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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단념 (20/33)

20. 단념

키리에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와 나타니엘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섰다. 딱 흐린 달빛이 들이치는 창문 앞이었다.

여기선 답하지 않는 게 낫다. 나타니엘이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키리에는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조용히 숄을 끌렀다.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 숄이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나타니엘은 약간 후회했다. 장난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아졌다.

상아색의 얇은 리넨 드레스만 입은 키리에의 오른쪽 뺨에 달빛이 비스듬하게 내려앉았다. 그가 장악하고 있던 밤을 순식간에 키리에가 휘어잡았다.

“손부터 할까요?”

키리에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받을 때의 손동작이 아니었다. 거울에 손을 얹듯이, 지문 다섯 개가 비스듬히 그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조금 기분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키리에가 제 손으로 자신에게 손을 뻗는 광경이 몹시도 생경하고도 기꺼웠다.

나타니엘이 잠자코 왼손을 들어 다섯 손가락의 끝을 맞댔다. 키리에의 체온은 그보다 높기에 닿은 곳이 뜨거워졌다. 그 때문인지 뱃속에서 뭔가가 치밀었다. 낯선 감각이었다.

“아프면 말할게요.”

키리에가 감촉을 가르치듯 천천히 깍지를 껴왔다. 엄지손가락 하나로도 뼈까지 부술 수 있는 작은 손이 겁도 없이, 맹랑하게 그의 마디 사이를 꽉 조였다.

나타니엘이 눈만 움직여 빈틈없이 꽉 맞잡은 손을 주시했다. 깨끗하고 작은 손톱이 매달린 손가락이 깍지의 빈 곳을 채우려고 손등 위에서 꼼지락거렸다.

나타니엘은 그제야 이게 꽤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누가 보면.]

“문 잠갔어요.”

[아.]

그 말은 안 하는 게 나았을 텐데. 이제 문 핑계도 댈 수 없었다.

“살살 힘줘 볼래요?”

밤이라서인지 키리에의 목소리는 낮보다 더 작고 소곤소곤했다. 나타니엘은 아주 살짝, 말하자면 피부를 갖다 대는 정도로만 손을 살근댔다. 그러자 키리에가 흠칫 놀라더니, 속닥거렸다.

“……진짜 세네요.”

조금 실소가 나왔다. 힘은 준 적도 없다.

“그래도 괜찮네요? 손은 자주 쓰니까 그런가 봐요. 하지만 이 이상 세게 잡으면 아플 것 같아요.”

[그렇구나.]

나타니엘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얌전히 대답하며 그녀가 말한 정도를 뇌리에 아로새겼다.

“손은 안 해도 되겠어요.”

그와 달리 키리에는 용건이 끝나자 바로 손을 떼어 냈다. 체온이 사라지자 순식간에 냉기가 찾아들었다. 그 순간, 그녀가 팔을 돌리고 옷소매를 올렸다. 진주처럼 하얗고 매끄러운 팔 안쪽이 드러났다.

냉기는 있는 적도 없는 것처럼 가셨다.

키리에가 옷소매를 고정한 채 팔을 내밀었다. 눈이 말똥말똥, 비장했다.

“만져 봐요.”

나타니엘은 쓴웃음을 지으며, 왼손으로 키리에의 팔을 감쌌다. 따뜻하고 말랑거렸다. 팔꿈치 아래의 가장 넓은 부분도 그가 한 손에 쥘 수 있었다.

[……식사를 해.]

“하고 있는데요.”

나타니엘이 한숨 쉬었다. 사실 지금의 한숨은 그녀가 걱정되어서는 아니고, 아까부터 나오려던 것이었다.

“팔꿈치.”

손이 더 올라갔다. 조금 뾰족한 팔꿈치 뼈가 만져졌다. 나타니엘이 손가락으로 키리에의 팔꿈치를 받치고, 엄지로 팔의 도톰한 곳을 살짝 눌렀다.

“앗.”

키리에가 어설프게 신음을 흘렸다. 동시에 그의 동작이 딱 멎었다.

[아프니?]

“아뇨. 차가워서…….”

그녀가 속닥거렸다.

“괜찮아요. 안 아파요.”

안 아파도 더는 누를 생각이 없었다. 하얀 피부가 눌리며 그의 손가락 주변으로 둥글게 솟아오르는 것이 썩 보기에 좋지 않았다. 손을 떼려는데 키리에가 소곤거렸다.

“팔 위쪽도 잡아 봐요. 이쪽을 잡을 일도 있지 않을까요? 보통 누굴 잡아 줄 땐 팔을 받치니까…….”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옷소매를 어깨까지 당겼다. 통이 넓은 소맷자락 아래로 하얀 팔이 드러났다. 보통 귀족가 숙녀들은 팔꿈치까지 가리는 드레스를 입기 때문에, 당연하지만 그 위는 그녀들의 발처럼 보기 힘든 부분이었다.

[키리에.]

“네.”

그는 진정성을 표현하기 위해 말머리에 약간의 공백을 둔 뒤, 생각만 하던 것을 말했다.

[어떤 의도가 있는 거라면 나로서는 말로 해 주는 쪽이 좋은데.]

“네?”

키리에가 얼굴을 찡그렸다. 욕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타니엘은 갑자기 조금 피곤해졌다.

그래. 의도 따윈 없구나. 그러시겠지.

그가 무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연륜 덕이었다.

나타니엘이 손을 뻗었다. 감싸듯이 키리에의 팔을 쥐자, 안쪽의 여린 살이 손가락에 감겼다.

키리에가 움찔했다. 어느 사내도 그런 곳을 만지진 않았을 테니. 나타니엘은 모르는 체하며 손톱 끝으로 피부를 간질이듯 쓸어내렸다.

“음.”

키리에가 그제야 조금 얼굴을 붉혔다. 좀 더 찬기를 흘리자, 배꽃잎 같은 피부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이 보였다. 키리에가 울상 지었다.

[힘은?]

“……안 아파요.”

나타니엘이 손을 추슬렀다. 냉기가 사라지자 키리에가 파르르 떨었다. 그를 보며 나타니엘은 책상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어깨.]

그는 다시 밤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양손으로 어깨를 쥐자 키리에가 흠칫하고 놀랐으나, 곧 또랑또랑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숙녀는 참 겁이 없다. 백조의 목처럼 둥그스름한 양어깨는 그대로 잡아올려도 달랑 들 수 있을 만큼 작고 가냘팠다. 그가 엄지로 어깨와 쇄골 사이를 꾹 누르자, 키리에가 움찔했다.

[아프니?]

“아뇨. 생각보다…… 읏.”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타니엘이 손에 힘을 주었다. 멍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아프네요.”

키리에가 얼굴을 찡그린 채 정직하게 말했다. 그는 조금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밀어냈다. 아파지라고 한 거였다. 아까부터 속이 들끓었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난데없이 인내심을 시험받으려니 속이 뒤틀리는 감각이었다. 그만둘 때였다.

[그럼…….]

하지만 키리에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이군요.”

나타니엘이 다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드높은 곳의 그 작자는 자기 자식들에게 경계심을 좀 더 가르쳤어야 했다.

[다음이 뭔데?]

그가 조금 지쳐 물었다. 키리에는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서투르게 웃었다.

“저기…… 내장 파열 안 되게……. 알죠?”

그러더니, 키리에 뷰캐넌이 천천히 품속으로 걸어들어왔다.

나타니엘이 굳었다.

그게 품이었던가, 심장이었던가. 걸어들어온 게 아니라 나비처럼 날아 들어왔던가? 아니면 꽃처럼 팔랑대며 바람에 날려 들었던가.

“그런데 이렇게까지 할 일이 있을까요? 하지만 만에 하나가 있을지도 모르고…….”

저도 부끄럽긴 하였는지 키리에는 턱 아래에서 뭔가를 조잘거리기 바빴다.

