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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불가항력 (18/33)

18. 불가항력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의 로비에서는 다시 금발로 머리를 바꾼 루비니아가 전전긍긍하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괜찮은 거죠! 안 다친 거죠! 아파요? 다쳤어요? 얼굴이 왜 그래요!”

루비니아가 마차에서 내려선 키리에를 보며 비명에 가깝게 물었다. 하얗게 질린 루비니아의 얼굴은 그녀가 키리에를 얼마나 걱정했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괜찮아요. 다치지도 않았고요. 저하께선 괜찮으세요?”

키리에가 힘없이 웃으며 물었다. 루비니아가 일순 입술을 꾹 깨물더니, 꼭 울음을 참는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난 무사해요.”

“다행이네요. 길이 엇갈렸나 봐요.”

“……그, 런가 봐요.”

루비니아의 고개가 서서히 내려갔다. 키리에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절 기다려 주셨군요? 감사해요. 이제 들어가서 쉬세요.”

“당신은요?”

“전 일을 해야죠.”

루비니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정신이에요? 지금 자기 꼴을 봐요! 새파랗게 질려가지곤 그러고 일을 하겠다고요?”

“안색으로 일하는 건 아니잖아요?”

“건강 관리도 귀족의 책임이에요!”

책임. 그 단어가 나오자 키리에가 작게 헛웃음 쳤다.

“알고 있어요. 일을 다 끝내지 못한 상태에서 쓰러지진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그런 의미가……!”

뭔가를 말하려던 루비니아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말해 봤자 통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됐어요. 하……. 당신 시녀는 마차를 보곤 목욕물을 준비하겠다고 갔어요.”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키리에는 그렇게 말한 뒤, 정말로 일을 하려는지 집무실로 올라가 버렸다. 남겨진 루비니아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방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자신의 방 문을 열자마자 숨을 삼켰다. 분명 로비에 있었던 전설경이 창가에 서 있었다.

루비니아가 주먹을 세게 쥐었다. 키리에 뷰캐넌은 이 남자를 손쉽게 무시했지만, 그녀가 아닌 누구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용건이 있으신가요?”

루비니아가 최대한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끔 저자세로 물었다.

나타니엘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조금 방만한 자세로 지팡이를 돌리고 있었고, 그 모습은 평소의 단정한 자세만큼이나 그에게 잘 어울렸다.

[너지?]

그가 매끄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루비니아의 구스베리 색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전설경이 심드렁히 눈을 깜빡였다.

[네가 국왕의 끄나풀이잖니.]

루비니아의 가슴이 놀람으로 들썩거렸다. 얼음송곳 같은 시선이 그런 루비니아를 꿰뚫었다.

[대체 얼마나 멍청해야 내가 있는 곳에서 키리에를 노릴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구나.]

“……전.”

루비니아가 눈도 깜빡하지 않고 숨을 들이켰다.

“전……. 전 모르는 일이에요.”

그 즉시 하얀 날이 루비니아의 배 앞으로 내밀어졌다.

루비니아가 하얗게 질려 경악을 삼켰다. 어느새 성큼 다가온 나타니엘이, 나른하고 따분하다는 듯이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웃음기 없는 얼굴에는 인간미도 없었다. 그의 검 끝은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이 루비니아의 배꼽 부분 앞에서 느리게 회전했다.

[키리에도 아마 알고 있겠지. 네가 연관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는 걸. 그 애가 왜 침묵하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게 내가 가만히 있을 이유가 되진 않아서 말이야.]

“…….”

[나는 일단은 기사이니 여자와 아이는 되도록 죽이지 않고 있거든. 케케묵은 관습이긴 하지만, 전통이란 게 늘 그렇지.]

그는 아주 여상스럽게 말하며 칼날을 좀 더 내밀었다. 흰 칼날이 드레스로 가려진 루비니아의 배꼽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흐……억.”

루비니아가 겁에 질려 입을 들썩거렸다. 눈은 믿기 힘든 것을 본 사람처럼 잔뜩 커져 눈물이 맺혔다.

나타니엘은 그녀의 공포를 무심히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자. 그래서 넌 어떨까? 죽음 앞에서도 네 신념을 지킬 생각이니?]

“저, 저, 저는……!”

[아주 아플 거야.]

“……!”

[아주.]

그의 목소리는 아이에게 고약을 먹이는 아비처럼 부드럽고 상냥했다.

배꼽 안쪽에 짜릿한 통증이 느껴졌을 때, 루비니아는 끝내 공포에 굴복했다. 그녀가 덜덜 떨리는 손을 불쑥 내밀었다. 녹색 보석이 박힌 오레윈브리지 왕가의 반지였다.

나타니엘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아. 흥미롭군.]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 그림자가 사방을 잡아먹었다. 죽음이 닥쳤다고 생각한 루비니아가 울부짖으며 머리를 붙잡았다.

“사, 살려 주세요!”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변이 온통 검은색이 되었을 뿐이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루비니아가 의아한 얼굴을 했고, 나타니엘은 검을 놓았다.

[마법이군.]

그가 루비니아의 손을 잡아채며 말했다. 벌레를 보듯이 오만한 시선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작만큼은 숙녀를 대하는 기사처럼 우아하고 낭만적이었다. 덕분에 루비니아의 공포는 빠르게 희석되었다.

나타니엘은 루비니아의 반지에 박힌 녹색 보석을 이리저리 살폈다.

[통제용인가. 훌륭하게 오레윈브리지의 취향이군.]

여전히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손을 내어 주고 있는 루비니아를 향해 나타니엘이 물었다.

[국왕이 줬나? 이 공간에서는 외부의 힘이 작용할 수 없으니 대답해.]

“아…….”

루비니아가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울음을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왕세자와 결혼하는 대신, 이걸 끼라고 했어요. 잘은 모르지만, 허튼 말을 하면 저를 죽이는 마법이 걸려 있다고…….”

[그리고?]

“키리에 뷰캐넌을 꾀어내라고 했어요…….”

루비니아가 말하며 나타니엘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의외로 심드렁히 반응했다.

[마법 병단이 키리에를 데려가서 뭘 하려고?]

루비니아가 잠시 우물거렸다.

“각하를, 유인하려고 해요……. 국왕 전하께서 시조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의 연구실을 찾아냈어요. 거기서 어떤 흉측한 마법을 발견한 것 같아요…….”

