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고립
얼마 안 있어 나타니엘이 찾아왔다. 검은 지팡이를 든 나타니엘은 키리에를 보곤 작게 중얼거렸다.
[외출복이군.]
“문제 있나요?”
나타니엘이 희미하게 미소짓고서, 당연하다는 듯이 응접실 상석에 앉았다.
키리에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조금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렸으나, 그는 여상스럽게 말했다.
[안녕.]
그다웠다. 키리에는 기운이 빠지려는 것을 숨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좋은 아침이라고는 못하겠네요. 여기, 왕궁인가요?”
[그래.]
“제가 다 일일이 물어봐야 얘기해 주시겠죠?”
나타니엘이 아주 재밌는 장난을 계획한 아이처럼 웃었다.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아. 하지만 숨기는 건 좋아하거든.]
“허락하신다면…….”
[허락하지.]
“심보가 아주 못됐다고 말하고 싶네요.”
[귀여운 감상이구나.]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억지로 활기차게 대화해도 일어났던 일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나타니엘은 한낮에도 응달처럼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키리에는 그 근사한 낯 앞에서 차분하게 심장 박동을 가라앉혔다.
“줄리아 공주 저하는요?”
[죽었어.]
“죽은 건가요, 죽인 건가요?”
[죽였지.]
그의 화법은 노련하고 교묘하다. 키리에가 다시 물었다.
“제가 납치되었다는 걸 알자마자 곧장 셀로 오신 건가요?”
[안 것은 저녁. 온 것은 새벽.]
“제가 기절한 뒤에는요?”
[논리적으로 오전이겠지.]
“……그게 아니라, 국왕과 이야기 안 하셨나요?”
[안 했어.]
그럼 자신이 기절한 뒤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키리에가 잠시 멍하니 있자, 나타니엘이 손을 뻗었다.
[아프니?]
“네?”
화들짝 놀라 대답하는 키리에의 뺨에 나타니엘의 손이 닿았다. 긴 손가락이 귀 뒤, 뺨, 목덜미, 이마까지 훑고 지나갔다. 분명 사심은 없는, 그러나 묘한 접촉이었다.
키리에가 어깨를 움츠리자, 그는 다시 희미한 미소를 짓고서 손을 뗐다.
[숲 짐승이 너를 간호할 거야. 나는 치료와는 상극이라.]
“아…….”
[물어볼 것은 끝이니?]
“그건…… 아니지만.”
키리에가 쓴웃음을 지었다.
“……할 말이 아주 많았던 것 같은데, 마주하니까 다 사라졌어요. 추궁해 봤자 잘못이라는 생각조차 안 할 것 같고.”
[훌륭해.]
나타니엘이 쿡쿡 웃었다. 뭐가 즐거운 걸까? 키리에가 못마땅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네마리가 늦네요. 식당으로 가 봐야겠어요. 식사 후엔 바로 국왕 전하를 알현하려고 하는데, 같이 가실 건가요?”
[넌 늘 잘도 돌아다니는구나.]
“눈 속에서 누굴 주운 뒤로 좀 바빠졌죠. 뒤처리하느라요.”
[그럼 그 누구께서 말해 주지. 이제 그럴 필요 없다고.]
“네?”
키리에가 문고리에 손을 얹은 자세 그대로 몸을 돌렸다.
나타니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정오의 햇살 아래, 아주 멀고도 아득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리에는 그 순간 본능적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카각. 칵.
걸쇠가 긁히는 소리가 났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착각일까. 일순 나타니엘의 그림자마저 기뻐 춤추는 듯했다.
[넌 못 나가.]
키리에가 잠시 굳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후 그녀는 최대한 태연하게 미소를 띠었다.
“일단 누가 문고리를 망가뜨린 것 같으니 사람부터 불러야겠어요.”
[소용없겠지만 네가 그리하고 싶다면야.]
나타니엘은 마치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얼굴로 소파에 깊게 몸을 묻었다. 그 노골적인 행동에 키리에가 입술을 깨물었다.
재차 문고리를 돌려보아도 덜걱거리는 소리만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감정을 삼킨 뒤, 뒤로 돌아 물었다.
“당신이 잠갔어요?”
[하인이.]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당신이 시킨 거예요?”
[물론이야.]
키리에의 입술이 몇 번 달싹거렸다.
“나타니엘. 이건 말도 안 돼요.”
[돼.]
“나타니엘! 지금 저는 농담할……!”
[농담?]
키리에는 눈 깜빡할 사이에 코앞까지 다가와 서 있는 나타니엘을 보고 숨을 삼켰다.
[내 말의 어느 부분이 농담 같지?]
나타니엘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바다 위에 깔린 투명한 얼음 같은 눈이었다. 불순물 없이 맑으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다.
키리에가 저도 모르게 물러나 문에 등을 기댔다. 그녀는 숨이 막힌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잘되지는 않았다. 미소짓지 않는 나타니엘 앞에서는 날숨마저 소란스럽다.
‘하지만 휘둘릴 생각은 없어.’
키리에의 보랏빛 눈이 사나워졌다.
“저는 제 몸에 대한 자유 의지가 있어요. 당신이 무슨 권리로 저를 여기서 못 나가게 하겠다는 거죠?”
[아. 권리.]
나타니엘이 키득거렸다. 그는 천천히 손을 올려, 키리에의 목을 감쌌다.
시선은 차갑다. 철없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듯한 눈이다.
[권리.]
살갗이 맞닿자 냉기가 목을 통해 스며들었다. 키리에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고, 나타니엘은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다다라서야, 그는 고개를 비틀이며 속삭였다.
[키리에. 나는 누구에게도 허락을 구하지 않아.]
오만하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누구도 내 위에 있지 않고.]
“……나타니엘.”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지척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청옥의 심장처럼 차갑고 무거운 푸른 눈은 당장이라도 키리에를 심해로 가라앉힐 것만 같았다.
아무런 감흥도, 감정도, 인간적인 희로애락도 느껴지지 않는 눈. 키리에의 마음속에 서서히 두려움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나타니엘은 벨벳 부채 같은 검은 속눈썹을 내리깔며 웃었다. 그는 보라색 눈을 한 어린 양과 부드럽게 뺨을 맞부딪힌 뒤, 한 걸음 물러났다.
[착각하면 안 되지, 키리에.]
턱은 당기고,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짚은 자세는 품위 있게. 그는 인간이 아니므로, 이렇듯 가장 고귀한 인간의 껍질을 쓰고 인간을 발아래에 두는 것이다.
[착각하면 안 되지.]
***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며 굳은 키리에를, 나타니엘은 상냥하게 내려다보았다.
[나쁜 조건은 아닐 거야. 아무렴. 아무 우리에나 모셔둘 순 없지.]
그가 손짓했다. 곳곳의 천장에 매달려 있던 설렁줄이 저절로 딸랑거렸다.
곧 키리에의 등 뒤에서, 그녀가 무슨 짓을 해도 열리지 않던 문이 열렸다.
“부르셨습니까, 키리에 뷰캐넌 님?”
“…….”
서른여 명의 하인이 문밖에 도열해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정수리만 보이는 수많은 하인의 인사를 받는 키리에의 목이 멨다.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타니엘, 저들은…… 뷰캐넌 백작가의 하인들이잖아요.”
[그래야 네가 낯을 덜 가리겠지. 네 아비도 허락한 일이야.]
