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죄와 벌 (21/33)

21. 죄와 벌

밤이었다. 키리에는 눈밭에 서 있었다. 꿈에서 수십 번도 넘게 본 그곳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과 달리 너른 공간이 아니었다. 동그란 경기장 모양의 터 주변으로 높은 관중석이 있었다. 그곳에서 얼굴 없는 사람들이 키리에를 내려다보았다.

키리에는 아론을 찌르는 중이었다. 이미 그녀가 죽인 멜로니와 근위병 시체들이 주변에 가득했다.

먼 곳에서 나타니엘이 웃고 있었다. 땅에서, 하늘에서, 모든 곳에서.

마침내 아론이 죽었을 때, 키리에가 숨을 들이켜며 꿈에서 깨어났다.

“허억!”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그녀가 헐떡대는 동안 찬 손이 이마에 닿았다.

[악몽이 잦구나.]

옆에 앉은 나타니엘이 밤을 닮은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키리에가 눈을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사위가 어두운데도 그의 피부는 쌓인 눈처럼 빛나, 그는 마치 양귀비처럼 오싹하고 아름다웠다.

[좀 더 자렴. 새벽이 오기에도 일러.]

나타니엘이 속삭였다. 키리에는 나긋한 목소리를 따라 숨을 들이켠 뒤, 서투르게 숨을 내뱉었다.

“나타니엘…….”

나타니엘이 고개를 한쪽으로 조금 기울였다.

[포도주라도?]

“아뇨…….”

키리에가 지친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산책할래요?”

나타니엘은 키리에가 안네마리의 시중을 받아 환복하는 것을 기다린 뒤,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뷰캐넌의 정원을 그녀와 걷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공주 하나가 건방지게 굴었을 땐 겨울이었는데, 어느새 정원이 온통 봄이었다. 나타니엘은 치자나무 사이를 걸으며 키리에를 살폈다.

비단 같은 머리카락과 숄을 움켜쥔 작은 손. 자다 깨어 멍한 보라색 눈은 그의 시선을 기민하게 눈치채곤 순하게 깜빡였다.

“나타니엘?”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나타니엘은 곤혹스러울 정도로 욕심이 들솟았다. 미소가 보고 싶으면서도, 앳되고 순한 것을 망치고 싶은 욕구는 여전히 그의 속에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키리에가 아, 하고 짧고 연약한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머뭇거리며 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나타니엘. 혹시…… 그 사람들, 어떻게 됐어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길에서 그녀에 대해 떠들던 이들을 이르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나타니엘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죽었을까 봐?]

장난기 가득한 어조임에도, 키리에는 까무러치게 놀라 자리에 멈췄다.

“죽였어요?”

흙빛으로 질리다 못해 죽는 상이 된 키리에의 얼굴을 보며, 되려 나타니엘이 놀랐다.

[농담도 못하겠구나. 우린 휴전 중이잖니? 그들도 멀쩡히 살아 있어.]

아직은.

나타니엘이 마지막 말을 혓바닥 뒤에 숨기며 미소를 띠었다.

여러 명의 귀족이 동시에 죽으면 키리에는 반드시 눈치챈다. 그레이 뷰캐넌에게 썼던 방식을 쓸 수도 없었다. 들키지 않을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어쨌거나 그는 이제 키리에가 우는 모습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여린 보라색 눈망울이 탐색하듯 나타니엘의 얼굴을 더듬었다. 나타니엘은 아무 물러섬 없이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세월은 한 세기도 살지 못한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키리에는 이내 의심을 거두고, 그러나 불안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숨기지 않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타니엘…….”

키리에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타니엘은 그녀가 자신에게서 멀어진 것이 못마땅하여 대답 없이 고개만 기울였다.

한참을 말이 없던 키리에의 낯에 괴로움이 한 방울 떨어졌다.

“죽이면 안 돼요…….”

때마침 바람이 불어, 흔들리는 치자나무 잎 사이로 키리에의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다소곳하게 손을 모은 채, 길 잃은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키리에를 보며 나타니엘은 나긋하게 말했다.

[난 이번만큼은 네가 널 위한 말을 할 줄 알았어.]

“나는 괜찮아요.”

키리에가 건침을 삼켰다.

“나는 귀족이니까, 남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건…… 익숙해요.”

[그리 보이진 않는데.]

“익숙해질 거예요.”

나타니엘이 잠시 고개를 들었다. 이 솜사탕은 완고하기가 강철 같다.

[키리에. 조금 이해가 안 되는구나. 내가 벌인 일인데, 넌 전혀 나를 탓하지 않아. 그렇다고 남을 탓하는 것도 아니지.]

키리에가 슬픈 얼굴을 했다.

“그런다고 뭔가 변하나요? 지나간 것은 의미가 없잖아요.”

[네 안에서도 그게 지나갔니?]

키리에는 허점을 찔린 사람처럼 눈을 홉뜬 채 당황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지나갈 거예요.”

나타니엘이 지긋이 키리에를 응시했다. 단순히 희망을 말할 뿐이라고 하기엔 절박한 다짐처럼 들렸다.

나타니엘은 어린 키리에 뷰캐넌을 떠올렸다. 열 살. 아비는 승냥이 같고, 어미는 저를 버렸다. 키리에 뷰캐넌은 어떻게 그런 환경에서 그 정도 인품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사람은 지옥에서야말로 신을 찾는다.

어린 키리에 뷰캐넌은 생각했을 것이다. 지나갈 거라고. 다 잘될 거라고. 노력하면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마침내 키리에 뷰캐넌이 맨손으로 쌓아 올린 앙상한 탑의 전경이 보이는 듯했다.

나타니엘이 느리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키리에를 당겨 안았다.

[그래. 지나갈 거야. 반드시 지나가지. 나중이 되면 깜짝 놀랄 정도로 아무 의미 없을 거란다.]

그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죄책감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식탁 밑에 설탕 과자를 떨어뜨린 것이 자신이더라도, 잘못된 건 거기에 몰려든 개미들이다. 게다가 어쨌든 키리에는 자신을 받아들였다.

키리에는 머리와 등을 감싸는 온기에 뻣뻣하게 굳었다가, 한참 뒤 몸의 힘을 풀었다. 키리에의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들솟았다.

지금이라면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한마디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내가 너무 힘들다고, 버티기 어렵다고,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아론이 두렵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나타니엘…….”

[그래.]

“내가…….”

키리에가 나타니엘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나타니엘은 미지의 존재처럼 온화하게 키리에를 굽어살피고 있었다. 그의 파란 눈은 마치 깊고 넓은 바다 같아서, 자신의 나약함도 바닷속 어딘가에 잠길 것만 같았다.

[네가?]

나타니엘이 키리에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속삭였다. 키리에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내가, 사실은…….”

그때였다. 나타니엘의 머리 뒤편 하늘로 노란 것이 비쳤다. 키리에의 시선이 홀린 듯이 그리로 향했다.

“……유성?”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 거대한 마력을 느낀 나타니엘이 순식간에 그녀를 끌어안았다.

[나를 잡아.]

키리에는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밤을 밝히며 떨어지고 있는, 불타는 구체를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나타니엘은 최대한 부드럽게 키리에의 머리를 끌어안아 턱 밑에 두었다. 그 장난 같던 ‘연습’이 정말 써먹을 구석이 있었다는 점에 그는 잠시 실소했다.