그녀는 연신 나타니엘의 눈치를 보았다. 반지를 살피던 나타니엘은 곧 오물을 털어 내듯 루비니아의 손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날 초대했고.]

루비니아가 멈칫했다.

[키리에가 죽길 바라진 않는 모양이지?]

“그야…….”

루비니아가 고개를 떨궜다. 분명 한때는 그녀가 너무나 미웠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런 세력 다툼에 휘말려 죽기엔, 키리에는 너무 성실한 사람이었다.

대답하지 않는 루비니아를 나타니엘은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얕은 숨과 함께 말했다.

[덕분에 키리에를 지켰으니 살려는 주지.]

루비니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일단 생존을 허락받자, 그녀의 얼굴에는 곧 절박함이 떠올랐다.

“계속 키리에 양하고 붙어 계실 거죠?”

나타니엘이 일견 무심하게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의미냐는 눈빛이다.

“저는 반지 때문에 국왕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해요. 하지만 각하께서 옆에 계시면, 키리에 양도 무사할 테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너도 눈이 있다면 그 당사자가 오늘 얼마나 나를 피했는지는 보았겠지.]

그리 대답하는 나타니엘의 눈빛이 조금 섬뜩했다. 루비니아는 놀란 나머지 코로 숨을 들이마셨다가, 이내 결의로 눈을 빛냈다.

“그건 제가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예요.”

***

다음날 오전, 루비니아가 키리에의 집무실에 쳐들어왔다.

“식사하죠!”

차를 나르던 안네마리가 하찮게 으르렁거렸지만 루비니아는 콧방귀도 뀌지 않고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식사! 식사를 해야 해요. 그러다 당신, 죽어요?”

“간밤엔 평안하셨나요, 저하?”

키리에 역시 콧방귀도 뀌지 않고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한 번은 그녀의 고집을 따라 줬지만 두 번은 없다.

“아이, 손님 대접을 뭐 이렇게 해요? 나 지금 신혼여행 중이라니까요? 이봐요, 뷰캐넌 양!”

루비니아가 책상 앞에서 발을 굴렀지만, 키리에는 태연히 펜촉을 잉크에 적셨다.

“신혼여행이라면 엘서스가 좋죠. 국외는 어떠신가요? 최근 북 대륙에서 금빛 용이 나타났다더군요.”

“이봐요!”

“안네마리. 재작년을 기준으로 소방 경비대의 예, 결산 내역이 너무 달라. 담당자가 바뀐 모양인데, 그 사람, 나 좀 보자고 해.”

“네, 아가씨.”

루비니아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대체 그걸 왜 지금 처리하고 있어요? 아직 정식으로 위임 절차를 밟은 것도 아니면서!”

키리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다음 서류를 넘겼다.

“그냥 급한 불만 끄는 중입니다, 저하. 아마 프로노이아는 영주 직할령이 되겠지만, 영주성을 세우기엔 위치가 좋지 않아서 직접 올 일은 많지 않을 듯해서요.”

그러니까 그냥 온 김에 처리한다는 말이다. 그게 자기를 이 정도로 혹사시켜야 할 만한 일인지 루비니아는 알 수 없었다.

루비니아는 책상에 양손을 짚은 채로 서류를 노려보았다.

“……아무튼 난 당신을 데려가야겠어요.”

“네. 그렇게 합의하셨겠죠. 전설경과.”

루비니아가 멈칫했다. 다시 만난 뒤, 그 입에서 직접적으로 전설경을 언급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키리에가 조용히 펜과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책상에 깍지를 올린 채 루비니아의 눈을 마주했다.

“저하. 이건 철저하게 저하의 신변을 걱정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으엑. 서문만 들어도 짜증 나는 이야기일 것 같네요.”

“그를 가까이하지 마세요. 그는 제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면 제 옆의 누구라도 죽일 사람입니다.”

루비니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녹색 눈매가 사나워졌다.

“그건 나도 알아요.”

“아는데 왜 그러시죠?”

“당신, 귀족 말투 어디 갔어요?”

“여벌 목숨이라도 있으신가요? 애교나 연기, 저하께서 자랑하시는 좁은 거리감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아요.”

그것도 모르겠냐고 반박하기엔 키리에의 눈빛이 중했다. 그리고 걱정이 담겨 있었다. 제 꼴이 지금 어떤지나 알 것이지. 루비니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도저히 안 돼요? 애교 부리면서 이용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키리에가 피식 웃었다.

“고양이처럼 말씀이신가요.”

“대체 인간이든 고양이든, 뭐가 중요해요? 당신이 누굴 죽여달라고 야옹 하고 울 사람도 아니잖아요!”

“놀랍게도 누굴 죽이고 누굴 살릴지의 권한은 고양이에게 없답니다. 그리고 이 문제의 경우, 그 주인이 나타니엘이라는 점이 문제겠죠.”

차분한 대답 뒤에 스며 나오는 슬픔에 루비니아는 자연히 나타니엘의 전적을 떠올렸다. 밖이 위험하다고 감금하고,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도시 전체를 이용해 인형극을 벌이는 감각은 분명 일반인의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타니엘은 자기 고양이에게 유해하다는 판단이 서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에요. 그걸 제 피해가 아니라고 방관해야 하나요? 언젠간 다시 그때 같은 참상이 일어나리란 걸 알면서도?”

“그러니까, 으, 그걸 잘 말하면…….”

“제가 설마 말로 설득하는 걸 해 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루비니아의 입이 막혔다. 그야 해도 제일 먼저 했을 것이다.

키리에는 조금 착잡한 마음으로 깍지 낀 손을 내려다보았다.

“오히려 저는 지금까지 모든 사람이 그런 식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그가 이렇게 된 게 아닐까 해요.”

“그런 식으로요?”

일순 키리에의 눈이 아득해졌다.

“그에게 대적하는 건 너무 두려우니까, 굽히고 숙여 가면서……. 아무도 그에게 진짜 관계를 쌓아 나가는 걸 가르쳐 주지 않은 게 아닐까 하고.”

뒷부분의 이야기를 루비니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진짜 관계라니. 그게 ‘그’ 전설경에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자신이었다면 그냥 적당히 비위나 맞춰 주면서 이득을 챙겼을 것이다. 맞서는 건 두렵고, 무시하는 건 더 두려우니까. 어쨌건 자기 자신에게는 피해가 없지 않겠는가. 그가 원하는 것을 주면, 더 큰 부귀영화가 돌아오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키리에 뷰캐넌은 조금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주변이 온통 고양이인 세상은 행복할까요.”

