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개막
며칠 뒤, 키리에는 레쇼를 방으로 불렀다.
“잘 오셨어요.”
키리에가 미소 지으며 레쇼를 맞이했다. 침대를 뺀 방을 비단 방석으로 가득 채운 그녀는 손가락으로 주변을 설렁설렁 가리켰다.
“아무 데나 앉으세요.”
〔서 있는 게 편합니다.〕
“그럼 그러세요.”
키리에가 길게 누운 채 묶인 손목을 꼼지락댔다.
“안네마리. 다과 좀 내오고 나가 있어.”
“하지만…….”
“호국경이시잖니. 안전할 거야. 나를 지켜 주실 거거든. 그렇죠, 레쇼 경?”
레쇼는 그녀의 느른함 속에 숨겨진 냉소를 눈치챘다.
〔물론입니다.〕
“들었지?”
안네마리가 잠시 ‘그런가?’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을 했다가, 결국엔 키리에의 말을 따랐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키리에는 아무 말 없이 늘어져 피로한 눈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눈은 좀 오지만 날이 좋네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레쇼의 대답에 키리에가 눈을 느리게 두 번 깜빡거렸다.
“신기하네요. 나타니엘은 거짓말은 안 하는데.”
레쇼가 드러나지 않게 놀랐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눈치는 피식자의 미덕이라고들 하죠. 다과 드시겠어요?”
〔생각 없습니다.〕
“아, 저돈데. 그럼 저건 장식품인 걸로 하죠.”
키리에가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지만, 팔에 힘이 빠졌는지 미끄러졌다.
“윽…….”
다행히 쿠션들 덕에 다치지는 않았지만, 꿈틀거리며 자세를 바로잡는 모습이 여간 힘겨워 보이는 게 아니었다.
키리에의 손목은 리본을 푸는 일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게 분명할 정도로 꼼꼼히 묶여 있었다. 발목도 마찬가지였다. 종종걸음으로 걸을 정도는 되지만, 뛰지는 못할 정도의 길이.
그야 그럴 것이다. 나타니엘은 그녀가 뛰어서 도망가게 두고 싶지 않을 테니까.
레쇼는 쿠션을 감싼 앙상한 팔을 보고서 드물게 먼저 입을 열었다.
〔곡기를 끊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또 소문이 났나요? 이러다 제 달거리가 언제인지도 모두가 다 알겠네요.”
레쇼가 불편한 얼굴을 했기 때문에, 키리에는 쓴웃음을 지었다.
“진짜군요. 어쩐지 단 것을 줄기차게 내오더라니.”
〔몸을 챙기는 게 좋겠습니다.〕
“나타니엘을 위해서요?”
〔당신 자신을 위한 일도 됩니다.〕
“식사 좀 걸렀다고 사람을 밀가루 속에 처넣는 일이 어떻게 나를 위한 일이 되나요?”
키리에 뷰캐넌이 곡기를 끊자 나타니엘이 사람을 시켜 나무로 거대한 통을 만들고, 그 안에 밀가루와 물과 키리에 뷰캐넌을 던져 넣었다는 일화는 이미 수도에 소문이 파다했다.
키리에 뷰캐넌을 다시 보기 전까지는 레쇼 역시 나타니엘이 과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보니 그가 옳았다. 야회가 더는 열리지 않는 이유도 명백했다. 키리에 뷰캐넌은 지금 앙상한 겨울 자작나무 같았다.
〔필요한 건 없습니까?〕
“요즘은 다 그런 걸 묻네요.”
키리에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영양실조 탓에 갈라지기 시작한 손톱 끝으로 방석 술을 잡아당겼다. 레쇼는 아주 잠깐 그것을 말릴지 말지 고민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지금 그녀는 방석 술한테도 질 것 같았다.
“움직이기만 해도 필요한 게 있으세요? 어쩌다 설렁줄이 바람에 흔들리기만 해도 뭘 드릴까요? 창가에서 기지개만 켜도 하인들이 달려와 불렀느냐고 묻죠.”
〔싫습니까?〕
“경은 누가 경의 몽정일을 기록하면 기분이 좋겠어요?”
레쇼가 입을 다물었다. 키리에는 무엇이 웃긴지 혼자 키득거리다 그것마저 힘에 부치는지 반쯤 누운 자세를 취했다.
“바른 자세로 맞이하지 못하는 점을 용서하셔도 되고 용서하지 않으셔도 되고.”
〔상관없습니다.〕
“그러실 거라 생각했죠.”
키리에가 마른 숨을 내뱉었다.
그녀가 입을 다물자 지독한 정적이 흘렀다. 의미 없이 식어 빠진 차를 바라보던 키리에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래서 당신을 불렀어요.”
고요한 호수의 수면 같던 키리에의 눈에 서서히 슬픔이 떠올랐다.
“……내가 죽는 걸 도와줄 순 없나요?”
레쇼가 일말의 당황도 없이 묵묵히 그녀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왜 죽으려고 합니까?〕
“제 마지막 책임이에요.”
〔그 죽은 근위병 때문입니까?〕
키리에가 흠칫했다.
“아론은…….”
그녀가 천천히 손을 뻗어 멀리 있던 잔을 들었다.
“그 아이 때문은 아니에요……. 저는 원래부터 책임감 하나로 살아온 사람이고, 책임질 게 아무것도 없는 지금, 살 이유도 없어졌을 뿐이에요.”
〔당신이 나타니엘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죽으려고요. 마음 같아선 내 암살이라도 사주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그 암살자가 화를 입을 테니…….”
키리에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찻잔을 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레쇼가 다가가 그녀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내려놓았다.
〔도와줄 수 없습니다.〕
“역시 그런가요.”
키리에가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나도 인간을 초월해 당신처럼 강해질 수는 없을까요?”
레쇼가 눈을 깜빡였다.
〔지금 당신의 상태로는 불가능합니다.〕
“왜죠?”
〔체력이 없습니다.〕
“아.”
키리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세상에.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네요.”
〔장난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알아요. 누구신데.”
키리에가 입가에 작은 웃음을 남겨 놓은 채 길게 몸을 뉘었다. 햇빛 아래서 은빛으로 보이기도 하는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제가 왜 그런 걸 물었는지는 알고 계시죠?”
〔당신 자신이 강해지면 나타니엘이 당신의 감금을 풀어 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맞아요. 그럴 수 있을까요?”
레쇼가 잠시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그럴 겁니다. 하지만 나를 참고하고 싶다면 좋은 선택은 아닙니다.〕
“어려운 길이라서요?”
레쇼는 대답 대신 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부터 손잡이까지 전부 새까만 양손 검이었다. 글라디오소의 검만큼이나 거대했지만, 그처럼 조잡한 느낌은 없고 오히려 아름다웠다.
〔인간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을 몰아붙인 뒤 운 좋게 ‘깨달음’을 얻어야 자신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먹빛 날에 홀렸던 키리에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경은 검술이군요.”
〔맞습니다. 나는 나타니엘에게 검술을 사사 받았고, 그것으로 진리가 있다는 지평선 너머를 잠깐 엿보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어려울까요?”
〔사람에겐 각기 다른 깨달음의 방식이 있습니다. 뭘 하든 죽기 직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면 됩니다.〕
레쇼가 들어 보라는 듯이 자신의 검을 내밀었다. 키리에는 거절했다. 무게도 무게이거니와, 그의 검은 남의 손을 타면 안 될 것 같은 품위가 있었다.
레쇼가 점잖게 검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당신이 뭘 하든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찻잔도 무거워하는 그 몸부터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겁니다.〕
“강해지기 위한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붉은 보라색 눈이 키리에를 응시했으나, 대답은 없었다. 키리에는 그가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손을 내저었다.
“제 단식을 관두게 하려고 그냥 하시는 말씀은 아니죠?”
〔아닙니다. 하지만 식사는 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까부터 제 배에서 부끄러운 소리가 나긴 했죠.”
〔관심 없습니다.〕
“알아요.”
물 흐르듯 이어지던 대화가 끊겼다. 키리에는 연보라색 잉어처럼 방석 위에 누워 중얼거렸다.
“육예(六禮)를 전부 익혔는데 정작 이런 상황에 쓸 재주는 없네요. 죽기 직전까지 자수를 놓을까? 하지만 바늘을 주지 않을 것 같네요.”
〔단순히 행위를 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정신적 고양 상태로 몰입해야만 합니다.〕
“농담이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셔도 돼요.”
키리에가 보랏빛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소모되는지 점점 표정이 무료해지고 있었다.
그 무료의 끝은 어디일까? 종착지가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죽음일 게 뻔하니까. 단 하나 걱정되는 것은, 그 죽음에 나타니엘이 보일 반응이다.
레쇼가 검 손잡이를 쥐었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조금 슬프다고 느꼈다.
〔키리에 뷰캐넌.〕
키리에가 고개를 들어 레쇼를 보았다.
