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28/33)

#2.

어쨌든 키리에는 도망치지 않는 것에 성공했다. 좀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녀는 나타니엘을 마주 보았다.

당연히 키리에는 그들의 역사가 다음 날 쓰이리라 생각했다. 나타니엘은 신사고, 예의 바르고, 키리에를 위해 하루 정도의 여유는 둘 남자였다.

그런 나타니엘을 가로막은 것은 영광스럽게도 ‘그를 방해하기 위해 태어난 가문’이라는 평을 받은 오레윈브리지의 새 일원, 루비니아였다.

“구휼 제도를 몰라서 아사하는 사람들이 있대요.”

차를 마시기 위해 들렀을 때, 루비니아가 그렇게 투덜거렸다. 눈 밑이 거뭇거뭇했다.

“제도를 빠르게, 널리 알릴 방법이 부족해요. 문맹률은 높지 않지만, 서쪽으로 도로 정비가 안 된 곳도 많아서 아예 소식이 안 가니까……. 멀리 있는 상대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을까? 마법사나 마법석은 너무 귀하다고, 젠장…….”

지방 귀족인 그녀도 감자를 캤던 시절이 있었으니 더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뒤쪽에 기립한 시녀들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야근을 자처하는 왕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일하다 몸 상하겠어요.”

루비니아가 흠칫 놀라며 자신의 배에 손을 얹었다. 표정이 시무룩했다. 안 그래도 귀여운 인상의 여자가 그러고 있으니 제법 앙증맞았다.

“나도 알지만, 이 썩을 귀족 놈들이 도통 협조를 안 해 준다고요…….”

요 몇 년간의 대화로 키리에는 루비니아의 눈에 수도 귀족들은 배에 기름이 낀 돼지들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비니아는 제 손으로 구황작물도 재배해 본 여자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으려 하는 귀족들이 아니꼬울 수밖에 없고, 반대로 귀족들도 그랬다. 호국경의 비호가 있어도 드러나지 않게 뒷주머니를 차거나 명령을 무시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

그거야 당연히 루비니아가 해결할 일이다. 하지만 아이를 밴 임신부의 눈 밑이 거뭇한 게 보기 좋은 모습도 아니었다.

키리에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좋아요. 원거리 소통 문제는 일단 나중의 일로 미뤄 두고, 지금 당장 급한 곳에는 내가 갈게요.”

“당신이요?”

“오늘 바로 출발해서…… 내일 오전까지면 충분히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술식을 채우려면 나타니엘에게 좀 물어봐야겠지만…….”

키리에가 손가락을 셈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해요. 전달해야 할 내용을 알려 줘요.”

“어…….”

루비니아가 눈을 굴렸다. 구스베리 색 눈 뒤에서 그녀의 셈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그녀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긴급 사태니까 어쩔 수 없네요. 부탁할게요. 다음엔 이런 부탁 안 할 거니까, 한 번만 도와줘요.”

키리에가 미소 지었다.

그녀는 그 소식을 나타니엘에게 알렸고, 나타니엘은 지금까지 본 모습 중 가장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소는 짓고 있는데 차가움이 뚝뚝 흘렀다.

[왜 네가?]

“호국경이잖아요. 이름값 좀 해 보려고 하는데.”

[호국경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아.]

“빈민 구제니까 정치적 의도는 없어요.”

[하지만 네가 나서는 것으로 사람들은 또 왕가 뒤에 있을 신화적 존재들을 의식하게 되겠지. 보통 때라면 그게 제법 좋은 선전이 되겠지만, 왕권은 아직 미흡하니 멀리 볼 때 이로운 결정은 아니야. 결국 호국경의 이름만 드높일 일을 오레윈브리지가 용케 허락했구나.]

“사람을 살리는 게 먼저잖아요. 저도 그게 맞다고 생각하고요.”

[나랑 있는 게 어색해서는 아니고?]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던 키리에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타니엘. 가까이 와 볼래요?”

키리에가 나타니엘의 손을 당겨 왔다.

“손대 봐요.”

나타니엘은 드러나지 않게 흠칫했다. 그녀가 그의 손을 왼쪽 가슴 위에 올린 것이다. 정확히는 심장이 있는 가슴 위쪽이었지만, 어디든 낮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의미심장했다.

이건 신호인가, 아닌가. 나타니엘은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떴다.

키리에가 속닥거렸다.

“엄청 뛰지 않아요?”

아닌 게 정답이었군. 그가 실소를 흘렸다.

[그래.]

“어색하긴 한데 싫은 건 아니에요…….”

키리에가 말끝을 흐렸다. 마디진 손은 여전히 그녀의 심장 위에 얹혀 있었다. 한 손이면 가슴 하나 정도는 가뿐히 움켜쥘 수 있을 정도로 크다.

잠시 다람쥐처럼 주변을 살핀 키리에가, 말갛고 순수한 눈으로 나타니엘을 올려다보았다.

“만지고 싶어요?”

나타니엘은 잠시 그 맹랑함에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뜻하지 않게 몹시 진정성이 들어간 한숨을 쉬었다.

[키리에 뷰캐넌…….]

“당신은 꼭 내가 얄미울 때만 뷰캐넌을 붙이더라.”

키리에가 까르르 웃었다. 그러면서 가슴에 얹었던 손을 떼어 내고, 양손으로 잡았다.

“하루만 기다릴래요?”

바다 위에 부서지는 햇살 같은 이 미소를 나타니엘은 거절하지 못한다. 그는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도장 찍듯 키리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다녀오렴.]

***

키리에의 짧은 여정은 당초 계획보다 짧은 시간에 끝났다.

그녀는 각지에 이러저러한 구휼 제도가 있고 그를 위한 지부가 어디에 설치되어 있는지 빠르게 알린 뒤 수도로 되돌아왔다. 왕궁의 마법사를 이용한다면 한 달은 걸렸을 일이었다.

아주 이른 오전에 발코니로 찾아온 키리에를 루비니아는 자다 깬 상태로 맞이했다.

“덕분에 좀 잤어요……. 진짜 고마워요, 나 죽을 거 같았어…….”

한시름 놓았다는 얼굴에 키리에는 빙긋 웃었다.

“다행이네요. 내 남편이 난동이라도 부리지 않았나 걱정했는데.”

“하아암, 의외로 조용하던데요.”

루비니아가 숄을 두른 채 입술을 두드렸다.

“궁을 나갔다는 소식도 못 받았지만, 애초에 그 사람은 출입이 목격되지 않았다고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드니까…….”

“그것만 알면 됐어요. 고마워요.”

“내가 할 말이죠.”

루비니아는 하품을 하며 남은 잠을 채우러 돌아갔다. 키리에는 배정된 방으로 향했다. 그는 바다와 같아서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를 떠나보낸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없네?”

방을 둘러본 키리에가 중얼거렸다. 침대도 어디도 깔끔했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그녀 자신이 남겼던 흔적밖에 없다.

키리에는 새삼 그들의 집에 나타니엘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두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 아름다운 저택의 서재에는 나타니엘이 읽다 만 책들이 소담스레 탁자 위에 올라가 있다. 가끔 그 혼자 체스를 둘 때도 있어, 체스 말의 위치는 볼 때마다 달랐다.

저택에서 두 번째로 푹신한 소파는 침대 옆이 고정석이다. 나타니엘은 그곳에서, 잠든 그녀를 내려다보거나 이마를 쓰다듬는다.

나타니엘은 중정의 미루나무를 손질하기도 하고, 여름에는 몸소 수국을 따와 유리로 된 꽃병에 꽂아 놓기도 한다.

키리에는 갑자기 사계가 의미 없는 그 집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나타니엘?”

그녀가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방을 나섰다. 힘을 써도 되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도 없는 일이었다.

키리에의 발걸음은 곧 궁을 나서, 루빈베리 정원까지 이어졌다.

루빈베리 정원은 이든이 루비니아를 위해 만든 아주 넓은 개인 정원이었다. 그를 통째로 키리에에게 대여해 준 덕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흐린 물안개가 낀 숲과 호수는 아름다웠다.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어찌나 여린지 수면 위로 떨어지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키리에는 그곳에서 나타니엘을 발견했다. 멀리서 그를 본 순간부터,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마법을 써서 땅보다 한 뼘 위 공중에 발을 디뎠다.

영구 동토를 호령하는 강대한 짐승은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요히 안개 젖은 호수의 정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검은담비의 털 같은 속눈썹 아래의 파란 눈이 멀리서도 반짝거렸다. 넓은 어깨에 바른 자세, 훤칠한 팔다리는 누가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낸 것처럼 모든 부분이 완벽했다.

그렇듯 일견 아름답지만, 주춤 물러나게 되는 섬찟한 분위기가 있다. 안개 속에서 마주친 검은 말처럼.

이렇듯 그가 혼자 남았을 때, 작은 인간들을 위해 쥐고 있는 고삐가 느슨해지면, 뒤편으로 탁한 그림자가 안개에 맞춰 너울대기도 한다.

사박.

하지만 키리에의 발이 잔디밭을 밟자 그것은 순식간에 나타니엘의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심장을 울릴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키리에.]