무게와 책임이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루비니아는 아연했다. 생판 남이 제발 자기나 좀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어질 지경이니, 전설경은 더할 것이다.

하지만 그 신념이 절대 그르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라, 결국 조금 기세가 죽은 루비니아는 이내 풀이 죽었다.

“……하지만 당신이 뭐라고 해도 난 당신하고 전설경을 붙여 놔야겠어요. 나와요. 지금 당장.”

키리에는 물끄러미 그렇게 말하는 루비니아를 올려다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명령이시라면.”

대도서관 최상층의 공중 정원이 세 사람의 식사를 위해 비워졌다. 마법으로 늘 푸름을 유지하고 있는 나무들 사이에 하얗고 둥근 테이블이 놓였다.

전설경은 그 앞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밑에 수납하기엔 너무 긴 다리를 적당히 우아하게 꼰 채였다. 찻잔을 들고서 눈을 반쯤 내리깐 모습이 마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키리에와 함께 입장하던 루비니아가 작게 감탄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생겼어……?”

두 사람이 다가가자, 나타니엘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속을 알 수 없는 투명한 눈이 키리에를 보았지만, 키리에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인사는 루비니아의 몫이었다.

“저희가 너무 늦었죠?”

나타니엘이 그제야 루비니아를 보고는, ‘그래, 너도 있었지.’ 같은 얼굴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온화하고 예의 바르게 답했다.

[기다리는 기쁨을 모르는 사람은 기사가 될 수 없지.]

안네마리가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키리에와 루비니아 앞에는 샐러드와 펑거스, 흰 빵, 소스를 끼얹어 구운 흰살생선이 놓였지만, 나타니엘 앞에는 포도주가 놓였다.

“각하께선 식욕을 느끼지 않으시나요?”

루비니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타니엘은 안네마리가 몹시 쀼루퉁한 얼굴로 잔에 포도주를 따르는 것을 지켜보며 대답했다.

[식욕을 느끼지는 않지만 먹을 수는 있고, 먹을 수는 있지만 굳이 먹지 않아도 상관없어. 포도주는 그냥 기호품이란다.]

“기호품이란 건, 인간의 기호를 배울 기회가 있으셨다는 거네요?”

루비니아가 상체를 조금 앞으로 내밀며 눈을 반짝였다.

“세간에는 이경이 원래는 인간이었다고 알려져 있던데, 진짠가요?”

그녀의 질문에 나타니엘이 묘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리곤 테이블에 턱을 괴고서 고개를 기울였다.

[키리에가 물으면 대답해 주지.]

명백히 막을 치는 대답이었다.

루비니아가 키리에를 돌아보았으나, 키리에는 절대 이야기에 끼고 싶지 않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문 채였다. 루비니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엄청 큰 비밀인가 보죠! 뷰캐넌 양, 궁금하지 않아요?”

[저 앤 별로 궁금하지 않을걸. 남들이 다 묻는 걸 도통 묻지 않더구나.]

“이럴 수가! 뷰캐넌 양, 전설경에 대해 궁금하지 않나요? 예를 들어 그 보석과 금화가 어디서 나오는지 같은 거요!”

[갖다 바쳐도 마다하니, 출처야 궁금할 리가 없겠지.]

“말도 안 돼! 이제 와서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뷰캐넌 양한테 들어간 핑크 사파이어, 제가 노리던 거라고요!”

루비니아는 어떻게든 키리에를 대화에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것이 보였다.

키리에는 왜 그녀가 이 일에 골몰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도무지 그만둘 것 같지 않았다.

키리에가 작은 한숨과 함께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수도로 돌아가면 드릴게요. 결혼 축하 선물이에요.”

“정말요?”

루비니아가 앙큼하게 눈을 빛냈다. 그러다 그녀는 나타니엘의 심드렁한 시선을 느끼고는 아차 했다.

“그, 저야 고맙지만, 뭐랄까, 아! 그래! 수도에 갈 거죠? 내 생각엔, 나는 왕가의 일원이니까 혼자 마차를 타고, 두 사람이 같이 마차로 여행하면 좋겠는데요!”

“안 그래도 버몬트 후작의 압송을 위해 조만간 수도에 돌아갈 생각이에요.”

[압송.]

나타니엘이 재밌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루비니아는 그가 왜 웃는지 몰라, 일단 대화를 이어 가는 쪽을 택했다.

“어머? 잘 생각했어요. 이 도시는 예쁘긴 한데 좀 지루하네요.”

“저하께선 입궁하셨나요?”

“흥. 물론이죠. 이제 나도 왕궁에 사는 여자랍니다.”

“아. 다행이군요.”

키리에가 다분히 예의를 차린 미소를 지었다. 루비니아가 의아한 눈을 했다.

“다행이라뇨?”

“그야 저하를 초대하려면 초대장을 보내야 하니까요.”

“귀경 무도회라도 열게요? 안 어울리네.”

키리에가 방긋 웃었다.

“아뇨. 결혼식 초대장이요.”

스산한 정적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루비니아가 떨리는 눈동자를 어쩌지 못한 채 가까스로 애교 있는 미소를 지었다.

“……누구랑요? 지금 저랑 같이 있는 사람이랑 하는 건 아니죠?”

키리에는 그런 루비니아를 보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여긴 둘밖에 없잖아요.”

드높은 신이시여. 루비니아가 속으로 기도한 뒤, 침을 삼켰다. 녹색 눈이 비장했다.

“……뷰캐넌 양? 다시 생각해요.”

“네?”

“그건 아닌 거 같아요. 남자도 없이 누구랑 하겠다는 거죠? 아니, 잠깐만요! 설마, 남자 있어요?”

나타니엘의 눈이 새파랗게 한 번 번쩍이자 루비니아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키리에는 그게 아예 안 보이는 사람처럼 입을 오므리고 눈을 깜빡였다.

“지금이야 없지만, 제가 남자 하나 못 만들 사람처럼 보이시나요?”

“그건…… 아니지만! 으으!”

