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16. 달의 뒷면 (16/33)

16. 달의 뒷면

정신을 차렸을 때, 키리에는 병실로 향하고 있었다. 어떻게 정원을 나왔는지, 나타니엘은 어떻게 되었는지, 어떻게 대화가 끝났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리가 멍했다. 그저 자고 싶었다.

병실 문 앞에서는 누군가가 서성대는 중이었다. 수염이 다보록하게 난 테마르 의장이었다.

“아아! 뷰캐넌 님!”

테마르 의장이 키리에를 발견하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다급하게 뭔가를 말하려던 그는, 키리에의 얼굴을 보자마자 굳었다.

“뷰캐넌 님……?”

그가 손수건을 꺼내려 하기에, 키리에는 잠긴 목을 다스리며 손을 내저었다. 힘들어도 힘들지 않아도 그녀는 키리에 뷰캐넌이다.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해야 했다.

“신경 쓰지 마. 무슨 일인가?”

“아, 그게, 엄청난 서신이 왔습니다…….”

테마르 의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손에 쥔 서신을 내밀었다. 키리에가 지친 눈으로 그것을 훑었다.

‘고급지. 공식 규격. 붉은 밀랍. 엇갈린 다섯 개의 창 문양.’

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

“버몬트 후작가?”

“예!”

의장의 표정이 절박했다. 키리에가 바로 서신을 펼쳤다.

「프로노이아의 지각 있는 지도자들은 들으라.

전설경은 더는 영웅이 아니다. 그는 무력을 빌미로 악행을 일삼아 종말을 대체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음이라. 그로 인해 내 아들 글라디오소 버몬트 역시 무고하게 희생되었노라.

더는 전설경의 패악을 좌시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에 나 발렌시아 델라노 버몬트는 분연히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그를 처단코자 함이라.

이는 곧 위로부터는 드높은 곳에 거하는 신의 뜻이며, 아래로부터는 핍박받는 민중들의 뜻이니, 조속히 전설경의 신병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발렌시아 델라노 버몬트.」

공문서답게 장황했지만 요는 간단했다.

“병사를 일으켰군.”

“예! 한 무리의 병사들이 프로노이아로 진격하고 있다 합니다!”

“뷰캐넌 가에서 연락 온 건 없나?”

“없습니다! 아아, 이를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테마르 의장이 손을 벌벌 떨었다. 점잖은 도시인 프로노이아의 의장이 맡기엔 버거운 일이 분명했다.

키리에가 건조하게 서신을 접었다.

“일단 바로 호국경에게 파발을 띄워 줘. 5년 뒤에 가져가야 할 땅을 지금 받아야겠다고.”

레쇼의 영토를 키리에가 넘겨받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다. 하지만 아직 공식적인 이관 절차는 없었다. 키리에가 뭔가를 하려면 제대로 된 명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이상해. 여긴 엄연히 말하자면 아직 호국경의 영토야.’

버몬트 후작이 아들을 잃고 진정 미친 모양이었다. 하기야 전설경을 상대로 싸움을 거는 일을 제정신으로 했을 리 없다. 그래, 전설경을 상대로…….

‘생각하지 마.’

그녀는 일부러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테마르 의장이 조심스레 키리에에게 물었다.

“저, 죄송하지만, 뷰캐넌 님. 저쪽의 요청대로 전설경을 내보내시는 게 어떻습니까?”

키리에가 멈칫했다. 그녀는 곧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최후의 선택이야.”

테마르 의장의 눈이 커졌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문지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모르는 모양인데, 세상에는 대화라고 하는 훌륭한 외교 수단이 있네.”

“아……!”

테마르 의장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양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키리에가 명령했다.

“첫째, 호국경에게 연락. 둘째, 주변 지리를 파악할 수 있는 지도. 셋째, 군사 전문가가 있으면 불러와. 넷째, 뷰캐넌에도 연락을 해. 이건 가문의 힘을 써야 해. 다섯째, 국왕 전하께 공문을 올려야 하니 서기관을. 여섯째, 혹시 모르니 근처에 사는 주민을 대피시켜. 외웠나?”

“외웠습니다!”

“좋아. 어서 가.”

테마르 의장이 꽁무니에 불붙은 사람처럼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키리에는 멍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 몸을 돌렸다.

‘생각하지 마, 키리에 뷰캐넌. 넌…… 할 만큼 했어.’

***

레쇼는 연락이 닿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키리에에게 영토를 넘겼다. 수도에서 가만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그건 아마 그가 처리할 것이다.

그렇다고 나서서 이쪽을 도와주지도 않겠지만, 기대한 적도 없다. 키리에는 발 빠르게 버몬트 쪽으로 서신을 보냈다.

후작은 정말로 한 무리의 기사와 병사들을 이끌고 오고 있었다. 국왕은 사병의 수를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시할 만한 수도 아니야. 곤란한걸.”

키리에가 긴 탁자의 가장 상석에서 지도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소집된 전문가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정말로 싸우게 되면 곤란합니다. 프로노이아의 방비는 전부 자치대에 맡아 하고 있는데, 전문 교육을 받은 병사들은 아니라서…….”

“알아. 최대한 프로노이아에는 피해가 없게 할 거야.”