유성은 거짓말처럼 일직선으로 뷰캐넌 저택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뷰캐넌 저택에 걸어놓았던 수십 겹의 보호 마법이 깨져 나갔다. 맨살이 익을 것 같은 열기가 작열했다.

나타니엘은 손에 흰 검을 든 채, 품 안의 키리에를 살폈다. 절망의 구덩이 같은 눈이 보였다.

이대로 관망하면 또 울까?

나타니엘이 설핏 쓴웃음을 지었다.

[착하지. 눈은 감고 있으렴.]

키리에는 잠깐 의식을 잃었다. 깨어난 것은, 뺨을 어루만지는 깃털 같은 손길 때문이었다.

[키리에. 난 이대로 있어도 좋지만, 아마 너는 깨우는 걸 더 좋아할 것 같구나.]

번쩍 눈을 뜬 키리에의 눈에 불타는 뷰캐넌 저택을 배경으로 나타니엘이 보였다.

[다친 곳은? 물론 없겠지만.]

그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서 있었다. 아까의 정원이었다. 하지만 주변은 마치 거대한 손톱이 할퀴고 지나간 것처럼 난장판이었다.

때마침 우지끈하고 저택 한구석이 무너져 내렸다. 누군가의 비명이 다시 들렸다. 귀가 먹먹했다.

키리에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제야 코가 찌릿할 정도의 매캐한 연기와 불길의 뜨거움이 느껴졌다. 사람들의 절규도 뒤늦게 귓가에 닿았다.

“도망쳐! 일단 도망쳐!”

“꺄아아악! 사람이 깔렸어요!”

“도와줘! 제발……!”

“수차를 불러!”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핏줄은 못 속이는군. 화려한 걸 좋아하는 취향은 여전해.]

나타니엘은 흰 검을 든 채 키리에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고위 마법이야. 발라브리가가 연구하던 것인데, 내가 잠든 후에 완성했나 보구나.]

지옥도 같은 불길 속에서도 나타니엘은 놀랍도록 차분하고 우아했다.

하지만 키리에는 더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죽어 가는 사람들의 피맺힌 통곡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새빨간 시야와 단백질 타는 냄새, 아비규환의 지옥 속에서,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멍하니 눈앞의 참상을 바라보았다.

그 가운데에서 아론이 걸어 나왔을 때, 그녀는 실소를 터뜨렸다. 지금껏 그녀를 버티게 했던 뭔가가 툭 끊어진 것 같았다.

[키리에?]

나타니엘이 정색하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키리에는 그를 무시한 채 하늘 높이 목놓아 웃었다.

그만두자, 전부.

키리에가 눈을 떴을 때, 방 안에는 노을이 들이치고 있었다. 키리에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옆에는 나타니엘이 앉아 있었다. 그녀가 눈을 뜰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시선이 마주쳤다. 침대 발치에 서 있던 아론 역시 물끄러미 키리에를 응시했다.

[네 시녀가 거의 죽으려고 하더구나.]

나타니엘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는 손을 뻗어 키리에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첫눈을 어루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다정이 매달린 손끝 어디에서도 죽음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것이 슬펐다. 그의 손이 칼날이 되고 재앙이 되는 건, 항상 자신 때문이었다.

[……그게 그렇게 충격이었니?]

나타니엘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너무나도 인간이 아닌 존재가 할 법한 말이라고 키리에는 생각했다. 그녀는 멍하니 침대의 캐노피가 모이는 부분을 바라보았다.

[키리에?]

나타니엘이 다리를 꼰 것을 풀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의 목소리가 보다 진지해졌다.

[혹시 또 목소리가 안 나오니?]

그때 아론이 말했다. 누나. 키리에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듣고 있어.”

나타니엘의 눈이 커졌다.

제 말이 맞았죠? 아론이 그렇게 말했다.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 말이 맞았어.”

[키리에. 지금…….]

죽을 걸 그랬죠? 아론이 씩 웃었다. 키리에는 차마 웃지 못하고 얼굴을 흐렸다.

“미안해. 그땐…… 내가 뭔가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키리에.]

나타니엘이 살며시 키리에의 어깨를 짚었다. 키리에는 저항 없이 그의 손길을 따라 몸을 돌렸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아론에게 꽂힌 채였다.

“내가 너무 오만했어.”

[키리에. 지금 누구와…….]

“미안해……. 내가 미안해, 아론…….”

키리에가 삐뚜름하게 웃고 있는 아론을 향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나타니엘이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키리에!]

나타니엘이 드물게 언성을 높였다. 그의 눈이 유성처럼 불타고 있었다.

[정신 차려, 키리에 뷰캐넌. 그 꼬마는 이미 죽었어.]

키리에가 멈칫했다. 아론이 질린 얼굴로 나타니엘을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내가 죽었대요.

“응. 알아.”

알아야죠. 아론이 시무룩해졌다가, 사자처럼 사납게 몸집을 부풀렸다. 누나가 죽였으니까.

키리에가 고개를 떨어뜨리곤, 눈물을 방울방울 떨구기 시작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키리에!]

나타니엘이 아예 키리에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키리에가 성화에 못 이겨 나타니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다시 지척의 아론을 바라보았다. 아론의 머리가 멜로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키리에가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해, 멜로니……. 내가…… 내가 멍청해서, 지킬 수 있을 줄 알고……”

키리에가 천천히 멜로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닿지 않았다. 허공에서 허우적대는 키리에의 팔을 보는 나타니엘의 얼굴에서 점차 표정이 사라졌다. 무소불위의 종말인 그의 낯에 점차 절망이 비치기 시작했다.

키리에는 말을 뚝 멈추고 자기 머리를 부여잡았다.

“나는 내가 노력하면, 그러면 뭔가 될 줄 알았어……. 얼토당토않아도, 모든 게 다 잘될 거라는 믿음이나, 아주 작은 선의…… 그런 게 결국엔 힘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내 그녀의 얼굴에 자기 자신을 향한 지독한 증오와 체념이 떠올랐다.

“그딴 걸로 대체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그때 아론이 씩씩대며 말했다. 그래서 말했잖아요, 누나. 사람들이 죽을 뿐이라고. 키리에가 아론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안해.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다시.

“미안해.”

다시요.

“미안해. 내가 살아 있는 게 잘못이었어.”

부족해요.

“미안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아론은 더는 말하지 않았지만, 키리에는 고요한 방에서 연신 아론과 멜로니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아론. 미안해, 아론. 미안해. 미안해, 멜로니. 미안해.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나타니엘은 멍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말려야 할지, 받아 줘야 할지, 가만둬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까마득히 오랜 세월을 살았고, 그가 아끼던 이들이 미친 적도 많았다. 전부 그가 원해서였다.

하지만 이런 적은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건 말도 안 된다. 그 앞에서도 맹랑하게 제 목숨을 걸고 협상하던 키리에 뷰캐넌이, 이리될 수는 없는 거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키리에 뷰캐넌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당연하지만 그는 유성을 아무 피해 없이 없앨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의 약속은 누구도 죽이지 않는 것이었고, 마법은 그가 시전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는 인간이 아니었기에, 코앞에서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불타 죽는 모습을 지켜보는 인간의 심정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지금에 이르러서도.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돌려도 인과는 반복된다. 그의 선택이었다. 그가 만든 결과였다.

“내가 죽을걸. 내가 태어나지 말걸…….”

머리를 움켜쥔 채 고개를 흔들대는 키리에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가 아는 키리에가 아니었다.