〔당신이 죽으면 나타니엘이 멀쩡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키리에의 얼굴에서 단숨에 호의가 사라졌다.
“저는 그냥 죽고 싶을 뿐이니 그런 거시적인 문제는 나타니엘과 이야기하시는 게 좋겠네요.”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타니엘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줄 압니다. 그저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키리에가 무거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경은 제 마지막 희망까지 가볍게 앗아가시네요.”
〔미안합니다.〕
제비꽃 색 눈에 깊은 슬픔이 떠올랐다. 키리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공허한 얼굴로 카펫 위에 일렁이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나는…… 나는 잘 모르겠어요.”
작고 슬픈 중얼거림이 그 위에 얹혔다.
“분명 더 나은 방식이 있었을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을 듣자마자, 레쇼는 벼락이라도 친 것처럼 갑작스레 나타니엘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나타니엘의 과거는 모르지만, 발라브리가의 최후가 어땠는지는 안다.
발라브리가는 나타니엘을 잠들게 한 이후로 죽은 나타니엘이 되돌아와 자신에게 복수할 거라는 망상에 시달려 미쳐 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게 보통일 것이다.
그런데 키리에 뷰캐넌은 나타니엘을 미워하면서도 그를 향한 증오에 매이지 않았다. 그녀는 복수나 증오, 분노에 매몰되어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와 달리. 그리고 아마 그 이전의 사람들과 달리.
〔……키리에 뷰캐넌.〕
그걸 깨달아 버린 레쇼는, 천천히 키리에 앞에 무릎을 꿇고 정좌했다.
〔딱 하나, 방법이 있습니다.〕
키리에의 고개가 돌아갔다. 레쇼가 말을 공기 중에 눌러 담듯이 또박또박 말했다.
〔그를 복종시키는 겁니다.〕
잠시나마 기대감을 보였던 키리에가 바로 김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누가 이렇게 정신 나간 말을 하나 했는데, 그게 호국경 당신이 맞네요.”
〔정신 나간 말처럼 들립니까?〕
“누가 나타니엘을 길들일 수 있죠? 그는 강하고…….”
〔맞습니다. 그는 강합니다. 그야말로 유사 이래 단 한 번도 길든 적 없는 창백한 말이라 하겠습니다.〕
“경은 저를 낙담시키기 위해 온 흰 말인가요?”
〔하지만 당신은 지금 그 말의 유일한 기수입니다.〕
키리에의 눈이 흔들렸다.
레쇼는 다음 말을 하기 전에 조금 망설였다.
그도 키리에 뷰캐넌에게 지워진 짐이 과중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거기에 한 짐을 더 얹어 주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명백했다.
레쇼는 담담히, 키리에 뷰캐넌의 머리 위에 가시 면류관을 바쳤다.
〔그리고 아마 당신 다음은 없을 겁니다.〕
‘무슨 상관이야.’
키리에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키리에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한다. 나타니엘은 그걸 알면서 키리에를 고립시켰고, 키리에는 그에게 졌다. 진 이상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키리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은 하루빨리 죽어야 한다고.
밀폐된 방에 갇히고, 학살을 목격하고, 친밀했던 사람의 죽음을 겪고, 그 사람에게서 죽어달라는 이야기를 들은 키리에의 정신은 착실하게 망가지고 있었다.
***
“안 나간다고요?”
[그래.]
응접실 소파에 앉아 책을 펼치고 있던 나타니엘이 그녀를 보지도 않고 답했다. 옆에 앉은 키리에의 눈이 좌우로 굴러갔다.
“왜요?”
[그러고 싶으니까.]
“바쁘잖아요.”
[걱정 고맙구나.]
키리에가 침대 기둥의 비밀 공간에 숨겨 놓은 상아 체스 말을 떠올렸다. 나타니엘이 있는 자리에서 꺼낼 수는 없었다.
“알았어요.”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인 뒤 리본에 묶인 손목을 내밀었다.
“책 읽을 거예요.”
[읽어 줄 사람을 부르렴.]
“이런 꼴 보이고 싶진 않아요.”
키리에가 재차 손목을 내밀었다. 나타니엘이 그제야 책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물끄러미 여린 손목을 응시하던 나타니엘은, 들고 있던 책을 콘솔 위에 내려놓고 손을 내밀었다.
“뭐예요?”
[읽어드리지.]
키리에의 눈에서 바로 열의가 사라졌다.
“그럼 됐어요.”
그녀는 금세 시큰둥해진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엉켜 있던 발목의 리본이 꼬였다.
“아!”
넘어지려는 키리에를 나타니엘이 빛보다 빠른 속도로 잡아챘다.
키리에는 고맙다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 사달을 만든 장본인에게 고마울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놔줘요.”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그야 분명 또 잔소리를 할 것이다. 식사를 걸러서 그렇다는 둥, 걸음마 교육이 필요하면 말하라는 둥.
그러나 나타니엘은 묘하게도 약간 언짢은 기색으로 팔을 놓았다.
[레쇼의 검이 네 허리보다 굵겠어.]
“그 정돈 아니던데요.”
[재보기라도 했나 보지?]
나타니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레쇼와 관련된 일에는 유독 예민해진다는 것을 아는 키리에는 말을 삼킨 채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나타니엘이 막 풀릴 참이던 팔을 다시 조였다. 그리고 소파 위에 앉더니, 키리에를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뭐하는 거예요?”
키리에가 사납게 눈을 치떴다. 나타니엘은 마치 그녀가 승부라도 건 양 도전적인 미소를 지었다.
[읽어드리겠다고 했잖니.]
“이제 필요 없어요.”
[내가 필요해.]
“왜요?”
[따분하거든.]
키리에가 나타니엘의 다리 사이에서 몸부림쳤다. 그러자 나타니엘의 구두가 바로 키리에의 발목을 묶은 끈을 밟아 버렸다.
키리에가 얼굴을 찡그렸다.
“사람들이 오해할 거예요.”
[아무도 안 와.]
도무지 놓아줄 것 같지가 않다. 키리에는 침울한 심정이 되어 몸을 움츠렸다. 최대한 나타니엘과 떨어지기 위해서였으나, 나타니엘은 아무 경고도 없이 그녀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그 동작에 아무런 사심이 없다는 점이 또 그의 놀라운 부분이었다.
[1장. 공예의 이해.]
나타니엘은 키리에가 골라온 책을 집어 들어, 정말로 읽기 시작했다.
[공예란 실용적인 물건에 장식적인 가치를 부가함으로써 그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미술이다.]
불시의 접촉에 신경이 곤두서 있던 키리에가 일순 감탄을 흘렸다. 말하는 사람이 나타니엘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너무나도 완벽하게 감미롭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다른 사람에게 책을 읽어 준 경험이 많군요?”
[재료로는 또한 동물의 가죽이나 뼈가 재료로 사용되었다. 꽤 있지.]
읽는 와중 대답하는 것도 어색하지 않았다.
“발라브리가?”
[-와 그 이전의 인간들.]
키리에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느 미친 인간이 나타니엘에게 책을 읽어달라는 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꽤 많았던 모양이다.
나타니엘은 그렇게 키리에를 무릎에 앉힌 채, 아이를 어르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낭독을 이어 갔다.
[……중에서는 값비싼 금, 은, 보석, 상아, 흑단 등을 사용한 것이 가장 인기가 많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키리에가 홀린 듯이 목소리에 빠져들었다.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 먼 곳에서 눈이 내리는 소리, 몸통을 통해 전해지는 나타니엘의 목소리가 합쳐져 방은 안락하고 평화로웠다. 긴장이 녹아내리자 몸의 힘도 풀렸다.
[……하여 소재의 가공을 위해서는 소재보다 더 단단한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 적이며.]
그녀가 나타니엘의 가슴에 등을 조금 기댔을 때, 그는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서로의 심장 박동을 두 번 정도 교환할 시간이 지난 뒤, 좀 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장 좋은 것은 다이아몬드이다. 레쇼와는 무슨 이야기를 했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질문에 키리에가 뒤늦게 화들짝 놀랐다.
“레쇼 경에게 물어봐요.”
[레쇼는 널 죽이지 못해.]
“그런 이야기 아니었어요.”
[그러면?]
“대답하고 싶지 않아요.”
키리에가 한숨 쉬었다.
“당신과는 관계없어요.”
[레쇼와는 관계가 있고? 언제 그리 친해졌는지 모를 일이구나.]
언젠가 한 적이 있는 대화였다. 다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기엔 그녀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를 복종시키는 겁니다.〕
듣기 싫은 이야기였다. 그녀는 더는 나타니엘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키리에가 다리를 올려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만할래요…….”
나타니엘은 몸을 웅크린 채 숨을 쌕쌕거리는 키리에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는 한순간 그녀의 등이 지나치게 야위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전엔 그렇지 않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흥이 깨지는구나.]
