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전조
일주일 뒤, 루비니아 캐스너는 정말로 뷰캐넌 백작가에 찾아왔다.
사실 키리에의 제안은 루비니아에게도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현재 사교계에서 뷰캐넌의 입지는 올드시우다드와 이덴홀 공작가보다 높았다.
그 일주일 사이 키리에는 제법 바빴다. 예전 같았으면 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그 대화’ 이후로 묘하게 나타니엘의 시선이 집요해졌다. 그리고 나타니엘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키리에 옆에 붙어 있는 일이 늘어났다.
덕분에 그녀는 따로 정신을 쏟을 일이 필요했고, 키리에가 연 작은 살롱은 그 몫을 다 해 주었다.
루비니아 캐스너는 살롱이 한창 진행되는 도중에, 뷰캐넌 백작가의 뒷문에 내렸다. 연한 주황색 구두에 드레스, 레이스와 꽃이 달린 보닛, 검은 점박이 무늬가 있는 흰 클로크까지 걸친 그녀는 사랑스러운 얼굴로 거친 인사를 내뱉었다.
“웃기지도 않아, 정말. 살롱을 연 날에 나를 초대해요? 어지간히 날 물 먹일 날을 고대했던 거군요, 당신?”
“일단 들어와요.”
“이 책이나 받고 꺼져 버려요. 제대로 찾았는지는 나도 모르고, 일주일 이내로 필사해서 돌려줘요.”
루비니아가 던지듯이 키리에에게 책을 건넸다. 역시 거칠다. 그러나 이미 예상한 바였다.
키리에가 박수를 두 번 쳤다.
“붙잡아.”
“예, 아가씨.”
“뭣……!”
키리에의 명을 받은 나이 많고 힘센 여자 하인들이 루비니아의 팔을 붙잡았다.
“뭐, 뭐, 뭐예요?! 죽이지 않겠다면서요! 이, 이거 안 놔?!”
키리에가 방긋 웃었다.
“이런 방식을 쓰고 싶진 않았지만, 우리 성격은 극과 극이잖아요? 이 정도는 해 줘야 당신이 내 말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야!”
“반말하지 말아요. 내가 당신보다 높은 사람이랍니다. 가요, 캐스너 양.”
“너, 너! 너 내가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사, 사, 사람 살려! 전설경이 사람을 죽여요!”
기세등등하던 루비니아가 다급하게 외치자, 키리에가 싱긋 미소지었다.
“해치지 않아요. 밑이 꺼지는 발판도 없고, 독이 발린 찻잔도 없답니다.”
“그거보다 심하잖아!”
“붙잡지 않겠다고는 안 했거든요.”
“꺄악!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하인들은 루비니아 캐스너를 1층의 작은 방으로 데리고 갔다.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나자, 당황을 숨기지 못한 루비니아가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다, 당장 문 열지 못해?!”
키리에는 방 안에 함께 들어가 앉았다. 그녀는 차분히 차를 우려 루비니아에게 따라 주었다.
“들어요. 마리아가 준 건데, 품질이 아주 좋아요.”
“무슨 속셈이에요, 대체!”
“본론만 간단히? 어쩜. 내 취향이기도 해라.”
키리에가 키득거렸다. 그녀는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를 따라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린 루비니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 저걸 보여 주려고?”
창 너머에서는 살롱에 초대받은 대여섯 명의 영애들이 참새처럼 지저귀고 있었다. 전부, 마리아가 알려 준 ‘루비니아 캐스너와 친한 영애들’이었다.
루비니아가 눈을 크게 뜨고서 이죽거렸다.
“키리에 뷰캐넌 양. 이게 무슨 파벌 놀이라고 생각하기라도 해요? 쟤네들이 당신 살롱에 갔다고 해서 내가 타격이라도 받을 것 같아요?”
“그런 게 아니에요. 다만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을 뿐이죠. 왜 루비니아 캐스너 양이 나를 그렇게 싫어할까?”
“언제까지 그 소리 지껄일 거예요?! 당신이 나를 무시했잖아요!”
루비니아가 성난 침팬지처럼 팔을 휘두르며 말했다.
“그런 적 없어요. 없다고 생각했고, 다시 생각해 봐도 없는 게 맞아요.”
“지금 사람 앞에 두고 장난쳐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어쩌면 당신은 내가 배려라고 생각했던 걸 무시라고 받아들인 게 아닐까?”
“뭐라고요? 지금 내가 속이 좁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뇨.”
키리에가 엄격하게 말했다.
“우리 사이에 아주 고약한 무언가가 끼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길 하고 싶은 거죠.”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없었고, 루비니아는 그런 키리에를 보고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무슨 말이에요?”
“캐스너 남작가가 주최한 무도회라고 했죠, 루비니아 양.”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요, 그리고 맞아요. 그때 당신이 날 무시했고, 난, 난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치가 떨려요.”
농담이 아닌지 루비니아의 눈에 물기가 서렸다. 키리에는 손수건보단 진실을 전하기로 했다.
“그 무도회에서 내가 한 행동을 생각해 봤어요. 그리고, 내가 이제부터 할 말을 너무 고깝게 듣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듣고 싶지 않아요!”
“캐스너 남작가는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고, 당신도 셀 아렐라노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았죠. 우리의 오해는 거기서 발생한 게 아닐까 싶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루비니아 캐스너가 벼락같이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이 빌어먹을 여자 같으니! 당신 정말 끔찍해! 귀족이면 다야? 7대 가문이면 다냐고! 내가, 내가 어떤 심정으로 그 무도회를 열었는데!”
“충분히 모욕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라는 거 알아요. 나 역시 내키지 않는 말이에요. 그래도 들어요, 루비니아 캐스너 양.”
루비니아는 울음을 참는 듯 입술을 꾹 깨문 채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키리에는 한숨을 내쉰 뒤, 문고리를 잡고 흔드는 루비니아를 부드럽게 원래 자리로 잡아 이끌었다.
“이제부턴 당신 친구들이 이야기할 거예요.”
키리에는 조용히 방을 나가, 살롱이 진행되고 있는 발코니로 향했다.
“너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여러분.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키리에가 그린 듯 아름답게 미소지었다. 지금부터는 가면 쓴 꽃들의 영역이다.
“너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여러분.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키리에 뷰캐넌의 목소리였다. 루비니아 캐스너는 멍하니 앉아 그 목소리를 들었다.
“어머, 아니에요, 뷰캐넌 양! 볼일은 끝나셨어요?”
“덕분에요.”
“저희는 초대해 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기쁘니까, 절대 신경 쓰지 마세요? 아셨죠?”
“맞아요, 저희가 얼마나 뷰캐넌 양과 친해지고 싶었는데요!”
“캐스너 양과 자주 같이 다니니까 저희는 멀리하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그렇게 말해 줘서 나야말로 고맙네요. 기뻐요. 같이 차를 마실까요?”
그 모든 대화를 들으며 루비니아는 코웃음을 쳤다.
망할 여자가 맞지만, 빌어먹을 정도로 귀족적이고 우아한 여자였다. 화제 전환에도 능숙하고 유행이나 시사에도 눈이 밝았다.
‘무도회에서 그런 일만 있지 않았어도…….’
어쩌면 그녀를 따랐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한 루비니아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저렇게 고상한 척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때마침 키리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무도회라고 하면, 분명 캐스너 남작가에서도 무도회를 열었었죠.”
루비니아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녀가 제일 떠올리기 싫은 순간이었다. 점점 일그러지는 얼굴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영애들의 이야기가 멎었다.
“아, 그거요?”
“킥…….”
영애들이 애써 웃음을 참느라 억눌린 웃음소리를 냈다.
“아, 물론 저희 다 갔죠, 거기에.”
“가긴 갔죠?”
“아, 생각하기도 싫다니까요.”
주먹을 쥔 채 몸을 수그리고 있던 루비니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은근슬쩍 서로 교환하는 시선, 조롱이 담긴 ‘알지?’하는 말투.
루비니아가 사태를 인식하기도 전에, 여러 사람의 말이 창을 통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솔직히 말해서 최악이었죠.”
“제가 겪어본 가장 끔찍한 무도회 중에서도 1위예요!”
“뷰캐넌 양이 아니었다면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싫어요.”
“저는 무시당한 기분까지 들었다니까요.”
“맞아요, 염치도 없어! 신흥 귀족이라 그런지 품위도 없죠!”
루비니아는 저도 모르게 의자를 끌고 소리가 더 잘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방금 그 말을 한 버베라 하트는, 루비니아가 키리에의 무도함에 대해 욕할 때 앞장서서 맞장구를 쳐준 친구였다.
바로 옆에서 루비니아가 듣고 있는 줄도 모르고, 영애들은 재잘재잘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람도 적었잖아요. 알고 보니 인원수에 딱 맞게 초대장을 돌렸다지 뭐예요?”
“저는 못 갔는데, 그게 사실이에요? 어머, 대체 무슨 생각이었대요?”
“그러니까요. 무도회 여는 법도 모르면서 무도회를 열다니, 말이나 돼요?”
“괜히 각 가문이 무도회를 적게 여는 게 아닌데 말이에요!”
“맞아요, 1/3 이상에게 더 돌리는 게 기본이잖아요. 그나마 포트듀케인 양과 뷰캐넌 양이 오신다는 이야기가 돌아서 안 가려던 사람들도 참여하긴 했죠.”
루비니아가 굴욕감에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나락으로 굴러떨어진 것 같은 자존심에 잇새로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꾀꼬리의 노랫소리 같은 이야기는 그를 모른 채 계속되었다.
“그런데 뷰캐넌 양, 초대장 받으셨어요?”
“아뇨, 면식이 없어서 초대장은 다른 분께 양도받은 것을 썼어요.”
“세상에, 그런 거면 캐스너 양은 정말 복 받았네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그때 뷰캐넌 양, 편찮은 연기를 하셨잖아요. 그쵸?”
“들켰나요?”
“아이, 누가 그걸 몰라요!”
영애들이 동시에 까르르 웃었다. 천사의 노랫말 같은 사근사근한 말들이 키리에 뷰캐넌의 머리 위에 얹혔다.
“덕분에 춤을 적게 춰도 되어서 좋았어요. 감사해요, 정말!”
“천만에요.”
“이제야 말하는 건데, 마룻바닥이 그게 뭐래요, 대체? 뷰캐넌 양의 상태가 걱정되어서 옆에 있어야 한다고 둘러대면 되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글쎄, 마룻바닥 손질을 안 했나 보더라고요! 광도 안 나고, 춤추기에도 어찌나 힘들던지……. 구두가 끌리더라니까요!”
“애초에 손질법을 모르는 것 같던데요? 볼룸을 따로 둘 정도의 가문이 아니라 그런가 봐요.”
“신흥 귀족은 이래서…….”
봇물 터지듯이 불만이 터져 나왔다. 조롱의 강도는 점점 높아졌다.
“거기다 답례품도 없는 건 좀 심하죠.”
“아, 하트 양! 저 쓰러질 것 같아요, 내가 왜 그걸 잊고 있었담? 맞아요, 그게 제일 나빴어요!”
“그때 뷰캐넌 양이 ‘요즘 너무 사치스러운 무도회가 많아졌다.’라고 한마디 해 주셔서 그나마……?”
“체면 살려 준 거죠.”
“답례품이 필수가 아니라 생각하더라고요? 본인은 다 받아 가면서 말이에요.”
“그걸 모른다는 게 문제예요. 물론 귀여운 분이지만, 귀족 실격이에요.”
그 이상 이어지는 말은 거의 루비니아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루비니아는 몇 년 전 수도에 올라왔다. 꿈 많은 시골 귀족이었고, 귀족이래도 지방 귀족은 셀 아렐라노의 귀족처럼 고상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일도 했다. 거친 손 때문에 루비니아는 늘 장갑을 끼고 다녔다. 무도회는 열어 본 적도 없다.
그런데 어쩌다 캐스너 남작가가 손댄 사업이 의외로 큰 성과를 거둬, 무도회란 걸 처음 열었다. 당연하지만, 감히 7대 명문가에 초대장을 돌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도 루비니아는 기뻤다.
‘드디어 나도 무도회를 여는 거야! 권세 있는 집안만 열 수 있다는 무도회를!’
그런데 그곳에 초대하지도 않은 키리에 뷰캐넌과 라우라 포트듀케인이 왔다.
‘초대받지는 않았지만, 와 버렸어요. 미안해요.’
키리에 뷰캐넌은 그렇게 말했다. 루비니아는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다.
‘한미한 남작가의 무도회 따위 주인 허락 없이 제멋대로 참석해도 된다는 거야?’
안다. 분명 모자란 부분이 많은 무도회였다. 장식은 지나치게 화려함을 강조해서 우아하지 못했고, 조잡한 데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 수가 적었고, 춤도 잘 추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루비니아는 호스트로서 노력했다. 정신없이 바빴다.
그런 와중에 키리에 뷰캐넌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캐스너 양, 잠깐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네? 네! 얼마든지요!’
키리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답례품이……?’
‘네?’
