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역전
학술회의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박사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그들은 몽유병 환자처럼 복도를 돌아다니다가 화분에 커피를 붓거나, 잉크를 마시려 들었다.
키리에는 세 박사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키리에의 효용성을 깨달은 사람은 호크송 박사였다. 그녀는 어느 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가 돌아와, 묘하게 정리가 된 주변을 보고 눈썹을 올렸다.
“음? 뷰캐넌 님?”
강당 구석에 앉아 있던 키리에가 고개를 들었다.
「왜?」
“혹시 방을 정리하셨나요?”
키리에가 슬며시 눈을 깜빡였다.
「바빠 보이기에 주워 넣어 봤는데. 혹시 방해였나?」
“오, 아뇨. 그렇다기보다…….”
호크송 박사가 조금 놀란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보통 집무실의 경우 철저하게 위치가 정해진 혼돈 상태라, 남이 건들면 오히려 뭘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게 되는 상황이 많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위치는 어떻게 아셨죠?”
「책장은 십진분류법을 따르고 있는 것 같더군.」
“외우고 계시나요?”
「일단은.」
“하지만 아닌 것도 많았을 텐데요?”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잘 살펴보니 나름의 규칙이 보이더라고.」
“보였다고요.”
호크송 박사가 해괴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눈썹을 들썩였다.
“책장은 그렇다 쳐도, 책상은요?”
「그냥 관찰했네.」
“오.”
때마침 시워드 박사와 포 박사가 돌아왔다.
“뭐야! 제롬 그 팔푼이가 또 내 책상을!”
나갈 때와 달라진 위치에 벌컥 화내려던 시워드 박사가 멈칫했다.
“책상을…… 잘 정리했네?”
“호! 그러게나 말이지요?”
“아니, 이 책이 여기 있었단 말야! 새로 주문했는데!”
“꺄아! 내 고양이 화집도 찾았어용!”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호크송 박사가 슬쩍 입을 열었다.
“뷰캐넌 님이 하셨다는군요.”
“뭐요?”
시워드 박사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키리에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키리에가 어색하게 펜을 움직였다.
「멋대로 손댄 점 사과하지.」
“아니, 그게 아니라…….”
시워드 박사가 찡그린 얼굴로 말을 골랐다.
“우리 셋은 워낙에 자유분방하게 정리하는 편이라 조수도 두지 않는데……?”
「관찰했네. 백작가에선 늘 가주 보좌였으니까.」
시워드 박사는 아까 호크송 박사가 지은 표정과 비슷한 얼굴을 했고, 포 박사가 다가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아가씨! 대단하세요!”
「그 정도는 아니야.」
그때, 호크송 박사가 헛기침했다.
“하지만 뷰캐넌 님. 이런 건 뷰캐넌의 격에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당신은 저희의 시종도, 조수도 아닙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까마득한 윗사람이죠.”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엄격한 말에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앉을 만한 의자가 파묻혀 있기에 치워 봤어. 다시는-.」
“그렇다고 해서.”
호크송 박사가 키리에의 펜대를 멈추며 끼어들었다. 그녀가 재차 헛기침했다.
“……그러지 말란 법도 없겠죠. 저희가 어떻게 귀족 나리의 행동을 훈계하겠어요.”
키리에가 조금 미소지었다. 호크송 박사 역시 그녀를 보며 인자하게 미소지었다.
그때부터 키리에는 그들 옆에서 일하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다. 방의 불은 새벽까지도 꺼지지 않았다. 키리에는 흔들리는 촛불과 창밖의 어둠을 보며 생각에 잠기거나 했다.
「뭘 발표하나?」
“그야 종말이지용. 저희는 주로 역사 관련이에용. 그 외에는 마법, 과학 등등 다양하답니다.”
「종말을 연구한다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네.」
포 박사가 답했다. 등불 덕에 하얗고 통통한 그의 뺨에는 가파른 그늘이 졌다.
“종말은 유사 이래 한 번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분명 다시 나타날 거예요. 그게 당장 내일이 될 수 있는 거지용.”
「보통 귀족들은 ‘종말’이 비유일 뿐이며, 적대 세력과 기근, 병마 등이었다고 배우는데. 틀렸나?」
“아주 틀리다고는 할 수 없지용.”
포 박사가 뒤로 몸을 젖혔다. 그의 무게 탓에 그가 앉아 있는 의자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바깥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를 가렸다.
“그래서 학계도 처음엔 종말이 무엇이냐에 집중하지 않았지요. 시조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의 위엄을 드높이기 위해 약간 과장했을 뿐이라고 생각했어용.”
「그런데?」
“몇몇 흔적들이 발견되면서 학계가 발칵 뒤집혔지요! 아가씨도 고대 시대에 대해서는 아시겠지요?”
「자네들만큼은 아니지만 약간은. 다방면으로 매우 번성했던 시절이라고 알고 있어.」
“맞습니다. 대체 이걸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를 기술도 많이 있지요. 그 고대 시대에도 종말을 경고하는 흔적이 몇 개 남아 있어요.”
키리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것까지는 배운 적이 없었다. 그녀를 가르친 거버니스는 제냐의 인정을 받았을 정도로 아주 우수한 선생이었는데도 말이다.
포 박사는 키리에의 얼굴을 보고 까르르 웃었다.
“모르실 만도 합니다. 오레윈브리지 왕조는 종말을 토벌하고 세워진 탓인지, 오히려 종말에 관한 기록이 드문 편이지요. 아가씨도 아시겠지만, 약간의…….”
「분서를 말하는구나. 시조는 많은 책을 금서로 지정해 왕실 서고에 모은 뒤, 나머지는 전부 불태웠지.」
“예. 그래서 학자들은 시조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용.”
“발라브리가는 미친 자였소.”
시워드 박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지 이마를 문지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가 뭔가를 두려워했다는 것은 확실하오. 그러지 않고서야 그딴 짓을 할 이유가 없지.”
그가 말하는 ‘뭔가’는 아마 나타니엘일 것이다.
키리에가 생각에 잠겼다.
발라브리가는 종말을 무찌르기 위해 나타니엘을 얼음 속에서 깨웠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타니엘이 종말이라면, 그가 일어나기 전에 있었다는 종말은 뭐지?’
나타니엘이 얼음 속에서 수족을 부려 남을 해쳤을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누군가를 서슴없이 죽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큰 열의를 느끼지는 않는 사람이다.
이런 의문은 늘 한 가지로 귀결되었다.
‘그는 대체 뭘까?’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전설경께 뭐 들은 것이라도…….”
포 박사가 은근슬쩍 물었다. 그는 사실 처음부터 이 질문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키리에는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시조와의 이야기를 남에게 해도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런가요…….”
시무룩하게 종이 귀퉁이를 만지작거리는 포 박사를 보며, 키리에가 펜을 움직여 물었다.
「그럼 자네들은 사실 전설경과 이야기를 하고 싶겠군.」
“그게 가능하다면야 아주 좋겠죠.”
이번에 대답한 것은 호크송 박사였다. 그제까지 뭔가를 옮겨 적고 있던 그녀는 안경이 얹힌 콧대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이미 호국경에게는 몇 번 취재를 요청해 봤지만 한 번도 응해 주지 않았어요. 그 시대의 생존자가 둘이나 있는데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니. 학자로서는 슬픈 일입니다.”
박사들은 눈앞의 케이크를 금지당한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처럼 시무룩해져서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를 본 키리에가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가, 슬쩍 일어나 포 박사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가위 좀 빌려주겠나?」
“가위요?”
포 박사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여기 있습니다만…….”
키리에가 조심스럽게 가위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모두가 놀랄 정도로 서슴없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고 뚝 잘라냈다.
“꺄아!”
포 박사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키리에는 자른 머리카락을 빈 종이 위에 올려놓았다.
「이걸 호국경에게 보여 봐. 아마 취재를 허락해 줄 거야. 모든 걸 말해 줄 것 같진 않지만, 만나 보기라도 하면 좀 낫겠지.」
어차피 이 머리카락이 레쇼에게 전달되었을 땐 자신이 자취를 감춘 뒤일 것이다. 베일의 힘이 있으니 나타니엘이 알아챌 리도 없다.