나타니엘이 손짓하자, 문이 다시 닫혔다. 그는 그대로 키리에에게 손을 내밀었다. 키리에는 학습된 동작으로 그 손을 잡았고, 손을 빼려고 했을 땐 이미 응접실 소파에 앉혀진 뒤였다.
“아버지가 그랬다고요?”
불안한 얼굴의 키리에가 물었다.
[그래.]
“아버지는 당신에게 접근 금지잖아요.”
[그랬지.]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예요?”
[글쎄.]
키리에가 울컥하는 속을 겨우 내리눌렀다.
“장난치지 말고 얘기해 줘요.”
나타니엘은 영원히 싱그러울 것 같은, 달리 말하자면 만들어진 냄새가 나는 미소를 지으며 지팡이의 매끄러운 표면을 매만졌다.
[키리에. 인간들은 타협한 거란다.]
“타협이요?”
[네게 바칠 공물, 네게 바칠 찬사, 네게 바칠 존경, 그 모든 것을 대가로 나를 치워 버린 셈이지. 너도 눈이 있다면 방금 하인 중 그 누구도 너와 눈 마주치지 않은 것을 보았을 테지.]
“…….”
[그게 네 피의 대가야.]
그는 유수 같은 속삭임을 끝낸 뒤, 지팡이에 고개를 기대고서 키리에를 응시했다.
[실망스럽나?]
키리에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다시 사납게 눈을 치떴다.
“논점 회피하지 말아요. 당신은 마치 그들이 날 이 상태로 만든 것처럼 말하지만, 아니지. 날 가두고 있는 건 당신이잖아요?”
[역시 안 통하는군.]
나타니엘이 빙긋 미소지었다. 그 미소가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워서, 그래서, 키리에는 통감했다.
그는 진심이다.
“놔줘요.”
[안 돼.]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어요.”
[밖은 네게 너무 위험해.]
“위험하지 않아요! 이번 일은 줄리아 공주의 독단이었고, 또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고 어찌 확신하지?]
아주 맑은 얼음 호수 같은 눈이 깜빡였다.
[그건 네 오만이야.]
“나타니엘!”
[나는 이미 한 번 기회를 줬어.]
“누구도 내게 기회를 주고 말고 할 수 없어요!”
[정말?]
그는 일순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조소에 가까웠다.
[아닐 텐데.]
나타니엘이 손을 뻗었다. 이전과 달리 키리에는 손을 맞잡지 않고,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나타니엘은 묘하게 흥분이 서린 목소리로 다시 한번 속삭였다.
[아닐 텐데?]
키리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키리에.]
작은 부름에도 그녀는 정면의 열리지 않는 문을 보았다.
[잡아.]
나타니엘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그래도 키리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 안 가 나타니엘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나타니엘이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 앞에 서자, 키리에도 그를 올려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미소짓고 있는 나타니엘의 얼굴에는 기분 나쁜 기색조차 없었다.
“나가게 해 줘요.”
나타니엘이 손을 뻗었다. 크고 찬 손이 키리에의 뺨을 감쌌다. 키리에가 그것을 뿌리쳤으나, 나타니엘은 상처받은 것 같지도 않았다. 뼈가 도드라진 흰 손은 오히려 더 느리고 부드럽게, 키리에의 귀와 뺨 근처를 어루만졌다.
[안 돼.]
“나는 어제처럼 내 몸을 이용해서 당신을 협박할 수도 있어요.”
[그러지 않는 게 좋을걸. 묶여 지내고 싶지 않다면.]
“제정신이에요? 내가 그런 모욕을 받고도 멀쩡히 당신과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소 높은 목소리로 화내는 키리에를 보면서도, 나타니엘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사실, 그는 오히려 재미있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잘 생각하란 뜻이야. 기르던 동물이 손을 물었다고 애완동물을 버리는 주인은 없어.]
“난 동물이 아니에요.”
[그럼. 말도 할 줄 알고.]
“빈정대지 말아요.”
[네가 좋아하는 방식이잖니.]
“난 적어도 상대를 똑바로 봐요.”
[내겐 이게 ‘똑바로’야.]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키리에와 이마를 맞댔다.
[너만 몰랐던, 인간들이 두려워하던 나타니엘. 세상의 모든 악독.]
악마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는 바다와 같아서 인간의 작은 감정 따윈 순식간에 묽어져 버린다.
[어떻게 이렇게 순진할까…….]
그가 키득거렸다.
키리에는 작고 푸른 우주가 공전하는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코앞의 푸른 눈은 키리에의 보라색 눈동자가 불안에 흔들릴수록 더 황홀에 취하는 것 같았다.
“이건 옳지 않아요…….”
[상관없어.]
“저는 인간이에요…….”
[그래, 사회적 동물이라지. 매일 무도회를 열어 줄까? 원한다면 열흘 밤낮 체스를 두자.]
“그런 의미가…….”
[영원히 기울지 않는 달을 네게 주마. 이 궁 안에서 꽃은 열흘 내내 붉을 것이고, 너는 앉은자리에서 모든 걸 거머쥘 거야.]
밤바다의 파도 소리처럼 조곤조곤 밀려 들어오는 나타니엘의 목소리에 키리에가 몸을 떨었다. 말할수록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나타니엘은 그런 키리에에게 코끝을 부딪치며, 전에 없이 다정하게 물어왔다.
[아프니?]
아프거나, 아프지 않거나.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한다.
그는 종말. 전설. 겨울의 왕.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
그날이 가기도 전에 그가 가장 먼저 부른 것은 국왕이었다.
외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싶었던 키리에의 기분은 국왕을 마주하자마자 참담해졌다. 국왕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얼굴에는 검은 망사를 드리우고 있었다.
“몸은 괜찮은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키리에의 어깨를 나타니엘의 지팡이가 눌렀다. 상석을 양보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키리에를 두고 국왕은 무심하게 손을 들어 그녀를 말렸다.
“신경 쓰지 말게. 나는 그저 초대받은 손님일 뿐이니.”
“전하…….”
[그게 아니라, 네가 키리에보다 하찮을 뿐이야.]
키리에와 국왕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나타니엘은 그것에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고 노래하듯 말했다.
[아직도 세울 자존심이 있다니 놀라운걸.]
“나타니엘, 제발……!”
[혀를 똑바로 놀려.]
어조는 상냥했지만 시선은 냉엄했다. 국왕은 눈을 피해 버렸다.
“……그래, 뷰캐넌 양. 이젠 그대가 이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일세. 내가 추태를 부렸군.”
보통 사람들이 아량으로 넘어가 주는 마지막 자존심까지 짓밟고 나서야 나타니엘은 만족한 듯 고개를 돌렸다.
키리에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무력감에 몸을 떨며 속삭였다.
“……송구합니다.”
국왕이 짧은 침묵 끝에 답했다.
“그대의 잘못은 아니잖나.”
지나치게 담백한 말에 키리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국왕의 녹색 눈은 기이할 정도로 차분했다.
“나야말로 미안하네. 왕실을 대표해 사과하겠네.”
“…….”
“전부 줄리아의 독단이었네. 그대를 납치해 정신계 마법으로 조종할 생각이었더군.”
키리에가 눈을 내리깔았다.
‘정말로 줄리아의 계획을 모르지는 않았겠지.’
