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감금 (8/33)

8. 감금

아론은 일주일 넘게 오지 않았다. 키리에도 그동안은 방을 빠져나가지 않았다. 대신 안네마리를 통해 바깥 상황을 알아냈다.

상황은 키리에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했다.

“국왕 전하가 스노우스트림 가드를 싫어해요. 나타니엘 님이 스노우스트림 가드에게 돈을 잔뜩 주라고 했거든요.”

“그리고?”

“사람들도 죽은 동료 팔아서 장사한다고 욕해요. 궁에서 걷다가 얻어맞는 상황도 많아요.”

“설마 아론도?”

“그 근위병한테서는 맨날 피 냄새가 났어요.”

안네마리가 담담히 말했다.

키리에가 마른세수를 했다. 모아쥔 손이 잘게 떨렸다.

모르고 있었다. 멜로니를 만나러 갈 때 사람들이 보인 시선에는 분명 적의가 가득했지만, 자신만을 향한 것인 줄 알았다.

“그게 끝이니?”

“아니요…….”

안네마리가 눈을 내리깐 채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국왕 전하가 스노우스트림 가드의 일을 줄였어요. 봉급은 그대로예요. 원래 그 근위병들이 하던 일은 다른 부대가 맡아서 해요.”

“타 부대에서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겠어.”

“그리고 스노우스트림 가드가 곧 없어질 거란 이야기가 돌아요.”

키리에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갔다.

나타니엘이 살아남은 근위병들에게 준 것은 남의 시기를 받을 정도로는 많은 돈이지만, 일생을 놀아도 될 정도의 거액은 아니다.

국왕은 전설경을 막지 못한 데다 추가적으로 돈까지 들게 한 스노우스트림 가드를 좋게 볼 리 없다. 조직 개편을 핑계로 없애버릴 확률이 높다.

그럼 그 차곡차곡 누적된 분노는 누구에게로 향할까?

‘전부 나에게.’

때마침 문이 열렸다. 검은 예복을 입은 나타니엘이 지팡이를 든 채 들어왔다.

그는 자신을 노려보는 키리에를 보고도 오히려 약간 살가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영리한 키리에 뷰캐넌께서 마중을 다 해 주시고.]

“아. 마중요. 그야 해드려야죠.”

키리에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이야기할 게 있죠, 우리?”

[무섭기도 해라. 표정은 풀지 그러니.]

“풀 일을 만들어 주시고 풀라고 하시죠.”

[넌 역시 농담에 소질이 있어.]

키리에가 벌떡 일어나 나타니엘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거칠게 나타니엘의 옷깃을 잡았다.

“왜 그랬어요?”

[이건 좀 품위 없구나.]

나타니엘의 미소가 차가워졌다.

“일부러 근위병들에게 거액을 준 거잖아요. 설마 사람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어요, 나타니엘.”

[그래서?]

나타니엘이 천천히 키리에의 손을 쥐었다. 그는 처음에는 강하게 키리에의 손을 잡았다가, 이내 생각을 바꿨는지 검으로 자기 옷깃을 잘라내는 쪽을 택했다.

그 와중에도 자신을 무슨 건드리면 깨지는 유리 종 취급하는 것에 키리에는 환멸을 느끼며 외쳤다.

“난 당신이 갖고 놀라고 있는 인형이 아니에요!”

[인형은 말이라도 잘 듣지.]

“나타니엘!”

다음 순간 그는 그가 늘 즐겨 앉는 굽은 다리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방이라도 나갔던 것처럼 말하는구나, 키리에.]

키리에가 홱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설마 내가 나갔다고 이러는 거예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걸.]

“전부 알잖아요!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근위병들에게 위로금을 줄 생각을 했겠어요!”

[누구누구께서 즐겨 하는 자기 투영이 옮기라도 했나 보지.]

나타니엘이 긴 손가락을 뻗어 테이블에 놓인 꽃병을 툭 건드렸다. 여린 야생화는 그 작은 진동으로도 목이 푹 꺾였다.

그것을 지켜보는 나타니엘의 입매에 품위 있으면서 동시에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예쁜 꽃이잖니. 웃어야지. 키리에.]

“나타니엘!”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을 했을 뿐이야. 상처받은 심령을 위로해 주는…… 금화.]

그가 낮게 웃으며 턱을 괴었다.

[앉아.]

나타니엘은 차갑게 말하곤 미동도 없이 키리에를 올려다보았다.

키리에는 자리에 앉지 않고 나타니엘의 지척에 섰다. 머리끝까지 복잡한 감정이 치솟았지만, 그녀의 표정만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끝까지 모른 체하겠다는 거예요?”

[모른 체를 하고 있는 것도, 내 권고를 깨뜨린 것도 너란다. 키리에.]

그가 상냥하게 말했다.

[난 대관절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는걸. 네가 바라는 거 아니었니? 모두에게 다정할 것.]

“면피에도 정도가 있어요. 지금 상황을 예상하고 그렇게 행동한 거잖아요.”

[좋아.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들어나 볼까?]

“그거야 사람들이……!”

[사람들이?]

때때로 소름 끼칠 정도로 순수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물었다. 키리에의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이 저를…….”

[너를 어떻게 했기에?]

키리에가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

전혀 깜빡이지 않는 그의 맑은 눈이 어쩐지 소름 끼쳤다.

빌미를 찾고 있는 거야.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그렇게 속삭였다.

그녀의 손이 본능적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자 나타니엘의 푸른 눈에 맴돌던 흥미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강인하기도 하지.]

무슨 의미일까. 키리에의 머리가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나타니엘은 그런 부분까지도 예상하고 있는 듯했다. 턱을 괸 채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그의 얼굴에 타성적인 권태가 맴돌았다.

[어차피 그리 중요하진 않겠지.]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키리에.]

그가 서늘하게 키리에를 불렀다. 그리곤, 본 적도 없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너를 탓하거든 돌로 내려치렴.]

“네?”

[그리고 내게 그 돌을 가져오는 거야.]

키리에의 입에서는 공기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혼란 속에 가만히 선 키리에를 나타니엘은 깊은 눈으로 응시했다. 그는 그 눈만으로 키리에의 마음 밑바닥까지 전부 캐내 버릴 것 같았다.

[그럼 나는 그 돌로 네 살인을 목격한 모든 이들의 머리를 내리쳐주마.]

키리에의 눈이 커졌다. 한참 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람들이 나를 욕하게 만들기 위해 일을 꾸몄군요.”

나타니엘의 눈이 깜빡였다.

[글쎄.]

“딴청 피우지 말아요.”

[뭔갈 착각하고 있구나.]

나타니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곧 반딧불이 같은 푸른 빛이 빛나며 지팡이가 들렸다. 그는 이제 키리에의 등 너머 문을 보고 있었다.

[내 말은, 내가 고작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란 뜻이지.]

키리에가 그 말의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누군가 응접실의 문을 쾅쾅대며 두드렸다.

기이하게도 나타니엘은 그것을 욕하지 않았다. 검을 빼어 들 생각조차 없는 듯했고, 오히려 표정에는 희미한 기대감이 비쳤다.

안네마리가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실례하겠습니다!”

초조한 얼굴로 사내 한 명이 나타났다. 키리에가 기억 속에서 그의 이름을 끄집어냈다.

“피츠 소위의 상급자군요. 타일러 경. 맞죠?”

“예!”

키리에의 눈이 떨렸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불길한 예감이 홍수처럼 함께 몰아쳤다.

“무슨 일이죠?”

타일러가 황망한 목소리로 경례했다.

“피츠 소위가 막 멜로니 버츠 주방장을 살해했으며…… 아가씨를 찾고 있습니다.”

“오랜만이에요, 누나.”

아론이 웃으며 인사했다.

아론이 있는 곳은 궁의 옥상. 키리에가 있는 곳은 궁 앞의 잔디밭. 위치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론의 옆에 피 흘리며 누워 있는 것은 분명 멜로니였다.

“아론,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흩날리기 시작한 싸락눈 사이에서 키리에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론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검을 든 손을 붕붕 흔들었다.

“전설경도 계시네요? 안녕하세요!”

나타니엘은 키리에의 뒤에 섰다. 그는 주변을 둘러싼 구경꾼들을 유리구슬 같은 눈으로 바라볼 뿐, 아론에게는 일절 대응하지 않았다.

아론이 하하 웃었다.

“높은 분 눈에는 제가 안 보이나 봐요. 아니면 눈 때문인가? 이상하네…….”

“아론, 일단…… 그 사람은 놔줘.”

