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 (27/33)

내게 복종하세요

LB 공금

#1.

절벽 위의 저택은 일대에서 이름이 자자했다. 먼발치에서만 봐도 느껴지는 호화로움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보다는 부근의 공기마저 잠재우는 듯한 고요한 분위기가 컸다.

간혹 저택에 물건을 납품하러 들른 외부인은 저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였다. 귀뚜라미 소리도, 새 소리도 없는 저택에서는 항상 어디에선가 나직한 음악이 흘렀다. 인기척은 없지만 구석구석이 아름답고 깨끗했으며, 동시에 엄숙했다.

봄에는 자카란다가, 여름에는 수국이, 가을에는 단풍이, 겨울에는 흰 눈이 저택을 장식했다. 사계를 무한히 반복하는 유리 온실 같은 곳이었다.

저택의 주인도 꼭 그들의 집을 닮았다. 묘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남녀였다. 부부라기엔 달짝지근하고, 연인이라기엔 담백한 그들은 종종 아랫마을에 내려와 시장을 둘러보곤 했다.

그게 전설경과 호국경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몰랐지만, 누구도 그에 대해 함부로 떠들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이 조용히 살기를 원하고 있고, 그걸 들어주는 게 그들에게 이로우리란 것을.

그런 조용한 겨울의 중심에, 나타니엘과 키리에는 옷차림을 가볍게 하고 눈 내린 정원으로 나섰다. 두 사람은 벌거벗은 포플러 나무 밑에 앉아 차를 마셨다.

그때 별안간 저택으로 올라오는 마차 소리가 울렸다. 키리에의 잔에 차를 따르고 있던 나타니엘이 마뜩잖은 기색으로 차를 따르던 것을 멈췄다.

[시끄러운 손님이 왔구나.]

“누굴까요?”

[내 벗일 리는 없으니 네 벗이겠지.]

응당 그러했다. 얼추 보아도 고급스러운 마차의 문에 달린 문양은 배의 타륜 모양이었다. 포트듀케인의 문장이다.

곧 사슴 가죽으로 만든 부츠에 헌팅 캡을 쓴 라우라가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키리에가 있는 정원 쪽을 보며 모자를 벗어 흔들고는, 데비의 안내를 받아 저택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일까요? 편지를 주고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좋은 이야기는 아니겠지.]

“어떻게 알아요?”

키리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타니엘은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지만, 정답은 맞혔다.

“뷰캐넌 공작이 죽었대.”

데비가 찻잔을 내려놓자마자 라우라가 말했다.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는 있었는데, 끝에 가선 거의 미친 사람 같았다더라. 그래도 요절할 줄은 몰랐는데.”

“그래?”

“그래? 라니, 너 수도 이야기는 정말 안 듣고 살았구나?”

“수도의 소식이 여기까지는 오지 않더라고.”

라우라가 양어깨를 으쓱하고서 찻잔을 들어 올렸다.

“뭐, 그것뿐만은 아니겠지! 네가 수도에 질려 하는 것도 이해는 해. 네가 뷰캐넌일 때 좀 힘들어했어야지.”

“오랜만에 듣는 이야기라 그런지 재밌네.”

“지나고 나면 다 재밌지.”

라우라가 능글맞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녀는 시중을 위해 멀리서 대기 중인 데비를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데비도 많이 늙었네. 나 어릴 적에는 근사한 아저씨였는데.”

“지금도 근사해. 일도 잘해 주고.”

키리에가 나긋하게 대답하며 찻잔을 들었다.

라우라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씩 웃었다.

“우린 어색해질 일 없겠지?”

“채무 관계로 엮이지만 않는다면?”

“그럼 영영 그럴 일 없겠네!”

라우라가 까르르 웃음소리를 늘어놓았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날이 네 결혼식이었지?”

“그랬지…….”

키리에가 떫은 표정을 지었다.

몇 개월 전, 키리에와 나타니엘은 정식으로 식을 올렸다. 키리에는 질색했으나 나타니엘의 고집이 컸다.

일주일 동안 성대하게 식을 치르고 일 년 동안 대륙 전역을 여행하자는 미친 계획을 거절했을 때, 나타니엘은 몹시 실망한 눈치였다. 그에 못 이겨 소박하게 식을 치르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게 벌써 몇 달이나 지난 일이었다. 키리에가 말없이 찻물을 마셨다. 라우라가 놀리듯 실쭉 웃었다.

“난 전설경이 결혼식 같은 걸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 그 밖에도 이상한 거 이거저거 했다며?”

“많이 했지.”

말에 한숨이 섞여 나왔다.

미신을 믿는 사람은 아닐 텐데, 이후로도 나타니엘은 꼭 어디선가 영원한 맹세 어쩌고 하는 서약들을 키리에 앞에 들이밀곤 했다.

그리고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나타니엘은 작은 일을 크게 벌리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예컨대 결혼식 날 하얀 비둘기를 보면 영원히 행복해진다는 귀여운 수준의 미신이, 나타니엘에게 다다르면 삼백 마리의 화이트 토파즈 비둘기가 되는 식이다.

공식적으로 나타니엘의 행동을 제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 키리에는 치를 떨며 삼백 개의 화이트 토파즈를 해저에 묻어 버렸다. 안 그래도 그가 들숨에 한 번, 날숨에 여덟 번 뿌리고 다니는 보석들 때문에 화폐 가치 폭락이 걱정되던 참이었다.

“지금은 좀 어때? 내 얼굴은 꼴 보기 싫다고 위에 올라가 있는 거야?”

“그런 건 아니야. 자기가 끼면 내가 너랑 편하게 대화하지 못할까 봐 자리를 피해 준 거야.”

“사람 됐네, 사람 됐어!”

라우라의 반응에 키리에의 입이 방싯했다. 외국에 몇 번 나갔다 오더니 라우라는 그새 좀 더 괄괄하고 능청스러워졌다.

“그런데 그거 알려 주러 온 거야? 내 오빠가 죽었다고?”

“겸사겸사. 엘서스에 볼일이 있거든.”

“또 외국에 나가나 보네.”

“응! 대륙 최북단에 있는 제국이랑 거래를 텄어. 폐쇄적인 나라라 고생 좀 했지. 그런데 갑자기 책임자를 만나야겠다길래, 어중간한 직급이 가면 시간만 버릴 것 같아서 내가 가기로 했어!”

“어머.”

“아무튼, 갈 거야? 장례식 말이야. 공작이 후계자 없이 죽어서 뷰캐넌 공작가가 누구에게로 넘어가느냐가 지금 초미의 관심사인데.”

“글쎄, 어쩔까.”

“하고 싶은 대로 해. 가게 되면 마리아한테 안부 전해 줘! 그리고 우리 왕비 전하께도 한번 들러 주고.”

라우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녀는 연둣빛 눈을 빛내며 씩 웃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에 대한 위로는 안 해 줘도 되지?”

키리에는 그만 웃어 버렸다.

***

라우라를 배웅한 키리에가 서재로 올라갔다. 나타니엘은 늘 앉는 곳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흰 윙팁 칼라 셔츠에 볼로 타이, 장식 없는 구두까지 그린 듯 점잖고 우아한 모습이었다. 키리에는 조용히 그 그림에 끼어들었다.

“책을 정말 많이 읽네요.”

나타니엘은 눈 하나 깜짝 않았다.

[인간들의 생활 양식을 익히는 가장 편리한 방법이지.]

“흐응.”

지식이나 지혜가 필요 없어 보일 정도로 훌륭한 외양을 가져 놓고선, 그는 생각보다 책과 친숙하다.

옆에 앉아 멍하니 그가 책을 다 읽기를 기다리던 키리에는, 어느 순간부터 더는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하하.”

그녀가 작게 웃었다. 귀를 간질이는 듯한 웃음소리에 나타니엘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괘씸하다는 듯이 눈을 흘기고는, 슬쩍 키리에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키리에가 움찔하며 몸을 뒤로 뺐다. 그러나 나타니엘이 아이 어르듯 다정하게 눈을 내리깔고서, 집요하게 키리에의 입술을 쫓았다.

“……정말.”

키리에가 눈을 감았다.

입술이 살짝 맞부딪혔다 떨어졌다.

키리에가 감았던 눈을 떴다. 내리깐 속눈썹 아래 파랗고 반짝이는 눈이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머쓱하게 귀를 매만졌다.

“그럼 내 종말께서는 여행이 좀 귀찮으실지?”

나타니엘이 눈을 느리게 한 번 깜빡였다. 눈동자에 어려 있던 희미한 감정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밀월여행에서 굴뚝 청소부를 보면 결혼 생활이 행복하다고 하는구나.]

“돈으로 행복이라도 사시려고요?”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니. 미신으로 재미를 좀 살 뿐이야.]

“보통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다면, 그건 돈이 모자라서라고들 하던데…….”

[내 키리에 양은 여전히 농담을 잘하시는군.]

한계를 모르는 부요를 약속받은 자의 말이다. 키리에가 픽 웃었다.

“애꿎은 굴뚝 청소부 괴롭히지 말고 그냥 가요. 그레이가 미쳐서 죽었대요.”

키리에가 그렇게 말하며 나타니엘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뭔가를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잠깐이지만, 그의 검은 눈동자가 세로로 죽 당겨졌다. 킬킬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타니엘은 곧 동그랗고 말간 푸른 눈을 하고서 온순히 답했다.

[유감이구나.]

키리에가 미소 지었다.

“모레쯤 출발하기로 해요.”

***

“다녀오십시오. 레쇼는 제게 맡기시고요.”

운 좋게도 키리에에겐 겨울이라고 대충 감은 털실 공처럼 북슬북슬해진 고양이 레쇼를 책임질 수 있을 만큼 유능하고 다정한 집사가 있었다.

요즘 부쩍 피로한 얼굴의 데비는 레쇼를 품에 안은 채 그들을 배웅해 주었다.

키리에는 비둘기색 기둥 옆에 서서 손을 흔드는 데비를 뒤로한 채, 나타니엘과 저택의 언덕을 내려갔다.

“데비가 많이 힘든가 봐요.”

[나이가 있으니.]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농담처럼 들리는 거 알죠?”

[인간의 입장을 헤아릴 뿐이야.]

키리에가 웃으며 머리에 로브를 눌러 썼다.

“사람 됐네, 사람 됐어.”

나타니엘이 영 못마땅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네 친구는 꼭 품위 없는 말을 알려 주고 가는구나.]

며칠을 걸어, 때로는 날아 곧 테바에 도착했다. 작은 도시였다. 나타니엘은 테바에서 가장 번화했을 교차로의 허름함을 보고는 몹시도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지금이라도 다른 곳을 가자꾸나. 성이라도 지어 줄 테니.]

“얼음 성은 차가워서 싫어요.”

여관과 술집을 겸하고 있는 가게 앞에 서서 키리에가 상기된 뺨으로 속닥거렸다.

“게다가 저 이런 거 해 보고 싶었는걸요. 술, 펍, 맥주, 용병…….”

[들어가지.]

키리에가 웃었다. 그녀의 ‘하고 싶다’는 거의 만능 단어였다. 키리에가 먼저 가게에 들어갔다.

“어서 옵쇼!”

주인장의 경쾌한 인사를 듣고 나타니엘 역시 가게로 들어왔다.

낮인데도 가게에는 사람이 몇 있었다. 나타니엘은 주변을 살피더니 묘한 찬웃음을 지었다. 그가 뭔가를 매우 한심하다고 생각할 때 나오는 미소였다.

키리에가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다 이런 거잖아요.”

[그래. 다 더럽고 냄새나지.]

늘 남의 귀를 타격하다시피 하는 목소리가 또렷하게 가게 안에 울렸다. 사람들 몇이 움찔했다.

그들이 심술궂은 눈빛을 보내기 시작하자 키리에가 재빨리 나타니엘을 가게 주인 앞으로 이끌었다.

“맥주 두…….”

[한 잔.]

“두 잔이요.”

주인은 글라스를 닦던 것을 멈추고 잔을 꺼내기 위해 몸을 돌렸다. 키리에가 남몰래 나타니엘에게 속닥거렸다.

“사람 수만큼 시키는 게 예의랬어요.”

그리 말하는 뺨이 발갰다. 이러나저러나 해도 키리에의 근본은 좋은 집 아가씨. 약간 긴장한 듯 앙다문 입술을 내려다본 나타니엘이 잠자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지팡이를 꺼냈다.

“그건 왜 꺼내요?”

[혹시나 해서.]

“나도 이제 마법 쓸 줄 알아요. 내 몸 하나 정도는 건사할 수 있는데요.”

[아무렴. 기사도의 발로라고 생각하렴.]

사근사근하지만 태도가 단호했다. 이쪽을 불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취객들을 흘끗거린 키리에가 한숨을 쉬었다.

“조용히 묵고 가요, 우리.”

나타니엘은 능청스럽게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때마침 나온 맥주는 시원한 맹탕이었다.

“음…….”

낯선 술맛에 키리에가 인상을 썼다. 잔에는 손도 대지 않은 나타니엘이 옆에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소감은?]

심술궂은 질문이다. 키리에가 눈을 흘겼다.

“참 사람이 못됐기도 하지.”

[하지만 잘생겼잖니.]

“저한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요.”

[그러니 앞으로 중요하게 여겨달라고 이렇게 아양 부리는 것 아니겠어.]

유들유들한 말에 키리에가 웃고야 말았다. 아닌 게 아니라 나타니엘은 고개를 조금 숙이며 그 빼어난 얼굴이 더 잘 보이도록 쌕 웃기까지 했다.

“그런 것 치곤…….”

키리에가 농담을 받아치기 위해 입을 연 찰나였다. 낯선 기운 하나가 키리에의 신경에 잡혔다.

키리에의 고개가 들렸다. 나타니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주 멀리에 있는 듯 희미하고 이상한 기운이었다. 주변에 퍼져 있는 공기가 미세하게 요동쳤다.

[아.]

나타니엘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타니엘의 ‘아’는 대체로 ‘그렇단 말이지’의 의미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뭐예요, 이거?”

[드문 일이 발생했구나.]

나타니엘은 키리에가 느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하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여기 있으렴. 살펴보러 다녀와야겠어.]

“살펴보러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이 대륙의 일은 아니구나.]

“여기 일이 아닌데도 당신이 굳이 살펴보러 갈 정도의 일인가요?”

[그걸 확인하러 가는 거지.]