그러나 줄리아는 죽었다. 진상을 파헤칠 수도 없고, 인제 와 물고 늘어진대도 얻을 게 없다.
“지나간 일에는 의미가 없으니, 기억하지 않겠습니다.”
“고맙네.”
국왕이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상이라 할 것은 아니지만, 뷰캐넌을 이번에 공작가로 승격시키기로 했네.”
“네?”
키리에가 놀라 반문했다.
“귀족들의 반발이 심할 텐데요.”
그녀가 차분하게 덧붙였다.
국왕은 시선을 내리깔고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대답했다.
“하나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네.”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고요?”
“오늘 아침 중앙 귀족을 소집했네. 결론부터 말하자면 뷰캐넌을 공작가로 올리는 것에 전원 찬성했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단순히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그 자리에 없던 귀족이 더 많았을 텐데 어떻게?’
국왕은 물끄러미 키리에를 보고 있었다. 키리에는 국왕의 녹색 눈에서 처음으로 어렴풋한 공포를 느꼈다.
“…….”
거기서 무언가를 깨달은 키리에의 고개가 돌아갔다. 나타니엘이 어느새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희미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당신, 뭘 한 거예요?”
아직 키리에가 깨어나기 전, 아침. 수도의 모든 귀족은 왕궁 셀의 가장 거대한 홀인 그레이트 카비네에 소환되었다.
명목상으로는 국왕의 소집이었다. 그러나 국왕의 역할은 중개자에 불과할 뿐이란 걸,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 모였는가?”
“예, 전하.”
“이렇게 이른 시각인데도 모두 모여 주어서 고맙네.”
국왕이 차분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히 트레베레움을 지탱한다고 할 수 있는 2공 2후 3백이 모두 모인데다, 정·재계의 내로라하는 가문의 주인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정말 내 소집이었다면 이렇게 전부 모이진 않았겠지.’
그녀가 쓴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전설경이 그대들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는군.”
모두가 기다리던 시간이 왔다.
나른하게, 마치 초상화 속의 완벽처럼 앉아 있던 전설경이 입을 열었다.
[안녕.]
밤바다의 파도 소리만큼 위험하고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동시에 그 목소리는 카비네 안의 긴장감이 무색하도록 맑고 천진했다.
귀족들은 배 속에 거미를 삼킨 기분으로 숨을 죽였다.
[먼저, 너희가 모르는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구나.]
전설경이 지팡이를 손가락 위에 얹고서 말했다.
[나는 이 나라에 매우 큰 유감이 있었고, 그래서 원래는 깨어나자마자 너희를 죽이려 했지.]
귀족들이 국왕을 돌아보았다.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네.”
어디선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나며,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그런…….”
[그걸 말린 게 키리에 뷰캐넌이니 사실상 너희는 키리에에게 목숨을 빚진 셈이야. 그런데…….]
전설경의 눈매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실로 유감스러운 일을 저질렀더구나.]
고작 ‘유감’이라고 표현하기엔 모자랄 정도의 무시무시한 냉기가 퍼졌다.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는 몰랐던 귀족들이 낮게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일은 돌아가신 공주 저하의 독단이 아니었습니까?”
처음으로 귀족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전설경이 그에게 시선을 옮겼을 때, 사람들은 무서운 일이 벌어지리라 생각했다.
하나 아니었다. 푸른 눈이 오히려 얕은 흥미로 빛났다.
[올드시우다드의 피구나.]
“라이너스 올드시우다드라 합니다.”
[늘 바른말을 좋아했지.]
“……예?”
[초대 말이야.]
전설경이 중얼거렸다. 그리움 하나 없이 추억을 돌이키는 말에 공작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 공작을 보며 전설경이 턱을 괴었다.
[제법이야.]
“……감사합니다.”
[네 말이 맞아. 공주의 ‘독단’.]
그는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농담이라도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그 냉소에 눈치 빠른 귀족들이 가장 먼저 머리를 굴렸다.
‘공주의 독단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자리는 귀족들을 압박하는 동시에 국왕에게 경고하기 위한 자리였다. 허튼짓하지 말라는. 그렇게 본다면 국왕의 지나치게 차분한 태도도 이해가 되었다.
전설경이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그 독단이 반복되면 내가 많이 슬퍼지겠지.]
“……외람되오나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말? 아니지. 내가 말로 해결하길 바랐다면 일이 이렇게 되도록 두진 말았어야지.]
“예?”
[내가 말로 해결할 시기는 이미 지났단다.]
전설경이 지팡이를 들어 그레이트 카비네의 문을 가리켰다.
“아버지!”
장정 몇 명에게 붙잡힌 글라디오소 버몬트가 들어오고 있었다. 당장 버몬트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글래드!”
“아, 아버지!”
“네가 왜 여기에……!”
“아버지, 살려 주십쇼, 살려 주세요! 아버지! 아빠!”
눈물을 질질 흘리는 글라디오소는 그대로 전설경 앞으로 끌려갔다. 버몬트 후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전설경!”
[아. 좀 더 지켜보라고. 재밌는 부분은 지금부터니까.]
하인은 글라디오소를 전설경 앞에 무릎 꿇렸다. 전설경이 오만한 자세로 앉아 지팡이 끝으로 글라디오소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저, 저……!”
본디 기사의 가문이라 강성인 버몬트 후작이 당장 앞으로 달려나갈 기세였으나, 주변의 다른 귀족들이 가까스로 그를 말렸다. 전설경은 그 또한 재밌어할 뿐이었다.
[자, 멧돼지. 네가 한 짓을 말해 봐.]
글라디오소가 흐느꼈다. 이미 한 번 그의 두려움을 느낀 적 있는 글라디오소는 그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는 전설경의 구두라도 핥을 기세로 비굴하게 외쳤다.
“저는, 저는……! 키리에 뷰캐넌 양에게, 연모의 마음을 가져서, 구애했는데…….”
[방법도 이야기해야지.]
“바, 밤에, 크흑, 밤에 찾아가려 했습니다……!”
[그리고?]
나타니엘이 아이 어르듯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대답을 부추겼다.
“그런데 그녀가 저를 거절해서…… 앙심을 품고, 그녀를 모함했습니다…….”
[왕세자의 약혼 축하연에서 말이지.]
“그렇습니다……. 저, 전부 제가 잘못한 거고, 저기, 제 죄를 인정하니까, 제발…….”
[거기까지.]
전설경이 글라디오소의 말을 끊고 지팡이를 내렸다. 그 안에 숨은 칼날의 무서움을 아는 글라디오소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전설경의 말이 나긋나긋이 이어졌다.
[그는 재범이긴 하나, 잘못을 뉘우치고 있으니 그 용기를 참작해 줘야겠지.]
“가, 감사합니다! 각하!”
“이런 개뼈다귀 같은 상황을 보았나……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짐승처럼 전설경에게 굽실대는 글라디오소를 보며, 버몬트 후작이 노성을 내질렀다.
전설경이 미소지었다. 지금까지와는 결이 다른 미소였다. 그 미소가 하 수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국왕과 몇몇 귀족뿐이었다.
국왕은 눈을 감았고, 전설경은 나른하게 속삭였다.
[바로 이런 말이야.]
전설경이 글라디오소의 이마에 손가락을 뻗었다.
