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키리에 뷰캐넌 (3/33)

3. 키리에 뷰캐넌

키리에는 며칠 사이 나타니엘과 꽤 죽이 잘 맞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로 누구를 놀릴 때만.

그는 경건하면서 뇌쇄적인 생김새와 달리 장난기가 많았다. 거기다 눈치가 기가 막히게 빨라, 대개 척하면 척이었다.

요즘 둘이 가장 골몰하고 있는 놀이는 세자르 근처에서 알짱대며 ‘철없는 연인 연기하기’였다. 덕분에 티 타임이 하루 32번으로 늘었지만 키리에는 즐거웠다.

“그런데 바로 셀에 들르지 않아도 되나요?”

[어떻게 들어갈까 고민 중이야.]

“부수실 건가요?”

[요즘 생각한 건데, 너는 좀 파괴적인 경향이 있구나.]

“요즘 느낀 건데, 나타니엘 님은 생각보다 자비로우세요.”

키리에는 보란 듯이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위에 얹힌 나타니엘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부수실 거면 꼭 미리 알려 주세요. 구경하고 싶으니까.”

[구경할 담력이나 되고 말하렴.]

“된다니까요.”

이번에는 반대로 나타니엘이 키리에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끝부터 손가락뼈가 도드라지는 부분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느리고 조심스러웠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부서질 유리 인형을 다루듯.

키리에는 살갗이 부드럽게 쓸리는 기묘한 느낌에, 금방 손을 빼버렸다.

“……연기 잘하시네요.”

[네 아비가 날뛸 정도는 되겠지.]

“그건 나타니엘 님과 제가 조금 더 즐거울 수 있다는 뜻이죠.”

키리에가 키득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저 멀리서 하인 한 명이 다가오는 게 보였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여기까지가 마지노선인 듯하네요.”

[무운을 빌지.]

키리에는 피식 웃고서 저택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마주친 하인은 아니나 다를까 그녀에게 허리를 굽혀 왔다.

“아가씨.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서재로 오라고 하셨어요.”

“응. 지금 갈 생각이었어.”

키리에는 바로 계단 위에 발을 얹었다가, 멈칫하고 몸을 돌렸다.

“안네마리는? 시녀들 숙소에 있어?”

“네. 쉬고 있습니다.”

하인은 얼굴을 미세하게 찡그린 뒤에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역시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아요.”

안네마리는 나타니엘의 존재 자체가 견디기 어려운 걸까. 키리에는 가벼운 고민에 빠졌다.

‘역시 나타니엘을 빨리 왕궁으로 보내 버려야겠어.’

안네마리를 그 지경으로 두면서까지 나타니엘을 보살필 의무는 없다.

그녀는 손을 저어 하인을 보낸 뒤 서재로 올라갔다. 서재에서는 세자르가 키리에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느냐?”

냉엄한 청보라색 눈동자는 수완가라 불릴 수는 있었지만 부성애가 느껴지진 않았다. 그를 마주한 키리에의 기분도 점차 차갑게 가라앉았다.

“부르셨어요?”

세자르는 키리에에게 앉을 곳을 내어 주지도 않았다.

‘뭐, 익숙하지.’

그녀는 냉소를 삼키며 오연히 섰다. 그 정태한 모습에 심사가 뒤틀린 세자르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너는 어떻게 된 것이 한 번을 내게 들르지를 않느냐? 자식이라고 키워 놓았더니…….”

“투자를 잘못하셨네요. 그런데 저는 투자해 달라고 한 적이 없으니, 그 정도 손해는 감수하셔야죠.”

항상 이런 시작이었다. 세자르는 타박하고, 키리에는 받아친다.

‘단 한 번도 좋은 말을 한 적이 없지.’

키리에는 욱하려는 마음을 꼭꼭 숨겼다. 들켜 봐야 또 욕이나 먹을 것이다.

“무슨 일로 부르신 거죠?”

딸을 향해 진심으로 노기를 품으며 씨근덕대던 세자르가 혀를 찼다.

“그자는 누구냐?”

“두 사람이 인사한 게 엊그제인데, 벌써 치매라도 걸리셨나요?”

키리에가 명랑하게 빈정댔다.

“키리에. 농담하지 않겠다. 그자는 누구지? 왕족의 숨겨 둔 서자라도 되는 게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요.”

“사정?”

세자르가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저자와 결혼이라도 할 셈이냐? 왕세자와 파혼했다고? 아니, 설마 애초에 저런 놈과 붙어먹기 위해 파혼을 유도한 건 아니겠지?”

“제가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면 그 약혼을 1년 넘게 유지하지는 않았겠죠.”

“지금 사교계에 무슨 이야기가 도는 줄 알기나 해!”

세자르가 주먹으로 거칠게 책상을 내리쳤다.

“네가 임신했다고들 한다! 그것도 별 볼 일 없는 평민이랑!”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다.

‘마리아가 말하지 못한 소문이 이거였구나. 버몬트의 수작도 들어간 걸까?’

키리에는 태연히 코웃음 쳤다.

“그걸 믿으세요? 그분이 평민으로 불린다는 점에서부터 전혀 말이 안 되는데요.”

“설령 그가 숨겨 둔 왕족이더라도 제대로 된 지위 하나 없는 놈이랑 결혼시키려고 너를 기른 게 아니다!”

“글쎄요. 전 지금 딱 아버지가 기른 대로 대처하고 있어서요.”

언제 수도를 부술지 모르는 종말을 감시하고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키리에의 말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세자르는 분을 못 이겨 노호를 내질렀다. 그리고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이더니, 눈을 부라리며 그녀를 훑어보았다.

“몇 개월이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당장 방을 뛰쳐나가고 싶은 질문이었다. 키리에가 주먹을 쥐었다.

“임신, 아니에요. 남자랑 붙어먹은 적도 없고요.”

“서쪽으로 쭉 가면 호국경의 영토에 ‘리브라’라는 마을이 있다. 헤미쉬 경을 붙여 줄 테니 이동해.”

“네?”

“실력 좋은 마법사가 있다고 들었다.”

“잠시만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설명을 해 주셔야죠. 왜 갑자기 리브라로 가라는 거죠?”

키리에의 질문에 세자르가 짜증스럽게 답했다.

“애를 지우려면 멀리서 지워야지. 수도 근처였다간 사람들이 다 알 것 아니냐!”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한 박자 늦게 분노해 외쳤다.

“대체 제 말을 들으시긴 하는 거예요? 방금 아니라고……!”

“그럼 내가 네 말을 믿을 수 있게 행동했어야지! 약혼도 파혼된 마당에 몸이나 굴리는 딸을 내가 어찌 믿어!”

키리에가 충격으로 파르르 떨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는 그 말은 과연 딸에게 할 수 있는 말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물으면? 듣기나 할까?’

그녀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시든 저는 임신한 적도, 부도덕한 짓을 저지른 적도 없어요. 리브라에는 가지 않아요.”

“이런 이야기 듣기 싫었다면 네가 잘했어야지!”

“제가 왜 이 이야기를 또 해야 하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무려 가주님의 시간씩이나 투자하는 건 수지에 맞는 일인가 봐요?”

“빈정대는 버릇하곤! 제 어미…….”

“아! 그래서 어머니가 나가시고 제 가정 교육은 누가 했는데요?”

세자르가 결국 참지 못하고 주변에 있던 책을 키리에에게 내던졌다.

“이 배은망덕한 계집애!”

키리에는 팔로 머리를 가린 채 피가 나기 시작한 입술만 깨물었다. 분명 예전과 같은 상황인데도 모든 게 엉망진창이라고 느껴졌다.

‘바보 같아.’

전설 속 존재와 모험하는 기분이라도 내고 있었던 걸까.

마지막 책이 키리에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입 안쪽이 터졌는지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흰 뺨이 붉게 달아오르자, 그제야 세자르가 멈췄다. 그녀가 역겨움을 느끼는 부분은, 그 순간 세자르의 눈에서 아주 미약한 후회가 엿보였다는 점이다.

그게 세자르의 가장 비열한 부분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혼자 인정하고 혼자 반성하는 것만으로 혼자 구원받는 것. 키리에가 풀지 못한 앙금은 늘 그녀의 가슴 속에서만 뱅뱅 맴돌았다.

‘난 대체 뭘 기대한 걸까.’

모든 게 여행을 떠나기 이전과 같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화는 나지 않았고, 그저 지치고 공허할 뿐이었다.

“끝나셨나요?”

“…….”

“나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몰라 말해 두는데, 그분께는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목숨이 열두 개라면 말리지 않겠지만요.”

그녀는 뛰쳐나오듯 서재를 나왔다. 그리고, 문 앞에서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마주쳤다.

나타니엘.

‘어째서 여기에?’

나타니엘은 습관적인 미소와 희미한 놀람이 반쯤 섞인 얼굴로 키리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리에는 당황과 수치로 얼굴을 가렸다.

‘다 들었을까?’

부끄러웠다.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여 버렸다.

그때, 서재 안쪽에서 분을 삭이지 못한 세자르가 무언가를 내려치는 소리가 났고, 키리에는 깜짝 놀라 어깨를 굳혔다.

소맷부리 너머로 나타니엘이 지팡이를 들지 않은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키리에.]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녀는 무례와 볼썽사나움을 무릅쓰고 복도 끝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날 이후, 키리에는 나타니엘을 피했다. 주변에서는 아가씨가 사랑싸움이라도 한 모양이라며 수군댔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봤을까? 들었을까? 왜 거기 있었지?’

키리에가 겨우 아물어 가고 있는 입술을 다시 깨물었다.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것만큼 비참한 것은 없다.

‘그런 아버지를 끊어내지 못하고 있는 나를 답답하다고 욕할까? 아니면 의연하지 못하다고 한심해할까?’

출구가 없는 생각 속에서 상상 속 나타니엘의 말과 표정은 더 잔인해졌다.

차라리 마리아나 라우라에게 들켰다면 이렇게 부끄럽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나타니엘이다. 모든 귀족이 바라는 완벽한 우아함의 표본 같은 남자. 그 주변은 공기마저 느리게 움직이는 듯하고, 세상 만물이 그에게 집중하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는 품위 없는 것이 싫을 뿐이라 하였지만, 그 품위를 따라가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하던가.

그래서 더 비참했다. 스스로를 백조라고 착각한 오리가 된 것 같았다.

겨우 딱지가 앉았던 입술에서 다시 피가 났다.

***

“정말 안 나가실 거예요?”

리모가 물었다. 그녀는 안네마리를 대신해 키리에를 전담 보필하는 중이었다.

뺨과 입술, 몸에 난 상처가 나을 때까지 방에 틀어박히기로 한 키리에는 뻣뻣한 고개를 돌렸다.

“……오늘도 거기 계시니?”

“네.”

나타니엘은 계속 같은 정원에서 차를 마셨다. 저택에 도착한 후 키리에와 담소를 나눴던 그 자리.

시중을 들 하인을 제외하면 누구도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유독, 그 근방만 쌀쌀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는 말도 돌았다.

그럼에도 햇빛 아래 나타니엘은 아름다웠다. 저도 모르게 바라보게 될 정도로. 그래서 키리에는 아예 창문 근처로는 가지 않게 되었다. 적어도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는.

그녀의 속을 모르는 리모가 커튼 너머를 기웃거리며 냅떴다.

“기다리고 계신 게 아닐까요?”

“그분이 나를? 그럴 리가 없지.”

“남자들은 좀 그렇잖아요! 자존심이 강하니까. 게다가 그분은, 사실 여자를 기다려 본 적은 없을 것 같이 생겼으니까요.”

리모의 말에 키리에는 힘없이 웃었다. 여자 이전에 사람을 기다리거나 할 위인이 아니었다. 누가 그를 기다리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냥 저 자리가 마음에 드신 걸 거야.”

“하지만…….”

리모가 말끝을 흐리며 창문을 흘끔거렸다.

“잔이 두 개인걸요.”

그 짧은 말에, 키리에는 속에 뜨거운 것이 얹힌 기분이 들었다.

“정말 안 나가 보셔도 되겠어요?”

“날 찾으신 것도 아니잖아.”

“찾으시진 않았지만요…….”

리모가 우물쭈물했다. 수다를 좋아하는 어린 소녀는 젖은 헝겊으로 분재의 잎을 닦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저는 아가씨가 그렇게 즐거워하시는 모습 처음 봤으니까……. 두 분이 잘 어울렸으니까요.”

의외의 말이었다. 키리에가 눈을 깜빡였다.

“……내가 즐거워했다고?”

“네.”

리모가 씩 웃었다. 그녀는 신이 나서 재잘대기 시작했다.

“예전의 아가씨도 물론 좋았지만, 나타니엘 님이 오시고 표정도 더 다양해졌고, 더 자주 웃으시게 됐고, 그리고…….”

리모가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했다.

“가주님께 골탕을 먹이시기도 하고!”

“풋.”

키리에가 작게 웃었다. 웃는 주인을 보며 리모는 조금 안심한 듯했다.

“이건 비밀이에요? 가주님도 생각이 있으셔서 아가씨를 위해 모진 말을 하시는 거겠지만, 그래도 아가씨가 꾸지람을 듣고 나오시면 괜히 저희도 우울하다고요.”

“고마워, 리모.”

“그러니까 가끔 가주님을 골탕 먹이시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아요. 나타니엘 님은 무섭지만, 그래도 아가씨는 그분이 계실 때 더 활기차 보이세요.”

그렇게 보이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

키리에는 눈을 내리깔고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분명 언제까지고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중에.”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조금만 더 있다가, 따로 찾아갈 거니까.”

정말로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일단 내뱉었다.

리모는 방긋 웃었다.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헤헤, 뭐든 힘내세요! 이상한 소릴 하거든 뻥 차 버리고 오세요!”

“응.”

“그리고 이건 초대장들이에요!”

리모는 은쟁반 가득 뷰캐넌 백작 영애에게 온 초대장을 올려 두고 방을 나갔다. 의자에 앉아 있던 키리에는 천천히 걸어, 그 앞으로 다가갔다.

가장 위의 초대장은 금빛이었다. 금빛 봉투에 금빛 밀랍. 인장에 찍힌 문양은 표범이었다.

‘왕가의 상징.’

그녀가 쓰게 미소지었다. 이쯤 올 거라고 예상한 추측이 들어맞았다.

가는 손가락이 밀랍을 떼고, 편지를 펼쳤다. 내용은 간단했다.

