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 각오 (22/33)

22. 각오

다음 날 키리에가 일어났을 때, 그녀가 안네마리를 보고 흐린 눈으로 물었다.

“누구지? 새로 온 시녀니?”

저택에 한차례 파란이 일었다.

나타니엘은 이야기를 듣고 다소 조급하게 키리에를 찾았다. 키리에는 갤러리에 집사와 함께 있었다.

“에른스트. 먼지가 너무 많아. 손님들 보시는 곳이니까 갤러리를 신경을 써야지.”

경쾌하고 엄한 목소리에 나타니엘이 멈칫했다. 그의 발소리를 들은 키리에가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어딘지 서투른 동작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뷰캐넌 백작가의 키리에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손님이신가요?”

안네마리가 옆에서 입을 벙긋거렸다.

‘유아 퇴행.’

원망스러운 눈이었다.

나타니엘이 고개를 키리에에게 돌렸다. 키리에는 대답을 기다리며 잔뜩 어깨를 굳히고 있었다.

[몇 살이지?]

“……열 살입니다.”

키리에가 조금 불만스럽게 대답했다. 원래의 키리에였다면 귓구멍이 막혔느냐를 우아하게 돌려 말했을 것이다.

[열 살.]

“네.”

[…….]

나타니엘은 자신이 생각만큼 기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키리에가 그 모든 기억을 잊어버려서 다행인 것 같으면서도, 그게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혼란을 삼키고 느리게 대답했다.

[그래. 손님이야.]

“응대가 서툴러 죄송해요. 귀하신 분께서는 성함이……?”

[나타니엘.]

이어지는 말이 없자 키리에가 당황해 머뭇거렸다. 그때 뒤에서 세자르가 다가왔다.

“각하.”

“각하?”

키리에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세자르가 눈살을 찌푸리며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나타니엘이 자연스럽게 그 사이를 가로막았다.

[키리에의 이야기는 전해 들었겠지.]

“물론입니다. 갈수록 일이 꼬이는군요.”

[당분간 내가 돌보지. 용건은?]

세자르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실례했습니다. 국왕의 병사들이 저택 주변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공격하겠다던가?]

“아직 그렇진 않습니다만,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병사들이요?”

세자르가 말하는 도중 키리에의 불안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이 앞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었군. 자리를 옮기지.]

바로 목소리를 낮춘 나타니엘과 달리 세자르는 인상을 찌푸렸다.

“키리에. 손님과 대화 중이다.”

키리에가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죄송해요.”

키리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풀이 죽었다. 나타니엘은 몹시 언짢아졌다. 지팡이로 한 번만 때리면 좋을 것 같은데, 어쨌든 세자르 뷰캐넌은 키리에의 친부였다. 그는 혈연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반대로 그 부분에는 조심스러웠다.

나타니엘이 웃음기 없는 눈으로 미소 지으며 지팡이를 꺼냈다.

[뷰캐넌. 웃어야지. 그렇게 인상이나 쓰고 있으니 키리에가 네가 화났다고 오해하잖니.]

“예?”

[웃을 일이 없다면 내가 웃게 해 주고.]

“각하, 지금은 그보다는…….”

[그래, 그건 내 몫이지. 그러니 너는 웃어야지.]

나타니엘이 조심스레 세자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는 지팡이 끝으로 세자르의 어깨 한쪽을 툭 두드린 뒤 속삭였다.

[그게 아니면 내가 왜 널 살려 두고 있겠어.]

움찔한 세자르가 키리에 쪽으로 슬금슬금 걸음을 옮기며, 주제에 능숙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각하께서 해결해 주신다 하니 이제 걱정이 없군요!”

나타니엘이 심드렁히 그를 주시했다. 간사한 자다. 자신이 손쓰지 않아도 제 명에 죽지는 못할 것이다.

키리에는 영문도 모른 채 아비가 웃으니 그저 따라 웃고 있었다. 복사꽃 같은 미소였다. 나타니엘의 입매가 부드러워졌다.

[맘에 드니?]

“네?”