때마침 해를 가린 구름 탓에, 그레이트 카비네 안은 갑작스럽게 어두워졌다. 전설경의 얼굴에 비치던 흰 빛이 또렷한 경계의 어둠으로 덮이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리게 펼쳐졌다.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글라디오소의 머리가 날아갔다.
“……어?”
귀족 중 누군가가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그 정도로 갑작스럽게, 예고도 전조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팡, 하고 터져나간 머리는 형체도 남지 않았다. 사방으로 터진 피가 귀족들의 얼굴에 꽃잎처럼 흩뿌려졌다.
[참작하여, 고통 없이.]
일순 사람들의 오감이 강제로 열렸다.
그들은 옆 사람의 이마에 땀방울이 흐르는 소리를 들었고, 피부에 와닿는 공기와 미세한 바람의 흐름을 느꼈다. 세 층 위의 하인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고, 저 멀리 앉은 사람의 동공이 어느 방향으로 떨리는지가 코앞에서 보는 것처럼 선명했다.
사람들은 몸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으며 자신이 그 작은 동작 하나하나를 영겁처럼 느끼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와중에도 기묘하게도 전설경만이 제 시간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부터 너희가 할 일은 아주 간단하다. 키리에를 잘 모실 것.]
사람들은 그가 유난히 빠르게 움직이는 건지, 자신들의 움직임이 멈춘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너무나도 가볍고 우아하게 지팡이를 들고 일어났다.
[키리에가 싫어하면 하지 않고, 키리에를 최우선으로 두고, 키리에가 다치게 두지 않을 것.]
전설경이 소금 기둥처럼 굳은 사람들 사이를 우아한 걸음걸이로 가로질렀다. 사람들은 아주 섬뜩한 무언가가 자신의 옆을 지나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키리에가 죽으라고 하면 죽을 것.]
뚜벅이는 구둣발 소리가 카비네 끝에 다다라 멈췄다.
나타니엘이 천천히, 별을 관찰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차마 그에게 손수 문을 열게 할 수 없다는 듯, 문이 미끄러지며 열렸다.
[내 손에 죽는 것보단 그게 나을 거야.]
그는 나긋하고 장난스럽게 말하곤 방을 나갔다. 사람들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당연하지만, 그건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
키리에의 낯이 하얗게 표백됐다. 국왕 역시 창백한 무표정이어서, 미소짓고 있는 것은 나타니엘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을 남에게서 듣는 일이 몹시 새롭게 느껴지는 듯했다.
“……해서, 뷰캐넌 백작가는 모레부로 공작가로 승격하게 되네.”
국왕이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키리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인형처럼 앉아 있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모두 찬성한 거로군요.”
“호국경의 뜻이기도 하네.”
“호국경이요?”
“그래.”
‘미리 사과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순간, 레쇼의 말이 키리에의 뇌리를 스쳤다.
‘그는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거야.’
키리에의 낯이 점차 무표정으로 변해 갔다.
‘나만 가만히 있으면 되니까……. 그러면 모두가 평화로울 수 있으니까…….’
키리에가 창백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자, 나타니엘은 묘하게 사늘해진 눈으로 국왕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압박을 느낀 국왕이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어차피 돌이킬 수 없는 일이네.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키리에 양.”
“……국왕 전하.”
“그대는 지금 이 나라에서 제일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어. 전설경을 모시는 일이 바로 그것이지. 거기에만 집중해 주게. 귀족이지 않은가? 늘 책임감이 강했던 그대 아닌가.”
“전하…… 저는 뷰캐넌의 사람이고, 뷰캐넌의 안살림을 관리해야만 합니다. 그게 제 가장 큰 책임이에요.”
“자네 아비가 괜찮다고 했네. 알지 않나? 백작은 늘 뷰캐넌을 공작가로 승격시키고 싶어 했지. 그의 숙원이 이루어진 셈일세.”
“하지만, 그동안 맡아 왔던 대외적인 문제들이…….”
“걱정하지 말게. 얼마든지 다른 누군가가 대신할 수 있는 일이야. 하지만 전설경을 모시는 건 그대밖에 할 수 없는 일이네.”
국왕은 초조한지 어깨를 달막대며 안절부절못했다.
“이건 그대에게도 나쁜 일이 아니야. 잘 생각해 보게. 트레베레움이, 온 나라가 그대를 중심으로 돌아갈 걸세.”
키리에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저는 단 한 번도 그런 걸 원한 적이 없습니다.”
국왕이 미간을 좁혔다.
“중요하지 않네.”
그녀가 차가운 밀랍 같은 얼굴로 말했다. 나타니엘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네게 바칠 공물, 네게 바칠 찬사, 네게 바칠 존경, 그 모든 것을 대가로 나를 치워 버린 셈이지.’
키리에는 눈을 내리깔고서 조용히 물었다.
“언제까지요?”
“그건…….”
국왕이 나타니엘을 바라보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키리에의 주인은 키리에 자신이 아니었으니까.
그녀의 새로운 주인이 된 나타니엘은 아름다운 미소로 답했다.
[영원히.]
다음 날부터 나타니엘은 키리에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외출할 일이 생기면 그는 안네마리와 기묘한 눈인사를 주고받은 뒤 방을 나갔다.
‘안네마리를 통해 나를 감시하고 있구나.’
키리에는 궁을 나서는 나타니엘의 등을 창문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나타니엘이 요즘 어딜 가는지 아니?”
조심스럽게 라벤더 차를 따르고 있던 안네마리가 활짝 웃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 같았어요.”
“사람들?”
“귀족이요!”
그러고 보면 요즘 나타니엘을 찾는 귀족가 하인들의 방문이 잦았다.
“혹시 그를 미행할 수 있니?”
키리에의 말에 안네마리가 멈칫했다.
“음…… 어려워요.”
“네 능력으로도?”
“나타니엘 님은 아주 아주 아주 많거든요. 인기척이 너무 많아요.”
“많다고? 없는 게 아니라?”
“네! 어디에나 있어요. 인간이 있는 곳에는 항상 같이 있어요.”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인간이 아닌 자들끼리만 통하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키리에는 말없이 티 테이블에 앉았다. 안네마리는 키리에가 기운이 없어 보이는 걸 의식했는지 과장되게 밝게 말했다.
“갖고 싶은 건 없으세요, 아가씨? 뉴미니에서 새 눈꽃 사탕 종류가 나왔대요!”
“없어.”
힘없는 대답에 안네마리가 얼굴에 초조한 빛을 띄웠다.
“그, 그러면…… ‘144프뤼게’에서 새 디자인의 드레스가 나왔다는데 카탈로그를 가져올까요?”
“드레스 입을 일이 없겠지, 이젠.”
안네마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키리에는 무심하게 그녀에게 물었다.
“그보다, 혹시 아버지에게 연락은 없었니?”
안네마리의 눈이 크게 떨렸다.
“어어어없었어요…….”
“……그래.”
키리에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했다. 기대를 덜 해서 다행이었다. 그런 키리에를 보며 안네마리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오, 오늘은 날이 좋아요, 아가씨! 하늘이 파래서 엄청 예뻐요!”
“그렇네. 예전 같았으면 같이 바깥을 산책했을 텐데.”
“그, 그렇지만 밖은 아직 추워요!”
“눈싸움 좋아하잖니?”
“시, 싫어졌어요…….”
안네마리가 어정쩡하게 시선을 엇비끼면서 고개를 숙였다. 안네마리는 거짓말을 할 때 눈을 보지 못한다. 키리에는 음울하게 가라앉은 보랏빛 눈으로 안네마리의 숙인 뺨을 바라보았다.