작게 중얼거린 나타니엘은, 키리에를 안아 올려 침대 위로 옮긴 뒤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
키리에가 왕궁에 갇힌 이후 몇몇 귀족들은 나타니엘과 면접을 치르는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키리에를 만나러 오기도 했다. 1200억의 상속자인 키리에 뷰캐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는 키리에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금세 시들해졌다.
그런 와중, 뜻밖의 인물이 키리에를 찾았다.
“걸어 다닐 수는 있어요? 피골이 상접했는데?”
인사 없이 다짜고짜 험한 말을 내던지는 루비니아 캐스너를 보며 키리에는 오랜만에 즐겁게 웃었다.
“와 줘서 고마워요.”
“고마우면 고마운 얼굴을 좀 해 보시든가요.”
“지금 그런 얼굴인데 그렇게 안 보이나요?”
“죽어 가는 얼굴을 보여 주려는 거였다면 그렇게 보이긴 하네요. 이건 아버지가 주는 거예요.”
루비니아가 손뼉을 두 번 쳤다. 하인 한 명이 보석함을 들고 다가왔다. 키리에는 묶인 손목 대신 턱짓으로 옆방을 가리켰다.
“저기 어딘가에 놔주세요.”
루비니아는 키리에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가, 질린 얼굴을 했다.
“으. 저게 다 뭐예요?”
“선물이요. 다들 올 때 하나씩 들고 오더라고요. 사람을 시켜 보내기도 하고. 갖고 싶은 거 있으면 가져가요.”
“난 이런 거 거절 안 하는 거 알죠?”
“잘 알죠.”
키리에가 킥킥 웃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키리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약혼은 어때요?”
루비니아가 심드렁하게 포크 끝을 찻잔에 넣었다 뺐다 하며 대답했다.
“결혼은 할 수 있을 거예요. 신랑의 자질이 좀 도마 위에 오르긴 했지만. 덕분에 요즘 무도회도 못 나가고 있어요.”
“자질이요?”
“세 번째 다리의 자질이요.”
당황한 키리에를 두고 루비니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과하지 말아요. 나도 사과하지 않을 거니까.”
“캐스너 양…….”
“사과하지 말라니까요?”
루비니아가 앙칼지게 말했고, 키리에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사과가 아니라, 굳이 따져 보자면 제가 당한 게 더 많을 텐데요. 그리고 포크를 찻잔에 담그면 안 돼요.”
루비니아가 얼굴을 붉혔다.
“그런 건 좀 대충 넘어가요, 우리!”
그녀는 포크로 찻잔 안을 휘저으며 날카로운 눈으로 키리에를 보았다.
“뭐, 됐어요. 원래부터 사랑해서 결혼하려던 건 아니었으니까. 왕권이 바닥으로 떨어진 건 좀 가슴 아프지만, 인권도 다 같이 떨어진 것 같으니 괜찮아요.”
“역시 권력욕 때문이었나요?”
루비니아가 코웃음 쳤다.
“물론이죠. 그거 말고 이든에게 볼 게 뭐가 있는데요?”
“나름 잘생겼잖아요.”
“전설경이랑 같이 지내면서 그런 말이 나와요? 그림도 그거보다 잘생길 수는 없겠던데요.”
“하하……. 그런가요?”
키리에의 메마른 웃음에 루비니아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가루를 발랐는지 요정 날개처럼 반짝이는 루비니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괜찮은 거예요?”
루비니아가 낮게 물었고, 키리에가 빙긋 웃었다.
“아뇨.”
경쾌한 대답이었다.
“……밥을 안 먹을 필요까진 없잖아요. 살다 보면 언젠가는 기회가 와요. 날 보라니까요?”
“그렇게 믿고 행동할 수 있는 당신을 존경해요, 캐스너 양.”
얼핏 조롱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으나, 지금의 키리에는 뭔가를 비꼴 만큼 인생에 열의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루비니아는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키리에의 팔을 보았다. 아차 하는 사이에 부러질 것 같은 가느다란 손목이었다.
새초롬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린 루비니아가 대뜸 물었다.
“전설경에게 매달리면 안 돼요?”
키리에가 희한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매달려요?”
“네.”
루비니아가 대답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남에게 애교를 부리거나 구차한 모습을 보이는 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키리에가 빙긋 웃었다. 그녀가 얼마나 열심이었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
“그건 나 역시 그래요. 그런데…… 그럴 이유가 없더라고요.”
“이유가 왜 없어요?”
“나를 움직이는 건 책임감이었어요. 그 하나 때문에 이든과 약혼했고, 당신과 이든의 행동도 눈 감았고, 주변의 시선도 참아냈고…….”
“…….”
“그런데 지금 나는 그 모든 걸 잃었어요. 이젠 다 내가 죽기를 바라죠.”
키리에는 테이블 위에 정물처럼 놓인 다과와 찻잔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젠 죽으면 편해질 수 있다고 믿는 수밖에 없네요.”
루비니아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보기에 키리에는 체념의 단계를 착실히 밟아 나가고 있었다. 어떻게 사람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될 수 있을까?
“난…… 난 당신의 그런 나약한 모습이나 보자고 여기 온 게 아니에요.”
“미안해요.”
“사과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키리에가 빙긋 미소지었다. 그 모습에 루비니아가 가슴을 두드렸다.
“결국 사람들을 인질로 잡고 협박한 전설경이 나쁜 건데 왜 당신이 그렇게 땅굴 파고 있어요?”
키리에가 멈칫했다. 그건 아론이 해 준 말과 비슷했다.
하지만 아론은 죽었다. 그러니 저것은 틀린 말이다. 키리에가 입을 다물었다.
“아! 정말 답답해!”
결국 루비니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신 정말 그 키리에 뷰캐넌 맞아요? 나한테 그런 식으로 빈정대고, 놀리고, 사람을 들었다 놨다 했던 그 키리에 뷰캐넌 맞냐고요!”
그녀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키리에는 그저 맑은 눈으로 루비니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감정의 티끌조차 보이지 않는 투명한 시선은 무서울 정도로 전설경을 닮아 있었다.
루비니아는 불현듯 이 모든 일이 두려워졌다. 그리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더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내가 내 생존과 기본권을 위해 투쟁하겠다는데 그게 왜 내 잘못이 돼요?”
“캐스너 양…….”
“인생은 각자도생이에요! 내 건 내가 챙겨야 한다고요! 남들이 뭐라 하건 내가 살고 봐야죠!”
루비니아는 한참을 씩씩거리며 키리에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꾹 깨물고 발을 옮겼다.
“갈래요. 한심해서 못 봐주겠어요.”
“잠시만요, 캐스너 양. 배웅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루비니아가 돌연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고개를 홱 돌려 사납게 키리에를 쏘아보았다.
“당신 말이 맞아요! 내가 지금까지 당신한테 한 게 더 심했어요.”
키리에가 영문을 모르고 눈을 깜빡였다. 루비니아는 그녀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오늘 여기 왔어요. 이 정도면 평행했나요? 얘, 문 열어.”
그녀는 냉정하게 말한 뒤, 도도한 걸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키리에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무언가를 깨닫고는 루비니아가 앉아 있던 자리로 향했다.
테이블 위에는 루비니아가 사용한 다기가 마치 일부러 그러기라도 한 것처럼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소서 위에는, 포크에 찻물을 찍어 그린 장단음 부호가 또렷하게 맺혀 있었다.
「내일 밤. 결행.」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잠깐 선잠에 들었다 깨니 안네마리가 세숫물을 들이고 있었다.
“일어나셨어요, 아가씨?”
“응. 좋은 아침.”
키리에가 몸을 일으키자, 안네마리가 멈칫하고서 도도도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가씨. 몸 상태가 안 좋으세요!”
“미열 정도야.”
“미열도 무시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안네마리의 걱정 어린 말에 키리에가 작게 웃었다.
“그땐 내가 책임지고 있는 게 있었으니까. 지금은, 알잖니?”
그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비단 아침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 나타니엘은?”
“아침 일찍 아가씨가 잠든 모습을 보고 가셨어요.”
키리에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앓고 난 뒤로는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밖에 볼일이 있는 듯했다.
“그가 밖에서 뭘 하는지 아니?”
“안네마리도 잘 몰라요. 알아볼까요?”
미지근한 물 위에 장미 꽃잎을 올리며 안네마리가 답했다. 키리에는 잠시 고민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안다고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이후 욕실로 향했다. 욕조 안에 몸을 담근 키리에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남들이 일할 때 목욕이나 하고 있으니 다들 당연히 내가 배가 불렀다고 하겠지.”
“음, 음…….”
안네마리가 눈알을 데록데록 굴렸다. 정직한 반응에 키리에가 웃었다.
“궁인들이 그러나 보구나.”
“조금요……. 못된 입!”
“안네마리가 알아주니까 괜찮아.”
키리에의 목덜미에 물을 끼얹던 안네마리의 손이 잠깐 멈췄다.
“하지만 안네마리만으로는 안 되는 거죠?”
