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그레이 뷰캐넌 (12/33)

12. 그레이 뷰캐넌

그레이 뷰캐넌은 일약 영웅이 되었다. 마을을 위해 ‘자기 여자’를 바치겠다는 그의 진심은 모두를 감동시켰다.

우리의 구세주, 그레이 뷰캐넌! 그가 바다를 녹여 줄 거야!

그레이는 키리에의 머리카락 색을 바꾸기 위해 포트듀케인 상회에서 만든 마석을 몇 개 가져다주며 말했다.

“난 홍당무색이 좋더라. 그 색으로 해.”

키리에는 평범한 갈색 머리를 택했다.

그레이를 따라온 시종 중에서는 키리에의 얼굴을 아는 자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옷 사이에 천 뭉치를 끼워 체형을 바꾸고, 얼굴은 천으로 가렸다.

사람들은 그녀가 마지막 시간을 조용히 보내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그녀에게 말 걸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선은 따라붙었기에, 키리에는 마을 축제를 여는 시간에야 밖에 나올 수 있었다.

“어디 가십니까?”

그레이가 감시용으로 심어 놓은 청년이 바로 말을 걸었다. 낯선 이의 시선에 키리에가 잠시 주춤했다. 그녀는 떨리기 시작한 손 대신 턱짓으로 바다를 가리켰다.

“바다에 가시려고요?”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인 뒤, 걸음을 옮겼다.

“어, 어? 잠시만요!”

청년이 쫓아왔지만 키리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날 때부터 남을 뒤에 달고 다니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항구에 다가가자 절경이 펼쳐졌다. 푸르러야 할 바다 위에 흰 얼음이 깔려 있었고, 바닥이 깨진 배들이 그 위에 얹혀 비스듬히 서 있었다. 그 위로는 점차 저물어 가는 하늘이었다.

진풍경이었으나 키리에는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키리에가 얼음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그 위로 내려섰다.

“조심하십시오!”

청년이 부랴부랴 달려왔다. 잠시 얼음에 발을 굴러본 키리에가 주머니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얼음 두께는 어느 정도지?」

종이를 본 청년이 대답했다.

“사람이 걸어도 깨지지 않을 정도는 됩니다. 하지만 넘어져서 다치실 수도 있으니까 돌아가시죠.”

청년은 불안한 표정이었다. 키리에가 행여나 불의의 사고로 죽어 버릴까 봐 걱정인 모양이었다.

「어디까지 깔렸는지 아나?」

“……아마 44,000큐빗 정도요?”

「두께는 일정한가?」

“대부분은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청년이 질문의 의도를 몰라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제물을 바다에 바치는 의식은 그럼 어디에서 하지? 얼음을 뚫어서?」

“근처에 사람들이 노력해서 얼음을 깨뜨린 곳이 있어요.”

「바다로 나가지는 않나?」

청년이 멈칫한 뒤, 머리를 긁었다.

“44,000큐빗은 좀 멀어서…….”

키리에가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칼바람이 누군가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최대한 서쪽으로 가서, 배를 타세요. 대륙을 떠나야 해요.’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인지, 성공한대도 그 이후는 어떻게 될지는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그들의 의지를 따르면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이 나라를 떠나서, 바다를 건너, 북쪽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아무 의미 없을지도 모르지만, 편지를 쓸 것이다.

나는 잘 있단다. 너희도 행복하렴.

그러면 그 뒤엔…….

‘죽어 버려요, 누나.’

키리에가 멈칫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바다에서 등을 돌렸다.

펜이 단호하게 움직였다.

「그레이 뷰캐넌을 불러 줘.」

***

키리에가 숙소로 돌아가고 얼마 안 있어서, 한창 축제를 즐기고 있던 그레이가 불려 나왔다.

“대체 왜 오라 가라 하는 거야? 한창 재밌을 때였는데.”

그레이가 짜증스럽게 말하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술을 마셨는지 얼굴이 붉었다.

「조건을 변경하고 싶어.」

“무슨 조건?”

「마차는 필요 없어. 대신 다른 걸 원해.」

“다른 거?”

「바다를 건너갈 거야.」

그레이가 잠시 멀뚱멀뚱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너 돌았니?”

그가 대화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목소리랑 같이 머리도 잃어버렸냐? 잠이나 자라.”

그레이가 그렇게 나오리란 걸 키리에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미 너무나 지친 상태였지만, 그녀는 안네마리와 라우라, 마리아를 위해 아주 잠시만 ‘키리에 뷰캐넌’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산 제물 의식은 근처에서 한다지? 난 원양으로 갈 거야. 사람을 시켜 얼음 썰매를 만들고, 얼음이 끝나는 곳에 미리 배와 사람을 준비시켜.」

그레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너 북대륙과 트레베레움 사이의 해류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줄 알아?”

「라우라 포트튜케인이 새 항로를 뚫었어. 포트듀케인에서 그 정보도 알아 와 줘.」

“하! 여기서 제일 가까운 포트듀케인 상회 지점은…….”

「클라시코지. 클라시코가 포트듀케인의 새 거점이 됐어.」

그레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외국에 오래 나가 있던 탓에 국내 정세에 어두웠다.

“너 지금 나한테 사기 치냐? 클라시코는 호국경의 영토고, 그가 외부와의 교류를 싫어한다는 건 이 나라의 누-구-나 알아.”

「호국경이 폐쇄 정책을 철폐했어.」

“뭐?”

「포트듀케인 상회로 가서 거래해.」

“그 사람이 무슨 이득이 있어서 항로 정보를 줘?”

그레이가 가당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는 호국경의 영토가 5년 뒤 키리에에게 넘어올 예정이며, 전설경의 영토는 이미 그렇게 됐다는 것을 모른다.

나타니엘은 지방에 키리에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꺼렸다. 하지만 뷰캐넌 가문이 국왕보다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지금 뷰캐넌의 이름값이라면 충분해.」

“그렇다고 해도 내가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널 그렇게 성심성의껏 도와야 하는데?”

키리에가 무표정으로 펜을 휘갈겨 썼다.

「돈이지.」

“…….”

잠깐이지만, 키리에는 그레이의 눈이 번득이는 것을 보았다.

“……네가 무슨 돈이 있는데? 다 버리고 나온 거 아니냐?”

떠보듯 묻는 그의 질문 역시 키리에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그녀는 로르 레쇼의 무심한 얼굴을 떠올렸다. 아마 레쇼는 아무 말 없이 돈을 내어 줄 것이다.

「방법이 있어. 내 머리카락을 잘라 줄 테니 ‘누군가’에게 가져가. 그럼 그자가 돈을 줄 거야.」

“나더러 그걸 믿으라고?”

「안 믿으면? 뷰캐넌의 실권은 아버지에게 있어. 아버지 성격상 죽기 전까지는 네게 작위를 물려주지 않을 테고, 넌 또다시 아버지와 부딪히겠지. 그걸 반복하려고?」

“그건 내 사정이야. 그게 내가 널 믿을 근거가 되진 못해, 키리에 뷰캐넌.”

「그럼 이제 네가 생각해 볼 차례네. 내가 누구였는지. 내게 그 정도 능력이 없을 것 같은지.」

키리에가 물끄러미 그레이를 응시했다.

그동안 키리에는 자신이 하는 일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공작가의 모든 가내 대소사와 대외 외교를 착실히 해냈다.

키리에는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그 책임을 내던진 적이 없었고, 그건 어쨌든 가족인 그레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키리에의 고요하고 차가운 눈을 마주한 그레이가 입을 내밀면서 머리를 긁었다.

“……그렇진 않겠지. 그리고 오빠라고 해라.”

창밖에서 술병을 들고 노래를 부르는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레이가 눈을 깜빡였다. 그가 어색하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돈은 얼마나 주는데?”

「아마 네가 원하는 만큼.」

“그런데 너, 내가 돈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냐?”

「어차피 네가 돌아온 것도 돈 때문이잖아?」

그레이의 얼굴이 냉정해졌다. 당황할수록 더 냉정하고 오만한 표정을 짓는 것은 뷰캐넌의 특징이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네가 고작 아버지가 불렀다는 이유로 돌아왔을 리 없지. 돈이 떨어진 거지?」

“나는-.”