“정말로 공격할 생각일까요?”

마법사 대표로 나온 나이 많은 남자가 겁에 질린 얼굴로 물었다.

“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희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은데요…….”

키리에가 그를 무시하고 고개를 들었다.

“버몬트 쪽에서 연락은?”

“버몬트 후작님으로부터의 전갈입니다!”

때마침 심부름꾼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왔군.”

키리에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심부름꾼은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서신의 봉인을 뜯었다. 내용은 간결했고,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나의 아들 글라디오소를 무참히 살해한 역병 같은 존재인 전설경을 품에 품고 있는 프로노이아의 어리석은 무리는 들으라.

대대로 뛰어난 기사를 배출한 본 후작가는 이번 전설경 토벌에 명예롭고 진정성 있게 임하고 있는바, 그 뜻을 전하라. 전설경은 곧 버몬트의 창끝에 걸려 시간의 종말을 맞이할지니, 이를 겸허히 받아들이라.

발렌시아 델라노 버몬트.」

내용이 이어질수록 사람들의 얼굴은 더 창백해졌다. 하지만 내용을 전해 들은 키리에의 미간이 좁아졌다.

“무슨 생각이지?”

정말 이기겠다는 마음으로, 아들의 복수만을 위해 전설경에게 싸움을 걸었을 리 없다. 뭔가 생각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프로노이아에는 키리에가 그걸 파악할 수 있을 만한 기반이 없었다.

‘수도가 아닌 게 아쉽네.’

키리에가 한숨을 쉬었다.

“아무 상관없지는 않아. 프로노이아는 이제 내 영지고, 버몬트 후작은 지금 영지전을 벌이겠다고 하는 거니까.”

키리에는 냉정하게 답한 뒤 다시 지도를 살폈다. 머뭇거리던 사람 중 군사학자로 참석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저는 킬로이라고 합니다. 뷰캐넌 님. 제가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해 봐.”

“이제 뷰캐넌 님이 이 일대를 다스리시게 되었다는 점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버몬트 후작이 싸움을 걸어온 상대는 전설경이 아닙니까?”

그래, 버몬트 후작이 노리는 건 전설경 나타니엘이다.

‘생각하지 마.’

키리에가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잠시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그녀는 곧 손톱 끝으로 탁자를 두 번 두드려,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말인즉?”

“전설경이 나가시면 모든 게 해결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만.”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던 킬로이가 황급히 덧붙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게 굉장히 비인도적인 처사일 겁니다. 하지만 저희는 알지 않습니까? 전설경께서 다치거나 지는 일이 절대 없으리란 것을요.”

키리에가 잠시 대답을 삼켰다. 그녀는 머릿속에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생각을 눌러 담고서 고개를 내저었다.

“버몬트 후작이 진실로 그가 요구하는 걸 내놓으면 물러날 거라고 생각하나? 후작의 속셈이 뭐든 병사까지 끌고 온 이상 그냥 물러나진 않을 거야. 중앙 정계에 일이 생긴 건지도 모르니, 연락을 해 봐야겠어.”

키리에의 말에 사람들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저쪽이 공격하면 어떻게 합니까……?”

“정말로 저 수의 군대로 전설경에게 덤빌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는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해.”

동그란 풍선같이 생긴 학자가 물었고, 키리에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조용히 앉아 있던 호크송 박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 역시 보여 주기식에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나도 그리 생각해.”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명분 싸움이야. 후작도 정말로 피를 보고 싶지는 않을 거야.”

“하, 하지만 뷰캐넌 님…….”

사람들이 불안하게 엉덩이를 들썩였다.

“마음은 잘 알겠으나, 만에 하나란 게 있지 않습니까……!”

“저희 도시는 절대 버몬트 후작가의 병사들을 막아 낼 수 없습니다!”

“버몬트는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분명 주변 마을을 수탈할 거예요…….”

“알아. 전부 맞는 말이야.”

키리에가 점잖게 말했다. 걱정을 모두 이해한다는 듯이. 동시에 그녀의 말에 서린 묘한 냉기와 품위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키리에는 느리게 고개를 움직여 좌중을 살폈다. 그리고 턱을 쳐들며 눈을 내리깔았다.

“피해만 없으면 되는 거잖아?”

***

졸지에 도시를 책임지게 된 키리에는 더는 쉴 수 없었다.

킬로이에게 혹시 몰라 병법에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마법사들을 지휘하고, 사람들을 피신시키고, 예산에 대해 논의하고, 국왕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그걸 다 끝내기도 전에 이미 새벽이 되었다. 무리해서인지 열이 오르고 있었다.

‘피곤해.’

하지만 피곤한 게 나았다. 바쁘면 상념에 빠지지 않을 수 있으니까. 집무실 대용으로 쓰게 된 방에서, 키리에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틈이 보이자 안네마리가 우울한 얼굴로 살금살금 다가와 물었다.

“차를 드릴까요, 아가씨?”

“차보다는 커피가 좋겠어.”

“아픈 사람은 커피를 마시면 안 돼요…….”

안네마리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키리에는 힘겹게 미소지었다.

“부탁할게, 안느.”

“……힝!”

안네마리는 코를 훌쩍이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옆에 딸린 작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곧 원두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착한 아이야.’

