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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외전 2화 (30/33)

특별외전 2화

나타니엘의 나긋한 말에 티르윈은 몸이 서서히 차가워짐을 느꼈다. 그러니까 저이가 지금 말하는 건….

“…제가 말을 안 들으면, 저를 죽이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겠다고요?”

나타니엘이 가증스럽게도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런 고약한 표현은 가슴이 아프구나. 죽은 아들을 대신해 다른 아들을 선물해 줄 만큼 그녀를 아낀다고 해 주렴.]

“당신….”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키리에가 그를 더러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던 게 이제야 와닿았다.

게다가 그는 정말로 그걸 실행할 것 같은 위인이었다.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자신을 따라 하게끔 교육받고 자란 소년들이 얼른 자신이 죽어주길 바라는 모습을.

소름이 등골을 내달렸다.

티르윈이 저도 모르게 버럭 외쳤다.

“선생님이 화낼 거예요!”

[그 애가 모든 걸 알 필요는 없어.]

“난 마법을 쓸 줄 알아요! 당신이 날 죽이려 한다면 선생님한테 신호를 남길 거예요! 그럼 당신은 선생님한테 미움받게 될걸요!”

나타니엘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사탕처럼 달고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티르윈 뷰캐넌. 네가 죽었다고 키리에가 영영 나를 미워할 정도로 네 존재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니?]

그 말은 정확하게 티르윈의 심장을 찔렀다.

검고 푸른 어린 것의 표정이 무너지는 장면을 나타니엘은 아무런 감흥 없이 바라보았다. 입가에는 여전히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네가 착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구나. 네가 주워온 아이라서가 아니야. 네가 설령 나와 키리에 사이에 나온 자식이었어도 너는 특별할 게 없고, 나는 널 좋아하지 않았을 거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다.

하지만 티르윈은 말을 삼켰다. 자신의 친부모도 자신을 버리지 않았나.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티르윈의 고개가 점차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혼란스러운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 듯했다.

[그렇다고 네게 많은 걸 바라지는 않는단다. 네가 키리에 옆에서 아들 놀이를 해 주는 게 나로서는 더 좋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좋지.]

그럼 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티르윈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뛰어난 성취를 이루라는 것도, 마법으로 인정받으라는 것도 아니야. 반항하고 싶으면 반항하고 떼쓰고 싶다면 떼쓰렴. 내가 네게 바라는 건 하나란다.]

“…….”

[지금처럼 ‘아들’로서 있도록.]

생각지도 못한 말에 티르윈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가 어눌하게 물었다.

“…그건, 그러니까… 어머니라고 부르라고요?”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거기서부터 시작해도 좋겠지. 나머지는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야.]

나타니엘이 지팡이 쥔 손으로 얼굴을 받치며 고개를 돌렸다.

“이해가….”

뭔가를 더 말하려던 티르윈은 서늘한 푸른 시선을 받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거버니스가 ‘윗사람이 고개를 돌리는 건 더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말한 게 기억났다.

티르윈은 무거운 방문을 제 손으로 열고 나왔다. 그리고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곱아든 손가락 끝에 하얗게 서리 같은 것이 껴 있었다.

티르윈은 말없이 그것을 털어냈다.

어쩐지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의 요청도.

* * *

루비니아가 저택에 찾아왔다. 나이가 4개월인 왕자와 함께였다.

“아들이 생겼다면서요!”

키리에는 보기 좋게 통통해진 루비니아와 그녀의 뒤에 일렬로 늘어선 마차들을 바라보았다. 어찌나 많은지 저택이 있는 언덕 아래까지 줄이 이어져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선물이에요. 자식을 키우려면 필요한 게 많잖아요?”

루비니아가 까르르 웃고는 덧붙였다.

“전설경과 호국경 사이에 자식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귀족들이 들었어요. 그들의 뇌물이기도 해요.”

“음….”

곤란해진 키리에가 미간을 좁혔다.

‘이런다고 뭘 도울 생각은 없는데.’

그녀는 곧 귀찮은 선물들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루비니아에게 말했다.

“해산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렇게 움직여도 되는 건가요?”

“전설경이랑 호국경네 간다는데 누가 막겠어요?”

그리 말하면서도 힘겹긴 한지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키리에는 루비니아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루비니아는 스무 명 가량의 시녀들에게 부축받으며 셰이즈 롱에 앉았다. 다리를 늘어뜨리자 그제야 편안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아. 몸이 너무 무거워요….”

그녀가 아기를 안고 있던 뒤편의 시녀에게 손짓했다.

“얼굴 좀 봐요. 이쪽이 우리 아들, 세타. 한번 안아 봐요.”

키리에가 어설프게 아기를 받아들었다.

태어난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아기의 머리에는 벌써 보송한 금발이 돋아 있었다. 낯선 사람에게 안겨선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아이 어르듯 웃음을 보였다.

“울진 않네요.”

“날 닮았으면 당연히 그렇겠죠!”

“무슨 자신감이람.”

키리에가 키득거렸다.

[손님이 왔다지.]

때마침 응접실 문이 열리고 나타니엘이 들어왔다.

그가 등장하자 루비니아와 시녀들은 숨을 멈추고 얼굴을 붉혔다.

가만히 있어도 빼어난 용모를 가진 이가 희미한 미소까지 짓고 있으니 정신을 잃을 법도 했다.