나타니엘이 고개를 내려 키리에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단정한 가르마가 보였다. 그 아래로 속눈썹이 보이고, 더 아래로 완만한 어깨가 보였다. 그녀의 손은 어색함을 견디며 나타니엘의 가슴팍 위에서 동글게 얹혔다.

도망치고, 거부하고, 멸시하고, 증오하고, 울고, 그가 이 세상에 없어도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독야청청 거닐던 키리에가 지금 제 발로 그에게 안겼다.

나타니엘은 자신이 그 광경을 영영 잊지 못할 것을 확신했다.

[키리에.]

“……그런데 방이 조금 추운 것 같기도 하네요. 당신이 그런 건 아니죠? 끝나면 사람을 시켜서…….”

[키리에.]

“네?”

[키리에.]

“아.”

키리에는 세 번째에 그의 의도를 파악하고, 고개를 들어 나타니엘을 마주 보았다.

“네. 나타니엘.”

나타니엘이 더디게 팔을 들어, 천천히 키리에의 몸을 안았다. 그녀의 키가 작은 탓에, 그가 몸을 움츠리자 나타니엘의 턱이 키리에의 목덜미에 얹혔다.

차가워. 키리에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몸이 긴장하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나타니엘은 손가락 끝부터 키리에의 등을 더듬어 감쌌다. 날개뼈가 도드라진 등이었다. 얇은 리넨 아래 몸의 굴곡이 적나라했다. 손바닥 아래서 연약한 근육이 맥동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털이 나 있지.]

“인간도 털이 나 있어요.”

[그건 그렇네.]

나타니엘이 눈을 깜빡였다. 술에 취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넌 고양이가 아니고.]

“음…….”

키리에가 작게 단어도 감탄도 아닌 말을 중얼거렸다. 그게 당혹이라는 것을 이제는 그도 알았다.

나타니엘이 좀 더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한 줌만도 못한 허리를 감싸고 등을 안자, 키리에는 이제 완전히 그의 품에 갇혔다.

“……이건, 그러니까, 어느 정도의 힘이죠?”

상황이 겸연쩍었던 키리에가 물었다. 이젠 아무래도 좋은 나타니엘이 키리에의 뒷머리를 받치며 대꾸했다.

[잘 모르겠어.]

“그으러시구나…….”

[아프니?]

“그렇진 않아요.”

[아프면 말해. 살살 할 테니까.]

“그야…….”

키리에가 말꼬리를 흐렸다. 나타니엘이 소리 없이 미소지었다. 그는 마음껏 그녀의 머리카락과, 뒷목과, 등과, 허리의 감촉을 느꼈다.

“……저, 나타니엘.”

키리에가 주춤거리며 몸을 빼기 시작했다.

“슬슬, 괜찮은 것 같은데…….”

[조금만 더.]

나타니엘이 나긋하게 말하며 키리에의 머리에 입 맞췄다. 확실히 그녀는 벌레도, 종달새도, 고양이도, 솜사탕도 아니었다.

“밤도 늦었고, 자야 하고…….”

[재워줄게.]

“네? 필요 없습니다.”

키리에의 말투가 단박에 냉랭해졌다. 이럴 땐 여지없이 꼬리를 부풀린 고양이 같아서 나타니엘은 웃고야 말았다. 하지만 고양이가 아니다. 아주 작고, 귀엽고, 연약하고, 사랑스럽긴 하지만, 어쨌든 고양이가 아닌 것이다. 너무 늦게 깨달았다.

[도와준다고 했잖니. 아직 잘 모르겠어.]

“도움이 되고 있는 게 맞나요?”

[응.]

그가 느리게 키리에를 품에서 놓았다. 팔 하나는 여전히 허리에 남겨 놓았기에 그렇게 멀어지진 않았다. 멋쩍은 얼굴을 하면서도 키리에는 도망가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방비. 무경계. 나타니엘이 실없이 웃었다.

“왜 웃는 거예요?”

[그동안 내가 대처를 꽤 잘했구나 싶어서.]

“밤엔 좀 미치는 타입이신지?”

[그런가 봐.]

나타니엘이 빈손으로 키리에의 뺨을 감쌌다. 자신의 체온을 좀 높여 놓은 덕에, 주변의 온도를 좀 낮춰 놓은 덕에 키리에는 머뭇거리면서도 본능적으로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얼굴을 만질 일도 있나요?”

손바닥만 한 주제에 눈코입이 다 들어가 있는 오밀조밀한 얼굴이 자신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타니엘의 머릿속에서는 별이 튀었다.

[……있을지도 모르지.]

그는 이제 자신이 뭘 해야 할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나타니엘의 고개가 품 안의 키리에에게 기울었다.

[조금만 더.]

인어가 헤엄칠 것 같다고 말한 파란 눈이 반짝인 순간, 키리에의 입술이 벌어졌다. 키리에의 눈 역시 놀람으로 별처럼 반짝였다.

“아…….”

[그런 목소리도 반칙이야.]

입술이 겹쳐졌다.

키리에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니, 나타니엘과 입 맞추고 있었다.

‘잠깐만.’

꿈인 줄 알았는데 꿈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연달아 떠올랐다.

‘뭐지?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거야?’

현실을 부정할 시간도 없이 코앞의 푸른 눈에 초점이 맞춰졌다.

유선형의 눈매가 곱게 휘며 쌕 미소짓더니, 혀가 좀 더 깊숙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차라리 거칠었다면 더 빨리 정신을 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입술이 닿는 부분부터 혀가 입 안을 매만지는 동작까지 모든 것이 애틋하고 부드러웠다. 얼핏 애절하게까지 느껴지는 감각이었지만, 숨을 틀어막고 싶은 것처럼 집요하고 끈질겼다.

키리에는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다시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혀가 얽히는 젖은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러다 목울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고 가슴이 힘에 겨워 들썩거리기 시작할 때, 키리에는 이젠 정말 그만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읍!”

키리에가 입을 꾹 다물며 홧김에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이 나타니엘의 경동맥에 정통으로 맞았다.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곧 입술을 살근거리던 것을 그만두었다.

[이런.]

나타니엘이 고개를 돌렸다.

[피가 나잖니.]

안 그래도 동상에 주먹질한 것처럼 손이 지끈거리는 중이었다. 나타니엘이 인상을 썼다.

[버들강아지가 너보다 더 튼튼하겠어.]

먼저 할 말이 그게 아닐 텐데.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혼란스러움과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당장 쏘아붙이고 싶은데, 너무 놀라서인지 온갖 단어가 서로 먼저 나오겠다고 오히려 목구멍을 막고 있었다.

키리에의 손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나타니엘은 태연하고 무심하게 키리에를 보았다.

[상처부터 치료하지.]

틱, 틱, 땡. 마침내 키리에의 꼭지가 돌았다.

“미쳤어요?!”

[아니.]

“지금 무슨……! 연습이었잖아요!”

[그래. 연습.]

태연하다. 너무 태연하다. 그리고 말이 안 통한다. 키리에가 절망적인 눈을 했다.

“이걸 왜 연습해요!”

[할지도 모르잖아.]

“누구랑요?”

[너랑.]

진짜 돌았구나! 키리에의 입에서 헛숨이 터져 나왔다.

나타니엘은 웃었다. 개운하다 못해 후련해 보이기까지 하는 미소에 키리에의 복장이 터졌다.

“애초에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대체?!”

[너랑 내가 키스한 상황.]

“제가 강제로 추행당한 상황이겠죠! 그리고 왜 아직도 안 놓고 있어요?!”

[놔주면 때릴 거잖니.]

“맞을 짓을 했으니까!”

[손등 깨져.]

“이보세요, 전설경 각하!”

[소리도 지를 줄 아는구나. 귀족적인 행동이 아니니 들을 일이 없었나.]