키리에가 뜨거운 머리로도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책상 위에 종류별로 놓아두었던 통신석 중 하나가 빛을 내기 시작했다. 키리에는 순식간에 온도 없는 표정으로 되돌아와, 통신석을 어루만졌다.

“기다리다 목이 빠지는 줄 알았어요.”

〔그렇습니까.〕

레쇼가 통신석 너머에서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안 빠지도록 잘 보관하는 게 좋겠습니다.〕

키리에가 피식 웃었다.

“요청한 정보는요?”

〔생각했던 그대로입니다.〕

레쇼가 답했다.

〔버몬트 후작 뒤에 국왕이 있습니다.〕

“생각했던 대로네요.”

키리에가 중얼거렸다.

“중앙 정계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갑자기 왜 서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알고 있겠지만, 나는 아랫사람을 두지 않습니다. 내가 알아낸 정보는 거기까지입니다.〕

레쇼가 단칼에 키리에의 의문을 잘라 냈다. 그러시다는데 별수 없다. 키리에가 고개를 까딱였다.

“다른 건요?”

〔라우라 포트듀케인과 마리아 올드시우다드는 각각의 가문으로 돌아갔습니다.〕

“……언제 일어난 일이죠?”

〔당신이 잡힌 직후입니다.〕

키리에의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렸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키리에는 억지로 그 물꼬를 차단했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다른 건 내일 이야기하도록 할게요.”

보통은 여기가 이야기가 끝나는 지점이다. 하지만 오늘은 약간 달랐다. 레쇼가 드물게 다른 말을 꺼냈다.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키리에 뷰캐넌.〕

키리에가 고개를 갸웃했다.

“말씀하세요.”

레쇼가 잠시 침묵했다. 어쩐지 망설이는 듯한 침묵이었으나,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마법에 대해 조금이라도 압니까?〕

“첫째로 혈통, 둘째로 재능, 셋째로 전승이라는 건 알죠.”

키리에의 대답은 아마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막힘없이 나왔을 것이다. 그녀가 난데없는 화제 전환에 일일이 놀라고 반응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키리에가 차분한 만큼 레쇼 역시 차분했다.

〔그게 전부입니까?〕

“의지, 술식, 매개가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 이상은 배운 적이 없어요. 알다시피 뷰캐넌은 마법사 가문이긴 했지만, 제 세대에는 마력이 남아 있지 않거든요.”

〔그 정도만 알면 됐습니다.〕

드물게 감정이 엿보이는 말이었다. 턱을 괸 키리에의 눈이 가늘어졌다.

‘방금 그건 안도였어. 하지만 왜?’

솔직히 그녀는 레쇼가 어려웠다. 아니, 어렵다기보다 이해가 안 됐다. 그는 나타니엘과 달리 자신을 철저하게 타인으로 보기에 더 그러했다.

나타니엘이 키리에를 감금하기 전, 레쇼는 그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막지 않았다. 그는 나타니엘을 위해서만 움직일 뿐, 특별히 키리에를 위하지는 않았다. 자연히 키리에의 신경이 곤두섰다.

‘내가 마법에 대해 알아야 나타니엘에게 이로워지는 일이 있나?’

아주 잠깐 고민해 보았지만,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나타니엘이니까.

‘잊어버려, 키리에 뷰캐넌.’

키리에가 심드렁히 손가락을 번갈아 톡톡 두드렸다.

“그보다 요청하고 싶은 일이 몇 가지 더 있는데요.”

〔뭡니까?〕

키리에가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경이 방금 말한 것.”

***

버몬트 후작의 병사들은 별 어려움 없이 프로노이아 근처의 평원에 도착했다.

“가주님. 전군 대기 중입니다.”

부관이 다가와 버몬트 후작에게 경례했다. 후작은 막사에서 나와, 거리 탓에 흐릿하게 보이는 프로노이아를 바라보았다.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의 흰 대리석과 유리창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연락은 없나?”

“없습니다.”

후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야습이 있던 것도 아니고, 사람은 대피시켰지만, 함정은 또 없더란 말이지…….”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프로노이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작 인간의 군대라 이거지.’

후작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차갑게 얼어붙은 증오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가 망토를 펄럭이며 다시 막사로 돌아가려 했을 때였다.

마법으로 크기를 키운 목소리가 벽력같이 울려 퍼졌다.

「오랜만이네요, 버몬트 후작님.」

버몬트 후작의 몸이 굳었다. 그는 그대로 고개만 돌려 프로노이아 쪽을 바라보았다.

“이건……?”

분명 키리에 뷰캐넌의 목소리다. 전설경에게 다시 잡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당연히 전처럼 아무도 모를 어딘가에 보관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드디어 제대로 붙어먹을 생각이라도 했나 보지?”

후작이 성큼성큼 부대 야영지 앞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부관에게 음량을 증폭하는 마석을 건네받은 뒤, 얼핏 산뜻하게 말했다.

“이게 누구신가, 뷰캐넌 양 아니신가?”

가장된 친절은 전설경을 미워하고 있을 키리에 뷰캐넌을 같은 편으로 삼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키리에는 그의 은근함을 눈치채곤 부드럽게 답했다.