「늘 그렇듯이, 호인인 척 여기저기 주머니를 흘리고 다녔겠지. 하지만 넌 그걸 회수할 만큼의 수완은 없고-」

그 순간, 그레이의 손이 키리에의 뺨을 우악스럽게 쥐었다. 그는 키리에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은 채 그대로 그녀를 밀쳤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키리에는 뒤통수를 벽에 박았다.

그녀는 그 순간에, 까닭 모르게 나타니엘을 떠올렸다.

힘으로 따지자면 그는 당연히 그레이보다 위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나타니엘은 단 한 번도 이렇게 우악스럽게 키리에를 대한 적이 없었다. 아니, 그가 먼저 접촉해 오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그의 손은 늘 정면에서 느리게 다가왔다. 피할지 받아들일지를 충분히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그건 역시…….’

“넌 정말 어릴 때랑 똑같구나, 여동생아? 하하.”

그레이가 키리에의 상념을 깨웠다. 그는 활짝 웃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짐승은 때리면 말이라도 듣는다는데, 넌 아버지한테든 나한테든 항상 굽히는 법을 몰랐지. 뭘 먹어서 이렇게 간이 부었지?”

뺨을 잡은 그레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키리에는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고작 그레이를 두려워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고통과 슬픔이 있었다.

그녀는 그저 이 모든 게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마주한 두 쌍의 보라색 눈 중, 떨린 것은 그레이의 눈이었다. 그는 자신이 화내고 있었다는 것조차 잊은 사람처럼 당황해 손을 뗐다.

“너, 얼굴이 무슨…….”

그레이의 얼굴이 봐선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일그러졌다.

“키리에, 너 설마…….”

“…….”

“죽으려고 그러냐?”

키리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살아 주세요.’

그녀는 살 것이다. 그게 그들의 뜻이니까.

그레이가 거미줄에 걸린 나비 사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이마를 찡그렸다. 그러고는 뭔가를 횡설수설하더니, 알겠다고 중얼거린 뒤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포트듀케인 상회의 클라시코 지부 지점장 닐 베이커가 만난 가장 높은 사람은 지금까지 포트듀케인뿐이었다. 포트듀케인 후작가의 천방지축이자 포트듀케인 상회를 일약 최고의 해운 업체로 만든 전설의 투자 왕 말이다.

그는 이번 생에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을 만날 일이 생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누구라고?”

“뷰캐넌의 후계자요!”

밖에서 손님 응대를 맡고 있어야 할 로이가 답답하다는 듯이 외쳤다.

“뷰캐넌의 후계자?”

닐은 어렴풋이 수도에서 포트듀케인 아가씨 옆에 있던 여자를 기억해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 귀족이오, 하고 말하는 것 같은 찬 인상의 여자였다.

“분명 백작가 딸내미였는데?”

로이가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아, 공작가 됐잖아요, 이번에! 그리고 그 위로 아들 하나 있었고요! 그 아들이라니까요?!”

“아들이 왔다고? 바다가 얼었는데 무슨 소리야? 그 아들은 분명 외국에 나가 있…….”

“그 아들이 여기 있어서 말이야.”

누군가 로이의 뒤에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긴 관계자 외 출입 금지요!”

“에이, 좀 실례할게. 내 얘기를 하고 있는데 모른 척하기도 너무 뻘쭘하더라고.”

방에 들어온 사내가 해맑게 웃었다. 나이가 찬 청년인데도 금빛 고수머리는 사랑스러웠고, 보랏빛 눈동자에는 악동 같은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잠깐…… 보라색 눈? 설마 정말…….”

“음. 보라색은 뷰캐넌의 상징이지.”

닐이 입을 떡 벌렸다가, 급하게 허리를 숙였다.

“몰라뵈었습니다! 포트듀케인 상회의 클라시코 지부장 닐 베이커라고 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소리소문없이 와서 몰랐을 거야. 아, 그래도 이건 확실히 해야지.”

사내가 품 안에서 뷰캐넌의 인장을 꺼내 보여 주었다.

“큼큼, 아, 이거 오랜만에 하네. 그레이 뷰캐넌이야.”

그레이가 명랑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닐이 다시 턱을 덜걱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세상에, 정말 제가 미처…….”

“아, 괜찮아. 그보다 흠, 자리가…….”

그는 뭔가 묻고 싶은 표정이었고, 닐이 잽싸게 로이의 궁둥이를 걷어찼다.

“가만히 있지 말고 커피라도 내와! 사람 못 오게 하고!”

그레이가 능숙하게 상석에 앉았다.

둘은 로이가 커피를 내올 때까지 이번 봄이 게으르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더는 들어올 사람이 없다는 묵시적 확인 이후에야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은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아니, 바다가 언 지 그래도 꽤 됐는데 어떻게 이렇게…….”

“딱 내가 도착하자마자 얼었더라고! 숙소는 여기는 아니고, 옆에 레드로우트야.”

“예? 거긴 좀 낙후된…….”

“지내기엔 나쁘지 않아. 사람들도 활기차고!”

그레이가 씩 웃었다. 닐이 잠자코 커피를 마셨다. 뷰캐넌의 장자는 사람을 좋아해서 수도를 뛰쳐나갔다던데, 그 말이 사실이었나보다.

“그럼 오늘은 어쩐 일로 저희 상회에 들러 주셨습니까?”

“뭔가 부탁할 게 있었는데, 혹시 바쁜가? 어수선해 보이던데.”

“이거 안 좋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이고. 곧 클레멘츠 자작님의 생신 연회가 있어 그렇습니다.”

“오. 그래?”

그레이가 심드렁하게 웃었다.

“그래서 용건은……?”

“아, 그게 말이지. 포트듀케인에서 이번에 북대륙으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했다는 게 사실이야?”

그런 이야기라면 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닐이 콧김을 내뿜으며 자랑스럽게 가슴을 내밀었다.

“예! 전부 저희 포트듀케인 아가씨 덕이지요.”

“라우라였나? 내 동생의 친구였지.”

“예. 아가씨 수완이 워낙 좋으셔서 말입니다. 포트듀케인의 자랑이지요.”

‘수완’ 어쩌고 하는 부분에서 그레이의 눈빛에 잠깐 불편한 기색이 스친 듯했으나, 닐은 그 느낌을 무시했다. 그레이가 금세 선량하고 쾌활한 미소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렇군, 그래. 흠. 하지만 바다가 얼어서 항해는 못 하고 있고?”

“예, 그렇습니다.”

“왜 얼었는지는 모르는 건가?”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닐이 그레이의 안색을 살피며 말끝을 늘렸다. 그레이는 귀족으로서 아랫사람의 이런 반응이 뭔지 잘 알았다. 주로 뜬소문, 가십 등, 말하면 혼날지도 모르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하는 행위였다.

“괜찮으니까 말해 봐! 내가 외국에 너무 오래 있어서 국내 소식은 좀 어둡거든.”

“하하, 그러셨죠. 그게 말입니다, 세간에는 ‘종말’이 다시 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파다합니다.”

“종말?”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그레이가 되물었다.

“예. 시조와 전설경, 호국경이 물리친 그 종말 말입니다. 사람들은 전설경이 되살아나고, 호국경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이유도 종말의 때가 다가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

그레이의 성의 없는 반응은 분명 믿지 않는 사람의 태도였다. 닐은 괜한 말을 꺼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조금 더 강하게 말했다.

“뷰캐넌 님께서도 전설경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으셨겠지요?”

“그 이야긴 물론 들었지!”

그레이의 눈이 기대감으로 빛났다. 풋풋한 소년 같은 반응이었다.

닐은 그 마음을 이해하고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전설경은 이 나라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전설이었으니까.

“항간에는 바다를 얼린 것이 전설경이고, 그건 대륙 내부에서 곧 태어날 종말을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진짤까?”

“모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정보도 하나 있는데, 또 이게 아주 귀한 정보죠…….”

닐이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며 커피잔을 들었다. 그레이는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서 금화 몇 개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궁금한데? 그 귀한 정보라는 거.”

