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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319)

1화

1. 다시, 시작

추위에 익숙한 산사람도 여행을 꺼린다는 겨울의 마지막 날, 눈보라를 뚫고 나타난 한 무리의 기사들이 있었다.

시커먼 갑옷에 은빛 털가죽 망토, 칼바람을 맞아 붉어진 얼굴엔 성에가 끼었다.

“추워 뒈지겠네.”

수염 덥수룩한 기사 하나가 냅다 욕설을 내뱉었다. 어찌나 추운지 걸걸한 목소리가 염소처럼 떨렸다.

“눈보라가 그칠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러게 며칠만 더 쉬었다가 출발하자고 했잖습니까.”

기사가 그의 사령관을 흘겨보며 말했다. 날씨 풀린 뒤에 나들이 가듯 떠나도 되었을 여정인데, 시간 낭비를 싫어하는 사령관은 기어이 이 추운 새벽에 산맥을 넘고야 말았다.

“아, 카루스 님!”

“닥쳐.”

카루스 란케아는 악명 높은 사령관이었다. 나이는 젊은데 그다지 친근한 성격이 아니었고, 딱히 인간적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의 부하들에겐 최고의 상관이었다. 강했으니까. 무혈 제독이라는 별명은 괜히 생긴 게 아니었다.

“거의 다 왔다.”

카루스가 머리를 덮고 있던 망토를 끌어 내렸다.

하얀 얼굴에 대비되는 검은 머리카락, 새카만 눈동자와 붉은 입술이 드러났다. 눈매가 깊고 눈썹이 짙어 남자다우면서도 신기하리만치 매혹적인 얼굴이었다.

“다 왔다는 말은 출발할 때부터 했잖습니까? 안 믿어요.”

“닥치라고.”

“저 여기서 총각으로 얼어 죽으면 원귀가 되어 평생 쫓아다닐 겁니다. 언젠가 카루스 님이 결혼하면 첫날밤 이불 안에 제가 먼저 들어가 있을지도 몰라요. 아, 거긴 따뜻하겠지?”

“닥치라고 했다.”

카루스가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

투덜거리던 부하가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자, 여기저기에서 기사들이 염소 목소리로 웃었다.

그들은 제국의 황제에게서 비밀스러운 임무를 받아, 그걸 수행하기 위해 남부 오르테가 왕국으로 가고 있는 기사단이었다.

앞서 걷던 정찰조가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고함을 질렀다.

“사령관님!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말 위에서 온몸을 웅크리고 있던 기사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사람이라니?”

건장한 기사들이 단단히 채비하고도 견디기 어려울 만큼 추운 날씨였다. 눈보라는 이틀 전부터 내내 이어지고 있었고.

“죽은 사람?”

한 기사가 소리쳐 물었다.

죽었을 거야. 죽었겠지. 기사들이 수군거렸다. 이 추위에 눈 속에 파묻힌 사람이라니. 분명 꽁꽁 얼어붙은 채 시퍼렇게 죽어 있을 거라고.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살아 있어요! 사령관님, 아직 살아 있습니다!”

카루스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의 망토가 펄럭이며 크게 휘날렸다.

정찰조가 사람을 발견한 곳은 갈림길 한쪽 커다란 나무 아래에 세워진 작은 마차였다. 그 안에 한 여자가 죽은 듯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이봐요! 정신 차려, 잠들면 안 돼! 눈 뜨라고!”

몸을 흔들고 뺨을 때려도 소용없었다. 여자는 좀처럼 미동이 없었다.

얼어 죽어 가는 주제에 고요하기 짝이 없는 얼굴. 속눈썹 사이사이 맺혀 있던 얼음이 가루처럼 떨어졌다.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소름 끼치는 모습이었다. 생기라곤 하나도 없이 인형처럼 창백한 얼굴이 기사들의 눈에 박혔다.

카루스는 어찌할 바 모르는 부하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아가, 장갑을 벗고 여자의 얼굴에 손바닥을 댔다.