당황스러웠다. 답례품을 달라는 걸까? 답례품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필수는 아니라고 들었다. 그런 자신을 보고 키리에는 눈을 깜빡이다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캐스너 양.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요즘은 많이들 볼룸을 대여해서 무도회를 열기도 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가 버렸다.
그리고 난데없이 몸이 좋지 않다며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더 춤을 추지 않았고, 신사, 숙녀 할 것 없이 키리에 뷰캐넌 근처에서 그녀를 걱정하기에 바빴다. 텅 빈 볼룸을 바라보며 루비니아는 망연자실했다.
키리에 뷰캐넌은 이목을 즐기는 것 같았고, 계속 그렇게 앓는 연기를 하다가, 자신에게 인사도 없이 무도회를 떠나 버렸다. 그녀의 뒤를 이어 다른 영애들도 똑같이 했다.
최악의 무도회. 최악의 경험.
‘그거, 그대를 무시하는 거군요.’
‘저를…… 무시했다고요?’
‘응, 그래요. 다른 데에는 이야기 안 하는 게 좋겠군요. 그 영애가 좀 고상 떠는 걸 잘해서, 사람들이 편 안 들어줄 거예요.’
그렇게 들었는데.
‘그게 다 사실이 아니었다고?’
어느새 살롱이 끝났는지 키리에 뷰캐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루비니아는 창가 근처 의자에 앉아 허리를 수그린 채로 목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비꽃 색의 여자가 차분하고 고요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비니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을 초대한 적 없어요.”
“초대장은 양도할 수 있고, 그건 실례가 아니에요.”
“인원을, 더 많이 초대해야 한다는 것, 몰랐어요.”
“그래서 참석하기로 했어요. 뷰캐넌에 포트듀케인이면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참석할 테니까.”
루비니아가 분노와 슬픔이 뒤엉킨 얼굴로 키리에를 응시했다. 키리에는 처음으로 그녀가 지쳐 보인다고 생각했다.
“나한테 답례품에 대해 물었잖아요. 답례품은, 필수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답례품은 엄밀히 따지자면 필수가 아니지만 하지 않으면 뒷말이 나와요. 부채나 조그마한 꽃다발, 작은 종, 모형 깃발이 주를 이루고 재료는 공단, 거북 껍질, 상아, 백단이 많이 쓰이죠.”
“그 이후에 ‘요즘 무도회는 너무 사치스럽다.’라고 한 건, 그건 내 사치스럽지 않은 내 무도회를 반어법으로 욕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른 귀족들에게 고작 답례품이 없다고 투덜대지 말라는, 경고성 의미로 한 말이었어요. 욕이 아니라.”
루비니아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거칠게 외쳤다.
“마룻바닥 관리를 대체 어떻게 하는 건데요!”
“하인을 고용해 한 발에는 브러쉬, 한 발에는 슬리퍼를 신게 해서 종일 춤추게 하면 돼요. 그걸 하지 않으면 바닥이 거칠어서 춤추기에 나쁘고 걸리적거리게 돼요.”
“그런 방법을 왜 아무도 안 알려 줘요!”
“마루 관리도 가문마다의 비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춤추기 좋은 볼룸은 인기가 높고, 대여도 해 줄 수 있어서 수익을 올릴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 무도회장의 마룻바닥이 그 정도로 형편없었다는 거예요, 지금?”
“네.”
루비니아가 헛웃음 쳤다. 키리에는 그녀의 자조를 지켜보며 담담히 말했다.
“평소보다 춤이 어설프게 보일 텐데, 그걸 좋아할 손님은 없죠. 그래서 아픈 척을 했어요.”
“……이목을 끌고 싶었던 게 아니라요?”
“그런 짓 안 해도 나는 이목을 끌어요. 오히려 사람들은 나를 핑계 댈 수 있고, 당신도 무도회장 준비가 어설펐다는 욕을 덜 들을 수 있었겠죠.”
“내게, 내게 볼룸을 많이들 빌린다고 했잖아요. 차라리 빌리지 왜 이딴 무도회를 여냐는 거 아니었어요?”
“혹시 볼룸을 빌리는 게 부끄러운 거라면 요즘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해 주고 싶었어요. 그런 볼룸은 관리도 잘 되어 있어서 편하답니다.”
키리에의 말이 끝나자마자 루비니아가 득달같이 외쳤다.
“나한테 인사도 안 하고 무도회에서 가 버렸잖아요!”
“원래 무도회 중간에는 방해하지 않도록 말없이 뜨는 것이 예의예요. 그런 적 없나요?”
“항상 에스코트 받으면서 나갔으니까 에스코트한 사람이 미리 이야기한 줄 알았어요!”
두 사람의 말이 멈췄다. 키리에는 루비니아가 굉장히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루비니아는 다시 몸을 수그리더니, 주먹을 꾹 쥐고는 펄쩍 일어나 외쳤다.
“그걸 왜 그렇게 간접적으로 표현하냐고요!”
“들어본 적 없나요? 없어도 있는 것처럼. 있다면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아연한 루비니아를 향해 키리에가 턱을 들고 말했다.
“그게 귀족이에요, 루비니아 캐스너 양.”
키리에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루비니아를 담담하게 응시했다.
“우리는 약점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해요. 당신도 중앙 정계에 들어온 이상 느끼고 있을 텐데요.”
“그렇다고, 그렇다고 그 모든 걸 전혀 언질조차 주지 않고……!”
“원래 그래요. 대놓고 무언가를 지적하거나 나무라지 않죠. ‘미리 알고 있지 않았던’ 상대의 잘못으로 돌리는 경향이 커요.”
“그게 옳아요? 그게 맞다고요? 그럼 난 지금까지 내가 친구라고 여겼던 사람들한테, 뒤에서는 열심히 헐뜯기고 있었단 뜻이잖아요!”
“그렇게 되겠네요. 나도 설마 내 딴에는 배려라고 생각해서 했던 일들을 당신이 무시당했다고 오해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루비니아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분노, 슬픔. 그 뒤로 자괴감과 허망함이 몰려들었다.
“남들 다 아는 당신의 배려를 나만 몰랐다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럼, 그럼 난 지금까지 뭐에 화내고 있었던 거예요……!”
키리에는 잠시 입을 닫고 루비니아를 바라보았다.
“당신 스스로의 열등감이요.”
루비니아는 헉, 하고 숨을 내쉬었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눈가에는 눈물이 고였다.
“……이럴 때 에둘러서 말하는 게 귀족 아니에요?”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줄까요?”
이제껏 무표정으로 루비니아를 응시하던 키리에의 얼굴에 눈꽃같이 아름다운 미소가 입혀졌다.
“아, 캐스너 양.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때때로 사람은 실수를 저지르지만, 어쩌면 잘못된 건 당신이 아니라 이 세상일지도 몰라요!”
“…….”
“됐나요?”
루비니아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헛웃음을 지었다.
“……짜증 나. 당신 진짜 나랑 상극이에요.”
키리에가 빙긋 웃었다.
“난 당신 어머니도, 친구도, 가족도 아니에요. 그래서 지금까지 적극적으로 당신에게 나를 해명하지 않았던 거고요.”
“근데 왜 이런 짓을 해요? 무슨 이득이 있다고?”
“음.”
키리에가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드렸다. 원래의 그녀였다면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녀는 자신이 나타니엘에게 한 말을 본인 역시 지키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억울한 게 있으면 풀어내길 바랐다. 화내고 싶은 일이 있으면 화내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하고.
그녀는 빙긋 웃고서 손을 내렸다.
“그냥요.”
“…….”
루비니아가 물기 어린 멍한 눈으로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채 지워지지 않은 증오는 갈 곳은 잃은 것 같았다.
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자신의 발끝을 바라보다가, 팔을 늘어뜨렸다가, 그 반동을 이용해 손등으로 눈가를 가렸다.
“……배려해 준 걸 그런 식으로 되돌려받아서 억울해요?”
“짜증은 났어요.”
“왕세자비…… 뺏겼잖아요.”
“가져가요. 별로 필요하지 않아요.”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나는, 나는 일부러 당신 앞에서 더 이든과…….”
“그만, 캐스너 양.”
“…….”
“약점 따윈 숨겨 버려요. 그게 귀족이에요.”
루비니아가 어깨를 들썩이며 허탈한 웃음을 몇 번 지었다. 그녀는 곧 고개를 내리고 음울한 녹색 눈으로 키리에를 보았다.
“……일주일. 다시 시간을 줘요.”
키리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비니아는 들고 있던 왕실 서고의 책을 품에 안고서 키리에의 발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원하는 걸 정확히 말해요.”
키리에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전쟁 시대의 이야기. 전설경과 관련된 거면 좋겠어요. 업적 말고, 건국 이후 이야기요. 전설경이 죽을 때쯤 오레윈브리지가 어땠냐 같은 거면 더 좋겠어요.”
“오레윈브리지를 적으로 돌릴 셈이에요?”
“어쩜. 무서운 말씀을 하네요.”
“하, 저쪽한테 당신은 이미 적인 것 같으니 상관없겠죠.”
“그 말은?”
루비니아가 천천히 키리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키리에는 문에서 비켜 주었고, 루비니아는 한 걸음 한 걸음을 힘겹게 옮겼다.
“당신의 행동에 대해 가장 처음 상담했던 사람이 그렇게 말했거든요. ‘그거, 그대를 무시하는 거군요.’하고.”
말투에서부터 누군지 알 것 같았지만, 키리에는 확신을 위해 물었다.
“그게 누구죠?”
루비니아가 키리에의 지척에서 멈췄다. 뭔가를 각오한 사람처럼 앞을 바라보던 루비니아가 눈알만 움직여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줄리아 오레윈브리지.”
***
루비니아 캐스너는 일을 잘했다. 과연 왕세자비가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해서 그걸 이룰 정도의 여자.
「어떤 역사가의 기록 같아요. 금서였지만. 이게 내가 알아낼 수 있는 최대의 정보예요. 일주일 안에 돌려줘요.」
루비니아는 편지와 함께 여러 책을 보내왔다. 책이라기보다 종이를 엮은 것에 가까웠으며, 정확하게 키리에가 원하던 정보였다. 나타니엘은 그것들을 들어 종잇장을 훌훌 넘기며 중얼거렸다.
[죽이지 않길 잘했는걸.]
“…….”
키리에는 묵묵히 소파에 앉아 사초를 팔랑팔랑 넘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나타니엘이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읽을 셈이니?]
“안 되나요? 어차피 정보는 공유해야 하잖아요.”
푸른 눈에 작은 파문이 인 듯했다. 그는 곧 고개를 돌렸다.
[뜻대로 해.]
***
「387년 12월 12일.
날씨, 겨울.
이전의 전쟁에서 상처를 입은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 대신 겨울의 왕이 나섰다. 병사들은 두려워하며 진지 안으로 숨었다.」
「387년 12월 15일.
날씨, 겨울.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와 겨울의 왕이 말다툼했다.
‘좀 더 확실하게 이기게 해 줘!’
발라브리가가 말했다.
‘후회하지 않겠니?’
겨울의 왕이 속삭였다.」
「387년 12월 31일.
날씨, 겨울. 눈이 너무 많이 내렸다. 적이 눈에 빠져 죽었다.」
「388년 1월 1일.
날씨, 겨울. 눈이 내렸다. 적이 눈에 빠져 죽었다.」
「388년 1월 3일.
날씨, 겨울. 적이 눈에 빠져 죽었다.」
「388년 1월 15일.
날씨, 겨울. 겨울의 왕은 기묘하다. 병사 중에서 그를 추종하는 사람이 늘었다.」
「388년 3월 9일.
날씨, 겨울. 발라브리가의 막사 근처에서 그들의 말을 엿들었다.
‘좀 더 눈이 와야 해. 신성성을 돋보여야 할 것 같아.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같은 느낌으로.’
발라브리가가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해, 발.’
로르 레쇼가 말했다.
‘충분하지 않아.’
발라브리가가 말했다.」
「388년 4월 11일.
날씨, 겨울.
발라브리가의 막사 근처에서 다시 그들의 말을 엿들었다. 겨울의 왕은 종말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자리에 없었다.
‘사람들이 나타니엘을 너무 좋아해. 그는 미쳤는데.’
‘그를 미치게 만든 건 우리일지도 모른다.’
‘너는 너무 물러. 그는 인간도 아니잖아. 이상해. 왜 우리를 돕는 거지?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밤에 겨울의 왕이 돌아왔다. 그는 언 손으로 펜을 움직이는 나를 보고는 손을 녹여 주었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숙이기도 전에 막사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감사도 동경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388년 6월 1일.
날씨, 겨울. 눈이 녹지 않는다.
발라브리가는 수도를 세우고 셀 아렐라노라 명했으며, 트레베레움을 건국했다. 그리고 겨울의 왕에게 전설경의 칭호를, 로르 레쇼에게 호국경의 칭호를 내렸다.
병사 중 일부가 전쟁에서 발라브리가의 역할이 뭐였느냐며 떠들다가 다음날 실종되었다.」
「388년 6월 3일.