“하하! 역시 도련님이셔.”

닐이 최대한 성급한 티를 내지 않고 금화를 챙겼다.

“그게 말입니다. 전설경과 호국경은 있는데, 시조가 없지 않습니까? 셋은 하나인데 말입니다.”

“그렇지.”

“그 시조의 환생이 대륙 어딘가에 있고, 전설경이 지금 그를 찾고 있다고 합니다!”

닐이 그레이의 호응을 바라듯 열성적으로 말했다.

“전설경이?”

“예! 이건 정말 귀한 정보입니다. 요즘 수도는 이상할 정도로 경계가 삼엄하거든요. 하다못해 신문 쪼가리 하나 밖으로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래?”

그레이의 얼굴에서 점차 표정이 사라지고, 냉정한 뷰캐넌의 초상이 떠올랐다. 닐이 저도 모르게 움찔해 입을 다물 정도였다.

그레이는 꽤 오래 뭔가를 생각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단 말이지…….”

“……도련님? 제가 뭔가 잘못 말하기라도……?”

“응? 아니. 오히려 아주 도움이 되었어.”

닐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입니다. 저, 그래서 오늘은 어떤 연유로 방문하셨습니까?”

그레이가 싱긋 웃었다. 전성기의 청년다운 당당하고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그러나 닐은 어째서인지 그의 모습에서, 사자보단 승냥이나 하이에나를 떠올렸다.

“아니. 뭔가 물어보려 했는데, 그건 이제 필요 없을 것 같네.”

***

그레이가 레드로우트의 숙소로 돌아왔다. 그는 본디 걷는 것을 좋아했지만, 이번엔 숙소 앞까지 마차를 이용했다.

그레이는 적당히 정리된 생각을 머릿속 한쪽에 수납하고, 계단을 올랐다.

방 안에는 그의 여동생 키리에 뷰캐넌이 있었다. 키리에를 발견한 그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레이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있는 듯했다.

키리에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숨 쉬는 기색도 없었다. 흰 베일을 머리에 쓴 채 음울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은, 눈 뜬 주검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마치 인생의 모든 희로애락을 한꺼번에 겪고 재가 된 사람 같았다.

그레이는 여동생에게서 처음 받는 섬뜩한 느낌에 잠시 불편한 마음이 들었으나,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인기척을 냈다.

“뭐하냐?”

키리에가 고개를 돌렸다. 아무 표정도, 감정도 없던 얼굴에 냉엄한 기품이 떠올랐다.

그레이가 비죽 웃음을 흘렸다. 과연, 징그러울 정도로 아버지의 말을 잘 들었던 여동생다웠다.

사실, 그레이는 알고 있었다. 세자르가 키리에를 바라보며 아들이 아닌 걸 아쉬워했다는 것을. 키리에가 아들이기만 했다면, 바로 뷰캐넌을 키리에에게 물려주었으리란 것을.

‘그래 봐야 후계자는 나야.’

그레이가 부러 여유로운 척 키리에의 손에 들린 종이와 펜으로 시선을 옮겼다.

“청승맞게.”

「일은?」

“아-잘됐어. 잘됐지.”

그레이가 방긋 웃었다. 키리에가 다시 펜을 움직였다.

「항로와 항해사는?」

“사람도 구했지. 배도 구했고.”

그레이가 다가가 책상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의식이 시작되면 넌 선수에서 바다로 몸을 던지고, 그럼 미리 아래쪽에서 대기 중이던 사람들이 널 바꿔치기할 거야.”

키리에가 계속하라는 듯이 턱을 까딱였다.

“이후 너는 길 안내인 한 명과 함께 썰매를 타고 얼음 끝으로 갈 거고, 미리 준비해 놓은 배를 타고 북대륙으로. 됐냐?”

그레이의 말을 전부 새겨들은 키리에가 조용히 미소지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공허하고 후련한 미소였다.

「고마워.」

그레이가 시선을 피했다.

“너도 약속한 건 지켜라.”

「응.」

“네 억지 때문에 오늘 나가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글쎄, 또 며칠 뒤에 클레멘츠 자작이 생일이라더라고?”

「클라시코 영주구나.」

키리에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펜을 움직였다.

「자작은 미식가야. 선물할 여유가 된다면 귀한 요리 재료 같은 걸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

“오. 안 그래도 괜찮은 걸 좀 가져왔는데. 그런데 넌 그걸 어떻게 아냐?”

「그런 일을 처리하는 게 내 책임이었으니까.」

“흠.”

그레이가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는 걸쇠를 열며, 드디어 기다렸던 말을 했다.

“자작의 생일날, 수도에서 높은 사람이 온다더라. 혹시 짐작 가는 사람 있냐?”

「클레멘츠 자작과 친한 가문이라면-」

“뭘 찾는다던데.”

막힘없이 움직이던 펜이 멈췄다. 그 순간을 기다렸던 그레이의 보라색 눈이 핥듯이 키리에의 얼굴을 살폈다.

키리에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은 냉정을 연기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입이 벌어졌다. 날 송장처럼 퍼렇게 질린 얼굴에서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가 묻어 나왔다.

그레이가 원하던 반응이었다. 그는 자신의 거짓말이 제대로 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작스러운 공작가 승격, 난데없는 아버지의 부름, 출처를 알 수 없는 키리에의 돈, 일탈이라곤 모르던 여동생의 가출.

모든 게 하나로 이어졌다.

‘전설경이 찾는 사람.’

그는 튀어나오려는 폭소를 삼키기 위해 등을 돌렸다. 창문을 활짝 열자 찬 겨울바람이 들이쳤지만, 하나도 춥지 않았다.

그레이가 상냥하게 말했다.

“뭐, 너랑은 관계없는 이야기니까 걱정 마. 아무 일 없을 거니까. 아무 일도 말이야…….”

의식의 날이 되었다.

아무리 둘러대도 근본적으로 인신 공양이니만큼, 의식은 밤에 시작되었다.

“기분 나쁜 날씨야…….”

누군가 중얼거렸다.

하늘의 끝에서 끝까지 지저분하게 뒤엉킨 구름은 밤의 어둠으로도 덮이지 않았다. 영하의 기온에도 눈은 내리지 않고, 칼바람만이 불고 있었다.

먼바다에서 천둥이 울린 것 같기도 했다.

구름에 가린 달이 하늘 가장 높은 곳에 걸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들이 방으로 몰려왔다.

“준비되셨어요?”

흰 베일을 쓴 채 얼굴과 몸을 꽁꽁 가린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면 다른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하시면 돼요.”

“좀 시끄러울 수도 있으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놓으시고요.”

“배가 고프진 않으시고요?”

상냥한 말이었지만, 그들은 키리에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키리에가 그녀들의 얼굴을 살폈다.

딱 결혼 안 한 딸이 있을 법한 나이의 여자들. 당신들의 딸을 대신해 희생하겠다는 사람을 마주 보지 못하는 마음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키리에는 잠자코 여자들의 시중을 받으며 화려한 물고기 무늬의 겹옷을 껴입었다.

문밖에는 그레이가 횃불을 들고 서 있었다. 그가 키리에를 보자마자 한마디 했다.

“그 베일 좀 벗으면 안 되냐?”

키리에가 미리 적어 놓은 종이를 보여 주었다.

「중요한 물건이야. 절대 벗지 않을 거니까, 억지로 벗기려 하지 마.」

“그러냐?”

그레이가 시큰둥하게 대답하고 고개를 돌렸다.

“가마 오라고 해.”

그는 마치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사람 같았다. 그러면서도 무리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것을 보면, 그의 친화력은 확실히 무시 못 할 것이었다.

곧 장정 네 명이 사방을 천으로 가린 가마를 지고 다가왔다.

“너, 못 보는 사이에 광장 공포증이라도 생긴 모양이더라?”

“…….”

“타.”

키리에가 잠자코 마차에 올랐다. 가마가 출발했다.

거리가 인산인해였다. 레드로우트의 모든 사람이 밖에 나와 있는 것 같았다. 가마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환호를 시작했다.

주변은 어두웠고, 그레이가 목청을 높여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으며, 정신없이 흔들리는 횃불들이 시야를 교란했다.