「어쩐 일이시죠, 후작님? 학자들이 두려워하고 있답니다.」

“그들에게 피해가 갈 일은 없을 거야. 전설경만 내어 주면 말이지.”

「글쎄요. 갑옷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요. 그 정도의 무장 세력을 도시에 들이는 건 아니 될 일이죠.」

“하?”

후작이 수염 끝을 어루만지며 혀를 찼다.

“뷰캐넌 양. 가만히 듣고 있었지만, 그대가 뭐라도 된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내가 알기로 뷰캐넌 양이 그렇게 주제를 모르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멀리서 쿡,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보다 영주 대 영주의 자리이니 존대를 해 주시겠어요?」

“영주?”

「어차피 5년 뒤에 받을 거, 미리 달라고 했거든요.」

키리에 뷰캐넌이 나른하게 답했다. 후작이 홱 소리가 나도록 옆에 있는 부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저 말이 사실이냐?”

“수도에서 하루 2회 연락을 받고 있지만, 예식이 진행된 바는 없습니다!”

“그럼 세자르 뷰캐넌의 딸이 뭣도 없이 저런 말을 했다는 소린가? 당장 다시 확인해!”

버몬트 후작이 부관 한 명의 등을 걷어찼다. 그는 혀를 차며 눈썹을 찌푸렸다.

확인하라고 보내긴 했지만, 아마 사실일 것이다. 귀족들이 허풍쟁이긴 하지만 금방 탄로 날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통신석을 쥔 후작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영주라는 건 인정해 주지, 뷰캐넌 양. 하지만 미안하게도 난 가문이나 관리할 줄 알지 정치라곤 해 본 적도 없는 한낱 영애에게는 존대하지 않네.”

후작이 염소 꼬리 같은 수염을 어루만지며 빈정댔다. 파란 하늘 아래 키리에 뷰캐넌이 쿡쿡대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 기대하지도 않았어.」

지나치게 태연한 태도에 묘하게 후작의 기분이 나빠졌다.

“키리에 뷰캐넌! 정녕 간악한 전설경을 옹호하기 위해 나와 대립하겠다는 건가?”

잠시간 대답이 없었다. 몇 초 뒤, 키리에가 서슬 퍼런 목소리로 낮게 뇌까렸다.

「예의 바르고 친절하게 격식을 갖춰 방문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잖나?」

버몬트 후작은 그 말로 키리에 뷰캐넌을 적으로 규정했다. 역시 고작 아녀자다. 전설경의 얼굴과 권력에 홀린 모양이었다.

“가당찮군! 어울리지도 않는 자리에 나와 뷰캐넌 공작가에 망신살을 뻗치지 말고 썩 물러나!”

그러나 키리에 뷰캐넌은 여유로웠다.

「날이 좋군. 책 읽기 좋은 날씨야. 난 고전 문학을 좋아하네. 좀 고루할지는 몰라도 많은 걸 담고 있거든.」

“하. 그 고전이 전쟁에서 이기는 법이라도 알려 줬나?”

「오, 물론이지.」

그 순간 어조가 바뀌었다. 장난기는 사라지고, 엄숙하고 사나운 기세가 맴돌았다.

「일대일 대결을 요청하네, 버몬트.」

“…….”

버몬트 후작의 미간이 좁아졌다. 바로 대답하지 못한 것은, 기억을 더듬는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고릿적 성문법이긴 하지만, 영지전에서는 전통적으로 영주가 가장 신뢰하는 기사들이 일대일 대결을 벌여 영지전의 승패를 결정짓는다. 무고한 희생을 줄이기 위한 방책이다.

“믿는 구석이 그거였군. 전설경을 내보낼 생각인가 보지?”

「기대를 저버려서 미안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네.」

키리에가 냉랭하게 답했다.

「어떤가? 우리 불필요한 싸움은 그만두자고. 이제 겨우 겨울이 가고 봄이 올 때야. 그대의 영지민들은 땅과 싸우는 자들이지 사람과 싸우는 자들이 아니잖아?」

예리한 지적에 버몬트 후작이 이를 악물었다. 무리해서 병사를 움직인 건 사실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더는 기회가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슨 속셈이지?’

프로노이아에는 키리에 뷰캐넌의 세력이 없다. 손을 빌릴 무장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죽하면 트레베레움의 모든 도시 중 프로노이아의 평균 연령이 가장 높을 정도였다.

‘허세인 게 분명하다.’

가늘게 뜬 후작의 눈이 빛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가 신경 써서 길러 낸 기사들 역시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후작이 삐뚜름하게 웃었다.

“좋다! 대결 신청을 받아들이지. 대신 다섯 명의 기사를 내보내겠다! 토너먼트로 진행하며, 마지막에 서 있는 쪽의 승리로 하지!”

당당하게 외친 버몬트 후작이 마지막에 느물대며 덧붙였다.

“너무 일찍 끝나면 뷰캐넌의 체면이 불쌍하니까 말이야.”

키리에 뷰캐넌 역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좋네, 버몬트 후작.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시작하지.」

“후회하게 해 주지!”

명령할 필요도 없었다. 몸을 돌리자, 버몬트 후작의 가장 신뢰하는 기사 다섯이 어느새 옆에 도열해 있었다.

“승자의 영예를 바치겠습니다, 주인님!”

