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선택
서류를 보던 키리에의 펜이 멈췄다. 그녀가 잠시 나타니엘을 떠올렸다.
나타니엘이 무너질 것 같이 보인 건 두 번째였다. 처음은 프로노이아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집에서였고, 그때도 그는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애처롭게.’
키리에가 펜을 까딱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레쇼 경이 말한 사흘이 오늘이야. 어째서 사흘이지?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나나?’
키리에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도는 변화가 없었다. 저택의 재건도 무사히 진행되고 있었고, 다른 공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프로노이아의 마법사들이 찾아와 “마법이! 마력이! 하지만 영주님을 믿습니다!” 같은 말을 하곤 했지만, 자세히 물어보면 정작 그들도 무슨 일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키리에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뭐가 됐든 그녀는 지쳤고, 매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생각이었다. 아마 평생 그렇게 살아야겠지만, 상관없었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는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리모가 들어왔다.
“아, 아가씨.”
“무슨 일이야? 바쁘니까 용건만 간단히 하렴.”
키리에가 시선도 옮기지 않고 말했다. 리모가 침을 꿀꺽 삼키고 답했다.
“왕세자빈 저하가…… 찾아오셨어요.”
키리에의 펜이 멈췄다. 종이를 찌른 잉크가 방울방울 흘러내려 검은 점을 키워 갔다. 불안이 꼭 그만큼 마음속에서 번져 나갔다.
“……곧 가겠다고 전해.”
루비니아 오레윈브리지는 온통 검은색 일색이었다. 목 끝, 손끝까지 덮은 검은 드레스가 섬찟한 인상을 주었다. 손바닥만 한 모자에 달린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루비니아가 말했다.
“나랑 가요, 키리에 뷰캐넌 양.”
키리에가 그녀 앞에 마주 앉아 눈을 깜빡였다. 루비니아는 천천히 얼굴을 가린 베일을 걷어 냈다.
“나랑 가요. 당신은 나랑 가야 해.”
키리에는 루비니아의 뺨에 있는 상처를 발견했다. 맞은 자국이었다.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슬퍼졌다. 세상에는 이토록 불행이 가득하다. 사람들의 삶이 이러하니 나타니엘이 신처럼 여겨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왜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까지 그곳에 계시는 건가요, 저하?”
루비니아가 코웃음 쳤다.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내가 볼 땐 당신이 더 답답해. 적어도 나는 내가 원해서 이 자리에 있는 거예요.”
루비니아의 말에 키리에가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맞는 말이다. 자신은 죽지 못해 여기 있을 뿐이다.
“국왕 전하가 저를 데려오라고 하던가요.”
“나랑 가요.”
“가지 않으면 저하는 어떻게 되나요?”
“알 바 아니잖아요? 나랑 가요.”
“가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거절인데도 루비니아는 대답이 마음에 든 눈치였다. 하지만 곧 살쾡이처럼 눈을 치떴다.
“그래서 오늘 추도식을 하기로 했어요.”
“네?”
“죽은 근위병들. 불명예 제대였죠.”
키리에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녀는 다음에 루비니아가 할 말을 예측할 수 있었다.
“오늘 추도식으로 그들을 명예롭게 전사한 것으로 처리할 거예요. 모두 유공자로 대우하고, 국립묘지에 안치할 거고요. 뷰캐넌 가문에서 그동안 금전적인 지원은 해 줬지만, 명예는 왕가만이 줄 수 있죠.”
“하지만, 묘를 파헤쳐서 유골을 버렸다고…….”
“전설경의 명으로 왕가가 실행했죠. 설마 정말 그걸 내다 버렸을 리는 없잖아요? 그렇게 써먹기 좋은 패를.”
키리에가 침묵했다. 루비니아의 눈빛은 무심했다.
“아론 피츠. 그도 명예를 되찾을 거예요.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훈장을 주기로 했어요. 이례적인 일이죠.”
분명히 그렇다. 키리에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 이례적인 일이 당신이 추도식에 참여하지 않으면 이뤄지지 않아요.”
“제가 간다면.”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의 명예는 회복시켜 줄게요. 물론 당신이 날 믿는다면 말이지만요.”
키리에가 눈을 감았다.
아론과 멜로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슬픈 것은 이제 키리에가 그들의 죽음에 무뎌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삶의 고난에 감정의 예리함은 나날이 뭉툭해진다. 그러니 더 늦어서는 안 된다.
결국 나타니엘의 말이 맞았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탈출구는 죽음뿐이다.
키리에가 천천히 눈을 떴다.
“……다행이네요. 나와 내 아버지가 동시에 죽었을 때 뷰캐넌 가문을 어떻게 할지 어제 막 문서화해 놨는데.”
루비니아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말을 믿어요?”
“하겠다고 한 건 하는 분이니까요.”
“…….”
루비니아의 녹색 눈이 차분해졌다. 그녀의 속에서 어떤 결단이 내려진 듯했다.
“그래요. 여기까지 왔으니 말하는 거지만, 오면 당신은 죽을지도 몰라요.”
“…….”
“남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겠어요?”
키리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키리에는 느린 걸음으로 복도로 나와, 아무도 없는 작은 정원으로 들어섰다.
“레쇼 경.”
짧게 중얼거리자마자 레쇼가 풀을 밟으며 나타났다. 여전히 거대한 검을 허리춤에 느슨히 찬 모습이었다.
〔나타니엘은 아침에 저택을 떠났습니다.〕
키리에가 멈칫했다. 뉘앙스가 이상했다.
“떠났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녀의 반문에 레쇼는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답했다. 아마 그는 영영 제 목적을 밝히지 않을 요량인 것 같았다.
레쇼가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라는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키리에는 침묵 끝에 시선을 피했다.
“그렇군요.”
〔그리고 나는 당신이 뭘 하든 제재하지 않을 겁니다.〕
“뭘 하든요?”
〔예.〕
키리에가 물끄러미 레쇼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키리에는 그에게서 그녀가 루비니아를 따라가기를 바라는 기색을 읽어 냈다.
한참 뒤, 키리에가 옅게 미소 지었다.
“경은 사실 내가 죽기를 바랐거나, 혹은 바라는군요.”
레쇼는 대답 대신 마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였다.
키리에가 몸을 돌려 루비니아가 있는 방으로 돌아가 말했다.
“출발하죠, 저하.”
***
셀로 들어가는 동안 키리에는 루비니아와 손을 잡고 걸었다.
“마법으로 보호되어 있어요.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도록.”
