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아론 피츠
어떻게 도망쳐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겨우 사람들을 물리치고 건물 사이의 작은 정원에 도착한 키리에가 숨을 몰아쉬었다.
“우욱…….”
먹은 것도 없는데 구토가 나왔다. 그녀는 나무를 짚고 계속 헛구역질을 하다 고개를 들었다.
하늘엔 달이 떠 있었다. 그게 마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같아서, 키리에가 다시 구역질했다.
“아가씨! 어떡하지, 어떡하지……!”
심리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안네마리가 아무리 나뭇잎을 치덕치덕 붙여대도 소용없었다.
“아, 안네마리가 물이랑 약을 가져올게요!”
안네마리는 울먹거리며 빠르게 정원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자, 그제야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키리에가 식은땀에 젖은 몸을 이끌고 벤치에 앉았다.
‘두려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처음이었다. 사교계에 첫발을 내밀었을 때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모두 내가 여기 있길 바라고 있어.’
시선에서 읽을 수 있었다. 모두 좋은 말만 늘어놓았지만, 정말 좋은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키리에의 자리를 질투하는 사람 반, 키리에가 영영 궁 밖으로 나오지 않길 바라는 사람 반.
그들의 눈초리가 투명한 칼이 되어 키리에를 찔러 왔다.
“하아…….”
키리에가 젖은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넘겼다.
‘내가 주최자야. 돌아가야 하는데…….’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키리에는 녹초가 된 몸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때,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어?”
들어본 적 없는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도 들렸다. 키리에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고개를 들었다.
“……누구지?”
이 와중에도 참으로 오만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며, 키리에가 자조했다.
나무가 만든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온 것은 어린 근위병이었다. 맑고 순진한 갈색 눈에, 창을 든.
키리에의 눈이 흐려졌다.
“너는…….”
몰라볼 수 없었다. 소년은 눈밭에 널브러졌던 시체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키리에가 부지불식간에 속삭였다.
“나타니엘이 죽인 자들의 동료구나…….”
소년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굳었다. 창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보였다.
키리에는 힘없이 미소지었다.
“날 죽이러 왔니?”
소년은 한동안 아주 혼란스러운 눈으로 키리에를 응시했다. 그러다 창대를 꾹 잡고는 결연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키리에 뷰캐넌 님이시죠?”
“그래.”
“여기 계시면 안 돼요…….”
소년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의외의 반응에 키리에가 눈을 깜빡였다. 소년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다른 분은…… 같이 안 계세요?”
아주 잠깐이지만 ‘다른 분’을 지칭할 때 소년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키리에가 고개를 저었다.
“나타니엘은 없어.”
“시녀는요?”
“약과 물을 가지러 갔단다.”
“아……! 편찮으세요?”
소년이 당황했다. 그는 혀로 입술을 축이더니 차렷 자세로 섰다.
“명령받은 게 있어서, 지켜야 하거든요. 아무도 없으니까 제가 지켜드릴게요!”
“뭐?”
“제가 미덥진 않으시겠지만요…….”
그런 이야기가 아닌데. 키리에의 고개가 쌜긋했다. 그녀는 가까스로 속엣말을 꺼냈다.
“죽이러 온 게 아니니?”
“예? 그런 끔찍한 소릴!”
키리에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소년은 머리를 벅벅 긁으려다가 투구를 쓰고 있다는 걸 깨닫곤 멋쩍게 손을 내렸다.
“아닌데요?”
“……그래?”
“네.”
키리에가 가만히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소년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제가 왜 죽여요?”
“그거야…….”
생각할 것도 없이 입을 연 키리에의 눈앞에 그날의 참상이 스쳐 지나갔다. 키리에는 무너지려는 표정을 간신히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네 동료들의 죽음에 내 책임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일부러 납치당했어요?”
“뭐?”
소년이 무구한 얼굴로 키리에를 응시했다.
“아니, 신문에는 공주님이 납치했다고 하던데, 어, 보통 공주님은 납치당하는 쪽인데……. 일부러 납치당한 거였어요?”
“그럴 리가.”
키리에의 얼굴이 굳었다.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싶어서 작정한 그런 방에 자진해서 들어갈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당장 그 방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났다.
키리에가 숨을 몰아쉬자, 소년병은 허둥지둥 창을 내려놓고 그녀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 어? 아! 어떡하지? 생각하지 마세요! 으아! 죄송해요, 이거 그거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에, 에비! 좋은 거, 좋은 거 떠올리세요!”
소년은 차마 키리에에게 손을 대지는 못했다. 그러다 키리에가 다시 헛구역질을 시작하자, 결연한 표정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몸치였다.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구역질하다 말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뭐하는 거니?”
“그, 보고, 웃으시라고…….”
소년이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좀 나아졌죠? 저는 아론이에요! 아론 피츠! 스노우스트림 가드 소속입니다!”
“…….”
너무나도 허술한 자기소개에 다시 키리에의 얼이 빠졌다. 소년, 아론은 마냥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듯했다. 그런 아론을 보며 키리에가 실소를 흘렸다.
“그래. 난 키리에 뷰캐넌이야.”
“알아요!”
“……그래.”
소년이 헤헤 웃었다. 키리에는 다시 말이 없어졌고, 소년은 침묵이 어색했는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가 아가씨, 뷰캐……?”
“뷰캐넌 양.”
“누나를 왜 죽여요?”
키리에가 이마를 짚었다. 소년에게선 종합적으로 품위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키리에가 느리게 대답했다.
“말했잖니. 내 책임도 있으니까.”
“일부러 납치당한 거 아니라면서요? 그런데 왜요?”
“어쨌든 내가 도화선이 된 건 사실이야. 귀족은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져야 해. 그게 의도한 바였든 아니든.”
“어…….”
아론이 말끝을 흐렸다. 키리에는 소년을 바라보지 않았다.
아론은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았다가, 바닥을 보았다가, 조용히 말했다.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키리에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멍한 표정을 마주한 아론은 잠시 얼굴을 붉혔다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전설경을 말리려고 팔까지 찔렀잖아요. 제가 봤어요. 누나는 우리를 구하려고 노력했잖아요.”
아론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나쁜 건 전설경인데 왜 미안해해요? 누나는 잘못한 거 없어요.”
키리에의 눈이 커졌다.
소년이 음악 소리와 대화 소리가 흘러나오는 궁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갈색 눈에는 분명 슬픔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따뜻했다.
“사람들이 누나에게 뭐라고 하는 건, 전 그거 되게…… 나쁘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봐도 그냥…… 만만한 사람 팬다는 느낌이거든요?”
키리에는 어금니를 악물어 가까스로 욱하는 감정을 참아냈다.
“……내가 없었다면 네 동료들이 죽지 않아도 됐어.”
“아닌데요? ‘전설경이 없었다면’이죠.”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저만 그렇게 생각하면 제가 틀린 거예요?”
키리에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가까스로 말했다.
“……내가 밉지 않니?”
“저 가방끈은 짧은데, 미워할 대상 잘못 찾을 정도는 아니에요!”
아론이 뿌듯하게 웃었다. 소년은 어깨를 으쓱해 덩치를 부풀리며, 키리에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말하다 보니 알 것 같아요.”
“뭘.”
아론이 일순 서글픈 얼굴을 했다.
