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 전야 (23/33)

23. 전야

밤이었다. 키리에 뷰캐넌은 훌쩍이다 잠들었다. 그녀가 잠들자 뷰캐넌 저택은 덩달아 고요해졌다.

레쇼는 저택의 옥상에서 주변을 살폈다. 국왕의 군대가 저택 주변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임전 태세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뷰캐넌 저택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압박감을 행사하고 있었다.

아래쪽에서 나타니엘이 정문을 걸어 나가는 것이 보였다. 평소와 달리 걸음이 정갈하지 못했다.

[안녕.]

그가 인사했다. 술이나 약에 취한 사람처럼 나른하고 긴장이 풀린 목소리였다.

군대의 수장으로 보이는 이가 앞으로 나왔다. 당황한 모양이었다.

“용건이 있으십니까?”

[응.]

나타니엘이 힘없이 대답했다. 레쇼가 칼을 꺼냈다. 시가지에서 나타니엘이 힘을 쓴다면 막아야 했다.

[내일 키리에와 밖에 나가기로 했는데, 너희를 보면 놀랄 것 같구나. 물러나 주면 좋겠어.]

수장이 손을 들었다. 군대는 대답 없이 나타니엘에게 칼을 내밀었다. 나타니엘이 광기 서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구나……. 그렇겠지.]

몇 분의 대화가 더 오갔다. 병사들은 칼과 창을 들었고, 나타니엘은 지팡이를 뽑았다.

[그럼 조용히 끝낼까? 자는 걸 깨우고 싶진 않으니까.]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창에 나타니엘이 꿰였다.

병사들이 놀라기도 전에 그는 피를 쭉쭉 뽑으며 몸을 흔들거리다가, 창에 꿰인 상태로 걷기 시작했다.

[이런 싸움은 정말 오랜만인데…….]

그가 중얼거렸다.

병사 한 명이 고함을 지르며 검으로 나타니엘의 목을 쳤다. 갈라진 목은 검은 피를 쏟더니 그의 몸에 다시 들러붙었다.

[떨어지면…… 보기에 좋지 않으니까.]

레쇼는 검을 물렸다. 그는 나타니엘이 뷰캐넌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병사의 창에 심장을 꿰뚫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병사들이 두려워 우짖기 시작했다.

“악마…… 이 악마!”

“우리를 속였어!”

[글쎄. 나를 신으로 만든 것도, 악마로 만든 것도 항상 너희들이었는걸.]

“죽어! 제발 죽어! 오, 신이시여!”

[그것도 내 이름이고.]

나타니엘에게서 나온 피가 저택 앞을 새까맣게 물들였다.

마침내 수장이 절규했다.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우리에게!”

[이상한 질문이구나. 그건 내가 물을 말인 것 같은데.]

나타니엘이 단 한 번도 휘두르지 않은 지팡이를 다시 꽂아 넣으며 말했다.

[무슨 생각으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는 알겠지만, 소용없으니 돌아가.]

“이대로 물러나면 우리는 갈 곳이 없습니다!”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파란 눈이 어둠 속에서 번득였다. 얼굴의 피 칠갑 때문에 분위기는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목숨 아까운 줄 알거든 이 일에 더는 끼어들지 말라는 거야. 이건 오레윈브리지와 내 싸움이니까.]

수장이 멈칫했다. 나타니엘은 심드렁히 심장과 팔에 박혀 있던 창을 하나씩 뽑아 떨어뜨렸다.

[가서 너희 국왕에게 전해.]

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낮아졌다.

[일주일 뒤, 아렐라노 외곽의 포베 곶에서 만나지. 나는 키리에를 돌봐야 하니, 그동안 함정이든 마법이든 열심히 준비해 보렴.]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믿을 것 같습니까……!”

[믿고 말고는 오레윈브리지가 결정하겠지.]

병사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나는데도 수장은 이렇다 할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항상 말로 하면 못 알아듣더군.]

나타니엘이 키득거리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검은 것이 해일처럼 일어나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도, 도망쳐!”

“저걸 어떻게 죽이란 말이야!”

병사들이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수장 역시도.

나타니엘이 그 뒤에 대고 실없이 웃었다.

[문단속 잘하렴.]

검은 그림자는 어느새 다시 잠잠해졌다.

레쇼는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혼자 남은 나타니엘이 늑골에 꽂혀 있던 마지막 창을 빼내는 것까지도.

피가 솟더니 금세 가라앉았다. 나타니엘은 지팡이를 짚는 것조차 잊고 팔을 늘어뜨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더니, 얕은 한숨을 쉬었다.

[레쇼.]

먼 거리지만 확실히 들렸다. 지친 목소리였다.

[키리에를 지켜 줘.]

그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내뱉은 나타니엘은 다시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리고 우아하고 기품 있는 전설경 나타니엘로 돌아와, 키리에 뷰캐넌을 돌보기 위해 저택으로 되돌아갔다.

레쇼는 뷰캐넌의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버려진 무기를 치우는 것까지 지켜보다 몸을 돌렸다. 그도 이제 마지막을 준비할 차례였다.

키리에가 눈을 뜨자, 나타니엘이 옆에 있었다. 햇빛 드는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던 나타니엘이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살며시 입꼬리를 당겼다.

[악몽은?]

그의 인사는 특이하다. 키리에는 씻지 않은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대충 고개를 저었다.

[준비하고 나오렴. 밖에 있을 테니.]

햇살 속에서도 유독 그늘진 느낌이 나는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키리에가 멍한 머리로 단장을 마치고 나왔다. 요새는 늘 그랬다. 세상이 희뿌윰한 막 너머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타니엘 님께서는 갤러리에 계십니다.”

하인 한 명이 키리에를 안내했다. 봄볕 드는 복도는 공중을 느리게 떠도는 먼지 탓인지 정신을 몽롱하게 했다.

‘꿈은 아무리 달콤해도 꿈이야. 정신 차려, 키리에.’

오랜만에 만난 제냐는 그렇게 말했다.

무슨 뜻일까?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좀 더 깊이 생각하려는 찰나, 앞서 걷던 하인이 갤러리의 문을 열었다.

“들어가시지요.”

갤러리의 끝에 나타니엘이 서 있었다.

키리에는 그의 옆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말 걸기가 어려울 정도로 창백하고 생기 없는 나타니엘은 처음이었다.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기괴했다.

키리에가 숨을 들이켠 순간, 나타니엘의 고개가 느리게 그녀에게로 움직였다. 나타니엘이 미소 지었다.

[왔구나.]

방금까지만 해도 갤러리 전체를 잠식하고 있던 어두운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네. 나타니엘 님.”

키리에가 눈을 깜빡였다. 나타니엘 역시 키리에의 깜빡임에 맞춰, 순하게 그것을 따라 했다.

[왜?]

“아뇨, 방금…….”

[방금?]

나타니엘이 살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의 말을 반복했다. 천사처럼 정숙한 얼굴에 걱정이 드리워졌다.

[몸이 안 좋다면 나들이는 취소할까?]

“아뇨! 갈 거예요!”

나긋한 목소리에 키리에가 황급히 상념을 털어 냈다. 그러자 나타니엘이 고상한 동작으로 손을 뻗었다.

키리에가 그 길고 차가운 손을 잡았다. 기묘한 불안감 때문에 심장이 쿵쿵대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모른척했다.

‘깨고 싶지 않아.’

그런 목소리가 속에서 들려왔다.

키리에는 나타니엘과 함께, 인적이 드문 호수 공원으로 나들이를 나섰다.

공원을 한 바퀴 도는 내내 나타니엘은 영혼이 없는 사람 같았다. 눈이 마주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상냥하게 웃어 주었지만, 왠지 금방 부서질 것 같은 미소였다.

다만 주변에 사람이 지나가면 그는 조금 날이 섰다. 그리고 묘하게도 사람들 역시 그런 것 같았다.

