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도망자
키리에가 달렸다.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흘렀다.
‘살아 줘!’
‘살아남아!’
‘죽어 버려요.’
걸음이 멈출 때도 있었지만,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가 그때마다 등을 밀었다.
“윽……!”
그러다 결국 키리에가 무너졌다. 셀 아렐라노 서쪽 성문 앞이었다. 경비병도 감시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키리에는 성문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내가 도망치면, 라우라와 마리아는……?’
하지만 그들의 필사적인 노력을 배신할 수도 없었다.
키리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골목 속에서 작은 인영이 타박타박 걸어 나왔다.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네요, 아가씨.”
안네마리였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도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흰 베일을 뒤집어쓴 채 슬프게 미소짓고 있었다.
“안네마리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요.”
“안, 안네마리……?”
“네. 아가씨의 안네마리예요.”
안네마리가 온화하게 대답했다.
“나를, 잡으러……?”
“아뇨, 아가씨. 반대예요. 안네마리는 아가씨를 구하러 왔어요.”
키리에가 눈물 젖은 눈으로 안네마리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아가씨. 다시 달릴 수 있어요.”
안네마리는 아주 성스러운 의식을 하듯, 키리에의 발에 양말과 신발을 신겨 주었다.
언젠가 둘이 있을 때, 그녀가 뜨개질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이런 상황을 예견했던 걸까. 키리에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나타니엘의 옷도 안네마리가 가져온 푸른 망토가 갈음했다.
“평범한 인간의 힘으로는 나타니엘 님에게서 완전히 도망칠 수 없어요. 그래서 준비가 오래 걸렸어요. 죄송해요.”
키리에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말다운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안네마리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주인은 심성이 곧고 똑똑하다. 한번 말한 건 잊지 않을 것이다.
안네마리가 조심스레, 경배의 의미를 담아 키리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가씨가 살려 주신 이후로, 안네마리의 목숨은 아가씨 거였어요. 이제 그걸 갚을 때가 온 것 같아요.”
“안네마리……?”
“아가씨. 이건 ‘존재 부정의 베일’이라고 해요.”
안네마리가 자신이 두르고 있는 베일을 가리켰다. 질질 끌리고 있는데도 더러워진 곳 하나 없는 흰 베일은, 척 보기에도 귀해 보였다.
“이걸 두르고 있으면, 바로 눈앞에 두지 않는 이상 존재를 눈치채지 못해요. 이걸 무조건 몸에 두르고 계세요. 나타니엘 님이 아가씨를 탐지하지 못하게.”
“안네마리, 너는. 내가 나타니엘에게…….”
“안네마리가 잘못 생각했어요. 안네마리는, 아가씨가 이 정도로 망가질 줄은 몰랐어요. 안네마리의 잘못이에요.”
안네마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죄책감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유능한 시녀답게 금세 감정을 털어냈다.
안네마리가 품에서 작은 인형을 꺼냈다. 하얀 뜨개실로 엮은 개 모양 인형이었다.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고 주술 진을 그리자, 개 인형이 순식간에 커지더니 빛나는 늑대가 되었다.
“타고 가세요. 최대한 서쪽으로 가서, 배를 타세요. 대륙을 떠나야 해요.”
“배……?”
“안네마리가 신호를 보내면, 나타니엘 님은 뭔가가 틀어졌다는 걸 바로 깨닫고 아가씨를 잡으러 올 거예요. 그러니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세요.”
키리에가 놀람과 두려움이 스민 눈으로 안네마리를 바라보았다.
라우라와 마리아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는 모습이 키리에의 머릿속을 스쳤다. 두 사람의 눈에는 절망이 보이지 않았다.
“안네마리, 이건 아니야……. 고작 날 살리기 위해, 이런 건, 잘못됐어…….”
“고작이 아니에요.”
안네마리가 속삭였다.
“저희는 다 각오했어요.”
키리에는 안네마리가 들고 있는 창을 바라보았다. 누가 보아도 감히 손대기 어려운 품위가 있는 창은, 나타니엘이나 레쇼의 검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도 창이었다. 무기였다.
키리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살면서 지금까지 흘린 눈물보다, 어제오늘 흘린 눈물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너희가 죽는 건 안 돼…….”
안네마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안 죽도록 노력해 볼게요. 좋은 걸 빌려 왔으니 조금은 버틸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안네마리, 그건 안 돼……. 너희가 나 때문에 죽으면…….”
“그러니까 살아 주세요, 아가씨.”
안네마리가 미소지었다. 작은 손이 베일을 벗어, 키리에의 몸에 둘렀다.
“꼭 살아 주세요. 도망치세요, 멀리멀리. 자유롭게…….”
“안느!”
키리에가 말릴 틈도 없었다. 늑대가 코끝으로 키리에의 다리 사이로 들어가 그녀를 들어 올렸다.
“꺅!”
키리에가 비명을 지르며 늑대의 털을 붙잡았다. 은빛 늑대는 야속할 정도로 빠르게, 예고도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키리에가 외쳤지만 늑대는 멈추지 않았다.
안네마리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배웅했다. 마지막에 남은 건 소녀의 명랑한 한마디뿐이었다.
“살아 주세요! 안네마리를 위해!”
하늘에 나뭇잎으로 만든 거대한 새 수십 마리가 나타났을 때, 나타니엘은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가락에서 모래가 빠져나가는 감각. 그가 그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나타니엘의 동공이 커졌다.
[키리에.]
흰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검을 쥐고 망설이지 않고 횡을 그었다. 잠깐 하늘이 갈라졌다고 느낄 정도로 크고 하얀 초승달 모양의 궤적이었다. 직후 동서남북을 향해 수도 바깥으로 날아가던 새들이 반으로 갈라져 추락했다.
“키리에!”
라우라가 비명을 질렀고, 마리아가 입을 틀어막았다. 키리에의 시녀가 계획한 탈출을 돕긴 했지만, 자세한 내막을 듣지는 못했다. 저 새 중 하나에 키리에가 타고 있었다면?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듯했다.
두 사람과 달리 나타니엘은 냉정했다. 키리에가 타고 있다면 떨어지기 전에 잡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시야 어디에도 키리에는 없었다.
하늘의 새가 효시였는지, 어디선가 나뭇잎으로 만든 짐승 떼가 나타나 떼를 지어 달리기 시작했다. 새 역시 수십 마리가 더 나타났다.
나타니엘이 그것들을 보이는 족족 베어냈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단순히 없애는 거라면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지만, 혹시라도 키리에가 휩쓸린다면 곤란하다.
[키리에.]
그가 중얼거렸다.
“도, 도망쳐!”
“살려 줘!”
두려움을 느낀 시민들과, 광장 가장자리에서 마차를 세우고 상황을 지켜보던 귀족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사위가 아수라장이었다.
알 바 아니었다.
[키리에.]
그를 중심으로 푸른 마력이 반딧불이처럼 반짝이는 원을 그리며 터져 나갔다. 수많은 인기척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지만, 거기에 키리에의 것은 없었다.
[…….]
입을 열어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던 나타니엘이 잠시 숨을 멈췄다. 와그작, 나타니엘의 이성 어딘가가 씹혀 나갔다.
아직 수도를 나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타니엘이 날뛰기 시작하는 내면을 억누르며 자세를 잡은 찰나였다.
“가시려고요?”
광장의 끝에서 안네마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안 돼요.”