“그냥 힘들다고 해요, 누나.”
***
키리에는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힘들면 참아야지, 힘들다고 말하라니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야.’
평민이라 그런지 확실히 사고방식이 남다르다. 드레스를 벗겨 주는 안네마리의 손길을 느끼며 키리에가 헛웃음을 흘렸다. 소리를 들은 안네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가씨? 어디 아프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저 없는 동안 무슨 일 있으셨던 건 아니죠?”
“없었어.”
투구를 쓴 채로 머리를 긁으려고 하는 이상한 근위병을 만난 것 빼고는.
‘그게 무슨 일씩이나 되진 않지.’
분명 무슨 일씩이나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아론을 만난 이후로 어쩐지 기분이 붕 뜬 듯했다. 다시 야회로 돌아가 ‘피곤하니 이제 그만 돌아가 달라’고 말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멍하니 안네마리가 머리를 빗겨 주는 손길을 받으며 앉아 있던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안네마리. 혹시 죽은 병사들의 처우는 어떻게 되었니?”
“왕실에서 위로금을 주기로 했어요!”
“왕실에서?”
왕실은 이번에 전설경의 토지를 되돌려준 탓에 국고가 휘청였다.
‘많이 주진 않았겠어.’
키리에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세요?”
“선물 들어온 것들, 어디 모아 놨지?”
“이쪽이에요!”
키리에가 안네마리의 안내를 따라 몇 개의 방을 지나쳤다.
궁 안에 갇힌 이후로 매일같이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귀족들의 선물이 줄을 잇고 있었다. 나타니엘은 그걸 방 하나에 모아 놓게 했다.
온갖 보석과 돈, 금화, 금괴, 값진 재물을 모아 놓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눈이 부셨다. 투명한 유리 장식장 안쪽에 진열된 보석들만 해도 성 한 채는 거뜬히 살 수 있을 정도였다.
키리에는 개중 캐럿이 큰 귀보석 위주로 수십 개를 골라내고, 당장 현금화하기 좋은 것들을 솎아냈다.
“어디다 쓰시게요?”
“바깥에 팔아 줘. 내가 나가진 못하니까, 라우라에게 맡기는 게 좋겠다.”
“전부요?”
“응. 현금화하면 꽤 될 거야. 그걸 죽은 병사들의 집에 위로금으로 전달해 줘. ……출처는 밝히지 말고.”
“네! 아가씨가 하는 일은 다 옳으니까요!”
안네마리가 키리에가 고르는 것들을 담아 밖으로 옮겨냈다.
다 고르고 나니 늦은 새벽이었고, 나타니엘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나타니엘은 어디 갔을까?”
“나쁜 일 하러 간 게 아닐까요?”
“근거 있는 말이니?”
“아뇨!”
키리에가 창밖을 돌아보았다. 날이 맑다. 그날, 눈보라 속에서 검은 나타니엘이 서 있었던 날 이후로 연일 쾌청한 날씨였다.
‘내가 여기 있는 게 기쁜 걸까.’
다시 침대로 돌아온 키리에가 잠을 청했다. 아론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누나는 잘못한 거 없어요.’
어디 가서 먼지 나게 매 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말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뭔가를 바라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기엔 눈에 탐욕이 없었다.
‘그냥 힘들다고 해요.’
소년의 다정한 말은 키리에가 잠이 들 때까지도 그녀의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어쩐지 나타니엘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잠결에 중얼거렸다.
“아무도 그렇게…… 말해 주지 않았는데…….”
곧 잠든 키리에의 위로 바람이 불었다. 겨울이 키리에의 뺨을 쓰다듬었다.
[맞아.]
어쩐지 고단하게 들리는 목소리와 함께.
그날 이후 처음으로 키리에는 악몽을 꾸지 않고 잠들었다.
***
안네마리가 라우라를 통해 현금화한 돈은 무사히 죽은 병사들에게 돌아갔다.
“땔감 값이 비싸서 걱정했는데, 이제 살겠다고 그랬어요!”
돈을 전달해 준 안네마리가 활짝 웃었다. 감사 인사를 들은 게 기분이 좋은 듯했다.
“역시 왕실에서는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았구나.”
차를 마시던 키리에가 중얼거렸다.
전설경에게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만큼, 또한 왕족의 실수인 만큼 큰돈을 내기가 싫었을 것이다.
“나타니엘이 눈치채진 않았어?”
“어, 사실, 가지고 나가는 걸 들켰어요…….”
정말 안 들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키리에가 고개를 들자 안네마리가 뺨을 긁었다.
“그런데 별말씀 안 하셨어요!”
“별말 안 했다고?”
“네!”
키리에가 미간을 좁히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굳이 나타니엘이 손댈 일이 아니기야 하지만, 그가 조용하다니 그것 또한 이상하다.
‘내게 들어온 물건이니 어떻게 쓰든 상관없다는 걸까? 아니면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분명 나타니엘이 극도로 민감하게 구는 문제는 자신의 안전뿐이다. 누굴 만나거나 누굴 돕든 안전하기만 하다면 신경 쓰지 않는 게 맞다.
‘그래도 괜히 불안해.’
키리에가 창밖을 돌아보았다.
오늘도 나타니엘은 자리를 비웠다. 요근래, 그는 키리에와 함께 있는 시간이 드물었다.
“안네마리. 나타니엘은 귀족을 만나러 갔댔지?”
“네!”
“오늘도 늦게 올까?”
“아마도요?”
“라우라랑 마리아는?”
안네마리가 멈칫했다.
“포트듀케인 아가씨는 바쁜 일이 있다고 하셨어요! 올드시우다드 아가씨도요!”
“그래?”
탈출하는 길을 마련하겠다고 했으니 그 일이 바쁜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두 사람이래도 왕궁, 그것도 전설경 손아귀에서 사람을 빼내는 게 쉬울 리 없다.
‘무리는 안 했으면 좋겠는데.’
키리에가 창문으로 다가섰다. 창을 열자 찬바람이 들이쳤고, 안네마리가 바로 두꺼운 숄을 가져와 키리에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그때, 아래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누나!”
이런 겁 없는 호칭으로 키리에를 부르는 사람이 둘이나 있을 리 없다. 키리에의 고개가 아래로 향했다.
“아론?”
키리에가 의아한 목소리로 아론을 불렀다.
키리에는 3층 위의 자신을 발견하고 폴짝폴짝 뛰는 아론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뭐하니?”
“누나! 저 보이죠? 저 지금 일하는 중이에요!”
어쩌란 건지 알 수 없는 말이다. 키리에가 턱을 괸 채 동물을 구경하듯 아론을 내려다보았다. 멀리서 상급자로 보이는 사람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피츠 소위! 또 열을 벗어나면 징계라고 말했을 텐데!”
“우와! 죄송합니다, 타일러 경!”
“왜 거기서 ‘우와’라고 하는 거야…….”
키리에가 중얼거렸다.
아론은 혼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운지 자꾸 얼굴을 숨겼고, 키리에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픽 웃었다.
“안네마리, 저쪽에 말을 전할 수 있을까? 큰소리로 외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이걸 쓰세요!”
안네마리가 주머니에서 나뭇잎을 꺼내더니, 꼬물꼬물 접어 나비를 만들었다. 나뭇잎 나비는 안네마리가 숨을 후, 불자 손바닥 위에서 팔락팔락 날아올랐다.
