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종말 (13/33)

13. 종말

키리에는 물이 떨어지는 배수구 안쪽에 서서 숨을 죽였다. 물이 허리까지 고여 있었고, 머리 위 높은 곳에는 격자로 된 배수구 뚜껑이 있었다.

배수로에 숨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도 기적적으로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성에는 위급한 상황에 성주가 이용할 비밀 통로가 반드시 있다. 그리고 클레멘츠 성처럼 절벽 위에 지어져 밖으로 드러난 퇴로가 없다면, 그 비밀 통로는 대개 배수로다.

‘그레이는 그런 정보엔 관심이 없었고, 나타니엘의 시대엔 없던 양식이야. 찾지 못할 거야.’

“느베야!”

그레이가 격노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도망친 모양입니다.”

그레이 밑에 있던 뷰캐넌의 여자 하인이 쉬지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키리에는 아래에서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살아는 있습니다.”

“깨워!”

그레이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곧 누군가의 뺨을 철썩철썩 때리는 소리가 났다.

“이보십시오. 일어나십시오.”

“으으…….”

“아가씨는 어디 가셨습니까?”

“어……? 당신은 뷰캐넌의……?”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으어……? 그 여자, 머리가 갈색이 아니었던……?”

“젠장, 그건 마석이라고! 아는 거나 말해!”

그레이가 좀 더 날뛰기 시작했다. 병사의 기가 죽었다.

“죄, 죄송합니다. 뒤에서 수갑 줄로 목이 졸린 이후로는 기억이…….”

“목을 졸랐다고? 키리에가? 그 고지식한 애가? 그걸 또 당하고 있어!”

“아이고, 여자를 함부로 다루기가 좀 그래서 아차 하는 순간에…….”

예상했던 순서대로의 대화들. 키리에가 눈을 내리깔았다. 조금 늦게 긴장이 풀린 듯했다.

그 사이를 비집고 좀처럼 듣기 어려운 미성이 끼어들었다.

[어디로 향했지?]

잠깐 힘이 풀렸던 키리에의 몸이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소리 내지 않기 위해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과호흡을 막기 위해서였다.

‘괜찮아. 괜찮아. 들키지 않아. 들키지 않을 거야…….’

키리에가 세뇌하듯 되뇌었다.

“일단 반대쪽에도 다른 문이 있긴 합니다. 거기가 아니면, 아마 성내에……?”

“아, 각하! 젠장, 느베야. 여길 처리해! 난 전설경 뒤를 쫓아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도련님.”

이후의 일은 소리가 겹쳐 잘 들리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느베야를 비롯한 뷰캐넌의 하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다가 병사를 데리고 떠나갔다.

이제 남은 건 키리에뿐이었다. 그녀는 특정한 표정을 지을 여력도 없이 지친 채,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후유증은 없는 모양이네. 다행이야.’

병사의 상태가 걱정되어 잠깐 남았으나, 문제는 없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누구도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나타니엘마저도.

키리에가 벽에 기대어 잠시 눈을 감았다. 심장이 뜨거운 듯도 하고, 차가운 듯도 했다.

[어디로 향했지?]

그의 목소리에 밴 희미한 초조함이 낯설었다. 실소가 나왔다. 그 무엇도 나타니엘의 여유를 부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고작 자신이 그걸 해냈다.

기쁘진 않았다. 지칠 뿐이었다. 이대로 쓰러져 물속에 잠기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환청이 그녀의 등을 밀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세요.’

키리에가 힘겹게 눈을 떴다.

‘알고 있어, 안네마리.’

키리에가 어둑어둑한 배수로를 바라보았다. 몸을 굽히면 어찌어찌 사람이 다닐 만한 크기는 되지만,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서둘러야 했다. 나타니엘이라면 금방 그녀의 장난을 눈치챌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성을 빠져나가야 해.’

그녀는 마지막으로 머리 위의 빛을 올려다보았다가, 뒤로 돌았다. 그리고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모를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갔다.

그레이는 전설경이 검은 안개 같은 모습으로 사라진 방향을 향해 뛰었다.

통로 끝에는 문이 없었다. 네모난 하얀 시야를 넘어서자마자, 그레이가 급하게 벽을 붙잡았다.

“흐억!”

문 바로 앞이 절벽이었다. 그레이가 급하게 문설주를 붙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절벽에 안전장치 하나 없는 아주 가파르고 좁은 길이 나 있긴 했지만, 통행로의 용도는 아니었다. 수감자의 ‘빠른 처리’를 위해 만들어진 길인 듯했다.

전설경은 그 길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각하!”

그는 폭풍우 속에서 비틀거림 하나 없이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찢어진 푸른 망토였다.

망토가 의미하는 바가 몹시도 명백하여, 그레이는 잠시 숨을 멈췄다.

“각하, 그건…….”

[미끼군. 근처에 있는 거야.]

“예?”

검은 버들잎처럼 흩날리는 머리카락 탓에 전설경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네 여동생은 나랑 숨바꼭질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인데.]

고개를 든 나타니엘의 얼굴을 본 그레이가 덜컥 숨을 죽였다.

하지만 나타니엘은 그레이의 상태 따위 알 바 아니라는 듯이 그에게 망토를 건넸다.

[들고 있어.]

“아. 네.”

[젖지 않게. 소중하게. 너보다 그 망토가 귀하다는 걸 이제 알 정도는 됐겠지?]

그레이가 말없이 겉옷을 벗어 망토를 감쌌다.

나타니엘은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졌다. 그레이가 그를 다시 발견했을 때, 그는 클레멘츠 성 꼭대기에 있었다. 그레이의 턱이 벌어졌다.

‘저거 지금…… 깃대 위에 서 있는 거야?’

새나 잠깐 앉았다 갈 깃대에 서서, 그는 땅도 가를 수 있을 것 같은 매서운 눈으로 사방을 주시했다.

그레이가 초조하게 이를 딱딱 부딪쳤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게 미끼라면 키리에는 성내 어딘가에 숨어서 탈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을 테고……. 그럼 찾느라 정신 팔린 사이에 빨리 도망치는 게 낫지 않나?’

그레이가 눈을 찌르는 빗물에 얼굴을 찡그렸다.

‘망토가 문제군.’

들고 튈까?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던 그레이가 혀를 찼다.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이어야지.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느베야가 말했다.

“도련님. 병사는 입막음했습니다.”

“그래? 느베야, 그럼 이거 들고 있…….”

그레이가 망토를 건네주려다 멈칫했다.

“……아니다. 내가 들어야겠어.”

느베야는 그레이의 표정만으로도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전설경은 어디 계십니까?”

“위에.”

그레이가 생각이 많은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 마차를 대기시킬 수 있나? 분위기가 안 좋다. 빠져나가야겠어.”

“클레멘츠 자작이 정문을 막았습니다. 연회 역시 파했고, 이유는 모르겠으나 마을로 병사를 보내려 합니다. 당장 나가기는 어렵습니다.”

“미친 노인네 같으니. 지대도 낮은데 왜 하필 곶에 지어 놔서……. 다른 출구 없나?”

그레이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전설경이 자작에게 키리에를 찾으라 명령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성내에 있을 텐데?”

“아래로 떨어진 건…….”

느베야의 조심스러운 말에 그레이가 팔을 내저었다.

“미끼일 거라던데?”

“클레멘츠 자작님께 성 구조도를 요청할까요?”

“들어주지 않을걸. 그 노인네 야욕이 좀 있어서, 성내에서 키리에가 사라진 걸 알면 자기가 찾아서 점수 따려고 들 게 뻔해.”

느베야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곤 고개를 내밀어 클레멘츠 성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정신없이 시야를 가리는 천둥, 번개, 비, 바람, 구름 탓인지, 그 사이에서 미동도 없는 전설경의 검은 그림자는 어쩐지 소름 끼쳤다.

“어떻게 하실 생각일까요?”

느베야가 중얼거리자마자, 나타니엘 쪽에서 움직임이 있었다.

그레이는 나타니엘이 흰 검을 천천히 올리는 것을 보았다. 다음 순간, 그레이가 외쳤다.