나타니엘의 눈이 사늘해졌다. 평소라면 무시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안네마리가 들고 있는 창에서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고약한 짐승의 냄새가 나는 창이네. 키리에는?]
“바다 너머 안네마리의 가족들이 맡아 두고 있는 걸 잠깐 빌렸어요.”
[아. 나를 말뚝에 꿰어서 효시라도 할 모양이지? 네 주인이 벌판에서 죽어 가는 도중에.]
“아가씨는 살 거예요.”
안네마리가 창을 내밀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자유롭게.”
나타니엘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속이 천불 맞은 악귀처럼 날뛰며 게걸스럽게 그의 인내심을 뜯어먹고 있었다.
[말뚝질은 나중에 하게 해 주지. 키리에는?]
“알려 주지 않아요.”
[기척이 없어. 뭔가 특별한 수작을 부렸구나. 순간 이동이니?]
“아가씨는 넘겨주지 않을 거예요.”
[네가 무슨 권리로?]
툭 떨어지듯 내려앉은 물음이었다.
나타니엘이 옆에서 도망치지도 못하고 있는 라우라와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칼날 같은 시선이었다.
[다시 묻지. 키리에는?]
기묘한 일이었다. 본디 미성인 그의 목소리가 점점 천 명이 제호하는 것처럼 들리기 시작했으니.
안네마리가 재빨리 나타니엘 앞을 가로막았다.
“아가씨들은 도망치세요!”
“이, 이게 뭐야……?”
[키리에는?]
“어서요!”
안네마리의 다급한 외침에도 두 사람은 너무나 공포에 질린 나머지 움직이지 못했다.
[키리에는?]
나타니엘이 조용한 걸음걸이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밟은 곳마다 얇은 살얼음이 깔렸다.
[키리에를 어디에 숨겼지?]
“우……욱, 우웨엑!”
기어코 라우라와 마리아가 구토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박살 낼 것 같은 위압감이었다.
어느샌가 휘몰아치기 시작한 눈보라 속에서 나타니엘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그 아래, 손가락으로 가려진 섬세한 얼굴이 웃는 가면처럼 괴이했다.
어디가 전설이고, 어디가 영웅이고, 어디가 위인이란 말인가.
눈부신 용모는 이제 의미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조각처럼 아름다웠으나, 그 아름다움에 라우라와 마리아는 더 멀미를 느꼈다.
그의 아름다움이란 칠흑 같은 물결 속에서 반짝이는 아귀의 초롱 같은 것.
[내놔.]
그가 숨기고 있던 날 것의 폭력성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정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헉, 허억…… 흐윽, 싫어, 싫어, 뭐야, 이건 뭐야……!”
“도망치세요! 어서! 안네마리가 막을 테니까!”
“아, 아아……! 시, 싫어, 무, 무, 무서워, 시, 싫어, 무, 무서워, 아악!”
인간은 그를 감당할 수 없다.
두 사람이 걷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엉덩이로 뒷걸음질 치며 손톱으로 바닥을 긁었다. 안네마리라고 정상은 아니었다. 어찌어찌 서 있긴 했지만, 눈앞의 불길한 존재가 두려워 구역감이 치밀었다.
[아.]
이윽고 한 발짝씩 앞으로 다가가던 나타니엘이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온기 없는 미소라도 시늉하던 낯이, 이목구비가 지워진 양 완벽한 무표정이 된 순간이었다.
[벌레랑 말이 통할 리 없지.]
나타니엘의 검이 움직였다.
***
셀 아렐라노의 밤하늘을 엄청난 불꽃과 굉음이 수놓았다. 두려울 정도의 장관이었다.
그 와중에 성벽 너머에서 나뭇잎, 꽃잎, 나무 덩굴, 빛으로 만든 기백 마리의 동식물들이 떼를 지어 뛰쳐나왔다.
‘미끼.’
키리에는 은빛 늑대의 등 위에서 그것을 목격했다.
‘저것도 미끼.’
동서남북의 성문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나팔 소리 같은 큰 우짖음이 천 근의 무게로 땅을 흔들었다.
‘전부 미끼야.’
얼마나 준비해 온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사실상 안네마리는 나타니엘과의 싸움보다는 키리에를 숨기는 일에 총력을 기울인 듯했다.
키리에가 탄 늑대가 시시각각 수도에서 멀어졌다.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눈물 탓에 뺨이 얼어붙을 것 같았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제발, 제발 그만…….”
그만 죽고 싶은데, 그러면 모든 게 끝날 텐데, 이미 너무 많은 목숨을 짊어져 버렸다.
이대로 돌아간대도 나타니엘이 그들을 용서할까? 아니, 그 이전, 노력이 배신당한 그들의 허망한 시선을 견딜 수 있을까? 하나 그들의 죽음이라고 견딜 만할까?
‘살아 주세요.’
‘살아 줘.’
‘죽어 버려요.’
‘넌 정말 쓸모라곤 없구나.’
‘가! 살아남아!’
그 순간이었다.
천지를 뒤흔들던 소리가 멎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키리에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키리에가 남겨진 자들의 이름을 외쳤지만, 그 목소리는 눈보라에 먹히고 말았다.
***
쓰러진 안네마리, 라우라, 마리아와 미처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니엘은 가만히 서 있었다.
오른손엔 흰 검, 왼손에는 누군가의 눈알.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눈알을 짓눌러 터뜨렸을 때, 레쇼가 도착했다.
〔나타니엘.〕
레쇼가 차분하게 이름을 부르며 나타니엘에게 검을 내리쳤다. 나타니엘은 사각에서 들어오는 검을 가볍게 막아냈다.
[방해하지 마.]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레쇼는 심장을 옥죄는 한기를 느꼈다. 웃지 않는 나타니엘은 그의 비인간성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드러나,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셀 아렐라노까지 부술 생각인가?〕
레쇼가 불편한 기색을 숨긴 채 물었다. 나타니엘은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속삭였다.
[키리에가 없어.]
〔되찾으면 지낼 곳이 필요할 거다.〕
[여기가 아니어도 돼.]
〔인간은 환경이 바뀌면 금방 죽는다.〕
그 말에 나타니엘이 물끄러미 레쇼를 응시했다.
무표정으로 검을 든 나타니엘을 상대하고 있는 레쇼의 등에 식은땀이 한 방울 흘렀다.
〔찾으면 된다.〕
[찾아야지.]
나타니엘이 검을 물렸다.
[도망치게 둘 줄 알고…….]
잇새 사이로 광기에 먹힌 속삭임이 튀어나왔다. 노인이, 아이가, 처녀가, 총각이, 수천 명이 속삭이는 것 같던 목소리가 서서히 가라앉아 원래의 미성으로 되돌아갔다.
[내가 없는 곳에서 죽게 둘 줄 알고.]
단정한 얼굴과 달리 세계최흉(世界最凶)이라 일컬을 만한 불길한 기운이었다.
레쇼가 저도 모르게 건침을 삼켰다.
〔눈은 그만둬라. 키리에 뷰캐넌은 추위에 약하다고 들었다. 주검으로 발견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거짓말처럼 눈보라가 가라앉았다. 가시지 않은 노기 탓인지 입김마저 얼어붙을 정도의 추위만은 여전했다.
그래도 아직은 말이 통하는 상태였다. 레쇼가 진중하게 말했다.
〔국왕에게 도움을 받아서 각 도시에 공문을…….〕
[아니. 직접 움직인다.]
