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관심
버몬트 후작의 군대는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나야 했다.
“이게 말이나 되나! 그만한 병력이 프로노이아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느냔 말이야!”
막사 안에서 후작이 노성을 내질렀다.
“대체 그런 것도 조사하지 않고 뭣하는 거야! 너희가 그러고도 버몬트의 녹을 받아먹어?!”
“죄송합니다, 후작님.”
부관들은 모두 묵묵히 그의 진노를 받아들였다. 분명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기록되지도, 집계되지도 않은 마법 병단의 존재를 어떻게 미리 안단 말인가.
하지만 부관들은 대꾸 하나 없이 후작이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그가 거병한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이럴 순 없어! 내가 이걸 위해 국왕에게 뭘 갖다 바쳤는데!”
마지막으로 의자를 내던져 부순 후작이 씩씩거리며 제자리에 섰다. 그는 눈을 희번덕대며 부관들을 돌아보았다.
“병력은!”
“현재 파악 중입니다.”
“그 식충이 같은 기사들은!”
“다행히 상처는 없…….”
“다행! 지금 그걸 다행이라고 지껄인 게 네 주둥아리냐?!”
버몬트 후작의 손에서 잉크병이 날아갔다. 부관은 머리에 병을 맞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언제든 전선에 참여할 수 있게 조치해 놓겠습니다.”
“일단 진입만 하면 돼. 암살조는?”
“대기 중입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언제든 작전 가능합니다.”
“그럼 당장 준비해!”
후작이 날카롭게 눈을 치떴다.
“마법사 부대는 순간 화력은 강하지만 그게 오래 가진 않는다. 아주 잠시만 전열을 무너뜨리면 돼. 안쪽에서부터 공략한다.”
부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가 이번 사태는 적을 얕봐서 생긴 실수일 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도시로 들어가는 물자를 끊어! 주변 도시에는 괜히 끼어들지 않게 협조를 요청한다.”
“알겠습니다.”
“상대는 고작 공작, 아니지, 근본은 고작해야 백작가 계집 아닌가!”
후작이 구렁이 탈을 쓰고 숨겨 놓았던 사나운 이빨을 그대로 드러내며 흉포하게 웃었다.
“뷰캐넌 공작이 딸에게 전술을 가르쳤을 리 없어. 장기전으로 가면 바닥을 드러낼 거다.”
“저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부관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프로노이아는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도시입니다. 전설경이 나서서 돕지 않는 한 물자만 끊어도 오래 가진 못할 것입니다.”
“그래. 국왕은 나서지 않겠다 약조했고, 마법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어…….”
버몬트 후작이 팔을 펼치며 강하게 외쳤다.
“명령한 대로 시행해! 우리는 반드시 전설경 앞에 다다른다!”
“명 받들겠습니다.”
부관들이 경례한 뒤 물러났다. 지휘관 막사 안에 남은 건 이제 발렌시아 버몬트 후작뿐이었다.
주변은 난장판이었다. 그는 씩씩대며 사위를 둘러본 뒤,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야, 초조해하지 마라, 버몬트…….”
막사 안에 남은 후작이 킬킬대며 웃기 시작했다.
키리에 뷰캐넌은 독 안에 든 쥐다. 처음에는 그녀가 나섰기에 당황했지만, 생각해 보면 도리어 이득이다. 키리에 뷰캐넌을 이용해 전설경을 꾀어내면 된다. 오히려 키리에 뷰캐넌이라면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할 테니.
‘단 하나, 걱정이 있다면…….’
후작이 초조하게 막사 안을 서성거렸다.
‘지금 이 순간.’
아직 전열이 가다듬어지지도, 주변을 봉쇄하지도, 지원군이 도착하지도 않은 바로 이 순간. 보통은 눈치 보며 서로를 견제하는 함성의 공백기.
지금 습격당하면 반드시 치명적인 결과가 나온다.
‘하지만 풋내기라면 절대 지금 움직이지 않는다. 하물며 여러 해 싸움을 지휘해 본 지휘관도 망설일 순간이니까.’
후작이 염소 같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 년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리 없지…….”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후작이 대답하다 말고 굳었다.
‘어린애 목소리?’
그가 뻣뻣한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엔 검은 옷을 입고 흰 베일을 두른 작은 여자아이가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는 다 예상했는데요.”
잠시 사태를 이해하지 못한 후작이 뒤늦게 입을 벌렸다.
“경비……!”
“앗. 실수.”
안네마리가 주먹을 내질렀다. 후작의 기억은 거기서 끝이었다.
버몬트 후작은 기절한 채 묶여 있었다. 옆에서는 안네마리가 그를 감시 중이었다.
그를 묶어 놓은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의 대련장은 텅 비어 있었다. 자리에 모인 사람은 대책 회의에 참여했던 임원급 학자들 몇 명뿐. 사람들은 슬쩍슬쩍 안네마리를 흘낏거리며 수군댔다.
“저 시녀가 잡아 왔다고 했소?”
“엘프 혼혈인 듯한데, 역시 엘프의 주술은 대단하군…….”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 바로 상황이 해결될 줄은 미처 몰랐소.”
사람들은 회의에서 그야말로 감정 없는 귀족처럼 명령하던 키리에 뷰캐넌을 떠올렸다.
“그러게요. 이긴 날, 바로 야습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땐, 솔직히 너무 성급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호크송 박사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새 영주님은 좀 과감한 데가 있는 것 같더군요.”
“영주님이라…….”
마법사 대표 일리오르가 턱수염을 쓸었다.
프로노이아는 전통적으로 자치 도시다. 오래도록 호국경의 영토였으나, 그는 학자들이 자유롭게 토론하고 도시를 발전시키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영토의 주인이 뷰캐넌으로 바뀌었다는 점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들도 제냐 하트우드의 남편이었던 세자르 뷰캐넌이 얼마나 승냥이 같은 남자인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딸, 키리에 뷰캐넌을 떠올린 일리오르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여러 가지 걱정이 많았지만, 그냥 기우였던 모양입니다.”
다행히 키리에 뷰캐넌은 소문의 아비를 닮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호크송 박사가 미소지었고, 테마르 의장이 기대감에 충만한 얼굴로 덧붙였다.
“게다가 프로노이아에 거액을 지원해 주겠다고 했고. 학문에 대한 관심도 있어 보였고 말이오.”
“그리고 또 있소. 들으셨는가, 다들?”
말을 꺼낸 학자 한 명이 낮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뷰캐넌 공작가의 장자가 이번에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하오.”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말인즉 그녀가 이제…….”
그때, 은밀한 속닥거림을 가로막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리에였다.
“후작은?”
그녀는 짚고 있는 지팡이가 검처럼 보일 만큼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 들어왔다. 다리 부상 탓에 걸음은 느렸지만, 그마저도 의도된 여유처럼 보였다. 열 때문에 약간 붉게 보이는 얼굴은 오히려 그녀의 아름다움에 힘을 보탰다.
키리에는 중앙으로 걸어와 대련장 한복판에서 기절해 있는 후작을 살폈다.
“깨워.”
그녀가 차갑게 명령했다.
그 말에 안네마리가 염낭에서 청록색 껍질을 가진 작은 장수풍뎅이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버몬트 후작의 귓구멍에 집어넣었다.
몇 초 뒤, 후작이 기겁하며 깨어났다.
“으, 아아아아! 내 귀! 내 귀!”
풍뎅이는 그가 몸부림치는 틈을 타 귓속에서 빠져나와 날아갔다. 후작은 한참 뒤에야 진정한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키리에를 발견했다.
“이게 누구야! 키리에 뷰캐넌 양 아니신가!”
후작의 눈이 사납게 번득였다. 그는 뱀처럼 고개를 휘둘러 그녀의 주위를 살폈다.
“전설경에게 잡혔다던데, 아예 그냥 그를 다리 밑에 두기로 했나 보지?”
사람들이 숨을 들이켰다. 버몬트 후작가가 강성이라더니 그 말이 참말이었나 보다.
하지만 키리에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글쎄. 전설경을 다리 밑에 두고 싶어 하는 건 그대 아닌가? 거병까지 한 열렬함에 감탄을 드리지.”
키리에의 대답에 후작이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오, 키리에 뷰캐넌……. 어리석기도 하지. 그의 용모, 권력, 부에 그리도 깜빡 속아 넘어가다니.”
“세상에서 거기에 속지 않을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 나일 거야. 하지만 그대의 이해는 필요 없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지.”
키리에가 지팡이 끝으로 강하게 바닥을 찧었다.
“국왕과 무슨 이야기를 했지?”
단호하게 오만한 어조였다. 하지만 버몬트 후작이 고작 그 정도에 겁먹을 남자가 아니었다. 그가 실소를 흘렸다.
“그게 궁금한가? 국왕과 내 거래가?”
“그래.”
“보아하니 국왕 전하께서는 이 문제에 참견하지 않겠다고 했나 보군.”