날씨, 겨울. 발라브리가가 연구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가 나를 연구실로 초대했을 때, 나는 그가 나를 죽이려 하는 줄 알았다.
발라브리가는 위험한 마법을 연구 중이었다.
‘나는 그 정체 모를 놈을 이기고야 말겠어. 네가 그 증인이 되는 거다.’
발라브리가가 말했다.」
「388년 6월 6일.
날씨, 겨울. 나는 전설경에게 찾아갔다. 그는 항상 높은 곳, 사람 없는 곳, 고요한 곳, 하늘에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가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내가 말했다. 전설경은 미소지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의 존재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는 누굴까? 아니, 무엇일까?」
「388년 9월 19일.
날씨, 겨울. 이 기록은 왕이 보아선 안 된다. 페이지를 두 장 겹쳐 그 사이에 기록하기로 했다.
발라브리가가 미리 준비했던 군대와 마법을 이끌고 전설경에게 찾아갔다. 호국경은 지방을 순회 중이었다. 건국을 함께 했던 일곱 가문의 가주들이 함께했다. 나는 따라가지 못했다.」
「388년 9월 20일.
날씨, 눈이 녹기 시작했다. 발라브리가와 로르 레쇼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죽지 않았어! 죽지 않았다고!’
‘발. 그는 우리를 도왔다.’
‘그런 미친놈을 어떻게 믿어!’
‘발!’
‘숨기자. 숨기는 거야. 얼음 속에서 잠들었으니 눈 속에 파묻어 버리자. 그래, 헤르큘라가 좋겠어. 거긴 사람이 적으니까…….’
‘발, 제발 그만해.’
‘너도 공범이야.’」
「388년 10월 1일.
날씨, 눈이 녹았다. 늦가을이었다. 나는 다시 발라브리가의 대화를 엿들었다. 내가 요즘 쓰고 있는 사초가 그의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나를 자주 곁에 두었다.
‘인간이 아닌 게 사라지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
‘발.’
‘금제도 쳤어. 그놈이 잠든 곳 근처에 가는 사람의 존재는 소멸시킬 거야. 모두 그놈을 잊어버리면 좋겠어. 기록에서나 존재하라지.’
호국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발라브리가는 어린아이처럼 신이 났다.
‘명색이 전설경이니 그놈에게도 땅 조금은 나눠 줘야겠군. 어차피 받진 못할 테지만. 하하, 레쇼, 고마워, 내 소꿉친구! 네 덕이야!’」
「388년 12월 2일.
날씨, 눈이 왔다. 눈만 왔다. 발라브리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매일 겨울의 왕이 다시 일어나 자신에게 복수하러 오는 악몽을 꾸는 듯했다.
그는 외쳤다.
‘그놈이 죽지 않고 잠든 게 전부 뷰캐넌의 짓이었어……. 그 자식을 죽여야 해…….’
뷰캐넌 공작가는 백작가로 격하되었다. 7대 가문의 명성 탓에 아예 내치지는 못한 것 같았다. 나는 뷰캐넌에 몸을 의탁하기로 했다. 발라브리가의 광증은 도를 넘어섰다.」
모든 기록을 다 읽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키리에는 조심스럽게 책을 덮었다. 그녀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가만히 속삭였다.
“내가 당신을 깨운 게 우연이 아니었던 거군요.”
여림심연에 이른 며칠이었다.
전설경 나타니엘은 여전히 뷰캐넌 저택에서 나오지 않았다. 가끔 줄리아 공주가 찾아갈 때만 만나 주는 듯했다.
호국경 로르 레쇼는 대외 활동을 늘렸다. 그는 무도회에서 절대 춤을 추지 않았으나, 키리에 뷰캐넌이 참석할 경우는 달랐다. 키리에에 한해서 호국경은 ‘반드시’라고 할 만큼 그녀를 독점했다.
키리에가 단단한 손을 사무적으로 맞잡은 채 조용히 물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있습니다.〕
레쇼는 여전히 무언가를 겁내고 있었다.
키리에는 얌전히 사방의 동경을 받아냈다.
전설경이 없는 자리에서만 춤을 추며 무언가를 속삭이는 아름다운 남녀의 모습은 이야깃거리가 되기에 좋았다. 왕세자의 약혼녀, 파혼당한 석녀, 거기서 다시 전설경의 그녀. 더해서 호국경의 존중.
이 극적인 이야기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며, 키리에 뷰캐넌은 말해 주고 싶었다. 자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저 키리에 뷰캐넌일 뿐이라고.
그러나 그녀는 침묵했다. 어차피 들리지 않을 것을 아니까.
***
여느 때와 같은 무도회가 끝난 날이었다. 세자르는 굳이 늦게까지 키리에를 기다려 그녀를 서재에 앉혔다.
“키리에. 둘 중 한쪽과 혼인해라.”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뻔한 말씀을 하시네요, 아버지.”
키리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세자르의 말을 받아쳤다. 두 쌍의 보라색 눈이 허공에서 대립각을 세웠다.
“네 빈정거림에 장단 맞춰 줄 생각 없다. 전설경이래도 좋고, 호국경이래도 좋다. 혼인해.”
세자르의 제비꽃 색 눈은 일확천금을 발견한 사람처럼 번들거렸다.
‘내 눈도 저렇게 욕망의 덩어리처럼 역겹게 보일까?’
키리에는 불편한 마음으로 눈을 깜빡였다.
“전설경은 알겠는데, 호국경은 왜 나오죠?”
“멍청한 소리 하지 말아라. 난 널 어리석게 기르지 않았어. 척 봐도 전설경보다는 호국경이 말이 통하는 상대이지 않으냐? 우리는 전설경에 대한 억제력이 필요해.”
“아아.”
주변은 호국경이 전설경을 말릴 수 없다는 걸 모르고 있다. 그러니 ‘어느 한쪽이라도 좋으니’ 소리가 나오는 거다.
‘정작 그 호국경은 전설경이 무슨 일이라도 벌일까 봐 조마조마하고 있는데 말이야.’
그때, 세자르의 손이 불쑥 뻗어 나와 키리에의 손을 움켜쥐려 했다.
“뭐하시는 거예요!”
키리에는 기겁하며 손을 빼냈고, 세자르는 무안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너도 다 컸고, 어미 없이 널 기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내 처지를 이해한다면 날 돕거라. 기왕이면 전설경과 혼인하고, 호국경은 애인으로 두는 게 제일 좋겠다.”
“하. 벌써 노인성 질환이라도 오셨나 봐요. 우리 뷰캐넌을 어쩐다?”
“키리에. 왕실에서 우리를 공작가로 승격해 주기로 했다. 네가 잘만 하면 말이다.”
“축하드려요. 드디어 염원하던 꿈을 이루셨네요? 조건이 뭐든 간에 전 들어드릴 생각 없지만요.”
“키리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키리에를 세자르가 붙잡았다. 그는 노성을 내질렀다.
“점점 신흥 귀족들이 치고 올라오고 있어! 네가 이 가문을 부흥시켜야 해!”
“딸의 행복보다 가문의 부흥이 중요하다는 ‘아비’로서의 마음가짐 똑똑히 전해 들었습니다.”
“뷰캐넌의 이름 없이 네가 어디 가서 지금처럼 고개 들고 다닐 수 있을 성싶으냐!”
세자르의 노성에 키리에가 오연하게 턱을 들었다.
“뷰캐넌이 아니었어도 저는 고개 들고 다녔을 거예요. 다들 그러고 다니고 있고요. 세상에 7대 가문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 치들 수준으로 굴러떨어져도 된다는 말이냐!”
“그 치들이 뭔데요? 어쩌다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가 건국할 때 옆에서 도왔다는 것 빼고, 대체 어떤 점이 그렇게나 특별한지 좀 알려 주시겠어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난 네게 최고급만 투자했어. 너도 네 주변을 둘러싼 것들이 고급인 것에 익숙해져 있지. 네가 그 수준의 격하를 참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첫째, 제게는 1200억짜리 영지가 있고요. 둘째, 모르시는 것 같아 말씀드리는데, 모든 게 최고급은 아니었어요.”
“뭐?”
“가장 중요한 게 최하급이었거든요. 그래서 별문제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키리에가 말을 마치고 세자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뒤늦게 의미를 이해한 세자르가 책을 내던지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재빨리 서재에서 빠져나왔다.
어지러워 오는 머리를 붙잡고 문을 닫은 그녀의 눈앞에 검은 구두코가 보였다.
“……?”
키리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올라가는 시선을 따라 긴 다리, 검은 예복, 검은 지팡이, 퍼플리쉬 블루의 보석이 박힌 볼로 타이가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는 나타니엘의 얼굴이 밤하늘의 정점에 선 달처럼 우아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기시감이 뒤늦게 찾아왔다.
키리에는 서둘러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전과 똑같이.
그때에는 정적이 오갔고, 세자르의 물건 던지는 소리가 그 정적을 깼고, 자신은 도망쳤고…….
‘이번엔?’
키리에가 초조하게 고개를 돌렸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타니엘은 달랐다. 그는 전처럼 아무 말 없이 서 있지 않았다. 나타니엘이 기다렸다는 듯이 예의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손을 내밀었다.
“나타니엘……?”
키리에가 조심스럽게, 나타니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눈은 낮은 곳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정말은 어디도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옅은 미소, 차갑고 아름다운 눈매.
키리에의 심장이 차가워지고, 동시에 뜨거워졌다. 키리에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나타니엘이 느리게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키리에.]
나타니엘이 낮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키리에가 천천히 얼굴을 가렸던 팔을 내렸다.
‘꼴사나운 얼굴일 텐데.’
키리에의 걱정과 달리 그는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나긋한 목소리로 한 번 더 속삭였다.
[이리 와.]
그의 목소리는 마법처럼 심장을 충동질한다. 키리에는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았다.
손을 잡은 두 사람은, 그대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공기마저 느슨해진 느낌이었다. 세자르의 고함이 있던 서재가 벌써 아주 먼 풍경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키리에와 나타니엘은 저택 밖으로 나와, 정원을 걸었다. 밖은 춥지 않았다. 키리에는 메마른 덤불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나타니엘.”
대답 대신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방에서 당신을 노리고 있어요. 특히 국왕은 아마 당신과 줄리아가 결혼하길 바랄 거예요.”
[그렇구나.]
“그럴 생각…… 있나요?”
나타니엘이 걸음을 멈췄다. 그는 습기 낀 낡은 청동 거울에 비치는 얼굴처럼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키리에를 내려다보았다.
[없어.]
“그렇겠죠.”
키리에가 시선을 의미 없이 주변으로 돌리며 건조하게 웃었다.
그녀는 맞잡은 손을 한 번, 그의 구두코를 한 번, 초승달이 한 조각 걸린 것처럼 정적인 나타니엘의 입술 부근을 한 번 눈으로 훑은 뒤 고개를 들었다.
“오레윈브리지는 억제력을 원하죠. 그게 표면적일지라도요. 그러니까, 일단 당신이 왕가에 충성 비슷한 시늉이라도 하면, 더는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라요.”
키리에의 자신감은 말하면서 시시각각 줄어들었다.
정말 그럴까?
게다가 이런 초월적인 존재에게 정치적인 사정을 들먹이며 결혼이니 뭐니 운운하는 건, 지나치게 하찮게 들린다.
다시 시선이 내려갔다. 키리에는 약간은 초조하게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래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온화했다. 그녀는 미약한 만용을 시도했다.
“만약 줄리아 공주가 아니라, 저라면 어떠세요?”
나타니엘은 갑자기 다시 걷기 시작했다.
“…….”
키리에는 속에서 울컥하는 무언가를 꼭꼭 눌러 담고는, 반쯤은 당황하며 그의 옆모습을 보았다.
푸른 눈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가슴이 턱 막힐 정도로 공허한 모습이었다. 강인한 정신력으로 감당해 온 세월의 무게가 엿보이자, 키리에의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득했다. 손을 잡고 있는데도 그가 아주 먼 곳, 과거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언젠가 보았던 고고한 모양새 그대로, 나타니엘이 속삭였다.
[너는 너무 일찍 죽어.]
키리에는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았다.
「얘기를 좀 하고 싶군요. 내 궁으로 와요. -줄리아 오레윈브리지」
키리에는 줄리아의 편지를 받고 셀로 향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줄리아가 자리에 앉자마자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재미 좋아요?”
난데없고, 또 다소 무례하게 들리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키리에는 준비된 미소를 지었다.
“어떤 재미를 말씀하시나요?”
그녀를 흘낏 넘겨다 본 줄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전설경이요.”
“그리 재밌는 위치는 아니에요.”
“하, 후후. 그래요? 배부른 소리로 들리는군요.”
내용만 듣자면 빈정거림 같았으나, 말하는 줄리아의 얼굴에는 어떤 냉소도 없었다. 그녀는 황금색 벨벳으로 두른 긴 소파에 누워 다리를 까딱거렸다.
“그대, 전설경과 언젠가는 혼인하겠군요?”
“아닙니다.”
“아니라고? 우습군요.”
키리에는 줄리아의 민날 같은 말에도 초연히 미소를 보였다.