나타니엘이 서늘한 목소리로 레쇼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가 시선을 돌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안네마리, 아니, 안네마리였던 것에게로.
[벌레들이 얼마나 주제 파악을 못 하는지를 내가 잠깐 잊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때, 나타니엘과 레쇼의 곁으로 사람 몇이 다가왔다. 절망적인 얼굴을 한 올드시우다드 공작과 포트듀케인 후작, 그리고 다소 불편한 얼굴의 세자르 뷰캐넌이었다.
[인간들이란.]
나타니엘이 중얼거렸다. 푸른 마력이 마리아와 라우라의 목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컥, 흑……!”
“윽……!”
기절한 두 사람이 신음했다. 공작과 후작에게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제발, 제발 그만하시오!”
“뭐든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제발……! 딸만은 살려 주십시오!”
나타니엘의 차가운 눈이 공작과 후작에게 향했다.
[너희 딸들이 키리에를 숨겼단다. 두 아비의 마음도 몰라주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제발, 부, 부탁드립니다! 제발! 대신 죽으라면 죽을 테니, 제발, 우리 애만은……!”
간청이 무색하도록, 나타니엘은 솜 인형의 머리를 잡고 놀 듯 허공에서 라우라와 마리아의 몸을 흔들었다.
“각하!”
포트듀케인 후작이 당장 눈물을 흘리며 나타니엘의 발치에 몸을 던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딸아이는 안 됩니다!”
올드시우다드 공작 역시 무릎을 꿇었다.
눈물 흘리는 두 아비를, 나타니엘은 그저 표정 없는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키리에가 아닌 것은 그에게 의미가 없다.
[키리에를 찾으면 돌려주지. 국왕은 미덥지 않지만, 새끼 둔 부모의 절박함은 좀 믿을 만하겠지.]
“찾겠습니다! 찾겠습니다! 찾아서 대령할 테니, 제발……!”
공작과 후작이 바닥에 이마를 대고 그에게 복종했다.
나타니엘의 시선은 이제 세자르에게 닿았다. 나타니엘은 수도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세자르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세자르 뷰캐넌. 네가 누구 덕으로 내 이름을 빌리고 다닐 수 있었는지 모르진 않겠지.]
세자르가 애써 떨리는 무릎을 숨기며 능청스럽게 답했다.
“물론 위대한 전설경 각하 덕분이지요.”
[아니, 키리에 덕이겠지.]
세자르가 입을 다물었다.
나타니엘은 그야말로 겨울의 왕처럼, 서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찾아. 네가 가진 것을 보전하고 싶다면.]
세자르가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숙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바야흐로 끝없는 겨울의 시작이었다.
키리에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을 땐, 낯선 천장이 보였다. 그녀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쓰러지기 전의 일을 떠올렸다.
늑대를 타고 눈길을 한참을 내달렸다. 산을 몇 개 넘었을 때, 힘이 다했는지 늑대가 하얀 인형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키리에는 그 인형을 품에 끌어안고 눈발을 헤치며 걸어 나갔다. 옷 이곳저곳에 안네마리가 붙여 놓은 나뭇잎 덕에 춥지는 않았다.
‘그러다 쓰러졌지.’
거기까지 떠올린 키리에가 급하게 베일을 확인했다. 꽁꽁 싸매듯이 앞을 여민 덕에 다행히 벗겨지지 않았다.
안심한 키리에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은 산장 같은 집이었다. 돌을 쌓아 만든 벽난로가 주변을 덥히고 있었다. 방 안의 물건들을 보면, 산지기의 방인 듯했다.
침대에서 발을 빼고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그녀는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윽…….”
건강하지 않은 몸으로 지나치게 많이 걸은 탓인지 발바닥이 쓰라렸다. 어설프게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으려니, 문이 열렸다.
“일어나셨소?”
굵은 목소리였다. 키리에가 고개를 들었고, 소리 없이 놀랐다.
아무리 봐도 집주인인 듯한 노인이 옷을 얼마나 껴입었는지, 덩치가 산만 했다.
반대로 노인은 키리에를 보며 혀를 찼다.
“그 차림으로 어찌 길을 떠날 생각을 했는지, 원……. 거의 죽을 뻔했소.”
노인이 걸걸한 목소리로 말하며 벽난로 위에 양철 주전자를 올렸다.
“아, 아…….”
뭔가를 말하려던 키리에가 목을 쥐었다.
‘목소리가 안 나와.’
그녀는 당황했지만, 이내 상황을 받아들였다. 추위 때문에 성대에 문제가 생긴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 정신적 문제일 것이다.
‘맞아. 말하고 싶지 않아. 더는 누구와도 엮이고 싶지 않아…….’
노인이 멍하니 앉은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말을 못 하시오?”
키리에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혀를 차더니 벽난로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됐으니 쉬다 가시오. 어쩌다 그런 외딴곳에 쓰러져 있었는지는 묻지 않을 테니…….”
“아, 아아…….”
키리에가 나무 덧창을 가리키며 웅얼거리자, 노인이 나이에 맞지 않게 예리한 눈을 끔뻑거렸다.
“날씨? 미친 날씨요. 눈은 안 오는데, 호수가 꽝꽝 얼다 못해 위에 집을 지어도 될 정도요.”
“아…….”
“그 차림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살할 거라면 더 나은 방법을 찾아보시구려.”
말을 마친 노인이 자연스럽게 따뜻한 차를 따라 침대까지 가져다주었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키리에는 그것을 받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사람도 나타니엘이 준비한 사람?’
의심이 고개를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안네마리의 계획은 정말 성공한 걸까? 이것마저 그의 계략?’
키리에가 컵을 받지 않자, 노인은 투덜대며 제 입으로 내용물을 털어냈다.
“사연이 기구한 모양인데, 뭐 안 넣었소. 그리고 이 추위에는 독초도 못 구하오.”
노인은 다시 차를 따라 건넸다. 이번에는 그것을 받았으나, 역시 마시진 않았다.
정말 관계없는 산지기 노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키리에는 더는 의심 없이 남을 믿을 수 없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영원히, 나는 의심하고 또 의심하겠지. 내가 또 나타니엘의 무대에 올라와 있는 게 아닌지…….’
아마 이것이 그가 노린 것. 웃다가도 어디선가 그가 미소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하며 떨게 만드는 것.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영혼을, 몸과 마음을 전부 먹어 치우는 것.
‘더 나은 방법이, 분명, 있었을 텐데…….’
이제는 말랐다고 생각한 눈물이 다시 흘렀다.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 가서 이불을 덮고 누웠다.
“젊은 아가씨가 뭐 그리 죽을상인지, 원……. 아무튼 여기는 로르 령 이스라 지구(地區)요. 날 밝으면 어디 사는지나 말해 보시오. 지나가는 마차가 있으면 말해서 태워 줄 테니.”
노인은 그렇게 말한 뒤 금세 코를 골며 잠들었다. 그가 잠든 뒤, 키리에는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호의일지, 연극일지.’
알 수 없다. 그녀에겐 그걸 확인할 정도의 용기가 없었다. 이제 키리에에게는 낙인처럼 새겨진 사람들의 목소리만이 전부였다.
살아남으라고, 죽어 버리라고, 또 살아달라고.
키리에가 노인을 깨우지 않게 조심하며, 오두막집 구석에서 램프를 꺼내 불을 밝혔다.
다행히 안네마리가 망토와 양말 안쪽에 금화를 꿰매준 것이 있어, 그것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나무문을 열자 한기가 불어닥쳤다. 두려울 정도의 겨울이었다. 저도 모르게 아무에게나 기대고 싶어질 정도로.