잘 길이 든 무기와 튼튼하고 반질반질한 갑옷. 그리고 버몬트 후작가의 검술로 길러 낸 정예 기사들.

후작은 승리를 확신하며 팔을 펼쳤다. 붉은 망토가 독수리의 날개처럼 펄럭였다.

“어디 책이나 붙잡고 앉아 있는 그 늙은이들 사이에서 쓸만한 인재라도 찾아냈길 비네!”

「이거 아쉽게 됐군.」

그때, 멀리 있는 프로노이아시의 끝자락에서 누군가 타박타박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기사인가?’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유난히 그림자가 작았다. 의아한 얼굴을 한 버몬트 후작의 머리 위에서, 키리에 뷰캐넌이 노래하듯 낭랑하게 말했다.

「우리 진영에서 내보낼 것은 아주 작고, 귀엽고, 여리고, 사랑스러운, 여자아이거든.」

“얍!”

“으아악!”

“얍!”

“크학!”

안네마리가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기사들이 낙엽처럼 쓰러졌다.

세 번째로 대결에 나간 기사는 기절한 두 기사를 보며 콧수염을 파들거렸다.

“저들을 쓰러뜨렸다고 방심했다간 큰코다칠 거다!”

쓰러진 기사 둘을 가뿐히 들어 구석에 옮긴 안네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네마리 코는 크지 않아요. 하지만 아저씨 코는 큰 거 같아요!”

“뭣……! 이 건방진……!!”

말 위의 기사가 풀 플레이트 갑옷을 입은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소리쳤다.

“내 이름은 리차드 하일랜드다! 자랑스러운 하일랜드 가의 기사로, 네까짓 시녀와는 달리 버몬트 후작가의 제대로 된 가신이란 말이다!”

“앗.”

그제야 안네마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리차드 하일랜드는 드디어 고분고분한 반응이 나올 줄 알고 턱을 들어 멋진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안네마리는 머리를 붙잡고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맞아요, 아가씨가 기사님들은 아저씨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말해 주셨어요……. 그렇죠, 아저씨?”

“기사님이라고 불러!”

리차드가 소리를 꽥 내질렀다. 메이드복을 입은 작은 소녀는 흠칫하고선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기사 아닌 거 같아요! 책에서 기사님은 다 강하다고 했단 말이에요!”

“지금 내가 약하다는 거냐?!”

“안네마리보다 약한 사람이 기사님일 리 없어요!”

“나는 강해! 강하다고!”

리차드가 위협적으로 랜스를 휘둘렀다. 하지만 어린 시녀는 그를 완전히 무시한 채 뒤쪽을 흘끔거리기 바빴다. ‘어째서 내게 기사가 나온다고 해 놓고 속였느냐’는 약간의 원망이 엿보였다.

참다못한 리차드가 노성을 내질렀다.

“됐어! 됐으니 나와 결투하자! 버몬트 가의 힘을 보여 주마! 이랴!”

리차드가 말 옆구리를 걷어찼다. 밤색 말이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저항하다가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는 몰라도, 넌 곧 꼬챙이에 꿰일 것이다!”

말에 탄 기사가 랜스까지 꼬나 쥐고 맨손의 소녀에게 달려드는 끔찍한 그림이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었다.

마침내 리차드가 가까워진 순간, 안네마리가 눈에 힘을 주고서 땅을 박찼다.

“야아압!”

다음 순간 그녀는 리차드의 어깨를 밟고 서 있었고, 리차드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깨닫기도 전에 그의 머리를 발로 차 버렸다.

“얍!”

“푸컥!”

맑고 고운 소리가 났다. 리차드가 말 위에서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사뿐히 바닥에 착지한 안네마리는 뒤늦게 화들짝 놀라 울먹댔다.

“어떡해요! 너무 세게 찼어요! 아가씨가 죽이진 말라고 했는데!”

안네마리가 울먹이며 기사를 살폈다. 다행히 가슴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기절하긴 했지만.

“으앙! 다행이에요…….”

안네마리는 전신 갑주를 입은 그를 가뿐히 들어, 다른 기사들 위에 포개어 올렸다. 그리고 버몬트 후작 진영을 향해 전전긍긍하며 외쳤다.

“다음 분, 빨리 와 주세요! 아가씨 찻물이 식기 전에 다시 물을 끓여야 한단 말이에요!”

버몬트 후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무기도 들지 않은 십 대 초반의 소녀에게 정예 기사 세 명이 농락당한 상황이었다.

“확성기를 이리 내놔!”

부관에게서 마석을 거칠게 빼앗아온 후작이 노해 외쳤다.

“키리에 뷰캐넌! 무슨 사특한 술수를 부린 거냐!”

「어머.」

키리에 뷰캐넌이 보이지도 않는 먼 곳에서 답했다.

「자기가 이기면 능력이고, 남이 이기면 술수?」

“그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저런 꼬마가 버몬트의 정예 기사를 이긴단 말이야!”

버몬트 가문 사람답지 않게 구렁이처럼 속을 숨기는 게 장점이었던 후작이 침까지 튀기며 소리 질렀다.

하지만 키리에는 여유로웠다. 그녀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이능의 방해라면 마석으로 검사를 했을 텐데? 실례지만 그냥 그쪽 기사들이 약한 게 아닐는지?」

“지금 뭐라고!”