가마는 횃불을 든 사람들이 만든 길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도착한 곳은 레드로우트 해변의 피리노 곶이었다. 툭 튀어나온 곶 끝은 절벽이었고, 노골적으로 ‘여기서 뛰어내리셔도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 나무 단상이 지어져 있었다.

다행히 단상과 사람들 사이에는 긴 천이 걸렸다. 그녀는 그림자만 보일 것이다.

육풍 탓에 단상 위에 선 키리에의 머리카락이 밤바다를 향해 휘날렸다. 앞은 바다, 뒤는 광기까지 엿보이는 군중.

‘하지만 이번 일만 끝나면 떠날 수 있어.’

키리에가 물끄러미 수평선 끝까지 이어진 얼음을 바라볼 때, 천을 휙 걷고 그레이가 다가왔다.

“의식 때문에 일부러 얼음을 깼어. 어디로 떨어질지 몰라서 최대한 넓게. 뷰캐넌의 하인들이 아래에 대기 중이니까 뛰어내리면 알아서 할 거야.”

그레이는 그렇게 말한 뒤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키리에가 살짝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젤리처럼 출렁이는 바다 위에 작은 쪽배가 떠 있었다.

그 뒤는 별 게 아니었다. 그레이가 슬픈 척 소리를 질러댔고, 노인의 목소리가 주문 같은 걸 읊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우리를 종말에서 구원하소서!”

“구원하소서!”

집단의 광기가 소리의 파도가 되어 키리에의 등을 덮쳤다.

망설임은 없었다. 키리에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가벼운 마음으로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 오색의 옷자락이 펄럭이고, 그 순간 키리에의 모습을 가리던 천이 떨어져 나갔다.

그다음은 순식간이었다.

아래쪽에서 대기 중이던 마법사가 키리에의 몸을 띄워 절벽 아래의 파인 곳으로 숨겼고, 대신 배 안에서 사람들이 키리에가 입은 것과 같은 옷을 씌운 무언가를 바다로 던졌다.

풍덩 소리가 나고, 절벽 위의 사람들이 구원을 확실히 하기 위해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쪽배 역시 순식간에 절벽 아래 그늘진 곳으로 피해, 위에서 보이는 건 바다에 흩어지는 천 자락뿐이었다.

키리에는 한참 뒤에야 아래의 쪽배로 내려앉았다. 멀미 탓에 조금 비틀거리는 그녀를 보며 남자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맞나?”

“맞겠지.”

“준비해.”

남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뭘 준비하란 거지?’

키리에가 의아하게 생각하자마자, 두건이 그녀의 머리에 씌워졌다.

“……!”

뒤늦게 버둥거렸으나 소용없었다. 남자들이 그녀를 제압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 들렸다.

“마차는?”

“곶 뒤쪽이야.”

“도련님 명령이니 특별히 조용히 움직이도록.”

“반항이 너무 심한데. 좀 때려도 되나?”

“이 하얀 건…….”

“그건 내버려 두라셨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 키리에의 뒷목에 수도를 날렸다.

키리에의 정신이 아득한 어둠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

클라시코. 클레멘츠 자작가의 저택.

저택은 오스냇 클레멘츠 자작의 생일 연회로 부산스러웠다.

클레멘츠 자작은 정원으로 들어오는 분주한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흡족한 얼굴로 거울을 보았다.

그동안 클라시코는 별 볼 일 없는 도시였다.

그러나 호국경이 항구를 개방하고 포트듀케인의 자본이 들어오자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의 야심이 발휘될 때가 온 것이다…….

그가 단꿈에 빠져 있을 때였다. 급하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자작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시종장이었다. 행복한 망상을 방해받은 자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나오기 전까진 부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오셨습니다만, 그분이…….”

“어중이떠중이는 돌려보내. 이젠 예전의 클레멘츠가 아니란 말이지.”

파리 쫓듯 손을 내젓는 자작을 향해 시종장이 황급히 말했다.

“그분이 그레이 뷰캐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습니다.”

거울을 보며 목의 타이를 고치던 클레멘츠 자작의 손이 멈췄다.

“뷰캐넌이라고!”

그가 소리를 내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뷰캐넌 백작가, 아니, 공작가라면 요즘 최고 주가의 세도가다. 게다가 5년 뒤에는 이 땅도 뷰캐넌의 땅이 된다.

“따로 방으로 안내해드려!”

클레멘츠 자작이 급하게 명령하고 걸음을 옮겼다.

얼마 안 있어 신뢰를 주는 인상에 말끔한 차림의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금발에 보라색 눈이었다. 클레멘츠 자작의 눈이 번쩍 뜨였다.

“분명 얼굴이 기억나는군요! 뷰캐넌의…….”

“그레이입니다. 초대장 없이 불쑥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 자작님.”

“하하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히려 먼저 초대장을 드리지 못한 제가 죄송하다 해야겠지요!”

청년이 해맑게 웃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참 기쁩니다!”

클레멘츠 자작도 신분 상승의 동아줄을 발견한 사람처럼 활짝 웃었다.

“오래 외국에 나가 계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돌아오신 겁니까?”

“예. 다행히 바다가 얼기 전에 돌아왔습니다.”

“하하. 뷰캐넌 공작님의 뜻일 테지요? 역시 뷰캐넌 공작님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군요.”

노골적인 아첨에도 그레이는 마냥 선량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야 늘 여섯 수 앞을 보는 분이시죠.”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이니 푹 쉬다 가시길 바랍니다. 북대륙의 이야기가 아주 궁금하군요.”

“그래도 될까요? 이렇게 자비로운 분을 영주로 모시고 있으니 클라시코는 남부러울 게 없겠습니다.”

“하하하! 늙은이 얼굴에 아주 금칠을 해 주십니다!”

적당한 겸양과 사교의 표현이 오갔다. 마침내 그레이가 운을 띄웠다.

“자작님. 혹시 이 그레이 뷰캐넌이 자작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클레멘츠 자작이 의자 손잡이를 쥐고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얼마든지요!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일순 그레이의 보라색 눈이 음습하게 빛났다. 그러나 클레멘츠 자작은 착각이라 생각했다. 이토록 호감 가는 모양새의 청년이라면, 사전을 펼친대도 ‘음습함’이란 단어가 알아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도망칠 게 분명했다.

“지하 감옥 한 칸을 빌릴 수 있을까요? 북대륙에서 죄인 하나를 수송해 왔는데, 감시할 곳이 마땅치 않아 말이죠!”

“지하 감옥 말입니까?”

“예.”

그레이가 단답했다. 잠시 의아함을 느끼던 클레멘츠 자작은 이내 ‘내 일도 아닌데 뭐.’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빌려드리죠.”

“감사합니다.”

그레이가 씩 웃었다.

***

키리에는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이건, 북대륙에서나 나는 귀한 향신료 아닙니까!’

‘미식을 하신다 들었습니다. 이 그레이 뷰캐넌의 약소한 성의입니다.’

클레멘츠 자작은 감동으로 몸을 떨기까지 했다. 이쯤 되면 특별 대접을 받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역시 음식은 난 곳에서 먹는 게 낫다니까.”

연회장에 선 그레이가 중얼거렸다.

그는 막 키리에를 지하 감옥에 잘 가둬 놓았단 연락을 받았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고, 굳이 그걸 숨기지 않고 터뜨렸다.

자작의 생일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준수하게 생긴 청년이 쾌활하게 웃는 모습을 보며 덩달아 미소지을 뿐 누구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건, 그레이는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일을 계산하느라 바빴다.

‘걔가 전설경에게 뭔가 잘못한 게 분명해.’

그레이의 보라색 눈이 가늘어졌다.

‘전설경에게 아버지가 열심히 아부를 떨어서 공작가가 되었고. 거기서 자존심이 전부인 걔는 굽힐 줄을 몰라서 사고를 쳤고. 그래서 전설경이 화가 났고. 도망친 거지! 뻔해! 참 나, 누가 수완이 안 좋다고?’

그레이가 키득거렸다.

정황상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무려 ‘전설경이 예뻐해 준다는데’ 도망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므로.