공격적인 말을 공격성 없는 태도로 말해 상대를 아리송하게 만드는 것은 줄리아 오레윈브리지의 방식. 루비니아 캐스너가 누구에게서 영향받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루비니아를 떠올린 키리에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루비니아 양은 근본적으로 악한 사람은 아니야. 야망이 넘칠 뿐…….’
어째서 루비니아를 그런 식으로 부추겼는지는 키리에도 궁금했다. 그러나 그녀는 루비니아의 일을 묻어 두기로 결심했다. 굳이 또 누군가와 싸울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물론 키리에는 레쇼가 말한 것처럼 전설경과 호국경의 이름으로 오레윈브리지를 압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떠받들어지는 건 키리에가 원하는 게 아니었고, 나타니엘이 사람들에게 두려운 존재로 취급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내가 잘하면 돼. 중간자의 역할이라면 왕세자의 약혼녀로서도 이미 해 왔던 거니까.’
키리에는 보란 듯이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가 제게 어떤 태도를 보이든 오레윈브리지를 향한 제 충의는 변치 않을 것입니다, 공주 전하.”
“나는 그걸로는 부족한데.”
그녀는 헐벗은 남자 하인이 가져다준 과일을 깨물어 먹으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책잡히지 않는 건 참 잘해, 그대가.”
“과찬이세요.”
“내 처지도 좀 이해해 주면 좋겠군요. 오라비는 그 모양이지, 어머니는 나를 달달 볶지.”
“남들 위에 서는 분은 범인이 이해할 수 없는 고충이 많으실 줄 압니다.”
“알아주니 고맙군요.”
줄리아가 픽 웃으며 기지개를 켜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봄 날씨의 공주 궁에 어울리는 가벼운 옷자락이 흔들렸다.
그녀는 기둥에 기대어 서서, 나비가 날아다니는 마법 정원을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묵. 이후 줄리아가 경쾌하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대가 말하는 건 이런 거죠. 대외적으로 왕실은 전설경과 협조하고, 나는 전설경에게 구애하고, 그러면서 뷰캐넌 가로 들어오는 압박을 쳐내고, 대신 그대가 뒤에서 내게 복종하는 것.”
“정확하세요.”
줄리아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그걸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나요?”
“제가 어찌 감히 저하의 심중을 헤아릴 수 있을까요.”
“명령이에요. 해 봐요.”
줄리아가 팔을 원 그리듯 크게 돌리며 빙글 돌아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서늘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키리에는 그보다 더 차가운 눈을 알고 있다. 그녀는 담담히 줄리아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제가 공주 저하께 충성하리란 보증이 필요하시겠죠.”
“정확해요.”
“원하시는 방식이라도?”
“그게 문제예요. 충심이란 걸 대체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차라리 그대가 돈이나 권력에 목매는 사람이었다면 이야기가 빨랐을 텐데, 그대가 또 그런 사람은 아니지.”
키리에가 침묵했고, 줄리아는 하인에게서 담뱃대를 받아 들었다. 침묵만큼이나 긴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공주는 진한 빨강으로 칠한 입술 사이로 연기를 뿜으며 키리에를 응시했다.
“당신이 전설경에게 영향력을 끼칠 정도의 존재인 건 확실한가요?”
키리에가 드러나지 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짧은 고민 끝에 정직하게 대답하는 쪽을 택했다.
“영향은 끼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그게 어떤 식으로 돌아올지는 알 수 없어요.”
“고작 무도회에서 놀림 받았다고 나설 정도면, 예쁨받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줄리아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잠깐의 시간 뒤에, 성큼성큼 걸어와 키리에의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좋아요. 앞으로 그대는 내가 부르면 즉각 내게 오는 거예요.”
“그리하겠습니다.”
“대외적으로 나는 그대와 뷰캐넌을 지키고, 어머니에게도 뷰캐넌을 공작가로 올려달라고 청해 보겠어요. 그 대신, 그대는 뒤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 주면 좋겠군요.”
“물론입니다, 공주 저하.”
“그리고 이 모든 건, 전설경에게도 비밀인 거겠죠? 자기가 아끼는 사람이 종처럼 부려지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을 테니까.”
“네.”
“재밌겠군요.”
짐승의 눈처럼 번득이던 줄리아의 눈은 금세 총기 넘치는 안광을 되찾았다. 그녀는 고민이 해결된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시원시원하게 웃었다.
“그대는 너무 담이 약해서 큰일이에요. 나라면 전설경에 호국경을 끼고서 그렇게 지내진 않을 텐데 말이야. 아니면 생각보다 그들이 약한 걸까?”
줄리아의 질문은 답을 구하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기에, 키리에는 정원을 날아다니는 나비 떼를 바라보며 대답을 삼켰다.
아주 크고 강한 존재가 저 수많은 나비 중 딱 하나만 골라 죽이는 수고로운 일을 할까?
‘그렇지 않겠지. 그의 말에 따르자면, 나 이외에는 누가 죽든 아무 의미 없을 테니까…….’
누군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 드는 순간 셀 아렐라노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자신으로 인해 벌어지는 무고한 피해만은 막고 싶었다.
키리에가 차분하게 주먹을 쥐었다.
‘이거면 된 거야.’
***
키리에 뷰캐넌과 왕가의 은밀한 타협 이후 한 달여의 시간이 지났다.
왕실, 특히 줄리아는 근 한 달로 키리에를 이용하는 법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정책을 바꿔야 할 때, 법을 개정하고 싶을 때, 외교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하여튼 그들의 입맛대로 무언가를 조종하고 싶을 때 일단 키리에 뷰캐넌을 끌어들이면 되었다.
그러면 거기엔 드물게 전설경이 동행했고, 그가 ‘대체 이 지루한 꼬락서니가 언제 끝날지 모르겠군.’ 같은 얼굴만 하면 모든 일이 일사천리였다.
그 노골적인 빌붙음이 아니꼬워서 나타니엘에게 동행해 주지 않아도 좋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나타니엘은 물끄러미 키리에를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너는?]
“네?”
[또 나가니?]
“네에. 오늘은 주류세 개정에 대한…….”
까닭 모르게 지팡이의 검날 부분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있던 나타니엘이 냉소를 지었다.
[오레윈브리지가 사람을 꽤 잘 부려먹는구나.]
이때 키리에는 심장이 1초 정도 멈췄다고 느꼈으나, 태연하게 미소지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오히려 정책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져서 좋은걸요.”
나타니엘은 그렇게 말하는 키리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지팡이를 쥐고 일어났다.
[가지.]
“아…… 괜찮아요? 이런 말 하면 이상하지만, 당신 위압감 덕에 오히려 왕가에 이득 되는 방향으로 정책이 결정되기도 해서…….”
[네가 재밌다니 됐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굳이 계속 키리에와 동행했다. 그 모습을 보며 키리에는 다른 걸 깨달았다.
나타니엘은 ‘지나간 것은 의미가 없다’라고 말했다. 그건 오레윈브리지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과 키리에를 돌보고 싶은 마음이 충돌했을 때, 후자가 이긴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오레윈브리지가 과한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키리에의 선택은 옳았다. 그녀는 지금 대외적으로 셀 아렐라노 최고의 여인으로 대우받고 있었으니까.
다행이랄지, 모든 일이 키리에가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
줄리아는 키리에와의 약속을 지켜, 대외적인 모든 상황에서 그녀를 떠받들어 주다시피 했다. 그건 국왕 진저 오레윈브리지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 모습이 전설경이 보기에 심히 좋았던 것 같다.
뷰캐넌의 볼룸에서 연 무도회 날 밤, 나타니엘이 중얼거렸다.
[의외야.]
바람을 쐬러 인적 드문 정원에 나온 키리에는 술기운을 가라앉히려 얼굴에 손부채질하며 대답했다.
“무슨 말이에요?”
[오레윈브리지가 생각 외로 일을 제대로 하는구나.]
“걱정했나요?”
[분명 주제 모르고 나서리라 생각했지.]
“그러게요. 아니어서 다행이네요.”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키리에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손을 내리며 방긋 웃었다.
화려한 무도회장의 불빛과 음악 소리가 아주 멀게 느껴졌다.
정원에는 풀벌레 소리 하나 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제 나타니엘이 이끌고 다니는 숨 막히는 고요에도 숨이 막히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저는 그냥 앞으로도 이렇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혹시 당신은 지루한가요? 싸우지 못해서 따분해요?”
[글쎄.]
드물게 앞머리를 올린 나타니엘이 허공에 손가락을 가로로 그었다. 가상의 선을 따라 잔잔한 바람이 불어와 키리에의 얼굴을 식혔다.
“아. 고마워요.”
[조금은 따분할지도.]
“그럼 전처럼 다 눈에 파묻고 싶어지나요?”
[그래도 상관은 없지.]
“하기 전에 미리 알려 줘야 해요. 시민들을 대피시켜야 하니까.”
키리에의 농담에 나타니엘의 미묘하게 표정이 느슨해졌다.
[또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구나. 오레윈브리지는?]
“파묻혀 죽으라고 하죠, 뭐.”
나타니엘이 낮게 웃었다.
[그래.]
그것은 영원 같은 한때였다.
어쨌거나 그는 나타니엘이었으므로, 키리에와 오레윈브리지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모종의 계약’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보는 세상은 확실히 키리에 뷰캐넌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나타니엘은 키리에가 꼭대기에 서서 사방을 호령하는 이 작고 귀여운 생태계가 몹시 기꺼웠다.
키리에는 자의로 왕실과 전설경 사이의 평화를 조율하는 중간자가 되었고, 훌륭하고 충실하게 그 역할을 수행했다.
오레윈브리지의 왕권은 더 높아질 데가 없었다. 전설경과 호국경의 비호를 받는 키리에 뷰캐넌이 왕가를 지지했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누군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끝없이 이어질 수도 있었던 평화였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이란 강과 같아서, 결국 더 크고 넓은 바다로 향하게 마련이었다.
나타니엘은 그걸 알았다. 누구보다도 잘.
그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위압감을 숨긴 탓에, 사람들은 슬슬 동경 사이에 숨어 있던 탐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솔직히 전설경이라고 해도, 군대 하나 정도만 있으면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싸우는 걸 본 적도 없지.’
‘종말과 싸웠다고는 하지만, 그냥 역병, 기근, 부족 세력 정도였을 거고, 승리를 과장되게 부풀린 거겠지.’
‘인간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하늘을 가르고 땅을 가르고 그런 정도의 힘이 있겠어.’
‘그는 마법도 쓰지 못하잖아?’
‘하지만 분명 유용한 패야. 좀 더 그를 손쉽게 다룰 수는 없을까?’
탐욕은 이윽고 한 방향으로 향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키리에 뷰캐넌에게로.
그날은 나타니엘이 키리에와 동행하지 않았다.
키리에가 바빠진 이후로 나타니엘은 자주 키리에의 일정에 동행했지만, 근래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난 탓에 염증을 느끼는 듯했다.
나타니엘은 키리에가 단장을 끝마쳤을 때까지도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나타니엘. 들어갈게요?”
키리에는 문을 세 번 두드리고, 자연스럽게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언젠가 실수로 그의 침실에 들어갔던 것을 나타니엘이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뒤부터, 그녀는 허락 없이도 그의 생활 반경을 오갈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나타니엘?”
키리에는 넓은 방을 여기저기 둘러보다,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나타니엘을 발견했다. 이제는 곧잘 보여 주곤 하는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몽롱한 푸른 눈이 키리에를 향했다.
[키리에.]
그가 이름을 부르자, 소름이 키리에의 등허리를 타고 올랐다. 나태하고 방탕하게 침대 위에 누워 있을 뿐인데도, 목소리부터 손톱 끝까지 걷잡을 수 없이 관능적인 사내였다.
그녀는 부러 빙긋 웃었다.
“전 이제 나가려고요. 오늘은 웨트러스트에 볼일이 있어요. 줄리아 공주 저하는 오지 않고, 신진 귀족과의 회합이에요.”
나타니엘은 대답 없이 물끄러미 키리에를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럴 리 없겠지만, 어디 아파요?”
[아니.]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
[넌 자기 투영이 심해.]
“그리고 눈치도 빠르죠. 당신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걸 알 정도로.”
나타니엘이 낮게 웃었다. 그는 매끈한 이마 위에 어지러이 흩어진 새까만 머리카락을 건드리며 천장 어딘가를 무의미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옆에 앉아도 될까요?”
나타니엘은 잠깐 이불보가 널브러진 침대를 흘낏 보았다가, 다시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키리에는 나긋나긋 걸어가 그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픈 사람 같네요.”
[착각이야.]
“어떻게 하면 나을까요? 종달새가 지저귀면 되려나?”
[내 종달새는 요즘 바빠.]
키리에가 빙긋 웃었다.
“가지 말까요?”
나타니엘은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없어서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니?]
“아니에요?”
그는 혀를 찼다.
[따분하군.]
그러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키리에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어느새 고개를 돌린 나타니엘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창을 통해 가늘게 들어온 겨울의 햇빛이 그 얼굴에 드리워지고 있었다. 눈이 부시지도 않는지 깜빡임 하나 없는 푸른 눈 안쪽에는, 흔들거리는 빛을 따라 파도가 친다.