서면 작약, 앉으면 모란, 걷는 모습은 백합과도 같은 사내가 미소 지었다. 천박한 기색 하나 없이 요염한 미소였다. 꼭 밤에 보는 벚꽃처럼.

[다녀왔니?]

“다녀왔어요.”

[다치진 않은 것 같구나.]

“다칠 일도 없었는걸요.”

두 사람은 가만히 호숫가에 서서 안개비 내리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쌀쌀한 겨울 아침이었지만 입김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종말은 아주 세심한 편이다.

잠시 침묵한 키리에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나타니엘. 혹시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요?”

나타니엘은 조금 의외라는 얼굴을 했으나, 곧 차분해졌다.

[네 뜻대로 하렴.]

“당신 생각을 묻는 거예요.”

[넌 정말 희한한 질문을 다 하는구나. 그게 또 내 숙녀답지만.]

나타니엘이 말없이 시선을 호수로 돌렸다. 키리에는 말없이 그를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인간은 대개 자손을 가지고 싶어 하지. 그 가능성을 빼앗은 건 나니까, 입양이라도 하겠다면 말릴 생각은 없어.]

키리에가 설핏 웃었다.

“의외네요. 당신이 아빠 노릇 하는 건 왠지 상상이 안 가는데요.”

[사랑할 수야 없지. 네 피와 살을 물려받는대도 그러지는 못할 거야. 하지만 조금 특별한 원숭이 정도로는 취급해 줄 수 있을 거야.]

“원숭이요…….”

[물론 아주 불유쾌한 다른 방법이 있는 줄은 알지만…….]

“다른 남자랑 하는 거요?”

옆모습만 보이는 나타니엘의 입가가 일순 입꼬리를 당겨 웃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하지만 그건 미소라기보다, 아름다운 껍데기의 틈으로 광기가 모습을 비춘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웃고 있는 광기란 건 대체로 아주 소름 끼치는 법이다.

[그렇게 하고 싶니?]

키리에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나타니엘은 설산처럼 깎아지른 턱을 당기고 청초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 뒤로 그림자가 구름처럼 커지고 있었다.

“……아뇨.”

키리에가 오한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렇구나.]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나타니엘은 점차로 온순해졌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키리에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래, 그러진 마.]

참 알 수가 없다. 그리 사납고 독선적인 태도를 보일 땐 언제고, 지금은 꼭 처마 밑의 어린아이처럼 쓸쓸해 보였다.

키리에는 귓가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따라 고개를 비틀었다가, 조심스레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나타니엘이 동작을 멈췄다. 그러나 곧 그녀를 똑같이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그는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아주 낯선 것 보듯이 바라보며, 키리에의 머리에 입 맞췄다.

키리에가 나타니엘의 품에서 꼼지락대며 고개를 들었다.

“다른 남자랑 뭔갈 하면서까지 아이가 갖고 싶은 건 아니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의 어깨에는 부슬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복종이라곤 모를 것 같은 오연한 얼굴로 얌전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키리에는 망설이다, 까치발을 들고 나타니엘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

“나는 그런 건 당신이랑만…… 하고 싶은데.”

태연한 척하려 해도 목덜미가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침을 한번 삼켰다가, 남자가 생각하기에 너무나도 무방비하게 웃어 버렸다.

“어떡하지. 이 다음이 뭔지 모르겠어요…….”

세월에 세월을 거쳐 쌓아온 나타니엘의 인내심이 마침내 바닥난 순간이었다. 나타니엘의 고개가 점점 키리에에게 다가갔다.

[키리에.]

“네.”

[키리에.]

“네.”

[키리에.]

그의 그림자 아래에서 키리에가 뒤늦게 배시시 웃었다.

“네, 나타니엘.”

나타니엘이 더는 참지 않고 키리에에게 키스했다. 작달막한 그의 숙녀는 고개를 완전히 젖히고도 그에게 닿지 않아, 그는 상체를 꽤 깊게 굽혀야 했다.

등을 감싸고 있던 손은 어느새 키리에의 양 뺨과 목덜미를 쥐었다. 사슴처럼 쭉 뻗은 흰 목이 그가 힘만 주어도 목 졸라 죽일 수 있을 만큼 가늘었다. 자카란다 나뭇가지 같은 그 여린 뼈대를 손아귀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 만족스럽게 했다.

키리에는 등이 땅에 닿고 나서야, 자신이 어느새 잔디밭 위에 누여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 맞은 풀잎이 비단처럼 촉촉했다. 그 위로 상아색 로브가 뭉게구름처럼 깔려 그녀를 받치고 있었다.

“사람들이…….”

[보라고 해.]

거친 동작은 없었다. 키리에는 나타니엘의 목덜미를 끌어안은 채, 감은 눈꺼풀 사이로 들이치는 흐린 햇빛을 감상했다.

입으로 들어온 혀가 치열을 훑다가, 안쪽의 젖은 목울대를 삼키고 싶은 것처럼 파고들었다. 가끔은 본능에 겨웠는지 이가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큰 손이 부드럽게 허리 아래를 받치기 시작했다는 깨달음은 조금 늦게 왔다.

“아.”

키리에의 어깨가 약간 오그라들었다. 나타니엘은 말할 때 입술이 스치는 거리에서 속삭였다.

[괜찮아.]

아침이고, 바깥이고, 남의 정원이고, 비가 오고, 누가 올지 모르고……. 멈출 사유는 많았지만 키리에는 나타니엘의 목덜미를 콱 끌어안고 코끝을 부딪쳤다.

“알아요.”

참으로 비장한 대답에 나타니엘이 낮게 웃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키리에의 옷을 반으로 갈랐다. 손날로 말이다.

그게 가능하냐는 둘째 치고 키리에는 당황했다.

“자를 필요가.”

[있지.]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정확한가. 속옷마저 갈라져 몸 옆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예고도 없이 알몸이 된 키리에가 당황으로 멈춘 것과 달리, 나타니엘은 다른 의미에서 동작을 멈췄다. 그가 잠시 숙였던 몸을 세웠다. 그리고 말없이 눈앞의 광경을 담았다.

키리에가 나신으로 제 앞에 누워 있었다. 새파란 잔디밭에 대비된 피부가 더 투명하게 빛났다. 어깨와 목덜미에는 드문드문 만족스러운 잇자국이 보였다. 주변에 펼쳐진 옷자락이 갓 태어난 나비의 허물처럼 보였다.

가는 허리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허벅지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다리 사이에는 나타니엘이 있었고, 그 덕에 다리는 완전히 오므라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타니엘은 안쪽에서 물방울 한두 개가 잔디밭으로 흐르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흐르는데.]

“읏.”

아마 난생처음 들었을 노골적인 말에 키리에는 재빨리 손으로 다리 사이를 가렸다. 나타니엘이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했다.

[미안하지만 그 모습이 더 선정적으로 보이는구나.]

“당신 그걸 꼭 말로…….”

[이런 걸 지금까지 혼자 보고 있었다는 게 좀 괘씸하지 않으니.]

“그럼 혼자 보지 둘이 보나요!”

[앞으론 둘이 보면 좋겠어. 매일 봐도 안 질릴 것 같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말이 안 되나? 부부잖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매일…….”

[그럼? 마음 같아선 하루에 여덟 번은 보고 싶지만, 네가 정해 주면 그걸 따를 용의도 있어.]

놀리려고 한 말인데 키리에는 뜻밖에도 진지하게 눈을 굴렸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루 한 번?”

그렇구나. 한 번은 되는구나……. 그리고 그걸 진짜 정해 주는구나…….

나타니엘을 살짝 돌게 하는 대답이었다. 그가 조용히 심호흡하고서, 부드럽게 키리에의 발목을 쥐었다. 꽃잎처럼 부드러운 피부에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부러뜨리고 싶네.]

“뭐라고요?”

다행히 내뱉는 것으로 그쳤다. 조금 물러난 나타니엘이 천천히 키리에의 양발을 모았다. 그리고 그를 길들인 주인에게 경애를 보내며, 발등 위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워요…….”

키리에가 앙탈 부리듯 중얼거렸다. 힘주어 곱아든 발가락까지 귀여웠다.

입술은 천천히 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보란 듯이 쪽 소리를 내며 타고 오르는 입맞춤에 키리에는 안 돼, 안 되나, 안 될 텐데 같은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안 돼도 어쩔 수 없어, 이젠.]

입맞춤이 발등, 발목, 정강이, 무릎 위에 얹혔다가 허벅지를 타고 올랐다. 입술이 골반과 허벅지 사이, 살이 접히는 부분에 다다르자 키리에가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나타니엘은 살갗에 가볍게 입술을 댄 뒤, 더 위쪽으로 올라갔다.

살갗은 부드럽고 근육은 바짝 굳었으며 열기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입술은 오므린 갈비뼈 위를 지나 명치에 다다랐다. 그는 거기서 입술을 잠시 멈추고, 찬 손으로 키리에의 허리를 덮었다.

“흐.”