나타니엘이 자신을 두고 자리를 비울 정도의 일이라면 꽤 심각한 문제 아닌가?

키리에가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타니엘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검은 안개가 되어 순식간에 사라졌다.

금방 다녀올 것 같던 나타니엘이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키리에는 바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홀짝였다. 목덜미가 슬슬 붉어지고 있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한 잔만 더 시킬까.’

키리에가 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가게 주인을 부르려던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키리에의 모자를 뒤에서 확 잡아당겼다.

“아!”

모자가 벗겨진 것으로 모자라 머리카락까지 당겨진 키리에가 신음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불량배 몇이 낄낄대다가 키리에의 얼굴을 보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서로 음흉한 시선을 교환하며 시시덕거리기 시작했다.

“이야아, 이거 엄청 예쁘게 생겼잖아!”

“기대도 안 했는데 이게 웬 월척이야?”

키리에가 황당함에 헛웃음 쳤다.

‘어떻게 이렇게 그린 듯한 시비가.’

본격적인 악한이라기보다 어느 마을에나 있는 질 나쁜 왈패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한들 봐줄 이유는 없지만.

키리에가 문을 흘끗거렸다. 다행히 걸어 다니는 종말께서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술기운에 나른하게 한숨을 쉬었다.

“볼일이라도?”

“볼일? 원래는 없었는데 이제 생겼지!”

남자 셋이 포위하듯 키리에의 양옆에 앉았다. 주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나서지 못했다. 키리에는 남자들이 시시껄렁한 말을 지껄이는 것을 무시하고서 맥주잔 주변에 동그랗게 고인 물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키리에의 귀에 다른 손님들이 속닥거리는 것이 들렸다.

“저놈들 또 저러네. 쯧…….”

“저번에 푸줏간 집 딸내미한테 해코지한 것도…….”

“누구야! 조용히 안 해?”

남자 중 한 명이 주변을 윽박질렀다. 가게 안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상습범이구나.’

키리에가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야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그래서 나랑 놀자고?”

“워, 적극적인데!”

남자 중 한 명이 낄낄댔다.

“언니, 생긴 거랑 달리…….”

“좋아, 놀아 줄게.”

키리에가 왼손 검지로 탁자 위의 물방울을 쓸었다. 물방울이 키리에의 손가락을 따라 나무로 된 바 테이블 위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검지가 둥글게 원을 그렸다. 곧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다이아몬드 반지에서 순식간에 광채가 번쩍였다.

바람이 몰아치고 키리에의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펄럭거렸다. 그녀가 시원시원하게 웃었다.

“난 역시 법에 맡기는 게 옳다고 생각하지만, 내 동거인의 기준이 즉결 심판이라서 말이야.”

“마법……!”

“그래도 그이보단 나한테 얻어맞는 게 낫겠지?”

콰콰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가게 한 면이 통째로 날아갔다. 비명이 들릴 새도 없었다. 남자들은 충격파에 끈 떨어진 목각 인형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순식간에 취기가 가셨다.

‘이 정도 마법은 아니었는데?’

키리에가 당황해 술식을 내려다보았다. 살펴보니 상징 하나가 잘못되어 있었다. 술에 취한 탓이었다.

‘죽었으면 어떻게 숨기지?’

키리에가 부랴부랴 남자들의 맥을 짚었다. 다행히 숨은 붙어 있었다. 안심하며 한숨 쉴 찰나, 그녀는 묘하게 주변이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새 나타니엘이 뻥 뚫린 가게 입구에 서 있었다. 심드렁한 얼굴이지만 손에는 지팡이가 검 쥐듯 들려 있었다. 나타니엘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위협적인 자세다.

“아……. 왔어요?”

키리에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짙은 색의 예복을 입은 우아한 남자는 유리구슬 같은 눈으로 바닥의 불한당들을 훑었다. 벌레를 일일이 경멸하는 사람은 없으므로, 그 시선은 과히 무기질적이었다.

판단을 마친 그가 별다른 질문 없이 타성적인 미소를 지었다.

[가게가 시원해졌네.]

“……겨울이라 환기가 좀 필요한 것 같아서요.”

키리에가 과장되게 털털한 척하며 일어났다. 그녀는 능청스럽게 나타니엘이 남기고 간 맥주잔을 내밀었다.

“같이 한잔해요.”

나타니엘이 여전히 냉기가 가시지 않은 분위기로 킥킥거렸다.

[자비로우신 호국경 각하. 무뢰배를 살려도 주시고.]

“그럼요. 누구 짝인데.”

키리에가 부러 순진하게 눈을 부릅떴다.

“당신이 좀 자비롭지 못하니 부인인 내가 대신 자비로워도 되는 거 아니겠어요.”

나타니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희미하게 눈썹을 찌푸린 채 미소를 지었다.

[참…… 영리한 키리에 뷰캐넌.]

키리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타니엘은 부부, 부인, 여보, 남편 같은 호칭에 약하다. 그리고 키리에가 그걸 안다는 것을 나타니엘도 알았다.

[도리가 없구나.]

그래도 그는 봐줄 것이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므로.

나타니엘은 곧 늘씬한 팔다리를 뻗으며 다가와 맥주잔을 받았다. 잔을 살짝 입에 댄 나타니엘이 입 안에 맴도는 저렴한 맛에 짜증 난다는 듯이 웃었다.

키리에는 그걸 보며 한바탕 웃고는, 다른 잔을 들어 건배했다.

“그래도 잘했죠?”

[아무렴.]

두 사람의 잔이 부딪쳤다.

그리고 한 모금을 마신 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잔을 내려놓았다.

“진짜 맛없네요. 다른 마을로 가요.”

그들이 떠난 뒤, 마을에는 불량배 몇이 잘게 난도질당한 채 발견되었더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

장례식까지는 시간이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귀족들의 영지가 수도와 거리가 있는 만큼, 얼음 마법을 이용해 시체를 얼려 두기 때문이다.

도시를 지나며 나타니엘은 키리에의 장난기에 혀를 내둘렀다.

[노숙을 하겠다고?]

“전 강하니까요.”

이어진 나타니엘의 응시를 키리에는 경쾌한 웃음으로 받아쳤다.

“당신 깨우기 전에 조금 했었는데 생각보다 재밌었어요. 그리고 눈도 많이 쌓여서 낭만적인 풍경이기도 했고요.”

나타니엘은 눈 쌓인 허허벌판의 어디가 그렇게 재밌을지 생각해 보았다.

역시 재미없다.

흰색에 차갑다는 것을 빼면 먼지나 다를 바 없는 눈밭에서 그는 그 어떤 낭만도 찾지 못했다. 그 위에서 키리에가 덜덜 떨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내 재미랑 네 재미는 좀 다르겠지만, 뜻대로 하렴.]

“고마워요.”

활짝 웃는 키리에를 보니 아무래도 좋긴 했다. 이내 그녀는 부산스럽게 터를 잡기 시작했다.

나타니엘은 눈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그건 뭔가를 아주 창의적으로 죽일 수 있다는 점에서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여행에서 그는 이미 특수하고 창의적인 방법을 이용해 몇 명인가를 죽였다. 물론 키리에는 모르게.

그가 그렇다. 나타니엘의 다정은 그녀만을 위한 것이고, 그는 특별히 선량해진 게 아니었다. 그저 조금 덜 죽이게 되었을 뿐.

위대한 키리에는 확실히 그의 억제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거기가 둘의 암묵적인 합의점이었다.

문득 나타니엘이 깨달았다.

그래서구나. 오는 길에 몇을 죽였다는 것을 눈치챘구나. 그래서 도시로 들어가지 않는 거구나.

그를 깨달은 나타니엘의 마음이 놀랍도록 노곤해졌다. 그가 누군가를 죽이는 게 싫어서 노숙하겠다니, 그걸 또 장난기로 포장하다니. 발상이 너무 귀여워서 깨물다 못해 발목을 부러뜨리고 싶어졌다. 그리고 리본으로 묶은 다음…….

그때 노숙을 위해 땅을 찾던 키리에가 나타니엘을 돌아보았다. 나타니엘의 발밑에서 살금살금 몸집을 키우던 그림자도 삽시간에 자취를 감췄다.

“나타니엘. 당신 지금 표정이…….”

그녀의 얼굴이 흐려지고 경계심이 떠올랐다.

“아주 사악한 짓을 꾸미고 있는 표정이에요. 뭔지 몰라도 하지 말아요…….”

나타니엘은 사붓이 미소 짓기만 했다. 그리고 상상을 고이 접어 머릿속에서 치워 버렸다.

키리에는 마법으로 큰 떡갈나무 주변을 동그랗게 태우기 바빴다. 제 손으로 하고 싶다는 열의가 보여 나타니엘은 가만히 그걸 지켜보았다.

연한 보랏빛 머리카락 사이로 튀어나온 귀가 까닭 없이 귀여웠다. 만지고 싶게.

키리에의 손가락이 비면 신경 쓰이고, 때때로보다는 더 자주 옷깃 아래가 궁금했다. 여전히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나타니엘은 늘 키리에의 다음 표정이 궁금했다.

[키리에.]

“네에.”

나타니엘이 큰 돌을 어떻게 치울지에 정신이 팔린 키리에에게 다가갔다.

[키리에.]

“저 지금 바쁘니까 조금만 이따…….”

고개를 돌리던 키리에가 멈칫했다. 지척에 나타니엘의 얼굴이 있었다.

나타니엘이 나무를 짚고서 조금씩 고개를 숙였다. 키리에가 당황해 상체를 뒤로 쭉 뺐다.

“지금요?”

[안 되나?]

“아…….”

[응?]

나타니엘이 약간의 애교를 섞어, 작은 새가 쫑쫑거리듯 입술을 붙여 왔다. 키리에가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약해 보이는 것들에게 약해지고 만다.

키리에는 그의 재촉에 응해 주었다. 살짝 상기된 뺨 위로 보라색 눈이 반쯤 감겼다.

입이 벌어진 순간, 나타니엘은 삼키듯 부드럽게 키리에와 혀를 얽었다.

흣, 하고 키리에가 살짝 숨을 들이켰다. 어느새 추위는 가셔 있었다. 풀이 타는 쓴 냄새 속에서, 나타니엘은 아주 깊게 키스했다가 물러났다.

그리고 어느새 뒤로 넘어갈 듯 허리를 꺾은 키리에를 내려다보며 나른하게 웃었다.

[눈밭이 좋을까?]

“……아뇨!”

뭔진 모르지만 바로 대답이 나왔다.

나타니엘은 목울대에서 나는 낮은 소리로 웃는 듯하더니 키리에를 제대로 세워 주었다.

[비단 이불과 눈 이불은 아니라 이거지.]

키리에의 얼굴이 곧 부끄러움으로 아주 냉정하고 비장해졌다.

기실, 둘 사이엔 아직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적으로 키리에가 결혼식 날 밤 ‘손만 잡고 자자’며 회피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타니엘은 잠깐 멍한 얼굴을 했다가, 예의 신사다운 미소를 짓고서 키리에를 재워 주었다.

그는 확실히 오래 산 만큼의 여유가 있다.

그날을 떠올린 키리에가 나타니엘을 힐끔거렸다. 나타니엘은 지팡이로 큰 돌을 툭 건드리는 중이었다. 거대한 돌은 순식간에 가루가 되었다가, 그것마저 얼어붙어 바람에 날아갔다.

시선을 눈치챈 나타니엘이 나른하게 물었다.

[왜?]

“아뇨…….”

괜찮은 건가. 키리에가 생각했다.

그리고 나타니엘은 생각보다는, 어디까지나 키리에의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그는 키리에와의 모든 경험을 최대한 면밀히 맛보고 싶었다. 혀를 쓰다듬는 것도 좋지만 가까이에서 보는 상기된 얼굴 쪽이 더 좋았다.

물론 가끔 키리에가 묘하게 안달하는 듯한 얼굴을 보이면, 그 날은 당장 눈앞의 여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 그대로 씹어먹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그러지 않기 위해선 지팡이를 종일 짚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사실 나타니엘은 키리에가 미쳤냐고 묻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여전히 성격이 나빴다.

[나는 또 네 취향이 바깥인 줄 알고 그렇게 열렬한 시선을…….]

“무서운 말 하지 말아요.”

당황한 키리에가 말을 잘랐다. 그녀가 짐짓 도도하게 팔짱을 꼈다.

“그리고 그건 당신 취향이겠죠. 사람 묶어 놓던 취미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나타니엘은 터 중앙에 불을 피우며 조용히 웃었다.

[그렇긴 해.]

“아니긴 무슨……, 네?”

[그건 내 취향이지.]

“네?”

[묶는 것도 사실은 내 취향이 맞단다. 넌 가끔 좀…… 묶어 두고 싶거든.]

하지는 않겠지만.

나타니엘이 스스럼없이 대답하고는 외투를 벗어 바닥에 깔았다. 그러곤 여상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 서 있지 말고 앉으렴.]

치고 빠지기…….

키리에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자리에 앉았다.

***

다음 날부터 나타니엘은 항상 지팡이를 들기 시작했다.

이후 목적지는 올드렐름이었다. 키리에는 박사들의 안부를 궁금해했다. 두 사람은 올드렐름으로 향하는 역마차 하나를 전세 냈다.

“그러고 보니, 종말의 흔적이 올드렐름에 가장 많다고 하던데요. 이유가 있나요?”

[너보다 더 영리하게 나를 써먹었던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의 마지막 사람은 나인데요.”

나타니엘이 물끄러미 키리에를 보았다.

맑은 보라색 눈망울.

키리에는 자신이 얼마나 귀여운 말을 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눈치였다. 나타니엘이 느리게 키리에의 뺨 위에 입 맞췄다.

[그래. 그리 보면 결국 네가 그 누구보다 영리했단 뜻이지.]

올드렐름 역에는 미리 연락을 받은 포 박사가 나와 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그의 몸에 맞는 흰 점박이 모피 코트를 입고 있었다. 살진 부엉이 같은 모습이었다.

“여기까지 와 주실 줄이야! 전갈을 받고 너무 놀랐답니다! 정말 오랜만이지용?”

“그러게. 그대는 건강해 보이네.”

둘의 인사가 끝날 때쯤 나타니엘이 마차에서 내렸다. 나타니엘이 늘씬한 몸으로 미끄러지듯 우아하게 모습을 드러내자 주변의 모두가 들고 있던 물건을 떨어뜨렸다.

