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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외전 5화 (33/33)

특별외전 5화

안간힘을 써도 소용이 없었다. 티르윈의 힘으로는 그가 지배하고 있는 마력을 끌어올 수 없었다.

여기저기 상처가 난 아이들은 티르윈이 달려들지 않자 자기 쪽에서 달려들 기세였다.

티르윈이 눈을 부라렸다.

‘어차피 마법에 의지해 본 적도 없어!’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물어뜯을 거다.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티르윈이 스틱을 꼬나쥐고 달려들려던 찰나였다.

[서로 적당히 때린 것 같으니 여기서 끝내지.]

티르윈과 헥스를 비롯한 아이들 전부의 몸이 덜컥거렸다.

머리 위에서 뭔가 거대한 게 정수리를 누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우욱.”

티르윈은 토할 것 같은 기분에 입을 막았다.

“허억….”

“힉….”

“…끅, 흐.”

아이들이 연쇄적으로 오줌을 지렸다.

그 사이에서 파란 눈의 예쁘장한 소년은 조용히 웃었다.

[착하기도 하지.]

그때였다.

허공에 상아색 로브 자락이 흩날렸다.

“그만! 뭐 하는 거예요, 지금!”

키리에였다.

* * *

키리에가 나타나자마자 나타니엘의 뺨 위에 산홋빛 생기가 돌아왔다. 그가 귀엽게 팔을 펼쳤다.

[키리에.]

잘했지? 안아 줘.

그런 제스처를 보이는 나타니엘을 보고 키리에는 어이가 없어졌다.

아이들의 울음소리. 다리 사이의 오줌. 온몸에는 할퀴고 맞은 자국.

기절할 것 같았다. 잘 놀고 있는지 잠깐 보기만 하려고 한 건데, 이런 개난장판이 되어 있을 줄이야.

“나타니엘. 말리라고 했잖아요!”

[말렸잖니. 보렴. 모두 조용하단다.]

“이게 말린 거예요? 잔뜩 싸우게 내버려 둔 거로 보이는데요!”

[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책에….]

“그건 보호자가 주변에 없었을 때죠! 안 봐도 뻔하네요. 귀찮다고 물러서 있다가 느지막이 끼어들었죠?”

용하네. 티르윈이 남몰래 감탄했다.

나타니엘은 못마땅한 얼굴로 팔을 내렸다.

[네가 저런 것들 때문에 내게 화내는 게 싫어.]

“아이들이 다치면 어른은 당연히 화를 내요!”

그녀가 티르윈을 돌아보았다. 티르윈이 이크 하고 고개를 숙였다.

‘실망했으면 어떡하지?’

키리에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나타니엘에게 말했다.

“약속을 안 지켰으니 보상은 없어요.”

소년 나타니엘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크고 파란 눈이 멍하니 깜빡였다.

[소원….]

“없어요.”

[생크림….]

“생크림도 없어요.”

[지독하구나. 키리에 뷰캐넌….]

나타니엘은 슬픈 눈을 하고서 검은 바람이 되어 자취를 감췄다.

키리에가 엄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왜 싸운 거니?”

아이들이 쭈뼛거렸다. 남을 놀리는 건 나쁜 짓이다. 아이들 모두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얘기 안 해?”

키리에가 목소리에 약간의 위압감을 담았다.

그때, 올리브색 머리카락의 소년이 나섰다.

“…저기! 너, 너무 혼내진 말아주세요….”

소년은 벌벌 떨며 말했다.

“걔, 걔는 절 도와 주려고 그랬을 뿐이에요….”

“티르윈이?”

“얘들이, 저를… 아빠 없는 애라고 놀려서….”

“그걸 가지고 놀렸다고?”

키리에가 어이없다는 듯이 탄식했다. 반사적으로 나온 반응이었다.

아이들은 크게 움찔하고서 눈물 콧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크게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점도.

뒤늦게 론이 마차를 끌고 도착했다. 키리에가 부러 딱딱하게 말했다.

“이 일에 대해선 나중에 너희 부모님들과 따로 이야기하겠어. 론! 얘들을 치료해 주고 집에 데려다줘.”

“알겠습니다. 호국경 각하.”

로널드가 깊이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어떡해. 호국경이래….”