손가락이 천천히 키리에의 피부를 문질렀다. 손톱 끝이 날씬하게 파인 허리의 옆면을 쓸다가, 배꼽 근처를 간질이며 위로 타고 올랐다.

살짝 벌어진 가슴 위로는 분홍색의 정점이 작고 둥근 진주처럼 바짝 서 있었다. 그가 있는 힘껏 가슴을 움켜쥐자, 키리에가 자극에 몸부림쳤다.

“아!”

불가해한 쾌락이 키리에의 머리를 내려쳤다. 손가락 사이로 살이 불거지도록 움켜쥔 가슴에서 생겨난 흥분이 병균처럼 온몸으로 전염됐다. 그녀가 흥분과 막막함에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떡해…….”

[어떡하긴.]

나타니엘이 이를 세워 가슴을 강하게 문 것은 한순간이었다.

“악!”

키리에가 비명을 내지르며 버둥거렸다. 그녀가 나타니엘의 어깨를 내려치며 몸을 밀었지만, 나타니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희롱하듯 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벼락이 내리치는 듯한 감각이었다. 키리에가 허리를 휘며 나타니엘의 어깨를 꽉 쥐었다. 뱀처럼 움직이는 혓바닥이 가슴의 가장 민감한 곳을 간질이다가 물러났다가 둥글게 핥기를 반복했다.

그는 키리에의 등을 붙잡아 들고, 사탕을 먹듯 살갗을 핥아 올렸다. 마지막은 항상 조금 아플 정도로 이를 세워 그녀를 깨물었다.

봐주는 듯, 배려해 주는 듯하고는 있지만 결국 그의 맘대로였다. 목덜미와 어깨를 깨물고, 가슴을 깨물면서 흔적을 남기는 것부터가.

키리에는 그의 어깨를 밀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손등으로 눈을 가린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그녀의 가슴에 파묻혀 있던 나타니엘이 고개를 들었다.

[가리지 말고.]

목덜미가 잡히고, 혀가 부드럽게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몸짓은 다정하지만 들어간 힘은 반항의 여지가 없다. 키리에는 고개를 붙잡힌 채 속절없이 입술을 먹혔다.

가까이에서나 들리는 키리에의 작은 할딱거림을 들으며, 나타니엘은 왼손으로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감아올렸다. 힘주면 끊어질 듯이 연약하기로는 목이나 머리카락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하고, 그렇기에 사랑스러웠다.

그렇기에 또 못되게 굴고 싶기도 했다. 키리에가 채 진정하기도 전에 손가락 하나가 그녀의 젖은 틈을 쓸었다.

“아!”

손가락이 닿은 순간 키리에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온몸을 덜덜 떠는 키리에에게 나타니엘은 온순한 양처럼 코끝을 비볐다.

[착하지, 키리에. 괜찮아.]

그러면서도 손으로는 제멋대로 그녀의 음부를 쥐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약간은 강하게 움켜쥐는 아귀힘에 진득한 액이 즙 짜이듯 흘렀다.

그 모든 감각이 지독히도 생경하고 황홀해서 키리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리기엔 그녀 역시 원하고 있고, 마냥 받아들이기엔 온몸이 남의 것 같았다. 유일하게 자유로운 눈이 눈물로 젖어 나타니엘을 좇는 게 전부였다.

나타니엘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서 그 모든 얼굴을 눈에 담았다.

[지금 네 얼굴이 어떤지 너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상한 말 하지 말아요…….”

[나중에 보여 줄게.]

“싫어, 아!”

키리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젖을 대로 젖은 여린 살 사이로 손가락이 엉겨들었다.

[보는 게 싫다면, 잘 들어 봐.]

그가 귓바퀴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손가락 끝이 간지러울 정도로 느리게 음순 주변을 맴돌았다. 도톰한 살덩이를 건드릴 때마다 외면할 수 없는 음탕한 소리가 났다.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인 키리에의 뺨이 능금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그러지 않아도 물기 어린 마찰음이 들릴 때마다 다리 사이에선 애액이 왈칵 흘렀다.

키리에가 나타니엘의 팔에 매달린 채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쾌락과 수치스러움에 괜히 죽고 싶었다. 그를 보는 나타니엘의 표정만은 티 타임의 신사처럼 온화하고, 일견 성스럽기까지 했다.

[기분은?]

나타니엘이 물어왔다. 키리에가 고개를 젓자, 그는 약간은 애원하듯 그녀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 맞췄다.

[기분은? 키리에.]

재차 물어오는 말에 그녀가 결국 입을 열었다. 열에 달뜬 목소리는 그녀가 듣기에도 몹시 야했다.

“이상해요…….”

[어떻게?]

“다리 사이가…….”

키리에가 말하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하지만 대답을 재촉하듯 손가락이 몸 안쪽으로 쑥 들어왔다. 키리에의 허리가 다시 튕겨 나갔다.

“다, 다리 사이가! 뭔가, 텅 빈 거 같아서…….”

[그래서?]

나타니엘이 대답을 종용하듯 고개를 갸웃했다.

망설이는 키리에의 눈에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놀랍도록 아름다운 남자가 보였다. 성냥 세 개를 올려도 거뜬할 속눈썹 아래의 파란 눈은 깜빡이지도 않았다. 그녀가 쾌락에 빠지는 모든 과정이 그 눈에 속속들이 담기고 있었다.

혼자 삽시간에 달아올라 흐느끼는 것이 부끄러워진 키리에가 숨을 들이켰다.

“……너무 얄미운 표정이라 말 안 할래요.”

나타니엘이 멈칫하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두르고 있던 여유가 약간 가셨다.

[도발에도 소질이 있으시군요, 키리에 뷰캐넌 양.]

“도발이 아니라, 아읏!”

안쪽을 점령했던 손가락이 곧 질 내벽을 부드럽게 긁어내렸다. 고작 손가락 세 개가 주는 쾌감에 키리에가 인상을 썼다. 손가락을 고정하듯 박아 넣고서 손바닥으로 바깥의 여린 살을 짓누르는 짓이 반복되었다. 키리에가 나타니엘의 상완을 붙잡은 채 얼굴을 찡그리고 헐떡였다.

“그만……!”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될 텐데.]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으흣!”

[그래도 말해 봐.]

키리에가 빨갛게 달아오른 고개를 휘저었다.

“그냥……, 너무, 태연해서……. 나만 기분, 흣, 좋은 것 같잖아요…….”

불시에 나타니엘의 손동작이 멈췄다. 키리에는 그것이 부끄러워 다시 고개를 돌려 얼굴을 숨겼다.

“……나는, 당신이 안 태연한 모습도 보고 싶은데.”

그거야말로 정말 어딘가로 데려가서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엉엉 울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내가 태연하다고 생각하는 건 네 착각이야.]

나타니엘이 그렇게 말하며 키리에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크기를 더 키운 뭉툭한 무언가가 몸에 닿아 왔다. 키리에의 얼굴이 불에 덴 사람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런데, 당신은 왜…… 안…….”

말하기 부끄러운지 뒷말을 삼킨 그녀는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비꽃 설탕 절임 맛이 날 것 같은 색이었다. 나타니엘이 슬쩍 눈꺼풀을 핥자, 정말로 단맛이 났다. 그는 자신이 어지간히 미쳤음이 만족스러웠다.

묘하게 친근하고 애정 어린 접촉에 키리에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왜 안 벗죠…….”

나타니엘은 짧게 웃었다. 그가 아이 어르듯 뺨을 비볐다.

[내가 벗는 게 좋니?]

“미쳤어…….”

[난 네가 부끄러워하는 게 좋아.]

“부끄러운 말 좀, 하윽!”

키리에가 더 말하기 전에 나타니엘이 다시 손가락을 안쪽에 집어넣었다. 그녀는 나타니엘의 예복이 구겨지도록 움켜쥐고서 허리를 비틀었다.

[안타깝게도 밖이잖니. 여차하면 내가 안고 숨기기라도 해야지.]

“그냥 괴롭히려는, 흐읏, 거면서……!”

[맞아. 사실 네가 좀 더 부끄러워하면 좋겠구나.]

“못됐, 아……!”

[네가 지금 왕궁 정원에서 이러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나?]

“흐……!”

키리에가 신음을 내지르며 자지러졌다.

작은 빗방울이 젖꼭지를 두드릴 때마다 움찔할 정도로 예민한 몸이었다. 키리에가 덜컹거릴 때마다, 크고 둥근 가슴이 비 오는 낮의 흐린 햇빛 아래에서 물결치기를 반복했다.

키리에의 몸은 어딜 붙잡아도 고양이의 등허리처럼 부드럽고 매끈했다. 한 줌짜리 허리는 가늘어서, 그가 끌어안는 것만으로도 터뜨릴 수 있을 지경이었다. 갈대 같은 연약함이다. 그 연약한 나신이 그의 손짓에 맞춰서 이리저리 나부꼈다.

나타니엘이 잠시 몸을 떼고 손가락만을 움직였다. 이제는 바깥에서 벌거벗고 있다는 인식 자체가 날아갔는지, 키리에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숨을 쌕쌕거리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한쪽 다리를 잡아 살짝 벌려도 그녀는 잠깐 움찔할 뿐이었다.