“실례지만 그는 내가 부른 거니 그만하시라고 전해 줘.”
초록색 나비는 팔랑팔랑 날아가 타일러의 얼굴 앞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이건……?”
타일러는 고개를 들어 3층을 보았다가, 손을 흔드는 키리에의 얼굴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피츠 소위, 혹시 뷰캐넌 양과 친분이 있나……?”
타일러의 질문에 아론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누나 동생 하는 사이에요!”
아닐 텐데. 키리에가 중얼거렸다.
타일러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아론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더니 사라졌다.
아론이 다시 키리에를 향해 팔을 흔들기 시작했다. 키리에는 그가 자기 구역으로 돌아가려는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누나!”
“…….”
“지금 올라갈게요!”
“뭐?”
놀랄 시간도 주지 않고, 아론이 왕궁의 외벽을 타기 시작했다.
키리에가 이마를 짚었다.
“안네마리. 지금 나랑 같은 거 보고 있는 거 맞지?”
“떨어뜨릴까요?”
“아니!”
가끔 안네마리는 무서운 소리를 천진난만하게 한다.
키리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창문가에 앉았고, 마침내 아론이 3층까지 외벽을 타고 올라와 헤벌쭉 웃었다.
“누나!”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듯한 표정에 키리에가 한숨을 쉬었다.
“피츠 소위. 숙녀의 방 창문 아래를 타고 오르는 행동은 옳지 못해.”
“어, 그, 그래요? 이거 로맨틱한 거라고 그랬는데?”
“대체 누가?”
“돌아가신 버몬트 자작님이…… 가끔 들러서 훈계하실 때 그랬어요. 남자는 그래야 한다고…….”
어쩐지 지나치게 버몬트 식이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욕하기도 애매해진 키리에가 몸을 뒤로 물렸다.
“아무튼 들어오렴. 그러고 있는 건 보기 흉하니까.”
“어? 안 돼요!”
“안 된다고?”
“누나가 있는 곳은 아무도 못 가요. 전설경이 그렇게 정해 놨어요. 방문하려면 전설경 허락을 받아야 하거든요.”
정말이냐는 의미에서 안네마리를 돌아보자 안네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객은 나타니엘 님이 관리해요! 안네마리도 손 못 대게 했어요.”
고개를 끄덕인 키리에가 다시 아론을 보았다.
“그래서 계속 거기서 이야기하겠다고?”
“누나만 안 불편하면요!”
아론이 활짝 웃었다. 투구에 갑옷까지 입고 있는데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는 걸 보면, 확실히 병사라 다르긴 다른 모양이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고? 참고로 안네마리가 너보다 강해. 허튼수작 부리려고 하면 날 찌르기도 전에 네가 먼저 떨어질걸.”
“맞아요! 안네마리가 더 빨라요!”
칭찬이라고 생각한 안네마리가 가슴을 탕탕 치며 나섰다.
제법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말인데, 아론은 주근깨가 올라가 있는 코를 찡그리며 웃었다.
“저번에는 죽이네, 마네 하더니. 이제 다시 살고 싶어지신 거예요? 잘됐네요!”
“저번?”
“그 얘기는 하지 말고.”
눈을 동그랗게 뜬 안네마리를 뒤로 물리며 키리에가 나섰다. 다행히 아론이 눈치가 없진 않았다.
“아, 그래서 용건은요, 그리고 이거 하면 안 되는 줄 몰라서…… 다음부턴 벽 안 탈게요…….”
“그래서 용건은?”
“누나가 도와준 거죠?”
키리에가 팔짱을 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어…… 여기서 잡아떼기엔, 한밤중에 보통 사람은 들지도 못할 양의 금화를 가뿐히 든 채 죽은 동료들 집에 찾아와, 어울리지도 않는 굵은 목소리로 ‘보상이오.’하고 사라진 의문의 소녀가 누군지 너무 확실한데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안네마리가 키리에의 드레스를 잡고 속닥거렸다.
“저거 안네마리예요, 아가씨!”
“……그래. 잘했어, 안네마리.”
어린애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면 안 된다.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은 자신이 나빴다.
키리에가 안네마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론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고맙다고 하려고요!”
아론이 웃었다. 소년은 손동작을 곁들이려다 떨어질 뻔한 뒤 좀 더 조심스럽게 벽의 넝쿨에 매달렸다.
“타일러 경도 그랬어요. 감사하다고 전해 달라고.”
“감사받으려고 한 행동은 아니야.”
“그럴 것 같아요.”
아론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좀 말수 적죠? 자기방어도 안 하고, 변명할 바에야 입 다물고. 도와줘도 티 안 내고.”
“무례하구나.”
말은 날카롭게 했지만 루비니아 캐스너와의 일이 떠올랐다.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를 변명했다면 그녀와의 관계도 달라질 수 있었겠지.’
키리에의 시선이 추억의 가장자리에 내려앉는 걸 본 아론은 급하게 팔을 휘둘렀다.
“그런데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고요! 제 말은, 그러니까…… 감사하다구요…….”
“……그래.”
“도움 많이 됐어요! 찰스 아저씨는 집에 몸이 불편한 딸이 있고, 빌 형네는 형밖에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렇게 돼서…….”
맑은 갈색 눈에 조용한 분노가 스몄다. 그러나 소년은 키리에가 반응하기도 전에 다시 철없이 웃었다.
“오늘은 이만 갈게요! 다음에 또 놀러 와도 돼요?”
“…….”
“안 돼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키리에는 바로 나타니엘을 떠올렸다.
상상 속의 그는 녹색 벨벳을 입힌 소파에 앉아, 고요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키리에는 뭔가를 할 때 다른 무엇보다 나타니엘의 의향을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에 구역감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나타니엘이…….”
“전설경이요?”
키리에가 얼굴을 찡그렸다.
“나타니엘이 알게 되면 좋지 않을 거야…….”
아론이 눈을 슴벅이더니, 머리를 긁었다.
“그럼 다음에 와서 물어볼게요!”
“뭐?”
놀란 키리에를 두고 아론은 외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런 데에서 혼자 있으면 미칠걸요? 우울증 걸려요! 전설경한테 산책이라도 시켜달라고 하세요!”
“너, 그가 어떤 사람인지…….”
“나중에 또 올게요, 누나!”
아론은 순식간에 바닥에 착지해, 갑옷 덜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뛰어가 버렸다. 덕분에 키리에는 묻고 싶은 것을 묻지 못했다.
‘넌 왜 나를 욕하지 않아?’
***
눈. 눈보라.
세상이 온통 흰빛이었다. 그 위에 시체들이 보란 듯이 더 도드라진 붉은빛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근위병 옷을 입은 그들은 꿈틀거리며 일어나 키리에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오지 마.’
키리에가 뒷걸음질 치다 넘어졌다. 맨발이 얼어붙고 있었다. 시체들이 울부짖었다.
‘왜 그랬어?’
키리에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내가 아냐!’
‘왜 구해 주지 않았어?’
‘나도 노력했어!’
‘전설경이 그런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으면서.’
‘난, 난……!’
‘너 때문에 우리가 죽었어! 책임지지 못할 일에 왜 손을 댄 거야!’