키리에가 고개를 돌렸다. 마치 오늘 있을 일을 알고 하는 말 같았다. 그러나 안네마리는 침울한 표정을 지을 뿐, 다른 의도가 보이진 않았다.
키리에는 부드럽게 안네마리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내가 어떻게 되든 네가 무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볼게.”
안네마리의 검은 눈이 깜빡임 없이 키리에를 응시했다가, 손에 든 목욕용 브러쉬로 향했다.
“아가씨는 안네마리가 밉지 않으세요? 안네마리는 아가씨가 원하는 걸 못 이뤄 주고 있는데…….”
“안 미워.”
키리에가 다시 정면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무릎에 뺨을 기댄 채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죽으면 다 해결될 일이야.”
“…….”
그녀는 뻣뻣하게 굳은 안네마리를 눈치채지 못한 채 생각에 잠겼다.
결행.
장단음 부호는 아마 라우라와 마리아의 신호일 것이다. 그동안 연락은 없었지만 뒤에서 계속 자신을 탈출시킬 방법을 모색하고 있던 모양이다.
‘내가 탈출해도 되는 걸까?’
두 사람에게 피해가 갈지도 모른다. 그녀의 목적은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 죽는 것, 그뿐이었다.
“안네마리. 만약 내가 여기서 도망치고 싶다고 하면 어떨 것 같아?”
안네마리의 눈이 크게 떨렸다.
“…….”
“말릴 거니?”
이윽고, 안네마리의 고개가 떨어졌다.
“말리지 않을 거예요. 그게 아가씨의 선택이라면…….”
어딘가 체념한 듯한 목소리였다.
안네마리는 더는 말하지 않았고, 키리에 역시 조용히 목욕을 마쳤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목욕이 끝나자 안네마리가 물어왔다. 키리에는 망설인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먹을게.”
안네마리가 즉각 반색했다.
“그럼 식사를 내올 사람을 부를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녀가 설렁줄을 흔든 뒤 문으로 다가갔다. 그동안 키리에는 창가로 다가가 유리창 위에 손을 얹었다.
진작 봄이 와야 했을 만큼 긴 겨울이었다. 사방이 눈이었고, 궁 밖은 희고 고요했다.
키리에가 마른침을 넘겼다.
‘나는 정말 여길 나갈 수 있는 걸까?’
***
그날 내내 나타니엘은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키리에는 숨겨 두었던 체스 말을 만지작거리며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근래 들어 잠이 부쩍 는 안네마리가 깼다 졸기를 반복했다.
“안네마리. 졸리면 가서 자도 돼.”
“아니에요! 졸린 거 아니에요…….”
“정말? 피곤해 보이는걸.”
“그게 아니라, 나무가 없어서 그래요…….”
“나무?”
“네! 괜찮아요!”
안네마리가 고개를 붕붕 저으며 대답했다.
“안느. 그러지 말고-.”
보다 못한 키리에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
키리에와 안네마리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이 정도 진동이면 궁 안이야.’
설마 결행이라는 게 아예 왕궁을 폭파한다는 의미였을까? 키리에가 당황을 숨기기도 전에 안네마리가 그녀의 앞을 막았다.
“아가씨! 물러나세요!”
창문이 덜컹거리더니 깨져 나갔다. 그리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두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모시러 왔습니다, 뷰캐넌 님.”
차가운 겨울바람이 키리에를 감쌌다. 그녀는 검은 옷의 남자가 품 안에서 꺼낸 올드시우다드의 월계수 문장을 확인했다. 보라색 눈이 잘게 흔들렸다.
‘떠나야 할까. 그래도 될까. 너무 이기적인 건 아닐까?’
혼란스러웠다. 뒤에 생길 일을 생각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그녀는 금방 생각을 그만두고 주먹을 쥐었다.
‘언제 도망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영영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정신력은 언젠간 마모된다. 그 전에 나가야 했다. 죽음을 향한 절박함마저 희석되기 전에.
‘죽어 주세요.’
그래야 했다. 그게 맞다.
“안네마리.”
“아가씨! 물러나세요! 안네마리가 지켜드릴게요!”
“아니야, 안네마리. 나를 데리러 온 사람들이야.”
“네?”
안네마리가 소매에서 꺼낸 나뭇잎을 쥐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키리에가 풀썩 그 앞에 앉아 안네마리의 어깨를 잡았다.
“안네마리. 널 두고 가면 그가 네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같이 나가자.”
“아가씨…….”
“뷰캐넌 님. 시간이 없습니다.”
“안네마리, 알겠지? 같이 가는 거야.”
안네마리의 검은 눈이 흔들렸다. 그때 안네마리의 눈에 비친 것은 공포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기묘하게도 슬픔이었다.
“아가씨.”
“안네마리. 어서!”
“뷰캐넌 님. 한시가 급합니다!”
폭발음이 연달아 크게 터지자 급박한 재촉이 이어졌다.
“안느! 제발…….”
그때 안네마리가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안네마리는……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안느?”
“안네마리는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안네마리가 얼굴을 가리며 히끅거렸다.
“뭐가 맞는 걸까요? 아가씨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안네마리는 제대로 준비한 게 맞을까요?”
“안느,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나중에 이야기하고 어서…….”
“뷰캐넌 님!”
“하지만 안네마리는 하나는 알아요. 안네마리는 여기 있어야 해요.”
그녀의 손에서 플라타너스 잎이 불탔다. 강풍이 불었다. 키리에와 남자들은 둥실 떠올라 순식간에 창문을 넘었다. 바람의 칼날은 키리에의 손목과 발목을 묶은 리본도 단숨에 잘라 버렸다.
“윽…… 안네마리!”
돌바닥 위에 서서 창문을 올려다보자, 슬픈 눈을 한 안네마리가 키리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가씨가 하고 싶은 것을 하세요, 아가씨.”
“안네마리, 나와 같이 가! 여기 있다간 그가……!”
“아뇨. 그러지 않을 거예요.”
얼굴을 가린 안네마리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목소리 역시 들릴 듯 말 듯 희미해졌다.
“왜냐면 그는 이미 ……했으니까.”
***
키리에는 멍하니 서서 아무도 없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안네마리…….”
“뷰캐넌 님.”
검은 옷의 남자가 초조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전설경의 눈을 끄는 일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가셔야 합니다.”
키리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안네마리의 선택이다.
‘나는 그냥 그 애의 결정을 받아들이면 돼.’
그녀는 짧은 심호흡 후 눈을 떴다.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디로 가면 되지?”
“이쪽입니다.”
남자들이 옷 위에 덮을 검은 망토와 신발을 내밀었다. 키리에는 몸을 낮춘 뒤, 그들과 달리기 시작했다.
‘돌바닥.’
키리에가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밤하늘.’
어딘가에서 계속 터지고 있는 폭발음 탓에 하늘마저 떨리고 있는 듯했다.
‘겨울바람…….’
나올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너무나 쉽게 빠져나왔다. 어딘지 허무하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하고, 울컥하기도 했다.
“나타니엘은?”
“시선을 묶어 두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묻지 않았다. 한시가 급한 일에 일일이 사족을 달 필요는 없다.
그녀는 곧 푸른 도시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위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
큰 창 너머의 풍경은 희었다. 방에는 불빛이 없었고, 창가에 앉은 나타니엘의 모습은 검은 실루엣으로만 보였다.
안네마리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우수에 찬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떠났나?]
안네마리가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갔어요.”
안네마리가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정말로 갔어요.”
소녀의 검은 눈이 소파에 앉은 남자의 그늘진 옆모습을 담았다.
“……나타니엘 님 말대로.”
[그래.]
나타니엘이 미소지었다. 그는 바닥을 짚고 있는 지팡이 손잡이 부분을 어루만지며, 좀 더 깊숙이 몸을 뉘었다.
[좀 이르긴 하지만, 예상대로야.]
“……쫓아가지 않아도 돼요? 아가씨 위험해지면 어떡해요?”
[그럴 일은 없어.]
나타니엘이 지팡이를 만지작거렸다. 안네마리가 몸을 움츠렸다. 키리에가 사라지자 그는 다시 예전의, 처음 만났을 때의 잔인하고 두려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이번엔 제법 공을 들였거든.]
그는 차분하게 지팡이를 눕혀 무릎 위에 올렸다. 투명하고 푸른 눈이 창밖을 향했다. 한동안 둘은 눈 내리는 창밖의 정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뒤에야 나타니엘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요즘 밖으로 돌았는지 아니?]
안네마리가 불안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키리에의 옆에 붙어 있어야 했기 때문에, 바깥의 소식은 들은 게 거의 없었다.
안네마리가 아는 것은 하나였다.
“뭔가를 준비하셨죠……?”
[그래.]
“그래서 아가씨가 남의 도움을 받아서 도망치려 하면, 그냥 가게 두라고 하신 거죠?”
나타니엘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뭘 꾸몄어요?”
[키리에는 별말 없던가?]
“요즘 나타니엘 님이 뭘 하는지 아느냐고만 물으셨어요…….”