키리에가 뒤를 힐끔거리며 양산을 더 세게 쥐었다.

“나타니엘 님. 혹시 방금 지나간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요?”

[글쎄. 잘 모르겠는걸.]

“제 이름이 들린 것 같은데…….”

[보는 눈이 있나 보지.]

나타니엘은 그렇게 말하며 몹시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었다.

호수가 있는 공원에서 키리에는 물수제비를 던지다가, 돌이 몇 번 튀어 오르다 말고 가라앉자 분한 마음에 눈살을 찌푸렸다.

“잘 안 되네요.”

[요령이 필요하니까.]

“나타니엘 님은 할 수 있나요? 해 보셨어요?”

나타니엘이 조금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주 예전에 조금 해 봤지.]

빛나는 수면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아스라했다. 키리에가 돌을 내밀었다.

“그럼 던져 주세요. 숙녀의 부탁을 거절하진 않으시겠죠?”

나타니엘은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가, 돌을 건네받았다. 키리에가 힘주어 말했다.

“힘껏 던져요!”

[힘껏.]

나타니엘이 중얼거리더니, 성의 없이 돌을 던졌다. 동시에 엄청난 소리가 나더니 호숫물이 터져 나갔다.

“아?”

[아.]

나타니엘의 짧은 침음성이 뒤늦게 들렸다.

키리에가 쫄딱 젖을 것을 예상하고 몸을 움츠린 순간이었다.

고개를 드니, 어느새 나타니엘이 그녀의 앞에 서서 망토를 덮어 주고 있었다.

[젖은 곳은?]

물방울이 나타니엘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검은 머리카락은 물에 젖자 좀 더 퇴폐적인 느낌을 주었다.

홀린 듯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키리에는, 뒤늦게 나타니엘 역시 물끄러미 자신을 보고 있음을 눈치챘다.

새파란 눈이 까닭 모르게 깊고 서글퍼, 키리에는 시선을 피해 버렸다.

“호숫물…… 더러울 텐데.”

[다행히 묻진 않은 것 같구나.]

“제 얘기가 아니었어요.”

[넌 너보다 남 걱정을 먼저 하니, 내가 네 걱정을 하는 수밖에.]

나타니엘은 약간 끌어안는 듯한 동작으로 팔을 당겼다가, 이내 망토를 풀었다. 그가 팔을 휙 털자 망토가 사라지고 젖었던 옷이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에게서는 다시 햇빛에 말린 뒤 향을 입힌 고급 옷감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키리에는 물끄러미 나타니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좀 이상하시네요.”

나타니엘이 멈칫했으나, 이내 다시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오늘만 그런 건 아니었지.]

“하지만 어제는 아주…….”

다정했는데. 키리에가 말끝을 흐렸다. 숨긴 말을 눈치챈 나타니엘이 갸름한 눈을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신경 쓰이게 했구나. 주의할게.]

“그런 게 아니라, 혹시 고민이라도 있으신가 해서요.”

[그럴 리가.]

매끄러운 대답이었다. 키리에는 가만히 나타니엘을 응시하다, 툭 던지듯 물었다.

“그럼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계세요?”

나타니엘이 멈칫했다. 그러더니 그린 듯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그뿐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공원 가장자리에 피크닉용 나무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하인들이 자리를 정돈하고 간단한 요깃거리를 차려줄 때까지도 나타니엘은 침묵했다. 이 주제를 모른 척하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품위 있는 귀족이라면 넘어가야 마땅하지만, 키리에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저는 도움이 안 될까요?”

[그렇진 않아.]

나타니엘이 미리 생각하고 있던 것처럼 차분히 대답했다.

[그저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을 뿐이야.]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있어도 하지 않는 게 그 애한텐 좋을 거야. 내 행동은 대체로 너희가 보기엔 지나치게 화려한 모양이니까.]

‘그 애’. 의외의 낱말에 키리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인인가요?”

그녀의 질문에 나타니엘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아니. 안타깝게도.]

“그럼 좋아하는 사람이군요?”

[그건…….]

나타니엘이 멈칫하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맞아.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아.”

어른 남성에게서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정직한 고백에 키리에는 약간 놀랐다. 그녀는 자신이 조금 더 성숙해 보이길 바라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음……. 어떤 분이에요?”

[예뻐.]

또 지나치게 정직하다. 나타니엘은 정말 표정 하나 안 바꾸고 그런 낯부끄러운 말을 했다. 괜히 키리에의 뺨이 홧홧해졌다.

“미인인가 봐요.”

[말은 안 했지만, 내가 본 사람 중 제일 예쁘지.]

“그런 건 말해야 좋아하지 않을까요?”

[그 애도 거울은 볼 테니 말 안 해도 알 거란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맹목적인 사고방식이었다. 키리에가 겸연쩍게 나타니엘이 건네는 차가운 수프를 받아 들었다.

“싸우신 거죠?”

[그건 아니야. 내가 일방적으로 잘못한 거니까.]

키리에가 의외란 얼굴로 수저를 들었다.

“엄청 크게 잘못하셨나 봐요. 미안하다고 했는데도 안 받아 줄 정도면.”

수프를 삼키던 키리에는 나타니엘의 얼굴에서 어슴푸레 놀란 기색을 읽어 냈다. 잠자코 그녀의 말을 계시처럼 기다리는 나타니엘을 향해, 키리에가 조심스레 물었다.

“……설마 미안하다고 안 하셨나요?”

얼마나 안하무인으로 살아온 걸까. 그런 생각이 드러났는지, 나타니엘이 망설이다 답했다.

[돈을 줬어.]

“멍청…… 죄송합니다.”

키리에가 급하게 입을 가렸다. 나타니엘은 불쾌한 기색이라곤 없었다.

[신경 쓰지 말렴.]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돈은 왜 주신 거예요?”

[보통 사람들은 말뿐인 사과보다는 확실한 것을 좋아하니까.]

“주변이 그렇게 말하던가요?”

[으레 그렇잖니. 문학, 음악, 역사…….]

키리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마치 사람들과 부대껴 산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아니면 너무 지위가 높아서 주변에 그런 거머리 같은 사람들밖에 없거나.

“그건 다 가짜잖아요.”

말하고 나서 키리에는 깨달았다. 자신의 말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타니엘의 심장을 찔렀다는 것을.

나타니엘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감길 듯 가늘게 인상 쓴 눈에서는 한겨울밤, 혼자 있을 때나 겪을 법한 깊은 슬픔이 느껴졌다.

한참을 말이 없던 나타니엘은 이내 온화하고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가진 게 하나밖에 없으면 그게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는 법이거든.]

반박도 분노도 없었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그는 마치 어떻게든 거지들 사이에 끼려고 몸부림치는 왕자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왕자는 거지가 될 수 없는 법이었다.

키리에가 멍하니 그를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외로우세요?”

나타니엘이 맑은 파랑의 눈을 깜빡였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호수가 언 것처럼 투명한 시선이었다.

[넌 늘 내게 그런 걸 묻는구나.]

“늘……이요?”

키리에가 반문했으나 나타니엘은 더는 대답하지 않고 푸딩이 담긴 그릇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조용한 식사를 마치고, 키리에는 에스코트를 위해 자세를 잡은 나타니엘을 향해 말했다.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과해야 해요.”

나타니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키리에가 거듭 힘주어 말했다.

“미안하다고 말해 주세요. 정말 그렇게 소중하다면요.”

나타니엘의 표정이 멍해졌다. 물에 젖은 하늘 같은 눈이 천진하게 삼박거리는 보라색 눈과 마주쳤다가, 서글픈 빛을 띠었다.

[받아 줄까?]

“받아 주지 않아도, 계속 사과하는 수밖에 없어요.”

[받아 주지 않으면?]

“다시 미안하다고 해요.”

[그래도 받아 주지 않으면?]