세 박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워드 박사마저도 당황한 듯했다.
“아, 아니, 귀족에게 머리카락은 중요하지 않습니까?”
「목도 아니고 다시 자랄 텐데 뭐.」
“예……?”
「싫어?」
“그럴 리가요!”
세 박사가 동시에 외쳤다. 키리에가 약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가 강요했다지만, 전설경으로부터 누군가를 숨기려는 게 보통 담력으로 할 일은 아니니, 내 나름의 성의라고 생각해 줘.」
잠시 말문이 막힌 세 사람 중 포 박사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이렇게 상냥하실 수가!”
그가 와락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드디어 연구에 진전이 있겠어요!”
“놀랍네요.”
“시대상도 좀 물어볼 수 있겠습니까?”
시워드 박사가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키리에가 미소 지으며 펜을 움직여 편지를 썼다.
「키리에 뷰캐넌입니다. 그때의 사과는 아직 유효하겠죠? 괜찮다면 이 편지를 전하는 자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겠어요.」
쪽지를 접어 건네주자 시워드 박사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웃고 싶은 걸 참는 듯했다.
좀 더 부드러워진 표정의 호크송 박사가 키리에게게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해드릴 수 있는 것 이상을 받아 버렸군요.”
「신경 쓰지 마.」
“뷰캐넌 님은 실감하지 못하시겠지만, 아가씨께서는 지금 저희에게 엄청난 기회를 제공한 겁니다.”
그녀가 노안경 너머로 눈을 빛냈다.
“프로노이아에서 리브라까지. 성심성의껏 돕도록 하죠. 달리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없다고 고개를 저으려던 키리에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벽에 걸린 그림들로 향했다.
‘나타니엘이 정말 역사 속 종말일까?’
키리에가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망설임이었다.
「이게 웃긴 말일 수도 있지만, 웃지는 말아 줘. 혹시 종말이…… 죽을 수도 있나?」
“오.”
호크송 박사가 올리브 빛깔 눈을 빛내며 차분히 대답했다.
“물론이죠.”
키리에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물론이라고?」
호크송 박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트레베레움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세 영웅이 종말을 무찔렀다’고 배우며 자라지 않습니까?”
「잠시만.」
키리에가 그녀의 말을 막았다. 좀 더 깊은 이야기가 필요했다.
문득, 제냐가 이 순간을 위해 자신을 올드렐름으로 보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웅 말고, 보통 사람의 힘만으로 말이야.」
호크송 박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키리에의 질문이 학자로서의 탐구열에 불을 붙인 듯했다.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 같은 대마법사도 없는 상황을 상정하시는 건가요?”
「응. 오로지 평범한 사람의 힘으로.」
호크송 박사가 턱을 짚고 고민에 빠졌다.
“……사실 저희는 종말이, 사람의 힘으로 죽일 수 없는 관념적 존재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야?」
“죽음이나 사랑을 죽일 수는 없잖아요? 우리는 ‘종말’이 그런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마지막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조금 망설인 뒤 덧붙였다.
“좀 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피하는 것이 고작이라 하겠죠.”
「포 박사도 그러더군. 피하는 게 가능하긴 해?」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가설에 불과해요.”
「부탁이야. 말해 줘.」
호크송 박사가 점잖게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포 박사는 책상 앞에서 조는 중이었고, 시워드 박사는 이쪽의 이야기를 흥미로운 얼굴로 듣다가 아차 하고 펜을 놀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밤을 조용히 울리는 풀벌레 소리, 바람 소리에 맞춰서 펜촉이 사각거렸다.
마가렛 호크송이 한숨 쉬었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문을 열어 주지 않는 거겠죠.”
그녀는 눈썹을 추켜세우며 노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우선 어떻게 이런 결론이 나왔는지 그 시작을 말씀드려야겠군요. 이 가설은 종말이 실체가 있긴 하지만 관념적인 존재라는 데에서 출발했습니다.”
호크송 박사가 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 있던 종이 더미를 뒤졌다. 그녀는 그것을 눈으로 훑기 시작했다.
“아시겠지만, 특히 관념적인 위협일수록 사람들은 그걸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요. 아이들이 물가에 가는 걸 막기 위해, 물속에는 말의 모습을 한 요괴가 살고 있다고 겁을 주는 식이죠.”
키리에는 금방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짚어 냈다.
「종말을 피하는 법 역시 말 속에 숨겨 놓았다는 뜻이구나.」
“정확합니다.”
호크송 박사가 의미심장하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때마침 풀벌레들이 잠깐 울음소리를 멈춘 시점이었다.
까닭 모르게 간담이 서늘해졌다. 키리에가 말없이 베일을 더 단단히 여몄다.
“우리는 많은 흔적을 탐구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진드기나 침입자를 향한 경고라기엔 지나치게 수상쩍은 이야기들을 몇 가지 추려냈어요.”
키리에는 어쩐지 죽은 왕의 무덤을 파헤치는 도굴꾼이 된 듯한 기분으로 펜을 들었다.
「예를 들어?」
“예를 들어……. 그래요…….”
호크송 박사가 배 위에 깍지 낀 손을 얹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의 사람에게 문을 열어 주지 말라거나.”
키리에의 몸이 덜컹거렸다.
호크송 박사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의 모습에는 노인만이 가질 수 있는 원숙한 안락함이 엿보였지만, 키리에의 손은 떨리기 시작했다.
기시감이 들었다. 아주 강한 기시감.
“모르는 사람이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지 말라거나.”
호크송 박사의 말이 이어졌다. 이제는 시워드 박사도 펜을 멈추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짐승과 벌레마저 살지 않는 곳에는 가지 말라거나.”
키리에의 얼굴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호크송 박사를 바라보기까지 했다. 호크송 박사의 설명만 들으면, 이건 마치 나타니엘을 알고서 그의 존재를 경고하는 것 같았다.
“길에서 뭔가를 주워 오지 말라거나, 한낮에도 유난히 싸늘한 곳이 있다면 조용히 자리를 피하라거나……. 그런 이야기가 있죠.”
말을 마친 호크송 박사가 다시 코 위에 안경을 얹었다.
“전통적으로 그런 ‘불길한’ 것들이 산 자의 영역에 간섭하기 위해선, 반드시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의 문이든, 집의 대문이든 창문이든 간에요.”
마침내 키리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깨달음이 뇌성벽력과 같이 내리쳤다. 계속 느껴지던 기시감의 정체를 찾은 것이다.
‘안네마리는 알고 있었어.’
뒤통수를 타고 오른 소름 때문에 온몸이 서늘했다. 그녀는 헤르큘라, 나타니엘을 만났던 최초의 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 마을에서, 안네마리는 이미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말해 주었던 것이다.
‘혹시 그게 아가씨에게 말을 걸었나요?’
‘그렇진 않아. 그냥 눈이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아가씨가 창문을 열어 주셨나요?’
‘네가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해서 그러지 않았어.’
‘그럼 혹시 아가씨가 큰 소리를 냈나요?’
‘가만히 있었어. 정말 보기만 했을 뿐이야.’
‘그러면 괜찮을 거예요!’
그녀가 맞았다. 그리고 그 역시, 이미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나는 나타니엘. 여기 사람들은 나를 ‘종말’이라 부르더구나.]
키리에가 비틀거렸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이 차근차근 몰려들었다.
헤르큘라에서 안네마리를 공격한 것의 목적은 안네마리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창문을 열게 하려던 속셈이었던 거다.
의전도 과시도 싫어하는 그가 클레멘츠 성에 나타난 이유도 뻔했다. 영지의 주인에게 ‘초대’받기 위해서다.
‘그래서 나를 찾는 게 느린 거였어.’
사실 이상했다. 그의 추적은 키리에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뎠다. 그래서 내내 불안했다. 그가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올드시우다드와 포트듀케인의 힘이 필요했어. 그래서 마리아와 라우라를 살려두었어.’
