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타니엘
키리에는 방으로 돌아가기 전, 나타니엘을 작은 손님용 정원으로 이끌었다.
“문제가 생겼어요. 아니, 아직 생기지는 않았지만, 곧 생길 것 같아요.”
[글라디오소 버몬트.]
“정확해요.”
키리에가 쓴웃음을 지었다.
[귀찮고 재밌는 냄새가 나는 이름이구나.]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귀찮지만 재미는 없죠.”
[그러니?]
나타니엘이 양 손바닥을 붙였다. 그가 손을 벌리자, 마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손바닥 사이에서 검은 지팡이가 뽑혀 나왔다.
키리에는 그 놀라운 광경을 보고도 차분하게 하려던 말을 이었다.
“내일 그가 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타니엘 님도 참석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식사든 티타임이든.”
키리에는 사실 나타니엘이 거절해 주길 바랐다. [내키지 않는군.]하고서 폭설마저 깨끗이 가시게 한 미지의 힘으로 어떻게든 해 주면 좋을 텐데.
그러나 나타니엘은 도톰한 입술 위에 장난기를 올렸다.
[흥이 돋는구나.]
“참석하시려고요?”
[객으로서 당연히 그리 해야지.]
“신원 불명이지만요.”
[비꼴 줄도 알고.]
나타니엘이 웃었다. 키리에는 턱을 든 채로 눈을 내리깔았다.
“제가 청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그녀는 나타니엘과 지내며 깨달은 게 있다. 바로 자신이 믿을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나타니엘의 몸에 밴 귀족의 예법뿐이라는 것. 키리에가 보기에 나타니엘은 도덕은 몰라도 예법은 아는 사람이었다.
“글라디오소 버몬트 후작 영식이 나타니엘 님께 결례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해결할 테니, 부디 맡겨 주세요.”
나타니엘은 흡족하게 웃었다.
[제법 자신만만하구나.]
“없어도 있는 것처럼.”
[있다면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귀족들 사이에서 격언처럼 내려오는 문구를 자연스럽게 주고받은 키리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렇군.]
나타니엘의 고개가 기울었다.
[기대되는구나.]
나는 전혀 기대되지 않습니다. 키리에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
글라디오소 버몬트. 그는 사교계의 골칫거리였다.
나이는 키리에보다 6살이 많고, 어릴 적 영웅 전기를 너무 감명 깊게 읽었는지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자신의 정의로움과 담대함을 뽐내는 기질이 있는.
그 밤, 키리에를 깨운 것은 그 영웅 전기 애독자의 우렁찬 노랫소리였다.
“뭐지? 안네마리, 밖을…….”
“제가 가 볼게요, 아가씨……!”
“리모구나……. 참, 안네마리는 신경 쇠약으로 쉬고 있었지…….”
나타니엘과 동행한 이후 경련을 할 정도로 그를 겁내는 안네마리 대신 리모가 키리에 옆에 붙었다. 그녀는 하품하며 다가왔다.
“창문 열겠습니다, 아가씨.”
창이 열리자 잠을 깨운 범인의 목소리가 더욱 또렷하게 들렸다. 어찌나 목청이 좋은지, 키리에는 그가 어느 박자에서 숨을 들이쉬는지까지 알 수 있었다.
“「이 몽환의 밤, 나의 작은 새여, 잠들지 못하는 이를 위해 지저귀어 주오!」”
“아. 제발.”
키리에가 머리카락을 넘기며 상체를 일으켰다. 리모는 재빨리 네글리제 차림인 그녀에게 숄을 덮어 주었다.
“글라디오소 버몬트 후작 영식이세요, 아가씨.”
“그래. 저 지겨운 노랫소리만 들어도 알겠네.”
키리에가 이를 갈았다. 드디어 내 차례인가?
좀 어여쁘다 싶은 숙녀를 만날 때마다 사랑 노래를 읊어가며 사람 신경을 돋우는 버릇이 있는 남자였다, 글라디오소는.
지금까지 키리에는 왕세자의 약혼녀였기 때문에 용케 그 구애를 피할 수 있었으나, 그 지위가 사라진 지금, 글라디오소를 막을 명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 지금이 몇 신 줄 아는 거야? ’
키리에가 신경질적으로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역삼각형의 상체와 있는 대로 보석을 쑤셔 박은 대검의 실루엣이 보였다.
“거기서 뭘 하시는 건가요, 글라디오소 님?”
“오, 키리에, 이름마저 아름다운 여인이여! 드디어 나와 주었군!”
높은 층에 있는 내빈실 창문 아래에서 글라디오소가 외쳤다.
“그대가 나와 주길 기다리고 있었소!”
“그래서 이렇게 나와드렸습니다. 주무실 시간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요.”
“아, 키리에, 키리에! 그대는 여전히 냉정한 겨울의 여신 같군! 그러나 나는 그 얼음장 같은 마음에 끓고 있을 찬란한 희망 역시 볼 수 있어!”
키리에가 싸늘하게 정색했다.
“그 희망은 낮에 좀 더 빛난답니다. 주무실 시간입니다, 글라디오소 님.”
“그런 말 말아요, 내 귀여운 종달새. 우리가 이렇게 만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운명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니, 이 어찌 통탄하지 않으리오!”
키리에는 그와 운명으로 엮일 만한 일을 해 본 적도 없다. 그런 게 키리에에게 정해진 운명이라면, 그녀는 당장 접싯물에 코를 박고 죽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키리에가 거리가 멀어서 자신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마음껏 인상을 구겼다.
“그 운명하고도 내일 이야기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키리에!”
글라디오소가 격정 어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버지께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어! 나는 그에 대한 답을 원하네!”
아하, 그게 목적이었군? 키리에의 얼굴에 혐오가 떠올랐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대가…… 그대가 내가 모르는, 신분도 불분명한 사내와 여행을 한다고!”