포 박사는 긴장한 얼굴로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아마 가문에 있었을 때 익힌 듯한 멋들어진 예법으로 나타니엘에게 인사했다.

“전설경을 뵙습니다. 살라미시 포라 합니다…….”

나타니엘이 심드렁하니 눈을 깜빡이며 포 박사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잘 다듬어진 청옥 같은 눈이 이내 느리게 키리에에게 옮겨 갔다. 답을 묻는 것이다.

키리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타니엘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래.]

거만하다 할 수 있는 대답 한마디에도 포 박사는 감격해 코를 훌쩍거렸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세 사람은 키리에도 이미 와 본 적 있는 네모난 건물로 이동했다. 나타니엘을 본 사람들이 차례로 물건을 떨어뜨리며 길을 만들었다.

전설경을 보고 비명도 못 지르고 굳은 학자들과의 인사도 마치자, 포 박사는 슬쩍 키리에의 뒤에 섰다.

“아가씨. 혹시…… 하트우드 박사님을 만나 보시겠어요?”

포 박사의 물음은 조심스러웠다. 그는 제냐와 키리에가 원만한 모녀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키리에가 고개를 젖히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녀는 제냐에 대해서 거의 잊고 있었다. 결혼식에도 초대장을 보내긴 했지만, 제냐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키리에도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까.”

포 박사가 신이 나서 손뼉을 쳤다.

“하트우드 박사님도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그럴지는 모르겠고. 나타니엘, 먼저 응접실에 가 있을래요? 사람들이 차를 대접해 줄 거예요.”

“물론! 아주 맛있는 차를 대접해 드릴 생각입니다!”

뒤에서 개구리 알처럼 모여 있는 학자들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정작 나타니엘은 심드렁했다.

[우리 호국경 각하께선 나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아쉽지도 않은가 보구나.]

“아쉬워요?”

[더할 나위 없이.]

“아주 잠깐이에요.”

[그 잠깐 못 보는 것도 싫어.]

어머어머. 학자들이 뒤에서 광대를 올리며 시선을 교환했다. 키리에가 헛기침했다.

“그런 사람이 도시를 통째로 극장처럼 만들어서 내가 도망치게…….”

[응접실이 어디지?]

키리에가 실실 웃으며 몸을 돌렸다.

학자들이 모인 1층과 달리 연구실이 모여 있는 2층은 조용했다. 2층 복도 끝에 있는 연구실 문에는, 화려하고 알아보기 어려운 필기체로 ‘하트우드’라고 쓰여 있었다.

키리에가 두꺼운 나무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방 안에는 금발의 여자가 장담배를 피우며 창가에 서 있었다.

“어머니.”

제냐가 몸을 돌렸다.

“오랜만이구나.”

담뱃대를 든 제냐 하트우드 박사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주름 덕에 원숙미가 더해진 얼굴에는 놀람도 없었다.

“네가 제 발로 날 다 찾아오고.”

“그러게요. 가는 길에 잠깐 들렀어요.”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예의를 차리는 사이였다고?”

“그것도 그러게요.”

키리에가 빙그레 웃었다. 제냐는 턱을 들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콧등에 얹혀 있던 은테 안경이 살짝 미끄러졌다.

“분위기가 많이 변했네?”

“어머니는 변하지 않으셨네요.”

제냐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빈정거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키리에의 낯은 담담했다.

“보기 좋아요.”

“비꼬는 건 아닌 것 같고.”

“왜 굳이 찾아와서 비꼬겠어요.”

제냐가 침묵했다. 그녀는 들고 있는 담뱃대를 바라보다 부리를 입에 물었다. 발음이 불분명해졌다.

“그래. 나였다면 그랬겠지만, 널 키운 건 내가 아니니까.”

“그렇죠.”

정적이 일었다.

제냐가 아름다운 녹색 눈을 내리깔았다. 불투명한 후회가 엿보였다.

“키리에.”

“네.”

“혹시 나를 원망하니?”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키리에는 부드럽게 받았다.

“그래 보이나요?”

“아니.”

“그럼 그게 맞을 거예요.”

“……이거야 원, 내 딸이 맞는지. 그 인간 딸 같지도 않아졌고 말이야.”

키리에가 어린아이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제냐가 킥킥 웃었다. 묘하게 회한이 밴 웃음이었다.

또다시 정적이 있고 난 뒤, 제냐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미안하구나.”

제냐는 난생처음 그런 말을 해 본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하, 우습네. 나도 늙은 모양이지.”

“…….”

“그냥…… 그레이와 너를 좀 더 잘 돌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더구나.”

그녀가 담뱃대 부리를 잘근거렸다.

“세자르 그치가 나를 짜증 나게 했더라도, 그걸 내 책임을 포기하는 식으로 해결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말끝이 잦아들었다. 그레이의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키리에는 말없이 제냐를 응시했다.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난 연구가 더 중요했고, 지금도 연구가 더 중요해. 하지만 그게 내 잘못을 면죄해 주진 않지.”

키리에가 온화하게 입꼬리를 당겨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며칠 묵었다 갈까 해요.”

“……그러렴.”

“건강히 지내세요.”

용서도 치죄도, 감사도 기대도 없는 안부 인사. 혈연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나 보일 수 있는 초연함이었다.

제냐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넌 정말 어른이 되었구나. 나랑은 다르게 제대로 된 어른이.”

키리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냐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도 건강하렴. 늦었지만 결혼 축하한다.”

***

나타니엘은 응접실에 있었다. 그는 다리를 꼰 채 투박한 컵에 탄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반대편에서 학자들이 관람했다. 그들 모두의 얼굴이 붉었다.

“저게 대체 가능한 미모인지…….”

“신일지도 모르지…….”

학자들의 중얼거림을 완벽하게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타니엘은 정말로 남의 시선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키리에가 들어서자 그는 바로 컵을 내려놓고 다정히 미소 지었다. 마냥 아름답기만 하던 파란 눈에 생기가 돈 것도 키리에가 돌아온 이후부터다.

[키리에. 날 이런 승냥이 떼에게 던져 놓고 말이야.]

“어느 쪽이 승냥이란 거예요?”

키리에가 픽 웃으며 나타니엘의 옆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서 포 박사가 컵을 내밀었다.

“이야기는 잘 끝내셨습니까?”

“응. 적당히. 굳이 할 이야기도 없는 사이긴 하지만.”

“그렇습니까…….”

애매하게 웃던 포 박사가 화제를 바꿨다.

“이렇게 직접 와 주실 줄은 미처 몰랐는데 말입니다. 뷰캐넌 공작의 일 때문인가 보지용?”

“소식 들었어?”

“하트우드 박사님이 계시니까요.”

“아아.”

그러고 보니 장례식에 참석하는지를 물어보지 않았다.

키리에가 컵을 들었다.

뭐, 상관없겠지.

“연구는 잘되어 가?”

“오…….”

바로 포 박사가 시무룩한 소리를 냈다.

“사실 별로 그렇진 않습니다. 시조의 분서(焚書)로 사료가 거의 없으니…….”

“내가 준 자료는 별로 도움이 안 됐나?”

“많은 도움이 됐죠! 하지만 연구 자료가 부족한 건 사실입니다……. 왕실 서고에도 자료가 많진 않았어용.”

포 박사가 시무룩하게 다리를 모아 앉았다. 포 박사 뒤쪽에서 모여 있던 학자들의 주름진 얼굴도 덩달아 시무룩해졌다.

‘원래는 레쇼 경이 면담을 해 주기로 했지…….’

하지만 레쇼는 지평선 너머로 돌아갔다. 자신에게 힘을 넘겨주고. 약한 죄책감이 들었다.

“음…….”

주변의 눈치를 보던 키리에가 슬쩍 나타니엘에게 어깨를 부딪쳤다.

“나타니엘.”

[사양하지.]

“질답 한 번만 하게 해 줄 순 없을까요?”

나타니엘은 미소를 잃거나 당황하지도 않고 우아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동정심?”

[날 웃기려는 시도였다면 성공했어.]

“내가 너무 예쁘니까 내 친구도 예뻐할 수는 없나요?”

[친구치고는 연령대가 높구나.]

키리에가 천연덕스럽게 손뼉을 짝 쳤다.

“어쩜. 놀랍네요! 내 남편도 연령대가 좀 높은 편인데. 아마 내가 연상에게 예쁨 받는 유형인가 봐요.”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다시 어깨를 부딪쳐 왔다.

“그렇죠?”

[…….]

“아닌가?”

[…….]

“안 예뻐요?”

나타니엘이 헛웃음 쳤다.

[키리에 뷰캐넌…….]

“안 돼요?”

나타니엘은 잔망스러운 일곱 살을 보는 양 키리에를 보았다. 괘씸하다는 눈빛이다. 하지만 키리에는 그가 부탁을 들어주리라 확신했다.

봐. 어이없어하는 것 같아도 입꼬리가 올라가 있잖아.

[그럼 이름을 걸어.]

“이름이요?”

[그래.]

키리에가 눈을 깜빡였다.

‘레쇼 경이 한 걸 본 적이 있긴 해.’

키리에는 어색하게 눈을 굴리다 한 자씩 느리게 말했다.

“그럼, 내 이름을 걸고, 당신이 이 사람들과 질답을 한 번 해 준다면, 당신 소원 하나를 들어줄게요. 단,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요. 남들을 해치는 건 빼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해(妨害) 같은 것이 퉁 하고 키리에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소리가 난 것도 간섭무늬가 퍼진 것도 아니지만, 느껴졌다.

생소한 감각에 키리에가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사람들은 느끼지 못한 듯했다.

“이건?”

나타니엘이 여유롭게 컵을 들었다. 미소가 어쩐지 진해져 있었다.

[드높은 곳에 있는 여신의 섭리지. 강한 힘이 있다면, 그 힘에 채울 고삐도 어딘가엔 있는 법이란다.]

“못 물러요?”

[못 물러.]

“조건 변경은?”

[못 하지.]

키리에가 덜컥 심각해졌다.

“뭐 그런 게 다 있어요?”

[그래서 신중해야 하는 거야, 키리에.]

나타니엘이 후광이 보일 정도로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키리에가 뒤늦게 불안감을 느꼈다.

“뭘 시키려고요…….”

나타니엘이 슬쩍 포 박사를 보았다. 포 박사가 눈치 빠르게 찻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작은 새들 같은 학자들은 재빨리 오늘의 저녁 메뉴를 토의하기 시작했다.

소란 속에서 나타니엘은 몸을 조금 숙이고서, 키리에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내 취향이 어떻다고?]

그야 묶는 거랑…….

삽시간에 귀 끝이 달아올랐다. 키리에가 입술을 깨문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침묵했다.

나타니엘은 고개를 비틀며 눈을 빛냈다. 해맑은 눈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미리 듣지 않는 게 좋겠지?]

“……거짓말.”

[거짓말?]

“당신은,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키리에가 얼굴을 붉히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몰아세우진 않으니까…….”

[아.]

나타니엘이 다시 멀어지며 고개를 젖혔다. 늘 주위를 맴도는 눈 내린 겨울 새벽 같은 찬 공기도 훅 물러났다.

그는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손가락 끝으로 턱을 두드렸다. 그리고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신사는 질렸어.]

키리에의 얼굴이 더 달아올랐다.

그 사이로 초탈한 얼굴의 포 박사가 엉성한 미소를 머금은 채 끼어들었다.

“제가 질문을 준비하러 가 봐도 될까용…….”

[함께 가지.]

나타니엘이 귀난 동작 없이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새빨간 얼굴에서 푸시시 열을 올리고 있는 키리에를 흘낏 넘겨본 뒤, 포 박사를 따라 방을 나섰다. 학자들 역시 훈훈하고 흐뭇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혼자 남은 키리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큰일 났다, 하는 생각이 드는 와중에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이제 나타니엘의 인내심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

올드렐름의 학자들과 전설경 나타니엘의 질답은 대강당에서 이루어졌다. 연구를 위해 지어진 도시답게 강당이 으리으리했다.

프로노이아에서 마법으로 급하게 달려온 학자들도 참여했다. 백여 명에 가까운 호호백발의 노인들이 모두 받아쓰기를 배우는 꼬마처럼 눈을 빛냈다.

[시작하지.]

강당 한가운데 놓인 긴 의자에 앉아, 나타니엘이 말했다. 그만한 주목을 받고 있으면서도 부담 한 톨 느끼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강당 구석에서 이젤을 놓고 눈을 부릅뜨는 화가 몇을 보고도 시큰둥하게 다리를 꼬았다.

키리에는 혹시 몰라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진행은 호크송 박사가 맡았다. 의외로 가장 참석하고 싶어 했을 제냐는 나오지 않았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에마여기 박사의 질문입니다. 고대시대의 마법에 대해 묻고 싶은데, 일단은 혹 그때 살아 계셨는지…….”

[나는 너희가 최초의 밀을 수확하기도 전부터 있었지. 질문이나 하렴.]

호크송 박사가 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마법이 번성했던 것으로 알려진 고대시대가 왜 끝나게 되었는지 혹 알고 계십니까?”

[그때 마법을 만든 자가 그것을 다시 회수하기로 마음먹었단다.]

“그때 마법을 만든 자가…….”

[질문은 하나씩이야.]

“알겠습니다.”

애초에 그저 시도였을 뿐인지 호크송 박사가 들고 있던 종이를 넘겼다.

“크레이그 박사의 질문입니다. 발라브리가 시대와 달리 마법사의 핏줄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하여 혹시 아시는 게 있으십니까?”

[신화의 시대가 끝나 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세상의 신비란 믿지 않는 자들이 많아지면 사라지는 법이고.]

그런 식으로, 수십 개의 질문이 흘러갔다. 나타니엘은 대부분 단답했지만, 몇몇 질문에서는 관대함을 보여 주기도 했다. 자기 질문에 무려 전설경이 대답해 주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기자 학자들은 눈물을 콸콸 흘렸다.

호크송 박사의 손에 들린 종이는 점차 마지막 장에 가까워졌다. 질답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박사가 안경을 추어올렸다.

“이제 제 질문입니다.”

[해 보렴.]

여태 능숙하고 냉정하게 사회를 맡던 호크송 박사가 아주 잠깐 호흡을 멈췄다.

“시워드 박사는 돌아올 수 없습니까?”