나타니엘의 눈에 비치는 키리에는, 작달막한 봄꽃 같은 것. 아주 작고 선한 것. 너무 여려서 짓밟고 싶어지는 것. 그래도 굴하지 않고 웃던 것. 남들이 멍청하다고 비웃는 가치를 위해, 어떻게든 뭔가를 해내겠다고 기를 쓰며 달려들던 것. 누구도 동정하지 않은 자를 동정하던 것.

나타니엘이 두 손으로 자기 눈을 가렸다.

대체 그 정도가 아니라면 누가 자신을 이렇게 바꿀 수 있단 말인가.

타인의 일에 그렇게 온몸을 내던지는 사람을, 대관절 그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제야 그게 얼마나 위대하고 사랑스러운 것인지 알았는데, 그녀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해 버렸다. 그가 선심 쓰듯 마음을 한 평씩 내어 줄 때, 그녀는 이미 그보다 더 큰 부분을 잘라 내고 있었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솟아 목구멍을 막아 버린 기분이었다.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다.

“살아 있어서 미안해요…….”

네가 그런 말을 하기를 바란 게 아니었다.

***

마법은 뷰캐넌 저택의 절반을 무너뜨렸다. 어마어마한 피해였으나, 나타니엘이 나서지 않았다면 반파로도 부족했을 것이다.

루비니아는 반쯤 무너진 방구석에서 벌벌 떨던 것이 발견되었다.

“같이 죽이려는 거야……. 약속과 다르잖아……. 다르다고……! 하지만 두고 봐, 이대로 죽진 않아……!”

나타니엘은 그녀를 궁으로 보내고자 했다. 그러나 지시를 내리기 전 멈칫했다. 루비니아 오레윈브리지의 반지가 눈에 띄었다. 그것이 유성 마법의 좌표가 되었을 것이다.

루비니아 오레윈브리지의 결말은 죽음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키리에의 어깨 위에 또 하나의 죽음이 얹힌다는 의미였다.

나타니엘은 마지못해 루비니아에게 손을 뻗었다.

“힉……!”

[가만히 있어. 손가락이 잘리고 싶은 게 아니면.]

곧 루비니아가 낀 반지의 녹색 보석만큼, 검은 구멍이 생겨났다. 아무리 보아도 2차원으로 보이지 않는 새까만 구덩이는 딱 보석만 삼킨 뒤 사라졌다. 루비니아가 왕방울 같은 눈으로 겁에 질렸다. 하지만 나타니엘은 무심히 뻗었던 손을 추슬렀다.

[적당히 비슷한 걸 찾아다 끼워. 눈치채지 못할 테니. 그리고 돌아가.]

그가 휙 하고 몸을 돌렸다. 뒤에서 작은 감사 인사가 들렸지만 의미는 없었다. 키리에가 아니었으니까.

안네마리는 키리에가 무사한 것을 보고 활짝 웃었다가, 키리에의 상태를 보고 무섭게 굳었다. 그리고 키리에를 도시에 빼내고자 했을 때처럼 온 힘을 다해 나타니엘에게 달려들었다. 나타니엘은 그때와 달리 안네마리를 기절시킨 뒤, 키리에 옆에 두었다.

무너지지 않은 별채의 가장 큰 방이 임시 지휘소가 되었다. 세자르는 방 안을 서성대다, 나타니엘이 들어오자 급하게 몸을 돌렸다.

“이야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각하! 저택의 방비를 도와주겠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나마 내가 나서서 이 정도라고 생각하지 않니?]

나타니엘은 무심히 답하며 양손으로 지팡이를 세웠다. 세자르는 숨겨진 날붙이를 떠올리며 머뭇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하지만 각하의 보호 마법을 깨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런 식이면 곤란합니다. 뷰캐넌이 쇠락하면 키리에를 뒷받침할 세력도 줄어듭니다.”

[이깟 마법에 줄어들 세력이라면 네 깜냥도 알만하구나.]

그 키리에가 지금 좋게 말해 와병 중이 아니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세자르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어제 같은 공격이 또 있으면 그땐 정말 끝장입니다.”

[그래. 그렇지…….]

그리고, 그러면 키리에는 또 울 것이다. 나타니엘이 한숨을 쉰 뒤, 허공에 손가락을 움직였다. 푸른 마력이 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보호 마법은 다시 걸어 두지. 전부 막을 수는 없겠지만.]

“하지만 그럼 또 유성이 꽂히면…….”

[그런 건 자주 쓸 수 있는 게 아니야.]

나타니엘이 냉랭하게 말했다.

[발라브리가의 마법이겠지. 현 오레윈브리지는 그의 마법을 소화할 그릇이 아니었어.]

“그럼 대체 어떻게 그런 마법을……?”

[뻔하지. 후대의 마력을 끌어온 거야.]

세자르는 미심쩍은 기색이었다.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가능하지. 불가능하더라도 가능하게 만들었겠지.]

발라브리가는 뷰캐넌보다 뛰어났다. 뷰캐넌이 어떤 마법을 써서 자신의 마법을 막았는지 분석했을 것이다.

세자르는 머릿속으로 열심히 뭔가를 계산하는 것 같더니, 이내 주름진 얼굴을 찌푸렸다.

“곤란합니다. 아예 무력 싸움이 되어 버리면, 뷰캐넌에는 승산이 없습니다. 하다못해 방패로 쓸 사람을 구하기도 여의치 않습니다.”

세자르의 말을 들으며, 나타니엘은 키리에가 사람의 목숨에 과민 반응하게 된 것이 아비의 이런 태도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해 보지.]

“각하께서 말씀이십니까?”

[그래.]

저택으로 다가오는 레쇼의 기척을 느낀 나타니엘이 가볍게 답했다. 세자르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렇다면 안심이군요!”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가, 좀 더 태도를 낮췄다.

“저희의 계획은 여전합니까? 그러니까…….”

그가 말을 골랐다.

“키리에를 왕으로 추대하고 싶다는 말씀 말입니다.”

나타니엘의 무료하고 차가운 눈이 세자르에게 닿았다.

[그 키리에가 지금 누워 있지 않나?]

“그게 각하께 문제가 됩니까?”

세자르가 그렇게 말하며 야비하게 웃었다.

“저희는 이미 한배를 탔습니다. 세간에 키리에에 대해 떠도는 시조의 재림이라는 말을 현실로 만들고 싶다 하신 건 각하셨습니다.”

[그랬지.]

나타니엘이 세자르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키리에를 인간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올리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건 번드의 집을 나와서였다. 키리에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기왕이면 선물처럼 안겨 주고 싶었다. 국왕을 놔둔 건, 그를 물리친 공을 키리에에게 돌리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원하는 고요한 하루가 따라올 테니,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

“여론은 제가 호도할 수 있습니다. 이경의 지지까지 있는 데다, 이 나라 사람들의 뿌리에는 여전히 세 영웅의 건국 신화가 깊숙이 박혀 있죠.”

세자르가 신나서 말했다.

“피해를 좀 입긴 했지만, 왕가가 아무 죄 없는 뷰캐넌 공작가에 다짜고짜 무력을 행사한 것은 좋은 꼬투리가 될 겁니다.”

세자르에게는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폰을 미끼로 적의 퀸을 거꾸러뜨린 사람처럼 말했다.

나타니엘은 인간이 아니기에 그것이 이상해 보이진 않았지만, 키리에의 눈에는 달랐을 것이다.

갑자기 모든 게 무료해진 기분이 들었다. 키리에가 없으니 세계가 색채를 잃은 듯했다.