“그래도 미안하다고 해야 해요.”

[그러면 받아 줄까?]

키리에가 당황으로 말을 흐렸다.

“글쎄요, 그렇게 바로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러면 받아 줄까?]

“뭐랄까, 제 생각엔, 음…….”

키리에는 눈앞의 아름다운 남자가 긴장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을 다문 채 사슴 같은 눈을 깜빡이는 나타니엘은 몹시도 정결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마치 성서의 예언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아지경으로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파란 눈에서 간절한 광기가 깜박깜박하고 점멸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니까, 저는…….”

[너라면 받아 주겠니?]

“그게…….”

머리가 아파져 왔다. 대충 둘러댈 수 있는 말인데도 키리에의 입술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나타니엘의 눈은 점점 빛을 잃어 갔다. 결국 키리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믿어 보세요, 진심이 전해지기를.”

***

저택에 돌아가니 올드시우다드와 포트듀케인에서 사람이 찾아와 있었다. 마리아와 라우라가 키리에를 위해 보낸 의원들이었다.

“내가 아프다고?”

키리에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의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찰을 받아 보시지요. 의례적인 것이니 너무 겁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의례적인 진찰인데 며칠 동안이나 방 안에 있어야 한다고?”

“치료를 위해 불가피한 일입니다, 뷰캐넌 님.”

“난 내가 아픈 것 같지 않은데.”

낯선 이들 때문인지 키리에는 움찔거리며 나타니엘의 등 뒤로 숨었다. 그러자 다친 발가락 탓에 거동이 불편한 세자르가 삐뚤어진 자세를 하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키리에, 각하께…….”

[뷰캐넌.]

나타니엘이 낮게 세자르의 이름을 불렀다. 세자르가 헛기침했다.

“……각하께 인사드리고, 진료를 받거라. 이 아비도 기다리고 있으마.”

“…….”

키리에가 대답이 없자 세자르가 작게 혀를 찼다.

“잘하고 돌아오면 잘 때 책을 읽어 주마.”

키리에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곧 꽃봉오리보다 고운 미소를 지으며 나타니엘 앞에 섰다.

“제가 진찰받고 와서도 계속 계시나요?”

키리에가 물었다. 나타니엘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계속 있을 거야.]

“아! 다행이에요.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직 많거든요.”

키리에가 방긋 웃더니, 나타니엘에게 귓속말했다.

“다음엔 그분이 좋아하는 게 뭘지 생각해 봐요. 저도 같이 고민해 볼게요. 화해하시면 좋겠어요.”

나타니엘은 이를 악문 다음, 가까스로 미소를 보였다.

[다녀오렴.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너는…….]

“누군가의 세계가 될 거야?”

키리에가 활짝 웃더니, 다시 나타니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기왕이면 나타니엘 님처럼 상냥한 사람이면 좋겠어요…….”

키리에가 방으로 들어가고, 안네마리가 의원들을 따라 들어갔다. 당연하지만 나타니엘은 그들의 ‘치료’에 끼지 못했다.

그는 키리에의 침실 옆방에서 사흘을 내리 기다렸다. 사흘 내내 비가 내렸고, 사흘 내내 키리에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제발…… 제발 날 내버려 둬! 미안해, 아론! 아론! 아아아아! 아아아!”

비명이 들리지 않는 날에는 흐느낌이 들렸다. 나타니엘은 어느 쪽이 나은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똑같이 두려웠다.

나흘째 되는 날, 의원 한 명이 복도로 나와 나타니엘을 찾았다.

“성공은 했습니다만…….”

[문제라도 있나?]

“우울증과 무기력증이 심합니다. 정신이 온전치 않았던 탓에 일부 기억도 손상되었고요.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라서, 종종 전처럼 분별 능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의원의 말이 마치 별세계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나타니엘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뒤, 키리에의 방으로 향했다.

비구름 탓에 방 안은 어둑어둑했다. 키리에는 침대 위에 시든 목련처럼 누워 있었다.

[키리에.]

나타니엘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키리에의 고개가 어둠 속에서 움찔거렸다.

정적은 꽤 오래 갔다. 그녀는 한참 뒤에야 너무 비명을 지른 탓에 쉬어버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타니엘…….”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타니엘은 잠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동안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만이 울렸다.

[……키리에.]

그가 다시 말했다. 한 걸음 더 다가가자 키리에의 모습이 확실히 보였다.

죽어 가는 꽃 같았다.

퀭한 눈에는 미소의 흔적도 없었다. 그녀는 산 채로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평온하고 처절했다.

당연하게도 나타니엘은 처음 만났을 때의 키리에 뷰캐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그와 떠들고, 이야기하고, 그에게 화내고, 제 목숨을 걸고서 손을 내밀었던 키리에 뷰캐넌을 떠올렸다.

지나고 나서야 봄인 줄을 알았다.

[……내가.]

나타니엘이 떨리는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키리에가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썩은 포도 같은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나타니엘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는 내려앉은 심장을 쥐어짜 목소리를 내었다.

[내가…….]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할 말은 너무나도 많은데, 눈앞의 여자는 그의 숨결 하나로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

[……내가, 네게, 너무…….]

나타니엘이 미간을 좁히고 주먹을 쥐었다. 호흡이 어려웠다.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데. 그걸로 모든 게 해결되진 않겠지만, 키리에 뷰캐넌이 내놓은 답이니 그것은 분명 정답일 텐데.

하지만 지은 죄와 해야 할 사죄에 비해 목구멍은 턱없이 좁았고, 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키리에는 이미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는 듯했다.

“……나타니엘.”

그녀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너무 늦었어요…….”

키리에는 한참을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누구 하나 말하는 사람 없이 시간이 무의미하게 흘렀다. 나타니엘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반응하는 것조차 지치고 힘들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결국 움직여야만 했다.

‘저택의 관리……. 사용인들에게 줄 보상. 추천장이 필요하면 써줘야 하고, 입을 단속해야 하고, 주변에 소문이 어떻게 나 있는지 파악해야 하고…….’

차라리 질식하고 싶었지만 정말로 질식해 죽지 않는 한 움직여야 했다. 키리에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 줘요. 피곤하네요.”

그녀는 일부러 나타니엘의 얼굴을 마주 보지 않았다. 더는 그로 인해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나타니엘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키리에.]

지독히 낮게 잠긴 목소리였다. 키리에는 그를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네마리. 들어오렴.”

귀가 밝은 안네마리가 키리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안네마리가 문틈 사이에서 울먹거리고 있었다.

“아가씨…….”

“……이리 와.”

안네마리가 발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흰 앞치마를 쥔 채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키리에는 그런 안네마리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내가 널 잊어서 서운했겠구나.”

“흐윽, 흐잉……!”

안네마리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훌쩍였다. 키리에가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내가 많이 힘들어서 그랬어……. 이제 괜찮아.”

“아가씨한테 영영 잊힐까 봐 안네마리는 너무 무서웠어요…….”

안네마리의 말에 키리에는 대답 없이 그녀의 작은 등만 토닥였다.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의 키리에는 안네마리의 감정을 제대로 토닥여 줄 여력이 없었다. 정신이 말린 포플러 꽃처럼 버석버석했다. 죽고 싶지만 죽을 의욕마저 없었다. 누군가 고통 없이 죽여 주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반복되었다.

키리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안네마리를 끌어안았다가, 포옹을 풀 때쯤 다시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나타니엘은 아주 지친 눈으로 바라보았다.

“씻어야겠어.”

우는 걸 그친 안네마리가 곧 해사하게 웃었다.

“크응, 네!”

“단장이 끝나면 아버지에게 갈 거고, 이후엔 저택 수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봐야겠어. 영지에 보낸 공문에 회신이 왔을 테니 가져다주고.”

“일하시게요?”

키리에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지.”