“에, 아! 이 사람이요?”

아론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기 발치에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일전에 아론을 쫓아왔던 남자였다. 그는 곤죽이 된 얼굴로 궁의 난간에 앉혀 있었다. 아론이 등을 조금만 밀어도 떨어질 위치였다.

“제가 왜요?”

아론이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론.”

“하하! 누나, 저 기분 완전 개운해요. 마치 탈피라도 한 것 같아요!”

“이러지 마, 아론.”

“꼭 그 날 같은 날씨네요……. 눈이 내리네.”

아론의 얼굴은 밝았다 멍해지기를 반복했다. 그는 힘주어 말하다가도, 이내 제 생각에 짓눌린 것처럼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근덕대곤 했다.

저대로 두어선 안 된다. 키리에가 조심스럽게 안네마리에게 눈짓했다. 안네마리가 치맛자락을 잡고 몸을 낮추자, 아론이 외쳤다.

“어? 그러지 말아요? 저 눈 좋아요, 다 보고 있어요!”

아론이 한쪽 발을 남자의 어깨에 올렸다.

“앤…… 앤 마리라고 했나? 유능하댔죠? 그래도 이 거리면 제가 더 빠를 거예요. 여차하면 발로 밀어 버릴 거니까…….”

“대화로 해결하자, 아론.”

“대화요? 멜로니 아주머니도 저렇게 됐는걸요. 이제 저는 뒤가 없다구요, 누나…….”

공허하게 중얼거리던 소년이 이내 활짝 웃었다.

“아! 그렇지, 누나, 사실 제가 누나를 불렀어요.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멜로니 아주머니를 죽이면 올 것 같았거든요…….”

“그런 짓 하지 않아도 네가 부르면 올 거였어.”

“아? 정말요? 왜요?”

“너도 나를 만나러 와 주었잖아.”

아론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반은 찡그린 것 같았고, 반은 웃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말해요?”

“뭐?”

“저 건방지다고 생각 안 해요? 제가 좀 좋게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분명 막 나가기도 했는데요?”

“내가 널 낮잡아야 했니?”

“그게 보통이에요.”

“아론.”

키리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양팔을 벌렸다.

“힘든 게 있으면 힘들다고 해. 들어줄게.”

아론은 그런 키리에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부모 잃은 아이 같은 눈이었다.

“그렇게 상냥하게 말할 거면서, 대체 왜 그랬어요……?”

소년이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기어코 갈색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왜 막아 주지 않았어요……?”

“무슨 말이니?”

“스노우스트림 가드가 해체됐잖아요……. 그 와중에 저는, 저만은, 누나의 호위로 고용된다고요……? 전설경에게 검을 배우라고요……?”

키리에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들은 적도 없는 이야기다. 그녀의 고개가 뻣뻣하게 뒤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나타니엘은 산책하던 사람처럼 태연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리에가 나타니엘에게 뭔가를 묻기도 전에, 아론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어요. 버틸 수 있었어요! 그런데…….”

팔로 눈물을 훔치던 아론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죽은 동료들 전원 작전 중 사망인데, 흐, 하하! 그런데 불명예 제대 처리한대요! 이유, 이유요?”

아론의 검 끝이 홱 하고 나타니엘을 향했다.

“전설경을 못 막아서요!”

그의 눈에 서린 증오가 그대로 눈물로 응결되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저 사람을 못 막아서……. 하하, 그게 가능한 사람이 호국경 말고 있기나 해요?!”

“미처 몰랐어, 아론. 내가 처리해 볼 테니 우선 칼을 내려놔.”

“그리고 그걸로 끝이 아니죠!”

아론이 입을 크게 벌리며 웃듯이 울부짖었다.

“묘지는 왜 파헤쳤어요?”

숨줄을 할딱대며 미친 듯이 악을 쓰는 아론의 외침이 겨울 하늘을 울렸다.

“동료들의 묘비는 왜요? 왜 안치까지 했던 유골을 다 파헤쳐서 어디 갔는지도 모르게 버려 버렸어요?”

“아론…….”

“켈리의 묘는 대체 왜 파헤쳤냐고요!”

산천초목이 합창하는 듯한 처절한 절규였다. 키리에는 사람이 그런 소리를 낼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키리에가 비틀거렸다. 오한이 든 사람처럼 몸이 덜덜 떨렸다.

“아론, 아론. 내가…… 내가 국왕 전하를 알현해 볼게.”

“알현? 푸하하하! 누나, 그걸로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 볼게. 내가 노력하마.”

“입 닥쳐요, 제발!”

허공에 칼을 휘두른 아론이 입을 크게 벌리고 컥컥대며 웃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허점이 많아요? 왜 그래요? 차라리 악당처럼 굴라고요! 왜 피해자처럼 굴어요?! 그럼 나는 누굴 탓하라고요!”

“악당이든 뭐든 해 줄게. 내려와!”

“왜 나한테 이게 전부 누나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냐고요!”

아론이 다시 발바닥에서 짜낸 듯한 힘으로 절규했다.

“왜 날 비참하게 만들어요…….”

고개를 숙이고 몸을 굽힌 자세 그대로 비틀거리던 아론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을 들었다. 검날은 소년의 목 앞에서 멈췄다. 키리에가 비명을 내질렀다.

“아론!”

“움직이지 말아요!”

“아론,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러지 마!”

“그러니까, 이게, 이게 아마 최선일 거예요…….”

“아론, 그만둬, 아론!”

“어차피 나는 누나를 못 죽이고, 그렇다고 전설경에게 복수할 수도 없으니까…….”

아론이 얼이 나간 눈으로 멜로니를 내려다보았다.

“멜로니 아주머니도, 아들이 전설경에게 죽은 고통을 더 짊어지지 않아도 되고요…….”

키리에는 잠깐, 세상의 모든 불이 꺼졌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그저 눈앞이 깜깜해졌을 뿐이다.

“……뭐?”

“몰랐죠? 그럴 것 같았어요.”

아론이 눈물 젖은 얼굴로 미소지었다.

“티모시는 제 친구였고…… 근위병이었고, 멜로니 아주머니의 아들이었고, 당신 옆에 있는 남자가 죽였어요.”

키리에가 입을 가린 채 소금 기둥처럼 굳었다. 자신을 향해 웃어 주던, 늘 뭔가를 더 먹이지 못해 안달이던 멜로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키리에는 그녀에게 자신이 얼마나 뻔뻔하게 보였을지를 생각하며 죄책감에 몸부림쳤다.

기분이 어땠을까. 죽이고 싶었을까. 속이 문드러졌을까. 그 앞에서 죽을상을 할 때마다 가소롭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나는 몰랐어. 알았다면 절대…….”

“그게 누나 잘못은 아니라는 거 알아요……. 그런데요, 누나.”

소년이 턱을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전설경이 누나를 좋아하는 이상, 결국 사람들이 죽을 거예요. 그건 누나도 알죠?”

안다. 알고 있다. 키리에가 양팔을 감쌌다.

눈물도, 웃음도 지나갔다. 아론의 얼굴에선 이제 초연함밖에 보이지 않았다.

소년의 눈은 더 높은 곳을 보고 있었다. 혹은 아예 낮은 곳이든가.

아론이 고개를 내려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입매에 가늘고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착한 누나니까, 제가 이렇게 부탁할게요…….”

“…….”

“누나, 죽어 주면 안 돼요?”

그 말이 기폭제였다. 아론의 입에서 숨겨 두었던 저주의 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죽어 줘요, 누나. 죽어 주세요, 제발요, 누나가 죽어야 이 일이 끝나요. 전설경을 누가 막아요……? 아무도 못 막잖아요. 그게 누나라고 해도요.”

아론이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누나가 죽어 주면 모든 게 끝나지 않을까요? 누가 누나를 죽일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누나 스스로 죽어 줘요.”

“…….”

“누나는 착하잖아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으니까,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죽어 주면 안 돼요? 죽어 줘요, 죽어 주세요. 제발요. 내가…….”

미친 듯이 말을 쏟아내던 아론이 일순 고장이 난 것처럼 멈췄다. 곧 아론의 칼이 경동맥 근처를 꾹 눌렀다.

“내가 같이 죽어 줄 테니까…….”

키리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먼 곳에서 구경꾼처럼 선 사람들이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그것이, 키리에가 지금까지 외면했던 사실이었다. 그녀는 그냥 죽으면 된다. 모두가 키리에의 자살을 바란다.

마침내 키리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누나.”

아론이 환히 웃었다. 끝에 어울리는, 환한 미소였다.

