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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립 (4/33)

4. 대립

키리에의 일상은 갑작스럽게 바빠졌다. 이든과의 파혼 이후로 꽤 줄어들었던 무도회 초대장도 은쟁반 두 개를 가득 채울 정도로 늘어났다.

이든과 루비니아의 약혼은 금방 사람들의 관심을 잃었다. 책장 속에 대충 끼워 넣은 해묵은 연하장만도 못한 취급이었다.

왕실은 키리에 뷰캐넌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사교계의 모든 인사가 그녀와 말이라도 나눠 보길 원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 뒤에 있을 전설경, 호국경과 나누길 원했다.

그리고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던 축하연에서의 등장 이후, 전설경 나타니엘과 호국경 로르 레쇼는 드디어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국왕을 포함해 온갖 원로 대신과 노공, 정·재계 실세와 미래의 정치인들이 그득한 회담장이었다.

둘은 시선을 신경 쓰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지팡이를 무릎 위에 얹고서 나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전설경. 그린 듯한 곧은 자세로 앉아 무표정하게 앞만 바라보는 호국경. 소름 끼치는 아름다움과 압도적인 기백에 회담장은 침 삼키는 소리마저 들릴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입이라도 맞춘 듯 여유롭게 선언했다.

[키리에 뷰캐넌을 내 전권 대리인으로 삼겠어.]

〔5년 뒤, 내 영지의 모든 권한을 키리에 뷰캐넌에게 양도하겠다.〕

‘잠깐만. 뭐라고?’

키리에가 숨을 삼켰다. 회담장 전체에 혼란이 밀려들었다.

“방금 전설경이 뭐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키리에 뷰캐넌? 뷰캐넌이 호국경과도 연이 있었다고?”

국왕마저 의자 팔걸이를 꽉 쥐고 눈을 홉떴다. 그러나 대뜸 무서운 말을 내뱉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제법이네.’라고 말하는 것 같은 시선을 교환하고 있을 뿐이었다.

회담을 맡기로 한 의장이 가까스로 떨리는 손을 들었다.

“저…… 각하. 그러시다는 건…….”

의장이 과하게 뛰는 심장을 어쩌지 못한 채 시큰둥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두 영웅에게 물었다.

“호국경께서는 로르 가의 영지를 전부 키리에 뷰캐넌 양에게 일임하시겠다는……?”

〔그렇다.〕

간결한 대답이었다. 의장은 기절하고 싶어 보였으나, 기절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 각하? 서류상으로 로르 가의 영지는 한 해 평균 700억 이상의 수입이 있습니다. 이것을 전부…… 키리에 뷰캐넌 양에게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오레윈브리지가 맡아두었던 내 영지는 어떻지?]

“어, 그게…….”

나타니엘이 끼어들자 의장이 국왕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각하의 영지는 한 해 평균 500억가량의 수입이 발생합니다.”

[적은데.]

절대 아닌데요. 모두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륙의 동남부, 기후가 좋은 노른자위 땅은 오레윈브리지의 영토. 북서부의 황량한 땅이지만 북대륙과 가까워 무역 관세로 톡톡히 이득을 보고 있는 것은 호국경의 영토.

전설경의 영토는 남서부의 메마른 땅이지만, 최근 왕실이 공들여 개발 중인 지역이기도 했다.

그를 알 리 없는 나타니엘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일단은 넘어가지. 1년에 1200억이면 끼니를 거르지는 않을 테니.]

가차 없는 금전 감각에 모두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키리에의 혼도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이런 걸 한다는 말은 없었잖아!’

사적인 자리였다면 당장 제정신이냐고 물었을 테지만, 엄밀히 따지면 둘 다 국왕보다 상전이다.

키리에는 끼어들 수 없었고, 세자르는 옆에서 웃음을 참느라 무릎을 꼬집는 중이었고, 전설경과 호국경의 대책 없는 계획은 날개 돋친 듯 몸집이 커졌다.

〔부족하면 땅을 더 늘리면 된다.〕

[어떻게?]

〔네가 가장 잘하는 것.〕

나타니엘이 희게 웃었다.

[정복 전쟁. 나쁘지 않지. 웬일이야?]

결국 키리에가 한마디 하고야 말았다.

“아니, 둘 다 너무 과해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일개 백작 영애의 목소리였으나 둘의 고개가 바로 키리에에게 향했다.

〔과합니까?〕

[그럼 일단 보류해 두지.]

아무리 봐도 남 이야기를 듣게 생기진 않은 두 사람의 빠른 수긍에 다시 모두의 얼이 빠졌다. 대관절 그녀가 뭐라고 이렇게나 편의를 봐준단 말인가?

잘 키운 영지를 날름 남의 손에 얹어 줘야만 하는 국왕의 안색이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의장이 그녀의 눈치를 보고 속사포로 말했다. 빨리 회담을 끝내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말씀하신 대로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본 회담에서 결정된 사항은 번복할 수 없습니다…….”

[번복할 수 없다고?]

의장의 말을 들은 나타니엘에게서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꽤 재밌는 농담이었어.]

거기다 대고 ‘당연히 안 되지!’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다 못한 국왕이 마침내 뒤틀린 속으로 입을 열었다.

“두 분은 뷰캐넌 양을 매우 아끼시나 보오.”

그래, 그게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이었다.

묘하게도 대답은 없었다. 나타니엘은 우아하고 냉연한 미소만 지은 채 지팡이로 목덜미를 툭툭 두드렸고, 레쇼는 묵묵히 앞만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두 사내의 무언이 ‘다른 이야기나 하는 게 좋겠는데.’의 의미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회담장 안의 온도가 급작스레 낮아진 이후의 일이었다.

떫은 표정의 국왕은 급히 사태를 수습하려 나섰다.

“우려되는 점은, 뷰캐넌 양은 후계자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오. 무엇보다 연약한 숙녀인 그녀가 각지의 군권까지 통솔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군.”

원래부터가 무의미한 흉내에 가까웠던 나타니엘의 미소가 조금 더 차가워졌다.

[군권이 왜 필요하지?]

“그야 영지를 지키기 위해…….”

[무엇으로부터?]

“물론 적이나…….”

[아. 키리에 뷰캐넌에게 적이 있다고.]

뚝 잘라낸 고드름만큼이나 싸늘한 속삭임이었다. 그는 다분히 의도된 동작으로 지팡이를 쓰다듬었다.

[부디 누군지 알려 주면 좋겠어.]

모두의 시선이 곧고 검은 지팡이로 향했다. 조금 늦긴 했지만, 사람들은 글라디오소 버몬트의 영웅 병을 고친 게 진짜 영웅의 지팡이 검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상냥한 낱말에 그렇지 못한 손동작은 좌중을 침묵하게 했다. 옆에서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호국경의 반응이 그것을 부추겼다.

누구도 쉽게 말 얹을 수 없는 그 상황을 타파할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그건 키리에 뷰캐넌뿐이었다.

“말하면요?”

키리에가 조금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타니엘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일순 그의 동공이 검은 태양처럼 일렁였다.

[재밌어지겠지.]

사람들은 웃을 수 없었다.

***

“어떻게 우리한테까지 숨길 수 있어!”

라우라가 외쳤다. 그녀는 키리에의 어깨를 붙잡고 짤짤 흔들어대며 울부짖었다.

“그런 거였으면 미리 눈치를 좀 주지 그랬어, 키리에! 난 또 네가 정말 엄한 놈에게 걸려서 말도 못하는 줄 알았는데!”

“맞아, 놀랐어.”

드물게 시간이 난 마리아가 살풋 웃었다.

키리에는 난처하게 웃으며 라우라를 바로 앉혔다.

“미안해.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인지라 입을 열기가 그렇더라고.”

“이해해. 전설경이니까.”

“그래도 그렇지!”

라우라는 한참을 씩씩댄 뒤에야 진정했다. 뒤늦은 개운함이 엿보이는 얼굴이었다.

“뭐, 아무래도 좋아! 요 귀염둥이! 난 네가 언제고 이런 일을 치리란 걸 알고 있었다고!”

키리에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정도야?”

“그 정도야! 그렇지, 마리아?”

라우라가 어깨를 들썩이며 마리아에게 눈짓했다. 사교계 모든 정보의 모체라 불리는 올드시우다드 공작가의 영양은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설 속에서만 듣던 이경(二卿)이 모였어. 상서로운 징조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

“건국 이래 처음이니까!”

“이젠 전국에 키리에 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그럼! 남의 약혼자나 가로챈 누구누구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지!”

“그리고 5년 뒤 너는…….”

마리아가 짐짓 감탄스러운 얼굴을 지었다.

“전 국토의 2/3를 가지게 돼.”

“꺄우우우!”

키리에보다 더 신이 난 라우라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녀는 아직도 실감하지 못하는 키리에를 두고 깔깔거리다가, 수저 끝으로 푸딩을 건드리며 씩 웃었다.

“뭐, 누구누구는 그걸 싫어하겠지만 말야!”

잡담하듯 웃으면서 차가운 계산을 말하는 건 라우라의 화법이다.

세 사람의 머리에 동시에 국왕이 떠올랐다. 왕보다 큰 영지, 왕보다 강한 군사력을 그녀가 반길 리 없다.

그러나 셋은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다른 이름을 꺼냈다.

“그나저나 루비니아 캐스너는 왜 유별나게 키리에를 싫어하는 거야? 너 뭐라도 했어, 키리에?”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그래, 모범생 키리에가 그럴 리 없다는 게 문제야! 마리아는 뭐 몰라?”

“가문에 들어온 정보는 없어. 책을 좋아한다, 진보 성향이다 정도?”

“흠! 7대 가문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긴 했지만, 유난히 키리에에게 날이 서 있단 말이지이이…….”

라우라가 그렇게 말하며 캐비닛 푸딩 그릇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키리에 네가 루비니아 캐스너와 만난 날에는 대부분 나도 함께 있었어. 그리고 네가 딱히 그녀에게 잘못한 건 없었거든? 오히려 캐스너의 실수를 덮어 주었다면 몰라.”

“실수? 그런 게 있었어?”

“기억 안 나? 그때…….”

그때 마리아가 라우라의 말을 가로막은 뒤, 낮게 속삭였다.

“얘들아. 궁내부장인 일레이니 공이야.”

그녀가 아직 푸딩을 내려놓지 못한 친구를 드레스 자락으로 가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사람은 동시에 손을 얌전히 내려놓고, 우아하고 온화한 숙녀다운 자세를 취하며 도열했다.

일레이니 공은 왕실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궁내관으로, 7대 가문에 속해 있지는 않았으나 역사 깊은 일레이니 가문의 가주였다.

그가 세 사람 앞에 다가와 근엄하게 말했다.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당연하지만 그 눈빛은 키리에를 향하고 있었다. 라우라가 알 만하다는 듯이 남몰래 눈짓했다.

‘싫어할 거라고 했지?’

시조가 만들었다던 마법 정원은 계절을 잊은 양 따뜻했고, 중앙에는 그림 같은 호수까지 있었다. 마치 봄처럼 느껴지는 정원을 보고 세 사람은 넋을 잃었다.

국왕이 인자하게 미소지었다.

“우리 트레베레움의 참된 아름다움이 이 자리에 다 모였군.”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존귀하신 태양을 뵙습니다.”

“오늘은 그런 허례허식은 관두도록 하지.”

키리에는 최대한 국왕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애초에, 국왕이 그녀를 부른 이유가 너무 명확했다.

그녀는 나타니엘이 어떤 존재인지, 자신과는 어떤 사이인지, 그리고 그 관계가 왕가에 해가 될지 궁금한 것이다.

마리아와 라우라 역시 그걸 알고 있었다. 그녀들은 되도록 키리에에게 화제가 가지 않도록 명랑하게 재담했다.

“차기 올드시우다드 공작을 이리 따로 만나게 되어서 눈총을 받겠어, 내가.”

“전하의 시간을 한순간이라도 독점한 제가 눈총을 받을 것입니다.”

“포트듀케인은 요즘 북대륙으로의 새 무역 항로를 뚫는 데 애를 쓰고 있다지?”

“네, 전하! 바다 마물도 많고 해류가 불규칙적이라 난항이지만, 곧 성공할 것 같아요!”

“성공이라고? 꽤 오래 고전했던 것으로 아는데.”

국왕의 눈이 빛났다. 라우라는 키리에 쪽은 바라보지도 않은 채 태연하게 말했다.

“그동안 신항로 개척이 어려웠던 건 해류 때문이었는데, 얼마 전 괜찮은 거점 항구를 잡았어요!”

“그게 어딘가?”

“앗, 비밀인데? 비밀이지만, 전하니까 특별히 말씀드릴게요! 클라시코입니다.”

모두의 미소가 예리해졌고, 키리에는 조금 놀랐다. 클라시코는 호국경의 영지다.

“호국경은 내내 폐쇄적인 영지 경영 원칙을 고수해 왔지. 그가 허락하던가?”

“저의 간곡한 요청과 놀라운 입담 덕이 아닐까요?”

라우라가 발랄하게 받았지만, 국왕의 시선은 묵직하게 키리에에게 향했다.

“자네는 키리에의 오랜 벗이지.”

라우라는 연출된 활기를 순식간에 가라앉히고서 씩 웃었다.

“맞습니다. 제가 뷰캐넌 양과 함께 있던 것을 눈여겨본 듯합니다.”

키리에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제야 사람들이 앞다투어 말을 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 이름을 높이고 있어. 대체 왜?’

국왕은 심기가 불편한 듯했다. 마법사의 혈통답게 주변 바람에서 불티가 튀는 듯한 타닥타닥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깐의 일이었다. 노련한 정치가는 감정을 오래 드러내지 않는다.

“기쁜 일이군. 타 대륙과의 교류는 언제나 소중하지.”

국왕은 얼마간의 신변잡기 이후 위엄 있게 손을 들었다.

