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거짓말
나타니엘은 순식간에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의 공중 정원에 모여 있던 마법사들 앞에 나타났다.
[안녕. 재밌어 보이는데, 나도 함께해도 될까?]
난간 위에 선 그를 보고 놀란 마법사들이 눈을 부릅떴다.
“허억……!”
“신……? 신이시여……!”
[안타깝게도 난 신은 아니란다. 그 비슷한 것이긴 하지만.]
나타니엘이 즐겁게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은 곧 시워드 박사에게 꽂혔다. 그는 한걸음에 시워드 박사 앞에 내려섰다.
[키리에에게 이렇게 늙은 친구가 있는 줄은 몰랐구나. 새 친구니?]
“……그, 그.”
시워드 박사가 자라처럼 목을 쭉 빼며 목깃을 매만졌다.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는 키리에의 조언을 떠올렸다.
‘혹시 나타니엘이 말을 걸거든, 그가 묻는 것엔 바로 대답해. 그렇다고 그에게 맞서는 걸 너무 두려워하지는 말게. 그가 사람을 좀 많이 죽이긴 했지만, 아무나 죽이진 않거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시워드 박사가 죽을상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 전설경이시여.”
[흠. 그래?]
나타니엘이 싱그럽게 미소지었다. 그는 정말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내 생각엔 내 물건을 네가 갖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예?”
잠깐 당황으로 어쩔 줄 몰라 했던 시워드 박사가 영문도 모른 채 몸을 더듬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무언가를 느끼고는 침음을 삼켰다. 그의 품에서 나온 것은 종이에 싸인 키리에의 머리카락이었다.
나타니엘이 묘하게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어디 머리카락이지?]
“예? 그, 어깨 부근의…….”
[네가 잘랐어?]
시워드 박사가 기겁해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뷰캐넌 님께서 손수 주셨습니다! 저는 절대, 절대 뭔가를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
“예!”
[그렇다면야.]
나타니엘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워드 박사는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듯했던 압박감이 사라지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내가 가져가도 될까?]
나타니엘이 물었다. 부드럽고 다정하기까지 한 물음이었지만, 시워드 박사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하, 하지만 이건 뷰캐넌 님이 저희에게 주신, 무, 물건입니다…….”
[그런데 내가 갖고 싶어.]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말에 시워드 박사의 턱이 덜걱거렸다.
“하, 하, 하지만…… 이, 이게 없으면 저희는 호국경과 대화할 수가…….”
나타니엘이 나른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레쇼는 왜?]
“예? 그거야 여러 가지 여쭤볼 것이…….”
[아. 학자였구나?]
놀랍게도 전설경은 웃음을 터뜨리고서,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어느새 나타난 지팡이로 바닥을 한 번 쳤다.
[자, 지금 난 아주 기분이 좋아. 그러니 내가 계속 기분이 좋을 수 있게, 그걸 내게 주면 좋겠어.]
시워드 박사는 잠깐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 다 무슨 말이지?
하지만 나타니엘은 그가 이해하길 기다려 주지 않았다.
[대신 나는, 내 능력 안의 일이라면 뭐든 네가 원하는 걸 하나 들어주지. 물론 키리에와 관련된 것은 제외하고.]
“예……? 뭐든 말입니까……?”
[그래. 뭐든. 하지만 잘 선택해야 할 거야. 과욕은 늘 몸을 망치거든.]
나타니엘이 키득거리며 시워드 박사를 내려다보았다. 오만한 푸른 눈이 번득이자, 시워드 박사는 일순 그의 눈동자 속에 풍덩 빠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 거지만, 절대 그의 유혹에 넘어가지는 마.’
키리에 뷰캐넌은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이것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학자였다. 진리를 탐구하는, 지식의 끝을 보고 싶어 하는. 머리로는 그냥 소개장이나 써달라고 하면 된다는 걸 알면서도, 시워드 박사는 망설였다.
지금 손을 뻗으면 모든 게 손에 들어온다.
미소짓는 전설경의 얼굴은 고요하고 아름다웠으며,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시워드 박사는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이, 이, 세계의 진리를…… 지혜의 끝을 원합니다……!”
일순 나타니엘의 검은 동공이 세로로 죽 찢어졌다.
[아. 그걸 바라니?]
나타니엘이 환하게 미소지었다. 저도 모르게 따라서 웃게 될 정도의 아름다운 낯이었다.
[너희는 어쩜 이렇게 한결같이 멍청할까. 키리에가 그런 걸 시키진 않았을 테고……. 본인의 욕심인가? 뭐, 상관없지.]
나타니엘이 손을 내밀었다. 시워드 박사가 창백하게 질린 채, 키리에의 머리카락을 건넸다.
나타니엘은 키리에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받아, 부드럽게 쥐었다. 그러자 연보랏빛 머리카락은 반짝이는 푸른 마력에 감싸여 사라져 버렸다.
나타니엘의 입술 사이에서 공기마저 떨리게 하는 여린 숨이 새어 나왔다.
[좋아. 네게 지평선 너머를 보여 주마.]
나타니엘이 손의 위아래를 바꿔, 느리게 시워드 박사에게 뻗었다.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시워드 박사의 얼굴을 가렸다.
시워드 박사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다섯 갈래의 어둠 너머로 투명하고 차가운 눈이 우주의 샛별처럼 반짝이며 그를 비웃었다.
[후회하지 마…….]
***
“올 때가 됐는데, 제법 늦는구나.”
키리에가 베일을 옆에 개켜 놓은 채 중얼거렸다.
가장 가까운 도시인 프로노이아도 말로 한참을 가야 있는, 황량한 벌판의 외딴집.
그녀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낡아서 무너지기 직전의 서까래가 보였다.
“누가 오기로 한 건가요……? 큼, 콜록! 불은 다 피웠습니다……!”
“수고했어.”
집 중앙에 화톳불을 피운 제롬이 기침을 하며 물러났다. 그는 밤새 여기까지 말을 타고 와서 피곤했는지, 그대로 바닥에 퍼질러 누웠다.
“흐아아…… 그런데 이런 외딴곳에 집을 사서, 뭘 하시려는 거예요……?”
“특별히 뭘 하려는 건 아니야. 그보다 어서 돌아가. 더 있으면 위험할지도 몰라.”
“헤헤, 좀만요.”
제롬이 킬킬거리며 염낭에서 작은 술병을 꺼내 땄다.
“박사님들도 그렇고, 아가씨도 좀…… 수상해요오, 크하!”
술병에 있던 술은 전부 제롬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는 병의 나머지 술까지 탈탈 털어 마시고는, 팔로 고개를 받쳤다.
“갑자기 하루 만에 집을 사라질 않나……. 박사님들이랑 인사하시던데, 박사님들도 아가씨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시는 건가요?”
키리에가 잠시 그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알겠지만, 남이 알아서 좋을 게 없어. 네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지 않는 것도 그래서고. 너무 아쉽게 생각하지 말렴. 그리고 어서 돌아가.”
“헤에.”
제롬이 이상한 대답을 하고서 키리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타닥, 타닥. 불꽃이 튀는 소리에 맞춰서, 그는 키리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키리에 역시 곁눈으로 제롬의 움직임을 살폈다. 타닥, 타닥. 불꽃이 튈 때마다 묘한 긴장감도 수위를 높여갔다.
“그래서 다른 사람 마차에 숨어서 프로노이아를 빠져나오신 거예요?”
제롬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키리에는 고개를 조금 까딱이는 것으로 긍정했다.
“그럼 여기 계속 계시나요……?”
“그래야지. 이게 내 역할이니까.”
키리에가 낭랑하게 대답하며 무릎 위에 단도를 올렸다. 박사들에게서 받아 온 것이었다.
박사들은 키리에의 계획을 반대했다. 호크송 박사마저 떫은 표정을 지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그보다, 정말 안 떠날 생각이니?”
“아.”
제롬이 히죽거리며 키리에를 위아래로 훑었다.
“전 지금 술을 많이 안 마셨는데요.”
“그래서?”
“그리고 지금은 밤이 깊은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키리에의 가슴과 다리에 머물렀다 떨어졌다. 키리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쿡쿡 웃었다.
“그러네. 밤이 아니지.”
“그럼…….”
“너도 날 갖고 싶니?”
난데없이 던져진 직접적인 말에 제롬이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탐욕에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서 키리에에게 무릎으로 기어왔다.
“아, 역시, 귀족 아가씨들은, 사실은 일탈을 꿈꾼다고 알고 있는데, 정말로……!”
“어쩜. 저열한 착각이구나.”
키리에가 냉정하게 웃었다.
“네 착각을 고쳐 줄 시간이 부족해서 안타깝구나. 그리고 내가 볼 때 넌 이미 도망치기엔 그른 것 같으니, 얌전히 있도록 해. 네 구명은 내가 어떻게든 해 보마.”
우아한 발음으로 흘러나온 말을 제롬은 잠깐 이해하지 못했다. 몇 초 뒤, 제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고 계시는 거예요?”
“알지.”
“박사님들은 이 집의 정확한 위치를 몰라요, 저만…… 안다고요! 그리고, 제가 아가씨보다 더 세거든요……!”
“좀 더 내가 모를 것 같은 이야기를 해 주겠어?”
웃는 얼굴로 하는 빈정거림에 제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키리에의 멱살을 쥐었다. 그 바람에 키리에의 옷깃이 벌어졌다. 그 사이를 엿본 제롬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난, 난 지금 당장이라도……!”
“쉿.”
갑자기 키리에가 낮게 속삭였다. 고함을 치기 위해 숨을 들이마셨던 제롬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숨을 죽였다.
집 한가운데 앉아 있는 키리에가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보라색 눈에 긴장이 맴돌았다.
바깥에 뭔가가 있었다.
바닥을 밟는 구둣발 소리. 머뭇거리거나 발을 끄는 일 없이 규칙적으로 울리는 것을 보면 귀족이다.
제롬은 주변이 너무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했다. 아무리 황야라도 바람 소리, 새소리, 벌레 울음소리는 나는 게 정상이다.
“뭐야, 밖에 누가…….”
“넌 나서지 말고 있어.”
제롬이 불안한 눈으로 키리에를 돌아보았다. 키리에는 여전히 멱살을 잡힌 채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고, 제롬은 갑자기 숨이 막힐 듯한 불안감을 느꼈다. 한낮인데도 꼭 서늘한 초가을의 호숫물에 빠진 기분이었다.