“죽어 버려요.”

검날이 소년의 목을 찢었다. 피가 튀었다. 소년의 몸이 쓰러지면서 발치에 앉아 있던 사내까지 옥상 아래로 떨어뜨렸다.

쿵, 소리가 났다.

어느새 쌓인 눈 위로 피가 스몄다. 마지막 순간에 소년이 켈리, 라는 이름을 중얼거린 것도 같았다.

키리에는 텅 빈 얼굴로 스르르 주저앉았다. 어떤 감정을 드러내기엔 그녀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눈은 피거품을 물고 꿈틀거리는 아론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타니엘이 그 앞을 가렸다.

[훌륭한 연사야.]

검은 예복. 길게 뻗은 다리. 그는 노인 앞의 죽음처럼 서서 키리에를 내려다보았다.

키리에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갔다. 양손이 바닥을 짚었고, 손톱이 땅과 눈을 긁었다.

“……전부 당신이 꾸몄죠?”

[물론이야.]

나타니엘이 대답했다.

[굳이 풀어 설명하자면 너희의 만남, 위로금, 고립, 부추김, 근위대의 해체, 묘지, 그밖에도 여러 가지.]

그는 제 손으로 만든 참상에 일말의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키리에는 몇 번이고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벌렸으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크게 뜬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렀다.

“……왜요?”

[별 이유는 없어.]

나타니엘이 일고조차 없이 답했다. 키리에가 웃음을 터뜨렸다.

“별 이유 없이 이 모든 사태를 부추겼다고요……?”

[그래.]

키리에가 심장이라도 토할 것처럼 입을 벌렸다. 나오는 건 목구멍소리뿐이었다.

“사람이 죽었어요, 나타니엘. 사람이…….”

그녀는 말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말이 얼마나 쓸모없는지를 깨달았다.

나타니엘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한 손으로 키리에의 뺨을 들어 자신을 보게 했다. 그리고 키리에를 향해 아이처럼 맑은 눈으로 미소지었다.

[네가 죽은 것도 아니잖니.]

침묵이 아주 잠시 내려앉았다.

키리에는 천천히 웃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나타니엘의 양 뺨을 잡았다. 녹은 눈과 흙 탓에 지저분한 손을 그는 피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아주 살짝,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키리에는 그 푸른 눈을 들여다보며 꺼질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타니엘의 눈이 깜빡였다. 깜빡임 한 번에 기대감, 깜빡임 한 번에 소유욕, 깜빡임 한 번에 광기.

키리에가 복수심을 잊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뜬 채 미소지었다.

“당신이 싫어요…….”

그 순간 일견 무의미했던 나타니엘의 미소에 희미한 잔인성이 떠올랐다.

그의 고개가 좀 더 기울었다. 뜬 눈은 더는 깜빡이지 않았으나, 그건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기뻐하고 있었다.

“당신을 만난 걸 후회해요.”

키리에가 좀 더 크게 웃었다.

어차피 이리될 거였다면 진작 말할 것을 그랬다. ‘믿는다’는 말 따위 하지 않을 것을, 잘못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를 감당하려는 생각 따위, 하지 말 것을 그랬다.

어차피 아무것도 통하지 않을 테니.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어.”

“나타니엘 님은 이제 만족하세요?”

안네마리가 물었다. 그녀는 이제 막 키리에를 방에 데려다 놓은 참이었다.

응접실 체스판 앞에 앉아 있던 나타니엘은 지팡이를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쁘지 않아. 공들인 보람이 있어.]

“…….”

안네마리가 조용히 그를 응시했다.

결점 없는 얼굴은 배부른 짐승처럼 평온했다. 눈 속에서 키리에를 마주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고요한 모습이었다.

그래, 그때.

키리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안네마리는 나타니엘이 한쪽 무릎을 꿇은 순간부터 숨을 쉬지 못했다.

나타니엘의 그림자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키리에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눈앞의 사탕을 먹을까 말까를 고민하는 아이처럼.

안네마리는 처음으로 주인을 두고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너도 꽤 잘해 주었지.]

나타니엘의 말이 안네마리의 상념을 깨웠다. 그는 천상의 사자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릴 건 알리고, 숨길 건 숨기고, 부추길 것은 부추기고.]

“전부 아가씨를 위해서예요. 나타니엘 님은 약속을 지키셔야 해요.”

[그래.]

그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죽이지 않기로 했으니 그리 해야지. 네 주인이 그걸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키리에가 아닌 사람을 상대로 이렇게 길게 말하는 걸 보면, 그는 정말 기분이 좋은 듯했다.

안네마리가 힘없이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분명 키리에를 위한 행동이었는데, 나타니엘에게 속절없이 이용만 당하는 기분이었다.

“……나타니엘 님은 아가씨를 좋아하잖아요.”

혼잣말처럼 나왔지만 분명 나타니엘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타니엘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깊고 고요한 시선으로 안네마리를 보았다.

둘 다 그게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배타적인 감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달리 마땅한 표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타니엘이 이해한다는 듯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 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겠지.]

드물게 보이는 그의 관용에 매달리며 안네마리가 말했다.

“잘해 주면…… 안 되나요? 잘해 줘서 옆에 있게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참. 잘도 그런 따분한 말을 하는구나.]

“따분하다고요?”

[그래.]

나타니엘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턱을 괴었다. 그의 얼굴에선 슬슬 권태가 떠오르고 있었다.

[호감은 휘발성이 강하지. 사람은 늘 좋은 것, 이미 가진 것보다는 싫은 것, 아직 내게 없는 것에 집중하기 마련이거든.]

“하지만……!”

[반면 증오는 달라.]

나타니엘이 다시 정면을 보았다. 벽난로 불길이 그의 얼굴 위에서 일렁이고 있는데도, 전혀 따뜻해 보이지 않았다.

[증오의 수명은 몹시 길며, 너희가 좋아하는 낭만보다 집요하고 처절하기까지 하지.]

나타니엘이 무릎 위에 지팡이를 올리며 산뜻하게 말했다.

[그러니 네가 누군가를 소유하고 싶다면, 그 누군가의 부모를 최대한 잔인하게 죽이렴.]

“…….”

[그럼 그 누군가는 평생 너를 증오할 거고, 너는 그로써 그를 평생 소유할 수 있겠지.]

안네마리의 얼굴은 점점 더 울상이 되어 가고 있었으나, 그녀는 애써 그것을 다잡았다.

“하지만 나타니엘 님은 아가씨의 부모님을 불사르지 않았잖아요?”

[너무 간편한 절망은 그만큼 빠져나오기도 쉽거든.]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안네마리가 치맛자락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키리에 아가씨를 또 울리실 거예요?”

나타니엘의 눈이 다정하게 빛났다. 슬금슬금 고개를 디밀던 싫증도 키리에의 이름이 나오자 순식간에 쑥 들어갔다.

그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예쁘잖니.]

그게 그의 가장 두려운 부분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순수하게 키리에의 고통을 사랑스러워한다.

[우는 것도, 괴로워하는 것도, 기대감을 갖는 것도, 희망을 가졌다가 절망하는 모습도 훌륭해. 그중 최고는 부서지는 모습일 테지만, 한 번 부수면 돌이킬 수 없으니…….]

신중해야지, 하고 말꼬리가 잦아들었다. 어쩐지 고민하는 듯한 기색이 엿보여, 안네마리가 급하게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안, 안네마리는 아가씨가 우는 건 싫어요!”

상념을 방해받은 나타니엘이 다소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방금 네 취향을 물었던가?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걸.]

“그, 그치만, 나타니엘 님은, 나타니엘 님은 안네마리에게 아가씨를 죽이지 않겠다고…….”

[내가 고작 말 하나 지키지 못할 사람으로 보였나 보구나.]

“그게 아니라……!”

안네마리가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타니엘 님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신 거예요?”

[뭘 말하는지 모르겠는걸.]

“아가씨가 맨날 울어도…… 괜찮아요?”

[키리에가?]

“아가씨가 더는 웃지 않아도, 나타니엘 님을 싫어해도…… 정말 괜찮다고요?”

나타니엘은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라는 듯이, 턱 끝에 지팡이를 댄 채 고개를 젖혔다.

[오히려 그래 준다면 더할 나위 없다고 해야겠지.]

나른한 품위가 흐르는 푸른 눈이 꿈꾸듯 젖어 들었다.

[정말 그 애가 나를 향한 증오로 미쳐 버린다면…….]