“좋아. 두 아가씨와의 이야기가 아주 즐겁군. 한데 키리에, 그대는 어찌 이리 말수가 적은가?”

올 것이 왔다. 키리에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전하. 오랜만에 뵙는 터라 긴장을 한 듯합니다.”

“우리 사이에 그런 소리를 다 하는군.”

우리 사이? 키리에의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부담이 가지 않는다면 그대와 둘이 오붓하게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은데, 어렵겠나?”

국왕의 옥색 눈은 거절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물론, 저의 기쁨입니다.”

“좋군. 올드시우다드 양, 포트듀케인 양, 그대들은 내 애완 표범을 구경하는 것이 좋겠어. 일레이니 공이 안내해 줄 걸세.”

라우라와 마리아는 감히 국왕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정원으로 안내를 받았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국왕은 한결 홀가분하게 자세를 바꿨다.

“드디어 둘뿐이군. 오랜만이네, 키리에. 그간 잘 지냈나?”

키리에가 빙긋 미소지었다.

“물론입니다, 전하.”

없어도 있는 것처럼. 있다면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미소짓는 키리에의 머릿속에 과거 국왕이 한 말이 스쳐 지나갔다.

‘키리에. 요즘 이든의 행동 때문에 항간에 소문이 돈다지?’

‘예, 전하.’

‘신경 쓰지 말게.’

‘예?’

‘사내란 무릇 그런 법이야. 어차피 이든의 약혼녀는 그대고, 지금은 한때의 치기일 뿐이니 맘씨 고운 그대가 그 철없는 행동을 좀 눈감아 주게.’

‘……알겠습니다, 전하.’

감히 국왕을 상대로 ‘그렇게는 못 하겠다’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때의 국왕을 기억하는 키리에로서는 그녀의 모든 것이 달갑지 않았다.

“이든과의 일이 그리된 건 안타까운 일이었어. 나는 정말로 그대가 왕세자빈에 걸맞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이가 원래 좀 사람 보는 눈이 없네.”

이번엔 키리에도 진심으로 미소지을 수 있었다. 왕세자는 사람 보는 눈이 없다고, 이미 그녀에게 말해 준 사람이 있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전하. 오히려 저는 좀 더 큰일을 하실 분께 괜히 심려를 끼친 것 같아 죄송할 따름이에요.”

“그리 생각해 주니 참 고맙군.”

늙은 여왕은 나이 탓에 움푹 들어간 눈두덩이 아래의 옥색 눈을 예리하게 빛냈다.

“흠, 그래. 키리에…… 현재 전설경께서 뷰캐넌 백작가에 머무르고 계시지?”

드디어 본론이었다. 키리에가 미소를 단단히 머금은 채로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전설경과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가?”

“왕세자 저하와의 파혼 이후, 엘서스로의 여행 도중 전설경께서 저를 발견하셨습니다. 저는 그분께 마차를 빌려드렸죠.”

“그뿐인가?”

노골적인 질문에도 키리에는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달리 궁금하신 부분이라도 있나요?”

“아닐세. 의례적인 질문일 뿐이야.”

국왕이 키리에를 흘끔거렸으나, 그녀의 표정에서 별다른 거짓의 기색을 알아차리진 못한 듯했다.

‘뷰캐넌은 마법사가 아니니 내가 금제를 깼다고 생각하진 않는 모양이네.’

다행인 일이었다. 그 부분을 책잡히면 공방이 어려워진다.

“그럼 그대는 그분의 과거에 대해 아는 건 없는 게로군.”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많은 말을 하지는 않으셔서요.”

국왕이 먼 곳에 시선을 두며 잠시 말을 골랐다.

“혹시 전설경께서 다른 말씀을 하진 않으셨나?”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를테면…… 봉인이라든가.”

보석 같은 눈이 뱀의 비늘처럼 빛났다. 국왕다운 위엄과 압박감은 좀처럼 거짓을 말하기 어렵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키리에는 하던 대로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아는 것이 적어 어떤 봉인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한가?”

“아시다시피, 뷰캐넌의 마법사 혈통은 끊긴 지 오래입니다. 부디 아는 것 없는 한낱 소인배의 형편을 굽어살펴 주세요.”

“그렇기야 하지.”

국왕이 떨떠름하게 미소지었다. 키리에는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못을 박았다.

“만약 알려 주신다면, 제가 나타니엘 님께…….”

“아니! 아닐세. 흠, 궁정 마법사들이 하도 난리를 피워서 물어보았을 뿐이야. 그분을 귀찮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비밀로 하게나.”

노골적이지는 않아도 명백히 당황한 눈치였다.

‘나타니엘을 적대하고 있다는 걸 밝히고 싶진 않은 거지.’

키리에여도 그랬을 것이다. 회담장에서 나타니엘이 보인 태도는 절대 농담을 말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말할 때는 지금뿐이었다.

“전하. 한 말씀 올려도 될까요?”

“말해 보게.”

“아시다시피 저는 최근 전설경과 호국경께 과분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국왕이 자세를 고쳐앉았다.

“설마 먼저 말을 꺼낼 줄은 몰랐네.”

“왕세자 저하와의 약혼도 유지하지 못한 제가 말하기엔 너무 주제넘은 말이 아닐까 싶어 망설이고 있었습니다만…….”

“어떤 말이길래 그런가?”

키리에가 조신하게 손을 가슴에 얹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정식으로 후계자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두 분의 영지를 일구기에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앞으로 영지 경영에 대해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전하께 자문을 구해도 되겠는지요?”

키리에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찻물 위에 반사된 국왕의 얼굴에 기쁨이 서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영웅이 자네를 그리도 아끼는데 내가 어찌 그러겠나?”

“땅을 보살피는 일이라면 나라에서 전하를 따를 자가 없음을 압니다.”

“하하, 참.”

국왕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리기 위해서 고민하는 척 손을 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방금 키리에의 제안이 퍽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그래. 나를 잘 구슬려서 이득을 볼 생각을 해야지?’

전설경과 호국경이 버티고 있으니 키리에가 아예 국왕에게 숙이고 들어갈 수는 없다. 키리에는 나타니엘이 묘하게 차가워진 미소로 사람을 깍둑썰기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뒤에서 국왕을 구슬려 중립이 되는 수밖에 없다. 아예 권리를 넘기지도, 아예 독자적 노선을 걷지도 않게. 국왕이 너무 큰 힘을 가지게 된 자신을 적대하지 않도록 말이다.

‘솔직히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왕조도 바꿀 수 있겠지만, 그 사이에서 괜한 사람들이 피 흘리는 건 사양이야.’

키리에는 얌전히 기다렸다. 국왕과 자신의 목적이 합치하기를.

마침내 국왕이 즐겁게 말했다.

“자네는 참…… 보면 볼수록 탐이 난단 말이야.”

“과한 칭찬입니다.”

“좋네. 본디 국왕 된 자로서 특정 가문의 편의를 봐줘서는 안 되지만, 달이 뜨지 않은 밤에 일어난 일을 누가 알겠는가?”

키리에가 끝까지 품위 있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답했다.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

“우리 생각이 맞았어요.”

[역시.]

응접실에서 체스를 두고 있던 나타니엘이 쿡쿡 웃었다. 키리에는 안네마리에게 담비 털모자와 망토를 건네고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탐욕이 어마어마하던걸요? 우리 전하는.”

[오레윈브리지가 속던가?]

“저를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영리하지 못한 키리에 뷰캐넌.]

“그렇다면 이참에 그 인식을 좀 바꾸셔도 좋겠네요. 그동안의 제 처신이 도움이 되었어요. ‘왕세자와 약혼하라’라는 날벼락 같은 말에도 ‘알겠습니다’ 했던 사람을 의심하진 않을 거예요.”

[쓸데없이 고분고분했다는 말을 아주 세련되게 표현하는구나.]

말은 타박하는 모양새였지만 정말로 나무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타니엘은 [하긴, 그게 영리한 거지.]하고 중얼거렸다.

“국왕은 당신을 다시 봉인하고 싶은 모양이던데요.”

[그럴 만도 하지.]

나타니엘이 느른한 동작으로 비숍을 움직였다.

전설경의 귀환은 왕실에게는 명분 빼고는 모든 게 손해였다. 명분이라함은 시조와 함께 트레베레움을 건국했던 이경이 모두 나타났다는 것. 이는 명백히 길한 징조로 여겨졌고, 왕실을 향한 사람들의 믿음도 강해졌다.

그러나 국가 소유인 줄 알았던 토지를 그에게 돌려주어야 했으니 실리라곤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어지간히 배가 아팠을 것이다. 거기다 나타니엘이 왕실에 협조적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왕실의 선전에 협조할 생각은요?”

[없어.]

“현재 이 나라에 당신을 봉인할 수 있는 마법사가 없는 건 확실한가요?”

[당장은.]

나타니엘이 폰을 든 채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키리에는 냉큼 흰 폰을 하나 움직였다.

“당장이라는 건 완벽하지는 않다는 뜻이네요.”

[셀에는 발라브리가의 연구실이 숨겨져 있지.]

“대마법사였죠?”

[그래.]

“당신을 잠들게 한 마법을 말하나요?”

[오레윈브리지는 어중간한 성격이 아니었어. 원래는 죽이려고 했겠지.]

“그런데 왜 죽지 않고 잠든 거예요?”

[글쎄.]

나타니엘의 폰이 움직였다. 키리에는 체스판을 손톱 끝으로 톡톡 두드리다가, 다시 폰을 움직였다.

“이상한데요. 당신은 불로불사라고 했잖아요.”

키리에가 나타니엘을 바라보았다.

“뭘 숨기는 거예요?”

나타니엘이 미소지으며 나이트를 움직였다. 말하고 싶지 않을 땐 웃으면 좋다는 걸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키리에는 좀 더 생산적인 방향으로 대화를 틀었다.

“그 연구실은 어디 있나요? 먼저 가서 터뜨리는 건 어떨까요?”

[넌 몹시 파괴적인 성향이 있어.]

“어머. 들켰나요? 저의 파괴적인 룩을 보여드릴 수밖에 없겠네요.”

[거길 그렇게 막는군.]

한동안은 체스 말이 판을 두드리는 규칙적인 소리만이 방을 울렸다.

자기 차례를 막 넘겼을 때, 키리에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요즘은 겨울에 어울리는 간헐적이고 온화한 함박눈만이 종종 내렸다.

‘기분이 풀린 걸까?’

그런 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돌렸을 때, 나타니엘이 어느새 이쪽을 보고 있었다. 푸른 호수를 얼린 것 같은 눈이었지만, 전처럼 싸늘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키리에.]

“네.”

[이제 국왕은 너를 압박하겠지.]

나타니엘은 지팡이로 목 근처를 두드리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네가 의도한 대로.]

“그러리라고 생각해요. 그럴 바에야 좀 더 효과적인 쪽을 공략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만.”

[효과적인 쪽?]

“당신에게도 소중한 거라든가, 중요한 것이 있을 거 아니에요. 대외적으로 제가 그렇게 보이긴 하겠지만요.”

나타니엘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의자 깊숙이 몸을 누이고, 고개를 뒤로 젖혀 이마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의미에선 오히려 잘 선택한 거라고 봐야지.]

“네?”

키리에가 반문했다. 무슨 뜻이지?

그러나 나타니엘은 쌕 웃고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키리에는 은쟁반에 쌓인 초대장 중 아무것이나 골라 참여 의사를 밝혔다. 어디인지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수도 전체가 주시하고 있을 것이니.

“살롱에 종종 참여할 거예요. 이대로 있다간 저택 문이 당신을 궁금해하는 사람들 몸무게를 못 버틸 것 같으니까.”

[겸사겸사 오레윈브리지에게 압박도 주고.]

“되도록 그러고 싶진 않네요. 피곤한 일은 질색이에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나타니엘을 흘겨보았다.

“피곤한 일로 따지자면 당신과 레쇼 경이 제일 저를 피곤하게 만들었지만요. 무슨 생각이에요?”

[땅은 필요 없어.]

“그럼 누구든 주면 되잖아요.”

[그래서 누구든 줬지.]

나타니엘이 읽던 책의 책등으로 키리에를 가리켰다. 키리에가 입을 벌린 채 눈살을 찌푸렸다.

“저는 맡은 일이나 하면서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이에요, 나타니엘.”

[영리하지 못한 키리에 뷰캐넌 양. 고요란 힘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 법이야. 약자의 생은 늘 소란스럽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소란을 만든 사람에게 듣기엔 얄미운 말이었다. 키리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래서 살롱에는 안 가시겠다고요?”

[안 가.]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나타니엘이 실소를 흘렸다. 키리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잖아요. 품위 있는.”

[가증스럽다는 말을 몹시 세련되게 하는구나.]

“농담이에요. 그렇다기보다, 춤을 잘 추시길래 익숙하거나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단순히 인간보다 똑똑할 뿐이야.]

“세상에, 그런 말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하시고.”

저택의 책을 전부 읽어 버릴 기세던 나타니엘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조금 심드렁한 얼굴로 책을 덮었다.

[아무래도 우리 키리에 뷰캐넌께서는 내게 할 말이 있으신가 보군.]

“들켰나요?”

키리에가 소파 등받이를 만지작거리며 어설프게 웃었다.

지금까지 나타니엘 옆에는 항상 자신이 붙어 다녔다. 그러다 갑작스레 떨어지려니 걱정이 차고 넘쳤다. 혹시나 누군가 나타니엘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그래서 그가 그 누군가의 머리 뚜껑을 따서 전시할까 봐. 그리고 그 누군가가 자신의 아버지일까 봐.

‘난 분명 아버지가 싫고, 남처럼 살고 싶지만, 눈앞에서 죽는 걸 보고 싶은 것도 아니야.’

키리에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감정을 나타니엘에게 설명하긴 어려웠다. 설명한대도 그가 이해할 수나 있을까?

“부탁드릴게요. 최대한 빨리 돌아올 테니, 누굴 괴롭히고 싶어지면 꼭 제가 돌아온 뒤에 하기로 해요.”