차가웠다.

가까운 인가가 어디더라. 카루스의 머릿속에 인근 지도가 펼쳐졌다. 말을 타고 달려도 반나절 가까이 걸릴 텐데, 이곳은 산중이고 눈보라까지 몰아쳤다.

“근처에 누가 있습니다.”

추워 죽겠다고 투덜거리던 기사였다. 그가 말에서 내려 카루스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하이에나입니다. 세 명, 실력은 제법 있어 보입니다.”

하이에나는 돈을 받고 사람을 처리해 주는 암살자를 일컫는 은어였다.

암살자가 붙어 있는 여자라니. 카루스가 조용히 명령했다.

“하나만 잡고 나머진 죽여라.”

기사들은 사령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잡아!”

짧은 창이 하늘을 날았다. 석궁도 활도 없는데, 창이 화살처럼 쐐액 소리를 내며 멀리 나무 뒤에 숨어 있던 하이에나를 관통했다.

놈들은 빠르게 달아났다. 그러나 카루스의 부하들은 그런 놈들을 사슴 사냥하듯 잡아 왔다.

둘은 죽고, 하나만 살았다.

“너희 뭐야!”

생포된 하이에나가 물었다.

카루스는 자신의 망토를 벗어 여자의 몸을 꽁꽁 동여맨 뒤 번쩍 들어 품에 안았다. 그러곤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카루스 란케아. 황제 폐하의 두 번째 기사이며, 리바이어던 기사단의 단장이다.”

당황한 하이에나가 입을 떡 벌렸다.

“왜, 왜 제국군이 여기…….”

“이 여자가 목표였던 모양인데, 이유가 뭐지?”

카루스는 한 손으로 여자를 단단히 받쳐 안고, 다른 손으로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가장 가까이에 있던 기사가 다가와 하이에나의 팔을 잡고 손가락을 뒤틀었다.

동료가 창에 꿰뚫려 죽을 때도 동요하지 않았던 하이에나가 몸부림치며 비명을 삼켰다.

“아프냐, 이 새끼야? 인간 도살자 주제에, 아픈 것도 알아?”

기사가 아니라 뒷골목 시정잡배 같은 말투였으나, 카루스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마, 마조람 후작가의 집사가 시켰습니다! 그 여자는 후작가에서 후원받던 고아인데, 주제도 모르고 도련님을 유혹해서 결혼을 약속했다고.”

“뭐?”

기사들이 모두 황당하다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뭐 대단한 사연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고작 귀족 도련님의 불장난 상대였단 말인가.

“둘이 같이 달아나기로 약속했다고 들었습니다. 도련님이야 그쪽에서 알아서 할 테고, 저는 여자만 처리하면…….”

“죽여라.”

카루스가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얼굴로 돌아섰다.

하이에나는 격렬하게 몸부림쳤지만 이내 마지막 단말마만 남기고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시체를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기사들은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죽은 하이에나들을 여자가 타고 있던 마차 안에 집어넣고 절벽 밑으로 밀어 떨어뜨렸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기사들이 다가와 물었다.

카루스가 여자를 품에 안은 채 말에 올랐다.

“우리도 좀 쉴 때가 됐지. 최대한 빠르게 인가로 내려간다. 뒤처지는 놈은 알아서 따라와.”

여자는 쉽게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인가로 내려온 뒤 몸을 녹이고 치료사를 데려와 돌보게 했는데도 도통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치료사는 어쩌면 여자가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심장이 너무 느리게 뛴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두고 간다. 치료사한테 금화나 몇 개 쥐여 줘. 눈보라까지 맞아 가면서 서둘렀는데, 이 여자 때문에 발이 묶일 순 없지.”

“덕분에 좀 쉬나 했더니…….”

“영원히 쉬게 해 줄까?”

“아니, 나 참. 뭔 말을 못 하게 하시네.”

투덜거리는 부하를 무시한 카루스가 여자가 안고 있던 짐을 풀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곤 하나씩 뒤적거렸다.