나타니엘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타닥거리는 벽난로 불꽃에 눈길을 둔 채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그에 맞춰 섬뜩한 기운이 방 안에 출렁이며 차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네마리는 너무나도 사악한 기운에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벽을 더듬어 간신히 방을 빠져나왔다.

열린 복도 창문을 통해 세찬 겨울바람이 안네마리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자,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안네마리가 창틀에 손을 올리고 달을 올려다보았다. 슬픈 눈이었다.

“안네마리는 할 수 있어요……. 이젠, 정말 안네마리가 아가씨를 지켜야 해요…….”

***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할 새도 없이 다시 야회가 열렸다.

“오늘도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뷰캐넌 양!”

“사랑받는 여자는 그 누구보다 아름답지요. 뷰캐넌 양을 보니 그 말이 참으로 맞는 말이네요.”

귀족들은 근래 몸무게가 9파운드나 빠진 키리에를 향해 전보다 낯빛이 좋고 피부가 매끄럽다며 비법을 물었다. 모두가 작위적인 웃는 얼굴로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다.

키리에는 답하지 않았다. 예의를 차리는 정도의 미소마저 없었다. 귀족들은 뒤에서 욕을 했지만, 그래도 야회는 성황이었다.

오늘도 불참한 나타니엘 대신 자리를 잡은 것은 그 남자였다.

〔미안합니다.〕

“…….”

〔손을.〕

궁의 좁은 복도를 채운 사람들 사이로 호국경 로르 레쇼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레쇼는 서툴고 어색한 동작으로 키리에의 손등에 입 맞추고서 고개를 들었다.

〔나타니엘은 어디 있습니까?〕

키리에가 대답 대신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레쇼는 대답을 채근하는 대신, 다른 화제를 꺼내는 쪽을 택했다.

〔살이 빠졌습니다. 건강을 챙기십시오.〕

“경께서 할 소리인가요?”

〔내가 하지 못할 말은 없습니다.〕

키리에가 냉소했다. 겉이 어떻든 이들 불멸자의 속은 오만 그 자체다.

그녀는 이쪽의 대화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무정한 눈으로 둘러보았다.

“알고 계셨죠? 이렇게 될 거란 걸.”

〔그렇습니다.〕

“방관하셨고요.”

〔그렇습니다.〕

대화가 끊겼다. 궁의 모든 문을 열고 방끼리 이어지는 복도를 따라 영랑들은 춤을 추었다.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든 만큼 사방이 듣그러웠다.

모두가 키리에에게 인사했지만, 인사한 이후로는 누구도 다가오지 않았다. 키리에는 무대의 정중앙에서 누구도 손대지 않는 장식용 케이크처럼 앉아만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건강을 챙기십시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필요가 없어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겠죠.”

키리에가 공허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사람들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다들 비위 맞추느라 힘들겠군요.”

〔죽는 것보다야 나을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레쇼가 깊은 눈으로 키리에를 내려다본 뒤 덧붙였다.

〔불유쾌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참아 주십시오. 미친 나타니엘을 막아서고 싶지는 않으니까.〕

“고작 제가 죽는다고 미치진 않겠죠.”

레쇼는 한참을 침묵하더니, 〔글쎄요.〕하고 짧은 대답만 던지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때, 방 한쪽이 시끄러워졌다.

“어머나, 뷰캐넌 백작, 아니, 이제 공작님이시죠?”

“요즘 정말 뵙기 어렵다는데, 야회에 오길 잘했네요…….”

인파 속에서 뒤로 넘긴 연보랏빛 머리칼을 본 키리에가 처음으로 약간의 생기를 보이며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

키리에가 중얼거렸다. 납치 이후 처음 보는 아버지였다.

키리에와 세자르의 눈이 마주쳤다. 세자르는 딸을 향해 손을 들어주곤, 주변의 모든 사람과 악수하기 시작했다.

세자르가 키리에에게 다가온 것은 30분이 지나서였다. 그마저도 키리에에게 먼저 인사하지는 않았다.

“호국경 아니십니까. 그간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딸애를 아껴 주신다고도요.”

〔그렇군.〕

레쇼가 초조한 얼굴의 키리에를 힐끗 넘겨다 보고는 한 발짝 물러났다.

〔딸과 이야기하러 왔나 보군.〕

세자르가 그제야 비로소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아주 다정하고, 또 몹시도 이성적인 눈빛이었다.

“키리에. 잘 지냈느냐? 어째 더 예뻐진 것 같구나.”

시선만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절박하게 세자르를 바라보던 키리에가 멈칫했다.

“아버지. 그동안 왜 저를…….”

“야회에 지루한 이야기는 어울리지 않는단다, 키리에.”

세자르가 능숙하게 근처를 지나던 웨이터의 쟁반에서 잔 두 개를 들어 건넸다.

“발코니로 가자. 네 야회지만 부녀 상봉의 시간 정도는 배려해 주겠지.”

***

발코니로 들어서자마자 세자르는 등을 보인 채 이렇게 말했다.

“키리에. 그 근위병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말은 신경 쓰지 말거라.”

그 말을 들은 키리에가 울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키리에의 어머니는 키리에가 열 살일 때 이혼해 집을 나갔다.

이후 세자르는 키리에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가끔 물건을 던지고, 뺨을 때리고, 잘하지 못하면 구박하고, 폭언을 했지만, 키리에가 잘하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아주 어릴 적에는 잠들기 전 머리맡에서 동화책을 읽어 주기도 했다.

그래서 노력했고, 드디어 세자르가 그걸 알아주었다고 생각했다. 역시 그는 조금 매정할 뿐, 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냐고.

그러나 몸을 돌린 세자르는 본 적 없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들은 낳아야지.”

키리에는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들이요?”

“바깥은 걱정 말거라. 올드시우다드와 포트듀케인이 좀 소란스럽긴 하지만 별문제 없을 거다. 전설경에 호국경이지 않느냐. 왕가는 이제 이빨 빠진 호랑이야.”

“아버지…… 잠시만요.”

“이 나라의 모든 것이 지금 너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 참, 혹시 전설경과 호국경께 몇몇 가문의 통행세를 내려달라고 청 드려 봐라. 목록은 사람을 통해 전해 주지.”

“아버지, 제 말을…….”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고. 전 같은 실수는 하지 말자꾸나, 키리에.”

세자르가 난간 위에 잔을 내려놓고 키리에의 양어깨를 잡았다.

“애교 있게, 귀엽게, 사랑받을 수 있게. 알겠지? 이게 다 뷰캐넌을 위해서야.”

그의 말 어디에도 키리에를 향한 걱정은 없었다.

키리에가 자신의 양팔을 감싸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죽을 때까지 방 안에 갇혀서 못 나갈 수도 있어요.”

텅 빈 손을 품위 있게 수습한 세자르가 말했다.

“전설경은 불로불사라 들었으니 그렇게 되겠지.”

“뷰캐넌 백작, 아니, 공작가의 안살림도 제가 맡고 있었고…….”

“내가 다 할 테니 괜찮다. 그런 건 문제가 안 되지.”

“대외적으로 아버지를 대신해 뷰캐넌으로 참석하던 모임들이며…….”

“그래. 안 그래도 외국에 나가 있는 네 오라비를 그만 불러들일 생각이란다.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너는 궁에서 푹 쉬면 되겠구나.”

키리에의 야윈 얼굴 위에서 처연한 두 눈이 마구 흔들렸다.

“누군가의 허락 없이는 한 발짝도 바깥에 나가지 못하는 상태로요? 씻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는 상황에서요?”

세자르가 긴 숨을 뱉었다.

“아까부터 뭘 말하고 싶은 거냐.”

키리에의 숨이 막혔다. 그녀는 마치 눈밭에 내동댕이쳐진 사람처럼 몸을 떨기 시작했다.

“정말로 제게 그것밖에 하실 말씀이 없으세요? 납치당한 이후, 처음 보시는 거잖아요…….”

세자르는 보기 좋게 쭉 뻗은 눈썹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키리에. 지금 넌 전설경을 모신다는 대체 불가능한 역할을 맡고 있다. 일의 경중을 판단하는 능력 정도는 가르쳤다고 생각한다만.”

온몸의 힘이 빠졌다.

아버지가 아론이 어떻게 죽었는지 듣지 못했을 리 없다. 그걸 전해 듣고도 그는 하다못해 면피를 위한 ‘괜찮냐’는 질문 한 번 하지 않았다.

키리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양팔을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아버지. 사람들이…….”

“그만 좀 하지 못해!”

세자르가 키리에의 말을 가로막으며 호통쳤다.