키리에가 태연하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랬지. 무장 세력이 민간인뿐인 도시를 침략하는데 그걸 좌시하다니, 이례적인 일이야. 뭔가 있었겠지. 대충 예상은 가지만 말이야.”
“거기까지 예측했으면 알아서 풀 문제 아닌가?”
“눈앞에 두드리면 정답이 나오는 가죽 공이 있는데 굳이?”
키리에의 눈짓을 받은 안네마리가 버몬트 후작을 바닥에 처박았다. 턱을 땅에 찧은 후작이 곧 눈을 희번덕대며 이를 갈기 시작했다.
“날 방해하지 마라, 뷰캐넌.”
“아무래도 내가 질문을 좀 더 자세하게 풀어드려야 할 것 같군.”
키리에가 후작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버몬트 후작.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단 말이야. 국왕이 대체 어떻게 그대를 부추겼지?”
그때 버몬트 후작이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부추겨?”
“그래.”
그는 정말 놀란 것 같았으나, 키리에는 방심하지 않았다. 버몬트 후작은 중앙 정계에서 구를 대로 구른 인물이다. 당연히 키리에보다 노련할 터였다.
“고작 저 정도 군대로 전설경을 토벌하겠다고 나섰을 리 없지. 목적은 나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해가 안 가. 고작 이런 일에 버리기엔, 버몬트 후작가의 이름은 그렇게 값싸지 않거든.”
그게 키리에의 의문이었다.
버몬트 후작, 그 구렁이 같은 남자가 대체 왜 이런 무리한 일을 시도했을까? 아들의 복수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지기엔 그는 너무 가진 게 많다. 국왕이 뒤에서 그를 부추긴 게 틀림없었다. 아니면 중앙 정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거나.
‘혹은 국왕이 발라브리가의 마법으로 뭔가를 준비하기 위해 시간을 끄는 것일지도 모르지.’
이젠 관계없는 일이지만, 이미 뷰캐넌은 폭풍의 눈에 있으니 모르쇠 할 수도 없었다.
“말해, 후작.”
그때였다.
“크, 크큭…… 하하! 크하하하하!”
버몬트 후작이 침까지 튀기며 웃기 시작했다. 키리에는 눈썹을 조금 들썩였을 뿐이지만, 사람들은 좀처럼 끊이지 않는 그의 광소에 불안한 표정으로 수런대기 시작했다.
이윽고 버몬트 후작이 만면 가득 연민과 경멸이 뒤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키리에 뷰캐넌. 넌 확실히 세자르 뷰캐넌의 딸이군.”
“내가 내 생물학적 출신을 부정한 적은 없는 줄로 아는데.”
“크크, 크흐흐……. 키리에 뷰캐넌…….”
후작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는 곧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불쌍한 계집.”
“아가씨. 명령을.”
굳은 얼굴의 안네마리가 주먹을 쥐고서 후작의 뒷덜미를 잡았다. 키리에가 고개를 저었다.
“들어나 보지. 내 어디가 그리 불쌍한지.”
“큭.”
후작이 목구멍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울리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래, 넌 모를 만도 하지. 내가 ‘부추김당해서’ 이런 ‘가망 없는’ 짓을 벌였다고 생각할 만하지. 그야 넌 뷰캐넌이니까……. 큭!”
“핵심을 말해.”
“크하하! 난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은 없다, 뷰캐넌!”
일순 후작이 미친 사람처럼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안네마리가 뒤에서 그를 잡아 눌렀지만, 죽기 전의 발악인지 후작의 반응은 거셌다.
“난! 말 그대로 전설경을 죽이러 왔다! 날 방해하지 마라, 뷰캐넌!”
키리에가 잠깐 레쇼를 떠올렸다. 전설경을 토벌하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리라. 키리에가 고개를 저었다.
“혹시 못 본 새에 정신 질환이라도 생겼나? 아니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속담을 아무도 그대에게 알려 준 적이 없나?”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냉정했다.
“불가능해.”
“물론 불가능하겠지!”
후작의 핏대 선 목에서 짐승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그가 너무나도 쉽게 그것을 인정한 탓에, 키리에의 얼굴이 굳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 역시 입을 벌렸다. 공기가 적막해졌다.
버몬트 후작은 침을 탁 뱉고는, 안네마리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내 위에서 내려와라, 시녀. 네깟 게 끼어들 무대가 아니다.”
안네마리의 동공이 커지고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키리에가 손을 들었다.
안네마리는 당장이라도 버몬트 후작의 목을 날리고 싶다는 얼굴을 했지만, 키리에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후작은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손목과 발목이 묶여 있는 탓에 그의 움직임은 여간 힘겨워 보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하찮고 우스꽝스러웠어야 할 동작이 그렇게 느껴지지 않은 것을 보면, 그는 확실히 대귀족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 후작의 눈이 창끝처럼 예리해졌다.
“불가능하지. 아무렴. 네깟 경험도 무엇도 없는 계집애가 아는 걸 이 발렌시아 델라노 버몬트가 모를 것 같나?”
키리에가 묵묵히 그를 응시했다. 버몬트 후작은 그야말로 하늘을 향해 꽂힌 창과 같은 자세로 키리에의 시선을 받아 냈다.
“하지만 넌 영영 모를 거다, 키리에 뷰캐넌. 넌 뷰캐넌이니까.”
“이해할 수가 없군. 알고서도 불가능에 도전했다고?”
“그렇다.”
“어째서?”
일순 질문을 받은 버몬트 후작의 얼굴에 큰 감정이 떠올랐다. 그는 순식간에 껍질만 남은 듯했다.
“글라디오소는 내가 사랑하는 내 아들이니까.”
키리에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그녀는 이내 당황을 숨기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그 말장난이 정말이었다고?”
“큭, 크하, 크흐흐흐! 말장난이라…….”
후작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래, 그렇지. 넌 그 승냥이의 딸이었지. 아비는 그 모양이고, 어미는 미친 천재였으니, 넌 모를 만도 하지!”
“하지만.”
키리에가 말을 멈췄다.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로? 정말 아들의 복수라고?’
그녀는 잠시 세자르 뷰캐넌과 제냐 하트우드를 떠올렸다. 그리고 코웃음 쳤다.
“나이를 먹으면 농담에도 재주가 없어지나 보군.”
“그렇게 생각하나?”
“당연하지. 버몬트 후작가는…….”
“7대 가문이지. 창기사 페즈니악을 시조로 두고 있으며, 대대로 뛰어난 기사를 배출해 온.”
“그걸 다 내버리겠다고? 이루지 못할 복수를 위해? 이미 죽은 아들 때문에?”
버몬트 후작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낄낄거렸다.
“문제가 있나?”
“있지.”
“말해 보시게.”
묘한 조롱기가 섞인 후작의 제안에 키리에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고작 자식 좀 잃었다고 가진 걸 다 내다 버리는 부모가 어디 있나.”
안 그래도 조용했던 주변은 더 조용해졌다. 주변 사람들의 표정도 이상했다. 그들은 차마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키리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버몬트 후작이 아니라.
사교계에 몸담았던 키리에는 그게 자신의 발언 때문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챘지만, 왜 그들이 그렇게 조용한지는 알 수 없었다.
버몬트 후작의 얼굴은 이제 놀랍도록 차분했다.
“그래. 넌 이해할 수 없겠지. 죽은 자식의 복수를 하겠다고 가진 걸 다 내버리는 부모의 마음을. 그 정도로 사랑받은 적이 없을 테니까.”
버몬트 후작과 키리에의 마음속에 동시에 세자르 뷰캐넌의 모습이 떠올랐다. 연보랏빛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늘 주변을 물어뜯고 싶어 하는 오만한 대귀족.
키리에의 머릿속에는 제냐의 모습도 떠올랐다. 연구를 위해 일생을 바친 괴짜이자 천재. 그녀는 키리에가 열 살이 될 때까지 키리에를 키웠지만, 어린 키리에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키리에가 영리하고 눈치 빠르게 굴지 않았다면 좀 더 일찍 키리에를 떠났을 것이다.
키리에는 자신의 숨이 가빠오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속이 답답했다.
후작의 무심한, 그리고 어딘지 연민이 서려 있는 눈빛은 더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건 귀족이 귀족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그는 어른이 아이를 바라보듯, 동량의 세월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관록이 담긴 깊은 눈으로 쐐기를 박았다.
“불쌍하고 어리석은 것. 네가 왜 그리 치열하게 살았는지 알겠구나.”
그 순간, 푸른 빛과 함께 바람이 나부꼈다.
어느새 나타난 나타니엘이 키리에의 눈을 가린 뒤, 나직하게 속삭였다.
[잠깐 자고 있으렴.]
키리에는 정신을 잃었다. 쓰러지는 키리에를 품에 안고서, 나타니엘은 너무나도 고요한 얼굴로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열이 높군.]
그가 중얼거렸다.
[이제 네 주인의 몸 상태는 알 바 아닌 모양이구나.]
빈정대는 기색 없이 내뱉은 냉소에 안네마리의 몸이 움찔했다.