“아니면, 지금 당장 국왕을 죽여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세자르가 나타니엘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높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타니엘이 상념에 빠져 있던 탓에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건 안 되겠구나.]

“아. 그렇습니까.”

세자르가 실망한 기색을 비쳤다. 나타니엘이 그것을 무시한 채 문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레쇼가 하인의 안내를 받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세자르가 대번에 반색했다.

“이럴 수가. 환영합니다, 호국경. 저희를 도와주러 오셨습니까?”

〔나타니엘.〕

레쇼는 팔을 벌리며 환대하는 세자르를 가뿐히 무시하고 나타니엘에게 다가갔다. 세자르가 겸연쩍게 팔을 내렸다.

〔미쳤다더군.〕

지팡이를 쥔 나타니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전히 말본새가 고약하구나.]

〔좋아하고 있을 줄 알았다.〕

자신도 그럴 줄 알았다. 나타니엘은 처음으로 과거의 자신이 적처럼 느껴졌다.

[오레윈브리지는?]

〔신이 난 모양이다.〕

[자세히.]

〔뷰캐넌의 마법을 응용했다. 후대의 오레윈브리지에는 더는 마법사가 태어나지 않을 거다.〕

[그릇을 늘렸군.]

〔그리고 더 얇아졌지.〕

[상태는?]

〔불안정하다. 유성을 날린 건 새 힘에 취한 게 반, 감당할 수 없는 힘에 미쳐 가고 있는 게 반, 그리고 발의 영향이 아주 조금 있는지도 모르겠군.〕

침묵이 오갔다. 레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발이 나처럼 인간을 초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못했고.]

나타니엘이 건조하게 답했다. 레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기엔 그는 네게 너무 매여 있었어.〕

그는 잠시간의 망설임 뒤에 덧붙였다. 나타니엘의 반응을 보고 싶은 사람 같았다.

〔지금의 키리에 뷰캐넌처럼.〕

무감정하던 나타니엘의 얼굴에 금이 갔다. 그는 지팡이를 짚은 자세 그대로 턱을 당겼다.

[그 말을 하려고 왔니?]

기세가 살벌했다.

레쇼는 물러나는 쪽을 택했다.

〔그럴 리가. 내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타니엘은 한동안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향하고서 피로한 기색으로 말했다.

[뷰캐넌 저택을 지켜. 나는…… 해야 할 일이 있구나.]

레쇼가 붉은 보라색 눈을 말갛게 빛내며 나타니엘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네 입에서 뭔가를 지켜달란 말은 처음 듣는군.〕

[다신 없을 거야.]

레쇼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뷰캐넌 공작가는 공식 성명서를 냈다. 왕가의 무도함을 질타하는 내용이 주요 골자였다.

그러나 왕가는 묵묵부답이었고,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전쟁 탓에 수도에는 불안이 깔렸다. 무도회는 중지되고, 밖을 나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일부 감이 좋은 사람들은 수도를 뜨기 시작했다. 호국경이 뷰캐넌 공작가에 머무르기 시작하자 갈등 상황은 더 첨예해졌다.

뷰캐넌 저택에는 수국과 자카란다가 깔렸다. 윌리엄 아치볼드를 통해 공수한 엘서스의 꽃이었다.

나타니엘은 가장 풍경이 좋은 자리를 골라 테이블을 놓고 키리에를 에스코트했다.

[이리로.]

멍한 얼굴의 키리에가 아이처럼 순하게 그를 따랐다. 나타니엘은 약간 기대했지만, 자카란다 꽃을 보는 키리에의 눈빛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눌러 삼키며 그녀를 꽃이 무성한 정원 중앙에 앉혔다.

[키리에.]

부름에 키리에가 그를 돌아보았다. 보라색 눈은 여전히 탁하고 흐릿했다. 나타니엘이 꽃송이 하나를 내밀었다.

[자카란다 꽃이야.]

키리에가 어설프게 그것을 받았지만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녀는 방 안에 있을 때와 같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기만 했다.

[키리에.]

나타니엘이 더 많은 꽃송이를 손 위에 얹어 주었다. 차가운 손끝이 손바닥에 닿자, 키리에의 시선이 스르르 내려갔다.

“……꽃.”

[그래.]

나타니엘이 그 작은 반응에 매달리듯 말을 받았다.

[네가 좋아하는 거야.]

“……내가요?”

키리에가 불분명한 발음으로 물었다. 나타니엘이 손짓하자 바람이 불었다. 더 많은 꽃잎이 흩날렸다. 키리에는 공허한 눈으로 꽃보라를 응시했다.

[아치볼드에서 주는 선물이란다.]

키리에의 눈꺼풀이 느리게 깜빡였다.

“……왜요?”

[네가 좋아하니까.]

“내가 좋아해요?”

[응.]

키리에가 턱을 들었다. 연보랏빛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안 되는데…….”

키리에가 중얼거렸다. 약에 취한 듯 반쯤 감긴 눈이 어느새 젖어 들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면 다 죽어 버리는데…….”

힘없는 목소리에 울음기가 묻어나왔다. 나타니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젠 그러지 않을 거야.]

그가 속삭이는 봄빛 미래에도 키리에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나타니엘의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키리에. 이 정원에 마법을 걸자. 네가 영원히 지지 않는 자카란다를 볼 수 있게. 내가 이곳을 지킬 거고, 이제 무엇도 네 꽃을 죽이지 못할 거야.]

하지만 그의 노력과 달리 키리에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 나타니엘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속을 숨기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잘생겼다 말한 적이 있으니, 웃는 것을 싫어하진 않으리라.

[번드 카프와 이브 카프도 데려오지. 그들을 좋아했잖니.]

“…….”

[네 친구들도 데려올까? 그들과 함께 지내게 해 줄게. 필요하다면 피크닉을 가도 좋고, 여행을 가도 좋아.]

키리에는 입을 헤 벌린 채 어깨를 늘어뜨릴 뿐 반응이 없었다.

나타니엘이 입을 꾹 다물었다가, 곧 그녀 앞에 손을 펼쳤다. 긴 손가락 사이에서 금화와 보석이 떨어져 내렸다.

[부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어. 너와, 네가 아끼는 모든 사람에게. 힘들게 가문의 일을 떠맡지 않아도 된단다.]

떨어진 보석들이 테이블과 부딪혀 시끄러운 금속음을 냈다. 그것들은 이내 바닥에 굴러다니는 꽃송이보다 높이 쌓였고, 햇빛 아래서 눈부시도록 빛났다.

하지만 키리에는 귀를 막으며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싫으니?]

나타니엘이 바로 그것을 그림자 속에 삼켰다. 조바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니면 이런 건 어때?]

순간 세상이 휙 하고 검어졌다가 되돌아왔다. 자카란다 꽃이 가득하던 흰 테이블 주위로, 그림자에서 꺼낸 온갖 고대의 유물이 즐비하게 놓였다.

[필요한 게 있다면 찾아보렴. 고대 시대의 유물은 구하기 어렵고 희귀한 것도 많지. 괜찮은 책도 제법 있단다…….]

나타니엘이 키리에의 안색을 살폈다. 책은 좋아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키리에는 오래된 유물들의 분위기에 주눅이 들었는지 어깨를 움츠렸다.

실패다. 나타니엘이 다시 그림자를 끌어올린 뒤 내렸다. 유물들은 사라지고, 화려한 고가구와 옷감, 장식품들이 자리를 채웠다. 키리에가 좋아할 것 같진 않았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었다.