“감정적으로 굴지 좀 말거라! 결국 비단 방석 위에서 뭐든 얻어낼 수 있게 된 거 아니냐! 네가 그딴 배부른 소리나 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욕하는 거야!”

“…….”

“난 널 명문 뷰캐넌 백작가의 규수로서 가르쳤다! 다 이런 날을 위해서였지. 이제야 네가 그 역할을 다할 기회가 온 건데 넌…….”

세자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랫동안 그의 안색을 살피고 비위를 맞춰 왔던 키리에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짜증을 내고 있었다.

“넌 정말 쓸모라곤 없구나.”

그때 왜 아론의 말이 떠올랐을까?

‘그냥 힘들다고 해요, 누나.’

키리에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은하수와 함께 흐르는 자신의 나약함에 헛웃음을 쳤다.

키리에는 자신을 가해자라 생각했다.

지나간 일에 만약은 없다지만, ‘나타니엘을 깨우지 않았더라면’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벌어진 모든 일이 자신의 책임 같았다.

그러나 이기적이어도 좋으니, 가족에게만은 듣고 싶었다. 네 잘못이 아니란 말을.

‘넌 틀렸어, 아론.’

그녀는 이제 그것이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며, 자신이 나타니엘이 말한 ‘자기 투영’에 취해 있었을 뿐임을 깨달았다.

그걸 깨달은 키리에는 이윽고 자유로워졌다. 모든 것에서.

키리에가 느리게 젖혔던 고개를 내렸다. 떨림은 이미 잠잠해져 있었다.

“아버지.”

“그래.”

“감사해요.”

세자르가 한쪽 눈썹을 추켜 올렸다.

“이젠 이해하는 게냐? 이 아비가 다 오늘 같은 날을 위해 너를 교육했다는 것을.”

키리에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여전히 착각 속에 살고 계시네요.”

세자르가 정색했다. 뭔가를 던지는 버릇이 나오려는지 팔이 움찔거렸지만, 키리에는 이제 움츠러들지 않았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죽기 전 아론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제야 깨달았어요. 저는 그동안 아버지가 나름의 방식으로 저를 사랑해 주시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키리에의 말을 들은 세자르가 바로 작위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야 사랑하고말고. 너는 내 딸이 아니니?”

키리에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데 아니었어요.”

그녀가 손을 뻗어, 난간 위에 올려져 있던 세자르의 잔을 툭 밀었다. 목이 긴 잔은 어둠 속으로 떨어져 작은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져 버렸다.

“아니더라고요…….”

참으로 사소한 동작이었으나, 세자르는 그 순간 키리에에게 엄청난 거리감을 느꼈다.

나긋한 목소리와 귀족적인 억양, 다소곳하고 품위 있는 몸짓, 희미한 오만과 권태가 깔린 표정은 분명 그가 가르친 키리에였다.

그러나 지금의 키리에는 그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세자르는 처음으로 자신의 딸이 아닌 인간 키리에 뷰캐넌을 보았다.

“제가 사랑이라고 느꼈던 아버지의 눈빛은, 그냥 집에 오래 두었던 물건을 보는 애정 정도였던 거죠. 잃어버리면 잠깐 마음이 허전하고 말…….”

키리에의 미소에서는 이제 그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세자르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버지가 그토록 바라는 고상하고 긍지 높은 뷰캐넌이 되려고 애썼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성을 못 느끼겠네요. 당신의 뷰캐넌이지 내 뷰캐넌이 아니니까.”

마지막 말을 마친 키리에가 숄을 추슬렀다. 그녀는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가만히 난간 너머에 펼쳐진 떡갈나무 숲을 바라보았다.

봄이 오려면 멀었고, 밤공기는 아직 차가웠다.

키리에가 미소지었다. 참으로 겨울이 아닌가.

“다음에 만날 땐 예를 갖추세요, 뷰캐넌 공작. 오늘부로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닙니다.”

***

다음 날부터 키리에는 열병에 시달렸다. 뇌가 익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의 고열 속에서 들리는 건 주변을 채운 긴박한 목소리뿐이었다.

[고쳐.]

“소용이…… 정신적인……!”

[그럼…… 전부…… 해야겠구나.]

“상담이…… 무리를……!”

[……섭외해.]

“요양이…….”

맥락을 파악할 수 없는 말들이 단편적으로 지나갔다. 정신은 죽어 가는 불꽃처럼 깜빡거리기를 반복했다.

[절대 못 줘.]

그리고 키리에는 처음으로 나타니엘의 목소리에서 긴장감을 느꼈다.

눈물에 젖은 눈을 가늘게 떴을 땐, 나타니엘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또 그런 표정을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극도로 날이 선 얼굴이었다.

이제 그는 아예 인간이나, 하다못해 석고상 같지도 않았다. 혼자만 시간을 다르게 사는 것 같던 여유도 사라져 있었다.

나타니엘이 키리에의 이마에 손을 얹으며 속삭였다.

[영악하기 짝이 없구나. 너희는 늘 마지막에는 나를 남겨 두고 죽음을 통해 구원받지.]

키리에는 어쩐지 그 목소리에 희미한 설움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더는 안 돼. 더는 도망치게 두지 않아.]

다짐하듯 속삭이는 말에, 키리에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

그녀는 자신이 왜 웃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진작 이랬어야 했다는, 드디어 옳은 방향을 찾았다는 생각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별처럼 반짝였다.

그 미소를 본 나타니엘은 또다시 처음 보는 얼굴을 보여 주었다. 광기, 냉소, 혹은 무표정, 혹은 약간 언짢은 듯한 기색을 비치는 게 전부였던 그에게서 처음 보는 강렬한 분노였다.

[도망치겠다고?]

나타니엘이 천천히 손을 옮겨 키리에의 목을 쥐었다. 아주 느렸다. 그리고 아주 차가웠다.

키리에는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눈을 감았다.

[…….]

나타니엘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키리에의 목을 쥐고만 있었다. 그는 끝끝내 손에 힘을 주지는 못했다.

눈을 감은 키리에는 보지 못했으나, 그녀는 또 처음으로, 나타니엘이 무겁게 한숨 쉬는 것을 들었다.

[너는 지나치게 약해서…….]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차가운 손은 곧 떨어져 나갔다. 키리에도 다시 잠의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멀어져 가는 빛을 향해 미소지었다.

그래요, 이젠 죽어도 괜찮겠지요. 어차피 나는 아무의 환영도 못 받고, 누구의 무엇도 될 수 없지요. 그러니 그것도 괜찮겠지요. 상관없겠지요…….

***

키리에는 오래 앓았다. 나타니엘이 억지로 몸의 온도를 낮추지 않았다면 뇌 기능이 떨어졌을 게 분명했다.

의원은 원래부터 추위에 약한 그녀가 너무 오래 찬 바람을 쐰 것이 원인이라 말했다.

그러나 단순히 그 문제만이 아님을 모두가 알았다. 정말 몸의 문제였다면, 안네마리의 치료로 나았어야 했다.

깨어난 키리에는 침대 캐노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살아 있네.”

기이할 정도로 침착하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아쉬움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아가씨……?”

키리에의 무릎 근처에 달려들어 엉엉 울던 안네마리가 괜한 섬뜩함에 눈을 크게 떴다. 키리에가 그런 안네마리를 보며 다정하게 미소지었다.

“잘 지냈니, 안네마리?”

오래 앓았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또렷한 인사였다.

“안네마리는 잘 지냈어요…….”

“잘됐구나.”

“아가씨, 괜찮으세요? 불편하신 데는요? 2주를 꼬박 앓으셨어요…….”

“개운해. 가뿐하고. 몸을 일으켜 줄래?”

키리에는 등에 쿠션을 대고 앉아, 작게 기침한 뒤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많이 왔구나. 예쁘네.”

“네에…….”

“뭔갈 먹어야겠어.”

“앗, 네! 가져다드릴게요.”

안네마리가 다른 시종을 불러 식사를 가져오게 했다.

그동안 키리에는 땀으로 젖은 몸을 닦고, 머리를 모아 묶었다. 눈밭에 핀 청보라색 백합처럼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그걸 보는 안네마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아가씨. 괜찮으신 거죠?”

“응.”

키리에의 대답은 가벼웠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그녀는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 보였다.

식사가 도착하자, 키리에가 온화하고 차분한 얼굴로 상을 내려다보았다.

“미음이구나.”

“네. 아무래도 오랫동안 뭘 못 드셨으니까요.”

키리에가 꼭 나타니엘이 떠오르는, 어딘지 초연한 미소를 지은 채 지긋이 상을 내려다보았다.