“그러게 내가 쟤도 끼워 주자고 했잖아!”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단 말이야! 어른들이 그랬다고!”

“난 보기만 했는데 너네 때문에…!”

“침묵도 동조야.”

키리에가 냉정하게 말했다. 아이들은 입을 꾹 닫고 훌쩍이며 론의 뒤를 따랐다.

남은 건 키리에와 티르윈, 올리브색 머리카락의 소년뿐이었다.

“티르윈.”

“죄송해요.”

티르윈이 즉답했다.

키리에는 복잡한 심경으로 옆에 있던 아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얘. 이리 오렴. 이름이 뭐니?”

“바, 발렌틴이요….”

“발렌틴. 그리고 티르윈.”

키리에가 무릎을 꿇고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췄다. 혼날 거라고 생각한 두 아이가 움찔했다.

“잘 화내는 법에 대해 알려 줄게.”

“…네?”

“첫째. 만류한다. 네가 싫어한다고 분명히 밝히는 거야. 둘째. 그래도 통하지 않으면 말로 때린다. 남들이 너희를 모욕하게 두지 마.”

“…?”

어른에게선 좀처럼 듣기 어려운 희한한 말에 티르윈과 발렌틴은 멍한 얼굴을 했다.

“셋째. 사람을 때리면 안 돼. 하지만 남의 폭력을 받아들이지도 마. 물리력은 너희 자신을 지킬 때만 사용하는 거야. 알겠니?”

티르윈과 발렌틴이 뭣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굳어 있던 키리에의 얼굴이 풀어졌다.

“발렌틴은 속상했을 텐데도 폭력을 쓰지 않고 잘 참았구나. 네 끈기과 인내는 분명 너를 빛나게 할 거야. 티르윈, 불의에 동조하지 않고 친구를 위해 나선 건 잘했어. 하지만 다음부턴 폭력은 최대한 지양하기야.”

티르윈과 발렌틴이 마주 보았다.

“…친구?”

“그런, 그런 게….”

발렌틴은 새빨간 얼굴로 웅얼대더니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 버렸다.

“아직 대화가 낯선가 보네. 어디 사는 아이일까? 나중에 저택에 놀러 와주면 좋겠네. 그렇지?”

“…….”

“같이 집까지 걸어갈까, 티르윈? 가서 상처를 치료하자.”

키리에가 다정하게 물으며 손을 내밀었다.

티르윈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이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조용히 걷기만 하던 티르윈이 조심스레 물었다.

“실망… 안 했어요?”

“마법을 썼다면 그랬을 거야. 하지만 쓰지 않았잖니?”

티르윈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타니엘이 아니었다면 진작 마법으로 얼굴을 짓뭉개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은 너희의 잘못이 아니겠지. 아이들이 뭘 보고 배웠겠어. 전부 어른들의 잘못이지.”

키리에가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생각은 곧 나타니엘로 옮겨갔다. 고운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 사람도 꼭 그래. 내가 뭘 말하는지 알면서 딴청이라니까. 아이들이 싸우는데 말리긴커녕 구경이나 했겠지.”

“…말로 말리긴 했어요.”

티르윈이 내키진 않지만 나타니엘을 변호했다. 

하지만 키리에가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말렸으면 내게 오기 전에 상황이 끝났을 거야. 너도 그 애들도 그 정도로 상처가 나지 않았을 테고.”

“…폭력을 써서 죄송해요.”

“반성할 줄 알면 괜찮아.”

키리에가 말을 고르기 위해 잠시 침묵한 뒤 덧붙였다.

“그리고 네가 그만큼 속상했던 거겠지. 누구에게나 정말 듣기 싫은 말은 있는 거니까.”

엄하지만 다정한 목소리였다.

티르윈의 눈가가 시큰거렸다. 그는 꼴사납게 울지 않기 위해 더 강하게 키리에의 손을 잡았다.

다행히 키리에는 티르윈 쪽을 바라보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재밌게 놀길 바랐는데 이런 일이 생겨서 어떡하지? 내가 괜히 놀러 가라고 한 것 같아.”

“괜찮…아요.”

티르윈이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싸우기 전까지는, 재밌었어요.”

“정말? 그건 다행이네.”