[생각해 보지.]

“꼭 그렇게 심술궂은 대답만 하시네요.”

[그래서 불안하니?]

“의외로 아니라는 게 문제예요.”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서’?]

“정확하시네요.”

나타니엘은 깊은 곳에 흐르는 물 같은 눈을 고요히 깜빡이다가, 태연히 책을 펼쳤다.

[가 봐.]

“네, 네. 방해 안 하고 얼른 가드릴게요.”

키리에가 뒤를 돌았다. 나타니엘은 그제야 점박이 털 망토를 두른 키리에의 마른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틈으로 사라지는 드레스 자락에 푸른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지만, 키리에는 눈치채지 못했다.

***

살롱에 참여한 영랑은 아홉 명 정도였다.

주최자인 레이첼 비비안 힐 백작 영애는 키리에를 보자마자 무릎이라도 꿇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그녀를 반겼다.

“뷰캐넌 양! 와 주셨군요!”

“안녕하세요, 힐 양. 겨울인데도 정원 조경이 아름답네요. 이런 멋진 저택에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으으응, 아니에요! 오히려 저야말로 뷰캐넌 양께서 와 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정말로 그런 모양이었다. 레이첼 비비안 힐은 영랑들을 응접실로 안내하며 은근슬쩍 거드름을 피웠다.

“사실 저희가 종종 편지했던 것 덕에 와 주신 게 아닌가 했답니다.”

키리에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지었다. 연하장을 편지라고 표현하다니 깜찍하기도 하지.

“그랬죠. 힐 양은 문학적 소양이 뛰어나셔서 양의 편지를 읽는 것은 제게도 매우 즐거운 일이에요.”

레이첼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는 부러움 섞인 눈초리를 받으며 사람들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레이첼이 찻잔을 티스푼으로 두 번 두드렸다.

“모두, 저의 살롱에 와 주셔서 감사해요.”

여기저기서 천만에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겨울도 잊게 하는 아름답고 멋진 신사 숙녀 여러분을 모시게 되어 저는 아주 기쁘답니다! 살롱을 즐겨 주세요.”

레이첼이 활짝 웃었다. 키리에는 재차 미소를 점검했다. 이제부터는 소문을 물어뜯는 비단잉어 떼의 영역이다.

가장 손이 빠른 것은 역시 영애들이었다. 그들은 레이첼에게 다가가는 척하며 접근해 키리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힐 양! 실내 장식이 아주 근사해요. 힐 백작 부인의 안목이 높으시네요.”

“힐 양, 저희는 구면이지요?”

“레이첼 양! 살롱이 너무 멋져요. 그런데 옆의 분은……?”

키리에는 예의 바르게 레이첼이 자신을 소개할 때를 기다렸다.

“두 분은 아직 만나 보신 적이 없나요? 키리에 뷰캐넌 양이세요! 특별히 오늘 참석해 주셨어요!”

과시하듯 내뱉은 말에 키리에가 미소지었다.

“키리에 뷰캐넌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엘레오노라 던트리치 양, 리아나 토발트 양.”

“어머! 제 이름을 아시나요?”

“그럼요, 던트리치 양이 페렐만 추측을 증명하신 일로 사교계가 떠들썩했잖아요. 토발트 가문의 빈티지 와인을 모르는 사람도 없고요.”

“세상에…… 감동이에요, 뷰캐넌 양!”

자신에게 관심 있는 사람의 비위를 맞춰 주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

키리에는 손쉽게 살롱을 장악했다. 몇 안 되는 영식들 역시 다가와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래도 한동안은 서로 눈치만 보며 잡담하기 바빴고, 시간이 좀 지나서야 개중 가장 기질이 강한 헤이스팅스 자작이 다가와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뷰캐넌 양, 혹시 전설경께서는 사교계 활동을 하지 않으십니까?”

모두의 귀가 씰룩댔다. 키리에가 내심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것을 참고서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전설경께서는 소란을 좋아하지 않으셔서요.”

“아……. 그럼 그분을 뵙기는 어렵겠군요.”

“안타깝게도요.”

“살롱이라도 열거나 하실 수는 없을까요?”

레이첼이 냅뜨듯 끼어들어 물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분처럼 우아하고 멋진 분이 사교계에 나오지 않으시다니 엄청난 손실이에요!”

“그 맘 이해해요. 한데 안타깝게도 저는 전설경께 뭔가를 요청할 자격이 없어요. 아시다시피 그분은 문자 그대로, 전설이시니까요. 이해하시죠?”

모두가 탄식을 흘렸다. 눈빛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키리에는 사람들이 소문으로 포말을 일으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전설경을 한 번이라도 뵙고 싶었는데…….”

“검술이 아주 뛰어나시다면서요. 산도 가르고 바다도 가른다던데, 사실일까요?”

“모 후작 영식의 바짓가랑이를 가른 건 사실이던걸요…… 킥킥.”

이후 사람들은 한동안 은근한 조롱 섞인 말로 ‘모 후작 영식’을 헐뜯었다.

그들은 키리에가 대화에 참여하지 않자, 그제야 눈치를 보며 화제를 바꿨다.

“뷰캐넌 양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누군가 물었다. 사람들의 눈 여러 쌍이 다시 키리에에게 향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왓슨 양?”

“그러니까 이를테면…… 전설경이나 호국경과 좋은 관계에 있진 않으신가 해서요.”

아닌 척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 속에서 키리에가 태연히 턱을 들고 미소지었다.

“제가 두 분께 너무 큰 선물을 받아서 오해하신 모양이에요.”

“오해요?”

“네. 두 분께서는 아주 자비로우시기에 당신께서 가진 것을 나눠 주셨을 뿐이랍니다.”

“어머, 그런 건가요?”

“물론이죠. 두 분은 전설경과 호국경이신데요. 게다가…….”

키리에가 고의적으로 뜸을 들였다.

“두 분은 제게 영지의 통치권을 일임하겠다고 하셨지만, 누가 아나요? 그사이 두 분께 좋은 인연이 생길지. 그렇게 되면 전 얼마든지 그분을 위해 제가 잠시 맡아 두었던 권리를 넘겨드릴 생각이에요.”

모두의 귓전에 들리지 않는 짤랑짤랑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눈이 금화만큼 커졌다.

“연간 수익이 1200억 골드인데 그걸요?”

“애초에 제게는 과분한 자리니까요.”

그리 말하며 그녀가 우아하게 미소지었다.

“헉…….”

“아무리 그래도 1200억인데…….”

“왕실 예산이 얼마였죠?”

“그 돈이면…….”

이로써 사람들, 기왕이면 왕가의 관심이 두 사람에게 가 주면 고마운 일이다.

키리에의 입장은 아주 모호하다. 그녀는 왕가와 척을 지거나 왕가를 위협할 만한 인물이 되어서도 안 되고, 전설경과 호국경을 휘두를 만한 약점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그녀를 신경 쓰는 듯한 나타니엘의 심기가 불편할 정도로 얕잡아 보여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사교계 인사들이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키리에 뷰캐넌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

‘압박은 전부 내 선에서 처리하고, 시선은 전부 나타니엘이 잡아끌도록.’

나타니엘은 의외로 이런 제안을 싫어하지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가 ‘과연 네 생각대로 될까?’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쯤은 키리에도 알 수 있었다.

‘되게 만들 거야. 누가 그 걸어 다니는 최종 병기를 건드리는 것도, 그렇다고 내가 사람들의 표적이 되는 것도 사양이야.’

키리에의 계획에 그다지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의 계획에 변수가 있을 수 있다면 그건 그녀를 휘두를 수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리고 나타니엘의 비호를 받는 키리에를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손가락에 꼽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럴 수 있는 사람 중 키리에와 목적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살롱이 전설경의 이야기로 들뜬 참이었다. 하인 한 명이 급하게 달려와 레이첼에게 작은 쪽지 하나를 건네곤 달려 돌아갔다. 하인을 꾸중하려던 레이첼이 벼락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나, 어머나! 어머,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나!”

경망스러운 태도에 사람들이 인상을 썼으나 레이첼은 신경 쓰지 않고 난데없이 몸단장을 시작했다.

“어떡하지? 세상에, 어쩜 좋아! 이럴 줄 알았다면 더 비싼 드레스를 입을걸!”

“힐 양, 공기가 탁하네요. 창문을 열어도 될까요?”

한 영애가 ‘네 동작이 너무 부산스러워 먼지가 난다’를 완곡어법으로 타박했다. 레이첼은 개의치 않고, 붉어진 얼굴로 머리카락을 만지며 외쳤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여, 여러분, 지금 저희 살롱에……!”

그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응접실 문이 열렸다.

남의 살롱에 늦지 않는 것이 예의라지만, 현재 트레베레움에서는 그 예의를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딱 셋 있었다.

국왕, 전설경, 호국경.

응접실에 나타난 것은 호국경이었다.

〔실례하겠다.〕

모두의 몸이 굳었다.

나타니엘만큼은 아니더라도 레쇼 역시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곱슬거리는 금발은 결이 좋았고, 잘 익은 체리 같은 붉은 보라색 눈동자는 무정에 흠뻑 젖어 심장을 설레게 했다. 표정 없는 석고상 같은 얼굴은 묘하게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추위를 느끼지 않는지 가벼운 예복 차림이었고, 허리춤에는 먹빛의 가느다란 세검이 매달려 있었다.

일전에 나타니엘의 검을 막았을 때와는 형태가 달랐다. 사람들은 그들의 검이 편의에 따라 모습을 바꿀 수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예고도 없이 등장한 레쇼는 곧바로 키리에에게 다가갔다.

〔키리에 뷰캐넌. 잘 지냈습니까.〕

키리에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런 식으로 나와서 어쩌자는 거야, 대체.’

기껏 아무 사이 아니라고 둘러댔는데 이렇게 사람을 특별 대우하면 자신이 한 말이 다 거짓말로 들리지 않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키리에가 울고 싶은 심정으로 미소지었다.

“안녕하세요, 레쇼 경. 저는 잘 지내고 있답니다. 하지만 경께 살롱에 참여하면 주최자에게 먼저 인사하는 것이 예의라는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그렇습니까. 몰랐습니다.〕

레쇼가 레이첼에게 몸을 돌렸다. 그는 담백하게 목을 까딱였다. 인사말을 할 거라고는 애초에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확실히 예의범절은 저 지평선 너머에 갖다 버리고 온 듯했다.

‘나타니엘은 예의로 따지자면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던데, 또 왜 이렇게 다른 거야.’

키리에가 내심 한숨 쉬었다.

레이첼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말을 못 꺼내고 있는 듯했고, 다른 사람들은 차마 그에게 말도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어쩐 일이세요?”

〔차를 마시러 왔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앉아도 되나?〕

질문은 레이첼을 향한 것이었다. 레이첼이 퍼뜩 놀라 고개를 끄덕이며 하인을 불렀다.

살롱 분위기는 개판이 되었다. 사람들은 호국경에게 말을 걸고 싶어 했으나 레쇼는 무표정으로도 싫은 기색을 비쳤고, 응접실에는 작은 음악 소리만 흘렀다.

‘도망치고 싶다.’

키리에가 다시 한번, 눈물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이 분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차는 입맛에 맞으시나요, 레쇼 경? 힐 양은 차 우리는 솜씨가 일품이거든요.”

〔맛있습니다.〕

레이첼은 키리에에게 앞으로 내가 네게 매우 호감을 가질 심산이라는 눈빛을 보냈다.

“원래 살롱에는 잘 참석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아는데, 어쩐 일이신가요?”

〔당신이 참석했다기에 들렀습니다.〕

‘제발 오해 살 만한 발언은 그만둬 주세요.’

점점 따가워지는 눈총에 키리에의 뒷골이 띵했다.

“전설경을 찾아오시면 저는 덤으로 볼 수 있으실 텐데요.”

〔나타니엘이 있는 자리에서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째서요?”

〔싫어할 겁니다.〕

“그가 싫어하는 게 문제가 되나요?”

묘하게 대답이 늦어지는 듯했다.

〔아주.〕

키리에가 주먹을 쥐었다. 그녀는 긴장을 미소로 덮었다.

“그렇죠. 상대가 싫어할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죠.”

레쇼가 속을 알 수 없는 불투명한 눈을 깜빡였다.

〔당신이 싫어할 행동은 뭡니까?〕

마치 키리에가 엄청나게 중요한 존재인 듯한 뉘앙스였다. 이쯤 말리지 않으면 정말로 뒤처리가 곤란해진다.

키리에는 웃음을 멈췄다.

“최근 포트듀케인 쪽에 클라시코 항을 개방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라우라 포트듀케인이 저랑 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혀 다른 이유는 없나요?”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저를 위해서가 아니겠죠. 맞나요?”

레쇼의 붉은 보라색 눈이 기이하게 번득였다.

이들 초월자는 가끔 인간을 이런 눈으로 본다. 원숭이가 수학 문제를 계산하는 것을 본 인간처럼, 아주 기특하다는 듯이.

〔맞습니다.〕

“나타니엘 님 때문이겠죠. 나타니엘 님이 저를 아끼신다고 했기 때문에.”

〔정확합니다.〕

“그럼, 나타니엘 님이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아끼게 된다면, 그분께도 잘해 주시겠네요. 제게 영지를 주신다고 한 건 오로지 전설경 때문인 거예요. 맞나요?”

〔맞습니다.〕

“제가 아니라도 상관없는 거고요.”

키리에가 주변을 흘끗 넘겨다보며 말했다.

‘들었지? 나라서가 아니야. 너희도 이렇게 될 수 있어. 그러니까 애꿎은 나를 욕할 생각 말고, 이들의 총애를 얻을 생각이나 해 보라고.’

다행히 키리에의 의도대로, 사람들이 묘한 흥분에 휩싸였다. 잘만 하면 키리에 뷰캐넌에게 간 영지를 넘겨받을 수도 있겠다는 탐욕.