나타니엘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그가 풍기는 분위기가 좀 더 차갑고 오연해졌다.

[없어.]

대답은 단호했다. 그는 앞에 앉은 키리에를 보곤 덧붙였다.

[그 아이는 적어도 고통을 받고 있진 않을 거란다. 진리란 게 그렇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을 뿐이야.]

“그렇습니까.”

호크송 박사의 대답은 일견 무심했다. 하지만 안경 너머로 삼키지 못한 감정이 비쳤다 사라졌다.

“……그럼, 마지막으로 그 시워드 박사와, 제냐 하트우드 박사의 질문입니다.”

[말해 보렴.]

“역사 속에서 ‘종말’은 몇 번이고 나타났습니다. ‘검은 하늘’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번 사태도 아마 종말로 기록될 것입니다.”

호크송 박사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희는 과거에 대륙 너머에서도 비슷한 일이 몇 번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비슷한 일?’

여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키리에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검은 것이 사람들을 덮친 것은 아닙니다만, 재앙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그런 일들 말입니다.”

나타니엘이 침묵했다. 그의 눈에 약한 호기심, 그리고 기특하다는 기색이 비쳤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키리에는 반사적으로 올드렐름으로 오는 길에 있었던 미약한 기운을 떠올렸다. 대륙 건너에서 무언가 크게 꿈틀거리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불안감이 치밀어올랐다.

“이 일들 사이에 어쩌면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저희는 생각합니다.”

질문은 아니었다. 나타니엘은 대답할 의무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긋이 호크송 박사의 차분한 녹색 눈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있지.]

난데없이 천둥이 꽝 쳤다. 강당에는 창문이 없지만, 어마어마한 빗소리가 정적을 밀어냈다. 키리에는 강당 안에 물결처럼 퍼져 있는 어떤 기운이 싹 조여들었다고 느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나타니엘은 살짝 벌린 무릎 위에 한쪽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괴고, 반대쪽 손으로는 지팡이를 어루만졌다.

[너희가 이뤄 내는 일을 여신은 싫어하지는 않을 테지만, 결코 좋아하지도 않을 거야.]

“드높은 곳의 여신께서 저희를 벌하시리란 뜻입니까?”

[그 반대지. 그녀는 너희가 절벽으로 기어가는 것을 결코 막지 않을 거란다.]

나긋하게 내리깐 눈은 혼잣말하듯 무심했다.

[물론 누군가가 그걸 막기 위해 노력하겠지. 키리에가 나를 막았듯이 말이야. 하지만 모든 사태를 막는 건 불가능해.]

쾅! 어딘가에 번개가 떨어졌다.

사람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키리에는 지긋이 나타니엘과, 나타니엘의 주변에서 요동치는 흐름을 바라보았다. 그를 눈치채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인 호크송 박사가 이어 물었다.

“그건 결국 종말이 오리라는 뜻입니까?”

나타니엘이 일순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별 감정은 없지만, 그래서 더욱 섬뜩하게 느껴지는 관찰자의 미소였다.

[그는 너희가 정할 일이 아닌가.]

나타니엘이 자세를 바꿔 지팡이 손잡이 위에 턱을 얹었다.

[너희는 정복자의 피를 타고났다. 끝도 모르고 산과 들과 바다를 정복할 것이며, 그러매 그 책임 또한 너희가 지게 되겠지.]

그는 멍한 얼굴의 청중들을 한 바퀴 둘러보곤 기묘하게 미소 지었다.

[우리는 지평선 너머에서 그걸 관찰할 뿐이란다.]

***

질답은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끝났다. 모두가 낮게 수런거리며 강당을 나섰고, 마지막으로 마주 앉은 키리에와 나타니엘만이 남았다. 사방을 긴장감으로 조여 오던 공기는 어느새 풀려 있었다.

“의외로 친절하게 대답해 주네요.”

키리에가 다 식은 찻물을 마시며 말했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단순히 그것 때문이라고 하기엔 좀, 무리라도 한 거 아니에요?”

[걱정이라도 했나?]

“당연하죠.”

약간 놀란 듯하던 나타니엘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내가 죽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관계없지 않나요?”

[그걸 관계없다 말하는 건 너뿐일 거야. 전에도 곧잘 치곤 했던 장난이니 신경 쓰지 말렴.]

“그런가요…….”

[그럼 이제 소원을 들어줄 차롄가?]

키리에는 찻물을 뱉을 뻔했다. 그녀가 눈을 좌우로 굴렸다.

“물론, 들어줘야죠…….”

나타니엘이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으로 가지.]

방……. 키리에는 차가운 얼굴, 다시 말해 몹시 당황한 상태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벌써 주변이 어둑어둑했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석조 건물 안에 나타니엘의 구둣발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키리에의 머릿속에서도 온갖 생각이 사방으로 울렸다.

‘아니겠지? ……정말 아닐까? 어울리진 않는데, 그렇지만 마리아의 결혼식에서 한 행동도 그렇게 따지면 별로 어울리진 않았지…….’

나선 계단을 올라 일전에도 묵었던 종탑 위 종지기의 방에 다다르자, 나타니엘의 침음이 키리에의 정신을 깨웠다.

[키리에. 우리가 정말 네 숙소로 온 게 맞나? 마구간이나 돼지우리가 아니라 말이야.]

“네?”

어느새 문을 열고 있던 키리에가 방을 살폈다. 방은 이전과 똑같았다. 낡은 침대, 농, 책상과 의자. 보라색 눈이 몇 번 깜빡였다.

“당신이 묵기엔 좀 누추할까요?”

나타니엘이 방에 들어서지도 않은 채 일견 심드렁하게 주변을 살폈다. 여전히 타성적인 미소를 띠고는 있지만 못마땅한 기색이 다분했다.

[그들이 널 여기서 재웠다고.]

“여기서 자진 않았어요.”

[그럼?]

“그게, 그때 상황이…….”

키리에가 제롬을 떠올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튼 괜찮았어요.”

두엄더미 옆 지푸라기 속에서 잤다고 말하면 지도에서 올드렐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키리에가 한 박자 늦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요즘 답변이 곤란할 때 좀 뻔뻔해지는 법을 익혔다.

“애초에 전설경 각하께서 저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될 일 아니었는지?”

나타니엘이 뭔가를 말하려 숨을 들이마셨다가, 이내 한숨 쉬었다.

[미안.]

그는 이 주제가 나오면 늘 사과가 먼저다. 키리에가 웃으며 그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들어와요.”

하지만 나타니엘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내일 보지.]

“안 들어와요?”

나타니엘이 몇 계단 아래에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한숨과 함께 말했다.

[장소가 별로야.]

“……그렇군요.”

[네 취향이라면…….]

키리에의 두 손이 나타니엘의 입을 텁 막았다. 목이 벌써 뜨끈뜨끈했다.

“미안한데 그 취향이란 거 좀, 어떻게 치워 주면 안 될까요……. 난 솔직히, 아직 그런 거 잘 모르겠고…….”

나타니엘이 눈을 깜빡이며 키리에를 올려다보았다. 키리에는 눈빛으로 그에게 강력하게 양해를 구했고, 그게 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타니엘은 가만히 ‘이렇게 귀여워서 어쩌라는 걸까, 이걸 정말 가둬 놓을 수도 없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걸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연륜 덕이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키리에가 손을 떼곤 애써 웃었다.

“그래도 불꽃놀이 때보다는 낫지 않나요…….”

[그땐.]

나타니엘이 미소 너머로 희미하게 난처함을 보였다.

[내가 좀 급했지.]

급했다는 말을 저렇게 여유롭게 하는 사람도 또 없을 것이다. 키리에가 괜히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럼…… 소원은요? 어떻게 할까요……?”

말투는 조심스러웠다. 어쩔 수 없었다. 키리에는 최근 들어 나타니엘의 초조함을 더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여긴 남의 일터고, 건물 몇 동을 지나면 친모도 있고……. 머리가 복잡했다.

[소원이야 있지.]

그를 눈치챈 나타니엘이 지팡이로 바닥을 한 번 두드렸다. 점잖은 신호에 키리에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몇 계단 아래, 나타니엘이 순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보아도 거짓말처럼 아름다운 남자.

소년처럼 풋내가 나는 것 같기도, 노인처럼 현명해 보이기도 하며, 남자 같기도 여자 같기도 하고, 고결하면서도 난잡하다.

그는 맑은 얼굴로, 망설임도 부끄러움도 없이 속삭였다.

[키스해 줄래?]

키리에의 몸이 굳었다.

파란 눈이 무구하고 선하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른의 장난을 요청하는 말과 달리, 표정은 사탕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순했다.

키리에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키스요?”

[응.]

“제가 할 질문은 아니지만…… 그걸로 괜찮아요?”

[괜찮아.]

나타니엘의 표정은 여상스러웠다. 유난히 순진해 보이는 파란 눈이 느리게 깜빡거렸다.

키리에가 황망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름을 걸었으니 배려해 준 걸까. 그녀는 멍한 머리로 횡설수설했다.

“잘 못 할 것 같은데…….”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란다.]

그렇겠지. 키리에가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문 키리에를 보고도 나타니엘은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한 계단 더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에게 자신을 쫓아오라 말하듯.

[키스해 줄래?]

농밀한 어둠 속에서 나타니엘이 천진하게 속삭였다.

이상하지. 아주 맑고 무구한 얼굴인데, 풍기는 분위기만큼은 놀랍도록 퇴폐적이었다.

키리에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타니엘은 재촉 없이 가만히 키리에를 응시했다.

“……네.”

그녀의 대답이 낯선 생물처럼 튀어나왔다.

키리에는 문지방 끝에 서서 잠시 심호흡했다. 손바닥에 그새 땀이 났다.

어둠 사이를 흰 손이 가로지른다.

키리에의 손바닥이 뺨에 닿자, 나타니엘은 거대한 짐승이 애교부리듯 뺨을 비볐다. 사뿐. 그런 표현이 어울리는 움직임이었다. 무표정이었던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사라졌다.

키리에가 머뭇거리다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아주 가까워지기도 전에 나타니엘이 살며시 눈을 감았다. 단정하고 고운 얼굴이 신의 계시를 기다리듯 고요했다. 못된 생각을 하는 건 키리에 자신밖에 없는 듯했다.

머리끝까지 신경이 곤두섰다. 키리에는 거의 혼절할 것 같은 기분으로 나타니엘의 건조한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댔다.

[아.]

그 순간 나타니엘이 목울대에서 아주 작은 침음을 흘렸다. 거의 신음에 가까운, 몹시 간질거리는 날숨이었다.

키리에의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차마 눈을 떠서 얼굴을 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녀는 입 맞추기에 너무 먼 거리에도, 차마 몸을 붙일 생각조차 못 하고 입술을 물었다.

나타니엘의 입술 사이에는 살짝 틈이 있었지만, 혀를 집어넣지는 못했다. 아직 젖지 않은 입술이 몇 번이고 나타니엘의 것을 지분거렸다.

그때 나타니엘이 살짝 고개를 비틀었다. 그 바람에 서로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나타니엘?”

키리에가 눈을 뜨자 나타니엘이 고요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담백하고 정갈한 눈빛이 도리어 야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처음 깨달았다. 서로의 코가 뺨에 닿는 거리에서, 남자는 예의 바르게 속삭였다.

[이건 키스가 아니군요, 호국경 각하.]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온 신경이 남자에게 사로잡혔다.

나타니엘은 느리게 시선을 움직여 키리에의 이마에서 턱 끝까지를 훑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키리에와 눈을 마주쳤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그는 다시 고결한 나타니엘의 모습으로 돌아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키리에 역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홀린 듯 온몸을 덜덜 떨며 혀를 나타니엘의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반사적으로 뺨에 얹었던 손이 나타니엘의 목덜미를 감쌌고, 손가락이 조금은 의도적으로 흰 목깃 사이에 걸쳐졌다.

나타니엘이 아주 약간 움찔했다.

그 순간 키리에는 나타니엘이 자신의 허리든 어디든 잡을 거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나타니엘은 심지어 이 자리에서 그녀가 그의 옷을 몽땅 벗긴대도 저항하지 않을 성싶었다.

난데없이 멀겋게 구는 게 낯설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그 능청을 깨뜨리고 싶다는 마음이 치밀었다.

키리에가 나타니엘의 어깨를 꽉 쥐었다. 손아귀 아래의 근육이 멈칫하는 것이 느껴져 만족스러웠다.

“응…….”

끈적이는 소리가 나선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입맞춤은 어느새 자연스러워졌고, 갈수록 대범해졌다.

키리에의 손가락이 나타니엘의 뒷목을 쓸자 그가 조금 움찔했다. 그것이 재밌어 키리에는 몇 번이고 나타니엘의 살갗을 어루만졌다.

그때마다 나타니엘은 수차례 몸을 굳혔지만, 결단코 그녀에게 손을 대지는 않았다. 뭔가를 눌러 참는 게 훤히 보이는 반응에 키리에는 되려 좀 더 즐거워졌다. 그녀는 우아하고 불길한 사내의 입술을 깨물며 저도 모르게 키득거렸다.

그렇구나. 재밌는 거구나. 많이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낯선 영역이라 겁을 조금 먹었을 뿐, 나도 사실은 원하고 있구나…….

거기까지 깨닫자 충동이 치밀어올랐다.

키리에가 양손으로 나타니엘의 멱살 근처 옷깃을 붙들었다. 볼로 타이가 풀어지고 단추가 뜯겨 나갔다.

“으응, 음…….”

들어 본 적도 없는 소리가 목구멍에서 튀어나왔다. 그걸 더 듣고 싶었다. 정신 한쪽이 돌아버린 게 틀림없었다. 분명 뭔가가 더 필요했다. 말초 신경 자극이 키리에의 정신을 방망이질했다.

“하…….”

그사이 나타니엘은 단 한 번도, 지팡이를 놓지 않았다.

더는 버틸 수 없어졌을 때, 마침내 키리에는 잔뜩 젖은 입술을 떼어 냈다. 다리 사이가 신경 쓰였다. 나타니엘의 오감은 인간 수준이 아니다. 혹시 눈치챘을까?

지근거리에서 나타니엘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어느새 눈을 뜨고 있었고, 키리에는 그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꼭 울 것 같구나.]

나타니엘이 조용히 속삭였다.