“미친 새끼!”

전설경이 검으로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싹둑 잘라 버린 것이다. 뭍과 곶을 잇던 땅이 무너져 내리자, 클레멘츠 성은 순식간에 섬처럼 고립되었다.

성에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 무너진 길 앞에서 황망히 서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레이가 망토를 든 채, 입을 떡 벌렸다.

“왜 아무도 나한테 전설경이 미쳤다고는 얘기 안 해줬지?!”

느베야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는 의미의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본가의 에디가 보였던 신중함이 현재 상황과 퍼즐처럼 맞물리고 있었다.

“가주님은 대체 왜…….”

‘가주’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그레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아버지 말하는 거야? 본가와 연락이 닿았어? 돈은!”

“아직입니다.”

“수도는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길래 아직도 연락이 안 돼!”

“그보다 퇴로를 차단하고 성을 뒤질 생각이신 듯합니다.”

느베야가 손 갓을 대어 비를 막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거야 당연한……!”

길길이 날뛰던 그레이가 화를 참지 못하고 바다 쪽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그의 얼굴에 천천히 의아함이 떠올랐다.

“저게 뭐야……?”

느베야가 뒤를 돌았다. 곧이어, 그녀 역시 너무 놀란 나머지 표정이 없어지는 과정을 똑같이 겪었다.

“해일이군요.”

그녀가 짧게 덧붙였다.

“아주 높은.”

먼 곳에서부터 다가오고 있는 해일은 한눈에 봐도 파고가 어마어마했다. 클레멘츠 성은 물론이고, 클라시코 전체가 물에 잠겨도 이상하지 않을 높이였다.

그레이가 한 박자 늦게 공포에 질렸다.

“……대피! 대피가……!”

“길이 이미 끊겼습니다.”

“아아아아악! 씨발! 씨바아아알!”

느베야가 미친 것 같은 주인을 내버려 두고 클라시코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성 아래 도시에서는 이미 사람들이 대피를 끝낸 상태였다.

“어떻게 할까요?”

“제기랄! 젠장! 망할! 아아아아악! 기다려 봐! 기다려 보라고!”

“곧 휩쓸릴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레이의 눈이 광기로 번뜩였다.

“넌 살고 나서 나한테 맞을 줄 알아! 아니야, 아니라고! 뭔가 방법이 있을 거라고!”

“죽기 전에 한 대만 때리게 해 주십시오.”

“죽어? 누가 죽어! 뷰캐넌 사전에 포기란 게 있을 것 같아?”

그레이가 이리처럼 사납게 외쳤다.

느베야는 잠시 감탄하고서, 침묵하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샛길을 찾으려는 걸 보면 그도 확실히 귀족이긴 했다.

“어차피 지금 도망가는 건 불가능해! 그렇다면……!”

그레이가 홱 하고 고개를 돌려, 목에 피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큰소리로 외쳤다.

“각하아아아! 해일입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전설경은 선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사방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그레이는 그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음을 확신했다.

“각하!”

여전히 반응은 없다.

‘이런 미친! 여기서 죽으라고?!’

그레이가 이를 빠득 갈았다. 절대 그럴 순 없다. 그레이의 머릿속에서 온갖 정보가 휘몰아쳤다. 이윽고 하나의 이름이 의식에서 번쩍였다.

“키리에까지 휩쓸릴지도 모릅니다!”

그레이가 키리에의 이름을 외치자마자 푸른 눈이 그에게 닿았다. 아주 멀었는데도 그레이는 그걸 알 수 있었다. 그레이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좀 더 그를 자극할 말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이를테면-.

“키리에가 성내에 있다면 찾아야 할 텐데, 성이 침수라도 되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레이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푸른 눈은 한 번 깜빡일 뿐, 반응은 없었다.

“설령 도시로 갔더라도 아직 충분히 멀리 도망가지 못했을 겁니다!”

이제 해일은 코앞이었다. 등지고 있었지만, 그림자로 알 수 있었다.

그레이가 온몸의 힘을 짜내 소리쳤다.

“-키리에가 어디로 향할지 알 것 같습니다!”

그 순간 그레이는 뒤에서 사신처럼 다가오는 소름 끼치는 물소리를 들었다. 그레이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

그레이는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느베야의 말을 듣기 전까진.

“도련님. 눈 뜨셔도 됩니다.”

그레이가 눈을 떴을 땐, 세상이 흰빛이었다. 그는 뒤늦게 그게 바닥에 깔린 얼음에 반사된 햇빛이라는 걸 깨달았다. 옆에는 똑같이 정신이 없어 보이는 느베야가 있었다.

그들은 본래 자리했던 절벽 아래에 서 있었다. 분명 뭔가에 휩쓸린 것 같았는데, 몸은 젖지도 않았다.

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천천히 주변을 살핀 그레이가 헛웃음을 쳤다.

“……바닥이 얼음이네.”

본디 바닷물로 차 있어야 할 바닥이 투명한 얼음 탓에 훤히 들여다보였다.

온 세상이 다 고요했다. 바닷가 마을에서 들려야 할 파도 소리는 들리지 않고, 얼음에 비친 하늘과 햇살 탓에 주변이 온통 눈 부셨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레이는 멀지 않은 거리에 전설경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검을 들고 있지 않았다. 지팡이를 짚은 채, 보기 드문 단정한 자세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레이와 느베야가 천천히, 그에게 걸어갔다. 인기척을 느낀 나타니엘이 더딘 속도로 고개를 돌려 그레이를 바라보았다.

그레이는 이를 악물었다. 눈을 보면 안다. 전설경은 아까보다 지금이 더 맛이 가 있었다.

[넌 키리에를 만났겠구나.]

대답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으면 목이 베일 것 같았다.

“……예.”

[왜 너만?]

투명한 눈이 꼭 미친 사람 같았다.

[왜 너는 만나고, 나는 못 만날까?]

“……각하.”

[너는 분명 봤겠지.]

“각하…….”

[보고, 만지고, 목소리를 들었겠지?]

그레이는 까닭 모르게 눈이 젖는 것을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까의 천재지변보다 눈앞의 전설경에게서 보다 직접적인 죽음의 냄새가 났다.

[내가 더…….]

전설경의 눈에는 감정이 없었고, 깊은 공허만이 엿보였다.

그는 그레이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 헤집어 할퀴고 싶은 사람처럼 그레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말했다.

[넌 눈이 키리에와 닮았네.]

전설경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하나만 줄래?]

그 말이 지나치게 담백해서, 그레이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전설경의 표정은 고요했다.

이제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보이던 죽음과 공허는 썰물 빠지듯 물러가 있었으나, 그레이는 그 빠진 자리에 굴러다니는 광기 몇 조각을 주울 수 있었다.

그레이가 몇 초간 내적 갈등을 거친 뒤, 주먹을 쥐었다.

“가져가십시오…….”

전설경이 눈을 내리깔았다. 새파란 하늘처럼 아름다운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 직접 하긴 힘들겠지…….]

그의 중얼거림 직후, 그레이가 비명을 질렀다.

“크악!”

왼눈이 화끈거렸다. 그레이는 눈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우습게도 피는 나지 않았다. 뚫려 있어야 할 곳에 얼음이 가득 차 있었다.

헐떡대는 그레이의 머리 위에서 전설경이 상냥하게 말했다.

[곱게 준 보답이야. 신경을 얼려 뒀으니 바로 의원에게 보이면 되겠지.]

“크흑, 헉, 흐어억…….”

그레이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들었다.

전설경은 하얗고 둥근 눈알을 손 위에 얹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키리에와 닮은 유일한 부분인 보라색 눈.

물끄러미 그것을 내려다보던 전설경은, 일순 아주 슬픈 얼굴을 했다. 너무나 순수하고 맑게 느껴지는 슬픔이었다.

[이렇게 보니 별로 닮은 것 같지 않네.]

그는 느리게 다시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지친 듯 손을 살짝 내밀었다. 보라색 눈이 그 위에서 데굴 굴러 그레이를 향했다.

[필요하니?]

그레이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대답했다.

