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낙원에서 나락까지 (19/33)

19. 낙원에서 나락까지

다음 날, 나타니엘은 교묘하게 키리에를 인적이 있는 곳으로 유도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구는, 물론 실제로 아무 일도 없긴 했지만, 어쨌든 키리에의 태연함이 꽤 못마땅했던 것이다. 물론 산에 키리에가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도 한몫했다.

유도했다고는 하지만 키리에가 사람 사는 집을 발견한 것은 거의 저녁이었다. 키리에가 지친 몸을 이끌고 통나무집의 문을 두드렸다.

“계세요?”

순간, 문이 확 열렸다.

“누구십니까?”

집에서 나온 것은 덩치가 크고 턱수염이 무성한 중년이었다. 손에는 도끼가 들려 있었다. 그는 우렁차게 외친 것치고는 눈앞에 있는 것이 여자라 당황한 듯했다. 그의 시선이 뒤에 있는 나타니엘에 닿았다가, 다시 키리에에게로 향했다.

“여행자인데, 신세를 질 수 있을까요?”

키리에가 정중하게 말했다. 남자는 키리에와 나타니엘을 심각한 얼굴로 번갈아 보더니, 이내 미소를 띄웠다.

“산 사람은 여행자를 거절하지 않죠. 그게 나중에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아니까. 들어오세요.”

그의 말을 들은 나타니엘은 죽이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키리에는 제삼자가 연루되는 것을 싫어하니 다른 사람 앞에서라면 절대 자신을 무시하지는 못하리란 계산이었다.

거실 겸 식당에는 10명은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통나무 테이블이 있었다. 때마침 저녁을 먹는 중이었는지 테이블에는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하지만 앉아 있는 건 작은 여자아이 한 명뿐이었다.

“되는대로 앉으십시오. 식기를 더 내올 테니.”

“고마워, 아니, 고마워요.”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딱 봐도 귀하신 분인 것 같은데.”

키리에가 어색하게 웃었다.

남자는 주방을 뒤져 키리에와 나타니엘 앞에 나무로 된 식기와 컵을 놓아주었다.

“제 이름은 번드 카프입니다. 아무렇게나 부르십시오. 여긴 제 딸인 이브입니다.”

“리에라고 해.”

당연히 가명임을 눈치챘을 테지만, 번드는 그저 미소 지었다.

“옆의 신사분도 성함이 리에 되십니까?”

키리에가 입을 작게 벌렸다. 그야 나타니엘이 스스로 자기소개할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 그녀가 뭐라도 말해야 할 상황이었다.

보라색 눈이 한밤중의 손님을 아무 이유 없이 집에 들인 사람 좋은 중년과, 아비를 닮아 순수한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이브를 담았다.

키리에는 그리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착잡한 낯으로 너무나도 순순히, 절대 부를 것 같지 않던 이름을 꺼냈다.

“……아니. 그는 나타니엘이라고 해.”

그의 계산이 맞았다. 나타니엘이 눈을 내리깔고 미소를 숨겼다.

“그러시군요. 실례지만 성함이 참 잘 어울리십니다. 마치 천사가 내려온 것 같습니다.”

번드는 그렇게 감탄을 표한 뒤, 다시 키리에에게 물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무슨 사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불편하시다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괜찮지만, 정말로 나쁜 뜻으로 묻는 것은 아닙니다.”

나타니엘의 눈에 키리에가 망설이는 것이 보였다.

키리에는 자신이 형식을 중요시하는 것을 안다. 사람을 죽이고 싶어도 식탁 위에서는 자제하고, 인사를 받으면 어쨌든 맞인사를 돌려주는 것. 손님이라면 손님답게 구는 것. 그러니 지금 어떻게든 그 ‘형식’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을 터였다.

나타니엘은 키리에의 난처함을 즐거워하며 잔을 든 채 그녀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이윽고 키리에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남편이야.”

나타니엘의 손에서 잔이 미끄러졌다.

“저런! 괜찮으십니까?”

잔이 떨어진 소리에 키리에도, 번드도, 이브도 놀라 그쪽을 바라보았다. 번드가 일어나 수건을 가져올 때까지 내내 잔을 떨어뜨린 자세로 멈춰 있던 나타니엘은 곧 손을 추스르며 우아하게 미소지었다.

[실례. 아직 익숙하지 않은 호칭이라.]

“그러십니까? 앞으로는 자주 불리실 텐데, 벌써부터 이러셔야! 하하.”

번드는 정말 순수하고 선량한 남자였다. 저 말도 안 되는 말을 믿어 주는 것을 보면.

키리에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부러 처연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실은 우리는 열렬히 서로를 사모하고 있으나, 가문의 반대로 사랑의 도피를 택했네.”

“세상에! 용감하시군요!”

번드가 입에 주먹을 물고 감탄했다.

“꺄아!”

이브는 추임새를 던졌다.

[그래, 사랑의 도피지.]

나타니엘도 어이없다는 듯이, 그러나 몹시 흥미롭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키리에는 나타니엘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몹시 꺼림칙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능숙하게 슬픔을 연기했다.

“원래는 마차를 타고 여행 중이었는데, 가문의 추적자들이 근처까지 와 있기에 도망치다 그만 길을 잃고야 말았어.”

“어쩐지 보통 사연이 있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

번드가 눈물을 글썽였다.

“제가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듣던 중 고마운 소리다. 키리에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청컨대 하루만 우리를 지내게 해 주게. 그리고 누군가 찾아와도 우리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해 줘.”

번드의 고개가 힘차게 오르내렸다.

“그 정도야 얼마든지요! 이 근방은 사람이 잘 다니지 않으니, 누굴 찾으러 온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겁니다.”

키리에는 미소로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식사를 마친 뒤, 잠시 망설이던 키리에는 식탁 밑으로 나타니엘의 손을 쥐었다. 길고 섬세한 손이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키리에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 내 남편……이 줄 게 있다고 하는군.”