“아가씨가 꼭 일해야 한다고 명령을…….”
[쉬게 했어야지.]
“하지만 안네마리는, 또 실수할까 봐…….”
[실수가 두려워 책임에 눈 감나?]
안네마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나타니엘의 말이 옳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나타니엘이 심기가 불편한 듯 한숨을 쉬었다. 지켜보는 사람이 덩달아 한숨을 쉬게 될 만큼 고혹적인 모습이었다.
[데려가서 눕혀.]
“크응, 네…….”
안네마리는 품 안에서 개 모양 인형을 꺼내, 크기를 키웠다. 그녀는 경건하게 키리에를 그 등 위에 올렸다. 키리에는 늑대 위에 잠든 공주처럼 누워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전설경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버몬트.]
발렌시아 버몬트 후작이 부름에 이를 드러내며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은 튀어나올 것 같았고, 목에는 핏대가 서 있었다. 누군가 나타니엘의 목을 물어뜯을 기회를 준다면 주저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전설경…….”
[그래.]
나타니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나른하게 고개를 젖히며 긴 숨을 내쉬었다.
[뭐에 그리 안달 나 있는지 들어나 보지.]
그 말을 들은 버몬트 후작이 대노한 얼굴로 콧김을 내뿜었다.
“나 발렌시아 델라노 버몬트는, 전설경 나타니엘에게 기사 대 기사로 결투를 신청한다!”
나타니엘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결투?]
“그래! 어느 한쪽의 목숨이 끊어져야 승패가 갈리는 진검 승부 말이다!”
이도 저도 못하고 구경꾼이 된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버몬트 후작은 절대 전설경을 이길 수 없다. 그걸 알면서도 후작의 눈에서는 그를 패배시키겠다는 열망이 빛나고 있었다. 마치 진심으로 그를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타니엘은 순식간에 심드렁함을 넘어 미묘한 경멸이 엿보이는 얼굴로 후작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전부인가?]
후작의 얼굴에 당황이 떠올랐다.
“뭐?”
[고작 그따위 장난을 하자고 거병을 해? 시대가 많이 변하긴 했군.]
“장……난?”
[초대 버몬트도 귀에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더니, 후대도 그렇구나.]
나타니엘이 어서 자리를 뜨고 싶다는 듯이 시선을 건물 쪽으로 옮겼다. 아마 키리에 뷰캐넌의 방으로. 그의 성의 없는 태도에 버몬트 후작의 수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 날 무시하는 건가?”
[따분하군.]
“전설경! 난 지금 그대에게 기사도를 지키란 말을 하고 있는 거요! 그대가 진정 전설경이라면……!”
[시끄럽고.]
“나와 대결해! 내 창을 받으란 말이야아악!”
[주제도 몰라.]
나타니엘이 눈을 내리깔았다. 나뭇가지쯤은 거뜬히 올려놓을 수 있을 것 같은 긴 속눈썹이 깜빡임에 맞춰 오르락내리락했다.
[나는 네가 손쉽게 자진하는 데에 쓰라고 있는 사람이 아니란다.]
“전설경!”
후작이 광기마저 느껴지는 노호를 내질렀다. 하지만 나타니엘은 냉정하게 몸을 돌리며, 테마르 의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위를 지키고 있던 이들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건조하게 명령했다.
[가둬 놔.]
“예? 예……. 그, 하지만…….”
“전설경! 이 악마 같은 자식! 나와 대결해! 대결하란 말이라! 내 자식의 원수!”
[재갈도 물려놓고.]
그에게는 버몬트의 절박함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나타니엘은 산책을 나왔다 돌아가는 듯한 산뜻한 걸음걸이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
나타니엘이 키리에의 침실에 다다랐을 때, 안네마리가 때마침 방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키리에는?]
“그, 그게…….”
말을 더듬는 것을 보면 또 제구실을 못 한 모양이었다. 나타니엘이 무심한 눈으로 안네마리를 내려다보았다.
“이, 일하시겠다고, 커피를…….”
나타니엘이 희미한 조소를 흘렸다. 일부러 잠깐 재우긴 했지만, 일어나서도 일이라니. 지독할 정도의 업무 중독이다.
[그걸 내버려 뒀나?]
“하, 하지만 안네마리는 아가씨에게 미움받기 싫어요……. 저번에도 아가씨가 옳았어요…….”
[축하라도 해 줘야겠는걸. 미움받기 싫다는 네 알량한 마음이 네 주인을 갉아먹는 걸 지켜보게 되었으니.]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제 치맛자락을 잡고 애처로운 눈을 하고 있던 시녀는 이내 절박하게 외쳤다.
“나, 나타니엘 님이 말려 주세요!”
나타니엘의 고개가 앞으로 기울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죽이고 싶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그 주제넘은 요청에 대한 감상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놀랍네.]
“그, 그치만, 그치만!”
안네마리가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거렸다. 그녀는 두려움에 오금을 덜덜 떨면서도, 키리에가 있을 방문 쪽을 흘낏 바라본 뒤 말했다.
“나타니엘 님은 아가씨에게 미움받아도 상관없으시잖아요…….”
울 준비가 충분한 검은 눈을 내려다보며, 나타니엘은 희미한 짜증을 느꼈다. 상관이야 없지. 상관이야 없다. 하지만 그는 원래 남의 부탁을 상냥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다.
나타니엘은 곧 차갑고 심드렁한 낯으로 몸을 돌렸다.
[물러나.]
안네마리는 고개를 푹 떨구고는 걸어가 버렸다.
문 앞에는 이제 나타니엘뿐이었다. 그는 예의를 아는 종말이기에 문을 두드리려 손을 올렸으나, 이내 그것을 그만두었다. 환자와 신경전 하는 것은 그의 취향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그냥 그림자 속으로 스며드는 쪽을 택했다.
방은 어두웠다. 밤색의 두꺼운 비로드 커튼이 반 정도 햇빛을 가리고 있었다. 키리에 뷰캐넌은 창문을 등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한 손에는 깃펜, 한 손에는 서류. 그녀는 아마 일하다 죽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방 안에 그림자가 가득했기 때문에, 나타니엘은 별 어려움 없이 키리에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한 걸음씩, 느리게 그녀에게 다가가던 나타니엘은, 문득 키리에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앉은 채로 기절했나?
마음이 조급해졌다. 거의 모습을 드러낼 뻔했을 정도로.
하지만 그는 뒤늦게 그녀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느리고 확실하게 온몸의 피가 싸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키리에는 완벽하게 표정이 없었다. 깜빡임 하나 없는 큰 눈 탓에, 그녀는 마치 잘 만든 도자기 인형처럼 보였다. 그 상태로 말없이, 미동도 없이 허공만을 응시하는 것이다.
나타니엘이 희미하게 인상을 썼다. 그는 안다. 사람이 텅 비면 저런 표정이 나온다는 것을. 급류처럼 거센 감정에 수없이 휩쓸려본 사람만이 저런 표정을 하게 된다는 것을.
나타니엘은 자신이 적잖이 충격을 받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이런 표정을 지으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공허와 굴복과 낙담은 그녀와 가장 거리가 먼 단어 같았고, 그녀와 가장 잘 어울리는 부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너무나도 연약하고, 고독해 보였다. 건드리기만 해도 흰 재가 되어 부서질 것만 같았다.
나타니엘은 깨달았다. 자신이, 사람들이 키리에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그녀는 강인하고, 굳세고, 타인을 배려하며, 슬픔에 굴복하지 않으니, 당장은 조금 힘들더라도 다시 일어날 거라고. 화목하지 못한 가정사나, 눈앞에서 사람 목이 날아가는 충격 따위 이겨낼 거라고. 약자에게 손을 내밀고, 망가진 자를 구원할 거라고. 키리에는 마치 신화 속에서나 존재할 것 같은 선량함의 우상이었다.
키리에는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던 것이다. 자신을 상대로, 죽음을 각오하고서도 그 페르소나를 유지할 정도로.
그리고 버몬트에 의해 강제로 끄집어내진 그녀의 본질이, 지금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나타니엘은 평소에는 절대 볼 수 없는 달의 뒷면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먼지가 고요히 떠다니는 정적인 방, 그림자 속에 숨은 나타니엘 앞에서 키리에는 울지도, 웃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게 키리에 뷰캐넌의 온전한 밑바닥이었다.
종말도, 사랑도, 죽음도, 희망도 의미를 잃고야 마는, 한 사람의 온전한 고독.
그를 지켜보는 나타니엘의 눈가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깨달음이 스쳤다.
***
버몬트 후작은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의 지하에 갇혔다. 사람용 감옥은 없지만, 간혹 치료를 위해 포획해 온 야생 동물용 감옥은 있었던 것이다.
테마르 의장과 학자들은 사람을 잡아본 적이 없었기에 그를 다루는 일을 무척 버거워했다. 그래서 일단 상급자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방치하기로 결정했다. 잡일을 하는 누군가에게 감시를 명령한 뒤에 말이다.