소년 같은 모습은 더는 없었다. 묘하게 색정적인 무표정만이 남아 흐트러진 옷매무새와 겹쳐졌다. 지독히도 자극적인 광경이었다. 새까만 동공이 노골적으로 키리에의 입술을 담았다.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을 알지 못하는 키리에가 어색하게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울 것 같긴 누가…….”

그때 고개 내린 그녀의 시야에 나타니엘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지팡이를 잡은 양손에 극명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 손은 키리에의 시선이 닿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의 몸 뒤로 숨었다.

[키리에.]

저 바다 밑까지 잠긴 듯한 목소리였다. 어조는 우아했지만, 날것의 감정이 들이켜고 내쉬는 숨에까지 배어 있었다.

키리에가 고개를 들었다. 나타니엘이 시선을 빗긴 채 제 입술에 묻은 타액을 핥고 있었다.

이름을 불러 놓고도 그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이 몇 번이고 달싹거렸다. 갈피를 못 잡고 주변을 훑는 시선에는 충동이 드러났다 숨기를 반복했다.

키리에가 느꼈다. 지금 그를 건드리면, 반드시 뭔가가 터져 나오리란 것을. 그녀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첨예하게 조여진 분위기가 이어졌다. 마침내 굳게 지팡이를 쥐고 있던 나타니엘의 손이 천천히 들리려던 순간이었다.

“나타니엘!”

제가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인지할 새도 없이 키리에가 외쳤다.

“잘…… 자요.”

말한 직후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타니엘은 잠을 자지 않는다. 꼭 그를 놀리는 듯한 꼴이 되어 버려, 절로 말문이 턱 막혔다.

하지만 나타니엘은 느리게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이해한다는 듯이 시선을 내리깔곤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 잘 자렴.]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몸을 돌렸다. 이후 나선 계단을 내려가는 규칙적인 구둣발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남겨진 키리에가 비틀거리다 계단참에 주저앉았다.

그날 밤, 키리에의 꿈에는 나타니엘이 나왔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꿈이었다.

***

다음 날 키리에는 나타니엘과 마주치자마자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바로 수도로 갈까요? 마법만 몇 번 쓰면 되니까…….”

나타니엘이 정적이고 기품 있는 미소를 지었다.

[여행이 좋다더니.]

“저도 그게 좋긴 한데 수도에서 볼 사람도 있고, 저희가 늦으면 장례식이 시작되지 않을 테니 너무 늦장 부리면 좋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그 말에 나타니엘이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지나가듯 말했다.

[꿈자리가 제법 사나웠나 보지.]

“…….”

키리에가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피했다. 다행히 나타니엘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수도에 도착해, 국왕을 알현하는 것까지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저, 전설경, 그리고 호국경. 자, 잘 오셨소.”

국왕 이든 오레윈브리지가 알현실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이든은 남들 나이까지 빌려 맞았는지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다. 거기다 빼빼 마르기까지 하니 왕좌에 앉은 모습이 놀랍도록 볼썽사나웠다. 염소가 왕관을 써도 그보다는 멋졌을 것이다.

키리에가 불현듯 안쓰러움을 느꼈다.

“잘 지냈나요, 이든?”

퍽 상냥한 목소리가 나왔다. 수도에 들어온 내내 사방에 무관심하던 나타니엘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옮겨 간 것을 그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자, 잘 지냈소. 그, 그대도 건강해 보이는군. 지, 지내는 데는, 무리, 없, 없으신가?”

“무리하고 말고 할 것도 없죠. 우리가 하는 거라곤 계절마다 경치를 구경하는 게 전부인데.”

“그, 그렇군……. 루비니아가, 잘, 해 주고 있으니 이쪽 일은 걱정하지 마시오.”

“왕비 전하는요?”

“바, 바깥에 시찰을……. 곧 돌아올 테니, 시종장에게 만남을, 잡으라고 일러두지.”

“고마워요.”

“고맙긴……. 왕, 왕비가 요즘, 태자를 잉태해서 많이, 힘들어하는데 그대가 온 걸 알면, 좋, 좋아할 거요…….”

“루비니아 양이 임신했다고요?”

키리에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류와 함께 간단한 소식을 전하기는 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무, 물론 전부 그대들 덕이요. 사건도 많았지만, 이, 이젠…… 다 지난 일이니까. 지, 지금은 그저 이 평화가 오래 가면 좋겠소…….”

많이 바뀌었구나. 키리에가 이든을 바라보았다. 이든이 힘없이 미소 지었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그 사이, 벽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온화한 빛이 쏟아졌다. 노곤한 공기였다.

“호국경 그대에겐, 사과하고 싶소…….”

이든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과요?”

“진작, 더 제대로 해야 했는데…… 기회가 없었지.”

“어떤 걸 말하는 거예요?”

“그때, 아주 옛날, 내, 내가 그대와 약혼했던 시절…….”

그 순간이었다.

[명줄이 질기구나.]

얼음송곳 같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타니엘이 무심한 얼굴을 하고서 반걸음 앞으로 나섰다.

겨울 한낮의 햇빛에 데워지던 공기가 다시 얼어붙었다. 이든의 녹색 눈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 하하. 그, 그러합니, 아니, 그러한가. 저, 전설경…….”

[잘 간수하렴. 네 아이가 성년이 되는 모습은 보아야지 않겠어.]

나타니엘이 무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큰 키 탓에, 이든은 고개를 거의 완전히 뒤로 젖혀 올려다보는 자세를 취했다.

이든이 불안하게 덜덜 떨며 의자 팔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 그렇지…….”

“나타니엘. 사과잖아요.”

부드럽게 나무라는 말에도 나타니엘은 대답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키리에를 보지도 않았다.

“나타니엘.”

키리에가 지팡이를 짚고 있는 나타니엘의 손을 덮었다. 나타니엘이 그제야 시선을 내렸다. 유리알 같은 눈은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가지.]

“벌써요?”

이든이 급하게 손을 휘저었다.

“나, 난 괜찮소. 궁에 방을 마련해 줄 테니, 묵고 가시오……. 뷰캐넌의 가신들이 올라오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니까…….”

이든은 병든 염소처럼 풀이 죽은 채 그들을 배웅했다.

알현실의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키리에가 못 할 짓을 한 기분에 멋쩍게 눈을 굴렸다.

“전보다 쇠약해진 것 같네요.”

[오래는 못 살 거야. 죽음이 그를 노리고 있구나.]

차가운 말에 키리에가 놀랐다. 그녀는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서 눈을 또르르 굴렸다.

“애 얼굴 보고 싶으면 입조심 하란 뜻이 아니었군요…….”

[그런 뜻도 있고.]

“누가 조언을 그렇게 의미심장하게 해요?”

키리에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타니엘이 팔을 올렸고, 키리에는 자연스레 그의 팔짱을 꼈다.

조용한 걸음이 두 사람을 인적 드문 회랑으로 이끌었다. 눈 때문인지 사방이 고요했다. 주변에는 오다니는 사람도 없어, 꼭 세상에 둘뿐인 듯했다.

문득 나타니엘이 물었다.

[아이가 갖고 싶니?]

키리에는 회랑 너머의 앙상한 정원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

“갖고 싶냐, 갖고 싶지 않으냐만 묻는다면, 갖고는 싶어요.”

나타니엘이 걸음을 멈췄다. 키리에가 고개를 들자, 감정의 그림자가 사라진 자리에 아름다움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껍질에 관심을 거둔 나타니엘은 여전히 두렵고, 인간 같지 않고, 야만적이고 난폭하며 오만하고 숨이 막힌다.

키리에는 발치의 그림자가 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양을 바꾸는 것을 지켜보다 상냥히 말했다.

“내 종말은 딴생각 중이신가 보네.”

키리에의 말에 나타니엘이 정신을 차렸다. 그가 다시 어렴풋한 미소를 띠었다.

키리에가 애교 있게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런 걸 물어요?”

[인간들에겐 중요하니까.]

“그것 때문에 아까 화낸 거예요?”

[아니.]

“그건 거짓말이죠? 뭔가 관련이 있는 눈치던데요.”

나타니엘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영리한 키리에 뷰캐넌.]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지만 썩 개운하진 못해 보였다.

“말해 봐요. 뭐가 문제예요?”

나타니엘이 시선을 정원으로 옮겼다. 길게 뻗은 새까만 속눈썹 아래로 파란 눈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내 입으로 말하기엔 지나치게 조야하구나.]

“아니죠. 조야하기로 따지자면 당신이 예전에 내게 한 짓이 더 조야했는걸요.”

[미안.]

“미안하면 뭐가 문제인지 말해 줄래요?”

키리에가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팔짱을 풀고, 조심스레 까치발을 들었다.

귀엽게 턱을 든 키리에를 내려다보며 나타니엘이 실소를 흘렸다.

[영리한…….]

“키리에 뷰캐넌.”

나타니엘이 자연스레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살짝 맞부딪혔다 떨어졌다. 키리에가 코끝을 부딪치며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그래서 우리 전설경 각하의 조야한 고민은?”

나타니엘은 붓으로 그린 듯한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키리에.]

“네.”

[혹시…….]

“네.”

나타니엘이 잠시 말을 멈췄다. 눈썹이 약간 찌푸려져 있는 것을 그 자신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혹시 그와 재미 본 적이 있나?]

의외의 말에 키리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어요.”

[조야하다고 말했잖니.]

나타니엘이 한숨 같은 숨을 내쉬며 굽혔던 몸을 세웠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적잖이 당황한 키리에는 시선을 먼 곳으로 주었다. 농담은 아닌 모양이다.

“내가 만약 여기서 있다고 답하면 어떻게 되나요?”

[그러면.]

나타니엘이 말을 멈추고 눈가에 작위적인 호선을 그렸다. 키리에는 거기서 탐색의 시선을 읽어 냈다. ‘어디까지 말해도 될지’ 가늠하는, 그런 시선.

[내가 조금 나쁜 짓을 하겠지.]

“조금.”

[많이.]

“당신 기준 많이 나쁜 짓이요…….”

키리에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중얼거렸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없었어요. 그런 걸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내가 선택한 건 당신이잖아요.”

키리에가 부러 자신의 반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타니엘은 반지를 끼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말 그대로 심장에 박아 넣었다.

“불안한 거예요? 내가 신뢰를 못 주나요?”

[그런 게 아니야.]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우아한 미소였다. 키리에는 약간 분한 마음이 들어 심통 부리듯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내가 당신 꿈도 꿨는데…….”

작은 새가 토라진 듯한 모습에 나타니엘의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너를 못 믿는 게 아니라, 인간의 본능이 얼마나 강한지 알 뿐이야.]

“본능이요?”

[인간에겐 종족 번식의 본능이란 게 있지.]

“아이를 말하는 거예요?”

예쁘게 조각된 사파이어 같은 눈이 깜빡였다. 대답은 없었지만 그게 오히려 대답이 되었다. 키리에는 약간 당혹스러워졌다.

“그 이야기가 무슨 연관이…….”

키리에에게는 유감스럽게도,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시종 한 명이 다가와 루비니아가 접견을 요청한다고 알려 왔다.

[다녀오렴.]

나타니엘에게는 대화를 이으려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키리에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

오랜만에 만난 루비니아는 임신으로 적당히 배가 부른 상태였다. 방으로 들어오는 그녀를 본 키리에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다녀도 돼요?”

“당연하죠! 초기도 지나서 지금은 좀 안정됐거든요.”

활달하게 대답한 루비니아가 곧 의자에 모자를 내팽개쳤다.

“근데 애초에 쉴 수가 없어! 너무 바빠요!”

“이든이…….”

“그 인간은 앉아서 도장이나 찍어 주는 게 도움 되는 거예요!”

“그런가요.”

“좀 진정되나 싶었더니 버몬트의 가주 쟁탈전이 딱 끝났네? 새 후작은 또 미칠 정도로 호전적이에요!”

“버몬트 후작가의 평균보다요?”

“평균보다요!”

그럼 거의 전쟁광 수준일 텐데. 대륙 정벌파인가…….

“대륙으로 진출하재요, 글쎄!”

맞구나…….

루비니아가 쓰러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입에서 절절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시녀들에게 디저트를 주문하고서 키리에를 돌아보았다.

“아, 맞다. 그리고 나 당신한테 중요한 거 물어봐야 하는데. 호국경이 세습되는 작위가 아닌 거 알죠?”

“알아요. 어차피 세습할 생각도 없고요.”

“으응? 아이 생각 없어요?”

라우라도 묻지 못한 말을 루비니아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키리에가 멋쩍게 웃었다.

“글쎄요, 얘기를 아직 안 해 봐서요…….”

정확히는 아이를 가질 수가 없다. 나타니엘은 사람을 살리고, 치유하고, 잉태시키는 행위는 할 수 없다. 신은 그에게 그런 다정한 온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는…….’

“물어보긴 해야겠죠. 나도 아예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니까.”

루비니아는 다행히 별다른 사정을 묻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아쉽네요. 당신들이 애 하나 낳아 주면 좋았을 텐데.”

“어째서요?”

“우리 애랑 결혼시키게요. 후후! 그러면 아무도 왕권을 넘보지 못할 텐데!”

루비니아가 애교 있게 뺨을 붉혔다. 그녀는 얄미운 말을 얄밉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 당돌함이 귀여워 키리에가 피식 웃었다.

“생각이 있더라도 지금은 아니에요.”

“왜요? 내가 볼 땐 오히려 지금이 딱인데.”

“나타니엘이 좀 불안해 보여서요.”

“불안해요? 그 사람이? 에, 말도 안 돼.”

루비니아가 시녀가 내온 딸기 케이크를 텁 물었다.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음! 달아! 왕비는 먹고 싶은 거 다 먹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잘됐네요.”

“그래서 왜 불안한데요? 둘이 싸웠어요?”

“그건 아닌데…….”

키리에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나타니엘을 떠올렸다. 다른 남자와의 관계에 대한 건 소유욕이라고 쳐도, 아이에 대해서는 왜 물었을까? 키리에가 딴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다른 남자랑 관계가 있었는지 묻더라고요…….”

루비니아가 딸기를 한입에 물고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든이랑요?”

키리에가 당황했다.

“아뇨, 그렇다기보다 그냥 다른…….”

“응? 당신이랑 엮였던 남자가 이든밖에 더 있어요? 내 남편이라 그런 거라면 신경 쓰지 말아요. 난 이든에게 딱히 정조를 기대하지 않고, 그이에게 별 의리도 없으니까.”