애가 탄 안네마리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가 뭐라 말할 찰나, 나타니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며칠이라도 좋으니 쉴 순 없니?]

잠깐의 정적 이후, 키리에가 살며시 안네마리의 어깨를 밀었다.

“나가 봐.”

“……네.”

안네마리가 나타니엘의 눈치를 보며 방을 나갔다.

[키리에.]

재차 부르는 소리를 키리에는 무시했다. 그녀가 잠옷의 앞부분 단추를 하나 풀자마자, 큰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의원이 네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더구나.]

키리에가 손을 뿌리쳤다. 나타니엘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부탁이니 내가 나가거든 해.]

그 말에 키리에가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나타니엘을 보았다. 그가 이토록 걱정 가득한 눈을 한 것은 처음 보았다. 타고난 오만 탓인지 볼썽사납다는 느낌은 없었다. 땅바닥에 이마를 대고 빌더라도 그는 망국의 왕처럼 고고할 것이다. 결국 바닥을 뒹구는 건 그녀뿐이다.

키리에는 피식 웃으려고 했으나, 뺨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가 무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내가 정신이 나갔을 때 한번 자지 그랬어요.”

[뭐?]

나타니엘은 잠깐 자기가 뭘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뒤늦게 그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내가 그런 짓이나 할 사람으로 보였니?]

“키스했잖아요. 내게 성욕을 느끼는 줄 알았어요. 쌍방 편하게 내가 미쳐 있을 때 한 번 하고 끝내지 그랬어요.”

적나라한 단어에 나타니엘이 멈칫했다. 키리에는 나타니엘의 손을 쳐냈다. 건조하고 황폐한 시선이 방 여기저기를 의미 없이 훑었다.

“아니…… 애초에 목적이 그거였다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자는 게 귀족에게 뭐 그리 어렵다고.”

나타니엘은 키리에의 말이 이어지는 내내 입을 살짝 벌린 채 들썩이다가, 끝에 가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저 투명하고 아름답기만 하던 파란 눈이 차례로 슬픔과 절망에 젖어 들어갔다.

그는 한참 뒤에 쥐어짜듯이 한마디 했다.

[……절대 그런 목적이 아니었어.]

키리에가 지긋이 나타니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냉소적인 어조로 물었다.

“나와 자고 싶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나요.”

나타니엘의 눈이 약간 커졌다. 맑은 파랑의 홍채 사이에서 동공이 심장 박동에 맞춰 떨리는 것이 보였다.

[…….]

그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키리에가 예상했던 대로.

“대답이 없네요.”

그녀가 시선을 내리깔며 무심히 말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이건, 내게 뭘 원하건…… 이젠 마음대로 해요. 난 내 할 일을 할 거고…… 그뿐이에요.”

그녀가 몸을 돌리자마자 다시 나타니엘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키리에 뷰캐넌. 이제 막 병상에서 일어난 자가…….]

키리에가 인상을 쓰며 손으로 귀를 덮었다. 나타니엘이 어슴푸레한 조바심을 비추며 이어 말했다.

[네 부모가 네게 과하게…….]

“거기까지!”

그 순간, 지금까지 사념이 모두 풍화된 것처럼 황폐해져 있던 키리에의 목소리가 대번에 서늘해졌다.

“내 부모가 왜요. 내 어린 시절이 왜요? 동정이라도 하고 싶으신가요?”

보라색 눈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노골적인 공격성을 띠었다. 그녀가 죽음 앞에서도 숨겼던 모습이었다.

달의 뒷면.

나타니엘이 그런 단어를 떠올리며 동작을 멈췄다.

“남이 숨기고 있는 걸 엿봐서 재미 좋았나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키리에 뷰캐넌에게 살갑게 대해 주면, 뭔가가 바뀔 것 같았어요?”

[그런 의도로 너를 그렇게 대한 게 아니었어.]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당신 눈에 아직도 내가 고작 사랑이나 받으려고 아등바등하는 어린애가 아니라는 뜻일 테니까.”

키리에의 혀에 처음으로 상대를 상처 주기 위한 독이 담겼다.

[내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너도 알잖니.]

나타니엘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문장은 매끄럽고 목소리는 감미로웠지만, 그의 표정은 한 번도 남에게 자신의 감정을 설명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긴장이 드러나 있었다.

[네가 어떤 사람이든 내겐 중요하지 않아. 설령 네가 정말로 그렇다 해도 너는 내…….]

키리에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렸다. 채 가려지지 않은 설움은 목소리를 타고 흘렀다.

“내가 당신의 세계다? 그 세계가 내게 준 게 뭔데요. 더 많은 짐, 더 많은 책임, 더 많은 말, 더 많은 소문, 더 많은 역할!”

키리에가 거칠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의 동공이 점점 풀리고 있었다.

“도망치고 싶었는데…… 도망치고 싶었는데! 당신이 날 다시 여기로 데려다 놨잖아요! 이 지옥으로!”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나타니엘이 초조하게 굳은 얼굴로 손을 뻗었다. 진정시켜야 했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키리에의 정신이 더 이상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키리에. 난 이제 네게 뭐가 좋은지 알 수 없어서…….]

“거짓말!”

키리에가 거친 숨을 내쉬며 크게 외쳤다.

“돌아오기 싫었어요! 잊고 싶다고요! 전부 지긋지긋해요! 남들 앞에서 멀쩡한 척해야 하는 것도, 남의 말에 상처받지 않은 척하는 것도, 전부! 당신에게서 사람들을 지켜야 하는 것도 싫고, 그걸 할 수 있는 게 나뿐인 것도 싫고, 그러면서도 거기에 목매는 나 자신이 가장 싫어요!”

산천초목이 떠나가라 내뱉는 절규에 나타니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키리에는 길게 비명을 내지르더니, 허공을 향해 살차게 웃었다.

하지만 이내 보라색 눈이 젖어 들었다. 그녀는 떨리는 두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렸다.

“하지만 결국 그게 아니면 난 아무 의미가…….”

“저, 저기……!”

그 순간, 문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순 키리에의 얼굴에 공포가 떠올랐고, 나타니엘은 그를 보자마자 몸으로 키리에를 가렸다. 그가 키리에를 등 뒤에 숨긴 채 고개를 돌리자, 하녀 리모가 불안한 눈으로 문지방에 서 있었다.

“저, 죄송합니다, 아가씨……. 프, 프로노이아에서 손님이 오셨어요…….”

***

키리에가 응접실로 나갔다. 오십은 넘고 백은 안 되는 학자들이 응접실을 꽉 채운 채 앉아 있었다. 집사 에른스트가 의자를 내어 주기 위해 몹시 고생했을 것이 훤히 보였다.

키리에가 그중 가장 반가운 이에게 다가갔다.

“포 박사, 호크송 박사.”

“호, 아가씨!”

수도라고 한껏 멋을 부린 모양인지 앞면은 회색, 뒷면은 자주색인 새틴 조끼를 입은 살라미시 포 박사가 새된 소리를 지르며 키리에에게 달려들려다, 뒤에 있는 나타니엘을 보고 자리에서 멈췄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였다.

“너무 오랜만에 뵙지용? 이 포는 오늘이 너무 기대되어서 밤잠을 설쳤답니다……만.”

포 박사의 얼굴이 흐려졌다.

“……무슨 일이 있으시군용.”

“그리 오랜만은 아니지만 그렇게 느껴지네. 자네도 반가워.”

키리에는 일부러 포의 말을 무시하고, 그의 옆에 있는 마가렛 호크송 박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호크송 박사가 안경 밑의 눈을 엄격하게 빛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잘 지내시길 바랐는데, 역시 삶이 그리 쉽지는 않은 법이겠지요.”

“……잠깐 사고가 있었을 뿐이야.”

키리에가 어떻게든 미소 지으며 주제를 넘겼다. 호크송 박사는 다시 한번 안경 너머의 눈을 빛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키리에는 좌중을 한번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웬일이야?”