분명 틀린 부분은 없었지만, 배경 서사에서 크나큰 곡해가 이루어지고 있을 게 눈에 선했다. 낭만을 좇은 월담, 뭐 그런 거로 착각하고 있겠지.
“뭐가 되었든 내일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어요, 글라디오소 님.”
키리에는 거기까지 말한 뒤 글라디오소가 무언가를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저거 술병이야? 맙소사.’
이 나라는 무례를 ‘치기 어린 경험’, ‘풋풋한 젊음’ 따위로 지나치게 포장하는 경향이 있다.
“키리에, 키리에! 그대는 나를 버리지 마오!”
글라디오소는 술기운이 잠기운으로 변할 때까지 물러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창문을 닫아 버리자니, 저 영웅주의자라면 벽을 타고 오르는 짓도 낭만으로 포장해 서슴지 않을 것이다.
키리에가 졸린 머리로 생각을 이어 갔다.
‘분명 7대 가문 중 하나인 버몬트와 척져서 좋을 건 없지. 왕세자와 파혼한 지금 글라디오소는 분명 좋은 혼처긴 해…….’
거기까지 생각한 키리에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마음대로 살겠다 결심해 놓고도 아직도 이런 정치 놀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니. 제멋대로 버몬트 후작에게 편지해 이런 사달을 낸 세자르에게 뼛성이 났다.
‘당신도 당신 마음대로 하시니, 나 역시 그러죠, 뭐.’
그녀가 결국 짜증스럽게 외쳤다.
“맞습니다. 제가 지금 글라디오소 님이 아닌 다른 분과 여행 중이니, 방해하지 말아 주시겠어요?”
“방해……?”
“방해가 아니면 무언가요!”
제 몸을 어찌 둬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팔다리를 허우적대던 글라디오소의 움직임이 멈췄다. 키리에는 먼 거리에서도 그의 근육이 꿈틀대는 것을 보았다.
“지금 말 다 했나!”
글라디오소는 심지어 대검을 뽑아 들었다.
“나는 그대가 세자 전하와의 약혼 중에도, 내게 살랑거리는 미소를 지었던 것을 놓치지 않았어! 그런데 인제 와 발을 빼겠다고!”
“저는 버몬트 후작 영식에게 예의를 갖췄을 뿐입니다.”
“그대가 이렇게 헤플 줄 몰랐어! 왕세자 전하께 파혼당한 것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야. 아주 실망이 커!”
키리에는 침을 뱉고 싶은 욕망을 내리눌렀다.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저러니 루비니아 캐스너에게 약혼자를 뺏기지.’라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관계없는 일을 끌어들여 저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아, 키리에, 키리에! 나는 그대를 구원해 줄 수 있어! 그 기생오라비 같은 신원 불명의 지방 귀족이 아닌, 내가!”
키리에가 콧방귀를 뀌었다.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그분은 글라디오소 님이 가지지 못한 걸 가지셔서요.”
“내가 가지지 못한 게 무어란 말이야! 내가 버몬트 후작가의 사람이거늘! 이 글라디오소 버몬트에게 뭐가 없다고!”
키리에가 코웃음 쳤다.
“얼굴이요.”
글라디오소가 딱딱하게 굳었다. 객관적으로 그는 몸이 좋을 뿐, 박색에 가까웠으니까.
드디어 지긋지긋한 세레나데가 멈췄다. 키리에는 이 골칫덩어리의 뒷감당을 내일의 자신에게 미루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먹고 창문을 닫으려던 순간, 키리에의 눈에 인영이 잡혔다.
나타니엘이었다.
글라디오소에게는 보이지 않는 1층 테라스 자리에서, 나타니엘은 그녀 쪽을 바라보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세상에! 설마 다 들은 거야?’
키리에는 몰려드는 수치심에 재빨리 창문을 닫아 버렸다. 망할 글라디오소! 망할 영웅주의자!
그녀는 지긋지긋한 골칫거리들을 떨치기 위해 잽싸게 침대에 누웠다.
‘내일만 버티자. 내일만.’
글라디오소는 늦은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쳐들어왔다. 식후 티 타임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키리에! 키리에 뷰캐넌 양!”
그래, 기다리고 있었다, 이 철없는 영웅주의자야. 키리에의 얼굴에 전투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안 그래도 찾아뵈려고 했어요.”
“그, 그랬나?”
“…….”
기가 막히게도 글라디오소는 조금 얼굴을 붉혔다. 대체 ‘찾아뵈려고 했다’라는 말 하나로 어디까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걸까? 그의 낙관에 키리에는 진절머리를 치며 눈을 날카롭게 떴다.
“글라디오소 님.”
“잠시 내 말을 먼저 들어주겠나, 키리에 양?”
아니꼽지만 계급을 따르면 그의 말을 들어야 했다. 안 그래도 키리에는 지난밤의 지나친 치기를 약간은 후회하는 중이었다.
“말씀하세요.”
“키리에 양…… 어제는 내가 잘못했어.”
“무얼요?”
“내가 그대의 여리고 수줍은 마음을 배려하지 못하고, 너무 저돌적이었던 거야. 그렇지?”
키리에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그렇지. 정말로 자기 잘못을 알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어.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그럼 이젠 제가 말해도 되겠습니까?”
“오, 그대의 말을 듣기로 하지!”
글라디오소가 으스대며 말했다. ‘숙녀의 말에 귀 기울이는 나’에 취한 모습이었다.
키리에는 웃었다. 어디 얼마나 귀 기울일 수 있을지 볼까.
“세레나데는 그만해 주세요. 부담스럽습니다.”
“뭐……?”
글라디오소가 조금 비틀거렸다.
“저는 물론 뷰캐넌의 일원으로서 버몬트 후작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남녀상열지사로 오해하신 것 같아 곤란하군요.”