사람을 희롱해 놓고 혼자 차분하다. 열이 머리끝까지 뻗쳤다. 키리에가 강하게 양손으로 나타니엘을 밀쳤다. 나타니엘은 [손 조심.]하고 말하며 뒤로 물러났다. 다칠까 봐 물러나 준다는 태도가 다시 불을 댕겼다.

“도대체, 이게, 대체, 무슨……. 제정신, 미쳤, 완전, 이런……!”

키리에가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남의 타액에 젖어 있는 감각이 낯설었다. 그 와중에 원흉이 안쓰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키리에. 문장 성분을 채워야지.]

“이게 누구 때문인데요!”

버럭 외치자 그는 얌전히 양손을 들어 보였다.

[사과하지. 내가 좀 앞서 나간 건 사실이니.]

“앞서 나가요? 내 길에는 이런 게 없었는데요!”

[나도 없었단다. 내가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네가 진즉 눈치챘겠지.]

뻔뻔한데 정답이었다. 나타니엘에게서 성적인 함의를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타니엘은 늘 빈틈없이 담백했고, 그게 키리에가 전혀 그를 경계하지 않은 이유였다.

“사람들이 보면!”

[누가 친절하게 문이 잠겼다고 알려 주던데.]

미칠 것 같았다. 원래 이렇게 낯짝이 두꺼운 사람이었나? 그랬지! 그랬다! 키리에가 머리를 부여잡은 채 나타니엘을 노려보았다. 나타니엘이 아리송하단 얼굴로 다시 책상에 걸터앉아, 팔짱을 꼈다. 느긋하게 다리를 엇갈기까지 했다.

[별로였니?]

“입 다물고 있어요!”

[그럴 리는 없지. 애초에 ‘그런 쪽’으로는 권능도 있고.]

“입! 다물고! 있으라고요!”

나타니엘이 쌕 미소지었다.

[그러죠, 여보.]

키리에가 양손으로 마른세수했다. 아니야, 문제없다. 사고다. 저건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다. 재앙이다. 자연재해다. 인류의 악몽이다! 사람이 아니다! 무생물이다! 그녀가 몸을 홱 돌리고 외쳤다.

“모르고 한 거라고 말해요!”

나타니엘이 드물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몹시 곤란하다는 듯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키리에 뷰캐넌. 성교육은 받았겠지?]

“입 좀!”

[네가 물었잖니.]

“반성하는 태도를 보여요, 제발!”

나타니엘이 멈칫했다. 한껏 무르익은 파랑의 눈이 곤란을 호소했다. 그리고 기어이 대답만은 않았다.

키리에가 황망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화내는 자신이 우스워졌다. 저치는 자신이 당황할수록 좋아 죽을 사람이었다.

“하…….”

키리에가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손을 내리곤 어깨를 늘어뜨렸다.

“됐어요……. 뭔가 내가 바보 같아졌어요…….”

[흠.]

“전 방금 개에게 물렸어요. 지나가던 땅강아지가 절 물었다고요. 벌에 쏘인 거죠. 알겠어요?”

나타니엘은 자신에 대한 새로운 별명이 몹시 재밌는 듯했다. 그가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유쾌하고 청량하게 미소지었다.

[다음은 무슨 말을 들을지 기대되네.]

“다음은 없어요!”

두 사람이 셀 아렐라노에 도착했다. 그리고 문제가 생겼다. 신분을 숨기고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이쪽으로.]

곤란해하는 키리에를 보며 나타니엘은 그녀를 인적 드문 곳으로 이끌었다. 키리에가 고양이처럼 눈을 치뜨고 입술을 오물대자, 그는 도리어 만족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구석진 곳의 성벽에서, 키리에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마법을 쓰려나? 하지만 셀 아렐라노의 무너지지 않는 성벽은 발라브리가의 작품이다. 그리고 나타니엘은 발라브리가가 자신보다 마법 능력이 뛰어남을 인정했다.

[키리에. 좋아하는 모양은?]

나타니엘이 지팡이를 꺼내며 물었다. 파란 눈이 나른하게 반짝였다.

“……동그라미?”

키리에가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원. 무한의 상징이지. 근원을 뜻하기도 하고.]

나타니엘은 그렇게 말하더니, 지팡이의 모습을 흰 검으로 되돌렸다. 그리고 성벽을 동그랗게 잘랐다.

스르릉. 젤리처럼 잘린 성벽에서 모래 먼지가 조금 흘렀다. 잘린 안쪽은 공간이 어그러지더니 순식간에 뭔가에게 먹혀 사라졌다.

[에스코트를.]

나타니엘이 새로 생긴 통로 앞에서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키리에는 그의 무력을 실감하며 손을 잡았다.

셀 아렐라노의 주성까지는 몇 겹의 성벽이 있었고, 내내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좋아하는 모양은?]

“별이요.”

[별은 인간이지. 죽어서도 너무 오래 남아 있어.]

영문 모를 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런 말에는 대체로 키리에가 범접할 수 없는 무게감이 담겨 있어서, 함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키리에는 좀 더 자신이 감당 가능한 주제를 꺼냈다.

[좋아하는 모양은?]

“높은음자리표?”

[까다롭네.]

나타니엘이 나긋하게 답했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나도 손쉽게 성벽을 높은음자리표로 잘라 냈다.

[음악을 좋아하니?]

“예술은 다 좋아하는 편이에요.”

나타니엘이 키리에의 얼굴을 힐끗거렸다.

[극장을 사 줄까?]

“……됐습니다.”

마침내 귀족들의 저택이 모여 있는 주성에 다다랐다. 보통 그런 건물은 한데 모여 있지 않는 법이지만, 셀 아렐라노의 구획을 정한 이가 발라브리가였다. 그는 미친 대마법사였고, 미친 대마법사의 선택은 대체로 그만큼 미쳐 있는 법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떠나 있었네요.”

키리에가 넓고 높은 건물들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니.]

나타니엘이 같은 곳을 올려다보며 호응했다. 키리에는 뒤늦게 머쓱해졌다.

‘불로불사인 사람한테 내가 무슨 말을.’

그녀가 로브를 좀 더 눌러쓴 것에 반해, 나타니엘은 지팡이를 짚은 채 허공을 보고 있었다. 아니, 허공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가 보고 있는 방향은 수도 아렐라노의 심장인 왕궁 셀이 있는 방향이었다.

[제법이네.]

나타니엘이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가소롭다는 듯한 오시에 비해, 입술의 미소는 감탄처럼 보였다.

[확실히 발라브리가는 인간치고는 뛰어났지.]

“무슨 말이에요?”

나타니엘의 시선이 키리에에게 향했다. 그리고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수도에선 나와 붙어 있으렴.]

“항상 그랬잖아요? 아니면 안네마리를 데리고 다니거나…….”

[아니. 숲 짐승으로는 부족하겠어.]

키리에가 놀랐다. 안네마리는 나타니엘이 인정했을 정도로 상당한 실력자다. 그런 안네마리로도 부족하다니. 키리에가 턱을 짚었다.

“레쇼 경이 말해 줬어요. 발라브리가의 연구실이 발견됐다고.”

[레쇼와 아직도 연락하니?]

“……논점이 그게 아니지 않나요?”

발라브리가의 연구실에는 나타니엘을 죽일 수 있는 마법이 있다. 사실, 정말 죽일 수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죽지 않는다고 다는 아니다.

“당신 일이에요, 나타니엘. 힘을 가지면 당신을 죽이려 들 텐데.”

그 말에 나타니엘은 [아.]하고 아주 천진하고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부드럽게 그녀를 응시했다.

[걱정해 주는 거야?]

키리에도 똑같이 부드럽게 그를 응시했다.

“착각도 유분수지. 말려들 시민이 불쌍할 뿐이에요.”