키리에가 배시시 웃었다. 그 옆모습에 티르윈은 괜히 한 번 더 울컥했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숨바꼭질도… 했고. 나타니엘 님이 다 잡았어요. 그리고 달리기도 했는데, 나타니엘 님이 제일 빨랐어요. 그래서 대장이 화냈는데, 제가 볼 때 대장이 어떤 여자애를 좋아하는 거 같았어요. 그런데 그 애는 나타니엘 님만 보더라고요.”

키리에가 “뭐 하고 다닌 거야, 그 사람….”하고 중얼거렸다. 그녀는 실없이 웃더니 입을 열었다.

“다음에 또 놀 거니? 싫다면 강요하진 않을게.”

티르윈이 고민에 잠겼다.

노는 건 재미있었다. 대장이라는 놈은 짜증 났지만 대장처럼 생각하지 않는 아이들도 반은 되어 보였다. 왁자지껄 떠드는 이야기도 재밌었고, 단체로 놀이를 하는 것도 해 보고 싶던 것이라 즐거웠다.

물론 가장 편한 건 키리에랑 있을 때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쁘진 않았다.

“또 놀 거예요.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니까.”

그 깜찍한 말에 키리에가 웃었다.

티르윈은 고개를 들어 언덕길을 바라보았다.

“예전엔, 마을 애들이랑 싸우면 맨날 어른들이 찾아와서 화냈어요. 그러면 저는 혼자니까 듣고만 있어야 했는데, 이젠 저한테도… 찾아와 줄 사람이 있으니까.”

“물론이지. 네게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나서 줄게.”

키리에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담담함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지지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 좋았다.

“그런 말도 들어보고 싶었어요.”

혼나는 게 부러웠던 때도 있었다. 혼낼 만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니까.

티르윈이 키리에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사고 안 칠게요. 오늘 일은 죄송해요.”

키리에가 나직하게 웃었다.

“괜찮아. 네 말대로 아이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니까. 게다가 네가 뭘 하든 나타니엘보단 덜할 거야. 그 사람이 어땠는지 티르윈은 상상도 못 할걸?”

“어땠는데요?”

“마을이 하나 있었는데…, 마을 하나를 통째로 자기가 심은 사람들로만 굴러가게 했어. 그리고 그걸 나만 모르게 했지.”

차분하게 말하던 키리에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세상에. 돌아가면 한 대만 때려 줘야지.”

“…그런 사람하고 어떻게 살고 있어요?”

“음. 그러게…. 아이는 예리하구나.”

이번엔 티르윈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그 표정에 키리에가 웃었다.

“괜찮아. 고생은 조금 했지만, 그 대신 세상에서 제일 값진 걸 얻었으니까.”

“값진 거요?”

“응.”

“그게 뭐예요?”

“글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때마침 언덕길 너머로 저택의 전경이 드러났다. 키리에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티르윈 역시 앞을 보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저택이 온통 꽃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분명 집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수국 정도만 물 찬 파랑을 뽐내고 있었는데 말이다.

“또 보석 낭비….”

키리에의 중얼거림에 티르윈이 다시 저택을 바라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정말 그랬다. 꽃잎인 줄 알았는데 전부 아주 얇은 보석이었다.

웬 미친 짓인지?

티르윈의 구겨진 얼굴을 본 키리에가 실없이 웃었다.

“저거 사과하는 거야.”

“사과….”

“나타니엘은 사과하는 방법을 몰라. 나이 헛먹었다. 그치?”

그녀의 입가엔 어느샌가 달콤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타박하는 어조와 달리 목소리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그런 키리에의 모습에 티르윈의 입에서 질문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행복해요?”

키리에는 티르윈을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응.”

맑고 투명한 미소였다.

티르윈은 나타니엘이 지금 그녀의 이런 미소에 반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자신의 양어머니에 죽고 못 사는 것도 이해가 간다….

내키지 않는 깨달음을 얻은 티르윈이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키리에는 저택에 있을 자신의 남편을 생각했다. 

말리랬더니 구경이나 하고. 부모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 골치가 아팠다.

하지만 티르윈이 즐겁게 논 것을 보니 나름대로 노력은 한 모양이었다. 소원 하나 정도는 들어줘도 좋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키리에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생크림의 원래 용도가 뭐지?”

[내게 복종하세요 특별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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