루비니아가 그렇게 말했다. 손을 잡는 행위가 좀 짜증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셀의 분위기는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몹시 어둡고 침체된 분위기였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왕궁이 왜 이렇게 됐죠?”
키리에의 질문에 루비니아는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본디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의 마법으로 영구적인 푸름을 간직하고 있던 정원이 노랗게 말라 죽어 있었다.
“전하의 마법이에요.”
루비니아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마법이요?”
“네. 뭔가를 하시는 것 같던데, 잘은 모르겠어요. 난 마법은 문외한이니까.”
루비니아의 태도가 지나치게 태연했기 때문에, 키리에는 그녀가 사실은 그 마법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키리에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요?”
“많이들 그만뒀어요. 휴직계를 내거나요. 특히 병사들은 대부분이 그만두었죠. 뭐,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네?”
“모르나요?”
키리에가 눈을 깜빡였다. 루비니아가 피식 웃었다.
“얼마나 애지중지하면.”
나타니엘의 이야기인 것이 확실했다. 키리에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루비니아는 쾌활하게 걸음을 옮겼다.
“기분 나빠하지 말아요. 나쁜 의미는 아니니까. 그냥 사실이 그렇다는 거죠. 뭘 하든 나라, 세계, 뭐 이런 단어가 나오는 사람이 무슨 일을 벌이겠다는데 고작 인간이 어떻게 그걸 다 파악하겠어요.”
위로인지 타박인지 알 수 없었다. 키리에가 입을 다물었다. 루비니아는 키리에의 뒤를 흘끔거렸다.
“그 시녀는 안 왔네요. 들여보내 주지도 않을 거지만, 좀 더 생떼를 쓸 거라고 생각했는데.”
키리에가 안네마리를 떠올렸다. 애초에 두고 올 생각이었지만, 먼저 저택에 남아 있겠다고 말한 건 안네마리 쪽이었다.
‘저는 할 일이 있어요, 아가씨.’
가라앉은 얼굴이 비장하여,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두고 왔어요. 좋은 꼴을 볼 리 없으니까.”
“예리해라.”
루비니아가 가볍게 말했다.
“다 왔어요.”
한참을 왕궁의 지하로 내려가던 루비니아가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녹색 눈이 엄정해졌다.
“처신 똑바로 해요.”
경고일까, 걱정일까. 키리에가 시선을 정면으로 옮겼다. 문이 열리고, 기괴한 마법진이 가득 찬 방이 드러났다.
찬란한 금빛이었지만 한눈에 봐도 불길한 기운이 이글거리는 마법진이었다. 주변으로는 수십 명의 마법사가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몇 걸음 안으로 들어선 키리에가 멈칫했다. 마법진의 중앙에 진저 오레윈브리지가 있었다.
“키리에 뷰캐넌 양이 오셨군.”
비틀거리며 일어난 진저 오레윈브리지는 전과 달리 초췌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앙상한 뼈 위에 가죽만 얹은 것 같은 몰골에 키리에는 내심 놀랐다.
“제 발로 올 줄은 몰랐네.”
국왕이 루비니아를 흘낏거렸다. 루비니아는 애교스러운 걸음걸이로 국왕에게 다가갔다.
“아이, 전하!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죽은 근위병들을 이용하면 반드시 올 거라고요!”
“그래. 그대의 말이 맞군.”
루비니아를 보는 국왕의 눈에 호감이 서려 있었다. 그를 보며 키리에는 루비니아가 기어코 국왕까지 함락시켰음을 깨달았다.
“자, 키리에 뷰캐넌 양. 오랜만이지?”
국왕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왕홀을 들고 갑옷을 입은 그녀는, 마치 오래전에 전장에서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 것처럼 보였다.
키리에가 짧게 묵례했다. 국왕이 피식 웃었다.
“전설경과 같이 지내더니 이제 윗사람에 대한 예의도 다 잊어먹었나 보군.”
“산 날보다 살 날이 적으니 그게 무슨 흠이 될까 합니다.”
국왕이 광소를 터뜨렸다. 녹색 눈이 살차게 번뜩였다.
“맘에 들어. 그 배짱이 좋았지. 사람은 모름지기 가슴 속에 심지 하나는 있어야 하는 법이거든. 비굴할 바에야 죽는 게 낫지 않나?”
국왕이 말을 마치며 루비니아를 한 번 바라보았다. 루비니아는 모멸감은커녕 뺨을 붉히고 생긋 웃기만 했다. 강인한 여자였다.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사람으로 태어나 무엇에 살고 죽을지는 본인이 선택할 일입니다. 그를 어찌 남의 혓바닥으로 재단하겠습니까.”
키리에가 약간 미소 지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게.”
국왕의 눈빛에 광기가 한 점 떠올랐다.
“허나 명예는 왕가만이 하사할 수 있는 법.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죽든, 타인의 인정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그대는 아주 잘 알지 않나?”
키리에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를 알기에 여기 왔습니다. 약속은 지켜 주십시오.”
“그쯤이야.”
국왕이 성큼성큼 키리에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짝!
키리에의 고개가 돌아갔다. 키리에의 뺨을 때린 자세 그대로, 국왕이 씨근거렸다.
“이가 갈리는군. 네가 그를 깨우지만 않았어도…….”
키리에가 시선만을 움직여 국왕을 오시했다.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전후를 따지자면 시조가 전설경을 배신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옳은 소리 좋아하는 건 여전하군그래.”
국왕이 한 번 더 손을 휘둘렀다. 사슴뿔보다 가는 손 어디에 그런 힘이 있는지, 키리에는 주먹을 맞고 쓰러졌다.
“그래, 키리에 뷰캐넌은 제 발로 여기에 왔고, 전설경 나타니엘은 제 발로 포베 곶으로 향했군. 실로 기이하지만 흡족하다 할 일이야.”
낯선 단어에 키리에가 멈칫했다.
‘포베 곶?’
그가 그런 곳에 가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동시에 노마법사의 말이 떠올랐다.
‘저 방향으로부터 강력한 마력이 느껴져서 말입니다.’
국왕이 나타니엘을 죽이기 위해 뭔가를 준비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레쇼에게 자신을 맡긴 것을 보면, 나타니엘도 필시 그걸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키리에의 마음에 불안이 스쳤다.
[오늘 하루만.]
그렇게 말할 때 그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지?
몸에 밴 오연한 태도에 가려져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괴로움에 젖어 든 목소리였던 것 같다.
키리에가 말이 없자 국왕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코웃음 쳤다.