[네 취향에 맞을 만한 물건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나타니엘이 손을 뻗어 가까이에 있는 튈을 끌어와 키리에의 팔에 가져다 댔다.

키리에가 떨리는 두 손을 들어 올렸을 때, 그는 약간 기대감을 비쳤다. 그러나 그녀의 두 손은 이마를 짚었을 뿐이다.

“제발…… 제발…….”

키리에의 눈에서 눈물이 줄기가 되어 흐르기 시작했다.

이것도 실패다. 나타니엘이 기억을 뒤졌다. 좀 더 키리에가 혹할 만한 것, 정신을 차릴 만한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돌이켜봐도 그녀가 뭘 좋아하는지, 어떻게 해야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다.

목울대가 콱 막힌 기분이었다. 그는 눈을 약간 찌푸린 채, 어찌할 바를 모를 심정으로 키리에가 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꽉 깨문 어금니에서 사나운 소리가 났다.

이윽고 나타니엘이 반쯤 억눌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론을 살려 주마.]

키리에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처음으로 보인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탈력감이 휘몰아쳤다. 나타니엘은 결코 생명과 탄생, 치유라는 기적에는 닿을 수 없었다. 그건 그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었고, 그 대가로 그는 모든 악하고, 강하고, 음탕한 것들의 부요를 약속받았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그것이 모자라다 여겨본 적이 없는데, 키리에가 원하는 건 그가 할 수 없는 것뿐이었다. 나타니엘이 침통하게 말했다.

[죽음과 거래하면 돼. 생전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는 건 어렵지만, 껍질만이라면…….]

키리에의 눈에 잠깐 빛났던 총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이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섭리는 나타니엘에게 이 이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마저도 엄청난 대가가 필요했다.

[짧은 말도 할 수 있고, 가르치면 간단한 행동 정도는 학습할 거야.]

그가 가진 가장 귀한 것임에도 키리에의 반응은 기대와는 달랐다. 키리에가 손톱 끝으로 안면의 피부를 긁기 시작했다.

“아니야…….”

눈이 까뒤집히고, 숨이 헐떡였다.

“그런 게 아니야……. 살려 주세요……. 미안해요……. 내가 대신 죽을게요…….”

[키리에!]

손톱 끝에서 피가 비쳐도 그녀는 아픈 줄 모르는 듯했다. 나타니엘이 키리에의 손목을 잡아 긁는 것을 말렸다. 그러자 키리에가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요, 죽이지 마세요!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죽을게요, 내가 죽을게요……!”

그녀는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나타니엘은 키리에의 팔을 놓을 수도, 그녀가 울지 않게 할 수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망가진 키리에를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부수는 건 너무나도 쉬운데, 그걸 다시 쌓아 올리기란 너무나도 어려웠다. 나타니엘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껏 남들에 의해 수십 번도 더 무너졌을 탑을 키리에가 어떤 심정으로 쌓아 올렸을지를. 어떤 심정으로 그를 믿겠다 말하고 어떤 심정으로 손을 내밀었을지를.

너무 늦게 알았다.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셀의 깊은 곳, 국왕 진저 오레윈브리지가 가슴을 붙잡고 신음했다. 주변의 마법사들이 다가오려 했지만, 국왕이 거칠게 그들을 뿌리쳤다.

“다가오지 마! 내가 감당할 거다! 내 힘이야!”

그녀의 이마에서 구슬땀이 흘렀다. 몸 안에서 발라브리가가 남겨 놓은 마력이 날뛰는 것이 느껴졌다.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는 기록된 것 이상의 천재였다. 전설경을 죽이지 못한 그는 말년에 미친 듯이 연구에 몰두했고, 그 빛나는 업적은 후대에 이르러 진저의 마력을 수십 단계나 끌어올렸다.

부작용이 좀 있긴 했지만.

“큭…….”

입가에 피가 흘렀다. 다 삼킨 것 같다가도, 시조의 마력은 네 수준에 맞는 힘이 아니라고 주장하듯 이렇게 날뛰곤 했다.

그래도 진저는 그것을 버텨 냈다. 그러지 않으면 전설경을 이길 수 없었다. 그녀에게 희망은 발라브리가의 마법뿐이었다.

전설경의 마력은 아주 방대하지만, 그는 확실히 마법사보다는 기사에 가까운 자였다. 마법이라는 고도의 기술에서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는 전설경을 월등히 앞서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진저도 마찬가지였다.

“후……. 진정됐나. 좀처럼 적응이 안 되는군.”

국왕이 바짝 날이 선 눈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섬뜩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역시 대단한 힘이야. 몇 겹이나 되는 보호 마법이었는데, 그걸 그렇게나 손쉽게……. 후후, 흐하하…….”

진저의 뒤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슨 말이냐.”

“이로써 오레윈브리지 왕가는 후대의 모든 마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 그런 사소한 일도 있었지…….”

진저가 심호흡하며 손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중요하지 않아. 자식이란 놈들이 하나같이 쓸모가 없으니…….”

그녀는 별궁에 칩거 중인 이든을 떠올리곤 얼굴에 혐오를 비췄다.

“그딴 모자란 것이 내 피를 이었다니, 오레윈브리지의 수치야. 내가 낳은 자식이니 내 거름이 되어도 불만은 없어야지.”

“과대하게 넓힌 그릇은 넓어진 만큼 얇아져 위험합니다. 마법 사용에는 주의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로브를 쓴 마법사가 다시 말했다.

마력이 커질수록 마법사는 진리에 한 걸음씩 가까워진다. 감각과 시야도 대체로 함께 넓어졌고, 대부분 어지럼증과 정신 착란 역시 동반했다.

국왕이 짜증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 정도는 나도 아네. 큰 힘에는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야.”

그녀가 망토를 두르고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마법사와 문관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보다는 뷰캐넌의 이야기를 해 보지. 공작가는?”

“수도의 시민들을 외부로 이탈시키고 있습니다.”

“미련한 짓을 하는군.”

“호국경이 뷰캐넌에 합류한 것은 어떻게 할까요?”

“내버려 둬. 태도로 미루어 볼 때, 그자는 나라가 망하는 것을 막으려 할 뿐 인간사에 개입하지는 않아.”

“루비니아 오레윈브리지가 돌아왔습니다. 키리에 뷰캐넌이 실성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고 합니다.”

진저가 멈칫했다. 녹색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이용해야지. 복수해야 하고말고.”

그때 뒤에서 가만히 있던 마법사가 불안한 듯이 입을 열었다.

“전설경이 키리에 뷰캐넌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총공격을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진저는 콧방귀를 뀐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봄을 맞이한 셀의 정경이 드러났다. 그녀가 왕궁을 감싸고 있는 보호 마법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뭣하러? 시조를 보아라. 그는 이미 전설경을 잠들게 한 전적이 있지 않나? 뷰캐넌의 방해만 없었더라면 죽이는 것도 가능했을 테지.”

“하지만 정말로 죽일 수 있었을지는…….”

“그는 오랫동안 얼음 속에 갇혀 있었어. 제 발로 나올 수 있었다면, 거기에 처박혀 있었을 리 없지.”

그래도 마법사들의 수군거림은 가시지 않았다. 전부 머저리들이다. 진저가 뒤를 돌며 팔을 펼쳤다.

“보아라! 할 수 있다. 가능해! 이 넘쳐나는 힘만 있다면 뭐든 말이야.”

그녀가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기 띤 녹색 눈이 미치광이의 그것처럼 번쩍였다.