제롬이 밭은 숨을 내쉬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별거 아니다. 별거 아닐 것이다. 정작 문을 열어 보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건 그냥, 침대 밑, 옷장 속의 괴물 같은 걸 거야!
“아, 아가씨, 바, 밖에 손님이라도 왔나 봐요! 하하, 하. 이상하네? 말발굽 소리도 안 들렸는데…….”
“제롬.”
키리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 나가지 마. 그리고 그를 자극하지 마.”
제롬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키리에를 내려다보았다. 키리에는 매발톱꽃 같은 눈을 오연하게 빛내며 제롬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얇은 나무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처음엔 아기 울음소리였다. 갓 태어난 갓난아기가 온 힘을 기울여 우는 소리.
“아기……?”
제롬이 반사적으로 키리에의 멱살을 쥐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문을 열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재빨리 일어난 키리에가 그의 손을 막았다.
“제롬. 이런 곳에 갓난아기가 있을 리 없잖아.”
그 순간 울음소리가 뚝 끊겼다.
이번엔 네다섯 살짜리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제롬의 불안감이 점차 커졌다.
“하지만 애가 우는데……!”
“저게 정말 아이 같니?”
“애가 아니면……!”
“제롬. 가서 앉아.”
제롬은 귀신에 홀린 얼굴로 순순히 화톳불 옆에 앉았다. 그리고 자기 다리를 끌어안은 채, 눈밭에 버려진 사람처럼 벌벌 떨기 시작했다.
키리에가 고개를 문으로 돌렸다. 아이 울음소리는 어느새 그쳤다. 이젠 날카롭고 예리한 것이 문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은밀하고 규칙적이었다. 그리고 갈수록 기괴해지기 시작했다. 문과 벽뿐만 아니라 천장에서도 긁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무 덧창 사이로 들어오던 햇살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커다란 짐승이 검고 끈적이는 혓바닥으로 온 집을 핥고 있는 것 같았다.
벽을 긁는 소리에 맞춰서 다른 소음이 은은하게 깔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키리에는, 가만히 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수백 명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리에, 키리에, 키리에…….
아이의, 어른의, 나이 많은 남성의,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애틋함에 흠뻑 젖어 키리에의 이름을 불러댔다.
제롬은 자기 머리를 끌어안은 채 흐느끼기 시작했고, 키리에는 평정을 잃지 않기 위해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이내 속닥거림마저 멈추었다. 진공 상태처럼 고요한 시간이 짧게 이어졌다.
이윽고 문 너머에서, 달콤하고 온화한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키리에.]
상냥한 목소리가 물었다.
[누구와 같이 있지?]
잠깐이지만 시간이 멈춘 듯했다. 혈관에 흐르는 피가 모조리 얼음으로 바뀐 기분이었다.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몇 발짝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문 너머에서 나타니엘은 설탕보다 달콤하고 술보다 감미로운 목소리로 재촉했다.
[키리에.]
그가 달뜬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 나와. 난 이미 너무 오래 참았어.]
키리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까득, 하고 문을 긁는 소리가 났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키리에. 아니면 아직도 즐길 게 남았니?]
키리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나타니엘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혹시 네 옆에 있는 그거?]
제롬이 더 크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타니엘의 웃음소리도 높아졌다. 아주 넓은 동굴 속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진원지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사방에서 울려 퍼졌고, 바람 소리보다 또렷하게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끝날 때쯤엔 위쪽에서 우지끈 소리가 났다. 나무로 된 천정이 뜯겨 나갈 듯 말 듯 들썩거렸다.
[그 집에서 그딴 것과 틀어박혀서 뭘 하려고? 날 더 화나게 할 생각인가 보지.]
키리에가 마침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닫혀 있던 입술이 열렸다.
“들어오지 말아요.”
별안간 거세게 몰아치던 바람이 멈췄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더 세찬 바람이 윙윙대며 불어왔다. 낡은 집이 뽑혀 나갈 것처럼 불안하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아, 영리한 키리에 뷰캐넌! 거기까지 도달했구나. 역시 넌 최고야.]
나타니엘이 속삭였다. 여전히 키리에의 대답은 없었고, 그러자 나타니엘은 조금 초조한 듯이 긴 숨을 내쉬었다.
[대답 정도는 괜찮으니, 말해.]
키리에가 멈칫했다. 정말일까? 속이려는 건 아닐까? 키리에가 망설일 찰나, 나타니엘이 이 상황에 조금은 싫증 난 듯이 덧붙였다.
[거짓말은 하지 않아. 대답 자체에는 별 효력이 없으니, 말을 해. 키리에 뷰캐넌.]
농담이 아닌지 그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키리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거짓말은 아닌 거죠?”
일순 나타니엘에게서 들려오는 말이 없었다. 키리에는 그게 꼭 첫사랑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소년 같다고 느꼈다. 터무니없게도.
[물론 아니지.]
나타니엘이 상냥하고 애틋하게 속삭였다.
[키리에.]
“…….”
[키리에.]
“……나타니엘.”
[그래.]
키리에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저 애달픈 부름을 듣고 있다간 말려들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일부러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들어오지 말아요.”
[나야 네가 거절하면 도리가 없지.]
나타니엘이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나 곧 다소 날카롭게 물었다.
[그래서?]
“네?”
[네 옆에 있는 그건 지금 이 자리에 꼭 필요한 인물인가?]
키리에가 제롬을 돌아보았다. 제롬은 거의 정신이 나간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는 어쩌다 연루된 사람일 뿐이에요. 내버려 둬요.”
[그건 내 취향이 아닌데.]
“당신 취향 물은 적 없어요.”
[아.]
일순 나타니엘의 목소리가 아주 차가워졌다. 직후 집을 이루고 있던 천장, 벽, 그 모든 게 터져 나갔다.
키리에가 비명을 질렀다. 망가진 집의 잔해들은 그대로 회오리쳐 하늘 끝까지 날아갔다. 천천히 가라앉은 돌풍 사이에서, 나타니엘이 옅게 미소지었다.
[안타깝지만 나도 네 취향을 물은 적은 없어서.]
키리에가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집은 산산이 부서져 이제 터밖에 남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성큼성큼 걸어와 키리에를 낚아챌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타니엘은 문지방을 넘지 않았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똑바로 선 채, 키리에를 응시하기만 했다.
그의 시선이 아주 잠깐 부서진 문설주로 향했다. 혹시 몰라 어린 양의 피를 발라 놓은 문설주가 근처에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양의 피. 오래된 관습이지. 꽤 꼼꼼하게 준비했구나.]
“상대가 상대니까요.”
[기쁜걸.]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모습은 헤어지기 전과 변한 게 없었다. 수려한 얼굴, 검은 버들잎처럼 나부끼는 머리카락, 투명한 눈. 옅은 미소가 걸린 입술이 거기에 여유와 품위를 보탰다.
물론 그 여유는 키리에의 흐트러진 매무새를 보자 모습을 감추었다.
[일부러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니? 내게 둘이 뭘 했는지 자랑이라도 하려고?]
“네? 아, 이건…….”
키리에가 급하게 옷깃을 추슬렀다. 나타니엘은 예의 바르게 키리에가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것을 외면해 주었다.
그는 기묘하게도 겉으로는 별로 기분이 나쁜 것 같지 않았다. 키리에는 그게 더 두려웠다. 밖에 드러나기에는 너무 깊고 무거운 감정이 그의 내부에서 흐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의 시선 끝이 찌를 듯이 제롬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정돈을 마친 키리에는 슬쩍 몸을 움직여 그 시선을 가렸다. 그에 나타니엘의 얼굴에서 표정이 좀 더 사라졌다.
[오랜만이야.]
“오랜만이네요.”
키리에가 부러 냉연하게 대답했다. 나타니엘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샐긋거렸다.
[보고 싶었어.]
난데없는 고백이었다. 잔뜩 긴장해 있던 키리에는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타니엘이 그런 키리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재차 말했다.
[몹시. 아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키리에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난 보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겠지.]
담백한 대답, 미련 없는 태도. 잠깐 심드렁히 눈을 내리깐 나타니엘은 이내 화사하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나를 불렀잖아.]
“불렀지만, 그건-.”
[뭘 해 줄까?]
나타니엘이 손을 뻗었다. 길고 예쁜 손가락이 물결처럼 펼쳐졌다.
[네 옆의 더럽고 냄새나는 짐승이 날 부르라고 했니? 내 눈앞에서 둘이 소꿉장난이라도 하려고? 그가 네 말문이라도 트이게 했나 보지?]
일순 그가 말을 멈췄다가, 눈매를 달처럼 휘어 미소지었다. 광기가 좀 더 짙어졌다.
[말해 봐. 뭘 원하는지.]
아무래도 그는 뭔가 큰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롬을 흘낏 살핀 키리에가 건침을 삼켰다. 신세 진 곳의 하인이니 하는 말은 이 상황에서 하기엔 지나치게 사사로웠다. 관계도 없는 일반인의 신상을 밝히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잖아요. 우리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거니까, 다른 건 끼워 넣지 말아요.”
새파란 눈이 차갑게 빛났다. 나타니엘이 좀 더 손을 내밀었다.
[그럼 다시 한번 말하지. 이리 와. 그 냄새 나는 짐승은 걷어차든 목을 치든 하고.]
은근한 목소리가 키리에의 척추를 타고 올랐다. 그녀는 가만히 손 내민 나타니엘을 응시했다. 그는 신보다 아름다운 것 같은 고결한 얼굴로, 그 누구보다 퇴폐적이고 서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키리에가 그를 마주한 채 고개를 저었다.
“……아뇨. 가지 않아요.”
[실망스럽네.]
나타니엘이 손을 물렸다. 별로 대수롭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의 시선이 곧 제롬에게 향했다.
[안녕, 꼬마야. 고개를 들어 볼래?]
“제롬, 대답하지 마.”
키리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롬은 더디게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젖은 더러운 얼굴이 보였다.
“저…… 저요?”
“제롬. 물러나서 가만히 있어!”
[그래, 지겨운 제롬.]
나타니엘이 싫증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살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언뜻 상냥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제롬. 내가 제안 하나 하지.]