나타니엘과 키리에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일순 둘 사이에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는 대화가 오갔다.

내놔 봐요.

뭘?

돈 될 만한 것.

나타니엘이 헛웃음을 치면서도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보석 몇 개를 떨어뜨렸다. 키리에는 당장 손을 떼고 그것을 번드에게 건넸다.

“약소하지만, 우리의 성의야.”

“아뇨! 이런 건 받을 수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이걸 환금할 여유가 없어. 정 마음이 불편하면, 혹시 나중에 다른 조난자가 생겼을 때 그들의 편의를 봐주겠어?”

“그런 건 부탁하지 않아도 하고 있습니다. 남을 돕고 대가를 바라다니요!”

한참을 거절하던 번드는 키리에가 너무 피곤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라고 말하자 정말 내키지 않는 얼굴로 보석들을 받았다.

그는 이브를 자신의 방에 재운 뒤, 키리에와 나타니엘을 이브의 방으로 안내했다.

“방은 하나로 괜찮으시죠?”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산에서 노숙하는 것만 아니라면 어디든 감사할 일이다.

방과 집 구조를 알려 준 번드는 바로 나가지 않고 잠시 우물쭈물했다.

“저어, 그리고 노파심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말해 봐.”

번드는 키리에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한 채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그, 이 집이 그렇게 방음이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응?”

“애가 있기도 하고…….”

“해서?”

“그래서…….”

번드가 눈을 질끈 감고 속닥거렸다.

“밤에 하는 대화는……. 조금 소리를 신경 써주셨으면 합니다……!”

“…….”

내가 지금 뭘 들은 거람. 당황으로 입을 뻐끔거리는 키리에의 어깨를, 어느새 다가온 나타니엘이 뒤로 살짝 당겼다. 그는 근래 들어 가장 찬란하고 반짝거리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건 내가 조심해 보지.]

나타니엘은 그렇게 말하며 번드의 눈앞에서 문을 닫아 버렸다.

코앞에서 닫힌 문을 보며, 키리에가 뒤늦게 눈을 감았다. 오해했을 것이다. 분명 오해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달리 둘러댈 말도 없었다. 조심할게?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뭐라고 말해도 이상했다. 키리에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반면 나타니엘은 대수롭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가구의 높이가 낮은 방을 한번 빙 둘러 살피더니, 이브의 책상에 기대어 앉았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 사랑의 도피를 했더라?]

키리에가 침음을 흘렸다. 일단 둘러댔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뒷수습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가 뭔가 변명을 꺼내기도 전에 나타니엘이 선수 치듯 말했다.

[별수 없으니 여기서는 그런 것으로 하지.]

키리에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번드의 집에 방문한 이후로 묘하게 생기가 도는 나타니엘이 눈매를 휘며 농염하게 미소지었다.

[나는 죽이지 않고, 너는 네 입에 걸린 자물쇠를 갖다 버리고. 휴전이야. 이곳에서만.]

그의 그림자는 좀 더 짙어진 것 같았고, 어둠 속 푸른 눈에서는 갈증이 엿보였다. 보통 그 갈증을 제멋대로 채우던 것과 달리, 지금 그의 제안은 분명한 ‘양보’였다.

잠시 눈을 내리깐 키리에가, 다시 그를 응시하며 답했다.

“좋아요.”

그러자 나타니엘이 미소지었다.

[나도 좋군요, 여보.]

“…….”

키리에가 이마를 짚었다. 잊고 있었다. 그는 이런 성격이었다.

***

다음 날, 번드는 새벽 산에서 로브를 쓴 자들과 마주쳤다고 말했다. 그는 그 이야기를 하며 몹시 진지하고 걱정 어린 얼굴로 키리에와 나타니엘을 바라보았다.

“근방을 뒤지는 모양입니다. 여기에 더 계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키리에는 고맙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안네마리에겐 일이 생기거든 버몬트 후작의 시체와 그를 감시했던 자를 수도로 보내는 것을 우선하라 일러두었다. 일단 그들만 무사히 수도에 도착한다면, 키리에 자신은 어떻게든 알아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안네마리 쪽에서 아무런 수색도 하지 않고 있는 건 의아한 일이었다. 분명 상황이 마땅치 않은 모양이라고 키리에는 생각했다. 계속해서 나타나는 나뭇잎 나비를 나타니엘이 되돌려보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에 한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하릴없이 거실에 앉아, 키리에는 마법 병단이 멀리 떠나기를 기다렸다. 나타니엘 역시 그녀의 옆에서 초상화 속 인물처럼 근사하게 앉아 있을 뿐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브, 여기 장작 다섯 개가 있고, 거기서 두 개를 빼면 몇 개가 남지?”

“우웅……?”

키리에는 나무를 하고 돌아온 번드와 이브가 나란히 앉아 다정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갈색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이브는 계산이 어려운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숫자와 싸우는 것을 지켜보던 번드는 키리에의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차를 더 드릴까요? 민들레차가 전부지만요.”

수염 때문에 입매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반달처럼 접힌 눈은 가없이 곰살궂었다. 키리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그냥 보기 좋아서 그래.”

“아이가 있으면 세상이 달라지지요.”

번드가 따스한 눈으로 이브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키리에에게 시선을 주었다.

“두 분에겐 아이 계획이 있으십니까?”

키리에가 당황했고, 아무튼 장난이라면 언제든 자기 일처럼 구는 나타니엘이 능청스럽게 끼어들었다.

[아들 둘에 딸 둘.]

“하하, 그 정도의 대가족이면 정말 행복하겠습니다!”

키리에가 미쳤냐는 눈으로 나타니엘을 보았다. 나타니엘은 눈이 멀 정도로 화사하게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왜?]

그때, 나타니엘이 뭔가 떠오른 듯이 눈을 반짝거렸다.

[아. 우리 여…….]

“제발!”

[……행이 잘 끝나야 가능한 이야기지만 말이야.]