레쇼는 마지막까지 순순히 대답했다.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는 뭔가를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러나 키리에가 그것을 막았다.

“그 정도면 됐어요. 차를 마실까요? 살롱에서는 서로 한마디 이상 대화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다. 하지만 레쇼는 묵묵히 그 말에 따라 살롱의 모두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피로에 지친 키리에는 자리를 옮겼다. 외진 벽에 덜렁 놓인 의자였다. 멀리서, 더는 관계없는 사람처럼 앉아 키리에가 생각했다.

‘나타니엘이 레쇼 경을 반만 닮았으면 좋겠네.’

사람들은 다시 키리에에게 온화해졌다. 찌를 것 같던 시선은 ‘우리에게 호국경과 대화할 기회를 주다니! 역시 뷰캐넌은 공평하군!’ 같은 눈빛으로 바뀌었다. 바라던 바다.

‘이 정도가 좋아. 중립이 아니면 살아남기 어려워.’

알지만 피곤한 것도 사실이다. 고려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일단 여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으니 한시름 놓은 셈이다.

레쇼는 모든 참여자와 한마디 이상 대화해야 한다는 임무를 끝마친 뒤에야 키리에에게 다가올 수 있었다. 그땐 누구도 그녀에게 눈총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네 자리는 곧 내가 차지할 테니 지금의 특별 대우는 이해해 주마.’ 같은 인정이 넘쳤다.

〔그런 규칙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거짓말이에요.”

〔…….〕

“용건은요? 호국경쯤 되시는 분이 아무 이유 없이 오진 않으셨을 테고.”

다시, 그 눈빛이었다.

〔나타니엘은 어떻습니까.〕

“보러 오셔도 돼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더 필요한 건 없습니까?〕

“있다고 하면 들어주실 건가요?”

〔최대한 그러겠습니다.〕

오히려 너무 관대한 대답에 키리에가 레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은 뭔가요?”

〔아까 답했습니다.〕

“제 의견 역시 아까와 같아요. 당장 내일 나타니엘이 저를 죽일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요?”

〔차라리 그게 낫습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죽을 바에야 말입니다.〕

키리에가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은 없었다.

“저를 죽이려는 움직임이 있나요?”

〔아직은 아닙니다.〕

“그걸 막으려고 일부러 그렇게…… ‘키리에 뷰캐넌’의 이름을 높이려고 행동하신 거군요. 감히 그럴 마음도 먹지 못하게끔.”

레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분명 날이 맑았건만 구름이 끼고 있었다.

〔뷰캐넌 저택으로 돌아가십시오.〕

“저건 그냥 평범한 겨울 날씨예요.”

〔당신보다는 내가 더 잘 알 겁니다. 오늘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나타니엘과 합의되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네? 그걸 왜 두 분이 합의해야 하는 건가요?”

〔우리는 각각이 한 종을 대표하는 독자적 개체이며, 최초이자 최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되도록 서로의 영역을 존중한다는 불문율이 있습니다.〕

“그 독자적 개체께서는 분리 불안 증세라도 있나 보죠.”

레쇼가 매끄럽게 이어지던 대화를 멈췄다. 재밌어하는 건지, 불쾌감을 느끼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첫째, 나라면 그걸 소유욕이라고 말하겠습니다. 둘째, 너무 강한 힘이 한곳에 고이면 질서가 무너집니다.〕

개가 나무껍질을 긁는 것처럼 거친 목소리에는 어딘지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하인 한 명이 날씨가 궂어지는 것을 알리러 들어왔다. 키리에는 레이첼이 살롱을 수습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물었다.

“마지막에 하지 못한 말은 뭐였나요?”

당연하게도 레쇼는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

〔나타니엘은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그는 영원불멸하며, 그의 선택 역시 불가변의 영역에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그는 죽음과 거래해서라도 당신을 되돌려받을 겁니다.〕

그는 여상스럽게 말했으나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그렇게 말하는 레쇼의 태도가 지나치게 담담했기 때문에, 키리에는 깨달았다. 그게 사실이라는 걸.

***

저택으로 돌아온 키리에가 나타니엘이 있는 빌리어즈 룸으로 향했다. 나타니엘은 떠나기 전 보았던, 책을 읽는 자세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저 왔어요. 다행히 문 앞에 사람 머리가 걸려 있진 않네요.”

[인사말이 품위 없기로는 일품이야.]

키리에는 물끄러미 나타니엘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가 들고 있는 책을.

인간보다 월등하여, 책 한 권 따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읽어 버리는 나타니엘. 그러나 책장은 떠나기 전 펼쳐져 있던 부분 그대로였다.

그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키리에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책을 덮어 버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새벽보다 차가운 푸른 눈은 웃음새를 지었지만, 말은 없었다.

키리에는 두려워졌다.

‘레쇼 경의 말이 사실이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

다음날, 초대장이 날아왔다. 금빛 봉투에 금빛 밀랍. 트레베레움에서 금색은 왕족의 색이다.

“발신인은…… 공주구나.”

국왕에게는 슬하에 왕자와 공주가 한 명씩 있고, 편지는 공주인 줄리아 오레윈브리지로부터 온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전에 없던 일이다.

키리에와 줄리아는 사이가 좋지 않다. 키리에는 사교계에서 마리아를 필두로 한 귀족파 쪽에 있고, 그녀는 반대파인 공주파의 수장이니까.

키리에가 눈을 가늘게 뜨고 편지지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말을 할지 기대되는걸.”

그녀는 담담히 은쟁반에 봉투를 내려놓았다가, 옆에서 나뭇잎을 잔뜩 들고 있는 안네마리를 보곤 미소지었다.

“안네마리. 웬 거야?”

“나쁜 냄새가 났어요! 안네마리는 막아야 해요!”

“이 편지에서 말이야?”

“네! 안네마리가 처리할까요? 안네마리는 이런 거에 자신이 있어요! 이거는 문지르면 눈곱이 많이 생기고요, 이거는 발가락에 벌레가 물리고요, 이거는…….”

“왕가를 능멸한 죄로 잡혀가면 어쩌지?”

“그럼! 그럼……! 힝, 그럼 안 되는데…….”

시무룩해진 안네마리를 키리에는 가볍게 끌어안았다. 품 안의 안네마리가 은근슬쩍 편지지에 나뭇잎을 비비는 것은 눈감아 주기로 했다.

“그럼 나쁜 냄새를 풍긴 사람이 누군지 보러 갈까, 안느?”

줄리아 오레윈브리지는 금발에 잘 익은 청포도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긴 곱슬머리에 반사되는 금빛이 눈부셔서 눈이 멀 지경이었다.

그녀의 방 역시 휘황찬란한 금빛투성이였고, 이빨과 발톱을 뽑은 금빛 표범이 몇 마리 어슬렁거렸다.

“아아. 어서 와요, 뷰캐넌 양. 굉장히 오랜만이군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공주가 말했다. 키리에가 몸을 숙였다.

“존귀하신 태양의 따님을 뵙습니다.”

“후후, 뷰캐넌 양도 참. 아직도 궁중 예법을 칼 같이 지키는군요.”

‘그야 언제 어떻게 책잡힐지 모르니까.’

키리에가 속으로 되뇌었다.

줄리아는 탐욕이 많았다. 갖고 싶은 건 뭐든 가져야 하는 성미였고, 집요함도 있었다. 변덕이 죽 끓듯 하고 성격은 불같은데, 그러면서도 정치 감각은 특출나 대하기 까다로운 상대였다. 마리아가 공주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는 것을 키리에는 여러 번 보아 왔다.

“어쩐 일로 부르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뷰캐넌 양, 그대는 내 성격을 너무 잘 아는군요. 그래요, 우리 중요한 이야기나 할까요?”

줄리아가 씩 웃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향을 피운 뒤, 긴 소파에 다리까지 올리고서 누웠다. 무례하다고 할 수도 있는 자세였지만, 공주 궁에서 공주를 나무랄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별건 아니니 힘 빼고. 응. 그래, 뷰캐넌 양, 그대의 백작가에 전설경이 머물고 계신다죠?”

“네, 그렇습니다.”

“흠…….”

줄리아가 시종에게서 긴 담뱃대를 받아 담배를 채웠다.

연기가 오르자 담배 냄새에 익숙하지 않은 키리에가 콜록댔지만, 줄리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만날 수 있을까?”

“콜록, 나타니엘을, 콜록, 요?”

줄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님’이 아니네? 친한가 보군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흐응. 뭐 좋아요. 그래요. 나타니엘을.”

“콜록…… 송구하오나, 공주 저하, 저는 그분께 무언가를 요청할 입장이 되지 못합니다.”

“뭐, 딱히 뷰캐넌 양에게 뭘 하라는 건 아니에요. 나도 힐 백작가의 살롱 이야기는 들었지. 호국경이 왔다면서.”

줄리아가 담뱃대를 들지 않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꼬았다.

이제 테이블 위의 향과 줄리아의 담배 연기 탓에 그녀의 모습은 반쯤 불투명하게 보였다.

‘왜 연기가 흩어지지 않지?’

키리에가 의아한 마음을 숨기고 차분히 줄리아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으로 그대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진 않아. 중립, 좋은 거지.”

연기 너머로 찌르는 듯한 줄리아의 시선이 와닿았다.

“애초에 이걸 노렸잖아요? 그냥, 기회를 마련해 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래요. 알죠?”

“네, 물론 뜻하시는 바는 알고 있으나…….”

“아니면 당신이 나를 초대하면 되잖아요. 그렇죠? 그것도 좋겠군요.”

“네? 어찌 공주 저하께서 백작가에…….”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요. 그래, 살롱이 좋겠군요. 살롱 하나 열어요. 돈 필요한가? 뷰캐넌이 그 정도로 가난하진 않겠지.”

“공주 저하, 귀하신 분을 누추한 곳에 모실 수는 없는 일입니다.”

줄리아가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러니까, 내가 괜찮다니까요? 공주인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호사가들이 수군거릴 겁니다.”

“뷰캐넌 양.”

갑자기 줄리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싸늘한 얼굴로 담배 연기를 머금었다가, 후 불어 키리에의 입에 뱉어냈다.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을까?”

음산하고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불현듯 키리에에게 한 가지 깨달음이 스쳤다.

‘마법이구나. 연기에 마법이 녹아 있어.’

오레윈브리지는 전통적으로 대마법사의 혈통. 당연히 국왕도, 줄리아도 마법을 쓸 줄 알았다.

키리에가 재빨리 눈의 초점을 흐렸다. 이런 경우 대부분 정신계 마법이다. 그리고 정신계 마법에 걸린 척하는 시늉은 귀족이라면 누구나 배운다.

“하지만…… 하지만, 공주 저하.”

“자, 내 말 잘 들어야죠.”

“하지만…….”

“쉿. 내 말이 맞아요. 그렇지?”

“……네.”

키리에의 판단은 옳았다. 그녀가 온순히 대답하자 줄리아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담뱃대를 내려놓았다.

“정신력 강한 애들은 이래서 귀찮아.”

키리에가 완전히 마법에 걸렸다고 생각한 줄리아는 키들거리며 다리를 흔들었다.

“그냥 좀 네, 네, 하면 덧나나, 짜증 나게.”

“…….”

“어머니는 왜 이런 귀찮은 일을……. 그냥 서고고 뭐고 밀어 버리면 그만일 것을.”

서고. 키리에가 스쳐 지나간 단어를 가만히 되새겼다.

‘잊고 있었어.’

트레베레움에도 국사를 적은 실록이 존재한다. 또한 실록은 국왕에게도 공개하지 않으며, 오직 왕실 서고의 사관만이 읽을 수 있다.

‘거기에 발라브리가의 연구실이나, 나타니엘을 봉인한 마법에 관련된 기록이 있는 걸까?’

줄리아의 혼잣말에 따르자면 국왕은 왕실 서고를 노렸으나 차마 금기를 깨진 못한 듯했다.

키리에는 조심스럽게 줄리아가 다른 정보를 던져 주길 기다렸으나, 줄리아는 그 이상 쓸모있는 정보를 말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로써 확실해졌다. 왕실은 갑자기 나타난 전설경의 목줄을 쥐고 싶어 한다.

‘마법을 사용해서든, 전설경의 총애를 얻어서든.’

키리에의 눈이 남몰래 냉정하게 빛났다. 그녀는 조용히 소파에 늘어져 다리를 휘적거리는 줄리아를 살폈다.

줄리아는 키리에가 마법에 걸리지 않았을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지 여러 말을 주절거렸다.

“뭐, 그렇지만 전설경이 엄청 잘생겼다니까 보고 싶긴 해. 잘 풀리면 좋을 텐데 나보다 강할 테니까 그건 무리겠고……. 그래도 얼굴은 보고 싶으니까, 응. 도와줄 거죠, 뷰캐넌 양?”

줄리아가 키리에를 향해 물었다. 아름답고 잘생긴 사내를 탐하기 좋아한다던 그녀다운 말이었다.

키리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공주 저하를, 백작가에 초대하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좀 낫네.”

줄리아가 픽 웃었다.

“난 예전부터 네가 너무 비싸게 굴어서 싫었거든. 고작 백작 영애 주제에……. 어머니는 그래서 네가 좋다고는 했지만.”

“…….”

“시골뜨기 캐스너도 맘에 들지는 않지만, 걔는 좀 귀엽잖아. 열등감 덩어리를 갖고 노는 건 정말 짜릿해…….”

줄리아가 키득거렸다.

그녀는 곧 모든 흥미가 떨어졌는지 재떨이를 근처 시종의 이마에 내던졌다. 그리고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시종을 쳐다보지도 않고서 명령했다.

“우리 ‘뷰캐넌 양’ 좀 모셔가. 적당히 환기되는 곳에 앉혀 놓았다가 꺼지라고 해.”