키리에의 입이 벌어졌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째서 나타니엘 정도 되는 남자가, 굳이 인간들 속에 섞여서, 전설경의 이름을 달고 있는지 의아했던 적이 있다.
과거엔 단순히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즐기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게 편하니까. 전설경의 권위가 무수히 많은 초대와 허락을 보장하니까!’
결국 그는 늘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던 셈이다.
“아가씨? 괜찮아요? 아가씨? 일어나 봐요, 살라미시!”
“으음?”
“왜 그러는 겁니까?”
어느새 다가온 세 박사가 이것저것 떠들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키리에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계속해서 나타니엘에 대해 생각했다. 이 실마리를 놓치면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
‘생각해!’
키리에가 주먹을 쥔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나타니엘이 종말이야. 그리고 종말은 몇 번이고 나타났어. 왜? 왜 나타났지? 나타니엘이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지는 않아. 뭔가가 그를 자극했어…….’
그녀가 마른 입술을 짓씹으며 자리에서 서성거렸다. 박사들은 이제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녀가 아주 중요한 단서를 파헤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키리에가 그들의 반응도 신경 쓰지 않고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휘저었다.
‘아니야, 키리에 뷰캐넌! 너무 먼 과거를 생각할 필요 없어. 나타니엘은 변하지 않으니까! 현재의 나타니엘을 자극할 수 있는 게 뭐지?’
키리에의 걸음이 멈췄다.
현재의 나타니엘에게 그런 게 있다면, 그건 너무 답이 뻔했다.
‘……나야.’
키리에가 숨을 들이마셨다.
발라브리가의 마지막은 어떠했던가? 그는 나타니엘이 자신을 죽이러 오리란 생각에 미쳐 버렸다. 죽을 때까지 나타니엘에게 사로잡혀서, 도망칠 수 없었다.
그건 나타니엘이 키리에에게 바라는 모습과 같았다.
분명 나타니엘은 만족했을 것이다. 그가 바라는 대로, 그가 원하는 작은 새 한 마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먹어치웠을 테니까.
‘그래서 그는 ‘종말’이 될 필요가 없었어.’
이제 키리에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레쇼의 말대로 미쳐 날뛰게 되는 시발점이 무엇인지.
‘그가 선택한 사람을, 나를 가지지 못하면 종말이 오는 거야…….’
탈력감이 휘몰아쳤다. 그게 의미하는 바가 너무 명확했다.
바다를 건너? 그게 대관절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자진하는 짓 따위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는 대륙 사람 전체를 인질로 잡고 있었고, 키리에는 절대 그걸 방관할 수 없었다.
‘외통수.’
키리에가 헛웃음 쳤다.
그걸 깨달은 이상 이제 남은 길은 하나뿐이었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누군가는 해야 했고, 그 누군가가 자신이었다. 모두를 죽일 수는 없었다.
키리에가 창가로 다가가 떨리는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닫혀 있던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없어도…… 있는 것처럼.”
있다면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키리에의 눈이 흐려졌다.
결국 그와 그녀는 그런 운명이었다. 복종하든지, 복종 당하든지.
학술회의를 위해 프로노이아로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키리에는 여전히 방이 아닌 곳에서 잤기 때문에, 때때로 한밤중에 본관을 걷는 일도 있었다.
그날도 빈방을 찾기 위해 본관을 지나던 키리에의 귀에, 문득 말소리가 들렸다.
“……위험해요.”
“하지만…….”
“아마 아가씨가…….”
키리에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시워드 박사의 사무실로 보이는 곳에, 세 박사가 모여 있었다. 키리에가 조용히 문틈 옆에 기대어 섰다.
“국왕의 마법 병단이 무장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호크송 박사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단어에 키리에가 더 귀를 기울였다.
“그게 사실이오?”
“사실이에요. 비밀리에 받은 전갈이라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요.”
“뭘 생각하는 걸까용?”
“뻔하지 않겠소? 전설경이 없는 사이에 준비해서 그를 치려는 거겠지.”
잠시 정적이 오갔다. 곧 포 박사가 불안한 듯 속닥거렸다.
“우리 국왕이 좀 미쳤던가용?”
호크송 박사가 침음을 흘렸다.
“그렇다고 들은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몹시 신뢰가 가는 가설이군요.”
“도대체 그게 가능이나 한 이야기냔 말이지요…….”
“어렵지 않겠소? 그는 무려 종말을 몰아낸 자요.”
“아니면 호국경의 협조를 받기로 한 걸까용?”
“참 나, 그 둘은 전우 아니오.”
“아니면 국왕은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의 후손이니, 특별한 마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죠.”
키리에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정황으로 볼 때, 국왕은 발라브리가의 연구실을 찾은 게 분명했다. 나타니엘이 수도에 없으니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다.
‘하지만 왕족은 서고에 관련될 수 없고, 그렇다면…….’
루비니아 캐스너가 도왔을 가능성이 있다. 화는 나지 않았다. 그게 그녀의 생존 방식이니까.
이후로 웅얼거림에 가까운 작은 대화가 이어졌다.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 이상은 들을 필요가 없었다.
키리에가 숙였던 허리를 펴고 몸을 돌릴 때였다. 복도 끝에서 누군가 몸을 내밀었다.
“거기서 뭐하세요?”
몹시 놀란 덕에 키리에의 표정은 더 냉정해졌다. 고개를 돌리자 멀찍이서 제롬이 초를 들고 서 있었다.
“아가씨……?”
그는 술에 취했는지 자세가 엉거주춤했다.
키리에는 조용히 그의 앞으로 다가가, 자신의 입술 앞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제롬의 눈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키리에의 입술에 달라붙었다.
“쉿.”
“쉿……?”
“뭔갈 물을까 했는데 끼어들 분위기가 아니네.”
켕기는 구석이 있을수록 대범해야 하는 법이다. 키리에가 베일을 흩날리며 총총 걷기 시작했다. 제롬은 머뭇거리다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 안내해드릴까요?”
“내가 길치는 아니라서 말이다.”
“전 또 방을 못 찾으시는 줄 알고…….”
“그걸 어떻게 알았기에?”
키리에가 제롬을 흘낏 넘겨다보았다. 제롬이 초조하게 혀로 입술을 핥았다.
“어, 히히, 방에 안 계시길래요.”
“왔었나?”
“예? 아뇨?”
갑자기 술에서 깨기라도 한 것처럼 번듯한 발음이었다. 키리에가 조소를 흘렸다.
“그런데 어찌 알지?”
“아, 문을 두드려서-.”
“그래?”
키리에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그녀는 올드렐름에서 지내는 내내 방문 틈에 종이를 끼워 놓았다. 그리고 그 종이는 키리에가 나갔다 돌아올 때마다 떨어져 있었다.
옷장에 넣어 둔 옷가지에 아주 희미한 술 냄새가 배어 있기도 했다. 그녀가 박사들이 있는 강당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된 이유다.
“들어와 보지 그랬니?”
떠보듯 흘러나온 말에 멀뚱거리던 제롬이 씩 웃었다.
“지금도요?”
“밤이 깊었구나.”
“예?”
귀족식 화법을 알아듣기엔 경험이 모자란 모양이다. 키리에가 침묵하자 제롬이 슬쩍 키리에의 앞으로 나섰다.
“혹시 말 탈 줄 아세요? 타는 법이 궁금하진 않으세요? 태워드릴까요……?”
제롬이 말하면서 은근히 키리에의 어깨에 몸을 부딪쳐 왔다.
키리에가 짧게 고민했다. 상대는 사람 없는 방을 뒤질 정도로 상식 없는 남자다. 원래 키리에는 상대가 어떻든 굽히지 않지만, 이런 곳에서 발목이 잡히면 곤란했다.
키리에는 눈을 내리깔고서, 그녀가 아는 사람 중 이런 상황을 가장 잘 빠져나갈 것 같은 사람을 떠올렸다.
‘루비니아 양이라면…….’
키리에가 곧 손가락을 세워, 천천히 제롬의 가슴팍을 밀었다.
“술 취한 남자는 대체로 쓸모가 없어서.”