‘하지만 이젠 안 돼. 이젠 누구와도 엮이면 안 돼. 아무것도 믿을 수 없어…….’
키리에가 망토를 여민 뒤, 겨울 속으로 걸어 나갔다.
***
한편 수도, 난장판이 된 셀에서 마리아와 라우라가 한 방에 모여 있었다. 대외적 명분은 요양이었지만, 실제로는 전설경의 인질이었다.
“키리에는…… 잘 도망쳤을까?”
라우라가 침대에 누운 채 중얼거렸다.
그녀는 나타니엘의 존재를 너무 코앞에서, 정면으로 맞닥뜨린 탓인지 사지에 약한 마비가 남아 있었다. 반쯤 실성했다 제정신을 차린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시녀가 괜찮을 거라고 말했으니, 그렇게 믿어야지.”
라우라보다 빨리 회복한 마리아가 침대 옆에 앉아 말했다. 라우라가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뺨을 들썩이며 힘없이 웃었다.
“제기랄, 그, 망할 놈……. 뭐 이렇게, 무섭냐고…….”
“나도…… 무서웠어. 키리에는 어떻게 그런 걸 견딘 거지?”
몸은 나아 가고 있지만, 전설경이 준 공포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딱히 라우라와 마리아를 의식해 엄청난 적개심을 드러낸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너무 강했을 뿐이다. 너무 강해서 그 존재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우주에 내던져진 것처럼 막막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다시 그때를 떠올린 라우라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난…… 그, 사람이, 키리에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헛소리였어.”
라우라의 말에 마리아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라우라. 난 오히려 이번 일로 확신하게 됐어.”
“뭘?”
“너는 못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마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렸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쓰러져 있을 때, 전설경은 분명 둘에게 다가오려고 몸짓했다. 쓰러진 상태로도 마리아는 그가 자신들을 죽이려는 심산인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도중 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죽이면 키리에가 다시는…….’이라고, 속삭였어. 분명.”
라우라의 눈이 커졌다.
“다신 못 본다는 말 아니야? 우리를 인질로 삼아서 아빠랑, 공작님을 이용하고 있잖아.”
“귀족들을 이용할 방법은 인질 말고도 많아. 게다가 정말 이용이 목적이라면, 가장 살아 있으면 안 될 사람이 살아 있지.”
“……키리에의 시녀.”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넝마가 되긴 했지만 안네마리라는 시녀도 살긴 살았다. 라우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네. 이용이 목적이라면, 사실, 그 시녀를 살려둘 필요는 없지…….”
“응.”
“그럼, 우리를 죽이면 키리에는…….”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잠시간 흘렀다. 마리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넌 만약 누군가 나나 키리에를 죽였다면 어떻게 될 것 같니?”
“뭐 그런 걸 물어?”
라우라가 험악하게 인상 썼다.
“죽여 버릴 거야. 내가 가진 모든 힘을 다 동원해서라도……. 절대 용서 못 해.”
격한 말이었지만 마리아는 미소지었다. 성격은 달라도 셋은 늘 같은 심정이었다.
“나도 아마 그럴 거야. 키리에도 그렇겠지. 절대 용서하지…… 않겠지.”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던 라우라가 이내 못마땅한 얼굴로 인상을 썼다.
“잠깐만, 그거 되게…… 키리에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마리아가 힘없이 미소지으며 먼 곳을 응시했다.
“하지만 확신은 없어. 상대는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네가 뭘 틀린 적은 없잖아!”
“그야 그렇지만.”
“아니, 하나 틀렸죠.”
별안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루비니아 캐스너 양?”
“네, 네, 저랍니다?”
루비니아가 경쾌하게 말했다.
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꽃 장식으로 치장한 그녀는 허락도 없이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도도하고 오만한 표정으로 라우라를 내려다보았다.
“어머나? 꼴이 그게 뭐예요? 성공할 거라고 자신하더니.”
“내가 일어나면 당신 뺨 한 대 정도는 갈겨 줘야겠어.”
라우라가 눈을 부라리며 씨근덕거렸다. 루비니아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런 건 일어나서 말씀하시죠. 병자의 협박이 얼마나 위협적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네!”
“이 여자가 정말……!”
얼굴을 붉히며 몸을 움찔대는 라우라 대신 마리아가 급하게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여긴 어쩐 일이죠?”
루비니아도 싸울 생각은 아니었는지, 봄꽃 같은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누군가는 당신들을 돌보고, 동시에 감시해야 하고. 그 역할이 내가 된 거죠.”
“당신이 말을 전달해 주었다는 건 들키지 않은 거군요.”
“뭐, 평소에 우린 좀 많이 으르렁댔으니까요?”
루비니아가 깔깔 웃더니, 돌연 음울하고 사나운 얼굴을 했다.
“잡히진 않았다네요. 그게 궁금하겠죠?”
두 사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인가요?”
“아! 다행이야……. 우리 걱정한다고 돌아오면 어쩌나 했는데!”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키리에를 탈출시킨 거였지만, 정말 죽지도 않았으니 이제 키리에는 멀리멀리 달아나기만 하면 된다.
라우라의 얼굴이 밝아졌다.
“또 다른 건요, 캐스너 양? 다른 소식은요!”
“보채지 말아요, 짜증 나니까. 어련히 들어오면 알아서 말해 줄게요. 나도 이든 때문에 지금 정신없거든요?”
“아…….”
마리아와 라우라가 시선을 교환했다.
전설경에게 된통 당한 이후로 왕세자는 굴욕을 견디지 못했는지 별궁에 칩거 중이었다.
“자업자득 같긴 하지만, 동정은 할게요…….”
“아, 집어치워요! 됐어요. 난 내가 알아서 성공할 거니까.”
루비니아가 투덜대며 눈을 흘겼다.
“그러려면 당신들하고 떨어져야 하는데, 어쩌다 엮여서…… 흥.”
“그러고 보니 캐스너 양, 정확히 무슨 일로 키리에와 친해진 건가요?”
“누가 누구랑 친하다구요?”
“시녀 말을 들어보면 그런 것 같던데요. 키리에가 당신 만날 땐 웃기까지 했다던데요!”
“참 나, 고귀하신 7대 가문 영애랑요? 웃기지도 않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루비니아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었다. 그녀는 빛나는 녹색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고개를 팩 돌렸다.
“내가 왕실 서고에 들어갔던 게 덜미를 잡혔어요! 정말이지 그 여자, 그렇게 알차게 써먹을 줄이야.”
라우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왕실 서고요? 금지 구역인데?”
“알아요! 그냥 읽고 싶은 책이 많아서 갔을 뿐이에요…….”
“공부 좋아해요?”
“왜요, 당신도 내가 머리 빈 년처럼 보여요?”
루비니아가 날카롭게 대답했다. 라우라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머리 빈 여자라고 욕먹은 거라면 나도 만만치 않은데요. 그래서 지금 날 욕하던 그 인간들이 어디 있게요? 내가 손댄 게 다 성공하니까, 지금 포트듀케인의 발바닥이라도 핥으려고 쩔쩔매고 있거든요?”
라우라가 깔깔대며 웃었다.
“루비니아 양. 난 여전히 당신이 재수 없지만, 야망 하나는 알아줘야겠네요. 그렇지, 마리아?”