***

하인들은 밖에서 대기 중이던 안네마리에게 키리에의 신병을 양도하고 떠나갔다. 키리에는 그제야 긴 한숨과 함께 태세를 정돈했다.

“하…….”

심장이 쿵쿵거렸다.

‘마법까지 사용할 줄은 몰랐어.’

옛날보다 마법사들의 능력이 줄어들긴 했지만, 마법사는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다. 당연히 귀족에게 마법을 사용하는 것 역시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걸 가장 잘 알고 있을 사람인 줄리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정신계 마법을 썼다는 건 많은 걸 의미했다.

‘왕가는 진심이야. 진심으로 나타니엘을 갖고 싶어 하고 있어.’

나타니엘은 폭풍의 눈이었고, 그를 중심으로 키리에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 일을 얕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키리에가 복잡한 심경으로 본궁과 부속 건물을 잇는 파빌리온에 다다랐을 때였다. 스치듯 주변을 바라본 키리에의 눈에 무언가가 띄었다. 먼 곳에서 금빛으로 반짝이는 머리칼이 휙 스쳐 지나갔다.

“루비니아 캐스너?”

키리에의 중얼거림에 안네마리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크고 검은 눈이 바로 대상을 찾아냈다.

“네! 캐스너 양이에요, 아가씨.”

“좀 더 자세히 보여?”

안네마리가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술술 입을 열었다.

“모자에는 꿩 깃털이 달려 있고요, 머리는 돌돌 말아서 땋았어요! 숄 안에 책을 여러 권 들고 있어요. 레이스가 새로 나온 레이스예요! 저건 우리 아가씨한테 더 어울릴 것 같아요.”

“책 제목이 보이니?”

“「롤랑바르크 대진 설계법 2편」하고 「잉게 아난타 비망록」이에요.”

“그래?”

둘 다 키리에가 아는 책이었다.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초판본만 남아 시중에 나돌지는 않는 책.

키리에가 루비니아가 나타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쪽은…….’

키리에의 보랏빛 눈이 예리해졌다.

‘왕실 서고 방향.’

그녀는 사라져 가는 루비니아의 뒷모습을 재확인한 뒤 마차에 올랐다. 안네마리에게 망토를 벗어 주며 문득 키리에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마법이 듣지 않았지?”

“아-!”

그때 안네마리가 짧게 외쳤다. 안네마리는 작은 손으로 키리에의 망토를 조물조물 만지더니 기묘한 문양이 그려진 나뭇잎을 꺼냈다. 나뭇잎은 꺼내자마자 검게 바스러졌다.

“안네마리가 이럴 줄 알았어!”

“그게 뭐야?”

“이럴 것 같아서 안네마리가 아까 넣어 놨어요! 봉투에서부터 나쁜 냄새가 났기 때문이에요!”

의기양양하게 말하던 안네마리는, 금세 태도를 바꿔 주변을 살피며 속닥거렸다.

“하지만 비밀이에요! 안네마리는 잡혀가고 싶지 않아요……!”

키리에가 웃었다. 잔뜩 팽팽해졌던 실이 느슨해진 기분이었다.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매발톱꽃 색 눈을 차갑게 빛냈다.

‘어차피 돌이킬 수 없어. 국왕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자고.’

그리고 정말로,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줄리아의 제안을 전해 들은 나타니엘은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은 봐두는 게 좋겠지.]

“별로 좋지 않게 들리는 말이네요.”

키리에는 그가 무슨 생각일지 궁리하며 빤히 바라보았다.

나타니엘은 양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지팡이를 수평으로 걸친 뒤 묘하게 미소지었다.

[신경 쓰이니]

“조금은요.”

키리에의 대답에 나타니엘이 피아노를 연주하듯 손가락을 움직이던 것을 멈췄다. 대답을 구하듯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푸른 시선에, 키리에는 아이를 어르듯 대답했다.

“여차하면 제가 응대할 테니까, 너무 과하게 하진 말아 주세요. 알겠죠?”

[아. 그 신경.]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더 말하지 않았다.

***

전설경과 공주가 참석하는 살롱이 열린다는 소식이 셀 아렐라노 전역에 퍼졌다.

모두가 초대장을 받기 위해 앞다투어 키리에에게 뇌물을 보내왔지만, 키리에는 가문의 마차까지 써서 정중하게 반송했다.

공주가 참여하는 살롱이다. 아무나 들일 수는 없었다.

줄리아의 방문에 가장 기뻐한 것은 세자르였다. 그의 서재에 불려갔을 때, 키리에는 없던 의자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조소를 지었다.

“웬 의자예요?”

“앉거라.”

“늘 서서 했으니 이번에도 서서 하시죠.”

냉랭한 말에 세자르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자신을 망치는 일을 극도로 삼가는 성격인 그는 드물게도 궐련을 피우는 중이었다. 키리에는 그가 궐련을 피우는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어머니와 이혼했을 때. 그리고 내가 왕세자와 약혼했을 때.’

어린 마음에도 키리에는 그가 매우 기분이 좋을 때만 궐련을 피운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그렇게 만들려고 노력했던 적도 있지만, 다 지난 일이었다.

“넌 날 닮아서 똑똑했지.”

“정말 싫지만 지능은 대부분 유전이니까요.”

“뻣뻣한 건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군. 쯧, 이번엔 잘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다.”

“다음부터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는 전보로 부쳐 주세요. 가도 될까요?”

“앉아라, 키리에.”

평소의 세자르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키리에가 차분히 맞은편에 앉아 세자르를 바라보았다.

연보랏빛 머리칼에 예리한 보라색 눈. 얼굴은 갸름하고 나이에 비해 노화가 느리다. 전체적으로 준수한 미중년이지만 그의 인상은 승냥이를 연상케 했다. 뒤를 내주면 뒤통수를 씹어먹을 것 같은 게걸스러움은 젊음이 허락한 풋내가 사라지자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난 늘 네가 키워 준 값을 하리라 믿고 있었지.”

“부모는 자녀 양육의 의무가 있지만, 자식에게는 그걸 보답할 의무가 없는데요, 아버지.”

세자르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일전에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러는 게냐? 가주로서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면 그것도 이해 못 할 정도로 천치인 게냐?”

“요즘 제가 제일 좋아하는 속담은 ‘사연 없는 무덤 없다’ 인데, 혹시 들어보셨나요?”

“전설경, 호국경과는 계속 친하게 지내도록 해. 물론 줄리아 공주와도. 그렇다고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진 말고. 현재 트레베레움의 정세는 극도로 첨예한 갈등상태야.”

“제 인간관계에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세요. 아버지의 말 잘 듣는 딸은 이든과 파혼하면서 같이 죽었거든요.”

두 사람 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세자르의 기세가 보다 사나워졌다.

“내 말을 들어서 네가 손해 본 게 있기나 하느냐?”

“제 평판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시나 봐요.”

“그건 오히려 네가 내 말을 안 들어서였지. 그러게 살갑게 굴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고작 그걸 못 해서…… 쯧.”

세자르의 눈이 책망의 빛을 띠었다.

“이번엔 똑바로 행동해. 나는 남서부 지방 귀족들과의 회합으로 바쁘니 신경 쓰게 하지 말아라.”

키리에가 멈칫했다.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쪽은 저희 영역이 아니잖아요.”

“가신을 늘려야지. 곧 공작가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아버지. 설마 전설경과 호국경의 토지를 담보로 뭔가 하고 계신 건 아니겠죠?”

“그럼 그 땅을 그냥 썩힐 생각이냐?”

세자르가 사납게 웃었다. 징그러울 정도의 권력욕에 키리에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입을 가린 채 낮게 외쳤다.

“그건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어요. 왕실도, 귀족들도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요!”

“그러니 왕실과 협상을 해야겠지. 아주 좋은 일이야. 뷰캐넌은 내 대에서 공작가가 될 거다. 반드시.”

“게다가 아버지가 아니라 제게 넘겨진 땅이잖아요!”

키리에의 외침에도 세자르는 시큰둥했다. 오히려 파렴치한을 보듯 키리에에게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이내 그의 얼굴이 친딸을 향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갑게 굳었다.

“키리에 뷰캐넌. 그래서 그 땅을 너 혼자 독식하겠다는 뜻이냐?”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요! 왕실보다 넓은 영지, 왕실보다 많은 수입, 왕실보다 많은 지지를 얻으면 반드시 탈이 생겨요! 그걸 왜 모르세요!”

“그러니 네가 똑바로 해!”

세자르는 고함과 함께 키리에에게 들고 있던 궐련을 내던졌다.

“이번엔! 똑바로! 머리를 써서든 몸을 써서든! 기회를 놓치지 마! 네가 무슨 수로 전설경을 꼬시고 호국경을 꼬셨건 상관없으니 둘을 제대로 묶어 놔! 그러면 왕실도 귀족들도 아무 말도 못할 것 아니냐!”

궐련은 치맛자락에 맞고 튕겨 나가 바닥을 굴렀다. 키리에는 가는 숨을 내쉬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몸이요? 지금 저한테 창녀처럼 굴기라도 하란 말씀이세요? 그깟 영지 때문에?”

“그깟 영지? 그깟 영지라는 말이 나와! 너를 팔아도 1200억이나 나올 것 같으냐! 그걸 알면서도 그런 멍청한 말을 해!”

“귀족답게 품위를 지키라고 한 건 아버지였어요! 그렇게 가르치셨잖아요! 그래놓고 인제 와서 창녀처럼 몸이라도 쓰라니요! 거 참 퍽이나 귀족적인 태도네요!”

키리에는 자신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리고 있음을 알았다.

눈앞이 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세자르의 코웃음 소리만은 똑똑히 들렸다. 오히려 정말 묻고 싶다는 투였다.

“애초에 그 목적이 아니라면 내가 널 왜 키워야 했느냐?”

***

줄리아 공주는 말 여섯 마리가 끄는 황금색 육두마차를 타고 나타났다. 이미 살롱은 한창 진행 중인 때였다.

“아, 뷰캐넌 백작. 그간 잘 지냈습니까?”

그녀가 당당하지만 어딘지 교만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세자르는 마냥 기쁜 듯 웃어 보였다.

“줄리아 공주 저하! 누옥에 이런 귀한 분을 맞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환대 고맙습니다. 뷰캐넌 양, 익숙한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그런데 얼굴이 창백하군요?”

줄리아가 세자르 뒤에서 굳은 얼굴로 서 있는 키리에를 넘겨다보았다. 세자르는 키리에를 보며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가, 다시 줄리아에게 미소를 보였다.

“딸애가 긴장해서 그렇습니다. 공주 저하께서 참여하시는 살롱인지라, 단단히 준비해야 했으니 말입니다.”

줄리아는 비죽 웃음을 흘렸다.

“그 정도로 배짱 없어 보이지는 않았는데……? 뭐, 좋습니다. 안내해 주면 좋겠군요.”

세자르는 줄리아를 극진히 모시며 정원으로 향했다.

아카시아와 치자나무가 심긴 정원은 인공 꽃 장식으로 겨울의 헛헛함을 지워냈다. 하늘에는 열을 발산하는 마석이 실처럼 엮여 반짝반짝 빛났고, 하인들은 그래도 혹시 추울까 풍로에 바람을 넣기에 바빴다.

살롱치고는 많은 인원인 열댓 명의 사람들은 모피를 걸친 채 삼삼오오 떠드는 중이었다.

그곳에 줄리아가 등장하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공주는 그들에게까지 시선을 주지는 않았다.

“전설경은?”

“이쪽입니다.”

세자르가 움직이자 사람들이 길을 열었다. 썰물처럼 갈라진 인파 사이로 정원의 중앙, 메마른 넝쿨이 타고 오른 파고라가 보였다.

나타니엘은 그곳에 있었다.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는 오연한 기운을 풍기며.

그는 따분함과 나른함이 반쯤 뒤섞여 어딘지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먼 곳을 보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줄리아가 걸음을 멈췄다.

“공주 저하?”

세자르가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줄리아는 눈을 크게 뜨고서 굳어만 있었다. 세자르가 인상을 쓰며 다급하게 뒤에 있던 키리에를 돌아보았다.

“키리에. 당장 저하를 살피지 않고 뭐하는…….”

“저자가 전설경인가?”

줄리아가 조용히 물었다. 어딘지 서늘한 질문이었지만, 키리에는 그 목소리에서 심장 박동을 느꼈다.

키리에는 뒤늦게, 줄리아의 시선이 나타니엘에게 못 박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나타니엘은 지나치게 잘생겼고, 줄리아는 잘생긴 남자를 모으는 취미가 있다.

“……완벽하군. 완벽해. 완벽하도다.”

줄리아의 녹색 눈동자가 기이한 열망으로 들뜨기 시작했다.

“……가지고 싶군.”

그녀가 중얼거렸다. 키리에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다행이랄지, 키리에를 대신해 세자르가 태연히 나섰다.

“저하.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음?”

“끝까지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는 아무래도 전설경의 미움을 산 듯해서 말입니다.”

“어쩌다 그리되었소?”

“딸 가진 아비란 원래 아무 잘못 없어도 미움받는 존재 아니겠습니까.”

세자르가 별일도 아니라는 듯이 웃었다. 실은 상당히 아쉬워하고 있을 텐데도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나타니엘은 일찍이 세자르에게 접근 금지를 선포한 적이 있다.

‘너는 살고 싶으면 내게 다가오지 않는 게 좋겠어.’

수틀리면 죽이면 그만인 것을, 굳이 언질까지 해 주는 건 분명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이유는 누가 봐도 그가 키리에 뷰캐넌의 아비이기 때문이었다.

분명한 특별 취급에 세자르는 나타니엘이 웬만한 일로는 자신을 죽이지 않으리란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교묘하고 야비하게 전설경의 이름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전설경은 그것을 눈감아 주었다.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공주 저하. 끝까지 모시지 못해 송구합니다.”

“괜찮으니 가 보시오.”

줄리아는 이미 세자르에게 할애할 상냥함을 다 써 버린 듯했다.