나타니엘은 별로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도리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수도를 볼 때의 사나운 기세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아무튼 숲 짐승으로는 안 돼. 나나 레쇼와 함께 있어. 그렇다고 레쇼를 너무 시키진 말렴. 그는 네 요청을 거절하기 어렵거든.]

키리에가 눈을 깜빡였다. 의외였다. 설마 레쇼를 걱정하는 건가? 하지만 나타니엘이 그녀의 생각을 짐작이라도 한 듯이 실소했다.

[네가 레쇼와 친하게 굴수록 내 심기가 불편해지잖니. 그리고 그거야말로 레쇼가 제일 싫어할 일이지.]

나타니엘의 입에서 레쇼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키리에가 말없이 수도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나타니엘에게 고개를 돌렸다.

“생각해 봤는데, 역시 레쇼 경에게는 당신이…… 그런 대상인 거죠? 나 같은…….”

나타니엘이 지팡이를 짚은 자세 그대로 고개만 살짝 움직여 키리에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오래 산 탓인지 감정 표현의 곡선이 지나치게 완만했다. 키리에가 좀 더 용기를 냈다.

“불쌍해서인가요?”

[글쎄. 누가 그 아이를 동정하겠어.]

몇백 년을 산 호국경더러 아이라고 표현하는 부분. 가끔 이런 부분에서 나타니엘이 겪어 왔을 시간이 스며 나왔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키리에의 머리 위에 씌워져 있는 로브의 모자를 여며 주었다.

[생각해 보렴. 난 네가 버들강아지보다 연약해서 늘 전전긍긍하지. 하지만 레쇼는?]

“아.”

키리에가 입을 벌렸다.

레쇼의 상대는 나타니엘이다. 누구도 복종시킨 적 없는 청황색 말.

[그런 거야.]

키리에의 표정을 본 나타니엘이 눈을 내리깔며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아까보다 시선이 묵직했다. 키리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나 더…… 물어도 되나요?”

[대답은 보장할 수 없지만.]

그녀가 망설인 끝에 입을 열었다.

“제 소중한 사람들을 제외한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죽이잖아요. 국왕이 내게 위험하다면…… 왜 가만두는 거죠?”

나타니엘이 완전히 고개를 돌려 키리에를 응시했다. 눈이 마주치자, 일순 그의 파란 눈이 밤하늘처럼 광활하게 펼쳐졌다가, 코앞에서 쾅, 하고 닫힌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가 몸담은 미지의 세계가 잠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 분명하지만, 안쪽의 것이 너무 거대해서 키리에는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니엘이 아주 낯설게 느껴졌다.

[만약을 위해서야.]

하지만 목소리만은 지상의 것처럼 상냥하고 다정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키리에의 시선을 피했다. 그건 확실하게 시선을 피하는 행동이었다. 쿵, 하고 키리에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전부……?’

[전부.]

다정한 환청과 함께 이명이 울렸다. 키리에는 재빨리 모자를 눌러쓰며 앞으로 나섰다.

“……갈까요? 아까 말한 대로, 숨어 있어요. 당신은 눈에 띄니까.”

다행히 나타니엘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곧 눈 깜짝할 새에 나타니엘의 모습이 사라졌다. 키리에가 가빠오는 숨을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이었다. 주머니에서 툭 튀어나온 못처럼 누군가의 말이 귀에 박혔다.

“그래서 키리에 뷰캐넌이 돌아온다는 건가요?”

키리에가 뚝 걸음을 멈췄다.

수도의 타운하우스는 영지처럼 넓지 않기에, 귀족들도 마차를 타지 않고 산책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길 건너편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것은 한 무리의 젊은 귀족들이었다.

“잡혔다고 그러더군요. 곧 전설경이 데리고 돌아오겠죠, 아가씨.”

“보람 없는 일에 열중하는 취미가 있으시네요, 그분은.”

“배가 부른 거죠.”

“몸값 올리려고 그러는 거 아니겠어요?”

“이미 팔린 몸은 아니고요?”

여자들이 키득거렸다. 그 순간 키리에의 그림자가 터지듯이 펼쳐졌으나, 그들에게 닿기도 전에 키리에가 발로 바닥을 굴렀다.

“죽이면 가만 안 둬요.”

잇새로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둠이 머뭇거리는 사이 귀족들은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목소리의 잔상만이 남았다.

“그런 것치곤 서럽게 울던데. 귀족 아닌 줄 알겠더라고.”

“천박하게 말이죠…….”

키리에가 가까스로 숨을 들이켰지만 내쉬지 못한 채 멈췄다. 온몸의 첨단에서 피가 모조리 빠져나간 것 같았다. 얼음물에 들어간 것처럼 추운데, 동시에 수치심이 전신을 불살랐다. 몇 개의 입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거리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자진할 것처럼 굴더니 안 죽었네. 임신이라도 했나?”

“에이. 달거리 했잖아.”

“어머, 그렇네.”

“설탕이 또 궁으로만 들어가려나?”

“욱……!”

키리에는 구역감을 참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그림자가 들썩였다.

“죽이지 말라고요!”

미친 사람처럼 외치는 키리에를 행인들은 나병 환자 대하듯 피했다. 심장이 고막에 달린 것처럼 시끄러운데도, 불특정 다수의 입술이 내뱉는 독은 그녀의 귀에 똑똑히 들려 왔다.

“비위 맞추는 건 별로였지만, 연극은 재밌었죠.”

“사실 저는 끼고 싶었는데, 시나리오는 다 올드시우다드와 포트듀케인에서 관리해서 말이에요…….”

“연극에 참여한 사람에게 전설경이 베푼 부가 어마어마하긴 했소.”

그때 누군가 작게 말했다.

“하지만 근위병들이 죽었어요.”

사람들이 동시에 멈칫했다. 하지만 곧 다시 참새처럼 숙덕공론을 시작했다.

“그건 왕가가 잘못했소. 전설경과 호국경의 도움을 받아서 만들어진 나라인데, 감히 이경을 거역하다니.”

“제가 아주 조금만 정직해 볼까요? 키리에 뷰캐넌은 너무 정신병자 같아요. 전설경께서 그렇게까지 하셨는데, 왜 고집을 부릴까요?”

“맞아요. 그렇게나 사랑해 주는데……. 하아, 너무 낭만적이야.”

누군가 다시 작게 말했다.

“하지만 소문 속 소년의 자살을 부추기기까지 했다는데요.”

재삼 이야기가 멈췄다. 그리고 누군가의 작은 의문을 지워 버리고 싶은 것처럼 더 높게 떠들었다.

“죽은 사람이 나약했네요. 원래부터 마음이 아팠던 게 아닐지?”

“애초에 평민이잖소. 평민들은 늘 그렇지. 궁에서 살인이나 하고 말이야. 그래 봐야 같은 평민 요리사가 죽었다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둘이 했을까?”

“했겠지.”

키득거림이 이어졌다. 그러다 누군가 로브를 쓴 키리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봐요. 상성구에 어떻게 저런 사람이 들어왔지?”

키리에가 방향을 바꿔 건물 뒤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먹었던 것을 전부 게워 냈다.

어느새 나타난 나타니엘이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청동상처럼 굳은 얼굴이었다.

[키리에.]

목소리가 겹치기 시작하자 키리에는 눈을 질끈 감고 귀를 막았다. 하지만 상냥하고 잔인한 속삭임이 심장 속에서 오르골처럼 울렸다.

[아직이야. 좀 더 울고, 좀 더 희망을 갖고, 좀 더 절망하렴.]

그럴 리 없다. 그럴 시간도 없었고, 기회도 없었고, 휴전이라고 했고,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고…….

[그래야 마지막엔 진짜 희망을 눈앞에 두고서도, 손을 뻗을 생각조차 못 할 테니.]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무도 돌봐 주지 않은 정신의 상처가 드디어 키리에의 내장을 먹어치우고 살갗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키리에가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녀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들어 골목의 끝을 바라보았다. 멜라니의 목을 든 아론이 서 있었다. 아론이 웃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누나.