그 누군가가 후작이 수를 써서 심어 놓은 암살자라는 것을,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멍청한 놈들.”
버몬트 후작이 혀를 차며 이죽거렸다. 수갑도 재갈도 풀렸다. 밤까지 기다려 그를 풀어 준 암살자가 후작 앞에 부복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전설경은?”
“그는 저희 능력으로는 기척을 감지할 수 없습니다.”
버몬트 후작이 다시 한번 혀를 찼다.
“그럼 키리에 뷰캐넌이다. 그 기사도도 모르는 자에게 복수하려면, 똑같이 소중한 걸 잃는 고통을 알려 주는 게 낫겠지.”
암살자가 일어나 후작에게 검을 건넸다. 당연하지만, 버몬트 후작가의 가주는 대대로 뛰어난 기사였다.
“키리에 뷰캐넌은 주거 공간 최상층에 있습니다.”
“안내해.”
주변을 살피고 돌아온 암살자 두 명이 합류했다. 그들은 후작을 보고 묵례한 뒤, 척후를 보고했다.
“전설경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괴력의 시녀는 주방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키리에 뷰캐넌은 고열로 앓고 있는 모양입니다.”
“잘됐군.”
안네마리에게 한 번 당한 적이 있는 버몬트 후작이 낮게 대답했다. 그는 기사이기에 마법사나 주술사와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한 명의 자식 잃은 아비와 세 명의 암살자는 조용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프로노이아의 밤은 고요했다. 마법사들,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은 우두머리를 잃은 버몬트 후작가의 군대를 감시하러 시 외곽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덕분에 대도서관은 당당히 복도를 걸어도 될 만큼 사람이 없었다.
미리 알아낸 키리에의 침실에 도착한 암살자들은 서로 수신호를 나누었다. 한 명이 문에 붙어 조심스럽게 내부의 인기척을 살폈다. 안쪽에서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뷰캐넌은 자고 있는 게 분명했다.
조용하군. 시작해.
수신호가 오갔고, 암살자 중 한 명이 신중하게 문의 잠금장치에 손을 댔다.
하지만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쯤 버몬트 후작은 희미한 불안감을 느꼈으나, 암살자가 문을 여는 게 더 빨랐다.
문은 소리도 없이 열렸다. 대도서관의 다른 문들이 오래된 건물답게 듣기 싫은 소리를 내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게 나타니엘이 키리에 몰래 사람을 시켜 경첩과 문 구석구석에 기름을 바르게 시켜서라는 것을, 그들은 알 턱이 없었다.
방은 백색 달빛이 가득 들이차 있었다. 전혀 밤처럼 느껴지지도 않았거니와, 방 안쪽이 아예 현실과는 분리된 몽환적인 공간처럼 느껴졌다.
몸을 낮추고 발소리를 죽인 채 방으로 들어선 침입자들이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방 주인인 키리에 뷰캐넌이었다.
그녀는 잠든 상태로도 어딘지 차갑고 서늘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열 때문인지 얼굴은 붉었고, 땀에 젖어 있었으며, 옷자락은 흐트러져 있었다. 금욕적인 인상의 그녀가 그토록이나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도리어 그녀를 좀 더 교태롭게 보이게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퇴폐적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을 유혹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남자가 그녀 옆에 있었다.
전설경 나타니엘은 키리에의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측면에서 달빛을 받는 그의 얼굴은 온화하고 고요했다. 누군가 지고의 품위를 찾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가장 먼저 그를 찾아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누구라도 정복할 야살스러움을 찾는다면 그 또한 나타니엘을 찾아야 할 터였다.
침입자들은 키리에 뷰캐넌과 나타니엘이 함께 있자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어떤 움직임을 보이지는 못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나타니엘의 손가락이, 아주 교묘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손가락이 문제였다.
유난히 길고 관절 마디마디까지 농염한 손가락이 천천히, 키리에 뷰캐넌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열 탓인지, 키리에는 그의 찬 손이 마음에 든 듯했다. 그녀는 살갗을 간지럽지는 나타니엘의 손가락을 따라 순종적으로 고개를 기울이거나 했다.
나타니엘은 침입자들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키리에가 열 오른 얼굴로 그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가을의 호수처럼 고요한 눈이었지만, 누구도 그가 정말 평정을 유지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암살자들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의도치 않게 남의 부도덕한 사생활을 엿보게 되었을 때 반사적으로 침묵하게 되는 그런 종류의 망설임이었다.
나타니엘의 손가락은 그들 모두를 무시한 채, 계속해서 키리에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는 잠든 키리에의 눈꺼풀을, 속눈썹을, 오뚝한 코를, 둥근 뺨을, 여린 살갗을 건드렸다.
마침내 얼굴 가장자리를 맴돌던 손가락이 천천히 키리에의 입술에 닿았을 때, 키리에 뷰캐넌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응…….”
밤 탓인지, 열 탓인지, 과하게 색정적으로 들리는 소리였다. 숨을 들이마시려는지 가슴이 살짝 들썩였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게 숨을 쉬기 위해서였든, 잠꼬대를 위해서였든 그건 중요치 않았다. 침입자들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아랫입술에 얹혀 있던 나타니엘의 손가락은 키리에의 입이 다물어질 때, 자연스러운 물리적 흐름으로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니까 아마도 혓바닥, 혹은 젖은 점막이 닿았으리라고, 암살자들은 생각했다.
찰나 간 나타니엘의 푸른 눈이 흔들렸다.
키리에는 입 안에 들어온 이물질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것을 조금 핥는 듯했다가, 이내 원하던 것이 아니었는지 혀를 내밀어 손가락을 밀어내곤 미간을 좁혔다.
나타니엘은 순순히 손가락을 물렸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한참을 그대로 키리에를 지켜보며 앉아 있던 그는 그제야 옹기종기 모여 얼음처럼 굳어 있는 침입자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너흰 조금 눈치가 없구나.]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굳어 있는 버몬트 후작과 침입자들을 지나쳐 방을 나갔다.
나타니엘은 한밤의 불청객들이 따라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나른하고 요염한 숨을 내쉬었다.
[거기서 그러고 있을 거니?]
도리도리. 암살자들은 순종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버몬트 후작은 별로 본 것도 없는데 남의 도색을 훔쳐봤다고 욕을 먹는 하인이 된 듯한 억울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닫자, 어설픈 자세의 세 암살자와 어쩐지 진이 빠진 버몬트 후작,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자기만은 진흙 위의 연꽃처럼 근사한 나타니엘이 모였다.
누가 먼저 입을 열기도 애매한 그 상황에서,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나타니엘이었다.
[어쩌지.]
“…….”
나타니엘의 말에 네 사람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낮은 숨을 내쉬었다.
[곤란하네. 그렇지?]
“…….”
[너흰 말수도 적구나. 그래, 눈치가 없으면 입이라도 다물고 있는 게 낫지.]
나타니엘은 적을 눈앞에 두고도,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이 태연하게 말을 걸었다.
그는 내내 주먹을 쥐고 있었는데, 그건 주먹 자체에 의미가 있기보다 키리에 뷰캐넌의 혀가 닿았던 손가락을 감싸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혼자 뭔가 생각하는 것 같던 그는, 이내 지독히 그윽한 푸른 눈을 깜빡이며 속삭였다.
[그야 울지 않을 때에도 나쁘진 않았지.]
그렇게 말한 나타니엘이 잠시 알 수 없는 이유로 침묵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렇지?]
그게 가끔 키리에에게나 보여 주곤 하던 천진하고 순진무구한 날 것의 심장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 턱이 없었다.
대답하라는 건가, 아니,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상황이야? 그런 마음으로 당황한 암살자 중 한 명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타니엘의 시선이 곧장 그에게 향했다.
[넌 살려 주지.]
그리고 그는 순식간에 전설경으로 돌아왔다.
그림자가 그의 뒤에서 꿈틀대며 몸집을 부풀렸다. 주변의 온도가 삽시간에 뚝 떨어졌고, 아름다운 입술에는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그 정도로 멍청할 줄은 미처 몰랐구나.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기쁘단다. 너 같은 놈들은 알기 쉽거든.]
나타니엘은 상대에게 격차를 인정시키고 거리감을 벌리는 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반전이 지나치게 빠르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후작과 암살자들은 제때 반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눈 깜빡할 사이에 검은 공간 안에 있었다. 그리고 나타니엘은 그곳에 없었다.
“이, 이게 무슨…….”
뒤늦게 정신을 차린 버몬트 후작이 말을 더듬으면서도 언성을 높였다.
“전설경! 이 간악한 악마 같으니! 우리를 어디로 데려온 것인가!”
검은 어둠 어딘가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는 몹시도 귀족적이고 서늘했다.
[네가 바라던 곳.]
“이리 나와! 내 검을 받으란 말이다!”