나타니엘이 느릿하게 고개를 젖혔다.
[그리고?]
“‘알아볼까요’하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하셨어요.”
[시키는 게 좋았을 텐데. 어지간히도 관심이 없구나.]
그가 웃었으나 방 안의 온도는 뚝 떨어졌다. 안네마리는 곱아 가는 손을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가씨는 죽고 싶어 하세요, 아무도 감시하지 않으면, 정말로 죽어 버릴지도 몰라요…….”
[너도 예상할 수 있는 문제를 내가 두 눈 뜨고 내버려 두리라 생각했다면, 나도 어지간히 얕보인 모양이지.]
그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눈은 더 많이 내리고 있었고, 소파에 앉은 나타니엘은 여유로웠다.
안네마리가 작게 탄식했다.
“……그냥 놓아준 게 아니에요?”
[나는 상황을 마련해 주었을 뿐이야.]
그가 천천히 지팡이를 까딱거렸다.
[모든 건 키리에에게 달렸지. 아직도 내가 자기와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순진해 빠진 네 주인 말이야.]
애초에 깜빡임이 적었던 눈꺼풀이 서서히 감기기 시작하자, 그를 중심으로 방 전체에 살얼음이 끼기 시작했다. 천장과 가구, 아름다운 벽화, 주인을 기다리는 침대까지 전부.
이제 나타니엘은 얼어붙은 옥좌에 앉은 왕 같았다. 키리에를 만나기 이전, 그 눈 내리는 마을에서처럼.
[좀 더 많은 행복을 느껴야, 좀 더 확실하게 절망하겠지.]
푸른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입으로 뱉는 악, 감미로운 독의 울림에 안네마리의 무릎이 파들거렸다.
나타니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다시 흰 눈 사이의 고요한 검은 그림자로 붙박였다.
[이건 아주 작은 연극일 뿐이야.]
키리에가 도착한 곳은 도시 구석의 작은 판잣집이었다.
“잠시 대기해 주십시오. 수배한 마차가 곧 올 것입니다.”
키리에를 데려온 복면의 남자가 말했다.
숄을 꼭 붙잡은 채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마리아를 보고 갈 시간이 있을까?”
“어렵습니다. 촌각을 다투는 일입니다.”
사내들은 한 명만 남기고 방을 나갔다.
바깥 어딘가에서는 소음이 계속되었고, 진동이 울렸다. 무장한 병사들이 단체로 움직이는 발소리도 들려왔다.
“찾아!”
“멀리는 못 갔을 거다!”
“연보라색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이다! 절대 생채기 하나 내지 말 것!”
키리에는 숨을 죽이며 잠깐 열었던 나무창을 닫았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그녀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몸을 돌렸을 때였다.
“엄마…….”
“이런! 나오지 마십시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안쪽 방문이 열리고, 어린 여자아이가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 사내는 몹시 당황해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당황한 것은 키리에도 마찬가지였다.
“저 아이는?”
“집주인입니다.”
복면의 사내가 난처한 듯이 답했다.
“올드시우다드의 조력자입니다. 아무래도 민간인들에게 섞여 들어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가만두었는데…….”
“우웅?”
“…….”
키리에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꼬마 아이를 바라보았다.
“페데리카! 어서 들어와!”
열린 문 뒤에서 여자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이 몸을 움질움질하며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아이의 어깨를 잡고 들여보내려 애썼지만, 아이는 문고리를 잡고 놓지 않았다.
“언니는 누구야?”
“나?”
“응. 예쁜 언니, 누구야?”
말문이 막혔다. 본명을 말하면 피해가 가지 않을까?
“난, 그러니까…….”
“조세피나 씨. 아이를 데려가십시오.”
“죄송합니다, 페데리카! 어서! 엄마가 말 잘 들으랬지!”
“엄마, 우리 집에 왜 모르는 언니야 있어?”
“페데리카!”
“힝…… 엄마, 왜, 화내구……!”
아이가 울 것 같자, 키리에가 여자를 말렸다.
“괜찮아. 아이가 놀란 모양이니.”
키리에가 아이에게 허리를 숙였다.
“페데리카라고 했니?”
“웅. 나 페데리카. 페데리카 모레티!”
“여기 사람이 아니구나.”
“페데리카 여기 사는데?”
복면의 남자가 대신 나섰다.
“생 드니 제도에서 도망쳐 온 가족입니다. 올드시우다드에서 정착을 도왔습니다.”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페데리카, 나는 키르라고 해.”
“키르?”
“응. 오늘 페데리카네 집에서 잠깐 신세를 질 거야.”
“신세가 뭐야?”
“페데리카네서 자는 걸 말하는 거야.”
페데리카가 엄지를 빨기 시작했다. 키리에는 당황했지만 예의 바르게 그것을 외면해 주었다.
“그래도 되니, 페데리카?”
“움……. 아빠 침대 언니가 써?”
“아버지는 안 계시니?”
“응. 아빠는 페데리카 고향에 있어. 천 밤 자면 온댔어.”
입은 가린 조세피나의 행동으로, 키리에는 천 밤의 의미를 바로 눈치챘다.
그때,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되돌아왔다. 그중 한 명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키리에!”
“마리아!”
키리에가 당장 달려가 마리아를 껴안았다. 마리아 역시 두 팔을 벌려 키리에를 껴안았으나, 그녀는 반가워하기보다 놀란 표정이었다.
“키리에, 너 어디 아픈 거니? 몸이…….”
키리에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스트레스 때문에 살이 빠졌을 뿐이야.”
“오, 세상에! 드높은 신이시여…….”
마리아가 신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 한번 키리에를 껴안았다. 그녀는 조세피나에게 손짓으로 인사한 뒤, 키리에를 작은 탁자 앞에 앉혔다.
“키리에, 상황이 급해. 수도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이 막혔어.”
“나타니엘이구나.”
“응. 마치 오늘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있었던 것 같아. 혹시 캐스너 양이 네게 다른 말을 흘렸니?”
“그렇진 않아. 그런데 어떻게 캐스너 양을 통해 전달할 생각을 했어?”
“네 시녀가 너와 캐스너 양 사이의 불화가 해결됐다고 알려 줬어. 우린 갇혀 있었고, 네게 접촉할 다른 방법이 없었지. 덕분에 계획도 이렇게 늦어졌고, 그사이 네가…….”
마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늘 단정하고 기품 있던 그녀의 얼굴이 상한 것을 보며 키리에의 마음이 더 아팠다. 그것마저 자신 때문이었다.
“미안, 마리아.”
“제발 내게 사과하지 말아 줘, 키리에. 난 네가, 네가 죽으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리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감정을 통제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 마리아는, 결연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키리에. 전설경이 수도를 통제하고 있어. 병사들이 너를 찾고 있고.”
“…….”
“라우라도 같이 빠져나왔으니까 우리는 걱정하지 마. 여기는 안전할 거야.”
키리에가 조심스럽게 마리아의 손을 잡았다.
“마리아, 날 위해 애써줘서 고마워. 하지만…….”
“키리에! 제발!”
마리아가 고개를 숙여 서로 맞잡은 손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의 목소리는 겁에 질린 사람처럼 떨리고 있었다.
“제발……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말아 줘. 친구로서 난 네가 그런 선택을 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
“부탁이야…….”
키리에는 끝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마리아가 그런 키리에의 어깨를 강하게 껴안았다.
“당분간 여기 숨어 있어, 키리에. 전설경은 나와 라우라를 가장 먼저 의심할 테니, 이제 여기 오진 못하겠지만 종종 소식을 전할게. 기회가 될 때 바로 너를 수도에서 내보낼 거야.”
“마리아…….”
마리아가 키리에의 말을 가로막고 고개를 저었다.
“살아 줘, 키리에.”
마리아의 눈은 단호했다. 말마저 그러했다.
“살아 줘.”
그녀는 곧 조세피나에게 몸을 돌렸다.
“조세피나. 키리에를 부탁해.”
조세피나가 페데리카를 끌어안은 채 미소지었다.
“얼마든지요, 마리아 아가씨. 제가 올드시우다드에 입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게요.”
바깥에선 진동이 몇 번 더 울렸고, 더 많은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아가 다시 모자를 뒤집어썼다.
“난, 이만 가 볼게, 키리에.”
키리에와 마리아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예지를 느꼈다.
그러나 둘 다 그것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마리아는 그저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친구의 얼굴을 보며, 다정하게 미소지었다.
“살아남아, 키리에.”
*
아침이 되자, 수도 전체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키리에 뷰캐넌을 데려와. 단, 상처 하나 없이.]
전설경의 특명이었다. 수도의 모든 병사가 그를 위해 소집되었다. 국왕의 마법 병단은 참여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희소식이었다.
그 모든 소식을 알려온 올드시우다드의 심복은 작은 브로치 하나를 건넸다.
“마법 탐지를 막는 용품입니다. 지니고 계십시오.”
키리에는 월계수가 그려진 브로치를 만지작거렸다.