「왕세자 이든 오레윈브리지와 루비니아 캐스너 남작 영애와의 약혼을 축하하는 야회를 열고자 하니 와서 자리를 빛내 주길 바라오.」

다만, 키리에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특별히 호국경 로르 레쇼도 참석할 것이오.」

***

수도 전역의 의상실에 불이 났다.

7대 가문쯤 되면 재봉사를 집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기본이지만, 호국경의 등장은 의상실들을 뻔뻔하게 만들었다. 호국경이 무려 100년 이상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만큼, 귀족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새 의상을 맞추려 들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현재는 직접 방문 영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송구스럽게도 당점은 현재 출장 영업을 중지한 상태입니다.’

몇 안 되는 고급 의상실의 출장 맞춤은 당연하게도 공작가의 구성원들에게만 돌아갔다. 다른 귀족들이 분개했으나, 분개가 드레스를 맞춰 주지는 않는다.

덕분에 귀족들은 직접 의상실까지 행차해야만 했다. 그 덕에 키리에는 생각지도 못하게 라우라와 만날 수 있었다.

“드레스를 맞추래, 글쎄! 호국경에게 잘 보여야 한다나?”

라우라가 크게 외쳤다. 주홍색 곱슬머리와 녹색 눈동자. 활달하고 앙큼한 포트듀케인 후작가의 막내딸은 불만이 많아 보였다.

“물론 예쁜 드레스는 환영이지만! 어떻게든 호국경을 꼬시라는 게 느껴져서 너무 짜증 나는 거야!”

자신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라우라의 시원한 말에 키리에가 키득거렸다.

“우리 아버지도 그래. 호국경이 온다는 걸 알자마자 나한테 찾아와서 피부 관리를 하라고 하시더라.”

“너희도? 우리도야! 대체 왜들 그래? 엄청 못생겼으면 어쩌려고! 남자가 돈만 많아서 뭐해? 얼굴이 예뻐야지!”

“그런 거야?”

“돈은 내가 있으니까 괜찮아!”

자신의 친구는 멋있는 말을 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다. 키리에는 웃으며 그녀가 투덜대는 이야기를 들었다.

라우라뿐만 아니라 수도 전체가 호국경의 이야기로 달아올라 있어, 그의 이름은 거리를 걷다가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호국경 로르 레쇼. 그는 트레베레움의 건국 영웅이다.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의 건국을 도운 대가로, 그는 전체 국토의 1/3을 그의 독자적인 영토로 인정받았다.

호국경은 그 모든 영토를 인접 지역 귀족들에게 관리하게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부와 거리가 먼 것은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초월자, 불로불사인 만큼 그는 ‘로르’ 가의 유일한 가주이기도 하고, 대를 이어온 부는 당연하지만 어마어마했다.

덕분에 미혼의 딸을 가진 귀족들은 마음이 급해졌다. 어떻게든 그 전설 속의 사내를 사로잡아 인생을 펴고 싶은 사람이 셀 아렐라노에 넘쳐났다.

덕분에 별 관심 없는 키리에와 라우라 역시 의상실에서 무려 번호표를 발급받아야만 했다.

라우라는 근처 카페에 앉자마자 번호표를 앞뒤로 살펴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마리아도 오면 좋을 텐데, 힝! 우리 이쁜이는 공작가라서 의상실에서 직접 모시러 왔나 보더라고.”

“마리아는 차기 올드시우다드 공작이니까.”

“사실 그건 전혀 안 부러운데 발품 팔지 않아도 되는 건 부러워! 이러고 있을 시간에 놓친 거래가 몇 개야, 대체?”

포트듀케인 후작가가 운영하는 포트듀케인 상단의 상단주다운 말이었다.

라우라는 이덴홀에게 꽉 잡혀 있는 내륙 무역에서 시선을 돌려, 해상 무역으로 판로를 넓힌 뛰어난 사업가이기도 했다.

“이제 상단은 아예 네가 맡기로 한 거야? 후작가는? 슬슬 후계자를 지목하실 때도 됐잖아.”

“모르겠어! 나더러 맡으라고 성화인데, 나는 금전이 오가는 게 재밌을 뿐이지 가문을 맡는 건 딱 질색이라고!”

한참을 투덜거리던 라우라가 키리에에게 화제를 돌렸다.

“키리에 너는? 아직도 집 나간 네 오빠가 후계자야?”

“음. 아마도?”

“어휴, 내가 너희 아버지라 아무 말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거지……. 너도 고생이 많다, 정말.”

대화는 길었지만 번호표의 대기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라우라의 재기발랄한 입담도 무한한 건 아니어서, 그녀는 이내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라우라는 여태껏 숨기고 있었을 화제를 조심스럽게 입에 올렸다.

“키리에.”

“응.”

키리에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요즘 나쁜 소문 돌고 있어.”

“그렇다고 하더라. 좀 어때?”

“심각해.”

라우라가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아무 남자와 자고 다닌다는 말도 나오고, 왕세자 저하가 파혼을 요구한 이유가 네 그런 행동 때문이라는 말도 나왔어. 심지어 네가 먼저 양다리를 걸쳤다고도 쑥덕대더라.”

“정말 그거밖에 없어?”

“뭐야, 너 알고 있었니?”

“아버지가 전해 줬거든.”

키리에가 차향을 음미하며 말했다. 다행히 그때 생긴 상처는 화장으로 가릴 정도로는 아물었다.

라우라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맞아. 임신이니, 매독이니 하는 소리까지 돌아.”

“아. 참신하네.”

“그래, 참신하게 악질이지!”

키리에는 나타니엘을 데리고 다닌 모습에 살이 붙어 부풀려진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라우라에게는 전부 사실무근의 악질적인 괴담으로 보일 것이다.

‘말해 줘야 할까?’

그녀는 단상 끝에 고개를 저었다. 설명도 장황해질 테고, 믿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라우라까지 이 사태를 책임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곧 연이 없어질 사람이니까.’

키리에는 아직 자신이 어떻게 시조의 금제를 풀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마법사였던 적도 없고, 마력을 느껴본 적도 없다. 뭔가를 한 적도 없으니 당당할 수 있었다.

‘왕실에서 압박이 들어오더라도 내가 마력이 없는 건 사실이니까 크게 추궁하진 못할 거야.’

그렇게 나타니엘은 아무래도 영 억울해 보이는 숙면에 대한 보상을 받고, 키리에는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고. 그리 끝나면 되는 일이다.

“괜찮아. 다들 수군거리는 걸 좋아해서 그래. 조금 지나면 잠잠해질 거야.”

그래서 키리에는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미소를 본 라우라가 힘 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살롱 이덴홀에 가 봤어야 그 말을 못 하지.”

“그 정도야?”

“루비니아 캐스너가 거기 참석했어.”

키리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살롱 이덴홀에? 거긴…….”

“맞아. 7대 가문이나 명문가가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지. 미래의 왕세자비에게 미리 잘 보이고 싶었나 봐, 이덴홀 공작 부인께선.”

아무래도 루비니아 캐스너는 차근차근 영역을 넓혀 가고 있는 듯하다. 인격적으로는 거리를 두고 싶지만, 그 추진력 하나만은 인정해 줘야 했다.

“캐스너 양은…… 사업을 하면 잘하겠어.”

키리에의 감상에 라우라가 머리를 쥐었다.

“지금 그 말이 나와? 네 약혼자를 빼앗아간 여자라고, 걘!”

“화는 나지만 지난 일인걸. 달리 일이 없으면 그냥 넘어가려고.”

침착한 키리에 대신 라우라가 분통을 터뜨렸다.

“너 지금 걔가 얼마나 심한 말을 떠벌리고 다니는지 몰라서 그래! 마치 네가…….”

그때였다.

짤랑.

카페 문이 열리며 방울 소리가 들렸다.

고작 그 정도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새로 들어온 누군가는 놀랍게도 키리에와 라우라 앞까지 다가왔다.

“어머, 여기서 뵙네요?”

애교 있는 목소리가 먼저 들리고, 분홍색 구두코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는 그다음으로 들렸다.

키리에와 라우라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들을 바라보며, 루비니아 캐스너는 챙 넓은 분홍색 모자를 벗으며 방긋 웃었다.

“합석해도 되겠죠?”

라우라의 얼굴이 사납게 굳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날티를 벗고 포트듀케인 후작 영애가 되어 오만하게 말했다.

“캐스너 양. 무례하시군요. 타인의 대화에 함부로 끼는 건 예의에 어긋난 행동인데요.”

하지만 상대는 과연 신흥 귀족 출신으로도 사교계의 냉대를 녹인 루비니아 캐스너였다.

“아이, 그런 매정한 말씀 마세요. 저희는 취향이 비슷하잖아요. 안 그래요, 뷰캐넌 양?”

그녀는 딸기 케이크처럼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녹색 시선을 키리에에게 던졌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온 건지 대충 짐작이 가는 눈짓이었다.

‘피곤해.’

키리에가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모르시긴.”

루비니아는 자연스럽게 키리에의 맞은편 자리로 끼어들었다. 귀족 영애끼리 점잖지 못하게 몸싸움을 벌일 수도 없는 상황.

라우라는 어쩔 수 없이 옆으로 밀려났다. 누가 보면 의상실에 들어가기를 기다리는 숙녀 셋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왕세자 저하가 취향인 두 사람…… 맞잖아요?”

“…….”

잠잠한 키리에 대신 라우라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지금 말 다 했어요? 남의 약혼자를 빼앗아 놓고 태연히 얼굴 내밀지를 않나. 뭐? 취향이 같아?”

“아이, 포트듀케인 양, 지금 뷰캐넌 양과 대화 중이니 조용히 좀 해 주시겠어요?”

“그 대화 중에 끼어든 게 누구인지 알고 하는 말이에요? 아하, 캐스너 남작가에서는 그런 것도 안 알려 주던가?”

그때 키리에는 왠지 루비니아의 미소에 금이 갔다고 느꼈다. 이내 그녀는 서슬 퍼런 독기 오른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아, 그렇네요? 고상한 당신들 7대 가문 어쩌고랑은 달라서 말이에요.”

루비니아는 그리 말하며,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척 왼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반쯤 실성한 듯한 눈이었다.

“그래서요? 태어날 때 갖고 있던 것 빼고 당신들이 무슨 노력을 했는데? 그렇게 안이하게 구니까 약혼자나 뺏기지.”

라우라가 놀라 대응하지 못하는 사이, 루비니아는 태연히 손을 내리고 사교계의 봄의 요정으로 돌아가 방긋 미소지었다.

“이제 내가 왕세자비가 되면 포트듀케인 양은 좀 조용해지시겠어요? 으음, 어떡하죠? 생각만 해도 너어무 신나는걸요?”

키리에는 상황도 잊고 감탄했다.

‘정말 대단한 여자야.’

말하는 내용은 신랄하기 짝이 없는데, 표정과 어투만은 치명적일 정도로 애교가 넘쳤다. 이든이 왜 그녀에게 껌뻑 죽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런 키리에의 시선을 도전이라 생각했는지, 루비니아는 날카롭게 눈을 홉떴다.

“기분이 어때요, 뷰캐넌 양? 이 나라 최고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는데 내려간 소감은.”

‘기분이라.’

이전에는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여행 이후 그녀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저렇게 당당하게 원하는 걸 쟁취할 수 있는 건 조금 부러울지도.’

키리에는 자신을 노려보는 루비니아를 향해 담담히 말했다.

“백년해로하세요.”

일순 정적이 흘렀다.

“……네?”

“행복은 못 빌어주겠네요, 나도 당한 게 있으니. 하지만 두 분 부디 백년해로하시길.”

루비니아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지금 누구 놀려요?”

“왜 놀린다고 생각해요?”

“이든은 나를 선택했어요! 당신은 그 대단한 뷰캐넌 가문을 업고도, 당신들이 그렇게 무시하던 고작 남작가 영애에게 졌다고요!”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 문제는 아니지 않나요, 이건?”

루비니아가 당장 소리를 지를 것처럼 눈을 부라렸다. 그녀는 가까스로 표정을 정돈하고 비틀린 조소를 지었다.

“아, 막상 지니까 ‘사실 난 관심 없었어’ 하고 자존심 세우려는 거예요? 꼭 패배한 사람들이 그러더라고.”

“저도 사람인 이상 조금 화가 나긴 했지만, 이제는 다 끝난 일에 자신을 소모하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그럼요. 다 끝난 일로 하고 싶으시겠죠.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떠들고 있는지 모르니까.”

“모르진 않아요. 지금 눈앞에도 한 명 있는 것 같거든요.”

“풋!”

라우라가 옆에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냈다. 루비니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당신이 그렇게 말해 봐야 왕실은 이제 내 편이에요!”

“정말요?”

키리에가 극적인 효과를 위해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분명 국왕 전하께서는 당신을 반기지 않으셨을 텐데요.”

루비니아는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숨을 멈췄다.

처음 왕실이 뷰캐넌과의 약혼을 주도한 이유는 지방 귀족들의 충성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이 나라는 중앙 집권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정점에 누가 있느냐에 대해서는 대답하기 어렵다. 보통이라면 국왕이겠지만, 트레베레움에는 건국 영웅인 호국경이 아직 살아 있으니까.

이 나라 사람들은 어머니의 배 속에서부터 시조와 전설경, 호국경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다. 그는 살아 있는 신앙이자 종교다. 그에 비하면 왕권은 감히 비할 게 못 되고, 그래서 왕권 강화는 시조를 제외한 모든 오레윈브리지의 숙명이었다.

당연히 국왕은 더 많은 충성,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캐스너 남작가는 둘 중 어느 것도 줄 수 없었다. 국왕이 이든과 루비니아의 약혼을 반대한 이유다.

“캐스너 양의 약혼을 지지한 것은 왕세자 저하 본인과, 그분의 여동생이신 줄리아 공주 저하뿐인 것으로 기억해요. 제 말이 틀렸나요?”

“지금 제가 지방 출신에 신흥 귀족이라고 무시하는 거예요?”

“사실을 말했을 뿐이에요.”

“무섭지도 않아요? 왕세자빈 다음은 왕후라고요! 그때 가면 당신은 내 앞에 무릎 꿇어야 한다니까?”

“무릎 건강은 챙겨 놓을 테니 안심해요.”

“그 얘기가……! 하……!”

복장이 터진다는 듯이 루비니아가 소리를 빽 내질렀다. 곧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자, 그녀는 주변의 눈치를 보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됐어요. 좋아, 그때 가서도 그렇게 고상한 척할 수 있는지 보자고요.”