“……헤, 헤헤.”
제롬이 손가락에 밀려 뒤로 물러났다. 그가 손가락을 낚아채려 들었지만, 키리에가 손을 치우는 게 더 빨랐다. 제롬이 헛웃음 쳤다.
“그럼 술에 안 취하면요……?”
키리에가 미소지었다.
“눈 높은 건 칭찬해 주마.”
그녀는 뒤로 돌아, 제롬을 남겨 두고 복도를 떠났다.
당연하지만 방으로 돌아가진 않았다. 키리에는 종지기의 방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먼지 쌓인 다락방을 찾아내, 그 안에 쪼그리고 앉아 잠을 청했다.
아늑하진 않았지만 조용했고, 달빛이 따스했다. 언젠가 나타니엘과 체스를 두던 그 밤처럼.
***
그 시각 그레이는 나타니엘과 함께 체스판 앞에 앉아 있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자기 전에 밤 인사를 하려고 올라왔을 뿐이다. 그러다 전설경이 체스판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말을 움직였다.
그랬더니 그가 다시 말을 움직였고, 그 상황에서 자러 가겠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레이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판을 내려다보았다. 나타니엘의 흑이 우세였다.
“그, 내일이면 프로노이아에 도착합니다. 자유 도시라 의전은 없겠지만, 괜찮으시겠죠?”
나타니엘은 대답이 없었다. 그레이가 눈을 굴렸다.
“……체스는 키리에가 잘 두죠.”
그러자 나타니엘이 지팡이 끝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기울였다.
[파괴적인 룩.]
역시 키리에가 아니면 반응하지 않는다. 그레이가 실소했다.
“아시는군요? 퀸을 쓰는 것도 능숙한 편입니다.”
[그건 내가 미처 못 봤군.]
“뷰캐넌은 모두 체스를 배우지만, 걔는……. 신기할 정도로 킹을 내어 주지 않았죠.”
그레이가 고개를 돌렸다. 가지런히 개켜진 망토와 하얀 킹이 창가에서 달빛을 받고 있었다.
별거 아닌 그 정갈함이 괜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저기에 먼지가 쌓일 일은 영영 없을 것만 같았다. 그의 기억이 추억이 되는 일이 없는 것처럼.
“키리에는 나타니엘 님이 그렇게 자기를 아껴 주는 걸 알고 있나요?”
[알겠지.]
“와. 그런데 도망을 쳤어요?”
나타니엘이 고개를 젖혔다.
[그건 사람의 본능이니 그걸 탓하진 않아. 죽지만 않았으면 돼.]
그레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전 이제 나타니엘 님과 어느 정도 뜻을 같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나타니엘이 대답 없이 지팡이 끝으로 룩을 밀었다. 그레이가 묵례했다.
“계속, 궁금했습니다. 실례지만 키리에를 사로잡으려면 잘해 주는 게 더 나은 방법이 아니었을까요?”
[넌 내가 그 애의 환심을 사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니?]
나타니엘의 대답은 물 흐르듯이 나왔다. 어느 정도 예상한 질문인 듯했다.
“물론 아닙니다. 여기까지 와서 그렇게 생각하면 멍청이죠.”
[아. 멍청이가 아니었단 말이지.]
그레이가 내심 울컥했으나 속없이 웃었다.
“제 말은, 상대가 키리에잖아요?”
[키리에지.]
나타니엘이 고개를 내리며 덧붙였다. 어느새 그 위에 가슴 떨리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내 키리에지.]
키리에와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레이가 침묵한 뒤 입을 열었다.
“도망치게 두고 싶으셨던 건가요?”
[그건 아니야. 되도록 우리 안에서 얌전히 지내주는 쪽이 좋아.]
“얌전히요…….”
[얌전히. 위험하지 않게.]
“위험…….”
[그래. 갖고 싶은 것은 다 가져가며,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서.]
“…….”
[그리고 내 옆에서.]
그레이가 눈을 깜빡이며 나타니엘을 응시했다. 달빛을 받는 나타니엘은 그런 광기 어린 말이 어울리지 않게끔 성스럽게 느껴졌다. 저 얼굴의 어디서 그런 비이성적인 집착이 나오는지 상상조차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 나타니엘 님은 키리에의 상태가 어떻든 상관없으신 거군요?”
말의 속뜻을 눈치챈 나타니엘이 별로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 듯이 눈을 내리깔았다.
[예전엔 그런 걸 신경 써 본 적도 있었지. 별 의미는 없었지만.]
“없었나요?”
[그래.]
그레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하지만, 잘 이해가…….”
[강하고, 죽지 않고, 탓하기 좋은 상대가 옆에 있게 되잖니.]
나타니엘이 나른하게 턱을 괴었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탓하더라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다지 상처받은 것 같지 않았다.
권태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무뎌짐에 가깝다고, 그레이는 생각했다.
[어차피 끝은 나를 미워하며 생을 불태우거나, 내가 두려워 벌벌 떨거나, 내 손을 빌려 한 짓을 보고 미치거나, 죽여달라고 하거나. 넷 중 하나 아니겠어.]
나타니엘은 재밌는 이야기를 하듯 말했지만, 그 저변에는 묘하게 냉소가 깔려 있었다. 그레이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이 부분이 뭔가 이상한 거였어. 전설경은 뭔가 크게 오해하고 있어……. 키리에가 보통 사람처럼 굴 거라고.’
이때 그레이는 선택할 수 있었다. 말할지, 말하지 않을지. 그는 자신의 말이 전설경의 심기를 거스를지도 모른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홀린 듯 중얼거리고 말았다.
“……하지만 나타니엘 님. 걔는……. 키리에인데요.”
나타니엘이 눈만 움직여 그레이를 바라보았다.
그레이는 자신이 던진 말의 파장을 깨닫지 못한 채, 고요한 수면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듯 말했다.
“걔는, 그러지 않을 텐데요.”
그레이의 얼굴이 흐려졌다. 반면 나타니엘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지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무표정이 되어 가고 있었다.
체스판이 하나, 남자가 둘. 달빛이 하나.
나타니엘이 그레이를 끝없이 응시했다. 그레이가 슬슬 불안감을 느꼈지만, 그는 내내 어림하고 있던 이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 애는 절대 자기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굴복하진 않을 겁니다. 그 상대가 설령……. 나타니엘 님이더라도요.”
“프로노이아는 어떤 곳이야?”
키리에가 마차 건너편에 앉은 포 박사에게 물었다.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멀미를 참던 포 박사가 고개를 들었다.
“국내 최대의 학술 도시지요. 제2수도라고도 할 수 있고……. 그런데, 안 와 보셨나용?”
“자리를 비울 시간이 없었어. 거버니스가 프로노이아에서 수학했다고 듣긴 했지만.”
“호! 대단한 인재였군요.”
“아버지 취향이 그랬거든. 뭐든 최고급인 걸 좋아하셔서.”
키리에가 빈정대듯 말하자, 포 박사가 손수건을 내리고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실례지만 그게 학자들이 아렐라노를 싫어하는 이유기도 합니다.”
키리에가 쿡쿡 웃었다.
포 박사는 눈을 감고 프로노이아의 정경을 그리며 말했다.
“정말 훌륭한 도시지요. 한때는 왕실의 탄압이 있었지만 결국 그렇게나 번성했어요. 안전한 곳에서 지식을 열망하고 싶다는 학자들의 노력 덕이지요…….”
“멋지게 들리는데.”
“하지만 저희와 떨어지진 마세용. 학술회의는 프로노이아의 가장 큰 연례 행사라 사람을 잃어버리면 찾을 수 없으니까요.”
“명심할게. 아, 그러고 보니-.”
키리에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포 박사가 바로 말을 받았다.
“전설경의 위치 말씀이시지용?”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클라시코가 ‘그렇게’ 된 후, 클레멘츠 성을 샅샅이 뒤지고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어느 청년과 함께였다고 해용.”
‘그레이 뷰캐넌.’