키리에가 눈을 사납게 치떴다. 저건 고의다. 그는 어떻게든 자신을 놀리고 싶은 거다.

그녀가 제발 입 다물고 있으라는 경고의 눈빛을 보냈지만, 나타니엘은 ‘세상에 이런 즐거운 일이 다 있다니’ 같은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여긴 정말 즐겁구나. 그렇지 않니?]

번드가 몹시 감동한 얼굴을 했기 때문에, 키리에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당신이 아주 기가 산 걸 보니 정말 즐거운가 봐요.”

[아무렴. 내 숙녀께서 친히 나와 사랑의 도피를 해 주셨는데 즐겁지 않을 리가.]

“어머. 도피니 뭐니 하는 단어는 아이 교육에 좋지 않을 것 같은데, 쓰지 않기로 할까요?”

[미래의 자녀 교육을 벌써 걱정하다니, 역시 내가 보는 눈이 있구나.]

키리에의 얼굴이 구겨졌다.

“세상에, 그렇게 끔……!”

그녀는 번드와 이브의 놀란 얼굴을 보고 하려던 말을 삼켰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웃었다.

“……찍하리만치 저를 칭찬해 주니 제가 너무 부끄럽네요. 이제 그만 해요.”

나타니엘이 파란 눈을 곱게 휘어 웃었다. 너무나도 찬란하게 반짝여서 천사가 강림한 것만 같은 미소였다.

[난 지금 이 상황만으로도 200년은 웃을 수 있을 것 같아.]

“웃으면서 남의 시간 단위 망가뜨리지 말아요.”

[나는 없던 결혼 계획도 생겼는데 시간 단위쯤이야.]

“불만이라면 좋은 방법이 있어요. 여기서 나가서, 각자 갈 길 가는 거죠.”

[결혼이 우습니?]

미치겠다. 키리에가 마른세수했다. 반면 나타니엘은 만개한 꽃처럼 활짝 웃으며, 필요 이상의 귀족적인 억양으로 시를 낭송하듯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얼마나 즐거운지 잘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니 좀 더 열심히 표현해야겠어. 보석으로 비를 뿌리고 황금의 강물에 에메랄드 배를 띄워서 그 위에서 식을 올릴까? 이러면 좀 느껴질 것 같니?]

“너무나 멋져요!”

번드가 새되게 외쳤다. 비유적 표현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오히려 함축에 가깝다.

결국 그녀는 이를 갈며 미소지었다.

“아뇨……. 지금도, 너무, 몹시, 매우, 충분하단 뜻이었어요.”

“감동적이에요!”

번드가 코 밑을 쓱 문질렀다.

“두 분은 정말 천생연분이시군요!”

“어디가?”

[너는 눈이 높구나. 자, 착한 아이에겐 선물을 줘야지.]

나타니엘은 바로 테이블 위에 보석을 산처럼 쌓아 번드를 당혹시켰다.

키리에는 과연 그와 휴전한 게 잘한 일인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보석을 예쁜 돌멩이 보듯 바라보며 입을 헤 벌린 이브와 눈이 마주치자, 그리고 그 이브가 쑥스러운 듯이 번드의 뒤로 숨자 저도 모르게 미소짓고야 말았다.

번드의 집은 속세와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듯했다. 나타니엘은 ‘사랑의 도피’라는 이름의 가장무도회에 참석한 사람처럼 굴었다. 몹시 재밌어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두 분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습니까?”

번드의 질문에 나타니엘이 꽃도 부끄러워 고개 숙일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첫눈에 넘어갔단다.]

“낭만적이군요!”

‘넘어오긴 넘어왔지. 창문을.’

키리에가 속으로 빈정거렸다.

사정을 모르는 번드는 그것이 매우 로맨틱한 이야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키리에를 보았기 때문에, 키리에는 약간의 죄책감마저 느꼈다.

나타니엘은 유례없이 온순했다. 그는 때때로 뭔가를 관찰하듯 키리에를 바라보긴 했으나 대체로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키리에가 다른 곳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면 항상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키리에는 그게 어색해 계속 시선을 피했다. 그가 언제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긴장되기도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히려 그게 나타니엘이었다. 이미 너무 멀리 왔을 뿐, 원래 나타니엘은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점잖은 사람이 맞았다.

늘 키리에의 옆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는 남자. 섬세한 이목구비에 단정한 예복, 품위 있는 자세와 언행.

번드의 집에서 그의 내리깐 눈은 여름의 바다처럼 맑은 파랑으로 빛났다.

“정말 아름다운 눈이네요.”

번드도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영부영 이틀의 시간이 더 흘렀다.

나타니엘은 시간 대부분을 키리에의 곁에서 보냈지만, 가끔 안네마리의 나뭇잎 나비가 날아들면 되돌려보내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가곤 했다.

하던 대로 혼란 마법을 걸어 되돌려보내고 문을 열려던 나타니엘의 귀에 번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망치길 원하시는 거라면 도와드리겠습니다.”

나타니엘이 멈칫했다. 번드가 몹시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모른 척하려고 했지만, 손목의 멍은 아무리 봐도 강하게 잡혔을 때 생기는 타박상이 아닙니까…….”

나타니엘이 문고리를 놓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건 확실히 그의 잘못이었다. 키리에는 자신에게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으나, 남에게라면 좀 다를지도 모른다. 그를 비난할 여유를 좀 주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나타니엘이 몸을 돌리려던 때였다.

“하지만 실수였는걸.”

문 너머에서 키리에가 조곤조곤 말했다. 나타니엘이 멈칫했다.

“고의는 아니었어. 그냥 너무 힘이 세서 그랬을 뿐이고, 다시 그러진 않을 거야.”

놀랍게도 솜사탕은 매우 정확하게 그를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번드 카프. 걱정은 고맙지만 괜찮아. 걱정할 만한 일은 없을 거야. 설령 정말 그가 힘으로 나를 제압하려 든다고 하더라도, 내가 가만히 있을 사람도 아니고.”