“뭐라고? 잠시만, 키리에 양!”
“네. 그게 제 이름입니다.”
키리에가 빈정대듯 말했다.
그녀가 지금껏 글라디오소의 집요하고 기분 나쁜 접근을 확실하지 쳐내지 못한 것은, 왕세자의 약혼녀라는 빌어먹을 위치 때문이었다.
그게 깨진 이상 그녀는 더는 냉소를 숨기지 않아도 되었다. 어차피 사교계는 뒤에서 그녀를 두고 떠들 테니까. 석녀 아니면 헤픈 여자. 콧대 높거나 싸거나.
‘어쩌란 거야? 이제 너희 기대에 맞춰 주는 건 질렸어.’
“그만하세요, 글라디오소 님. 글라디오소 님에 관한 세간의 평이 어떤지 정말 모르십니까?”
냉정하게 끓는 키리에의 말에 글라디오소의 몸이 멈칫했다.
“면식도 없는 숙녀분에게 매일 그녀의 일상을 관찰한 발신인 불명의 편지를 보내고, 숙녀분과의 데이트 도중 사내다움을 보이겠다며 죄 없는 하인들을 검집 씌운 검으로 때린 일이 정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 냉소가 부싯돌의 역할을 했는지 글라디오소의 눈에는 금방 불이 붙었다.
“그대는…… 그대는 정말 너무하는군! 나는 그대에게 기회를 주려고 했거늘!”
“기회요?”
“나를 모욕한 것을 사과할 기회 말이야!”
“제가 글라디오소 님을 모욕했나요?”
“그래!”
글라디오소가 위협적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등에 찬 대검도 그에 맞춰 위협적으로 덜그럭거렸다.
“내가 못생겼다고 하지 않았나!”
키리에는 차분히 자신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그랬던가요?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안목이 높아져서 실수로 솔직해져 버린 듯합니다.”
[킥.]
그때, 작은 웃음소리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당장이라도 화낼 것처럼 팔을 들어 올리던 글라디오소와, 차를 마시던 키리에의 시선이 동시에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그 끝에서 나타니엘은 소서와 찻잔을 든 채 키득거리다, 둘의 시선을 깨닫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아. 난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이 작은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처음부터 계속 자리에 있었던 나타니엘의 첫마디였다.
당장 글라디오소의 목에 핏대가 섰다.
“방금 나를 비웃은 겐가!”
‘그래도 반존대는 하는구나.’
키리에는 이상한 부분에서 안심했다.
“잠시만요, 글라디오소 님. 저랑 이야기하시죠.”
“비켜! 암고양이 같으니…… 여자란 것들은 하나같이 잘해 줘도 소용이 없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언제 잘해 줬다고? 누가 잘해 달랬나?
키리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내가 암고양이라면 너는 숫멧돼지겠구나. 남자란 것들은 하나같이 웃어 주면 주제도 모르고 착각하기에 바쁘지.”
미안하지만 비꼬기라면 이쪽도 자신 있단다.
나타니엘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미친 듯이 즐거워하고 있었다. 반면 글라디오소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팔을 들었다.
“네가 감히!”
키리에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차라리 이걸로 버몬트 후작가에서 나갈 수 있다면 잘된 거야.
그러나 기다리던 충격은 오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나타니엘이 포크 끝으로 글라디오소의 팔을 막아내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포크 끝으로.
[이런. 아무리 그래도 내 앞에서 숙녀에게 폭력을 사용하면 못 쓰지.]
나타니엘은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글라디오소를 바라보았다.
[너는 숙녀를 대하는 법을 모르는 것 이전에 사람으로서 글렀구나. 허나 주제에 눈은 제법 높고.]
“감히 나를 모욕하는 거냐!”
고함과 함께 글라디오소의 얼굴이 분노로 터질 듯 달아올랐다.
글라디오소는 바로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나타니엘에게 던지고야 말았다.
“좋다! 네게 결투를 신청한다!”
***
“이건 미친 짓이에요.”
키리에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타니엘이 찻잔을 든 채 말을 받았다. 속도 모르고 차광용 천막 아래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그 모습을 보자니 부아가 치밀었다.
“글라디오소가 겉으로만 영웅 흉내나 내고 다니는 건 아니에요. 꼴은 저렇게 하고 다녀도 제법 강합니다.”
[그렇구나.]
“기사 서임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건 그가 버몬트 후작 영식이라서지 실력이 부족해서는 아닐 거예요.”
[기사의 십계를 외우지 못할 정도로 멍청해서는 아니고?]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농담을 잘하시네요. 그러실 줄 몰랐는데.”
[어떤 상황이든 즐길 줄 알아야만 진정한 귀족이지.]
“자기 목이 달아날 것 같은 상황까지 즐기라는 뜻은 아닐 것 같습니다만.”
[내 목이 달아난다고?]
나타니엘이 쿡쿡 웃었다.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도 못 한 일을 저 어리석은 것이 할 수 있다고? 너도 농담에 소질이 있구나.]
키리에가 얼굴을 찡그렸다.
“나타니엘 님은 마법사고, 글라디오소는 검사입니다. 마법사와 검사가 검으로 결투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그렇군. 보통은 그렇지.]
“아니면 마법을 쓰실 생각인가요?”
키리에가 생각한 가장 가능성 높은 일이 남몰래 마법을 쓰는 일이었다. 그녀는 좀 더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결투가 진행되면 주변에 마석으로 마법을 쓸 수 없게끔 결계를 쳐둡니다. 마법은 쓸 수 없을 거예요.”
[뷰캐넌. 이리 즐거운 일을 어떻게 그런 재미없는 방식으로 끝내겠니.]
“이겨도 져도 득이 없는 결투입니다. 지금이라도 취소하면 안 될까요?”