그녀는 더는 기다릴 수 없었는지, 나타니엘이 있는 파고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키리에가 채 말리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신이 전설경이군요?”

자신이 뭘 저질렀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낭랑한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본디 귀족은 초면이면 지인의 소개를 받는 것이 예의다.

줄리아는 그런 것을 깡그리 무시한 채, 나타니엘에게 허락도 구하지 않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전 공주예요. 줄리아 오레윈브리지.”

나타니엘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은데.’

키리에가 재빨리 빈 자리에 앉았다.

“나타니엘 님, 이쪽은…….”

“쥴스라고 불러 주시면 좋겠군요.”

줄리아는 아무래도 당돌한 매력이 먹힐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타니엘의 맑은 눈이 무심하게 깜빡거렸다. 대답이 없었기에, 줄리아는 끈질기게 말을 붙였다.

“경은 내 시조와 벗이었다죠. 셀 아렐라노는 어떤가요? 경이 살던 때와는 적잖이 다르겠군요?”

마침내 나타니엘이 반응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는 사람이나 짓는 미소를 지었다.

[다르지.]

줄리아의 눈에 불꽃이 번쩍 튀었다. 그녀의 뺨이 웃음기로 떨렸다.

“셀로 오시지 않겠어요?”

[셀?]

“그래요! 왜 이런 곳에 계시는 거죠?”

줄리아가 점잖은 척 양손을 펼쳐 보였으나, 아무리 봐도 다소 거만하게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셀은 훨씬 좋습니다. 한 층이 아니라 궁 하나를 통째로 빌려드리죠. 경의 영지는 이미 반환되었을 테고, 저택은 새로 짓거나 마땅한 곳을 찾아야 할 테니 시간이 걸리겠군요. 그동안 셀에 계시면 좋겠고요.”

나타니엘의 미소가 시시각각 짙어졌다.

키리에는 나타니엘이 줄리아를 마뜩잖아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매우 예의를 중시하는 편이었고, 줄리아는 있는 힘껏 예의를 걷어차는 중이었다.

“공주 저하. 조금 더 말씀 나누신 다음에 이야기하시면 어떨까요?”

“끼어들지 말아요, 키리에 양.”

“왕세자 저하께서도 나타니엘 님의 안부를 궁금해하지 않으시던가요?”

의미심장한 말에 줄리아가 멈칫했다. 그녀는 이내 쏘아붙이듯 키리에를 바라보다가, 뺨을 들썩이며 미소지었다.

“아아, 그렇군요. 미안하군요, 뷰캐넌 양. 그대 말이 맞아요. 우리 오라버니도 나타니엘 님의 안부를 궁금해했었죠.”

키리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줄리아는 이든보다는 눈치가 있었다.

“부디 키리에 양도 대화에 참여해 주면 좋겠군요. 나만 말하다간 나도 모르게 왕실의 비밀 같은 걸 떠들어 버릴 것 같아요. 날 알잖아요?”

대화가 이어지는 내내 나타니엘은 거의 말하지 않았고, 줄리아는 셀에서 머무를 때의 이점에 대해 열변을 토하거나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키리에는 그 사이에서 나타니엘의 미소가 진해질 때마다 간접적으로 줄리아를 제지했다.

[너는 마법사구나.]

마침내 나타니엘이 먼저 화제를 꺼냈다. 줄리아가 반색했다.

“마법에 관심이 있으시군요?”

[있지.]

그가 지팡이를 살피는 동작을 하며 느리게 시선을 움직였고, 줄리아와 키리에의 눈도 묘하게 그것을 따랐다.

[오레윈브리지의 연구실을 아니?]

너무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본론에 키리에가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방해(妨害) 같은 것이 나타나 공기를 퉁겼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모, 몰라요…….”

[내 봉인에 대해서는?]

“그, 걸, 알아내기 위해…….”

[오레윈브리지가 보냈나?]

줄리아가 고장 난 호두까기 인형처럼 턱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타니엘은 그녀를 비웃지 않았다. 이전의 줄리아도 그에게는 지금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인 듯했다.

[질문이 잘못됐군. 국왕이 나를 봉인한 방법에 대해 궁금해하는구나. 그녀도 그걸 모르는 거야. 그렇지?]

“그, 그, 그래요…….”

[540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지?]

“그, 그건 어, 머머, 니니, 만만, 알알, 알. 알고.”

[국왕은 키리에 뷰캐넌의 자리를 탐냈겠지.]

“그그, 렇렇, 습습, 니니, 다다.”

줄리아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녀는 숨이 막히는 사람처럼 헉헉거렸고, 입에서 침이 흘렀다. 눈을 까뒤집은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 더 내버려 두면 안 된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스쳤다.

“나타니엘!”

키리에가 자리에서 솟구치듯 일어나 줄리아를 끌어안았다. 세상이 다시 제 속도로 흐르기 시작했다.

나타니엘에게서 줄리아를 가리듯이 끌어안자, 나타니엘은 예의 냉소적인 미소를 띤 채 키득거렸다.

[이건 아는 게 없는걸.]

키리에가 나타니엘을 쏘아보았다.

“무슨 짓을 하신 거죠?”

[마법을 걸었을 뿐이야.]

“무슨 마법이요!”

[네가 걸릴 뻔했던 마법이지.]

키리에가 눈을 깜빡였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숲 짐승이 제법 유능하더구나.]

“그게 이렇게 무서운 마법이었나요?”

[강도를 좀 높이면 그렇게 되지.]

“정신에 문제가 생기거나 후유증이 남는 건 아니죠?”

[아쉽게도 그러기엔 네가 너무 일찍 막았어.]

그가 정말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키리에는 당황을 숨기지 못한 채 품 안의 줄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정신이 온전치 못한 듯했다.

[그건 앉혀둬. 기억은 못 할 테니까.]

나타니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줄리아가 제 발로 키리에의 품에서 멀어졌다. 그녀는 인형처럼 가만히 있었고, 키리에는 불안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동경의 시선으로 이쪽을 보고 있을 뿐,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자. 이걸로 알게 된 것이 있지.]

“알게 된 거요?”

[첫째, 건국 시기의 사건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것은 국왕뿐이며, 다른 왕가 구성원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다.]

나타니엘이 체스 룰을 설명하듯이 단조롭게 말했다.

[국왕은 내게 봉인 따위 ‘아는 게 없으며’, ‘죽은 줄 알고 있었다.’라고만 말했지.]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의 일을 모른 체하고 싶었던 거군요.”

[선조의 일로 죽기엔 억울했겠지.]

나타니엘의 표정에 희미한 경멸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둘째, 국왕은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걸 몰라.]

“기록이 남지 않은 걸까요?”

[거기서 셋째. 국왕은 내가 오레윈브리지의 마법으로 잠들어 있던 것만 알 뿐 의외로 정보가 없어. 그럼 그건 어디에 기록되어 있을까?]

대답은 쉬웠다.

“왕실 서고나 그의 연구실이겠네요.”

나타니엘이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댔다. 그는 팔걸이에 팔을 올려놓고 턱을 괴었다. 긴 손가락으로 입술까지 가리자 남은 것은 그늘 아래 푸른 초신성처럼 빛나는 한 쌍의 눈뿐이었다.

[탐낼 것을 탐냈어야지.]

가려진 입술은 왠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

〔못마땅할 겁니다.〕

레쇼가 말했다.

레쇼는 나타니엘이 다시 뷰캐넌 백작가에 머무르게 된 이후, 종종 그보다는 키리에를 보러 들르곤 했다.

“전 잘 이해가 가지 않아요. 사람들이 자기를 탐내는 게 싫은 건가요?”

〔그는 인간이 자신을 탐내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그가 말하는 건 당신입니다.〕

“……좋아요, 완벽하게 납득가지 않는 대답이네요.”

레쇼는 달이 뜬 밤하늘 아래 잠시 묵묵히 걸었다.

뷰캐넌 가의 메마른 덤불 정원은 그와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나타니엘에게도 그림 같이 잘 어울렸던 것을 보면, 초월적 존재가 가지는 깊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겨울과 잘 맞는 건지도 몰랐다.

〔나는 전에 당신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타니엘에게 의미가 있는 건 당신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러셨죠. 납득가지 않기로는 그게 첫 번째였네요.”

〔당신은 근거를 물었습니다.〕

“대답하지 않으셨고요.”

〔지금 답하겠습니다. 과거의 우리 역시 그런 방식으로 나타니엘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연하지만 그땐 그게 그가 누군가를 아끼는 방식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레쇼가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보았다. 찬 공기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는 입김이 나오지 않았다.

〔과거 발라브리가와 나는 나타니엘을 깨웠습니다.〕

“그때도 그가 잠들어 있었나요?”

〔그렇습니다. 과거의 우리는 얼음 속에서 그를 발견하고 신, 혹은 악마를 만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원을 빌었습니다. 발라브리가는 건국을, 나는 그걸 도울 힘을.〕

레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타니엘은 그걸 이뤄주었습니다.〕

“그때의 나타니엘에게는 경과 발라브리가만이 의미가 있었던 건가요?”

〔그렇습니다.〕

레쇼가 걸음을 멈추고는, 덤불 사이로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나온 손가락 위에는 기묘한 색의 벌레가 앉아 있었다.

〔그에게 인간은 이 정도의 존재입니다. 벌레.〕

키리에는 착잡한 마음으로 레쇼의 설명을 들었다. 기묘한 색의 벌레는 레쇼의 손가락 위에서 날개를 파르락거렸다.

〔우리는 얼마든지, 그저 재미를 위해 인간들을 눌러 죽일 수도 있습니다.〕

레쇼가 건조하게 말했다.

〔하지만 굳이 하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도 길 가다 보이는 모든 벌레를 눌러 죽이는 취미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겠죠.”

〔그렇게 당신은 평소에는 벌레를 무시하고 살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벌레 중 하나가 당신 발가락을 물고서, 당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키리에 뷰캐넌, 하고. 놀라지 않겠습니까?〕

“벌레가 제 이름을 부른다면야 당연히 놀라겠네요.”

〔놀라고, 재밌을 겁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당신의 이름을 부를 줄 아는’ 벌레가 요청하는 걸 들어줄지도 모릅니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닐 테니 말입니다.〕

키리에는 어렵지 않게 그가 말하는 ‘이름을 부른 벌레’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헤르큘라에서 잠들어 있던 나타니엘을 처음 깨운 사람. 그게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와 로르 레쇼였던 거다.

“그럼 제가…… 나타니엘에게 뭔가를 바라게 되면, 그는 그걸 이뤄줄 수도 있겠네요. 그게 그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나타니엘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키리에가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예리한 눈으로 레쇼를 응시했다.

“확실한가요?”

〔확실합니다.〕

“어떻게 확신하죠?”

레쇼가 키리에를 돌아보았다. 색유리처럼 맑은 체리색 눈은 참으로 나타니엘을 닮아 있었다. 손가락 끝의 벌레는 어느새 날아가 버렸다.

〔나 역시 더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키리에는 그 대답이 주는 차가운 울림에 저도 모르게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그저 추운 척 팔을 문지르며 시선을 피했다.

“다행이네요. 그에게 뭔가를 부탁할 생각은 들지 않으니까.”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키리에의 눈이 의아함을 담았다. 레쇼가 물끄러미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아끼던 새가 있다고 칩시다. 그 새가 어느 날 보니 다른 새들에게 쫓기고 있다고 가정해 보잔 말입니다.〕

아까는 벌레고 지금은 새였다. 키리에가 괜찮다고 하면 지렁이로 표현해도 무리 없이 갈음할 것 같았다.

그녀는 저택 어딘가에서 아마 이쪽을 관찰하고 있을 그를 떠올리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세계라는 정원에 사람이라곤 당신 하나뿐인데, 거기서 유일하게 당신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새가 곧 죽을 것 같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뷰캐넌은 그렇게 약한 가문이 아니에요.”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아니라고 반박하기도 어려운 문제였다.

“계속하세요.”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다른 새를 모조리 죽여 버리자. 이름 모를 백만 마리의 새보다, 내 어깨 위의 새 한 마리가 중요하니까.〕

레쇼가 달을 바라보았다. 붉은 보라색 눈동자에 가는 고리 같은 달이 걸렸다. 키리에는 그 눈의 깊은 곳, 심장의 가까운 곳에서 흐르는 차가운 물소리를 들었다.

〔그러니 키리에 뷰캐넌. 전설경과 호국경을 이용하십시오. 누구도 당신을 우습게 볼 수 없도록.〕

레쇼의 낮고 거친 목소리는 아무런 비장미 없이도 손쉽게 키리에의 심장에 꽂혔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그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나타니엘은 예의를 지키는 것을 좋아합니다. 웬만한 일이 아니면 품위를 지킬 겁니다.’

‘그렇게 보이더라고요. 그건 어째서죠?’

‘그러지 않으면 모든 게 너무 쉬우니까.’

***

지켜본 결과 명확해졌다. 나타니엘은 정말로 키리에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또한, 침묵을 메우기 위한 대화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었고, 그가 목적 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상대는 오로지 키리에뿐이었다.

그걸 깨달은 키리에는 좀 더 조심스러워졌고, 세자르는 갈수록 기세등등해졌다. 키리에는 틈날 때마다 세자르를 말렸지만 역부족이었다. 세자르는 키리에의 이름을 팔아 세를 불렸고, 나타니엘은 그 모든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용하기만 했다.

항간에는 뷰캐넌이 곧 공작가로 승격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키리에는 줄리아와 조금 더 자주 접촉하게 되었다.

[거길 또 가겠다고?]

빌리어즈 룸에서 책을 읽고 있던 나타니엘이 단장을 마치고 나온 키리에를 흘낏 보았다.

“공주 저하세요. 당연히 부르면 가야죠.”

[그 품위 없는 것이 공주라니.]

나타니엘이 빈정댔다.

흰 셔츠에 검은 바지만 입은 그는 회색 벨벳 소파에 누운 채 책으로 입을 가렸다.