“안네마리.”
키리에가 물었다.
“왜 갑자기 나타니엘을 돕는 거야?”
“아, 안네마리는 그런 게…….”
“내가 싫어진 거니? 그래서 나를 가둔 나타니엘을 돕는 거야?”
“아니에요!”
안네마리가 벼락 맞은 사람처럼 놀라 외쳤다.
“그렇지 않아요! 절대 아니에요! 아가씨는 안네마리의 전부예요! 안네마리는 아가씨를 싫어하지 않아요!”
꼭 그녀의 격렬한 부정이 아니더라도, 키리에 역시 안네마리가 나타니엘에게로 돌아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납치된 그 날 이후로, 키리에 자신과 관련된 모든 일을 나타니엘이 결정하게 되었다.
오래 알아 온 안네마리마저 나타니엘과 의뭉스러운 시선을 주고받을 뿐,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그럼 어째서 그와 손을 잡은 거야?”
슬픔을 숨기지 않은 키리에의 얼굴을 본 안네마리의 눈가가 덩달아 촉촉해졌다.
“안네마리는, 안네마리는 그저 아가씨가 안전하시길 바라서 그랬어요…….”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키리에는 질식할 것 같은 차향 속에서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안네마리. 기억해? 내가 너를 처음 만났던 날.”
안네마리의 몸이 굳고, 뾰족한 귀가 처졌다.
“기억해요…….”
“내가 너와 처음 만난 건 지방에 있던 노예 상인의 집이었지.”
“그랬, 어요…….”
“너는 투기장에서 싸우는 노예였고, 절대 지지 않는 투사로 살고 있었지.”
“…….”
“밥도 나왔고 잠잘 곳도 있었고, 없는 건 딱 하나. 자유뿐이었을 거야. 그때 넌 행복했니?”
쨍그랑.
안네마리가 들고 있던 찻주전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키리에는 바닥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갇혀 있어도 안전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건…….”
“너도 내가 죽을 때까지 이곳에 있길 바라니?”
“아니에요!”
“그저 안전하게 먹고 산다고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안네마리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의 코끝이 점차 붉어졌다.
“하지만, 하지만 안네마리는 아가씨가 납치되었을 때 너무 놀랐어요!”
“누구도 삶에서 위험을 온전히 제거할 수는 없어.”
“노력할 수는 있어요!”
“그건 누구를 위한 노력이니? 그걸로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지만……! 하지만!”
안네마리의 검은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키리에는 투기장을 정복했던, 인간이 아닌 어린 소녀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녀는 노예로서는 최고의 대우를 받았지만, 눈은 죽어 있었다. 그러니 안네마리는 사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키리에가 표정 없는 처연한 눈으로 안네마리를 응시했다. 혼란스럽게 헐떡이던 안네마리는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안네마리는 강해서 죽지 않아요! 그렇지만 아가씨는 이런 일이 또 있었다간 정말 죽을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뾰족한 귀의 작은 소녀는 머리를 붙잡은 채 얼이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아가씨 죽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힉, 히윽……. 안네마리도 아가씨 못 나가는 거 싫어요……. 히끅, 힉, 그런데, 아가씨가 죽는 게 더 싫고 무섭단 말이에요……!”
“안네마리.”
당황한 키리에가 다가가려 했으나 안네마리가 일어나는 게 빨랐다.
안네마리가 품에서 넓적한 플라타너스 잎을 여러 장 꺼내 뿌리자, 바닥을 적셨던 찻물과 깨진 찻주전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메이드복을 입은 작은 소녀는 허망한 눈으로 타들어 가는 잎사귀를 보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가끔 보이는 노숙하고 피로에 젖은 눈이었다.
“아가씨가 좋아하시는 찻주전자 깨뜨려서 죄송해요, 아가씨…….”
“…….”
“다른 것도 죄송해요…….”
“……안느.”
“죄송해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검은 눈이 차마 키리에를 담지 못하고 바닥을 향했다.
“하지만 안네마리는 다른 무엇보다 아가씨가 안전하길 바라요. 그리고 나타니엘 님이, 아가씨를 지켜 준다고 했어요…….”
안네마리의 중얼거림에 키리에가 의자에서 일어나 안네마리 앞에 앉았다.
“안네마리. 혹시 나를 지키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거야?”
“…….”
“그러지 않아도 돼. 네 잘못이 아니었잖아.”
“……아니에요. 안네마리 잘못이었어요. 안네마리가 약해서……. 안네마리가 엄마에게 모든 걸 다 배우지 못해서…….”
안네마리가 말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소녀의 검은 눈은 끝을 알 수 없는 밤처럼 어두웠다.
“안네마리는 다시는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을 거예요…….”
“안네마리.”
“그러니까, 안네마리는, 아가씨가 위험해지게 두지도 않을 거예요…….”
안네마리가 갑작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심연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요.”
***
곧 정신을 차린 안네마리는 “손님을 데려올게요! 오늘부터 매일 손님이 생길 거랬어요!”라며 문을 열었다. 들어온 것은 마리아와 라우라였다.
“키리에!”
“키리에. 잘 지냈어?”
“너희…….”
앞에 있던 라우라가 키리에를 보자마자 달려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세상에! 이야기 들었어! 괜찮은 거야? 이거 봐, 볼살이 쪽 빠졌잖아! 내가 너 먹이려고 비싼 음식 바리바리 보냈는데, 안 갔어?”
“설마 뤼티에산 송로버섯으로 죽을 만들어서 보낸 게 라우라 너야?”
“갔구나! 누가 떼먹을까 싶었는데 아니라니 다행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랐어, 우리 귀염둥이!”
“라우라가 걱정 많이 했어, 키리에. 물론 나도.”
라우라는 울기 직전이었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마리아 역시 수심이 깊어 보였다. 키리에가 두 사람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다신 못 볼 줄 알았는데……. 와 줘서 고마워. 너희는 괜찮아?”
“우리 걱정할 게 뭐가 있겠어.”
“맞아! 그 자식! ……만 아니면 다 괜찮지!”
라우라가 크게 외쳤다가 주변을 살폈다.
안네마리가 시중을 위해 멀리서 대기하고 있긴 했지만, 그녀는 시선을 받자 귀를 접어 들리지 않는 시늉을 했다.
키리에는 쓴웃음을 짓고서 친구들을 테이블로 이끌었다.
“앉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라우라는 자리를 잡자마자 충분히 애교로 보일 정도로만 탁자를 내려쳤다.
“키리에, 얘기 들었어! 너 납치된 것도 어이없긴 하지만, 너 찾겠다고 병사들 싹 쓸어 버리고 왕세자를 홀딱 벗겨서 개처럼 굴렸다면서!”
그녀는 거기까지 말한 뒤 키리에의 어깨를 툭 쳤다.
“귀여운 크기라던데, 진짜야?”
키리에가 실소를 흘렸다.
“안 봐서 모르겠어.”
“그걸 내가 봤어야 하는 건데! 지금 도심에 풍자화 엄청 돌아다니고 있는데, 진짜인지 궁금하단 말이지!”
“너 그런 거 관심 있었어?”
“네가 파혼당한 날 이후로 난 오레윈브리지의 수치에 매우 관심이 생겼단다! ……그런데 여기 방음 잘 되지?”