표독스러운 눈빛이었다. 그런 루비니아를 마주하고 앉아서도, 키리에는 이상하게도 전처럼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원하던 게 권력이라면 이미 얻었는데 왜 저렇게까지 나를 미워하는 거지?’

기억을 되살려도 마땅히 실마리가 없었다.

숙녀들의 사교계에는 크게 두 세력이 있는데, 하나가 줄리아 공주를 필두로 하는 공주파, 다른 하나가 마리아를 필두로 하는 귀족파였다. 키리에는 귀족파고, 루비니아는 공주파이니만큼, 당연히 두 사람은 대화한 적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묘하게 내게만 날이 서 있고.’

“왜 내가 싫어요, 캐스너 양?”

키리에가 불쑥 물었다. 명백히 흥분해 있었던 루비니아는 오히려 질문을 듣자 차분해진 눈치였다.

“가식적이고, 가증스럽죠. 고상한 척 다른 사람을 얕잡아보고.”

그녀의 다음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그때처럼.”

‘그때’?

이상한 단어였다. 루비니아와 자신이 과거의 어느 순간을 들먹일 정도로 인연이 있었던가?

“언제를 말하는 거죠, 캐스너 양?”

루비니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예 자신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사교계를 녹인 봄의 요정이라 하는 그녀는, 그 호칭과 달리 멀리서 볼 때나 겨우 미소처럼 보이는 얼굴로 키리에를 노려보았다. 독기 가득한 녹색 눈은 밝고 강렬했다.

“고상한 척해 봐야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아요, 뷰캐넌 양.”

사랑스러운 루비니아는 잠깐 새에 마음 정리를 마쳤다.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길은 섬세했고 표정은 새침했다.

“지금 대중에게 당신은 싸움에 진 개 정도? 어디 열-심히 고상한 척 자기 위안이나 하고 살아 봐요.”

“캐스너 양.”

그때 라우라가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언뜻 살기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에 루비니아가 움찔했다.

“그만 가는 게 좋겠네요. 내가 정말로 진지해지고 싶어지거든요?”

라우라의 빈정거림은 분명 진담이었다.

루비니아가 눈치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 와중에도 미소의 가면을 쓰고서 이죽거렸다.

“힘내봐요. 남이 씹다 버린 여자를 누가 주워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소리가 날 정도로 홱 고개를 돌리곤 가 버렸다.

***

드레스를 맞추고 라우라와 헤어진 뒤,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키리에는 생각에 잠겼다. 루비니아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남이 씹다 버린 여자.’

그렇게 보일 줄은 몰랐다. 이든과의 약혼 기간이 짧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다 할 에로스적 무언가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는 왕세자라 늘 바빴으니까. 키리에도 그것이 당연하다 여겼다.

물론 지금에 이르러 그가 루비니아 캐스너와 다니는 모습을 보면, 어쩌면 일부러 바쁜 척을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국왕이 주선한 약혼이니 무를 수는 없고,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랑 결혼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겠지.’

내키지 않은 약혼인 건 키리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로 마음먹었고, 이든에게도 같은 것을 바랐다. 그도 왕세자고,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다는 걸 알 테니까.

화를 잘 내지 않는 자신이 이든의 외도에 화가 났던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책임감. 살아오면서 키리에를 지탱한 가장 큰 가치를 이든은 너무 쉽게 내버렸다. 그런 사람이 국왕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가며 루비니아 캐스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성을, 가문을, 가진 모든 것을 내다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구나 싶었다.

‘나는 많은 것들을 책임지고 있지만, 누구도 나를 책임지고 싶어 하진 않는구나.’

키리에는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피식 웃었다.

‘애초에 남에게 기대는 방법을 배워본 적도 없는데 무슨 소리.’

어머니와의 파경 이후, 아버지 세자르는 키리에를 강하게 길렀다. 그녀는 모든 면에서 완벽해야 했고, 남에게 약점을 드러내서도 안 되었다.

그저 우아하고 의연하게. 키리에는 그렇게 사는 법밖에 배우지 못했다.

만약 누군가와 맺어진다면, 서로 기대는 사랑보다는 손만 잡은 채 각자의 발로 서 있는 사랑이 어울리리라.

‘하지만 씹다 버린 껌에게 그건 과분하겠지.’

키리에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어차피 그녀의 인생에서 사랑은 별로를 넘어 아주 중요하지 않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 봤어야 사랑을 믿든가 말든가 하지.’

키리에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그녀는 이상한 점을 느꼈다.

‘마차가 멈췄나?’

창문 밖의 풍경이 그대로였다. 생각에 골몰해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제임스, 무슨 일이야?”

점잖게 마부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답이 없었다. 공기에 긴장이 스몄다.

‘습격? 그런 것치고는 너무 조용해. 지금 위치는 하일랜드 파크……. 밤이라 인적도 드물고, 달리 도움 요청할 곳도 없어.’

그녀는 또 하나 기이한 점을 깨달았다.

사방이 고요했다. 새와 짐승, 벌레 소리가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이런 상황을 최근 경험한 적이 있다.

“나타니엘 님? 당신이에요?”

목소리를 높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불안이 가중될 무렵, 누군가 마차 문을 두드렸다.

“나타니엘 님?”

키리에는 뭐가 나올지 모르는 긴장감에 마차 구석으로 붙었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키리에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금발의 키 큰 미청년이었다. 키리에는 바로,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의 눈을 보자마자 그가 누군지 깨달았다.

‘인간이 아니구나.’

붉은 보라색의 눈동자는 독보적으로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소름 끼칠 정도로 무감정했다. 마치 나타니엘처럼.

나타난 남자는 나무껍질을 긁는 듯한 중음으로 말했다.

〔호국경 로르 레쇼라고 합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키리에 뷰캐넌.〕

‘역시 호국경이구나.’

그의 말을 믿지 않기엔 그는 너무 많은 부분에서 나타니엘과 비슷했다. 다른 게 있다면, 나타니엘에게서 나는 야만적이고 원초적인 힘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 정도.

키리에는 우선 숨죽이느라 구부정해져 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뷰캐넌 백작가의 키리에입니다. 우선, 제 마부의 상태에 대해 여쭤도 될까요?”

〔재웠습니다. 몸에 이상이 있지는 않을 것이고, 볼일이 끝나면 자연히 일어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우선 마차에서 내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이해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녀는 차분했고, 레쇼 역시 그랬다. 조금 안심한 키리에가 손을 내밀었다.

“제가 에스코트를 요청한다고 해서 저를 썰어 버리지는 않으시겠죠?”

나름의 함의가 담긴 말에 그는 기분 나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기사로서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그 간단한 행동으로 키리에는 그의 몸에 밴 예의와 품위, 기사도를 간파했다.

‘역시 나타니엘과 비슷해. 오밤중에 비명횡사하는 일은 없겠어.’

그에게서 어떤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키리에는 망설임 없이 마차에서 내려 하일랜드 파크의 산책로로 향했다.

레쇼가 먼저 말을 꺼냈다.

〔거친 방법을 써서 미안합니다. 저택으로 가면 그가 알아차릴 것이고, 사람들이 많으면 좋지 않아서 이런 방법을 택했습니다.〕

“괜찮아요. 오히려 대로변에서 사람들을 전부 잠재웠다면 도망쳤을지도 모르겠네요.”

〔나는 나타니엘과 달리 마법에는 능하지 못해서 그럴 재주는 없습니다.〕

“그러시군요. 역시 나타니엘 님은 마법에도 일가견이 있는 건가요?”

〔당대의 마법사들이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닐 겁니다.〕

둘은 적당히 공통의 지인에 관한 이야기로 서두를 끝낸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타니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글쎄요, 그렇게 물으셔도…….”

여기서 키리에는 약간 말꼬리를 늘이며 사회적으로 합의된 어떤 동작을 취했고, 레쇼는 건조하게 그에 응했다.

〔마음대로 부르십시오.〕

“아. 그럼 로르 경으로 부르겠어요.”

키리에가 속마음을 숨기고 생긋 웃었다. 호국‘경’이니만큼 ‘경’으로 부르면 그만이긴 하지만, 누가 감히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나타니엘만 빼고 말이지.’

“어쨌든, 저는 로르 경이 아시는 만큼 알지는 못한다는 말씀밖에 드릴 수 없네요.”

〔그가 과거의 이야기를 했습니까?〕

“아주 조금요. 너무 오래전의 이야기라 제게는 마치 꿈속의 일처럼 들렸지만요.”

일순 레쇼가 걸음을 멈췄다. 키리에 역시 자연스럽게 발을 멈추고 레쇼를 향해 어깨를 비틀었다.

〔나타니엘이 왕가에 대해 말한 적은 없습니까?〕

“없진 않습니다만, 왜 그런 걸 물으시나요?”

〔왜냐니요.〕

그는 처음으로 ‘-습니다’하는 말투를 버렸다. 더불어 붉은 보라색 눈동자에도 희미한 긴장감이 떠올랐다.

아니, 긴장감이 아니었다.

‘저건 두려움이야.’

레쇼가 속삭였다.

〔그를 보면 느껴지지 않습니까?〕

“무엇이요?”

〔파괴욕 말입니다.〕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많이 가라앉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틀리진 않습니다.〕

레쇼가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나타니엘 님이 정말로 이 나라를 멸망시키려 했던 ‘종말’인가요?”

그녀는 좀 더 자세히 풀어 말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타니엘 님은 불시에 시조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의 마법으로 잠들게 되었다고 했어요.”

〔그가 거기까지 이야기했습니까?〕

레쇼가 희미하게 놀란 기색을 비쳤다. 그는 키리에가 말한 내용보다, 그녀가 생각보다 진상에 가까이 있다는 것에 더 놀란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내겐 그가 말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궁금한 게 있다면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겁니다.〕

“역시 그런가요.”

키리에가 한숨을 쉬었다.

“알 수 없네요. 두 분 모두, 나타니엘 님이 억울하게 잠든 것처럼 말씀하고 계시잖아요.”

레쇼가 처음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로르 경은 나타니엘 님이 왕가에 복수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습니다.〕

“경께서는 나타니엘 님의 억울함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이시네요.”

〔그렇진 않습니다. 속죄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할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복수와 그가 실제로 행할 복수는 규모의 차이가 어마어마할 겁니다.〕

“하지만 경은 그를 막을 수 있으시잖아요.”

키리에가 생각만 하던 말을 내뱉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누구라도, 종말이 다시 나타난대도 호국경이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레쇼는 키리에의 희박한 긴장감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알아차리곤 눈을 가늘게 떴다.

〔키리에 뷰캐넌. 당신은 나타니엘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산책로 옆의 넓은 연못을 응시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유칼립투스 잎을 흔들었다. 부르튼 나무껍질 같은 거친 목소리가 잎새의 사각거리는 소리에 맞춰 울렸다.

〔내게 검술을 가르쳐 준 것이 나타니엘입니다. 그리고 나는 단 한 번도 그를 뛰어넘은 적이 없습니다.〕

키리에가 놀라 입을 조그맣게 벌렸다.

“잠시만요. 로르 경께 검술을 알려 주셨다고요? 하지만 그는…… 종말이잖아요? 시조와 전설경, 그리고 로르 경께서 함께 토벌한…….”

레쇼가 입을 살짝 벌렸다가 다시 조개처럼 다물었다.

키리에가 눈을 가늘게 뜨고 레쇼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미약한 기시감이 느껴졌으나, 그걸 잡아채기도 전에 레쇼가 말을 이었다.

〔그는 발라브리가와 내가 아직 어리고, 아직 인간일 적에도 이미 미지의 존재였습니다.〕

“그럼 그는 대체 누구죠? 아니, 무엇이죠?”

레쇼가 키리에를 돌아보았다. 그는 감정의 조각조차 보이지 않는 인형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모릅니다.〕

“모른다고요?”

〔우리는 그때에도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쉽게 그의 힘을 빌렸고, 쉽게 그가 두려워졌고, 쉽게 그를 내쳤습니다.〕

잠깐 키리에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잠시 뒤,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만요, 그러니까, 나타니엘 님에게 건국을 위해 도움을 받았다가, 막상 전쟁이 끝나니까 그를 버렸다고요?”

〔그렇습니다.〕

변명 따위 하지 않는 정직한 대답이었으나, 키리에에게는 그 정직이 되레 역하게 느껴졌다.

“그건 배신이잖아요.”

까닭 모르게 높아진 언성으로 그녀가 말했다.

다시금 눈 내린 광활한 숲을 바라보던 나타니엘의 등이 떠올랐다. 그 등에 얹혀 있던 담담한 고독은 그가 원래 갖고 있던 것일까? 아니면 배신 끝에 생겨난 것일까?

“그럼 나타니엘 님은 정말 아무 잘못도 없이 540년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키리에가 중얼거렸다. 그녀가 애써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로르 경도 나타니엘 님을 봉인하는 것에 동의하셨던 건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아마 저도 은연중에 그렇게 되리라 예상했던 것 같습니다.〕

“어째서요?”

〔그는 너무 높은 곳에 있었고, 정체를 알 수 없었고, 너무 강했고,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불명예를 끼얹어서라도 끌어내리고 싶을 정도로.〕

레쇼가 눈을 감았다.

〔그래서 당신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다음 말이 듣기 싫어지려 하네요.”

〔들어주면 좋겠습니다.〕

레쇼는 천천히, 뜯어보듯이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나타니엘을 말려주십시오.〕

키리에는 실례라는 것도 잊고 혀로 입술을 축였다.

“너무 큰 기대를 거시면 곤란합니다. 저는 나타니엘 님에게 아무것도 아닌걸요.”

키리에에게는 ‘네겐 그 정도의 가치가 없다.’고 말했던 나타니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명했다. 그러나 레쇼는 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원래 그에겐 모든 게 무의미합니다. 그나마 당신만이 약간의 의미라도 있을 겁니다. 믿어도 좋습니다.〕

“근거 없는 일에 목숨을 걸진 않아요.”

〔근거라면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레쇼는 어둠 속에서 체리 색으로 보이는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 증거입니다.〕

“궤변이군요.”

냉정하게 쳐내면서도, 키리에는 레쇼가 하지 않은 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걸 독촉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 이상 그에게 개입해도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열정적인 전체주의자도 아니고, 이든과의 일로 왕가를 향한 충성심마저 바닥을 기는 중이었다.

게다가 키리에에겐, 나타니엘의 분노가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 부분이 가장 문제였다.