‘……아름다워.’
키리에는 가만가만 나타니엘의 눈 속 일렁임을 감상하다,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인어라면 당신 눈 속에서 헤엄치고 싶을 거예요.”
나타니엘은 느리게 그녀를 돌아보았다. 검고 매끈한 속눈썹 아래의 둥근 눈동자가 더 깊어졌다.
[헛소리.]
“아름다운 눈이잖아요.”
[키리에 뷰캐넌. 아픈 건 네 쪽 같구나.]
“어머, 그래요? 감기에 걸리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오늘은 일찍 와야겠네요. 음, 감기에 걸리면 안 되니까 레몬 꿀차라도 마시면서 누군가와 체스라도 두면 좋을 것 같은데요.”
방긋거리며 내뱉는 연극 투의 말에 나타니엘이 물끄러미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도 한참을 말이 없어, 키리에는 그가 다시 [헛소리.]하고 말하려나 싶었다.
그러나 나타니엘은 시선을 피하며, 공기에 취한 사람처럼 낮고 간질거리는 목소리로 웃었다.
[그래.]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 키리에는 덜컥 아찔함을 느꼈다.
남들이 숨기기에 급급한 심장을 펄떡거리는 날 것 그대로 내놓는 그 올곧음. 그것이야말로 이 강하고 아름다운 존재의 본질이라는 깨달음이 키리에의 뇌리를 스쳤다.
어쩐지 보면 안 될 것을 봐버린 기분에,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야겠어요. 이따 돌아오면 체스, 두는 거예요.”
[매일 지면서.]
“놀랍게도 봐준 거랍니다.”
나타니엘이 조용히 웃었다.
[다녀오렴.]
그제야 평소의 나타니엘이었다.
키리에는 봄 햇볕 아래의 눈사람 같은 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뒤 침실을 나섰다.
***
아침부터 점심 이후의 모든 순간까지 기이한 하루였다. 너무나 평탄하고 수월했기에 그랬다.
웨트러스트의 신진 귀족들은 키리에를 우러러보았다. 키리에는 그들 앞에서 왕가의 대변인이 되어 잘난 척 설교를 늘어놓았다.
잠시 혼자 남게 된 시간에, 그녀는 피로를 느끼며 눈두덩이를 문지르려다 화장이 지워질까 싶어 참았다.
“……이런 일까지 날 부를 필요는 없었을 텐데.”
왕실을 선전하기 위한 도구로 활동하겠다고 말한 건 자신이었지만, 요즘은 정도가 과했다.
특히 줄리아는, 아주 영악하다고 하겠다. 그녀는 교묘하게 키리에가 참여할 모임을 짚어 주며 이든을 끌어내리기 위한 사전 작업에 몰두했다.
‘왕관을 쓸 자격이 있긴 해. 좀 비열하긴 해도.’
키리에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에 안네마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밖에 나갔다.
그녀는 쏜살같이 돌아와, 작은 체리 열매 두 개를 내밀었다.
“눈에 대고 계세요, 아가씨! 시원해져요!”
“나 주는 거니? 고마워. 정말 나는 안네마리밖에 없어.”
평소 같았으면 헤헤 웃고 말았을 안네마리는 근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아가씨 너무 바빠요. 우리 아가씨 너무 바빠서 큰일 나면 어떡해요……?”
“괜찮아. 체력 단련은 꾸준히 하고 있는걸?”
“그렇지만 요즘 아가씨를 너무 막! 막!”
“쉿, 안느.”
키리에가 검지를 세우자 안네마리가 풀죽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아가씨는 쉬셔야 해요…….”
“쉬긴 할 거야. 1년 정도는 이렇게 해 줘야 안심할 테니까, 그 이후는 좀 나아지리라 기대해 봐야지.”
“하지만 약속 아니잖아요…….”
안네마리의 말에 키리에는 쓴웃음을 지었다.
“예리하기도 하지. 맞아, 약속이 아니니까 1년으로는 모자랄지도 모르지.”
체리를 눈두덩이 위에 올려놓은 키리에가 눈을 감았다.
‘휴식이 필요한 건 사실이야.’
그녀는 스스로 느낄 정도로 지쳐 가고 있었다.
왕실은, 그리고 줄리아는 여전히 불안해했다. 키리에가 당장이라도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꿔 오레윈브리지를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라고 얼마나 더 보여 줘야 이해할지.’
그녀는 건조한 눈을 일부러 깜빡여 눈물을 짜냈다.
그래도 효과는 좋았고, 오레윈브리지도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고, 나타니엘 역시 잠잠했다. 이대로 그가 배부른 맹수처럼만 있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눈만 내리지 않으면 돼……. 그렇지, 안느?”
“하지만 눈을 안 내리게 하려고 아가씨가 힘든 건 싫어요…….”
“내조를 제대로 못 해서 약혼자가 양다리를 걸치는 거란 소리를 1년을 들은 몸인데, 이 정도쯤이야.”
“차라리, 차라리 그분을 이용해서…….”
키리에가 고개를 내리고 안네마리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
안네마리의 검은 눈이 흔들렸다. 작은 몸의 시녀는 끝끝내 그렇다고 말하진 못했다.
안네마리 역시 알고 있었다. 함부로 무언가를 빌었다가 어떤 식으로 되돌아올지 모른다는 것을.
키리에는 체리를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안네마리의 작은 어깨를 끌어안았다.
“걱정하지 마. 모든 게 다 잘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게. 내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일상을 위해서.”
그녀는 자신의 품에 안겨 오는 안네마리의 머리를 토닥거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하듯 되뇌었다.
모든 게 다 잘되고 있다고. 모든 게 다 잘될 거라고.
그리고 그날, 키리에 뷰캐넌은 마차째로 실종되었다.
***
뷰캐넌 백작가에서 키리에 뷰캐넌의 귀가가 늦어지는 것이 단순한 늦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건 일몰 이후였다.
세자르 뷰캐넌은 친딸, 그보다는 최강의 정치적 패를 쉽게 잃을 순 없었다.
“당장! 당장 키리에를 찾아! 내 눈 앞에 데려와!”
“지금 사람을 풀었습니다, 백작님!”
“그 애 몸값이 1200억이야! 1200억이란 말이다! 이런 제기랄! 제일 중요한 시기인데!”
세자르 뷰캐넌의 진두지휘 하에 백작가의 사병과 공권력까지 투입되어 키리에 뷰캐넌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키리에의 납치가 너무 깔끔하게 진행됐기 때문에, 누구의 소행인지 잡아낼 수 없었다.
별 소득 없이 자정이 되었다.
사람들은 키리에 뷰캐넌의 실종 자체보다 더 무시무시한 일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설경 나타니엘. 그는 불 꺼진 응접실에 앉아, 오지 않는 이를 기다렸다.
체스판 앞,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다리는 꼰 채, 손깍지를 끼고, 지팡이는 엄지와 검지 사이에 수평으로.
그는 기다렸다. 키리에가 만든 작고 귀여운 모래성 같은 생태계를 어떤 멍청한 이들이 부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주 잠깐 정도라면 눈감아 줄 요량이었다.
그러나 밤은 턱없이 짧았고, 하늘에는 눈구름이 넘쳐 흘렀고, 마침내 가는 세로형의 빛줄기가 체스판 위에 조용히 올라탔고, 끝끝내 그녀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돌아 버렸다. 조용하고 확실하게.
키리에가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어두운 방이었다.
‘여긴……?’
그녀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팔다리가 묶여 있었다. 키리에가 빠르게 기절 이전의 일을 되새겼다.
‘마차를 타고 웨트러스트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와중 습격이 있었지.’
일을 벌이더라도 수도 한복판을 선택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마차 밖의 소란이 심해지자 키리에는 안네마리를 끌어안고서 긴장한 상태로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녹색 뱀 같은 연기가 마차 안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 오기 시작했고, 그걸 본 안네마리가 자신을 뿌리치며 손을 앞으로 뻗었던 것이 기억났다.
‘도망치세요, 아가씨!’
안네마리의 손에서 푸른 빛이 폭발하던 모습이 키리에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안네마리, 안네마리는 어딨지?”
그녀는 뒤늦게 안네마리를 찾았지만, 방 안에는 키리에밖에 없었다.
검고 네모난 방이었다. 창문은 없고, 사방에 기하학무늬가 수놓아진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잠시만 보고 있어도 정신이 까마득해질 정도의 복잡함이었다.
방 가장자리에 열을 맞춰 놓여 있는 향 램프를 본 키리에는 빠르게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줄리아구나. 정신 계열 마법으로 나를 지배해서 좀 더 편하게 다루기 위해…….’
거기까지 깨달은 키리에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이걸 나타니엘이 알았다간 끝장이야.’
키리에는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무릎으로 땅을 기어 문 앞으로 다가갔다.
“거기 아무도 없나!”
그녀는 목이 터져라 외치기 시작했다.
“제발! 누구든 어서 나를 풀어 줘! 집으로 돌아가야 해! 그가 알게 해서는 안 돼!”
한참을 그렇게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그러나 누구도 오지 않았고, 인기척이 나는 것보다 키리에의 목이 쉬는 게 더 빨랐다.
“켈록, 큭, 콜록……! 제발……!”
어떻게든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좁은 방의 어지러운 무늬 탓에 정신이 널을 뛰었다.
감정이 울컥한 탓에, 키리에는 무릎을 세워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품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서 잠시 흠칫했으나, 살펴보니 옷깃 안쪽에 숨겨진 나뭇잎 조각이었다.
‘안네마리…….’
급하게 욱여넣었는지 제멋대로 뭉쳐 있는 나뭇잎을 본 키리에의 시야가 흐려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서 고개를 저었다.
‘나를 살려서 계속 이용하고 싶을 테니 안네마리에게 해를 끼치진 않았을 거야.’
키리에는 느리게 심호흡한 뒤, 억지로 평정을 유지했다.
‘이렇게 오래 멀쩡한 걸 보니 호흡에는 문제없을 거야. 괜히 혼란에 빠지면 안 돼.’
‘방의 모양도, 배치도, 장식도 전부 정신계 마법을 위한 게 분명한데 어째서 마법에 걸리지 않았지?’
‘안네마리의 나뭇잎 덕일까?’
‘아니면 데려와서 마법을 시도하기도 전에 무슨 일이 터지기라도?’
‘만에 하나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게 하려면 강력한 마법이 필요할 테고, 그게 가능한 건 오레윈브리지 정도. 그러니까 여긴 왕궁이야.’
‘규칙적으로 식사하는 내가 허기를 느끼지 않는 걸 보면 시간이 오래 흐르진 않은 게 분명해.’
수천 가지 생각이 키리에의 머릿속에서 부풀었다 터지기를 반복했다.
키리에는 초조를 억누르기 위해 자꾸 거칠어지려는 숨을 다스렸다.
기본적으로 남들보다 냉정하고 사리 분별에 능한 성격 덕에 키리에는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기다리자. 아무나 접근할 수 있는 곳에 데려다 놓지는 않았을 테니 미리 힘 빼는 건 좋지 않아. 누군가 온다면 교섭을 시도하고, 여차할 땐 내 발로 도망가야 하니까.’
당장 무엇이 우선인지 결정한 키리에가 다시 엉금엉금 기어 방을 둘러싼 램프로 향했다. 그녀는 힘겹게 램프 안쪽의 향초를 꺼내 바닥에 늘어놓았다.
왕실에서만 쓰이는 주문 제작품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기성품이었다. 향초는 크기에 따라 연소 시간이 다르니 시간을 잴 수 있을 것이다.
키리에가 정신 착란을 막기 위해 눈을 감고서 호흡에만 집중했다.
누군가는 반드시 그녀를 구하러 올 거였다.
‘멍청한 오레윈브리지든 누구든 좋으니, 누구든 빨리…….’
눈이 내리기 전에.
***
키리에가 눈을 감고 체력 보존에 집중한 사이, 큰 지진이 세 번 있었다. 그녀는 거칠어지려는 호흡을 향초를 보며 달랬다.
바깥의 소란은 거의 들리지 않았으나, 때때로 울리는 머리 위 높은 곳의 진동음이 키리에가 미치는 것을 막았다.
정적 속에서 키리에는 차근차근 희망을 버렸다.
‘못해도 10시간은 지났을 거야. 배가 고프지 않으니 아침은 되지 않았겠지만…….’
이제 나타니엘이 이 일을 알지 못하리라고 기대하는 건 지나친 낙관이었다. 키리에의 냉정은 차분하게 다음 단계를 밟아 나갔다.
‘왕가가 무너졌다면…… 아니, 셀 아렐라노 자체가 멀쩡할지 모르겠어…….’
아무리 차분한 키리에여도 납치되고 언제 구출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오래 침착을 유지하긴 어려웠다. 그녀의 인내심은 점점 좁은 방에 짓눌려 갉아 먹히고 있었다.
탁탁탁.
그때, 키리에의 귓가에 기다리던 소리가 들렸다.
“……!”