키리에가 깜짝 놀라 대답한 뒤 얼굴을 붉혔다.

“음, 두 분 대화에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각하…….”

[얼마든지 끼어들렴. 그렇지, 뷰캐넌?]

“하하, 하! 물론입니다.”

세자르가 어색하게 키리에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 키리에. 나는…… 일을 해야 하니, 네가 각하를 잘 모시렴. 할 수 있지?”

별거 아닌 작은 어루만짐과 칭찬에 키리에가 바짝 굳었다.

“네, 아버지.”

“넌 뷰캐넌이야.”

“네, 아버지. 알고 있어요.”

“네 어미 같은 무책임한 사람은 되면 안 된다.”

잔뜩 의욕에 차 있던 키리에가 조금 어깨를 늘어뜨렸다. 여전히 주제 파악 못 하는 말에 나타니엘은 좀 더 언짢아졌다.

“……네, 아버지.”

그녀가 머뭇거리며 덧붙였다.

“아버지……. 그런데 혹시 어머니는 언제 오시나요?”

세자르가 무표정으로 변했다.

나타니엘은 키리에의 정신이 왜 열 살 시점으로 회피했는지를 깨달았다. 아직 세자르 뷰캐넌과 제냐 하트우드가 이혼하기 전이었다. 아직 모든 게 행복했던 시절.

세자르는 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나타니엘을 바라보았다.

“영지에서 저희 쪽 사병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규모는 크지 않습니다만, 아치볼드가 빠지고 버몬트가 내분으로 돌입해 생각만큼 나쁘진 않습니다. 하지만 전면전은 피하고 싶습니다만.”

나타니엘은 대답 대신 엄지와 검지로 입술 앞에 완만한 곡선을 그려 보였다.

[웃어야지?]

새파란 눈빛이 서늘했다. 키리에의 정신이 어려졌기 때문에, 그는 좀 더 엄격해질 필요성을 느꼈다.

세자르는 파르르 입꼬리를 떨다가, 홱 하고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나타니엘이 다시 키리에에게 주의를 돌린 뒤, 미소 지으며 허리를 살짝 굽혔다. 그가 우아하고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차 한잔하실까요?]

키리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새침하게 나타니엘의 손을 잡았다.

“얼마든지요.”

***

단장에서 약간의 고비가 있었다.

“아가씨. 환복을 도와드릴게요.”

안네마리가 그렇게 말하며 나섰으나, 키리에는 머뭇거렸다. 뾰족한 귀가 낯설어 불편한 모양이었다.

“저기……. 마르타는?”

마르타는 이미 죽은 키리에의 유모였다. 나타니엘이 눈짓하자 하인 한 명이 재빨리 오래 근무한 하녀를 데리고 왔다. 안네마리는 충격받은 얼굴로 물러났다.

키리에가 단장하는 동안, 나타니엘 역시 복도로 나왔다. 안네마리는 복도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나타니엘의 인기척을 느끼자, 번들거리는 검은 눈을 하고서 고개를 쳐들었다.

빛 들지 않는 복도에서 둘이 동시에 말했다.

“고쳐야 해요.”

[잠시 놔두지.]

잠시 쌕쌕 숨을 내뱉던 안네마리가 온 저택이 떠나가라 외쳤다.

“이게 다 나타니엘 님 때문이에요!”

눈에서 절망이 보였다. 나타니엘이 차분하게 지팡이를 짚었다.

[부정은 안 해. 하지만 잠깐 쉬게 두는 게 좋겠어.]

“아가씨가 안네마리를 잊어버렸다고요!”

[그래서 무슨 수를 쓰겠다고?]

“강제로 기억을 깨울 거예요!”

안네마리가 그렇게 말한 뒤 어깨를 들썩이며 하나 남은 검은 눈을 좌우로 굴렸다.

“엄마가 알려 줬어요, 그런 주술이 있었어요, 분명……!”

[위험은?]

안네마리가 입술을 깨물었지만, 기세는 더 흉흉해졌다.

“하지만 아가씨가 안네마리를 잊었단 말이에요……!”

[위험하단 뜻이군.]