“……아뇨.”

[그래.]

나타니엘은 아주 가볍게, 방금 막 가져간 그레이의 눈알을 쥐어 터뜨린 뒤, 바닥으로 툭 떨어뜨렸다.

그레이는 엄청난 각오를 하고 넘긴 자신의 눈이 십 초도 되지 않아 바닥에 버려지는 모습을 뭐라 말할 수 없는 심정으로 응시했다.

그레이가 침묵했고, 나타니엘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자.]

그 목소리가 상냥하기 한량없어서, 어쩐지 눈물이 나왔다.

그는 ‘잔인하려고’ 잔인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딱히 상대를 겁먹게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하다못해 살육을 즐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냥 너무 다르고, 너무…… 강할 뿐이다. 미친놈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예……. 갑니다.”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를 살피며 잠자코 있던 느베야도 말없이 그레이 뒤에 섰다.

그레이 뷰캐넌은 앞서 걷는 나타니엘의 뒤를 따르며, 흘끗 자신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도시를 덮치기 직전이었던 거대한 해일이, 하늘까지 솟은 빙벽이 되어 아찔할 정도로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해일에 덮쳐지기 직전의 클레멘츠 성도 무사했다.

“…….”

그레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확실히 미쳤다. 그렇지만, 그래서 감히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미친놈이 키리에 뷰캐넌을 갖고 싶다는데.

키리에는 클레멘츠 성의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레이와 느베야는 당연히 전설경과 동행하게 됐다. 도망가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죽기 싫은 것도 있지만,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경비가 떨어졌습니다.”

굳이 여관 뒤의 중정까지 자리를 옮긴 뒤, 느베야가 딱딱하게 말했다. 그레이가 정원의 치자나무 기둥을 붙잡고 한숨 쉬었다.

“아-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젠장. 그래도 꽤 남아 있지 않았어?”

“클레멘츠 님의 생일 선물로 지출하고, 레드로우트에서 주로…….”

“아, 그래, 그래. 그땐 한몫 잡을 줄 알고 좀 과하게 지출했지.”

그레이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본가는? 연락은 다시 됐다며.”

“가주님께서 부르고 계십니다. 하여 따로 여비를 줄 수는 없다고 합니다.”

“대체 뭘 시킬 생각이야? 아! 말하지 마라. 보나 마나 키리에와 관련이 있겠지.”

느베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셀 아렐라노로 돌아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니면, 전설경과 동행하고 있음을 알리거나…….”

“하. 이 꼴로?”

그레이가 험악하게 대꾸하며 자신의 왼눈을 가리켰다. 검은 안대가 뻥 뚫린 구멍을 가리고 있었다.

“종친회든 사교계든 몸에 장애가 있으면 영혼에도 상처가 난다는 시대착오적인 말이나 지껄일 텐데, 그걸 얌전히 듣고 있으라고? 아니, 반드시 뭐 하나는 얻어내서 돌아가야지.”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설경에게 붙어 있어야겠어.”

느베야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레이는 과묵한 시종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이 뭔지 눈치챘다.

“뭐야. 눈깔 병신 되고도 빌붙을 생각이 드냐고?”

“아닙니다.”

“그 키리에도 전설경 비위를 맞췄어. 키리에가 한 걸 내가 못 할 것 같아?”

느베야는 못 해서 대륙까지 건너 도망친 게 아니냐는 말을 굳이 해서 매를 버는 성격은 아니었다.

“도련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전혀 신뢰가 느껴지지 않는 응원 고맙다.”

그레이가 시큰둥하게 여관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아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야.’

전설경과 지내게 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전설경 앞에서 ‘키리에’의 이름은 거의 만능이라는 것.

그레이가 해일 이후의 일을 떠올렸다.

[일단 오림으로 가지.]

전설경은 그렇게 말했다. 클라시코에서 좀 더 내륙으로 들어가면 있는 도시였다.

‘오림 시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키리에는 바다로…….’

그레이의 말에 전설경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키리에가 참 대단하기도 하구나. 빙벽도 다 등반할 줄 알고.]

‘…….’

자신이 생각해도 등신 같은 발언이었다. 전설경은 기가 죽은 그레이를 내려다보며, 나긋하게 말했다.

[오림 이후에 어디로 가야 할지는 네가 알려 주겠지. 그렇지, 그레이 뷰캐넌?]

그때 그가 보여 준 살벌한 눈빛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레이가 고개를 저으며 회상을 거둬 냈다.

“살기 위해 그냥 한 말이라는 걸 알면 바로 죽이겠지?”

“죽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

느베야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정정하겠습니다. 직접 죽이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짜증 나네.”

그레이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모로 가도 죽음이라면, 이름이라도 파는 수밖에.”

***

아침이 되었다. 그레이는 미리 여관 1층의 홀에 나와 있다가, 나타니엘이 내려오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좋은 아침입니다, 각하!”

나타니엘이 놀란 기색도 없이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그레이가 일부러 좀 모자라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날이 추운데, 밤새 괜찮으셨을까요? 그렇게 좋은 여관은 아니라서, 하하!”

나타니엘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한마디 했다.

[미친 거니?]

“아닙니다! 그저 어릴 적부터 들은 신화 속의 전설경과 함께하게 되어 흥분한지라 그렇습니다.”

그레이가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그를 조용한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쯤 전설경은 이미 그레이의 속내를 눈치챈 모양이었으나, 마냥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하하…….”

그레이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흠. 앞으로의 일정 말입니다만.”

푸른 눈에서 불이 반짝한 것 같았다.

“……당장 키리에를 쫓는 것도 좋지만, 제가 그래도 키리에의 오라비 아니겠습니까.”

키리에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나타니엘의 눈매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괜히 그걸 지켜보는 그레이가 낯뜨거워질 정도로.

[그래서?]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한 은근한 말에 그레이가 진지하게 외쳤다.

“너무 당장 쫓아가는 것보다는 시간 여유를 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흐음.]

“절대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래?]

“그래야 방심할 때 잡아챌 수도 있고!”

[그리고?]

그레이는 전설경의 미소가 점점 진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등에 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이판사판이었다.

“제가 드릴 말씀이 정말 많거든요. 혹 키리에가 어땠는지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다소 필사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놀랍게도 전설경은 처음으로 그레이의 말을 귀담아들은 듯했다. 푸른 눈이 아득하니 깊어졌다.

[어땠는데?]

그레이가 건침을 삼켰다.

“베일을 쓰고 있었고…… 많이 야위어 있었습니다.”

[기껏 먹여 뒀더니.]

“잘 씻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고요.”

전설경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감기에 걸린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날이 꽤 추운데, 그건 다행이죠.”

[그건 레쇼의 말을 듣길 잘했군.]

“호국경 말씀이십니까?”

[계속해.]

그는 키리에의 이야기에 다른 주제가 끼어드는 걸 원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레이는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키리에의 모든 모습을 하나하나 읊어 나갔다. 하다못해 그녀의 앞머리가 얼마나 길었는지, 손의 어디에 얇게 베인 상처가 있었는지까지도. 당연하지만 자신이 키리에에게 했던 약간의 주먹질은 쏙 빼고서 말이다.

전설경은 그런 이야기만으로도 만족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레이가 ‘달빛 아래서 가끔 그 애의 머리카락은 은색으로 보인다’고 말하자, 심장이 떨릴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좋아하는 색이야.]

“……그러십니까?”

[정확히 하자면 키리에의 색이라서 좋아하게 된 거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시선이 그레이의 오른눈에 닿았다. 비단 지금뿐만이 아니라, 대화 내내 그는 집요하게 그레이의 눈을 응시했다.

그레이가 어색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시선을 피했다.

“다만, 알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으나, 말을…….”

[못하게 되었다고 하더구나.]

“……괜찮으십니까?”

[그건 괜찮아.]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전설경이 잠시 후 말을 번복했다.

[어쩌면 그게 더 좋을지도 모르지.]

‘미친놈.’

그레이가 애써 싱그럽게 웃었다.

“많이 보고 싶으신가 봅니다.”