“제안이요……?”
[그래. 제안.]
“제롬!”
[내게 환영한다고 말하는 거야. 한마디면 돼. 그렇게 해 준다면 살려는 주지. 어때?]
보다 못한 키리에가 급하게 제롬에게 다가가 그의 두 귀를 막았다. 그녀는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제롬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나타니엘의 시선을 차단했다.
“듣지 마, 대답하지 마! 넘어가면 안 돼!”
풀려 있던 제롬의 초점이 돌아왔을 때, 키리에는 조금 안심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제롬의 눈에서 공포와 폭력성이 동시에 번득였다.
제롬이 순식간에 키리에가 바닥에 놓아두었던 단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키리에가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그녀의 목에 단도를 가져다 댔다.
“다, 다, 다가오지 마아아! 나한테 손대면 이 여자를……!”
제롬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돌풍을 타고 날아온 나무판자가 제롬의 안면을 강타한 것이다.
제롬의 머리가 풍선 터지는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이렇다니까.]
나타니엘이 질린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중추를 잃은 제롬의 몸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키리에는 그 옆에서 충격으로 눈을 홉뜬 채 굳었다. 생피가 그녀의 온몸에 튀어 피투성이였다. 메마른 절망이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한 키리에의 눈에 스몄다.
“제발, 제발……!”
키리에가 천천히 주저앉았다. 고개가 처지고, 야윈 어깨가 파들거렸다. 이윽고 유리구슬 같은 눈물이 똑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키리에를 내려다보며, 나타니엘은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 우주를 건너온 신처럼 미소지었다.
[보렴. 네가 선택한 남자가 얼마나 쉽게 널 버리는지. 얼마나 쉽게 네 적으로 돌변하는지.]
“…….”
[나 이외에 누구도 네게 영원을 약속할 수 없어. 알 때도 됐을 텐데.]
나타니엘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이제 그만해.]
사람을 벼랑 끝으로 내몬 뒤 뻗는 손. 감미로운 목소리와, 달콤한 낱말들.
인간은 그걸 거부할 수 없다.
[이리 와.]
지금까지의 모든 이들이 그러했듯이, 결국은 키리에도 선택할 것이다. 안전하게 보살핌을 받을지, 아니면 맹렬한 증오에 온몸을 맡길지.
그가 겪어 온 오랜 시간 동안 예외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이윽고 키리에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그리고 키리에의 목소리가 천 마리의 나비처럼 날아와, 한낮의 천둥처럼 나타니엘의 귓가에 내리꽂혔다.
“……헛소리 그만 해요.”
키리에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들었다. 깨문 입술 사이로는 당장이라도 서러운 절규가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끝끝내 그리되지는 않았다. 야윈 뺨은 눈물에 젖어 반짝거렸고, 그 위로 저물어 가는 노을이 얹히자, 그녀는 평소보다 수십 배는 아름다워 보였다.
마침내 뜬 두 눈은 투명했다. 한 점 증오도, 미움도, 분노도 없는, 깨끗하고 맑은 보라색 눈. 슬픔이 가득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를 눈치챈 나타니엘이 굳었다.
“나 있죠, 여길 나가면 결혼을 할 거예요.”
키리에가 울면서 어떻게든 웃으려 애쓰는 이상한 얼굴로 말했다.
“누구와 할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누구여도 자식을 때리지는 않는 사람이면 좋겠네요. 가문은 상관없을 거고, 평민이어도 괜찮겠죠.”
나타니엘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지워졌다. 하지만 키리에는 이제 그가 어떻건 신경 쓰지도 않는 듯했다. 새끼 양 같이 온몸을 바르르 떨면서도,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중정에는 수국과 포플러를 심을 거고, 여름 별장은 엘서스에 둘 거예요. 우리는 여름이면 여름 별장에 가서 휴가를 즐길 거고, 가을엔 함께 꿩 사냥을 하러 영지에 가겠죠. 겨울엔 벽난로 근처에 둘러앉아 시를 읽을지도 몰라요…….”
키리에의 말이 이어졌다. 그녀는 가끔 채 삼키지 못한 감정에 울컥하며, 훌쩍이며, 히끅대며, 흐느끼며, 미래의 이야기를 했다. 나타니엘을 앞에 두고, 그가 없는 미래의 이야기를.
“나는 늙어 갈 테고, 별일이 없다면 병에 걸리지 않고 죽을 수 있을 거예요. 운이 나쁘다면 치매에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러진 않기를 빌 뿐이에요.”
키리에의 시선이 노을로 옮겨 갔다. 눈물에 젖은 속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파르르 떨렸다.
“난 그런 삶을 살 거예요.”
[넌.]
키리에가 이야기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나타니엘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넌 내가 그걸 허락할 것 같니?]
일순 구름에 가려졌던 노을이 유독 아름다운 황금빛으로 빛나며 키리에의 얼굴을 비췄다.
키리에가 활짝, 아마 그녀의 모든 힘을 다 쏟은 것이 분명한 미소를 지었다.
“아뇨, 허락은 필요 없어요. 나는 아주 행복해질 거고, 난 지금 거기에 당신 자리는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니까.”
지금 이 순간, 나타니엘에게 열려 있던 문이 닫혔다.
노을이 가파른 그림자를 드리운 나타니엘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
하지만 키리에는 이제 그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의 반응에 겁먹지도 않았다. 그거야말로 그가 가장 바라는 일일 테니.
“왜 내가 당신을 증오하고, 미워하며, 하나뿐인 내 삶을 불태워야 하죠?”
키리에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 바람에 눈물이 황금빛으로 반짝이며 흩뿌려졌다.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당신이 무슨 짓을 하든, 난 앞으로 당신에게 내 삶의 일부분도 내어 주지 않을 거예요. 심지어 증오마저도요.”
나타니엘은 무섭게 침묵했다. 그의 눈은 바다보다 깊었고, 그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 사이에 명백한 두려움이 섞여 있는 것을 키리에는 놓치지 않았다.
키리에는 그걸 알았지만, 너무나도 잘 알았지만, 그렇기에 침묵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졌던 단도를 무릎 위에 얹고서 가만히 자세를 정돈했다.
나타니엘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놀랍게도 키리에를 향한 적의마저 희미하게 서려 있었다.
[네게서 강제로 감정을 끌어내는 방법도 있지.]
“어떻게요?”
[넌 약점이 너무 많아.]
“라우라와 마리아를 말하는군요.”
[그들뿐만 아니라 네 옆의 모든 사람.]
나타니엘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정복자의 표정이었다.
[그들을 전부 죽여도 네가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여전히 투명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키리에가 물었다.
“사람들을 죽일 건가요?”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떻게든 당신을 미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갈 것 같은가요?”
[혹은 내가 주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미칠지도 모르죠.”
[난 네가 미쳐도 상관없어.]
물끄러미 나타니엘을 올려다보던 키리에가 툭 던지듯 말했다.
“고마워요. 확신을 얻었어요.”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는 단도가 들려 있었다. 뺨을 뒤덮었던 눈물은 어느새 그쳐 있었다.
[확신?]
나타니엘이 낮게 되물었다. 키리에가 어렴풋한 미소를 보였다.
“당신이 나를 잃는 걸 두려워할 거라는 확신.”
때마침 태양이 지고 땅거미가 내리는 시간이었다. 키리에는 마지막 햇빛을 머금은 단도를 들어 올렸다.
“당신이 정말로 그게 두려웠던 거라면, 당신은 나와 증오가 아니라 호감을 쌓아야 했어요.”
[넌 그 잘난 호감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 감정인지 몰라.]
“난 그걸 부서뜨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어요.”
[그거야말로 만용이야, 키리에 뷰캐넌.]
“그래요. 난 키리에 뷰캐넌이에요. 하겠다고 한 건 해요. 지키겠다고 마음먹은 건 지켜요. 설령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키리에가 심호흡했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을 때, 나타니엘은 다음 장면을 그리듯 예상할 수 있었다.
키리에의 손이 힘차게 아래로 향했다. 날카로운 단도가 그녀의 허벅지를 내리찍었다.
“아윽!”
붉은 피가 키리에의 다리를 적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타니엘이 아주 조금,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키리에는 그걸 보지 못했다. 그녀는 날을 상처 안쪽에서 비틀며, 악문 잇새 사이로 신음을 흘렸다.
“진짜, 아프네요, 이거……. 팔이랑은, 너무 다르네…….”
[못 본 사이에 심히 미쳤구나, 키리에 뷰캐넌.]
“세상에……. 당신이 그런 말을 해요?”
아픔 때문에 키리에의 눈이 젖어 들어갔다. 그녀가 나타니엘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투명하고 맑은 보라색 눈으로.
“후……. 이제 당신이, 선택할 시간이에요.”
[선택?]
“나와, 제대로 된 관계를, 쌓아 가기로 약속하고, 나를, 살리거나…… 나를 죽이고, 다시 고독해지거나.”
키리에가 눈을 질끈 감고 단도를 뽑았다.
“아윽!”
덜덜 떨리는 양손이 단도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반대쪽 다리를 내려찍었다. 피가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천사같이 아름다운 나타니엘의 얼굴이 점차 혼란으로 물들었다. 키리에가 그 모습을 보며 실실 웃었다. 슬슬 아픔이 무뎌지고 있었다.
“당신은, 영원을 살 거고…… 절대, 나를 잊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난 당신을, 증오하지 않을 거니까…… 당신은 영원히, 날 가질 수도, 없어요.”
그녀가 목 깊은 곳에서 신음을 흘리며 무너졌다. 두 손은 여전히 단도를 놓지 않았다. 그녀는 바닥에 앉아 숨을 헐떡대며, 나타니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했고, 바닥으로는 빗물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타니엘은 자신이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듯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요?”
[뭐?]
“처음 보는, 얼굴…….”
나타니엘이 입을 벌렸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키리에는 신음을 흘리면서도 웃었다.
“아마 나, 곧, 출혈 때문에 정신을 놓을 거예요. 아마, 동맥 하나쯤은, 터진 것 같은데…….”
[살려달라고 말해.]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들어오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선택해야 해요…….”
[구해 달라고 말해.]
“난 절대, 당신에게, 복종하지, 않을 거니까…….”
[키리에 뷰캐넌!]
나타니엘이 낮게 외쳤다. 그에게서 처음 듣는 높은 언성이었다.