‘아니면 그 베일, 비싸 보이던데. 전설경 물건을 훔치기라도 한 건가?’

그레이는 키리에가 두르고 있던 베일을 떠올렸다.

빼앗아서 먼저 전설경에게 보여 줄까 생각도 했지만, 혹시라도 남의 손을 탔다고 미움을 받으면 곤란하다.

‘뭐가 됐든 갖다 바쳐 보자. 찾고 있는 게 키리에가 아닐지도 모르니까 일단 운부터 띄운 다음에……. 잘못 짚은 거면 그냥 아버지에게 보내 버리면 되니까.’

그레이가 간단히 생각을 마무리했다.

그때, 연회의 중심에서 사람들의 축하를 받던 클레멘츠 자작이 눈에 띄었다. 시종 한 명이 급하게 다가가 그에게 귀엣말을 하고 있었다.

그레이는 눈치가 빠르다. 그는 시종의 다급한 얼굴, 자작의 반응을 보고 뭔가 ‘아주 중요하고 긴급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뭐라고!”

자작이 소리를 내질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지만, 자작은 정신이 없어 보였다.

“잠깐, 잠깐, 지금 이리로 오고 계신다고? 그게 사실이냐? 정말이냐고!”

“예, 예! 전갈을 받자마자 바로 온 것입니다! 지금 정문에서…….”

“안내는 해드렸겠지!”

시종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안내해드리려고 했는데, 반드시 주인님께 방문 허락을 받아야겠다고 하셔서…….”

“이럴 수가! 당연히 들어오시라고 해라!”

사람들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레이는 짐작이 들어맞기 직전에나 들곤 하는 벼락같은 예감에 온몸이 찌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뭐야! 설마 정말로? 정말…… 전설경이 오기라도 한 거야?’

키리에가 물에서 막 빠져나온 사람처럼 쿨럭거리며 눈을 떴다.

그녀는 자신이 엎어져 있는 곳이 돌바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손목에 수갑이 채워져 있다는 것 역시.

“아……?”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베일이었다. 다행히 베일은 제대로 덮여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베일의 여밈을 확인한 뒤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봐도 감옥이었다.

키리에가 머리를 붙잡고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도련님 명령이니 특별히 조용히 움직이도록.’

그레이의 짓이다.

키리에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복도 벽에 걸린 문장은 클레멘츠 자작가의 문장이었다. 클라시코로 이동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레이가 돈을 거절할 리 없어. 본가와 연락이 닿은 것 같지도 않았는데…….’

불안감이 키리에를 감쌌다.

그때, 감옥 복도 저편에서부터 누군가 횃불을 들고 다가왔다. 키리에가 재빨리 다시 자리에 누워 실눈을 떴다.

“일어났나?”

나타난 것은 근육질에 키가 큰 여자 시종이었다. 그레이가 북대륙으로 떠날 때 그를 따라갔던 뷰캐넌의 시종 중 한 명이다.

“아직이군.”

그녀가 함께 온 병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일어나거든 가만히 있으라 전해 주십시오. 도련님의 명령입니다.”

“알겠습니다.”

두껍게 자른 치즈처럼 늘어진 눈꺼풀을 가진 병사가 대충 대답했다.

“그런데 대체 뭔 잘못을 했길래 이렇게 가둬 놓은 겁니까?”

그가 엉거주춤하게 옥 안쪽을 횃불로 비춰 보았다.

“그냥 여자 같던데. 몸매도 별로 같았고. 예쁩니까?”

병사가 느물거렸다.

“도련님의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그리고 무슨 짓을 해도 문을 열어 주지 마십시오.”

“에헤이, 감시는 걱정하지 마시고. 그런데 거 그쪽…….”

“느베야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저를 찾아 주십시오.”

“아, 그래요. 느베야 양.”

“씨.”

두 사람 간에 정적이 흘렀다. 병사가 부러 무심히 대답했다.

“……그래요, 느베야 씨. 거 뷰캐넌에서 일하면 콩고물 좀 떨어집니까?”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뷰캐넌이 공작가가 됐잖아요. 아랫사람한테는 뭐 없나? 우리 자작님은 기껏 클라시코가 커졌는데도, 아랫사람 챙길 줄을 모르셔서…….”

느베야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병사를 한심하게 여기는 기색을 온몸으로 풍겼다.

“뷰캐넌에는 주인이 주는 식사에 불만을 품는 개는 없습니다.”

“……그렇습니까아. 네, 네.”

“하지만.”

느베야가 말을 끊었다.

“도련님께서는 혼자 경비를 서게 하는 점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녀가 키리에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저이가 많은 사람이 있으면 공황 발작을 일으키기에 부득이한 선택이었습니다. 이것은 도련님께서 전하는 위로의 마음입니다.”

느베야의 품에서 잘강거리는 소리가 나는 비단 주머니가 나왔다. 그것은 아주 부드러운 동작으로 병사의 염낭으로 흘러 들어갔다. 병사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아, 거, 도련님이 참 매너가 있는 분이네. 여긴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해 주십쇼!”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말고 가시오!”

느베야가 돌아갔다. 병사는 그녀가 감옥을 아주 나간 뒤에야 중얼거렸다.

“거 여자 떡대가 저래서야 시집이나 갈라나 몰라.”

병사가 고개를 내저으며 복도의 작은 의자에 앉았다. 그는 아주 멀리서 천둥소리가 작게 울릴 때마다 간헐적으로 욕을 내뱉긴 했어도, 졸거나 자리를 비우진 않았다.

나갈 방도를 찾지 못한 키리에가 누운 채로 숨을 죽였다.

가장 큰 문제는 수갑. 음각으로 클레멘츠의 문양이 찍혀 있는 것을 보면 열쇠는 병사가 갖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두 번째로 옥문. 역시 열쇠는 병사가 갖고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탈출로.

무엇 하나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떡하지?’

키리에가 저도 모르게 큰 숨을 내뱉자, 감시 중이던 병사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이봐. 일어난 거야?”

그때, 바깥쪽에서 축축 늘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직후 클레멘츠의 다른 병사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할 만한가?”

“워. 웬일이야?”

감시병의 신경도 자연히 그쪽으로 쏠렸다. 새로 들어온 남자는 횃불을 든 채 짝다리를 짚었다.

“배수로랑 뒷문 잘 점검하게. 폭풍이야. 뒷문은 저번에 문째로 날아간 적도 있으니…….”

“천둥소리가 들리길래 긴가민가하긴 했는데, 이 겨울에 폭풍이라고?”

“그래, 젠장. 눈은 안 오는데 왜 이리 추워? 차라리 눈이나 오면 덜 추우련만.”

키리에는 일순 차가운 손이 심장을 꽉 쥐어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눈과 겨울.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들이 떠올랐다.

병사들의 말이 이어졌다.

“저 징그러운 얼음이나 좀 깨주면 좋겠어. 포트듀케인이 깨주나 싶더니 그만두기나 하고.”

“아니면 영주님이 힘 좀 쓰시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영주님?”

감시병이 의아하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영주님이 왜 나와? 그 양반, 허구한 날 처먹기나 하지.”

“아, 그래!”

새로 들어온 병사가 무릎을 치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아래에 있어서 못 들었군? 글쎄 지금 위에 누가 와 있는 줄 아나?”

“그래 봐야 고만고만한 귀족들 아닌가?”

“들으면 깜짝 놀랄걸?”

그레이의 이야기인가 보다. 키리에가 정보를 얻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다음 순간 병사가 흐흐 웃으며 속살거렸다.

“글쎄 지금 위에…….”

***

연회장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문틈, 창문 너머, 또 어딘가의 틈새를 통해, 서늘한 바람이 사막의 모래처럼 연회장 안으로 밀려들었다.

그는 난데없이 연회장 중앙에 나타났다.

“어머?”

“왜 그러시죠?”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예?”

“저기 봐요, 저건…….”

가장 안쪽에서 허둥지둥하던 클레멘츠 자작은 묘하게 주변이 조용해졌다는 것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자작님, 저기…….”

“응?”