그레이가 하는 모든 말에 하나하나 감상을 내놓던 전설경이 대답을 멈췄다. 그는 물끄러미 그레이를 보고 있었다.

그레이는 거품이 꺼지듯 훅 가라앉은 분위기에 당황했다.

“각하?”

[그야 물론이지.]

그렇게 말하는 전설경이 앉은 채로 시시각각 죽어 가는 것 같아서 심장이 선득했다.

[아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그럴 거야.]

그레이는 아연했다.

‘그런 것치고는 지금 너무 침착한 것 같은데…….’

전설경은 그레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그는 너무 오래 버려진 신전처럼 고고하고 쓸쓸해 보였다.

[네게는 내가 퍽 차분해 보이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레이가 조심스레 답했다.

“사람을 시키거나 정식으로 공고를 올리시면 더 빨리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랬다가 만에 하나 어느 무뢰배들이 키리에를 해치기라도 하면?]

“날 때부터 전설경의 일화를 듣고 자란 사람들이요? 그럴 가능성은 정말 드물 텐데요.”

[드문 거지, 없는 게 아니야.]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면 급하게 도망치다가 어딘가의 산에서 실족해 눈 깜짝할 새에 죽을지도 모르지. 죽음의 가능성은 어디에나 있어.]

하지만 그럴 일은 분명 아주 드물 것이다. 아주 드문 그 가능성마저 두려운 거라면, 그건 분명 단순히 키리에를 ‘아끼는’ 수준이 아니었다.

침묵하던 그레이가 불쑥 물었다.

“각하께 그런 존재가 처음입니까?”

전설경은 그레이가 이상한 말을 한다는 듯이 대답했다.

[불에 데 본 사람만이 불이 두려운 줄 아는 거란다.]

“하지만 키리에는 성인입니다. 게다가, 제 동생이라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꽤 유능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쉽게 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전설경이 잠시 침묵했다. 그의 시선은 끈질기게 그레이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너희가 얼마나 연약한지 알아. 아무렇지 않게 나갔다가 시체로 돌아오기도 하고, 별거 아닌 병에도 픽 죽어 버리지.]

“아니, 그렇게까진…….”

[너희의 자신감은 늘 보잘것없고 빈약한 근거 위에 간신히 모양만 갖추고 있는 모래성과 같아.]

“…….”

초월자인 그가 그렇다는데 인간인 그레이가 달리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아무렴 그런가 보다 할 뿐.

그레이는 계속 자신에게 따라붙는 푸른 시선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가장 묻고 싶었던 부분을 물었다.

“그럼, 만약에 키리에가 죽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레이는 이 질문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화가 나서 날뛸까? 대륙을 부술까? 인간들을 다 죽일까? 아무튼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겠지. 필시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타니엘의 대답은 그레이가 예상한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 따라잡을 수 없는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눈으로, 아주 오랫동안 그레이를 응시한 다음, 조용히 말했다.

[슬프겠지. 몹시.]

***

전설경은 볼일이 있다며 어딘가로 가 버렸다. 그는 그레이에게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약간의 보석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레이는 보석이 굴러다니는 테이블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느새 느베야가 느리게 다가와 옆에 섰다.

“도련님.”

“응? 아아.”

“이야기 잘 마치셨습니까?”

“음. 아마도 그런 것 같지?”

“어떠셨습니까?”

“어땠냐고? 음. 뭐랄까.”

그레이가 타성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대의 신처럼 아름다운 남자를 떠올렸다. 그는 생각보다 차분하고, 생각보다 강하고, 생각보다…….

“어렵네.”

툭 던지듯이 말이 튀어나왔다. 느베야가 뒷짐을 지고 고개를 갸웃했다.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레이가 눈을 찌푸렸다.

“나도 잘 표현 못 하겠는데? 이런 건 처음이라.”

그는 소름 끼칠 정도로 자신의 눈을 쫓던 전설경의 시선을 떠올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그렇잖아. 어쨌든 그도 사내일 텐데, 자기 감정을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낯간지럽다고 생각하지 않나? 나이를 먹으면 더 그렇고.”

그레이가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엄지 위에 턱을 올렸다.

“나는 그가 위협을 하든가, 키리에를 찾지 못하면 벌어질 풍파를 말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정치 판도가 어떠니, 땅이 어떠니 하는 거국적인 문제 말이야.”

“아니었습니까?”

“아니던데.”

그레이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걸 그렇게 솔직하게, ‘슬플 거’라고 말해 버리니까, 그게 너무, 뭐랄까…….”

순수하게 느껴져서.

그레이가 입술을 닫았다.

그게 말이나 되나? 안 된다. 그 전설경인데, 신화 속의 존재인데, 모든 걸 다 가졌을 텐데. 그런데 그런 사람이 ‘그 애가 죽으면 나는 너무 슬플 거야.’ 같은 말이나 하는 게, 그게 말이 된다고?

그레이의 어깨가 늘어졌다. 질 나쁜 환상 속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었다.

“……모르겠다. 그는 대체 뭘까?”

그레이는 그때부터 주의 깊게 전설경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전설경은 그레이를 시종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전설경이 준 재화, 그리고 어떻게 알았는지 모를 호국경의 원조 덕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으니까.

그레이는 알뜰하게 딴 주머니를 차면서, 좀 더 전설경의 주위를 맴돌았다.

때때로 사라지는 전설경을 찾는 법도 익혔다. 그는 대체로 높고 사람이 없는 곳에 있었다.

“각하.”

[그냥 ‘님’을 붙여.]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가 능청스럽게 대답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뭘 보고 계셨습니까?”

[딱히.]

그레이가 의아한 눈으로 나타니엘과, 나타니엘이 마주한 방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들이 있는 곳은 오림 시 중심의 지대가 높은 공원이었다. 덕분에 도시의 끝에 세워진 낮은 성벽까지 훤히 보였다. 새벽 안개가 낀 도시는 날붙이처럼 차가웠지만, 평범했다.

그레이가 별다른 징후를 찾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밤새 마을을 수소문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정탐은?]

“키리에를 본 적은 없다고 합니다.”

나타니엘이 짧게 침묵했다.

[그래.]

그레이가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타니엘 님의 능력으로는 찾을 수 없는 건가요?”

[신기(新機)란 게 그렇지.]

“오. 그럼 나타니엘 님도 적어도 신 정도 되시는……?”

떠보는 듯한 말에 나타니엘이 고개를 돌렸다. 유리처럼 맑은 눈이 그레이를 응시했다.

[내가 궁금하니?]

“하하, 음. 그렇다기보다-.”

[별로 추천하고 싶진 않아. 다른 쪽을 공부해 봐.]

그레이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손가락 대신 입 안의 혀를 가만두지 못하고 움직여대다가, 거북처럼 목을 한 번 쭉 뺐다.

“키리에가 말입니다.”

[어디 갔을까?]

딸꾹.

그레이가 천만다행으로 웃음을 유지했다.

“물론 만나게 해드릴 겁니다! 그 전에 제가 좋은 제안을 하나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제안?]

나타니엘이 반문했다. 묘하게 우습다는 기색이 서린 목소리였다.

“네. 서쪽으로 며칠 더 가면,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이라는 곳이 있는데, 가 보시겠습니까?”

[키리에가 거기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제 나름의 생각입니다.”

그레이가 손으로 길을 안내하는 자세를 취했다. 나타니엘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인지 말해 줄 차례구나.]

그레이가 마지막으로 흘낏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뒤늦게 나타니엘이 멀리서 휘날리는 보라색 깃발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아하는 걸 줘서 꾀어내는 건 어떨까 합니다. 프로노이아에는 희귀한 초판본 같은 것도 많다지 뭡니까? 키리에는 책을 좋아하니…….”

나타니엘이 잠시 계단을 내려가던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레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분위기가 훅 달라졌다.

그레이는 그가 뭔가 다른 이야기를 꺼낼 예정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뷰캐넌.]

“예.”

[가주의 서재에 들어가 본 적 있나?]

그레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재가 따로 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나타니엘은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그레이를 응시했다. 그레이는 그제야 자기 실수를 깨달았다.