“시조가 이루지 못한 것을 우리는 해낼 것이야. 내가! 이뤄 주지. 인간이 아닌 것의 신화는 내 대에서 끝날 것이다.”

문관들은 진저의 연설을 듣고서 약간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침묵했다. 그들은 발라브리가의 연구 결과를 분석하며, 그가 얼마나 전설경에게 미쳐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국왕은 아무리 봐도 그것을 답습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눈먼 국왕이 불러올 것이 종말일지, 새 시대일지 알 수 없었다.

***

올드시우다드 공작가에서 회동이 있는 날이었다. 키리에를 그녀의 친구들에게 보이기 위해서였다.

키리에가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했기에, 마차에는 차양이 씌워지고 키리에 역시 튈이 달린 모자로 얼굴을 가렸다. 그래도 그녀는 뷰캐넌 저택을 나서자마자 안네마리에게 매달려 벌벌 떨었다.

마차에 앉아, 안네마리는 연신 키리에의 등을 토닥였다.

“……효과가 있을까요?”

안네마리가 죽은 생선 같은 눈으로 말했다. 근래 지팡이를 몸에서 떼놓지 않는 나타니엘이 그 끝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있길 바라야지.]

마차가 공작가의 뒷문을 통과했다. 미리 언질을 받은 사용인이 공작가의 작은 정원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유칼립투스 나무가 심긴 정원 한가운데에는 동그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막 공작위를 승계받은 마리아 올드시우다드와 라우라 포트듀케인이 그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키리에!”

두 사람이 정원으로 들어서는 키리에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섰다.

나타니엘은 정원 시작점에서 그들의 해후를 지켜보았다. 봄을 맞이한 정원, 눈부시게 빛나는 흰 테이블. 그리고 안네마리의 손을 잡고 불안하게 나아 가는 키리에.

라우라가 드레스 자락을 팔락이며 키리에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키리에! 이야기는 들었는데, 너 정말……?”

바람이 말소리를 전달했다. 나타니엘이 키리에의 반응에 신경을 집중했다.

“아……?”

하지만 키리에는 순한 양처럼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순식간에 나타니엘의 기분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이게 뭐야! 아예 떠나서 잘 살아 버리지 그랬어! 난 네 이런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란 말이야!”

라우라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안네마리를 붙잡았다.

“치료는?”

“정신적 충격이라서…… 안네마리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정신적 충격이라면 주변을 더 신경 써야 할 텐데, 지금 뷰캐넌 상황에 그게 잘 되고 있긴 한가?”

“그게…… 가주님이 아가씨의 상태를 밖에 드러내기를 꺼리셔서…….”

“그건 알지만 왜 마음이 힘든 애를 굳이 수도에……!”

마리아가 드물게 분통을 터뜨렸다.

한바탕 혼란이 휩쓸고 지나간 뒤, 세 사람이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라우라가 눈가를 발갛게 물들인 채 애써 경쾌하게 웃었다.

“키리에! 필요한 건 없어? 마리아는 이미 가주지만, 나도 곧 가주가 돼. 이제 완전 내 사리사욕을 위해 가문을 운영할 거니까, 네가 갖고 싶어 하는 게 있으면 얼마든지 공수해 줄게!”

“튤립은 어때?”

마리아가 살며시 키리에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튤립도 좋고, 라벤더도 괜찮을 것 같아. 같이 보러 가자. 꼭 수도에 있을 필요는 없잖아?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급한 일이 끝나면 며칠 떠나 있자. 아니면, 먼저 가 있을래?”

가당찮은 소리. 지켜보던 나타니엘이 실소했다. 이후로는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러다 라우라와 키리에를 두고 마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일직선으로 나타니엘에게 다가왔다.

“각하. 시간을 내주시죠.”

당당하고 단정한 자세에 비해 눈빛에는 지우지 못한 반감이 엿보였다. 지겹고 흔했다. 나타니엘이 무미건조하게 마리아에게 시선을 주었다.

[용건은?]

“키리에의 요양을 권합니다. 공작가의 영지, 아니, 키리에도 이미 영주니 상관없겠죠.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길 청합니다.”

[오레윈브리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내 옆이 제일 안전해.]

“외람되오나 그것은 각하의 싸움인 줄로 압니다.”

[키리에는 이미 발을 뺄 때를 지나쳤어.]

“눈에서 멀어지면 사람들은 금세 잊어버리죠. 지금 수도에 있는 건 키리에에게 악영향밖에 끼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겠지.]

발라브리가를 떠올릴 것까지도 없었다. 올드시우다드의 후손은 올드시우다드고, 버몬트는 버몬트고, 뷰캐넌은 뷰캐넌이다. 핏줄이란 그런 것이다. 국왕은 절대 키리에를 잊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나타니엘은 이를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했으며, 필요성마저 느끼지 못했다. 그가 지팡이 짚은 자세로 마리아 건너편의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좀처럼 웃지 않았다.

[자리를 지키렴, 올드시우다드. 키리에는 내가 지킬 테니, 넌 네가 할 일을 해.]

마리아의 검은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쏠 준비가 된 궁수의 화살촉 같았다.

“외람되오나, 그걸 못 하셔서 지금 키리에가 저렇게 된 게 아닙니까?”

그 순간 나타니엘이 손을 튕겨 지팡이의 아랫부분을 잡았다. 지팡이의 손잡이가 마리아의 턱밑에 닿았다.

[올드시우다드.]

나타니엘이 서늘하게 말했다.

[내가 네게 얼마나 우습게 보였는지 잘 알 것 같네. 하지만 착각하면 곤란하지. 내가 무릎 꿇을 대상은 네가 아니야.]

턱밑에서 위로 짓쳐들어오는 압박에 마리아의 고개가 점점 들렸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두려움 없이 고집스럽게 나타니엘을 주시했다.

“각하께서는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을 아예 없애서 그것을 모른 체하는 습관이 있으십니까?”

[전대와 달리 목숨 아까운 줄을 모르는구나.]

나타니엘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지팡이 끝이 더 들렸다.

[우정? 좋지. 하지만 주제는 파악해야지. 내가 너까지 봐줄 거라 생각하면 곤란해.]

나타니엘의 말끝이 소곤거리듯 잠겨 들었다. 마리아는 이제 피하지 않으면 턱뼈가 부러질 것 같다고 느꼈다.

그때, 누군가 사이에 끼어들었다.

“안 돼요…… 안 돼요, 제발요.”

어느새 다가온 키리에가 나타니엘의 팔을 붙잡고 뒤로 꾹꾹 밀어대기 시작했다.

나타니엘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키리에는 초점이 나간 눈으로 절박하게 나타니엘에게 매달렸다.

“내가 잘못했어요, 죽이면 안 돼요, 죽이지 말아요, 제발……. 제발…….”

나타니엘은 차마 키리에를 떨쳐 내지 못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내 그가 진력이 난 얼굴로 한 걸음 더 물러났다.

[제정신 아닌 상태로도 도대체가 남 걱정 말고는 없나? 네 꼴이나 생각해, 키리에 뷰캐넌.]

나타니엘이 낮고 사납게 말했다. 키리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겁에 질린 짐승처럼 몸을 낮췄다가, 다시 빌기 시작했다.

“내가 대신 죽을게요…….”

나타니엘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주인이 동물을 아끼듯 마냥 상냥했던 시선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둑해진 바다색 눈동자에는 키리에를 향한 애정과 미움의 양가감정이 들끓었다.