[누가 보면 공주와 사랑에라도 빠진 줄 알겠어.]

“간 김에 서고 근처를 좀 둘러보고 올까 해요.”

키리에가 그의 빈정거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나타니엘은 그것을 나무라지 않았다.

[어떻게?]

“그거 말인데, 나타니엘 님의 마법으로는 어떻게 안 되나요?”

[서고에는 허락받지 않은 사람을 막는 마법이 걸려 있어.]

나타니엘이 말을 멈췄다가, 나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물론 아예 박살 내는 방법이라면 가능하단다.]

“어쩜. 반역으로 쫓기기엔 제가 아직 너무 젊네요.”

키리에가 방문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망토를 들고 종종걸음을 옮기던 안네마리는 나타니엘과 눈을 마주쳤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타니엘 역시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둘은 대체 나 몰래 무슨 죽이 맞은 거야?’

사이가 안 좋은 것보다야 낫지만, 이전과는 너무 다르다.

키리에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서 몸을 돌렸다.

***

다행히 줄리아에게 마법의 영향이 남지는 않았다.

“역시 그날 일은 잘 기억이 안 나는군요. 너무 잘생겨서 그랬을까? 어찌 생각하죠, 뷰캐넌 양?”

“그러셨나 봐요. 별일은 없었어요.”

“너무 잘생긴 것도 두고 볼 일이군요. 소름이 끼칠 정도였어요.”

그 소름은 아마 마법 때문이었을 테지만, 키리에는 모른척했다.

“아무튼, 계속 보고 싶어. 완벽해. 내가 본 사내 중 최고였어. 뷰캐넌 양, 계속 자리 좀 마련해 줄 수 있죠?”

“저는 그분께 뭔가를 요청할…….”

“하. 직접 요청은 아니더라도 간접적으로 수를 쓰는 정도는 할 수 있겠죠.”

줄리아가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대, 그것도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잖아요? 전설경이 그대를 싸고돈다는 걸 온 아렐라노 사람이 다 알고 있을 텐데요.”

“…….”

키리에는 대답하지 않고 빙그레 미소지은 채 줄리아를 바라보았다.

향도, 담배도 피우지 않은 줄리아는 다시 소파에 늘어진 채 그런 키리에의 시선을 받았다.

그녀는 가까이에 있는 표범의 턱을 쓰다듬어 준 뒤, 몸을 일으켰다.

“뷰캐넌 양.”

“네, 공주 저하.”

“그대는 눈치가 빠르죠.”

“과찬이십니다.”

키리에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고, 줄리아가 조소를 흘렸다.

“정말 과찬으로 생각되려고 하는군요. 왜 모를까?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른 척하는 걸까?”

“말씀의 진의를 모르겠네요.”

“어머니와 당신의 거래를 들었죠. 하지만 이쪽도 그거 하나 믿고 안심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줄리아는 습관처럼 테이블 위의 담뱃대에 손을 뻗었다가 다시 물렸다.

“그는 부와 무력을 동시에 갖고 있고, 왕가에게 이건 아주 커다란 위협이죠. 이번에 전설경의 영지를 반환한 것으로 세수까지 줄었잖아요?”

“어려운 말씀을 하시네요.”

“이 시국에서 가장 좋은 해결책은 나와 전설경이 맺어지는 거예요. 알죠?”

“압니다.”

키리에의 미소는 흔들림이 없었다. 내내 그녀를 주시하던 줄리아는 표범처럼 야성적으로 씩 웃었다.

“그래, 알 거라고 생각했지. 그럼 도와주면 좋겠군요. 그대의 자리에 내가 올라가는 게 최선이야.”

“노력해 보겠습니다.”

“아예 어딘가로 가 있는 게 어때요? 엘서스라든가. 그대의 고향이잖아요?”

“그 말씀은…….”

“전설경이 셀에 머물러 주면 좋겠단 거예요. 전설경이 아무리 그대를 아낀대도 여행길에 쫄래쫄래 따라가진 않겠죠, 설마.”

줄리아는 사냥꾼이다. 이득을 낚아채는 일에도 익숙하다.

키리에는 레쇼의 경고를 떠올리며 담담하게 답했다.

“어렵습니다. 송구합니다, 저하.”

줄리아의 시선이 나른해졌다.

“어째서?”

키리에는 짧은 고민에 빠졌다. 키리에가 국왕에게 내민 조건은 ‘적대하지 말자’였으니, 국왕은 딱 거기까지만 지킬 것이다.

왕실은 여전히 전설경을 복종시키고 싶어 한다.

국왕이 생각하고 있을 가장 좋은 수는 줄리아가 키리에의 자리를 대체하면서, 시조가 남긴 마법을 찾는 것.

‘하지만 호국경이 단언했지. 나타니엘의 선택은 변하지 않는다고.’

귀족들은 바보가 아니다. 시간이 지나도 나타니엘이 키리에만을 아낀다면, 너무 많은 걸 가진 키리에를 질투하는 자도 생길 것이다.

‘그것 때문에 나타니엘이나 레쇼에게 도와달라고 했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고.’

그러므로 키리에에게는 그걸 막아 줄 방파제가 필요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키리에가 마음을 굳혔다.

‘줄리아를 회유하자.’

키리에의 입이 열렸다.

“전설경은 변하지 않습니다.”

줄리아의 녹색 눈이 번득였다.

“뷰캐넌 양. 내가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게끔 도와주면 좋겠군요.”

“생각하고 계시는 바가 맞습니다.”

줄리아는 “역시 한 대 피워야겠어.”하고 말하곤 담뱃대를 들었다.

“하, 음…… 귀족들에게 전설경을 꼬셔 보라 부추긴 건 그냥 선동이었군요. 그의 의도인가?”

역시 그녀는 머리가 좋다.

“그렇습니다.”

“그걸 나한테 말하는 건, 막아 달라고 하는 거겠고. 공주가 옆에 붙어 있으면 그대가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 안 할 테니까.”

“정확하세요.”

“아마 어머니께도 비밀……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걸 좋아하시지 않거든.”

“네. 이것은 키리에 뷰캐넌이 왕실이 아닌 줄리아 오레윈브리지 공주 저하께 드리는 제안입니다.”

“아! 좋아요, 좋군요. 그대가 내게 바라는 건 계속 전설경 근처에서 깔짝대면서, 그대에게 향하는 비난을 막는 것. 그렇다면 이제 내가 뭘 얻을 수 있는지 들려줄 차례군요?”

키리에가 미소지었다.

“실리를 취하세요, 공주 저하. 제 뒤에는 전설경과 호국경이 있어요.”

“그래서?”

“이경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겠죠. 보라, 우리의 옛 벗인 시조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가 재림한 듯하다.”

“…….”

“우리는 이 현명한 후손만을 트레베레움의 차기 국왕으로 인정하겠다.”

줄리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녹색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키리에에게 고정시켰다.

“어떻게 알았죠?”

“약간의 조사와 추론을 했습니다.”

“그래도 정보가……? 아니, 차기 올드시우다드 공작이군요.”

키리에가 생긋 웃었다.

줄리아는 왕세자인 이든보다 영리하지만, 후계자가 되지는 못했다. 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변은 줄리아가 그걸 순순히 받아들였다고 생각했지만, 국내외 정보 길드를 통솔하는 올드시우다드 공작가에만은 다른 정보가 들어왔다.

줄리아가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정보.

‘친구 잘 두고 볼 일이야.’

줄리아가 머리를 벅벅 문지르며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이빨을 드러내는 건 나중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예상 밖이네.”

그녀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담뱃대에서는 연기가 길게 늘어졌으나, 전처럼 마법이 섞여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표범이 어슬렁거리고, 반쯤 벌거벗은 잘생긴 하인들이 과일과 포도주를 든 채 돌아다니는 공주 궁. 약과 술과 담배에 취한 듯한 공주가 천장을 응시하며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역시 갖고 싶어…….”

아주 작은 중얼거림이었으나 키리에의 등허리를 서늘하게 하기엔 충분했다.

그녀는 한참을 키득거리다가, 탐욕과 흥분으로 빛나는 눈으로 키리에를 보았다.

“오늘은 물러가요. 다시 부르죠.”

***

키리에는 어쩐지 섬뜩한 기분이 드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궁을 나왔다. 그녀가 팔을 문지르다, 근처를 지나는 궁인 한 명에게 말을 걸었다.

“담배 냄새 때문에 산책을 하고 싶은데, 괜찮은 정원이 있을까? 귀가는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궁의 하인은 키리에를 정원으로 안내한 뒤 돌아갔다.

‘온 김에 서고를 살펴야겠어. 나는 궁에 들를 일이 많지 않으니까.’

키리에가 차분하게 걸음을 옮겼다. 마침 서고 방향의 파빌리온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모퉁이를 돌았을 때, 그녀는 의외의 사람과 마주쳤다.

“아?”

“루비니아 캐스너 양?”

“다, 당신이 왜 여기에?”

루비니아 캐스너였다. 그녀는 책 몇 권을 들고 있다가 급하게 그것을 뒤로 숨겼다. 키리에의 눈이 빠르게 그 행동을 포착했다.

“이런 데서 뵙네요, 캐스너 양.”

“……당신이 왜 여기 있죠?”

“줄리아 공주 저하께 인사드리고 나오는 길이에요.”

“공주 궁과 여기는 거리가 꽤 되는데요!”

“캐스너 양은 어쩐 일이세요? 이 근처는 왕실 서고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책은……?”

루비니아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자, 잠깐만요! 이건……!”

때마침 근처에서 발걸음 소리가 났다. 의외의 행운에 키리에가 남몰래 미소지었다.

‘대처할 시간이 부족하면 변명에 머리 쓸 시간도 없어지지.’

예상대로 루비니아는 급하게 키리에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리 와요!”

키리에는 얌전히 그녀에게 잡혀 기둥 뒤로 숨었다. 두 사람은 사람들이 지나갈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그리고 인적이 사라지자마자,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이건, 그러니까!”

“왕실 서고는 공인된 사서와 사관이 아니면 출입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된 거죠?”

루비니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혼란과 당황으로 가득했던 녹색 눈은 금방 증오로 물들었다. 루비니아는 탁, 소리 나게 키리에의 손을 뿌리쳤다. 그 바람에 루비니아가 들고 있던 책들이 떨어졌고, 키리에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안네마리, 주워드려.”

“네, 아가씨.”

안네마리가 대답하자, 그녀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루비니아가 흠칫 놀랐다.

안네마리가 작은 손으로 책을 주워, 루비니아에게 건넸다. 루비니아는 매섭게 그것을 쳐냈다.

책이 다시 바닥에 흩어졌고, 키리에는 한숨을 쉬었다.

“안네마리, 망을 봐 줘.”

“네, 아가씨.”

안네마리가 잰걸음으로 사라졌다. 키리에는 눈으로 그녀의 등을 좇다가, 차가운 눈으로 루비니아를 보았다.

“캐스너 양. 귀한 책인데 이러면 곤란하지 않나요?”

“…….”

“우린 꼭 이런 식으로 마주치게 되네요.”

루비니아가 눈이 충혈되도록 키리에를 쏘아보았다.

“당신하고 할 말 없으니까 꺼져요.”

“약혼 축하연 때의 일로 내게 화났을 줄은 알아요. 하지만 미안하다고 하진 않을 거예요. 당신이 내게 한 짓도 만만치 않으니까.”

“하! 그래, 그게 당신 본성이지, 키리에 뷰캐넌.”

“나도 모르는 내 본성을 아시다니 참 대단하시군요. 나보다 나를 오래 사귀었나 보네요.”

“뭐라고요?”

모멸감에 얼굴을 붉힌 루비니아와 달리, 키리에의 태도는 변함없이 냉소적이었다.

“난 성격도 말투도 별로 좋지 않아요, 캐스너 양. 참는 이유는 오로지 내가 귀족이기 때문이죠. 나 자신의 품위를 위해서.”

“관심 없어요!”

“그런데 당신은 자꾸 까닭 모르게 내게 공격적이니, 나도 이제 굳이 참아 줄 필요가 없겠네요.”

키리에가 낮고 힘있게 말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이 키리에의 얼굴 일부를 가렸다. 연보랏빛 머리칼 사이에서 냉연히 빛나는 보랏빛 눈에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날 선 기색이 엿보였다.

루비니아는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그녀가 다음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지방 귀족으로서 단련된 오기 덕이었다.

“그런다고 내가 겁낼 것 같아요?! 사람 잘못 봤다고요! 난 루비니아 캐스너라고!”

“내야죠. 안 내면 어쩔 건데요?”

“난 당신에게 겁낼 이유 없어요! 내게 져서 파혼당한 주제에! 뺏긴 주제에! 남자 하나 간수 못 하는 주제에!”

“캐스너 양, 신문 안 보나요?”

“그……!”

루비니아가 입을 벌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

키리에는 일부러 얄미울 정도로 하나하나 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저는 이런 식의 싸움은 별로 달갑지 않지만, 캐스너 양의 방식대로 맞춰드릴게요. 첫째, 가문.”

“…….”

“뷰캐넌과 캐스너. 어쩜. 비교하기가 미안하네요. 뷰캐넌이 개국 공신 가문인 건 알죠? 지위는 백작가지만 영향력까지 내려온 건 아니에요.”

“우, 우리 가문도……!”

“이거 하나만 조언해드리죠. 캐스너가 새로 손대려고 하는 목양 산업, 별로예요.”

득달같이 달려들려던 루비니아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잠깐, 목양이라뇨? 아버지가 새 사업에 손대고 있다고요?”

“둘째, 영향력. 흠, 한날한시에 무도회라도 열어 볼까요? 어느 쪽 무도회에 더 사람이 많이 올지.”

“아까 하던 말이나 해요!”

“셋째,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파트너.”

루비니아의 눈이 흔들렸다. 직격타에 가까웠을 것이다.