맨살과 젖은 골 위로 빗방울이 톡톡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손가락이 질 안쪽의 젖은 살 사이를 헤집자, 골반과 엉덩이가 움찔거렸다.

“……읏.”

여전히 수치심은 조금 남았는지 신음을 참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질척한 표면 위로 어렴풋한 햇빛이 반사되어 산호색 점막이 반들거렸다.

[키리에.]

손가락으로 넓이를 가늠하던 그가 몸을 낮췄다. 키리에는 자신의 몸을 나타니엘이 덮는 것을 느꼈다.

나타니엘의 팔이 머리 옆을 짚고, 둘러 안듯 그녀의 머리를 감쌌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아주 작게 났다.

[키리에.]

그가 재차 이름을 불렀다. 뭔가의 예고 같은 상냥함이었다. 키리에가 본능적으로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겁은 좀 나겠지만, 아프진 않을 거야.]

고개를 빗긴 나타니엘이 귓가에 입 맞추고는 속삭였다. 손가락이 쾌감으로 꿈틀대던 속살을 마지막으로 훑곤 빠져나갔다.

[좋은 꿈을 꾼다고 생각하렴.]

그리고 두껍고 뭉툭한 것이 사정없이 그 빈자리에 내다 꽂혔다.

“흐, 아앗!”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키리에의 머리가 하얘졌다. 놀랍도록 아무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비명이 튀어나왔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강렬하고 폭발적인 쾌감이 순간이지만 눈을 멀게 했다.

“아아! 아……!”

들어온 것은 너무 컸고, 순식간에 내장 하나가 통째로 구멍이 난 느낌이었다. 키리에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생존 본능에 가까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가 어깨를 붙잡자, 옷감 아래의 근육이 단단해졌다.

[아프니?]

“그렇진, 않, 흑, 그런데, 어떻게…….”

[그런 권능이 있어.]

나타니엘이 키리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서서히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야가 다시 백작했다. 누군가 그녀의 사타구니에 말뚝을 쑤시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몸과 몸이 맞붙을 때마다 음핵에 가해지는 약한 충격에 온몸이 찌르르 울렸다. 이미 애액은 엉덩이 전체에 흐르고 있었다.

박자에 맞춰 올려치다가도 가끔 있는 힘껏 물건을 집어넣은 채 꾹 눌러댔다. 그때 생겨나는 약한 통증은 도리어 쾌감에 가까웠다.

그 와중에도 나타니엘은 상반신과 하반신이 각기 다른 자아를 가진 것처럼 연신 키리에의 귓가와 목덜미에 입 맞췄다.

키리에. 키리에. 키리 에 .

나타니엘은 계속해서 그녀를 불렀다.

[좀 더…….]

여기서 어떻게 더? 아래쪽에서 질척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온몸에는 소름이 돋았다. 몸이 비틀릴 때마다 나타니엘은 그녀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착하지.]하고 속삭이며.

달래는 말과 달리 거대한 성기가 타격하듯이 아래에서 위로 밀어닥쳤다. 가히 둔기였다. 봐주는 것은 없었다. 키리에가 숨을 쉬도록 멈추지도 않았다.

“아, 아! 안, 안 돼요……!”

물건이 키리에의 몸 안에서 계속해서 크기를 키워 갔다. 서서히 구멍이 벌어지는 감각에 일순 공포감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잔뜩 부푼 내벽은 페니스에 달라붙어 본 적도 없는 물건의 모양을 세세히 그려 낼뿐, 망가지지도 찢어지지도 않았다.

“어떻게, 흐으……, 안 돼, 제발……, 아흣!”

[착하지. 아무 문제 없을 거야.]

나타니엘이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댔다. 그 목소리에 밴 갈증과 욕망이 귀를 통해 뇌를 녹이는 게 분명했다. 벌어진 다리가 수치도 모르고 움직임에 맞춰 흔들렸다. 그때마다 드러난 가슴도 거세게 아래위로 튕기기를 반복했다.

살덩이가 비벼지는 쾌락에 골반이 들리고 입가에는 타액이 흘렀다. 눈이 풀리고, 나타니엘과 곁눈질로 시선이 맞을 때마다 키스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가 뭘 말해도 그러겠다고 할 것 같았다.

“아, 흑! 아! 악……!”

그렇구나, 이런 느낌이라서 다들 엉망진창이 되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키리에가 나타니엘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짐승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초점이 풀린 키리에의 눈을 나타니엘은 먹잇감을 보듯이 바라보았다. 힘든 기색 따윈 없었다. 빙하처럼 투명한 눈에 그저 질고 끈적한 애정이 그득했다.

그때였다.

“왕비 전하께서는…….”

“곧 태자가…….”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모르는 목소리였다.

키리에가 숨을 삼키며 반사적으로 나타니엘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남자는 그를 알면서도 도리어 더 강하게 아래를 쳐올리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한 힘에 키리에가 폐까지 들이찬 공기를 다시 토해 냈다.

“나, 나타, 아흑! 나타니엘, 사람, 들이, 흣!”

[여기까지 오진 않을 거야.]

“흐, 하, 하지만.”

나타니엘이 기척이 나자마자 그들 쪽으로 오지 못하게 수를 쓴 것을 모르는 키리에가 불안에 떨었다. 그녀는 자연스레 눈앞의 나타니엘의 외투를 벌리고 품으로 파고들었다.

“당신은, 다 입고! 아흑, 있, 으, 제발, 말, 좀……!”

[벗은 건 내가 아닌데.]

“들키면……!”

[우리 호국경 각하께서는 각오가 부족하구나.]

움직임은 오히려 더 거세졌다. 애액이 빠듯하게 페니스 사이에서 비벼지며 흰 거품을 냈다.

[난 오히려 네가, 우는 소리를,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구나. 그야 네가, 몹시 예쁘게 운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싫어…….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좀 더 크게 울어 봐.]

“제, 발……, 아흑!”

키리에가 타액으로 지저분해진 입술을 깨물었다. 흘레붙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타니엘은 그저 사랑스럽다는 듯이 속삭였다.

[내 부인은 참 정숙하기도 하지.]

그러면서 자궁구에 닿도록 페니스를 올려치는 강한 타격에 키리에의 눈앞이 번쩍였다.

“악!”

키리에가 비명에 내질렀다. 참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뚫린 것은 아랫배인데 횡격막에서부터 목 아래로 뜨거운 것이 차올라 숨이 막혔다. 뭔갈 먹었다면 반드시 토했으리라고 생각되는 압박감이었다.

“숨, 숨이, 나타, 나타니엘……, 잠깐, 만!”

키리에는 몸이 꿰뚫린 채 울부짖었고, 말과 반대로 몸은 흡입하듯이 그의 물건에 들러붙었다.

나타니엘은 희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이 가냘픈 여자가 나타니엘을 길들인 주인이었다.

“왜, 숨이, 말도, 안, 잠깐, 잠깐만요…….”

타액을 흘리며 컥컥거리는 키리에를 더 난폭하게 몰아붙이며, 나타니엘은 가라앉을 줄 모르는 정복감에 그녀의 뺨을 가볍게 물었다.

좀 더 괴롭히고 싶었다. 그녀가 상상도 못 할 방식으로.

키리에는 신중하지만 호기심이 많으니, 몇 년이고 유혹하면 받아 줄 것도 같았다. 그는 따로 성적 취향이 있지는 않으나, 키리에를 보다 더 애태울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

기회가 된다면 공단 리본으로 키리에의 온몸을 꽁꽁 묶으리라. 키리에가 겁에 질려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애달프게 그의 이름을 부르리란 점이 좋았다. 그 몸가짐 얌전한 아가씨가 드러난 몸을 가리지 못하고, 온전히 그에게 모든 걸 맡긴 채 애처롭게 흐느끼리란 점이.

경멸은 이젠 별로 받고 싶지 않지만, 가끔 좀 심한 짓을 하고 원망 섞인 눈초리를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 원망 섞인 눈의 키리에에게 성기를 찔러 넣은 채 그녀가 말도 못 하고 헐떡이는 걸 보고 싶기도 했다.

키리에를 자극하기 위해서라면 약간의 장난을 쳐도 좋을 것이다. 이 얌전하고 당돌한 여자가 부끄러움에 빠져 죽을 정도의 상황을 만들고 싶었다.

남들 앞이라면 어떨까?

진짜로 보여 줄 생각은 없다. 대충 몇 명을 구해 눈코입을 뭉개놓고 돌아다니게 시키면 될 것이다. 그 사이에서 안대로 눈을 가린 키리에를 놓고 강제로 다리를 벌리면 얼마나 사랑스럽게 울음을 터뜨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러면 그는 보란 듯이 더 깊숙한 곳을 벌린 채, 수치로 파들파들 떠는 키리에의 귓가에 사람들이 어떤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지 속삭여 줄 것이다.

보렴, 키리에. 네가 이 상황에서 젖는 건 아무래도 남들이 그만큼 너를 사랑스럽게 봐주고 있기 때문인 것 같구나…….