키리에가 셀 아렐라노에 있는 뷰캐넌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안네마리가 빗자루를 내던지고 키리에에게 달려들었다.

“아가씨!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안네마리가……!”

키리에를 끌어안은 안네마리가 멈칫했다. 올려다본 키리에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창백했다. 그러다 안네마리와 마주치자, 뒤늦게 끌려 나온 생기가 억지 미소를 띄웠다.

“……무사했구나, 안네마리. 고생 많았어.”

안네마리는 모래를 씹는 기분이 되어 웃지 못했다. 키리에의 뒤를 보자 나타니엘이 무서울 정도의 침묵을 지키며 키리에를 응시하고 있었다.

“……들어가요, 아가씨. 안네마리가 목욕물을 준비할게요.”

안네마리가 나타니엘을 노려보며 키리에를 이끌었다.

뷰캐넌 저택의 복도를 지나며 키리에는 천천히 살아났다. 안색이 돌아오고 자세는 근엄해졌으며 내리깐 눈은 오연했다. 안네마리의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안네마리가 아가씨를 열심히 찾았는데, 발견할 수가 없었어요.”

안네마리가 다시 그들을 뒤따르는 나타니엘을 찌릿 노려본 뒤 말했다.

“그래서, 아가씨 명령을 최우선으로 했어요. 안네마리가 마차도 지켰고요, 꽝꽝 얼린 콧수염 아저씨와 미친 아저씨를 지켰어요!”

“잘했어. 고마워, 안네마리. 왕세자빈 저하는?”

안네마리가 얼굴을 흐렸다.

“마법사들이 그쪽으로는 공격하지 않아서…….”

“그래……. 역시 공모했구나.”

배신감이라곤 전혀 없는 얼굴이었다.

나타니엘은 키리에와 안네마리가 대화하는 동안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 몇 분 뒤, 안네마리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지금 나타니엘 님이 저택에 보호 마법을 거셨어요.”

키리에는 무표정으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안네마리가 어색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면 저택에서는 마음대로 돌아다니셔도 돼요.”

“국왕이 어떻게 된 건지 아니?”

“그 얘기를 드리려고 했어요. 숲에서 만난 마법 병단의 마법도 그렇고, 지금 왕궁에 걸린 마법도…….”

안네마리가 불안한 눈으로 창밖을 흘낏 보았다. 때마침 욕실이었다. 안네마리는 키리에가 옷을 벗는 것을 도우며 작게 속삭였다.

“아주 오래되었고, 뛰어나고, 독창적이고, 천재적인 술식이에요.”

“발라브리가의 마법이?”

“네.”

안네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키리에는 더운물이 채워진 욕조 안으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갔다.

“인간이 쓰는 마법은 원래 용이 만들었어요. 그런데 지금 왕궁을 수호하는 마법은 아주 독자적인 방식이에요. 안네마리는 해석할 수도 없어요.”

“네가 못 할 정도면 발라브리가가 대마법사가 맞긴 맞나 보네.”

오랜만에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키리에가 머리카락을 넘긴 순간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키리에는 잠시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고 물속 깊이 몸을 웅크렸다. 괜찮아. 괜찮아. 그녀가 중얼거렸다. 지켜보던 안네마리는 주먹을 쥐었다.

“들어와.”

키리에가 깊은숨과 함께 차가운 얼굴을 되찾았다.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욕실 문을 열고 리모가 들어왔다. 과거 안네마리가 앓았을 때 키리에를 모신 시녀였다.

“아가씨. 귀성을 축하드립니다.”

“리모. 오랜만이지? 잘 지냈니?”

키리에가 다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리모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께서 부르십니다…….”

키리에는 가만히 어린 소녀를 바라보았다. 움츠러든 어깨와 후들거리는 다리. 쉬이 짐작이 갔다.

도망쳤던 키리에 뷰캐넌이 돌아왔다. 전설경 나타니엘을 ‘뒤에’ 이끌고. 그녀를 꼭두각시로 만드는 데에 동참했을 사람들, 특히 권력이 없는 자들이 긴장할 차례였다.

안절부절못하며 갑자기 하늘이 하얗고 구름이 검다는 말을 늘어놓는 안네마리를 바라본 키리에가 쓴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가 보렴.”

키리에가 고개를 돌리며 손을 내저었다. 리모는 허리를 꾸벅 숙이더니 한달음에 욕실을 떠났다.

키리에는 머리를 욕조 가장자리에 기댔다. 욕실 한구석에서 아론이 물끄러미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

환복을 마친 키리에는 바로 세자르의 서재로 향했다. 그녀의 손이 손잡이를 잡았을 때, 목소리가 들렸다.

[야심 하나만큼은 하늘에 닿겠구나.]

언제 어디서 들어도 다른 누군가로 오해할 수 없는 나타니엘의 목소리였다.

“그리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대적으로 더 안쪽에 있는 것 같은 세자르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키리에는 잠시 복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조심스레 방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그럼 제 짐작이 맞다고 오해해도 되겠습니까?”

[글쎄…….]

“이제 한배를 탄 셈 아닙니까. 속 시원히 말씀해 주셔도 될 텐데.”

한배. 단어 하나가 키리에의 신경을 긁었다.

“저는 얼마든지 각하의 손발이 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미 한 번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각하의 연극을 방해한 건 제가 아니라 제 전처입니다.”

오랜만에 듣는 세자르의 목소리는 드물게 격앙되어 있었다. 나타니엘은 심드렁했다.

[제냐 하트우드는?]

“곧 올드렐름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세자르는 자신을 놔두고 다른 이름을 꺼내는 게 못마땅한 듯했으나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가 자세를 고쳐 앉는가 싶더니 좀 더 은밀하게 말했다.

“역시 저번처럼 키리에를…….”

[뷰캐넌.]

나타니엘이 냉정하게 세자르의 말을 잘랐다.

[이만 가 보지.]

곧바로 문이 열리고 나타니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문 앞의 키리에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비켜서지도 않았다.

[키리에.]

그가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우아한 동작으로 서재의 문을 닫았다. 안쪽에 들려주고 싶지 않다는 듯이.

[몸은?]

정말 묻고 싶은 건 안부가 아니었을 것이다. 키리에는 미소 지으려 했다. 과거는 과거. 지나간 것은 의미가 없다. 없어야만 한다.

“괜찮…….”

[그 순진함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귀를 장악하는 환청에 키리에가 대답을 멈추고 창백하게 질렸다.

[키리에?]

나타니엘이 수심에 잠긴 아름다운 얼굴로 손을 뻗었다. 몸을 받쳐 줄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키리에는 자신을 향해 뻗어져 나오는 손을 보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본능이 죽어 가는 초식 동물처럼 중얼거렸다.

“싫어…….”

나타니엘의 얼굴이 굳었다. 키리에의 귓가에는 계속 낮고 잔인한 말이 재생되었다.

[그러니까 사실 난 그냥 네가 우는 소리를 듣고 싶었을 뿐이야.]

그녀가 고개를 거칠게 휘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순식간에 식은땀에 젖어 헐떡대던 그녀는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몸을 바로 세웠다. 눈앞의 나타니엘은 손을 내밀다 멈춘 상태로 굳어 있었다. 수려한 눈매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지금은 보고 싶지 않아. 아니, 보여 주고 싶지 않아.’

키리에가 입술을 깨물고서 나타니엘을 지나쳐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왔느냐.”

창가에 서 있던 세자르가 말을 걸었다. 사지가 녹진하게 지쳐 버린 키리에가 흠칫한 뒤, 간신히 표정을 다잡았다.

“공대하세요, 공작.”

세자르 뷰캐넌이 피식 웃었다.

“그리하지.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겠지만.”