발소리였다.
그녀는 체면도 잊은 채 문으로 기어갔으나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목은 고함을 치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다가오는 누군가의 목적지가 키리에가 있는 방인 듯했다.
누군가의 흐느낌, 쩔그렁거리며 자물쇠를 여는 소리 끝에, 마침내 깜짝 상자처럼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끅, 으흑, 으윽…….”
가장 먼저 들린 것은 울음소리.
키리에는 실명을 막기 위해 눈을 감았다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앞을 보았다.
“제발…….”
문을 연 것은 아직 미성숙한 티가 나는 청년이었다.
“당신은……?”
“제발…… 제발, 구해 주세요…….”
“그 옷차림……. 줄리아 공주 전하의 궁에 있던 사람인가?”
청년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헐벗은 옷차림, 동상 직전의 손발.
청년은 자물쇠와 열쇠를 내던지고 얼굴을 감싸며 주저앉았다.
“제발…… 제발, 잘못했으니까, 저희가 잘못했으니까, 막아 주세요…….”
“막다니……? 잠시만. 무슨 말이야?”
“이럴 줄은 몰랐어요……. 이렇게까지 할 줄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청년은 울면서 손발의 구속구를 풀어 주었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한 근육이 삐걱댔으나 걸을 수는 있었다.
“밖은 어떻게 됐지? 날 데려온 건 역시 공주 저하인가?”
“그냥, 그냥 잠깐 가둬만 둔다고, 하시기에, 그런, 히끅, 줄로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똑바로 말해!”
키리에의 일갈에 청년은 겁에 질린 것처럼 몸을 떨었다.
“저는, 저는 몰라요……. 저는 그냥 공주 전하를 모시는 하인일 뿐이에요! 그런데, 전하가 당신을 데려와서, 가둬 두라고…….”
“그래서!”
“저녁에 당신을 가두는 걸, 봤어요. 제가 돕진 않았어요, 믿어 주세요, 믿어 주세요……!”
“그다음엔?”
청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갓 태어난 어린 양처럼 팔다리를 움찔거리다, 공포 그 자체에서 뽑아낸 듯한 말을 속삭였다.
“전설경이 찾아왔어요…….”
키리에가 침을 삼켰다. 고작 찾아왔다는 말이 이렇게나 불길하게 들리는 존재가 그 말고 또 있을까.
“그리고?”
그녀가 물었다. 청년이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의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서 대답했다.
“……직접 보세요.”
***
청년은 줄리아의 사람이었다.
청년의 역할은 궁의 초입에서 방문객을 안내하는 것이었고, 그 연유로 전설경이 공주 궁에 다가오는 것을 가장 먼저 본 사람이기도 했다.
멀리서 검은 예복을 입고 지팡이를 든 남자가 걸어오는 것을 보았을 때, 청년은 한눈에 그가 소문의 전설경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꽃밭의 검은 말, 무덤 앞의 갓난쟁이, 접시 위의 머리카락 같은 이질적인 남자였다. 더없이 아름다웠으나, 미소 너머에 흉포하고 야만적인 괴이가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다시 말해, 보는 것만으로도 불길함에 오금이 저렸다.
전설경은 그렇게 눈구름을 몰고 찾아와, 온기 없는 미소 띤 낯으로 말했다.
[공주에게 안내해.]
얼음보다 차가운 푸른 눈을 앞에 두고 ‘만남을 잡고 오시라’고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청년은 전설경을 공주에게로 데려갔다. 아마 저녁 늦게 기절한 상태로 데려온 키리에 뷰캐넌의 일 때문이겠거니 싶었을 뿐이다.
하루가 시작되기도 전에 들이닥친 전설경 탓에 줄리아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능숙하게 그를 소파로 안내했다.
“전설경이시군요. 어쩐 일이실까요?”
[오레윈브리지.]
전설경은 자리에 앉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 띤 얼굴로 용건을 말했다.
[키리에는?]
이때까지도 청년은 이 모든 일이 인간의 상식선에서 해결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대화, 언쟁, 아마도 약간의 폭력. 고작 그 정도.
이 안이한 기대는 직후 박살 난다.
전설경의 질문에 줄리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식으로 생긋 웃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군요. 키리에 양이요?”
줄리아의 말이 끝나자, 전설경은 왼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아.]
그리고 나직한 웃음소리.
[그래.]
직후 순식간에 나타난 흰 검이 줄리아의 사지를 잘랐다.
‘너를 죽이겠다.’, ‘네 죄를 알라.’ 같은 예고조차 없는 일방적 단죄.
줄리아는 몇 초 뒤 땅으로 떨어져 내렸고, 다시 몇 초 뒤 팔다리의 윗동을 버둥거리며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끼, 으, 아악!! 아아, 아아악-!”
그 모습을 전설경은 개미를 관찰하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고 순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방금 누군가의 팔다리를 토막 냈다는 감상, 죄책감, 하다못해 쾌락마저도 보이지 않는 맑고 깨끗한 시선이었다.
때마침 공주의 비명을 들은 기사들이 돌입했다.
“침입자다!”
“공주 전하를 지켜!”
“하, 하지만, 저분은……!”
“입 닥치고 돌격해!”
슬프게도 기사들은 전설경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보람 없이 죽어 나갔다. 잔인할 정도로 아름다운 검은 너무나도 손쉽게 몇십 명의 기사를 두 동강 냈다.
그러면서도 그의 옷매무새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전설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처럼 무구한 얼굴이었고, 사방에 튀는 핏방울마저 그것을 더럽힐 수 없었다.
마침내 고요가 찾아왔다.
전설경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애벌레처럼 바닥에서 꿈틀거리던 줄리아의 머리카락을 쥐어 들어 올렸다.
“아악! 아아아! 아아, 어흐흑……!”
그녀의 몸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았다. 청년은 뒤늦게 잘려나간 단면이 급속도로 얼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설경은 비명 지르는 공주를 짐짝처럼 손에 쥐고, 인형처럼 균일하고 가지런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청년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그가 차라리 키리에 뷰캐넌의 위치를 물었다면 마음이 놓였을 텐데.
그러나 그는 손에 든 줄리아 오레윈브리지를 한 번 내려다본 뒤, 다정하게 물었다.
[근처에 호수나 연못이 있니? 버릴 게 생겼구나.]
청년은 깨달았다. 무엇을 생각하든 그는 그 이상을 저지를 것이고, 그걸 말릴 수 있는 사람은 키리에 뷰캐넌밖에 없다는 것을.
키리에가 청년의 인도를 받아 깊은 지하에서 궁의 1층으로 나왔을 때, 키리에의 입술 앞에서 하얀 숨이 부서졌다. 세상이 온통 흰 빛이었다.
“눈…….”
바깥의 소리는 전부 눈에 잡아먹힌 듯했다. 두 사람의 나직한 발소리만이 흰 세계의 유일한 소음이었다.
청년은 셀의 중앙 궁와 줄리아의 공주 궁을 잇는 파빌리온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키리에를 보았다가, 궁 정면의 눈밭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타니엘은 그곳에 있었다.
그는 흰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그가 검을 움직일 때마다 병사 수십 명의 목이 잘려나갔다. 그렇게 바닥에 꽃처럼 핀 시체가 족히 수백.
“막아! 죽어서라도 막아야 한다!”
“국왕 전하를 지켜라!”
“하지만……! 이건 미친 짓입니다!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하의 명령이다!”
“아아아아아악!”
비명, 단말마, 고함, 죽음. 아비규환이었다.
그 사이에서 나타니엘은 심드렁하고 나른한 표정으로 걸었다. 검을 휘두르는 몸짓은 교향악을 지휘하는 사람처럼 우아했다. 사방의 참상은 그 우아함의 뒤꿈치도 잡지 못하는 것 같았고, 또 실제로 그랬다.
세상은 그가 있는 곳만 조용하고 순결했다.
“이, 이……! 사악하고 더러운 마귀가!”
키리에가 볼 수 없는 각도에 있는 국왕이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차오르는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어찌, 어찌 네 전우의 후손을 이런 식으로……! 네가 정녕 사람이냔 말이냐! 금수도 너와 같진 않을 것이다!”
나타니엘은 대답하지 않은 채 병사들을 죽이며 나아갔다. 그 끝에 있을 국왕이 재차 노호했다.
“네 무도함을 네가 알리라! 너는 왕족을 시해하고! 기사들을 죽이는! 잔악무도한 짓을 저질렀으니! 네가 진정 ‘전설경’의 칭호를 가진 기사라면 자신의 죄를 뉘우쳐야 마땅하다!”
나타니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진정 ‘전설경’이라면 이래서는 안 돼!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종말을 토벌하고 겨우 일궈낸 나라인데!”
점차 중앙 궁과 나타니엘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럴수록 국왕의 외침도 다급해졌다.
“하늘이 네 죄를 알 것이다! 너는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할 것이야!”
나타니엘은 그것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가뿐히 무시했다.
마침내 그와의 거리가 지나치게 좁혀졌을 때, 국왕이 조금 전과 달리 절박하게 외쳤다.
“자, 잠깐! 거기서 이야기하시오! 다가오지 마시오!”
그래도, 나타니엘은 멈추지 않았다.
겨우 파빌리온 건너 건물을 돈 키리에에게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국왕이 보였다.
“이런 제기랄, 마법 병단!”
그녀의 외침에 따라 마법사들의 마법이 하늘을 채웠다. 아마 이것을 위한 시간 끌기였는지, 눈 내리는 하늘을 거대한 술식이 채웠다.
“공격!”
거기에 국왕의 금빛 마력까지 더해졌고, 국왕의 팔이 움직이자 폭포수 같은 천둥 번개가 나타니엘에게 작렬했다.
콰콰콰콰쾅!
지금까지의 병장기 소리와는 크기부터 다른 큰 소리가 귀청을 찢을세라 달려들었다.
키리에는 눈이 비산하는 셀 중앙 정원으로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설마……?’
그 순간, 흰 안개 속에서 나타니엘이 걸어 나왔다. 더러워진 곳 하나 없는 검은 예복 그대로.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전하! 피하셔야 합니다!”
“호국경! 호국경은 어디 있는 게야!”
“더는 저자를 막을 힘이 없습니다, 전하!”
“이……!”
대열을 이탈해 도망치는 병사들이 생겨났다. 고작 한 명의 남자에게 겁에 질려서.
‘나타니엘…….’
키리에는 눈앞의 참상에 비틀거리며,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맨발로 눈을 밟고 나아갔다.
그러다 낭창한 걸음을 헛디뎌 넘어질 뻔한 것을, 누군가가 팔을 잡아 가까스로 버텨냈다.
〔막을 생각입니까?〕
레쇼였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붉은 보라색의 눈으로 키리에를 내려다보았다.
키리에는 어떤 반응도 하지 못했다. 레쇼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가, 자기 구두를 벗어 키리에 앞에 놓아 주었다.
〔미리 사과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레쇼는 그대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그는 어째서…… 나타니엘을 막지 않지……?’
알 수 없었다. 지금 키리에가 느끼는 감정은 그저 슬픔이었다. 왜 슬픈지 그녀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다.
키리에는 레쇼가 벗어 준 구두를 지나쳐 나아갔다.
나타니엘은 이제 무기를 들고 있을 뿐 공포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음을 기다리는 인간들과 가까워져 있었다.
“제발……! 제발! 전설경이여! 원하는 게 뭐요! 뭘 원하기에 이리 행동하는 게요!”
국왕이 두려움과 초조함에 휩싸여 울부짖었다.
“키리에 뷰캐넌이라면! 내 딸이 그녀를 납치했다는 건 알지만! 곧 무사히 돌아올 거요!”
그 한마디에 나타니엘이 처음으로 걸음을 멈췄다. 국왕은 겨우 얻어낸 실마리에 게걸스럽게 반응했다.
“맞소! 내 딸 줄리아가, 키리에 뷰캐넌에게 삿된 짓을 하려 했지! 인정하오! 하지만 그건 줄리아의 잘못이고, 이 나라와는 관계없는 일이지 않소?”
국왕이 위엄까지 내다 버린 채 구차할 정도로 간절히 호소했다.
“키리에 뷰캐넌이라면 당장 찾아드리겠소! 국왕인 내가 보증하겠어! 그러니 제발 멈추시오! 줄리아는 이미 죽이지 않았소, 전설경! 전설경이여! 병사를 풀어 당장 그녀를 찾을 테니……!”
아무 표정도 없는 나타니엘의 얼굴은 두려울 정도로 공허했다.
그는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왕의 일장 연설은 오히려 그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건드린 듯했다.
마침내 그의 팔이 달처럼 아름답게 둥근 원을 그렸을 때, 그 자리의 모두가 직감했다. 저것으로 모든 걸 끝낼 심산이라는 것을.
그것을 키리에도 알았다.
‘안 돼…….’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그 찰나의 고요 속, 그녀는 울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타니엘…….”
그 순간, 나타니엘이 멈췄다.
눈송이 하나에도 흡수되어 사라질 것 같은 작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나타니엘은 고개를 돌려 정확히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걸음을 내딛자, 둘 사이에 쌓여 있던 눈이 녹아 길을 만들었다.