전부 마법사로 구성된 평균 연령 65세의 무리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그 사이에서 호크송 박사가 한 걸음 나섰다.

“전에 주신 소개장 일도 있고, 저희가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만…….”

그녀가 키리에 뒤쪽의 나타니엘을 한 번 흘끗거렸다.

“영주님이 부르신 건 아닌 모양이군요.”

“아…….”

키리에가 작게 피곤 섞인 한숨을 쉬었다. 그 소리에 나타니엘의 시선이 흔들린 것을 그녀는 보지 못했다.

“그래……. 착오가 있었더라도 손님을 내칠 수는 없지. 어서 와. 저택은 지금 수리 중이라 모두를 수용하긴 어려우니 숙소를 잡아 줄게.”

“저희야 감사합니다만.”

호크송 박사가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학자들은 연륜이 있는 만큼 서로 수염 길이를 자랑하며 소란을 피워 주었다.

“……수도에 안 좋은 소문이 많이 떠다니던데요. 괜찮으십니까?”

“아……. 소문.”

키리에가 손으로 눈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짚이는 것이 너무 많아서 특정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뭐든 간에 그녀가 할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미소 지으며 ‘괜찮다’고 하는 것. 그녀는 없어도 있는 것처럼. 있다면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굴어야 하므로.

“괜찮아.”

[키리에.]

뒤에서 나타니엘이 나섰다. 그는 다른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오롯이 키리에만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사흘만이라도 좋으니 제발 쉬어.]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듯 나타니엘의 목소리가 들리자 숨을 죽였다.

키리에는 어금니를 깨물고서 그를 무시했다. 그녀가 집사 에른스트를 불렀다.

“에른스트. 손님들께 적당한 숙소를 찾아 줘.”

에른스트는 약간 곤란한 얼굴이었다.

“그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보다, 주인님께서 부르십니다.”

“아버지가?”

“저택의 수리와 앞으로의 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갈게.”

“아가씨 앞으로 휘하 영주들의 서신도 쌓여 있습니다만…….”

“전부 갖고 와. 쓸데없이 누워 있느라 시간만 허비했어.”

“하녀를 시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후계자 교육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은 어려울 테니 내일부터 재개하도록 하지. 왕가의 동향에 대해서도 며칠간의 정보를 가져다주고.”

“그리하겠습니다.”

[키리에.]

“호크송 박사, 포 박사. 일단 에른스트를 따라가. 나중에 다시 연락하지.”

키리에가 깊고 복잡한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는 나타니엘을 무시한 채 앞으로 나섰다.

“수도를 소개해 주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이해해 주길 바라.”

그렇게 나타니엘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는 마법사들을 상대하고, 하녀에게 서류를 건네받으며 정신없이 걷다 보니 나타니엘은 어느샌가 그녀를 따라오지 않았다.

키리에는 복도에서 걸음을 멈추고 창밖을 보았다. 봄비라 하기엔 사나운 빗줄기가 시야에 가득하였다. 빗소리에 맞춰 약간 달떠 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누군가는 네가 노력하든, 노력하지 않든,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너를 사랑해 줄 거야.]

그리 말하던 나타니엘의 푸른 눈 역시, 도무지 뇌리에서 떨쳐지지 않았다. 꿈 같은, 거짓 같은, 그렇기에 심장을 파고드는 말과 떨리던 눈.

하지만 그녀는 이제 아이가 아니다. 노력한다고 상응하는 대가가 돌아올 리 없다는 걸 안다. 음울한 눈의 키리에가 냉연히 고개를 돌렸다.

그런 일은 없다. 절대.

***

키리에는 옹기종기 모인 마법사들을 이끌고 뷰캐넌 저택을 나섰다. 호위는 기사 발디르를 비롯한 뷰캐넌의 사병들이 맡았다. 나타니엘은 쫓아오지 않았지만, 키리에는 차라리 자기 머리 위에 유성이 내리꽂히길 바랐으므로 신경 쓰지 않았다.

프로노이아에서 온 마법사들은 간만의 수도를 신기해하며 숙소를 찾아 들어갔다.

‘약속한 게 있으니 레쇼 경과 한 번쯤 만나게 해 줘야겠네.’

키리에가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숨을 돌릴 때였다. 수염을 길게 기르고 수염에 마가렛 꽃을 꽂은 마법사 한 명이 다가왔다.

“그런데 영주님. 저건 괜찮은 겁니까?”

“저거?”

“저쪽 방향 말입니다.”

마법사가 하늘의 한 귀퉁이를 눈짓했다. 키리에가 생기 없이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

“아이구, 우리 영주님은 마력이 없으시던가?”

마법사가 수염을 쓸어내렸다.

“저 방향에 뭐가 있습니까, 영주님?”

키리에가 수도의 지도를 떠올렸다. 그녀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쪽은 보통의 시가지야. 특별히 큰 건물은 없어.”

“그렇습니까……. 그 너머는요?”

“너머는 평민들이 사는 하성구가 있지.”

“그 너머는 성벽이겠군요. 아렐라노를 넘어가면 뭐가 있습니까?”

마법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키리에가 차분히 답했다.

“포베 곶. 트레베레움과 가장 근접한 바다야.”

“흠.”

마법사가 다시 수염을 쓸었다.

“특별한 것은 없는 듯한데…….”

“대체 무슨 일인데?”

“저 방향으로부터 강력한 마력이 느껴져서 말입니다.”

“마력?”

키리에는 수도에 돌아왔을 때 나타니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혹시 왕궁과 착각한 건 아닌가?”

마법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왕궁 셀은, 허허, 다른 뭔가로 오해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보호 마법이 걸려 있군요.”

아마 인간은…… 하고 마법사가 수염 대신 마가렛 꽃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수도가 혼란하다 하더니 진짜였군요. 예사로운 힘이 아닙니다. 혹시 전설경이 저희를 부른 이유가 저것을 막기 위해서입니까?”

“뭐?”

뜻밖의 말에 키리에가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법사가 반달 모양의 안경을 조금 내리고서 눈을 빛냈다.

“아닙니까? 영주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마법사 부대 하나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그건 봤으니 잘 알지. 하지만.”

키리에가 말끝을 흐렸다.

“……그는 나타니엘이야.”

당사자가 이르되 세상의 모든 악독. 호국경 로르 레쇼조차 두려워하는 겨울의 왕.

그런 나타니엘이 뭔가를 ‘막기 위해서’ 사람들을 부른다? 말도 안 된다. 그는 그런 자가 아니다.

키리에가 한숨을 삼켰다.

“……오히려 자네들을 미끼로 쓰려고 불렀을 확률이 높아. 전설경이 뭔가를 요구하거든 내 이름을 대고 피해. 그가 자네들한테 득 될 일을 할 리 없으니까.”

마법사가 아이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습니까…….”

“되도록 숙소 밖으로는 나가지 말고. 수도의 분위기가 흉흉해.”

늙은 마법사는 자상한 눈으로 키리에를 보았다.

“그러겠습니다. 책상물림만 하고 산 노인네들이지만,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부르십시오.”

“손님인데 그럴 수야 없지.”

“손님이 아니라 영주님의 병사들입니다.”

“그땐 프로노이아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지. 하지만 자네들을 전쟁에 끌어들일 마음은 없네.”

키리에의 단호한 말에 마법사가 일순 복잡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 영주님 어깨에는 짐이 참 많은 모양입니다.”

그는 이마에 깊은 주름이 지도록 눈썹을 들썩이더니, 수염에서 흰 마가렛 꽃을 한 송이 빼내 키리에에게 건네주었다. 키리에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버렸다. 아주 잠깐, 자카란다 꽃을 내밀던 희고 고운 손이 키리에의 뇌리를 스쳤다.

“그걸 덜어 줄 사람이 영주님께 나타나길…….”