마침내 시체들의 손이 키리에에게 닿았다. 가장 가까운 시체와 눈이 마주쳤다. 아론이었다.
“아아아!”
그 순간 키리에가 잠에서 깼다. 그녀는 잠시 눈을 부릅뜬 채로 굳었다.
“헉, 허억…….”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거친 숨을 몰아쉬던 키리에는 그제야 자기 이마 위에 얹힌 손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온도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나타니엘이 있었다.
그가 천천히 키리에의 이마에서 손을 뗐다.
[악몽을 꿨구나.]
꿈에서 닿았던 찬 손이 아마 나타니엘의 손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밤이라 오히려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악몽에 뒤척이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지을만한 표정이 맞는지, 키리에는 알 수 없었다.
“왜, 왜 여기에……?”
[아직 새벽이니 더 자도록 해. 키리에 뷰캐넌.]
“여기, 그 방이에요……?”
[네 방이야.]
키리에가 멍한 눈으로 나타니엘을 바라보았다. 보랏빛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나타니엘은 그런 키리에를 기이할 정도로 온화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침대 옆 굽은 다리 의자에 앉았고, 때마침 창을 통해 들이치는 달빛 아래, 나타니엘은 밤 그 자체 같았다.
[더 자도록.]
“…….”
키리에가 의미 없이 천장을 응시했다.
“꿈…… 맞죠.”
[맞아.]
다행이다. 키리에가 숨을 삼키며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근래 그녀는 잠들기만 하면 악몽을 꾸었다. 내용은 항상 같다. 시체들이 있고, 그들은 그녀를 원망하고, 키리에는 도망치며 변명하지만, 끝내 잡힌다. 그리고 나타니엘은 먼 곳에서 지팡이를 짚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는다.
“내가 그런 게 아니야…….”
키리에가 불쑥 중얼거렸다.
그녀는 말을 내뱉자마자 눈에서 손을 떼고, 멍한 얼굴로 다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죠……?”
이상했다. 분명 깨어 있는데, 아직도 꿈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나타니엘이 곁에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건 정말 현실일까?
나타니엘은 너무 희미해서 거의 무표정으로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렇게 말했나요……?”
[그래. 그리고 그 말이 맞아.]
키리에의 고개가 돌아갔다. 끔찍한 무언가를 본 사람처럼 크게 뜨인 눈이 나타니엘을 향했다.
“정말 아니에요?”
키리에는 자신이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슬프고 두렵고 막막했다.
나타니엘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우아하고 정연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크고 차가운 손으로 키리에의 눈을 가렸다.
[물론이야. 누구도 너를 탓할 수 없어. 내가 있잖니.]
나타니엘의 다른 손이 키리에의 베개 옆을 짚었다. 그의 몸이 키리에를 덮듯 기울었다.
키리에가 눈을 가린 나타니엘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아 꾹 눌렀다.
“내가, 나는…… 정말로 노력했는데…….”
[그래. 보고 있자니 갸륵하더구나.]
“정말, 정말로 노력했는데…… 지키고 싶어서…… 당신도, 사람들도…….”
나타니엘이 잔물결 같은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코끝이 맞닿았다.
[하지만 실패했지. 통렬하게.]
키리에가 흑, 하고 숨을 내그었다. 달콤한 목소리가 칼날 같은 낱말을 속삭였다.
[너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고, 사람들은 죽었어.]
키리에가 괴롭게 팔을 허우적댔다.
“나는, 나는 어떡해야…….”
나타니엘은 그 손을 아주 조심스럽게 잡아, 깍지 껴 이불 위에 내리눌렀다.
[키리에. 네가 뭘 어떻게 한다고 상황이 바뀌는 일은 없단다.]
“그럼…….”
[그러니 이제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사람들……?”
[그래. 사람들.]
대화가 이어질수록 나타니엘의 목소리는 비밀을 캐내듯 은근해졌다.
그는 깍지 낀 손을 놓아주지 않은 채, 반쯤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를 몰라주는 사람들. 네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
파란 얼음 같은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였다.
[전부 그들의 잘못이야.]
“그들의……?”
[그래.]
“내가…… 아니라?”
[네가 아니라.]
나타니엘이 나지막이 말할 때마다 키리에의 몸이 가냘프게 떨렸다.
“하지만…….”
[그들은 네게 돌을 던지는 것밖에 해 주지 않아. 반면 나는 더 많은 걸 줄 수 있단다.]
“아…….”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이뤄줄 수 있어.]
절망에 젖은 키리에의 마음 깊숙한 곳으로, 나타니엘의 목소리가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은밀하고 음험하게. 섬뜩하고 계획적으로.
그림자가 키리에의 몸을 덮기 시작했다. 입술은 이제 닿을 듯 가까워져 있었다.
나타니엘이 속삭였다.
[그러니 전부 죽여 버리자.]
그 순간 키리에가 크게 몸을 떨었다.
“하지 말아요!”
키리에가 몸서리치며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싫, 어요……. 하지 말아요, 제발……. 내가 더 잘해 볼게요…….”
나타니엘의 동공이 날뛰던 것을 멈췄다. 그의 발밑에서 게걸스럽게 입을 벌리며 뻐끔대던 어둠도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잠시 말을 멈춘 나타니엘이 어르듯 입을 열었다.
[키리에.]
“행복해지면 좋겠어…….”
키리에가 자신의 눈 위에 올려진 나타니엘의 손을 꾹 눌렀다. 그 덕에 나타니엘은 자신의 손바닥 아래로 흐르는 눈물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도, 당신도, 행복해지면 좋겠어서…….”
그 말을 끝으로 키리에는 온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나타니엘의 얼굴에, 일순 그 자신도 이유를 모르는 듯한 소리 없는 혼란이 스쳤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나타니엘의 입가에 다시 평소의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을 때, 그는 어쩐지 이전보다 더 차갑고 냉혹해 보였다.
나타니엘이 몸을 일으켜 느리게 손을 떼자, 담비 털 같은 속눈썹 위에 눈물이 별처럼 남아 반짝거렸다. 나타니엘이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도 아직 별의 온기가 남았다.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던 나타니엘은, 이내 눈물을 얼려 버렸다. 온기는 금세 사라지고, 작은 얼음은 그의 손 안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제법이라니까.]
그는 흥미가 사라진 무미건조한 얼굴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사흘에 한 번, 나와 동행한 상태에서, 30분 동안의 산책 정도는 괜찮겠지.]
나타니엘은 아침에 나타나 그렇게 말한 뒤 휙 나가 버렸다.
‘무슨 심경의 변화지?’
키리에가 눈을 깜빡였다. 어젯밤 잠결에 나타니엘과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았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내가 꿈에서 나타니엘을 좀 때려 주었나 봐, 안네마리.”
“사람이 죽는 꿈은 좋은 꿈이랬어요.”
“왜 내가 죽었다는 걸 전제로 하는 거니?”
그래도 덕분에 마냥 숨통이 트였다.
“누나!”
아론이 찾아오는 일은 매우 잦았다. 그는 어쨌든 전설경의 말은 지켜야 한다며 매번 키리에의 방 창문 아래의 외벽을 타고 올랐다.
“그래서 이번에 월급이 좀 올랐어요!”