“가주의 서재에는 가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게는 아직…….”

나타니엘의 푸른 시선이 지긋이 그레이에게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그래. 그래 보이는구나.]

그게 어떤 ‘그래 보인다’는 의미인지, 그레이는 묻지 않기로 했다. 대답해 줄 눈치가 아니었다.

“혹시 찾으시는 책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나타니엘이 그거면 됐다는 듯이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왜 그가 계단을 내려갈 때는 남들처럼 머리가 뒤뚱거리지 않고 그저 우아한지 알 수 없어 하며 그 뒤를 따랐다.

[그래서 뷰캐넌, 너는 키리에가 어디로 갈지 알고 있지만, 약간의 여유를 두자는 거구나.]

대화가 다시 본 궤도로 돌아왔다. 그레이가 최대한 순진하게 미소 지었다.

‘까놓고 내가 키리에가 어디로 갈지 어떻게 알아.’

하지만 그걸 티 냈다간 즉사다. 없어도 있는 것처럼, 있다면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굴어야 했다.

“사냥꾼도 때때로 쉬는 시간이 필요하죠. 그동안 나타니엘 님께서 모르는 키리에의 이야기도 해드릴 수 있고요. 어떠십니까?”

공원의 계단에서 내려와 막 거리의 포석을 밟은 나타니엘이 뒤로 돌았다. 그는 어쩐지 무섭게 느껴질 정도로 물끄러미 그레이를 응시했다.

나타니엘은 5.9피트인 그레이보다도 월등히 큰 탓에, 그레이는 드물게 신체 조건의 차이에서 오는 압박감을 느꼈다.

“……나타니엘, 님?”

그레이의 눈이 떨렸다. 그러자 나타니엘이 조금 미소짓는 듯했다. 그 순간 그레이는 전설경의 내면에서 어떤 결정이 났다고 느꼈다.

[그러지. 네 말이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몇 군데 맞는 부분도 있으니까.]

이상할 정도로 쉽게 수락이 나왔는데도 그레이는 마냥 기쁘지가 않았다.

그는 분명 자신이 키리에의 목적지를 모른다는 것을 안다.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면서도 가만히 자신의 능청을 넘어가 주고 있었다.

‘왜?’

그레이가 대답하지 않는데도, 나타니엘은 여전히 그레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그레이 자신이 아니라 그의 오른쪽 눈을.

생각해 보면 그는 그레이를 알게 된 순간부터 내내, 그레이의 눈에서 시선을 뗀 적이 없었다.

그레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눈이다.’

그레이가 저도 모르게 목을 빳빳이 세웠다. 그러면서도 그는 감히 눈을 깜빡이지 못했다.

‘내 눈이 키리에와 같은 보라색이라서.’

말하자면 그는 살아 움직이는 보라색 눈을 보며 키리에를 향한 갈증을 채우고 있는 셈이었다.

‘미친 새끼.’

그레이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타니엘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는 그레이가 방금 뭘 깨달았는지를 눈치챈 듯했다. 하지만 둘 다 그걸 입 밖에 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레이가 길고 떨리는 한숨 뒤에 물었다.

“키리에를 찾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네가 그런 걸 물을 줄은 미처 몰랐는걸.]

두 사람은 다시 자연스럽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키리에는 왜 도망친 겁니까?”

[두려웠나 보지.]

“두려워한다고요?”

[예쁘게 울었으니 아마도.]

“뭔가 하셨나요?”

[흠. 장난을 조금?]

짓궂은 목소리였다. 그레이가 마음에도 없는 호응을 했다.

“참 이상한 일이네요! 도망까지 가고. 누구라도 원하는 그런 자리일 텐데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나도 이렇게 고생하진 않았지.]

잠깐 침묵이 오갔다.

“실례지만, 키리에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드신 건가요?”

둘은 여관을 향해 가로등이 세워진 모퉁이를 돌았다. 저 멀리서 나타니엘을 발견한 시민 한 명이 자신의 눈을 의심하다가 게걸음으로 사라져 가는 게 보였다.

나타니엘은 멀어져 가는 행인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레이가 뒤늦게 그곳을 보았다. 행인의 옷이 보라색이었다. 그레이는 찝찔한 소름을 느끼며 입을 닫았다.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네.]

“하지만 모든 일에는 계기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맞는 말이야.]

나타니엘이 잠시 침음에 빠져들었다.

[글쎄. 농담에 소질이 있는 점? 건드리면 놀라고, 떨면서도 할 말은 다 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듯한 순진해 빠진 말이나 하면서, 또 겉으로는 제법 품위를 챙기는 점.]

키리에에 대해 말하는 나타니엘은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그레이는 나타니엘이 ‘키리에’라는 주제에 한정해서 굉장히 자비롭다는 걸 깨달은 상태였고, 그래서 다소 마음을 놓은 상태에서 물었다.

“키리에 말고 다른 괜찮은 여자들은 눈에 안 차시던가요?”

[일단 그 ‘괜찮다는’ 사람들이 날 깨우진 않았어.]

그레이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럼, 누가 깨우는지가 중요한 거군요.”

다소 의미심장한 질문이었다. 나중에 안 좋은 일이 되어 부메랑처럼 돌아올지도 모르는.

나타니엘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순순히 대답했다.

[보통은. 오래 사는 것들은 그렇게 쉽게 마음을 바꿀 수 없으니까.]

“그건 어째서죠?”

나타니엘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는 거리의 유리 진열장 너머를 보고 있었다.

그레이는 진열장 안에서 넓은 챙이 달린 보라색 여성용 모자를 발견하곤, 점잖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타니엘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잊지 못하거든.]

무엇을요? 하고 그레이는 묻지 않았다. 나타니엘의 말이 음악처럼 이어졌다.

[우리는 오래 살고, 먼 옛일을 어제의 일처럼 느끼고, 웬만한 일로는 죽지 않고, 또 각각이 새로운 종에 가깝지.]

그레이가 멍하니 나타니엘의 말에 귀 기울였다. 나타니엘은 앞만 보았다.

[너무 긴 세월은 자아를 무뎌지게 하기에 충분하거든.]

“그럼, 키리에는 어떤 의미가…….”

[그 와중에 어느 풍뎅이가, 어느 나비가, 어느 새가, 어느 고양이가, 어느 무엇이 기억 속에 묻혀 있던 네 이름을 부른다고 생각해 보렴.]

그레이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나타니엘에게서 뭐라 말하기 어려울 만큼의 거리감이 느껴졌다. 동시에 그가 아마도 키리에를 떠올리며 짓는 미소가 지나치게 수려해서 심장이 조금 아픈 느낌이었다.

[그럼 넌 아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걸 네 곁에 두고 싶어질 거야. 내 이름을 걸어도 좋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이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타니엘이 나긋하게 말했다.

어느새 그의 손에 들린 지팡이가 바닥을 한 번 툭 두드렸다. 그레이는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퍼뜩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각하.”

[키리에도 결국 받아들이게 될 거야. 발라브리가와 그 이전의 인간들이 그랬듯이.]

나타니엘은 아마 상당히 무시무시한 짓을 키리에에게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걸 통해 키리에가 도망치는 걸 포기하고, 옆에 있게끔 하려고.’

분명 나타니엘은 그걸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 아귀가 맞지 않았다. 그의 계획은 가장 결정적인 부분에서 뭔가가 어긋나 있었다.

그걸 느끼면서도, 그레이의 입은 보다 궁금한 부분을 묻기 위해 열렸다.

“그럼 나타니엘 님께선 키리에를 여자로 보지는 않으시는 겁니까?”

나타니엘의 푸른 눈이 아주 살짝 가늘어진 것 같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니?]

“인간들의 사랑에는 보통 에로스가 깔려 있지 않습니까.”

[별로 그 오라비와 말할 주제는 아닌 것 같구나.]

“역시 그렇죠?”

그레이가 실망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좋다 말았다. 전설경을 제부로 둘 기회였는데.