그 상태에서 우격다짐으로 아래쪽을 채워 넣으면 좋을 것이다.

키리에는 남들에게 보이고 있다는 상황에 더 자지러질 테고, 그는 그런 키리에를 범하며 날아갈 듯 황홀할 게 분명했다.

늘 깔끔하고 이성적인 얼굴을 한 키리에가 눈물과 타액, 더불어 애액과 정액으로 범벅이 되어서 교성을 내지르면 얼마나 더 예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자칫 잘못해서 부러뜨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진실을 알게 되면 키리에는 화를 내겠지만, 그래도 결국엔 용서해 줄 것이다. 키리에는 자신을 사랑하니까.

그는 별수 없이 악한 존재였고, 어쩔 수 없이 키리에의 울음이 좋았다.

[키리에.]

“아! 아!”

[이제 너는 절대, 도망치지 못해.]

“아, 아, 하앙! 아아아……!”

키리에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은 채, 파정의 순간이 왔다.

키리에 역시 절정에 다다르자 소리도 내지 못했다. 세상이 터지고 하늘이 깨지고 머리가 하얗게 표백되는 감각 속에서 그녀는 숨조차 멈춘 채 파들파들 떨었다. 질 내벽이 어떻게 수축하고 조여드는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 오그라들었다.

잠깐이지만 위도 아래도 없는 무중력 공간에 놓인 듯했다. 느껴지는 것이라곤 몸 내부에서 터져 나온 쾌감이 산산이 조각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한 느낌, 그뿐이었다.

그녀는 남자를 끌어안은 채, 뇌를 새로 갈아 끼우는 듯한 절정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흑…….”

까닭 모르게 나오는 눈물을 나타니엘은 말없이 입술로 찍어 훔쳤다. 애정이 깃든 동작에 소란스럽던 마음이 점차 가라앉았다.

키리에가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린 하늘이 보였다. 그러나 내리는 부슬비가 눈동자를 때리자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있는 힘껏 찡그린 얼굴 때문에 뒤늦게 온 얼굴이 아팠다.

“아…….”

목소리를 내자 목이 쉬어 있었다. 그녀가 힘없이 숨을 흘렸다.

나타니엘은 키리에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 꽤 오래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가끔 더 움직이고 싶은 것처럼 몸이 움찔거렸다.

곧 그가 느리게 몸을 들었다. 아침 햇살을 등지고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파란 눈이 키리에와 마주쳤다. 여전히 동공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분명 다정도 흠뻑 배어 있었다.

[아프니?]

가장 먼저 나온 물음이 그거였다.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안 아플 거라고 자기가 말해 놓고…….”

[혹시 모르니까.]

“하하……. 당신은 걱정이 너무 많아요…….”

키리에의 웃음에 나타니엘은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 맞췄다.

[너한테만 그래.]

“아…….”

키리에가 배시시 웃었다.

“그래서 내가 당신을 좋아하죠…….”

때마침 아침 햇살이 키리에의 얼굴을 향해 비스듬히 드리워진 때였다. 키리에는 황금빛 햇살에 눈이 부신지 아찔하게 웃으며 눈을 꼭 감았다.

나타니엘은 아무래도 신이 그녀를 사랑하나 보더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손을 들어 키리에의 뺨을 만지려다가,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아직 연결되어 있던 부위가 매끄럽게 빠져나왔다.

키리에는 눈을 꼭 감은 채 나타니엘이 제 하반신을 만지는 것을 느꼈다. 뒷정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녀 역시 몸을 일으키려다, 경련이라도 올 것처럼 뻣뻣한 팔다리를 이내 축 늘어뜨렸다.

“어떡하죠…….”

[뭘?]

“아무것도 하기 싫어…….”

[긴장을 너무 했어. 가만히 있으렴. 침대까지 데려다줄 테니.]

나타니엘이 손바닥으로 살며시 키리에의 음부를 쓸었다. 회음부까지 엉겨 있던 정액과 애액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상쾌한 느낌만이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키리에의 등을 받쳐 그녀가 상체를 세우도록 도왔다. 그리고 웃옷을 벗어, 벌거벗은 키리에의 몸을 가렸다.

“고마워요.”

키리에가 앞을 여미며 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흩어져 있는 옷 조각과, 호수 위에 비치는 햇살. 여전히 조금은 흐린 하늘.

베스트 차림의 나타니엘은 그 아래에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정했던 셔츠가 구깃거렸다. 키리에가 부여잡은 흔적이다. 머리카락도 약간은 흐트러져 있었고, 눈매가 평소보다 깊었다. 분위기 역시 유난히 차분했다.

‘뭐라고 한마디 놀려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

키리에가 어색함에 발끝을 모았다.

“저기…….”

그녀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혹시 별로였.”

[그럴 리가.]

나타니엘이 딱 잘라 대답했다. 그는 손을 모으고 시선을 내리더니, 드물게 멍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냥 잠시 꿈을 꾼 듯한 기분이 들었을 뿐이야.]

“당신도 꿈을 꿔요?”

[아니.]

그렇게나 제멋대로 아래를 밀어붙이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아이처럼 굴어도 되는 걸까. 키리에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나한테는 좋은 꿈 꾸는 셈 치라고 했으면서.”

[그야 나는 네게 좋은 꿈을 선사해 줄 자신이 있었으니까.]

“난 그럴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내 좋은 꿈은 네가 내게서 도망치지 않는 거야. 그건 네 능력과는 별개의 문제고, 꿈이 끝나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지.]

키리에가 어이없다는 듯이 실소했다.

“내가 끝나면 당신 뺨이라도 때리고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나요.”

[어느 정도는.]

“당신 나한테 소박맞는 게 어지간히 무서운가 봐요?”

어느 정도는 놀리려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나타니엘은 말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 사람은 참 이런 식으로 사람 말문을 막는다. 키리에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는 나타니엘의 모습은 흐트러져 있는데도 묘하게 금욕적이었다. 정결하고 선해 보이는 얼굴에 속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늘 마음이 약해지고야 만다.

“당신 부인 안 도망쳤어요.”

키리에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작게 덧붙였다. 용기가 필요한 말이었다.

“조금……. 아니, 꽤 좋기도…… 했고요.”

그녀의 말에 나타니엘이 희미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상의 모든 파랑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 느리게 깜빡였다.

나타니엘이 일순 아주 예쁘게 미소 지었다.

[나는 아마 오늘로 영원을 살아가게 되겠구나.]

지극히 온유하고 풍성한 미소였다. 나타니엘과, 나타니엘의 껍질과, 그 너머에 있는 어떤 거대하고 범우주적인 괴이가 동시에 살그마니 미소 지은 것만 같았다.

늘 어느 정도는 광기가 섞여 있던 그들 모두의 의견이 합치되었다고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까닭 모르게 경이로운 기분을 느낀 키리에의 정신이 멍해졌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꼭 그렇게 곧 죽을 사람처럼 말할 필요가 있나요…….”

[걱정되니? 그야 내가 죽으면 우리 키리에 양은 나만 한 남자는 못 찾으시겠지만.]

“정말 감동할 틈을 안 주네.”

키리에가 실없이 웃으며 주먹으로 나타니엘의 명치를 때렸다.

“아!”

그러곤 제 손이 아파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나타니엘은 그게 너무 귀여워서 그만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그는 곧 키리에를 아이처럼 끌어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가지.]

키리에가 다리를 달랑거리며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숫제 생쥐만도 못한 작은 온기가 그의 심장을 데웠다. 키리에와 맞춘 반지가 박힌 심장이다.

나타니엘은 키리에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드높은 곳의 여신에게 소리 없이 감사를 보냈다.

너는 정말 신이 내려 준 걸 거야.

***

[진통제나 근육 이완제 같은 게 필요해.]

키리에를 재운 나타니엘은 바로 루비니아의 방에 들이닥쳤다.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도 루비니아는 모든 걸 눈치챘다. 그녀가 금으로 된 종을 울렸다.

“있어요. 사람을 시켜 방으로 보내드릴게요. 그리고 담당 시종도 잠시 바꿔도 될까요? 저를 돌봐 주는 아이들이라, 궁에서는 가장 믿을 만한 시녀들이에요.”

[그러렴.]

고맙다는 말조차 없다. 루비니아도 그걸 당연시했다.

“그리고, 어떡하시겠어요? 뷰캐넌의 장례식 이후 바로 저택으로 내려가시나요? 계속 궁에 계시겠다면, 별궁 하나를 배정해 드릴게요.”

[별궁까지야.]

루비니아가 입술을 우물거리다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건 부탁드리는 거기도 하거든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괜히 신경 쓰일 수도 있고…….”

[신경?]

“그야…….”

내가 이걸 진짜 말해야 해? 루비니아가 나타니엘을 흘끗거렸다.

그러나 나타니엘은 무심히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고, 루비니아는 그의 눈엔 제가 금수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모양이니 아무 말이나 지껄여 보자 하는 마음으로 눈썹을 들썩였다.