불안해하는 번드를 키리에가 차분하고 부드럽게 타일렀다. 나타니엘은 그녀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누군가를 설득하고자 할 때, 그녀의 얼굴은 더없이 아름답고 동시에 단호해진다.

잠시 말을 멈췄던 키리에가 이내 청량한 웃음소리를 냈다.

“게다가 그를 마주 때려 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나밖에 없는걸.”

나타니엘이 팔짱을 낀 채 저도 모르게 웃었다. 하기야 그는 키리에가 갑자기 그를 공격한대도 일단 찔리고 볼 것이다.

번드는 키리에의 의지가 확고함을 깨닫고는 이내 주제를 돌렸다.

“그럼 가문에서 두 분을 자유롭게 놔주면 뭘 하고 싶으세요?”

그러자 이전까지 잘만 들리던 대답이 갑자기 뚝 끊겼다. 나타니엘은 손가락을 두드리며 키리에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나온 목소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당황이 섞여 있었다.

“글쎄. 상상해 본 적이 없어서…….”

“예?”

번드가 놀라 되물었다.

“어째서요? 포기하지 마십쇼! 저도 도울 테니, 꼭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응. 고마워.”

떨떠름한 반응. 번드는 좀 더 불타올랐다.

“미래를 꿈꾸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요! 의외로 그게 사람을 힘내게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런가.”

“정말 바라는 게 없으신가요? 잘 생각해 보세요. 꼭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주 사소한 것 하나 정도는 분명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번드는 오래도록 침묵했다. 텁수룩한 수염이 난 남자가 따뜻한 눈으로 키리에를 바라보고 있는 광경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번드는 나타니엘이 인정할 정도로 선량한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답게 키리에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리고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키리에 뷰캐넌은 그 별거 아닌 질문을 무시하지 않았다. 곧 그녀가 느릿하게 대답을 꺼냈다.

“꽃이…….”

키리에가 나직하게 말했다. 나타니엘이 좀 더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의 신체 능력이 아니었다면 절대 들리지 않았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꽃이 피면 좋으려나.”

키리에의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꽃이요?”

번드가 물었다. 아마 이쯤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수국이나, 자카란다…….”

어딘지 허망하고 공허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번드가 그 이유를 말했다.

“근사하군요! 그 두 꽃이라면 엘서스가 유명하다고 합니다!”

엘서스. 나타니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키리에가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들었다. 아마 일생에서 유일하게 걱정 없이 온전히 사랑받았을 시절.

“그 근방에서 지내시는 것도 좋겠군요. 아니면 엘서스 교외의 마을에…….”

번드의 목소리는 키리에를 북돋기 위한 활기로 가득 찼지만, 역효과일 것이다.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나타니엘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며,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재밌는 이야기라도 하고 있니?]

“오셨나요? 안 그래도 지금…….”

콰르릉!

마른하늘에 친 벼락에 번드의 말이 바로 끊겼다. 그리고 으레 그러하듯 사람들은 순식간에 이전의 주제를 잊고 조금 전의 벼락이 얼마나 소리가 컸는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키리에는 조금 안심한 얼굴이었고, 나타니엘은 그걸로 좋았다.

***

마법 병단은 근처를 떠난 듯했다. 키리에는 다음 날 이른 새벽에 떠날 채비를 마쳤다.

“더 필요하신 건 없나요?”

맨몸인 키리에에게 짐과 옷을 챙겨 준 번드는 여전히 뭔가를 해 주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갈색 눈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다정했다.

키리에는 아론과 멜라니를 떠올렸다. 이제 그들은 꿈으로도 환각으로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키리에는 다정한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매번 그들을 떠올렸다.

“고마워. 신세 많이 졌어.”

“고맙긴요. 저도 결국 대가를 받아 버렸고……. 하하.”

번드는 부끄러운지 머리를 긁었지만, 위험할지도 모르는 사람을 아이 있는 집에 받아 준 그의 용기를 생각하면 더 얹어 줘도 모자랄 판이었다.

키리에가 이브와 인사하는 동안, 번드는 고개를 저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남편분은 어디 가셨습니까? 어제부터 안 보이시던데. 이 근방은 곰이 있어서 위험할 텐데요.”

“위험하겠지, 곰이.”

“예?”

“괜찮을 거야. 멀리 가진 않았을 테니.”

그런 사람이거든. 키리에가 중얼거렸다.

“그렇습…… 아! 저기 오셨군요.”

그때 번드가 키리에의 뒤쪽을 보며 굵은 손을 흔들었다.

키리에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다. 이제 가장무도회도 끝이지만,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뒤를 돌았을 때, 그녀는 잠시 말을 잊었다.

나타니엘은 보라색 꽃이 풍성하게 핀 자카란다 나뭇가지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아름다운 낯으로 미소지었다.

[수국은 계절이 아직이라.]

놀람을 넘어 굳어 버린 키리에를 내려다보며, 나타니엘은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내밀었다. 키리에는 제 팔뚝만 한 가지에 주렁주렁 열린 보라색 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직 필 때가 아닌데 어디서…….”

나타니엘은 그저 미소지었다.

[근처에서.]

근처엔 자카란다가 없을 텐데요. 뒤에서 번드가 중얼거렸지만, 나타니엘은 가뿐하게 그것을 무시했다.

키리에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특별한 표정을 지은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간헐적으로 눈을 깜빡이며, 보라색 꽃잎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나타니엘은 시선으로 그녀의 손끝을 좇았다.

키리에의 입에서 ‘꽃’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나타니엘은 단숨에 그게 그녀의 원초적인 욕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뷰캐넌인 키리에, 귀족인 키리에, 나타니엘의 키리에가 아닌 키리에 그 자신의 욕망.

악은 무릇 그런 마음의 틈을 파고드는 법이다. 그토록 텅 빈 마음이라면 꽃 한 송이에도 가득 차지 않겠는가.