키리에의 눈이 깊어졌다. 나타니엘에게서 도망쳐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그 이후는 들어온 정보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가 특별히 정보를 수집할 능력이 있는 건 아니라 이게 한계예요.”
“충분해. 고마워.”
“천만에용.”
포 박사가 해맑게 웃었다.
“그래도 상식적으로 전설경이 종말 연구 학회가 열리는 곳에 올 이유는 없을 테니까요!”
키리에가 긍정하는 의미에서 미소로 답했다. 나타니엘은 의외로 종말, 시조, 그가 잠들기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다.
게다가 학회엔 학자들뿐만 아니라 출자자도 올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귀족일 테니, 얼굴이 밝혀질지도 모르는 곳에 키리에가 갈 리 없다……고 생각하고 다른 곳으로 가 주면 고마울 것이다.
문제는 그레이였다.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르겠어.’
그레이는 늘 예측 가능한 범위를 넘어선 행동을 했다. 이번에도 그랬다면…….
‘나타니엘을 상대로? 제발 그 정도로 미치진 않았길 빌어야지.’
***
그레이는 그 정도로 미쳤다.
그는 살아야 했다. 그가 점점 더 엉뚱한 기행을 하는 이유였다. 그렇게라도 분위기를 띄우지 않으면, 등 뒤에 도사린 것이 당장 남은 눈까지 뽑아 버릴 것 같았다.
‘괜히 말했어.’
그레이는 그 밤의 일을 후회했다. 그때 자신이 한 말이 나타니엘의 심기를 거스른 게 분명했다.
나타니엘은 갈수록 부패한 꽃, 기름진 인조 보석처럼 섬뜩하고 아름다워졌다. 그리고 말수가 없어졌다. 자신이 던진 말을 계속 되뇌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말 없는, 미소 짓지 않는 나타니엘의 옆에 있는 건 지옥 같은 일이었다. 그의 사정 모를 고민이 끝나면, 자신의 목도 같이 잘려나갈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레이는 더 광대처럼 굴었다.
“이 책을 보세요, 나타니엘 님! 꽤 근사한 고서적이로군요. 키리에에게 선물하시면 어떨까요?”
[그래.]
나타니엘이 조용히 대답하면, 그레이는 잠시 미소를 유지했다가 재빨리 다음 가게로 넘어갔다.
“저 여성용 의상실이 아주 괜찮아 보입니다! 키리에에게 줄 의상을 같이 고르실까요?”
[그래.]
나타니엘은 그레이의 발악을 눈치채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무심한 것 같아도, 올드시우다드와 포트듀케인의 수하들이 대륙을 샅샅이 뒤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느베야의 행동으로 미루어보건대 아버지 역시 키리에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키리에 얘는 대체 무슨 수로 수도에서 탈출한 거고, 무슨 짓을 했길래 사람을 이렇게 단단히 홀린 거야?’
나타니엘을 잠시 의상실에 두고 골목으로 빠져나온 그레이가 느베야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도련님?”
“어. 키리에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젠장!”
그레이가 거칠게 골목의 나무 궤짝을 걷어찼다.
“대체 왜 발견이 안 되는 건데?! 걔가 이 근처에 연고지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느베야가 침묵했다.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으리라.
“누구든 좋으니까, 빨리 키리에를 찾아내야 한다고! 제기랄! ‘저거’ 정말 맛이 가고 있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최선으로는 안 돼! 결과가 중요한 거야, 결과가!”
그레이가 윽박지르며 느베야의 왼쪽 어깨에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그레이는 느베야의 근육질 몸에 오히려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젠장, 젠장! 아아아악!”
그레이가 바닥에서 구르며 버둥거렸다. 손을 내밀었던 느베야는 잠자코 뒷짐을 지고 서서 사람들의 시선을 차단했다.
마침내 진정한 그레이가 씩씩거리며 무릎에 팔을 얹고 앉았다.
“이대론 안 되겠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자 하나 찾아봐. 연보라색 머리로. 아! 하필 그딴 희귀한 색이야, 그년은!”
그레이가 다시 성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베야가 되물었다.
“혹시…….”
“아니야!”
침묵하는 느베야의 시선에 그레이가 짜증스럽게 눈을 부라렸다.
“침실에 집어넣을 생각이냐고? 천만에. 그딴 짓 했다간 당장 뒤질걸.”
“그러면…….”
“그냥 나한테서 떨어지게 하자고! 분명 키리에를 발견했다는 말을 들으면 바로 쫓아갈 테니까. 그사이에 도망가면 돼. 나를 찾겠어? 안 찾을 거야, 그렇지……? 내가 뭘 했다고 찾겠어……?”
느베야는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정신이 나간 것 같은 그레이의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주인은 근래 새벽부터 잠들기 전까지 전설경 옆에서 입술이 부르트도록 아가씨의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점점 둘러댈 말이 떨어져 가고 있는 것이 느베야의 눈에도 보였다.
당연히 전설경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레이를 바라보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푸른 눈은 꼭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네 이야깃거리가 언제 떨어질지 기대되는구나.
상념을 떨쳐낸 느베야가 말했다.
“자금은 충분합니다.”
“그래……. 내가 죽을 각오로 이빨을 턴 보람은 있네.”
그레이가 힘겹게 숨 쉬며 고개를 늘어뜨렸다.
“씨팔…….”
느베야가 묵묵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레이는 곧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꼭 천연 보라색이 아니어도 괜찮아. 염색이라도 시켜 봐.”
“알겠습니다.”
“베일 기억나지? 비슷한 걸 덮어. 정 마땅한 사람이 없으면 아무나 붙잡고 협박이라도 해. 그래 봐야 고작 평민 여자니까 죽는대도 별문제 없겠지.”
“예.”
“옷.”
그레이가 큰 숨을 내쉬며 턱을 들었다. 느베야는 다른 하인에게 물과 새 예복을 가져오게 시켰다.
“그리고 또 뭐가 있지 않았나?”
“학술회의에서 개막식 연설을 부탁했습니다.”
받아 온 물로 그레이의 손을 닦아 주며 느베야가 답했다.
“알았다고 해.”
겉옷을 걸치던 그레이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학회면 올드렐름 사람들도 오겠네?”
“예. 초청 강연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올드렐름이라.”
그레이가 무심한 얼굴로 타이를 고쳤다.
나타니엘은 올드렐름에는 간섭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키리에가 올드렐름으로 갔을 확률이……. 없나?’
학자들은 정쟁에 끼어들지 않는다. 어머니는 수도에 있다 들었고, 학자들이 생각이 있다면 키리에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고, 키리에도 그걸 알 테니 그들에게 향했을 리는 없다.
‘그게 맞긴 한데…….’
“뭐, 형식적인 인사 정도는 해 놔서 나쁠 거 없겠지. 어머니 쪽 연구실 사람들하고도 약속을 잡아 놔.”
“알겠습니다.”
환복을 마친 그레이가 제자리에 서서 자기 뺨을 두 번 가볍게 쳤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순수하고 쾌활한 미소가 떠올랐다.
“간다. 잘해.”
느베야가 허리를 숙였다.
***
프로노이아는 복잡한 도시였다.
특히 구시가지는 작은 집들이 빼곡하게 붙어 통로와 방을 구별하기도 어려워 보였다. 마치 위로 너무 많이 쌓아 올린 장난감 상자 더미 같았다.
하지만 신시가지로 들어갈수록 포석은 정돈됐고, 집들도 그럴듯해졌으며, 무엇보다 그 유명한 대도서관의 위용에는 키리에도 말문이 막혔다.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은 전체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빛을 받으면 하얗게 빛났다. 벽면을 장식한 유리창이 반짝였고, 층마다 있는 공중 정원에는 녹음이 가득했다. 첨탑은 셀 수도 없었다.
“엄청난 건물이네.”
마차 안에서 살짝 천을 걷어 내고 대도서관을 관찰하던 키리에가 말했다.
포 박사가 뿌듯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렇지요? 예전엔 저 첨탑마다 마법으로 미끄럼틀을 만들어서 타고 논 적도 있답니당!”
“그런 걸 한다고?”
“전통이에요!”