“원래 신혼엔 좀 앞뒤 안 가리는 게 보통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피해 주는 게 예의니까요……?”

새파란 눈이 일순 햇빛 아래 보석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마치 그 한마디가 그에게 어떤 계시라도 되는 듯했다. 내내 일관되게 나른하던 표정이 몹시 밝아졌다.

[아.]

그 ‘아’가 어떤 ‘아’인지 루비니아는 눈치채지 못했다.

***

장례식 날이 되었다. 식은 세자르 뷰캐넌과 같은 신전에서 이루어졌다. 작고 오래되었지만 기품이 있는 신전이다.

뷰캐넌 영지에서 올라온 가신들로 신전은 인산인해였다.

“선대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키리에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모자에 달린 검은 망사로 얼굴을 가린 채 식장의 가장 뒤에 나타니엘과 함께 섰다.

힘을 가진 자는 어쩔 수 없이 남들과는 다른 여유를 갖게 되는 법이다. 사람들은 타인의 접근을 거부하듯 오만한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에게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딱 한 명만 빼고.

“안녕하십니까. 에드워드 뷰캐넌입니다.”

그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30대 중반의 남자였다. 갈색이 섞인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본 키리에가 작은 감탄사를 흘렸다.

“우린 언젠가 본 적이 있지? 방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예. 작고하신 뷰캐넌 공작님의 슬하에 자녀가 없기에, 제가 차기 뷰캐넌 공작이 되었습니다. 각하께서 저를 지명하셨다고…….”

“그랬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

그러고 보니 뷰캐넌 공작가의 대를 이을 사람이 없으면 방계인 에드워드에게 가문을 넘긴다는 서류를 작성한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고개를 잠깐 갸웃한 키리에가 여유롭게 눈을 휘었다.

“그래. 이제 뷰캐넌은 네 거야.”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난 가문의 일원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나한테 그런 거 맹세할 필요도 없고. 대신 내가 맡긴 영지민들에겐 잘해 줘.”

“네!”

에드워드가 자신감 있게 대답하고 물러났다.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 섞인 시선이 그의 등을 좇았다.

키리에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속닥였다.

“어때요?”

나타니엘이 습관적인 미소를 띤 얼굴 그대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평범하구나.]

“역시 그래요? 번드 같은 사람이길 바랐는데.”

[그런 인간은 흔한 게 아니야.]

“돌아갈 때는 번드에게도 들를까요?”

[그러지.]

식이 진행되었다. 신관이 추도문을 읊고, 몇몇 사람이 나서서 추모의 연설을 시작했다. 그쯤 키리에는 남몰래 하품했다.

나타니엘이 몸을 살짝 기울이고 낮게 속삭인 것도 그즈음이었다.

[키리에.]

평소와 달리 누구도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시선을 옮기자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화려한 얼굴이 약간 굳어 있었다.

[문제가 생겼어.]

“문제요?”

키리에가 미간을 좁혔다. 세상에 나타니엘한테 문제 취급받을 만한 일은 많지 않다.

‘지평선? 아니면 그레이? 아니면…….’

머리를 굴리던 그녀가 조심스레 뒤로 빠졌다.

“나가서 얘기하죠.”

두 사람은 식이 진행되는 신전 옆의 작은 기도실로 이동했다. 스테인드글라스와 여신상, 작은 책걸상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심각한 얼굴을 한 키리에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타니엘은, 예의 말갛고 순진한 눈을 깜빡깜빡하더니 순하게 말했다.

[하고 싶어졌어.]

“네?”

[하고 싶어졌어.]

“……네?”

[하자.]

“네? 잠깐…….”

나타니엘이 바로 키리에에게 성큼 다가왔다. 그는 가뿐하게 키리에와 깍지를 낀 뒤, 그녀의 입술에 지분거리듯 키스했다. 숫제 소년 같은 얼굴로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나타니엘!”

키리에가 낮게 윽박질렀으나 소용없었다.

[나는 나타니엘이고, 너는 키리에고, 가끔은 이런 것도 재밌겠지.]

나타니엘이 노래하듯 말하며 키리에의 허리를 돌렸다. 키리에는 팽이처럼 돌아 순식간에 그를 등지게 되었다.

[아프진 않을 거야. 이미 알고 있겠지만.]

“장례식이에요!”

[내 장례식이 아니라서.]

키리에가 어이없어하는 사이 나타니엘의 손이 드레스를 들추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조금 조급하게 키리에의 허벅지를 쓸어올렸다.

[책에서 이르길 요즘 식은 약 한 시간 정도 치른다더구나. 조금 짧으니 앞부분은 임의로 생략하기로 하지.]

“누구 맘대로!”

[신혼이라 몹시 신난 남편 마음대로.]

“미안하지만 우린 신혼은 진작, 흣!”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빠르게 나타니엘의 손이 옷깃 사이로 파고들었다. 장례식이라 단순한 옷을 입고 온 것이 컸다.

순식간에 가슴이 드러났다. 마디가 도드라진 손이 가슴을 강하게 주무르자 키리에의 다리가 휘청였다. 다른 손은 이미 비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키리에가 뭔가를 더 외치기도 전에 그는 그녀와 혀를 얽었다.

“음, 응…….”

뒤에서 안긴 자세는 처음이었다. 조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키스도, 낯선 각도로 다가오자 전과 달리 강한 자극을 주었다.

투명하고 묽은 액이 순식간에 속옷에 배어 나왔다. 잠깐 쓰다듬어진 것으로 젖어 버린 몸에 키리에는 당황해 굳어 버렸다.

이게 말이 돼?

그녀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들을 의지가 없는 나타니엘이 키리에를 번쩍 들어 여신상 앞에 가져다 놓았다.

[잡아.]

“네?”

검은 드레스가 위로 휙 하고 펄럭였다. 뒤로 돌아보려던 키리에의 몸이 중심을 잃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코앞의 여신상을 붙잡았다. 그 바람에 망사가 달린 모자가 비틀어지며 얼굴을 반쯤 가렸다. 속옷이 끌어 내려진 건 거의 동시였다.

“나타니엘! 정말 여긴…… 아흑!”

키리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팔뚝만 한 기둥이 마찰이나 고통 하나 없이 그녀의 몸을 갈랐다.

“읏! 아……!”

육중한 충격이 다리 사이를 강타했다. 키리에가 놀라 기침할 만큼 빠르고 거셌다.

문제는 놀라기만 했을 뿐, 순식간에 쾌락이 찾아들었다는 점이다.

나타니엘과의 관계는 고통이랄 게 없다. 있는 것은 쾌감뿐. 절정의 자리를 찾는 움직임은 너무나 능숙했고, 그 능숙함은 분명 태생적인 것이었다.

그러니까 일단 한번 시작하고 나면, 절대 ‘싫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 그게 나타니엘의 가장 무시무시한 점이었다.

“아, 흐응!”

절로 다리가 벌어지고 몸이 자세를 잡았다. 키리에가 흰 대리석으로 만든 여신상을 매달리다시피 붙잡았다.

“잠, 흑……, 깐, 자, 장례식인데, 아!”

[그러니 조용히 해야지.]

“제발……, 제발, 그, 아흑! 왜, 여기서!”

[그래. 이런 데서 전설경과 호국경이 흘레붙고 있다는 걸 들키기 싫으면 조금만 참아 보렴. 네 목소리는 지나치게 야해서 더 잘 들리거든.]

“아! 아! 아윽!”

벽 너머에서 혈육의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귓가에 들리는 송가가 더욱 배덕감을 자극했다. 그녀는 여신상에게서 눈을 감고 교성을 내질렀다.

“흐읏……, 윽, 아……!”

나타니엘의 예민한 청력에 벽 너머의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소리가 잡혔다. 그는 키리에의 얼굴을 붙잡고, 입에 엄지를 물려 주었다. 키리에가 당장 그것을 깨물었다.

[핥지는 말고……. 정말 제멋대로 하고 싶어지니까.]

나타니엘이 중얼거렸지만 제대로 들릴 리 없었다. 키리에가 반사적으로 입 안의 물건을 핥고 깨물었다. 나타니엘이 약하게 실소했다.

뒤에서 쳐올리는 힘이 더 거세졌다. 그때마다 벌어진 앞섶 사이로 가슴이 덜렁거렸다. 나타니엘의 손이 골반을 꾹 누르고 있는 탓에 그의 물건은 아주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키리에는 울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눈이 젖어 들었다.

“하, 으읏!”

나타니엘의 손가락을 깨무는 치아가 더 아팠다.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고, 질구에서 나는 철퍽철퍽 소리가 기도실을 울렸다.

나타니엘이 연신 뒤에서 올려치는 탓에 가슴이 점점 여신상과 붙었다. 예민한 유두가 대리석에 쓸릴 때마다 자극에 몸이 달았다.

입에 물린 손가락 때문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고, 그 탓에 도리어 타액이 턱으로 줄줄 흘렀다. 나타니엘의 손가락은 그런 키리에의 입을 헤집듯이 어지르며 더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키리에의 입에서는 신음과 함께 컥컥 소리가 났다.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광채여, 천상 낙원의 딸들이여. 모든 존재는 자연의 품속에서 환희를 마신다…….”