나타니엘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미리 죽여 둘까.

하지만 그는 눈앞에서 훌쩍거리는 안네마리의 머리통과, 그녀를 끌어안고 웃던 키리에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죽이고 아무도 모르게 숨기면 된다. 연고도 없는 하프 엘프 따위 키리에가 아니라면 누구도 찾지 않는다.

키리에가 아니라면.

나타니엘이 이내 지팡이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풀었다.

[……잠시 쉬게 내버려 두지. 키리에는 인간이니 인간의 방식이 덜 유해할 거야.]

안네마리가 고개 숙인 채 눈동자만 찌르듯 올려 원망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나타니엘이 덧붙였다.

[올드시우다드에 연락해. 포트듀케인의 그 망아지에게도.]

“……나타니엘 님을 죽이려 들 거예요.”

[그래, 암살자도 같이 보내라고 하고.]

“안네마리도 나타니엘 님이 죽었으면 좋겠어요…….”

어느새 나타난 작은 단검이 안네마리의 손에 들려 있었다. 흰자위가 드러난 눈은 그의 허점을 찾으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실, 안네마리는 나타니엘이 저택에 있는 내내 그래왔다.

나타니엘이 실없이 웃었다.

[안 그랬던 사람은 키리에밖에 없었어.]

***

정원에 만개한 자카란다를 보며 키리에는 조금 흥분한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나 나타니엘의 눈치를 보며 점잖게 꽃들을 흘끔거렸다. 나타니엘은 옅은 애수가 비치는 온화한 눈으로 그런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자카란다를 좋아하니?]

나타니엘이 모른 척 물었다. 키리에의 얼굴이 환해졌다.

“……네.”

그녀가 환한 얼굴에 비해 조금 망설이는 태도로, 그러나 정직하게 인정했다. 아마 아직 예절 교육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라, 어디까지가 귀족다운 대답인지 모르는 듯했다.

[다른 건?]

“다른 거요?”

[좋아하는 거.]

키리에가 생긋 웃었다. 분명 예쁜 미소였지만, 이런 대답을 위해 준비했다고 생각되는 표정이었다.

“요즘은 안젤라의 미술 작품이 좋더라고요.”

나타니엘이 입가를 찻잔으로 가렸다.

[어느 작품이?]

“‘강림하는 천사’요.”

열 살짜리의 마음에 들 만한 작품은 아니었다. 나타니엘은 산뜻하게 그녀의 허세를 모른 척해 주었다.

그가 대답이 없자, 키리에가 상체를 내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각하께서는 공작가의 분이신가요?”

[나타니엘이라고 불러. 왜 그렇게 생각했니?]

“아버지가 깍듯하길래요. 올드시우다드는 아닌 듯한데, 이덴홀 공작가 분이신가요?”

[7대 가문은 영지의 크기와 사병 수에 차이가 있을 뿐 위아래가 없단다.]

“이덴홀은 아니군요? 하긴, 지팡이를 꺼내신 걸 보면 마법사이신 것 같으니까……. 그럼 왕족이신가요?”

어린 키리에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조잘조잘 떠드는 게 좋은 접대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궁금한 건지.

어느 쪽이든 생기 넘치는 키리에를 본 것이 까마득한 옛날이라, 조금 먹먹한 기분이었다.

[뜻대로 생각해.]

“비밀인가요? 그럼 숨겨드릴게요. 저는 입이 무겁답니다.”

나타니엘이 미소 지었다. 연회에서 비난받으면서도 꼿꼿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알아. 그건 내가 잘 알지.]

키리에가 살며시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뒤늦게 찻잔으로 얼굴을 가렸다.

“병사는…… 무슨 말인가요? 혹시 아버지가 왕가에 반기를 들려고 하나요?”

[아이에게 할 이야기가 아니구나.]

“하지만 저는 뷰캐넌이에요.”

[그리고 어리지.]

“하지만…….”

[키리에. 언젠가는 듣기 거북한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는 때가 와. 그러니 그걸 미리 앞당길 필요는 없어.]