[도대체가 넌 아직도 내 앞에서 그딴 소릴…….]

살갗을 찌르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키리에가 눈물을 한 방울 뚝 떨구며 몸을 웅크렸다. 어느새 마리아와 라우라, 안네마리가 그녀를 가리고 섰다. 모두 죽일 듯이 나타니엘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틈으로 키리에가 작게 흐느끼는 것이 들렸다.

“아론……. 미안해…….”

나타니엘이 눈을 가렸다. 진력이 났다. 지긋지긋하고 끔찍했다.

[넌…….]

그가 지독히 낮은 목소리로,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뒤틀린 속내를 내뱉었다.

[……넌 단 한 번도 내 이름을 부르진 않는구나.]

나타니엘의 말을 들은 안네마리의 얼굴에 놀란 빛이 스친 순간이었다. 같은 찰나, 나타니엘의 얼굴에서는 삽시간에 인간미가 사라졌다.

[역시 이건 내 방식이 아니지.]

나타니엘이 바로 키리에를 붙잡아 들쳐 안았다.

“싫어! 싫어!”

“키리에!”

“키리에를 내놔, 이 미친 새끼야!”

그는 달라붙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대로 정원을 가로질러, 대기 중이던 마차에 올라탔다.

[뷰캐넌으로 돌아가.]

마부가 잠자코 그의 명령을 따랐다. 키리에는 계속 눈물을 쏟으며 몸을 떨었고, 나타니엘은 다소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나타니엘은 가장 먼저 보이는 하인 열 명을 지팡이로 가리켰다.

[너부터 너까지. 나를 도와주면 좋겠네.]

하인들이 하던 것을 멈추고 침을 삼켰다. 나타니엘은 그들을 방 하나에 몰아넣고, 키리에의 팔뚝을 쥐었다.

“싫어…….”

키리에가 끌려가지 않으려 몸을 낮추었다. 하지만 그녀는 첫 봄비에 떨어지는 꽃잎만큼 손쉽게 나타니엘의 손에 끌려갔다.

큰 방에 인간 아닌 것이 하나, 그의 사랑을 받는 인간이 하나, 그리고 꼭두각시가 열 개.

나타니엘이 키리에의 팔뚝을 붙잡은 채 하인들 앞에 멈춰 섰다.

[자, 친애하는 키리에.]

그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이었다. 남녀가 뒤섞인 하인들은 일렬로 선 채 두려운 눈으로 나타니엘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나는 ‘부탁’하고, 너는 들어주고. 네가 이 가여운 나타니엘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때마다 한 사람씩 죽는 거야. 쉽지?]

키리에가 숨을 들이마셨다. 하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난히 어둡게 느껴지는 방 안, 나타니엘의 푸른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설마 정의로운 내 숙녀께서 이들을 외면하진 않겠지. 아무렴.]

“싫어, 싫어, 싫어…….”

[나도 지긋지긋해.]

나타니엘이 지팡이 끝을 하인의 명치에 갖다 댔다. 그는 뒷걸음질 치는 키리에의 팔을 당겼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위압적으로 물었다.

[내 이름은?]

키리에가 헐떡대며 고개를 저었다. 나타니엘의 고개가 기울었다.

[대답이 없구나.]

그가 지팡이로 명치를 밀자, 하인의 몸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상처는 없었다. 그저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키리에가 울부짖었다.

“안 돼! 안 돼요! 제발요!”

[다음.]

나타니엘이 냉정하게 다음 사람의 명치에 지팡이 끝을 가져다 댔다. 지긋지긋하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닌지, 그의 얼굴에는 미소 한 조각 없었다.

[내 이름은?]

그가 재차 물었다. 여유가 없다는 점만 빼면, 키리에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오로지 생김새와 행동만 점잖으며, 풍기는 분위기는 지독하리만치 야만적인.

“제발요, 싫어요…….”

키리에가 몸을 뒤로 빼며 울었다. 너무 울어서 숨쉬기조차 어려워 보였다.

문득, 눈가가 짓무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타니엘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키리에는 숨을 들이켜며 그의 손을 피했다.

허공에서 손을 멈춘 나타니엘이 냉소를 터뜨렸다.

[그래. 그게 보통이지.]

오랜만이라 잊고 있었다. 원래 그는 이런 취급이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건 대답이 아니야, 키리에.]

다시 하인의 몸이 허물어졌다. 넘어지며 머리를 잘못 부딪혔는지 카펫에 피가 비쳤다.

[다시 묻지.]

나타니엘이 하얗게 질린 다음 하인의 명치에 지팡이를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내 이름은?]

그가 키리에의 머리 위에서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키리에가 꺽꺽대며 외쳤다.

“나타니엘! 나타니엘! 나타니엘!”

나타니엘이 자괴감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는 뭔가를 기대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키리에의 귀를 간질이듯 어루만진 뒤, 고개를 돌렸다.

[다음.]

“제발, 제발…….”

[네가 그토록 중얼대는 그 머저리의 이름은?]

나타니엘의 지팡이가 다음 하인에게로 향했다. 키리에는 십여 초를 불안하게 헐떡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론?”

하인이 쓰러졌다. 키리에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그놈의 이름은?]

“아…… 아론, 아론? 아론! 아론!”

나타니엘의 표정이 점점 사라져 갔다. 하인이 또 한 명 쓰러졌다.

[이름은?]

“아아, 아아……. 아아아아……!”

겁에 질린 키리에의 혀가 바싹 굳었다.

[잘했어.]

그제야 나타니엘은 다시 상냥한 어조로 되돌아왔다. 그는 느리게 키리에의 뒷목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눈물에 젖은 눈꺼풀 위에 입 맞췄다.

[앞으로도 그 이름은 안 들렸으면 좋겠구나.]

키리에가 뻣뻣하게 굳은 채 쌕쌕거렸다. 나타니엘은 온화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지팡이를 들었다.

[키리에. 부탁하지.]

남은 하인은 여섯 명. 키리에가 얕은 숨을 헐떡거렸다. 나타니엘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키리에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손가락에서 빠져나가는 연보랏빛 머리카락에 나타니엘의 마음은 조금 더 가라앉았다.

[웃어.]

“허억, 흐읏…….”

키리에가 웃지 못하자 다시 한 명이 쓰러졌다. 그녀가 울며 나타니엘의 팔에 매달렸다.

“안 돼요, 제발요! 제발요! 제발!”

[웃어.]

“싫어, 이제 이런 건 싫어……!”

[나라고 이러고 싶은 줄 아나? 난 이런 방법밖에 몰라.]

지팡이가 다른 하인을 가리켰다. 나타니엘이 짓씹듯 속삭였다. 지팡이를 겨누고 있는 건 나타니엘인데, 심장이 뽑혀 나가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나타니엘이었다.

[제발 그만 울고…… 웃어.]

“으, 으으…….”

마침내 키리에가 뺨을 파들거리며 입꼬리를 당겼다. 야윈 볼에 보조개가 패었다.

“제발…… 제발…….”

백지같이 멍한 머리로도 키리에는 나타니엘의 지팡이가 치워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나타니엘의 얼굴에서는 점점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얼굴이 지나치게 섬세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의 절망과 슬픔 역시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나타니엘은 한참을 굳어서 말이 없었다. 지팡이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비참함에 젖은 눈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눈물만 있었더라면, 울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 아…….”

키리에는 자기 얼굴을 꼬집어 가며 어떻게든 웃으려고 노력했다. 그가 만족해서, 지팡이를 내리길 바라며.