[결투를 신청한 건 내가 아니니 저자에게 가서 말해 보도록.]
나타니엘은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겠다는 기색을 비쳤다.
키리에는 말없이 글라디오소가 있는 천막을 바라보았다. 그는 보란 듯이 대검을 꺼내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키리에의 시선을 눈치채자, 안타깝다는 얼굴을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뻔했다.
‘아! 보이는 것에 미혹되는 무지몽매한 여인이여! 그대는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알고 곧 후회할 것이오!’
“…….”
나타니엘에게 말한 것과 같이, 이겨도 져도 얻을 게 없다.
이기면 버몬트 후작가와의 관계가 틀어지고, 지면 저 영웅주의자는 승자의 생색을 내면서 「세상이 나를 몰라주네」 어쩌고 하는 노래를 불러대겠지. 그럴 바에야 취소하는 게 제일 나은 선택이지만, 그걸 그녀도 알고 있지만.
“이길 수 있나요?”
나타니엘이 이쪽을 보는 게 느껴졌다.
[이기고 싶어졌니?]
“이겨도 져도 얻을 게 없다면 이기는 게 낫죠.”
키리에는 나타니엘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종말’을 자칭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비소를 흘렸다.
“게다가 저 표정…… 좀 열 받잖아요?”
나타니엘이 킥킥 웃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폭소에 가깝지 않나 싶은 웃음소리였다. 그는 그 정도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젠체만 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누군들 모든 일에 초연할 수 있겠어요? 그러도록 노력은 하지만, 정말로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나타니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제법 솔직해졌는걸.]
“그래요. 귀족답진 않겠죠. 나무라실 거라면 지금 하세요.”
때마침 심판과 글라디오소가 결투장으로 걸어 나오는 것을 본 나타니엘이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니. 그 모습이 훨씬 보기 좋아.]
생각 외의 호평이다. 키리에가 조금 당황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타니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고 있던 지팡이에서 쇳소리가 났다.
곧 나타니엘이 제 몸처럼 다루던 지팡이의 윗부분이 갈라지면서, 순백의 세검(細剣)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리에는 겨울의 왕 같은 남자가 검신을 확인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검이었나요?”
[검이었어.]
“그래서 검을 빌려준다는 것을 거절하셨군요?”
[그렇지.]
“하지만 글라디오소의 검은…….”
키리에가 글라디오소를 바라보았다. 압도적으로 상대를 이긴 것처럼 보이고 싶은지, 갑옷도 제대로 입고 있지 않았다. 손에 든 대검이 흉흉하게 빛났다.
[투 핸디드 소드. 내 시대 때 저런 검을 쓰는 건 대개 멋진 친구들이었는데, 요즘은 좀 달라진 것 같군.]
나타니엘이 중얼거렸다. 키리에는 실소를 흘렸다.
“세검으로 투 핸디드 소드를 상대하는 미친 짓을 여기서 보겠네요.”
[불안한가?]
나타니엘이 묻는다. 키리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나타니엘이 검을 든 모습을 보자마자 키리에는 느꼈다. 그는 검을 들어야 비로소 완성된다. 그 정도로 흰 검은 나타니엘 몸의 일부 같았다.
키리에가 물끄러미 나타니엘을 올려다보았다.
“저를 속이셨죠?”
[내가?]
“마법사가 아니군요.”
나타니엘의 눈이 키리에를 바라본다. 그는 흥미로운 걸 발견한 사람처럼 눈을 떴다가, 장난기 많은 악동처럼 킥킥 웃었다.
[맞아. 사실 난 검사거든.]
그는 천천히 키리에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키리에 역시 놀랐으나, 먼 곳에서 글라디오소의 얼굴이 찌그러지는 것을 보곤 부러 여유롭게 미소지었다.
“보기보다 장난을 좋아하시는군요.”
[들켰니? 맞아. 남들이 들으면 가학적이라 할 만한 성향이 있기야 하단다.]
“그럼 저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게 아쉬우시겠어요.”
[예상한 대로의 표정인가?]
“이런 쾌감에 눈 뜨면 못쓰는데 말이에요.”
[즐겨보렴.]
나타니엘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고, 키리에는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자, 기사란 모름지기 모시는 숙녀의 긍지를 위해 검을 드는 법이지. 무얼 원하지, 키리에 뷰캐넌?]
짓궂은 미소를 짓고 있는 나타니엘을 보며,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같은 방식으로 웃어 버렸다.
“승리. 압도적인.”
일방적인 결투였다.
“으아아아아아!”
글라디오소가 크게 외치며 검을 휘둘렀지만 나타니엘은 몸을 조금 비트는 것만으로 그것을 피해 버렸다.
단 한 번도, 글라디오소는 나타니엘을 건드리지 못했다.
‘어째서?’
반면 나타니엘의 검은 보이지만 피할 수 없는 속도로 글라디오소를 찔러왔다.
손등을, 손톱 아래를, 손가락 사이를, 귀 끝을, 귓불을, 팔꿈치를. 절대 치명상 없이.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이.
‘어째서!’
그는 구름을 밟듯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로 글라디오소의 공격을 모조리 피했다. 그 뒤에는 늘 교묘하게 피부 끝만 파고드는 검격이 이어졌다.
[동작에 군더더기가 많아.]
“하, 아, 아아압!”
글라디오소의 대검이 부웅 소리를 내며 크게 휘둘러졌다. 회심의 일격이었으나, 나타니엘은 맞아 주지 않았다.
[움직임이 느려졌어.]
“시끄러워!”
[검사는 말수가 적을수록 좋단다.]
“너 이 자식! 이 개자식! 이……!”
[상스럽기도 하지.]
“네가, 네가……! 너 따위가!”
[허리가 비었고.]
글라디오소는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정신이 먼저 무너졌다. 코앞에 있는데, 닿지가 않는다.