한계를 느낀 키리에가 조심스레 핏물이 고인 바닥에 누웠다. 바닥의 차가움은커녕, 이제는 고통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왜, 화를, 내요…….”
[가소롭고 어리석어서. 주제도 모르고 내게 아량을 베푸는 꼴이 한심하고 하찮기 짝이 없어서.]
신랄하기도 해라. 그는 아마 이 와중에도 복종이니 명령이니 하는 걸 요구하지 않는 자신을 비난하는 게 분명했다. 키리에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거센 비가 누운 그녀의 몸을 두드렸다. 이제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누가 봐도 위급한 상태처럼 보였다.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건, 진심이었으니까…….”
일순 나타니엘이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
“전부…… 내 잘못 같아서…….”
[…….]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네요, 당신을, 원망하진…….”
지팡이를 짚고 있던 나타니엘이 저도 모르게 키리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문설주를 지나자마자 검은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나타니엘의 시선이 번갈아 자신의 손과, 죽어 가는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키리에는 쏟아져 내리는 비를 맞으며, 젖은 속눈썹 사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타니엘은 마치 우주가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그 와중에도 기품 있는 자세는 여전하여 그는 그린 듯 아름다운 나타니엘 그대로였다. 하지만 바다처럼 푸른 눈은 더는 고요하지 않았다. 더는 여유롭지도 않았다.
키리에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이윽고 그녀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잘 자요, 나타니엘…….”
대륙 전역에 비가 내렸다.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에서, 테마르 의장은 멍하니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구만.’
전설경이 나타났고, 시워드 박사가 쓰러졌다. 쓰러지기 전, 그는 경악에 가득 찬 절규를 내질렀고, 이어진 치료에도 불구하고 끝내 미쳐 버렸다.
‘지평선 너머에서 대체 뭘 본 거지?’
진리가 궁금하지만, 미치고 싶은 건 아니다. 사태를 전달받은 학자들은 당연하게도 의욕을 잃었다. 테마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키리에 뷰캐넌인가 하는 여자는 잘 도망쳤으려나……?’
테마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이었다. 그는 창문 너머 저 멀리서 검은 얼룩이 펄럭이는 것을 보았다.
“뭐지?”
그가 얼룩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뜬 순간이었다. 뭔가 하얀 것이 번쩍였다.
“으헉!”
콰차차창!
전면의 유리창이 동시에 깨져 나갔다. 테마르는 테이블 밑으로 몸을 던져 간신히 그것을 피했다.
‘대체 오늘 무슨 날이냐고!’
테마르가 울상을 지으며 테이블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의 시야에 날개처럼 나부끼는 검은 망토를 두른 사내의 모습이 잡혔다.
“저, 전설경?”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한 테마르가 바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하지만 전설경은 이미 테마르의 존재를 눈치챘다.
전설경은 다소 빠른 걸음걸이로 테마르에게 다가왔다. 그제야 테마르는 그가 누군가를 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시체?!”
[아니.]
전설경이 기대하지도 않은 대답을 내어 주었다.
테마르가 조심스럽게 테이블 밑에서 나와 그가 내려놓은 여자에게 다가갔다. 비에 젖어 창백한 얼굴에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엉켜 있었다. 여자의 양다리에서는 도축이라도 당하다 만 것처럼 피가 뚝뚝 흘렀다.
“……설마 키리에 뷰캐넌?”
[치료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의료반!!”
테마르가 허겁지겁 외쳤다. 대도서관에 상주하는 의원들이 부름을 받고 달려왔다. 그들은 키리에 뷰캐넌의 상태를 확인한 뒤, 상태가 급박하다고 외치며 그녀를 들것에 실어 데려갔다.
사태를 수습한 테마르가 뒤늦게 숨을 몰아쉬었다.
“허어, 어쩌다 저런 꼴이…….”
중얼거리던 테마르는, 아직 전설경이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돌렸다.
전설경 나타니엘은 비가 오는 정원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키리에 뷰캐넌이 들려 나간 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걱정하는 건가?’
그런 생각으로 그의 얼굴을 살핀 테마르는 입을 다물었다.
지독한 얼굴이었다. 장대비 사이에서도 당장 누구 하나를 찢어 죽일 것 같은 기세가 선명했다.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겁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는 위대하고 오만한 전설경인데도.
그러나 그런 표정은 테마르의 시선을 의식하자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레이 뷰캐넌은? 그가 어린 것을 하나 맡고 있었을 텐데.]
“예? 뷰캐넌의 장남이라면 낮에 프로노이아를 떠났습니다만…….”
[도망쳤나.]
전설경의 눈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새까만 동공이 커지는 모습을 본 테마르 의장이 가까스로 미소를 유지했다.
“그, 저, 비가 오는데…….”
[…….]
“들어오시겠습니까……?”
테마르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의사를 밝혔다.
나타니엘은 대답 없이 한동안 비를 맞고 서 있었다. 분명 곧은 자세인데도, 어딘지 지쳐 보였다.
[……아니.]
이윽고 나타니엘이 무겁게 몸을 돌렸다.
테마르는 그의 몸이 어둠 속에 잠기듯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키리에가 눈을 떴다. 가장 먼저 그녀를 반긴 것은 둔통이었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데다 저렸다.
시야 가장자리에서, 커튼이 물결처럼 흘렀다. 반투명한 천 너머로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하늘이 보였다. 반짝이는 유리창을 보니,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인 듯했다.
‘살아 있네.’
키리에가 멍하니 빗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그때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키리에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곧 그녀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안느!”
“아가씨!”
방으로 들어온 것은 안네마리였다. 메이드복을 입은 작은 소녀가 절규하며 키리에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아가씨…… 아가씨, 아가씨! 일어나셨군요! 아가씨! 으아아아아앙!”
“세상에,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키리에의 눈가 역시 젖어 들었다.
“안느, 살아 있었구나. 어떻게 된 거야? 그 이후 무슨 일이 있었어?”
키리에가 안네마리의 양 뺨을 붙잡았다. 오른쪽 눈 자리가 검은 안대로 가려져 있었다. 키리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타니엘이 이런 거니? 다른 데는?”
“히끅, 흑, 안네마리는 하나도 안 아파요! 안네마리는 다 괜찮아요! 안네마리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안느. 그렇지 않아! 끼니는 제대로 챙긴 거니? 왜 이렇게 수척해진 거야…….”
“아가씨야말로, 끅, 아가씨야말로 왜 이렇게 마르셨어요! 허수아비가 아가씨랑 친구 하자고 할지도 몰라요! 안네마리는 그런 거 싫어요!”
안네마리가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울었다. 참으로 안네마리다운 걱정이었다. 이제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듯했다.
키리에는 젖은 눈으로 웃으며 연신 안네마리의 얼굴을 매만졌다.
“안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줄래?”
안네마리는 고개를 끄덕인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 아가씨를 보내고, 안네마리랑 아가씨의 친구분들은 죽을 뻔했어요.”
“죽을 뻔했다는 건, 살아 있다는 거지?”
키리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안네마리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사자에게 직접 들으니 정말로 마음이 놓였다.
“두 사람은 지금 어디 있어? 몸은? 혹시 다치거나…….”
“왕궁에 계세요. 다치지는 않으셨고, 나타니엘 님이 마법으로 가둬 놓았다고 들었어요.”
“너도 같이 갇혀 있었어?”
안네마리의 검은 눈이 잠깐 모로 굴렀다.
“그으, 안네마리는 다른 곳에 갇혀 있었어요. 주술이랑 마법이랑 이것저것을 할지도 모르니까…….”
“안느…….”
보나마나 험한 꼴을 당했을 것이다. 키리에가 손을 뻗어 안네마리의 뺨을 쓸었다. 차마 안대를 들추지는 못했다.
안네마리는 그녀의 심정을 헤아리고 해맑게 웃었다.
“안네마리는 괜찮아요! 죽을 줄 알았는데, 눈 하나만 없어졌어요!”
“하지만 안네마리…….”
“정말 괜찮아요! 안네마리는 알아요, 안네마리가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엄청 신기한 일이에요!”
그래도 키리에의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러자 작은 손이 키리에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정말로 안네마리는 괜찮아요…….”
키리에는 말없이 미소지으며 안네마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네마리는 가르랑 소리를 내며 그런 키리에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두 사람은 빗소리를 들으며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안네마리는 귀를 쫑긋하고서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자, 순수한 감탄을 흘렸다.
“아가씨는 역시 대단하세요! 안네마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요!”
“내가 네 기대에 부응했니?”
“네!”
짧게 대답한 안네마리가 곧 고개를 갸우뚱했다.
“안네마리는 아마, 원래는 아가씨를 협박할 재료로 쓰이려고 불려 온 것 같아요…….”
“그런 모양이야.”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안네마리를 부른 것을 보면, 나타니엘 역시 만약을 대비한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발로 그 집에서 걸어 나오진 않겠다 마음먹었지만, 나타니엘이 대놓고 안네마리의 목숨을 갖고 협박했다면 결심이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으으음! 하지만 안네마리는 수도에서 여기로 옮겨졌을 때 아무 연락도 못 받았어요……. 뭔가 나타니엘 님의 계획이 잘못됐을까요?”
키리에가 입을 다물었다. 짐작 가는 것이 하나 있긴 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맞다면, 그 부분은 이미 자신이 손쓸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을 것이다.
키리에가 깊은 생각에 빠지려는 찰나, 안네마리가 물었다.
“그럼 아가씨는 계속 트레베레움에 계시는 거예요?”
“네 생각은 어떠니?”
키리에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텄다. 안네마리가 목숨을 걸고 자신을 내보내려 했는데 돌아왔다고 지탄받을까 봐 두려웠다.
“너는 내게 바다를 건너가라고 했잖아. 그게 네 뜻이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안네마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고비늙은 사람처럼 가라앉았다.
“그게 아가씨의 선택이라면, 안네마리는 괜찮아요. 나타니엘 님도 이제 아가씨를 함부로 하지 않을 테니까…….”
키리에가 부드럽게 안네마리의 뺨을 꼬집었다.
“하지만 걱정이 있지?”
그렇게 묻는 키리에의 표정은 온화했으며, 동시에 각오를 다진 순례자 같은 얼굴이었다.