“잘됐네.”
“왕실에서도 죽은 동료들 때문에 생긴 슬픔을 위로한다고 위로금을 다시 줬고요…….”
신나서 떠드는 아론의 말에 키리에가 빙그레 웃었다.
안네마리는 자꾸 찾아오는 소년이 영 마뜩잖은 모양이었지만, 키리에가 웃는 일이 늘어 가만두는 듯했다.
“그래서, 최근에 약혼했다고?”
“네! 켈리는 진짜 이쁘거든요!”
아론이 활짝 웃었다. 그는 근래 자기 소꿉친구이자 예비 약혼녀인 켈리 워즈워스가 얼마나 예쁜지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데에 맛 들려 있었다.
“얼른 약혼하지 않으면 딴 놈이 채갔을 거예요! 왜냐면 켈리는 진짜 이쁘니깐! 누나도 예쁘지만, 켈리는 진짜 진짜 이쁘다고요!”
“그래?”
“네! 눈은 하늘색이고요, 머리카락은 진저고, 코에는 주근깨가 있어요. 그 애의 주근깨는 별자리 같아서 예뻐요!”
사랑은 소녀의 콧잔등에 올라간 주근깨도 하늘의 별처럼 보이게 한다. 그 온화하고 귀여운 말들을 들으며 키리에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축하해.”
“고마워요, 누나! 누나도 우리 약혼식 봤으면 좋았을 텐데!”
“이미 사람들이 축하해 줬을 테니 그거면 됐지.”
키리에의 말에 아론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렇진 않았어요…….”
“왜?”
아론이 고개를 숙여 투구로 눈을 가렸다.
“켈리 아버지도 근위병이었거든요. 전설경을 막다가 죽었고요.”
미소짓고 있던 키리에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녀는 조심스레 들고 있던 찻잔을 양손으로 쥐었다.
“미안해.”
“어…… 누나가 미안해할 필요 없다니까요!”
아론이 키리에의 눈치를 보며 재롱떨듯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보다, 산책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잘됐다!”
아론이 방방 뛰며 이야기하다 손을 놓쳐 추락할 뻔한 일이 있고 난 뒤, 둘은 암묵적으로 화제를 바꿨다.
“그, 이러다 나갈 수 있게 되는 거 아니에요?”
“그렇진 않을걸.”
“왜요? 이렇게 갇혀 있는 거 싫다고 말하면 풀어 주지 않을까요? 좋아하면 좋은 것만 해 주고 싶던데.”
키리에가 고개를 기울였다. 주변에서는 다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나타니엘이 자신을 너무나 좋아해서 가둬 놓기까지 하는 거라고.
“그는 그런 의미로 날 좋아하는 게 아니야.”
“그럼 무슨 의미예요?”
“쿠키를 줄까?”
“아…… 어…… 알겠어요, 이건 끼어들어 봤자 좋을 거 없다는 거죠?”
키리에는 미소지으며, 아론의 품 안에 쿠키를 넣어 주었다.
“너도 여긴 오지 마.”
“전설경한테 들켰어요?”
“모르겠어. 알고 있는지, 모른 척하는 건지.”
“누나를 안 좋아하는 거면 제가 누나 만나도 상관없지 않아요?”
분명 아론의 말이 맞다. 하지만 키리에의 감이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좀 더 지독하다.
“뭐가 됐든.”
“좀 이상해요. 전설경이 이상한 건가? 아니면 누나가 오해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절대 그럴 리는 없어.”
“그러지 말고 한번 시험해 보면 어때요, 누나?”
“시험?”
아론이 씩 웃었다.
“어쩌면 별문제 없을지도 모르잖아요!”
아론은 키리에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키리에를 껴안고는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
사과를 깎느라 하필 안네마리의 반응이 느렸을 때였다. 안네마리가 던진 과도는 아론의 잔상만 꿰뚫었다.
“미쳤어!”
아론이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키리에가 기함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론은 그녀를 내려놓고 당장 같이 뛰어내린 안네마리에게 양손을 들어 보였다.
“아가씨를 해치려는 사람은 안네마리가 다 죽여 버릴 거예요!”
“워, 워! 아니야! 아니야, 해치려는 게 아니라……! 누, 누나, 쟤 좀 말려 주세요!”
“나쁜 사람! 죽어야 해요!”
안네마리는 눈으로 아론을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각처에서 새떼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키리에가 한숨 쉬며 안네마리의 어깨를 짚었다.
“안네마리, 괜찮아. 새들은 물러 줄래?”
“아가씨. 다치신 데는요?”
“없어, 다행히.”
“엄청 조심했으니까요!”
아론이 좋다고 웃었다. 키리에는 그를 조금 째려보곤 등을 세우고 표정을 지웠다.
“아론 피츠 소위. 제정신인가? 무례에도 정도가 있어.”
지금까지 좁혀진 거리를 순식간에 벌릴 정도로 귀족적이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저는, 그러니까, 어……!”
“근위병 이전에 인간으로서 남의 의사도 묻지 않고 행동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나?”
“그, 죄송해요…….”
아론은 단숨에 기가 죽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서, 조심스럽게 투구를 벗었다. 처음으로 아론이 투구를 벗은 모습을 본 키리에의 눈이 커졌다.
“너, 귀가…….”
“흉하죠……?”
아론이 오른쪽 귀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귀가 없었다. 귀뿐만 아니라, 귀를 포함한 얼굴 한쪽이 아주 예리한 무언가에 잘려나간 듯했다.
“저는 그냥…… 저도, 제 동료들도, 누나도, 전설경 때문에 힘든 거니까…… 같은 처지니까, 누나가 힘들어 보여서, 바람 쐬게 해 주고 싶었어요. 죄송해요…….”
끝내 소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동료들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안네마리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지만, 키리에는 거기에 대고 더는 아론을 탓할 수 없었다.
“……아니야. 됐어. 그만하자. 대신 앞으로는 이런 일 없게끔 해.”
“용서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
아론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고마워요, 누나!”
운 게 방금인데 저리 순식간에 웃는다. 남동생이 있다면 이런 기분이었으리라.
키리에가 한숨 쉬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네가 신경 쓸 필요까진 없었어, 아론.”
키리에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녀는 문득 흙을 밟는 감각이 아주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했다.
넓지 않은 화단에는 겨울나무들이 마른 가지를 흔들며 서 있었다. 어디에선가 새 소리가 났고, 바람이 만공정했다.
그 모든 게 아주 낯설게 느껴져, 키리에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타니엘이 알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어서 아론을 물리고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알면서도, 발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투구를 다시 쓴 아론은, 그런 키리에를 보며 소년다운 풋내나는 웃음을 지었다.
“막상 나오니까 돌아가기 싫죠?”
“…….”
정말 기사는 못 될 아이다. 키리에가 대답하지 않자, 아론은 짐짓 기사다운 동작으로 손을 내밀었다.
“크흠! 그, 키, 키리에 뷰캐넌 양, 제게 에스코트의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키리에가 혼란스러운 낯으로 소년이 내민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타니엘이 가만있을 리 없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정말은 도망치고 싶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키리에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아론이 열 오른 얼굴로 씩 웃었다.
“잡아요, 누나. 누나는 전설경의 장난감이 아니잖아요. 누나가 갇혀 있을 이유는 없어요.”