“좀 아쉽지만…….”

“네?”

안네마리가 의아하게 되물은 순간이었다.

키리에가 금사로 장식을 넣은 포크를 쥐었다. 그리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목을 향해 찔러넣었다.

키리에가 변했다.

[또?]

밖에서 돌아와 응접실을 지나치던 나타니엘이 안네마리에게 물었다. 안네마리가 울먹거렸다.

“네. 아침부터 계속…….”

나타니엘은 노크 세 번 이후 곧장 문을 열었다. 키리에가 의자로 창문을 깨부수려는 자세 그대로 멈췄다.

“일찍 왔네요.”

[뭐하는 거지?]

“깨질까 하고.”

[마법을 걸어 놔서 깨지지 않아.]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잖아요.”

[창문은 나무가 아니야, 키리에 뷰캐넌.]

키리에가 ‘어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던져 볼까.’ 같은 얼굴로 팔에 힘을 주었기에, 나타니엘은 검으로 의자를 갈라 버리는 쪽을 택했다. 이제 그는 아름다운 흰 검을 꺼내는 것을 망설이지도 않았다.

짧은 의자 다리만 남자, 키리에가 단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깔끔하네요.”

그녀는 미련 없이 그것을 버리고 침대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타니엘은 손도 대지 않은 테이블 위의 그릇을 확인한 뒤, 손가락을 튕겼다. 즉시 안네마리의 몸이 보이지 않는 힘에 방 바깥으로 밀려났다.

[키리에.]

대답 없이 책장이 넘어갔다. 시위라도 하듯 화려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식사를 또 걸렀구나.]

키리에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타니엘은 요 몇 개월간의 경험 덕에 키리에 뷰캐넌의 고집이 매우 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여 그는 품위 있는 걸음걸이로 키리에에게 다가가, 그녀를 번쩍 들어 어깨 위에 실었다.

“꺅!”

키리에가 낮게 비명을 지르며 팔을 버둥거렸다. 나타니엘은 얼굴에 부딪히는 장신구에 미간을 좁히다가, 키리에가 그냥 버둥대는 게 아니라 호신용 관절기를 걸려고 한다는 것을 깨닫곤 실소를 흘렸다.

[뷰캐넌이 별 걸 다 가르쳤군.]

“책 읽고 있잖아요! 무례하게 굴지 말아요.”

[넌 어제부터 굶었어.]

“어제부터 입맛이 없다고 했는데요.”

나타니엘이 키리에의 말을 무시한 채 그녀를 테이블 앞에 앉혔다. 키리에가 차려진 상을 보자마자 얼굴을 찡그리고서 고개를 돌렸다.

“토할 것 같네요. 안네마리! 이것 좀 치워 주렴.”

[아니.]

나타니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먹어.]

“싫어요.”

[내가 이렇게 나올 때 먹는 게 좋을 텐데.]

“인간은 억지로 먹이면 탈이 나죠.”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어.]

“그럼 죽겠네요.”

키리에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단 한 점의 망설임도 없는 말이었다.

나타니엘은 고작 일주일 사이에 눈에 띄게 살이 빠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먹어.]

“싫어요.”

키리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음에 안 들면 죽여요. 죽이고 새 인형을 찾으면 되겠네요.”

나타니엘이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글쎄. 나는 너 말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은데.]

키리에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러세요, 그럼.”

그건 확실히 나타니엘의 예상 범위 밖이었다.

키리에는 무심하고 오연하게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제 타인의 죽음에 얽매이지 않았다. 어차피 나타니엘은 하고 싶은 것은 한다. 그러니 그를 말릴 시간에 자진하는 길을 찾는 게 낫다. 그게 키리에의 새 인생 목표였다.

나타니엘은 그로 인해 자신이 아주 귀찮아지리란 것을 손쉽게 깨달았다.

그가 손을 뻗어 키리에의 턱을 들어 올렸다.

[마지막 권고야. 먹어.]

키리에가 방긋 웃었다.

“싫어요.”

나타니엘도 예상했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그럼 먹여 주면 좋겠다는 뜻으로 알지.]

“네? 읍!”

바로 나타니엘의 손가락이 입 안에 들어왔다. 우격다짐이었다.

키리에의 눈에 나타니엘이 다른 손으로 미음을 담은 수저를 드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그녀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힘으로 그를 뿌리쳤다.

“싫다니까요!”

키리에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아직 김이 나는 그릇을 들어 자기 머리 위에 쏟아 버렸다.

반사적으로 물러난 나타니엘이 할 말을 잃었다. 그 앞에서 키리에는 엉망진창이 된 드레스 차림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됐어요? 좀 품위 없었나요?”

잠시 침묵이 오갔다. 나타니엘의 눈이 가늘어지고, 동시에 사나워졌다.

[몹시.]

“버릴 마음이 드셨는지?”

[아니.]

“좀 더 분발할게요. 전 씻어야겠으니 나중에 다시 오세요.”

그 한 번의 반항마저 힘에 부쳤던 키리에가 손을 내저으며 테이블을 짚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나타니엘이 평정을 위한 노력처럼 느껴지는 긴 숨을 내쉬었다.

[그래. 씻어야겠구나.]

“네?”

뿌리칠 새도 없었다. 나타니엘이 단숨에 키리에의 허리를 들쳐 안았다.

“잠깐만요, 뭐하는 거예요!”

짐짝처럼 들린 키리에가 버둥거렸으나, 그는 빠른 걸음으로 침실을 나왔다.

[씻어야겠다고 했잖니.]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식사하는 법도 모르는데 씻는 법이라고 알 리가 없지.]

“나타니엘!”

그는 더 대답하지 않고서 욕실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대로 들고 있던 키리에를 넓은 욕조 안으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잠……!”

요란한 풍덩 소리가 났다.

키리에는 드레스 탓에 한참을 버둥대다가 겨우 수면 위로 올라왔다.

“콜록, 콜록!”

[이제야 좀 보기 좋구나.]

“콜록, 무슨……! 세상에!”

[씻겨 준 거란다.]

나타니엘은 욕조 앞에 서서 자신의 손과 옷에 묻은 음식 찌꺼기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다시 한번 긴 숨을 쉬었다.

[자랑해도 좋겠어, 키리에 뷰캐넌. 날 이 꼴로 만든 건 네가 처음이야.]

나타니엘이 겉옷을 벗고 흰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곧이어 푸른 빛이 나타니엘의 몸을 감싸자, 그의 몸에 음식물 찌꺼기의 흔적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키리에가 욕조 가장자리에 달라붙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어차피…… 콜록, 마법으로 처리할 거면서.”

[뻔뻔하기도 하지.]

“콜록, 무슨…… 상관이에요.”

키리에가 지친 몸을 늘어뜨렸다.

“그래서 이젠 됐나요? 그만 나가 줘요……. 당신 말고 안네마리가 감시하면 되잖아요.”

먹은 게 없으니 물장구 한 번도 힘에 부쳤다. 그녀는 욕조 바깥으로 팔을 늘어뜨린 채 가쁜 숨을 쉬었다.

본디 성실히 인간들의 예의를 지키는 나타니엘은 그답게 반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별일이 없다면 나갈 생각이었다.

그때, 키리에의 지친 중얼거림이 나타니엘의 발목을 잡았다.

“죽기 한번 참 힘드네요…….”

그러니까, 그녀는 항상 이런 식으로 그를 자극한다.

나타니엘은 나가려던 것을 방향을 바꿔, 키리에에게 다가갔다. 긴 손가락이 단숨에 키리에의 목덜미를 잡았다.

[재밌나?]

“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키리에의 코앞에서 푸른 눈이 오만하게 빛났다. 그는 아주 약간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죽고 싶은 거라면 진작 죽었어야지. 이제 넌 네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없어. 그걸 아직도 모르다니. 열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구나.]

욕조에 가득 출렁대던 물이 넘쳐 나타니엘의 구두와 바짓단을 적셨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키리에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가시 돋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런 짓을 했겠죠. 참으로 대단하신 소유권 주장이네요.”

[너희는 항상 나를 탓하지.]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어요.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에게 당한 일을 내게 화풀이하지 말아요.”

나타니엘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잠깐 침묵했다.

[두 번 들으니 새롭고 좋네. 용기도 가상하고. 내가 널 어떻게 다룰지 별로 걱정되지 않나 보지?]

“관심 없어요. 어차피 당신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까.”

[정말 내키는 대로 할 뿐이라면 이렇게 널 봐주지도 않았어.]

키리에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냉소했다.