꽁꽁 얼었던 온몸을 녹이는 훈풍이 뒤에서부터 불어와 키리에의 등을 밀었다. 마치 바람으로 에스코트라도 하듯이.
키리에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피에 젖은 눈을 밟아 나갔다.
시체가 즐비한 눈밭 위에서 나타니엘은 가만히 그녀를 기다렸다. 가없이 아름답고, 또 이루 말할 수 없이 괴이한 모습으로.
“나타니엘…….”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나타니엘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여느 때와 같은 정적이고 고요한 미소.
“……나타니엘.”
말해 보라는 듯,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키리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려? 그에게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했던 건 나야. 모든 걸 내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나야.’
그녀는 얼굴을 가린 채 가쁘게 숨을 내뱉었다.
‘전부 내 잘못…….’
키리에의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몸은 그보다 더 빨리 무너졌다.
키리에가 탈진으로 비틀거리자, 나타니엘이 순식간에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키리에?]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나타니엘의 옷자락을 붙잡았고, 나타니엘은 그 순간 검을 놓고 두 손으로 키리에의 몸을 들쳐 안았다.
[아프니?]
그는 왼팔 안쪽에 키리에를 앉히고, 어깻죽지 근처에서 흔들리는 키리에의 얼굴을 살피려 애썼다. 상냥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키리에.]
키리에는 나타니엘의 팔과 어깨에 얹히듯 기댄 자세로 숨을 쌕쌕거렸다.
“……나타니엘.”
[그래.]
“나타니엘.”
[그래.]
“…….”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키리에가 마른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말을 잃은 키리에 대신, 나타니엘이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곳의 환경은 네게 유해한 것 같구나.]
능히 의미를 짐작 가능한 두려운 말에 키리에가 몸을 비틀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나타니엘은 어린 새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키리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면서도 단단한 팔은 그녀의 허리를 둘러싼 채 떨어지지 않았다.
키리에는 덜덜 떨며 나타니엘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요. 해롭거나, 그렇지 않아요. 제가 좀 더 잘할 수……!”
[넌 할 만큼 했어.]
나타니엘이 미소지었다.
[그 아량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설친 것은 인간들의 잘못이지.]
“아니, 아니에요!”
[그러니 이제 그 죄는 그들에게 묻도록 하자.]
“나타니엘!”
그는 빈손을 펼쳤다. 얼음 결정 같은 흰 빛이 모여들고, 순백의 검이 생겨났다.
나타니엘이 속삭였다.
[그게 옳아.]
“안 돼요!”
키리에가 팔을 뻗으며 나타니엘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그를 끌어안은 채 가슴을 밀었으나 나타니엘은 땅에 뿌리내린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지?’
이미 흰 검은 무시무시한 진동음을 내기 시작했다. 나타니엘은 키리에를 살짝 뒤쪽으로 밀어내고서 연꽃을 스치는 바람처럼 우아하게 나섰다.
그녀는 중앙 궁 앞에서 도망치지도 못한 채 서 있는 병사들의 얼굴을 보았다. 모두 겁에 질려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국왕 역시, 발목을 잡는 죽음의 그림자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키리에에게 눈으로 말했다.
살려달라고.
키리에는 선택해야만 했다.
몰아치는 초조 속에서 고개를 가로젓던 키리에의 시야에 근처에서 죽은 병사의 시체가 걸렸다. 그 손에 든 검이 유달리 희게 빛났을 때, 키리에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녀는 거의 본능을 따라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아……!”
너무 급하게 달려나간 탓에 바닥에 나동그라졌으나, 키리에는 무사히 병사의 검을 손에 쥐었다.
그녀는 검날을 쥐고서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문질렀다.
“아윽!”
억지로 꾸며낼 필요도 없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손바닥이 베여 화끈거렸다. 그녀는 그 상태로 나타니엘을 바라보았다.
나타니엘은 모든 행동을 멈춘 채 키리에를 보고 있었다. 조금 놀란 얼굴로.
다행히 흰 검은 진동하던 것을 멈췄다. 키리에는 거의 울 듯이 억지로 웃었다.
“……체스 두기로 했잖아요.”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의 안전이라면, 그 안전을 눈앞에서 부숴 버리면 다른 데 눈 돌리지 못하겠지.
키리에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한번 팔뚝 안쪽을 그었다.
“체스, 내가 봐준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다시 한번, 반대쪽 팔뚝을 그었다.
“저, 룩 말고, 퀸을 제일 잘 쓰는데, 아직 못 봤죠……?”
이래도 나를 놓아둘 건가요?
키리에가 눈으로 물었다. 더는 참을 수 없어진 눈물 한 방울이 뺨으로 흘러내렸다.
그 순간 나타니엘에게서 끔찍할 정도로 불길하고 흉포한 기운이 펼쳐졌다. 깊은 바다색의 홍채 사이에 자리 잡은 검은 동공도 염소나 고양이의 그것처럼 제멋대로 일그러졌다.
그는 느리게 오른손의 검을 버렸고, 왼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손가락 안쪽에서 극도의 흥분, 갈증, 쾌락, 광기가 뒤엉켜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지었다.
나타니엘이 속삭였다.
[넌 최고야. 키리에 뷰캐넌.]
키리에가 칼을 놓치며 기절했다.
칼날이 그녀의 무릎에 닿기도 전에 코앞에 다가온 나타니엘이 그것을 발로 쳐냈다. 그때의 그는 다시 평소의 우아한 나타니엘이었다. 고요한 미소를 짓는 겨울의 왕.
[나이트는 퀸을 이길 수 없지. 오늘은 우리 영리한 키리에 뷰캐넌의 말을 따라야겠구나.]
나타니엘이 교양 있는 신사처럼 기절한 키리에를 안아 올렸다. 자기 몸을 함부로 하는 것에는 웃었으면서, 안아 올리는 동작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그는 겉옷을 벗어 키리에의 등에 덮어 주고 나서야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레윈브리지. 키리에가 이렇게까지 하니 죽이진 않겠어. 대신 몇 가지 부탁을 들어줬으면 하는데.]
국왕이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부탁…… 말이시오?”
[어려운 건 아니야. 약간의 성의를 보고 싶을 뿐.]
“숙고해 보도록 하겠소. 어떤 성의를 말하는지……?”
[거기에 왕세자가 있겠지?]
국왕의 얼굴이 굳었다.
“……전설경. 그는 이 나라의 후계자요.”
[죽이지 않아.]
“단순히 죽이지 않는 게 전부가 아니지 않소…….”
[그럼. 전부가 아니지. 그걸 아니까 키리에를 데려갔겠지.]
“그 점은…….”
국왕이 말꼬리를 흐렸다. 아니라고 말하기엔 너무 많은 증거가 있었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어느새 옆에 나타나 서 있던 호국경을 발견했다. 국왕이 허겁지겁 레쇼를 불렀다.
“호국경! 너무 늦게 오셨소, 경! 그대의 전우와 이야기를 좀 해 주시오! 그대는 호국의 영웅이지 않소!”
말은 ‘이야기’였지만, 레쇼가 나타니엘과 맞서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나타니엘이 빈정대는 기색 없이 빈정댔다.
[그건 꽤 재밌겠구나.]
그때까지 나타니엘만을 보고 있던 레쇼는 붉은 보라색의 시선을 국왕에게로 옮겼다.
〔그의 분노는 합당합니다.〕
“호국경!”
〔그는 키리에 뷰캐넌에게 손대지 말라는 경고를 충분히 보내왔고, 그걸 지키지 못한 것은 줄리아 오레윈브리지입니다.〕
“그래서 결국 줄리아는 죽었고, 키리에 뷰캐넌 양도 무사하지 않았소! 게다가 이든은 왕세자란 말이오!”
〔죽이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말을 어떻게 믿소!”
〔나타니엘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 이든은 왕세자란 말이오!”
레쇼는 무기질적인 눈으로 국왕을 바라보았다.
〔그가 왕세자인 게 중요합니까?〕
“그럼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오?”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뭐라고?”
〔현재 셀 아렐라노에 키리에 뷰캐넌보다 가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당신을 포함해서.〕
눈을 부릅뜬 국왕이 별안간 자신의 품을 더듬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크고 육중한 검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레쇼의 손에 들린 검은 검집 끝으로 마법 스크롤을 막 꺼내려던 그녀의 손등을 지그시 눌렀다.
〔그러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멸망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조금 슬픈 듯한 목소리였다.
진저 오레윈브리지는 북받치는 울분을 참듯 어금니를 깨물었다.
“……나는 마법사요! 위대한 오레윈브리지의 후손이란 말이오!”
〔그 위대한 발라브리가도 나타니엘을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발라브리가의 수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럼 당신은 왜 여기 있는 거요!”
〔내가 호국경(護國卿)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멍청한 행동으로 나라가 멸망하는 일은 막아야 하니까.〕
아직도 모욕감을 느낄 자존심이 남아 있었는지, 국왕이 분노로 일갈했다.
“멍청! 멍청이라고!”
〔틀립니까?〕
“그도 결국 죽이려고만 하면 죽일 수 있는 존재 아닌가! 시조가 한 번 그러했듯이!”
레쇼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발라브리가가 어째서 나타니엘을 두려워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레쇼는 드물게도 화내고 있는 것 같았다.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국왕이 주먹을 쥐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으나, 국왕으로서 그녀의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한참을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외쳤다.
“……이든! 앞으로 나와라!”
“하, 하지만 어머니!”
뒤에서 이든의 절규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저, 저는 살고 싶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그러게 내 말을 들었어야지! 그깟 캐스너 계집이 뭐라고……!”
“명령하신다면, 그러면 다시 뷰캐넌과 약혼하겠습니다! 그러겠습니다! 살려 주세요!”
이 시국에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그는 진실로 한 나라를 책임질 깜냥은 되지 못했다.
나타니엘의 미소가 짙어지자 국왕이 급하게 일갈했다.
“어서! 국왕으로서의 명령이다!”
결국 왕세자가 겁에 질려서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늘 단정하게 넘겼던 금발은 땀 때문에 지저분하게 이마 위로 늘어졌고, 겁에 질린 눈은 불안하게 희번덕댔다.
한 명의 국왕, 두 명의 초월자, 수백의 군사 앞에 나선 왕세자는 벌벌 떨며 나타니엘의 발치를 바라보았다.
“저, 저, 전설경이시여…….”
[오레윈브리지.]
“예, 제, 제가 이든 오레윈브리지, 이 나라의…….”
[관심 없어.]
나타니엘이 새하얗게 미소지었다.
[난 널 죽이지 않아. 네가 내 부탁만 들어주면.]
“부, 부, 부탁이요……?”
[그래.]
나타니엘이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다.
[원래는 네 동생을 다져서 먹이려 했는데, 제 주제를 알도록 가르치는 게 꽤 오랜만이라 내가 조금 기분이 좋아져서 말이야. 형체가 안 남아서 그 계획은 취소야. 그러니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든이 숨 쉬는 것을 멈췄다.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 뺨을 적셨다.
“사, 사, 살려…….”
[이게 좋겠군.]
나타니엘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속삭였다.
[네가 벌거벗은 채 개처럼 기어서 주변을 한 바퀴 돈 다음 잘못했다고 짖으면 용서해 주지.]
이든이 밭은 숨을 헐떡이며 두 손을 가만두지 못했다. 그는 그 와중에도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했다.
“전설경이시여…… 저는 왕세자입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그러니 왕세자인 네가 모두를 구해야지. 어렵지 않아.]
“그, 그렇지만, 저는, 왕족입니다, 경……!”
미소짓고 있던 나타니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가 하지 않아도 너는 죽이지 않아. 대신 궁전 밖의 사람을 죽이마. 넌 네 체면과 네 국민,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거야.]
“전설경이시여!”
이든이 동아줄이라도 붙잡고 싶은 사람처럼 키리에를 바라보았으나, 나타니엘의 표정이 싸늘해지자 잽싸게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이든은 좀처럼 행동을 정하지 못했다. 그가 시간을 끌수록, 추위는 시시각각 강해졌다. 갑옷 탓에 옷을 껴입지 못한 병사들은 치아를 부딪치며 떨었다. 그 자리에서 가장 추운 것이 병사들이었기 때문에, 깨달음은 병사들에게서 가장 먼저 나왔다.
나타니엘이 왕세자를 기다려 주고 있는 척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나타니엘은 지나치게 태연했다. 차갑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개중 두뇌 회전이 빠른 병사가 중얼거렸다.
“하하…… 시간을 끌면 눈에 파묻히고, 왕세자가 거절하면 애꿎은 우리 가족만 죽는 거잖아……?”
어느새 발목을 덮을 정도로 쌓인 눈을 내려다보며 병사들은 차츰차츰 두려움보다는 분노에 휩싸였다.
마침내 한 어린 병사가 꽥 소리를 내질렀다.
“왕세자 저하!”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어느새 시체마저 덮어버린 눈 때문인지, 어린 병사는 착란에 빠진 것처럼 혼란스러워 보였다.