대답이 없었다. 주변은 액체 같기도 하고, 기체, 혹은 점액질 같은 검은 안개가 꿀렁거리고 있었다. 안개뿐만은 아니었다. 곳곳에 작게 반짝이는 흰 별이 수천 개가 박혀 있었다.
“저, 저게 뭐야…….”
암살자 중 한 명이 공포에 질려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고, 그제야 그들은 흰 점이 별 같은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눈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들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웃고 있었다. 간혹 잎사귀의 가장자리처럼 작고 뾰족한 이빨 같은 것이 보이기도 했다.
“시, 싫어! 오지 마!”
“흐아아악!”
암살자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와중에도 어딘가에 있을 나타니엘은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 기사도를 숭배하는 자라면 상대해 줄 요량도 있었지. 하지만 내 고양…….]
그의 말이 잠깐 끊겼다. 나타니엘은 한참을 침묵한 뒤, 방금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이 태연히 말했다.
[키리에에게 손대려 했으니, 참으로 유감이군.]
“하! 네가 그딴 말을 하는가!”
암살자들이 겁에 질린 것에 비해, 버몬트 후작은 오히려 더 길길이 날뛰었다.
“인간도 아닌 주제에 기사도를 읊느냐! 너도 네 소중한 사람이 죽는 고통을 느껴야 해!”
[그따위 건 지겹도록 겪었어.]
나타니엘이 흔들림 없이 답했다.
잠시 주춤했던 버몬트 후작은 금세 분노를 되찾고, 검을 뽑아 들었다.
“그렇다면 나와라! 네 여자의 복수를 해!”
[아. 복수…….]
그가 무척 감미롭게 그 단어를 중얼거렸다.
[그것도 재미야 있지. 하지만 나는 너희처럼 무도하지 않기에, 넓은 아량으로 네 소원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단다. 아무래도 그게 요즘 내 새 역할인 모양이거든.]
나타니엘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정말 원하는 건 나와의 대결이 아니잖니. 그렇지?]
그 순간 안개가 물러났다. 숨이 막힐 것 같던 압박감이 사라졌지만, 반길 만한 일은 아니었다. 여전히 검은 공간의 저 멀리서 수백 명의 인간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머리가 없거나, 팔이 없거나, 눈이 없거나 하여 모두 사지가 뒤틀린 시체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검을 들고 있었고, 모두 한 사람이었다.
“아, 아, 아, 아버지…….”
“아, 아빠…….”
“사, 사, 살려 주세요…….”
버몬트 후작의 늙은 얼굴이 절망으로 뭉개졌다. 그의 입에서 소리 없는 절규가 흘러나왔다.
“글라디오소…….”
노기사의 검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아들과 함께 행복하렴.]
나타니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만난 부자에게 안녕을 빌어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들어 있는 어둠을 영원히 접어 버렸다.
다음 날, 발렌시아 버몬트 후작은 감옥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자결했다고?”
키리에가 매섭게 물었다. 초록색 깃이 달린 자줏빛 새틴 조끼 탓에 거대한 꽃다발처럼 보이는 포 박사가 쩔쩔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확실해용. 누가 침입한 흔적도 없었고…….”
“무기는 빼앗았을 게 아닌가?”
“졸도한 척해서 감시하던 사람이 들어오게 한 모양입니다. 버몬트 후작은 체격이 좋다 보니…….”
“체격이 좋은 사람이 졸도를 하나?”
“듣기로는 지네에 물린 뒤 버둥거렸다고 하더군용. 감시하던 사람이 그렇게 증언을 했답니다. 명령대로 잘 지키고 있었다고는 합니다만.”
키리에가 잠시 멈칫했다.
“그 명령이란 건…….”
“호. 그, 아가씨가 쓰러지시고 난 뒤, 전설경께서…….”
포 박사가 슬슬 키리에의 눈치를 보았다. 상급자가 두 명이면 아랫사람은 영 곤란하다.
키리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앓았으니 어쩔 수 없지.”
포 박사가 순식간에 안타까운 눈을 했다.
“건강은 괜찮으신 거지요? 업무가 매우 과중하다고 들었는데…….”
“괜찮아.”
키리에가 단호하게 답했다. 누가 봐도 괜찮아 보이진 않았지만, 포 박사는 입을 다물었다. 그게 귀족의 생리였다. 그는 자기가 맡은 일이라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
“감시를 맡았던 하인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모양이라 쉬게 두었지요. 만나 보시겠어용?”
키리에가 펜을 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의 눈매가 진중해졌다.
“나중에.”
일이 복잡해졌다. 프로노이아 대도서관 안에서 버몬트 후작이 죽었으니 누가 봐도 이쪽이 그를 죽인 것처럼 보이리라. 수도로 호송하려던 계획이 어그러졌다.
“하인을 지킬 만한 사람을 한 명 붙여 줘. 그가 없으면 우리가 누명을 쓸 판이니까.”
“그,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용?”
포 박사가 안절부절못하며 손가락을 꼼작거렸다. 키리에가 펜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전쟁이지.”
“히익!”
“버몬트 후작가의 가신들은 전부 무가야. 곤란하게 됐군.”
7대 가문은 각자 주력 분야가 다르다. 이덴홀 공작가는 내륙 무역, 바르비티 백작가는 광산업, 아치볼드 백작가는 관광업 등.
과거 뷰캐넌은 마법사 가문이었으나, 지금의 뷰캐넌은 철저하게 인맥전으로 승부하는 가문이다. 지방 귀족과의 긴밀한 연계와 그들의 지지가 뷰캐넌이 가진 힘의 핵심이다.
반면 버몬트 후작가는, 놀라울 정도로 무력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다.
정말 전쟁이 일어나면 당연히 뷰캐넌이 불리하다. 초월자 두 사람이 있다면 상관없겠지만, 그들을 끌어들이고 싶진 않았다.
키리에가 편두통이 도져 오는 이마를 누르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국왕 전하께 조정을 요청드리는 수밖에. 수도에 가야겠어.”
포 박사는 듣기만 해도 끔찍하다는 얼굴을 하고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키리에가 피식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 이번 거병은 아마 후작 개인의 목적을 위한 것이었을 테고, 후작가에는 지금 후계자가 없지. 그리고 기사들은 그들의 정당한 주인이 아니면 명령을 듣지 않아. 아마 차기 버몬트 후작을 누구로 올리느냐 때문에 소란스러울 확률이 높아.”
술술 흘러나오는 말에 포 박사의 고개가 갸웃했다.
“그런 건가요? 저는 정치는 잘 몰라서 말이지요.”
“그대들의 역할은 학문이지 정치가 아니니까. 괜찮아. 그런 거 하라고 영주가 있는 거거든.”
마지막 말은 제법 장난스럽게 나왔다. 덕분에 포 박사는 안심하고 돌아갔다.
그를 보낸 키리에가 손등으로 눈을 덮었다.
‘정말 자결일까?’
키리에는 버몬트 후작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나타니엘이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황을 들어보면 의심스러운 구석이 없다. 잠긴 옥, 기절한 감시자. 자신이 클레멘츠 성을 나왔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시체에는 후작이 스스로 목을 찌른 상처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나타니엘의 방식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늘 다분히 고의적으로 일을 크고 화려하게 벌리곤 했으니, 그의 짓이라면 지금쯤 버몬트 후작의 시체가 프로노이아 입구에 걸려 있어야 했다.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저, 뷰캐넌 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네에, 손님이랍니다!”
직후 문 뒤에서 샛노란 금발이 불쑥 튀어나왔다. 위풍당당하게 선 루비니아 캐스너가 활짝 웃었다.
“키리에 양! 너무 보고 싶었어요!”
***
루비니아는 둘만 남게 되자 바로 살쾡이처럼 눈을 치떴다.
“드레스 꼴이 그게 뭐예요?”
그녀의 태도 변화는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다. 키리에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드레스를 챙겨 입을 상황이 아니라서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으, 끔찍해. 2년 전에나 유행하던 원단이잖아요.”
“수도보다 문물이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이 레이스는 새로 나온 거예요. 지지 미켈레 작품이죠. 예쁘죠?”
“예쁘네요.”
키리에의 반응이 지나치게 싱거웠기 때문에, 루비니아는 그녀가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길 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비니아가 새침하게 눈을 흘겼다.
“결혼했다고 알리러 왔어요.”
“네?”
난데없는 고백이었다. 키리에마저 잠깐 평정을 잃었을 정도로.
그 모습을 본 루비니아가 까르르 웃었다. 하얀 양산을 쓰고 벚꽃색 드레스를 입은 채 웃는 그녀는 마치 봄의 요정 같았다.
“당신도 냉정하지 못할 때가 있네요! 처음으로 이긴 것 같은데!”
“결혼이라뇨? 누구와?”
“그야 왕세자죠. 저 이제 왕세자빈이에요. 공식적으로.”
그러면서 그녀는 왕가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반지를 꺼내 보였다. 녹색 보색이 반지 위에서 요요한 빛을 뿜으며 반짝였다.
키리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존귀하신…….”