노인이 그렇게 말한 뒤 숙소로 들어갔다.

키리에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한 손에는 꽃을 든 채 마차에 올랐다. 그녀는 머뭇거리다 안네마리에게 꽃을 건넸다.

“보관해 줄래?”

“말려서 압화로 만들까요?”

“응.”

안네마리가 방긋 웃었다.

마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키리에가 생각에 잠겼다. 노인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내 짐. 내 책임…….’

정신이 온전치 못했을 때의 기억은 또렷하지 않다. 대체로 오래된 그림을 보는 것처럼 흐릿했다. 그래도 머리를 쓰다듬던 세자르와 제냐의 손길만은 선명했다.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해야 찾아오는 따뜻한 말, 다정한 손길. 그녀의 어린 시절, 그 무엇보다 간절히 바랐던 것이었다.

아이답지 않게 어른스럽고, 나이에 맞지 않게 손이 가지 않는 어린아이. 그게 그 시절 키리에의 역할이었다.

그녀에게 타인의 애정이란 상점에 진열된 물건과 같아서, 그걸 사기 위해선 상응하는 성과가 필요했다.

그게 나쁜 건 아니었다. 언제부턴가는 체념하게 되었지만,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좀 더 일찍 깨닫게 해 주었으니까.

뷰캐넌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하며, 없어도 있는 것처럼. 있다면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도망칠 곳은 없다. 도망칠 수도 없다. 그런 세계에 태어났다. 아마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키리에가 눈을 감아 버렸을 때였다.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아가씨!”

“발디르 경?”

키리에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마차 밖에서 발디르가 말을 달리며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조심하십시오!”

“뭐?”

그녀가 반문하자마자 마차 문이 뜯겨 나갔다.

〔키리에 뷰캐넌.〕

순식간에 레쇼가 마차 옆에 매달린 모습으로 나타났다. 너무 의외의 인물에 키리에는 놀라는 것도 잊었다.

〔습격입니다.〕

레쇼가 바람을 맞으며 말했다. 그가 앞을 보았다.

〔꼬마. 신호하면 키리에 뷰캐넌을 데리고 마차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그새 레쇼와 키리에를 가로막고 있던 안네마리가 키리에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안네마리를 잡으세요!”

키리에가 엉겁결에 안네마리를 끌어안은 순간,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지금입니다.〕

키리에와 안네마리가 하늘을 날았고, 검은 용의 날개 같은 큰 궤적이 펼쳐졌다가 사라졌고, 마차가 터졌다.

“콜록, 콜록……!”

마차가 터지면서 날린 연기에 키리에가 기침했다. 안네마리가 다시 그녀를 등지고 섰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괜찮아……. 그보다 어떻게 시가지에서……!”

〔그만큼 급했을 겁니다. 나타니엘이 자리를 비우는 일은 자주 있지 않으니까.〕

‘자리를 비웠다고?’

키리에가 고개를 들자 레쇼가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손에는 일전에 보았던, 몽둥이처럼 넓적한 검이 들려 있었다.

그는 검은 옷의 사람들과 대치 중이었다. 귀족들의 타운 하우스가 몰려 있는 탓에 인적은 드물었고, 사람이 있대도 이런 상황이라면 숨을 게 분명했다.

〔당신을 데려가고 싶은 모양입니다. 가고 싶습니까?〕

레쇼의 무심한 질문에 키리에가 미간을 좁혔다.

“아뇨.”

〔그럼 막겠습니다.〕

레쇼가 다시 앞을 보았다. 습격자들이 진형을 짜는 것이 보였다. 먼 곳에서 마력을 쓸 때 생기는 빛이 보이는 걸 보니, 마법사 역시 대기 중인 모양이었다. 뷰캐넌의 기사들 역시 자리를 잡았다.

그 사이로 레쇼가 몇 걸음 나섰다.

〔번거로우니 물러나라.〕

그의 엄정한 말에 발디르를 비롯한 뷰캐넌의 기사들이 당황했다. 레쇼는 그들을 무시한 채 눈을 가늘게 떴다.

〔나타니엘이 없어서 우습게 보이는 모양인데…….〕

멀베리 색 눈에 떠오른 건 명백한 가소로움이었다.

〔죽이진 않겠습니다.〕

레쇼는 순식간에 습격자들을 정리했다. 정말로 죽이지는 않았다. 팔다리의 관절을 찌른 뒤 던져 버렸을 뿐이다.

키리에는 뒤에서 그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확실히 나타니엘의 검술과 닮은 곳이 있었다. 그리고 확실히 나타니엘 쪽이 레쇼보다 경지가 높았다.

레쇼의 검이 파괴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사방팔방 뻗어 나가는 느낌이라면, 나타니엘의 검은 그 모든 단계를 뛰어넘어 소리 없이 고요하다는 인상이었다. 마치 그 자신처럼.

키리에는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 주변을 정돈했다. 폭발 마법 때문에 부상자가 있었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다쳤습니까?〕

레쇼가 마지막 습격자를 처리한 뒤 몸을 돌리고 물었다.

“……아뇨.”

거대한 몽둥이 같은 검이 주는 위압감에 키리에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나타니엘이라면 그걸 보자마자 검을 물렸겠지만, 레쇼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사흘 동안은 나타니엘이 있든 없든 내가 주변에 있을 겁니다. 쓸데없는 호위 인력은 뷰캐넌 저택으로 돌리는 게 좋겠습니다.〕

“사흘이요?”

〔사흘입니다.〕

키리에의 눈이 흔들렸다. 묻지 않고 지나가기에는 지나치게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어째서요?”

레쇼가 고개를 기울였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겁니다.〕

갑자기 레쇼가 거북하게 느껴졌다. 친근했던 적조차 없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녀 옆에 있는 사람 중 가장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왜 지금까지 그의 목적이 뭔지 생각해 보지 않았지?’

키리에가 희미한 불안을 삼키며 괜히 팔을 매만졌다.

그동안 기사들이 사고 현장을 정리했다. 키리에는 새 마차가 올 때까지 레쇼와 함께 근처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안네마리가 정찰을 위해 약간 거리를 벌리자, 레쇼가 키리에에게 말을 붙였다.

〔나타니엘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키리에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아무 생각 없습니다.”

레쇼의 얼굴에 잠시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 스쳐 갔다.

〔싫지 않습니까.〕

“싫어요.”

〔당사자에게 말해 주십시오.〕

키리에는 잠시 고개를 들어 레쇼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타니엘이 소중한 거 아니었나요?”

레쇼도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그는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체리 색 눈이 일순 아주 깊고 맑아졌다.

〔고작 그런 단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렇습니다.〕

키리에가 멈칫한 뒤, 고개를 돌렸다. 나타니엘 역시 말로는 잘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나타니엘을 용서하라고는 하지 않네요.”

키리에의 말에 레쇼가 고개를 저었다.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별로 그걸 바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당신이 나락 끝까지 나타니엘을 밀어 넣어도 상관없습니다.〕

“네?”

키리에가 약간 놀라 레쇼를 보았을 때, 그는 어느새 다시 정면을 보고 있었다. 허리춤에 거대한 검을 찬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선 그의 모습은 어딘지 사막이나 평원의 전사들을 떠올리게 했다.

〔나타니엘은 되도록 무엇에도 정 붙이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는 죽지 않으므로, 무언가를 잃지 않는다는 게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레쇼가 잠시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게다가 그것에 무뎌지지도 않습니다.〕

“……어째서요?”

키리에가 망설이다 물었다.

〔그는 그냥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새가 날개를, 물고기가 지느러미를 달고 태어나듯이.〕

레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늘에서 천둥이 쳤다. 먹구름이 모여들고 있었다. 레쇼는 무심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괴로운 일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물론 지금의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다시 천둥이 쳤다. 엄청난 소리였다. 꼭 레쇼의 말을 가로막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저 멀리서 안네마리가 불안한 눈으로 이쪽을 흘끔거리는 것이 보였다.