루비니아는 눈을 위쪽으로 굴리고선 사악하게 웃었다.

“아니면 전(前) 호국경을 염두에 두고 물은 건가? 근데 당신이 그 사람이랑 눈이나 배가 맞진 않았던 것 같았는데요.”

“그 얘기, 나타니엘 앞에서는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당신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모른답니다.”

순식간에 케이크 하나를 해치운 루비니아가 까르르 웃었다.

“그래서 그 남자가 당신한테 딴 놈이랑 했냐고 물었고, 당신은 아니라고 답했겠고, 그리고 당신은 그 남자랑은 아직이고?”

키리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떻게 아는 걸까. 아닌 척하기엔 루비니아가 알 만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예요……. 그리고 아이 생각이 있냐고 물었고요.”

키리에가 이왕 상담한 김에 말한다는 느낌으로 고해했다.

“흐응!”

루비니아가 홈홈하니 웃었다. 원인과 결과가 너무나 뻔한데 호국경 본인만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그녀는 그걸 지켜보는 게 너무 즐거웠지만, 전설경의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왕국에 해가 된다. 둘이 부부 싸움이라도 한다면 대륙은 초토화다. 트레베레움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두 사람은 반드시 개방정을 떨어 줘야 했다.

루비니아가 입에서 포크를 쑥 빼고 외쳤다.

“둘이 안 해서 그렇지, 뭐!”

키리에는 차를 도로 뱉을 뻔했다.

“루비니아 양!”

“뻔하네! 아하하, 불안이 아니라 초조한 거지! 그 지독한 남자가 아직도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고 있으려니 애가 얼마나 탔을까!”

“무슨…….”

키리에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결혼한 부인들끼리는 이런 이야기도 한다고 알고 있지만, 이런 대낮에, 왕비의 방에서, 왕비에게 들을 줄은 몰랐다.

루비니아는 독수리처럼 매서운 눈으로 포크를 키리에의 가슴께에 겨눴다.

“잘 봐요. 당신이랑 한번 찐하게 하고 싶은데! 당신은 계속 피하고! 그러면 이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혹시 나랑 아이를 갖는 게 싫어서 그런 걸까?”

상황을 모르는 루비니아는 그렇게 말했지만 얼추 얼개는 들어맞았다. 키리에의 입이 벌어졌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그 이야기를 나타니엘은 바다에서 올라온 직후 했다. 그리 말하는 나타니엘의 태도는 아주 담담했지만, 동시에 그녀의 반응을 매우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아무래도 나타니엘은 인간이 번식에 아주 집착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설마 내가 그 사람이랑은 아이를 못 가지니까 망설이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거면 정말 오해다. 그녀는 부득불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도 없을뿐더러, 부부가 아이를 갖는 방법이 꼭 직접 낳는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오해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지…….

“어쩜 좋아, 내가 살면서 전설경을 다 걱정해 보네!”

키리에의 표정을 본 루비니아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녀의 눈썹이 맹랑하게 위로 쭉 뻗었다.

“그 작자 인내심도 보통은 아니네요, 정말! 바로 옆에 있는 아가씨가 이렇게 순진해서야!”

“생각은 이해하겠는데, 사실 관계가 없다는 점에 그렇게까지 힘들어 보이진…….”

“그럼 그걸 티 내겠어요!”

루비니아가 포크를 탕 하고 내려놓았다.

“물론 제멋대로 손대면 개새끼지! 그러니까 가만히 있는 거고요. 그래도 너무 기다리게 하네. 그 사람이야 시간이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러다 나중 가면 그대로 고착돼서 손도 못 쓸걸요?”

정확하고 예리했다. 이미 어느 정도는 그런 느낌이었다. 결혼 첫날 밤, 키리에가 도망친 이후로 그랬다.

황망해진 키리에를 보고 루비니아는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서 하기 싫어요? 남의 남편 두고 이렇게 말하는 거 좀 그렇지만, 솔직히 괄목한 만한, 아하하, 뭐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싫은 건 아니에요…….”

키리에가 모기만 한 소리로 답했다.

“그럼 눈 딱 감고 먼저 들이대요. 자존심, 수치심, 체면 생각하지 말고. 싫어할까 어쩔까 생각하지 말고. 전후 상황 따지지 말고!”

그다음 루비니아는 왕비가 하기엔 품위 없는 손동작을 보이며 턱을 들었다.

“자빠뜨려요!”

이 나라의 왕비는 참……. 키리에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루비니아가 연신 콧노래를 부르며 포크로 케이크를 찍었다.

“그리고 아이 문제도 생각해 보고요.”

그렇게 말한 뒤, 루비니아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왕궁 뒤쪽, 루빈베리 정원이라고 알아요? 새로 생겼는데.”

“알아요.”

“궁을 떠나기 전까지 거기를 비워줄게요. 제대로 얘기해 봐요. 이런 건 원래 일상적인 공간에서는 이야기하기 어려우니까.”

놀란 표정을 지었던 키리에가 이내 짓궂게 웃었다.

“왕비님 권력으로?”

“어머, 당연하죠. 나 왕비야!”

루비니아가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으스댔다. 킥킥거리던 그녀는 곧 자신의 동그란 배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도 좋아 보여요. 당신은 당신 나름의 행복을 찾았나 보죠.”

일순 마냥 귀엽고 애교 있던 얼굴에 성숙함과 온화함이 깃들었다.

“나는 이 아이에게서 내 행복을 찾은 거 같아요.”

“그런가요.”

“이상해, 진짜……. 나 원래 권력이랑 돈이 제일 좋았는데…….”

루비니아가 제 배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자애로운 미소는 전에는 본 적 없던 것이었다.

한참 뒤 그녀는 맑은 구스베리 색의 눈을 접어 웃었다.

“키리에 양. 부탁은 안 할게요. 다만…… 내가 죽으면, 이 아이를 몇 번 보러와 줘요. 호국경으로서 말고, 내 친구로서.”

키리에는 햇빛 아래서 루비니아가 선하게 미소 짓는 모습을 지켜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키리에는 대화가 거기서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루비니아는 기어코 한마디를 더 했다.

“참고로 내 정원은 사람 잘 안 다녀요. 당신들이 뭘 하든 안 들릴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이! 도망치면 어떡해!”

***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온 키리에가 방 안을 서성였다.

‘안 되지. 절대 안 되지.’

일단 정원은 안 된다. 들키기라도 했다간 두고두고 놀림당할 것이다.

하지만 모레는 장례식이다. 장례식이 끝나면 더는 수도에 있을 이유도 없다.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면 뭔가 바뀔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루비니아의 말이 옳았다.

키리에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응접실을 배회하는데 때마침 나타니엘이 방으로 들어왔다.

[꼭 춤추는 꿀벌 같구나.]

키리에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디 다녀왔어요?”

[당대 버몬트가 찾아왔길래 만나고 왔지.]

“대륙 정벌이라도 도와달라던가요?”

[정확해.]

나타니엘은 육식동물처럼 느긋하게 다가와 키리에의 뺨에 손을 올렸다.

[안색이 안 좋아. 왕비와의 대화가 별로였나 보지?]

다정한 물음이었다. 증오도 달가워하던 그 나타니엘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몹시 신사적이고 예의 바르고 점잖기까지 하다. 속은, 좀처럼 알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풀이 죽은 키리에가 나타니엘의 손에 뺨을 비비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나타니엘은 잠시 멈칫했다가, 키리에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별일이구나.]

“만약 루비니아 양하고의 대화가 별로였다고 하면요?”

[네가 원하는 대로 처리해 줄게.]

“죽이는 거요?”

[누차 말하지만 너는 좀 파괴적인 성향이 있고, 나는 너보다 온건하지. 세상에는 전설경의 이름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꽤 많단다.]

“그건 그래요. 물론 앞부분 말고 뒷부분이요.”

고개를 들자 툭 치면 파란 바다가 쏟아질 것 같은 눈이 조용히 그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키리에가 심호흡했다.

“나타니엘. 시간 있어요?”

[내 시간은 다 네 거지.]

가지런히 예쁜 대답이 키리에의 용기를 북돋웠다.

키리에가 말없이 나타니엘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나타니엘을 응접실의 일인용 굽은 다리 의자에 앉혔다. 종말은 순순히 손을 잡힌 채 그녀의 인도에 따랐다.

키리에가 손을 내젓자 두꺼운 겨울용 커튼이 착착 움직여 창문을 가렸다. 방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눈앞에는 나타니엘이 바른 자세로 앉아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당장 칼을 꺼내 목에 갖다 댄대도 미소만 살풋 지을 것만 같다.

키리에가 재차 심호흡했다.

‘자존심, 수치심, 체면 생각하지 말고. 싫어할까 어쩔까 생각하지 말고. 전후 상황 따지지 말고!’

루비니아는 예리하다. 그녀는 정확히 키리에가 신경 쓰는 부분들을 짚어 냈다.

“……나타니엘.”

[키리에.]

“키스해도 돼요?”

키리에가 양손으로 팔걸이를 짚었다. 나타니엘의 동공이 일순 형태가 뒤틀렸다가 되돌아왔다. 그러고 보면 감정이 극에 달할 때마다 그랬다. 지금도 그런 걸까? 그리 생각하니 벌써 얼굴이 뜨거워졌다.

키리에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정수리에 나타니엘의 숨이 닿았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대로 그에게 키스했다.

제대로 된 키스였다. 타액이 오가고 점막이 서로 들러붙었다 떨어졌다. 키리에가 재촉하듯 입 안을 핥아올 때마다 나타니엘의 고개가 뒤로 살짝 밀렸다. 그는 어느새 한 손에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키리에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만 입술을 뗀 채 속삭였다.

“키스할 때 검을 잡는 건 바람직한 기사의 태도가 아닌 것 같아요.”

그녀의 손이 부드럽게 나타니엘의 지팡이를 떨어뜨렸다.

단정한 얼굴의 남자는 무표정이었다. 하지만 시선은 예리한 창처럼 키리에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키리에.]

“키스해요.”

키리에가 재차 입을 맞췄다. 그녀는 여전히 양손을 팔걸이에 짚은 채였다. 나타니엘이 항상 지팡이를 잡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으나, 나타니엘의 살은 달다. 그는 사람이 탐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져 있다.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혀로 어루만지는 것만으로도 묘한 흥분이 피어올랐다. 키리에의 숨이 어느새 거칠어졌다.

[키리에.]

숨을 고를 찰나에 나타니엘이 재차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마저 약간은 젖은 것처럼 들렸다.

[왕비가…….]

“조용히 해요.”

키리에가 다시 입 맞추려는 순간 큰 손이 키리에의 뒷덜미를 감쌌다. 키리에가 동작을 멈췄다.

입가에 그녀의 타액을 묻힌 나타니엘이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희미한 미소에서 느껴지는 건 걱정이지 흥분이 아니었다.

[별일이구나. 아무래도 나는 왕비가 네게 무슨 이상한 말이라도 한 게 아닌가 싶어지는데, 틀렸니?]

가볍게 잡은 정도인데 물러날 수도 더 다가갈 수도 없을 만큼의 힘이었다. 뒷덜미를 잡은 건, 그의 의도는 아니겠지만 그녀를 마치 새끼 고양이 취급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키리에가 조금 분한 마음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오히려 루비니아 양은 조언을 해 줬어요.”

[조언?]

“내가…….”

키리에가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당신을 선택했어요. 다른 사람은 눈에 안 차요. 아이 같은 건 신경 쓰지 말아요. 내가 아이를 갖고 싶다고 한 건, 당신이 생각하는 이유는 아닐 거예요.”

고작 몇 문장 말하는데도 귀 끝이 달아올랐다. 코앞에서 눈을 피하지 않고 말하려니 더 그랬다.

나타니엘은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아이의 방황을 지켜보는 어른 같은 얼굴이다. 저 초연함이 더 승부욕을 자극한다는 것을 그는 알까?

“피하는 건…….”

키리에가 말을 짧게 끊었다.

“이제 안 하려고요.”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천천히, 마치 나타니엘이 그러하듯이 느리게 다가가 입을 맞췄다.

내내 나타니엘이 움켜쥐고 있던 팔걸이 끝부분이 끝내 부서졌다. 키리에는 입술을 떼고 나타니엘을 오시했다.

“벗겨 봐도 돼요?”

나타니엘은 이게 뭐지, 같은 멍한 얼굴이었다. 정말로 약간은 놀란 듯한 모양이라 키리에는 승리감을 느꼈다.

“그런데, 사실 안 된다고 해도 할 거예요.”

그녀가 태연한 척 손을 뻗었다. 그래 봐야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마저 숨길 여력은 없었다.

손가락 끝에 나타니엘의 볼로 타이가 걸렸다. 손을 당기자, 타이가 쭉 빠져나왔다. 조여져 있던 흰 옷깃이 살짝 벌어지고 그 안쪽의 목울대가 드러났다. 섬세한 얼굴 때문에 미처 몰랐는데, 생각보다 선이 굵다. 키리에가 괜히 침을 삼켰다.

“기분이…… 어때요?”

나타니엘은 대답하지 않고 드물게도 가만히 키리에를 올려다보았다. 어린 천사 같은 순수한 낯으로.

또 멀겋게 구네. 얄밉다…….

키리에가 눈을 흘기며 나타니엘의 다리 사이에 떡하니 무릎을 올렸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남자는 촘촘하게 주름이 진 드레스 자락과, 그 속에 있을 동그란 무릎을 주시하다 입을 열었다.

[글쎄. 우리 호국경 각하께서 언제쯤 후회할지 기대되는구나.]

“후회하지 않아요.”

키리에가 나타니엘의 셔츠 가장 위쪽의 단추를 풀며 오만하게 턱을 들었다.

[그러시겠지.]

“정말이에요.”

그 순간 나타니엘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

새파란 눈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대신 그동안 좀처럼 보여 준 적 없던 것들이 엿보였다. 나타니엘의 근본을 이루는, 독점욕과 소유욕, 그리고 광기 같은 것들.

[정말일까?]

깜빡임 없는 눈과 희미한 미소 띤 얼굴은 꼭 가면 같았다.

그는 키리에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보다 인간적인 모습으로 되돌아와, 조롱보다는 한탄에 가깝게 말했다.

[넌 이러고 항상 도망가지. 꼭 정말로 내게 아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네게 뭔가를 바라는 건 나뿐인 것처럼.]