“뭘 생각 중이든 소용없네. 준비는 이미 끝마쳤어. 그대가 여기 있으니 전설경도 함부로 공격하진 못하겠지.”
국왕이 손가락을 튕겼다. 바닥의 금빛 진에서 빛이 더 강해졌다.
“그렇다 한들 방심은 금물이야. 그렇고말고.”
키리에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뭘 할 생각이에요?”
“그는 기사 중의 기사. 포베 곶에서 만나자고는 했지만…….”
그녀가 오만하게 말한 뒤 왕홀을 쥐고 마법진의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법사가 검사 앞에 나서는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잖은가.”
***
포베 곶.
보잘것없는 수의 병사들과 마법사들이 겁에 질린 눈으로 나타니엘과 대치 중이었다.
나타니엘은 그들을 무시한 채 산책하듯 포베 곶과 이어진 해식 절벽 근처를 걷고 있었다.
[오래도 걸리는군.]
그가 중얼거리던 찰나였다.
“온다! 준비해!”
마법사들이 수런거리는 소리가 그의 예민한 청각에 잡혔다. 나타니엘이 걸음을 멈췄다.
동시에 바닥에서 백여 각, 백여 주의 술식이 경고 없이 빛을 발했다. 나타니엘이 서 있는 지역 전체에서 금빛 마력이 하늘로 치솟았다.
동시에 밤이 찾아온 것처럼 하늘이 어두워졌다. 나타니엘이 고개를 들었다.
마을 하나는 거뜬히 삼킬 크기의 다차원 공간 마법이 둥글게 열리고 있었다. 태양을 가린 미늘 같은 남보라색 막 너머에서, 수백여 개의 금빛 쐐기가 미끄러지듯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 불가사의 차원이 대략 십여 개.
나타니엘이 놀란 듯 미소 지었다.
[제법이네.]
마법이 내리꽂혔다.
***
가히 폭격이었다. 수은으로 만든 거울 같은 상에 포베 곶이 터져 나가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키리에가 저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멈추지 마라, 이 정도에 죽을 놈이 아니야.”
국왕이 쥔 왕홀은 들끓는 마력으로 마치 거대한 번개처럼 보였다. 마법의 매개인 왕홀에서 마력이 타닥거리는 소리를 낼 때마다, 포베 곶과 이어진 머리 위의 게이트도 요동쳤다.
“공격!”
국왕이 노호를 내질렀다.
그에 맞춰 마법진을 둘러싼 다른 마법사들은 경건하고 엄숙하게 진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부터 한 명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키리에에게 루비니아가 다가왔다.
“마력을 불어넣는 거예요. 시조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의 마법을 익힌 건 국왕 전하뿐이고, 따라서 전설경을 상대할 수 있는 것도 전하뿐이죠. 마법사들은 마력을 제공하는 게 전부예요.”
루비니아의 말에 답하듯 국왕이 왕홀을 사납게 휘둘렀다. 마법사가 한 명 더 쓰러졌다. 눈코입에서 피 흘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했던 건가요?”
“전하의 뜻이에요.”
루비니아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보다 당신이 여기 있는 걸 아는 모양인데요. 공격을 안 하는 걸 보면. 전설경 실력이면 저기서도 어떻게든 공격할 수 있지 않아요?”
“……몰라요. 그런 이야긴 하지 않으니까.”
“그래요? 흐응. 사실 부탁만 잘 들어주면 전쟁 병기로 딱인데.”
키리에가 입술을 깨물고 다시 국왕을 바라보았다. 왕홀이 번쩍였다. 포베 곶에는 천둥, 번개가 쳤다. 아무리 큰 전쟁도 일시에 끝낼 만한 어마어마한 마법이 단 한 사람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큭!”
어느 순간 국왕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마법 병단의 단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외쳤다.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게이트를 너무 많이 여셨습니다! 인간의 몸으로는 감당할 수가……!”
“호들갑 떨지 마라……. 전설경은?”
국왕이 피를 닦으며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허공에 띄워진 마법의 은반으로 향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부드럽고 엄숙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제법이긴 한데, 좀 부족하구나.]
구름처럼 거대한 연기 속에서, 아주 크고 검은 것의 그림자가 언뜻 보였다.
아마 모두가 잠시간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이나 짐승의 실루엣이라기엔 부정형(不定形)이었다. 그리고 분명 연기에 가려져 있는데도, 그것의 본체는 왠지 그 연기보다 더 클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이윽고 연기를 꿰뚫고 나타니엘이 걸어 나왔다. 흰 검을 들고 옅게 미소 띤 채. 예복에는 먼지 하나 없었다.
[실망시키지 말아다오.]
왕궁에 정적이 흘렀다.
내내 그를 보아온 키리에마저 잠시간 생각을 멈췄다.
압도적인 강함. 여유. 그리고 비정한 아름다움.
홀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하!”
국왕이 자지러지게 목소리를 높였다. 목소리에 광기가 서렸다.
“그렇게 나와 줘야지!”
그녀의 외침과 함께 마법사들이 피거품을 물며 일제히 쓰러졌다. 지금까지와는 결이 다른 마법이 시전되고 있었다. 포베 곶와 왕궁을 이어 주는 머리 위의 게이트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냈다.
“죽일 수…… 있다! 죽일 수 있어! 발라브리가는 너를 잠들게 하는 데에서 그쳤지만, 나는 널 죽일 것이다!”
국왕의 입에서 피가 흐르다 못해 터져 나왔다.
“아직, 아직이야, 아직 더……!”
국왕은 각혈하면서도 왕홀을 놓지 않았다.
루비니아는 어느새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키리에는 벽에 붙어 눈앞의 일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핫!”
마침내 국왕의 왕홀과 바닥의 술식에서 빛이 한순간에 일소했다.
키리에는 그 순간, 마법의 상 너머에 있는 나타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그럴 리 없는데도.
찰나가 주마등처럼 길었다.
키리에는 살아생전 누군가에게 그렇게 간절한 눈빛을 받을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 나타니엘을 만났을 적엔 그 눈이 얼음처럼 맑고 투명하여 참으로 인간 같지 않다 여겼는데. 이제 와 마주하니, 그렇기에 그는 늘 그 안에 든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불현듯 키리에는 알 수 있었다.
살든 죽든, 그는 다시는 사람들 눈 앞에 나타나지 않겠구나. 겨울이 잘 어울리는 저 고고한 멸종 위기종 같은 사내는, 왔던 것처럼 홀연히 어딘가로 사라지겠구나. 그렇게 앞으로의 영원을 홀로 짊어지기로 했구나.