그렇기에 안네마리는 서글프게 웃었다.
“안네마리는 그냥…… 아가씨가 모든 걸 잊고 새로 시작하길 바랐어요…….”
안네마리가 작은 손을 키리에의 손등 위에 얹었다.
“왜냐면…… 아시잖아요?”
그녀는 키리에의 손을 꼭 잡은 채, 그 위에 뺨을 얹었다. 절망마저 체념한 듯 공허한 얼굴이었다.
“나타니엘 님을 복종시켰다는 건, 이제 영원히 그분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해요…….”
***
안네마리는 키리에의 물건을 챙겨야겠다며 방을 나갔다. 다리가 다 낫지 않아 움직일 수 없는 키리에는 미소로 그녀를 배웅했다.
이후 병실을 찾은 것은 올드렐름의 박사들이었다.
“아가씨! 성공하셨군요!”
“정말 대단한 분이시네요.”
꽉 끼는 주황색 조끼를 입은 포 박사가 눈물을 흘리며 달려와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호크송 박사는 그 뒤에서 여전히 차분하고 엄격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와 줘서 고마워. 그런데 시워드 박사는?”
“아, 제랄드는…….”
포 박사의 안색이 흐려졌다.
“제랄드는…… 시, 신과 가장 가까운 자가 되었어요…….”
키리에의 손이 이불을 강하게 쥐었다. ‘신과 가장 가까운 자’는 주로 정신 이상을 설명할 때 쓰는 관용어였다.
“왜?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설마 나타니엘이 그를 강제로…….”
“오, 오해하진 마세요! 무, 물론 전설경과 일이 있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라면 우린 전설경을 탓할 수 없어요.”
호크송 박사가 부러 차갑게 말했다.
“제리는 손대서는 안 될 것에 손을 댔어요. 아가씨는 이미 경고했고, 그걸 어긴 건…… 제리의 잘못이죠.”
하지만 그녀의 냉담한 태도에서 오히려 슬픔과 거리를 두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키리에가 입을 다물었고, 포 박사는 분위기를 살피다 힘겹게 미소지었다.
“그래도 아가씨라도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용…….”
“그대들 덕이야. 고마워.”
“대체 어떻게 하신 거지요? 전, 전 아무리 생각해도 전설경에게 다시 잡혀 오실 줄 알았는데…….”
“보면 알잖아? 과한 내기를 했지.”
키리에가 다리를 가리키며 희미하게 웃었다. 포 박사는 손수건에 코를 팽 풀더니 어깨를 들썩였다.
“그럼 이제 괜찮으신 거지요? 저는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도망치진 않아도 되는 거지요?”
“아마도.”
“그분이 앞으로는 아껴 주겠다고 했나용? 좋아하는 여자를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걸 깨달았겠지요?”
키리에는 대답을 망설였다. 일단 그는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기억의 끝에서 나타니엘에게 어떤 약속을 받아낸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일단 그와 얘기를 해 봐야겠어. 깨어난 뒤로 만나지 못했거든.”
사실, 깨어났을 때 당연히 그가 옆에 있을 줄 알았다. 키리에가 고개를 돌렸다.
“나타니엘은?”
“글쎄요. 저희는 연락만 받아서…….”
“연락?”
“네. 아가씨가 깨어났을 때 병문안을 가라고요.”
키리에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걸 나타니엘이 직접 전했어?”
호크송 박사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좀 이상한 일입니까?”
“음…….”
키리에가 말을 삼켰다. 그녀는 눈을 좌우로 굴리다가 침대에 기댔던 등을 떼어 냈다.
“역시 그를 좀 만나 봐야 할 것 같아. 그와 만난 게 언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만, 어디에 계시는지는…….”
“그래?”
말없이 어딜 간 걸까. 기분 나쁜 추측이 떠올랐지만, 키리에는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털어 냈다.
“일단 움직여야겠어.”
“네? 무슨 말씀을! 아가씨는 쉬셔야 해용!”
키리에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포 박사가 호들갑을 떨며 그녀의 어깨를 눌렀다.
“그 안네마리라는 소녀가 치료하긴 했지만, 아직 다 나으신 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아가씨는 환자예용!”
“살라미시 말이 맞아요. 전설경을 찾는 일이라면 사람을 시키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래도 혹시나 다른 누가 잘못이라도 하면…….”
시워드 박사를 떠올린 키리에가 안색을 흐렸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달은 두 박사 역시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쉬셔야지요. 저는 잘 모르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으시겠지요?”
“그런가……. 그렇네.”
키리에가 다시 등을 침대에 기댔다. 비는 그치지 않고 있었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했다.
과거 키리에는 자신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타니엘이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건 맞지만, 그건 그야말로 애완동물을 향한 마음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국왕이 키리에의 주변을 압박해도, 키리에 자신의 일이 아니니 도와주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럼 지금은 어떻지?’
이제 키리에는 자신이 나타니엘에게 어느 정도의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라도 그를 인생에서 내칠 준비를 하고 있어야만 그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도.
‘어쩌면 정말 왕조를 바꾸는 게 나을지도. 레쇼 경은 아마 도와줄 거야. 나타니엘이야 말할 것도 없고. 문제라면 귀족들인데…….’
키리에가 냉정하게 생각을 이어 갔다. 선택하고 싶지 않은 선택지지만 최악은 대비해 두어야 했다.
그사이 포 박사는 꽃다발을 물병에 꽂고 있었다.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키리에가 불쑥 물었다.
“그러고 보니 웬 꽃이야?”
“호, 좋은 소식을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포 박사가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날이 따뜻해졌다고 해요! 놀랍지요?”
“봄이 오는 거야?”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다행이지요……. 봄밀은 어려워도, 가을밀은 추수할 수 있겠어용.”
“하지만 꽃은 대도서관의 연구용 마법 정원에서 났습니다. 나중에 테마르 의장이 인사드리러 올 겁니다.”
“아…….”
키리에가 눈을 깜빡였다. 당연히 나타니엘의 마음이 풀렸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하지만…….’
시선이 창밖의 장대비로 향했다.
‘그냥 봄비일까?’
잠시 침묵하던 키리에가 고개를 돌렸다.
“나타니엘을 불러 줘.”
***
나타니엘은 하루가 다 가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비는 계속 내렸고, 키리에는 엄청난 수의 방문객을 맞이했다.
저녁나절에 들른 테마르 의장은 귀부인들이 즐겨 쓰는 진주 연고를 가지고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의 관장이자, 학술회의 의장인 테마르라고 합니다.”
“반갑네.”
키리에가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학술회의의 마지막 날을 ‘그런 식으로’ 꾸미게 된 것에는 그의 공이 컸다.
“덕분에 계획대로 일을 진행할 수 있었어. 추후 사례하고 싶은데, 받아 주겠어?”
다정한 키리에의 말에 테마르 의장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별로 한 것도 없습니다, 저는……. 그보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다 나으려면 며칠 걸릴 것 같다더군.”
“며칠이요? 꽤 심각한 상처였는데…….”
“내 시녀의 솜씨가 좀 좋아.”
“그 귀가 뾰족한……?”
“응. 그보다 나타니엘은?”
의장이 안네마리에게 관심 갖기 시작한 것을 눈치챈 키리에가 화제를 바꿨다. 테마르 의장이 아차 하고 턱수염을 쓸었다.
“그게 말입니다, 아무래도 프로노이아에는 안 계신 것 같습니다.”
“나타니엘이?”
“예. 이게 참,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걸 알지만 마법으로 찾으려고 시도도 해 보긴 했습니다. 그런데 기척이 없었습니다.”
키리에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알았어. 그럼 그를 찾는 건 미뤄 줘.”
“알겠습니다. 그리고…….”
테마르 의장이 머뭇거렸다.
“실례지만, 혹시 시워드 박사를 뷰캐넌 가문의 영지에서 요양시켜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시워드 박사를?”
의장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학자들이 가정을 가지긴 쉽지 않습니다. 시워드 박사 역시 그렇고요. 그는 몸을 의탁할 곳이 없고, 그의 재산으로 요양비를 전부 감당할 수 있을지…….”
“아아.”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전설경, 호국경, 바다를 얼리는 능력과, 하늘을 가르는 검. 요근래 그런 것들을 마주하고 지냈지만, 키리에의 현실은 여전히 이쪽이었다.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는 뷰캐넌에서 책임지겠어. 영지에 괜찮은 해안가 마을이 있어. 거기에서 요양을 시키면 될 거야.”
테마르 의장이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사람 좋게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그것만 해 주신다면…….”
“아니, 그것만 할 순 없지.”
“예?”
“올드렐름의 박사들에게도 보상이 돌아가야 하고, 죽은 제롬도 잊으면 안 되지. 이번 일로 차출된 마법사들 목록을 나중에 가져다주겠어? 들어간 비용도 계산해서 알려 줘. 아니, 아예 총무를 내게 보내 주는 게 낫겠군.”
테마르 의장이 어안이벙벙한 얼굴로 눈을 끔뻑거렸다.
“예? 하지만 그거야 원래 학술회의에서 하던 행사고…….”
“개회식을 내 오라비가 맡았다지? 아예 이번 학술회의를 뷰캐넌이 지원하는 것으로 하지.”
“예?!”
테마르 의장의 눈이 커졌다.
학자들이란 연구비가 물레방아만 돌리면 떨어지는 줄 아는 족속들이다. 당연히 학술회의를 한 번 여는 데에도 엄청난 돈이 필요했다.
그걸 뷰캐넌이 대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기야 하다.
‘하지만 그녀는 중앙 귀족이고, 앞으로 정치적으로도 국왕과 부딪칠지 모르는데…….’
테마르 의장의 망설임을 눈치챈 키리에가 냉연하고 온화하게 미소지었다.
“괜찮아. 이건 어디까지나 지식의 발전을 위한 투자니까. 이번에 큰 도움을 받기도 했고 말이야. 그대들이 뷰캐넌의 싸움에 휘말릴 일은 없을 거야.”
“그렇습니까……?”
불안한 부분을 제대로 해소해 주는 말이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 해도 천문학적인 금액이 드는데 괜찮으실지…….”
테마르 의장이 여전히 눈치를 보며 말했다. 키리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설마 1200억을 넘나?”
“예?! 그럴, 쿨럭, 그럴 리가요!”