“으! 제발! 그만두지 못해요? 징그러워!”
“그럼 이건 넘어갈게요.”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자리에 앉는 키리에를 보며 루비니아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예의 차릴 생각이 들어요? 당신 자존심은 탈부착되나 봐요?”
“사교계란 게 그렇죠. 왕세자 저하께서도 같이 오신 건가요?”
“서류상으로는 같이 왔어요. 신혼여행.”
키리에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상태가 여전히 안 좋은 모양이다. 키리에의 시선을 받은 루비니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든은…….”
말하기 전, 그녀가 주변을 살폈다.
두 사람이 있는 장소는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의 가장 큰 공중 정원. 숲 너머에서 이쪽을 구경하는 학자들이 있긴 하지만, 소리가 들릴 거리는 아니다. 그래도 루비니아는 목소리를 낮췄다.
“좋진 않아요. 그 인간 자존심은 영혼이랑 한 몸이었나 봐요.”
투덜대는 것치고는 표정이 전보다 밝았다. 원하던 지위를 손에 넣었으니 더는 아쉬울 게 없을 것이다.
키리에가 말없이 미소지었다. 그녀를 보며 루비니아는 연한 녹색의 눈을 애교 있게 굴렸다.
“당신은요? 수도로 돌아가나요?”
“돌아가야죠.”
키리에가 부드럽게 찻잔을 들었다.
“전설경이랑 같이요?”
루비니아의 말에,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그녀의 움직임이 아주 잠시 멎었다.
“글쎄요.”
루비니아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멀쩡히 업무를 보고, 밖에서 티타임을 가지는 것을 보고 그와 어떻게든 합의한 줄 알았는데.
“설마 아직도…… 그래요? 감금? 애완동물? 아직도 묶여 지내요, 설마?”
짤각. 키리에의 찻잔이 소서 위에 내려앉았다. 그녀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오찬 전에 주변을 둘러보시겠어요?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은 국내 최다 장서를 보유하고 있으니 저하의 마음에도 드실 거라고 생각해요.”
미소짓는 얼굴에서 더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단호한 의지가 엿보였다.
루비니아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사랑스럽고 깜찍하게 눈웃음쳤다.
“젠장. ‘저하’는 집어치워요. 소름 끼쳐.”
“젠장도 썩 고상하진 않답니다.”
***
과연 키리에의 예상대로 버몬트 후작가의 군대는 우두머리를 잃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들은 며칠을 프로노이아 앞에서 하릴없이 진을 치고 있다가, 이내 철수했다.
“바보들. 쯧쯧.”
왕세자빈은 그들을 보며 코웃음 쳤다. 과연 왕실 서고를 들락거리던 여자다웠다.
며칠 내내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에서 사는 것 같던 루비니아는 슬슬 따분해졌는지 키리에의 집무실을 찾았다.
“또 일해요?”
“또 일해요.”
키리에가 펜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프로노이아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루비니아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대체 언제 쉬어요? 나 몰래 쉬나요?”
“그런 적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대답하면서도 시선은 서류에서 떠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루비니아가 다가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키리에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뭐가요?”
“답은 축제예요. 축제!”
루비니아가 눈을 빛냈다. 키리에가 루비니아의 손가락에 가려진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들어서 치우면 왕가 모독일까?
“지금은 여력이…….”
“다행히! 당신이 개최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얘기를 듣자 하니 시민들이 자력으로 뭔가 한다는 것 같더라고요?”
“그건 어떻게 알아낸 정보인가요?”
“제가 좀 예쁜 덕에 사람들이 알아서 입을 열어 주거든요!”
루비니아가 콧대를 내밀고서 과장되게 으쓱댔지만, 키리에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건 확실히 그녀의 재능이다. 루비니아는 씩 웃으며 덧붙였다.
“요즘 좀 돌아다녀 봤는데, 도시가 너무 침체되어 있어요. 거의 손실 없이 이기긴 했어도 한동안 이웃 도시와의 교류만 끊긴 꼴이니, 기분이라도 좋게 해 줘야죠. 사기도 높이고, 아직 건재하다는 것도 보여 주고!”
연설하듯 술술 말하던 루비니아가 멈칫하고 키리에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긴 건 맞죠?”
루비니아는 버몬트 후작이 대도서관 어딘가에 구금되어 있다고만 알고 있다.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비니아가 자리에서 뱅그르르 돌고서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럼 잘됐네요! 왕세자빈의 명령이에요. 책상 앞에는 그만 앉아 있고, 같이 나가요! 감히 왕세자빈의 명령을 거역하진 않겠죠?”
“그야…….”
키리에가 서류를 한 번, 루비니아의 얼굴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의전을 못 챙겼으니 이런 건 들어줘야겠지. 나간 김에 민심도 살펴봐야겠어.’
키리에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펜을 놓았다.
“하늘 같은 왕세자빈 저하의 명령을 거절할 순 없죠. 언제인가요?”
“오늘.”
“네?”
“바로 지금!”
루비니아가 손뼉을 두 번 두드리자, 문이 열리고 여자 하인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어안이 벙벙한 키리에를 보고 루비니아는 부채를 펼치고서 깔깔 웃었다.
“마침 오늘부터 시작한다고 하니 시간 끌지 말자고요? 적당히 평민처럼 꾸며!”
루비니아의 명령에 따라 하인들이 물고기 떼처럼 몰려들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사전에 공모한 모양이었다. 안네마리마저 따라 들어와 ‘제발’이라고 말하는 듯한 눈으로 키리에를 보고 있었다. 루비니아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보였나 보다.
키리에는 속절없이 끌려갔고, 그 와중에 루비니아는 무시할 수 없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던졌다.
“아. 당연하지만 전설경께도 말씀드렸어요!”
평민처럼 갈아입고, 머리카락 색은 마법으로 바꿨다. 대도서관 입구로 내려온 키리에와 루비니아는 미리 기다리고 있던 나타니엘을 발견했다. 그의 모습이 보이자, 절대 그에게 반응하지 않겠노라 마음먹고 있던 키리에마저 움찔했다.
나타니엘은 놀랍게도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비단 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가리려 모자를 눌러 쓴, 열 살 남짓한 소년.
“저하, 전 역시 업무를…….”
“안-돼요. 왕세자빈의 명령이에요! 그리고 밖에서는 루비라고 불러요!”
루비니아는 기세 좋게 키리에와 팔짱을 낀 채 나타니엘에게 다가갔다. 물론 나타니엘 앞에서까지 기세가 좋진 못했다.
“전설경…… 각하시죠?”
하얗고 동그란 뺨을 가진, 그야말로 인형처럼 생긴 소년이 소리 없이 웃었다. 좀처럼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드는 미소였다.
[그래.]
“그…… 나이를 바꾸실 수도 있었네요?”
루비니아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나타니엘은 대답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예, 귀찮으시군요. 루비니아가 애써 웃었다.
옷차림을 보면 평민으로 가장한 듯했으나, 남루한 옷차림이 도리어 귀티를 숨기기 어렵게 만든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전설경으로 오해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루비니아가 고개를 끄덕이곤 뻣뻣하게 굳은 키리에를 돌아보았다.
“저렇게까지 하시는데, 꼭 붙어 다녀야겠네요!”
“저하.”
키리에가 음울한 눈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계속 나타니엘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고, 반면 나타니엘은 못 박힌 듯 키리에만 바라보았다.
“꼭 제가 같이 가지 않아도…….”
“아뇨. 꼭 가야 해요!”
“저하, 저는…….”
[나와 같이 다니는 게 싫다는구나.]
소년의 키득거림에 키리에가 입술을 깨물었다.
사이에 낀 루비니아는 애써 키리에의 표정을 외면했다. 그녀가 키리에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럼 갈까요!”
***
초저녁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 거리는 평소와 달리 들떠 있었다. 마법으로 만든 봄꽃 장식이 여기저기 달려 오색으로 빛났다.
“와! 생각보다 예쁘네요! 어떻게 마법을 이렇게 쓴담?”
루비니아가 여기저기를 기웃대며 웃었다. 이제 도망치는 것을 포기한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마법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군요.”
“키르! 저기 봐요! 저거 먹어 봤어요?”
“아뇨. 하지만 드시면 안 돼요.”
“괜찮아요! 나 원래 저런 거 먹고 자랐어요!”
루비니아가 질린 얼굴의 키리에를 끌고 노점으로 향했다. 양념을 입혀 구운 꼬치를 본 키리에가 본능적으로 입을 가렸다. 그걸 보며 루비니아는 깔깔 웃었다.
“티 내긴! 아저씨, 꼬치 세…… 개가 아니라 두 개요!”
루비니아가 나타니엘을 흘끔거린 뒤 말을 바꿨다. 꼬치 가게 주인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셋이면 세 개를 시켜야지!”
“나는 이슬만 먹고 살아서 괜찮아요!”
루비니아의 능청에 주인이 웃었다.