「그렇지 않니, 안네마리?」

키득거리며 묻는 말에, 안네마리가 깡충깡충 뛰며 활짝 웃었다.

“아가씨 말씀이 다 맞아요! 안네마리는 강하지 않아요! 주술도 안 썼어요! 그냥 아저씨들이 약해요!”

「그래? 어쩜 좋아. 그래도 죽이면 안 되는 거 알지?」

“네! 안네마리의 엄마가 약자에게 함부로 폭력을 쓰면 안 된다고 했어요!”

「안네마리는 참 똑똑해.」

안네마리가 신나서 가슴을 잔뜩 내밀고 뺨을 부풀렸다.

“안네마리는 똑똑해요!”

“입 닥쳐엇!”

후작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잠시 멈칫했던 안네마리는 다시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노래했다.

“안네마리는 똑똑해요! 안네마리는 똑똑해요!”

“닥치라고!”

“안네마리 똑똑해! 안네마리 똑똑해!”

“으아아아악!”

후작이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이를 갈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 돼, 이대로는!’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는 몰라도,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결투에서 져버린다. 후작의 눈에 핏발이 섰다.

‘전설경이 코앞에 있는데 돌아가라고? 이깟 일 때문에?’

그럴 수는 없다. 후작이 확성기를 내팽개쳤다.

“발리스타! 공격 태세로! 기병들은 차징을 준비하고, 궁병이 엄호한다!”

“예!”

부하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작은 망토를 휘날리며 부대 뒤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일대일 대결? 무시하면 그만이다.

“저쪽은 어차피 책상 공부가 전부인 노인들밖에 없는 도시다! 밀어붙이면 그만이야!”

「그럴 줄 알았지. 결국은 힘인가?」

키리에 뷰캐넌이 일순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버몬트 후작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코웃음 쳤다.

“그게 뭐 어떻단 건지 모르겠군. 주제도 모르고 내 앞길을 방해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주지!”

그때 키리에 뷰캐넌이 몹시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이쪽을 얕잡아보는 것도 이해는 해. 그야 서류상의 프로노이아는 제대로 된 군대가 없으니까.」

“들었는가! 적은 훈련도 받지 않은 민간인이다! 우리는 지지 않아! 전 보병 전진!”

“전진! 전진!”

“와아아아!”

보병들이 땅을 울리며 프로노이아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키리에 뷰캐넌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하지만 잘 모르는 게 있지는 않나, 후작?」

“듣지 마라! 그래 봐야 곧 발밑에 무릎 꿇을 패자의 헛소리다! 진격해! 우리는 승리한다! 전설경의 머리는 우리 것이다!”

버몬트 후작이 하늘을 향해 광소했다.

그 순간, 유난히 텅 빈 것 같은 맑고 파란 하늘에 키리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안하네만, 머리 좋은 사람들은 몸으로 싸우지 않는 법이거든.」

“뭐?”

버몬트 후작이 멈칫했다. 확성기 너머에서 키리에 뷰캐넌이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프로노이아의 허공에 거대한 술식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마법 병단. 출진.」

***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의 가장 넓은 식당 이곳저곳에서 탄산주 코르크가 터져 나갔다.

“우리가 이겼어! 버몬트를 상대로 이겼다고!”

“으하하하하! 꽁무니를 빼고 도망가던 그 꼴이란!”

“내 인생에 이런 쾌감이 있다니!”

“들었나? 우리가 병단이라니! 세상에!”

“이름을 정해야 하오!”

단 한 명도 점잖은 옷차림이 없었고, 단 한 명도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머리에 튤립을 꽂은 노인이 싱글싱글 웃으며 안네마리에게 비스킷을 건넸다.

“꼬마야, 너 아주 힘이 장사더구나!”

안네마리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과자를 받아 치마 아래 호박 바지 속에 숨기며 헤헤 웃었다.

“다 아가씨 덕이에요!”

“그래! 아가씨 덕이야!”

“그래! 뭔지 몰라도 아가씨 덕이겠지!”

사람들이 키리에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키리에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영주님이겠지.”

“냉정해!”

“짜릿해!”

“이 상황에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니! 그야말로 영주님감이야!”

한데 뒤엉킨 학자와 마법사들이 캬,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키리에는 헛웃음을 치며 같은 탁자에 둘러앉아 있는 테마르 의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일이 수월했어. 고맙네.”

테마르 의장 역시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홈홈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두툼한 손가락 사이에 유리잔을 끼고서 어깨를 들썩였다.

“아뇨!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을 보게 되어서 아주 기쁩니다! 마법을 공격에 쓴다니! 공격 마법이라니! 세상에!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었지요!”

키리에가 조용하고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한 무더기의 마법사들이 ‘우린 죽을 거야! 우린 무능력해!’라고 외치며 오들오들 떨고 있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그래. 마법이 꼭…… 머리카락 색을 바꾸거나 눈 수영 축제를 하라고 있는 건 아니니까.”

테마르 의장은 칭찬이라고 생각했는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도 전혀 몰랐어요! 원래 연구를 오래 한 사람은 다 어딘가 미쳐 있기 마련이거든요!”