‘당사자인 시조는 죽었다지만, 자신의 고혈을 토대로 권력을 잡은 사람의 후손인 거잖아.’

분명 머리로는 현 국왕의 잘못이 아니니 말려야 맞다는 생각을 했지만, 가슴으로서는 나타니엘의 사정이 더 이해가 갔다.

“솔직히 혼란스럽네요. 제가 낄 일이 아닌 것도 같고요.”

키리에가 이 일을 내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레쇼의 말이 빨라졌다.

〔그가 얼마나 위험한지 당신은 모르고 있습니다. 상황은 지금 초읽기에 들어가 있습니다.〕

“과장이 심하신 것 같네요.”

레쇼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눈이 오고 있습니다.〕

안네마리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듯했다. 눈이 대체 뭐길래 이렇게들 소란스럽게 군단 말인가?

“부디 제가 알 수 있게 말씀해 주세요. 물론 유례없는 폭설이 내리고 있긴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에요. 곧 겨울이 지나갈 거고…….”

〔아닙니다. 이대로라면 봄이 올 일은 없을 겁니다.〕

레쇼의 안 그래도 낮은 목소리는 더 낮아져 있었다. 키리에는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저를 설득하시려거든 좀 더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이유를 주세요.”

레쇼는 아주 짧게 망설였다. 그러나 원래 판단이 빠른 사람인지, 그는 금방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굳은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이제 둘 사이에 번거로운 염탐은 필요 없었다. 대화는 빠르게 이어졌다.

〔과거 그는 아군에게 ‘겨울의 왕’이라 불렸습니다.〕

“낭만적인 호칭이네요.”

〔전부 듣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좋아요, 들어보죠.”

레쇼가 잠시 뜸을 들인 뒤, 입을 열었다.

〔그는 토벌전 초기에는 검을 사용했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너무 번거롭다’며 방식을 변경했습니다.〕

“어떻게요?”

레쇼가 물끄러미 키리에를 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폭설이었고, 중간쯤 가서야 사람들은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키리에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건 꼭 요즘 그녀가 생각하던 것과 비슷하다. ‘이상하게 올해는 눈이 많이 오네.’ 하는, 그 정도의 생각.

〔그러나 그땐 이미 늦은 뒤였습니다. 인간의 불로는 해결할 수 없는 추위가 몰아쳤고, 작물은 얼어붙었으며, 동물들은 동사했습니다. 적들은 눈에 빠져 죽었습니다.〕

레쇼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때 저도, 오레윈브리지도 처음으로 실감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키리에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해가 안 가요. 어째서 그가 그렇게까지 한 건가요?”

레쇼는 쓴웃음을 지었다. 회한이 담겨 있는 얼굴이었다.

〔그 부분에서 저희는 더욱 실감했던 겁니다. 이유가 없었으니까.〕

“네?”

〔별 이유 없이 전 대륙을 영구 동토로 만들고, 그 모든 일을 하면서도 평소와 다름없이 권태롭게 미소지을 뿐인 존재였으니까.〕

레쇼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는 굳어 있는 키리에의 어깨와 머리카락에 묻은 눈을 털어내며 말했다.

〔아시겠습니까? 눈이 ‘너무’ 많이 오고 있습니다, 키리에 뷰캐넌.〕

[늦었구나.]

로르 레쇼와 만나고 돌아왔을 때, 나타니엘은 접객실에서 홀로 체스를 두는 중이었다. 그 옆에는 안네마리가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키리에는 오랜만에 밖에 나온 시녀를 발견하고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그런 다음 태연하게 망토를 벗었다.

“의상실에 사람이 많았어요.”

나타니엘은 대답하지 않고 비숍을 움직였다. 키리에는 벗은 망토를 안네마리에게 건네주었다.

“안네마리, 목욕물을 준비해 줄래?”

“하지만 아가씨…….”

“쉬. 가 있어.”

안네마리가 우물쭈물하다 나타니엘을 흘낏 넘겨다보곤 멀어졌다. 키리에의 시선은 오랫동안 그 작은 등에 꽂혀 있었다.

“안네마리를 부르셨나요?”

[그랬지.]

자신이 답을 구하듯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타니엘은 얄미울 정도로 이쪽을 보지 않았다. [뚫어지겠구나.]하고 한마디 할 뿐.

“……안느는 멀리해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나타니엘 님을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 숲 짐승이 뭘 준비하고 있었는지 안다면 그런 말은 못 할걸.]

“숲 짐승이 아니라 안네마리예요. 그 아이가 뭘 했든 나타니엘 님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건 변하지 않고요.”

[너는?]

키리에는 말없이 뷰로 위에 놓인 거울로 얼굴을 살폈다. 밖에 오래 있었던 탓에 화장이 지워졌다. 그 사이로 다 낫지 않은 얼굴의 상처가 희미하게 떠올라 있었다.

“…….”

키리에는 태연하게 반 묶음 머리를 풀어냈다. 옆머리가 뺨을 가리자 조금 나았다.

그녀는 작게 심호흡한 뒤 나타니엘에게 다가갔다.

“나타니엘 님. 저는 오늘 피곤해서 이만…….”

[앉아.]

거절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한 냉정한 목소리로 나타니엘이 말했다. 그가 말을 끊는 건 드문 일이었다.

키리에는 반박도 없이 차분히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뺨의 상처가 신경 쓰였지만, 괜히 더 티가 날까 싶어 고개만 조금 비틀었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동시에 달이 밝아, 체스판 앞의 나타니엘을 부드럽게 비췄다. 그는 나이트를 손에 쥔 채 체스에 집중하고 있을 뿐인 것처럼 보였다. 불편한 자리였다.

“할 말이 있으신가요?”

[응.]

단조로운 대답은 평소보다 더 나른하고 권태로웠다. 마침내 나이트를 내려놓은 나타니엘이 팔에 턱을 괴었다.

키리에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남자가 방만하게 의자 팔걸이에 몸을 기댄 모습을 바라보았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라 말할 법한 단정한 얼굴로, 그는 어쩜 저렇게 위험하고 퇴폐적인 냄새를 풍길 수 있는 것일까.

그때,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매달린 눈꺼풀이 불시에 들렸다. 그를 훔쳐보고 있던 키리에는 어쩔 수 없이 그와 눈이 마주쳤다.

[왜 날 피하지?]

“……!”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오해하고 있다면 말해 봐.]

키리에가 떨리는 눈으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거짓말을 할까? 아니, 그런 잔재주가 통할 상대가 아니야.’

게다가 나타니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거짓을 말하는 건 기만이다.

키리에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나는 두 번 말하는 걸 싫어하고, 방금 나는 ‘왜’ 피하느냐고 물었어.]

“…….”

[이제 세 번이구나.]

“나타니엘 님과는 관계가…….”

[관계없기로만 따지자면 나보다 레쇼가 더 관계없을 줄로 아는데.]

“어떻게……?”

키리에의 눈이 떨렸다. 레쇼는 분명 나타니엘에게 숨겨 보도록 하겠다고 말했는데.

[그 애는 마법에는 재능이 없었지.]

나타니엘은 작게 중얼거리며 퀸을 집어 들었다. 말을 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아를 깎아 만든 만듦새를 관찰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 ‘어떻게’가 이 이야기와 관계있나?]

차분하고 오연하던 미소는 순식간에, 그리고 명백히 조소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렇진 않습니다.”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녀 자신도 자신의 속을 파악할 수 없었다.

강인하고 냉소적이고 할 말은 다 하는 당당한 키리에 뷰캐넌. 그 껍데기가 벗겨진 자신은 너무나 초라하다. 상대를 외면해 자신의 나약함마저 없던 것으로 치부하고 싶은 마음을, 그가 알까? 그걸 고백하는 건 키리에에겐 죽으란 말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장 잘하는 걸 하기로 했다.

의연해지는 것. 아니, 의연한 척하는 것.

“셀 아렐라노까지의 동행은 이제 끝났잖아요.”

키리에가 부러 냉정하게 말했다. 일순 나타니엘의 몸 근육에 힘이 들어갔으나, 그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처음부터 그게 목적인 동행이었고, 이제 나타니엘 님은 억지로 저와 같이 있지 않으셔도 되고요. 제가 어떻게 시조의 금제를 깼는지는, 주기적으로 만나 연구해 보기로 해요.”

키리에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의외로 미소는 가볍게 나왔다.

‘즐거웠던 건 사실이니까.’

이든과의 약혼, 루비니아의 등장 이후로 행복했던 적이 별로 없다.

나타니엘의 등장과, 주변을 신경 쓰지 않는 그의 솔직함은 분명 신선한 자극이었다. 자신과는 달라서, 그게 참 부러웠더란다.

‘나는 그를 통해 대리 만족하고 있었던 거야.’

그렇다고 해도 그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여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이제 현실로 되돌아왔으니 꿈에서 깰 때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키리에의 말이 빠르고 정확하게 공기를 갈랐다.

나타니엘에게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비쳤다. 홍채의 푸른 빛이 하양에 가까운 파랑에서 짙은 바닷물의 빛으로 헝클어졌다.

그를 만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게 짜증인지, 화인지, 분노인지, 실망인지, 키리에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알 수 있는 건, 늘 노래하는 듯한 미성이었던 나타니엘의 목소리가 유난히 낮아졌다는 것.

[레쇼가 무슨 말을 했지?]

“별 이야기 아니었어요.”

[그 별거 아닌 이야기를 해 봐.]

“말하고 싶지 않아요.”

[키리에 뷰캐넌.]

“달이 아름답네요.”

키리에가 천천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특별히 레쇼의 말로 깨달은 게 있다. 어느 순간 나타니엘이 자신을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 [키리에.]라고.

키리에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저 호칭의 변화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게 레쇼의 말에 따라 ‘특별한 의미’를 뜻하는 거라면 말이 달라진다.

현 국왕은 교활한 자다. 당연히 나타니엘을 이용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런 그에게 고작 백작가 영애인 자신은 인질 잡기 좋은 약점일 뿐이다.

‘이미 한번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적이 있는데, 또 사람한테 얽히게 만들 순 없잖아.’

키리에는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 웃어 버렸다.

허세가 과하단 그의 말이 맞았다. 결국 자신은 눈앞에 있는 사람을 내버려 두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왕가에 복수하실 건가요?”

[봐서.]

“제가 당신을 말릴 수 있을까요?”

[레쇼가 이상한 바람을 넣었군.]

“그렇죠? 저는 당신께 그 정도 가치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린 아무 사이 아닌 거죠.”

그녀가 잊지 말라고 짚어 주듯 조곤조곤 말했다. 나타니엘은 이제 거의 호흡을 하지 않는 듯했으나, 키리에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무 사이 아니니까요. 관계,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이만 안녕해도 좋겠네요.”

누구도 당신을 이용할 수 없게.

욕심 많고 제멋대로인 인간들의 손에 휘둘리기에는 그는 너무 고고하다. 높은 곳에서 하늘을 나는 게 어울리는 존재가 바닥으로 끌어내려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

아주 오랜 침묵이 이어졌다.

느리게 눈을 깜빡거리며 키리에를 바라보던 나타니엘은 나른한 숨을 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지러이 놓여 있던 체스 말은 원위치로 돌아갔고, 어느새 그의 손에는 검은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에는 눈발이 거셌고, 그에 맞춰 시끄러운 바람 소리가 났다. 그 윙윙대는 소리에 묻힐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나타니엘이 중얼거렸다.

[그래……. 관계없지.]

키리에는 돌연 슬퍼졌다. 겨울 숲을 내려다보던 그때처럼, 지금의 나타니엘은 몹시 고독해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늘 올연(兀然)하여. 드높은 겨울의 왕은, 더는 지상의 어떤 일에도 사사로이 매이지 않을 것을 약속하듯 차갑게 속삭였다.

[가 봐.]

다음 날 아침, 키리에가 일어났을 때, 나타니엘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마치 초봄 햇빛에 녹아내린 눈사람처럼 순식간에.

***

수도 셀 아렐라노는 한껏 들떴다. 왕세자의 약혼 축하연을 기념해, 국왕 진저 오레윈브리지가 수도 전역에 축제를 열었기 때문이다.

드레스의 가봉을 위해 다시 만난 라우라는 무도회보다는 축제에 더 들떠 있었다.

“얘, 키리에! 우리 무도회 끝나고 놀러 갈까?”

“끝나면 새벽일 텐데?”

“축제니까 괜찮잖아! 너희 기사들은 꽤 강하고. 어때? 모습 숨기면 아무도 모를 거야!”

“글쎄. 애초에 축제가 열릴 수 있을까?”

“윽. 그건 그래…….”

눈은 지금도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내리고 있었다. 날씨에 대해서라면 라우라는 할 말이 아주 많은 눈치였다.

“대륙 최북단까지 눈이래. 미친 거 아냐? 열대 지방인데 말이야! 덕분에 지금 수송비가 세 배로 들고 있어.”

“미안해.”

“참 나, 왜 네가 미안해해? 하늘이 잘못한 건데.”

키리에가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그날 이후로 적설량이 많아졌어.’

이 눈이 나타니엘 때문에 내리고 있는 거라면, 그는 아마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키리에는 그 생각마저 자의식 과잉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물론 감히 인간 따위에게 먼저 거절당한 듯한 상황이 화가 날 수도 있겠지만,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그는 어차피 언제고 셀로 떠날 사람이었다. 이미 한 번 오레윈브리지에게 배신당한 그라면, 역시 인간은 못 미덥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의상실 창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키리에의 어깨를 라우라가 톡톡 두드렸다.

“얘, 키리에! 정신 차려!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응? 미안. 뭐라고 말했어?”

“야회 말이야. 누구랑 입장할 거야?”

가봉 된 드레스를 입어 보며 라우라가 물었다.

“아버지와 같이 입장할 거야. 원래도 그래왔고.”

“네 오빠라도 있으면 같이 입장할 텐데, 대체 어디 계신다니?”

“글쎄. 관심 없는걸.”

“하긴, 이제 와 무슨 관계가 있겠어? 거의 남 수준이잖아.”

라우라의 말에 키리에가 멈칫했다.

“키리에? 왜 그래?”

“응? 아냐, 아무것도. 맞아, 관계없지. 각자 자리에서 잘 살면 되는 거야.”

다행히 라우라는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갔다.

‘그래, 이게 맞는 거야.’

키리에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삼켰다.

“그보다 이 드레스 어때? 장식이 좀 과한가?”

“장식보다는 보온에 문제가 있을 것 같은데…….”

“무도회장은 더우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곧 봄이잖아!”