“아가씨가 참 말을 귀엽게 하네! 하나는 내가 그냥 주지! 버몬트를 상대로 무사했으니, 이쯤이야!”
“어머, 정말요? 무르기 없어요!”
찬란한 금발이 사라져도 루비니아의 사랑스러움은 없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꼬치가 구워지는 5분 동안 꼬치 가게 주인의 이웃집 아들이 이번에 쌍둥이를 가졌더라는 이야기까지 나누었다. 지켜보던 키리에는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대단하시네요.”
“이제 알았나? 흥.”
루비니아가 짓궂게 웃으며 꼬치를 내밀었다. 키리에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중간에 작은 손이 튀어나와 루비니아의 손을 쳐냈다.
“아!”
꼬치는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누가 봐도 고의적인 행동이었다.
“…….”
“…….”
[실수.]
소년의 얼굴을 한 나타니엘이 방긋 웃었다. ‘길거리 음식을 먹이고 싶지 않다’는 뜻이 너무나도 잘 드러난 탓에, 루비니아가 떫은 표정을 지었다.
“……네에, 그렇겠죠. 아무렴요.”
그때 키리에가 나섰다.
“다시 사죠. 저하의 명령이니까.”
키리에는 기어이 꼬치 하나를 더 주문해 제자리에서 그것을 먹어치웠다. 당연하지만 입맛에 맞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타니엘은 몹시 마뜩잖다는 얼굴로 물끄러미 키리에를 바라보았고, 키리에는 그걸로 족했다.
그 모습을 보며 루비니아가 되레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나타니엘에게 들리지 않게 키리에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도저히 안 되겠어요? 나, 지금 눈치 보여서 죽을 것 같단 말이에요!”
“애초에 그렇게 친해지신 줄은 몰랐네요.”
“도서관에서 마주쳤단 말이에요! 그리고 원래 이런 건 예의상 한 번은 초대하는 게…….”
“그럼 면피는 했으니 이만 돌아가죠.”
“안 돼요!”
루비니아가 다소 절박하게 외쳤다. 그에 나타니엘이 무슨 일이냐는 듯이 바라보자, 그녀는 이크, 하고 목을 움츠렸다. 그녀가 재차 속닥거렸다.
“제발 둘이 말 좀 하면 안 돼요?”
[내버려 두렴. 저 애는 지금 날 어찌할 수 없어서 분통이 터질 테니.]
소년이 앞서 걸으며 노래하듯 말했다. 키리에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사이에 낀 루비니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일이…… 으, 잠깐만요.”
인파 사이로 걷던 루비니아가 옷자락을 내려다보았다.
“양념 묻었잖아! 어쩌지? 분명 오다가 수돗가가 있었죠?”
루비니아가 자리에 멈춰 섰다. 키리에는 몇 발자국 앞서 있었고, 그 몇 발자국이 소란스러운 축제의 인파 탓에 좀 더 늘어났다.
“루비? 잠시만요, 같이…….”
“아뇨!”
흥분한 사람들 속에서 루비니아가 고개를 젓는 것이 보였다.
“금방 다녀올 테니, 둘이 있어요! 알겠죠? 둘이!”
머리 위로 흔들리는 손바닥을 끝으로 루비니아는 멀어져 갔다. 키리에가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 키리에는 곁에 있을 존재를 애써 외면하며 습관적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네가 꽤 싫어할 만한 상황이 되었구나.]
“…….”
어느새 다가온 나타니엘이 옆에서 키득거렸다. 키리에가 이마를 짚었다.
***
키리에는 조용히 중앙 거리를 벗어났다. 놀 줄 모르는 학자들의 도시답게 축제는 그리 크지 않아, 거리 하나만 벗어나도 고요했다.
이젠 저녁을 지나 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좁은 골목 틈으로 보이는 등불이 노랗게 번져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키리에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모습을 한 나타니엘은 모자를 벗은 채, 키리에의 옆에서 다리를 달랑거렸다.
[네 친구가 늦는걸.]
나타니엘이 중얼거렸다. 키리에는 애써 그 말을 무시했다. 나타니엘이 사늘하게 웃었다.
[둘만 있으려니 제법 괴롭겠어.]
키리에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좀처럼 그러기 어려웠다. 목소리 탓이었다.
나타니엘의 음성은 남들보다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진다. 발음은 완벽하지만, 가끔 섞여 나오는 숨 탓인지 귀가 녹을 것처럼 농염하게 들리기도 한다. 외형이 어려져도 그런 점은 변하지 않았다.
키리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타니엘이 벤치에서 내려와 키리에 앞에 섰다. 몹시도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가진 소년이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넌 참 잘도 참는구나.]
키리에의 눈이 깜빡였다. 나타니엘의 투명한 바다색 눈동자는 깜빡임 하나 없이 키리에의 모든 움직임을 살폈다.
[고집 하나는 대단해.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타니엘이 살풋 웃으며 뒷짐을 지었다. 가증스러울 정도로 사랑스럽고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하지만 키리에는 고개를 돌렸다. 보지도,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다. 덕분에 그녀는 소년 나타니엘의 얼굴에서 약간 미소가 사라진 것을 보지 못했다.
따분하군.
나타니엘이 낮게 중얼거렸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두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첨예한 정적을 깨운 것은 루비니아가 아니었다. 도시 전체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였다.
땡땡땡!
키리에도 나타니엘도 동시에 고개를 쳐들었다. 매캐한 회색 연기가 순식간에 밤하늘을 뒤덮었다.
“불이야!”
“수차를 불러!”
“모두 대피하시오! 화재요!”
“물 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은 없습니까?!”
골목 너머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 난 화재가 틀림없었다.
키리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키리에. 이동하지.]
그녀가 움직이기도 전에 나타니엘이 차갑게 말했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며 그 소름 끼치는 맑은 눈으로 뭔가를 탐색하고 있었다.
키리에는 그를 무시한 채 중앙 거리로 뛰쳐나갔다. 뒤에서 나타니엘이 혀를 차는 듯한 소리가 들렸지만, 더는 그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거리는 아비규환이었다. 축제로 많은 사람이 모여 있던 탓에 대피가 어려워 보였다.
[키리에. 도서관으로 돌아가. 지금 넌 아무것도 못해.]
뒤에서 다가온 나타니엘이 다시 힘있게 말했다. 파란 홍채 사이에 검은 굴처럼 박힌 동공이 잔뜩 커져 있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키리에는 잠시 망설였다.
‘화재 현장으로 갈까? 아니야. 내가 가 봤자 할 수 있는 게 없어.’
물 마법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프로노이아의 소방 경비대만큼 도시의 지리를 잘 아는 것도 아니다.
분하지만 나타니엘의 말이 옳았다. 키리에가 입술을 깨물었다.
[키리에.]
나타니엘이 재차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이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정신없이 달려오던 사람들에 의해 키리에의 어깨가 치였다.
키리에는 순식간에 바닥을 나뒹굴었다.
누군가에 의해 손이 밟히면서, 그녀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나타니엘이었다. 나타니엘이라면 분명 그녀를 밀치고 지나간 사람들을 대신 밟아 터뜨릴지도 모른다. 온몸에 먼지가 묻은 키리에가 화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검을 꺼내 들고 있지 않았다. 다만 아주 짜증스러운 얼굴로 키리에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사람들은 상어를 피하는 정어리 떼처럼 그를 중심으로 갈라져 뛰어갔다.
그게, 그러니까 나타니엘이 아직 누굴 안 죽였다는 게 아주 이상한 일이라는 것을 키리에가 깨닫기도 전에 그가 엄중하게 말했다.
[일어나. 아니면 내가 걸음마를 가르쳐 줘야 하나?]
아름다운 소년의 얼굴이 몹시도 사나웠다.
키리에는 희미한 당황을 느끼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때 옆을 지나던 청년 한 명이 손을 내밀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일어나세요! 위험해요!”
“아, 네. 괜찮…….”
경황이 없는 와중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을 잡으려던 키리에가 멈칫했다.
허리를 굽힌 청년의 로브 사이로 반짝이는 뭔가가 툭 불거져 있었다. 청년은 그걸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키리에의 시선은 삽시간에 그 반짝이는 것에 꽂혔다.
“제 손 잡으세요!”
청년의 목에 걸린 아뮬렛에는 지팡이를 수호하는 금색 표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금빛 표범은 왕가 오레윈브리지의 상징. 거기에 지팡이를 더하면, 그건 국왕 직속 마법 병단의 문장이 된다.
“…….”
“아가씨?”
뭔가를 계산할 새도 없었다. 키리에가 청년의 손을 뿌리치고 군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거친 고함이 종소리와 사방의 비명에 섞여 들려오기 시작했다.
“젠장! 눈치챘다! 잡아!”
키리에는 정신없이 달렸다. 왜 국왕의 마법 병단이 자신을 쫓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인파에 숨어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공격해! 대상만 생포하면 나머지는 상관없어!”
비명과 섞여 잘 들리지 않는 외침이었지만 키리에에게는 너무나도 똑똑히 들렸다.