“하긴, 너무 당연한가요? 나타니엘 님이 보시기엔 저희가 엄청 하찮을 테니, 흔히들 말하는 ‘이성적’인 관심은 앞으로도 절대 생기지 않겠죠.”

그레이가 미련을 갖고 흘낏거렸으나, 나타니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키리에의 이야기를 하며 잠깐 부드러워졌던 그의 분위기는 어느새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레이는 슬슬 자기가 무형의 선을 밟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우와, 하하하! 춥네요. 먼저 가서 문을 열어 놓겠습니다. 더 자세한 탐문 보고도 드려야 하니까.”

그는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 여관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그 뒤에서, 나타니엘은 걸음을 멈췄다.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눈치도 빠르죠. 당신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걸 알 정도로.’

잠시 상념에 잠겼던 그는 이내 다시 걷기 시작했다.

***

덜컹, 덜컹.

마차가 산길을 달렸다. 키리에는 마차 창을 가리고 있는 덮개를 살짝 열어 밖을 보았다.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마차는 더 내륙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연적으로 녹진 않겠지용?”

키리에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밤색 콧수염에 회색 눈을 가진 아주 뚱뚱한 외국인 신사였다. 아니, 신사라기보다 학자였다.

“빙벽 말입니다.”

그가 콧수염을 어루만지며 재차 말했다.

“전설경의 힘이라 하니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직접 봤으면 좋겠는데 말이지용.”

그의 말은 끝에 과하게 ‘ㅇ’ 발음이 들어가 있어 굉장히 사랑스럽게 들렸다.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 키리에를 향해, 남자는 콧수염을 나비넥타이 당기듯이 양쪽으로 짧게 당기며 미소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하트우드 박사님께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저와, 말씀드렸지요? 포 박사라고 불러 주시지요. 아무튼 이 포와, 사정을 아는 다른 연구원들이 도울 테니까요.”

포 박사는 말이 많았다. 그는 키리에가 말을 못 한다는 걸 알게 된 뒤로, 조금의 침묵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부지런히 입을 움직였다.

“일찍 도착해서 다행이지요.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기적이라고 하고 싶지 뭡니까?”

“…….”

“아시다시피 올드렐름은, 종말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모인 도시지요. 즉 남에게 별로 관심이 없으니 안심하시지요, 아가씨.”

키리에가 말없이 시선을 피했다.

마차는 올드렐름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륙의 서쪽이다. 종말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모인 곳이기도 하다.

그런 곳을 가고 싶을 리 없다.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키리에가 땅 밑의 비밀 통로에서 밖으로 나오자마자 발견한 건 하늘 높이 치솟은 빙벽이었다. 그걸 넘어갈 방법도 없었고, 수색조는 점차 포위망을 좁혀 왔다.

제냐 하트우드가 보냈다고 말한 포 박사를 만날 수 있었던 건 정말로 기적이었다.

나타니엘이 보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금방 거두었다. 나타니엘은 자신의 아버지가 하는 일에도 손대지 않았으니, 어머니가 하는 일에도 손대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의 이름이 지방에 알려지지 않도록 굉장히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올드렐름에 와 보신 적은 있지요?”

너무 반응하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니기에, 키리에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다행히 포 박사는 그런 종류의 제스처를 알아듣는 사람이었다.

“하기야 하트우드 박사님의 따님이시지요. 박사님의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혹시 들어 보셨는지요?”

키리에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잠시 실망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콧수염을 짧게 두 번 잡아당기고서 빙그레 웃었다.

“소개해드릴 시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트우드 박사님은 이 분야에서 최고의…….”

그때, 포 박사의 목소리에 겹쳐져 다른 마차의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소리였다. 키리에가 저도 모르게 베일을 움켜쥐었다.

“호. 도착했군요.”

포 박사가 창문 가리개를 살짝 들쳤다. 그는 아무리 봐도 한 사이즈 이상 작아 보이는 조끼 탓에 더 거대해 보이는 배를 두드리며, 미소를 보였다.

“환영합니다. 올드렐름입니다.”

마차는 올드렐름 외곽에 있는 거대한 모래색 건물의 뒷문에서 멈췄다. 수도원을 개량해 사용하고 있는 듯했다.

포 박사가 먼저 마차에서 내린 뒤, 손을 내밀며 윙크했다.

“작위는 없지만, 그래도 제가 귀족 출신이긴 하지요. 뷰캐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요.”

포 박사의 살진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키리에가 불안하게 주변을 살폈다. 포 박사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오늘은 대부분 외부에 있습니다. 몇은 소개해드릴 필요가 있겠지만요…….”

네모난 건물 안쪽은 그야말로 학자들이나 살 법한 곳이었다. 있을 게 다 있으면서 지저분했다는 뜻이다.

때마침 맞은편에서 남자 한 명이 걸어왔다.

“포 박사님?”

“호, 제롬 군! 마침 잘됐군요.”

키리에가 재빨리 포 박사의 뒤로 숨었다. 제롬이라 불린 청년이 의아한 눈을 했다.

“손님이세요……?”

제롬의 말은 느렸다. 키리에는 그가 술에 취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요, 제롬 군. 하트우드 박사님의 따님이시죠.”

“그럼 뷰캐넌의…….”

“맞습니다. 하트우드 박사님께서 비밀로 해 달라고 하셨으니, 지켜 주시겠지용?”

“물론, 이죠.”

“자, 아가씨? 얼굴을 보여 주시지요. 제롬 군은 원래 아랫마을의 마구간지기인데, 저희가 하인으로 고용했습니다. 앞으로 아가씨를 도와드릴 거예요. 아무래도 이 건물엔 여자 하인이 없다 보니 양해를 부탁드리지요.”

키리에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베일을 걷으며, 천천히 포 박사의 뒤에서 걸어 나왔다.

“와……?”

그 순간, 제롬이 심장에 화살을 맞은 사람처럼 눈을 부릅떴다. 키리에가 잽싸게 다시 얼굴을 가렸다.

“자, 자, 얼굴은 봤지요, 제롬 군? 앞으로 제롬이 아가씨를 모시는 겁니다. 그런데 낮에는 술을 안 하는 게 좋겠어요, 제롬 군. 또 제랄드에게 혼이 나면…….”

“노력하겠습니다. 노력해야죠.”

“좋아요, 좋아요! 제롬 군. 아가씨는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말을 못 하시니, 일단 펜과 종이를 드리고…….”

포 박사가 이것저것 떠들기 시작하며 자리를 옮겼다. 그 와중에도 제롬의 눈은 키리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키리에는 애써 그 노골적인 시선을 무시하며 걸었다.

그녀의 방은 수도원 본관과 구름다리로 이어진 탑의 가장 높은 곳에 배정되었다.

“좀 낡긴 했지만, 있을 건 다 있으니까요……. 아무도 안 쓰는 방입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시다면 제롬에게 요청하시지요.”

키리에가 그리 넓지 않은 방을 빙 둘러보았다. 침대와 창과 책상과 옷장이 하나씩.

제롬이 스리슬쩍 그녀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다주었다.

「나타니엘에 대한 이야기는 얼마나 알고 있지?」

생활에 관련된 요청보다 먼저 전설경의 이야기가 나오자, 포 박사는 통통한 뺨을 떨며 놀랐다.

“역시 하트우드 박사님의 따님이시군요! 사실 저희도 아는 게 많지는 않습니다.”

「어머니께서 다른 말은 안 하셨나?」

“아가씨에 대해서라면, 올드렐름으로 모시라는 말밖에는 듣지 못했지요. 그러니 일단 아가씨의 계획을 따르는 게 좋겠지요?”

키리에의 펜이 멈췄다.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제냐가 일부러 사람까지 시켰을 정도면, 분명 이유가 있었을 텐데.

키리에의 표정이 가라앉자, 포 박사가 안절부절못하며 제 수염을 잡아당겼다.

“아가씨?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일단 마음을 놓으시고, 그렇지! 저희 연구라도 구경하시겠습니까?”

「남에게 보여도 되는 건가?」

포 박사가 실망스러운 얼굴을 했다.

“저희가 남인지용?”

그는 키리에가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재빨리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키리에가 반사적으로 박사의 손을 맞잡았다.