고개를 돌린 클레멘츠 자작의 눈이 붕어처럼 튀어나왔다. 누군가가 클레멘츠 자작의 눈이 더 튀어나오지 않게 집어넣어 줘야 할 지경이었다.

“오, 이건, 이런, 세상에, 오…….”

그레이는 자신 역시 그 정도로 놀라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정도로, 모든 신경을 남자가 잡아먹었다.

인간이 아니라는 것쯤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 얼굴이 인간일 수는 없었다. 그는 아마 신이 만들었거나, 혹은 신 자신일 것이다.

그러나 푸른 시선이 잠깐 자신에게 닿았을 때, 그레이는 저도 모르게 자기 목을 만졌다.

섬뜩했다.

그에게서는 무엇에도 발목 잡히지 않을 오연함과, 발목을 잡는 그 무엇도 베어버릴 것 같은 잔혹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연회장은 순식간에 눈을 삼천 말은 쏟아부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주변을 밝히고 있던 따스한 불빛마저, 한순간에 온도를 잃은 듯했다.

쿠르르릉…….

멀리서 울리는 천둥소리를 들으며 그레이가 침을 삼켰다. 아마 다른 모두도.

난데없이 나타난 아름다운 정복자는 말없이 주변을 살폈다. 그레이가 그 느긋한 동작에서 아주 희미한 초조함을 느낀 것은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 기적은 너무 실낱같았던 나머지, 금세 그레이의 의식에서 탈락되고 말았다.

이윽고 그가 입을 벌렸고, 사람들은 그의 첫마디를 놓칠세라 숨조차 쉬지 않았다.

[사람 하나 본 적 없니?]

창밖에서 위험한 천둥소리가 났다. 폭풍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

「느베야 멩컨?」

“그렇다.”

그레이 뷰캐넌의 최측근인 느베야가 보라색 소통석에 대고 대답했다.

그레이의 명령을 수행하고 지상으로 올라온 뒤, 그녀는 바로 뷰캐넌 본가에서 연락을 받았다.

「오랜만이군. 나 에디요.」

“오랜만이군, 에디. 연락은 왜 끊겼지? 트레베레움에 도착하자마자 연락을 했었는데.”

「수도에 일이 많아 신경 쓸 겨를이 없었소.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 넘어가지.」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랫사람이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에디도 느베야도 가볍게 그 주제를 털어 냈다.

「가주님의 특명이오.」

“특명?”

느베야가 되물었다.

「그렇소. 연보라색 긴 머리카락, 보라색 눈, 20대 초반 여성.」

잠시 침묵했던 느베야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가씨 아닌가?”

「맞네.」

소통석 너머의 에디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느베야는 그의 목소리에서 희미한 긴장감을 느꼈으나, 숙련된 시종답게 그것을 모른 척 넘겼다.

「키리에 아가씨를 발견 즉시 포박해 수도로 압송할 것. 대신 그 과정에서 절대, 절대, 절대 상처 입히지 말 것. 또한, 자진할 우려가 있으니 대우에 주의할 것.」

“‘절대’가 세 번이군.”

에디는 원래는 다섯 번이었다는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린 뒤, 말을 이었다.

「또한 이에 대해서 뷰캐넌 소속이 아닌 자에게는 비밀로 할 것.」

“끝인가?”

「더 있소. 모든 일에 아가씨를 찾는 것을 최우선으로 할 것.」

무표정하게 서 있던 느베야가 한 박자 늦게 물었다.

“도련님보다도?”

「도련님보다도.」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느베야가 문득 옥에 넣어 둔 갈색 머리 여자를 떠올렸다.

뷰캐넌의 상징색은 보라색이다. 아가씨의 머리카락은 연보라색이니 그 여자일 리 없다.

“아무튼 도련님께 보고드려야겠군.”

「아. 그러진 말라 명령하셨소. 도련님께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그런가.”

그레이를 업신여기는 말에도 느베야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녀의 주인은 정확히 따지자면 그레이가 아니라 세자르 뷰캐넌이었으니까.

「다시 한번 말해 두겠소. 절대 아가씨께 상처를 내서는 안 되오.」

에디가 좀 유별나다 느껴질 정도로 당부한 뒤 연락을 끊었다. 마력을 다한 소통석은 빛을 잃고 보라색 돌멩이로 되돌아갔다.

느베야가 소통석을 쥔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녀는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곧 폭풍이 오겠군.”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클레멘츠 자작이었다. 자작은 처음엔 비틀거리다가, 점차 빨라져 마지막엔 거의 뛰는 듯했다.

“혹시, 저, 저, 전설경 되십니까……?”

남자의 푸른 눈이 클레멘츠 자작에게 닿았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몸소 소명해야 하는 상황이 몹시 언짢은 듯 보였으나, 어쨌든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자작의 질문에 긍정했다.

“이럴 수가!”

자작의 얼굴에 환희가 번졌다.

“말로만 듣던 전설경을 직접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옵고……! 에, 또, 가문의 홍복이며……!”

[네가 영주구나.]

전설경은 칼같이 그의 말을 잘랐다. 무심한 시선이었다.

[내가 뭘 찾고 있는데. 물론 도와주겠지?]

클레멘츠 자작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급하신 거라면 지금 바로 이야기하실까요?”

[따로.]

“좋습니다, 따로! 허허, 이거 다른 분들께 죄송하군요.”

자작은 으쓱거리는 어깨를 숨기지 않으며 앞장섰다.

그레이 뷰캐넌은 그 모습을 다른 사람들처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불쑥 외쳤다.

“각하!”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자각한 그레이가 당황했다.

‘내가 전설경을 왜 불렀지?’

이유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는 벌써 자신에게서 떨어지기 시작한 전설경의 눈빛을 받아내기 위해, 다짜고짜 소리쳤다.

“저는 그레이 뷰캐넌이라고 합니다! 제게도 시간을 주시겠어요?”

그러자 놀랍게도 전설경의 발이 멈췄다. 그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뷰캐넌?]

그레이가 눈을 반짝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래 외국에 나가 있었는데, 이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네가 그 오라비구나.]

“예! 제가 그 오라비입니다. 어떤 의미의 ‘그’인지는 모르겠지만요, 하하.”

그레이가 속으로 쾌재를 울렸다. 역시 전설경은 키리에와 연관된 사람이 맞았다.

보통은 너털웃음이라도 짓게 되는 자신의 친밀한 행동에도 냉담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게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레이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장점이 준수한 외모와 친화력에 있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제 동생을 아시나 봅니다. 키리에가 각하께 신세를 졌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레이를, 전설경은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낮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넌 아비 쪽을 닮았구나.]

“제가요?”

[그래.]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이 아니라면?]

그레이가 능청스럽게 굵은 눈썹을 들썩였다.

“그럼 앞으로 ‘넌 아비를 안 닮았구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노력을 좀 해 봐야겠네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전설경의 입매에 살짝 미소가 비쳤다. 사람들이 홈홈하게 얼굴을 붉혔지만, 그레이는 전설경의 미소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한 것임을 눈치챘다.

[기다려.]

그레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예! 얼마든지 기다리겠습니다!”

클레멘츠 자작과 전설경이 다른 방으로 향한 뒤, 그레이는 기쁨을 참지 못해 크게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은 부러움의 눈길을 보냈고, 그는 더 의기양양해졌다.

‘좋았어. 이대로 그와 접촉해서 키리에를 넘기면 돼!’

키리에가 약속한 돈보다야 전설경의 환심이 장기적으로 이득이다.

그레이의 가슴이 꿈에 부풀었다.

***

“진짜? 전설경이?”

“그래! 어디 이런 비린내 나는 촌구석에 전설경이 오겠나 싶었는데, 왔다니까!”

키리에의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자신이 뭘 들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따 다 같이 보러 갈 생각이네.”

“그럼 나랑 교대해 주러 왔지? 그렇지? 그런 거지?”

“미안하네.”

“어이!”

병사들의 대화가 메아리쳐 울렸다. 키리에의 정신도 아득해졌다.

자신을 묶고, 가두고, 뱃속에 공포라는 이름의 짐승을 잉태시킨 자가 바로 여기 있다.