키리에가 미간을 좁혔다. 떨리는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내가 여기 있어야 모두가 안전해.”
“누구도 누나에게 희생하라고 강요할 순 없어요.”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으면서 배부른 소리 해선 안 돼.”
“정말 갖고 싶은 건 그게 아니잖아요?”
키리에의 눈동자가 더 강하게 떨렸다.
“내가 나가면, 분명 나타니엘이…….”
“그만! 누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 그것만 생각하자구요.”
“나는…….”
키리에가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보였다. 천장이 아니라.
그녀는 자신이 하늘을 보면서 장엄함을 느끼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한 적 없었다. 그러나 별거 아니라 생각했던 그 파랑, 그 양떼구름이 어찌나 사랑스러운 것이던지. 찬 공기가 그녀의 가슴을 들썩이게 했다.
결국, 키리에가 아론의 손을 잡았다.
***
아론이 키리에를 이끌고 간 곳은 놀랍게도 사용인 휴게실이었다.
궁이나 대저택은 보통 반지하에 사용인을 위한 공간을 두는데, 저택을 관리할 때 이외에는 갈 일이 없는 공간이었다. 키리에는 그곳에 앉혀졌다.
“…….”
휴게실에 들른 사람들이 아닌 척 키리에를 힐끔거렸고, 그걸 본 아론과 주방장이 휴게실의 문을 걸어 잠갔다.
“이거 참! 보통 이런 데에 귀한 분이 오지는 않으니까요. 이해 좀 해 주세요!”
풍채 좋은 여자 주방장 멜로니가 인자하게 웃었다. 키리에는 어색하게 숄을 여몄다.
“괜찮아. 나야말로 갑자기 찾아와 미안하네.”
“아뇨, 아뇨! 다 요, 요 아론이 잘못했겠죠!”
“아, 멜로니 아주머니! 아니라니까요!”
높은 분을 불러온 대가로 육수 젓기에 사용되고 있던 아론이 소리쳤다.
“누나한테 쓸데없는 소리 하면 안 돼요! 알겠죠!”
“고놈 참, 목청도 좋다.”
멜로니가 웃으며 키리에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키리에에게 꼭 달라붙어 솜털까지 곤두세우고 있는 안네마리를 보곤 말린 육포를 내밀었다.
“아이고, 귀엽기도 하지. 먹을 테냐? 이건 소고기야. 매콤할 거란다.”
“……먹을래요.”
‘조련했어……?’
키리에가 감탄했다. 안네마리는 의외로 낯을 가리는 편인데, 너무나 쉽게 그녀의 경계를 풀었다. 흐뭇하게 웃던 멜로니가 키리에에게 고개를 돌렸다.
“뭐라도 드시겠어요? 아가씨 드실 거야 늘 내가 만들긴 하지만.”
“아! 아주머니! 저도 같이 주세요! 누나 맨날 비싼 거만 먹는다는데 진짜예요?!”
“아휴, 그럼 거짓말이겠니. 가만있어 봐요. 내가 만들어 놓은 게 있지.”
“아니, 괜찮은데…….”
“응? 사양 말아요. 왕궁이니 청결은 유지하고 있고, 다 좋은 재료로 만든 거니까.”
“그게 아니라 입맛이…….”
“자, 자셔 봐요.”
‘벌써……?’
멜로니가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부이용을 내놓았다. 키리에는 물끄러미 그릇을 내려다보았다가,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들었다.
‘예의상 한 입은 먹어야겠지.’
그런데 생각 외로 맛있었다. 깜짝 놀란 키리에의 얼굴을 보며 멜로니가 푸근하게 웃었다.
“많이 좀 자셔요. 늘 새 모이만큼 먹으니 남는 음식 먹는 우리 사용인들이야 좋지만, 그래 말라 병이라도 걸리겠어요.”
“누나는 말라도 예쁠걸요?!”
“넌 육수나 잘 저어!”
“너무해요, 아주머니!”
멜로니는 아예 아론이 있는 방으로 통하는 문을 닫아 버렸다. 아론이 뭐라고 투덜댔으나 들리지 않았다.
온갖 물건이 널브러져 정신없는 방인데도 포근했다.
수저를 든 키리에가 멍하니 부이용을 홀짝거렸고, 멜로니는 이걸 줘야겠네, 저걸 줘야겠네 하며 간간이 안네마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현실적인 동화 속 공간에 온 느낌이었다.
‘분명 야회 때도 모두가 환대했지만, 지금과는 달랐어. 지금이 좀 더…….’
키리에의 눈이 흔들렸다. 그걸 본 멜로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입에 안 맞나요?”
“아니, 음식은 아주 맛있어. 그게 아니라, 난…….”
키리에가 할 말을 찾지 못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날 꺼릴 거라고 생각했네.”
지나치게 품위 없게 들리는 말이었다. 말하고 나서 후회한 키리에와 달리, 멜로니는 다 안다는 듯이 너그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삶은 그리 각박하지 않아요. 아가씨 잘못도 아니고, 산 사람들도 결국은 살아야지 않겠어요?”
힘 있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키리에의 말문을 막았다. 멜로니가 안네마리에게로 시선을 옮겨 흐뭇하게 웃었다.
“그렇지, 꼬마야?”
안네마리가 참으로 옳은 말이라는 듯이 빵싯 웃었다.
“네! 아가씨는 자연사해야 해요!”
“……그러니?”
멜로니는 안네마리의 특이한 말에 당황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키리에가 한숨을 쉬며 안네마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네마리, 남들 앞에서 자연사란 단어는 쓰지 말자.”
“네! 안네마리는 저 아주머니가 좋아요! 좋은 냄새가 나요!”
안네마리가 방긋 웃었다. 키리에도 웃었다.
“나도 그래.”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을 쓰다듬는 키리에를 바라보며, 안네마리는 잠깐 무표정을 지었다.
소녀가 이내 불안한 표정으로 키리에에게 달라붙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아니에요.”
온화한 풍경에 데워지던 키리에의 피가 얼어붙었다.
안네마리의 시선이 멜로니와 아론이 있는 부엌으로 향했다. 검은 눈이 순식간에 사나워졌다.
안네마리는 키리에의 옷자락을 붙잡고, 부엌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속삭였다.
“그 근위병은 웃을 때마다 정말 나쁜 냄새가 나요…….”
이제 키리에의 방 꽃병에는 매일 다른 꽃이 꽂혔다. 아론의 짓이다. 메마르고 가냘픈 겨울 야생화였다.
저녁나절 가끔 들르는 게 전부일 정도로 바빠진 나타니엘은 그걸 보고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이상해.”
창밖의 나타니엘을 바라보던 키리에가 중얼거렸다.
나타니엘은 키리에가 지켜보고 있는 걸 아는 사람처럼, 눈 깜빡할 사이에 검은 연기로 흩어져 사라졌다.
키리에가 김 서린 창문에서 몸을 떼었다. 뜨개질하던 안네마리가 고개를 들었다.
“바쁘시긴 하세요. 밤에도 잘 안 들어오세요.”
“왜지?”
“아가씨를 배려해 주시는 건 아닐까요?”
회색 뜨개실로 양말을 뜨고 있던 안네마리는 자기가 말하고도 웃겼는지 우헤헤, 웃고는 코바늘로 시선을 돌렸다.