“호! 가실까요?”

아차 할 새도 없이 포 박사가 키리에를 이끌었다.

포 박사가 안내한 곳은 넓은 강당이었다. 벽에는 지도, 알게이스어와 틸카 성어로 쓰인 메모, 정체불명의 벽화 등이 가득했다. 바닥은 종이로 덮이지 않은 부분을 찾는 게 더 빠를 정도였다.

“자, 자, 들어오시지요! 들어오세요!”

포 박사가 몹시 흥분한 어투로 말하고는, 팔짝팔짝 뛰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찬찬히 주변을 살피던 키리에는 문득 벽에 걸린 그림 하나를 발견했다.

기이한 그림이었다. 그림의 한구석에서부터 검은색이 퍼져 나오고, 작은 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까만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그림 앞으로 다가간 그녀의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그림을 쓸었다. 참으로 집요한 검정이었다. 그린 사람이 어떤 고의를 갖고 칠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예쁜 그림이지요?”

어느새 포 박사가 곁에 다가와 물었다. 키리에는 망설이다 펜을 들었다.

「이게 종말인가?」

“거의 그렇다고 봐야지요.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요.”

키리에의 눈이 그림에 붙박였다.

“…….”

아무리 보아도, 그림 속의 ‘검은 것’은 나타니엘과 비슷했다. 정확히는 때때로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던 그의 그림자와.

묻어 두었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그는 대체 뭘까?’

그가 아주 강대한 존재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정체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물어볼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서는 왠지 말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풍겼다.

‘물었어야 했을까?’

“하나밖에 없지만, 과거 벽화에도 비슷한 게 있습니다.”

포 박사가 다른 그림을 끌어와 보여 주었다. 강박증에 걸린 사람이 그리기라도 한 것처럼 집요하고 소름 끼치는 검은색의 무언가. 그리고 도망치는 사람들.

「한 번이 아니야?」

“아닙니다. 유사 이래 몇 번 이런 게 나타났는지는, 글쎄요, 전설경이나 알까요?”

키리에가 다시 그림을 바라보았다.

「이런 게 또 나타나면 사람들이 다 죽게 될까?」

“호. 놀랍게도 그건 아닙니다.”

의외의 대답에 키리에의 고개가 돌아갔다. 포 박사가 흥분한 얼굴을 했다.

“그랬다면 문명이 이 정도로 발전했을 리 없지요. 암요!”

「그럼 방법이 있다고? 이런 것에서부터 도망칠 방법이?」

“거야 문헌으로 남아 있는 게 아니니 확답은 드릴 수 없지만, 몇 가지 설은 있지요.”

키리에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손에 들린 펜이 날 듯 움직였다.

「그게 뭐지?」

키리에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포 박사가 콧수염을 잡아당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 어려운 비책도 아닙니다. 원래 이런 비밀은 동화나 설화, 속담이나 민담 속에 숨어서 전해지는 법이니까요. 바로…….”

포 박사의 입이 열린 순간이었다.

“박사님.”

제롬이 멀찍이서 말을 걸었다.

“다른 박사님들이 돌아오실 시간인데, 괜찮을까요?”

포 박사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호! 그건 안 되죠! 아가씨도 그건 곤란하시죠?”

“아…….”

“어서, 어서 가시지요! 사람들에겐 제 손님이 묵고 있다고 설명할 테니, 푹 쉬실 수 있을 겁니다.”

포 박사가 떠밀 듯이 키리에를 밀었다. 덕분에 키리에는 다음 말을 듣지 못하고 강당을 나와야 했다.

“저는 사람들을 맞이하러 가 보겠습니다. 곧 있을 학술회의 때문에 좀 바빠서 말이지요. 제롬이 안내해드릴 거예용!”

포 박사는 살진 거위처럼 움직여 사라져 버렸다. 남은 건 제롬뿐이었다. 키리에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고 글을 써 그에게 보였다.

「혼자 돌아갈 수 있으니 일 보게.」

제롬이 취기 때문인지 붉은 얼굴로 어설프게 미소지었다.

“아닙니다…….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고집이 셀 것 같은 인상이다. 키리에가 말없이 배정된 방으로 향했다. 제롬은 그 뒤를 따랐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으나, 탑의 계단을 올라갈 때쯤 키리에를 불렀다.

“저, 뷰캐넌…… 님?”

키리에가 고개를 돌렸다.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특별히 원하시는 식사 메뉴라든가…….”

「괜찮아.」

“소를 모레 잡을 텐데 소고기 같은 거, 좋아하시는지…….”

제롬이 말을 마치며 딸꾹질했다. 키리에가 냉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방이 코앞이었다. 나선형 계단이 끝나가자, 제롬은 좀 더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항상 본관 1층에 있으니까요, 혹시 심심하시면…… 언제라도. 그러니까아, 밤에도.”

「그럴 일은 없을 거야. 혼자 있게 해 다오.」

키리에는 최대한 품위 있게 답한 뒤, 실망한 얼굴의 제롬 앞에서 문을 닫았다.

한숨이 나왔다. 피로 때문에 시선을 내린 그녀는 바로 미간을 좁혔다.

잠금장치가 바깥에 있었다.

“…….”

키리에는 문고리를 잡은 채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제롬이 사라진 뒤, 조심스럽게 탑을 내려가 오는 길에 봐 두었던 헛간 짚더미 속에 숨었다.

포 박사가 의심스러운 건 아니었다. 그저 누구여도 믿지 못하게 되어 버렸을 뿐이다.

서릿발이 내린 짚더미에서는 쿰쿰한 말똥 냄새가 났다. 그제야 키리에는 쓰러지듯 잠들 수 있었다.

***

포 박사는 아침이 밝자마자 제롬을 시켜 키리에를 불렀다.

“포 박사님께서 부르시는데요.”

「곧 가지. 아래에서 기다려.」

그가 노크 후 허락 없이 바로 문을 열었기 때문에, 키리에는 좀 짜증이 난 채로 글씨를 휘갈겨 썼다.

「그리고 다음부턴 허락을 듣고 문을 열도록 해.」

제롬은 히죽거리기만 했다.

키리에는 이제는 한 몸처럼 느껴지는 베일을 꼼꼼히 두른 뒤 탑을 내려갔다. 아침부터 부를 줄은 몰랐기에 약간 놀란 상태였다. 그야 학자들이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대단히 드물었으니까.

그녀는 강당으로 들어선 뒤, 그들이 아침 일찍 일어난 게 아니라 아직 안 잤을 뿐임을 깨달았다. 어제보다 더 퀭한 눈을 한 포 박사가 키리에를 보고 싱긋 웃었다.

“소개를 해드릴까 합니다. 우선 저부터 할까요? 저는 살라미시 포, 종말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의 양옆으로는 두 사람이 더 있었다. 그중 마르고 광대가 튀어나온 남자가 키리에를 노려보며 말했다.

“뷰캐넌 님이십니까?”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흥. 잘도 여기까지 오셨군요.”

“어허, 제랄드!”

“그래, 그게 내 이름이오, 포 박사. 뷰캐넌 님, 귀는 멀쩡하실 테니 들으셨겠죠? 하지만 제랄드 말고 시워드 박사로 불러 주십시오. 아예 안 불러 주시면 더 좋고 말입니다.”

노골적인 적대였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시워드 박사가 아직 문 근처에 서 있던 제롬을 보면서도 눈살을 찌푸렸던 것이다.

“포 박사. 저 술꾼은 인제 그만 해고할 수 없소? 아침부터 저 얼굴을 보려니 재수가 없는 것 같군.”

제롬이 움찔했다. 포 박사는 거대한 덩치로 그를 가리며, 제롬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제롬 군은 매우 잘해 주고 있어요, 제랄드.”

“잘도 그렇겠소. 매일 술이나 마시고 고주망태가 되어서 간신히 하루가 끝나기 전에 일과를 마무리하는 게 하루 이틀이오?”

“그렇지만…….”