그러니 노린다면 그때였다. 그가 준 꽃이 키리에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그를 향한 경계를 늦췄을 때.

역시 다시 가둬 버리자.

[마음에 드나?]

나타니엘은 생각을 숨긴 채 그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이번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누구도 오지 못하는 곳에 가둬 버리자. 얼음으로 성을 만들고 주변은 모조리 설원으로 만들어 버리고서, 눈의 여왕처럼 모시자. 시중은 자신이 들면 그만이다. 다른 개체는 필요 없다.

손발은 보라색 리본으로 묶어 그가 없으면 걷지도 못하게 만들자. 머리에는 면사포, 눈에는 안대를 씌워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만들자. 귀는 밀랍으로 막고, 입에는 유리구슬을 물려서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그의 손길밖에 없는 세상에 가둬 버리자.

나타니엘은 흰 침대 위에서 자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키리에를 떠올리며 밀물처럼 차오르는 안도감을 느꼈다.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었지만, 생각만 해도 사랑스러웠다. 이게 옳았다. 키리에는 영원히 자신의 곁에 있을 것이고, 안전할 것이다.

‘게다가 그를 마주 때려 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나밖에 없는걸.’

툭 하면 멍이 들고, 기절하고, 그런 주제에 맹랑하기도 하지.

그는 이제 키리에의 마음과 정신과 무의식까지 지배하는 것이 몹시 지난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상황이 이 정도까지 오니, 나타니엘마저도 그녀의 위대함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잠깐은 키리에가 남들에게 하듯이 해사하게 웃으며 그와 함께 팔랑팔랑 돌아다니는 일도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으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도 저도 아닌 이런 상황은 집어치우고, 차라리 몸이라도 완벽히 지배하는 게 더 속이 편할 성싶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키리에 뷰캐넌은 완전하게 돌아설 것이다. 그가 무슨 짓을 해도 그의 이름을 불러 주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나타니엘은 어쨌든 근소하게나마 그녀가 우는 것보다는 웃는 게 훨씬 보기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나, 그를 향해 웃어 주는 일 역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오만이 말했다. 남의 미소, 호의, 애정, 그게 그리 대수냐고.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손속에 자비를 두기엔 너무 겪은 게 많지 않으냐고.

그 말이 참으로 옳았다.

그러니 그는.

[키리에.]

절대로.

[이리 와.]

그녀를.

나타니엘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키리에가 고개를 들었다.

“아…….”

반사적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키리에가 그를 보며 눈을 깜빡인 순간, 그녀의 눈에 담겨 있던 꽃이 그에게로 홍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흥분해 날뛰고 있던 광기는 지레 놀라 덜컥 움직임을 멈췄다.

“으.”

키리에가 흰 뺨을 빨갛게 물들이며 얼굴을 찡그렸다. 기쁨을 숨기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이미 뺨에는 보조개가 폭 하고 패였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 듯한 수줍고 무방비한 표정이었다.

“어떡…… 어떻게 하죠.”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뭔가를 참는 듯한 소리를 내던 키리에가 작게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미간을 좁히고, 한참을 작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러다 이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꽃봉오리가 피어나듯 아찔한 웃음이었다.

“너무…… 너무 고마워요, 나타니엘.”

그리고 나타니엘은 그의 모든 계획이 봄 햇볕 아래의 눈사람처럼 녹아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불가항력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절대로 그는 그녀를…….

키리에는 꽃송이를 몇 번 더 쓰다듬은 뒤 번드에게 몸을 돌렸다.

“번드. 괜찮다면 이걸 삽목해 줄래?”

“가져가시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번드가 나타니엘을 흘끔거렸다. 키리에는 입을 헤 벌린 이브에게 자카란다 나뭇가지를 들려주었다.

“가져가다 죽으면 불쌍하잖아. 나무는 땅에서 자라야지.”

애초에 나타니엘은 선물을 어떻게 다루든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가 준 보석으로 자갈 해변을 만든대도 말리기나 할까 싶었다.

하지만 예의상 키리에가 몸을 돌렸다.

“그래도 될까요, 나타니엘?”

흐린 얼굴의 나타니엘이 조금 늦게 대답했다.

[……뜻대로.]

나직한 목소리가 조금 전과 다르게 확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너무 좋은 티를 냈나?’

키리에가 그런 생각에 뺨에 살짝 손을 올렸다. 그녀는 얼굴을 가린 채 번드, 그리고 이브와 인사했다. 일이 다 끝나면 찾아오겠다는 말과 함께.

다시 나타니엘과 둘만 남았다. 마을로 향하는 길은 번드가 알려 주었다. 마을까지 향하는 시간이 몹시도 어색했다.

나타니엘이 꽃을 가져다준 이후 유난히 조용해져서 더 그랬다. 그는 굉장히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앞서 걸었다. 평소의 그의 여유는 상대에게 우월감을 보이기 위해 계산된 것이었는지, 딴 데 정신이 팔린 것 같은 지금은 촘촘하고 치밀한 예기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느낌이었다.

키리에는 그가 마음껏 상념에 빠지게 두었다. 자카란다 꽃을 받은 직후, 지나치게 분방하게 반응한 것이 부끄러웠다. 바로 표정을 정돈했으나, 나타니엘이 몹시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으니 볼썽사나웠던 것이 틀림없다. 그에게는 늘 못 보일 꼴만 보이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키리에는 더 재게 발을 놀렸다.

그러다 나타니엘이 난데없이 입을 열었다.

[꽃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군.]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나 했는데 나온 게 꽃 이야기였다. 키리에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답했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를 정도는 아니지만요.”

나타니엘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게 어쩔 줄 모를 정도가 아니었다고?]

이런. 역시 들통났구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이죠. 귀족은 그러지 않잖아요?”

다행히 목소리에는 당황이 드러나지 않았다.

[아.]