“아가씨는 나타니엘 님이랑 같이 계시면 몸이 굳어요. 호흡도 고르지 않고요.”
그녀가 문득 손을 멈췄다.
“……예전에는 안 그러셨거든요.”
“예전 일이야.”
“안네마리한테는 엊그제 같아요.”
키리에가 안네마리를 바라보았다. 보기엔 열두어 살의 소녀지만 안네마리는 쉰 살이 넘었다.
“나타니엘도 그럴까?”
“아마도요.”
그건 꽤 잔인한 일처럼 들린다.
키리에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것만은 아니길 빌어.”
“아가씨는 상냥하세요.”
“뜬금없는 칭찬이구나.”
안네마리가 생긋 웃었다.
“발소리가 들려요. 그 근위병인가 봐요.”
“코바늘을 칼처럼 잡는 건 보기 안 좋으니까 그만두자, 안느.”
“네.”
안네마리는 코바늘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창문을 열었다. 어느새 창문 아래에 와 있던 아론이 방방 뛰며 손을 흔들었다.
“누나! 누나! 전설경 나갔죠? 우리 또 주방 가요! 멜로니 아주머니가 쿠키 구웠대요!”
안네마리는 어느 순간부터 아론을 말리지 않았다. 그녀는 키리에보다 한 발짝 뒤에 서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아론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키리에는 주머니 속에 뭐가 있는지 묻지 않기로 했다.
“부탁해, 안네마리.”
“네.”
안네마리가 술식을 그린 뒤, 꽃병에 꽂혀 있던 야생화를 창밖으로 던졌다. 키리에는 폭신한 오리털 쿠션처럼 거대해진 야생화 위로 뛰어내렸다.
햇살을 등진 채 아론이 손을 내밀었다. 짓궂고 선량한 미소였다.
“가요, 누나!”
***
“아이구, 왔어요?”
“너무 자주 들러서 미안하군.”
“그런 말 말아요. 숨 돌릴 수 있으면 좋은 거지요.”
인자한 멜로니의 말에 키리에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아론도 끼어들었다.
“맞아요! 게다가 누나가 오면 멜로니 아주머니가 맛있는 거 해 주고…….”
“넌 맨날 먹을 생각만 하지 말고 가서 고기나 가져와 봐. 알프레드가 가져온댔는데 소식이 없구나.”
“또 부려먹으려고!”
아론이 씩씩대며 뒷문으로 걸어 나갔다. 누가 보아도 그저 맡은 일에 열심일 뿐인 소년이었다.
키리에가 멜로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멜로니…… 음, 혹시 성이?”
“아유, 내 정신 좀 봐. 성은 버츠랍니다! 멜로니 버츠.”
“버츠.”
키리에가 그녀의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렸다.
“아론과는 오래 알았던 사이인가?”
“아론이요? 어휴, 말도 말아요. 내가 저 애 이야기를 하려면 소 한 마리 잡을 시간으로도 부족하죠.”
“잘 아는 사이인가 봐?”
“우리 아들내미 친구니까요. 착한 아이예요.”
멜로니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쓴웃음을 지으며 허브차를 키리에 앞에 놓아주었다. 그녀는 테이블에 붙어 눈알을 굴리는 안네마리에게 생강 쿠키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론은 참 성실해요. 책임감도 강하고, 저 나이대 남자애 중 아론만 한 애가 없지요.”
“궁 생활에 문제는 없나? 나는 저 아이를 오랜 시간 보지 못하니…….”
“요즘은 좀 나아진 것 같아요.”
“나아져?”
“그 착한 애가 반쯤 미칠 정도였는데, 아가씨 덕에 잘 이겨낸 모양이에요. 이렇게 데려오는 걸 보면…….”
멜로니가 찻잔을 들었다. 씁쓸한 표정이었다.
“모두에게 힘든 일이었지만, 저 아이는 마음이 여려서인지 유독 충격이 컸죠…….”
키리에가 말없이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동료들의 죽음이 그렇게 쉽게 잊힐 리 없다. 당장 자신도 밤마다 그날의 악몽을 꾸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녀는 ‘가해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피해자의 트라우마처럼 취급받을 수는 없겠지만.
“……잘 지켜봐 줘.”
멜로니가 미소지었다.
“아가씨는 제가 본 어느 귀족보다 품위 있으면서도, 동시에 아주 귀족답지 않게 상냥하시네요.”
키리에가 눈을 내리깔아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가 막아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게 연락해 주고.”
“아유, 아가씨가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안 그래도 요즘 그 문제 때문에…….”
“그 문제?”
“그러니까…… 세상에. 이걸 말해도 되나 싶은데.”
멜로니는 곤란한 표정으로 손을 가만두지 못했다. 뭔가를 직감한 키리에가 자세를 고쳐 앉았을 때였다.
“우와!”
문이 벌컥 열리고, 아론이 돌아왔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로.
그 모습을 본 키리에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일순 그날의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키리에의 숨이 거칠어진 것을 눈치챈 건 안네마리뿐이었다.
“아가씨?”
“아니야, 괜찮아, 안네마리…….”
키리에는 간신히 멜로니와 아론이 눈치채기 전에 호흡을 정돈했다. 다행히 멜로니는 아론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느라 이쪽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유, 얘 좀 봐! 어디서 이렇게 피를 뒤집어쓰고 온 거야? 얘, 지워지지도 않겠다!”
“으악, 너무 빡빡 문지르지 마세요, 아주머니! 아프다구요!”
“그러게 왜 이 꼴로 돌아와? 내가 정말 못 산다!”
“치, 저라고 피 냄새가 좋진 않은데요!”
아론이 해맑게 웃으며 성큼성큼 휴게실 안으로 들어왔다.
“누나!”
아론의 손에는 피 묻은 칼이 들려 있었고, 온몸에서는 쇠 비린내가 풍겼다.
키리에의 몸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자신이 새하얗게 질려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걸 본 아론이 지척에서 멈췄다. 일순 갈색 눈동자에 둥글고 기묘한 빛이 맴돌았다가, 웃음새에 섞여 사라졌다.
“아! 미안해요, 이런 거 보기 힘드시죠……? 알프레드 아저씨가 따로 받아온 소 피 봉지를 터뜨려서…….”
“……소 피?”
“네! 여러 곳에 쓰이거든요!”
“아유, 맞다, 그러네! 이걸 어쩌나, 새로 요청해야겠네…….”
“에이, 멜로니 아주머니, 제 걱정도 좀 해 주세요.”
“넌 멀쩡하잖니! 아가씨 놀라시게 묻히고 오기나 하고 말이야!”
“내 잘못도 아닌데…….”
한참 아론을 타박하던 멜로니는 수건이 모자란다며 뒷문으로 나가 버렸다.
끼익, 소리를 내며 나무문이 닫혔다. 이제 방 안에 남은 건 키리에와 안네마리, 아론뿐이었다.
키리에가 숨을 몰아쉬었다. 아론이 그런 키리에를 흘낏 본 뒤,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왜 그래요, 누나?”
갈색 눈이 마치 단단히 고인 핏덩어리처럼 보였다. 겁날 이유가 없는데, 겁이 났다.