“봐 달라고 한 적 없어요.”

[그건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그러니 내 행동 역시 당신이 정할 수 없죠.”

그녀는 너무 오래 욕조에 몸을 담근 탓에 달아오른 얼굴을 휘휘 저었다.

나타니엘은 배 속에서 올라오는 충동을 내리누르며 손을 떼어냈다.

[다시 한번 말하지.]

그는 대신 키리에의 머리카락을 잡고, 아직 남아 있던 음식물 찌꺼기를 떼어내기 시작했다.

[씻고 식사를 해. 한 번만 더 이런 일로 나를 불렀다간 널 밀가루 속에 던져 버릴 테니 그리 알고.]

키리에가 멍한 머리로 한숨을 쉬었다. 두 번 말하진 않는다던 사람이 지금 식사하란 말만 몇 번째인지 모른다.

그녀는 황송하게도 자신의 머리카락에 묻은 이물질을 일일이 떼어 주는 전설경을 보며, 몹시 마음이 슬퍼졌다.

“……이제 그만 다른 사람을 찾아도 되잖아요.”

나타니엘의 손이 멈칫했다가 다시 움직였다.

[다른 사람? 흥미롭네. 아직도 그런 희망을 갖고 있었다니 말이야.]

“뷰캐넌 공작이 후대의 모든 마력을 담보로 당신이 죽는 걸 막았다는 걸 이젠 알잖아요. 내 말은…….”

키리에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너무 무겁게 느껴지는 목걸이를 벗으려 걸쇠를 만지작거렸다.

그를 본 나타니엘은 키리에가 원한다면 충분히 쳐낼 수도 있는 느린 속도로 그녀의 목덜미에 손을 뻗었다. 키리에는 차가운 손길을 느끼며, 그가 걸쇠를 벗기기 쉽도록 머리카락을 모아 넘겼다.

“……내가 특별한 게 아니잖아요. 아마 뷰캐넌 공작이 걸었던, 당신을 깨울 마법이 내 대에서 발현됐을 뿐이니까요.”

[그렇겠지.]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사금파리 깨지는 소리를 내며 욕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럼 나일 이유는 뭔가요?”

키리에가 물었다. 나타니엘은 키리에의 장갑을 벗겨 내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없지.]

“그럼 바꿔요. 누군가는 좋아할 거예요.”

나타니엘이 욕조 안을 더듬었다.

[안 돼.]

그는 몸을 피하는 키리에의 다리를 붙잡고 기어코 구두와 양말까지 벗겨 낸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옷은 알아서 벗도록.]

“…….”

키리에는 말없이 눈앞의 전설경을 올려다보았다.

어울리지도 않는 시중 탓에 그의 소매와 무릎, 구두와 바짓단이 축축했다. 절대 다른 사람에게 이리 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도 알고는 있었다. 근본이 소유욕이든 뭐든, 나타니엘이 자신을 특별하게 대우해 주고 있다는 걸.

‘하지만 난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야…….’

멍하니 나타니엘을 올려다보던 키리에가 툭 던지듯 말했다.

“죽게 해 줘요.”

셔츠의 소맷단을 정리하던 나타니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키리에의 뇌리에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창문가에 서 있던 나타니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또 동시에, 지팡이를 짚은 채 눈 내린 겨울 숲을 바라보던 그 등도.

[너는 너무 일찍 죽어.]

이윽고 나타니엘이 쓰게 웃었다.

[포기해.]

***

욕실 밖에서 수건을 들고 쪼그려 앉아 있던 안네마리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나타니엘이 온몸이 흠뻑 젖은 채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가씨는요?”

[씻겠다는군.]

그는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걷어 올렸던 소매를 정돈하다가, 불현듯 능파를 멈춘 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인간의 적정 체중이 얼마지?]

“아가씨 키인 3.6큐빗을 고려하면 약 110파운드예요.”

안네마리가 바로 대답했다. 나타니엘의 미간이 희미하게 좁아졌다.

[또 끼니를 거르거든 불러.]

“또 거르실 거예요.”

이번에도 안네마리는 바로 대답했다.

나타니엘이 안네마리를 돌아보았다. 우울한 눈의 시녀는 목욕용 브러쉬를 꼭 쥔 채 낮게 중얼거렸다.

“아가씨는 하겠다고 한 건 하시는 분이거든요.”

[그걸 어르고 달래는 게 네 역할이야.]

“나타니엘 님은 안네마리에게 약속했어요. 아가씨를 죽이지 않겠다고. 아가씨가 계속 굶으시면 나타니엘 님은 약속을 어긴 게 돼요.”

나타니엘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인간미가 사라졌다.

[그래서 내가 너까지 달래줘야 할까?]

안네마리가 뒤늦게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그게 아니라…….”

[별게 다 주제를 넘는군.]

나타니엘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의 발이 닿은 곳마다 둥글게 너테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몸이 굳은 안네마리를 향해, 높은 곳에서 천천히 손을 뻗었다. 다섯 갈래의 검은 낫 같은 손이 안네마리의 눈알을 파고들기 직전이었다.

“안네마리…… 거기 있니?”

키리에의 힘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나타니엘의 손이 제자리에서 뚝 멈췄다.

목욕용 브러쉬를 생명 줄처럼 붙잡고 있던 안네마리의 눈알이 또르르 굴러 욕실 쪽으로 향했다.

나타니엘의 얼굴은 까만 머리카락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키리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힘이 없어서 드레스를 못 벗겠어……. 도와줄래, 안네마리?”

나타니엘은 욕실 쪽을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더 손을 뻗지도 않았다.

너무 길지 않은 침묵 끝에, 나타니엘이 천천히 손을 물렸다.

[가 봐.]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지팡이를 불러내 바닥을 두 번 두드렸다.

그러자 그는 순식간에 원래의 점잖은 예복 차림이 되었고, 그대로 안네마리를 지나쳐 방을 나갔다.

키리에의 자진 시도는 갈수록 강도가 심해졌다.

마침내 그녀가 벽으로 돌진해 머리를 부딪쳐 뇌진탕이 왔을 때, 나타니엘은 품위를 지키며 키리에를 말리는 일을 포기하기로 선언했다.

[아무래도 내 고양이가 미친 모양이야.]

침대에 누운 키리에를 나타니엘이 기가 찬다는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그는 바람을 불러 설렁줄을 흔들었고, 이윽고 시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가져와.]

키리에는 하인이 은쟁반에 긴 벨벳 리본을 담아 대령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잠깐만요…… 나타니엘?”

안네마리는 리본을 보자마자 질겁해 방을 나가, 남은 건 키리에와 나타니엘뿐이었다. 더해서 한 수저도 뜨지 않은 식사도.

[그 오랜 세월 동안.]

나타니엘이 심드렁히 말하며 손에 리본을 든 채 키리에에게 다가갔다.

[내게 식사 시중을 들게 한 사람은 또 없었는데 말이야. 아주 새로워.]

“잠깐……!”

[나는 이미 충분히 봐준 것 같구나.]

키리에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나타니엘이 빨랐다.

그는 너무나도 쉽게 키리에의 양 손목을 모아 묶었다. 리본의 끝은 침대 기둥의 높은 곳에 이어졌다.

[만족스럽니?]

“…….”

팔이 묶인 키리에가 침대 위에 널브러진 채 나타니엘을 쏘아보았다. 전혀 기죽지 않는 그녀의 눈을 보며 나타니엘이 얄미울 정도로 세련되게 웃었다.

[우리 키리에 뷰캐넌 양께서 묶이는 취미가 있으신 줄은 미처 몰랐구나.]

“당신 취향이겠죠.”

[그 머저리 같은 짓을 그만두겠다고 하면 풀어 주지.]

“그럼 그만둘게요.”

키리에가 맑고 고운 목소리로 답했다.

나타니엘이 ‘그럼 그렇지’ 같은 얼굴로 옅은 냉소를 지었다. 미상불 키리에는 이미 같은 방식으로 그를 속인 적이 있다.

[영리해서 좋다만, 두 번 속아 줄 일은 없어.]

“그럼 볼일 없으니 나가 주세요.”

키리에가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나타니엘은 마른 숨을 내뱉고서, 옆에 놓인 그릇을 들었다.

[말했잖니. 식사 시중이라고.]

“…….”

[입.]

오히려 입을 앙다무는 키리에를 보고 나타니엘이 중얼거렸다.

[참 번거롭게도 구는구나.]

그는 바로 한 손으로 키리에의 얼굴을 붙잡아 손가락을 입에 쑤셔 넣었다.