그래도 나타니엘이 웃지 않았다. 절망이 키리에를 집어삼켰다.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나타니엘의 손을 잡았다.

나타니엘이 흠칫 놀랐다. 맑고 서러운 눈이 매달리듯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키리에는 나타니엘의 손을 당겨 그대로 자기 다리 사이에 밀어 넣었다. 동시에 나타니엘이 불에 덴 듯 키리에의 손을 뿌리쳤다.

“아윽!”

키리에가 손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흰 피부 위에 긴 찰과상이 남았다.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나타니엘을 올려다보았다.

나타니엘은 손을 뿌리친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의 얼굴에 큰 슬픔이 뒤번졌다.

[그런 걸 바란 게…….]

분노인지 슬픔인지 절망인지 모를 감정이 뒤범벅되어 흘렀다. 하지만 나타니엘은 곧 정신을 차리고 키리에에게 손을 뻗었다.

[……상처를 보자.]

이번엔 반대로 키리에가 나타니엘을 뿌리쳤다. 그녀가 다친 손을 가린 채 흐느꼈다. 나타니엘은 굳은 얼굴 그대로, 다시 손을 뻗었다.

[……키리에. 상처만 보면 돼.]

키리에는 아예 등을 돌렸다. 그리고 바닥에 웅크린 채 가쁜 숨을 내뱉었다.

[키리에.]

“싫어…….”

나타니엘이 이를 강하게 깨물었다가, 몸을 낮추고 키리에 옆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방금은 내가 실수를…….]

“싫어…… 이젠 싫어…….”

[…….]

“내가 다 지고 갈 테니까…….”

키리에가 더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웅얼거렸다.

나타니엘은 듣지 않아도 그게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었다. 싫다, 밉다, 살려달라, 자신이 죽겠다, 그런 말일 것이다.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은 마법 같은 말들.

작은 주머니쥐처럼 웅크린 키리에를 내려다보며, 나타니엘이 실소를 흘렸다.

[……그래, 내가 본다고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싫어…… 싫어…….”

[알아.]

그가 건조하게 답했다.

나타니엘은 하인들이 살금살금 방을 나가는 것을 무심히 응시하며, 까마득한 옛날 일을 떠올렸다.

그때 그가 사랑했던 최초의 소년은 강 근처에서 살았다.

소년은 가족이 없었고,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나타니엘을 동생 취급하며 아꼈다. 참으로 멍청했다. 그렇지만 그 멍청한 소년이 나타니엘의 중심이었고, 세계의 전부였으며,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었다. 소년이 눈을 마주치며 손을 내밀었을 때부터, 그는 소년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악은 늘 쉬워야 하므로, 나타니엘은 그런 쉬운 존재로 태어났다.

그 소년이 물에 빠져 죽어 가고 있을 때, 나타니엘은 소년의 오두막에서 소년을 기다리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소년이 늘 돌아오던 시간에 돌아오지 않자, 나타니엘은 그제야 오두막을 나서 소년을 찾았다. 나타니엘이 뒤늦게 소년을 찾아냈을 때, 소년은 껍데기가 깨진 달팽이 같은 모습으로 물속에 잠겨 있었다.

나타니엘은 소년을 구할 수 없었다. 그는 뭐든 죽이고 부술 수 있었지만, 무언가를 지키거나, 치료하거나, 되살릴 수는 없었다.

몇 번이고 그런 일이 더 있었다. 인간은 너무 작고 연약해서, 웃으며 일하러 나간 자가 시체로 돌아오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때마다 나타니엘의 세계는 몇 번이고 허물어졌다가 재건되었다.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공동체가 생기고, 사회가 구성되고 난 뒤부터는 사회 지도층이 그를 깨우는 일이 늘었다. 투명한 얼음 속에서 잠든 아름다운 사내. 지도자에게 바치기엔 딱 좋은 공물이었다.

그들은 나타니엘을 떠받들며 대가로 힘이나 돈을 요구했다. 죽은 소년처럼 나타니엘을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갈증은 언제나 있었지만, 차라리 그편이 좋았다. 권력 있는 자들은 최소한 허망하게 죽어서 그를 어쩔 줄 모르게 하는 일은 없었다.

그를 깨운 자들이 악하건 선하건, 나타니엘은 그저 그들이 자신 옆에 있어 주기만을 바랐다. 그는 정말로 그거면 충분했다.

[키리에.]

“…….”

대답하지 않겠지. 그럴 것이다. 알면서도 나타니엘은 계속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키리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의 세계였고, 그녀는 그를 외면할 수 있지만,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키리에.]

“아가씨!”

그때 안네마리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흰 베일을 뒤집어쓰고 창을 든 안네마리가 쓰러진 키리에를 보고 비명을 내질렀다.

“안 돼!”

안네마리는 바닥에 엎어진 하인들을 보고 바로 상황을 짐작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검은 눈이 증오로 불탔다.

“또 아가씨 앞에서 사람을!”

나타니엘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그는 단정하지만 힘없는 몸짓으로 일어나, 한 걸음 물러났다.

안네마리가 허겁지겁 키리에에게 다가갔다. 울다 지쳤는지 키리에는 웅크린 자세 그대로 혼절해 있었다.

[손에 상처가 났으니 돌봐주렴.]

나타니엘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곧 손가락을 튕겼다. 흰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 끝에서 보석들이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동시에 쓰러졌던 하인들이 머리를 붙잡고 일어났다. 안네마리가 의아한 눈을 했다.

“죽인 게 아니에요……?”

나타니엘이 실소한 뒤,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물러난 채로 키리에를 응시했다. 그리고 위태롭고 공허하게 중얼거렸다.

[……웃는 게 보고 싶었을 뿐이야.]

안네마리는 하인들이 보석을 챙긴 뒤 방을 나설 때까지 기다렸다. 후에 그녀의 눈이 사나워졌다.

“아가씨를 괴롭히면서 아가씨가 웃길 바란다고요?”

고개 숙인 나타니엘의 머리가 느리게 흔들렸다.

[키리에가 웃질 않는구나.]

“웃게 해 줘야 웃죠! 이제라도 아가씨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면, 웃을 일을 만들어 줘야 하는 거잖아요!”

안네마리가 답답함에 소리를 내질렀다. 나타니엘이 고개를 들었다. 표정 없는 얼굴에 멍한 눈이 안네마리를 향했다.

[하려고 했어.]

안네마리가 멈칫했다.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가진 걸 다 주어도 좋으니, 웃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돈, 명예, 부, 권력, 지위, 명성…….]

“지금 그딴 걸로 아가씨를 웃게 하겠다고요!”

나타니엘이 낮고 서글픈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한 발짝 더 물러났다. 방 안이 그의 얼굴을 가리며 한층 어두워졌다.

[나는 그 방법밖에 몰라.]

안네마리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으로 키리에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아가씨는 그런 걸 바라지 않았어요.”

[네 말이 맞아. 키리에는 그렇지. 키리에가 아니라면 감히 누가 나를 동정하겠니.]

나타니엘이 허무함이 느껴질 정도로 가볍게 대답하며 한 걸음 더 물러났다. 이제 그는 어둠과 섞여 희미한 실루엣으로만 보였다. 얼핏 그의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같았다.

한참의 침묵 뒤에, 나타니엘은 슬픔과 비참함에 창자가 짓이겨지고 뼈가 저리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나는 정말 그 방법밖에 배우지 못했어…….]

[둄2 절갠 교환재공타싸x]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