나타니엘이 별 의미 없는 소리를 흘렸다.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다. 뭔가가 언짢은 것 같기도 했다.

다시 말이 없어진 그는 한참 뒤에 던지듯 말했다.

[그럼 엘서스를 주지.]

앞서 걷던 키리에가 걸음을 삐끗했다.

“잠시만요. 뭐라고 했죠, 방금?”

[엘서스를 주겠다고.]

나타니엘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말을 마친 뒤, 그는 약간 여유가 돌아온 푸른 눈으로 키리에의 얼굴을 훑었다. 뭔가의 흔적을 더듬는 것 같은 신중한 시선이었다. 키리에가 질색했다.

“영지전을 하겠다고요? 또 사람을 죽이겠다고?”

나타니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이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넌 너무 파괴적이야.]

“당신은 너무 통이 크고요. 영지가 무슨 맨바닥에 금 그어 놓고 하는 땅따먹기라도 되는 줄 알아요?”

[그럼 아닌가? 보통 내가 금을 그으면 거기가 내 땅이곤 했는데 말이야.]

규모에 질린다. 키리에가 이마를 짚었다.

“필요 없어요…….”

이를 악문 대답에 나타니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답답하다는 듯이 인상을 썼다.

[좋아한다며.]

약간 볼멘소리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키리에는 이 주제가 일상적인 안부 인사처럼 스쳐 지나가길 바라며 계곡물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넜다.

“좋아하지만, 좋아한다고 대륙의 꽃을 다 가져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말하고 뒤돌아보니, 나타니엘이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끄러미 키리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좋아하는 게 맞나?]

“맞습니다.”

[넌 좀 치밀하지 못해.]

말을 저렇게 얄밉게 하는 것도 재주다. 키리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가 뭐라고 말할 찰나에, 순식간에 징검다리를 건너온 나타니엘이 손을 뻗었다.

[키리에. 너보다 조금 더 오래 산 사람으로서 조언하건대, 네가 뭔가를 갖고 싶어 할 때 네 발밑에 그걸 산처럼 쌓아 줄 남자가 아니라면 일단 걷어차고 보렴. 물론 그 전에 레쇼도 먼저 걷어차고.]

키리에가 뚱한 얼굴로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미적거려도 그는 손을 추스르는 일이 없었다.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키리에는 이게 휴전의 연장 제안이라는 것을 알았다. 결국 그녀가 한숨을 쉬며 손을 잡았다.

때마침 숲길이 끝나고 탁 트인 언덕이 나왔다.

“그럼 본인밖에 안 남는 거 아나요?”

[모를 것 같니?]

“그럼 당신은 뭘 쌓아 줄 심산이죠?”

언덕 아래에 마을이 보였다. 나타니엘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엘서스.]

“필요 없다고요…….”

***

마법 병단이 어떻게 되었는지, 안네마리와 루비니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들의 소식은 뚝 끊겼고, 키리에는 하루빨리 수도로 돌아가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짐 마차를 얻어타고 작은 마을 몇 개를 지나, 도시에 도착했다.

나타니엘은 소년으로 모습을 바꿨다. 평민 소년으로 가장했던 전과 달리 반바지에 니 삭스까지 갖춰 입은 완벽한 귀족가 자제의 모습이었다.

[이편이 눈에 덜 띄겠지.]

어른 나타니엘의 미모는 과하게 눈부신 편이라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소년 나타니엘이라고 빛나지 않는 건 아니어서, 사람들의 이목을 모조리 잡아끌었다.

소년으로 변한 나타니엘은 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키리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잡아달라는 듯이 작은 손을 내밀었다.

키리에가 머뭇거리다 그 손을 잡았다.

“일단 역마차를 잡아야겠어요. 시간을 보고 오늘은 여기서 묵든가 하죠.”

[뜻대로.]

나타니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귀족 사회에서는 예의 없는 몸짓이기 때문에 어른 나타니엘은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물론 그가 그렇게 하더라도 워낙 분위기가 우아하다 보니 전혀 예의에 어긋나 보이지는 않을 테지만.

시내를 걷는 동안 나타니엘은 키리에의 손을 잡고 주변 가게를 살폈다. 웬일로 정면을 주시하지 않나 했는데, 그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널 주려고 산 선물을 네 오라비가 다 가져가 버렸구나.]

키리에가 고개를 돌렸다. 유리 진열장 너머에 여성용 물건이 가득했다. 나타니엘이 키리에를 힐끔거렸다.

[갖고 싶은 게 있니?]

“글쎄요…….”

별생각은 없지만 예의상 진열장 안쪽을 살폈다. 키리에는 자신이 생각보다 눈이 높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 도시에서는 나름 세련된 가게일 테지만, 셀 아렐라노의 화려함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없는 것 같아요.”

내내 키리에의 얼굴을 살피던 나타니엘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 소년의 모습 때문인지 그는 전보다 표정을 알아보기 쉬웠다.

[물욕이 너무 없는 것도 보기 좋지 않아.]

“꼭 내 아버지같이 말하네요.”

나타니엘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썼다. 나타니엘이 그 정도로 질색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거의 혐오에 가까웠다.

[말을 참……. 됐다.]

키리에가 빈손으로 주먹을 쥐고 입을 가렸다. 생각해 보니 좀 심한 말인 것 같다.

“미안해요. 아무렴 아버지보다야 당신이 낫죠.”

[왜 내가 네 부친에 비견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는걸. 난 네 아버지가 아니야.]

“음. 그야 굳이 따지자면 고조부의 고조부의 고조부의…….”

[그래. 네가 날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아주 잘 알겠구나.]

나타니엘이 몸서리를 치며 손을 놓고 걸어갔다. 세자르가 정말 싫은 모양이다. 키리에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앞서 걷던 나타니엘이 몸을 홱 돌렸다. 키리에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웃음기를 싹 거두었다.

장밋빛 뺨을 가진 소년이 놀란 얼굴로 눈썹을 찌푸렸다.