“왕세자와 전설경. 이제 내가 더 말 안 해도 될 것 같네요. 당신도 눈이 있다면 내 뒤에 누가 있는지 알겠죠.”

루비니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비교할 필요조차 없었으니까.

그녀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키리에를 노려보기만 했다. 키리에가 손가락을 살랑거리며 웃었다.

“그래서 남이 씹다 버린 여자에게 더 하실 말씀은?”

스산한 겨울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루비니아 캐스너는 순식간에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차분해졌다.

‘하지만 그럴 여자가 아니지. 야망을 위해 자존심을 접어 두었을 뿐이야.’

루비니아가 물풀처럼 흔들리는 녹색 눈으로 기둥 너머에 펼쳐진 아까시나무 숲을 바라보았다.

“……난 정말 당신이 싫어. 뭘 바라는 건데요?”

“말귀가 빨라서 좋네요.”

키리에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내렸다.

“어떻게 들어갔나요?”

“영업 비밀이에요. 당신, 서고에 들어가고 싶은 건가요?”

“그건 알 필요 없어요.”

“대단하신 뷰캐넌 백작 영애께서 왕실 서고에 무슨 볼일이 있을까?”

“그걸 꼬투리 잡고 싶나요? 해 봐요. 그럼 난 국왕 전하께 갈 테니. 전하께서 당신과 이든의 약혼을 반기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겠죠, 캐스너 양? 그런 와중에 잘못까지 저질렀다간…….”

실제로는 반길 확률이 높다. 국왕은 시조의 기록을 찾고 있을 텐데, 서고에 출입 가능한 말이라니.

‘하지만 루비니아는 그걸 모르지.’

키리에와 루비니아의 시선이 맞붙었다. 양쪽 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으나, 키리에가 여유로운 미소를 짓자 루비니아가 먼저 눈을 피했다.

“……알려줘 봤자 당신은 못 따라 하는 방법이에요.”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렸나요?”

“말할 수 없다니까요! 다른 요구 사항이나 말해요!”

“어떻게 할까요. 난 달리 원하는 게 없는데.”

루비니아가 황당하다는 듯이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보며 키리에가 우아하게 미소지었다.

“머리를 굴려 봐요, 루비니아 캐스너 양. 내가 원하는 게 뭘까요?”

“하아? 미쳤어요? 돌았어요? 내가 왜 그런 짓을 해야 하죠?”

“어쩜. 갑자기 국왕 전하를 알현하고 싶어지는걸요.”

“아, 아! 정말……!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날 방해하고 싶어요?!”

루비니아가 초조하게 외쳤다.

“그건 내가 할 소리예요. 내가 아직 이든의 약혼자이던 시절, 꼭 내 앞에서 둘이 그랬어야 했나요?”

“인과응보로 따지자면 당신이 먼저 나를 무시했잖아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또, 또 그 모른 척!”

“욕으로 빠져나가지 말고 똑바로 말해 봐요. 사실 난 이걸 가장 묻고 싶었어요.”

“뭔데요!”

“내가 대체 당신에게 뭘 했다고 날 싫어하는 거죠, 캐스너 양?”

루비니아가 뺨을 들썩이며 웃었다.

“지금 나더러 그걸 내 입으로 말하라고요? 아, 정말이지, 뷰캐넌의 아가씨는 대단하시네. 염치가 한낱 남작가랑은 비교가 안 돼!”

“그걸 이제 알았다면 곤란한데요. 머리가 나쁜가요? 그 책을 읽을 정도면 꽤 영리할 텐데요.”

둘은 이야기가 진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막상 면대면으로 이야기하자니 빈정거림이 대화의 8할이었다. 기본적으로 둘 다 속내를 털어놓는 게 익숙하지 않았고, 이미 어긋난 관계를 붙잡고 늘어지는 성격도 아닌 탓이었다.

그 극명한 대립을 루비니아도 느꼈는지, 그녀는 인상을 쓰고선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들었다.

먼지 묻은 책은 「롤랑바르크 대진 설계법 3편」과 「페라토 병법」이었다.

‘어렵다고 알려진 책인데.’

키리에가 물었다.

“책 좋아해요?”

“하. 책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있죠, 그럼.”

“난 그런 건 사람이라고 안 불러요.”

“매정하네요.”

“당신만 할까? 키리에 뷰캐넌.”

냉랭하게 받아친 루비니아가 허리를 폈다. 책은 그녀의 숄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예요. 뭔가 찾고 있나 보죠? 갑자기 이상한 관심이 생겼을 리는 없으니 전설경과 관련된 무언가겠고, 왕실 서고에 있을 정도면…… 오래된 기록이거나 금지된 기록이거나?”

키리에가 빙긋 웃었다.

“처음으로 당신이 마음에 들기 시작하네요.”

“우웩이에요.”

키리에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이 날 증오해도 상관없어요, 캐스너 양. 작은 부탁만 들어주면 별일 없을 거예요.”

“안 들어주면 전설경에게 말해서 날 죽일 생각인가요?”

“당신이 허락받지 않고 왕실 서고에 출입한 일은 눈감아 줄 테니, 일주일 안에 뷰캐넌에 방문해서 당신이 찾은 걸 알려 줘요.”

“그럼 백작가에서 날 죽일 생각인가요?”

“글쎄요. 난 누군가 싫은 사람이 있으면 단순히 죽이는 정도로 끝내지는 않을 거라서요.”

“단순히 죽이지는 않겠단 뜻인가요?”

“……내가 왜 이 대화를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드는 순간이네요.”

키리에가 대리석 바닥을 구두로 두 번 두드렸다. 그러자 멀리서 망을 보고 있던 안네마리가 쪼르르 다가왔다.

“확실히 해 둘까요? 당신은 내게 약점을 잡힌 거예요. 내 말을 따르는 게 좋을 거예요.”

“국왕 전하께 고자질하지 않겠다는 거나 확실히 해요.”

루비니아가 망설이며 덧붙였다.

“날 죽이지 않겠다는 것도.”

“안심해요. 발판이 꺼지는 함정은 없을 거고, 찻잔에 독이 묻어 있지도 않을 거니까. 협조만 제대로 해 준다면 오늘 본 건 모른 척하겠어요.”

두 사람은 드디어 어느 정도 의견 합일을 이루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른하게 미소짓는 키리에와, 이글거리는 녹색 눈의 루비니아. 누구도 손해 볼 생각 따위는 없어 보였다.

“내가 찾아낸 정보를 빌미로 오히려 당신을 협박하리라고는 생각 안 해요?”

“해 봐요. 게임의 승패를 결정하는 건 누가 더 판돈이 많으냐니까. 그리고 지금 내 판돈은 트레베레움의 그 누구보다 많죠.”

루비니아가 키리에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키리에의 미소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루비니아는 결국 잠자코 몸을 돌렸다.

“난 역시 당신이 짜증 나요. 싫어. 싫어 죽겠어. 고상한 척하지만 필요에 따라 뭐든 할 여자라는 걸 너무 잘 알거든.”

“고마워요. 하지만 한 번만 더 내게 반말하면 당신 의사에 상관없이 게임이 시작될 거라고 미리 말해 둘게요.”

“잇……! 알았어요! 일주일 뒤에 가면 된다는 거죠! 하지만 내가 뭘 제대로 찾을 거라고 기대한다면 때려치워요!”

“노력해 봐요.”

루비니아 캐스너는 질렸다는 듯이 혀를 찬 뒤 복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파빌리온 너머에서 사람들이 오고 있었다.

키리에는 마차가 있는 곳으로 가려다, 멈칫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정말로, 왜 나를 싫어하는 거예요?”

루비니아의 발이 멈췄다. 그녀는 한동안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증오를 언어로 토해내듯 말했다.

“캐스너에서 연 첫 무도회. 기억나요?”

“물론이죠.”

“그러고서도 내게 그런 걸 물어요?”

“네?”

루비니아는 단호하게 등을 보이며 멀어져 갔고, 키리에는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았다.

‘캐스너 남작가의 무도회? 당연히 기억하지. 내 평생 그런 무도회는 처음이었으니까. 최악의 무도회였어! 그나마 네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의도치 않게 누군가와 사이가 나빠졌다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오레윈브리지를 말하는 건가?]

“딱히 누굴 특정해서 말한 건 아니었어요.”

키리에는 조용히 대답하며 폰을 움직였다.

빌리어즈 룸, 체스판 앞. 요즘 키리에와 나타니엘은 부쩍 같이 있는 시간이 늘었다.

나타니엘은 전매특허인 나른한 자세로 앉아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폰을 앞으로 밀었다.

[대체로 무시하지.]

“지금까지 계속 무시했는데, 이젠 그러면 안 될 때가 온 것 같아요.”

[루비니아 캐스너의 일이군.]

“혹시라도 ‘여자의 적은 여자다’ 같은 말씀은 하지 말아 주세요.”

[싸움에 성별을 구분하는 머저리가 제일 먼저 죽는 법이란다.]

키리에가 작게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차례에 다른 폰을 움직였다.

“그런 것치곤 약혼 축하연에서 상당히 큰일을 벌이셨잖아요.”

[그쪽이 먼저 왕세자라는 무기를 장비했으니 이쪽도 비슷하게 나가 줘야지.]

키리에는 오랜만에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지상 최강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존재가 자기 자신을 호신용 무기 취급하는 상황이라니.

“그럼 같은 편인가요, 우린?”

[‘우리’라고 엮일 수 있는 시점에서 이미 같은 편이겠지.]

“현명하시네요.”

[자주 들어.]

나타니엘은 그렇게 말하면서 미소지었다. 편안하고 나른해 보였다. 그의 얼굴 한편에 늘상 그림자처럼 깔려 있던 권태나 파괴욕은 첫눈의 흔적만큼이나 희미했다.

그저 아름답기만 한 그 미소를 바라보며 키리에는 까닭 모르게 가슴이 벅찼다.

“사람들이 조금 더 당신과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어려워.]

“편견은 시간을 들이면 깰 수 있어요.”

[나는 그들과 잘 지낼 생각이 없단다. 편견을 깰 생각도 없어.]

그의 담담한 고백에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고, 키리에는 이유 모를 막막함을 느꼈다.

“외롭지 않나요?”

[네가 있으니 괜찮아.]

무시무시한 말이 하나도 무시무시하지 않게 지나갔다. 당황할수록 냉정해 보이는 사람인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제가 없어질 수도 있잖아요.”

나이트를 움직이려던 나타니엘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는 드물게 조금 미간을 좁힌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이상한 곳에 나이트를 내려놓은 뒤 등을 등받이에 기댔다.

[키리에 뷰캐넌. 그건 협박인가?]

“네?”

‘어디가 어떻게 협박으로 들리는 거야?’

키리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타니엘은 지팡이를 불러내 그것을 쓰다듬었다.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하면 죽어 버리겠다, 뭐 그런 협박으로 들리는걸.]

“사고 확장력이 대단하시네요. 하지만 전혀 아니었고, 어째서 도망도 아니고 자살 협박인가요.”

[나한테서 도망치는 방법은 자살밖에 없으니까.]

“정말 도망치고 싶어지니까 그만둬 주시겠어요?”

[너도 그만둬.]

“무엇을요?”

[없어진다느니 하는 가정.]

키리에가 입을 뻐끔거렸다. 그녀는 체스판을 내려보았다.

이상한 자리에 놓인 나이트.

‘당황……한 건가?’

그녀는 애써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흩어진 체스 말을 모았다. 어차피 체스를 이어 둘 상황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갑자기 천재지변이 일어날 수도 있고…….”

[내가 너라면 그 이상 말하지 않을 거야.]

“음…….”

체스 말을 원위치에 돌려놓으며, 키리에는 차마 나타니엘을 보지 못했다.

‘화난 것 같아…….’

손가락이 슬슬 떨렸다. 공기는 싸늘했고, 주변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 심장 뛰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슬쩍 올려다본 나타니엘은 미소 한 점 없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웃고 있을 때와 웃지 않을 때의 온도 차가 놀랍도록 큰 그는, 깊은 바닷속에나 흐른다는 영하의 얼음 같았다.

“……화났어요?”

[아니.]

“그러면요?”

[어디까지 말해도 되나 고민 중이야.]

뭐를요? 라고 묻고 싶은 것을 키리에는 간신히 참았다. 들으면 좋지 않은 내용일 게 뻔했다.

키리에는 주먹을 쥐고, 심호흡한 뒤에 나타니엘을 마주 보았다.

“……이번엔 제가 실수했어요. 미안해요.”

나타니엘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서울 정도로 투명한 눈이었다. 차라리 보통 사람들처럼 희로애락이 드러나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키리에는 나타니엘이 보여 주는 아주 작은 감정적인 동작들이, 자신을 위해 일부러 보여 주는 것이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것도 아마 그에게는 예의의 영역인 것 같았어.’

그러니까 그런 배려가 없는 나타니엘은, 무서울 정도로 기괴하고 비인간적이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미안해요.”

[…….]

“하지만 저는 병 없이 무탈하게 장수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평소엔 지금처럼 나서는 성격도 아니고, 오히려 너무 조용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죠.”

최대한 상냥하고 조곤조곤하게, 그를 건드리지 않게, 키리에가 속삭였다.

그녀의 노력이 통한 것인지, 그저 혼자 이해하고 넘어간 것인지 나타니엘은 고개를 젖히고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키리에.]

“네.”

잔뜩 긴장한 내면,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 외면의 키리에와 달리, 나타니엘은 입술을 벌린 채 아주 오랫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품위 있고 우아한 미소를 지어내고선 꼰 다리 위에 손깍지를 올렸다.

[잘 자렴.]

키리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일어나, 방으로 돌아와 누웠다.

이불 속에서 들어와서야 그녀는 몸이 겨울 벌판에 한참을 서 있었던 것처럼 덜덜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던 키리에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는 무슨 말을 삼켰을까?

[둄2 절갠 교환재공타싸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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