그 봄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말한 게 호국경이다.

“그러면 좋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여우 털 망토 정도는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뭐, 그러자! 얼마 하지도 않는데.”

키리에와 라우라는 드레스의 수선을 끝낸 뒤 의상실을 나섰다. 거센 눈보라에 머리 모양이 망가지자 라우라가 대번에 인상을 썼다.

“정말이지, 밖에 나다니질 못하겠네. 대체 웬 폭설이야!”

키리에가 불안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타니엘은 정말 왕가에 복수할까? 호국경은 정말로 그를 말릴 수 없을까? 이 나라는 어떻게 되는 걸까?’

누구도 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여러 가지 해결되지 않는 고민을 끌어안은 채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이든과 루비니아의 약혼 축하연이 열렸다.

약혼 축하연은 성대했다. 왕궁 셀의 볼룸은 길고 넓은 데다 마룻바닥은 매끈매끈해 춤추기에 더없이 좋았다.

키리에 뷰캐넌은 그 무도회장에 아버지와 함께 입장했다. 뷰캐넌 부녀가 입장하자마자 사람들은 하이에나처럼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화제의 인물이 왔네요. 무슨 심정일까?”

“왕가와의 약혼 이후 뷰캐넌 백작이 그렇게 기세등등했는데 이젠 어떨지…….”

세자르 뷰캐넌은 딸을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태연하게 굴었다. 그럼에도 사방에서는 뷰캐넌의 속을 긁는 인사말이 넘쳐났다.

세자르는 진절머리를 치며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정재계 가주들의 무리로 사라졌다. 남겨진 건 키리에뿐이었다.

“그나저나 키리에 뷰캐넌은 정말 꼴이 말이 아니게 되네요.”

“사교계의 눈의 여왕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나라면 병중을 핑계로 오지 않았을 거예요.”

“오지 않을 순 없었겠죠. 그러면 꼴이 더 우스워지니까.”

“하지만 대단한 여자예요. 생각해 보면 왕세자 저하와 캐스너의 관계가 기정사실이었을 때에도 낯 한 번 안 바꾸고 그들을 대했잖아요?”

“귀족답긴 하네요. 실속도 없이 자기 밥그릇을 뺏겨서 그렇지.”

키리에는 가만히 주변의 수런거림을 무시했다. 참여하지 않으면 꼬리를 내렸다 비웃고, 참여하면 낯짝이 두껍다 욕하고. 이래도 저래도 안줏거리가 된다면 당당한 편이 나았다.

부인들, 영애들만 수군거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네들은 떠들기만 할 뿐 직접 그녀를 건드리진 않았으나, 영식들은 조금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키리에를 괴롭혔다.

“안녕하십니까, 키리에 뷰캐넌 양. 저번에 인사를 드렸지요?”

퉁퉁한 남자 한 명이 키리에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알피로스 덴버로우 자작님. 그럼요, 꿩 사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게 아직도 기억이 나는걸요.”

“기억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알피로스 덴버로우는 키리에보다 16살이 많았다. 그리고 ‘아무리 뷰캐넌이라지만 왕세자에게 파혼당하고 값어치가 떨어진 여자’ 정도면 비벼 볼 만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 일 이후 잘 지내십니까?”

“그 일이라뇨?”

키리에가 일부러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말했다. 덴버로우 자작이 헛기침했다.

“왕세자 저하와의 파혼 말입니다.”

“아아. 그 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전 늘 잘 지내 왔고, 그 일이 딱히 저를 잘 못 지내게 할 이유는 되지 않아서요, 자작님.”

“참으로 의연하십니다. 그런 모습이 사내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게 되는 것이겠지요.”

키리에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엄한 곳에 불이 붙었네요. 어서 비가 내리면 좋겠군요.”

“젊은이의 가슴에 타오르는 불을 어찌 끄려 하십니까? 사랑의 불길이 선사하는 환희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거늘.”

“저는 저의 가장 큰 기쁨은 저 자신에게 맡기는 편이라서요. 다른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

덴버로우 자작이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느물느물하게 키리에의 목선과 가슴골을 훑어보았다.

“그건 뷰캐넌 양이 진정한 쾌락을 못 느껴봐서 그런 겁니다.”

“뭐라고 하셨죠?”

“사랑의 쾌락 말입니다. 물론, 정신적인 것 말이지요. 혹시 이상한 뜻으로 생각하신 건 아니겠죠?”

그는 주변에 병풍처럼 서 있는 다른 영식들과 시선을 교환하며 낄낄댔다. 종합적으로 대단히 역겨운 행동이었다.

‘한 번 파혼당한 여자는 쉬워 보인다 이거지. 저열하기 짝이 없어.’

키리에는 이 이상 예의를 차려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오만하게 턱을 들었다.

“글쎄요. 적어도 제게 그 ‘쾌락’을 알려 줄 분이 덴버로우 자작님은 아닌 것 같네요. 왜냐면 사내들의 ‘사랑’이란 만 29세가 넘어가면 급격히 부실해지잖아요?”

키리에가 일부러 ‘만 29세’에 강세를 두며 말했다.

그가 뒤로 정력제를 사들이고 있다는 소문은 유명하다. 덴버로우 자작의 얼굴이 굳은 반면, 키리에는 무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방금 절 모욕하신 겁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구체적인 나이까지 운운해 가며 부실 어쩌고 하는 건 너무 의도가 뻔히 보이는 모욕 아닙니까?”

“그걸 느끼셨다니 참으로 다행이네요. 방금 제가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환희를 선사해 주셨어요.”

“뭐라고요?”

덴버로우 자작이 위협적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는 눈가를 파르르 떨더니, 배를 내밀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당찬 분이시니 왕세자 전하께서 감당하지 못하셨던 거군요. 아무렴 그렇지.”

그건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비열한 발언이기도 했다. 여기서 뭘 어떻게 말한들 ‘감히 왕가를 모욕하느냐’고 엮이기 딱 좋았으니까. 물론 그런 어리석은 도발에 넘어가 줄 만큼 키리에는 멍청하지 않았다.

“본인이 저를 감당할 능력이 되지 않는 걸 전하를 끌어들이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키리에는 은근슬쩍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숙녀를 10분도 감당하지 못하시다니. 아무래도 건강에 문제가 있으신가 보네요. 그렇죠? 좋은 약 찾으시길 바라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죄송하지만 저는 덴버로우 자작님이 감당하긴 어려운 사람이라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누군들 감당하기 쉬우시겠느냐만…….”

키리에가 몸을 돌렸다. 뒤에서 덴버로우 자작과 이름 모를 아무개 머저리들이 쑥덕대는 게 들렸지만 무시했다.

‘이제 겨우 10분 지났다고? 이걸 6시간은 더 해야 한다 이거지. 아, 좋아. 끝내주네.’

키리에가 쉴 만한 의자를 찾기 위해 무도회장을 가로지르는 동안, 같은 대화를 6번 정도 반복해야만 했던 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마침내 그녀는 볼룸의 아랫자리에 다다랐다. 악단과 멀고, 입구와도 먼 곳. 감히 뷰캐넌 영애에게 말을 걸 용기도 없는 한미한 가문의 영랑들이 모인 곳이었다.

자리에 앉은 키리에에게 누군가 득달같이 다가왔다.

“키리에!”

키리에가 고개를 돌렸다. 곱슬거리는 주황빛 머리카락을 공작 깃으로 장식한 라우라가 그녀를 향해 활짝 미소지었다.

“이런 곳에 있었구나?”

“라우라, 왔어?”

“응. 내가 좀 늦었지?”

라우라는 소위 벽의 꽃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려니 독보적으로 눈에 띄었다. 동작 하나하나가 화려한 그녀는 주변에 개의치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이런 곳에 있어? 아아, 아니, 말하지 마, 대충 짐작이 가.”

“네가 생각하는 게 맞을걸.”

“누가 우리 귀염둥이를 괴롭혔을까? 나중에 적어서 알려 줄래?”

“알려 주면?”

“포트듀케인이 어떤 가문인지 알려 줘야지!”

“네가 말하면 농담 같지 않아.”

“농담 아니니까!”

라우라가 와락 웃었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였다.

“너를 위해서라도 그냥 내가 가주를 할까 봐. 대체 왜들 남의 결혼에 그렇게 참견이야? 나 너를 찾아다니면서 네 이름을 17번 정도 들은 것 같아!”

“양호한 수치 같은데?”

“뭐라고? 요 귀염둥이. 이리 와! 오늘은 나랑 같이 있자! 마리아는 어른들께 인사드려야 해서 좀 늦을 것 같대.”

“그러고 보니 마리아는 곧 가주 승계인가? 순조로워 보이네.”

“마리아잖아!”

라우라와 있으니 탁했던 공기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특유의 발랄함 덕에 주변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오늘의 주역은 언제 온대? 키리에 넌 알아?”

“슬슬 등장하지 않을까? 날 놀려 먹고 싶을 테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오늘 주역은 그 둘이 아니라 ‘호국경’이잖아!”

“아, 그쪽.”

키리에가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그 전설 속 호국경을 만난 게 바로 며칠 전이었다.

“호국경에게 관심이라도 생긴 거야, 라우라?”

“얼굴도 모르는 남자한텐 관심 없고, 그냥 호국경 영지가 대륙이랑 가까우니까 혹시 항구 좀 개방해 줄 수 있나 해서!”

사업가다운 말이었다.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라우라에게서는 생기와 활력이 넘쳤다. 키리에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내가 너의 반만큼만 똑 부러지면 좋겠어, 라우라.”

힘없는 말에 앵무새처럼 여기저기 움직이던 라우라의 고개가 멈췄다.

“무슨 소리야? 너만큼 똑 부러진 애가 어딨다고?”

“너도 마리아도 각자 열심히 자기 자리를 일궈내고 있는데, 나만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무도회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사방에서 마치 자신의 가치가 ‘왕세자의 약혼녀’ 외에는 없었던 것처럼 말하니 주눅이 들었다.

라우라가 이야기를 들으며 서서히 입을 벌렸다. 마지막에 가서는 머리 장식이 흔들리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키리에를 와락 껴안았다.

“대체 누가 너한테 그런 소리를 하게 만든 거야? 세상에! 키리에, 넌 아무 문제 없어! 네 장점은 다른 곳에 있잖아!”

“그런 걸까?”

“잊었어? 내가 할 일 없이 무도회 순례나 하고 다닐 때, 내게 ‘셈이 빠르고 반죽이 좋아서 시장 변화가 빠른 일을 잘하겠다.’라고 조언해 준 게 너잖아!”

“그건 정말로 네 장점이었는걸.”

“난 몰랐어! 몰랐다구! 사람들이 매일 나더러 머리 빈 사치스러운 여자라고 했단 말야!”

“널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야.”

“바로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키리에!”

라우라의 눈이 진지한 빛으로 반짝였다. 그녀는 주변도 개의치 않고 키리에의 손을 꽉 붙잡았다.

“네 장점이 그거야. 사람들이 보지 않는 진짜 모습을 봐주는 거. 마리아도 네 말을 듣고 가주가 되기로 결심한 거, 몰랐지?”

키리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모습에 라우라가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마리아는 자기 오빠들보다 뛰어난데, 항상 기죽어 살았잖아. 그러지 말라고 알려 준 게 너였고!”

“그건 마리아가 워낙에 능력 있는 애니까…….”

“얘가 진짜! 그때 마리아는 말수도 적고 그런 거 티 내는 애가 아니었다니까? 그걸 알아본 건 너야, 키리에.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그런 말 하는 사람, 내가 무찔러 줄게!”

“그게 왕세자 저하라면?”

“그럼 대놓고는 못 하고 뒤에서 무찔러 줄게!”

라우라가 키리에에게만 들리게 속닥거렸다. 둘은 눈을 마주친 뒤, 키득거리며 웃었다.

“우리 진짜 웃기는 거 알아?”

“맞아, 웃겨.”

“웃긴 짓 그만하고 싶으니까 이상한 말 그만해, 귀염둥이야!”

“고마워, 라우라.”

라우라가 씩 웃었다. 그녀는 키리에의 손을 잡고 춤추고 있는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춤추자, 키리에!”

“후작님이 아시면 뭐라고 하지 않을까?”

“우리 아빠는 내가 돈 벌어다 주기 시작한 이후로 뭐라고 안 해!”

때마침 남녀 역할 구분이 없는 4인조 춤이었고, 둘은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껴서 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쯤 무도회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왕세자 이든 오레윈브리지와 루비니아 캐스너였다.

오랜만에 본 이든은 신수가 훤했다. 루비니아 역시 볼룸의 그 누구보다 생기가 넘쳤다. 분홍색 사파이어 목걸이를 한 그녀의 얼굴에는 숨겨지지 않는 승리감이 엿보였다.

“멋진 밤이오, 신사 숙녀 여러분.”

이든이 잔을 들었다. 그는 좌중을 둘러보며 왕세자다운, 그러나 위엄은 조금 모자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밤의 여신은 내 옆에 있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겠군.”

좌중이 잔잔히 웃었다.

“드높은 신의 이름 아래 약혼을 맹세한 나의 약혼녀, 루비니아 캐스너를 여기 소개하오.”

루비니아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작은 요정처럼 사랑스럽고 애교 넘치는 동작이었다.

“루비니아 캐스너라고 합니다. 부족한 몸이나마 왕세자 저하를 보필하기 위해 노력할 테니, 어여쁘게 봐주세요.”

이로써 공식적으로 약혼한 사이가 된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잔을 들었다. 새 연인을 축하하기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건배하는 그 순간, 키리에는 루비니아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고 느꼈다. 느낌만은 아니었다. 군중 속에서 그녀의 녹색 눈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모두가 잔을 내릴 때, 작고 앵두 같은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내가 이겼어.’

그리고, 마침내 모두가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다. 루비니아 캐스너가 여왕 같은 걸음으로 키리에에게 다가갔다. 드레스를 입은 숙녀들이 물살처럼 갈라져 길을 텄다.

“어머.”

루비니아가 꾀꼬리처럼 낭랑한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이런 곳에 계셨네요, 뷰캐넌 양!”

다소 높은 톤의 외침은 별 어려움 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꼭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그녀는 대중의 관심을 끄는 법을 아는 여자였다.

“약혼 축하드려요, 캐스너 양.”

“감사해요. 축하해 주실 줄 알았어요!”

루비니아가 쌕 웃었다.

“이든은 지금 가주님들과 이야기하러 갔어요. 7대 가문의 가주님들이요.”