말을 마친 포 박사가 안색을 흐렸다.
“호, 하지만 이번엔 구경은 좀…….”
“괜찮아. 관광 온 게 아니니까. 누군가 내 얼굴을 알지도 모르고.”
“일단 학회 측에서 잡아 준 숙소로 들어가면 좀 괜찮으실 거예용.”
포 박사는 키리에를 걱정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키리에는 도리어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애쓰며 숙소로 향했다.
수행원으로 위장해 숙소에 들어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윽고 모두가 한 방에 모이자, 시워드 박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계획은 들으셨습니까?”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학술회의가 시작할 때까지는 방에서 대기. 마지막 날, 소란을 틈타 포 박사와 함께 준비한 마차로 리브라까지 이동.”
“마차는 섭외했소, 포 박사?”
“제롬 군이 하기로 했어용!”
포 박사가 하얗고 뚱뚱한 아기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시워드 박사는 불안하기 짝이 없군, 하고 중얼거렸으나, 이내 들고 온 논문에 코를 박고 읽기 시작했다.
때마침 차를 내온 호크송 박사가 모두에게 찻잔을 건넸다.
“뷰캐넌 님도 드세요.”
“고마워.”
“식사는 앞으로 제롬이 가져다줄 겁니다. 그럼 계획대로-.”
그 순간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로질렀다. 모두의 시선이 한꺼번에 문으로 향했다. 무서운 정적이 끼얹어졌다.
놀란 도마뱀처럼 고개를 쳐든 시워드 박사가 가장 먼저 낮게 쉭쉭거렸다.
“포 박사!”
“제롬 군은 마차를 빌리러 갔어요. 제롬 군은 아닐 거예용.”
“학회 사람들일 가능성은?”
“제랄드, 학자들이 어디 일일이 부르러 오는 족속들이던가용?”
“결국 올 사람이 없다는 뜻이군요.”
호크송 박사가 작게 속삭였다. 그녀가 키리에에게 눈짓했고, 키리에는 재빨리 방 안쪽에 숨었다. 시워드 박사는 논문을 읽는 척하기 시작했고, 포 박사는 옆에서 너무나도 어색하게 콧수염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호크송 박사가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시죠?”
“안녕하십니까. 초면에 죄송합니다.”
목소리를 들은 키리에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다름이 아니라, 뷰캐넌의 도련님께서 하트우드 박사님의 동료분들과 말씀을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느베야였다.
호크송 박사가 처음 들었다는 듯이 물었다.
“뷰캐넌의 도련님이 귀국하셨습니까?”
그야말로 연륜에서 나오는 여유로움이었다.
“예. 현재 프로노이아에 계십니다.”
숨어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키리에가 소리 없이 놀랐다.
‘그레이가 프로노이아에 있다고?’
같은 심정이었을 텐데도, 호크송 박사는 당황한 기색 없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아쉽군요. 제냐는 지금 셀 아렐라노에 갔는데요.”
“괜찮습니다. 여러분들을 보고자 하실 뿐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학술회의를 준비해야 해서 바쁩니다.”
호크송 박사가 정말 난처하다는 듯이 답했다. 하지만 느베야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시간은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하루 이틀 내로 만났으면 합니다.”
“음. 실례지만 제가 방금 한가하다고 말했나요?”
“죄송합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뷰캐넌의 이름이 여러분을 한가하게 해드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호크송 박사가 차갑게 되물었다.
“무슨 의미입니까?”
“아무 의미 없는 말입니다.”
느베야가 정신적으로 한 걸음 물러난 느낌으로 말했다.
“저는 여러분과 다투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련님께서는 현재 매우 막중한 임무를 맡고 계십니다. 부디 여러분이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키리에가 휘청였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바닥에 손을 짚은 자세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키리에는 나은 편이었다. 시워드 박사는 논문을 너무 꽉 쥔 나머지 종이가 다 구겨졌고, 포 박사는 한 손으로는 눈썹을, 한 손으로는 콧수염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냉정한 것은 호크송 박사뿐이었다.
“뷰캐넌의 도련님께서 저희 학자 나부랭이들에게 무슨 도움을 바라시는지 모르겠군요.”
“저는 일개 하인이라 도련님의 심중이 어떠한지는 모릅니다. 그저 최대한 빠른 만남을 요청드립니다.”
느베야가 잠깐 침묵한 뒤 말했다.
“더불어, 다른 만남을 방해한 것은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다른 만남이요?”
호크송 박사가 되물었다. 느베야는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천연덕스러운 것은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찻잔이 네 개군요.”
“꺅!”
비명을 지른 것은 포 박사였다. 호크송 박사와 느베야의 눈이 동시에 포 박사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자기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엎지른 채, 차마 느베야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그야말로 몸 둘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느베야의 눈이 날카로워졌지만, 키리에는 포 박사를 나무라고 싶지 않았다. 평생 연기와는 담쌓고 살아왔을 사람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 것 같아 도리어 마음이 쓰렸다.
“……제가 괜한 말을 했나 보군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예?”
“다음에 뵙겠습니다.”
느베야의 눈이 수리처럼 예리하게 빛났다.
“조만간 말입니다.”
느베야가 썰물처럼 빠르게 물러났다. 호크송 박사는 얼결에 인사까지 받고 문을 닫았다.
남은 건 훌쩍이는 포 박사, 사실 똑같이 소리를 냈던 터라 차마 그를 나무라지 못하는 시워드 박사, 골치 아프다는 표정의 호크송 박사, 그리고 키리에뿐이었다.
“죄, 죄송, 죄송합니당…….”
포 박사가 바닥에 흐른 찻물을 닦으며 훌쩍대기 시작했다. 키리에는 그의 옆으로 가서, 두툼한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무리한 걸 시켜서 미안해.”
“히끅…… 힉…….”
“크, 크흠. 눈치챈 것 같소?”
시워드 박사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호크송 박사가 한숨으로 답했다.
“모르죠. 하지만 계획을 변경할 필요가 생겼다는 건 확실합니다.”
***
학술회의가 시작되었다. 개회사를 맡은 그레이는 적당히 판에 박힌 찬사를 늘어놓은 뒤 단상에서 내려왔다. 느베야가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을 잡았다고?”
“예.”
“안내해.”
그레이가 웃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신경질적인 어조로 답했다.
원형 테이블에는 초로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언젠가 어머니 옆에서 본 기억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하! 시간을 내줘서 고맙군. 그레이 뷰캐넌이야.”
그레이가 호감 사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백발의 학자는 가볍게 일어나 허리를 숙인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마가렛 호크송이라고 합니다.”
그레이가 싱긋 웃었다.
“어머니와 같은 연구실에 있다지?”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잘 지내시나?”
“제냐라면, 물론이죠.”
호크송 박사가 은은한 미소를 띄웠다. 그만큼 속을 알아보기 힘든 미소였다.
그레이가 싫어하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자신의 근본 없는 친화력이 잘 통하지 않는 부류.
“뭐, 어머니야 자식들 내버리고 하고 싶은 걸 하고 계실 테니까 잘 못 지내실 리 없지.”
그레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하는 말에도 호크송 박사의 평정은 깨지지 않았다. 그레이의 김이 빠졌다.
‘진짜 싫다니까.’
“연구는 잘 되어 가고?”
“걱정해 주신 덕에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 종말 어쩌구 하는 거 말이지?”
그레이의 노골적인 업신여김에도 호크송 박사는 은은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예. 종말 어쩌고 하는 것입니다.”
“잘 되어 간다니 다행이네! 난 또 내 여동생이 방해라도 했을까 봐.”
그레이가 말한 뒤 빠르게 호크송 박사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주름진 얼굴에는 의아함이 떠올라 있었다.
“여동생이라니요?”
“키리에 뷰캐넌. 내 여동생 말이야. 모르나?”
“제냐에게 이름은 들었습니다. 여동생분이 올드렐름에 오시기로 했나요?”
“……아니야.”
그레이가 한숨을 쉬었다. 노인이라서인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이젠 그런 문제에 골몰하는 것 자체가 피곤했다. 그는 또 전설경에게 가야만 했다.