라우라가 귀 근처에서 손가락을 팔랑거리며 과장되게 눈을 굴렸다. 키리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라우라도 안심한 표정으로 씩 웃었다.
“그래, 웃으니까 보기 좋다! 북대륙에서 좋은 화장품 수입해서 넣어 줄게. 왜 이렇게 얼굴이 상했어, 걱정되게…….”
일부러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하며 분위기를 띄워 주었다는 걸 키리에도 안다. 키리에의 미소가 부드러워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 바깥 이야기 좀 들려줄래? 안네마리, 다과를 준비해 줘.”
키리에의 부름에 안네마리가 다가와 다과를 차렸다.
안네마리가 뜨거운 물을 새로 받기 위해 문으로 등을 돌린 그 순간이었다. 여태껏 별말 하지 않고 있었던 마리아가 입 모양만으로 속삭였다.
‘네 시녀, 장단음 부호 알아?’
키리에가 바로 보라색 눈을 좌우로 굴렸다.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걸로.’
세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 이젠 라우라의 차례였다.
“그래서, 전설경은 대체 너한테 뭘 원하는 거야?”
“그래서, 전설경은 대체 너한테 뭘 원하는 거야?”
라우라가 요란하게 모피를 벗어 내던지고서 부러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투덜댔다.
“네가 좋대? 좋아서 그런다니? 아니면 왜 인생을 조지려고 한대?”
“좋아서는 아니야.”
“우리 귀염둥이가 위험했던 건 맞지만 이렇게 사람 가둬 놓는 건 정말 아니잖아! 키리에, 너 뭐 죄지은 거 있어?”
라우라의 호들갑에 맞춰 마리아가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대화 감시받고 있어?」
“그런 건 아니지만 자세한 건 말해 줄 수 없어, 미안해.”
「아마도. 밖은 어때?」
키리에가 조용히 손가락을 두드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이게 말이나 되냐고! 어떻게 사람을 이런 데다 가둬 놔? 바깥이 너무 태연해서 더 짜증이 난다니까!”
「국왕과 전설경의 대립이 심해지고 있어. 지금은 국왕이 무릎을 꿇고 있지만, 뒤로는 칼을 갈고 있을 게 뻔해.」
“그것 말고는 어때? 달리 변한 건 없어?”
「군대를 확충하는 거야?」
“곧 여기서 무도회를 열 테니 필참하라고 하더라! 왕실로 들어가는 최고급품도 우선 네게 빠지고 있다고 들었어.”
「아니. 오히려 마법사를 모으고 있어.」
키리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의 연구실을 찾는 거구나.’
아마 현 상황에서 나타니엘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오레윈브리지의 마법이 거기 있을 것이다.
그녀는 손 위치를 바꾸며 의미 없는 침묵의 시간을 가진 뒤, 다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귀족들 사이에서 분란은 없어? 뷰캐넌이 공작가가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어.”
「국왕 밑의 마법사들의 동향을 감시해 줄 수 있어?」
“버몬트가 그렇게 된 걸 보고도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
「그들이 뭔가를 찾고 있다는 걸 아는 거구나, 키리에.」
키리에가 고개 대신 눈동자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마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찻잔 손잡이에 걸린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이미 감시 중이야. 마법사들의 움직임은 주로 왕궁에 집중되어 있어.」
국왕이 발라브리가의 연구실을 찾을 수 있을지가 이 파워 게임의 변수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키리에는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나타니엘은 자신이 불로불사라고 말했고,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런데 어떻게 발라브리가에게 죽을 수 있지?’
키리에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에 대한 건 알면 알수록 모든 게 불투명하다.
키리에가 애써 미소지었다.
“일단…… 너희도 되도록 그의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들이 뭔가를 찾아내면 알려 줘.」
“띄고 말고 그런 게 지금 중요하니?! 네가 갇혀 있는데?”
「그럴게.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나?」
「라우라와 힘을 합쳐서 네가 탈출할 수 있게끔 노력하고 있어. 여기서 벗어날 거지?」
키리에가 부호를 전하던 손가락을 멈췄다. 커다란 보라색 눈동자에 망설임이 스쳤다.
「내가 그래도 될까?」
「무슨 말이야?」
키리에는 죽어 나가던 병사들을 떠올렸다. 무고한 희생이었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눈밭의 시체 더미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모든 게 자신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나만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다치지 않는 건 사실이야.」
일순 마리아와 라우라가 동시에 굳었다.
“키!”
기어코 눈물을 보인 라우라가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치며 일어났다.
“리에…….”
그러나 라우라의 다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소리도 없이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문을 측면에 두고 있던 키리에는 시야의 바깥에서부터 중앙으로 침입해 시선을 옭아매는 검은 구두를 보았다.
[손님이 왔구나.]
***
그는 병자의 침실보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몰고 다닌다. 그 자신은 권력자의 꽃바구니처럼 풍성하고 아름답지만, 그의 몸에 생기는 모든 그늘은 불길함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나타니엘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를 정면으로 본 라우라는 보는 것과 느껴지는 것의 차이에 숨을 들이켰고, 마리아는 너무 강하게 주먹을 쥔 나머지 손톱으로 손바닥을 찔렀다.
“나타니엘.”
이제는 익숙해진 키리에만이 불안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가렸다.
“어쩐 일이에요?”
나타니엘이 미소지었다. 그는 얼음장 같은 푸른 눈으로 라우라와 마리아를 차례대로 응시했다.
[네 벗들이 왔구나. 착하기도 해라.]
전혀 칭찬하는 기색 없이 나타니엘이 말했다. 그는 냉정한 검열의 시선을 거둔 뒤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드나?]
“네?”
[네 친구들이잖니.]
사회적 동물. 나타니엘이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키리에가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이 부른 거였어요?”
[물론이지. 사람을 가둬 놓으면 멍청해지는 줄은 미처 몰랐는걸.]
키리에가 라우라와 마리아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코앞에서 마주한 종말에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 둘 순 없겠어.’
키리에는 착잡한 마음을 숨기고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둘은 이제 돌아갈 거예요.”
[온 지 얼마 안 된 손님을 내쫓으면 안 되지, 키리에.]
“두 사람은 가문의 후계자예요. 바쁘니까 잡아둘 순 없어요.”
[그래? 난 아닌 것 같은데.]
나타니엘이 마리아에게 다가갔다. 그는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고, 마리아는 삐걱거리면서도 반사적으로 손을 잡았다.
나타니엘은 그녀의 손등에 입 맞추려는 듯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가, 움직이던 것을 뚝 멈췄다. 그리곤 묘하게 경멸에 가까운 미소를 지으며, 마리아의 손을 버리듯 놓아 버렸다.
[역시 이건 좀 비위가 상하는군.]
그는 끼고 있던 장갑을 훌훌 벗어 버리며 마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너희가 말해 봐. 가겠다고?]
웃음기도 농담기도 없는 정연한 푸른 눈은 키리에를 볼 때와는 달랐다. 구두 위를 타고 오르는 길 잃은 개미를 죽일까 털어낼까 고민하는 듯한, 그저 메마른 시선이었다.
마리아가 삐걱거리는 오르골 인형처럼 치마 끝을 잡고 들어 올렸다.
“……아닙니다, 각하. 초대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타니엘이 라우라를 돌아보았고, 라우라 역시 가슴에 손을 얹고서 허리를 숙였다.