“마리아와 라우라는 괜찮아?”
“다행히 무사하십니다. 전설경의 압박이 있긴 했지만, 두 분께 위해를 끼치진 않았습니다.”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올드시우다드의 연락책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탈출은 늦어질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원래 수배해 두었던 마부가 살해당했습니다.”
키리에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살해됐다고? 누구에게?”
“꼬리를 밟힌 모양입니다. 이곳은 들키지 않았으니 그 점은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죽은 마부는, 그럼…….”
“올드시우다드의 이름으로 충분한 위로금을 보낼 것입니다.”
키리에의 눈이 흔들렸다. 또다시 한 사람이 죽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죽어 버려요, 누나.’
‘살아 줘, 키리에.’
그녀는 가늘게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꾹 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알았어. 가 봐.”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심복이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마리아 아가씨께서 뷰캐넌 님의 건강을 염려하고 계십니다.”
“…….”
“다시 오겠습니다.”
“잠시만.”
나가려는 심복을 키리에가 붙잡았다.
“당신은 이름이 뭐야? 그 마부의 이름은 뭐였어?”
남자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림자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마부의 이름도 보안상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뷰캐넌 님께서 굳이 신경 쓰실 일도 아닙니다.”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자신 때문에 죽었는데 신경 쓰지 말라 한다. 어렵고 슬픈 이야기였다.
키리에의 표정을 본 남자는 우물쭈물하더니 한 걸음 물러나 작게 말했다.
“조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저희는 모두 조이라고 부릅니다.”
“조이.”
키리에가 그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렸다. 얼마나 더 부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럼 조이. 부탁 하나 할게.”
“네. 뷰캐넌 님.”
“죽지 마.”
키리에가 낮게 말했다.
조이는 꼭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굳었다가, 고개를 숙인 뒤 허둥지둥 방을 나갔다.
조이가 나가자 안쪽의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언니?”
페데리카였다. 노란 피부에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진 소녀.
그녀의 어미인 조세피나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하던 대로 일을 하러 나갔다. 집 안에는 키리에와 페데리카 둘뿐이었다.
페데리카가 쪼르르 키리에에게 다가왔다.
“키르 언니. 울었어?”
“안 울었어.”
키리에가 미소지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아이 앞에서는 웃어 주는 게 어른이다. 그러자 페데리카도 헤벌쭉 웃었다.
“언니 이쁘다. 나도 보라색이면 좋을 텐데.”
“고마워. 페데리카도 지금 그대로도 예뻐.”
“언니 공주님 같애. 옷도 예뻐. 나도 그런 거 입고 싶어…….”
페데리카가 키리에의 옷을 보며 손가락을 빨기 시작했다. 키리에가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해. 주고 싶지만. 이걸 네게 주면 무서운 사람이 페데리카를 찾아갈지도 모르거든.”
“무서운 사람?”
페데리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무서운 사람.”
“귀신이야? 괴물이야? 종말이야?”
전설경과 호국경, 그들이 물리친 종말의 이야기를 전래 동화처럼 듣고 자라는 아이들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키리에는 ‘종말’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키리에가 당혹 때문에 냉랭해진 기색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모로 돌렸을 때였다. 마치 운명의 손가락이 가리키기라도 하듯, 저 멀리서 뭔가가 반짝였다.
주방용 칼이었다.
동시에 누군가의 속삭임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누나, 죽어 주면 안 돼요?’
키리에는 자신이 어쩌면 영원히 그 말에 사로잡히리란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건 겨울의 저주였고, 아론은 여전히 밤마다 키리에의 꿈에 나왔다.
키리에의 시선이 홀린 듯 칼에 붙박였다. 그녀가 천천히,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페데리카의 양어깨를 쥐었다.
“페데리카…… 잠시만 방 안에 들어가 있을래?”
“왜?”
페데리카가 무구한 눈으로 물었다. 키리에는 페데리카를 보았다가, 다시 넋 나간 얼굴로 칼을 바라보았다.
“언니는…… 잠깐 밖에 볼일이 있어.”
“밖에? 사람들이 잡으러 오는데?”
“아니야. 못 잡는 곳이 있어. 언니는 거기로 갈까 해.”
“우리 집보다 안전해?”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키리에는 전에 없이 평온한 얼굴로 미소지었다.
“응. 아주 안전해. 누구도 다치지 않는 곳이야.”
키리에가 속삭였다.
페데리카가 엄지를 씹는 것처럼 뺨을 오물거렸다. 키리에는 깜빡임 없는 눈으로 페데리카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페데리카의 입이 열렸다.
“언니. 애기는 어른이랑 같이 있어야 한댔어. 페데리카 아직 어른 아니야.”
놀랍게도, 키리에는 한 방 먹었다. 죽는 것만을 생각하던 정신이 한순간에 돌아왔다. 키리에가 눈을 깜빡거렸다.
‘미쳤구나, 키리에 뷰캐넌.’
빈집에 아이를 두고 죽으러 나갈 생각을 하다니. 이 얼마나 자신밖에 모르는 행동이란 말인가.
“그치?”
페데리카가 물었다. 키리에가 페데리카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응. 페데리카 말이 맞아.”
키리에는 그렇게 말한 뒤 입을 다물었다. 부끄러웠다. 아론이 죽었을 때와 같은 행동을 할 뻔했다.
그녀는 다시 부엌칼로 시선을 보냈다.
‘기회는 나중에 또 있을 테니까.’
그때 페데리카가 불쑥 시야에 끼어들었다.
“언니 배고파?”
“응?”
“왜 자꾸 주방 봐?”
키리에가 멈칫했다.
“배고픈 거 아니야. 페데리카는?”
“페데리카는 배고파. 언니 요리 할 줄 알아?”
“…….”
두 방째였다. 지금까지 이 정도로 쉽게 키리에의 말문을 막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아니.”
“언니는 어른인데 왜 못 해?”
“……그러게.”
페데리카가 안쓰러운 눈으로 키리에를 보았다.
“언니, 괜찮아. 살다 보면 더 잘하는 거 있을 거야.”
“걱정해 줘서 고마워, 페데리카.”
키리에가 침착하게 답했다. 페데리카가 입에서 엄지를 빼고 활짝 웃었다.
“우리 그럼 밥 먹으러 가자, 언니야.”
아이가 침 묻은 손을 키리에에게 내밀었다. 키리에는 모른 체 그 작은 손을 잡았다.
“밥 먹으러 가자고?”
“응!”
“페데리카, 어머니가 돌아오시면 그때 가자.”
“언니야 배에서 꼬르륵 소리 너무 많이 나! 엄마가 꼬르륵 소리 많이 나면 죽는댔어!”
키리에가 말릴 새도 없었다. 페데리카는 즉시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
페데리카가 키리에를 이끌고 도착한 곳은 바로 아랫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코리 아줌마! 코리 아줌마!”
“페데리카?”
손을 닦으며 나오던 여인이 키리에를 보고 흠칫 놀랐다.
“페데리카, 아는 분이니?”
“응! 키르 언니예요! 아줌마, 저 배고 고픈데 밥 줄 수 있어요? 키르 언니도 배고프대요!”
“페데리카, 난 괜찮아. 돌아가자.”
키리에가 머리를 숄로 덮으며 페데리카의 손을 당겼다. 하지만 페데리카는 힘이 어마어마하게 셌다.
“언니 또 꼬르륵했어!”
페데리카가 기어코 키리에를 식탁 앞에 앉혔다. 그리고 다른 방에서 달려 나온 또래 친구와 떠들기 시작했다.
“애니! 우리 언니 봐 봐, 공주님 같지?”
“누구야?”
“우리 집에 신세 진대!”
“왜?”
“어?”
페데리카가 키리에를 돌아보았다.
“언니, 언니는 집 없어? 왜 우리 집에서 자?”
“그건-.”
“언니 왜 그거 쓰고 있어? 집에서는 옷 벗는 거야.”
키리에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들에게 웃어 주랴, 겁에 질린 얼굴로 서 있는 여인을 위해 얼굴을 가리랴 정신이 없었다.
그때 여인이 키리에와 아이들 사이를 가리며 나섰다.
“너희들, 잠깐 방 안에 들어가 있어!”
“어?”
“엄마, 왜? 나 밥 먹고 밖에서 놀래.”
“들어가!”
아이들은 부루퉁한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시끄럽던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코리라 불린 여인은 한참을 희게 질린 얼굴로 서 있다가, 창밖에서 병사들의 발소리가 들리자 흠칫하고 놀랐다.
코리가 결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귀족님이시죠?”
키리에가 손을 모으고, 자세를 바로 한 뒤 대답했다.
“맞아.”
“병사들이 찾는, 뷰캐넌 님이 설마…….”
그때 어설프게 머리 위에 뒤집어쓰고 있던 숄이 떨어졌다. 윤기 나는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드러나자, 코리가 질겁했다.
“세상에. 신이시여. 신이시여……!”