포 박사가 순한 양 같은 얼굴로 시무룩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걸 본 시워드 박사가 질린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그러자 옆에서 말없이 앉아 있던 호호백발의 여성이 나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뷰캐넌 님. 마가렛 호크송이라고 합니다. 종말을 연구하고 있죠.”

「키리에 뷰캐넌이야. 반가워.」

“천만에요.”

그녀의 태도에는 호의는 없었지만 예의는 있었다.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이고 인사를 받자, 호크송 박사가 손뼉을 두 번 쳐 그때까지 다투고 있던 포 박사와 시워드 박사의 주의를 돌렸다.

“우리는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고 모였죠, 여러분?”

“뭔 놈의 진지한 이야기.”

“제리. 당신은 지금 수면 부족으로 예민해져 있어요. 어서 끝내고 자러 가도록 하죠.”

시워드 박사가 투덜대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그를 진정시키는 것까지가 호크송의 역할이었는지, 다시 포 박사가 나섰다.

“못 보일 꼴을 보여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무튼, 하트우드 박사님의 전언은 저희 셋만 알고 있지요.”

“그 망할 여자.”

“어느 정도 아가씨의 사정을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저희가 아가씨를 도와드릴 예정이에용.”

“내키진 않지만 말입니다.”

포 박사가 못 참겠다는 듯이 바들바들 떨면서 시워드를 노려보았다.

“제랄드!”

“또 질질 짜려고 그러오?”

“어떻게 그런 말을!”

포 박사가 비명을 내질렀다.

아무래도 끝날 것 같지 않다. 그 모습을 보며 차를 마시고 있는 호크송 박사를 포함한 세 사람은, 사회성을 제물로 바치고 지능과 고학력을 얻은 사람들 같았다.

키리에가 말없이 종이 위에서 펜을 움직였다.

「바다를 건너서 북대륙으로 가야 해.」

다행히 다들 눈앞에 활자가 놓이자 하던 것을 멈추고 그것을 읽기 바빴다.

“바다라. 흠.”

“지금 꽤 넓은 면적이 얼었지요. 그게 어는 모습을 눈으로 봤어야 했는데! 그만한 바다를 얼리려면 어마어마한 힘을 들여야 하니까용. 역시 전설경이라 할지.”

“난 바다를 살펴보고 싶은데 말이오. 그 넓은 면적이 얼었다면 분명 해류에도 변화가 생겼을 거요. 그렇지 않소, 호크송 박사?”

“그렇겠죠, 제리. 하지만 그걸 만든 사람이 전설경이라는 걸 생각하면, 의외로 해류에는 영향이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학술회의가 끝나면 북쪽 해안가에 들르는 건 어떻소? 생각해 보니 그 부근에 종말의 흔적 같은 게 있다고도 들은 것 같소만.”

“제랄드,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생각을!”

키리에는 옆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으레 교수들이 그렇듯, 여러 가지 잡다한 이야기 끝에 원래의 주제로 되돌아왔다.

“역시 서쪽 끝으로 가시는 수밖에 없겠지요?”

「서쪽 끝?」

포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 서쪽의 ‘리브라’라는 마을에 우수한 마법사가 있다고 해요. 근방에서는 매우 유명하지요.”

키리에가 고개를 들었다. 들은 기억이 있다. 그녀의 아버지가 있지도 않은 애를 지우라 마라 할 때 언급한 적이 있었다.

“이능은 이능으로 받아야지, 암.”

시워드 박사가 팔짱을 끼고서 순순히 수긍하는 걸 보면 괜찮은 계획인 모양이었다.

그때, 호크송 박사가 점잖게 헛기침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가 있지 않나요?”

“문제요?”

“올드시우다드와 포트듀케인의 사람들이 뷰캐넌 님을 찾고 있잖아요. 그것도 꽤 열심히.”

키리에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자 온몸의 근육이 수축하는 느낌이었다.

“두 가문은 완전히 전설경 쪽으로 돌아섰다고 해도 되겠던데요.”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소. 뷰캐넌과 올드시우다드, 포트듀케인이 관계가 그렇게까지 나빴던가?”

키리에가 음울한 눈으로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힘을 준 탓에 가장자리가 구겨져 있었다.

「그런 게 아니야.」

세 사람의 시선이 키리에의 펜글씨로 향했다.

「그게 아니라, 날 수도에서 탈출시키느라 두 가문의 후계자가 죽어서 그렇네.」

세 박사의 얼굴에 놀람이 스쳤다. 키리에는 그들이 자신의 말에 놀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워드 박사가 뚱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소립니까? 마리아 올드시우다드와 포트듀케인의 투자 왕이라면 궁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뭐?’

키리에의 고개가 들렸다. 시워드 박사는 키리에를 보며 혀를 찼고, 호크송 박사가 대신 입을 열었다.

“거리가 거리인지라 무슨 일인지 사정은 정확히 몰라요. 하지만, 두 후계자라면 왕궁에 기거하고 있다고 하네요. 최신 정보니까, 아마도…….”

「살아 있다고?」

마음이 급해서 알아보기도 힘든 글씨체가 나왔다. 포 박사가 안쓰러운 눈으로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그럴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두 세도가의 후계자가 동시에 죽었다면, 나라가 이렇게 조용했을 리 없으니까요.”

키리에의 손이 펜을 꽉 쥐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마음이 북받쳤다.

살아 있어.

살아 있다.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감정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세 박사, 심지어 시워드 박사마저도 그 모습을 슬쩍 외면해 주었다.

그때, 포 박사가 통통한 애벌레 같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럼 여러분, 이건 어떨까용?”

그의 목소리는 분위기를 단숨에 바꿔 버릴 만큼 밝았다.

“우리는 어차피 곧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에서 열리는 학술회의에 참여하지요. 그러니 그때 아가씨께서 저희와 동행하시는 건?”

바로 시워드 박사가 격노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포 박사! 지금 이 일이 애들 장난으로 보이오? 동행이라니!”

하지만 포 박사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제랄드. 하트우드 박사님의 따님이에요.”

“하지만 하트우드 박사 본인은 아니지! 아니, 설령 그녀 본인이었어도 터무니없는 일이오!”

그때 상황을 관조하던 호크송 박사가 점잖게 손을 들었다.

“제리, 일단 들어 보는 게 어떨까요?”

“호크송 박사!”

“계속해 봐요, 살라미시.”

“고마워요, 마가렛. 저는 솔직히 이보다 더 안전한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성의 전당에는 절대 정치 세력이 개입해서는 안 되오! 이렇게 받아 주고 있는 것조차 위험한데, 동행?”

시워드 박사가 노호를 내질렀다.

“이 일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정녕 예상하지 못한단 말이오? 상대가 무려 전설경이란 말이오! 당신도 학자라면 그가 어느 정도의 힘을 지녔는지 알지 않소!”

“하트우드 박사님은 그 전설경이 자신의 영역, 즉 저희에게는 손대지 않으리라고 확신하고 계셨지요. 전 그녀의 판단을 믿습니다. 게다가, 학술회의의 분위기를 아시지요? 마지막 날이라면 거리도 시끄러울 테니 분명…….”

“포 박사!”

포 박사는 심술이 났는지 조금 새침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정 반대하고 싶으시다면, 직접 하트우드 박사님께 편지를 쓰시지요.”

그 순간 시워드 박사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는 고장 난 인형처럼 턱을 움찔거리다, 기세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그, 그럴 것까진…….”

“하트우드 박사님은 제랄드의 편지를 매우 좋아하실 거예용.”

“그, 글쎄? 나는, 별로…….”

“좋아하실 거예용.”

“강조하지 마시오!”

“제랄드의 멍청이 지수가 지금 몇 점이었죵?”

“그만해!”

하지만 제냐 하트우드의 이름이 나오자 시워드 박사는 반박의 의지를 잃은 듯했고, 호크송 박사는 애초에 끼어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좌중을 둘러본 포 박사가 두 손을 앙증맞게 오므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럼 아가씨와 프로노이아로 간 다음, 살짝 빠져서 리브라로 이동하는 것으로…… ‘만장일치’군용!”

[둄2 절갠 교환재공타싸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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