키리에가 차갑고 싸늘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공은 늘 이 자리에선 말이 많아지는군요. 책 대신 나이라도 먹나 봅니다.”

“내 딸이 영 나이 먹을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내가 대신 먹는 게지. 앉으시오.”

키리에가 눈을 내리깔고 아마 나타니엘이 앉아 있었을 의자를 내려다보았다.

“그것도 뷰캐넌의 것이라고 거절하시겠소?”

키리에는 세자르의 은근한 비아냥을 무시하며 자리에 앉았다. 세자르는 맞은편에 앉아, 궐련 갑을 꺼냈다.

“결국 잡혔군.”

그가 궐련에 불을 댕기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하기로 했소? 전설경과 말이오. 그에게 맨 고삐는 충분히 튼튼한지?”

“망상이 과하군요. 설령 그와 무슨 일이 있었든 공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세자르 뷰캐넌이 눈을 가늘게 떴다. 회색 연기 너머로 만족을 모르는 이리 같은 눈이 탁하게 빛났다.

“보시오, 키리에 뷰캐넌 양. 밖에서 그런 말이 통할 것 같나? 그대는 뷰캐넌 공작가의 사람이오. 전설경에게 청탁하고 싶어 하는 자들 모두가 내 저택의 입구로 들어오지.”

“무슨 자랑이라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지 모르겠군요. 내가 돌아왔으니 그대가 내 이름으로 벌인 일은 모두 원래대로 돌아갈 겁니다.”

“그대가 뭘 생각하고 실행하든 그대가 내 핏줄이고, 이름 뒤에 뷰캐넌의 성이 붙는다는 건 변하지 않소.”

세자르가 준수한 얼굴로 이루 말할 수 없이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지.”

“말이 긴 걸 보니 원하는 게 있군요.”

“있지.”

세자르는 깊게 궐련을 빤 뒤, 몽롱한 얼굴로 연기를 길게 뱉어냈다.

“뷰캐넌의 후계자가 되시오.”

눈을 따갑게 하는 매캐한 연기에도 키리에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그레이 뷰캐넌이 후계자 자리를 내놓았다는 게 사실이군요.”

세자르가 인상을 썼다. 그는 서랍 안에서 나이프를 꺼내 궐련 끝을 잘랐다.

“마차 사고라는군. 사람 구실도 못하게 되어 버렸어…….”

그의 말에는 불구가 된 자식을 향한 안타까움이 없었다. 사람을 체스 말로 보는 권력자의 실망감만이 보였다. 키리에의 시선이 서재 한쪽에 놓은 체스판으로 향했다.

“정말 사고입니까?”

“붙여둔 하인의 증언이니 확실하겠지.”

키리에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지나치게 타이밍이 좋았다. 나타니엘이 의심스러웠지만, 그의 살인은 잔인하고 화려하다. 이런 조용한 방식은 어울리지 않았다.

“후계자가 되시오. 내가 죽으면 뷰캐넌 공작가는 그대 것이 되는 거요. 그전까지는 뭐, 내 것이지만.”

세자르는 남은 궐련을 다시 갑에 넣으며 말했다.

“나는 그대, 특히 전설경의 이름을 열심히 이용할 테지만, 그게 싫어서 떠난다고 해도 내가 그러리란 사실은 변하지 않지. 그러니 그게 싫다면, 옆에서 열심히 노력해 보시오.”

“결국 살아 있는 내내 자기 뜻대로 하겠다는 말을 돌려 말하는 셈이군. 내가 그걸 가만둘 것 같습니까?”

“안 두면? 뷰캐넌이 내 대에 놀라울 정도로 부흥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소. 미안한 말이지만 내 인지도는 규방 처녀가 상대할 수 있을 만큼 녹록지 않소.”

분하지만 키리에는 그 말을 인정했다. 세자르 뷰캐넌은 자기 잇속을 위해서라면 하루아침에 얼굴을 바꿀 사람이었지만, 사람들은 그걸 알고서도 그를 좇았다. 그는 늘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든다.

“수도의 갈등 상황은 아주 첨예하지. 국왕은 갑자기 미쳤고, 동시에 전설경의 인형극에 동참한 사람들을 매우 아니꼽게 보고 있소. 또한 사람들은 어느 쪽에 붙는 게 이득일지를 재고 있지.”

세자르가 금으로 만든 궐련 갑을 살피는 척하며 말했다.

“그렇다고 전설경이나 호국경이 그들을 돌볼 사람인가? 아니지. 지금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건 뷰캐넌의 이름이오.”

“그건 내 이름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세자르가 낮은 조소를 흘렸다.

“불가능해.”

그는 키리에가 충분히 기분 나빠할 만큼 오랫동안 쿡쿡거리다, 서랍을 열어 궐련 갑을 집어넣었다.

“그대가? 무슨 힘으로? 국왕군이 사람들을 죽이려 들기라도 하면 사람들을 피신시킬 수나 있소? 그들을 지킬 사병이라도 있소?”

“내 영지에-.”

“사람 말이오, 사람. 그들을 새 영지로 인도하고, 먹을 것을 주고, 일자리를 찾아 주고, 이웃 영지에게 보급품을 전달받고, 왕가와 그들 사이에서 말을 전달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국왕군과 대치할 사람! 돈으로는 그걸 해결할 수 없소. 배신자만 늘릴 뿐이지. 뷰캐넌의 이름을 빼면 그게 그대에게 있소? 그대에겐 아무 기반도 없소.”

키리에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정확히 그 부분이 부족해서 프로노이아를 떠난 거였다.

세자르는 싱글싱글 웃었다. 키리에가 대답하지 못하리란 것을 아는 눈치였다.

“싸우려면 전장에 서 있어야 하는 법이오. 전장에서 도망친 자는 결과에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거든. 그러니 넌 뷰캐넌에 있어야 해.”

그는 승기를 확신하는 얼굴로 서랍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 키리에에게 던졌다. 키리에가 무심결에 그것을 받아 냈다.

“가주와 후계자만 가질 수 있는 서재의 열쇠다. 나중에 혼자 들어와 보도록. 후계자 교육은 곧 시작하지.”

세자르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쉬며 손을 저었다. 나가 보라는 의미였다.

키리에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그리고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망설임이 섞인 키리에의 말에 세자르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키리에는 창백한 얼굴로 말을 짜내듯이 입을 열었다.

“전설경과는, 무슨, 이야기를…….”

세자르는 그런 키리에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눈을 반달처럼 휘어 웃었다. 다정해 보이지만 묘하게 비웃음처럼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것도 연극 같으냐?”

키리에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유성처럼 터져 나갔다. 조이, 조세피나, 페데리카, 늙은 부랑자, 백합 광장, 자신을 바라보던 수백의 시선……. 해결하지 못한 채, 그저 눈앞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묻어 두었던 감정이 바닥에서 떠올라 부유하기 시작했다.

“욱.”

키리에가 입을 가리며 허리를 굽혔다.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럴 시간도 없었잖아. 아니야.’

이성의 반박은 무의식에 각인된 두려움 앞에서 너무나도 쉽게 휘발되었다. 크게 뜬 눈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그런 키리에를 내려다보며 세자르는 내심 혀를 찼다. 그의 딸은 그깟 꼭두각시놀음 때문에 트라우마까지 생긴 모양이었다.

‘한심하긴.’

전설경과는 왕가의 동향과 정세, 그리고 키리에의 신변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돌아온 그는 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정말로 키리에가 고삐를 채우긴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레이가 그 모양이 되었으니 키리에는 좀 더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리고 그걸 교육해 줄 사람은 아무래도 아비인 자신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세자르는 ‘이대로 더 밀어 버리면 어떻게 될까?’하는 호기심을 살짝 숨긴 채, 키리에를 향해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2막이구나, 키리에.”

