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별외전 1화 (29/33)

특별외전 1화

나타니엘이 티르윈을 불렀을 때, 티르윈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티르윈을 부르러 온 노집사 데비 역시 약간은 긴장한 듯 보였다.

“괜찮으실 겁니다.”

그는 다정하게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괜찮아요. 갈게요.”

티르윈이 아직 어색한 존댓말로 말했다.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티르윈은 거리 출신의 아이에게도 높임말을 해 주는 이 할아버지가 마음에 들었고, 그를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어디에 계세요?”

“서재에 계십니다. 안내해드리고 싶지만, 도련님 혼자 오라고 하신 터라….”

티르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 알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티르윈은 걱정이 가득한 노집사의 시선을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복도는 티르윈이 걷고 있는데도 지극히 조용했다. 비단 티르윈의 움직임이 들고양이처럼 은밀해서만은 아니었다. 그저 이 저택이 경망스러운 발소리를 반사하기엔 지나치게 넓고 높았을 뿐이다.

티르윈은 여전히 이곳이 자신의 집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거리를 전전하고 빵을 훔치며 얻어맞던 그가 이곳에서는 ‘도련님’이었다.

새집에서 티르윈은 부드러운 옷감으로 된 옷을 입었다. 용도와 분위기에 따라 달리 신는 신발이 여러 켤레가 생겼다. 매 끼니의 마지막에는 달걀과 설탕으로 만든 디저트를 먹었다.

그게 전부 키리에 덕이었다.

셀 아렐라노에서 키리에가 그를 데려왔고, 그녀는 ‘티르윈’이라는 새 이름도 주었다.

‘전쟁의 신이라는 뜻이야. 네가 싸움을 잘하길래…. 마음에 드니?’

그렇게 묻던 양어머니의 눈은 유독 아름다운 보라색이었다. 언제부턴가 그 색이 티르윈의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티르윈은 복도를 걸으며 그녀에 대해 떠올렸다.

키리에 뷰캐넌.

아니, 호국경 키리에.

티르윈도 전설경과 호국경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키리에와 만나기 전에는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실감 나지 않았다.

키리에에게 주워지고 나서야 티르윈은 자신이 얼마나 까마득한 곳에 올라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키리에는 티르윈을 들이기로 결정한 뒤 바로 그를 뷰캐넌 공작가에 데려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가 내 양자… 같은 피후견인인데, 뷰캐넌에 적을 올리고 싶어. 재산 분할은 필요 없지만 직계면 좋겠어.’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당대 뷰캐넌 공작인 에드워드 뷰캐넌은 당장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 아들로 입적시키겠습니다.’

‘고마워. 부탁할게. 나는 이제 성이 없고, 그건 나타니엘도 마찬가지라서 말이야. 그렇다고 귀족의 성을 주지 않기엔….’

키리에가 애매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곤란하겠지? 이경의 후손이 귀족이 아니면.’

‘예. 차라리 성을 주시는 게 저희로서도 마음이 편합니다.’

‘얼마나 걸리지?’

‘두 시간만 주십시오.’

두 시간 뒤, 티르윈의 이름 뒤에는 정말로 ‘뷰캐넌’이 붙었다. 호국경을 배출한 뒤 7대 가문 중 권력 구도에서 가장 선두를 달리고 있는 그 뷰캐넌 공작가 말이다.

키리에의 손을 잡고 뷰캐넌 공작저의 타운하우스를 소개받으며, 티르윈은 내심 신경을 곤두세웠다.

‘더럽다고 욕할지도 몰라.’

하지만 공작가의 그 누구도 티르윈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뷰캐넌 공작인 에드워드를 포함해서 그의 부인, 다른 아들, 집사와 시녀장 등 모두가 진심으로 티르윈을 공경하기 시작했다.

‘서류상으로는 제 아들이지만, 대외적으로는 모두가 도련님을 이경의 후손이라 알고 있을 것입니다.’

뷰캐넌 공작이 깍듯하게 말했다. 티르윈은 마냥 얼떨떨한 상태로 키리에 뒤에 숨었다. 키리에는 작게 웃으며 티르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친척이 생긴 거랑 같아. 앞으로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뷰캐넌이 도와줄 거야.’

