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외전 3화
“꽤 남았을 거예요. 역시 너무 젊은 건 보기에 별로일까요?”
“아뇨? 영원히 탱탱한 게 낫지! 난 이제 주름이 걱정돼요. 정말 짜증 난다니까.”
“나이를 먹으면 어쩔 수 없죠.”
“그러니까 싫은 거예요. 난 젊고 탱탱한 상태로 늙고 싶은데!”
할 말이 없어진 키리에가 헛웃음 쳤다.
루비니아는 금세 티르윈에게로 주의를 옮겼다.
“그래서 얘. 마법은 재밌어?”
키리에는 그게 루비니아 나름대로 티르윈을 신경 써 주는 방식이라는 걸 눈치챘다.
티르윈도 그걸 아는지 싫은 눈치가 아니었다. 약간은 철이 없는 듯 보이는 루비니아의 언행도 티르윈의 거리감을 없애는 데 한몫했다.
“재밌어요.”
“헤에. 대단하네! 원래 재밌는 거 하면 실력도 금방 는다더라.”
왕비는 생각보다 시원시원하고 친절한 성격이었다. 티르윈의 태도도 한결 편해졌다.
“이제 강도 가를 수 있어요.”
“강?”
“네.”
루비니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키리에에게 물었다.
“그거 꽤 고등 마법 아니에요? 움직이고 있는 자연물을 거스르는 건 어렵다고 들었는데….”
“티르윈은 마법에 재능이 있어요. 지금도 웬만한 왕실 마법사 수준은 될 거예요.”
루비니아의 초록색 눈이 난데없이 반짝였다.
“티르윈!”
“네. 왕비 전하.”
“하고 싶은 거 있니?”
“네?”
“왕실 소속 마법사는 대우가 좋아. 돈도 많이 벌고, 연구비도 넉넉하지. 미래의 직업으로 삼기에도 남부끄럽지 않고. 잘 생각해 보렴?”
“아…. 전…, 그러니까….”
티르윈은 키리에의 눈치를 보았다.
키리에는 미소를 지으며 양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장 정하라는 건 아니야. 티르윈은 티르윈이 하고 싶은 걸 하면 돼.”
티르윈이 물끄러미 키리에를 올려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럼 거절할게요.”
어른 두 사람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린아이치고는 단호한 말이었다. 곧은 눈썹 아래의 눈도 진지했다.
루비니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얘가… 엄마를 닮은 거야, 아빠를 닮은 거야?”
“글쎄요….”
“티르윈. 왜 거절하는 건지 물어봐도 돼?”
“그건….”
그때 세타가 울기 시작했다.
“어머. 이런. 또 쌌나 봐.”
루비니아가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자 티르윈은 조금 안심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는 키리에 옆에 있고 싶었다.
* * *
루비니아가 떠나고 키리에는 티르윈을 제외한 모두를 소집했다.
모두라고 해 봤자 키리에, 나타니엘, 집사인 데비 홀트와 로널드 홀트, 내니인 메리가 전부였다.
“또래와 놀이 활동을 시키래요!”
키리에가 진지하게 말했다.
나타니엘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턱을 괴었다.
[내 또래를 찾아 주겠다니 참 고맙기도 하구나.]
“티르윈 이야기예요. 고조부 님.”
나타니엘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미처 생각을 못했어요. 맞아, 아이라도 사교는 필요한데…. 하지만 싸우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원래 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라는 법 아닙니까?”
로널드 홀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로널드 홀트는 나이가 마흔이 넘은 중년으로 집사인 데비 홀트의 맏아들이다. 몇 달 전부터 저택의 집사로 일하게 되었다. 데비가 점점 혼자 일하는 것을 힘겨워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긴 하지만 나이에 비해 마법이 너무 뛰어나. 여차하면 마법을 써 버릴까 봐 걱정이야. 어떻게 생각해, 메리?”
메리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엔 아주 얌전하시긴 한데, 가끔 욱하시는 게 있긴 해요. 걱정하시는 마음도 이해가 가네요.”
“역시 메리가 보기에도 그래?”
빨간 머리를 머릿수건으로 가리고 펑퍼짐한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일부러 셀 아렐라노에서 데려온 내니였다. 실력도 좋고 평판도 좋았다. 그녀의 말이니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씨는 아주 따뜻한 분이세요.”
“그건 그래. 착한 아이야.”
메리가 빙긋 웃었다.
“안 그래도 도련님이 너무 공부만 하시는 것 같아서 걱정이었어요. 또래를 만날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근처엔 티르윈 또래의 아이가 있는 가문이 없어서…. 어떡하면 좋지? 아렐라노로 이사할까?”
그때 나이 탓에 나타니엘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의자에 앉아 있던 데비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을 아이들이 놀러 나올 시간이 되었군요.”
“마을 아이들?”
키리에의 반문에 로널드가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어른들이 일을 나가는 오전과 오후에는 마을의 아이들끼리 몰려다니며 놀곤 합니다. 귀족이 아니어도 괜찮으시다면, 마을로 보내 보시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아렐라노의 유성구에서 그런 아이들을 돌본 적도 있었다. 보통 그런 무리는 나이를 가리지 않으니, 티르윈의 또래도 있을 것이다.
“다행히 저희 마을에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치안도 나쁘지 않으니 도련님이 위험해지실 일도 없을 겁니다.”
“그건 다행이긴 한데….”