어쩐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감시당하는 중이었고, 어쨌든 루비니아 양 덕에 키리에를 탈출시킬 수 있었죠. 마리아 올드시우다드의 이름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무슨, 참, 웃기지도…….”
“라우라라고 부르는 거 허락해 줄게요.”
“됐거든요!”
루비니아가 짹짹거리며 소리를 내질렀지만, 기분은 좋아 보였다.
그러나 직후 문이 열리고, 세 사람의 몸이 굳었다.
“듣자 하니 꽤 재밌는 이야기더군.”
“……!”
“구, 국왕 전하!”
“전하!”
모두가 재빨리 예를 표했다. 국왕 진저 오레윈브리지는 성의 없는 손짓 하나로 그것을 받아넘겼다.
“신경 쓰지 말게. 흐음, 그보단 난 생산적인 이야기를 좋아해서 말이야…….”
연한 구스베리 색의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띠고서 루비니아에게 향했다.
“루비니아 캐스너 양. 왕실 서고에 연이 있다고?”
“이스라 지구의 몽트 산에서 연보라색 머리카락의 여자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올드시우다드 공작이 감정 없이 보고했다.
[끌고 와.]
그에 대답하는 나타니엘에게서는 평소의 나른함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깍지 낀 자세로 앉아, 끌려 들어온 노인을 응시했다.
[키리에를 봤다고?]
“허…….”
노인이 그의 외모에 감탄하든 말든, 나타니엘은 무심히 말을 이었다.
[연보라색 머리카락. 눈은 보라색이고, 키는 약 5.3피트. 마른 편에…….]
그러다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드물게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가, 이내 지워냈다.
[목이 가늘어.]
“……키리에가 누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외양의 처녀를 본 적은 있습니다.”
[생김새. 받아 적어.]
나타니엘이 명령하고, 올드시우다드 공작이 눈짓하고, 시종이 펜을 들었다.
“잠옷처럼 보이는 흰 원피스에, 금색으로 수놓은 파란 망토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얀 베일을 두르고 있었는데…….”
[베일?]
나타니엘의 눈이 예리해졌다. 노인은 침을 삼켰다.
“……아주 아끼는 모양이었습니다. 벗지 않으려 하더군요.”
[베일.]
나타니엘이 재차 중얼거렸다.
[고대의 유산인가 보군. 숲 짐승들이 보관하고 있었나.]
“예?”
[다른 건?]
“어…… 그게, 말을 못 하는 사람에게 뭘 묻기에도 어렵고, 아무래도 사연이 기구해 보여서…….”
노인의 말에 나타니엘과 올드시우다드 공작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말을 못 했다고?]
노인이 머리를 조아렸다.
“예. 그래서 그냥 누웠더니, 밤새 사라졌습니다…….”
[말을 못 했다는 건 확실한가?]
“입을 뻐끔거리며 손짓, 발짓을 했으니, 아마도…….”
[그래?]
나타니엘이 조용히, 일견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올드시우다드 공작이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보았다. 아무래도 키리에가 충격으로 말을 잃은 모양이니, 혹시 전설경이 일말의 인간적인 반응이라도 보일까 해서였다.
[그렇구나…….]
그러나 나타니엘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아주 부드럽고 애틋하기만 했다. 어디에도 죄책감의 부스러기조차 없었다.
공작이 소름을 삼켰다. 키리에 뷰캐넌이 ‘말을 잃었다’는 소리를 듣고도, 그저 자신의 지배력을 확인한 것에 기뻐하는 전설경이 두려웠다.
자신은 딸, 그것도 가문의 후계자가 인질로 잡혀 있는 이상 경거망동할 수 없다. 그건 포트듀케인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공작. 어쩌실 생각입니까?’
‘협조하는 수밖에 없겠소.’
‘하지만 키리에 그 아이도 우리가 오래 봐온 아이 아닙니까……. 딸애의 가장 소중한 벗입니다.’
‘나 또한 마음이 편치는 않소. 영리한 아이였으니, 부디 잘 도망치길 바랄 뿐이오.’
‘허어…….’
그들에게는 전설경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왕가는 궁에 마법사들을 모아 뭔가를 하기에 바빴고, 귀족들은 떨었으며, 평민들의 신앙은 여전히 굳건했다. 사람들은 종말의 때가 다가왔으며, 이경(二卿)이 악한 자들을 불사르고 선한 이들을 하늘로 데려갈 거라고 믿는 듯했다. 물론 거기엔 전설경이 뿌린 재화도 한 몫 거들었다.
그의 패도에 불만 있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소수였다.
‘그러고 보면, 그 소수 때문에 그 아이가 위험해질 상황조차도 감수하고 싶지 않은 겐가?’
문득 그런 생각을 한 올드시우다드 공작이 전설경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나타니엘은 그런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말했다.
[난 관찰하는 눈은 좋아하지 않아.]
“……죄송합니다.”
전설경은 다시 견고한 냉정의 갑옷을 입고 노인에게 물었다.
[그래서 너는 뭘 했니?]
“예?”
[내가 알기로 인간들은 욕망이 강하거든.]
“무슨 말씀이신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반문에, 나타니엘이 흰 눈처럼 아름답게 미소지었다.
[혹시 손이라도 댔을까 해서.]
노인이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그때 나타니엘의 뒤에서 올드시우다드 공작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노인은 눈치 빠르게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결단코 그런 적 없습니다! 길에 쓰러져 있기에 데려가, 그러니까, 손은 대지 않고, 정말 딸처럼 업기만 했고, 이불만 덮어 준 뒤 다시 산을 보러 나갔습니다!”
나타니엘이 진의를 파악하듯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을 노인을 바라보다가, 물러가라 손짓했다.
노인이 나간 뒤, 올드시우다드 공작이 조금 의외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죽이진 않으십니까?”
그 말에 나타니엘이 공작을 보았다. 황금보다 반짝이는 것 같은 푸른 눈이 기묘하게도 경멸의 기색을 비쳤다.
[너희는 항상 그렇게 생각하지.]
“예?”
[여차하면 죽이고, 수틀리면 죽이고, 이유 없이 죽이고. 아마 너희 머릿속에는 누굴 죽일 생각밖에 없는 모양이야.]
공작이 당황해 말을 잊었다.
‘누가 할 소리를?’
나타니엘은 별로 개의치 않고 고개를 돌렸다.
[모든 일에는 늘 이유가 있지. 그걸 아는 사람은 키리에뿐이었어.]
올드시우다드 공작은 그의 말에서 그리움이 비치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조속한 시일 내에 찾겠습니다.”
[나도 이동하지.]
나타니엘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손에는 검은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본 공작이 침을 삼켰다.
“하지만…….”
[레쇼의 영토로 이동한 걸 보면 서쪽이나 북쪽으로 이동해서 배를 탈 모양인가 본데, 그렇게 둘 순 없으니까.]
공작이 의아한 눈으로 나타니엘을 바라보았다.
“그 말씀은?”
[보면 알아.]
냉연하게 대답한 나타니엘은 곧고 단정한 걸음걸이로 걸어 나갔다.
다음 날, 트레베레움을 둘러싼 바다가 전부 얼어붙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
노인의 집에서 나온 키리에는 겨우 쉴 만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작은 산마을이었다. 키리에가 무너진 우사 같은 곳에 앉아 있자, 어느 중년 여인이 헛간이라도 좋으면 쉬었다 가라고 말해 주었다.