키리에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나쁜 냄새가 난다던 안네마리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아론은 내게 적의를 보인 적이 없어. 안네마리의 말만 믿고 사람을 판단하는 게 옳은 일일까?’
설령 아론이 정말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상황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
키리에가 가까스로 미소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요?”
아론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화난 것 같기도, 슬픈 것 같기도, 기쁜 것 같기도 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마. 아론, 너는 씻고 옷을 갈아입는 게 좋겠어.”
“왜요? 더 있다 가시지…….”
“몸이 안 좋아.”
“그렇구나…….”
왜 칼을 집어넣지 않는 걸까.
아론은 어딘지 멍한 얼굴로 멜로니가 나간 문을 바라보다, 짓궂게 웃었다.
“우리 장난칠까요?”
무슨 장난이냐고 묻기도 전에 아론이 문을 잠갔다.
“이러면 멜로니 아주머니가 못 들어오겠죠?”
안네마리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키리에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키리에는 안네마리의 얼굴에 난 솜털이 바짝 곤두선 것을 보았다.
“누나?”
아론이 몸을 돌렸다. 칼은 여전히 뽑혀 있었다.
“왜 대답이 없어요?”
불빛의 사각이 만든 묘한 그림자 속에서 아론이 천진하게 웃었다. 갈색 눈이 여지없이 맑았다.
“……아론.”
“네, 누나.”
그가 다가오려 하자 안네마리가 소리쳤다.
“오지 말아요!”
“아?”
아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누나, 쟤 좀 말려 줘요! 맨날 나만 보면 저래요!”
“…….”
“누나?”
“아론.”
“네.”
“일단 칼은 집어넣어.”
“아, 칼 때문에 그래요? 이거 씻어야 해서 들고 있는 거예요. 바로 넣으면 안 되거든요.”
합리적인 말이다. 하지만 왠지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걸 키리에는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칼을 들고 있었다.
“그럼 내려놔.”
키리에가 말했다.
그때 아론의 눈에 스친 충동이 무엇인지, 키리에는 알 수 없었다.
아론의 입이 살짝 벌어지고, 검을 쥔 소년의 손에 힘이 들어간 순간이었다.
쾅쾅쾅!
“여보세요? 문 좀 열어 주세요! 여기 혹시 스노우스트림 가드 한 명 안 지나갔어요?”
누군가 아론이 등지고 서 있는 뒷문을 두드렸다. 바깥에서 사내 여럿의 말소리가 들렸다.
“여기 아닌가?”
“아, 근위병 놈들, 맨날 꿀 빨기만 하니까 튀는 건 잘해요!”
“숨어 있는 거 아냐?”
“부엌에? 삶아지려고 미리 들어가 있나?”
“미친놈.”
키리에와 아론 사이의 첨예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깨져 나갔다. 키리에는 그들이 찾는 ‘근위병’이 아론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
아론이 눈을 내리깔았다.
사내들은 아예 문 앞에서 쉴 참인지 털퍼덕 주저앉아 떠들기 시작했다.
“좀 더 때려 줬어야 하는 건데.”
“지 동료들 죽이고 살아남았으니 튀는 실력이 오죽하겠냐?”
놀란 키리에의 시선이 아론을 더 주의 깊게 뜯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미처 닦지 못한 핏물 사이로, 아직 여물지 않은 상처에서 생피가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옷깃 아래의 피멍.
“동료 머리 하나당 금괴 하나씩 받았다며? 살인자 새끼들.”
키리에의 표정이 굳었다. 금괴라니? 그것도 유가족이 아니라 살아남은 근위병에게?
키리에가 안네마리를 돌아보았다. 안네마리가 고개를 저었다. 사내들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아론 피츠 그 새끼는 아예 그 년한테 알랑방귀 뀌잖아. 금괴에 영혼까지 판 거지.”
“돈 받은 것도 그 새끼가 이빨 털어서 받은 거라며? 지 여자친구 애비 목숨도 뒤지게 해 놓고 그 돈으로 결혼식 하려고 했나?”
“뭔 소리야? 결혼식?”
사내 중 한 명이 피식 웃었다. 이제 아론의 얼굴에서는 표정과 함께 모든 인간적인 생기마저 사라진 듯했다.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며 사내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아 이 새끼 소식 느리네. 야! 그놈 여자친구는 이미…….”
그 순간, 아론이 문을 열어젖혔다.
“왁! 찾으시던 아론 피츠 대령이에요!”
“씨발, 뭐야!”
아론의 등장에 사내들이 험악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중 누군가가 방 안쪽의 키리에를 발견했다.
“야, 야, 안 돼! 저기 봐……!”
“……뷰캐넌이잖아.”
“……이런 데 단둘이 있었다고?”
“참 나…….”
남자들이 경멸의 눈으로 아론과 키리에를 보았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좋은 시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딱 어조만 빈정거리며 그들은 물러갔다. 사내들이 사라지자마자 키리에가 앞으로 나섰다.
“아론. 금괴라니, 그런 게 전달됐어?”
소년은 뒷문의 문지방에 서서 머리를 긁었다. 옆얼굴은 웃고 있는 듯했으나, 일그러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누나가 줬잖아요?”
“아니야.”
키리에가 단호하게 말했다.
“물론 위로금을 전달하라고 안네마리에게 명령하긴 했지만 그건…….”
“누나가 한 거 맞네요.”
아론이 힘없이 대답했다. 열다섯 살 소년의 어깨가 떨어졌다.
“누나, 저는요. 스노우스트림 가드가 되어서 좋았어요. 평민에게 궁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는 적거든요. 안정적이고요.”
“아론. 우선 내 말을 들어.”
“예전엔 거기에 자부심도 있었는데, 요즘은 아녜요.”
아론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처음엔 다들 안타깝게 여겼죠. 그런데 일단 거액을 받고 나니까, 시선이 달라지더라구요…….”
“…….”
“요즘 궁을 지나다니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동료 죽이고 출세했다고 해요.”
정적이 오갔다. 아론의 고개가 삐거덕거리며 키리에에게 향했다.
“대체 왜 그랬어요?”
“내가 한 게 아니야.”
허망한 피로로 가득 찬 갈색 눈을 바라보며, 키리에가 어느샌가 익숙해진 말로 답했다.
“그럼 누가요. 전설경이? 그 잔인한 사람이? 애초에 돈을 갖다 준 게 누나 시녀라고 누나 입으로 말했잖아요?”
“그건 유가족의 위로금만 말한 거였어.”
키리에가 안네마리를 통해 지시한 건 딱 두 가지였다. 유가족을 위한 위로금.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정신과 치료.
너무 많은 보상은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를 부른다는 걸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론은 전부 키리에의 짓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렇게 오해하기 좋은 상황이었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왜…… 왜 이렇게 된 거예요?”
아론이 콧살을 찡그리며 말했다.
“동료들의 죽음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이제 저는 살아남았다고 욕을 먹어야 하네요…….”
“아론.”
키리에가 드레스를 움켜쥐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시 네 약혼녀는…….”
“…….”
아론이 몸을 돌렸다. 그가 너무나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에, 키리에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다 나은 게 아니라, 이미 미친 거였다.
“돌아간다고 했죠? 배웅은 못 해 드릴 것 같아요.”
[둄2 절갠 교환재공타싸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