“같이 가시지 않고요?”

옆에 있던 라우라가 날카롭게 말했다.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저는 왕세자빈으로서 기품이 부족한 것 같아서요.”

“하? 무슨 상관이죠?”

“그게, 뷰캐넌 백작가의 키리에 양은 경험도 있으시고, 좋은 가문의 영애니까 제가 배울 게 있을 것 같아서 일부러 찾아왔어요!”

루비니아는 그 말을 하면서 얼굴에 일말의 날카로움, 일말의 조롱, 일말의 비웃음도 띄우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온화함만이 보였고, 뿌리를 알 수 없는 승부욕은 눈동자 아래에 잠들어 있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아리송해졌다. 분명 조롱 같은 말인데도 천연덕스럽고 순진한 낯이 그 진의를 무해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의 민낯을 본 적이 있는 라우라와 키리에만이 얼굴을 굳혔다. 다시 나서려는 라우라를 키리에가 막았다.

“그 말을 하려고 일부러 오셨다면, 저는 딱히 말씀드릴 게 없네요. 이미 저보다 훌륭히 해내고 계신걸요.”

키리에의 대답에 루비니아는 까르르 웃으며 몸을 붙여 왔다.

“무슨 말씀이세요! 키리에 양은 오랫동안 이든의 약혼녀였잖아요! 저는 당연히 발끝에도 못 미치죠!”

“캐스너 양!”

라우라가 노기 띤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루비니아는 그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럴 만했다. 루비니아 캐스너는 현 사교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하루아침에 왕세자빈이 된 저력을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고, 확실히 그녀는 그게 가능할 정도로 눈에 띄었다. 그것을 알기에 라우라 역시 이를 갈면서도 크게 역정 낼 수는 없었다.

“……몸가짐을 단정히 하시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붙는 건 실례랍니다.”

“어머나? 제가 결례를 범했네요. 어떡하죠? 역시 7대 가문 출신은 다르네요. 왕세자빈이 되려면 저는 정진해야겠어요.”

“그럼요. 영광스러운 자리이니 왕세자 저하의 이름에 먹칠하는 일은 없어야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포트듀케인 양!”

루비니아가 방긋 웃으며 키리에에게 시선을 주었다.

“알고 보니 다른 남자가 있어서 약혼에 충실하지 않았다든가…… 그런 소문이 돌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술렁였다. 키리에 뷰캐넌이 왕세자와의 파혼 직후, 젊은 미남을 데리고 여행을 갔더란 이야기는 이미 사교계에 파다했다.

키리에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닫혔다.

나타니엘과 다닌 일이 퍼지리라고는 예상했다. 애초에 그것마저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고 벌인 일이기도 했다.

루비니아가 아기 천사처럼 눈을 깜빡였다.

“그렇지 않나요, 뷰캐넌 양?”

사람들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도 사교계 모두가 결벽증 수준으로 뒷이야기가 없는 키리에 뷰캐넌의 첫 ‘추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찰나였다.

키리에는 쏟아지는 눈총을 담담히 받아냈다. 아무래도 루비니아 캐스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자신을 완벽하게 눌러 주고 싶은 것 같았다.

‘대체 우리가 무슨 일이 있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억울하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해서 왕세자의 약혼 축하연에서 무도회의 주역인 루비니아를 몰아세울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발끈할수록 더 좋아하겠지.’

결국 키리에는 루비니아의 도발을 흘려넘기는 것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캐스너 양.”

루비니아가 씩 웃었다. 그녀는 허락이라도 받은 양 포르르 키리에의 곁에 다가왔다.

“그렇지요? 공감해 주실 줄 알았어요. 저는 그런 파렴치한 짓,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이죠.”

“아주 문란하고, 또, 이해할 수도 없고요. 그건 사람의 신뢰를 배신하는 일이에요.”

“…….”

키리에의 보랏빛 눈과 루비니아의 녹색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키리에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맞는 말이에요. 남의 약혼자를 꾀어내거나,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거나…….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참 많죠, 캐스너 양?”

루비니아가 흰 뺨을 붉히며 활짝 미소지었다. 마치 키리에의 도전을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럼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아주 멋진 물건이 하나 있고, 그 옆에 볼품없는 물건이 있다면, 누구나 멋진 물건을 가지고 싶지 않을까요?”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하는데요. 보통 사람은 남의 물건을 빼앗으려 들지 않거든요.”

“왜 이렇게 나약하게 구세요? 뺏긴 사람이 잘못이지.”

“전형적인 도적 떼의 논리네요.”

루비니아가 혀를 쏙 내밀었다.

“그래요? 아이, 도적이든 뭐든 어떻겠어요! 엘서스는 즐거우셨어요, 뷰캐넌 양?”

아무래도 루비니아는 어떻게든 키리에가 이든이 아닌 다른 사내와 정을 통했다고 떠벌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타니엘의 정체를 밝힐 수 없는 이상 내가 불리해.’

자신만의 일이라면 얼마든지 멋대로 굴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키리에가 사실 소문의 나타니엘은 평민 나부랭이가 아니며 전설 속의 종말이라는 사실을 떠든다면 그는 어떻게 될까?

억울하게 잠들었다가, 이제 막 일어나 겨우 세상에 적응한 사람이 겪기엔 번거로운 일이 생길 게 분명했다.

‘도움은 되지 못할지라도 약점이 되거나 해가 되지는 않겠어.’

키리에가 입을 다물자, 루비니아가 기세등등해졌다.

“바다 공기는 어떻던가요? 상쾌하시던가요? 엘서스는 휴양지로 유명하죠. 연인들끼리 사랑을 속삭이기에 좋은 풍경도 많고요.”

“제 고향이기도 하죠.”

“풋풋하네요. 저도 이든과 함께 제 고향에 들를까 봐요.”

“좋은 생각이군요.”

“그럼요. 숨길 사이가 아니라면야, 고향에 가는 것 정도는 문제 될 일도 아니니까요.”

“그렇네요. 꼭 연인만 함께 고향에 방문하리란 법은 없지만요.”

루비니아가 카랑카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적령기의 숙녀가 잘 알려지지도 않은 신사분과 단둘이 며칠 내내 마차를 타고 다니는 게 부적절하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에요.”

“하긴, 저도 그런 행동을 했던 분을 한 명 압니다.”

말을 마치고 키리에가 루비니아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네가 그랬잖아?’

그러나 오늘의 루비니아는 승리자였고, 그녀에게는 외부의 어떤 자극도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 그건 그렇네요. 그분은 어떻게 되었나요? 자신의 어리석음 깨달았나요, 아니면 그게 전화위복이 되어 오히려 더 큰 행운을 손에 거머쥐었나요?”

루비니아는 어떻게든 자신이 명문 뷰캐넌의 약혼자를 빼앗았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확실하게 주지시키고 싶은 것 같았다.

키리에는 보다 근본적인 의문에 빠졌다.

‘대체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이렇게까지 적의를 갖는 거지?’

그녀는 루비니아 캐스너에게 별 유감이 없었고, 처음 만났던 루비니아 역시 그래 보였다.

키리에는 마리아를 필두로 하는 귀족파, 루비니아는 줄리아 공주를 필두로 하는 공주파로 나뉘긴 했지만, 별다른 접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루비니아는 이든에게 접근하던 초기에도 키리에를 향한 악감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키리에가 언제부터 루비니아의 태도에 악의가 실리게 되었는지 생각하느라 말을 멈추자, 루비니아는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낭랑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뷰캐넌 양의 약혼 때에는 축하연을 열지 않았네요?”

“그랬죠.”

“아쉬우셨겠어요. 이 무도회장, 정말 근사하잖아요!”

“저는 춤을 그다지 즐기지 않아서 그리 아쉽진 않았어요.”

“춤을 즐기지 않으시나요? 뷰캐넌 양이 춤추는 모습은 한 마리 백조 같다고 평이 자자하던데 의외의 말씀을 하시네요. 심지어 올드시우다드 양마저도 한 수 접어 줄 정도라고 하던데요.”

루비니아가 말했다.

키리에는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마리아가 자리에 없는데 그녀와 키리에를 비교하는 건 대단히 무례한 행동이었다.

키리에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는지 옆에 있던 라우라의 얼굴도 차가워졌다. 사람들 역시 조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차기 올드시우다드 공작이고, 아무리 루비니아가 미래의 왕세자빈이라고 한들 함부로 건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뒤늦게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루비니아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되면 아쉬울 것 같네요. 오늘 무도회는 멋진 신사분들이 많이 오셨으니까, 부디 그 고운 자태를 보여 주세요.”

그리고 여전히 조롱인지 진심인지 구분되지 않는 태도로 덧붙였다.

“오늘 저희 약혼을 축하하기 위해 호국경께서도 와 주시겠다고 했으니까요.”

호국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또 다른 흥분이 휘몰아쳤다.

그는 이 나라에서 국왕에게 신하의 예를 표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존재였으니, 모두가 그 모습을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네요. 물론 그분께서 누구와도 춤을 추지 않겠다 하셔도 아무도 뭐라 할 수는 없을 테지만요.”

“그거야 그렇겠지요.”

루비니아가 해맑게 웃었다.

키리에는 하나 더 깨달았다. 자신이 호국경과 춤이라도 추지 않는 이상, 루비니아는 계속 그녀에게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이리란 걸.

‘그렇다고 그녀가 남자에게 목숨을 거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아. 그렇다기보다…… 남자의 지위가 그녀의 전리품이라는 느낌이야.’

키리에는 이든이 “루비니아와 결혼하지 못하게 한다면 오레윈브리지의 성이라도 버리겠다.”라고 말했을 때 루비니아의 서늘했던 눈빛을 아직도 기억한다.

사실, 그래서 더 루비니아를 대하기가 어려웠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만 쑥덕거리는 얼굴 없는 적들과 달리, 루비니아는 적어도 키리에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상대’로 인정해 주고 있었으니까.

덕분에 키리에는 미온적으로 대답하는 것에 그쳤다.

루비니아는 키리에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피력하며 나서지 않는 것에 내심 아쉬워했으나, 그걸로 만족한 듯 물러나려고 했다.

그때였다.

“뷰캐넌 양 말입니까? 그녀는 정말 남자를 꾀는 데에 재능이 있죠.”

울림통이 큰 남자의 목소리가 적당히 높은 소리로 울렸다.

글라디오소 버몬트였다.

[지루하군.]

레쇼는 오늘 들어 나타니엘의 그 말을 71번째 듣는 중이었다.

〔카드놀이라도 하겠나?〕

나타니엘은 가뿐히 그 제안을 무시했다. 71번째 무시였다. 그는 그리고 72번째의 말을 했다.

[따분해.]

레쇼는 다시 대답했다.

〔산책을 해.〕

[진담이니?]

〔물론 나도 같이 간다.〕

[재미없어.]

나타니엘은 73번째의 말을 중얼거렸다.

[따분해.]

〔온천욕을 해.〕

[너는 참 한결같이 고지식해.]

나타니엘이 웃었다. 레쇼는 기분이 조금 상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나타니엘을 맡을 책임이 있었다.

과거 나타니엘은, [심심하다]며 난데없이 적지로 날아가 수많은 적을 몰살시키고 온 적도 있었다. 만약 그가 [심심해서] 날뛰기 시작한다면, 그걸 1초라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란 걸 레쇼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네가 이 정도로 조용한 게 기적이군. 키리에 뷰캐넌에게 가서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어.〕

커프스를 잠그던 레쇼가 멈칫했다. 뒷목이 서늘했다.

몸을 돌리자 나타니엘이 묘하게 온도가 뚝 떨어진 낯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화내는 건가?〕

[아니.]

〔그럼 그 냉기는 뭐지.〕

말하자마자 셀의 공기를 통째로 얼릴 것 같던 긴장감이 느슨해졌다. 나타니엘은 포도주가 담긴 잔으로 얼굴을 가렸다.

[깨어나지 말 것을 그랬어.]

〔…….〕

[모든 게 따분하군.]

나타니엘이 말하는 건 왕가의 일이었다. 레쇼도 동감했다.

나타니엘이 수도로 돌아와 셀에 찾아온 순간의 일이다. 국왕 진저 오레윈브리지는 나타니엘을 보자마자 우선 그의 비위를 맞추기에 바빴다. 시조의 마법으로 잠들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아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타니엘의 강대한 힘을 직접 보지 못해서인지, 그녀는 이 놀라운 존재를 어떻게 자기 좋을 대로 이용해 먹을까를 고민하는 게 보였다.

왕세자라고 다르지 않다. 이든 오레윈브리지는 생각 없이 나타니엘을 우러르기에 바빴다. 냉랭한 표정을 하고 앉은 나타니엘에 대고 자기 약혼 축하연에 와 달라는 소리를 지껄이기까지 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나타니엘이 묘하게 딴생각에 빠져 있던 것이 그들에겐 행운이었다 하겠다.

〔나는 네가 국왕을 보자마자 죽일 줄 알았다.〕

[내가 호국경의 기대를 배신했군.]

〔그런 의미가 아니다. 내가 아는 넌 분명 그랬을 거야.〕

[하고 싶은 말이나 하면 좋겠는데. 레쇼.]

〔키리에 뷰캐넌이 너를 말렸나?〕

얼굴 앞에서 잔을 흔들던 나타니엘의 손이 멈췄다.

레쇼는 기이함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키리에 뷰캐넌의 이름만 나오면 그는 하던 것을 멈췄다. 이제는 그녀가 정말로 그에게 무슨 의미인지 합리적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인간은 모르겠어.]

나타니엘이 중얼거렸다.

〔우린 이제 인간이 아니다.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어.〕

[하.]

나타니엘이 웃었다. 언뜻 경쾌한 울림이었으나 본질은 조소에 가까웠다. 그는 손가락에 힘을 줘서 잔을 부숴 버렸다.

붉은 포도주가 손을 타고 뚝뚝 흘렀다. 그 손 안에 다시 잔이 나타나고, 그걸 부수고, 잔이 또 나타나고, 나타니엘은 계속 그걸 부숴 버렸다.

〔나타니엘.〕

레쇼의 나직한 부름이 있을 때까지도 그는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해.〕

나타니엘이 무표정으로 제 손에 흐르는 포도주를 응시했다. 너무 과한 아름다움 언저리에서 날 것의 폭력성이 꿈틀대는 그 광경을, 레쇼는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정 할 일이 없거든 무도회에 가라. 키리에 뷰캐넌도 올 거다. 7대 가문은 필참일 테니까.〕

나타니엘의 박제된 듯한 웃는 얼굴이 레쇼에게 향했다.