“저, 저도 물론 초대해 주신다면 얼마든지 더 머무를 수 있답니다!”
[그래야지.]
나타니엘이 다시 미소를 다시 짜 맞추고서 키리에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나지막이 웃었다.
[눈빛으로 사람도 죽이겠구나.]
“두 사람에게 손대면 정말로 그럴 거예요.”
[네가 나를?]
“그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렇지. 그러면?]
키리에가 지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제가 저를.”
키리에가 말을 마치자마자 나타니엘의 엄지손가락이 입 안으로 들어와 키리에의 혓바닥을 눌렀다.
“읏……!”
[참 말도 잘하지, 내 숙녀는. 미운 말을 잘해서 문제지만 말이야.]
그는 나머지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서 키리에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손톱을 세워 손목을 잡아 보았으나 나타니엘은 미동도 없었다.
[너는…….]
나타니엘이 키리에의 눈을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참 쉽게도 그런 말을 하는구나. 죽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 목숨을 아주 가볍게 내던지지.]
쉬워 보인다니. 키리에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냥 가진 게 내 몸밖에 없을 뿐이야.’
그녀는 대답 대신 입 안에 들어와 있는 나타니엘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
그 순간, 나타니엘의 얼굴에 점등하듯 떠오른 감정이 무엇인지 키리에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키리에는 이제 자신이 자신의 몸을 갖고 협박할 때야말로 나타니엘이 가장 사나워지고, 가장 흡족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키리에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걸 몹시 싫어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녀를 막다른 길로 모는 것은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도 봐. 저 눈의 잔혹.’
뺨을 쥔 나타니엘의 손가락 힘이 점점 강해졌다. 눈을 넘어, 그 너머의 뇌 안쪽을 헤집는 것 같은 시선에 키리에의 숨이 막혔다.
“흣…….”
마침내 아귀힘을 참지 못한 키리에가 달아오른 얼굴로 얕은 신음을 내뱉었을 때, 나타니엘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게 네가 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협박이기야 하지.]
그가 중얼거렸다. 상황이 아주 마음에 차지는 않는 눈치였으나, 키리에는 그게 왜인지 알 수 없었다.
나타니엘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뒤에서 공격 태세를 취하고 있는 안네마리를 향해 우아한 조소를 지었다.
[숲 짐승. 무도회를 준비해. 네 주인은 너무 심심해서 곧 자살이라도 할 것 같으니 말이다.]
***
그날 밤이었다. 누군가가 라우라 포트듀케인이 머무는 방문을 두드렸다. 라우라의 시녀가 주인 대신 문을 열었다.
“넌?”
“안녕하세요, 포트듀케인 아가씨.”
문을 두드린 것은 안네마리였다. 옆에 키리에는 없었다. 라우라가 눈치 빠르게 시녀들에게 명령했다.
“들여보내고, 너흰 나가 있어.”
작은 소녀는 머뭇거리며 들어왔지만, 행동과 달리 눈에는 겁도 두려움도 없었다. 라우라의 녹색 눈이 매섭게 안네마리에게 향했다.
“무슨 일이야?”
“여쭤볼 게 있어서요…….”
안네마리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포트듀케인 아가씨는 우리 아가씨를 좋아하세요?”
라우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꼬마야? 키리에는 관대해서 널 봐주는 것 같지만, 나는 시녀와 선문답하지 않아.”
“하지만 우리 아가씨를 구하러 오신 거 아니에요?”
뭔가를 간절히 바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라우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전설경에게 협조하고 있는 네게 해 줄 말은 없어. 돌아가.”
안네마리가 눈을 내리깔았다.
“안네마리는 아가씨가 무사하길 바랐을 뿐이에요. 그런데…….”
“그런데?”
“이대로는 안 돼요.”
“안 된다고?”
“아가씨가 갇혀서는 행복하지 않다고 말했어요.”
“당연한 거 아냐?”
라우라가 코웃음 치며 턱을 들었다.
“남의 발밑에서 애교나 떨면서 살라고? 개새끼도 아니고 그렇게 살 순 없지. 누구도 키리에를 그렇게 대할 순 없어! 그 애가 어떻게 지켜 온 긍지인데!”
어금니를 악물고 토해낸 라우라의 말에 안네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검은 눈동자에는 후회와 그리움 같은 감정이 부유했다.
“……안네마리도 그랬어요.”
“네가 그랬다고? 아니, 말하지 마! 안 궁금해! 난 키리에의 일을 이야기하려는 줄 알고 널 들인 거니까 본론이나 말해!”
철저하게 목적 지향적인 말에 안네마리가 배시시 웃었다. 그녀가 느릿하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포트듀케인 아가씨는 큰 배를 움직이는 분이죠?”
“뭐, 그렇지?”
“그럼 안네마리가 말하는 걸 가져다주실 수 있나요?”
라우라가 고개를 기울인 채 팔짱을 꼈다.
“내가 왜?”
안네마리는 그런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검은 눈 안에서 희미한 두려움이 소용돌이쳤다.
“이대로 가다간 아가씨는 나타니엘 님 손에 부서지고 말 거예요.”
기울지 않는 달, 열흘 내내 붉은 꽃을 주겠다던 나타니엘은 진실로 그 말을 지켰다.
야회가 열렸다. 볼룸도 아니고 어딘가의 대저택도 아닌, 키리에가 머무는 왕궁의 왼 날개 궁에서.
에스코트를 기다리며 대기 중이던 키리에는 창 너머로 들리는 소란에 고개를 들었다.
“……사람이 많이 왔나 보네.”
“수도의 귀족들은 다 왔다고 했어요!”
등 뒤에서 허리 리본을 묶어 주던 안네마리가 대답했다.
“수도만?”
“지방에는 쭉정이만 있으니 알릴 필요 없다고 했어요.”
참으로 나타니엘다운 말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키리에는 멍하니 앉아 거울을 보면서도 문밖의 야회에 대해 생각했다.
“자리가 모자랄 텐데. 바닥도 마룻바닥이 아니고…….”
“복도를 허물어서 괜찮아요!”
“……어제 들린 소리가 그 소리였구나.”
“네! 그리고 방마다 분위기를 다르게 해서인지 다들 즐거워하고 있어요.”
“……그래.”
생각해 보면 자신이 아니더라도 야회 준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국왕의 말이 맞았다.
‘나는 언제든 대체 가능한 존재일 뿐이야.’
키리에가 가만히 거울을 응시했다. 늘 고귀함과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는데, 거울 속 여자는 참으로 볼품없고 초라했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키리에는 말라붙는 가슴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 룸을 나서서 응접실로 나가자, 평소와 같은 차림의 나타니엘이 서 있었다. 고급인 게 분명하지만 수수하고 까만 예복을 걸친 그는, 별다른 장식 없이도 지나치게 매력적으로 보였다.
나타니엘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키리에를 보고 특별히 놀란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그에게 겉껍데기란 별로 의미가 없다.
[가지.]
키리에가 그의 팔을 감쌌다. 팔 안쪽에 손이 닿았을 때 나타니엘이 언뜻 눈을 빛낸 것 같기도 했으나, 키리에는 그것을 착각이라 생각하고 넘겼다.
밤인데도 낮처럼 불을 밝힌 복도를 가로지르는 내내 그림자가 길어졌다 짧아지기를 반복했다.