키리에는 다시 악몽을 꾸기 시작했고, 혼잣말이 늘었다. 그 외의 일들은 평탄하게 흘러갔다.

버몬트 후작의 시체는 후작가로 돌아갔다. 또한 키리에가 왕가에 분쟁 조정을 요청했으나, 국왕은 응답하지 않았다.

버몬트 후작가는 후작의 시체를 보고는 당장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후작이 자결했음이 드러나자 곧바로 내분으로 돌입했다. 한두 세기에 한 번 정도 있는 버몬트 후작가의 가주 쟁탈전은 몹시 치열하기로 이름 높다. 나타니엘마저 ‘보기 드문 구경거리’라고 평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그리고, 루비니아 오레윈브리지가 뷰캐넌 공작가를 방문했다.

“여기 머무를 거예요. 한동안.”

그녀는 창을 등진 응접실 소파에 앉아, 어딘지 절박하게 말했다.

거절하려던 키리에가 멈칫한 뒤, 차를 내오던 안네마리에게 턱짓했다.

“안네마리. 잠깐 나가 있으렴.”

“네!”

안네마리는 차 도구 일습을 내려놓은 뒤 방을 나섰다.

키리에는 조용히 시선만 옮겨 옆자리를 살폈다. 나타니엘이 일인용 소파에 앉아 지팡이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무료해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키리에는 그를 무시하고 루비니아에게 물었다.

“저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루비니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왈칵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려는 사람 같았다.

“저하.”

키리에가 재차 말했다. 가까스로 표정을 갈무리한 루비니아가 고개를 저었다.

“바보예요?”

그 질문으로 키리에는 마법 병단의 습격에 그녀가 관련되어 있음을 알았다. 키리에가 상냥히 미소를 지었다.

“세상엔 똑똑한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바보 하나 정도는 있어도 괜찮겠죠.”

“…….”

루비니아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이내 쓴웃음을 머금었다.

“……방이나 내줘요.”

힘없는 목소리에 비해 표정이 굳셌다. 물끄러미 루비니아를 응시하던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손이 야무진 시녀를…….”

“아뇨. 왕가의 하인이 붙을 거니까.”

“그런가요.”

“잘 부탁해요.”

루비니아가 쌀쌀맞게 말했다. 그러고는 금방 소태 씹은 얼굴을 했다. 그녀가 옆에 앉은 전설경을 흘끔거렸다.

“……당신은요?”

“네?”

“……왜 또 꼴이 그 모양이에요? 프로노이아에선 좀 살만해 보였는데.”

그 순간 엷은 미소를 띠고 있던 키리에의 얼굴이 싹 굳었다. 루비니아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키리에는 작동이 멈춘 오르골 인형처럼 가만히 루비니아를 응시했다.

한참 뒤에야 루비니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루비니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옛날 일이…….”

“저하.”

키리에가 루비니아의 말을 잘랐다.

“방을 안내해드릴게요.”

인형이 말하는 것 같은 단조로운 안내는, 그늘지고 초췌한 키리에의 얼굴과 몹시도 잘 어울렸다. 루비니아의 입술이 오므라들었다.

사교계는 키리에 뷰캐넌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도 왕가가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일부는 손바닥 뒤집듯 왕가에 붙어 키리에 뷰캐넌을 욕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예의 연극 때문에 키리에 뷰캐넌을 욕하는 이들이 많았다.

놀랍게도 그들은 전설경을 욕하지는 않았다. 루비니아가 나타니엘을 힐끔거렸다.

[할 말이라도?]

상념에 빠진 것 같던 나타니엘이 그것을 눈치채고 나른하게 물었다.

“아, 아뇨…….”

루비니아가 어설프게 시선을 피했다. 뭔가를 더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의 키리에는 께름칙할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그냥 안부 인사였어요.”

“감사합니다.”

루비니아는 잠시 머뭇거린 뒤, 보란 듯이 고개를 홱 돌려 하인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키리에가 배웅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섰다.

정면만 보며 성큼성큼 걷던 루비니아는, 못내 키리에가 마음에 걸려 복도 끝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키리에는 복도 한가운데에 자라난 가문비나무처럼 꼿꼿했다. 그리고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누구에게 말하는 거야?’

루비니아는 그 모습이 조금 소름 끼친다고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뒤를 돌았다.

***

루비니아를 마중하고 돌아온 키리에를 보며 나타니엘은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키리에.]

“네, 나타니엘.”

키리에가 물 흐르듯이 답했다. 엷은 미소가 떠올라 있는 키리에의 두 뺨에는 오목한 보조개가 파여, 그게 아주 진심이 담긴 미소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나타니엘은 잠시 멈칫했다. 그는 이제 키리에가 짓는 모든 미소에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오레윈브리지가 보낸 간자라는 걸 모르진 않을 테고. 무슨 생각이니?]

“돌려보내면 위험하잖아요.”

키리에가 봄꽃처럼 사뿐하게 소파에 앉았다. 하늘하늘한 드레스 자락이 백조의 날개처럼 펼쳐졌다 가라앉았다. 그 모습에 나타니엘의 기분이 좀 더 부드러워졌다. 그녀에게는 역시 고가품이 잘 어울렸다.

[저 아이가 소중하니?]

“당신이 그런 말을 하면 무서우니까 대답하지 않을래요.”

[나를 아주 몹쓸 것 취급하는구나.]

키리에가 차를 타기 시작했다. 나타니엘은 그녀의 손끝이 그리는 정갈한 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근래 키리에는 기이할 정도로 차분하고 온화했다. 그녀에 대해 떠들던 사람들, 뷰캐넌 공작과 나눈 이야기.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사사건건 그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무슨 꿍꿍이인지 알아내려고 하던 전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찻잔에 찻물이 차오르고, 하얀 김이 솜사탕처럼 부풀어 올랐을 때, 나타니엘이 말했다.

[묻고 싶은 건 없나?]

갑작스러운 말에도 찻주전자를 내려놓는 키리에의 동작은 물 흐르듯 끊김이 없었다.

“없어요.”

나타니엘은 키리에의 내면에서 깊어지고 있는 어둠은 모른 척해 주었다. 그는 누군가의 마음을 두 손 위에 올린 것이 처음이라, 그 귀퉁이에 묻은 검은 얼룩을 닦아 내야 할지, 가만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그러므로 이런 거였다.

[찔려 줄 수도 있어.]

“어머.”

키리에가 짐짓 놀란 양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칼이 드나요?”

[내 검을 빌려줄게.]

“찌르면 죽나요?”

[안타깝게도 그러진 않아.]

“피는 빨간색?”

나타니엘이 실소를 흘렸다.

[그럼 수은이라도 흐를까.]

“금이라도 흐르려나 생각했어요.”

키리에가 마주 웃었다. 보기에 좋았다. 부드럽고 다정했다. 해소하지 못한 분노는 있을 테지만, 그는 그야말로 언제든 찔려 줄 생각이 있었다.

“괜찮아요. 버티는 건 잘하거든요.”

옅은 체념이 섞인 말에 나타니엘은 약간 언짢음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을 모른 체해 주었다. 그는 이제 키리에를 믿고 싶었기 때문에, 키리에의 그 말도 믿었다.

***

며칠이 흘러도 왕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루비니아 오레윈브리지는 식사 때를 제외하곤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키리에는 사교계에서 자신과 나타니엘을 두고 여러 말이 오가고 있는 것을 알았으나, 무시했다.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키리에는 세자르가 한 말을 바로 믿을 정도의 멍청이는 아니었다. 나타니엘은 그녀 몰래 뭔가를 계획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그건 세자르의 만용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허세라고 위력이 없는 건 아니어서, 그녀는 자신을 지켜보는 아론의 모습이 더 또렷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미안해, 아론.”

누나, 왜 죽지 않았어요?

“죽으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니까…….”

누나가 뭔가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아요?