“됐다. 그럼 난 이만 가 보지. 많이 즐기고, 기회 되면 또 봐.”
더 이상 앉아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 그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크송 박사가 적당히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배웅했다.
그녀의 노쇠한 얼굴에 승리감이 떠올랐지만, 이미 돌아선 그레이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
나머지 두 박사는 키리에와 함께 숙소에 있었다.
멀리 돌아 숙소로 돌아온 호크송 박사는 아직도 풀이 죽어 있는 포 박사를 보곤 혀를 찼다.
“살라미시. 아직도 그러고 있나요?”
“하지만, 매그…….”
“모두 모여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입구의 사각지대에 앉아 있던 키리에까지, 모두가 응접실에 둘러앉았다. 호크송 박사가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
“허, 허. 참말이오?”
“그래요, 제리. 내가 그렇게 눈썰미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누가 봐도 귀족가의 하인들이더군요.”
“그대들을 감시하는 건가?”
키리에가 물었다. 호크송 박사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그런 모양입니다. 밖으로 나가기 쉽지 않겠어요.”
그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모두가 긴장했으나, 직후 긴장감 없는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박사님! 끅, 제롬입니다아!”
“……저 술주정뱅이를 그냥.”
시워드 박사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이를 갈았다. 포 박사가 일어나 문을 열어 주자, 술에 잔뜩 취한 제롬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윽, 술 냄새……!”
“제롬 군, 대체 얼마나 마신 거예요? 마차는 수배했겠지요?”
“아, 물론이죠!”
제롬이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마차도 섭외했고, 또 제가 이쪽 지리를 잘 아니까……. 좀 멀지만, 밀맥주가 저렴한 곳이 있거든요?”
“알겠으니 좀……. 물러나요. 후으으, 냄새.”
포 박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모습을 본 제롬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치만, 제가, 엄청 재밌는 걸 주웠는데요!”
“재밌는 거요?”
“엄청! 재밌는 거예요, 잠시만요…….”
제롬은 술 탓에 고개를 근덕거리며 주머니를 뒤졌다.
“아, 여깄다……. 한번 보세요, 박사니임.”
제롬이 혀꼬부랑 소리를 내며 손을 내밀었다. 투박한 손안에, 거친 갱지를 길게 오려 만든 쪽지 같은 것이 보였다.
“이게 뭐죠, 제롬?”
“아! 그, 보통 술집 벽에 붙어 있곤 하는 건데요, 인력을 구할 때……. 씁니다.”
그가 둔한 손으로 쪽지를 펼쳤다.
「사람 구함: 여성, 20세에서 29세 사이, 허리길이 머리카락, 연보라색이나 유사한 색의 머리카락 우대, 염색 가능한 자, 일당 50금.」
“문의는 닉스 인으로 하라고 하는데, 이거 완전 아가씨 같지 않나요?”
제롬이 눈을 끔뻑거리며 웃었다. 다른 사람들은 웃을 수 없었다.
포 박사가 끔찍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닉스 인은 프로노이아에서 가장 비싼 고급 여관이에요……. 출자자들이 주로 묵지용…….”
“그레이의 짓이네.”
키리에가 중얼거렸다.
“사람을 써서 나인 것처럼 위장하려나 본데.”
이때쯤 포 박사가 대화 내용을 궁금해하는 제롬을 밖으로 내보냈다. 듣는 귀가 없어지자, 시워드 박사가 화색을 띄우며 말했다.
“좋은 기회 아니오? 대역에 정신 팔린 틈을 타면 빠져나가기도 쉬울 테니!”
“뷰캐넌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호크송 박사가 키리에에게 물었다. 키리에가 잠시 침묵한 뒤 답했다.
“빠져나갈 순 있겠지. 하지만 나타니엘에게 들키면 대역을 한 사람이 위험할지도 몰라.”
말을 마친 키리에가 긴 숨을 토해냈다.
또다시 누군가가 죽을지도 모른다. 자신 때문에.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이 키리에의 손을 떨리게 했다.
원래는 조금 더 확신이 생길 때까지 판단을 미뤄 두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 결정해야만 하는 순간이 왔다.
‘이제 도망치는 건 무의미해.’
키리에가 손을 들었다.
“……제안할 게 있어.”
박사들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잠시 숨을 들이마셨던 키리에는 고개를 들며 조용히 속삭였다.
“나타니엘을 만나야겠어.”
학술회의는 물 흐르듯이 지나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넷째 날이자 마지막 날이 되었다.
발표를 마치고 일찍 프로노이아를 뜨는 무리가 많았다. 그 탓인지 숙소를 벗어나는 마차 역시 평소의 배는 되었다. 그렇지만 올드렐름의 학자들은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숙소에서만 가만히 있다고?”
느베야가 심복들에게 물었다. 그녀가 숙소 주위에 심어 놓은 심복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하신 대로 감시 중입니다만, 밖으로 나올 기미가 없습니다.”
“출구는 계속 감시했겠지?”
“물론입니다.”
“방은?”
“계속 불이 켜져 있고, 인기척도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군.”
느베야가 고개를 들어 박사들이 묵는 방의 창을 바라보았다. 커튼 너머로 움직임이 보였다.
“이상해.”
느베야의 예감을 무시하고, 학술회의는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곧 폐회식이 끝날 것이다.
이상한 일이라면 하나 더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덤에서 갓 일어난 싱싱한 시체처럼 어정거리던 학자들이, 하나같이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머리에 배를 쓰고 있거나, 분홍색 플라밍고 인형을 다리 사이에 끼고 있거나, 코에 당근을 달고 있거나 했다. 그리고 모두 웃고 있었다.
느베야가 미간을 좁히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서 뭔가 행사라도 있나 싶었지만, 벽보가 붙어 있지도 않았다.
“대체 이 사람들은 왜 이러는 거지?”
“모르겠습니다. 공부를 너무 해서 미친 게 아닐까요?”
“일리가 있군.”
어쨌든 이젠 다른 준비를 위해 자리를 옮겨야 할 시간이었다.
“너희는 계속 박사들을 감시하도록. 그들의 마차가 숙소를 빠져나가면 일단 잡아 세우고 안을 뒤져.”
“예.”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린 느베야가 자리를 옮겼다. 시 외곽의 낡은 집이었다.
“준비는 됐습니까?”
느베야가 안으로 들어서며 묻자, 연한 보라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잘 도망 다니면 돈 주는 거죠?”
“‘잘 도망 다니면’입니다.”
“프로노이아는 내 안마당이라니까? 후후, 한밑천 잡을 수 있겠네.”
느베야가 대답 없이 여자를 바라보았다.
결국 자연적인 연보라색 머리카락의 여자를 구하지는 못했다.
‘그렇겠지. 희귀한 색이니까.’
그래서 염색으로 여자의 머리카락을 물들이고, 온몸에 향유를 발라 관리받은 티를 내려고 했다.
얼추 비슷해지긴 했다. 하지만 분명 느베야가 아는 키리에 뷰캐넌과는 까마득히 달랐다.
앉아 있는 자세, 고개의 각도, 손가락을 두는 위치……. 아니, 그런 세세한 부분을 떠나 뒷모습만 보아도 풍기는 분위기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기품이란 게 그런 거였다. 눈앞에 두면 잘 모르지만 다른 것과 비교했을 때 도드라지는 것.
‘과연 그 전설경이 속을까?’
느베야는 뷰캐넌을 섬기고 있지만, 그레이 뷰캐넌이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전설경 옆에 있으면 유난히 더 멍청해지는 모양이니, 확실히 그레이 뷰캐넌은 어서 전설경의 곁에서 떨어지는 게 나았다.
“큰 나팔 소리가 울리면 개시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안 잊어요, 돈줄인걸?”
키리에 뷰캐넌을 흉내 낸 여자가 손을 휘두르며 깔깔 웃었다.
“그나저나 별 행사를 다 하네요! 특이해, 특이해! 이건 또 누구 머릿속에서 나온 계획이에요?”