그의 세계이고 전부이고 모든 것인 키리에 뷰캐넌을 위해.
[…….]
잠깐이지만 파랗고 아름다운 눈이 뭔가를 눌러 참듯이 흔들렸다. 입술 역시 뭔가를 말할 것처럼 달싹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입을 꾹 다물고, 나른하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야말로 차고 올연한 겨울의 왕 같은 모습이었다.
눈을 찌르는 금빛이 작렬했다. 키리에가 백작하는 시야에 눈을 질끈 감았다.
***
그 시각, 세자르 뷰캐넌은 뷰캐넌 저택 안에 있었다.
나타니엘은 그에게 ‘끝내겠다’고 말했고, 세자르 뷰캐넌은 그 말을 믿고 안심하고 있었다.
모든 게 잘 풀리리라 생각했다.
그때, 돌연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큰일이에요!”
문을 강하게 열어젖힌 안네마리가 외쳤다.
“나타니엘 님이 폭주했어요!”
세자르는 당장 서류를 내려놓았다.
“무슨 말이냐?”
“나쁜 냄새가 났어요! 위험해질 거예요! 아가씨가 가주님을 안네마리에게 맡겼어요!”
“지금 나더러 네깟 시녀의 말을 믿으라는 거냐?”
세자르가 마뜩잖은 얼굴로 대답한 순간이었다.
큰 지진이 일었다. 아니, 지진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큰 천둥소리였다. 반사적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검은 구름이 왕궁 위를 휘감고 있었다.
세자르의 곧은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는 바로 몇 가지 서류를 챙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차로 가지.”
“네!”
안네마리가 고개를 끄덕이곤 세자르의 뒤를 따랐다. 세자르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는 위치가 되자마자, 조바심 가득하던 안네마리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
한참 뒤, 키리에가 눈을 떴다.
웅장한 예배당 같던 지하는 초토화되어 있었다. 여전히 불길한 빛을 발하고 있는 술식 주변으로 마법사들이 뿌리 뽑힌 잡초처럼 널브러진 채였다. 서 있는 건 키리에뿐이었다.
“흐어…… 어어…….”
국왕이 왕홀에 체중을 실은 채 헐떡였다. 시랍화된 시체처럼 변한 몸은 피부마저 갈색이었다.
“전, 전설…… 전설경은……?”
그녀가 중얼거리며 숨을 헐떡였다. 고개를 들 기력도 없는 모양이었다. 키리에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을 바라보았다.
“아…….”
그녀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연기가 걷히자 더 이상 곶이라고 부를 수 없는 풍경이 드러났다. 무너진 땅 어디에도 나타니엘의 모습은 없었다.
“……거짓말.”
그녀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타니엘이 죽을 리가…….”
“죽었다고?”
국왕이 고개를 홱 쳐들었다.
“죽었나……? 죽었어……?”
그녀가 상으로 다가갔다. 포베 곶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뭔가를 말하는 것 같았으나, 잘 들리지는 않았다.
국왕의 녹색 눈이 핥듯이 상을 훑어보는 동안, 몇 분이 흘렀다. 죽은 척이었다면 진작 살아나 사람들을 놀래줬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포베 곶은 오래도록 고요했다. 부서진 땅으로 바다가 밀려드는 잔잔한 풍경이었다.
천천히, 국왕의 낯에 승리자의 환희가 떠올랐다.
“내가…… 내가 이겼다……. 내가! 내가 이겼어! 내가 전설경을 물리쳤다! 내가 전설경을 죽였단 말이다!”
낄낄대며 춤을 추는 국왕에게서 키리에는 나타니엘보다 더한 광기를 느꼈다.
자식의 복수? 그렇지 않다. 국왕은 단 한 번도 줄리아 오레윈브리지의 이름을 꺼낸 적이 없었다.
저런 몰골이 되면서까지 갖고 싶은 힘이란, 우월감이란 무엇인가.
그런 자가 권력의 정점에 자리해 있다는 점에서 키리에는 지금껏 맡아 보지 못한 지독한 악취를 느꼈다. 아마 나타니엘은 내내 맡고 지냈을 그런 음습한 냄새였다.
“이상…… 기운이……!”
그때 상 너머에서 띄엄띄엄 외침이 들려왔다. 포베 곶에 나가 있던 마법사의 목소리였다.
“검은 것……!”
마법의 거울 너머에서 마법사 한 명이 바다 쪽을 가리켰다.
국왕과 키리에가 무심결에 그곳을 바라보았다.
거짓말 같은 광경이었다. 밤이 몰려들고 있었다. 칼로 자른 듯한 경계였다. 햇빛은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바다에서부터 땅이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저건……?”
국왕이 중얼거렸다.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새까만 어둠이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들을 향해 기어오기 시작했다.
“저게 대체…….”
국왕이 눈살을 찌푸린 순간이었다. 검은 것이 갑자기 속도를 빨리하더니, 가장 가까이에 있던 마법사의 발밑에 닿았다.
“……!”
이어진 광경에 키리에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마법사의 몸을 어둠이 메뚜기 떼처럼 기어올랐다. 그가 벌레를 떼어 내고 싶은 사람처럼 몸을 털며 비명을 질렀지만 소용없었다. 이내 그의 온몸이 새까맣게 덮였다. 꼭 그 부분만 검은 종이로 덧칠한 것처럼 비현실적인 검정이었다. 마법사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그대로, 검고 꿈틀거리는 것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법은 끊어졌다. 더는 포베 곶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모습은, 수도 방향으로 빠르고 낮게 기어오는 어둠이었다.
국왕이 눈을 부릅뜬 채 가슴을 들썩였다. 그녀는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키리에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조금 달랐다. 그녀는 기시감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종말…….”
국왕의 고개가 돌아갔다. 녹색 눈이 비이성적인 빛으로 희번덕댔다.
“넌 저게 뭔지 아는구나.”
국왕이 순식간에 키리에에게 다가와 멱살을 움켜쥐었다.
“저게 뭔지 말해! 설마 저게 지금 여기로 오고 있는 거냐!”
빼빼 마른 몸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의 강한 힘이었다. 국왕은 아예 키리에의 턱밑에 왕홀을 들이댔다.
“말해! 전설경이 무슨 꿍꿍이속인지 말해! 기껏 방패막이로 쓰려고 네년을 데려왔는데 설마……!”