국왕보다 많은 영토, 대륙의 2/3 크기의 영지를 가진 영주, 뷰캐넌의 핏줄, 한때 왕세자의 약혼녀였던 만큼 검증된 능력. 그야 아무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키리에는 스스로 권위를 마다하고 있을 뿐, 그 가치를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여왕처럼 앉아 물끄러미 루비니아를 응시했다.

이윽고 그 희극을 지켜보던 나타니엘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너는 수도의 모든 장자를 죽이고 싶은 모양이구나.]

“외국인도 나쁘지 않겠죠. 저는 그런 데에 편견이 없어서요.”

키리에가 그린 듯 웃으며 말했다. 시선은 루비니아를 향하고 있었지만 명백히 나타니엘을 향한 경고였다. 두 사람 사이에 파직, 하고 가상의 불꽃이 튄 것 같았다. 루비니아는 배꼽 언저리를 문지르며 식은땀을 흘렸다.

나타니엘이 낮게 웃었다.

[그걸 내가 지켜만 보고 있을 것 같니? 난 네 남편을 으깨서 네가 잠든 사이에 네 주머니 속에 넣어 놓을 수도 있어.]

“한 번에 성공하면 좋겠지만, 기회는 여러 번 있죠. 행여나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더라도 재혼하면 그만이니까요.”

[한 번만 시범을 보여 주면 누구도 네게 다가가지 않을걸.]

“일단 목표는 그렇지만, 정 어려우면 즐기기만 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어요.”

그 즉시 나타니엘의 동공이 가로로 쭉 찢어졌다.

[미쳤구나, 키리에 뷰캐넌.]

그때 루비니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키리에와 나타니엘의 시선이 동시에 루비니아에게 모였다. 의자가 뒤로 넘어졌지만, 루비니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외쳤다.

“죄송하지만 저는 의상실 예약 때문에 가야겠어요!”

“…….”

[…….]

그래, 나도 알아. 내가 미쳐 보인다는 거. 루비니아가 일부러 허공에 초점을 맞추고 실성한 사람처럼 주절거렸다.

“자, 여기 제가 귀여운 여우 인형을 하나 놓고 갈 거랍니다? 두 분 모두 저한테 하실 말씀이 아주 많은 것 같으니까, 얘를 저라고 생각하고 여기가 대고 말씀하시면 돼요. 절대 두 분이 얘기 나누라는 게 아니라는 거죠. 아시겠어요?”

루비니아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내곤, 자리에서 일어나 총총 사라졌다. ‘살았다!’하는 마음의 소리가 등에서 보이는 것 같았다.

바람이 휑하니 몇 번 불었을 때쯤, 키리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있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몸을 돌리자마자, 코앞에 어느새 나타니엘이 서 있었다. 그는 차갑고 서늘한 낯으로 키리에를 내려다보았다.

[어디까지 방종할 생각이지?]

전과 달리 키리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방금과 같은 작위적인 미소를 짓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해설 없이 정물화를 관람하는 사람처럼 나타니엘을 응시했다. 나타니엘이 조금 미간을 좁힐 정도로 무심한 시선이었다.

“문제 있나요?”

어쨌든 그녀는 대답했다. 나타니엘을 똑바로 보며, 나직하고 잔잔한 목소리로. 나타니엘이 길고 얕은 숨을 내쉬었다.

[있지. 네가 아직도 허황한 꿈을 꾸는 것 같아서 말이야.]

“꿈이라뇨.”

고저 없는 목소리에 나타니엘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키리에의 머리카락에 와 닿았다. 푸른 눈이 좀 더 아득해졌다.

[어떻게 해야 네게 그런 미래가 없다는 걸 알려 줄 수 있을까? 키리에. 네 미래엔 수국이 핀 중정도, 엘서스의 여름 별장도 없어.]

키리에는 그 손 역시 무관심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나와는 생각이 다르군요. 딱히 의견 통일을 원하는 건 아니니 이만 가 보죠.”

[아니.]

나타니엘이 크고 우아한 손으로 키리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이 닿은 곳을 중심으로 키리에의 머리카락에 살얼음이 앉기 시작했다. 정말 쥐고 싶은 건 머리카락이 아니라 목인 것처럼 느껴지는 동작이었다.

오싹하리만치 파란 눈이 뚫어지게 키리에를 주시했다.

[통일시켜. 내 뜻대로.]

키리에는 깜빡임 없는 눈으로 나타니엘의 시선을 받았다.

그때 키리에의 흰 얼굴에 부드럽고 희박한 미소가 떠올랐다.

설마 키리에가 다시 자신을 보며 웃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나타니엘의 사고가 잠시 멈췄다.

“내가 여기서 그러겠다고 말하면 믿나요?”

그는 미소의 충격 때문에 잠깐 대답하지 못했다. 키리에가 연이어 속삭였다.

“어차피 당신은 날 믿지 않잖아요. 내 말이 무슨 의미가 있죠?”

나긋나긋하기에 더 허무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키리에는 다시 미소를 거두고 나타니엘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나타니엘은 뒤늦게 필요 이상으로 잔혹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보였다.

[알긴 아는구나. 네 의지가 얼마나 볼품없고, 네 말이 얼마나 듣기에만 그럴듯한지.]

아마도 마음을 난자하기 위해 꺼낸 말. 하지만 키리에는 다소곳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내가 당신에게 한 말, 전부 거짓말이에요.”

그렇게 말한 순간, 나타니엘의 움직임이 한순간에 멎었다. 그의 얼굴은 더는 미소를 가장할 수 없는 사람처럼 무표정으로 변했다.

그런 나타니엘을 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키리에가 속삭였다.

“그냥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해 본 말이에요. 당신과 있으면 재밌다는 말도, 좋은 관계를 쌓아 가고 싶다는 말도 전부. 새롭지도 않죠? 애초에 내 말은 하나도 믿지 않았을 테니까.”

머리카락을 쥐고 있던 나타니엘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는 자기 움직임이 굳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요동쳤다.

키리에가 딱딱하게 굳은 나타니엘을 맑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한 걸음으로 그의 손 안에서 벗어났다.

“이건 거짓말일까요, 진짜일까요?”

보라색 눈이 차분하게 그를 응시했다.

나타니엘은 깨달았다. 이건 그의 거짓말에 대한 우아한 복수였다.

키리에 뷰캐넌은 양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잡고, 한 마리 학처럼 우아하게 인사했다.