키리에는 깜부기불을 놓고 쉴 곳이 생기자 겨우 잠이 들었다. 그마저도 오래 자진 못했다.
‘결국 누나는 죽지 않네요.’
‘아론. 미안해, 미안해…….’
‘그냥 살고 싶은 거 아니에요?’
아론이 선한 얼굴로 빈정대듯 말했다. 키리에가 괴롭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그저…….’
‘이기적이네요. 애초에 누나가 전설경을 깨우지만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인데.’
‘내가 깨운 게 아니라 초대 뷰캐넌 공작의 마법이야!’
‘변명이에요.’
일순, 꿈속 아론의 얼굴이 세자르로 변했다. 그는 길가의 쓰레기를 보듯이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내 말을 들었어야지. 왕세자에게 잘 알랑거렸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으냐.’
‘아버지…….’
‘넌 정말 쓸모라곤 없구나.’
마지막은 항상 수많은 근위병, 더해서 빈민가에서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외쳤다.
‘네가 정말로 그에게서 도망쳤다고 생각해?’
베이고, 갈라지고, 찢겨 나가고, 피와 눈이 엉켜 뒤범벅된 끔찍한 모습의 사람들이 키리에에게 달려들었다.
꿈속의 키리에가 절규하면, 현실의 키리에가 물속에서 빠져나오듯 꿈에서 깨어났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얼어붙은 발을 붙잡고 몸을 웅크렸다.
창문 너머로는 달빛과 함께 가지에 눈이 쌓인 갈매나무 군집이 보였다. 나무의 그림자가 마치 무리 지은 사람들처럼 보여, 키리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것도 연극?’
그녀가 충혈된 눈으로 헛간 문을 바라보았다.
‘전부 연극? 도망쳤다고 생각하는 것도 내 착각? 사실은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닐까? 나타니엘과, 그가 명령 내린 모두가…….’
그게 가장 두려웠다. 다행히 더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키리에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망토에 얼굴을 묻었다.
‘추워.’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생존을 위협당한 인간의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이 잠들면, 나타니엘이 종종 창문을 통해 방에 들어왔다. 그는 키리에가 잠든 모습을 조금 살펴본 뒤, 침실을 나가 안네마리와 이야기를 나눴다. 밥은 먹었는지, 누군가 신경을 거스르진 않았는지, 몸에 상처 날 일은 없었는지 등등.
그건 분명 애정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짐승, 혹은 아직 제구실 못 하는 어린아이를 돌보는 듯한 행동이었다. 혹은 오르골에 기름을 먹이는 행동일 뿐이거나.
그는 제가 아닌 그 누구도 키리에를 상처 입히게 두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소유욕.’
나타니엘은 키리에가 그를 미워하거나, 두려워하길 바란다.
그를 향한 감정으로 온 생애를 불태우게 하는 것이야말로 상대의 마음까지 소유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지금까지만 보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만나는 모든 사람이 의심스러웠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전부 연극배우일까 두려웠다.
‘결국엔 모든 게 나타니엘의 뜻대로 되는 걸까?’
키리에는 자신의 마음이 무너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추위와 허기, 초조는 생각보다 더 많이 그녀의 신경을 갉아 먹었다.
모든 걸 다 포기하고 모른 척 살아갈까 하는 생각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의 의지를 북돋웠다.
‘안네마리는 아가씨를 구하러 왔어요.’
키리에는 몸을 좀 더 작게 웅크리며, 자신을 위해 희생한 이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들이 진정으로 원한 것을 이뤄줘야만 했다.
‘나타니엘에게서 온전히 벗어나야 해……. 하지만 어떻게?’
창밖의 갈매나무와 눈앞의 등걸불을 바라보며, 키리에는 계속 나타니엘과 자기 자신에 대해 새김질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타니엘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슬픔이 몰려 왔다. 하지만 삶에는 울면서 자기 심장을 퍼먹어야만 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가만히 무릎에 뺨을 기댄 채, 키리에는 절망 속에서 끊임없이 답을 더듬어 나갔다.
‘나는 나타니엘을 바꿀 수 없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
안네마리가 준 베일은 신기한 물건이었다. 키리에가 떠난 자리에는 냄새, 발자국, 인기척, 하다못해 머리카락 한 올조차 남지 않았다. 사람들은 오로지 키리에가 시야에 들어왔을 때만 그녀의 존재를 감지했다.
키리에는 몰래 짐마차를 얻어 타며 북서쪽으로 이동했다.
근방의 제일 큰 항구는 클라시코지만, 포트듀케인의 활동이 활발했다. 귀족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갈 수 없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클라시코 옆의 항구 도시 레드로우트였다. 북대륙으로 가는 배가 있을 정도로는 큰 도시면서, 보다 유동 인구는 적은.
안네마리가 대륙을 떠나라 했으니, 레드로우트에서 북대륙으로 가는 상선을 잡아탈 생각이었다.
하지만, 키리에의 기대는 항구 앞 선술집에서 박살 났다.
“배? 운행 안 하는데?”
점심이라 한가한 모양인지, 점원이 글라스를 닦으며 턱짓했다.
“꽤 됐소만, 어디 산에서 살다 왔소?”
“아, 아아.”
키리에가 대답 대신 목을 가리켰다. 점원이 움찔했다.
“말을 못 하나? 뭐, 듣기만 하쇼. 이 근방은 다 비상이요. 뱃길은 다 끊겼고, 선원들은 백수가 됐고. 듣기론 원양만 얼지 않았다는군.”
나타니엘의 짓이다.
키리에의 반응이 사라지자, 점원이 글라스를 닦다 말고 망토 안쪽을 들여다보려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얼굴인데…….”
키리에가 급하게 망토를 더 눌러썼다. 하지만 이미 점원이 키리에의 얼굴을 본 뒤였다.
“흠, 죽을상만 안 하면 더 잘 생각날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뭔가를 궁리하던 점원은 별안간 큰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웃었다.
“아! 알겠구먼! 그 형씨 닮았잖소! 남매요?”
좀처럼 무시하기 힘든 말이다. 키리에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점원이 키리에의 뒤를 향해 마른걸레를 든 손을 흔들었다.
“안 그래도 저기 오는군. 어어이!”
“여! 루퍼트! 장사 잘되나?”
키리에의 몸이 굳었다.
익숙한, 그러나 여기서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목소리였다. 점원은 호쾌하게 웃으며, 키리에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 버렸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녀, 뷰캐넌 형씨! 여기 형씨랑 똑 닮은 여자가 다 있소!”
‘도망쳐야 해.’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키리에는 등 뒤의 남자가 옆까지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재빨리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뭐야, 왜 도망쳐?”
그러나 남자는 그것을 예상했는지 손쉽게 키리에의 손목을 잡아챘다.
“윽……!”
“수상한데? 입은 건 아무리 봐도 고급품이고.”
“거, 형씨. 좀 살살 다루시오. 성질머리 하곤!”
“난 충분히 살살 잡았어! 얼굴이나 좀 봐야겠네. 그렇게 나랑 닮았다고?”
키리에가 힘껏 도망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키리에의 양 손목을 쥔 남자가 모자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어?”
남자,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레이 뷰캐넌의 보라색 눈이 커졌다.
“뭐야. 네가 왜 여기 있냐? 마중이야? 이상하다, 말 안 했는데!”
키리에가 눈을 질끈 감고 손바닥으로 그레이의 입을 막았다. 그레이는 바로 혀로 손바닥을 핥았고, 키리에는 기겁한 얼굴로 급하게 다시 손을 떼어냈다. 그 모습에 그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와! 엄청 오랜만이지? 잘 지냈냐?”