벽 너머에서 송가가 울렸다. 나타니엘은 성기를 느슨하게 빼더니, 아예 박자에 맞춰서 박아 넣기 시작했다.

“하! 흣! 아, 제, 발, 그만……!”

[식이 끝나려면 아직 한참이야.]

잡힌 엉덩이가 좀 더 당겨졌다. 내부에 꽉 들이찬 물건은 자궁구에 닿고도 모자라 크기를 늘려 갔다. 아이 주먹 정도는 들어갈 정도로 벌어진 틈새에서 연이어 거품이 흘렀다.

“아읏……!”

그녀에게 성기를 내리꽂는 힘이 어찌나 센지 키리에가 붙잡고 있는 여신상이 덜컹거렸다. 나타니엘은 재밌다는 듯이 속삭였다.

[여신님이 보고 계시는구나.]

수치심이 목 끝까지 차올라 신음이 되었다.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애액을 흘리며 짐승 같은 헐떡거림을 토하는 것이 전부였다.

쾌락으로 사람이 미칠 수도 있을까. 땀과 액에 젖은 허벅지가 경련하는데도 쾌감은 무뎌지지 않고 계속해서 한계 이상으로 높아졌다.

이제 장소도 상황도 더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녀의 가장 예민한 곳으로 정확하게 찔러 들어오는 자극이 온 정신을 무방비하게 만들었다.

“흐, 읍…….”

모자가 내려와 시야를 가렸지만 고칠 기력조차 없었다. 키리에는 그녀의 골반을 쥔 사내에게 꽂힌 채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엉덩이가 부딪힐 때마다 물이 과즙처럼 흘러내렸다.

몸을 올려치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마침내 나타니엘이 키리에의 입에서 손을 빼고 양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에 잡힌 유두의 모양이 일그러졌다.

통증과 쾌감이 교차하는 아찔한 감각에 키리에의 척추가 빳빳이 섰다. 동시에 크고 강한 삽입이 있었다.

절정이었다.

“하윽……!”

[후…….]

키리에가 공기 섞인 비명을 질렀고, 나타니엘은 억눌린 한숨을 쉬었다. 뭉클뭉클한 것들이 키리에의 몸속에 뿌려졌다. 하지만 키리에가 새하얗게 물든 머리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은근하게 비벼지는 음부의 마찰뿐이었다.

머지않아 파정이 끝났다. 나타니엘이 천천히 키리에의 등에 이마를 갖다 댔다. 그는 얕은 한숨과 함께 거친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간이 없는 게 아쉬운걸.]

아닌 게 아니라 벽 너머에서 추모객들이 일어나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으로 고인의 얼굴을 보기 위함이다. 식이 끝나 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타니엘은 제 물건을 뽑아내고 흔적을 지워 내기 전, 마지막으로 눈앞의 광경을 눈에 담았다.

귀 끝이 붉은 키리에가 다리를 바들바들 떨며 여신상에 매달린 채였다. 그새 조여든 구멍이 빠끔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 사이로 투명한 애액과 정액이 한데 뒤엉켜 흘러내렸다.

그는 정말로 많은 인내심을 발휘해 시선을 돌렸다.

[이리 와.]

키리에의 손을 잡고 이끌자 그녀가 순순히 끌려왔다. 울긋불긋한 얼굴에 눈은 갓 지펴진 열락으로 흐리멍덩했다.

[잠깐 쥐고 있으렴.]

키리에가 비틀거리며 드레스를 말아쥐고 섰다. 나타니엘이 키리에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손으로 다리를 쓸자, 스타킹과 허벅지에 묻었던 흔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키리에는 멍한 상태로도 약간 안심했다. 이 정도라면 티는 안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걸음을 옮긴 순간, 질 안에 가득 차 있던 끈적한 액이 뒤엉켜 허벅지로 흘러내렸다. 키리에가 힘없이 뺨을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흘러요…….”

[핥아 줄게.]

“미친 사람…….”

나타니엘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키리에의 망사 달린 모자를 고쳐 주고, 머리카락까지 단정하게 정돈해 준 뒤 물러났다.

[여전히 예쁘구나. 뺨이 좀 붉지만 운 기색이 역력하니 호국경이 남몰래 애도의 눈물을 흘렸구나 하겠지.]

놀랍게도 정말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키리에는 복잡한 심경으로 나타니엘에게 눈을 흘겼고, 나타니엘은 늘 그렇듯 태연하기만 했다.

그리고 돌아가는 마차 안이었다. 나타니엘이 천사처럼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키리에의 다리를 붙잡았다.

[핥아 주겠다고 했잖아.]

“미쳤어!”

키리에가 연신 ‘당신 미쳤군요’를 외치다가 이내 자지러졌다. 나타니엘은 그런 키리에를 쓰다듬고 입을 맞추며 착하다 착하다 달래면서도 하던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는 입술을 꾹 다물어 버렸고, 나타니엘은 그제야 아차 하고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둘 중 누구도 고인을 추모하지 않는 장례식이 그렇게 끝났다.

***

수도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떠나려는 키리에에게 루비니아는 선물을 한가득 안겨 주었다. 주로 시골에서는 구할 수 없는 고급 디저트와 수도의 최신 문물 같은 것이었다.

“라우라 양이 어찌나 나를 들들 볶던지! 그 사람은 당신이 최고급으로 온몸을 휘감고 있지 않으면 어디에 종기라도 돋는대요?”

루비니아가 짜증스럽게 외쳤지만 장난치는 기색이 다분했다.

키리에와 나타니엘은 국왕 부처의 환대 속에 조용히 궁을 떠났다.

때마침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다. 그녀는 눈을 좋아했기에, 마차가 더딘 것은 아무런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들이 탄 마차가 성문을 통과하기 위해 잠깐 멈췄을 때였다. 키리에의 눈에 좁은 골목이 보였다.

“죽여! 죽여!”

“이 개새끼!”

정확히 들리지는 않지만 그런 고함과 함께 아이 여럿이 싸우고 있었다.

고아거나 유민이다. 평소라면 별 의미 없이 흘려보냈을 상황이지만, 키리에는 놀라 턱을 괴고 있던 것을 풀었다.

“나타니엘. 저 애…….”

[마력이 있군.]

늘 키리에나 키리에가 바라보는 곳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나타니엘이 막힘 없이 말을 받았다. 그 역시 드물게 흥미로운 기색이었다.

[엘서스 출신이야. 엘서스에 다시 마력이 고이기 시작했구나.]

“왜 그런 거예요?”

[엘서스를 저당잡고 있던 마법이 해소됐으니까.]

그가 빠르고 쉽게 답을 내놓고선 팔짱을 꼈다.

[그렇다고는 해도 드문 일이구나. 보통은 마력의 해소 이전에 태어난 인간에게 마력이 돌아가지는 않는데.]

인간이 아닌 자의 평은 그게 끝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싸움에서 흥미를 잃고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키리에만이 눈밭에서의 싸움을 신기한 듯이 구경했다.

덩치 큰 갈색 머리 아이와 그 패거리가 우세했다. 검은 머리의 몸집이 작은 소년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다신 얼씬도 하지 말라고!”

덩치 큰 아이가 그렇게 외치고서 뒤를 돌았다.

작은 애가 졌구나.

싸움의 향방이 마무리되면서 키리에의 흥미도 꺼지려 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좀 재밌는 일이 일어났다. 검은 머리 소년이 돌로 덩치 큰 아이의 뒷목을 내려찍은 것이다. 머리도 등도 아닌 목을. 다분히 즉살의 의도가 담겨 있는 행동이었다.

“아하하.”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웃었고, 동시에 육감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아. 저 아이다.

“마차 멈춰.”

키리에가 그렇게 말하며 마차 벽을 두드렸다. 움직이려던 마차가 바로 자리를 잡았다.

키리에의 고개가 나타니엘에게 향했다.

“나타니엘.”

그녀의 남편, 전설경, 요즘은 조금 신사적이지 못한 종말은 가만히 키리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괜찮을까요?”

키리에가 진중한 눈으로 나타니엘을 응시했다.

나타니엘은 상대가 작고 여리다고, 귀엽고 앙증맞다고, 오래 보고 지냈다고 정을 붙이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다. 한낱 시간 따위는 그를 복종시킬 수 없다.

나타니엘이 무릎 위에 깍지 손을 얹은 채 턱을 당겼다.

[후회하지 않겠니?]

“내가요?”

[마법 중에서 네 육신을 이용해 호문쿨루스를 만드는 방법도 있어. 네가 그걸 원한다면, 필요한 재료는 내가 가져다줄 수도 있지.]

“아주 수상쩍은 재료가 필요할 것 같이 들리는데요.”

나타니엘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 봐야 남의 영혼이고 남의 육신이지.]

고색창연한 빛깔의 눈이 몹시도 어른스럽고 냉정한 모양새로 휘어졌다. 패도만 걸은 사람이란 이렇게나 자비를 모른다.