‘왜…… 왜 닿지 않아? 왜 닿지 않는 거지? 나는 기사 수련까지 받았는데? 내겐 재능이 있다고 그랬는데!’
다시 검을 휘둘러보지만 나타니엘은 나른한 걸음걸이로 횡단 베기를 피해 버렸다.
[사전 동작이 너무 길어.]
그의 말은 조언이라기보다 분발을 요청하는 것처럼 들렸다.
글라디오소는 스스로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데에 십여 분의 시간을 더 사용했다. 그리고 결국, 검 끝이 떨어졌다.
‘내 검이 이렇게 무거웠던가?’
경련이 이는 팔을 내려다보는 시야가 차오른 눈물 탓에 흐렸다. 다리는 진작부터 후들거리고 있었다.
불안감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어 글라디오소를 집어삼켰다. 체면이, 남의 손가락질이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5분 뒤에 맡을지도 모르는 무덤 냄새에 등에 식은땀이 흘렀고 모골이 송연했다.
그가 상황을 회피하며 떨리는 눈으로 나타니엘을 보았다.
‘설마, 설마 그러겠어? 아니겠지!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진짜로 죽이겠냐고!’
그러나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는 더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나타니엘은 포식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경건함까지 느껴지는 우아한 자세. 그러나 콧날 옆에 드리워진 그림자 저변에는 분명 제어되지 않는 야만성이 날뛰는 것이 보였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뻔했다.
‘날 정말로 죽일 셈이야…….’
글라디오소는 뒤늦게 두려움을 허락받고 폭발적으로 흐느꼈다.
“너무하잖아. 이건 너무하잖아! 진작…… 진작, 진작 말해 줬으면!”
[뭘?]
나타니엘이 대답했다.
“약한 척하지 않고! 당신이 강하다고! 나 같은 것보다 훨씬 강하다고! 말해 주었으면 이런 일은!”
글라디오소의 거친 노호에 나타니엘은 사붓이 웃었다.
[내가 왜?]
숨이 턱 막혔다. 저것은 강자의 논리다.
말문이 막힌 글라디오소를 나타니엘은 감정 없는 맑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도 그러잖니.]
“내, 내가 뭘 말입니까!”
[네가 어젯밤에 뷰캐넌에게 한 일 말이다. 뷰캐넌에게 허락받고 한 행동은 아닌 것 같던데.]
“지, 지금 그래서 고작 여, 여자 때문에……!”
[물론 그건 아니지. 그건 내 알 바야 아니지.]
나타니엘이 다시 웃었다. 그는 손에 쥔 검의 손잡이 부분을 살피며 눈을 내리깔았다.
[맞아. 사실 넌 그냥 운이 나쁜 거란다.]
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을 일직선으로 뻗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글라디오소의 대검이 저 멀리 튕겨 나갔다. 마석의 결계에 되 튕긴 검날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글라디오소는 하얗게 질렸다. 나타니엘은 그 지척에 서서, 상냥하고 온화하게 물어왔다.
[끝이니?]
글라디오소가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는 더 이상 도망갈 구석이 없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아니, 아닙니다, 아니에요…….”
[끝인가 보구나.]
“아, 아니야……! 아직, 아직 할 수 있어요!”
[검도 없으면서?]
“아니야! 아니라고! 아직, 아직 더 할 수 있습니다!”
[아닌 것 같은데.]
“아니…… 아닙니다! 아니야! 할 수 있습니다!”
아니라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글라디오소는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나타니엘은 일말의 감정도 없는 미소를 띤 채 내려다볼 뿐이었다.
무력감이 이미 글라디오소를 잡아먹었다. 그는 그제야 모든 허세를 내던지고, 몸을 수그렸다.
“살려 주세요…….”
고개를 숙인 글라디오소는 보지 못했으나, 관객들은 그 순간 주변의 온도가 5도쯤 낮아졌다고 느꼈다.
그리고 보았다. 나타니엘의 눈에서 마법처럼 흥미가 가신 것을.
그는 돌연 주검처럼 차가운 얼굴이 되어 낮게 중얼거렸다.
[시시해.]
무릎 꿇고 엎드린 글라디오소의 시야 가장자리에 검은 구두가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흰 검이 흰 선을 그리며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글라디오소는 죽음을 예감하고 눈을 감았다.
그 순간이었다.
“그만두세요.”
키리에 뷰캐넌이 뛰어들었다.
“어, 으어……?”
글라디오소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키리에의 등을 바라보았다. 망토를 두르는 것조차 잊은 가냘픈 등 위로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키리에?”
“그만두세요. 나타니엘 님.”
그녀가 양팔을 벌린 채 나타니엘을 가로막았다. 한 손에는 나타니엘이 건네주었던 검집이 들려 있었다.
“그만두세요.”
키리에가 재차 말했다.
나타니엘의 검 끝은 키리에의 쇄골 앞에서 멈춰 있었다. 숨만 잘못 쉬어도 닿을 거리였다.
한동안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석의 결계를 깨고 연무장 안으로 뛰어든 키리에를 보고 관중들이 웅성거렸으나, 그 소란은 첨예하게 조여진 긴장감을 부술 정도는 아니었다.
[누가 들으면 내가 정말 죽이려고 한 줄 알겠어.]
나타니엘이 그렇게 말하며 검을 물렸다. 맑고 투명한 눈에는 묘하게 다시 생기가 돋아 있었다.
“아닌가요?”
키리에가 차분하게 팔을 내렸다.
‘검집이 결계를 깰 수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면, 글라디오소는 분명 죽었겠지.’
하지만 정말 말리길 바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굳이 검집을 건네준 나타니엘의 속을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나타니엘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결투라면 목숨을 잃을 각오 정도는 해야지.]
“그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던가요?”