나타니엘이 낮고 부드럽게 말했다.

키리에가 말을 멈추고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일순 아이인 키리에와 어른인 키리에가 혼재된 듯 지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아빠, 엄마가 날 보러 오지 않잖아요…….”

나타니엘이 멈칫했다. 그는 곧 잔잔하게 차오르는 살의를 능숙하게 갈무리한 뒤 말했다.

[이혼했다고 했나.]

“아직 아니에요!”

키리에가 발끈하듯 외쳤다가, 제 행동에 지레 놀라 울상을 지었다.

“죄송해요, 제가 점잖지 못하게…….”

나타니엘이 보란 듯이 나긋하게 미소 지었다.

[열 살에게 점잖게 있으라 요구하는 어른이 있다면 발을 밟아 주렴.]

“……그게 우리 아버지인데도요?”

[아버지면 더 쉽지. 뒤처리가 곤란하진 않겠어.]

“저보다 더 큰 어른인데요?”

[별수 없으니 나중에 내가 밟아 주도록 하지.]

그녀가 키득거리다가 활짝 웃었다.

“나타니엘 님은 좀 특이하시네요.”

안에 든 것이 열 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타니엘은 조금 멍해졌다. 자카란다 꽃을 받았을 때의 그 미소였다. 준 게 없는데도 받는 미소는 그를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타니엘 님?”

그가 말이 없자, 키리에가 상체를 내밀며 손을 흔들었다. 나타니엘이 뒤늦게 시선을 내렸다.

[키리에.]

“네.”

그녀가 좀 더 어른스럽고 당차게 대답했다. 나타니엘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 맑고 선한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결국 고작 이런 거였다.

[갖고 싶은 건 없니?]

키리에는 한참 동안 고민에 잠겼다. 그러다 쑥스러운 듯이 속삭였다.

“하고 싶은 건 있어요.”

[하고 싶은 거?]

“비밀인데, 저희 아버지의 발가락을 괴롭혀 주시는 대가로 특별히 알려드릴게요.”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나타니엘의 귓가에 손을 모아 속삭였다.

“엄마, 아빠랑 놀고 싶어요…….”

***

나타니엘은 바로 제냐 하트우드를 소환했다. 하루가 다 가기도 전이었다.

담뱃대를 문 채 오만하게 뷰캐넌 저택으로 들어오던 제냐는, 나타니엘과 그 옆에 선 세자르를 보더니 담뱃대를 옆에 있던 시종에게 건네주었다.

“또 뵐 줄은 몰랐네요.”

당당한 말투였지만 나타니엘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익숙했다. 나타니엘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키리에가 원하더라고.]

제냐가 의아한 듯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 아이가 저를요? 걔는 그랬던 적이 없는데. 아주 어릴 때 빼고는요. 전보에서는 지금 열 살로 퇴행했다 하시지 않았나요?”

나타니엘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녀의 부모는 자신만큼이나 그녀를 모른다.

[그 아주 어릴 때라고 치고 노력해 보렴. 어려운 일도 아닐 테고.]

“이번엔 단란한 가족 연극인가요? 전설경께서는 취미가 참 고약하시네요.”

“제냐.”

세자르가 나타니엘의 눈치를 보며 낮게 일갈했다. 그는 나타니엘을 흘끔거리며 낮고 빠르게 말했다.

“허튼소리 하지 말고 해야 할 일이나 똑바로 해.”

제냐의 눈썹이 다시 활처럼 휘었다.

“지금 너, 나한테 명령했니? 내가 네 말 들어주려고 온 줄 알아?”

“갑자기 없던 모성애가 생기진 않았으리란 건 알지.”

“그러는 넌? 딸 하나 상납해서 공작가가 되니까 속이 시원해?”

“그게 지금 여기서 할 말인가!”

“닥쳐, 990점짜리가.”

“뭐?”

제냐와 세자르는 나타니엘이 침묵하자 더 기가 살아 서로 삿대질을 해 가며 다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나타니엘은 피로를 느꼈다. 이전 같았으면 재밌다고 싸움을 부추겼을 텐데, 지금은 방에서 깜짝 선물이 뭘까 하며 기다리고 있을 키리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하나 얻은 건 있었다. 이 집안의 누구도 키리에를 제대로 생각해 주지 않았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만.]