“그럼 우리의 별로 놀랍지도 않은 의견 통일에 기뻐하며, 전 이만 가 보도록 하죠. 괜찮겠죠, 각하?”

그리고 아무 미련도 없이 자리에서 떠나갔다.

***

방으로 돌아온 키리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타니엘이 죽인 국왕의 마법사들은 5명. 하지만 그는 6명이라고 말했다. 한 명이 살았으니 분명 국왕에게 말이 전해졌을 것이다.

국왕이 키리에를 잡고 싶어 하는 이유가 버몬트 후작의 일이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그런 거였다면 제대로 된 무대에서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남은 건 역시 나타니엘에게 복수하기 위해…….’

발라브리가의 마법을 찾았다면 뻔하다. 그가 가만히 앉아서 당할 리 없으니, 인질을 잡고 싶은 것이다.

키리에가 소파에 앉아 이마를 짚었다.

‘돌아갈 때가 되었네.’

***

프로노이아를 떠나는 날이 되었다. 안개 낀 새벽, 몇몇 사람들이 키리에를 배웅하기 위해 프로노이아 대도서관 앞에 모였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수행원을 붙여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테마르 의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키리에, 루비니아, 버몬트 후작, 하인을 위한 마차 네 대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하인들을 위한 마차에 탄 이들은 전부 루비니아의 수행원들이었다.

“전설경이 계시니 가시는 동안 무슨 일이 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너무 조촐한 게 아닌지…….”

테마르 의장이 말끝을 얼버무렸다. 키리에가 숄을 두른 채 빙긋 웃었다.

“괜찮네. 조용히 출발하는 게 좋아.”

“그렇습니까…….”

의장은 크게 한 번 숨을 내쉬었고, 키리에가 손을 내밀었다.

“차후 영주 임관식이 있을 때 초대하지. 그때까지 잘 부탁해.”

“알겠습니다.”

다음엔 포 박사와 호크송 박사가 앞으로 나섰다. 진작 손수건으로 눈가를 콕콕 찍고 있던 포 박사가 감정에 겨운 듯 키리에를 끌어안았다.

“아가씨!”

격식 없는 행동이었지만, 키리에는 웃으며 포 박사의 등을 토닥였다.

“자네들에겐 신세를 정말 많이 졌지. 고마워. 나중에 수도에 들르거든 꼭 뷰캐넌에 들러 줘.”

“하트우드 박사님께 안부를 전해 주세용…….”

“그래. 시워드 박사의 일은 걱정하지 말고.”

“여행 조심하시길.”

“자네도.”

호크송 박사의 깔끔한 인사를 뒤로하고 돌아서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루비니아가 삐딱하게 서서 말했다.

“인덕이 있는 편이네요.”

“저들이 착한 거죠.”

“흐응.”

루비니아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런데 버몬트 후작은요? 아무리 압송이라지만 얼굴 한번을 안 비추네요?”

그녀의 시선은 끝에서 두 번째 마차에 닿아 있었다. 거기엔 안네마리가 차갑게 얼린 버몬트 후작의 시체,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감시인과 함께 타고 있었다.

키리에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좋은 일로 가는 건 아니니까요. 그보다 저하께서도 같이 가실 줄은 몰랐네요. 신혼여행 중이신데.”

“짜증 나네. 놀리는 거죠?”

“그럴 리가요.”

“흥. 어차피 프로노이아 이후로는 볼 만한 도시도 없으니까요!”

앙칼진 말에 키리에가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그러시다면 제 생각엔, 저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면서 주변을…….”

“아뇨!”

루비니아가 새치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나는 왕세자빈이라 마차를 혼자 써야겠어요!”

그녀는 바로 자신의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키리에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눈앞의 마차에 탔다. 우려했던 대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나타니엘이 먼저 앉아 있었다.

키리에는 조용히 그가 비워 둔 자리에 앉았다. 고요 속에서 마차가 출발했다.

키리에는 멍하니 마차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둘만 남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불편하진 않았다. 나타니엘을 감지하던 신경이 뚝 끊긴 느낌이었다.

[키리에.]

그래. 이런 부름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눈을 깜빡이지 않기 위해 애쓰거나 일부러 숨을 고르게 쉴 필요성조차 없었다.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고 거짓말한 이후로, 정말로 그 모든 감정이 거짓이 된 것만 같았다. 아니면 그저 어깨에 너무 많은 힘이 들어가 피곤한 것인지도 모른다.

[키리에.]

나타니엘이 재차 키리에를 불렀지만, 키리에는 말없이 그런 생각만 이어 갔다.

그녀는 뒤늦게 창유리에 반사된 푸른 눈이 자신을 향한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본 키리에가 자연스럽게 시선을 빗겼다. 그러자 나타니엘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한동안 정적이 있었다. 그리고 한참 뒤, 나타니엘이 이 모든 상황에 염증이 난다는 듯이 속삭였다.

[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거기까지 말한 그는, 이내 조금 피곤하다는 듯이 제 얼굴을 가린 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차는 삽시간에 프로노이아를 빠져나와, 루브메니언 산맥으로 들어섰다. 국가 차원에서 도로를 정비한 이후 쓰지 않는 옛길이지만 추적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보호 마법과 추적 방지 마법도 걸어 놓았고, 빈 마차도 출발시켜 놨어.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이래도 들킨다면…….’

키리에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루비니아 오레윈브리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겠지.’

불이 난 날, 루비니아의 표정은 정말 키리에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연기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녀가 마법사들과 공모해 키리에를 시장으로 유도한 뒤 자리를 떴다고 생각하면 모든 게 들어맞았다.

그때였다. 지진이라도 난 듯이 마차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키리에가 비틀거리며 마차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지만, 나타니엘은 얄미울 정도로 태연하게 바깥을 바라보았다.

[마법이군.]

그가 중얼거렸다. 키리에가 언제 그랬냐는 듯, 우아하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수가 꽤 많아. 숲 짐승만으로는 어렵겠어. 구해 달라고 말해 보지그래, 키리에 뷰캐넌.]

키리에는 나타니엘을 무시하고 창밖을 보았다. 어느새 안네마리가 뛰쳐나와 있었다. 그녀의 품에서 나온 온갖 나뭇잎이 주술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아가씨한텐 손대지 못해요!”

안네마리가 선전하고 있지만 상황은 불리했다. 마차는 탁 트인 산길 위에 있었고, 적은 숲에 숨어 그들을 저격하는 중이었다.