“아, 잠깐만요. 멈춰 주실래요?”
그때, 국왕의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키리에와 국왕이 동시에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시선 끝에 루비니아가 있었다. 그녀는 쓰러진 마법사들을 넘어, 손도끼를 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루비니아 양?”
키리에와 국왕이 동시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루비니아와 손도끼와 웃는 얼굴이라는 아주 괴상한 조합이었다.
“하, 정말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어쨌든 전설경이 날 살려 준 건 사실이잖아요? 게다가 내가 또 빚지고는 못 살거든.”
반면 루비니아는 쾌활하고 짜증스러운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 전설경이 부탁까지 하는데 어쩌겠어. 키리에 뷰캐넌이라도 지켜 줘야지. 당신, 나한테 고맙다고 해야 해요.”
“지금 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고. 기껏 왕세자빈이 되었는데 국왕은 미쳤지, 완전 인간 같지도 않지, 말인즉 죽을 때까지 왕을 해 먹겠다는 소리 아냐? 그럼 난 언제 왕비 하라는 거야? 이든 같은 똥 덩어리의 뒤치다꺼리 하는 것도 짜증 나는데, 평생 너한테 굽신거리며 살아야 한다고?”
“……지금 그대 내게 ‘너’라고 말한 건가?”
국왕이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멍한 얼굴로 물었다. 루비니아가 새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입으로 그랬잖아. 내가 시골 출신이라 위아래가 좀 없어.”
루비니아는 쉼 없이 말하며 국왕 앞에 다다랐다.
약간의 눈치싸움 후, 국왕이 잽싸게 왕홀의 끝을 루비니아에게 겨눴다. 국왕의 자신만만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이럴 줄 알았다, 이 건방진 계집!”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루비니아가 코웃음 치며 녹색 보석이 박힌 반지를 바닥에 던졌다.
“이거 찾니? 지독한 걸 걸어 놨더라?”
“어떻게……!”
국왕의 눈이 커졌다. 루비니아가 방긋 웃었다.
“지옥에서 전설경한테 물어보세요, 전하!”
루비니아가 힘차게 도끼를 휘둘렀다. 왕홀이 두 동강 났다. 일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크헉!”
국왕은 자리에서 무너지며 다시 대량의 피를 토했다.
동시에 머리 위에서 바람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소리가 귀청을 찢는 크기로 울려댔다. 마법과 시전자를 잇는 매개가 부서지자, 게이트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이…… 은혜도 모르는 년이……!”
국왕이 피에 젖은 몰골로 루비니아에게 손을 뻗었다. 루비니아는 가까스로 그것을 피해 키리에 뒤에 숨었다.
“이제 어떡하죠?!”
루비니아가 무책임하고 발랄하지만 다급하게 외쳤다.
“어떻게 된 거예요?”
“몰라요! 마법 시전 도중에 매개를 부수면 마력이 역류한다고 들어서 부쉈을 뿐이에요!”
“누구한테요?”
“누구한테겠어요! 저기 널브러져 있는 마법사들한테서지!”
루비니아가 다 똑같아 보이는 로브 쓴 마법사들을 가리켰다.
그때, 다시 한번 머리 위에서 콰드득, 소리가 났다. 이제는 건물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키리에가 굳어 버린 루비니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여기서 나가야 해요!”
“거기…… 서!”
국왕이 노호를 내질렀지만 돌아볼 겨를조차 없었다.
두 사람이 왕궁의 너른 공터로 빠져나온 순간, 갈 곳 잃은 마력은 위로 향했다. 왕궁이 지하에서부터 터져 나갔다.
무사히 빠져나온 키리에와 루비니아는 멍하니 눈앞의 폐허를 바라보았다.
루비니아가 불안하게 물었다.
“……죽었겠죠?”
“…….”
키리에가 대답을 망설였다. 상대가 상대이니 죄책감은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의 죽음이 즐겁지도 않았다.
반면 루비니아는 좀 다르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안 죽었으면 어떡해요? 화, 확인하러 가야 하나?”
“…….”
“대답 좀 해 봐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키리에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다 멈칫했다. 굳은 피에 손가락이 걸렸다.
“종말이 오고 있는 것 같아요.”
“네?”
“포베 곶이 여기서 거리가 꽤 있긴 하지만, 속도가 빨랐어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네? 대체 뭐라는 거예요?”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키리에가 말하다 말고 멈칫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정보가 단숨에 스쳐 지나갔다. 키리에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니. 그 반대예요. 도망치는 게 아니라 숨어야 해요!”
키리에가 루비니아의 팔을 잡았다.
“문을 닫으라고 말해야 해요! 그건 초대받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으니까!”
거기까지 내뱉은 키리에가 다시 굳었다.
어째서 나타니엘이 자신을 여기에 두었는지, 어째서 프로노이아의 마법사들을 불렀는지, 어째서 굳이 그 먼 포베 곶으로 향했는지, 어째서 마지막에 미소 지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왕궁은 무너졌다. 국왕은 죽었다. 이경은 왕가를 지지하지 않았고, 왕가는 몰락할 것이다.
난세는 영웅을 만들고, 그 영웅은…….
“멍청이!”
키리에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며 외쳤다. 루비니아가 지레 놀라 움찔했다.
“나, 나, 나한테 하는 말이에요, 지금?!”
“하……!”
키리에가 속을 달래려 한숨을 쉬었다. 속이 들끓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 왕궁이 무너질 정도면 벌써 경보가 발령돼야 했는데, 기미가 없어요. 뭔가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 그게 국왕이 오늘 수도에 무슨 일이 있어도 반응하지 말라고 말해 놔서 그래요…….”
키리에가 이마를 짚었다. 시간은 없는데 방법도 없었다. 상황을 모르는 루비니아는 초조한 모양이었다.
“대체 종말이 뭔데요?! 뭔가 잘못 안 거 아니에요? 그가 말한 것 중에 이런 상황은 없었다고요! 분명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했단 말이에요!”
“나타니엘을 믿어요?”
“아, 그렇게 말하면 할 말 없고요!”
루비니아가 발을 동동 굴렀다. 무게 중심이 불안정하게 걸쳐져 있던 왕궁 일부가 다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를 본 루비니아가 입술을 깨물며 한 걸음 물러났다.
“뭐가 됐든…… 난 이든을 살피러 가야 해요!”
“네?”
뜻밖의 말에 키리에가 눈을 크게 떴다. 루비니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내 계획을 위해서는 이든이 살아 있어야 한단 말이에요!”