불빛, 불빛.
그저 나타니엘이 이끄는 대로 걷던 키리에가 중얼거렸다.
“뭘 원하는지는 몰라도, 당신 뜻대로는 안 될 거예요.”
나타니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내가 뭔가를 바란다고 생각하는 건 너뿐이야.]
“그게 실제로 바라는 게 없다는 뜻은 아니라는 걸 알아요.”
[아.]
나타니엘이 조용하게 웃었다. 넓고 공허한 복도 탓인지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고 위험하게 들렸다.
[거기까지 알면 그걸 말했을 때 내가 더 즐거워하리란 것도 알았어야지.]
“그건.”
뭔가를 말하려던 키리에는 이내 다시 입을 닫아 버렸다. 말해도 소용없으리란 생각이었다.
조금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던 나타니엘 역시, 키리에가 침묵하자 조용하고 우아하게 걷기만 했다.
이윽고 키리에가 주거하는 방과 약식 볼룸을 잇는 복도가 끝났다.
키리에가 속삭였다.
“나가게 해 줘요.”
[안 돼.]
랑브리로 장식한 문이 열렸다. 오색찬란한 빛이 키리에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
“키리에 뷰캐넌 양! 어서 와요. 오시기를 기다렸어요.”
“뷰캐넌 양, 그간 건강하셨나요?”
“더 아름다워지셨네요. 키리에 양! 어쩜, 붉은색이 너무 잘 어울리셔!”
“뷰캐넌 양! 저 아시죠? 너무 오랜만이에요!”
키리에가 자신을 향해 터지는 팡파르에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당장 나타니엘의 눈초리가 싸늘해졌다.
[그만.]
악단들이 급하게 소리를 멈췄고, 환영을 외치던 귀족들도 단박에 숨을 죽였다.
그들은 몇 초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러나 좀 더 소박하게 키리에를 환대했다.
모두가 웃고 있었다. 키리에만 빼고.
그런 그녀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키리에의 눈이 커졌다.
“국왕 전하…….”
“되었네. 일어나게.”
급하게 무릎을 굽히려는 키리에를 국왕이 만류했다.
“국정 운영이 바빠 자주 참석하진 못할 테지만, 종종 방문하겠네, 뷰캐넌 양.”
“…….”
“이든을 두고 갈 테니 필요하다면 이 아이와 이야기하게.”
국왕이 간단하게 말한 뒤, 담담한 낯으로 물러났다. 그녀의 뒤를 이어, 왕세자가 어색한 동작으로 나섰다.
“음…… 뷰캐넌 양!”
“저하…….”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지?’
키리에도 이든이 겪은 굴욕에 대해서는 전해 들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키리에가 머뭇거리자, 며칠 새에 늙은 염소처럼 변해 버린 이든이 치아를 전부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이렇게, 초대해 주어서, 매, 매우 영광이네! 그, 왕실과 할 이야기가 있다면, 언제든 오게!”
그는 단어 하나하나를 말할 때마다 나타니엘의 눈치를 보았다. 나타니엘 역시 이든을 마주하자 유독 냉기가 흘렀다.
“……편찮아 보이시는데, 일찍 들어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 어? 그래도 되겠나?”
죽은 염소 시체 같던 이든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나 지금껏 조용히 있던 나타니엘이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왕세자는 야회가 끝날 때까지 여기 있을 거야.]
소란에 묻혀도 이상하지 않을 크기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늘 바닥부터 천장까지를 꽉 채우고 공기를 가르는 기묘한 울림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도 같았다.
이든은 일순 산소 대신 두려움을 삼킨 듯했다가, 곧 잇몸까지 보이며 웃었다.
“그, 생각해 보니 전설경의 말이 맞네! 난 오늘 밤새고 싶은 기분이라네! 하하!”
그는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사라졌다.키리에는 비틀거리는 왕세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재밌어요?”
[아니.]
“그럼 이런 짓 그만 해요. 나 역시 하나도 재밌지 않으니까.”
[이런.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갑자기 즐거워지잖니.]
키리에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나타니엘은 그런 키리에를 보며 일견 권태로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소란스러운 것도 사실이야.]
그가 천천히 팔을 놓았다.
[즐기고 오도록.]
“네?”
키리에가 돌아봤을 때, 그곳에 이미 나타니엘은 없었다. 놀란 키리에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이 다가왔다.
“뷰캐넌 양! 뷰캐넌 양! 아이, 저희랑은 언제 이야기해 주시나요?”
“저랑도 이야기하시죠.”
“꿩 사냥을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요, 뷰캐넌 양!”
정신이 혼미할 정도의 인사말 속에서 가장 먼저 키리에를 낚아챈 것은 레이첼 힐이었다. 그녀는 금발 고수머리를 휘날리며 능청스럽게 키리에에게 팔짱을 꼈다.
“저희가 먼저예요! 저희는 면식이 있잖아요. 그렇죠? 저쪽으로 가요!”
레이첼이 까르르 웃으며 영애들 쪽으로 키리에를 이끌었다. 키리에는 어지러움 속에서 비틀거리며 그 손에 이끌려 자리에 앉았다. 다행히도 대부분 아는 얼굴들이었다.
‘그런데 왜 라우라랑 마리아가 없지? 캐스너 양도 없고.’
키리에가 의문을 가지는 걸 방해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영애들은 새된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뷰캐넌 양, 뷰캐넌 양! 이번 야회 너무 즐겁고 좋아요! 앞으로도 계속 열어 주세요!”
“아. 오랜만이에요, 하트 양, 야회라면…….”
“게다가 저, 봤어요! 저쪽 방에 산더미같이 보석이 쌓여 있더라고요!”
“어쩜! 너무 멋져요……. 방 안에서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다니!”
“게다가 전설경은 저렇게나 멋지고요!”
“토발트 양, 저는…….”
몰아치는 얘깃거리 속에서 키리에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자주 열어 주실 거죠? 호국경도 부르시나요? 너무 기대돼요!”
“그러고 보니 호국경께서는 오늘은 안 오셨네요?”
“로르 경은…….”
“꺄아! 로르 경이라니!”
새된 재잘거림이 귀를 때렸다. 키리에는 이명에 미간을 찌푸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분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건 뷰캐넌 양밖에 없어요! 너무 로맨틱해요!”
“호국경은 요즘 뷰캐넌의 사업을 돕느라 바쁘신 것 같았어요.”
“하긴, 키리에 양의 가문이니까요!”
“어쩜! 앞으로의 야회가 기대되네요!”
“…….”
어지러웠다. 토할 것 같았다. 화려한 샹들리에의 불빛이 두개골 안에서 터지는 기분이었다.
키리에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소파 팔걸이를 짚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칭찬 감사드려요. 하지만 저는 곧 저택에 돌아갈 거예요.”
그 순간이었다. 단숨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악단의 음악은 멈추지 않았지만,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대화를 멈추자 끔찍할 정도의 공백이 생겨났다.
눈은 웃지 않으면서 입은 뺨 끝까지 당겨 웃고 있는 기괴한 얼굴의 영애들이 키리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영애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귀족도 마찬가지였다.
키리에는 일순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을 정도의 공포를 느꼈다.
그런 키리에에게, 레이첼 힐이 미소짓는 목각 인형 같은 낯으로 속삭였다.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해요?”
[둄2 절갠 교환재공타싸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