느베야가 멈칫했다. 행사라니.
“무슨 말입니까?”
“아이참!”
여자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까르르 웃었다.
“기대된다는 거죠! 예년보다 재밌을 것 같아요! 그런데, 술래는 나밖에 없어요?”
“이건 술래잡기가 아닙니다.”
“에에엥?”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풋 웃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언니, 뷰캐넌 가문 사람이라며!”
“그렇습니다.”
“이번에 개회식에서 인사한 거 뷰캐넌이라던데요? 그럼 당연히 폐회식의 ‘그거’ 준비하는 거 아니에요?”
“‘그거’?”
“네! ‘그거’!”
대체 무슨 말이야. 느베야가 슬슬 어긋난 의사소통에 답답함을 느낄 무렵이었다. 엄청난 크기의 목소리가 프로노이아 대도서관 쪽에서 터져 나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 목소리는……?”
학술회의 의장이다.
느베야가 대로로 나섰다.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느베야는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 갔다. 멀리 보이는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의 중앙 정원에 의장이 서 있었다.
“지금 막 제169회 프로노이아 종말 연구 학술회의가 끝났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환호했다. 의장도 목청을 높여 웃었다.
“그럼 지금부터 제166회!”
이어서 의장이 하늘로 팔을 뻗었다.
“프로노이아 학술회의 무사 폐회 축하 파티를 시작하겠습니다!”
“무슨…….”
느베야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중얼거렸다.
곧이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들 앞에 수많은 술식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느베야의 얼굴이 굳었다.
‘마법사!’
이어서 각양각색의 마력이 터져 나가며, 프로노이아 전체를 뒤덮었다.
“세상에! 반딧불이 같아! 예쁘다!”
“올해는 신경을 좀 썼군!”
그리고 사람들의 머리카락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연보라색으로.
의장이 쐐기를 박듯 외쳤다.
“올해의 행사는 ‘숨은 키리에 뷰캐넌 찾기’입니다!”
느베야의 얼굴이 굳었다.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
“시워드 박사! 이걸 하면 정말 호국경이랑 이야기할 수 있는 거요?”
한 명의 마법사가 불안하게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마법사들 뒤에 있던 제랄드 시워드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오.”
대륙에서 마법사의 혈통이 아주 끊긴 것은 아니다. 여전히 오레윈브리지가 가장 강력한 마법사의 혈통을 유지하고 있지만, 남은 마법사들은 거의 프로노이아로 이동해 연구를 지속했다.
“내 연구 결과를 걸고 보증하지. 이걸 도우면 호국경을 만날 수 있소!”
그래도 여전히 불안했는지, 테마르 의장은 의심의 눈빛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우릴 속이려는 거라면 가만두지 않겠소! 원래 이번 행사는 세계 제일 눈 수영 축제로 정해 놓았단 말이오!”
“이보시오, 의장. 난 내 연구 논문을 걸었소. 포 박사와 호크송 박사까지 보증하지 않았소!”
“그건, 그렇지…….”
테마르 의장이 턱수염을 쓸며 그를 흘낏거렸다.
“……정말 그게 가능하다면, 난 반드시 시조에 관해 물어야겠어. 그것도 가능하겠소?”
“아무렴!”
시워드 박사의 호쾌한 대답에 마법을 펼쳤던 다른 박사가 끼어들었다.
“혹시 그럼 종말에 대해서도……?”
“물론!”
또 다른 박사가 머리를 디밀었다.
“그럼 혹시 어떻게 인간에서 초월자가 되었는지도?!”
시워드 박사가 양손을 펼쳤다.
“다 물어볼 수 있소!”
“오오오오!”
각 연구실에서 차출된 마법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환호했다.
“됐어! 드디어 논문을 끝낼 수 있어! 출처에 호국경의 이름을 쓸 수가 있다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닌데, 뭐!”
“사실 범죄여도 상관없어!”
증거에 목마른 학자들에게 호국경과의 면담이란 마다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공수표래도 상관없었다.
그때 테마르 의장이 은근슬쩍 물었다.
“그런데, 그래서 키리에 뷰캐넌…… 님은 어디 계신 거요?”
시워드 박사는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눈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여기에 없소.”
***
“찾았다! 키리에 뷰캐넌이다!”
“아니! 여기 내가 찾았어!”
“잠깐만! 인상착의가 어떻다고 했지?”
“예쁘대!”
“대체 이게 무슨 개짓거리야?!”
의장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여관에서 뛰쳐나온 그레이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자신 역시 머리카락 색이 연보라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방에서는 연신 ‘키리에 뷰캐넌을 찾았다’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레이는 개중 그나마 옷을 정상적으로 입은 사람 한 명을 붙잡았다.
“이봐! 이게 대체 무슨 난리야?!”
연보라색 수염으로 리본을 만들어 묶은 노인이 그레이를 위아래로 훑었다.
“폐회 축하 파티를 모르오?”
“그게 뭔데!”
“학술회의가 끝난 걸 축하하는 파티지!”
“그딴 미친 게 어딨어?!”
“미치지 않은 사람은 연구 따위 하지 않소!”
노인은 벌컥 화내고서 다른 곳으로 달려가 버렸다. 남겨진 그레이가 고개를 휘저으며 악을 썼다.
“이러면 계획이 어긋나잖아아악! 느베야는 대체 어딨는 거야!”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은, 아직 확인해야 할 게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여관의 문지방을 검은 구두가 밟는 것이 보였다. 그레이가 천천히 머리를 쥐었던 손을 내렸다.
“나, 나타니엘 님……!”
나타니엘이 끔찍할 정도로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여관을 걸어 나왔다. 그가 불안정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모르는 사람의 입에서 키리에 뷰캐넌의 이름이 들릴 때마다 흠칫했다. 마치 전장 한복판에 떨어진 사람 같았다.
그런데 또 그 얼굴에 한 줄기 선득한 광기가 비치기 시작하는 것에, 그레이는 신물이 났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
돈도 받아 챙겼겠다, 한시라도 빨리 이 미친 존재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타니엘 님, 아무래도 키리에가 프로노이아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레이가 혼란을 삼키고 격앙된 목소리를 높였다.
“이 소란을 틈타 빠져나가려는 게 분명합니다! 찾으셔야 합니다!”
나타니엘이 그레이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부릅뜬 눈, 초조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그레이의 머릿속은 냉정했다.
‘그래야겠다고 해.’
그레이가 생각했다.
‘어디 있는지 말하라고 해. 그리고 먼저 가 버려. 그때처럼!’
“나타니엘 님!”
그 순간, 나타니엘의 눈에 어떤 감정이 반짝였다.
[그러네.]
나타니엘이 말했다. 그는 왜인지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위험해 보였다.
그레이는 약간 당황했다.
‘왜 그때처럼 사라지지 않지?’
[뷰캐넌.]
“예?”
[수도에서 수화물이 곧 도착한다. 내게 보내.]
나타니엘의 손아귀에는 어느새 예의 흰 체스 말이 쥐여 있었다. 나타니엘이 손에 힘을 주자, 상아로 만든 말은 손쉽게 바스러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레이가 저도 모르게 건침을 삼켰다. 바스러진 체스 말과 함께, 나타니엘을 지탱하고 있던 마지막 이성도 같이 바스러진 듯했다.
나타니엘이 새하얗게 웃었다.
[진짜를 만나러 갈 시간이야.]
그 순간, 프로노이아에서 21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버려진 집에서, 키리에는 베일을 벗었다.
나타니엘은 그 감각을 설명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다만 그는 알 수 있었다. 베일이 벗겨졌다. 그리고 베일의 힘으로 지워져 있던 키리에의 흔적이 그의 감각에 잡혔다.
나타니엘은 잠시 자리에 멈춰,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영원이라는 지옥이 끝났다. 세상 역시 의미를 되찾았다. 키리에가 지나친 거리, 키리에가 느끼는 바람, 키리에가 보는 태양, 키리에가 밟은 땅, 키리에의 세계.
그가 느리게 눈을 떴다.
만나러 가기 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둄2 절갠 교환재공타싸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