[7대 가문?]

〔왕세자의 약혼 축하연.〕

[아아. 그건가.]

나타니엘의 입에서 의미 모를 수긍의 말이 새어 나왔다. 무언가를 고민하듯 가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잠깐 모습을 보였다 사라졌다.

[네가 그런 곳에도 드나들었던가?]

〔국왕과의 거래다.〕

[죽이면 되잖아.]

나타니엘이 대수롭지 않게 답한 뒤, 느른하게 하품하며 팔을 늘어뜨렸다. 상처 하나 없는 팔에서 포도주는 검은 실뱀이 되어 바닥으로 흩어졌다.

레쇼는 징그럽다기보다 기이하고 꺼림칙한 느낌에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 싶지 않다.〕

[넌 아직도 옛날과 똑같구나.]

〔그러는 너 역시.〕

더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레쇼가 몸을 돌렸다.

〔가지 않을 거라면 오늘 밤만큼은 얌전히 있어.〕

[이런. 안 간다고는 안 했어.]

의외의 말이었다. 레쇼가 다시 나타니엘을 바라보았다.

나타니엘은 어느샌가 말쑥하고 고급스러운 예복 차림으로 옷깃을 당기고 있었다. 한 몸 같은 지팡이를 들고서. 레쇼는 그런 나타니엘의 태도에서 기이한 망설임을 엿보았다.

〔나타니엘. 넌…….〕

레쇼가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희미한 깨달음이 그것을 말렸다.

과거에도 나타니엘은 늘 따분하고 지루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과 발라브리가의 일에는 늘 손을 빌려주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여전히 생각이 많구나.]

어느새 다가온 나타니엘이 눈앞에서 지팡이를 한 번 흔들었다. 나타니엘이 레쇼를 스쳐 지나갔고, 레쇼는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

경이로운 힘을 가졌으면서도 규범을 좋아하던 나타니엘답게, 그들은 마차를 타고 볼룸으로 이동했다.

방문객의 이름을 외치는 하인이 레쇼를 보고는 몹시 격양된 얼굴로 입을 벌리려던 순간이었다. 나타니엘의 지팡이 끝이 하인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하인의 입에서 나오려던 말이 쑥 들어갔다.

[기다려봐.]

〔나타니엘?〕

레쇼는 나타니엘이 무도회장 안쪽의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걸 깨닫고 그것을 따라 했다. 집중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큰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중이었다.

“참으로 무도한 일 아닙니까! 그녀와 그 이름 모를 남자의 사이는 아주 깊어 보였습니다! 예, 이 글라디오소 버몬트와의 결투에 직접 나설 정도면 이미 그 교분이 상당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유난히 발음을 꼬는 격렬한 호소에 나타니엘의 푸른 눈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 안에 태고의 잔혹성이 깃드는 것을 레쇼는 똑똑히 보았다. 연설은 끊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참담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자는 사특한 술법을 이용해 결투장에서 저를 강제로 무릎 꿇리고, 굴욕을 안겨 주었으나, 다들 아시다시피 이 글라디오소 버몬트는 절대 외부의 무도함에 굴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쨌단 소린가?”

누군가 끼어들어 물었다.

“아, 예, 말씀드리겠습니다. 애초에 정숙한 처녀라면 파혼 직후 남자와 단둘이 여행을 떠날 일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키리에 뷰캐넌 양이 정숙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는가?”

또 다른 누군가가 물었다.

“그런 노골적인 단어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는 왕세자 저하께서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샅샅이 파헤쳐, 감히 왕가를 모욕하는 일이 없게끔 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키리에 뷰캐넌 양, 사실인가?”

마지막은 왕세자의 목소리였다.

다음 순간 낭랑하고 또렷한 미성이 들렸을 때, 레쇼는 지팡이를 쥔 나타니엘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니요.”

“그럼 버몬트 자작의 증언은 무엇인가?”

“당당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그분과 부적절한 관계에 있지 않으며, 왕세자 저하와의 약혼 도중 생각하시는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적도 없습니다.”

목소리는 당당했으나, 어딘지 지쳐 보였다.

“그러나 키리에 뷰캐넌 양, 그대가 정체 모를 젊은 남자와 한 별장에 묵었다는 소문이 도는 것도 사실이네.”

“뷰캐넌의 손님이십니다.”

“전하, 그자는 제가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자였습니다. 7대 가문의 손님이 될 정도의 인물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첫 연설자가 다시 끼어들었다.

“그럼 그자는 누구인가, 키리에 뷰캐넌 양?”

“말할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다고?”

“저는 그분과 사사로운 관계에 있지 않으며, 따라서 그분이 원하지 않는 한 감히 그분의 신상을 노출할 수 없습니다.”

“왕세자인 내가 묻고 있지 않나.”

“그렇다고 해도 말할 수 없습니다.”

“키리에 뷰캐넌 양, 나는 지금 과거 그대와 약혼했던 시절의 정으로 이리 봐주고 있는 것이야.”

왕세자의 어조가 더 강해졌다. 그는 기분이 나쁜 것 같았다.

“만약 글라디오소 버몬트 자작이 말한 게 사실이라면, 나는 이 사실을 좌시할 수 없네.”

“송구합니다. 말할 수 없습니다.”

“뷰캐넌 양!”

“그렇다고 왕가를 향한 저의 충성심이 바랜 것은 아니니, 부디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왕세자가 헛웃음 쳤다.

“지금 중요한 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으면서, 그런 허울 좋은 말이 통하리라 생각하나?”

“진실로 이르되 제 모든 것을 걸고, 저는 부덕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키리에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진실로 떳떳하면 어떤 풍랑도 자신을 굽힐 수 없다 말하듯이.

상황의 주역이 되는 듯한 인물이 모두 잠시간 침묵했다.

“허 참, 곤란하군. 키리에 뷰캐넌 양, 이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야. 나는 왕세자로서 이 일이 뷰캐넌 가에서 거액의 위자료를 얻어내기 위해 벌인 일이 아닌가 의심이 드는군.”

“왕세자 저하!”

새로이 나선 것은 진중한 바리톤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간사하게 들리는 세자르 뷰캐넌의 목소리였다.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온전히 딸아이의 일탈일 뿐, 뷰캐넌과는 관계없습니다!”

“하나 백작, 상황이란 게…….”

소란이 파도처럼 일었다. 그 사이에서 키리에 뷰캐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꿀벌 떼처럼 윙윙거렸고, 그들이 떠드는 단편적인 단어만이 탁탁 튀는 모닥불처럼 튀어 올랐다.

“보기보다…….”

“어디서 어떻게 굴러먹었는지…….”

“알고 보니 뒤로는…….”

“파혼한 이유가…….”

“의외로 음탕한…….”

레쇼는 문을 한 번, 나타니엘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말하지 못하게 금제라도 걸었나?〕

[아니.]

나타니엘이 냉연하게 속삭였다.

[당분간 숨기겠다고는 했지.]

〔그렇다면 이건 부당한 모욕이다. 내가 나서지.〕

[레쇼.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지?]

시종에게 문을 열게끔 눈짓하던 레쇼가 멈칫했다.

나타니엘의 얼굴에는 미소가 없었다. 그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레쇼는 너무 잘 알았다. 앳되면서도 성숙하고, 음험하면서도 고결하고, 퇴폐적이면서도 금욕적인 나타니엘의 낯은 미소짓고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가 크다. 웃지 않는 나타니엘은 문자 그대로 종말을 닮았다.

[대답해.]

크고 거대한 영구 동토의 짐승이 가지런히 앞발을 모으고 레쇼에게 눈을 마주쳐 왔다. 심해의 어둠 같은 푸른 눈이었다.

레쇼는 숨을 한 번 들이켰다가, 나직한 말과 함께 뱉어냈다.

〔너를 말려달라고 했다. 전장에서의 네가 어땠는지 알려 주면서.〕

[겁내던가?]

레쇼는 다음 말을 하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나타니엘 앞에서만큼은 정직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진 않다. 우리가 네게 한 행동이 옳지 못하다고 했을 뿐.〕

나타니엘은 묵묵히 문을, 아니, 아마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의 발치로 살얼음이 끼기 시작했다.

[그래. 그랬지.]

〔나타니엘.〕

[그깟 게 뭐라고 저기서 저러고 있나. 한심하기 짝이 없군.]

그건 키리에가 들었다면 “드디어 당신도 감정이 드러나는 말을 하네요.”하고 말했을 법한 한마디였다. 레쇼가 큰 충격을 받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타니엘은 그런 레쇼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예의 그린 듯한 미소를 짓는 낯으로 되돌아와 하인에게 명령했다.

[문을 열어.]

문이 열리자마자 소란스러웠던 무도회장에는 침묵이 끼얹어졌다.

막 볼룸에 입장한 그. 그 남자 때문에.

칠흑처럼 까만 머리의 그 사내는 한밤의 달처럼 눈에 띄었다. 물론 그 옆에 선 금발의 사내 역시 좀처럼 보기 힘든 아름다운 사람이었지만, 흑발 쪽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를 넘어 그 자체로 이미 완전무결한 미형이었다.

새까만 머리칼은 윤기가 흘렀고 깊은 바다색 눈동자는 희미한 미소와 어우러져 숨겨진 독점욕을 자극했다. 그의 걸음걸이는 백사장을 타고 오르는 물결처럼 사람을 홀렸고, 손동작 하나하나에 이르러서는 은밀하고 섬세한 우아함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모든 외적인 아름다움을 떠나, 범인들이 그를 열망하게 만드는 것은 첫눈에도 알 수 있는 그의 오만이었다. 사람들은 누군가 정성 들여 만든 선물에 예의 바른 감사만 표한 뒤, 아무렇지도 않게 내다 버릴 오만을 남자에게서 보았다.

그걸 들킨대도, 그는 그 행위에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을 터였다. 그런 오만이야말로 사람들이 그에게 매료되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런 존재가 볼룸 중앙으로 걸어 들어왔다.

키리에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어째서 여기에?’

나타니엘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국왕과 이야기가 잘 풀리고 풀리지 않고를 떠나, 애초에 그가 이런 사교 활동에 집중할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놀란 키리에와 달리 이든은 당장 반색했다.

“아! 여러분! 이렇게 놀라울 데가! 이분을 이 자리에서 소개할 수 있어서……!”

나타니엘은 담담하게, 태연하게 그런 이든을 지나쳤다.

“있어서……?”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이든의 몸이 굳었다. 사람들 역시 감히 왕세자의 인사를 무시한 남자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물 한 방울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사방이 고요했다.

그리고 남자가, 키리에 앞에 섰다.

[키리에.]

유난히 밀도 있게 느껴지는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절대 누군가에게 고개 숙이지 않을 것 같던 사내가, 이후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키리에가 홀린 듯이 손등을 주었고, 나타니엘은 자연스럽게 그 위에 입술을 맞췄다.

[안녕, 나의 숙녀.]

모두가 쩌르렁 굳어 버렸다.

나타니엘은 똑같이 굳은 키리에를 에스코트하며 이든의 옆으로 다가갔다.

[왕세자. 내가 방해한 건 아니겠지?]

왕세자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바, 방해라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소개를 부탁할까.]

“아, 무, 물론입니다.”

이든은 어색하게 팔을 펼쳤다.

“그, 흠, 들어보게. 최근 왕국에 기쁜 소식이 있었는데, 이런 뜻깊은 자리에서 밝히게 되어 참으로 경사라 하겠어. 바로 호국경 로르 레쇼와, 전설경 나타니엘 되시겠소.”

키리에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전설경……?”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중 누구도 나타니엘이 전설경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게 재밌는 일이었다.

“하지만 전설경은 건국 직후 종말과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영면을…….”

“흠, 흠. 물론 세간에는 그리 알려졌지.”

이든이 헛기침했다.

“허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그저 잠들어 계셨을 뿐이오. 왕실에서는 그런 전설경을 되살리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했고, 드디어 당대에 이렇게 전설경을 다시 모실 수 있게 되었소.”

키리에는 이때 근처에 있던 글라디오소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티 내지 않고 조금 웃었다. 소리를 낸 것도 아닌데, 나타니엘이 이쪽을 스치듯 바라본 느낌이었다.

“원래는 차후 제대로 된 곳에서 소개해드리기로 했지만…… 오늘 이 자리에 축하하러 와 주신 모양이니, 이 어찌 오레윈브리지의 홍복이 아니라 하겠소?”

그렇게 말한 이든이 나타니엘을 바라보았다. 보통은 ‘초대에 감사하며’ 어쩌고로 시작하는 겸양의 말을 할 때였다.

그러나 그는 나타니엘이었다. 그가 조금 웃고서 한 발짝 걸어 나갔다.

[그래. 그런데 기껏 한 발걸음이 무용하군.]

“예……?”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어. 감히 내가 아끼는 이에게 천박이니 음탕이니 지껄이는 소리 말이야.]

나타니엘이 키득거렸다. 그가 한쪽 손으로는 키리에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쥐었다. 그리고 더없이 사랑스러운 무언가를 보듯이 키리에를 보았다가,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좌중을 훑었다.

[내가 그녀와 여행을 좀 한 것이 그리 부도덕한 일인 줄은 상상도 못했군.]

그는 미소 띤 낯과 달리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글라디오소를 돌아보았다.

[버몬트. 나는 네게 이미 경고한 바 있지. 너는 네 입으로 내뱉은 말을 지키지 않은 죗값을 치르게 될 거야.]

글라디오소가 벌벌 떨었다. 키리에는 그의 반응으로 나타니엘이 지금 그 위압감을 버몬트에게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나, 나타니엘 님…… 제, 제, 제가, 저, 전설경이신 줄을 몰라뵈어서……!”

[내가 전설경이 아니었으면 상관없다는 뜻인가? 천박하기도 하지.]

“그, 그, 그게 아니라……! 허, 허억.”

[물러나.]

나타니엘이 냉정하게 선고했다.

글라디오소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곧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사람들 틈새로 숨어 버렸다. 그 꼴을 보던 나타니엘이 차갑고 싸늘하게 미소지었다.

[내가 세운 나라가 왜 이 꼴이 되었지? 본디 기사도 위에 세워진 나라 아니었나, 왕세자?]

이든이 놀란 두꺼비처럼 바짝 굳었다.

[한낱 소문에 사람 하나를 마녀사냥 하는 것이 언제 이 나라의 문화가 되었는지 모르겠군.]