키리에가 나타니엘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그런 거 필요 없어요. 그리고 제 분신이 필요해서 아이가 갖고 싶은 것도 아니고요.”

[그럼.]

“음.”

키리에가 입꼬리를 당겼다. 고개를 돌리자 소년은 여전히 싸우고 있었다. 키리에는 그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냥 가끔은 남이랑 당신 얘기를 하고 싶더라고요. 내 친구들이나 수도의 사람들은 당신을 무서워하니까……. 좀 더 친근하게 당신 얘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검은 머리 소년이 무어라 외치며 패거리의 다른 아이에게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소년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내 남편은 내가 깨기 전에 침대 옆에 아침 풀꽃을 놓아 주었다든가, 내가 좋아하는 남자는 향수도 안 쓰는데 항상 상쾌한 향기가 난다든가…….”

[내 숙녀께서는 이야기 취향이 독특하시기도 하지.]

“내 남자는 여전히 나를 숙녀라고 부른다든가.”

키리에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가 다시 나타니엘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런 거 하고 싶지 않나요?”

[전혀.]

“번드랑은 나에 대해 이야기했으면서. 그거랑 다르지 않은데요.”

[그땐 내가 죽기 전이었지.]

“미래에는 다를까요. 우리는 늘 타인과 기억을 나누고 싶어 해요.”

부드러운 말에 나타니엘이 침묵했다. 내리는 눈처럼 조용하고 포근한 시선이 나타니엘을 감싸 안았다.

나타니엘이 입을 열었다. 키리에는 나타니엘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대답을 알았다.

[뜻대로 해.]

***

소년은 벽에 기대어 앉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품에는 가까스로 지켜낸 듯한 빵 하나가 안겨 있었다.

“안녕.”

눈을 밟으며 다가간 키리에가 가볍게 인사했다.

그녀는 말하고 나서 문득, 이것이 나타니엘의 첫인사였다는 점을 기억해 냈다. 부부는 닮는 모양이지. 그녀가 실소했다.

소년은 뜻밖의 인사에 고개를 돌렸다. 경계심 가득한 파란 눈이 키리에를 위아래로 살폈다. 작은 고양이 같았다.

엉거주춤 자세를 취하는 소년을 보고 키리에는 살풋 미소 지었다.

“도망가지 마. 네게 좋은 제안일 수도 있어.”

“…….”

“내 얘기 한번 들어 볼래?”

가볍게 말한 키리에가 직후 눈을 또르르 굴렸다.

“아니지. 눈높이를 맞춰야 하는 거던가?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아.”

그녀는 고개가 아플 정도로 위를 바라보아야 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앙칼진 눈매의 소년이 약간 인상을 썼다.

“……왜 그러는데요?”

소년은 고급인 게 분명한 상아색 로브에 더러운 눈과 흙이 묻는 것이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꼬마야. 우리 집에는 조금 특이한 사람이 있어. 나 포함 둘.”

“…….”

“좀 오래 살고, 좀 강하고, 좀 특이하지. 하지만 다정한 집사가 있고, 거대하고 하품을 잘하는 고양이도 한 마리 있어.”

소년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키리에는 약간 머쓱해졌다. 난데없는 가구원 소개가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다음 말을 위해 먼저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집인데……, 혹시 우리 집에 올 생각 있니?”

“……뭐라고요?”

소년의 대답은 늦게 나왔다. 그렇지. 누구라도 반문 한 번 정도는 할 만한 이야기다.

키리에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널 우리 집에 들이고 싶어. 네 부모는 되어 줄 수 없지만, 후견인은 되어 줄 수 있어.”

“……후견인?”

“후견인. 부모가 되어 줄 수 없는 건, 내게 부모 자격이 없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후견인이야. 물론 이게 네게 아주 오만한 제안으로 들릴지도 몰라. 너는 후견인 같은 건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키리에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하지만 난 첫눈에 네가 마음에 들었고, 네가 우리 집에 와 줬으면 좋겠어. 적어도 길에서의 생활보다는 나을 거야.”

소년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키리에의 위아래를 살폈다.

“싸움을 잘해서요?”

키리에가 살짝 웃었다.

“인상적이긴 했지만, 그 때문은 아니야. 이유는 딱히 없어. 그러니까 넌 우리 집에 오더라도 그 이유를 사수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소년이 멈칫하더니,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눈으로 키리에를 보았다. 키리에는 쓴웃음을 삼켰다. 동정이 맞더라도 동정으로 보이고 싶진 않았다.

“한 번만 물을게. 그 이상은 오지랖이니까.”

“…….”

“나랑 가겠니?”

이지러진 달처럼 파란 눈이 키리에를 응시했다. 맑았다. 마차 안에 있을 누군가의 눈동자처럼.

소년이 느슨하게 고개를 숙였다.

키리에가 역시 안 되나, 같은 생각을 할 찰나, 소년은 홱 머리를 들었다. 부릅뜬 눈이 마치 파란 불꽃 같았다.

“조건이 있어요.”

“말해 봐.”

“날 데려갔는데 내가 필요 없어지면…… 말해요. 군손님 취급받긴 싫으니까.”

키리에는 약간 놀랐으나, 부드럽게 답했다.

“그건 어렵겠는걸.”

아이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쳤다. 키리에가 고개를 저었다.

“필요가 있어서 널 데리고 가는 건 아니거든. 우리 집은 일손도 충분하고, 아이에게 맡길 일은 없어.”

“…….”

“아니면, 글쎄…….”

키리에가 입을 가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나중에 내 남편의 말동무나 해 주렴.”

“……남편이요?”

“응. 잘생긴 남자 있어. 보고 까무러치지는 말고.”

소년이 미친 여자인가, 하고 생각하는 게 보였다. 키리에가 소리 내어 웃었다.

“나한테 필요는 그런 것 정도인데, 그걸로는 안 되니?”

소년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좌우로 굴렸다. 키리에는 그가 빨리 결정해 주기를 바랐다. 빨갛게 언 손발이 영 신경 쓰였다.

다행히 남의 목덜미를 돌로 찍을 생각을 한 사람답게 소년의 결정은 길지 않았다.

“갈래요.”

소년의 눈이 결연하게 빛났다. 정말 아름다운 파란색 눈이었다.

키리에가 씩 웃었다.

“좋아.”

그녀가 왼손 손가락을 튕겼다. 다이아몬드 반지가 빛을 발하면서, 소년의 발치에 술식이 펼쳐졌다.

소년은 순식간에 깨끗하게 씻겨, 복슬복슬한 양털 외투에 둘둘 말렸다. 외투는 어찌나 두꺼운지 빼빼 마른 소년의 실루엣을 둥근 공처럼 만들었다.

“아……. 아?”

소년이 흠칫 놀라 자기 모습을 살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키리에를 올려다보았다.

“마법사……?”

“맞아. 난 마법사야. 이상한 사람 1호지. 2호는 검사야. 그리고 혹시 그 사람이 지팡이를 이상하게 들기 시작하면 나한테 도망 오렴.”

쾌활하게 답한 키리에가 손을 내밀었다.

“갈까, 친구?”

소년의 경계심이 눈매에 드러났다. 하지만 이내 떨리는 작은 손이 키리에의 손을 맞잡았다.

***

한 사람이 내리고 두 사람이 탄 마차가 출발했다.

마차에 처음 올라탄 소년은 나타니엘을 보고 눈을 비볐으나, 미리 언질 준 덕인지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안녕하세요.”

예의도 발랐다.

소년은 주변 눈치를 보다가, 모피 안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작고 하얀 털짐승 같았다.

“추웠나 봐요.”

키리에가 소년의 머리를 끌어와 무릎에 눕혔다. 얼핏 소녀로 보일 정도로 긴 머리카락은 영양실조로 거칠었다. 하지만 이목구비는 단정하고 턱은 뾰족하다. 피부는 희고, 눈꼬리가 고양이처럼 올라간 것이 제법 어여뻤다.

“당신이랑 좀 닮은 거 같아요.”

나타니엘이 작게 실소를 흘렸다.

[넌…….]

“농담에 소질이 있죠.”

[그래.]

“이 아이도 농담을 잘하게 될까요? 그러면 좋겠는데.”

나타니엘은 창틀에 팔을 기댄 채 조곤조곤 말하는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키리에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나중에 이 아이가 커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보고, 그 자식들이 당신과 함께 내 이야기를 해 주면 좋겠네요.”

나타니엘은 그런 키리에의 속내를 짐작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먼 미래의 일이었다. 키리에 역시 겨울과 바다를 닮은 남자를 바라보며 그저 다정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그녀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큰일 났네요. 사실 나 아이랑은 별로 마주친 일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요.”

[빨리도 걱정하는구나.]

“데비가 아이 키우는 법을 좀 알아야 할 텐데…….”

내리는 눈이 두 사람의 목소리를 덮었다. 마차가 흰 길을 가로질렀고, 키리에와 나타니엘은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곳으로 향했다.

사계가 무한히 반복되고 체스 말 두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그 아름다운 저택으로.

[내게 복종하세요 외전(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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