“그럼 됐네. 내 영지에서 그 정도 수입은 나올 테고, 뷰캐넌의 내 구좌에도 어느 정도 배당금이 쌓여 있거든.”
“아가씨의 영지요?”
테마르 의장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귀족가의 영지와 재산은 원래 전부 장자가 승계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키리에는 슬슬 어둠이 내리는 하늘을 배경으로 우아하게 미소지었다.
“몰랐나? 곧 프로노이아의 영주를 맡게 될 키리에 뷰캐넌이라 하네. 잘 부탁해.”
***
셀 아렐라노의 왕궁, 국왕 진저 오레윈브리지는 마석을 손에 쥐고 천천히 굴렸다.
「키리에 뷰캐넌이 다시 잡혔습니다.」
“잡혔다고?”
국왕이 차갑게 물었다. 통신석 너머의 연락책이 높낮이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예.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다친 모양이지만 원인은 알 수 없으며, 전설경이 그녀를 호송해 왔다 합니다.」
“멍청하긴. 도망도 제대로 칠 줄 모르나.”
국왕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됐다. 고작 백작, 아니, 공작 영애에게 내가 너무 큰 걸 바랐지. 전설경은?”
「이동했습니다.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작정하고 모습을 숨기면 인간은 그를 잡을 수 없다. 그걸 알기에 국왕은 탓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곤란하다. 그가 지나치게 빨리 돌아오면 계획이 어그러진다.
국왕이 근처에 로브를 쓰고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단장. 술식의 해독은?”
“오래 남진 않았습니다.”
남자가 양손을 모으고 고개를 조아렸다.
“시조께서는 확실히 전설경이 돌아올 것을 예견하고 계셨던 듯합니다. 범인도 이해 가능할 수 있게 적어 놓아, 조만간 모든 해독이 끝날 것입니다.”
“잘됐군.”
국왕이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키리에 뷰캐넌이 도망쳐준 덕에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전설경은 어울리지도 않게 쫄래쫄래 그녀를 찾으러 나섰고, 호국경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리고 자신은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의 마법을 손에 넣었다.
‘호수. 호수 안에 연구실을 숨겨 놓았을 줄이야.’
국왕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대마법사 발라브리가의 마법으로 마냥 봄을 유지하고 있을 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전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국왕이 손짓하자, 거대한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그리고 카나리아처럼 차려입은 루비니아 캐스너가 종종걸음으로 집무실에 들어왔다.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그녀가 녹색 눈을 반짝이며 귀엽게 인사했다.
하지만 그를 보는 국왕의 눈은 매서웠다. 과거 왕세자의 약혼녀였던 키리에 뷰캐넌이 떠오른 것이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존귀하신 태양을 뵙습니다.’
확실히 뷰캐넌이 모든 면에서 품행이 방정했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품위를 가진 그녀는 왕세자빈이 될 자격이 있었다.
“쯧.”
“…….”
국왕이 대놓고 혀를 차는 모습에도, 루비니아는 약간의 시무룩함만 보였다. 뭐가 됐든 이용하기에 좋으면 그만이라 생각한 국왕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가까이 오라.”
“예.”
루비니아가 작은 새처럼 걸어 다가왔다.
‘이든을 정성스레 간호해 주고 있다고 했지. 이번에도 말을 잘 들었고……. 출신이 더럽긴 하지만, 그래도 쓸모는 있겠어.’
국왕이 차가운 눈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엔 그대의 도움이 컸네. 왕실 서고에 함부로 출입한 것은 지식을 좇는 그대의 사소한 일탈인 줄로 알고 넘어가도록 하지.”
“아량에 감사드려요.”
“하지만 내 아직 그대에게 부탁할 게 있네. 들어주겠나?”
루비니아가 구스베리 색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든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얼굴이었다.
“제가 감히 그럴 능력이 된다면, 이 몸 바쳐 얼마든지 전하께서 하시는 일을 돕겠습니다.”
“좋군.”
국왕이 책상에 팔꿈치를 올리고, 깍지를 꼈다. 그리고 산뜻하게 미소지었다.
“그럼 당장 수도를 떠나, 키리에 뷰캐넌 옆에 붙게. 그리고 내 명령을 기다려. 할 수 있겠지?”
루비니아 캐스너의 눈이 의지로 가득 찼다. 그녀가 입술을 앙다문 채, 소녀처럼 뺨을 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할게요.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마차가 빠른 속도로 빗길을 달렸다. 겁에 질린 마부는 연신 말들을 채찍질했다. 그의 얼굴은 어두운 장대비 속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차 안의 그레이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프로노이아에서 빠져나온 지 몇 시간. 최고 속도로 달린 덕에 이미 거리는 상당히 벌어졌다. 호우 탓에 속도가 조금 느려지긴 했지만, 그레이는 무사히 프로노이아를 빠져나왔다고 생각해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부가 ‘뭔가가 온다’며 혼비백산해 달리기 시작한 지 15분째였다.
“대체 뭐야! 뭐냐고!”
누구도 그레이의 외침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같이 마차에 타고 있는 느베야는 주먹을 쥔 채,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무시무시한 것이 쫓아오고 있었다.
“도련님.”
“왜! 뭔데! 설마 전설경이야? 전설경이냐고! 이만큼이나 달려왔는데,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
그레이가 발작하듯 외쳤다. 느베야가 침을 삼켰다.
“마차를 멈춰야 합니다.”
“개소리하지 마!”
“도련님. 이미 늦었습니다.”
그레이의 표정이 무너졌다. 세자르를 닮은 보라색 눈에 공포가 차올랐다. 그는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아니야……. 아직, 아직 방법이 있을 거야……!”
“…….”
느베야는 마부석과 연결된 창을 열어 마차를 멈추라고 명령했다.
직후, 마차가 멈췄다. 비가 마차 천장을 두드리는 탕탕, 소리가 고요한 마차 내부를 울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레이의 맞은편, 느베야의 옆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흐억!”
뒤늦게 놀란 그레이가 기겁해 벽에 붙었다.
나타니엘은 그걸 보고서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긴 다리를 꼬고 그 위에 지팡이를 얹은 채, 그는 마치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치를 보던 그레이가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나타니엘 님! 이런 곳에서 다 뵈, 뵙는군요? 아니, 그런데 다 젖으셔서 어떡하지? 이거 참!”
그레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느베야는 말없이 무릎 위에 얹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별로 좋지 않은 인사말이었다. 자신의 주인은 이제 그걸 판단하지 못할 정도로 이성이 마비된 게 분명했다.
나타니엘은 무릎 위에 가로로 얹어 놓은 지팡이를 느리게 흔들었다. 지팡이 끝에서 빗물이 똑똑 떨어져 내렸다.
[수화물을 보내라고 했을 텐데.]
“아! 수화물 말씀이십니까?”
넉살만큼은 인정해 줄 만했다. 그레이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시원하게 웃었다.
“이야, 사람을 시켜서 꼭! 말을 전하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제대로 일을 안 한 모양입니다!”
[사람을 시킬 거였다면 굳이 네게 말하지 않았겠지.]
“그으러시죠, 예, 그렇긴 한데, 하하! 그, 제 아버지가 하도 저를 찾으셔서……. 제, 제가 수도에 갈 일이 생겼기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숲 짐승의 치료가 조금만 늦었어도 키리에는 죽었어.]
“그렇습니까? 이거 참…….”
차라리 뒈지는 게 나았을 텐데. 그레이가 속내를 숨기고 표정을 관리했다.
“키리에는 괜찮습니까? 그렇게 보고 싶어 하셨는데, 여기 계셔도 될지……?”
그 말에 어둠 속의 파란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정말로 웃었다기보다는, 웃는 모습을 보여 주려는 것에 가까웠다.
[지금이 아니면 처리가 곤란하겠더라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지팡이를 움직였다. 곧 지팡이 끝이 그레이의 가슴팍에 닿았다. 그레이의 옷에 빗물이 검은 점을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본 느베야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동작의 의미를 깨달은 그레이가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저는 키리에의 오라비입니다!”
[그렇겠지. 여동생을 버린 오라비.]
어둠 속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지팡이는 흔들림이 없었다.
“나타니엘 님은 모르시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혈연이란 어마어마한 겁니다. 가족의 원수는 절대 잊지 못한다 이 말입니다!”
[안타깝게 됐구나. 키리에는 그러지 않을 거야.]
“무슨……?! 키리에가 저를 죽이는 일에 협조했다고요?!”
[아니.]
나타니엘의 입술이 조곤조곤 움직였다.
[키리에는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영 알지 못할 거야. 그렇지?]
그의 물음이 향하고 있는 곳은 그레이가 아니었다. 옆자리의 느베야였다. 느베야가 숨을 들이켰고, 그레이의 눈이 커졌다.
“느베……!”
“물론입니다.”
[똑똑하군. 훌륭해.]
그 순간 그레이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비명도 없고 피거품도 없었다. 그저 갑자기 잠든 사람 같았다.
느베야가 천천히 눈을 뜬 뒤, 죽은 야자나무처럼 늘어진 그레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물었다.
“……도련님의 용태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의식은 있어. 제 몸을 못 가눌 뿐. 완벽하게 제정신이지.]
나타니엘이 지팡이를 물리며 키득거렸다.
[이 이야기도 듣고 있겠지. 지병이라도 있기를 바라야 할 거야. 남은 수명이 길면 길수록 고통스러울 테니.]
“……제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데리고 돌아가. 그리고 뷰캐넌의 후계자가 ‘모종의 사고’로 더는 제구실을 할 수 없다고 알려. 이후엔 영영 내 눈에 띄지 않으면 더할 나위 없겠구나.]
미리 구상이라도 한 것처럼 흘러나오는 잔인한 말에, 느베야는 잠깐 마차 너머 마부석 쪽을 바라보았다.
“마차 사고로 하겠습니다.”
[아무렴. 빗길은 위험하지.]
느베야가 침묵했다. 그녀는 불편한 정적에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내리는 비도 피할 수 있을 사내가 굳이 비에 젖은 채 상념에 잠겨 있는 것을 방해할 배짱은 없었다.
한동안 빗줄기가 마차를 두드리는 탕탕, 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너도 키리에를 모셨나?]
나타니엘이 불쑥 물었다. 그가 설마 자신에게 말을 걸 줄은 몰랐던 느베야는 잠시간 대답하지 못했다.