[문제의 경중은 중요하지 않단다, 뷰캐넌. 각오가 중요하지.]
“누구나 실수를 해요. 감당하지 못할 일을 스스로 껴안기도 하고요. 저처럼.”
[그러니 책임을 져야지.]
“다른 방식의 책임도 있어요.”
[다른 방식?]
나타니엘이 낮게 웃었다.
[목숨을 대신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그런 건 없어, 뷰캐넌.]
키리에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걸 알고 계신다면, 더 그의 목숨을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키리에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글라디오소는 넋이 나간 채 창백한 안색으로 헐떡거리고 있었다. 다리 사이에 노란 물웅덩이가 고여 있는 것을 그녀는 우아하게 외면했다.
“그에게 기회를 주세요.”
[신성한 결투에 끼어든 네가 무슨 권리로?]
“잊으셨나요?”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우아하고 오만하게 턱을 들었다.
없어도 있는 것처럼. 있다면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자신은 키리에 뷰캐넌이다.
“당신에게 긍지를 위임한 숙녀의 권리로.”
나타니엘은 그런 대답이 나오리란 것을 알았을까?
그는 무서울 정도로 침묵했다. 살얼음 같은 고요함이었다. 키리에가 추위를 잊을 정도로 거대하고 싸늘한 정적은, 이윽고 칼날 같은 웃음소리로 흩어졌다.
[영리하기도 하지.]
노인의 여유를 닮은 미소와 달리 어린아이처럼 맑은 눈이 키리에를 보았다. 그의 눈은 순수하게 잔인했고, 그래서 닿은 곳마다 서리가 피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의 말은 수용을 의미했고, 키리에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버몬트.]
나타니엘이 단호하게 이름을 불렀다. 바닥에 개구리처럼 엎어져 있던 글라디오소는 화들짝 놀라 나타니엘을 우러러보았다.
“네, 네?”
[축하해. 살았구나.]
글라디오소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친 것 같았던 눈물도 다시 쏟아졌다.
“가, 감사, 감사합…….”
[감사? 네가 나중에도 그렇게 생각할까?]
“네?”
[지금 너는 뷰캐넌에게 목숨을 빚졌어. 당장이야 살아난 기쁨에 뭐든 하겠다고 하겠지.]
“물론입니다! 원하시는 게 있다면…….”
[하지만 하루도 안 갈걸. 아마 넌 나를 무릎 꿇리고 싶어질 거야. 조만간.]
악마의 속삭임 같은 목소리였다. 글라디오소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아니긴. 다들 그렇던걸.]
나타니엘이 우아한 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나타니엘의 세검이 다시 지팡이로 되돌아왔고, 키리에의 등에는 그녀가 미처 챙기지 못한 망토가 둘렸다.
그는 그대로 서서 지팡이를 짚은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웃고 있었지만, 왜인지 무표정으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늘에서는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타니엘은 첫 눈꽃이 바닥에 닿을 무렵, 몸을 돌렸다.
[나중에 또 놀자고.]
그는 그렇게 모두가 바라보는 가운데, 저택 방향으로 걸어가 버렸다.
***
눈앞의 위험이 사라지자 글라디오소는 안도했는지 숨을 몰아쉬었다. 그 앞에는 여전히 키리에가 있었다.
“키리에 양! 그대는 진실로 나의 성……!”
“성녀 어쩌고 하려는 거라면 관두세요.”
“……종달새요! 구원해 주어서 고맙소! 어떻게 저런 무시무시한 자 앞에 나설 수 있는지, 나는……!”
글라디오소가 몸을 떨었다. 키리에는 그제야 마른 한숨을 쉬었다.
“저도 감당하기 어려운 분입니다. 더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그리하지…….”
생채기투성이의 몸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글라디오소는 끝까지 착각으로 눈망울을 빛냈다.
“그, 그런데 나를 도와주었다는 건 그대도 역시 내게 마음이!”
“없습니다.”
키리에는 일부러 망토 자락으로 코를 가리는 시늉을 했다.
“몸부터 추스르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아까부터 냄새가…….”
“……!”
글라디오소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더는 노란 물웅덩이 위에 퍼질러 있는 남자의 꼴을 보기 싫었던 키리에는 드레스를 잡고 걸음을 옮겼다.
‘내가 뛰쳐나가지 않았다면, 분명 죽였겠지.’
역시 위험한 남자였다.
그러나 인상을 쓴 채 걷던 그녀는 문득 이 승부가 자신의 예상과는 판이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버몬트 후작가의 미움은 사지 않았다. 영웅주의자의 콧대도 눌러주었다. 결투에 져서 오줌까지 지렸으니, 글라디오소도 얌전해질 것이다.
‘설마?’
키리에가 길 위에 우뚝 멈췄다.
그녀는 뒤늦게 나타니엘이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나타니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키리에를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키리에에게, 우아한 동작으로 기사의 예를 차린 뒤 등을 돌렸다.
여행이 계속되었다.
키리에와 나타니엘은 몇 개의 도시를 문제없이 지나쳤다.
하인들은 이전보다는 나타니엘을 덜 무서워하게 되었다. 모시는 아가씨의 명예를 지켜 주었다는 이유에서였다.
모든 것이 평탄해 보였다. 안네마리를 빼고.
“안네마리는 아직이야?”
잠시 말을 쉬게 하는 동안, 키리에가 발디르에게 물었다. 발디르는 착잡하게 대답했다.
“예. 의원이 말했다시피 정신적인 문제라서…….”
키리에가 그를 따라 하인용 마차를 바라보았다.
엔비니크 시에서 의원이 안네마리를 진찰했지만, 병은 아니라 하였다.
‘안네마리는 나타니엘에게서 뭘 느끼고 있는 걸까?’
키리에는 한숨을 한번 쉰 뒤 마차에 올랐다.