그때 앞이 아닌 뒤쪽에서 마법이 날아왔다. 마법이 노린 마차는 버몬트 후작의 시체가 있는 세 번째 마차였다.

마차가 옆면에 마법을 맞고 튕겨 나간 순간, 안네마리는 그쪽으로 주의를 뺏겼다.

“아! 안 돼요! 지켜야 하는데!”

아마 그 순간을 노린 것처럼 마법이 일제히 키리에가 탄 마차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가씨!”

안네마리가 주술을 펼치기도 전에 마차가 기우뚱했다. 산길 옆의 급경사 탓에 마차가 뒤집히기 직전이었다. 나타니엘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운이 좋으면 돌에 부딪히거나, 좀 더 멀리 있는 낭떠러지로 떨어지거나, 멀쩡히 멈춰서 마법사들에게 잡히거나. 셋 중 하나겠군.]

그의 시선은 여전히 키리에를 향하고 있었다. 끔찍이도 맹목적인 시선이었다.

키리에는 마지막 순간에 나타니엘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행여라도 자신의 마음이 약해지지 않게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

나타니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쩐지 기분이 나쁜 듯했다.

[그래. 그러시겠지.]

그 순간 간신히 버티고 있던 마차가 뒤집혀 비탈길을 구르기 시작했다. 내동댕이쳐진 키리에의 등이 마차와 부딪혔다.

“흐윽!”

그녀의 몸이 한 번 더 튕겨 나가기 직전, 키리에는 크고 딱딱한 무언가가 자신을 감싸 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키리에의 의식이 끊겼다.

나타니엘은 기절한 키리에를 끌어안은 채 잠시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마차가 굴러간다!”

“제기랄, 멈춰!”

“제동이 안 걸립니다!”

멀리서 마법사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마법은 그다지 강하지 않아서, 그걸 막기 위해 나타니엘은 손가락을 튕길 필요조차 없었다.

마차가 계곡을 구르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었다. 바위에 부딪힌 채로도 용케 쪼개지는 일은 없었다.

“앞은 절벽입니다!”

[절벽이지.]

나타니엘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막아! 저걸 멈추라니까!”

우두머리의 외침은 부질없었다. 마차가 잠깐 붕 떴다. 그리고 빠르게 벼랑 너머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지금 키리에가 눈을 뜨고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무리 강인한 성품을 지녔더라도 그에게 한 번쯤 매달릴 법했다.

[아니. 그도 아닌가.]

그의 도움 따위 없이, 그가 주는 모든 장애를 뛰어넘고서 행복을 찾겠다는 여자. 이쯤 눈감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친근하게 굴어도 그는 눈감아줄 텐데 말이다.

나타니엘이 낮게 혀를 찼다. 때마침 마차가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났다.

그는 형체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부서진 잔해 속에서 걸어 나왔다. 키리에는 인형처럼 그의 품에 달랑 들려 있었다. 기절하니 도망치려 들지 않는 점 하나는 나쁘지 않았다.

나타니엘은 잠시 키리에의 몸을 돌려 부딪힌 등을 살폈다. 다행히 피는 나지 않았다. 그는 조금 안도했다.

멍이라도 들었을까 싶어 일단 벗겨 볼까 고민하던 나타니엘은 이내 그 생각을 포기했다. 예의도 예의이거니와, 그는 인간의 몸을 만질 때 대단한 주의가 필요했다. 힘 조절이 능숙하지 않았던 시기엔 실수로 사람을 눌러 죽인 일도 빈번했다.

마법사들은 아래까지 쫓아오지 못했다. 인간이 가진 마력에는 한계가 있고, 그렇게 마법을 펑펑 써댔으니 바로 뒤를 쫓진 못하리라. 그는 왜 마법 병단이 그렇게 멍청한 방식으로 습격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개미가 발을 문다고 그걸 신경 쓰는 인간은 없는 법이니까.

나타니엘이 키리에를 고쳐 안았다. 앞에는 울창한 숲과 산맥이 펼쳐져 있었다.

어쩌면 키리에를 다시 가둘 공간 정도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그는 본인도 모르는 망설임이 섞인 눈을 내리깔았다. 부서질 것 같이 연약한 몸을 죽은 백조처럼 늘어뜨린 키리에가 눈에 담겼다.

이윽고 나타니엘이 숲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키리에가 눈을 떴다.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시야를 가득 채운 나무들을 보았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햇빛 역시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주변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키리에는 나타니엘이 옆에 있음을 깨달았다.

‘습격당했고, 기절했고, 나타니엘이 구했고, 일행과는 떨어졌나 보네.’

키리에가 누운 채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머리가 아프지는 않은 것을 보면 다행히 두부에는 문제가 없는 듯했다.

‘내가 있는 마차를 정확히 알았어. 이동 경로도 간파당했고. 역시 루비니아 양이야.’

놀라울 정도로 배신감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어떻게 해야 마법 병단의 눈을 피해 안네마리와 다시 접촉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고저 없이 우아한 목소리가 키리에의 상념을 깨웠다.

[내내 그러고 누워 있을 생각이니?]

시야 안으로 나타니엘이 끼어들었다. 그는 몹시 냉담한 눈으로 키리에를 내려다보았다.

“…….”

그의 시선을 받은 키리에가 느리게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원래의 산길은 보이지 않았다. 키리에의 눈이 그녀가 누워 있는 곳 옆에 흐르는 계곡물에 닿았다.

나타니엘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살려는 주었으니 나머진…….]

차갑게 말하던 그는 곧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타니엘이 고개를 돌렸다. 키리에가 옷을 벗기 시작한 것이다.

나타니엘은 고개를 돌린 채 입을 다물었다. 옷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풀들이 주저앉는 소리, 키리에의 발이 계곡물 속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선연히 들렸다.

찰방거리는 물소리는 금방 멎었다. 한참을 아무 소리가 없는데 돌아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키리에가 대답할 리도 없었다.

나타니엘이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나직하게 한숨 쉬었다.

[경고하건대 품위를 챙겨, 키리에 뷰캐넌.]

다시 키리에가 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옷을 갖춰 입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나타니엘은 그녀가 등의 상처를 물에 비춰 보려 했음을 깨달았다.

나타니엘이 이만하면 됐다 싶은 충분한 시간 뒤에 시선을 돌렸을 때, 키리에는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하. 그가 나직하게 탄식했다. 그리고 두 걸음 뒤에서 그녀를 따랐다.