그 덕에 이렇게나 무해하고 한가로운 도시가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자기들이 가진 게 무기라고 생각을 못 하니, 버몬트 후작이 이쪽의 저력을 전혀 알지 못했을 테고.

“게다가 호국경이 알려 주셨다는 마법은…… 정말 어마어마했습니다!”

테마르 의장이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키리에는 빙긋 웃었다. 레쇼는 자신의 마법은 별거 아니라 말했지만, 발라브리가의 시대가 얼마나 마법이 번성한 시대였는지를 생각하면 그의 ‘별거 아닌 마법’은 이 시대에서는 충분히 별거일 터였다.

키리에는 안네마리가 수염 난 노인 다섯 명으로 저글링을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약속한 대로 뷰캐넌 가문은 앞으로 프로노이아에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야.”

“듣던 중 감사한 일입니다! 아가씨, 아니지, 영주님은 정말 프로노이아의 보배십니다!”

“그리고 이건.”

키리에의 품에서 작은 쪽지 몇 장이 나왔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보라색 밀랍이 찍힌 종이를 흔들자, 떠들던 학자들의 시선이 한데로 모였다.

“호국경과 대화할 수 있는 소개장이네.”

“끄아아아아!”

“얼마! 얼마를 드리면 됩니까!”

“제발 제 돈을 가져가고 그걸 팔아 주십시오!”

“제 논문에 공동 저자로 올려드릴 테니, 제발!”

너무나도 격한 반응에 키리에가 잠시 놀라 헛기침한 뒤 말했다.

“알다시피 아직 적이 물러난 것은 아니야. 이건 모든 일이 끝나면 치하하는 의미에서 몇 명에게 줄 거고.”

“안 돼애애애!”

“제바아알!”

나이 일흔 줄 먹은 노인들이 울부짖는 모습이 그리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키리에가 큼큼, 다시 헛기침을 했다.

“물론 ‘몇 명’인가에게 주겠지만, 그 ‘몇 명’이 또 몇 명의 동행을 데리고 가도 될지는……. 나중에 이야기해 볼까?”

생긋 웃는 키리에의 손에서 소개장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마법사들의 눈에 불이 붙었다.

“나중! 좋습니다, 나중!”

“기필코! 버몬트 그 닭대가리의 목을 가져와서!”

“꽃병에 꽂아 놓고! 물을 주지!”

이제 각자 창의적으로 난폭해진 학자들을 뒤로하고 키리에가 몸을 돌렸다. 멀리서 포도주에 취해 있던 포 박사가 어디 가느냐 물었지만 손 인사만 보여 준 뒤, 키리에는 연회장을 나왔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차가운 어둠이 깔려 있었다. 소란이 성큼 멀어져 갔다.

딱 예의만 차리는 정도였던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손등을 제 이마 위에 올린 뒤,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아직은 심한 열이 아니니 남은 일은 마쳐야겠어.’

키리에가 작은 한숨을 쉬고서 집무실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윽…….”

순간 시야가 핑 돌았다. 키리에가 지팡이를 놓치고, 벽을 짚은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시야가 온통 까만 것을 보면 빈혈인 모양이다.

‘가만있으면 지나가겠지.’

키리에가 느리게 호흡을 다스렸다. 그러는 내내 왁자지껄한 소음이 대리석 벽 건너편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누구도 키리에가 이러고 있는 줄은 모를 것이다. 다행이었다.

‘생각해 보니 오늘 뭘 먹었더라?’

식사한 기억이 없다. 안네마리가 있으면 그녀가 챙겨 주지만, 오늘 안네마리는 키리에의 명령으로 바빴다. 밤에도 물론 바쁠 것이다.

‘이런. 지휘관 실격이야, 키리에 뷰캐넌…….’

있는 척이라도 하려면 뭔가 먹어야 한다. 체스에서도 킹만은 쓰러져서는 안 된다. 설령 쓰러지더라도, 지금 여기서는 곤란하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으나, 아무래도 정말 진이 빠진 모양이었다.

“거기, 혹시 누가…….”

키리에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연약한 목소리는 너무 작아 대리석 복도에 울리지도 않았다.

‘안 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점점 몸을 수그리는 키리에 앞에, 검은 구두코가 보였다.

누구인지는 뻔했다. 그는 늘 이런 식으로, 사람이 진창에 처박혀 있을 때 나타나곤 했으니까.

[식사를 거르더니.]

인사말도 꼭 그답다. 키리에는 실수로라도 대답하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갓 아문 상처에서 다시 피 맛이 났다.

“누구, 아무나…….”

머리 위에서 나타니엘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이리 와.]

몸이 들린다 싶더니, 어느새 키리에는 그의 품에 안긴 뒤였다.

구역감은 일시에 찾아왔다. 사람을 그렇게나 무자비하게 조롱해 놓고, 이런 식으로 당당하게 나서는 그의 모습이 싫었다.

그러나 그걸 드러내는 순간 나타니엘은 기뻐할 것이다. 그런 남자니까.

키리에가 순간 온몸에서 힘을 짜내어 그를 밀쳐 냈다.

“아윽!”

품에서 굴러떨어지는 키리에를 나타니엘이 다시 받아 내긴 했지만, 발목이 바닥과 부딪혔다.