“대체 무슨 계획이길래 그래요?”
“그걸 몰라요?!”
루비니아가 엄지로 자신의 명치를 척 가리키며 눈을 부라렸다. 그녀에게는 더는 망설임이 없었다.
“국왕은 죽었고! 이든은 이제 왕! 그럼 나는 왕비!”
“…….”
키리에는 잠시 상황도 잊고 감탄과 어이없음이 반씩 섞인 신음을 흘렸다.
때마침 건물이 균형을 잃고 다시 무너져 내렸다. 먼지 바람이 날렸다. 키리에가 조심스럽게 루비니아의 팔을 잡았다.
“머리를 다친 거죠?”
루비니아가 폭발했다.
“아, 진짜 은근히 짜증 나네, 이 여자! 전설경이 꼭 이든 옆에 붙어 있으라고 했다고요!”
“왜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 말을 믿는 건데요!”
“그야 그 인간 같지도 않은 남자가 나를 살려 줬으니까!”
키리에의 동작이 멈췄다. 아까 듣고도 겨를이 없어 묻지 못한 말이었다. 루비니아는 머뭇거림이 아예 사라진 태도로 바락 외쳤다.
“전설경이 아무 관계도 없는, 당신이랑 친하지도 않은 나를 살렸다고요! 나한테 몰래 접촉했을 때, 심지어 ‘부탁’이란 단어까지 썼다고요!”
“……몰래 접촉했다고요?”
“그럼 국왕이 저 짓을 하는데 그 사람이 가만있었겠어요?”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게 누군가를 살리거나, 돕거나, 협력을 요구하는 방식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 나타니엘이?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정신을 놓고 외부의 두려움으로부터 숨어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얼빠진 얼굴을 한 키리에를 향해 루비니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전설경을 믿는 게 아니에요! 그런 정체 모를 사람을 어떻게 믿어요! 내가 믿는 건!”
루비니아는 말을 끊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냉정을 되찾아, 예의 자신만만한 루비니아 캐스너의 모습으로 말했다.
“사랑에 빠진 남자의 멍청함을 믿어요. 난 당신 이름을 말하는 그 사람의 표정을 봤거든요.”
루비니아가 떠나갔다. 건물이 몇 번 더 무너졌다.
키리에는 멍한 머리로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그녀가 느리게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아론. 내 행동이 의미가 있었던 걸까.’
하지만 왜 이제 와서…….
키리에가 이를 악문 순간이었다.
“내 마력이……! 내 마력 회로가! 내 힘이이이!”
국왕의 목소리가 하늘을 갈랐다. 키리에가 놀라 몸을 돌렸다. 그녀는 곧 폐허 위에 서 있는 국왕의 모습을 발견했다. 국왕은 점점 구름이 깔리는 폐허 위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이럴 리 없어! 이럴 리 없다! 연구는 완벽했는데! 완벽했단 말이다! 신조차 고꾸라뜨릴 마법이었거늘! 아아악!”
온갖 보호 마법을 걸어 놓았을 갑옷이 주인을 지키는 사명을 끝내고 바스러졌다. 국왕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손을 내려다보다가, 손톱으로 얼굴 가죽을 긁기 시작했다.
“제기랄, 제기랄! 이놈, 전설경……! 내 그릇을 돌려내……! 돌려내란 말이야……!”
마력의 역류와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을 탐한 대가는 컸다.
갈색으로 말라붙은 피부에 퀭한 눈, 사람 같지 않은 가는 팔다리. 머리털도 뭉텅 빠져, 그녀를 인간답게 보이게 하는 건 뺨에 흐르는 눈물과 입가의 핏자국뿐이었다.
그러다 그녀가 동작을 뚝 멈췄다.
“전설경이 나를 죽이러 온다…….”
갈라진 나뭇결 같은 국왕의 입술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전설경이…… 나를 죽이러 올 거야! 죽는다! 종말이 올 거야! 종말이 나를 죽이러 올 거야! 나를!”
그녀가 길길이 날뛰며 펄쩍거리더니, 폐허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종말! 종말이 온다!”
국왕은 그렇게 외치며 꼭두각시 인형처럼 삐걱대는 걸음으로 어딘가로 달려가 버렸다. 어느새 몰려든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방금 지나간 사람, 국왕 전하 아니었어?”
“그런데 종말이라니……?”
키리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왕궁의 이변을 감지한 사람들이 불안한지 거리로 나오고 있었다.
더는 시간이 없었다. 이 시간에도 종말은 바닥을 기며 수도로 향하고 있을 터였다.
‘마법사를 찾아야 해. 수도 전역에 목소리가 들리게 하려면 그 수밖에…….’
그때, 쉰 듯한 저음이 들려왔다.
〔키리에 뷰캐넌.〕
키리에가 고개를 돌렸다. 레쇼가 여상스러운 태도로 서 있었다. 다만 그의 눈빛은 평소보다 더 예리하고 무거웠다.
〔가까이 왔습니다.〕
키리에의 입이 벌어졌다. 왜 이제야 그를 떠올렸나 싶었다. 그녀가 급하게 외쳤다.
“날 프로노이아에서 온 마법사들에게 데려다줘요! 근처에 있을 거예요!”
레쇼는 물끄러미 키리에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네?”
예상치 못한 대답에 키리에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아마 나타니엘은 그걸 바라고 내게 당신을 부탁한 모양이지만, 들어줄 수 없습니다.〕
멍하던 키리에의 눈이 점차로 사나워졌다.
“사람이 죽을 거예요, 경! 당신들이 세운 나라잖아요! 아니면 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건가요?”
〔상관없는 건 아닙니다. 발라브리가가 사랑한 나라니까, 지키고 싶습니다.〕
레쇼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나와 갑시다, 키리에 뷰캐넌. 당신에게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레쇼 경!”
〔시간이 없습니다. 이게 사람들을 살리는 길입니다.〕
키리에의 말문이 막혔다. 레쇼의 차분한 눈은 요지부동이었다.
“제가 경을 어떻게 믿죠?”
〔이름을 걸겠습니다.〕
레쇼가 주먹을 쥐더니, 그것을 가볍게 심장이 있는 가슴 위에 몇 번 두드렸다.
〔로르 레쇼의 이름을 걸고, 나와 함께 가는 게 가장 효율적으로 사람들을 살릴 방법입니다.〕
그는 맹세를 마치더니 눈을 스르르 올려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인간이 아닌 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기를 바랍니다.〕
키리에가 주먹을 쥐었다.