“도련님이 북 대륙으로 떠나시기 전, 저택에서 계속 뵈었습니다.”
가까스로 나온 목소리는 그녀가 들어도 경직되어 있었다.
나타니엘의 시선이 미끄러지듯 느베야에게 향했다. 어둠 속에서 푸른 눈만이 유독 맑은 색채로 빛나는 것이 보였다.
[원래 좀 그런가?]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원래 좀 그렇게…….]
나타니엘의 고운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나?]
그는 말하고서도 그것이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희미하게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다.
느베야는 착실히 저택에서의 아가씨를 떠올렸다. 키리에 뷰캐넌, 그녀가 어떤 사람이더라?
“……저는 일개 사용인이라 그분의 행동을 평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번 누군가와 대립하면 절대 굽히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나잖아.]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걸까. 느베야가 침묵했다.
나타니엘이 다리를 꼬고 턱을 괴었다. 그 바람에 그레이의 뺨이 구둣발에 차였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구나 내 앞에선 무릎을 꿇고, 가지지 못한 것을 바라지. 힘, 권력, 부, 명예, 좀 더 겁이 없는 것들은 내 충성을 바라거나.]
“…….”
[그런데 그 목숨 걸고 요구하는 것이란 게 고작…….]
고작. 그 이후로 말이 끊겼다. 그는 빗소리를 반주로 삼아 다시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흠뻑 젖은 탓에 평소보다 세 배는 더 퇴폐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느베야가 그 몰래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아가씨는 대체 이 위험한 존재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그 아름다움과 별개로, 자신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지경인데.
[거짓말일까?]
전설경이 불쑥 물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무표정의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얼굴을 하고서 느베야를 바라보았다.
“예?”
[거짓말일까? 대답해 봐.]
머리도 꼬리도 뗀 알 수 없는 질문. 감정 없는 푸른 눈은 어느 쪽이 정답인지 일말의 실마리도 주지 않았다.
이미 압박감으로 느베야의 정신은 막다른 곳에 몰려 있었다. 바다에 빠진 사람처럼 숨이 막혔다. 그녀는 결국 자기도 모르는 새에 뭔가를 입 밖으로 토해 냈다.
[아.]
느베야는 나타니엘이 그렇게 말한 뒤에야, 자신이 뭔가 대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뭐라고 말했지? 하지만 나타니엘의 표정은 심드렁한 그대로였다.
[그런가.]
나타니엘이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느베야의 심장은 너무 거칠게 뛰어서 입 밖으로 빠져나오기 직전이었다. 제대로 대답한 게 아니라면, 그레이 뷰캐넌처럼 죽는 게 더 나은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전설경은 답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는 냉정하고 차가운 얼굴로 다른 이야기를 했다.
[뷰캐넌이 키리에를 찾고 있나?]
이제야 느베야가 아는 이야기가 나왔다. 너무 거창하지 않은 현실의 이야기가.
노련한 하인답게 느베야는 그가 말하는 ‘뷰캐넌’이 당주 세자르를 이르는 말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예. 발견해 수도로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내가 데리고 있으니 그만두라 전해.]
“알겠습니다.”
나타니엘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어딘지 지쳐 있는 듯했다.
[넌 네 주인보다는 똑똑하구나.]
그는 그대로 어둠에 녹아들어 모습을 감췄다.
***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에서 지낸 지 나흘째.
웬만한 방문객은 전부 다녀갔다. 키리에는 살뜰히 그들을 챙기고, 치료받고, 회복 이후의 일을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나타니엘은 아직 소식이 없는 거니, 안네마리?”
허벅지의 상처를 살피러 온 안네마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안네마리도 잘 모르겠어요. 아가씨를 프로노이아에 데려다 놓으신 이후에는 아무도 본 적이 없대요.”
“그거 참……. 불안하게 들리는 말이네.”
나타니엘이 눈앞에 없었을 때 좋은 일이 일어났던 적이 없다. 키리에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나마 비가 그쳤다는 것만이 위로가 되었다.
프로노이아를 홍수로 쓸어버리고 싶은 것처럼 내리던 비는 어느 순간 잠잠해졌다. 그리고 봄에 어울리는 햇살이 도시 전체에 가득 찼다.
창 너머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전경을 바라보던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다리는 괜찮을까?”
“다행히 후유증은 남지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당분간은 지팡이를 쓰셔야 하고, 오래 걸으시면 안 돼요!”
“다행이네. 지팡이를 가져다줄래?”
“바로 움직이시려고요?”
안네마리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충실하게 지팡이를 내밀었다. 키리에가 그것을 건네받아 살피며 대답했다.
“그래야지.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앉아 있으려니 시간이 아까워.”
안네마리가 뭔가 못마땅한 듯이 입술을 오므렸다.
“안네마리가 인형을 만들까요?”
말하면서 그녀는 고양이처럼 손톱을 세웠다. 일전에 키리에를 옮겼던 늑대를 말하는 모양이다.
키리에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런 걸 타고 다니면 사람들이 기겁할 거야. 괜찮아. 오히려 좀 걷고 싶거든.”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자, 다리에 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키리에가 눈살을 찌푸리자 안네마리는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맴돌았다.
키리에는 괜찮다고 손짓하며 느린 걸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가씨! 벌써 움직이셔도 되나요?”
“안녕하세요, 뷰캐넌 님!”
몇몇 박사들이 인사를 건네왔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나타니엘은 보이지 않았다.
키리에가 주변을 둘러본 뒤, 절뚝거리며 다시 대도서관의 고층으로 향했다.
‘사람이 없는 곳.’
고층은 입장이 통제되는지 인적이 드물었다. 키리에는 드레스를 쥐고서, 조금 더 위쪽으로 향했다.
‘조용한 곳.’
그녀의 눈에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의 가장 꼭대기 층에 있는 공중 정원이 띄었다.
‘하늘과 가까운 곳…….’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땀이 났다. 줄곧 곁에 있던 안네마리는 어느 순간 흠칫하고 놀라더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건, 키리에가 맞게 찾아왔다는 의미였다.
키리에의 손이 유리로 된 정원의 문을 열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바람 소리뿐인 정원이었다. 절뚝대며 풀숲을 지난 키리에는, 온갖 녹색 틈바구니에서 흔들림 없이 꼿꼿이 선 검은 등을 보았다.
키리에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절름거리며 그가 서 있는 난간 끝으로 향했다.
“나타니엘.”
그 순간, 그때껏 버텨 주던 다리에서 힘이 쑥 빠졌다. 키리에가 닥쳐올 아픔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아픔은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나타니엘이 가뿐히 키리에를 잡아챈 것이다.
키리에가 그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
[…….]
시선이 가까이서 마주치자, 허리를 안은 나타니엘의 팔에 조금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고마워요.”
키리에가 미소지으며 속삭였다. 얼핏 나타니엘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떠오른 다정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제롬이 키리에의 목에 낸 생채기를 본 직후였다.
드러나지 않게 굳은 얼굴을 본 키리에가 급하게 손으로 상처를 가렸다.
“나타니엘, 제롬은…….”
이미 죽었잖아요, 하고 말하려 했으나, 나타니엘이 고개를 돌리는 게 더 빨랐다.
[그만두지.]
묘하게 화내는 것 같은, 그러나 그것뿐만은 아닌 것 같은 낮은 경고성의 울림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키리에가 무슨 새끼 고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볍게 들어, 그녀를 난간에 앉혔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앞만 바라볼 뿐.
“…….”
키리에가 머뭇거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아예 환대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로 냉랭할 줄은 몰랐다.
그는 평소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고, 날이 서 있었다. 얼핏 보면 세련된 젊은 사내로만 보이기도 하는 나른한 미소도 없었다.
키리에가 슬쩍 나타니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디에 다녀왔어요?”
나타니엘이 가볍게 대답했다.
[산책.]
키리에는 눈썹을 치켜세웠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타니엘은 그녀가 가만히 불어오는 봄바람에 머리카락을 쓸어 넘길 무렵에야 입을 열었다.
[무모했어.]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키리에가 부드럽게 답했다. 나타니엘이 그녀 쪽으로 조금 몸을 돌렸다.
[내가 널 죽게 내버려 뒀다면?]
“그러지 않았잖아요.”
[만일을 이야기하는 거야.]
“만일은 없어요.”
[어떻게 그렇지 확신하지?]
키리에가 난간에 걸린 다리를 흔들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날 죽이지 않겠다고 안네마리와 약속했잖아요? 아예 근거 없이 움직인 건 아니었어요.”
키리에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타니엘의 머리는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는 꽤 오래 침묵했다.
[잘도 그걸 믿었구나.]
“누구와는 달라서 남을 믿는 법을 알거든요.”
[그래. 누구와는 달라서 뒤통수도 맞고.]
“남의 뒤통수를 친 그 누구께서 하실 말씀인지?”
[나 말고.]
그때, 소리도 없이 나타난 나타니엘의 검이 상흔이 남은 키리에의 허벅지 옆 부분에 꽂혔다. 치맛자락이 갈라졌다. 훅, 하고 단숨에 불어닥친 칼바람이 뺨을 스친 것도 그 순간이었다.
[귀여운 제롬 말이야.]
키리에는 그제야 그가 화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용하고, 어마어마하게. 아마 지금까지 중 가장 크게.
그녀는 방망이질치는 심장을 숨기며 냉정하게 말했다.
“지금 칼 들이밀 사람은 나인 것 같은데요.”
[좋은걸. 복수라도 하겠어?]
“복수…….”
어째서 아직도 그런 단어를 꺼내는 걸까. 키리에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거 하지 않아요.”
[물론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그래야지. 자기를 버리고 도망칠 생각이나 하는 놈을 위해 복수라니, 가당치도 않아.]
“그건 당신이 위협해서 그런 거잖아요.”
키리에가 낮고 강하게 말했다. 나타니엘은 조용한 웃음을 터뜨렸다.
[나라면?]
“네?”
[거기 있는 게 나였어도 그랬을까?]
키리에가 말없이 나타니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당신은 그러지 않았겠죠.”
나타니엘이 제롬의 입장이었더라면, 분명 제롬처럼 행동하진 않았을 것이다. 위협받는다고 해서 키리에를 두고 도망치거나, 인질로 삼아 상황을 모면하려고 드는 일 따위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변하지 않고, 바뀌지 않고, 굽히지 않고…….’