나타니엘이 약간의 위압감을 담아 낮게 말했다. 제냐와 세자르가 동시에 말을 멈췄다.

[너희가 원하는 건 나중에 들어줄 테니, 지금은 너희 딸에게 좋은 꿈을 보여 주고 오렴. 내가 굳이 험한 말을 쓰지 않아도 되게끔, 부탁하지.]

세자르와 제냐는 서로를 노려보다 동시에 고개를 홱 돌렸다. 그때 나타니엘이 눈썹을 살짝 들썩였다.

[참. 뷰캐넌.]

“예?”

세자르가 몸을 돌린 순간, 나타니엘이 지팡이를 아래로 찍었다. 잠깐이지만 그의 표정도 조금 부드러워졌다.

“크악!”

세자르가 망가진 구두코를 부여잡으며 몸을 웅크렸다. 나타니엘은 그 위에 금화 몇 개를 던지며 말했다.

[누가 네 발가락 암살을 사주하더라고.]

노을과 반쯤 무너진 뷰캐넌 저택을 배경으로 세 사람이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키리에는 행복한 듯 웃었다. 세자르는 연기를 잘했고, 제냐는 호승심 때문에 연기에 목숨을 건 느낌이었다.

상관없었다. 키리에만 좋아한다면.

나타니엘은 열주랑 한쪽에 서서 키리에가 세자르와 제냐에게 뭔가를 조잘조잘 떠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달아오른 뺨은 분홍빛이었고, 부모 중 한 명이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마다 어쩔 줄 몰라 했다.

키리에가 웃을 때마다 나타니엘은 슬퍼졌다.

결국 그가 가진 무엇으로도 키리에를 웃게 할 수는 없었다. 자카란다는 정말 우연이었던 거다. 시기가 맞고, 때가 맞아서 생긴, 일생에 단 한 번 있을 우연. 그러면 아예 없던 것으로 해 버리면 될 것을, 그러지도 못했다.

나타니엘이 한 걸음 물러나 기둥의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키리에가 웃었으니 그걸로 좋다. 국왕의 일을 처리할 차례였다.

그가 아직 조금 찬 저녁 공기 속에서 몸을 돌렸을 때였다. 뒤에서 요란한 구둣발 소리가 났다.

“나타니엘 님!”

자신을 부르는 키리에의 목소리에 나타니엘이 고개를 돌렸다. 키리에는 조금 숨을 할딱대며, 방긋 웃었다.

“어디 가세요?”

나타니엘이 눈을 내리깔았다.

[네 저택 밖의 불친절한 이웃들과 대화나 좀 할까 하고. 그보다 간만일 텐데 더 이야기 나누지그래.]

“아뇨, 두 분 다 이제 일하셔야 하니까요. 돌아가실 거래요.”

키리에가 드레스를 추스르며 답했다. 그녀가 곧 나타니엘의 눈치를 보며 샐쭉 웃었다.

“각하께서 도와주신 거죠? 제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미소 띤 보라색 눈은 옅은 그늘 속에서도 반짝였다. 그를 향하고 있지만 어쨌든, 그가 가질 수는 없는 반짝임이었다.

나타니엘이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지긋이 내리누르며 시선을 낮췄다.

[마음에 드니?]

“무척이요. 원래 지금은 숙려 기간이었대요. 그래서 주기적으로 들르시기로 했는데, 오지 않으셔서…….”

키리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감사해요.”

나타니엘은 무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툭 던지듯 내뱉었다.

[그런 것치고는 아주 기뻐 보이진 않는구나.]

키리에가 멈칫했다. 하얀 뺨이 살짝씩 들썩이더니, 그녀는 곧 레몬이라도 씹은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어떻게 아셨어요?”

[보면 알아, 이젠.]

키리에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맑고 또렷하고 은근한 눈빛으로 나타니엘을 응시할 뿐.