나타니엘이 검은 깃털 부채 같은 속눈썹을 살짝 떨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도 잠시, 나타니엘의 얼굴에 섬뜩한 무표정이 떠올랐다.

[그때마다 나는, 키리에…….]

눈을 내리깐 상태 그대로, 나타니엘은 주춤거리며 물러나려는 키리에의 팔을 붙잡았다.

물러날 수 없다.

키리에가 숨을 멈췄다. 나타니엘은 몇 번 입술을 달싹인 뒤, 아찔하게 미소 지었다.

[도망치는 널 쫓아가서 있는 대로 망가뜨리고서 예뻐해 주고 싶어…….]

말문이 턱 막혔다. 그의 언어는 늘 고상하기에 직접적인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키리에는 느꼈다. 말 뒤에 숨겨진 잔인한 농탕질의 암시를.

키리에가 침을 삼켰다.

“도망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 말에 나타니엘의 분위기가 다시 차분해졌다. 그가 키리에의 팔을 놓았다.

[그러시겠지. 팔은? 멍이 들었겠구나. 미안하군.]

“괜찮아요.”

[저녁에 국왕 부처가 만찬을 들자고 하더구나.]

명백히 화제를 돌리는 행위였다. 키리에는 그대로 일어나려는 나타니엘의 가슴을 밀었다.

“아직 내 볼일은 안 끝났어요.”

나타니엘이 멍한 얼굴을 했다가, 태연히 미소를 지었다.

[네 뜻대로 하렴.]

키리에가 약간의 패배감과 분함을 느끼며 다음 단추를 풀었다. 나타니엘은 낮게 웃더니 조용해졌다.

셔츠의 단추를 푸는 건 베스트 윗부분까지가 한계였다. 베스트를 벗길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다.

자, 그럼 이제 어떡하지…….

키리에가 망설임을 숨기며 나타니엘을 살폈다. 쇄골과 가슴 사이까지 드러났는데도 나타니엘은 태연했다. 눈을 내리깐 모습이 초연하고 여유로웠다. 저 얼굴이 여유가 없어서 안달복달하는 모습 한 번만 보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다.

그러니까, 대충 이런 느낌이던가?

망설이던 키리에가 다섯 손가락을 펼쳐 나타니엘의 옷깃 안쪽으로 미끄러지듯 밀어 넣었다. 아, 생각보다 근육이 다부지네…… 하는 생각이 드는 찰나에, 내내 내리깔고 있던 파란 눈이 정확히 그녀를 응시했다.

키리에가 흠칫해 저도 모르게 손을 뺐다. 그러자 나타니엘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끝났니?]

키리에가 입술을 꾹 다물고 눈썹을 모로 휘었다.

“아뇨!”

그녀는 나타니엘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자신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싫은 게 아니면 그만 도망치라는 루비니아의 말이 떠올랐다. 키리에가 심호흡했다.

“……이상하게 보면 안 돼요.”

키리에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기 옷의 리본을 풀어냈다.

[키리에?]

“보, 보고 있어요.”

그 말이 아니더라도 나타니엘은 더는 키리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툭. 투둑.

긴 소매가 달린 상아색 로브, 실크로 만들어 술을 단 허리띠, 그 안쪽의 흰 드레스가 차례차례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속치마가 다리를 스치고 팔락거리며 내려앉았다. 남은 건 속옷뿐이었다. 키리에가 잠깐 망설였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그리고 그녀는 프로노이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목숨도 걸어 본 마당에…… 라고 생각하니 못할 것도 없다.

키리에가 눈을 꼭 감고, 천천히 속옷의 가장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약간 비틀거리며 마지막 속옷마저 벗었다.

완벽한 나신이 드러났다.

맨살에 겨울철 실내 공기가 닿자 소름이 오소소 올라왔다. 그래도 하얗게 질리긴커녕 수치심에 목덜미까지 새빨갰다. 키리에가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한 비장한 얼굴로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봐요. 누가…… 도망친다고.”

[…….]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거의 울먹거리듯 말이 나왔다. 키리에는 팔로 중요한 부위를 가린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타니엘은 신을 저주했다.

그 작자는 제 자식을 이렇게 순진하게 만들어 놓고도 두 발 뻗고 잠이 오나?

어둑어둑한 방 안에서 희고 매끈한 살결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숨을 고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숨을 안 쉬어도 되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 죽었을 것이다.

키리에는 울 것 같은 모양인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그러면서도 고개를 쳐들고 그를 오시하고 있었다.

도발이라면 정말 최고의 도발이다.

그는 거부할 생각조차 못 하고 시선을 사로잡혔다. 쭉 뻗은 어깨와 깃털 베개처럼 소복하게 솟은 가슴. 가느다란 배와 허리와, 작은 구멍 같은 배꼽. 낮은 언덕같이 완만한 아랫배와…….

그 순간 잡아먹자 , 하고 누군가 나타니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타니엘이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목울대 깊은 곳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

그때쯤 간신히 참고 있던 키리에의 이성과 수치심이 같이 터지고 말았다. 그녀의 예상과는 다른 반응도 한몫했다. 그가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평정심이 키리에에게는 다소의 황당함으로 보였던 것이다.

어떡하지, 이게 아닌가. 루비니아 양이 뭐라고 했더라? 가까스로 힘을 주고 있던 미간이 풀리자 바로 울먹임이 튀어나왔다.

“내, 내가 당신 자빠뜨릴 거예요!”

그 한마디로, 나타니엘의 이성과 본능은 극적인 타결을 맺었다.

일단 울리고 용서를 빌자.

“그, 그리고 내가…….”

[그래, 도발에 재주가 있으신 훌륭한 호국경 각하.]

그가 새하얗게 웃었다. 그리고 구두를 움직여 키리에의 발을 밀었다. 키리에의 몸이 급류에 쓸려 가듯 기우뚱했다.

“꺅!”

나타니엘이 쓰러지는 키리에의 몸을 돌려 무릎 위에 앉혔다. 물 흐르듯 막힘없는 동작이었다.

[하기야 벗은 채로 도망치진 않겠지.]

나타니엘이 강하게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뒤에서 안긴 꼴이 된 키리에가 움찔했다. 엉덩이골 부근에서 엄청난 크기의 무언가가 두 사람의 몸이 붙는 걸 방해하고 있었다.

그거지. 그거구나. 그거인 거지. 키리에의 이성이 작동을 정지했다.

반면 나타니엘은 굳은 키리에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키리에를 예의 물건 위에 걸쳐 놓듯 앉혔다.

“흡…….”

길쭉한 것이 민감한 곳을 스치고 키리에의 허벅지 사이에 자리 잡았다. 입은 것 하나 없는 그녀는 옷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크기와 단단함에 저도 모르게 벌벌 떨기 시작했다.

[불편하니?]

나타니엘이 물어왔다. 정말로 불편한지가 궁금한 양 사심이라곤 없었다.

키리에가 대답하지 않자, 나타니엘은 다시 키리에를 인형처럼 번쩍 들어 고쳐 앉혔다.

“흣.”

일부러일까. 몸을 누르듯이 앉히는 바람에 아랫부분에 약한 자극이 올라왔다. 반사적으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낯선 자신의 목소리에 당황한 키리에가 소리치듯 입을 열었다.

“원래 이런 거예요?”

[뭐가?]

“…….”

나타니엘이 뒤에서 키리에의 목덜미를 짧게 깨물었다. 뒷말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야 항상 이랬지.]

“난, 난 당신이 이런 걸 보인 적이 없어서, 생각이 별로 없는 줄로만…….”

[여신이 나를 그런 것도 조절 못 하는 반푼이로 세상에 내놓진 않았거든.]

“그렇…… 아윽!”

난데없이 키리에의 어깨가 깨물렸다.

“아파요!”

키리에가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녀의 손목은 가볍게 제압당했다. 다시 한번 뒤쪽에서 나타니엘이 목덜미를 깨물었다.

“나타니엘!”

[네가 잘못한 거야.]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팠다. 나타니엘의 힘을 아는 키리에는 움직이면 살이 뜯길 것 같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키리에 뷰캐넌 같으니.]

나타니엘은 드러난 목덜미를 물었다가 다시 차근차근 어깨를 물었다.

손목이 잡힌 채로는 반항도 할 수 없다.

“윽…….”

아픈 게 분명한데, 동시에 흥분이 피어올랐다. 키리에가 당황해 눈을 질끈 감았다. 나타니엘은 낮게 웃더니, 손으로 키리에의 눈을 덮었다.

[괜찮아.]

반대쪽 손이 천천히 키리에의 팔을 타고 올라갔다. 손끝이 닿는 곳마다 열기가 꽃처럼 피어올랐다. 나타니엘은 그와 동시에 그녀의 등에 입 맞추기 시작했다. 키리에의 마른 몸이 비 맞은 새처럼 떨렸다.

뱀처럼 팔을 타고 오른 손가락이 어깨를 둥글게 몇 번 어루만졌다. 살금살금 살갗 위를 걷던 다섯 손가락이, 곧 피부를 밀어 올리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흐.”

키리에가 놀라 숨을 집어삼켰다. 검지 손톱 끝이 우연인지 고의인지 알 수 없이 젖꼭지를 스쳤다. 온몸이 바짝 굳었다.

손가락은 가슴을 쥐고 주무르다가, 모양을 기억하듯 동그랗게 주변을 쓸었다. 흰 밀빵 같은 가슴이 손아귀에서 뭉그러졌다. 엄지와 검지가 꼬집듯 끝부분을 비비자 키리에가 몸을 비틀었다.

[착하지.]

하지만 나타니엘의 손이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눈을 덮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개가 움직이지 않는다. 손가락이 다시 정점을 꼬집었다.

“아흑!”

교성이 튀어나왔다. 이제 확실해졌다. 아픔이 아니라 쾌감이었다. 가슴 끝에서부터 온몸으로 전류가 오르듯 흥분이 퍼졌다.

[너무 긴장하진 말고. 아프진 않을 테니까.]

뒤에서 나타니엘이 속삭였다. 신의 계시처럼 온화한 어조인데도 발음 구석구석이 색정적이다. 그 목소리가 더 머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기분이, 이상해요…….”

[그러니.]

“하면 안 되는 짓 같아요…….”

[기분 탓이야.]

나타니엘의 손이 가볍게 키리에를 뒤로 당겼다. 키리에는 눈을 꼭 감은 채, 나타니엘의 어깨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모로 떨궜다.

나타니엘의 풀려난 빈손은 키리에의 반대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흐윽…….”

키리에가 재차 신음했다. 손가락 끝은 유두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가슴 몽우리에 닿을 때까지 누르거나, 아프기 직전까지만 쭉 잡아당기거나, 쾌감에 몸이 떨릴 정도로만 비비기를 반복했다.

“아, 흐으…….”

타인의 손이 피부에 닿는 감각에 소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나타니엘의 손길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쾌감의 끝까지만 키리에를 괴롭혔다.

모든 과정이 아주 느렸다. 키리에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제 가슴이 어떤 식으로 남의 손에서 모양을 바꿔 가는지 느끼는 것밖에 없었다.

[착하지, 키리에.]

키리에가 몸을 떨 때마다 악마가 귓가에 그렇게 속삭였다.

[착하지, 키리에. 착하지…….]

기묘한 울림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착하게’ 굴고 싶어졌다. 쾌감에서 비롯된 굴종이었다.

키리에의 흐느낌이 줄어들자 한 손이 피부를 문지르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손끝이 갈비뼈를 더듬거리며 나아 가다, 배를 살짝 눌렀다. 그리고 순식간에 오므린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나, 나타니엘!”

무방비하게 벌어져 있던 사타구니 사이의 둔덕을 그는 예고도 없이 움켜쥐었다.

[왜?]

등 뒤에 있기에 보이진 않았지만, 그녀는 나타니엘의 표정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또 그 순진무구하고 말간 얼굴로 눈을 깜빡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야…….”

태연한 반문에 할 말이 없었다. 키리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제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오목한 골짜기에 뼈가 도드라진 손이 파고든 모양이 적나라했다.

다리를 오므려 보았지만 무력한 저항이었다. 허벅지의 살이 둥글게 모양을 잡으며 이미 안쪽으로 파고든 나타니엘 손을 더 노골적으로 조였을 뿐이다.

키리에는 아예 그 장면에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차피 이젠 어떤 핑계도 댈 수 없었다. 나타니엘이 점잖기에 말하지 않았을 뿐, 이미 아래쪽은 젖을 대로 젖어 있었다.

“누가 보면…….”

[이경의 방에 누가 함부로 들어오겠니.]

“비어 있는 줄 알고…….”

그 순간 나타니엘의 손가락이 갈라진 틈을 아래에서 위로 크게 쓸었다.

“아!”

[그럼 네가 나랑 흘레붙고 있구나 하겠지.]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 젖은 음핵이 눌리자 키리에가 공기를 토했다. 손가락의 넓은 면이 반복적으로 음핵을 눌렀다.

“아, 싫어…….”

[그럴 리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란 걸 아는 눈치였다. 가슴과 비부가 맥없이 손가락 하나에 유린당했다. 살 사이를 파고들었다 빠져나오는 동작에 따라 끈적거리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아!”

장난처럼 음핵이 건드려질 때마다 키리에는 짧게 신음했다. 그때마다 나타니엘은 귀엽다는 듯이 키리에의 어깨를 가볍게 깨물었다.

인형처럼 앉혀져 있던 키리에는 이내 입술을 앙다물었다. 괜히 분한 마음이 들었다. 처음으로 나타니엘의 신체적 반응을 보긴 했지만, 흥분으로 몸을 뒤틀고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내가 만지지 말란 법은 없잖아.’

키리에가 마음을 강하게 먹고 다리를 살짝 벌렸다.

“아, 읏…….”

그 바람에 나타니엘의 손이 더 아래쪽까지 파고들었다. 키리에는 입술을 깨물고서, 다리 사이로 손을 넣었다.

내내 그녀의 몸을 지탱하다시피 하고 있던 크고 두꺼운 물건이 손에 잡혔다. 그 즉시 나타니엘이 눈에 띄게 흠칫했다.

[아.]

어떻게든 손을 움직여 보려던 키리에는 그의 반응에 지레 놀라 동작을 멈췄다.

“나타니엘?”

나타니엘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져,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직 그런 데에 관심 가질 여유가 있단 말이지.]

“네?”