그걸 알기에 키리에도 목숨을 걸었다. 말로는 그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왜일까.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뭔가가 어긋났다.
그런 불안감에 키리에는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고, 말문을 튼 것은 나타니엘이었다.
[키리에 뷰캐넌.]
높은 곳에 부는 바람이 나타니엘의 뒤에서 몰아쳤다. 키리에가 턱을 들어 나타니엘을 올려다보았다.
천천히, 나타니엘이 쥐고 있던 검이 푸른 마력으로 반짝이며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팔을 펼치며 허리를 숙였다. 날렵하고 매끈한 사내의 몸이 그림자를 만들어 키리에의 위를 덮었다.
양손이 느리게 키리에의 뺨을 쥐었다. 역광에 가려졌던 얼굴이 그제야 보였다.
지독한 얼굴이었다.
[그냥 나를 증오해.]
키리에의 눈이 커졌다.
나타니엘은 경건하기까지 한 동작으로 무릎을 꿇고 키리에와 이마를 맞댔다. 눈을 감은 채, 마치 신에게 기도하듯이.
[그렇게 하자. 그게 네게도 내게도 나아. 행복? 가당치도 않아.]
“나타니엘……?”
[너 이전의, 발라브리가를 포함한 모두가 그렇게 자신했지. 내 행복을 바란다고, 자신만은 그걸 줄 수 있다고.]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엉켜 키리에의 이마 위로 흐트러졌다. 나타니엘의 찬 숨이 키리에의 뺨에 와 닿았다.
[그들이 성공했을 것 같니? 정말 네가 변하지 않을 것 같아?]
“……무슨 말이에요, 대체?”
키리에가 억눌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타니엘은 코끝을 부딪치다가, 키리에의 눈꺼풀에 입 맞추기를 반복했다. 떨리고 있는 키리에의 몸과 달리 그는 너무나도 차분하고 고요했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라는 듯이.
[그렇게 말한 누군가는 내게서 벗어나고 싶다며 자살했고, 누군가는 나를 은화 서른 닢에 팔았고, 너도 아는 누군가는 내가 자기 것을 탐내려 한다며 나를 죽이려 했지.]
“난, 그러지 않……!”
[지금은.]
힘겹게 꺼낸 말마저 그는 바로 잘라 버렸다.
[그러지 않겠지, 지금은…….]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심장 떨리게 청아했지만, 어딘지 쉰 듯 들렸다. 아마 지나치게 오래 산 덕에, 오로지 그 덕에 겨우 버텨 내고 있을 상처가 조금 엿보였다. 담담하게 내뱉는 모든 단어에 키리에는 겪을 수도 없는 시간이 꽉꽉 눌러 담겨 있었다.
그렇기에 신랄했다. 그는 너무나도 능숙하고 노련하게 키리에의 심장을 찔러왔다.
[넌 지금 너 자신의 선량함에 취해 있을 뿐이야. 그렇지 않니? 너에게만 친절하고, 강하고, 아름답고, 고독해 보이는 남자를 구원해 주고 싶다는 욕망.]
“그렇지 않아요!”
[착각하지 마, 키리에 뷰캐넌.]
키리에가 나타니엘을 뿌리치려 했지만, 나타니엘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더 강하게 키리에의 양 뺨을 쥐고서, 짓씹듯 속삭였다.
[넌 변해. 너도 변할 거야. 지금까지의 모든 인간이 그랬듯이.]
“아니에요! 당신, 아직도 그렇게밖에……!”
아니긴. 나타니엘이 키득거렸다.
[네가 그렇게 특별한가? 내게 사랑받는다고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종말로부터 세상을 구원할 책임이라도 진 것 같니?]
키리에의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했다.
“난 그저 당신과, 앞으로는 좀 더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어서……!”
[좋은 관계? 내가 너와?]
칼날 같은 조소가 나타니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가 정말 널 믿을 거라고 생각했나? 고작 인간인 너를? 고작 그 하찮은 목숨 한 번 던졌다고?]
하찮은.
키리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타니엘을 올려다보려 했으나, 그는 끝끝내 얼굴을 보여 주려 하지 않았다.
[난 네가 좀 더 주제 파악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나타니엘. 날 봐요, 날 보고 얘기해요.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알잖니, 내가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는 걸. 하지만 네가 내 구원자가 되고 싶다면, 얼마든지 시늉해 주지. 내가 어찌 널 거절하겠어…….]
나타니엘이 차갑고 낮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내 동의를 얻고 싶을 때, 넌 내게 허락되지 않은 방 안에 틀어박혀서 네 목숨을 갖고 협박하면 그만이니까.]
키리에가 도리질 쳤다. 그녀가 모든 일을 계획하면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다. 결국 그가 거절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서 압박한 꼴이 되어 버리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난 그냥 그렇게 해야 당신이 내 말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해서……. 절대 당신을 협박할 생각은 없었어요……!”
[재밌니? 나를 복종시킨 기분은 어때? 이제 온 세상이 다 네 거란다. 축하해.]
키리에가 괴로운 숨을 토했다. 그런 식으로, 그런 마음으로 한 행동이 아니었다. 결단코 그런 마음은 없었다.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축하 받으려고 한 게 아니에요……. 그 점은, 나도, 나도 미안하게…….”
[미안하긴. 그래 봐야 죽는시늉만 좀 하는,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그가 내뱉는 모든 단어가 키리에의 심장을 푹푹 찔러 댔다. 뒤늦은 설움이 몰려들었다. 그가 일부러 송곳 같은 말을 내뱉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슬펐다.
그에겐 별것도 아닌 일일지 몰라도, 키리에에겐 어마어마한 두려움이었다. 그가 자신을 믿어 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을 가능성도 분명 있었다. 두렵고, 두렵고, 두려운데도, 그래도 그녀는 자기 목숨을 걸었다.
그랬는데.
“하지만 나는, 나는 사실 무섭, 무서웠는데……!”
[그래서 이렇게 축하해 주잖니? 그 알량한 구원자 행세로 이제 종말을 부릴 수 있게 되었구나.]
키리에의 입이 슬픔으로 벌어졌다. 괴로웠다. 자신이 행한 모든 일이, 그의 날카로운 낱말에 베여 차곡차곡 무로 돌아가고 있었다.
자신을 끌어안은 단단한 어깨에 손톱을 세우며, 키리에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날…… 살렸으면서…….”
나타니엘이 다시 키리에의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너무나도 소중한 무언가를 어루만지듯 연약한 입맞춤이었다.
[없으면 따분하니까. 그리고 네가 말했듯이, 숲 짐승과 약속했으니까. 그뿐이야.]
어느새 흐르고 있던 키리에의 눈물이 그의 입술 사이로 스며들었다.
[정말 그뿐이야.]
거짓말.
키리에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처음으로 듣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진짜라면?’
그녀는 그걸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타니엘 역시 그걸 알고 있었다.
계속 도리질 치며 몸을 밀어내려고 하는 키리에를, 나타니엘은 놓아주지 않았다. 내뱉는 말과 달리 키리에를 어루만지는 그의 사소한 몸짓 하나마저 조심스러웠다.
[어리석은 키리에 뷰캐넌. 네 연민은 모두 일시적인 허상이고, 난 그 구원자 놀음에 장단 맞춰 주기엔 너무 오래 살았단다.]
그 순간, 키리에가 강하게 나타니엘을 밀쳤다. 그리고 순식간에 나타니엘의 멱살을 붙잡았다.
피가 나는 입술을 깨물며 울고 있는 키리에를, 나타니엘은 깊고 고요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때…… 날, 받아들이겠다고 말한 것도…… 그것도 거짓말이었어요……?”
키리에가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물었다. 그 빗속에서의 일을. 그녀가 정신을 잃기 전 들은 마지막 말을.
무수히 많은 말, 무수히 많은 생각이 아스라이 나타니엘의 푸른 눈 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이내 그린 듯 단정하게 미소지었다.
[거짓말이야.]
***
그는 아주 오랜만에 거짓말을 했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악이란 본디 거짓과 상통하는 것.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삶이 따분해서였을 뿐이니까.
키리에 뷰캐넌은 품 안에서 몸을 떨었다. 그녀는 몸도 작고, 손도, 발도 다 작아서,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꼭 작은 새가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존재의 기원이 악에 있기에, 누구보다 사람의 악을 손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키리에가 진심이라는 것을 당연히 모르지 않았다. 그녀는 놀랍게도 정말로 온전한 선의만을 가지고, 그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적어도 지금은.
나타니엘은 울며 숨을 힘겹게 내쉬는 키리에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래서 그게 얼마나 갈까? 일주일? 한 달? 키리에 뷰캐넌은 고집이 좀 센 편이니, 몇 해는 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뿐. 그뿐이다.
그녀는 결국엔 자신의 말을 철회할 것이다. 인간은 너무 일찍 죽고, 그보다 더 일찍 변심한다. 그들에게 마음이 바뀌는 일이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고, 영원의 맹세란 당장 지금 그렇다는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이미 수없이 그 가벼운 맹세 때문에 세계가 무너지는 기분을 겪었다. 그가 아직 남들 위에 군림하는 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 그는 냉대받고, 증오받고, 배신당하고, 팔리고, 돌팔매질 당하고, 쫓겨나고, 불태워지고, 사지가 찢기고, 죽임당했다.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그러면서 깨달았다. 인간이 말하는 영원은 부질없다.
그 영원을 말한 사람 중 키리에처럼 그를 위해 목숨까지 건 사람은 없었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만큼 인간들의 행동도 더 극단적으로 변했을 뿐이리라.
그의 세계는 키리에를 믿기에는 너무 많이 무너져 있었다.
더하여 그는 직감했다. 언젠가 키리에 뷰캐넌이 자신을 외면하게 된다면, 그게 그를 완벽하게 무너뜨리는 마지막 한 수가 되리란 것을.
그래서 그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전부 거짓말이야.]
흐느끼는 몸을 끌어안고, 젖은 보라색 눈을 보지 않기 위해 연신 눈꺼풀 위에 입을 맞추며, 그는 생각했다.
이젠 그녀가 우는 게 별로 즐겁지 않았다.
[둄2 절갠 교환재공타싸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