[방금…….]

“역이 보이네요. 갈까요?”

키리에가 냉연하게 미소지었다. 귀족은 소리 내서 웃지 않는다. 또 품위 없다고 혼날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

나타니엘이 인상을 쓴 채 미심쩍이 키리에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이야 그러했지만, 바다 일부를 떼어 옮긴 것같이 푸른 눈이 유리알처럼 맑았다. 약간의 기대감이 보이기도 했다.

대체 왜?

키리에는 아까 그가 했던 것처럼 어깨를 으쓱하고는, 천연덕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누나랑 손잡고 갈까?”

[…….]

나타니엘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키리에의 손을 잡았다. 상황에 응해 주는 것이 참으로 나타니엘다웠다.

키리에는 다시 웃고 싶어졌다. 아마 그 섬뜩한 위압감을 감추고 있어서 그럴 테지만, 지금의 나타니엘은 놀라울 정도로 그 나이대 소년 같았다.

키리에가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둥근 지붕을 한 낡은 역이 보였다.

“아이의 모습이 꽤 자연스럽네요.”

[그런 게 익숙하게 태어났어.]

“아이를 연기하는 게요?”

[남의 틈을 파고드는 게.]

나타니엘이 무심하게 답했다. 키리에가 그 말이 주는 섬뜩함에 멈칫했으나 나타니엘에게 이끌려 물 흐르듯이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역사 안에는 마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키리에가 창구로 다가갔다.

“셀 아렐라노까지 가려고 하는데요.”

“거기까지는 안 갑니다.”

만사가 귀찮아 보이는 젊은 남자 역무원이 굼뜨게 고개를 들었다.

“출발은 내일 7시고, 성인은 은화로…….”

그가 말하다 멈칫했다. 로브를 눌러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키리에 대신 나타니엘을 헤벌레 바라보면서.

통통한 뺨에 흰 피부, 젖어 있는 듯 묵직한 흑발의 소년은 키리에가 봐도 인형 같았다. 나타니엘이 농염하게 미소 짓자, 역무원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귀족이십니까?”

키리에가 나타니엘을 훑어보았다. 평민들은 좀처럼 입지 않는 반바지에 니 삭스, 말가죽으로 만든 반질반질한 구두까지.

“……저희 가문 도련님이세요.”

차마 귀족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역무원은 의심하지 않았다. 일견 따분해 보이던 그의 표정이 조심스러워졌다.

“나리께서 타시기엔 좁고 더러운데요…….”

그때 나타니엘이 방긋 웃으며 키리에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깨끗한 마차를 수배하는 게 좋겠어요, 누나. 저는 언제까지도 기다릴 수 있어요.]

이거 왜 이러실까. 키리에가 그럼 그렇지 하고 물러나려는 역무원을 붙잡았다.

“아뇨! 가지 말아요. 잠시만요, 도련님. 우린 남의 눈에 띄면 안 되는 것 아시잖아요?”

[정말요?]

나타니엘이 가증스럽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뺨을 장밋빛으로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하긴, 누나가 자기만 따라오라고 했죠. 밤에만 여는 좋은 곳에 데려가 준다고 하셨죠? 저는 거기서 뭘 하면 되나요?]

역무원이 혐오의 시선으로 키리에를 올려다보며 책상 밑 어딘가를 더듬는 것이 보였다. 키리에가 급하게 소리를 내질렀다.

“내가 언제요!”

[거짓말이에요? 저한테 기분이 아주 좋을 거라고 했잖아요, 누나……. 아주 환상적일 거라고, 이런 건 처음일 거라고…….]

나타니엘이 솜방망이 같은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키리에가 분노로 파들파들 떠는데, 역무원이 기어코 종을 울렸다. 역사에 대기하는 경비원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키리에가 재빨리 나타니엘을 붙잡고 역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올게요!”

역사 뒤편에 도착한 키리에가 당장 노호를 내질렀다.

“나타니엘!”

나타니엘은 태연하게 묻지도 않은 옷의 먼지를 털어 내곤 빙그레 미소지었다.

[맘에 들었어요, 누나?]

뒷골이 당겨 왔다. 키리에가 심호흡했다.

“무슨 생각이에요, 대체!”

[여행을 끝내기에는 좀 빠르지 않니? 넌 풍류를 즐길 줄 모르는구나.]

“지금 내가 풍류나 즐길 계제인가요?”

[넌 그렇게 살다 분명 책상머리 앞에서 요절할 거야.]

“어쩜. 그래서 지금 내게 느림의 미학을 찾아 주느라 사람을 유괴범으로 몰았다고요?”

나타니엘이 천진하게 웃었다.

[그건 아니고 좀 따분해서.]

기가 막혀서. 키리에가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나타니엘은 그런 키리에를 본체만체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게 누가 고조부 심기를 거스르랬니.]

그는 타박타박 걸어 역사 안으로 쏙 들어갔다.

몇 개의 도시를 지나치는 동안, 나타니엘은 누구도 죽이지 않고서 키리에를 관찰했다.

키리에 뷰캐넌.

그는 이제는 버릴 수도, 죽일 수도 없는 사람의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렸다. 셀 아렐라노로 향하는 동안, 그녀는 자카란다 꽃을 받았을 때처럼 환하게 웃진 않았다. 하지만 때때로 처음 만나 농담을 주고받을 때처럼 장난스럽게 키득거리곤 했다.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다 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키리에가 제대로 웃을 땐 눈꼬리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웃는 흉내를 낼 땐 눈이 가늘어질 뿐 휘어지진 않아서, 몹시 우아하고 기품 있어 보였다.

가끔 속눈썹이 눈에 들어가 아이처럼 눈을 비비기도 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토끼처럼 하품하기도 했고, 그때마다 흰 치아와 장미색 혓바닥이 잠깐 보였다 사라졌다.