“그 말, 지켜야 할 거예요.”
〔당신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레쇼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키리에가 손을 맞잡은 순간, 레쇼는 휙 하고 팔을 움직여 키리에의 허리를 들어 올렸다.
〔이편이 더 편하겠습니다.〕
레쇼는 짐짝 들 듯 키리에를 들고서 발돋움했다.
“흣!”
그는 순식간에 하늘로 떠올랐다. 날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날고 있다고 착각할 만큼 높게 뛰었을 뿐이다. 어마어마한 체공 시간이었다.
높은 하늘에서 키리에는 수도 쪽으로 검은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예상보다 빠른 속도였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대답 대신 레쇼는 땅 위에 내려앉았다. 수도 셀 아렐라노의 초입이었다. 멀리 있는 건물들의 테두리가 점차 검게 물드는 것이 보이는 자리였다.
키리에가 허리를 문지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특별할 건 없어 보이는데요.”
〔아직은 없습니다. 곧 만들 겁니다.〕
“만든다고요?”
레쇼가 먹구름이 뒤덮은 하늘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키리에의 눈썹이 활처럼 휘었다.
“레쇼 경?”
검은 어둠이 코앞이었다. 이름을 불러도 레쇼는 여전히 자리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키리에의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속은 거야? 아니, 이 상황에 나를 속인 거야?’
참다못한 키리에가 언성을 높였다.
“레쇼 경!”
“저기…….”
그때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키리에가 흠칫해 뒤를 돌았다. 순한 얼굴의 아낙이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기, 혹시 방금 있었던 거, 무슨 일인지 아시나요? 엄청난 소리가 났는데…….”
“그게…….”
키리에가 얼굴을 찡그린 채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동안, 레쇼는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예식이라도 진행하는 듯한 느린 동작에, 키리에는 그를 쏘아본 뒤 급하게 아낙의 어깨를 잡았다.
“집에 들어가! 그리고 밖이 캄캄해져도 절대 문을 열지 마!”
“네?”
아낙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키리에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래. 보통 이런 반응이겠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설명을 반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눈밭의 참상이 다시 스쳐 지나갔다. 무력감과 절망이 가슴을 저미며 차올라, 키리에는 좀처럼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낙은 이상하다는 눈으로 키리에를 보다가, 그녀의 등 뒤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머. 구름인가?”
아낙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키리에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서늘하고 무시무시한 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불길한 감각이 들었다. 아낙 역시 같은 것을 느꼈는지 얼굴이 굳었다. 등 뒤에서 무언가가 와글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절망에 질린 키리에가 뻣뻣하게 몸을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 것이 그들의 위를 덮은 순간이었다.
레쇼가 검을 수직으로 바닥에 꽂았다. 그러자 검을 중심으로 키리에와 레쇼의 주변을 돔 모양의 투명한 막이 감쌌다.
아낙은 튕겨 나갔다.
“안 돼!”
키리에가 외쳤지만, 그녀는 아낙의 눈코입에 검은 그림자가 침범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은은하게 빛나는 반구형의 막 안쪽에서 키리에는 할 말을 잃고 서 있었다. 그림자는 막을 넘어오지 못했다. 주변은 온통 새까매서, 검은 잉크 속에 가라앉은 것만 같았다.
그제야 레쇼가 검에 양손을 얹은 채 입을 열었다.
〔이전까지의 모든 상황과 이후에 있을 모든 상황에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하겠습니다.〕
들어본 적 있는 말이었다. 키리에가 사납게 레쇼를 노려보았다.
“경.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으면서 방금 그녀를 내쫓았군요?”
방금 놓친 아낙의 온기 때문인지 약간 으르렁거리는 듯한 말이 나왔다. 레쇼는 태연했다.
〔그렇습니다. 나는 나타니엘이 잠든 540년 동안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습니다. 그걸 방해받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 목숨이 우습나요?”
〔이야기를 합시다, 키리에 뷰캐넌. 이곳과 바깥은 시간의 흐름이 다르니 수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일이 잘 끝나면 당신은 방금 봤던 그녀뿐만 아니라 모두를 구할 수도 있습니다.〕
말을 마친 레쇼가 검을 놓고 정좌했다. 그의 평소 행동은 나타니엘과 달리 투박했는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는 그 동작만큼은 몹시도 정갈하고 단정했다.
키리에는 그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나타니엘의 손에 갇힌 이후, 레쇼를 불렀을 때 그는 꼭 저런 자세로 ‘마지막’을 이야기했다.
잠깐이지만 키리에의 머릿속에 나타니엘의 마지막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키리에는 애써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동안 내가 여기까지 도달하기를 바라서 날 도와줬군요.”
〔맞습니다.〕
레쇼가 손을 펼쳐 보이며 앉으라 시늉했다. 그에게서 무도인의 엄격성을 느낀 키리에는 이를 악물며 그와 같이 무릎을 꿇고 마주 앉았다. 레쇼가 어렴풋한 미소를 비쳤다.
〔키리에 뷰캐넌. 나는 당신이 선택하길 바랍니다.〕
“선택이요?”
레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신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 내게 힘을 물려받아 아주 강한 마력을 가진 마법사가 되는 것. 이 경우 발라브리가처럼 아주 강력한 대마법사가 될 수 있지만, 인간으로 그칠 것입니다.〕
키리에의 눈이 떨렸다.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둘째.〕
레쇼의 목소리는 좀 더 낮게 가라앉았다. 그는 언젠가 나타니엘의 푸른 눈이 그랬던 것처럼, 멀베리 색 눈동자를 자줏빛 우주처럼 빛내며 속삭였다.
〔내게 힘을 물려받아 인간을 넘어서는 것.〕
키리에의 머리가 놀랍도록 차분해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지금 이 상황이 앞으로의 일에 있어 아주 중요한 분기점이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혹시 기억합니까? 당신은 언젠가 내게 강해지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때 경은, 사람에겐 각기 다른 깨달음의 방식이 있다고 말했죠.”
〔나는 당신 몸부터 어떻게 해 보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강해질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냐고 물었고요.”
〔그리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는 거군요.”
〔있습니다.〕
“그 방법은?”
키리에가 물었다. 레쇼가 깊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내가 당신을 초월자로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레쇼의 말이 수면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공기를 울렸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키리에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이게 나타니엘의 계획인가요? 키리에 뷰캐넌을 초월자로 만들어서 사람들을 구하게 하고, 시조의 재림이라 칭송받게 하는 게?”