“……!”

키리에가 이를 세워 그의 손가락을 물었다. 나타니엘에게는 옷 위에 먼지가 앉은 것보다 좀 덜 신경 쓰이는 정도였다.

[먹어.]

그는 미소 지으며 손가락으로 키리에의 입을 벌리고 그 안에 수저를 쑤셔 넣었다.

“컥, 흑, 읏……!”

[좀 더.]

“시, 싫어…….”

[더.]

“욱…….”

처음에는 발작 수준으로 몸부림치던 키리에도 십여 분이 지나니 잠잠해졌다.

키리에의 입 주변은 금세 타액과 음식물로 지저분해졌다. 나타니엘의 미간이 좁아졌지만, 그는 키리에를 먹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으윽, 이제, 그만…….”

[더.]

키리에가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나타니엘은 눈물 젖은 눈으로 헐떡대는 키리에를 바라보다 그릇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릇에는 여전히 미음이 반 이상 남아 있었다.

[죽는 방법으로 아사는 별로 좋지 않아. 시체는 깔끔하겠지만 본능을 거부하기가 쉽지 않거든.]

대답 대신 키리에의 이가 나타니엘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간지럽지도 않았다.

나타니엘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입 안에 고여 있던 타액이 조금 넘쳐 흘렀지만, 별로 더럽게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더 엉망이 되어도 좋을 것 같았다.

[너는 확실히 발라브리가와는 다르구나. 나를 파멸시킬 생각은 하지도 않는 것 같고.]

“…….”

[왜 국왕을 부르지 않지?]

키리에의 움직임이 멈추고, 그녀의 눈이 커졌다.

[오레윈브리지와 손잡고 나를 죽일 발라브리가의 마법을 찾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않더란 말이지.]

말을 마친 나타니엘은 표정에서 대답을 찾으려는 사람처럼 물끄러미 키리에를 응시했다.

키리에가 묘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

부르튼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를 말할 것 같던 그녀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나타니엘은 요즘 들어 잦아진 한숨을 내뱉고선 손가락을 빼냈다.

[오늘은 이만하지.]

키리에는 벌써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팔을 묶은 리본을 보고 있는 것을 보니, 풀 궁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키리에.]

나타니엘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키리에가 흘낏 그를 넘겨보았다.

나타니엘이 조용하게 경고했다.

[또 허튼짓하면 이번엔 목줄을 채울 줄 알아.]

두 사람의 시선이 찰나 간 마주쳤다. 그러나 키리에는 다시 시선을 돌려 리본을 풀기 위해 끙끙대기 시작했다.

나타니엘은 어쩐지 피곤하다는 생각을 하며 방을 나섰다.

***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왕궁 셀의 작은 서재에 6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한 명은 나타니엘, 나머지는 7대 가문의 가주들이었다.

나타니엘은 키리에의 방 창문이 보이는 자리에서 창틀에 몸을 기댔다.

[사람들은?]

“모두 말해 두었습니다.”

올드시우다드 공작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이제는 익숙해진 회합이었지만, 아직도 빠릿빠릿한 대답을 하는 건 그뿐이었다. 나머지 귀족들은 서 있는 데에 모든 심력을 다 소모한 사람처럼,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조금 오래 걸리긴 했지만, 문제없이 처리되었습니다.”

[정말 문제가 없는지는 가 봐야 알겠지.]

나타니엘이 낮게 말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다시 키리에의 방 창문을 바라보았다.

[다른 건?]

“버몬트 후작이 여전히 비협조적입니다만…….”

[영지로 돌아갔다 하였으니 군대라도 준비할 모양이지. 따분하지 않고 좋구나.]

“실제로, 군수 물자를 사들이는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일흔에 가까운 나이인 이덴홀 공작이 대답했다. 내륙 무역을 주도하는 이덴홀의 말이니 거짓일 리 없다. 나타니엘이 냉연하게 미소지었다.

[괜찮아. 상정 내의 일이야.]

그때 아치볼드 백작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저…… 각하. 역시 뷰캐넌 백작, 아니, 공작의 협조를 구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나타니엘이 고개를 기울였다.

[세자르 뷰캐넌?]

“예. 뷰캐넌 공작의 도움이 있어야 각하께서 계획하시는 일이 좀 더 수월하게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나타니엘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 반응에 아치볼드 백작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주제넘은 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내버려 둬.]

“하지만, 아무래도 유일한 변수가 공작이리라 생각됩니다.”

아치볼드 백작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불안하게 침을 삼켰다.

그제야 나타니엘은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글쎄. 변수가 있다면 다른 부분이겠지.]

그저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을 뿐인 동작에 일동이 숨을 죽였다. 반투명한 흰 커튼이 흔들리며 달빛을 반사하자, 그 광경은 이제 어느 왕족의 초상화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잠시 앞의 대화를 까먹은 아치볼드 백작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다, 다른 부분 말입니까……?”

[그래.]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누가 각하의 명령에 반대하겠습니까? 아주 오래…… 준비해 오셨는데요.”

나타니엘이 작게 웃었다.

[완전무결한 것은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나 있는 법이야.]

백작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지평선 너머에는 진리가 있다고 전해진다. 당연하지만, 인간은 닿을 수도 없는 영역이다.

말의 무게 탓에 사위가 조용해졌다.

“혹시 그 변수가 무엇인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때, 내내 얼굴을 풀지 않고 있던 포트듀케인 후작이 나섰다.

나타니엘이 깊고 그윽한 시선으로 후작을 응시했다. 그는 후작의 팔다리가 긴장감으로 뻣뻣해질 때쯤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포트듀케인. 네 딸은 잘 있단다.]

“……!”

포트듀케인 후작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올드시우다드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리아 올드시우다드와 라우라 포트듀케인이 왕궁에 인질 삼아 갇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했다.

서재 안에 첨예한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포트듀케인 후작은 당장 눈앞의 사람을 도끼로 후려치고 싶은 얼굴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물론…… 잘 보살펴, 주시고 계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중간에 이 가는 소리가 나는데도 나타니엘은 즐겁다는 것이 쿡쿡 웃었다. 휘어진 푸른 눈이 더없이 찬란하게 반짝였다.

[시키는 것만 잘하면 정말 별일 없을 거야. 사실 나는 누굴 죽이는 걸 좋아하지는 않거든.]

귀족들이 침묵으로 나타니엘의 말을 부정했다.

나타니엘이 다소 장난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농담이라고 생각하니? 하기야 이걸 믿은 건 키리에밖에 없었지.]

키리에 뷰캐넌의 이름이 나오자 그의 눈매는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나타니엘의 시선이 다시 키리에의 방 창문으로 향했다. 창 안쪽에서 불빛이 일렁이는 것을 본 그는 창가에 기댔던 몸을 세웠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사람들을 물린 나타니엘이 복도를 걸었다. 그는 불빛 없는 어둠 속에서도 걸음에 막힘이 없었다. 검은 구둣발은 키리에의 침실로 향했다.

응접실을 거쳐 침실 앞까지 다가간 나타니엘이 문고리를 잡았다. 그는 그 상태로 잠시 멈췄다가, 옆으로 물러나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달칵.

“후…….”

곧 황동 램프를 든 키리에가 주변을 살피며 나왔다. 계속 입을 누르는 것을 보니 리본을 치아로 물어뜯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초조한 얼굴로 책장과 서랍을 살폈다.

“뭔가 예리한 거…… 없나?”

키리에가 중얼거렸다.

“정말 다 치워 버렸나…….”

나타니엘은 키리에가 거기서 포기하리라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한참 주변을 배회하던 키리에의 시선이 체스판에 닿았다. 보라색 눈이 무언가를 가늠하듯 가늘어졌다.

“상아는 갈아서 쓸 수 있겠지.”

키리에의 손가락이 하얀 킹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소맷자락 안에 넣은 뒤, 남은 말들을 보며 망설였다.

아니, 망설임은 없었다. 그녀는 눈의 여왕처럼 차갑게 나머지 말들을 쓰레기통에 쏟아 버리고는 침실로 되돌아갔다.

나타니엘은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 버려진 체스 말들을 응시했다.

‘그 연구실은 어디 있나요? 먼저 가서 터뜨리는 건 어떨까요?’

[넌 몹시 파괴적인 성향이 있어.]

‘어머. 들켰나요? 저의 파괴적인 룩을 보여드릴 수밖에 없겠네요.’

키리에의 고른 숨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그가 불현듯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타니엘은 표정 없는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겨울일 뿐이었다.

[둄2 절갠 교환재공타싸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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