‘물론입니다. 이젠 가족이니까요.’

에드워드 뷰캐넌은 그렇게 말하고서 살짝 키리에의 눈치를 살폈다.

키리에는 은근한 미소를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티르윈은 깨달았다. 티르윈에게 주어진 호의와 상냥함은 전부 호국경과 전설경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전설경 나타니엘과 호국경 키리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알고 있을까? 자신들이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유독 공기가 느슨하다 못해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묘한 위압감을 풍겼다.

나타니엘은 특히나 그랬다.

그는 티르윈이 만난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남들과 같은 종에 속하기엔 지나치게 미형이었던 탓이다.

나타니엘은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가장 완벽한 비율로만 짜여 있는 듯한 존재였다.

티르윈은 그런 그가 무서웠다. 나타니엘은 늘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조금의 인간미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미소는 아름다움만큼 섬뜩하고 꺼림칙했다. 그런 남자에게 미소짓고, 입을 맞추고, 가끔은 타박하는 키리에가 대단했다.

“티르윈 뷰캐넌입니다.”

티르윈이 서재 앞에서 말했다. 두드리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나타니엘은 서재의 중앙에 놓인 긴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꼰 채 지팡이를 무성의하게 까딱거리는 중이었다.

그 상태로 그는 인사란 걸 했다.

[안녕. 뷰캐넌.]

들어가고 싶지 않다.

티르윈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나타니엘이 어렴풋하게 미소를 보였다. 

별 기대하지 않은 상대가 기대대로의 못난 반응을 보였을 때의 조소처럼 보였다.

발끈한 티르윈이 주먹을 말아쥐고 방으로 들어섰다.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그래.]

등 뒤로 큰 문이 닫혔다.

검은 머리칼에 푸른 눈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티르윈 뷰캐넌. 내 아들.]

티르윈은 토하고 싶어졌다.

“…왜 부르셨어요?”

[이럴 땐 날씨 이야기를 하는 거란다. 책잡히고 싶지 않다면 그 날의 날씨 정도는 살펴놓으렴.]

나타니엘의 지적에 티르윈이 반항의 의미로 눈을 내리깔았다.

두 사람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날씨가 좋아요. 왜 부르셨어요?”

[슬슬 너와 단둘이 이야기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지.]

나타니엘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생활은 괜찮나?]

“…네.”

[수업은?]

“…하고는 있어요.”

[마법은 물을 필요 없겠고.]

티르윈의 목소리가 자신감으로 약간 커졌다.

“평범한 마법사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길 수 있대요. 밖에 나가면 바로 마법사로 취직할 수 있을 거랬어요.”

[그렇구나.]

나타니엘이 눈을 내리깐 채 호응했다. 전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키리에는?]

“…뭐가요?”

[그냥 네가 느낀 걸 말해 봐.]

티르윈이 다시 키리에를 떠올렸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냉정한 성격이었다. 그렇지만 티르윈에게는 한없이 다정했다.

‘볕이 따갑진 않니? 모자를 사 줄까? 가만, 이거 꼭 그 사람이 하는 말 같네….’

그러고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는 키리에.

티르윈은 거기서 자신은 닿을 수 없는 키리에와 나타니엘의 깊은 유대감을 엿보았다.

“…친절하세요.”

하지만 그런 말 대신 무난한 답을 택했다.

대답과 함께 시선을 내리까는 것은, 나타니엘이 왜 그런 걸 묻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남자. 그리고 머릿속에 제 양어머니 밖에 안 들어 있는 남자.

자신을 데려온 이후 키리에는 몹시도 바빴다. 티르윈은 알 수 없는 서류 절차가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재봉사를 불러 티르윈의 옷을 지어주고, 방의 가구를 같이 골라 주었다.

나타니엘은 내내 뒤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키리에가 뭘 물어도 [네가 원한다면 그리하지.]하고 말할 뿐이었다.

순종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지만 티르윈이 키리에가 쥐여주는 초콜릿을 받아들 때, 나타니엘의 시선은 항상 그녀와 자신의 손이 맞닿은 곳에 머물러 있었다.