레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것은 오로지 내 독단입니다. 따지자면 나타니엘의 의도와는 반대되는 행동이긴 합니다.〕
레쇼의 말에서 그녀가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기색이 느껴졌다.
키리에는 닥친 상황을 이해하느라 말을 잃었다. 그동안 그들의 머리 위에서 그림자가 귀를 먹먹하게 하는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당신의 결정을 돕기 위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레쇼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들판을 쓰다듬는 산들바람같이 부드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주 옛날, 나는 발라브리가가 나타니엘을 죽이려 하는 것을 알면서도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네. 그건 들었어요.”
〔나타니엘이 두려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일을 모른척했습니다.〕
일전에 눈 내리는 날, 그가 마차에 찾아와 한 말과 비슷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리 호국경 본인의 감정이 짙게 묻어났다.
〔그로 인해 발라브리가는 미쳤고, 나타니엘은 다시 얼음 속에 잠들었습니다. 뒤늦게 후회했지만, 돌이킬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키리에는 가만히 앉아 레쇼의 눈꺼풀이 느리게 깜빡이는 것을 보았다. 맑고 투명하고, 슬퍼 보였다. 옛날 일을 말하던 나타니엘처럼.
〔나는 똑같은 일이 반복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다시 누군가가 나타니엘을 깨우고, 죽이려 들고, 나타니엘은 그 증오를 즐기는 그런 굴레 말입니다.〕
레쇼가 분위기를 환기하듯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시선이 다시 키리에를 향했다.
〔그래서 처음엔 당신이 죽기를 바랐습니다. 같은 일의 반복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레쇼의 말이 멈췄다. 그는 무표정이었지만, 키리에는 왜인지 그가 방금 옅게 미소를 머금었다고 느꼈다.
〔그런데 놀랍게도 누구도 즐겁지 않은 그 굴레를, 당신이 끝낸 겁니다.〕
“……제가요?”
레쇼는 조금 재밌다는 듯이 낮게 웃었다.
〔끝까지 이런 비유를 하게 되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만, 나타니엘을 자신이 키우는 지렁이를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으로 만든 건 당신이 최초이고, 또 마지막일 테니 말입니다.〕
이윽고 레쇼가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무릎 위에 손을 얹고 허리를 굽히는 동작이 정갈하고 엄숙했다. 그 역시 초월자인 터라, 그 모습은 마치 사자가 머리를 숙이는 것 같았다.
〔로르 레쇼의 이름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키리에가 말문을 잃은 사이, 레쇼는 굽혔던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감사를 표합니다. 나타니엘을 그 굴레 속에서 빼내 주어서 고맙습니다.〕
이제 그는 만면에 초연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후련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키리에는 도리어 속이 뒤틀렸다.
“……나는 경을 만족시키려고 그렇게 행동한 게 아니에요.”
키리에의 차가운 말에도 레쇼는 태연했다.
〔압니다. 당신이 나타니엘을 긍휼히 여긴 건 그저 당신이 선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 한마디로 때울 수 있을 만큼 내가 겪은 고통이 우스워 보이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힘겨웠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건조한 말인데도 어딘지 달래듯 온화한 대답이었다.
〔나는 그저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당신이 얼마나 큰일을 해냈는지.〕
“하. 큰일이요……?”
키리에가 떨리는 목소리로 코웃음 쳤다.
“그 큰일 때문에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경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런 말을 하네요.”
키리에가 젖어 가는 눈으로 레쇼를 노려보았다.
지나간 일들이 떠올랐다. 한시도 마음 편했던 날이 없었다. 뭔가를 잘해 보려고 하면 도리어 망가지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탓했고, 그녀가 살기를, 동시에 죽기를 바랐다.
키리에 뷰캐넌은 너무 많이 부서졌다. 가장 두려운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서진 채로 계속 살아 나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버틸 수 있다고 자신을 속였다. 없어도 있는 것처럼, 있다면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살아왔으니 가뿐하다고 자신을 달랬다.
그런데 나타니엘은 그걸 자꾸 소리치게 만들었다. 그는 늘, 처음부터 키리에가 남들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모습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당신이 날 다시 여기로 데려다 놨잖아요! 이 지옥으로!’
왜? 왜 그걸 말하게 만드나.
‘돌아오기 싫었어요! 잊고 싶다고요! 전부 지긋지긋해요!’
사실은 버겁다는 것을 왜 굳이 말하게 만드나.
‘남들 앞에서 멀쩡한 척해야 하는 것도, 남의 말에 상처받지 않은 척하는 것도, 전부!’
없어도 있는 것처럼 구는 이유가 사실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임을 왜 자각하게 만드나.
말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모른척할 수 있었는데.
지금도 무너지려 하는 것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데.
[키리에.]
그리고 대체 왜. 하필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
[너는 누군가의 세계가 될 거야. 반드시.]
왜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나를 부순 당신이 말하나.
“내가…….”
키리에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 말하던 나타니엘의 눈빛, 손길, 거기에 뚝뚝 묻어나오던 오롯한 마음이 떠올라 괴로웠다.
“내가 얼마나…….”
입술을 깨무는 키리에를 레쇼는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나는 당신이 나타니엘에게 온몸으로 부딪쳐,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키리에의 목울대에서 울컥하는 소리가 났다. 레쇼가 고개를 들었다. 마치 하늘을 바라보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나는 정말로, 그저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당신이 햇살이라면, 당신이 부서져 만들어 낸 물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하, 하하…….”
키리에가 손을 내렸다. 그녀는 더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눈가가 발갛게 물든 얼굴에 슬픔과 냉소가 번갈아 나타났다.
“……이제 와서요?”
눈물 젖은 보랏빛 눈이 사나워졌다.
“돈을 준다고, 힘을 준다고 부서진 것이 돌아오나요? 내가 겪은 일들이 없어지나요?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맞습니다. 세상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란 것도 있고, 당신이 나타니엘에게 알려 준 가치가 바로 그것입니다.〕
기어코 키리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그래요! 나를 불살라서, 키리에 뷰캐넌 하나가 깨져 나가는 것으로 위대한 전설경에게 깨달음을 주었다니 참으로 황송한 일이네요!”
레쇼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리에 뷰캐넌. 당신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무엇을 준다 한들 당신이 입은 상처를 되돌릴 수는 없을 겁니다.〕
“그걸 안다면!”
〔그래서 나타니엘은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키리에가 멈칫했다. 그녀의 눈이 떨렸다.
“……가져간다고요?”
레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책임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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