나타니엘의 손이 키리에의 양쪽 허벅지를 잡았다. 미래를 예감한 키리에가 비명을 질렀다.

“안 돼요!”

[아무도 없어.]

“없어도요!”

키리에가 비명을 질렀지만 손을 떼어 낼 순 없었다. 강한 힘에 다리가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좀 더. 착하지, 키리에.]

나타니엘이 그렇게 말하며 연신 등에 입 맞췄다. 당황한 키리에가 고개를 휘저었다.

“싫어……!”

[싫지 않을걸.]

키리에가 분한 마음에 눈물을 뚝 흘렸다. 낯설고 충격적인 상황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과 별개로 흥분이 피어오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긴 아무도 없고, 지금은 나도 너를 볼 수 없고, 넌 그냥 지금껏 안 해 본 자세를 취해 볼 뿐이야. 말을 탄다고 생각하렴.]

“이건 승마도 아니고…….”

[사람들에게는 내가 청황색 말이라고 불리기도 하니, 네가 내 위에 올라탄다면 승마가 아닐 것도 없지.]

미친 사람인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하지만 아무 말이나 해도 설득력 있게 들리는 불공평한 목소리가 귀에 착 달라붙었다. 키리에가 울먹였다.

“하지만 이런 건…….”

[착하지, 키리에.]

나타니엘이 이름을 부를 때마다 키리에의 망설임은 조금씩 녹아내렸다. 등과 어깨, 목덜미에 닿는 키스는 부드럽고 다정했다.

[네게 봉사하고 싶을 뿐이야.]

“봉사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건 겪어 보면 알겠지.]

그 말에 혹한 건 아니지만, 키리에는 입맞춤에 따라 조금씩 다리를 벌렸다. 안쪽에 고여 있던 물이 왈칵 흘러내렸다.

그걸로도 조금 모자랐을까. 나타니엘이 양손으로 키리에의 무릎 뒤편을 잡고 좌우로 당겼다.

“아!”

잔뜩 젖은 음부에 외부 공기가 닿자 허리가 바짝 섰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물을 흘리고 있는지 깨달았다. 엉덩이를 넘어, 걸터앉아 있는 남자의 바지 부분까지 축축했다.

[팔걸이에 올리는 거란다.]

등 뒤의 남자는 몸소 그녀의 다리를 팔걸이 위에 걸쳐 주기까지 했다. 그녀가 자기 손으로 허벅지를 잡게끔 시키는 걸 보면, 그녀의 머리에 어지간히 수치심을 박아 넣고 싶은 게 틀림없었다.

그의 의도는 완벽하게 성공했다. 살면서 이런 자세는 해 본 적도 없다. 키리에가 양다리를 붙잡고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어떡해요…….”

영문도 모르고 눈물이 나왔다. 날개처럼 벌어진 젖은 음부가 움찔거렸다. 자신이 지금 이 상황에 흥분하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이건 너무…….”

[너무?]

“자세가…….”

[자세가?]

음란해요, 라고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타니엘이 뒷말을 알아듣고 담백하게 답했다.

[난 그게 좋은걸. 고상하신 우리 호국경 각하께서 언제 또 이렇게 다리를 벌려 봤겠어.]

조곤조곤 나오는 낯뜨거운 말에 키리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위로는 눈물이 흐르는데도 아래로는 물이 왈칵 나와 흘렀다. 나타니엘이 다정하고 짓궂게 키득거렸다.

[보고 싶지만 네가 분명 울겠지.]

“절벽에서 밀어 버릴 거예요…….”

[목숨 하나면 되나?]

“죽을 때까지 밀어 버릴 거야…….”

[난 죽지 않는데. 그럼 계속 볼 수 있나?]

키리에는 기어코 마음속에 있는 말을 내뱉었다.

“당신 진짜 변태 같아요…….”

[신사보단 낫구나.]

그녀의 목덜미에 잇자국을 남기는 키스와 함께 손가락이 질 안으로 쑥 들어왔다.

“아흑!”

키리에가 몸을 떨었다. 절로 다리가 오므라들었다. 그러자 다른 손이 가슴을 힘껏 쥐고 유두를 비틀었다.

[자세를 유지해야지.]

자세……. 키리에는 젖은 눈을 하고서 순순히 허벅지를 팔걸이 위에 올렸다. 머리가 멍했다.

질척한 소리가 울릴 때마다 하복부가 뜨거워졌다. 걸리적거리는 것이라곤 없었다. 미끈한 물고기가 몸 내부로 들락날락하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었다. 키리에가 젖은 눈을 깜빡였다. 어느 정도는 아파야 하지 않나?

나타니엘은 멍한 키리에의 얼굴을 잡고 키스했다.

[아프지 않을 거라고 했잖니.]

키리에가 목마른 여행자처럼 나타니엘의 입술을 핥았다. 아프지 않다는 사실이 단숨에 그녀의 공포를 희석시켰다. 그게 아니더라도, 배덕감과 쾌락에 안쪽의 살이 움찔거리는 것을 그녀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흐으, 윽…….”

손놀림은 전혀 거칠지 않았다. 사방팔방 쑤셔대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아주 느리고 신사적으로 질 안쪽의 모든 점막을 어루만지고 달래 주는 느낌이었다.

손가락은 한 개에서 세 개로 순식간에 늘어났다. 길고 가는 것이 안으로 쑥 들어갈 때마다 손바닥이 음핵을 약하게 때렸다. 고의일까, 실수일까? 그때마다 키리에는 무릎을 모으며 소리 없이 자지러졌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다. 몸에는 땀에 배어 나왔고 공기는 습하고 더워졌다. 희미하게 정사의 냄새도 나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이 키리에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그때, 유리 온실처럼 꽉 닫힌 공기를 가르고 날카로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각하. 국왕 전하께서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키리에가 부지불식간에 고개를 쳐들었다. 나갔던 넋이 되돌아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나타니엘, 사람이…….”

하지만 나타니엘은 그보다 빨랐다.

[입을 좀 막겠어.]

“읍!”

넓은 손바닥이 키리에의 입을 가렸다. 숨을 쉬거나 소리를 낼 틈조차 주지 않는 강한 힘이었다. 그가 당기듯 고개를 자기 쪽으로 끌어왔고, 키리에는 무력하게 천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젖혔다.

밀치거나 말릴 새도 없이, 남은 손이 아래쪽을 강하게 파고들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속력과 방향이었다.

“읍, 읏! 흐으으……!”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고 말하듯 손가락은 정확하게 키리에가 자극받는 지점을 노렸다. 손가락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질 안쪽을 채우는 감각에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각하?”

시종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키리에가 몸부림쳤다. 애써 정신을 부여잡고 있지만, 강렬한 쾌감에 정신이 사방에서부터 타들어 갔다.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흐으응, 으읍!”

[소리가 나면 들킬걸. 그러지 않는 게 네게 더 좋을 거야.]

나타니엘이 작게 속삭였다. 손바닥과 젖은 살덩이가 맞부딪히는 소리보다도 작았다. 고막을 녹일 듯 달려드는 목소리는 달콤했지만 그녀를 부여잡은 아귀힘은 무자비했다.

쾌락에 몸부림치던 키리에의 다리가 팔걸이 위에서 미끄러졌다. 그 바람에 덜컹, 하고 앞의 테이블이 움직였다.

“각하? 계십니까?”

키리에는 천장의 나무 샹들리에를 보며 흐느꼈다. 붙잡힌 턱 때문에 숨 쉬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그가 입을 막지 않았다면 체면도 잊고 교성을 내질렀을 게 뻔했다.

몇 개인지 알 수 없는 손이 안쪽을 쑤셨다. 잔뜩 조여든 곳을 파고들 때마다 허리가 비틀리고 다리는 벌어졌다 모아들기를 반복했다.

“각하. 국왕 전하의 전언입니다.”

“아으읏……!”

복도 너머에서 들리는 시종의 망설이는 발소리가 쾌락을 가중시켰다. 잠기지도 않은 문 건너편에 사람이 있는데, 이런 곳에서 체액을 뚝뚝 흘리며 농탕질을 벌이는 건 그녀의 세계에는 결단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함락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물질이 들어올 때마다 사내의 손바닥에 잔뜩 부푼 작은 음핵이 비벼졌고, 키리에는 날개 잃은 나비처럼 바들거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흐, 아읍, 아아……!”

“각하, 안에 계신 거지요?”

입이 막혔어도 신음은 계속 높아졌다. 시종이 슬슬 이상함을 느꼈는지 한 번 더 문을 두드렸다.

“각하, 혹시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 아, 아아!”

[쉬. 그건 좀 위험해.]

달래듯 말하면서도 요사스럽게 성감대를 자극하는 손짓에 정신은 이미 혼미해졌다. 일부러 손가락을 벌린 채 안쪽을 자극하자 그 틈으로 찬 공기가 들어와 안쪽의 뜨거운 근육을 더 자극했다. 음탕하고 난잡한 소리와 귀를 자극하는 낯선 이의 목소리, 말없이 그녀의 뒤를 받치면서도 그 모든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는 나타니엘의 존재 때문에 온몸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으응, 읍, 으으으으……!”

결국 키리에가 울부짖듯 신음하며 절정에 올랐다.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 안쪽을 뱀처럼 누비던 손가락 때문인지, 음핵에 연속적으로 가해지던 약한 자극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둘 다였는지도 모른다.

나타니엘이 손가락을 빼자 끈적이는 물이 주륵 흘러 손가락 사이로 오목하게 흘러들었다. 나타니엘이 중얼거렸다.

[단내.]

나타니엘은 재밌다는 듯이 그것을 바라보다가, 손바닥으로 그녀의 음부 전체를 감쌌다. 그리고 작은 털짐승을 어루만지듯 손을 쥐락펴락했다.

[부드러워.]

그때마다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은 예민한 부위에 찌릿하고 전기가 올랐다. 키리에가 흐느꼈다.

“하지 마요…….”

[예쁘잖니.]

“진짜…….”

키리에는 문장을 채 끝내지도 못했다. 그녀는 나타니엘이 인형처럼 늘어진 제 몸을 끌어안고 여기저기를 움켜쥐는 것을 느끼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각하……?

그걸 방해한 건 아직 떠나지 않은 시종이었다. 나타니엘이 마지막으로 키리에의 음부를 손가락으로 훑고서 그녀를 안아 올렸다.

[저 시종은 영 눈치가 없구나.]

“이경이니까…… 말을 못 전하면 안 되잖아요…….”

축 늘어진 키리에를 나타니엘은 길고 낮은 응접실 테이블 위에 올렸다. 차가운 나무가 등에 닿자 키리에가 다시 파르르 몸을 떨었다.

아직 젖어 있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를 응시하는 보라색 눈동자를, 나타니엘은 문득 혀로 맛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잠깐만 여기에 있으렴.]

키리에는 지쳤는지 몸을 모로 웅크리고선 눈만 깜빡였다.

나타니엘은 정말 마지막으로 그녀의 다리 사이를 손가락으로 건드리고서 몸을 돌렸다. 어느새 풀려 있던 앞섶도 금욕적이리만치 단정하게 여민 그가 문을 반쯤 열었다.

[무슨 일이지?]

“아! 국왕 전하께서 만찬을 바깥에서…….”

키리에는 응접실 테이블에 누워서 흐린 시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등 뒤로 넘긴 나타니엘의 손가락이 여봐란듯이 젖어서 반들거렸다. 제가 벌인 정사의 흔적에 키리에는 다시금 울컥하는 수치심을 느꼈다.

걱정도 들었다. 나타니엘은 뒷짐을 지지 않는다. 뭔가 수상쩍은 짓을 했다고 의심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키리에는 뒤늦게 나타니엘이 뒷짐을 지고 말고를 아는 건 자신 정도라는 걸 깨달았다.

“하아…….”

작은 숨이 튀어나왔다. 나타니엘이 잠시 그녀를 돌아보려는 것 같았으나, 다시 시종을 바라보았다.

[알았으니 돌아가.]

나타니엘이 문을 닫았다. 시종이 서둘러 도망치는 발소리가 들렸다가 이내 잦아들었다.

돌아선 나타니엘은 키리에가 테이블에 가만히 누워 지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다리 사이가 흠뻑 젖어 미끈거리는 데다, 땀에 젖은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수초처럼 우아하게 퍼져 있었다. 정확히 그가 내려놓은 그대로였다.

나타니엘은 일순 치밀어오르는 생각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신사의 탈을 쓴 채 그녀에게 다가갔다.

[쓸데없는 만찬 이야기더군. 오레윈브리지는 아무래도 나를 방해하려고 태어난 가문인가 본데.]

“아하하…….”

[내가 가지 말자고 해도 너는 가겠다고 하겠지.]

“약속이니까, 가야죠……. 시간에 맞추려면 지금 씻어야…….”

키리에가 팔에 힘을 주어 상체를 지지했다. 그러다 그 상태로 멍하니 나타니엘을 응시했다.

나타니엘은 습관적인 미소를 짓고 있지 않았다. 다정을 연기할 여유가 없는지 묘하게 포식자의 눈이다. 말은 하지 않아도 그녀를 샅샅이 관찰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벌거벗은 상태로 땀과 애액투성이인 그녀와 달리 나타니엘은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여자 팔뚝만 하던 엄청난 물건도 어떤 요령인지 더는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키리에가 힘없이 시선을 내렸다.

“억울해…….”

나타니엘이 애매하게 미소 지었다.

[정말 억울해할 쪽은 나라고 생각하지 않니?]

“당신이 너무 태연하니까…….”

[그래. 내 생각대로만 하면 너는 분명 국왕과의 만찬에도 못 가고 엉엉 울게 될 테니, 가까스로 태연하게 굴어드리고 있잖니.]

말이 길다. 진짜 좀 억울한가 보다. 키리에가 입꼬리를 당기며 우물쭈물했다.

“그럼 다음엔 안 태연해도 돼요…….”

나타니엘의 이성이 아주 잠깐 사라졌다가 되돌아왔다.

[키리에 뷰캐넌…….]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타니엘이 잠시 숨을 골랐다. 그는 곧 부드럽게 키리에의 몸을 안아 올렸다.

[씻겨드리지.]

“나쁜 사람…….”

[하지만 넌 날 사랑하잖아.]

나타니엘이 대답과 함께 키리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키리에는 나타니엘의 옷깃을 부여잡고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자기가 더 나 좋아하면서…….”

[알아주니 고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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