키리에가 다시 입을 막으려 들자, 그레이는 고개를 뒤로 빼 피했다. 그리고 씩 웃었다.
“나가서 얘기하잔 거지?”
여전히 눈치가 빠르다. 키리에가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선술집 뒤쪽의 골목으로 향했다. 쓰레기와 죽은 쥐가 있긴 했지만 사람은 없었다.
그레이가 인상을 쓰며 헛웃음 쳤다.
“그래서,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여동생아?”
그레이 뷰캐넌은 뷰캐넌 공작가의 적장자다. 그는 외탁이라 제냐 하트우드를 닮았고 금빛 곱슬머리를 가졌지만, 또렷한 이목구비는 분명 키리에와 닮은 곳이 많았다.
성격은 매우 다른 편이다. ‘언제든 무리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라는 분류가 생긴다면 그레이 뷰캐넌은 반드시 거기에 들어가고, 또 그 안에서도 중심이 될 사람이었다.
그는 한층 진화한 글라디오소 같은 성격으로, 외향적이고, 용맹하며, 늘 당당하고 시원시원했다.
무엇보다 눈치가 빨랐다.
“너 가출했냐?”
“…….”
그레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키리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꼴도 이상하고, 도망치려고 하고……. 흠. 가출이네.”
키리에는 당황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나 빨리 들켜 버렸다. 그것도 친오라비에게.
외국에 나가 있던 그레이를 불렀다는 건 분명 들었다. 하지만 당연히 대도시인 클라시코나 셀 아렐라노 주변의 거점 항구인 테소로로 향하리라고 생각했다.
‘어떡하지?’
피로 탓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 키리에를 보며 그레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지랑 싸웠냐? 의외네. 너는 말 잘 듣는 애 아니었나?”
“…….”
“왜 대답을 안 해?”
키리에가 잠자코 손바닥으로 목을 감쌌다. 그레이가 보라색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실어증?”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속이는 게 아니라?”
키리에가 고개를 저었다.
그레이가 잠시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자다운 입술 사이에서 흥미롭다는 듯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래?”
주변에는 여전히 사람이 없었다.
뒤늦게 뭔가를 눈치챈 키리에가 재빨리 몸을 피하려 했으나, 이미 큰 주먹이 키리에의 명치로 날아온 뒤였다.
“흑!”
키리에가 단말마를 흘리며 쓰레기 더미 위로 쓰러졌다.
“어?”
그 모습을 보며, 그레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을 내밀었다.
“너 진짜 말 못 하게 됐구나? 예전 같았으면 바로 시끄럽게 굴었을 텐데. 하하, 이거 참. 미안하다. 확인 좀 해 보느라!”
키리에가 쓰러진 채 이를 악물고 그레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레이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면서도, 그저 여유로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키리에가 절대 자신을 이길 수 없다는 걸.
“뭐하냐. 안 잡아?”
뷰캐넌의 작은 폭군, 그레이 뷰캐넌.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를 마주쳐 버렸다.
***
결국 직접 일어난 키리에를 보고도, 그레이는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근데 너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 아버지는?”
그레이가 뒤늦게 흠칫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는 가증스럽게도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말 못 한댔지? 어떻게 한다…….”
여동생이 갑자기 실어증에 걸린 것을 보고도 사정을 묻지 않는다. 관심조차 없다. 그의 ‘포용력’은 굉장히 선택적으로 발휘되는 능력이었다.
‘어떻게든 도망쳐야 해.’
키리에가 슬그머니 퇴로를 살폈다.
‘시야에서만 벗어나면 베일의 힘으로 잡히지 않을 수 있어.’
하지만 그레이는 정말로 눈치가 빨랐다. 그가 바로 유쾌하게 말했다.
“도망가려고? 그러지 마라. 오랜만에 만난 오빠인데 이야기 좀 나눠야지. 응? 어차피 금방 잡을 수 있거든.”
“…….”
키리에가 묵묵히 그레이를 노려보았다. 잘 갈무리된 분노의 시선에도, 그레이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아까 봤지? 여기 항구 사람들이랑 좀 친해져서 말이야! 하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키리에를 두고, 그레이는 재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좋아! 일단 내가 묵는 곳으로 가자! 나도 내가 없는 새에 트레베레움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하거든!”
그레이가 키리에의 손목을 잡아챘다. 자비 없는 힘이었다.
“아읏!”
키리에가 신음해도 그는 힘을 놓지 않았다. 키리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베일이 벗겨지지 않게 여미는 것밖에 없었다.
골목을 나와 거리로 들어서자 수많은 사람이 그레이에게 말을 걸었다.
“여, 뷰캐넌 형씨! 오늘은 판에 안 오나?”
“오! 헨리! 오늘은 내가 볼일이 있어서 안 되겠는데? 내일 따줄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맨날 말만 그렇게 하곤 지잖수! 하하하!”
“내가 본 실력을 숨겨서 그런 거야, 숨겨서!”
“아무튼 다음에 봅세!”
“응! 아, 신디! 어디 가나?”
무슨 아는 사람이 그리도 많은지, 과장 좀 보태서 지나가는 사람 전부와 인사하는 것 같았다.
“어머나…… 뷰캐넌 님 아니세요. 점심 식사는 하셨나요? 안 하셨다면 같이 들고 가세요.”
책임까지 내팽개치고 도망쳐 온 가문의 이름에 키리에의 몸이 움찔했다. 대신 그레이가 흐린 데 없이 밝게 대답했다.
“그레이라고 부르라니까? 하하, 식사는 됐어! 오늘은 선약이 있거든!”
“아쉽게 됐네요.”
그레이가 친숙하게 사람들과 대화하는 소리를 들으며, 키리에는 덜덜 떨었다. 갈수록 몸이 오그라들고 호흡이 어려워졌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과거의 기억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광장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수백 명의 눈.
“우윽…….”
키리에의 걸음이 멈췄다. 뒤집힌 매미처럼 다리가 벌벌 떨려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허억…….”
“뭐야. 야. 괜찮냐?”
그레이가 거리 한가운데서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키리에의 얼굴을 살폈다. 키리에는 대답하지 못한 채 숨만 헐떡였다.
그레이는 잠깐 침묵한 뒤, 키리에를 짐짝처럼 들어 어깨 위에 얹었다.
“자자, 지나갑니다!”
뒤집힌 채 들려 있자니 토할 것 같았지만, 그랬다간 그레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키리에가 힘겹게 숨 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레이 님. 어머나, 그 사람은?”
“응! 내 여……!”
꺽꺽대는 소리를 내면서도, 키리에가 황급히 그레이의 입을 막았다.
그레이가 눈을 깜박거렸다. 이번에는 손바닥을 핥는 괴행각은 없었다. 그는 눈치 빠르게 샐쭉 웃으며 키리에의 손을 치워냈다.
“내 여자야!”
그레이의 선언에 길 가던 남자가 갑자기 휘파람을 불었다.
“오! 얼굴 좀 보여 주쇼!”
“싫다! 나만 볼 거야!”
“본다고 닳나?”
“보니. 보니는 성질 때문에 눈깔도 드러워서 보면 닳거든?”
“뭐야!”
그레이가 웃으며 사람들을 지나쳤다.
마침내 그레이가 묵고 있는 고급 여관의 방에 들어서고 나서야, 그는 키리에를 던지듯 바닥에 내려놓았다.