코리가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작게 열려 있던 나무창을 꽉꽉 눌러 닫고 심호흡했다.
“왜, 왜 여기 계신 거죠?”
“불의의 사고야. 미안하네. 금방 나갈 예정이야.”
“전설경이…… 찾고 계시잖아요? 궁에 계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봐선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겁에 질린 코리를, 키리에는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속상하긴커녕 미안한 마음이었다. 옆에 두었다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이런 여자와 엮이기 싫은 건 당연했다.
“죄송하지만 가 주세요. 저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어요. 이해해 주세요.”
코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심정을 알기에, 키리에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는 바로 갈 테지만, 조세피나가 페데리카를 내게 맡겼어. 부디 그녀가 올 때까지 페데리카를-.”
“제가 돌볼 테니까요! 제발! 제발…… 병사들이 알기 전에 떠나 주세요.”
코리가 헐떡거리며 외쳤다. 키리에가 뭔가를 더 말했다간 졸도할 것 같았다.
“방해해서 미안하네.”
키리에가 숄을 추슬렀다. 그녀가 집을 떠나기 위해 문고리를 잡은 순간이었다.
“언니!”
페데리카가 방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언니 어디 가?! 언니 나 빼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 페데리카도 갈래!”
“얘! 페데리카!”
코리가 막으려 들었으나 소용없었다. 페데리카가 그대로 키리에에게 돌진해 그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페데리카, 잠깐, 위험……!”
안타깝게도 키리에는 그 작은 소녀를 지탱할 힘조차 없었다. 페데리카의 몸무게를 이기지 못한 키리에가 뒤로 무너져 내렸다.
“어? 어어! 언니!”
그 이후 아주 잠깐, 키리에의 시야가 암전됐다. 그녀는 잠깐이라고 생각했으나, 아마 몇 분 이상이었던 것 같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키리에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키리에가 눈을 뜬 것을 본 페데리카가 엉엉 울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으아아앙! 언니!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으앙앙!”
“으아아아아앙!”
“어쩜 좋아, 어쩜 좋아…….”
요란하게 우는 페데리카, 그 옆에서 덩달아 우는 꼬마 아이, 목을 졸린 듯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는 코리. 혼란스러운 광경 속에서도 키리에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뇌진탕으로 잠깐 기절한 모양이야.’
키리에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아직 머리가 조금 아팠지만, 그녀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페데리카에게 미소를 지었다.
“페데리카. 다친 데는?”
“죄송해요, 으흐흑, 잘못했어요…….”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언니가 받쳐 줘서 괜찮아요…….”
키리에가 훌쩍거리는 페데리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위험하니까 다음부턴 사람한테 뛰어들면 안 돼. 알겠지?”
“안 그럴게요……. 히끅.”
“착하지.”
키리에가 자신의 품에 조심스럽게 파고든 페데리카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코리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정말로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가, 밭은 숨이 섞인 말을 중얼거렸다.
“아가씨는,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시네요…….”
키리에가 누운 채 코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잠시 할 말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머리를 다쳤을지도 모르겠어. 잠시만 누워 있다가 바로 나갈 테니, 그때까지만 이해해 줄 수 있겠어?”
코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방 안을 서성거리던 코리가, 이내 결연한 눈으로 키리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얘들아. 언니를 침대로 옮길 거니까 도와주렴. 알겠지?”
“아! 나도 도울게요!”
“엄마, 내가 문 열어 놓을게!”
코리가 키리에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말했다.
“아가씨도…… 잠시만, 몸에 손을 댈 테니…….”
“난 괜찮아. 조금만 있다가 괜찮을 것 같으면 나갈 거야.”
키리에가 손을 내저었지만, 코리는 이미 결심한 모양인지 단호하게 키리에의 몸을 들었다. 의외로 가뿐하게 들리는 몸에 코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너무 가벼우시네요. 누워계시면 먹을 것을 드릴게요.”
“아니! 그러지 마. 이러다 위험해질지도 몰라.”
코리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고, 눈에도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래도 그녀는 키리에를 안아서 밖에 내던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픈 사람을, 어떻게 내쳐요……. 병사들에겐 말하지 않을 테니까, 대, 대신 다치신 것도, 제발…….”
코리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그녀를 말릴 수 없음을 깨달은 키리에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을게.”
코리는 가까스로 미소 비슷한 것을 보인 뒤, 키리에를 침대 위에 올리고 상을 차리겠다며 나갔다. 식사 생각이 없다고 말했지만, 부끄러울 정도로 배에서 소리가 나고 있으니 들을 리 없었다.
페데리카와 페데리카의 친구 애니가 키리에 옆에서 이불을 덮어 주네, 따뜻한 공기를 만드네 하며 폴짝거릴 때였다. 침대 옆 나무창에서 똑똑 소리가 나더니, 창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뷰캐넌 님. 이런 곳에 계셨습니까?”
“조이?”
창문 틈으로 검은 그림자밖에 보이지 않는 조이가 긴장이 밴 목소리로 속삭였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키리에가 벌떡 일어났다. 뭔가를 말하려던 그녀는 우선 아이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페데리카. 그리고, 애니라고 했니? 잠깐만 언니를 혼자 있게 해 줄래?”
페데리카가 고개를 끄덕이곤 애니의 손을 잡았다.
“엄마가 검은 아저씨 말 잘 들으라구 했어. 언니, 그럼 애니 데리고 나가 있으면 돼?”
“고마워. 부탁할게, 페데리카.”
“응! 끝나면 밥 같이 먹어!”
아이들이 나가자, 키리에가 급하게 물었다.
“무슨 말이야. 설마 마리아와 라우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만약 그렇다면, 절대 나타니엘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두 분은 왕궁에 구금되시긴 했으나 괜찮으십니다. 다만 탈출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휘부와의 연락이 두절됐습니다.”
“두절?”
조이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전설경이 손을 쓴 모양입니다. 현재 수도는 밖으로 출입하는 모든 길이 봉쇄되어 있습니다. 다행히 여기 계신 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듯하지만, 아무래도 좀 더 이곳에 숨어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들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어.”
겁에 질린 코리의 얼굴을 떠올린 키리에가 냉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조이 역시 냉정했다.
“이들은 적절한 보상을 받고 있습니다. 뷰캐넌 님께서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조이의 답변은 사전을 읽는 것처럼 딱딱하고 막힘이 없었다.
“또한 현 상태에 대한 대책은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다만 준비에 시일이 걸리니, 계시면서 후일을 대비해 주십시오.”
“대비? 어떤 걸 말하는 거지?”
조이가 아주 강한 어조로 답했다.
“식사를 챙기십시오.”
이상하게도, 키리에는 어쩐지 조이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어떻게든 뭔가를 먹이려고 하는 그 모습에서, 우습게도 그를 떠올렸다.
[씻고 식사를 해. 한 번만 더 이런 일로 나를 불렀다간 널 밀가루 속에 던져 버릴 테니 그리 알고.]
그러나 그녀는 그 생각을 금세 지워 버렸다. 마리아가 직접 데려온 사람이다. 그녀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는단 말인가.
“알았어. 그렇게 할게.”
키리에는 며칠 동안 조세피나의 집에 머물렀다.
“언니 생겨서 좋아! 언니, 계속 나랑 같이 있으면 안 돼?”
페데리카가 순진한 얼굴로 그렇게 말할 때마다 키리에는 내심 당혹을 느꼈다. 그녀는 아직 아이에게 죽음을 설명하는 적절한 방법에 대해 알지 못했다.
결국 키리에는 미소만 지었다.
“나도 페데리카가 좋아. 계속 같이 있으면 좋겠다.”
“응! 응! 언니 그림도 잘 그리고, 노래도 잘하고, 진짜 공주님 같아! 근데 엄마가 우리 공주님은 죽었댔다?”
키리에의 숨이 잠시 멈췄다. 그녀는 바로 떠오르는 푸른 눈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근데 내 생각엔 공주님은 죽은 게 아니야.”
“그럼?”
“물레에 찔린 거야!”
키리에가 진심으로 풋 웃었다. 그걸 본 페데리카가 덩달아 크게 웃으며 주변을 뛰어다녔다.
“언니 또 웃었어!”
이상한 일이었다. 보석, 황금, 금화, 성, 권력과 명예. 모든 것을 갖고 있을 땐 바닥났던 즐거움이, 작고 좁은 집에서 오히려 차올랐다.
아마 나타니엘이 마리아와 라우라를 죽이지 않고, 그저 인질로만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일 수도 있다.
‘그는 기다리고 있는 걸까.’
모른다. 키리에가 아는 건, 도시 전체를 잠들게 하고 싶은 것처럼 쏟아지는 함박눈뿐이었다.
키리에의 탈출 시도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키리에가 집에만 있어도 페데리카가 친구들을 데리고 몰려왔다.
“우와, 진짜 공주님 같애…….”
“키르 언니는 손이 왜 안 딱딱해요? 언니 공주예요? 공주는 솜이불 덮는다는데 정말이에요?”