키리에는 걷는 내내 그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신중하게 숲을 살피기에 바빴다. 나무에 낀 이끼를 보며 방위를 확인하고, 계곡물을 따라 걸었다. 모든 동작이 서툴고 어색했다. 나타니엘은 그 사소한 손짓 하나까지도 묵묵히 눈에 담았다.

분명 밤이 되면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산의 밤은 춥고, 그러면 저 고집불통도 매달리지 않고는 버티지 못할 테니.

망설임 없이 걷던 키리에는 폭포를 마주쳤다. 기어 내려가기엔 높고 가팔랐고, 돌아가기엔 너무 멀었다.

키리에가 머뭇거리며 폭포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이었다.

“윽…….”

그녀가 난데없이 비틀거렸다. 아마 고질적인 빈혈, 혹은 편두통이리라.

나타니엘은 절벽 아래로 미끄러지려는 키리에의 팔을 바로 잡아챘다.

[그럴 줄 알았지.]

그가 조롱조로 속삭였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절벽에 걸쳐 있는 키리에는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오직 그만을 담은 채 깜빡이는 눈이 아주 조금 만족스러웠다.

그래, 아무리 무시하려고 해도 자기를 구해 준 사람은 무심결에라도 보게 되는 법이니까.

나타니엘이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슬슬 포기할 때가 된 것 같지?]

그러나 다음 순간, 키리에는 아무 예고도 없이 나타니엘의 손을 뿌리쳤다.

공중에 붕 뜬 연보랏빛 머리칼과 옷자락이 피어나는 꽃처럼 팔락거렸다.

키리에는 즉시 추락했다.

나타니엘은 다행히 키리에가 바닥에 닿기 전에 그녀를 받아 냈다.

[……하.]

그는 잠깐 제 심장이 얼음처럼 차가워진 것을 느꼈다. 나타니엘이 소름 끼칠 정도로 커진 동공 가득 키리에를 담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키리에는 그를 보지 않았다. 그저 다람쥐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작게 중얼거렸을 뿐이다.

“하아.”

[‘하아’?]

그가 키리에의 중얼거림을 따라 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였다.

[키리에 뷰캐넌. 내가 모르는 새에 지평선에서 깨달음이라도 얻고 왔나?]

키리에가 대답 없이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나타니엘은 별수 없이 그녀를 내려놓았다.

키리에는 또다시 걷기 시작했고, 나타니엘은 뒤에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찢어 죽이고 싶은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고,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보통은 이럴 때 주변인을 죽이면 말을 듣는다. 하지만 누굴 죽여도 키리에가 마음을 바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손가락 사이로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하늘에서 녹색 나뭇잎으로 만든 나비가 날고 있었다. 안네마리의 주술이었다.

나타니엘은 벌써 등도 보이지 않는 키리에를 한 번 바라본 뒤, 나비에게 혼란 마법을 걸어 되돌려보냈다. 그리고 다시 키리에의 뒤를 쫓았다.

나타니엘은 키리에가 힘겹게 나아 가는 모습을 뒤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다.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중 온갖 잡스러운 생각들은 해가 산을 넘어감에 따라 점차 가라앉고, 하나의 생각만이 남았다.

풀어 두기에는 역시 너무 약하다.

산세가 험한 루브메니언 산맥을 맨몸으로 건너겠다는 만용부터가 말이 안 됐다. 그는 일부러 키리에를 사고 지점에서 먼 곳으로 옮겨 놓았다. 인적도 없는 깊은 산속에 홀로 남겨졌으니, 언젠간 패배를 시인하고 도움을 요청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면 그는 모른 체 그 등을 망토로 덮어 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키리에는 몇 번이고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도 도와달라는 한마디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정말로 그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뭐든 혼자 할 수 있고 보호 따윈 필요 없으니, 그가 옆에 있을 이유는 그 웃기는 ‘좋은 관계’ 하나면 된다고.

가당치도 않게.

해가 저물자 산은 금세 어두워졌다. 키리에는 뒤늦게 좀 더 일찍 잠자리를 물색했어야 함을 깨달은 듯했다. 자신이 있으니 산짐승은 없을 테지만, 산은 아직 춥다. 나뭇가지를 긁어 불을 만들려 노력하던 키리에는 결국 실패하고 얕게 땅을 파 웅크리고 누웠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나타니엘은 답답한 마음에 하늘을 보았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하찮은 존재가 다 있을까.

나타니엘의 눈에 키리에는 지렁이, 벌레, 개미, 종달새, 고양이와 동급이었다. 요즘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짓을 하도 많이 해서인지, 그냥 세상 위험한 줄 모르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 어린아이에 좀 더 가까운 것도 같았다. 일단 고양이라면 고집을 꺾으려 들 필요조차 없었을 게 아닌가.

마법을 쓸 줄도 몰라, 검을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주술을 아는 것도, 신성한 힘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뼈가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것도 아니고 찌르면 피가 나오고 더 찔리면 죽기까지 한다.

나타니엘이 다시 탄식했다. 이렇게 하찮고 연약할 데가.

그는 한숨과 함께 근처를 살펴 적당히 큰 바위를 찾아냈다. 그리고 검으로 그것을 가로로 잘랐다.

산을 헤맨 것이 피곤했는지 키리에 뷰캐넌은 그가 몸을 안아 올려도 깨지 않았다.

나타니엘은 키리에를 바위 위에 눕힌 뒤, 주변에서 냉기를 거둬 냈다. 새하얗게 질려 있던 키리에의 낯은 그제야 혈색이 돌아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나타니엘이 그 옆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넘기자, 키리에는 조금 움찔하더니 다시 새근새근 잠들었다. 그 모습을 담던 파란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가둘까.]

세상이야 어떻든 관심 없다. 키리에만 반응하면 괜찮았다. 그런데 그녀는 거의 완벽하게 그를 무시하고 있었고, 그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짜증 나는 일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알은체라도 하는 건 남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거론될 때를 제외하곤 없었다.

나타니엘이 천천히 손을 뻗어, 키리에의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다시 가두면 어떨까. 이번엔 아예 움직이지도 못하게 손발을 묶고, 입도 눈도 가리고서 인형처럼 앉혀만 놓으면 어떨까. 그러면 자신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저주의 말을 내뱉어 줄까?