“아…… 으…….”

무릎을 쥔 키리에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자존심과는 별개로, 아픔은 현실이다.

잠깐 숨을 멈춘 것 같던 나타니엘이 염증이 난다는 듯이 빈정댔다.

[꼴이 좋구나.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하니?]

키리에는 대답하지 않고서 바닥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고작 발목 좀 부딪혔기로서니 이렇게까지 아플 일인가 싶었다.

아직까지도 키리에의 등허리를 받치고 있던 나타니엘은 한숨을 쉬며 키리에의 몸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디 봐.]

그의 손이 발목을 잡을 때쯤, 키리에는 오소리처럼 날래게 몸을 비틀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잠깐 기가 찬다는 듯한 나타니엘과 시선이 마주쳤으나, 키리에가 먼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가 주변을 살폈다. 보조용 지팡이는 나타니엘의 손에 들려 있었다. 키리에는 입술을 깨물고서, 벽을 짚으며 나아 갔다.

복도가 유난히 길었다. 발목은 아무래도 잘못 부딪힌 모양이었다. 퉁퉁 붓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결국 키리에가 한 번 더 비틀거리며 고개를 바닥에 처박을 뻔했을 때, 나타니엘이 다시 허리를 잡았다.

[우리 키리에 뷰캐넌께서 언제부터 바닥과 입맞춤하는 취미가 생겼는지 모르겠군.]

그가 강하게 몸을 들어 올린 순간, 키리에의 눈이 나타니엘과 마주쳤다. 고여 있던 눈물도 덩달아 흩뿌려져 나타니엘의 뺨에 닿았다.

키리에는 그때 자신의 얼굴에 증오가 드러나지 않게 해 준 뷰캐넌의 엄격함에 처음으로 감사했다. 그녀는 자신이 고통 외의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타니엘의 반응으로 눈치챘다.

아주 잠깐, 나타니엘은 멈칫했다. 눈동자가 흔들린 것 같기도 했으나, 그건 필시 헛것일 것이다.

열이 올라 멍하니 나타니엘의 시선을 받고 있던 키리에는 뒤늦게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바르작거렸다.

“아가씨?”

연회장으로 향하는 거대한 문이 열리고, 안네마리가 빼꼼 고개를 내민 건 그 순간이었다.

나타니엘의 눈이 선득하게 빛났다. 키리에를 볼 때 차올랐던 감정도 어느새 해저처럼 깊은 곳으로 쑥 들어간 듯했다.

[숲 짐승. 이리 오렴.]

“네?”

“안느, 오지 마…….”

안네마리가 어찌할 줄 몰라 했다. 하지만 키리에의 충실한 시녀는 절대 아가씨를 두고 갈 수 없었다. 안네마리는 문을 닫고, 불안한 얼굴로 나타니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팔의 사정거리 안에 그녀가 다가오자마자, 나타니엘의 손이 안네마리의 목을 쥐었다.

“컥!”

“안느!”

키리에가 쉰 목소리로 외쳤다. 나타니엘은 안네마리의 목을 쥔 채, 키리에를 내려다보았다.

모든 게 이전과 같았다. 키리에의 소중한 사람을 인질로 잡고 그녀를 협박하는 나타니엘.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미소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키리에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어떤 식으로 우는지 살피던 그 예리하고 섬뜩한 미소가. 전과 달리 그는 하나도 재미있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키리에는 이내 그 생각을 지워 냈다. 헛것일 것이다.

[네 시녀가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가만히 안겨 가.]

“…….”

키리에가 가만히 입을 벌렸다. 열 때문에 가슴이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래도 그녀의 대답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키리에.]

“안네마리…….”

나타니엘이 보다못해 입을 열었을 때, 키리에가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나타니엘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마치 그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양 무시하며 속삭였다.

“미안해…….”

나타니엘의 몸이 굳었다. 그건 단순히 이런 상황에 놓이게 해서 미안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미래의 일에 대한 속죄였다.

이를테면, 나타니엘이 안네마리를 죽인다든가 하는 일에 대한.

키리에의 일그러진 얼굴은 회한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눈물 젖은 보라색 눈은 맑았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것들을 담고 있었다.

안네마리는 목이 졸리고 있는 상황에서 총명하고 아름다운 주인이 자신에게 사과하는 것을 들었다. 그녀는 나타니엘의 손목을 쥔 채, 키리에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괜찮아요, 제 목숨은 아가씨 거니까.”

작은 시녀는 그러곤 손을 놓아 버렸다. 눈까지 감았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완벽한 자세가 있다면, 그건 지금 안네마리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키리에는 더는 예전처럼 시녀의 구명을 애원하지 않았다. 자기 때문에 벌어진 모든 일에 책임을 지겠다는 듯이 안네마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타니엘은 깨달았다.

지금 여기서 안네마리가 죽어도, 키리에 뷰캐넌은 되돌아보지 않는다. 아마 안네마리가 아니라 그 누구여도.

키리에 뷰캐넌은 정말로 그를 그녀의 삶에서 내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나타니엘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키리에와 안네마리는 서로를 부축하며 멀어져갔다.

그는 남겨지지조차 못했다.

[둄2 절갠 교환재공타싸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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