레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래서 사실 나는…….〕

멀베리 색의 말간 눈동자에 깊은 회한이 묻어났다. 언젠가 나타니엘에게서도 본 적이 있는 천진하고 설운 눈이었다.

〔슬픕니다. 나타니엘이 언젠가 죽어 버릴 당신을 그토록 아끼는 게.〕

***

그 날, 나타니엘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엔 뷰캐넌 저택에 국왕의 병사들이 찾아왔고, 레쇼가 물리쳤다.

나타니엘이 돌아온 건 이틀 뒤 밤이었다.

새벽까지 뒤척이다 겨우 잠든 키리에는 바깥의 인기척에 어렴풋한 잠에서 깼다. 방문 틈으로 들어오는 불빛에 사람 그림자가 졌다.

[키리에는?]

나타니엘이 몹시 지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렸다. 침실에 딸린 응접실에서 호위 중이던 레쇼가 답했다.

〔오레윈브리지의 습격이 몇 번 있었지만 무사하다.〕

‘몇 번’이라는 단어에 키리에가 움찔했다. 키리에의 기억에는 한 번뿐이었으니, 그녀가 모르는 곳에서 레쇼가 처리한 모양이었다.

〔그보다 오래 걸렸군.〕

[그래……. 내 방식은 아니니까.]

나타니엘이 들릴락 말락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피로가 소리가 되어 들리는 듯했다.

[살면서 시간이 없다고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이게 보통 사람들의 속도라면 그토록 참을성이 없는 것도 이해가 가네.]

〔모레인가?〕

[그래.]

〔오레윈브리지는…….〕

그 뒤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더 작아져서 잘 들리지 않았다.

몇 마디의 대화가 더 이어진 뒤, 침실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두꺼운 카펫을 밟는 발소리가 났다. 키리에가 재빨리 다시 자는 척했다.

나타니엘은 키리에가 누운 침대로 다가왔다. 그리고 옆에 서서 한참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딜 다녀온 걸까. 키리에는 자꾸 그에 대해 생각하려는 자신을 멈추었다.

키리에가 불편한 마음에 몸을 조금 뒤척였다. 그러자 나타니엘이 가늘게 한숨을 짓더니, 나직이 속삭였다.

[……잘 자렴.]

그리고 평소와 달리, 이마가 아니라 키리에가 덮은 이불의 끝을 톡톡 두드린 뒤 방을 나섰다.

***

잠에서 깨어났을 땐, 당연하다는 듯이 나타니엘이 곁에 있었다. 그는 상쾌할 정도로 가뿐하게 미소 지었다. 지난밤에 보였던 피로감이 마치 거짓말 같았다.

[일어났구나. 씻고 식사를 하지. 날이 맑아. 오늘은 나들이를 가도 좋겠어.]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타니엘은 심지어 키리에와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그는 시선이 조금이라도 마주칠 때마다 사붓이 미소를 지었다.

[키리에. 오늘 일정은?]

괜히 친근하게 구는 그의 태도에 속이 불편했다. 레쇼의 말이 아직 기억에 남아 있어서 더더욱.

키리에가 나지막이 한숨 쉬었다. 나타니엘의 미소가 아주 잠깐 흔들렸으나, 그는 바로 표정을 부드럽게 정돈했다.

[프로노이아의 박사들을 만나러 가나? 같이 가지.]

이후 나타니엘은 정말로 키리에의 모든 일정에 따라다녔다. 이전의 나타니엘이 그저 키리에와 동행하는 수준이었다면, 오늘은 그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속눈썹의 떨림 하나까지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거기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여유로운 태도와 나긋한 우아함 탓에, 그는 모든 곳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속이 뒤틀렸다. 그가 빛날수록, 그녀는 조금씩 더 비참해졌다.

오전 업무가 끝나고 오후 업무로 들어가기 직전, 결국 참다못한 키리에가 나타니엘을 빈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키리에?]

등 뒤에서 들리는 다정하고 나긋한 목소리에 키리에가 다시 한숨 쉬었다.

“……그만해요.”

나타니엘의 미소가 조금 흐려졌다.

[뭘?]

“무슨 꿍꿍이속인지는 몰라도…… 그만해요, 제발.”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그렇게 웃는 거, 따라다니는 거, 관찰하는 거. 그만하라고요.”

노려볼 힘도 없었다. 키리에가 팔을 늘어뜨린 채 나타니엘을 응시했다. 나타니엘은 멍하니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예의 아름답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안 드니?]

“들 것 같아요?”

고단함이 얼룩진 목소리에 나타니엘이 다시 말을 멈췄다. 미소는 거의 사라졌다. 그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마치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보통은 내 이런 모습을 좋아하니까.]

키리에가 헛웃음 쳤다.

“……아뇨, 나타니엘. 당신은 뭔가 착각하고 있어요.”

나타니엘이 눈을 들어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키리에는 그의 눈을 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이 뭘 해도 이제 나는 당신이 지긋지긋해요.”

나타니엘의 얼굴에서 완전히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벼랑 끝에 선 사람처럼 굳었다.

“당신이 날 보고 있으면 두려워요. 도망치고 싶고요. 당신이 말 거는 것도 싫고, 당신이 부르는 내 이름에…… 미쳐 버릴 것 같아요.”

서서히 텅 비어 가는 새파란 눈을 보며 키리에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가 가빠오는 숨을 들이켠 뒤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발 좀 날 혼자 있게 해 줘요…….”

나타니엘은 아주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 뒤, 그가 입꼬리를 움직였다. 어떻게든 미소 짓고 싶은 사람처럼 입매가 움직였지만, 이내 멈췄다. 흔들리는 푸른 눈이 인파 속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떨렸다.

일단 한 번 보면 내칠 수 없는, 발버둥 같은 시선에 키리에는 고개를 돌렸다.

“……먼저 나갈게요.”

그를 지나쳐 나가려던 키리에의 귀에 잔뜩 쉰 목소리 들렸다.

[오늘만.]

키리에가 멈칫했다. 나타니엘이 선 자세 그대로, 약간 고개를 숙인 채 힘겹게 입을 뗐다.

[내 이름을 걸고…… 내 능력 안의 일이라면 뭐든 해 줄 테니, 오늘 하루만.]

“…….”

[……아니, 한 시간 만이라도.]

쥐어짜듯 내뱉은 목소리의 호흡이 거칠었다. 잠시 흠칫한 나타니엘이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정말, 보기만…….]

키리에가 이를 악물었다.

지긋지긋했다. 종말이 다 뭐고 세계 최흉이 다 뭐란 말인가. 지금 그는 열심히 할 테니 쓰다듬어 달라고 애원하던 어릴 적의 키리에 뷰캐넌 같았다. 키리에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싫어요.”

키리에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서 방에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나타니엘은 홀로 지옥에 남겨졌다.

키리에가 방에서 나가고, 나타니엘은 한동안 그 자리에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가슴 안쪽이 조용히 불타는 듯했다. 나타니엘은 눈을 감은 채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것은 도통 지나가지를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심장의 무게는 더 선명해졌다. 아마 열두 개로 조각나 피를 타고 흐르는 모양이었다. 이렇게나 온몸이 뜨거운 것을 보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뭔가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나타니엘은 내도록 자리에 서서 그것을 삼켜 냈다. 목울대가 몇 번이나 꿀렁이고, 미간에 들어간 힘은 풀리지 않았다.

녹아내리는 것 같은데, 기이하게도 머리 위쪽은 오히려 안쪽이 꽉 차 터져 나가는 듯했다. 가슴이 불규칙적으로 들썩대다 가라앉고, 그러다 다시 뭔가가 치밀어오르는 것이 반복되었다.

그게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라는 걸, 그가 알 턱이 없었다.