일단 그런 생각을 하자 발밑에 어둠이 고여 입을 빠끔댔다. 곁눈질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타니엘이 실소를 흘렸다. 사실 누군가를 가두는 일이라면, 그는 이 세상의 누구보다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일어나서 나를 말려봐, 키리에.]

그가 중얼거렸다. 당연히 일어날 리 없었지만.

잠든 키리에의 얼굴은 고요했다. 약간 차가운 인상은 잠든 채로도 여전하지만, 그는 그편이 더 좋았다. 하기야 뭔들 좋지 않겠느냐만.

키리에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고, 뺨과 손에 묻은 흙을 털어 내주던 나타니엘은 문득 못 보던 것을 발견했다. 키리에의 목덜미 근처, 옷깃 사이로 새파란 얼룩이 보였다.

그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마차에서 크게 등을 부딪혔을 때 생긴 멍인 게 분명했다. 앓는 소리 한번 내지 않기에 모르고 있었건만, 목덜미 근처까지 타박상이 타고 오른 것을 보면 지독히도 심하게 부딪힌 모양이었다.

[…….]

나타니엘이 잠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약한 자괴감이 들었다. 그토록 오래 산 주제에, 핏덩이 같은 인간과 줄다리기 좀 하겠다고 다치는 걸 내버려 두다니.

나타니엘은 깊은 한숨을 쉬고서 다시 키리에의 옷깃 사이를 바라보았다. 다쳐본 적이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멍으로도 사람이 죽을 수 있지 않던가? 키리에는 유난히 깃털처럼 가벼운 편이니 뼈가 부러졌거나 고름이 고였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유난히 살결도 여렸던 것 같다. 정자세로 누워 있으면 피부가 짓무르지 않을까?

나타니엘은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그는 세상의 모든 악독을 아우르지만, 그 탓에 뭔가를 되살리거나 치유하는 것만은 할 수 없다. 상처가 심해 보이고, 이러다 죽을 것 같고, 그러면 그는 몹시 슬플 것이고…….

나타니엘이 복잡한 마음으로 일단 살펴보기라도 해야겠다고 다짐하고서 키리에의 옷깃을 들춘 순간이었다.

거짓말같이 키리에가 눈을 떴다.

“…….”

보라색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깜빡거렸다. 나타니엘은 지금 자신이 잠든 숙녀를 추행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몹시 언짢아졌다. 그러나 놀랍게도 더 언짢아질 일이 남아 있었다.

[오해가…….]

키리에가 나타니엘이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다시 눈을 감은 것이다.

나타니엘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키리에는 마치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절대 보고 싶지 않은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일일이 반응하는 모습을 감추고 싶은지 눈꺼풀은 가볍게 닫혀 있었지만, 턱에 힘을 주고서 이를 악문 것이 보였다. 체온이 올라가고, 대충 늘어뜨려 놓았던 손이 주먹을 쥐기도 했다.

나타니엘의 동작이 멈췄다. 그는 자신이 ‘그럴 사람’으로 보였다는 것, 그리고 실제로 그런 오해를 받기 딱 좋게 행동했다는 것, 그 ‘오해할 만한 상황’을 키리에가 이토록 온몸으로 싫어하는 것, 그러면서도 그를 외면하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앞으로 벌어질 일을 참으려 드는 것 중 어느 것에 제일 기분이 나빠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타니엘이 조소를 흘리며 키리에의 머리 옆을 짚었다.

[키리에 뷰캐넌.]

그가 사납게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내가 무시가 되나?]

키리에는 그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달빛이 들지 않는 숲은 어두웠고, 그 속에서 고개 돌린 키리에의 목덜미는 유난히 하얗게 빛났다. 그녀가 보통 사람이었다면 차라리 유혹이라고 생각하기 딱 좋았다.

하지만 지금 키리에의 내면에서 울리고 있는 목소리는 두려움과 슬픔뿐이었다. 분명 상황은 오해가 맞았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정말로 일말의 기대, 일말의 흥분조차 없는 것이다.

나타니엘의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헝클어졌다. 기분이 엉망이었다.

[키리에.]

“…….”

[대답해.]

그래도 키리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험 삼아 나뭇가지만도 못하게 가는 양 손목을 모아쥐어도 얌전했다. 감정을 참느라 가슴이 밭게 들썩이는 것을 빼면 정말 잠든 것만 같았다.

보이는 광경 자체는 좋았다. 기분은 몹시 무참했지만.

[나를 말릴 생각이 없나?]

나타니엘이 좀 더 상체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그는 손목을 쥐지 않은 손으로 키리에의 고개를 돌려, 이마를 맞댔다. 그녀의 눈꺼풀이 약하게 움찔댔다.

[내가 품위를 아는지라 가만히 있을 뿐, 사실 너를 괴롭힐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남아 있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키리에의 눈꺼풀이 약하게 움찔댔다. 긴장 때문인지 그녀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틈으로 흘러나온 숨결은 거의 그대로 나타니엘이 삼켰다. 일순 나타니엘의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듯 어떤 충동이 와르르 쏟아졌지만, 다행히 그는 손에 힘을 한 번 주었다 푸는 것으로 그것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아니면 사실 기대하고 있니?]

그 말을 하며 나타니엘의 기분은 좀 더 가라앉았다. 키리에는 끝끝내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속눈썹끼리 엉키는 거리에서 눈을 깜빡여도, 끝끝내.

그도 알고 있었다. 설령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키리에가 자기 뜻을 굽히지는 않으리란 것을.

좀 더 경고해 볼까 고민하던 나타니엘이 이내 몸을 일으켰다. 상황에 신물이 나는 것과는 별개로 장소도 계절도 별로였다.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

[상처는 꼭 숲 짐승에게 보이도록.]

그가 차분히 말하며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러자 딱 손아귀만큼 새파란 멍이 든 것이 보였다. 그를 본 나타니엘이 다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는 이 솜사탕보다 연약한, 그리고 통각이 맛이 간 게 분명한 여자에 대해 다시 한번 염증을 느꼈다.

더 이 자리에 있다간 정말 인내심이 끊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나타니엘이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키리에의 입에서 아주 약한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 어지간히 싫었겠지.]

그는 자신이 뭐에 제일 기분이 나빴는지를 깨달았다.

[둄2 절갠 교환재공타싸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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