그러다, 그녀가 툭 던지듯 말했다.

“사실 벌써 이혼했대요.”

미친 게 틀림없군. 나타니엘은 그렇게 말하지 않기 위해 입을 가렸다. 그는 침묵하며 치솟는 살의를 가다듬었다. 이래서 인간들은 충분히 협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헛소리는 하트우드의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네……. 어머니는 냉정하시니까요. 똑똑하시기도 하고요.”

[퍽이나.]

“틀린 말은 안 하셨어요. 아마 두 분이 이혼하시는 게 싫어서, 제가 너무 무르게 굴었나 봐요. 얼른 꿈에서 깨라고 하시더라고요…….”

키리에가 살풋 웃었다.

아마 참으려 했을 테지만, 얼마 안 있어 가늘게 미소 짓는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제가, 제가 부족해서.”

나타니엘이 잔물결처럼 부드럽게 걸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키리에.]

키리에가 고개를 잘게 저었다.

“저 아직, 예절도 다 익히지 못했고…… 사용인들도, 아직 저를 어린애, 취급하고…….”

[…….]

“내가, 좀 더 열심히 했어야…….”

키리에는 곧 입을 일자로 다문 채, 눈을 부릅뜨고서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노력이 부족해서 사랑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타니엘은 인간이 아니었지만, 그게 열 살짜리가 할 생각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우는 키리에 앞에 서서, 나타니엘이 가만히 손을 뻗었다.

[알고 있겠지만,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모르겠어요……. 전부 신기루 같고, 사라질 것 같고, 제가 노력하지 않으면, 발밑이 꺼질 것 같고…….”

[키리에. 내 이름을 걸어도 좋아. 넌 충분히 열심히 했어.]

나타니엘은 사람을 위로하는 법 따위는 알지 못했다. 그는 누군가를 위로해 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가만히 사실만을 말했다.

[네 부모의 일은 네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고, 네가 부족해서 그들이 너를 사랑해 주지 않은 게 아니야.]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나타니엘이 키리에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키리에의 손톱 끝에 입 맞췄고, 키리에는 별처럼 반짝이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뺨을 석양이 감쌌다.

[아주 먼 미래에, 네가 지금 받지 못한 것까지 줄 누군가가 나타날 거야.]

키리에의 눈이 떨렸다. 젖은 흰자위가 꼭 물비늘처럼 빛났다.

“정말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있어. 아직 만나지 못했을 뿐, 어딘가에 반드시.]

나타니엘이 나른한 숨을 쉬며 키리에의 네 손가락 위에 입술을 맞댔다.

[그 누군가는 네가 노력하든, 노력하지 않든,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너를 사랑해 줄 거야.]

“…….”

[그 사람은 네가 어느 지옥에 있든 너를 구하러 갈 거고, 네가 원한다면 그 지옥에서 너와 함께 불탈 거야. 너는 누군가의 세계가 될 거야. 반드시.]

키리에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속눈썹에 잘게 매달려 있던 눈물이 그 바람에 흩날렸다.

“……그걸 어떻게 믿어요?”

나타니엘이 멈칫했다. 그의 머릿속에 석양 속 키리에와 자신의 모습이 번져 나갔다. 그때 믿지 못했던 것은 그였고, 그래서 키리에는 목숨을 걸었다.

나타니엘의 손이 떨렸다. 키리에를 만나기 전까지의 시간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늙지 않잖아. 무서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모르는 사람이에요! 난 모른다고요! 난 악마랑 내통한 적 없어!’

‘됐으니까 돈 좀 더 줄래?’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혹시라도 발설하기 전에 먼저 수를 써야…….’

“나타니엘 님?”

키리에가 그를 불렀다. 밤바람이 그녀의 연보랏빛 머리칼을 흩뜨리는 것을 보며, 나타니엘은 아스라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알 수 있을 거야.]

그가 느리게, 다시 한번 키리에의 손끝에 입 맞췄다.

[왜냐면 그 누군가는 널 위해,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걸 포기할 거거든.]

[둄2 절갠 교환재공타싸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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