나타니엘은 한참 뒤에야 겨우 몇 걸음 거리에 떨어져 있는 소파 위로 무너지듯 앉을 수 있었다.

몸에 힘을 빼면 무슨 행동을 할지 몰라, 그는 양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리고 작은 신음도 흘리지 않기 위해 단단히 턱을 악물었다.

다행히 키리에가 내뱉은 말이 아직 방 안에 고여 있었다. 그게 나타니엘의 인내심을 가늘게 유지시켰다.

언젠가 비슷한 밤을 보냈던 적이 있다. 키리에가 오레윈브리지에게 납치당했을 때다. 그때도 그는 별로 멀쩡하진 않았지만, 분명 여유는 있었다.

그때의 나타니엘은 키리에가 물론 아주 작고 귀엽지만, 대체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릇 모든 일이 그러했다.

전무후무의 천재란 없다. 불세출의 영웅도 없다. 아무리 특별해 보이는 것도, 영원이라는 잣대를 대면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끝도 없는 시간 속에서 정말로 ‘딱 하나’뿐인 존재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나타니엘은 그중 하나였고, 그에 비해 인간은 무수히 많았다.

키리에는 분명 나타니엘의 세계였다. 적어도 이 한 세기는 그럴 터였다. 하지만 과거 그 세계가 얼마나 자주, 쉽게 무너지는지를 깨달은 나타니엘에게 그것이 굳건하리라 믿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믿고, 배신당하고.

믿고, 죽임당하고.

믿고, 외면받고.

그래도 믿고, 믿고, 그리고 또 믿고…….

그러다 그럴 바에야 증오로 무너지지 않을 성을 쌓겠다 마음먹었다. 나타니엘이 실소를 흘렸다. 웃음과 함께 가슴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렸다.

그래도 키리에에게만은 그러지 말 걸 그랬다.

방 안에는 노을이 졌고, 밤이 찾아들었다. 뷰캐넌 저택에 하나둘씩 어둠을 밝히는 불빛이 켜졌다. 레쇼는 나타니엘의 부탁대로 키리에 근처에서 호위 중이었고, 키리에는 평소보다 늦게 잠이 들었다.

나타니엘은 다시 슬퍼졌다. 숨이 막혀 왔다. 키리에가 또 악몽을 꾸면 어떻게 하지? 이제는 악몽을 없애줄 사람이 없다. 누군가 암살자를 보내면? 약해빠진 키리에 뷰캐넌은 팔 하나만 잘려도 픽 죽어 버릴 텐데.

누가 독이라도 먹이면.

높은 곳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 아비가 해코지라도 하면.

하지만 그 모든 걱정에도 그는 결국 키리에의 침실로 향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냉랭한 목소리가 귓가에 고여 소용돌이쳤다.

‘싫어요.’

나타니엘은 그 말을 들을 때 자신이 어땠는지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온몸이 키리에 뷰캐넌의 모든 목소리를 여과 없이 받아들였다는 것만이 기억났다.

‘당신이 날 보고 있으면 두려워요. 도망치고 싶고요. 당신이 말 거는 것도 싫고, 당신이 부르는 내 이름에 미쳐 버릴 것 같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마지막이니까 기왕이면 그럴듯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을 뿐이다. 마음 약한 키리에 뷰캐넌이라면, 언젠가 ‘내가 심했던 걸까.’ 같은 생각을 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그런데 나타니엘이 미소 지을 때마다 그녀는 한숨 쉬었고, 나타니엘은 당황을 숨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나타니엘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가장 슬펐다. 마치 너는 영원히 부외자라는 선고 같았다. 그는 영원히 키리에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타니엘이 천천히 고개를 젖혔다. 주먹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럴 거면.

그럴 거면 차라리 고독을 알게 하지나 말지.

타인의 손길이 따뜻하다고 느끼게 하지나 말지.

겨울의 끝에는 봄이 온다는 걸 알려 주지나 말지.

오장육부가 난도질당해 찢기는 것 같은 괴로움이었다.

그래도 밤은 속절없이 흘렀고, 이윽고 마지막 날이 밝았다. 커튼 틈으로 새벽빛이 들었을 때, 나타니엘은 어리석게도 시간을 돌렸다. 태양의 끄트머리가 다시 땅으로 꺼지고, 하늘이 검게 익고, 그마저 지나 무르익은 저녁으로. 그리고 차츰차츰 원래의 시간으로.

그는 수십 번을 그렇게 도망친 끝에야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볼 수 있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그는 이제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다.

[……키리에.]

이름 하나에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어째서 갖고 태어났어야 했는지. 그는 영영 모를 것이다.

눈으로 들이치는 햇살에 눈을 감으며, 나타니엘은 채 삼키지 못한 침음을 흘렸다.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면, 미안하다고 말할 걸 그랬다. 그게 아무리 가치 없고 흔한 말이더라도 말할 걸 그랬다.

‘미안해. 네가 무서워.’

‘나는 네가 두려워……. 그러니까 이건 대의를 위해서야. 이해해 줘.’

‘미안. 넌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미안해도 돌은 던지고, 미안해도 그를 배신하고, 미안해도 죽이려 든다.

정당화에 자기 합리화. 그저 죄책감을 덜기 위한 말. 그까짓 걸 줄 바에야 행동으로, 물질로 보상하는 걸 기뻐하리라 생각했다.

그래도 미안하다고 말할 걸 그랬다.

이미 늦었지만.

나타니엘이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났다기보다 미끄러지는 것에 가까웠다. 이제 그는 인간형의 몸을 움직인다는 자각이 없었다. 키리에가 없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방을 나선 나타니엘은 문 앞에서 안네마리를 마주쳤다. 애꾸눈의 시녀는 가장 먼저 공포와 경악에 질렸다.

“……나, 타니엘, 님.”

시녀가 숨을 헐떡였다. 나타니엘이 뭔가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었다. 그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보통의 존재는 그의 본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미치거나 죽는다. 시녀도 곧 심장이 멎을 터였다.

하지만 죽으면 키리에가 슬퍼할 것이다.

하얗게 눈을 까뒤집은 시녀를 내려다보던 나타니엘이 몸을 정제했다. 안네마리는 새빨개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크헉, 컥, 큭…….”

[할 말이라도?]

안네마리가 두려움과 적의가 섞인 눈으로 나타니엘을 올려다보았다.

“가, 가시나요……?”

[가야지.]

나타니엘이 차분하게 답했다. 그는 키리에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녀에게 달려가 무릎 꿇지 않기 위해 지팡이를 세웠다.

[너도 역할이 있어.]

나타니엘이 잠시 고개를 들어 창 너머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어딘가에 키리에가 살아 있는 세계라고 생각하니 애틋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알고 있었겠지. 아무리 변변찮아도 세자르 뷰캐넌은 키리에의 친부고, 키리에는 제 아비를 죽인 자를 아낄 수 있을 정도로 융통성 있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안네마리가 허를 찔린 사람처럼 움찔했다. 작은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아, 안네마리는, 아가씨에게 미움받기 싫었어요. 안네마리도 당연히 주인님이 싫고, 없어졌으면 좋겠지만…….”

나타니엘이 사붓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내 몫인 모양이야.]

“……네?”

[너는 세자르 뷰캐넌에게 붙어 있도록. 때가 되었을 때, 그가 만에 하나라도 키리에를 먼저 찾는다면 키리에에게 데려다주렴.]

나타니엘이 살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목소리가 한 단계 낮아졌다.

[내버려 두고 물러나. 그리고 키리에에겐 내가 죽였다고 전해.]

안네마리의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졌다. 나타니엘은 말문이 막힌 금발의 시녀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왕궁에 응집된 마력이 깨질 것처럼 위태위태했다.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나타니엘이 실소하듯 미소 지었다.

[그런 건 항상 내 몫이거든.]

[둄2 절갠 교환재공타싸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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