“왕세자 저하! 부탁드릴게요! 전설경이 시키시는 대로 해 주세요!”
“야, 너 미쳤어?”
주변 동료가 급하게 소년을 말렸다. 그러나 소년이 봇물 터지듯 악쓰기 시작했다.
“하성구에 가족이 살아요!”
“……!”
“저희 집은 가난해요! 올해는 땔감이 비싸서 구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렇게 추위가 이어지면, 저, 저희 가족은……!”
“너…… 지금 너 따위를 위해 내 체면을 내던지란 말이냐! 무엄하다! 애초에 너희가 전설경을 막을 수 있었으면…… 아, 아차.”
이든이 입을 다물고서, 나타니엘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게 도화선이었다. 병사들의 얼굴이 굳었다.
‘장난해? 지금 누구 때문에 이 지경이 됐는데…….’
‘우린 죽으란 거야?’
‘애초에 저 새끼 때문이잖아.’
번들거리는, 궁전 밖에 가족을 둔, 무기를 든 사내들의 수많은 눈알이 이든에게 내리꽂혔다. 그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을 이든은 바로 눈치챘다.
나타니엘과 병사들 사이에 낀 이든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뭐, 뭐냐. 왜 나를 그렇게 노려보는 거지?”
“…….”
“이, 이 천둥벌거숭이들 같으니! 너희, 설마 파렴치한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거냐!”
병사들 사이에서 슬슬 짜증 섞인 한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든이 보이지 않는 시선을 뿌리치기라도 하듯 팔을 휘저었다.
“애초에 궁을 지키는 게 너희들 일이잖아! 불평할 거면 썩 꺼져!”
“누군 안 그러고 싶은 줄 아쇼? 그런데 댁 때문에 우리 가족이 죽는대잖소!”
누군가 대답했다. 이든이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너나 할 것 없이 사나운 시선이었다.
“방금 지껄인 게 누구냐!”
“…….”
“누구냔 말이야악!”
“왕세자 저하!”
다시 처음의 소년병이 외쳤다. 이제 그는 노골적으로 이를 갈고 있었다.
“제발, 시키는 대로 해 주세요…….”
소년병의 애원을 시작으로 저마다 한마디를 보태기 시작했다.
“애초에 댁이 바람피우지만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저 개새끼 때문에 이게 뭐야……!”
“왕세자 저하! 저는 이런 곳에서 가족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하던 일과 별로 다를 것도 없지 않습니까!”
“부탁드립니다! 다른 곳에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고작 벗고 머리 좀 숙이는 일이잖아요!”
이윽고 병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이든을 향해 야유와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러게 왜 양다리나 걸치냐고요, 씨팔!”
“아니, 대체 왜 왕세자가 아랫도리 개같이 놀린 걸 우리가 책임져야 해?”
“바, 방금 누가 감히 내게……!”
[일리가 있구나.]
그때, 나타니엘이 속삭였다. 그는 조금 즐거워 보였다.
[생각해 보니 왕세자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기라도 하면…… 내가 화낼 대상이 사라지는구나.]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국왕이 한 걸음 나서며 호국경을 돌아보았다.
“호국경! 저건 명백히……!”
〔나는.〕
레쇼가 냉랭히 대답했다.
〔인간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호국경!”
전설경의 종용, 호국경의 외면. 병사들의 머릿속에서 천칭이 기울기 시작했다.
‘어차피 국왕보다는 전설경이 강하고, 이대로 가다가 다 개죽음이라면 차라리…….’
병사들의 눈빛이 서늘해지고, 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국왕이 서둘러 외쳤다.
“이든! 전설경이 시키는 대로 하거라! 이건 어명이야!”
이든 역시 자신의 미래를 짐작했는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하면, 하면 되잖아…….”
이든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병사들이 갈라져 길을 비켜 주었다. 사위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이윽고 옷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고, 마침내, 왕세자가 벌거벗었다.
“큭…….”
이든이 울먹거렸으나, 나타니엘은 냉정했다.
[한 바퀴.]
그가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이든은 추위와 억울함을 참으며 나타니엘이 시킨 일을 수행했다.
“죄송합니다…….”
왕세자가 무릎 꿇었다. 전설경에게. 이는 명백히 현 왕가가 절대 그들의 건국 영웅에게 굴복했다는 신호였다.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발치에 엎드린 이든을, 나타니엘은 무구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이든의 고개 역시 내려가 이마가 바닥에 닿았다.
“잘못, 잘못했습니다…….”
왕세자의 몸이 추위로 벌겋게 얼 때가 되어서야, 나타니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키리에가 듣지 못한 게 아쉽군. 하지만 축하해. 넌 방금 네 국민을 살렸단다.]
나타니엘이 키리에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병사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들은 더 이상 이든에게 관심이 없었고, 기묘하게도 오히려 ‘여기서 끝내준 것’에 대해 나타니엘에게 감사하고 있는 듯했다.
나타니엘은 사람들의 뒤틀린 동경을 받으며, 국왕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하지. 셀에 궁을 하나 마련해 주렴.]
“……궁 말이오?”
눈을 감고 있던 국왕이 힘없이 되물었다.
나타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품속에서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늘어진 키리에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눈처럼 새하얀 미소였다.
[새장이 필요해졌거든.]
키리에는 고질적인 편두통과 함께 잠에서 깼다. 한낮의 햇살이 방 안에 들이차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키리에가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방은 아니구나.’
딱 하루 갇혔을 뿐인데, 의외로 정신적인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아직도 희미하게 잔상이 남았다.
잠시 숨을 고른 키리에가 느리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무덤덤해진 정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백작가는 아니었다. 잠옷, 침구, 가구, 장식. 모든 게 자신의 방과 같았지만, 벽 마감재와 방 구조가 달랐다.
고개를 돌리자 창밖으로 셀의 중앙 정원이 보였다. 어제, 나타니엘이 종말처럼 우뚝 서 있던 바로 그곳.
시체의 흔적은 없었다. 오가는 근위병도, 귀족들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상스러웠다. 마치 나쁜 꿈을 꾼 것처럼.
‘마지막에 어떻게 됐더라?’
기절 이후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느껴지던 것은 그저 등을 어루만지던 손길. 다리 아래를 받치던 손.
괜히 등허리를 타고 오르는 서늘함에 키리에가 양팔을 끌어안았다.
‘전부 망가졌어.’
혼란스러웠다.
‘내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 애초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나았을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키리에는 또 다음 일을 생각했다.
‘일단 죽은 이들에게 가문에서 따로 위로금부터 주자. 줄리아, 줄리아는 어쩌지? 공주를 죽인 건…….’
맨발이 바닥에 닿자 문득 생각이 멈췄다.
피와 눈과 먼지가 묻어 더러웠던 발은 하얗고 깨끗했다. 손과 팔뚝도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아프지 않았다.
‘나타니엘이 했을까?’
그녀는 망막에 새겨진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 손가락 안쪽의 미소를 떠올렸다. 다시, 온몸이 싸늘해졌다.
나타니엘이 키리에에게 보이는 감정은 사랑 따위가 아니었다. 집착도 아니었고, 애완동물을 아끼는 마음도 아니었다. 그건 그냥 소유욕, 독점욕이었다.
그저 가지고 있으면 그만. 낡거나 부서져도 상관없다.
‘내가 죽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나타니엘은. 그렇게 자기 눈 닿는 곳에만 있으면 되는 거야.’
그녀는 처음 그를 만났던 순간 이후 처음으로, 그가 두렵다고 느꼈다.
‘일단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아야겠어.’
키리에는 지친 걸음으로 방문으로 향했다.
그때 달칵, 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녀가 채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아가씨!”
안네마리였다. 소녀는 서 있는 키리에를 보고선, 금세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으아아아앙! 아가씨!”
안네마리가 들고 있던 옷가지도 내던지고서 키리에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키리에가 반사적으로 안네마리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안네마리. 괜찮니? 너는 괜찮아?”
“아가씨, 아가씨! 으, 흐으……! 아가씨이, 흐아아앙!”
“무사했구나…… 다행이야.”
“안네마리가, 안네마리가 죄송해요……! 안네마리가 약해서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나야말로 안느가 없어서 걱정했는데 다치지 않았다니 다행이야.”
“아가씨…….”
키리에는 안네마리가 진정될 때까지 등을 쓰다듬어 준 뒤, 그녀를 방 한쪽의 작고 둥근 테이블로 이끌었다.
“안네마리. 차근차근 이야기해 줄래? 그때 마차 습격 이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킁, 쿨쩍…… 그날, 안네마리는 나쁜 냄새를 맡았어요……. 마차 안으로 나쁜 게 들어왔어요…….”
“그 연기 같은 거 말하는 거지?”
“네, 킁, 그건 엄청 나쁜 거였어요. 막으려고 했는데 실패했어요……. 그래서 안네마리가 쓰러지기 전에 가지고 있던 방어 주술을 몽땅 아가씨께 드렸고요.”
키리에가 품 안에 가득했던 나뭇잎을 떠올렸다.
“그 덕에 내가 멀쩡할 수 있었구나. 고마워, 안느. 네가 날 구했어.”
안네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키리에를 올려다보았다.
“안네마리가…… 아가씨 구했어요?”
“응. 구했어.”
“안네마리 잘했어요?”
“응, 참 잘했어요.”
진주 같은 눈물을 흘리던 안네마리가 눈을 좌우로 굴렸다.
“하지만 이번에 아가씨를 구한 건 안네마리가 아니에요…….”
분위기가 단번에 가라앉았다. 키리에는 씁쓸히 웃으며 안네마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긴 왕궁이니?”
“네.”
“나타니엘이구나.”
“그분이 아가씨를 옮겼어요.”
“방은 왜 이런 거야?”
“가주님이 찰스 아저씨를 시켜서 똑같이 옮기게 했어요.”
“왜 그런 짓을……?”
키리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게 물을 건 아니지. 죽은 사람들은?”
“왕궁 사람들이 모두 치웠어요.”
키리에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제일 묻고 싶지 않은 게 남았다.
“나타니엘은?”
안네마리는 입을 일자로 다문 채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올려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안네마리는 그분이, 좋지는 않아요. 그분은 불길하고 나빠요. 그렇지만…… 그분이 거짓말을 안 하는 것도 알아요.”
“거짓말?”
갑자기 무슨 말일까. 키리에가 대답을 바라는 눈으로 안네마리를 응시했다.
안네마리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답을 꺼렸다. 키리에는 부드럽게 안네마리의 손을 잡았다.
“나타니엘과 무슨 이야기를 했니?”
안네마리는 키리에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가씨가 걱정하실 일은 없었어요! 그런 게 아니라…….”
안네마리가 우물쭈물했다.
“그분이 그랬어요……. 아가씨는 안 죽이겠다고…….”
묘한 말이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침묵하는 키리에를 두고 안네마리가 말했다.
“안네마리는 사실, 준비하고 있었어요. 안네마리의 엄마는 북쪽에서 왔는데, 거기엔 나쁜 사람에게 쓰는 마법이 있어요!”
“그래?”
“네. 안네마리는 나타니엘 님이 아가씨에게 해를 끼칠 거라고 생각해서, 방에서 나오지 않는 동안 내내 그걸 준비 중이었는데…… 그분이 찾아왔어요.”
“그건 예전 이야기지?”
“네에.”
안네마리는 몹시 시무룩한 표정으로 큰 눈을 깜빡였다.
“안네마리가 뭘 하려는지 다 알고 있다고, 하지 말라고 했어요. 자기는 아가씨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진짜로 아가씨를 구했어요. 안네마리가 아니라 그분이…….”
“그랬구나.”
어쩐지 왜 그렇게 두문불출하던 아이가 갑자기 다시 괜찮아졌나 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다.
키리에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구했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 다만 구하는 것 이외의 문제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을 뿐. 그렇다면 앞으로 그 앞에, 자신 앞에 장애물이 생기면 나타니엘의 손에 모조리 죽어 버리는 걸까.
“그게 맞는 걸까?”
키리에가 낮게 중얼거렸다. 멍한 키리에를 보며, 안네마리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어쩔 수 없어요, 아가씨.”
“응?”
“그분은 그럴 수밖에 없어요.”
“무슨 뜻이니?”
“거미가 나비를 사랑할 순 없으니까요. 잡아먹지 않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거예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래서…… 안네마리는 믿기로 했어요. 하지만 안네마리도 이제 방심하지 말고 준비해야 해요…….”
안네마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키리에는 가만히 작은 안네마리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나도 나비가 아니고, 그도 거미가 아니잖아.”
안네마리는 일순 무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아주 잠시 동안. 그런 다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방긋 웃으며 양팔을 위로 쭉 뻗었다.
“아가씨가 깨어나신 걸 알려야겠어요! 안네마리가 미음을 가져올게요!”
“잠깐, 안네마리?”
“쉬고 계세요!”
안네마리는 빠른 걸음으로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키리에는 멍하니 앉아 그 질문의 어디가 안네마리를 도망치게 했는지 떠올렸다.
팔을 타고 오르는 서늘한 기운에, 키리에가 자신의 몸을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잡아먹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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