“내 생각엔, 이 누나는 천사야.”
“하워드 멍청이! 천사는 날개 있는데 언니는 날개 없거든?”
아이들은 병아리처럼 키리에의 주위를 쫑쫑거리며 삐약대기 시작했다.
전부 근방에 사는 아이들이었다. 피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키리에가 조금만 보이지 않아도, 판잣집 구석구석의 낡은 판자를 밀어내고 불쑥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키르 누나!”
“키르 언니!”
세 살에서 여덟 살까지, 어린아이들이 키리에를 보며 말갛게 웃었다. 그러면 키리에도 속이야 어떻든 일단 웃어야만 했다. 혼자 있을 시간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언니야가 나중에 옷 나 준댔어!”
“진짜? 언제?”
“어…….”
페데리카가 입을 뻐끔거렸다.
“언니, 무서운 사람 언제 와?”
“무서운 사람? 어른도 무서운 거 있어?”
“우리 아빠가 돈이 제일 무섭댔어.”
“아냐, 사람이랬거든?”
페데리카가 키리에에게 고개를 휙 돌렸다.
“언니는 뭐가 무서워?”
“나?”
아이들이 눈을 빛냈다. 키리에가 애써 잡힐 듯이 떠오르는 나타니엘의 얼굴을 지워냈다.
“……글쎄. 사람?”
“거봐!”
“왜 무서워요? 그 사람이 언니 먹을 거 안 줬어요?”
오히려 못 먹여서 안달이었다. 키리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야.”
“그럼요?”
대충 넘어가고 싶었지만, 아이들이 눈을 별처럼 빛내며 키리에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 때문에 나쁜 짓을 하거든.”
“언니 때문에요?”
“응. 나 때문에.”
키리에가 약간은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하지 말라고 하면 안 돼요?”
“소용없었어.”
“진짜 나쁜 사람이네!”
페데리카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갑자기 키리에를 껴안았다.
“오면 내가 화내줄게! 키르 언니 대신!”
“나도!”
“그럼 나도!”
“맞아! 나 칼 있어!”
“우리 집에도 칼 있어!”
순식간에 키리에 방위대를 구성한 아이들이 언제 올지 모르는 ‘무서운 사람’에게 기세를 보여 주겠다며 날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편안하게 웃었다.
이곳에서 키리에는 귀족도 무엇도 아니었고, 무언가를 책임질 필요도 없었다. 행복해선 안 되는데 행복했다.
꿈 같았다. 아주 짧고, 덧없는 꿈.
***
“마차를 일일이 검사한다나 봐요.”
조세피나가 뜨개질하며 말했다. 저녁이었다. 식사를 마친 페데리카는 키리에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밖으로 나가는 시체까지 검사를 한대요. 혹시 거기 숨어 있을까 봐.”
“그답네.”
“그래도 이런 낡은 판잣집을 뒤질 생각은 못 하나 봐요. 아무래도 귀족님이라 이런 곳에서 생활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하는 거겠죠.”
“그런 걸까.”
키리에가 의욕 없이 대답했다.
병사들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거리를 수색하고 있다지만, 솔직히 말해 생각보다 감시가 약했다.
“아니면 이대로 계시면 어때요?”
그때, 조세피나가 조심스레 말했다.
키리에가 고개를 들었다. 조세피나는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전설경께서 아가씨가 너무 좋아서 그러신다면서요.”
“정확히는 각인 효과 같은 거라고 생각해.”
“보통 사랑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되지는 않을까요?”
조세피나가 다시 코바늘로 시선을 옮겼다.
“실제로 병사들도 점점 대충 수색하는 것 같고요. 어쩌면 밖에 나가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 준다면야 더할 나위 없다. 사교계에는 자신보다 예쁜 영애들이 많고, 자신보다 야망 넘치는 영애들도 많다. 나타니엘의 마음이 그들 중 한 명에게로 옮겨 가면, 분명 모든 게 좋을 것이다.
키리에가 멍하니 조세피나 등 뒤의 부엌칼을 응시했다.
가끔 누군가, 혹은 아론이 귓가에 어서 죽으라 속삭이긴 했지만, 그 목소리는 페데리카와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묻혀 점점 희미해졌다.
“그런데 아가씨는 전설경께 관심이 전혀 없으신 거예요?”
“관심?”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키리에가 놀란 기색을 숨기며 되물었다. 조세피나는 왠지 조심스러운 눈치였다.
“저희는 잘 모르지만, 그렇게나 잘생기셨다고……. 맞나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키리에가,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조세피나가 눈을 빛냈다.
“게다가 부자시고요.”
“아마도.”
“강하기도 하시고.”
“강하지.”
“잘생기셨고요.”
왜 얼굴을 두 번 강조하는 걸까.
조세피나는 마치 자신에게서 나타니엘에 관한 긍정적 답변을 끌어내고 싶은 듯했다. 그렇다고 딱히 부정할 만한 사실들도 아니라서, 키리에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아마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멋있긴 하지. 겉으로는.”
“보통 사람이라면 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실례일 수도 있겠지만…….”
키리에가 가만히 나타니엘을 떠올렸다. 분명 쉽게 잊히지 않는 남자다. 눈앞에 없어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한 이목구비에, 차갑고 세련된 인상.
무엇보다 그 권태와 기품.
그에게는 압도적 강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엿보이고, 그건 분명 사람을 홀린다.
“……그럴 수도 있었겠지.”
조세피나가 뜨개질도 멈추고 물었다.
“그럼 아가씨는 어떤 부분이 마음에 안 드셨던 거예요?”
그 말에 키리에가 순식간에 냉정을 되찾았다. 목소리도 덩달아 차가워졌다.
“나는 날 위해 누군가를 죽여 줄 사람을 원하지 않아.”
조세피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당황한 사람처럼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요?”
키리에가 냉소를 지었다.
“그게 중요할까? 어차피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을 거고, 나도 더는 살고 싶지 않으니.”
말의 무게 때문인지 조세피나는 창백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황급히 뜨개질 거리를 내려놓았다.
“죄송해요. 제가 괜한 말을……. 들어가 쉬시겠어요?”
“그래야겠어.”
조세피나가 뒤늦게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될 거예요. 저희와 함께 계세요. 혹시 아나요? 기적처럼 다 괜찮아질지…….”
***
며칠이 흘렀다. 처음의 경계심도 둔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자신을 향해 밝게 웃는 페데리카와 아이들을 볼 때, 키리에는 종종 자신의 처지를 잊곤 했다.
먹기 싫다고 떼를 부리는 페데리카를 먹이려 하다 보니, 덩달아 자신이 먹는 양도 늘었다. 처음에는 토하기 바빴으나, 지금은 남들 반 정도의 양도 곧잘 먹게 되었다.
병사들은 여전히 거리를 수색했지만, 예전만큼 철저하게 살피지는 않았다.
마침내 왕궁에서 도망친 지 2주가 흘렀을 때, 키리에는 왕궁에서 무도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엄청 크게 열린댔어!”
페데리카가 활짝 웃으며 주워들은 소문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기 시작했다.
“전설경 님이 심심해해서 연다구 했어! 나도 어른 되면 거기 가서 드레스 입을 거야!”
키리에가 고개를 들자 미소짓고 있는 조세피나와 눈이 마주쳤다.
“잘됐네요. 그렇죠?”
“응.”
키리에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믿기지 않는다. 나타니엘이 이렇게 쉽게 자신을 놓아줄 리 없다.
하지만 동시에 키리에는 그가 제발 자신을 잊었기를 소망했다. 옷을 더럽히고, 품위를 잃고, 밥 한 번 먹일 때마다 전투를 치러야 하는 키리에 뷰캐넌은 잊어버리길.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하길.
소중한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잠들어야만 했던 그가 행복하길 바란 마음은 분명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건 키리에의 바람이었을 뿐이다.
그녀가 모르는 곳, 얼어붙은 왕궁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계속 키리에를 생각했다.
차마 얼리지 못한 키리에의 방 안에서, 키리에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던 굽은 다리 의자에 앉아, 그는 계속 키리에를 생각했다.
그에게는 밤이 없고 낮도 없으며, 있는 것이라곤 영원뿐이므로, 그 영원이 전부 키리에로 가득 차 있었다.
[키리에.]
가끔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볼 적이면, 그는 좀 더 참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손바닥 위의 하얀 킹이 그의 인내를 붙들어 놓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때때로 그는 몹시 깊은 슬픔을 느꼈다. 키리에가 곁에 없으니 세상에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지저귀는 잡새들만 가득했다.
그러므로 그는 생각했다. 역시 다음은 없다고.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고. 연극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올드시우다드.]
“네. 각하.”
나타니엘의 부름에, 그의 뒤에 서 있던 올드시우다드 공작이 대답했다.
[키리에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묻곤 하는 말. 공작은 열세 번째로 대답했다.
“각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둄2 절갠 교환재공타싸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