나타니엘은 능숙하게 열망 어린 시선을 무시했다. 그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키리에에게 직진했다.

[키리에.]

나타니엘이 앉아 있는 키리에의 뺨에 입 맞췄다. 그리고 루비니아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이구나. 오레윈브리지.]

나긋한 속삭임에 루비니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잘 지내셨죠?”

[나야 키리에가 있으면 늘 괜찮지.]

나타니엘이 시선을 미끄러뜨려 아기를 보았다가 다시 루비니아를 보았다.

[너도 건강한 모양이구나.]

이제 막 해산한 여인에게 하기엔 약간 실례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튼튼한 망아지를 낳은 암말을 보는 듯 묘한 기특함이 서려 있었다. 

불쾌해지기엔 애매한 기분이었기에 루비니아는 그냥 웃어버렸다.

“네에. 그래서 건강한 왕자를 낳았죠. 나타니엘 님도 한번 안아 보세요!”

설마 그런 걸 권할 줄 몰랐던 키리에가 약간은 미쳤냐는 눈으로 루비니아를 보았다.

“뭐 어때서요?”

루비니아가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어미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키리에가 아기를 들어 올렸다.

“안아 볼래요?”

나타니엘은 대답하지도 아기를 받아 들지도 않았다.

그가 시선을 내리깔았고, 나타니엘과 세타의 시선이 마주쳤다.

잠깐의 정적.

이후 세타가 울기 시작했다. 성인이었다면 목이 찢어져라 지르는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왜 이러지?”

당황한 시녀들이 우르르 몰려들려다 나타니엘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그 사이에서 나타니엘은 느리고 부드럽게 키리에의 뺨에 입 맞췄다.

[잘 놀고 오렴.]

“아….”

키리에가 망설이는 사이 나타니엘은 방을 나가버렸다.

세타는 그제야 울음을 그쳤다.

키리에가 씁쓸히 웃었다.

“나타니엘이 무서웠나 봐요.”

새하얗게 질린 채 안절부절못하던 루비니아는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부랴부랴 제 아이를 품에 안았다.

“어우,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데려왔네요! 눈도장이라도 찍어볼까 했는데.”

그렇게 말한 루비니아가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당신 아이는 어디 있어요?”

“집사가 데리러 갔는데…. 아. 왔나 봐요.”

곧 티르윈이 응접실에 들어왔다.

머리카락은 검은색.

눈은 나타니엘보다는 연한 푸른 빛.

턱이 뾰족하고 여자아이처럼 곱상하게 생긴 소년이었다.

티르윈을 보자마자 루비니아가 소리쳤다.

“어머! 당신도 취향 참 한결같네요!”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아니긴! 보기보다 눈이 높다니깐?”

티르윈이 쭈뼛거리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파랗고 큰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고개를 숙이는 태도 역시 뻣뻣했다.

“…안녕하세요. 티르윈… 뷰캐넌입니다.”

“그래, 안녕!”

루비니아가 상상 이상으로 쾌활하게 대답하곤 키리에에게 물었다.

“궁중 예법은 아직 안 가르쳤나 봐요?”

“가르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요.”

“출사시키지 않을 생각이에요?”

“본인의 의견에 따를까 해요.”

“그래도 궁중 예법은 배워 놔야죠! 뷰캐넌인데!”

“어떨까요….”

키리에는 티르윈에게 자리에 앉으라 손짓했다. 

티르윈은 시녀들이 주는 압박에 눈치를 보며 키리에 옆에 앉았다.

“티르윈. 여긴 내 친구인 루비니아 오레윈브리지야. 그리고 이 아이는 그녀의 아들인 세타 오레윈브리지.”

티르윈이 멈칫했다. 오레윈브리지?

소년의 의문을 루비니아가 잽싸게 채갔다.

“얘! 나는 왕비야. 흐흥! 내게 인사해도 좋아!”

눈앞에 있는 통통한 미인의 정체가 왕비라는 사실에 티르윈은 놀라지도 못했다.

키리에가 그런 티르윈에게 말했다.

“날 빼고 만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인사 정도는 배워 놓자. 알았지?”

“…네.”

“자. 고개는 이 정도로, 손은 이렇게 놓고….”

루비니아는 티르윈이 궁중 예법을 흉내 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마침내 티르윈 어설프게나마 인사를 해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존귀하신 태양을 뵙습니다. 뷰캐넌 공작가의 티르윈입니다.”

왕비는 따분하다는 기색도 없이 미소지었다.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하지만, 너도 알지? 사실 그럴 필요까진 없어. 네 양부모가 워낙 높은 사람이어야지.”

다시 자리에 앉은 티르윈이 키리에를 올려다보았다.

“…잘 모르겠어요.”

“모르면 알면 되지. 그런데 넌 여기서 뭘 하면서 지내니?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서 심심할 것 같은데.”

“심심하진, 않아요. 수업도 듣고….”

“그리고?”

“…강해져요.”

“강해져? 설마 전설경한테 검술을 배우는 거야?”

“아뇨. 선생님한테 마법을 배우고 있어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루비니아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엄마라고 안 하네?”

“…….”

티르윈이 눈을 굴렸다.

키리에 역시 은은하게 미소지을 뿐 별말은 하지 않았다.

눈치 빠른 루비니아가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엄마 소리 듣기엔 너무 젊어 보이긴 하지. 당신은 언제 늙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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