가진 게 없는 여자였다. 돈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여행자라기엔 여분의 옷이나 노숙용 장비도 없었다.

“죽으려고 작정한 여잔가?”

“아닐걸.”

“네놈이 어찌 알아?”

“멍청한 놈아.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이 갈림길 표지판 앞에 있겠냐? 분명 도련님이 오기만을 밤새도록 기다렸던 거겠지. 그리고 손가락 봐. 저거 더럽게 비싼 반지 같은데.”

“도련님이 증표로 줬나 보네.”

부하들이 쯧쯧 혀를 찼다. 갑자기 여자를 향한 동정 여론이 조성되었다.

가엾다. 안쓰럽다. 그 추운 데서 얼어 죽을 때까지 정인이 오기만을 기다렸을 텐데. 남자가 개새끼네. 별의별 욕이 쏟아졌다.

여자는 그때 깨어났다.

“……!”

작은 입이 벌어지더니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창백한 얼굴엔 여전히 핏기가 없었다. 두 눈을 한계까지 부릅뜨고, 여자는 이불을 쥐어뜯듯 움켜쥐었다.

“어, 어어!”

부하들이 치료사를 불러오겠다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카루스는 그 자리에 선 채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신이 드나.”

여자에겐 아직 카루스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것 같았다. 눈꼬리를 타고 맑은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목에선 울음도 비명도 나오지 않고, 그저 바람 새는 소리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카루스는 여자가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해야 할 말을 했다.

“산맥 갈림길에서 얼어 죽어 가는 너를 발견했다. 암살자가 셋이나 붙었더군. 부하들이 모두 죽여 없앴지만, 다시 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어.”

흐으. 여자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불을 움켜쥔 손이 경련하듯 떨렸다.

“우리는 내일 아침 일찍 떠날 거다. 네가 내 보호 아래에서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시간은 그때까지야.”

냉정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할 말을 마친 카루스는 여자에게 쉬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려고 했다.

그런데 여자가 그를 붙잡았다.

“……잠시만요.”

갈라지고 터지고, 피가 날 것 같은 목소리였다. 꺼질 듯 위태로운 촛불 같기도 했다. 그런데도 묘하게 상대를 잡아끄는 힘이 있어, 카루스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암살, 자는…….”

“마조람 후작가의 집사가 고용한 자였다. 거기까지만 확인하고 죽여 버려서 다른 정보는 없어.”

자세히 보니 여자의 눈동자는 초록색이었다. 한여름 녹음처럼 짙은 초록. 혹은 수심 깊은 남쪽 바다처럼 푸른 초록. 그 위에 빗살처럼 드리워진 속눈썹은 길고 숱이 많았다.

물기 어린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기가 무섭게, 여자가 카루스를 바라보았다. 고작 시선이 마주쳤을 뿐인데 오싹하게 숨통이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눈빛이 좋은 여자로군. 카루스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여자가 한결 명확해진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됐다. 지나는 길이었을 뿐이니까.”

“여기…….”

“갈림길 남쪽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너는 오르테가를 떠나려고 한 모양인데, 우리 목적지는 오르테가라서.”

여자가 느리게 두 눈을 깜박였다. 굵은 눈물 줄기가 한 번 더 흘러내렸다.

카루스는 되도록 여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떨리는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증오 섞인 신음도 못 들은 척했다.

차가운 초록, 그 안에서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사실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귀족이란 족속들은 오직 권력에 집착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결혼은 가장 훌륭한 정치 수단으로 이용되곤 했다. 그러니 귀족 도련님과 평민 여자의 사랑이 이루어질 리 없는 것이다.

그는 사랑을 도박과도 같다고 생각해 왔다. 순간의 감정, 욕망에 취해 삶을 대가로 거는 게 도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카루스 님.”

그때 여자가 알려준 적도 없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목 조르듯 이불을 쥐고 있던 손은 어느새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회복이 빠른 여자였다. 괜찮아진 건지, 아니면 괜찮은 척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저주를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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