어떻게든 해 보려 노력해도, 결국 그는 더 앞선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꼭 그의 말처럼.

눈을 감으면, 그가 손을 내민다. 각막에 새겨진 것처럼 사라지지 않는 얼굴이 자신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가령 네가 죽어도, 너는 영원히 내 소유야.’

환청처럼 들려오는 우아한 발음의 속삭임이 불안을 부추겼다. 도망자의 조바심 속에서, 나타니엘은 현실보다 더 잔혹해지고 아름다워지고 있었다.

“아…….”

키리에가 바닥에 웅크린 채 괴로운 숨을 토해냈다.

“아윽……!”

식도가 뒤틀리는 듯했다. 수백 명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을 때의 공포가 되살아났다. 의식 저 멀리에서 병사들이 윙윙댔다.

“어우, 깜짝이야. 저기 사람이 있었나? 어이, 저거 왜 저래?”

“이런! 설마 두 명이 보는 것도 안 되는 거였어? 얼른 나가!”

“뭐?”

“나가라니까! 저거 망가지면 나 죽네!”

“허 참, 알겠네.”

늦게 온 병사가 횃불을 챙겨 감옥을 벗어났다. 남은 병사는 다급히 허리춤을 뒤지기 시작했다.

“야, 야! 뒤지지 마! 혀 깨물지 말고! 아이씨, 미치겠네, 돈까지 받았는데……!”

쩔그럭 소리가 귓가에 요동치고, 쇠창살 문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끼기긱, 하고 울렸다. 곧이어 마디가 굵고 투박한 손이 키리에의 고개를 홱 돌렸다.

“이런, 씨……! 의원한테 보여야 하나? 야! 잠깐 저기 앉아 있어 봐!”

병사가 키리에의 얼굴을 가볍게 짝짝 내려치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확실히 도움이 됐다. 뺨에 불이 붙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망쳐야 해.

키리에가 비틀거리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손이 자연스럽게 품에 들어갔다 나왔다.

잘그락.

“응? 뭐지?”

키리에의 손가락 사이에서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병사의 주의가 그리로 향했다.

그가 떨어진 것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횃불이 손가락 사이의 작은 돌을 비췄다.

“마석?”

병사가 중얼거린 순간, 키리에가 그 뒤로 달려들었다.

***

그레이는 십여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별도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는 사람들이 보내는 선망의 눈빛을 받으며, 당차게 걸음을 옮겼다.

전설경은 손님들을 위한 연주실에 있었다. 바닥에 검은 융단이 깔려 있고, 중앙에는 대형 피아노가 있는 방이었다.

그를 발견한 그레이가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가려다, 발을 멈추고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팔짱을 낀 채 창가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 그는 뭔가를 더하거나 뺄 필요가 없었다. 지나치게 잘생긴 남자를 보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는 걸, 그레이는 그를 보고 처음 알았다. 마음이 벅차올랐다.

‘정말로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이야. 이대로 전설경의 총애를 얻어 내면 아버지도 더는 내게 작위를 주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그레이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에서는 그가 아는 모든 세련되고 재치 있는 인사말이 스쳐 지나가는 중이었다.

그런 그레이의 시야에 뒤늦게 창가에 놓인 무언가가 잡혔다.

‘체스 말?’

전설경이 서 있는 창가의 창틀에, 상아로 만든 새하얀 킹이 놓여 있었다. 전설경은 다소 습관적인 시선으로 체스 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레이는 눈을 깜빡인 뒤,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체스를 좋아하십니까?”

검고 우아한 남자의 고개가 느리게 그레이에게 향했다. 그레이가 능청스럽게 몸짓하며 그의 맞은편에 섰다.

“저도 좋아하죠.”

전설경이 대답 대신 창가에 올려놓았던 킹을 쥐었다. 푸른 마력이 빛나자, 체스 말은 곧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레이 뷰캐넌.]

“네!”

[네 여동생 이야기를 해 보렴.]

나타니엘이 노래하듯 말했다. 노래라고는 하였으나, 울림통이 큰 현악기의 소리 같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레이가 곧 씩 웃었다. 목적 지향적인 사람은 싫지 않다.

“얼마든지요. 어떤 게 궁금하십니까?”

[너희 남매에게 엘서스 말고 다른 연고지가 있나?]

“아, 엘서스가 저희의 고향인 걸 알고 계시는군요! 멋진 동네죠.”

그레이가 싱긋 웃었다.

“하지만 연고지라, 글쎄요. 사실 저는 일찌감치 셀 아렐라노에서 지냈습니다. 아니면 영지에 있거나요.”

[엘서스가 고향이라 하던데?]

“걔는 엘서스에 있었죠. 어머니와 함께.”

[왜?]

그레이가 짙은 눈썹 아래 큰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쓸데없이 정이 많아서죠.”

[아. 정이라.]

푸른 눈에 일순 잔혹한 빛이 스쳤다. 이때 그의 입가에 떠오른 것이 냉소였기 때문에, 그레이는 자신의 선택을 확신했다.

‘키리에와 문제가 있었던 거야.’

하지만 아직 온전히 패를 내보이기엔 뭔가 부족하다. 그는 좀 더 대담해져 보기로 했다.

“키리에는 어머니를 챙기고 싶어 했거든요. 그때 상태가 별로 안 좋으셨기에…….”

[제냐 하트우드.]

“아십니까? 맞아요. 어머니는 원래 종말을 연구하는 학자셨거든요. 임신 때문에 학계에서 멀어져야 했지만 말입니다. 아버지가 허락을-.”

[그래서?]

“예?”

전설경이 약간 피로한 기색으로 물었다.

[난 두 번 묻는 걸 싫어해. 키리에 뷰캐넌이 갈 만한 곳이 어디지?]

그레이가 웃는 낯 그대로 잠시 멈췄다. 때로는 침묵을 끌고 가는 게 말보다 낫다.

‘조금만 더.’

“실례지만, 키리에에 관해서는 왜 궁금해하시는지……? 동생이 뭔가 잘못했습니까?”

전설경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잘못했지.]

그는 ‘너무 예쁜 게 잘못’ 따위의 말이나 할 정도의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기에, 그레이는 그 말로 의심을 종결지었다.

키리에는 뭔가를 잘못했고, 전설경은 그것에 화가 난 게 분명했다.

그레이의 얼굴에 희미한 비열함이 떠올랐다.

“오, 이런……. 역시 그렇습니까? 동생의 잘못을 대신 사과드립니다, 각하…….”

그는 과장되게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놀랄 일도 아니죠. 사실 그 애는 좀 모자란 곳이 많거든요.”

그 순간 그레이는 대화 내내 다른 것을 떠올리던 전설경의 초점이 자신에게로 일시에 모였다고 느꼈다.

[그래?]

그는 심지어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참 이상한 일이었다. 전설경은 미소짓기 시작했는데, 공기는 더 팽팽해졌으니.

[계속 말해 봐.]

그가 묘하게 부추기듯 말하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레이가 까닭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어…… 각하?”

[재밌는 이야기야. 정말 재밌어서 그래. 그야, 내 눈에도 제법 그리 보이긴 했지.]

“그러십니까……?”

전설경이 눈을 내리깔고 속삭였다.

[좀 더 말해 봐.]

“네? 음…….”

잠시 말을 잃었던 그레이가 곧 자신감을 되찾았다. 비위를 맞춰서 호감을 얻어 내는 거라면 그의 주특기였다.

“키리에를 만나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일단 보통 성격이 아니죠. 고집이 너무 세서 말을 안 듣는 것부터가……. 그나마 아버지 말은 좀 들었지만요.”

[제법 겁이 없는 편이지.]

“그렇죠. 가족이니 치부는 덮어 줘야 하는 게 맞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애도 참! 어떻게 전설경에게 뭔가를 잘못할 생각을 했을까요.”

전설경이 미소지었다. 그레이도 따라 웃었다.

“그 애를 찾고 계신 듯한데, 제가 선물을 하나 드릴까요?”

[재밌네. 나도 네게서 받고 싶은 게 생겼는데.]

전설경은 어느새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검이라도 쥔 것 같은 자세였다. 하지만 그레이는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레이가 기대감을 숨기며 말을 던졌다.