하늘에 술식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올빼미의 눈, 십자가, 맹금의 부리, 뿔로 된 잔 등 수많은 상징이 불길한 금빛으로 술식 안을 채웠다. 공격 마법이었다.
그걸 깨달은 키리에가 거리를 벗어났다. 그들이 노리는 건 자신이니, 민간인의 피해는 막아야 했다.
“골목으로 들어갔습니다!”
“쫓아라!”
마법사들의 고함이 멀리서 울렸다. 키리에는 등불 하나 없는 미로 같은 골목에서 무작정 뛰었다.
[국왕의 마법사군.]
나타니엘은 내내 옆에 있었다. 그는 여전히 소년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물 위를 걷듯이 우아한 걸음으로도 키리에의 전속력보다 빨랐다.
[수는 여섯 명인가.]
뒤쪽을 보며 소년이 낭랑하게 말했다. 키리에는 그걸 잴 여력이 없었다.
[도와달라고 하지그래? 네 힘으로 저들에게서 도망치기는 어려워 보이는데.]
나타니엘이 생긋 웃었다. 밤에도 별처럼 반짝이는 파란 눈은 노골적으로 키리에가 자신에게 매달리길 바라고 있었다.
매달리면? 나타니엘은 또다시 확신을 얻을 것이다.
나를 배제하고 오롯이 행복을 찾겠다던 키리에 뷰캐넌도 결국 내게 도움을 구하는구나. 역시 인간은 쉽게 마음을 바꾸는구나. 그러니 그녀의 연민도 백일몽에 불과했겠구나. 역시 지금까지의 내 방식이 옳았구나…….
하지만 나타니엘은 알아야 한다. 그가 항상 옳을 수는 없다는 것을. 자기 의지를 꺾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키리에는 그를 무시하고 달렸다. 그러자 나타니엘의 미소가 조금 어긋났다.
[……언제까지 고집부리나 보자고.]
토끼처럼 쫓기다 보니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에서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키리에는 이제 폐가 찢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쪽에서 소리가 들린다!”
사방에서 압박하는 고함과 간혹 하늘에 그려지는 술식이 키리에를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포위망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었고, 별수 없이 키리에는 아무 건물의 뒷문 손잡이를 흔들었다. 다행히 열린 곳이 있었다.
[조명사군.]
나타니엘이 중얼거렸다. 그는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키리에는 헐떡대며 건물 내부로 향했다. 가게 안은 조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손님을 끌기 위함인지 불을 끄지 않아, 오색의 조명이 밤도 몰아내는 찬란한 색으로 반짝였다.
키리에는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조명사라 그런지 너무 밝았다. 그림자의 양이 턱없이 적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이미 지척에 와 있었다. 키리에가 허겁지겁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으나, 문이 잠겨 있었다.
“이곳만 문이 열려 있습니다.”
“추적 마법은?”
“아까부터 하고는 있지만, 섭리가 가로막히고 있습니다.”
“안을 살핀다.”
그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동아줄이라도 찾으려 두리번거리는 키리에의 눈에 들어온 건 조명을 운반하는 용도로 쓰이는 듯한 나무 궤짝 더미였다.
키리에가 가장 높게 쌓인 궤짝 더미와 벽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그리고 뒤늦게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나타니엘의 존재를 눈치챘다.
우아하고 단정한 미소의 소년은 키리에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저런. 내가 여기 있으니, 네가 여기 숨어 있다고 광고하는 꼴이네.]
키리에가 이를 악물었다. 나타니엘이 하얀 치아가 보이는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할 셈이니?]
“저쪽으로 간다.”
마법사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땅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가까스로 보통 가게에는 지하에 숨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다른 동작을 취할 시간이 없었다.
그 순간 나타니엘이 불만스러운 듯이 한숨을 쉬었다.
[고집하곤.]
품 안의 작은 몸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커다랗고 검은 것이 잡아먹을 듯이 키리에를 끌어안았다.
“잠깐……!”
단말마가 울려 퍼지자마자 마법사들이 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찾았나?”
“보이지 않습니다.”
“뒤져 봐.”
어둠 속에서 키리에는 자신의 숨, 그리고 끌어안고 있는 나타니엘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는 한쪽 팔로는 키리에 뒤쪽의 벽을 짚고, 다른 한쪽 팔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싼 채였다. 소년의 탈은 더는 없었다. 그는 지나치게 무르익은 분위기를 풍기는 평소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정지된 사고 속에서 나무 궤짝의 뚜껑을 일일이 여는 소리가 들렸다. 밝은 곳에서 누군가의 손가락 그림자가 나타났을 때,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나타니엘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직후 마법사의 머리가 쑥 튀어나와 키리에가 있는 곳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여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가 궤짝 더미와 벽 사이의 좁은 공간을 일견 무심하게 살핀 뒤 말했다. 정확히 키리에와 나타니엘이 있는 장소였지만, 마법사 청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키리에가 놀라 눈을 깜빡였다. 마법사는 금방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그림자가 적어서 불편하군.]
머리 위에서 나타니엘이 속삭였다. 그제야 키리에는 그들이 있는 곳이 그림자 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타니엘의 발밑에서 어쩐지 늘 살아 있는 것 같던 그 어둠 말이다.
마법사들은 시끄럽게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키리에의 몸이 흠칫 놀라며 얼어붙듯 굳었고, 그러자 나타니엘은 조금 더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조금 기다려.]
나타니엘이 조금 고개를 기울여, 키리에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숨결이 닿자 키리에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걸 어떻게 오해했는지, 나타니엘은 반대로 그녀를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아프니? 내가 너무 힘을 줬나?]
너무나도 심각한 어조에 키리에는 실소를 흘릴 뻔했다. 그리고 불현듯 그가 늘 ‘지나치게 느리게’ 손을 뻗는 이유가 힘 조절을 위해서라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약한 인간. 너무 약한 고양이. 그에게 인간은 누르면 쑥 들어가는 점토 인형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키리에? 내장이 파열됐나?]
키리에는 결국 상황도 잊고 짧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그 순간 나타니엘의 몸이 굳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허리를 감싼 팔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도 느꼈다.
키리에는 코끝에 가슴이 닿는 거리에서 멀어지려 애썼으나, 워낙 공간이 좁은 탓에 잘 되진 않았다. 결국 키리에가 몸의 힘을 뺐다. 힘없이 선 몸이 나타니엘의 가슴과 붙었다. 그러자 나타니엘은 조금 망설인 끝에, 키리에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러라고 힘을 뺀 건 아니지만 밖은 여전히 마법사들이 난동 중이다. 키리에는 체념했고, 나타니엘은 강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관심 한 번 받기 참 힘들구나.]
그는 이후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오래도 찾는군.]하고 마법사들을 향해 중얼거렸을 뿐. 키리에는 그 말에 어쩐지 그다지 싫어하는 기색이 없다고 느꼈다.
마법사들은 조명사를 거의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리로 들어온 것은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넘어진 키리에에게 손을 뻗었던 청년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전설경이 데려간 건 아닐까요?”
“그가 같이 있진 않았어.”
놀랍게도 그 어수룩한 변장이 통하긴 한 모양이었다. 키리에가 그들의 대화에 좀 더 귀를 기울였다.
“어떻게 할까요?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으로 진입하는 것은 지나치게 위험합니다.”
[위험하지.]
나타니엘이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이쪽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특별히 소곤대는 기색은 없었다.
아마 우두머리인 것 같은 마법사가 혀를 찼다.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으로 향하는 길목을 감시한다. 결국은 거기로 돌아가겠지.”
그 말에 나타니엘의 고개가 움직였다.
[저건 죽여두는 게 낫겠군.]
키리에의 어깨 너머 벽을 짚고 있던 나타니엘의 팔이 움직였다.
아마 지나치게 긴장해 있던 탓인지, 키리에는 일순 당황해 고개를 쳐들고 말았다. 그리고 바다처럼 새파랗고 맑은 눈과 마주쳤다. 아주 오랜만에 키리에는 나타니엘의 눈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그 역시 그럴 것이다.
물 흐르듯이 움직이던 나타니엘의 팔이 멈췄다. 그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마 아주 짧은 시간이었을 테지만, 눈이 마주친 그 짧은 시간이 어쩐지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나타니엘이 희미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팔을 내렸다.
[넌 꼭 남의 일에만 그렇게…….]
그 순간 마법사들의 대화가 귓가에 꽂혔다.
“생포하라 하셨지만 여차하면 팔다리 정도는 없어도 되니 무조건 잡아 와.”
키리에의 몸이 굳었다.
순식간에 나타니엘의 얼굴이 무표정으로 변했다. 찰나 이후, 아름다운 얼굴에는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럼 그렇지, 하고 말하는 듯했다.
[역시 넌 너무 물러.]
나타니엘은 한 손으로는 키리에의 눈을 가린 뒤, 반대쪽 손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과일이 터지는 소리가 나고, 더는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둄2 절갠 교환재공타싸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