“푸하, 난 비밀은 못 만들 성격이야! 숨기느라 혼났네! 그런데 너 진짜 왜 그러냐? 못 본 사이에 좀…… 등신 같아졌다?”
겨우 사람들의 시선에서 풀려난 키리에가 힘겹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레이는 그녀가 정상 호흡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됐냐?”
키리에가 젖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레이가 비죽 웃었다.
“넌 맨날 그런 눈이지. 뭐, 됐다. 이 나이 먹고 남매 싸움하는 것도 우습지 않겠냐. 자!”
그가 무언가를 던졌다. 종이와 펜이었다.
“필담이 낫겠지? 넌 글씨체는 예쁜 편이었지!”
그레이가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침대에 앉아 팔짱을 꼈다. 키리에는 비틀거리며 다가가, 선 채로 글씨를 휘갈겼다.
「놓아줘.」
“흠. 여동생아. 그건 내가 물은 게 아닌데?”
그레이가 머리를 긁었다. 다소 순진한 표정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그 승냥이 같은 아버지가 쓸데없이 날 부를 리는 없고. 엄마라도 죽였대? 아니지, 그 여자가 아버지 손에 죽을 리 없으니 반대인가?”
키리에는 펜을 든 채 난관에 봉착했다. 근 몇 달간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설명한대도, 그레이가 자신을 놓아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머리 굴리는 소리 들리네.”
그레이의 조용한 말에 허를 찔린 키리에가 흠칫 놀랐다.
“너 설마 글자도 잊었냐?”
그레이가 성큼성큼 일어나 다가왔다. 키리에가 도망치기도 전에, 그가 우악스럽게 키리에의 손을 붙잡았다.
“자, 이게 글씨 쓰는 법인데. 기억나니?”
펜대를 쥔 키리에의 손을 그레이가 꾹 눌렀다. 나무로 된 펜대에 뼈가 강하게 짓눌렸다.
“아윽!”
“아냐, 아냐, 그런 말은 없다고. 잘 봐!”
그레이가 웃으며 더 강하게 손가락뼈 부근을 움켜쥐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손뼈를 우그러뜨리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키리에가 있는 힘껏 그레이를 밀쳤다. 고작 두 발자국, 그것도 ‘놓아준다’는 느낌으로 물러난 그레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기억났다고? 좋아. 그럼 차례대로 말 좀 해 줘, 동생아! 아버지가 왜 날 불렀는지.”
키리에가 이를 악물고 글씨를 썼다.
「수도의 권력 관계가 바뀌었어. 뷰캐넌은 공작가가 되었고, 왕권이 추락했어.」
“뭐? 오레윈브리지 왕조가?”
「아버지는 네게」
“‘오빠에게’겠지?”
펜촉이 거칠게 앞부분을 긁어 잉크로 덮었다.
「오빠에게 공작가의 일을 맡기려 해.」
“윽. 뭐야! 그런 귀찮은 일이나 시키려고 부른 거였어? 난 또 드디어 작위를 물려주려나 했는데. 나 참, 그런 건 애초에 네가 하고 있었잖아!”
그레이가 이마를 짚으며 큰 소리로 한숨 쉬었다.
“설마 너 그래서 도망친 거였냐? 하기 싫어서?”
잠시 망설였던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뜻대로 사는 것에 지쳤어. 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날 봤다는 걸 알리지 말아 줘.」
그레이가 씩 웃었다. 해맑고 장난스러운 미소였지만, 키리에는 그 안에서 세자르와 같은 교활함을 엿봤다.
“알고 있겠지만 너도, 나도 귀족이지. 거래는 맨입으로 하는 게 아니잖아?”
두 쌍의 보라색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키리에가 입 모양으로 물었다.
‘뭘 원해?’
“역시 넌 계산이 빨라. 뭐, 늘 머리는 나보다 좋았지.”
그레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레이의 요청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것이었다.
“바다 언 거 봤지? 알다시피 바다 사람들은 미신에 약해. 그들은 이게 불길한 징조고, 바다에 산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네가 제물 역할을 좀 해 줬으면 좋겠어!”
그는 키리에가 인상을 찌푸리기도 전에 손을 내저었다.
“물론! 진짜 너를 바다로 쏙 던지겠다는 건 아니야. 시늉만 해 줘, 시늉만.”
「미쳤어?」
그레이가 울컥했다.
“나도 이런 미신은 안 믿어! 그런데 마을 회의에서 사람들이 막 울고불고하더라고. 자기 딸은 싫다면서. 어찌나 진지하던지.”
「이 지방 사람들은 아들이 없나 보지?」
“에이, 너도 알잖냐. 아무래도 상징적인 의미라는 게 있잖아. 생각해 봐, 어느 신이 털 숭숭 난 시커먼 아저씨를 받고 좋아하겠어?”
키리에는 말을 못 하는 게 처음으로 답답해졌다. 그녀가 빠르게 펜을 휘갈겼다.
「네 목 위에 있는 게 머리가 아니라 호박이란 건 잘 알겠어. 내가 여기 안 왔으면 어쩌려고 했는데? 정말 죄 없는 여자를 바다에 던지려고 했어?」
“그거야 아니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다잖아? 넌 여기에 있고, 그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지.”
「똑바로 대답해.」
그레이가 물끄러미 키리에가 쓴 글자를 바라보았다.
“죄만 있으면 되는 거잖아? 죽어도 싼 놈들은 어디에나 있지.”
「오. 위대한 그레이 뷰캐넌께서는 그걸 결정하고 단죄할 뭐라도 되시나 보지.」
“너 진짜 꼬장꼬장하다. 그 성격 아직도 안 고쳤구나?”
「귀족으로서 그런 근거 없는 풍속을 없앨 생각은 못할망정-」
그레이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종이를 빼앗았다. 그리고 눈앞에서 쫙쫙 찢어 버렸다.
“그러니까 네가 도우면 되잖아?”
그가 위협하듯 성큼 거리를 좁혔다. 키리에가 펜촉의 예리한 부분을 앞으로 내밀었지만, 그레이는 손쉽게 그것을 빼앗아 등 뒤로 던졌다.
“네가 해라. 내가 도와줄게. 설마 내가 정말 여동생을 죽게 두겠어? 그냥 배에서 몸을 던지는 시늉만 하면, 밑에서 다른 작은 배가 받아 줄 거야.”
키리에가 그레이를 노려보았다. 그레이가 해맑은 얼굴로 웃었다.
“안 그러면 난 네 말 대로, 죄 없는 다른 마을 처녀를 하나 정해서 적당한 죄목을 만들어 준 다음, 바다로 던져 버릴 거야.”
키리에의 눈이 혐오를 담아 그레이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이게 그레이 뷰캐넌이다. 그의 인류애란 늘 다분히 작위적이고, 다분히 선택적이었다.
“마을 전체가 끙끙 앓느니 한 사람이 희생하는 게 낫잖냐. 그렇지, 키리에 ‘뷰캐넌’? 이건 네가 하던 방식이잖아?”
뭐가 재밌는지 그가 키득거렸다.
“반면 네가 날 도와준다면, 누구에게도 너에 대해 말하지 않고 놓아주지. 꼴을 보니 마차도 한 대 필요할 것 같고. 어떠냐?”
역시 그는 세자르 뷰캐넌, 그 승냥이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키리에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둄2 절갠 교환재공타싸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