“나타니엘은 조금 변했어. 이제 왕가가 어떻게 나올지만 대비하면 돼.”

누나 때문에 또 누군가 죽겠네요.

“죽게 두지 않을게.”

이것도 다 연극 같진 않고요?

키리에의 호흡이 떨렸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고 답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어…….”

연극이면 차라리 낫다. 자신만 괴로울 뿐 아무도 죽지 않을 테니까. 더는 사람들이 죽는 걸 두고 보고 싶지 않았다.

국왕과 전설경의 대립은 이미 키리에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왕은 언제고 갈등을 빚을 것이고, 나타니엘은 그에 응하지 않겠지만, 키리에에게 일이 터지는 순간 지금의 온화한 태도를 뒤집을 것이다.

키리에는 그때를 대비해 사람들을 자신의 영토로 이주시키려 했다. 귀족들은 코웃음 쳤지만, 큰 이주 지원금까지 얹어 주자 시민 일부에게서는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하면 된다. 지켜야만 했다. 아론과 멜로니 앞에 당당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위한 눈물은 모든 게 끝난 뒤, 딱 한 방울로도 좋을 것이다.

***

며칠 뒤, 새로 초빙된 튜터가 키리에의 방을 찾았다. 그 잘난 후계자 교육을 위해서였다.

“안녕하세요, 키리에 뷰캐넌 님. 앞으로 키리에 님을 교육하게 된 윌리엄 아치볼드입니다.”

윌리엄은 제집처럼 키리에의 방에 앉아 있는 나타니엘을 흘낏 본 뒤, 몹시 감동한 얼굴을 했다.

키리에는 그의 가문을 듣고 약간 놀랐으나 내색 없이 손을 내밀었다.

“아치볼드 백작가에서 오실 줄은 미처 몰랐네요. 키리에 뷰캐넌이라 합니다.”

“저도 몰랐습니다, 하하하.”

윌리엄이 키리에의 손등에 입 맞추며 윙크했지만, 키리에는 미소 한 톨 보이지 않았다.

아치볼드 백작가는 대표적인 친 국왕파다.

‘속셈이라도 있나? 어떻게 아버지가 아치볼드 백작가의 사람을 데려왔지?’

그때 윌리엄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타니엘에게 인사했다.

“윌리엄 아치볼드가 전설경을 뵙습니다!”

윌리엄의 얼굴은 소년 같은 미열로 붉었다.

‘가문의 이단아였군.’

키리에가 빠르게 수긍했다. 세 영웅의 건국 신화가 이 사회에 남긴 가장 큰 악이 있다면, 그건 영웅병 환자를 너무 많이 만들었다는 점이다.

윌리엄이 가슴이 벅차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전설경 앞에 무릎 꿇었다.

“만나 뵙게 되니 알겠습니다. 저는 마치 경을 섬기기 위해 이날 이때껏 살아온 듯합니다!”

하지만 윌리엄을 내려다보는 나타니엘의 입가에는 차디찬 미소뿐이었다. 그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몇 살이니?]

“스물넷입니다!”

[아.]

나와는 ……살쯤 차이가 나는구나, 하고 나타니엘이 중얼거렸다.

“방금 그거 숫자 맞아요?”

키리에가 귀를 의심하며 묻자, 나타니엘이 언짢은 듯이 지팡이를 꺼냈다.

[네 아버지는 그야말로 승냥이구나.]

“제 아버지에 대한 평가는 윌리엄 경의 인사를 받아 준 다음에 하는 게 어떨까요?”

[어차피 안 볼 사인데.]

나타니엘이 심드렁히 말했다.

[넌 안 돼.]

“예?”

윌리엄이 고개를 쳐들었다가, 아마 나타니엘의 미모 때문에 다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이유를?”

[미덥지가 않아.]

“각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증명할 수 있습니다!”

[튜터란 자가 처음 만난 제자를 살피긴커녕 권력자의 광주리를 탐하기에 바쁘니, 어디를 미쁘다 해야 할까? 아니면 네가 가르칠 과목이 혹시 아양과 아첨인가?]

나타니엘이 신랄하게 키득거리며 지팡이로 윌리엄의 머리를 눌렀다. 그 지팡이가 가볍고 산들산들해 보이지만 중력만큼 무거운 줄을 안다. 윌리엄은 바닥을 향해 외쳐야만 했다.

“그, 그게 아니라! 뷰, 뷰캐넌 양의 일이니까…… 당연히 전설경께서 관리하실 거라고……!”

키리에의 얼굴이 무표정으로 변했다. 빠르게 그것을 눈치챈 나타니엘이 장난을 그만두고 지팡이 끝으로 윌리엄의 턱을 들어 올렸다.

[입이 방정이구나. 앞으로는 내 눈에 띄지 않는 게 좋겠어.]

순식간에 터진 위압감에 윌리엄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변을 지렸다.

“아……! 으, 으으…….”

키리에가 이마를 짚었고, 나타니엘은 눈빛으로 이미 윌리엄을 도살했다. 그가 살찬 어조로 키리에에게 말했다.

[이 정도면 죽여도 정당방위야.]

“……실례할 수도 있죠.”

키리에는 착잡한 얼굴이었다. 나타니엘이 혀를 찼다.

[뷰캐넌에게 전해. 짜증 나게 굴지 말라고.]

그는 곧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키리에는 하인을 시켜 윌리엄을 손님용 객실로 모시라 명한 뒤, 그가 새 바지를 입고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윌리엄은 한참 뒤 수치심에 빠져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저, 뷰캐넌 양…….”

“지금은 괜찮으세요?”

“아, 물론 그렇습니다만, 저기, 이건 비밀로…….”

키리에가 생긋 미소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비밀로 해드릴게요. 정력이 약하면 괄약근에 힘이 잘 안 들어간다고 하더군요.”

윌리엄이 억울한 얼굴을 했다.

“아, 아니, 그, 그게 아닌데!”

“가실까요? 에스코트를 부탁합니다.”

“하, 하아, 예…….”

윌리엄이 풀이 죽은 채 키리에와 함께 세자르의 집무실로 향했다.

가는 내내 윌리엄의 머릿속에는 뷰캐넌 공작에게 뭐라고 말해야 계속 전설경을 모시는 것을 허락해 줄지에 대한 고민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작은 중얼거림이 윌리엄을 상념에서 깨웠다.

“미안해. 알고 있어. 미안해.”

“예?”

윌리엄이 퍼뜩 놀라 팔짱을 끼고 있는 키리에 뷰캐넌을 내려다보았다. 복도 어딘가를 보며 멈춰 서 있던 키리에는 윌리엄의 반문에 탁한 보라색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도무지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은 무기질적인 눈빛이었다.

윌리엄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이내 키리에의 얼굴에서 그런 기색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왜 그러시나요, 윌리엄 경?”

“예? 아니, 방금…….”

키리에 뷰캐넌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머뭇거리던 윌리엄이 멋쩍게 어깨를 으쓱했다.

“……바람 소리였나 봅니다.”

“봄바람은 오랜만이네요.”

키리에가 나긋하게 답했다. 그녀의 온화하고 정중한 태도에 윌리엄은 가볍게 그 일을 기억 속에서 털어 냈다.

윌리엄은 키리에의 튜터가 되지 못했다. 뷰캐넌 공작은 열성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호소하는 윌리엄의 말을 가로막고 한마디 했다.

“그래서 전설경은?”

“그, 짜증 나게 하지 말라고…….”

윌리엄이 조금 난처한 얼굴로 날것 그대로의 내용을 전했다. 세자르가 심술궂게 웃었다.

“나가 보게.”

윌리엄 아치볼드는 그날로 해고되었다. 다음 날, 기다렸다는 듯이 등장한 가정 교사는 바르비티 백작가 출신의 거버니스였다. 나타니엘은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둄2 절갠 교환재공타싸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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