“아-그것은, 그게, 저는 조사를 하려고 했습니다. 물론, 아주 나쁜 행동이고, 그래서 조사를 통해…….”

[볼룸에서?]

“물론, 물론 아닙니다. 하하! 전설경이시여, 이 자리에서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그저, 고작 여인네의 일이니…….”

나타니엘이 손을 들었다. 순식간에 지팡이가 나타나 쏙독새처럼 빠르게 이든의 미간으로 향했다. 그걸 막아낸 것은 레쇼의 검이었다.

탱!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에 잔잔한 충격파가 일었다.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나타니엘은 진심으로 이든을 죽이려고 했고, 호국경이 아니었다면 막을 수 없는 속도였다.

〔나타니엘. 그래도 왕세자다.〕

[내겐 인간 하나일 뿐이야.]

〔정 죽이려거든 내가 없는 곳에서 해.〕

레쇼의 두터운 검은 지팡이를 튕겨내고는, 투명해져 공기 중으로 사라져 갔다. 그는 딱 거기까지 하고 뒷짐 진 자세로 한 걸음 물러났다. 눈앞에서 목숨을 앗는 행위만 아니라면 끼어들지 않겠다는 노골적 의사 표현이었다.

나타니엘이 조소를 흘렸다.

[레쇼는 예나 지금이나 착하기도 하지.]

냉랭한 눈이 이든을 향했다. 이든은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움찔했다가, 가까스로 도망치려던 것을 참아내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섰다. 그가 변명의 말을 하려는지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나타니엘의 말이 더 빨랐다.

[하지만 난 아니야. 대륙 전체를 영구 동토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입조심 해.]

이때 이든은 아주 잠깐 번뇌 섞인 얼굴을 했다. 왕세자로서의 굴욕과 범부로서의 굴종,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치고 올라왔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큰소리를 내진 못했다.

“그, 음…… 저는, 물론 숙녀에 대한 예의를…… 지킬 것입니다. 아무렴요.”

비굴하고 어색하게 웃음만 흘리는 이든의 옆에서, 루비니아 캐스너는 깨진 도자기 인형처럼 멈춰 있었다.

그 눈은 잠이나 술에 취한 것처럼 나타니엘과 레쇼를 번갈아 보았다가, 키리에에게 이르러서는 끔찍할 정도의 증오가 되었다.

키리에는 그걸 뒤늦게 깨달았다. 원래 이 자리는 왕세자와 루비니아 캐스너의 약혼 축하연이었고, 그녀가 주인공이어야만 했다.

‘이런 식으로 내가 시선을 끌면 좋을 게 없어.’

키리에가 조심스럽게 나타니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저, 나타니엘 님?”

사실 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타니엘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태도를 바꿔 키리에를 향해 미소지었다.

[왜?]

“왕세자 저하의 약혼을 축하하러 오신 것 아닌가요?”

[물론이지. 원래는 둘이 약혼한 사이였다지?]

나타니엘이 천천히 루비니아 캐스너를 바라보았다. 그는 묘한 키득거림과 함께 키리에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인간들은 안목이 별로지.]

기어코 루비니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누군가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처럼 굳었다.

키리에는 어쩔 줄 몰라 당황했고, 나타니엘은 미소지었다.

[춤출까?]

“네? 뭐라고요?”

[볼룸에서는 춤을 추는 거란다. 이리 와.]

나타니엘이 지팡이를 빛으로 만들어 흩뿌린 뒤 키리에를 끌어당겼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악공들의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왈츠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우스운 꼴이 된 왕세자와 미래의 왕세자빈을 모른 척해 주기 위해 몇 무리가 춤출 자리를 잡았다.

나타니엘은 웃으며, 키리에의 견갑골 위에 손을 얹고 춤추기 위한 자세를 잡았다.

[누구든 더 우월한 개체의 행동을 따르는 법이지.]

“…….”

왈츠가 시작되고, 두 사람은 마룻바닥 위를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왈츠의 동작에 따라 크게 회전했다가, 다시 몸이 붙었다. 키리에는 코앞에서 눈을 내리깐 나타니엘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다 들으셨군요.”

[그래.]

키리에가 단어를 고르기 위해 잠시 입술을 닫았다. 그런 그녀를 나타니엘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우리 영리한 키리에 뷰캐넌께 마법을 쳤으니 주변에는 들리지 않을 거란 말을 해드리는 걸 잊었군.]

“아, 진작 말씀해 주셨어야죠. 허락하신다면 당신을 악질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540년 전의 셀은 엿듣는 것쯤은 별 실례가 아니었나 보죠?”

소리를 차단했다고 말하자마자 바로 튀어나오는 빈정거림에 나타니엘이 즐겁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답답한 소리를 가만히 다 듣고 앉으니 정말 영리한지 의심은 들지만 말이야. 540년 전의 셀에서도 멍청이들이나 볼룸에서 돌팔매질을 당하곤 했지.]

그녀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넌 그 멍청한 버몬트를 살리겠다고 내 검 앞으로 뛰어들었고, 자기 일도 아닌 눈사태를 해결하겠다고 낑낑거렸고, 심지어 왕가를 대신해 죽겠다고 했지. 그런데 방금은 꼭 이빨 빠진 개처럼 굴더구나.]

신랄하고 경쾌하게 말하고 있는데도 나타니엘은 꼭 무언가에 화가 난 사람 같았다.

‘착각이겠지?’

키리에가 몸을 뒤로 젖히는 동작에 맞춰 턱을 들었다.

“하지만 상대는 왕세자였고, 미래의 왕세자빈이었어요.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침묵이 답이었습니다.”

[버몬트 앞에서는 잘도 내 이름을 팔던 여자 아니었나? 아니면 내가 그깟 왕가도 이기지 못할 것 같았나 보지?]

“당신 이름이 저를 지키기 위해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때는…… 맞아요, 제 실수였어요. 욱하는 바람에.”

그녀는 사죄의 의미에서 춤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눈인사했다. 나타니엘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말이 없었다.

그는 키리에가 겪어본 누구보다 춤을 잘 췄다. 마치 마룻바닥이 얼음 카펫이기라도 한 것 같은 스텝이었다. 모든 리드는 정확했고 이해하기 쉬웠으며 우아했다. 사람들 눈에도 나타니엘만 보이는 듯했다.

“어쩜, 너무 완벽한 춤이에요…….”

“세상에나, 전설경이라니! 얼마 전 궁내관이 비슷한 소문을 알려 주길래 반신반의했는데 사실이었나 봐요……!”

“그런데 그러면 앞으로 키리에 뷰캐넌은……?”

어떤 이의 입에서 키리에의 이름이 나오자,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분위기가 다급하게 바뀌었다.

“저, 저는 아까부터 그녀가 억울하다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죠. 물론 말할 순 없었지만. 아무렴, 국왕 전하께서 직접 고른 약혼녀였던 뷰캐넌 양이 그런 짓을 했겠어요?”

“그나저나 전설경이라면, 토지가 약속되어 있는 지위 아닌가요?”

사람들의 눈이 게걸스럽게 번득였다.

시조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는 종말을 몰아낸 이후, 대륙을 세 등분해 전설경, 호국경과 나눠 가졌다.

그러나 전설경은 이미 명을 달리한 상황이었다. 그에 발라브리가가 ‘언젠가 그가 다시 돌아올 때를 위해 잠시 맡아 놓겠다.’며 전설경의 영지까지 가지게 된 것이다.

그는 아마 정말로 전설경이 돌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전설경은 돌아왔다.

“왕실이 그걸 돌려줄까요?”

“안 돌려주면 어쩌겠어요? 보니까 호국경과 견줄 정도로 강한 것 같은데.”

“그러면 뷰캐넌 양은 파혼한 게 오히려 잘됐네요. 캐스너 양이 그렇게나 즐겁게 떵떵거리던 게, 어머, 실례.”

“킥…….”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노골적이었다.

키리에는 루비니아 캐스너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이든과 자신을 노려보는 것을 곁눈질로 보았다.

키리에가 딴청을 피는 것이 못마땅한지, 나타니엘은 일부러 어긋난 박자로 스텝을 밟아 키리에의 고개를 돌렸다.

[내가 ‘전설경’이란 점에 불만은 없나?]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어요.”

[다시 영리한 키리에가 되려고 하는걸.]

키리에가 시선을 피했다.

[키리에.]

낮은 부름에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왜 피했지?]

키리에의 입술이 조개처럼 닫혔다. 그녀는 허리에서 등으로 흘러가는 곡선을 날렵하게 만들고서 맞잡은 손끝을 보았다. 단정한 손톱이 달린 나타니엘의 길고 예쁜 손가락이 자신의 손을 감싸고 있었다.

그가 대답을 종용하듯 손을 꾹 잡았다.

[키리에 뷰캐넌.]

“이렇게 될 것 같아서요.”

[이렇게?]

키리에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푸른 눈을 바라보다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저는 그렇게 심지가 굳지 못해요. 당신처럼 우아하지도, 초연하지도 못하죠. 그러니까 이렇게, 기대하지도 않은 순간에 나타나서 도와주면…….”

키리에의 호흡이 떨렸다.

왈츠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고 있었다. 키리에는 바람 소리처럼 들리는 음표 사이에 자신의 나약한 말이 묻히길 바랐다.

“……나도 모르게 기대 버릴 것 같아서.”

나타니엘은 키리에가 이해하지 못할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그는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미소가 짙어진 듯했다.

[모두가 내게 기대. 발라브리가는 다짜고짜 ‘건국을 도와줘.’라고 했을 정도니.]

“그런 나약함과는 달라요. 당신은 품위 없는 짓이 싫다고 했고, 솔직히 말해서 저는 당신의 품위를 따라가지 못해요. 봤잖아요?”

키리에가 음울하게 속삭였다. 세자르에게 맞고 서재에서 나왔던 직후의 일. 그녀는 여전히 그 모습을 들킨 게 부끄러웠다.

나타니엘은 딱히 그녀를 위로하지 않았으나,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러면 진작 ‘그자가 종말이오.’하고 한마디 했으면 되었잖나?]

“제가 왜요?”

[그렇게나 자신을 감추고 싶어 하는 주제에, 사람들 앞에서 제 아비에게까지 부정당하는 꼴이 뭐가 즐겁다고.]

“누가 즐겁대요?”

[그럼.]

“숨기기로 약속했잖아요. 제가 이용당할 수도 있고요.”

나타니엘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고소를 짓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어차피 밝혀질 일이었어.]

키리에가 미약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다음 말을 해도 될지 알 수 없었다. 건방지다고 머리 위에 얼음을 내리꽂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 나타니엘의 푸른 눈은 유독 맑고 청명했다. 겨울이 고여 만들어진 호수 같았다.

음악은 감미로웠고, 맞닿은 피부도 따뜻했다. 등을 감싼 손에서는 강하고 단호한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대도, 혹시나 또 배신당했다고 여기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어째서?]

나타니엘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미소가 사라졌다. 웃음기가 사라진 낯은 놀랍도록 싸늘했지만, 키리에는 어쩐지 그가 두렵지 않았다.

키리에가 미소지었다.

“당신이 슬플 것 같아서.”

춤이 멈췄다. 나타니엘은 볼룸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추고, 손을 내렸다.

악공들은 불협화음을 내며 연주를 그만두었다. 한 송이, 두 송이, 볼룸 위에 눈이 꽃비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타니엘은 개의치 않고 그저 키리에만을 바라보았다. 키리에는 그 맑고 고요한 시선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넌 내가 아는 인간 중 가장 어리석구나.]

“그 말은 정말 실례군요.”

[발라브리가는 건국을 도와달라고 했지. 레쇼는 내게 인간의 것을 뛰어넘는 힘을 요구했고. 그런데 너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군.]

“마치 사람들이 당신에게 계속 바라기만 했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틀리진 않아.]

키리에가 물끄러미 나타니엘을 보았다. 그 말을 하면서도 그는 무엇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조금 불만스럽게 레쇼를 돌아보았다. 540년 전의 그들은 대체 뭘 한 걸까?

레쇼는 불안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를 향해 빙긋 웃어 주고서 다시 나타니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하나 요청해도 될까요?”

[말해 봐.]

“하고 싶으신 걸 하세요. 그게 제 요청이에요.”

나타니엘의 고개가 아주 살짝 모로 기울어졌다. 미소 없는 얼굴은 각도가 조금 달라지는 것만으로도 어딘지 위험하게 느껴졌다.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난 지금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여기 있는 전부를 죽일 수 있어.]

“허락하신다면 당신을 제가 아는 사람 중 제일 바보라고 말하고 싶네요.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키리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자신들의 대화를 궁금해하고 있는데도, 어쩐지 그 시선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탐욕이 그득한 아버지의 시선도 더는 그녀를 상처 주지 못했다. 눈앞의 존재가 그리 멀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나타니엘에게 손을 내밀며, 활짝 웃었다.

“당신이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서요. 믿으니까.”

눈이 멎었다.

나타니엘은 속삭였다. 하고 싶은 게 생겼어.

많은 것이 바뀌었다. 전설경은 원래 그의 것이었던 모든 것을 되돌려받았다. 왕실이 맡아 놓고 있었던 대륙의 1/3 크기의 영지를 포함해서.

“나타니엘. 땅 필요해요?”

하고 묻는 키리에의 질문에 그는.

[아니꼽잖아.]

하고 대답했다. 둘은 얼굴을 마주 보고 은밀하게 웃었다.

“맞아요. 솔직히 그래요.”

[알아주니 고맙네.]

“그 정도로 용서해 주는 걸 오히려 감사해야 할 거예요. 목숨은 붙어 있으니까.”

키리에가 신랄하게 말했다. 그녀가 말하는 동안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나타니엘은 장갑 낀 손으로 입을 가리고서 나직하게 웃었다.

[늘 말은 잘하지.]

“제가 얼마나 냉정한지 당신은 아직 몰라서 그래요.”

[영영 알 일 없겠어.]

그렇게 말하는 나타니엘의 태도는 이전보다는 확연히 부드러운 기색을 띠었다. 물론 주로 키리에에게만 그랬다.

덕분에 ‘키리에 뷰캐넌’의 주가는 고공 행진 중이었고,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그걸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하진 않겠지만 말이야.]

“역시 문제가 생길까요?”

나타니엘이 쌕 웃었다.

[물론.]

전설경의 귀환. 호국경의 활동. 셀 아렐라노는 들끓어 올랐다.

[둄2 절갠 교환재공타싸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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