나타니엘은 마차 안에 있었다. 그는 지팡이를 무릎 위에 얹은 채 다리를 꼬고 있다가, 키리에가 올라타자 그녀를 힐끔 돌아보았다.
[출발이니?]
“네. 곧 출발해요. 필요한 게 있다면 지금 말씀해 주세요.”
[없어.]
그는 교양있고 우아하게 답하며 타성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는 미소 외의 다른 표정은 짓지 않았으므로, 사실상 그게 그의 무표정이었다.
“마차 여행이 피곤하진 않으신가요?”
[나쁘진 않아.]
“다행이네요.”
건조한 문답이 오갔다. 둘 다 필요 이상으로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진 않았다. 중간에 글라디오소가 끼긴 했지만, 키리에와 나타니엘은 철저하게 이해관계였다.
키리에는 자신이 깨운 정체 모를 ‘종말’을 감시해야만 했고, 나타니엘은 그의 안락한 여정을 위해 키리에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석의 결계를 깰 수 있을 정도의 마법이라면, 그냥 바로 수도로 이동해도 될 것을.’
그녀의 목표는 하나였다. 수도에 가서 왕가의 금제를 풀고 나타니엘을 깨운 것이 고의가 아님을 알리는 것.
‘이런 걸 깨웠다고 반역으로 몰리는 건 사양이야.’
그녀에게 나타니엘이란 그 정도의 존재였다.
‘어차피 그냥 스쳐 지나갈 남일 뿐이니까.’
키리에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마차가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눈을 감고 생각 중이던 그녀의 귀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키리에는 마차 창 너머의 겨울 숲을 바라보았다. 아직 마을이 아니니 길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 마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키리에가 문을 열자, 발디르가 코까지 빨개진 모습으로 경례했다.
“아가씨. 눈사태로 길이 막혔다고 합니다.”
“또?”
“전국적으로 폭설이 심해서 손이 부족하다고 하는군요. 아무래도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키리에는 한숨을 쉬며 발디르 뒤의 리모에게서 털 망토를 받아 들었다.
“알았어. 일단 내려서 상황을 봐야겠어.”
“그러시겠습니까?”
그녀는 발디르의 에스코트를 받고 막힌 길 쪽으로 향했다.
우로는 높은 산, 좌로는 절벽. 그 사이의 유일한 길이 눈으로 꽉 막혀 있었다.
마을에서 파견된 장정들과 공무원 몇이 눈을 삽으로 퍼내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역부족이었다.
“하루 이틀 작업으로는 안 끝나겠는데.”
“그럴 것 같습니다.”
키리에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녀의 버릇이다.
“지도 가져와, 경. 그리고 현장 책임자도 불러 줘.”
“예!”
발디르가 씩씩하게 대답한 뒤 지도를 가져다주었고, 키리에는 책임자에게 다가갔다.
누구의 담당이니 어디의 지원이니 하는 재미 없는 이야기가 오가는 도중, 키리에의 뒤에서 문득 세련된 발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길로 돌아갈 예정인가?]
나타니엘이었다.
인기척이 전혀 없었던 탓에 발디르가 한 박자 늦게 검 손잡이를 쥐었지만, 나타니엘은 시선 한 톨 주지 않았다.
[자주 멈추는군.]
“요즘 이상할 정도로 눈이 많이 와요. 이런 적이 없는데.”
키리에가 발디르에게 눈짓하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눈 때문에 길이 막혀서 여정이 지체된 일이 이미 여러 번 있었다.
키리에는 드러나지 않게 나타니엘의 눈치를 보았다.
“이 부근은 버몬트 후작 령인데, 지원이 적어서 제설 대책이 미비하다고 하네요.”
[그 콧수염인가.]
“콧수…… 네, 그렇죠. 콧수염.”
그녀는 입을 가리고 조금 웃다가 코를 훌쩍였다.
“지금 사람을 보내도 해결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 문제예요.”
[어느 정도나?]
“못해도 일주일은 걸리겠죠? 이럴 줄 알았으면 마법사를 데려올 걸 그랬네요.”
그렇게 말하는 키리에를 나타니엘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너는 참견이 과하구나.]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일도 아닌데 뒤처리를 생각하고 있잖니.]
키리에가 곰곰이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버몬트 때처럼요?”
[버몬트 때처럼.]
나타니엘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말리러 들어올 줄은 몰랐지.]
키리에는 한기가 들어오지 않게 망토를 여미고서 막힌 길을 바라보았다.
“글쎄요. 그냥 책잡히기 싫을 뿐.”
[그건 네 아비의 교육인가?]
“반면교사도 교사라고 부를 수 있다면요.”
[좋군. 화목하지 못한 가정사를 표현하는 방법치고는 아주 세련됐어.]
“감사합니다.”
키리에가 담담하게 답했다.
이내 키리에는 버몬트 후작가 쪽으로 연락을 보냈다고 전하는 현장 책임자를 돌려보내고 나타니엘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의외의 말씀을 하시네요. 신분에 따른 책임을 매우 중요시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나는 품위 없는 행동이 싫을 뿐이야.]
그의 웃음이 좀 더 진해졌다.
[이를테면 자기 책임도 아닌 일에 열중하다 감기에 걸릴 예정인 귀족 영애 같은 것들 말이지.]
“하지만…….”
[뒤로 물러나.]
나타니엘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산비탈의 도로를 점거하고 있던 눈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구름보다 크게 생긴 수증기를 바라보며 키리에는 경외감에 입을 벌렸다.
“마법사가 아닌데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건가요?”
[마법사가 아닐 뿐 마법은 부릴 수 있으니까.]
“그렇다는 건 마법보다 검을 훨씬 더 잘 쓰시는 거군요?”
[내 마법은 오레윈브리지에게 조금 배운 정도야.]