키리에가 티르윈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티르윈은 빵을 품에 안고 다른 거리의 아이들에게 맞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남의 급소에 치명상을 입히려 드는 독한 부분도 있다.
‘역시 그냥 보내면 문제가 생길 것 같아….’
그렇다고 아이들이 노는 데에 어른이 끼어들 수도 없다.
키리에의 표정이 비장해졌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나타니엘.”
그녀의 부름에 나타니엘이 다리를 풀었다. 그는 난생처음 불길함을 느꼈다.
“같이 가 주면 안 돼요?”
불길함이 맞았다.
[내가?]
나타니엘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러나 키리에는 초조한 눈으로 나타니엘의 손을 맞잡았다.
“당신은 강하잖아요. 강하고….”
[서술부가 중복이야, 키리에.]
“강하잖아요!”
[그래. 강조 표현이라 이거지.]
“그러니까 만약 일이 터지려고 하면 막을 수도 있잖아요. 또, 어린아이 모습으로 바꿀 수도 있고.”
[폭력을 막으려고 나를 붙인다고.]
“네.”
[나를.]
“네.”
키리에의 표정은 비장했다.
나타니엘의 아름다운 얼굴이 복잡미묘해졌다.
[…상대의 가능성을 높이 사는 건 네 장점이지.]
그는 어떻게든 돌려 말하는 것에 성공했다.
미상불 나타니엘은 키리에와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가 원대한 야망을 포기해 주면 좋았겠으나, 그의 아름다운 아내는 그러진 않을 모양이었다.
“잘 해결하고 돌아오면 소원 하나 들어줄게요.”
[소원?]
그 말에 고양이가 귀를 쫑긋하듯이 나타니엘의 시선이 키리에에게 집중됐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 있던 키리에의 허리를 감쌌다.
[뭐든 말이니?]
“…아마도 뭐든요.”
[내 숙녀께선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는 계시는지?]
데비와 로널드, 메리가 눈치 빠르게 방을 나갔다. 방엔 순식간에 둘만 남았다.
키리에는 약한 홍조를 띄운 채 눈을 흘겼다.
“그런 쪽 말고 다른 걸 부탁할 생각은 안 드나 보죠?”
나타니엘이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파란 눈에 장난기가 떠올랐다.
[그럼 ‘다른 쪽’으로. 생크림을 원래 용도로 써 보는 것도 재밌겠구나.]
“…생크림의 원래 용도가 뭔데요?”
나타니엘이 대답 없이 쌕 웃었다. 어쩐지 불안해졌다.
* * *
며칠 뒤, 점심 식사가 끝난 시간.
저택의 입구에 모두가 모였다.
시선을 끄는 것은 단연 나타니엘이었다. 티르윈도 여자아이처럼 고왔지만 나타니엘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열 살 남짓의 소년은 피부가 진주처럼 희었고 파란 눈은 보석 같았으며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고물고물 올라와 있었다.
옷에 이르면 어떠한가. 티르윈은 좋은 옷이 어색하다며 면으로 된 옷을 입었다. 하지만 나타니엘은 무릎길이의 반바지에 자수정으로 된 브로치까지 갖춰 입었다.
그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로널드 홀트는 입을 연신 뻐끔거렸다.
“그러니까 이분이 저희 주인님이시라는…?”
“이 사람이 가끔 나이가 변해. 너무 놀라진 마.”
키리에가 달래듯 말하곤 나타니엘을 향해 웃었다.
“당신은 매일 이렇게만 있으면 좋겠네요.”
[글쎄. 내가 이런 모습으로 있으면 우리 호국경 각하께서 소년 애호가라는 추문이 붙지 않겠니.]
“입은 정말 꿰매 주고 싶고요.”
부부의 농담을 들으며 티르윈은 괜히 발치의 돌을 툭툭 찼다.
‘고작 동네에 가는 건데 저렇게 차려입는 게 부끄럽지도 않나.’
투덜대는 마음 반, 그냥 자신도 차려입을 걸 하는 마음 반.
그때 티르윈의 시야에 모자가 튀어나왔다. 고개를 들자 메리가 따스한 눈으로 모자를 내밀고 있었다.
“잘 다녀오실 거죠, 도련님?”
“…네.”
옆에서 데비도 인자하게 말했다.
“아랫마을 공터까지는 그리 멀지 않을 겝니다. 네 시에 마을의 종이 울릴 테니, 맞춰서 마차를 보내겠습니다.”
티르윈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곧 키리에가 티르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보라색 눈과 정면에서 마주하자 티르윈은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티르윈. 마차 조심하고,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누가 때리면 말하고,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고….”
[네 아들은 개가 아니야, 키리에.]
“개는 아니지만 아이잖아요. 아이는 보호받아야 해요.”
낯간지러운 말이지만 키리에가 말하니 어쩐지 싫게 들리지 않았다.
“티르윈.”
키리에가 팔을 벌렸다. 환한 미소와 함께였다.
티르윈은 잠깐 머뭇거렸으나 곧 그녀의 품에 안겼다.
꽃향기 같은 게 났다.
키리에는 귀엽다는 듯이 고개를 마주 비볐다.
“조심히 놀다 오렴?”
“…다녀오겠습니다.”
귓가에 울리는 다정한 목소리가 좋았다. 티르윈이 작게 웃었다. 옆에서 누군가의 찌를 듯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건 무시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