티르윈은 늘 그 시선이 조금 섬찟하다고 생각했다.

“…잘해 주시고요.”

[그렇겠지. 그런 아이니까.]

나타니엘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녹아내릴 듯 달콤한 미소였다.

티르윈은 그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는 성인이 되면 이 집을 나갈 거예요.”

나타니엘은 다시 고요한 진청의 눈으로 티르윈을 응시했다.

“마법을 배울 거예요. 그리고 힘을 길러서… 아무에게도 지지 않게 되면, 나갈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내게 말하는 이유는? 아비의 만류나 지지가 필요하니?]

“제가… 사라지길 바라시잖아요.”

티르윈이 망설이다 덧붙였다.

“선생님 옆에서.”

이 이상한 호칭은 키리에를 부르는 호칭이다.

그녀는 너무 젊고 예뻐서 ‘어머니’라고 부르기엔 힘들었다. ‘키리에’라고 부르기엔 건방지다. ‘키리에 님’이라고 부르면 키리에가 조금 상처받은 눈을 한다. 그래서 ‘선생님’이었다. 키리에는 티르윈에게 마법을 가르쳐주고 있기도 했다.

“나갈 거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네 착각이 너무 깊어서 어디서부터 정정해 줘야 할지 모르겠구나.]

나타니엘이 지팡이를 무릎 위에 수평으로 올렸다. 검은 지팡이를 매만지는 손길이 묘하게 관능적이었다. 그 상태로 그가 속삭였다.

[키리에는 화목한 가족을 동경하지. 나는 그걸 이뤄줄 수 없기에 너를 들이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어. 그러니 내 의사를 묻는 거라면, 나로서는 네가 키리에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쪽이 더 마뜩잖단다.]

그럼 그렇게 죽이고 싶다는 듯이 보지를 말든가.

불쑥 드는 생각에 티르윈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하지만 티르윈은 얌전히 발톱을 숨겼다.

“제가 방해된다고 생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난 너희들이 부득불 안 좋은 답이 나올 게 뻔한 질문을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

짜증 나는 남자.

티르윈이 바닥을 노려보았다. 키리에는 상냥한데, 그 남편이란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도 나갈 거예요. 선생님은 저한테 당신의 말동무를 해 달라고 했지만…. 그런 거 필요 없으시잖아요.”

[필요 없지. 하지만 키리에가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라면 넌 거기에 따라야 해.]

“선생님은 저한테 그걸 강요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나 역시 강요는 아니란다. 그저 이득은 취하고 의무는 내팽개치겠다는 천박한 근성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야.]

약간 발끈한 티르윈은 자신이 나타니엘과 싸우면 슬퍼할 키리에의 얼굴을 떠올리고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실 말씀 끝난 거면 갈래요.”

[아랫사람이 먼저 대화를 끊으려 하는 것도 품위에 어긋나지. 거버니스를 한 명 더 고용해야겠구나.]

“난 품위 같은 거 필요 없어요!”

기어이 티르윈이 외쳤다.

하지만 나타니엘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너의 친절한 양어머니 옆에서 천둥벌거숭이처럼 서 있고 싶으면 그대로 있어도 되겠지. 퍽 보기 좋은 광경이겠구나.]

정말 짜증 났다!

유리구슬 같은 눈에는 분노도 증오도 경멸도 없었다. 그에게 티르윈은 완벽한 남이자, 하등 신경 쓸 이유가 없는 미물이었다.

티르윈이 싫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나타니엘을 노려보았다.

나타니엘은 순진하고 나른하게 미소지었다.

[그렇다고 너를 협박하려고 부른 건 아니란다. 난 그저 네가 알아 두길 바랄 뿐이야.]

“…뭘요.”

[티르윈 뷰캐넌. 나는 고아원을 설립할 수 있단다.]

티르윈이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파란 눈을 깜빡였다.

나타니엘은 이어 말했다. 아주 부드럽고 상냥하게.

[나는 그 고아원에 마력을 가진, 검은 머리칼과 푸른 눈의 소년만 들이겠다고 할 수도 있지.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단다. ‘저 티르윈’이 시원찮으면 다음엔 너희에게 기회가 온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