당황하면 표정이 더 차가워지고, 가끔 우두커니 멈춰 서 먼 곳을 아스라이 보는 습관이 있었다. 전부 보고로는 알 수 없던 것들이었다.

알면 알수록 그녀는 세계의 끝에 있다는 고대의 미궁처럼 느껴졌다. 그 미궁 끝에는 아마 그 웃음이 있을 것이다.

웃음. 그게 그를 이끌었다.

단 한 번 보았을 뿐인데, 정신이 아득하니 아찔해졌던 그 웃음. 순간 시간이 멈추고, 키리에의 주변만 무지개색으로 덧칠된 것처럼 생기가 넘쳤다. 햇빛이, 하늘이 있는 이유는 키리에의 연보라색을 돋보이기 위함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던 그 웃음.

그것은 조금 반칙이 아닌가. 나타니엘이 생각했다.

그런 것이 있으면 있다고 얘기해 줘야 하지 않는가. 정복한 줄 알았더니 이쪽을 동정하고, 이제 다 알았다 싶었더니 그 뒤가 더 있다. 막다른 길로 몰았다 싶었더니 난데없이 와락 웃어서 자신이 놀란 사이에 달아나 버린다. 반칙이었다.

꽃이 문제였던 건지, 봄이 문제였던 건지, 아니면 장소가 문제였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처음 보는 미소였다. 기분 나쁘게도 그녀는 지금까지 그에게 한 번도 그런 미소를 보여 준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게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미소가 아니었단다.

다시 그 말을 떠올린 나타니엘이 심드렁하게 팔짱을 꼈다.

역시 반칙이다.

엘서스를 주겠다고 하면 그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일 줄 알았는데, 가시 돋친 태도로 질색팔색하는 것에 그쳤다. 그것도 반칙이다. 나타니엘이 나지막이 혀를 찼다.

“나타니엘?”

때마침 키리에가 방으로 돌아왔다. 셀 아렐라노는 코앞이었고, 나타니엘은 오늘만큼은 고급 여관에 묵어야겠다고 주장한 참이었다. 잠자리가 불편했던 키리에가 낮에 병든 닭처럼 조는 게 아니꼬워서였다.

“방을 역시 두 개를 잡을 걸 그랬나요?”

정강이를 덮는 리넨 잠옷 위에 숄을 두른 키리에가 차분하게 말하며 다가왔다.

[어차피 자지도 않아.]

“먹진 않아도 당신 몫의 식기를 차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방 안에 놓인 책상에 기대어 선 채 나타니엘이 고개를 기울였다. 둘이 있기 싫다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키리에는 지금껏 그를 방에서 쫓아낸 적이 없었다.

[적당히 지켜보다 나갈 테니 걱정하지 말렴.]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요.”

키리에가 낮게 웃었다. 그녀는 조금 더 걸어와 맞은편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침구를 쓸다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곧 아렐라노예요.”

[그렇네.]

키리에의 입술이 달싹였다. 말이 한숨에 섞여 새어 나왔다.

“나는 당신이 조금…… 변한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나요?”

나타니엘이 눈을 내리깔았다.

한심할 정도로 동정심이 많은 키리에 뷰캐넌 같으니.

그였다면 저런 식으로는 묻지 않는다. 자신을 물어뜯은 상대에게 손을 내미는 일 따윈 없다.

하지만 그게 키리에 뷰캐넌이기도 했다…….

다행히 나타니엘은 슬슬 키리에를 다루는 법에 확신을 얻었다.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했다.

그리고 그가 아무리 영악하고 앙큼하게 굴어도 보이는 것에 속지 않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녀에게는 사물의 정체성을 꿰뚫는 여섯 번째 감각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키리에는 나타니엘이 누군가의 죽음을 이야기하면 바로 차갑게 얼굴을 굳히고, 끝없이 드리워진 보라색 장막 같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왜 이제야 느꼈나 싶을 정도로 등골이 오싹한 무관용의 시선이었다.

그러나 옆에 사람이 있고, 관계없는 제삼자가 있고, 나타니엘이 그 사이에서 적당히 너그럽게 굴면 키리에도 못내 그를 받아들이곤 했다.

때리면 마주 때리지만, 무르게 나오면 한없이 물러지는.

그러니 이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물러지면 넌 어디까지 날 받아들일까?

[글쎄. 잘 모르겠군.]

그가 팔짱을 낀 채, 약간 방만해서 더 오만해 보이는 태도로 턱을 들었다.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인간들 사이에 섞이긴 좀 어려우니까.]

“전에도 말했잖아요. 그거라면 내가 도울게요.”

키리에는 정말 진지하게 그렇게 말했다. 나타니엘은 웃지 않기 위해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밤의 어둠이 제 몫을 톡톡히 했다.

[인간들은 너무 약해.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죽어 버리니, 그걸 다 신경 쓰다간 신경 쇠약에 걸릴지도 모르잖니?]

믿을까?

[사람을 만질 상황이 오면 특히 아주 곤란하지.]

그럴 일 없다.

[살짝 건드리는 정도로도 터지기도 하니.]

알 바 아니다.

키리에의 눈이 크게 한 번 흔들렸다.

“……그럼 연습해 볼까요?”

나타니엘이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키리에 뷰캐넌. 이렇게 순진해서야.

하지만 그는 날름 기회를 잡았다.

[네가 다칠지도 몰라.]

그녀에겐 이렇게 말하는 쪽이 좋겠지. 아니나 다를까 키리에가 결연하게 눈을 빛냈다.

“전 괜찮아요. 곧 수도고, 안네마리와 만나면 치료받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슬슬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어떻게 지금까지 누구도 키리에의 뒤통수를 친 적이 없는 거지? 나타니엘은 한탄이 절로 나오는 속내와는 별개로, 다분히 의도적으로 머뭇거렸다.

[키리에. 난…….]

“정말! 정말 괜찮아요. 오히려, 이렇게라도 속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둄2 절갠 교환재공타싸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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