“그럼 키리에를 만나 보시겠어요?”

[뭐?]

전설경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키리에 말입니다.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그 순간 창밖에 큰 번개가 쳤고, 하얀빛이 백작해 전설경의 몸을 비췄다. 자신의 연출력에 지나치게 취한 그레이는 그 순간 전설경의 그림자가 지나치게 크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여기 있다고?]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목소리였다.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 활시위를 놓았다.

“네. 여기 있습니다.”

“차라리 눈이라도 오는 게 낫겠어. 뭐 이런 미친 날씨가 다 있지?”

클라시코 주민들이 투덜거렸다.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거대한 인력이라도 작용하는 것처럼, 천둥 번개를 동반한 구름이 절벽 위의 클레멘츠 성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대피해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대피령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영주님 생일 연회라잖아! 밖을 내다보기나 하겠어?”

“그래도, 좀 더 상황을 지켜보고…….”

그때, 누군가 바다를 가리켰다.

“잠깐, 바다가 좀 이상한데?”

사태를 살피러 밖에 나와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바다로 향했다. 아빠 품에 안겨 있던 아이 한 명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순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용오름이야! 우와!”

먼바다에서부터 손가락보다 작은 크기의 용오름이 여러 개 생겨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와 달리 어른들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바닷물이 빠지잖아.”

폭풍 때문에 넘치듯 끓어오르던 바다가 소리소문없이 물러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쓰러진 병사를 내려다보며 키리에가 숨을 헐떡였다.

목의 동맥을 압박해 저산소증을 일으키면, 아무리 건장한 사람이라도 십 초 이내로 기절한다.

이론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사람에게 실행한 건 처음이다. 고의로 남을 해치려 한 일도 처음이었다.

키리에의 손이 덜덜 떨렸다. 악귀가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미안, 미안해……. 하지만 난 도망쳐야 해…….’

키리에가 정신없이 병사의 품을 더듬었다. 그녀는 수갑 열쇠를 찾아내 수갑을 풀어낸 뒤, 병사의 팔에 채웠다.

‘배수로랑 뒷문 잘 점검하게. 폭풍이야. 뒷문은 저번에 문째로 날아간 적도 있으니…….’

키리에의 마음속에도 폭풍이 몰아쳤다.

그녀는 달리기 시작했다. 야윈 다리에 힘이 빠져 몇 번이고 바닥에 나동그라졌지만, 아픔을 느낄 새조차 없었다.

먼 곳에서 빛이 보이자, 키리에의 표정에도 한 줄기 희망이 비쳤다. 거친 숨을 참고 빛을 향해 달려가자, 순간 세상이 확 밝아졌다.

“아……!”

빛 때문에 눈을 감았다 뜬 키리에가 절망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까마득한 절벽이었다.

***

그레이는 나타니엘이 놀랐다는 사실에 도리어 놀라 얼굴이 차가워졌다.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게다가 그는 방금 나타니엘의 그림자가 이상했다는 것까지는 깨닫지 못했지만, ‘봐선 안 될 것을 보았다’는 것만은 확실히 느꼈다.

“음……. 제가, 말을 잘못했을까요?”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말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자 반대로 나타니엘이 한 발짝 다가왔다.

[어떻게?]

스산한 목소리였다.

“레드로우트에서 발견했습니다. 도망치는 행색이 수상해 잡아 뒀죠.”

그레이가 어설픈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뭔가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놀람으로 살짝 커진 나타니엘의 푸른 눈에서, 표정은 변하지 않은 채 감정만이 사라졌다. 대단한 압박감이었다.

[안내해.]

“예?”

[키리에가 있는 곳. 어디에 두었니?]

그레이가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어쩐지 점점 둔해지는 머리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이대로 가시겠다고요?”

그레이가 불쑥 말했다.

불행하게도 그레이에 대한 키리에의 통찰은 정확했다. 그는 수완이 부족했다. 눈치는 좀 빨랐으나 자신감이 과했고, 친화력은 좀 좋았으나 그건 나타니엘에게 가장 통하지 않는 덕목 중 하나였다.

“물론 저야 바로 키리에에게 안내해드리고 싶지만, 원래 이런 게 서로 체면을 차리는 일이 필수이지 않습니까?”

그레이의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이 기회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키리에를 그냥 넘겨줄 수는 없었다.

‘하다못해 구두로라도 보답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야 수지가 맞지.’

그레이가 숨을 한 번 들이켰다.

“게다가 아무래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로 여동생을 찾으시는 것을 돕는 제 마음이 편하지도 않고 말입니다.”

원래의 나타니엘이라면 희미한 냉소로 수락했을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 나타니엘에게는 여유가 없었다. 나타니엘의 입이 열린 순간, 혹은 그 전이거나, 혹은 그 후일 수도 있다. 어쨌건 거의 동시였다.

그레이의 얼굴에 가로로 금이 갔다.

그레이는 상처에서 흐른 피가 옷깃에 떨어질 때까지 그걸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멍청한 소리를 냈다.

“……어?”

손이 느리게 올라와 눈 밑을 더듬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의 피부가 아주 얕게 일자로 베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이 비명을 위해 벌어졌다. 그 순간 흰 칼날이 입 안으로 쑥 들어왔다.

[내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고, 나는 지금 네 생각보다 갈증이 심해. 소리 지를 시간에 키리에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나타니엘이 낮게 말했다. 하얗게 번득이는 번개를 뒤로한 그의 얼굴은 소름 끼칠 정도로 창백했다.

그레이는 혓바닥 위에 얹힌 쇠붙이에서 비릿한 피 맛을 느꼈다. 자신의 피였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대로 입이 베일 것 같았다.

나타니엘은 머리 나쁜 두발짐승을 위해 조금 더 사근사근하게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처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안내란 게 꼭 사지가 멀쩡해야 할 필요는 없단다…….]

흰 검이 뱀처럼 스르르 입에서 빠져나갔다. 그것은 하 의미심장하게 그레이의 양어깨와 무릎을 건드린 뒤, 검은 지팡이가 되었다.

나타니엘이 지팡이를 짚은 채 바른 자세로 서서, 그레이를 응시했다.

시선을 받으며 그레이가 천천히 얼굴에서 흐르는 피를 매만졌다. 상처는 지나치게 섬세하게 베인 나머지 조금 따끔한 정도였다.

그게 더 무서웠다.

“……안내하겠습니다.”

한창 연회가 진행되고 있을 와중이었다. 방을 나선 두 사람의 걸음을 재촉하듯 어딘가에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그레이는 점점 절정으로 치닫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그리고 때마침 그를 찾던 느베야와 마주쳤다.

느베야가 그레이의 얼굴을 보고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 얼굴이!”

“하하! 느베야, 괜찮아! 더, 잘생겨졌지? 야성미도 느껴지고!”

그레이가 급하게 느베야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뒤를 눈짓했다. 느베야는 뒤늦게 그레이의 등 너머에 있는 남자를 발견하곤, 얌전히 그레이 옆에 붙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신 겁니까?”

느베야와 그레이가 속닥거렸다.

“제기랄……. 키리에를 찾고 계시더라고.”

“아가씨 말이십니까?”

“그래. 감옥에 잘 가둬 놨겠지?”

느베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여자가 아가씨였습니까?”

“그래. 젠장,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레이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뺨을 움찔거렸다. 아무래도 두 사람은 원한 관계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키리에의 뒤통수를 친 걸 알면 끝이야.’

그레이의 손이 통제를 벗어나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잘못 짚었어. 진짜 죽일지도 몰라. 그런 눈이야. 그런 눈이라고……. 말이 안 통하는 부류였다고!”

상황을 깨달은 느베야가 얼굴을 굳혔다.

“호위하겠습니다.”

별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옆에 자기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레이는 조금 안심했다.

나타니엘은 뷰캐넌의 하인들이 합류하는 걸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걸으면서 그 자신을 욕한대도 안내만 제대로 한다면 신경 쓰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레이는 이 답답한 상황을 키리에가 어떻게 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을 때, 감옥은 비어 있었다.

[둄2 절갠 교환재공타싸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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