왕가의 이름을 참으로 쉽게도 부르는 남자였다.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주변을 살피는 키리에를 나타니엘은 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본디 뷰캐넌 역시 마법사의 혈통일 텐데 네게는 마력의 축복이 느껴지지 않는구나.]
“옛날 일을 알고 계시는군요.”
[옛날이라.]
나타니엘이 벼랑 좌편을 바라보았다. 절벽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눈 내린 너른 숲은, 그가 잠들어 있었던 그 마을과 조금 흡사했다.
[내게는 아직 엊그제 같거늘.]
키리에가 멈칫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감정이 몰아치고 있을 때 할 법한 말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타니엘의 눈은 유리처럼 맑고 투명하기 그지없었다.
키리에는 나타니엘에게 아무것도 물은 적이 없다. 그러나 그가 이 나라의 건국을 함께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정체가 뭐건, 시조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와 일이 있었다는 것도.
시조에 의해 잠들었다던 그의 말이 맞다면, 그는 자그마치 500년 이상의 세월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우신가요?”
[그립지는 않아.]
대답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사람이 건조하게 답했다. 그는 지팡이를 짚은 채 영영 눈 덮인 산을 내려다볼 것처럼 서 있었다.
[잃어버린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없나요?”
[내게는.]
때때로 너무 오연한 것은 외로워 보이기 마련이다. 키리에는 나타니엘에게서 형언할 수 없는 막막함을 느꼈다.
그녀는 어쭙잖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대신, 몇 발짝 걸음을 옮겨 나타니엘의 옆에 섰다.
“뷰캐넌이 마법사 혈통이었던 것은 시조 대에서만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후 공작가에서 백작가로 격하 당했는데, 그게 마력을 잃은 것과 어떤 전후 관계에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흥미롭구나.]
“그래야죠. 가문의 비밀을 알려드린 건데.”
[귀한 걸 듣게 됐네.]
나타니엘이 키리에를 돌아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키리에는 대답하지 않고 미소만 보인 뒤, 몸을 돌렸다.
“너무 늦지 않게 마차에 타주세요.”
[그러지.]
나타니엘은 한참을 홀로 서 있었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한 명씩 하던 일을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계절감을 잊은 청년의, 곧 멸종할 고고한 맹수 같은 등을.
‘외로워 보인다고 하면 화를 낼까.’
키리에는 마차 안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누구에게나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은 있을 테니까.
***
키리에와 나타니엘은 며칠 뒤 엘서스에 도착했다.
[들떠 있구나.]
“들켰나요?”
그녀는 마차 창을 열고 바다 냄새를 크게 들이마시며 웃었다.
“제 고향이에요. 어릴 땐 여기서 지냈어요. 어머니가 아직 계실 때요.”
[화목하지 않은 가정이랬으니 사별은 아닐 테고, 이혼인가?]
“맞아요.”
묻지 않은 말을 하는 건 아마 기분이 너무 좋아서다. 말하고 나서야 눈치를 살폈지만, 나타니엘은 귀족답게 냉연히 미소지을 뿐이었다.
사건은 마차가 뷰캐넌의 별장에 도착했을 때 벌어졌다.
“손님을 들일 수 없다고?”
“예, 아가씨……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별장 관리인 린드너는 안절부절못했다. 키리에는 우선 그의 어깨를 눌러 그를 진정시켰다.
“어째서?”
“그게…… 백작님께서 별장을 ‘비워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난 그런 이야기 못 들었어.”
“어제 막 마법으로 연락을 주셨습니다. 귀빈께서 별장에 머무르시기로 한 모양입니다.”
린드너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조아렸다.
키리에가 미간을 좁힌 채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 본인이 올 거였으면 귀빈이라는 말은 안 썼겠지. 그럼 누구지?’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건 왕세자였으나, 루비니아 캐스너와 희희낙락하고 있을 이든이 인제 와서 뷰캐넌의 별장에 머무를 리 없다.
‘곤란한데.’
뭐가 됐든 이대로 나타니엘을 세워 둘 수는 없는 일이다. 키리에가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린드너. 난 손님과 함께 여관에 머무를 테니 별장은 아버지의 손님께 내어드리도록 해. 관리 신경 쓰고.”
“그러겠습니다.”
그녀는 별장을 나서, 마차에 있던 나타니엘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죄송해요. 가문의 사정으로 별장에서 지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른 별장을 수색하는 동안 여관으로 참아 주실 수 있으신가요?”
[나야 상관없지만.]
나타니엘이 말했다.
[네 고향 아니었나?]
키리에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감상적인 이야기 따위 괜히 말했다.
“지나간 것에 의미 따윈 없죠.”
두 사람이 탄 마차는 금방 여관에 도착했다. 키리에가 어릴 적 자주 머물렀던 여관이었다.
세자르 뷰캐넌은 야심만큼이나 바빴다. 그건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지만, 부모가 된 이상 누군가는 키리에를 키워야 했다.
그녀는 육아라는 짐을 홀로 짊어진 자신의 어머니가 망가져 가는 것을 이곳에서 전부 보았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곳이었지만,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긴 싫었다.
키리에는 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기묘한 감각에 흠칫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그녀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뭐지?’
그 시선은 나타니엘이 등장하자 그에게로 옮겨갔지만, 그 역시 같은 것을 느낀 듯했다.
[과격한 환영인걸.]
키리에는 다음 순간 바로 이 매서운 시선의 이유를 깨달았다. 그 이유가 여관 로비에 마련된 신문 첫 면에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었던 것이다.
「왕세자와 뷰캐넌, 파경!」
「왕세자가 택한 그녀, 루비니아 캐스너를 알아보자!」
「키리에 뷰캐넌과의 불화 원인은?」
키리에가 입술을 깨물었다.
‘파혼 공식 발표가 오늘이었구나.’
눈치 빠른 하인들이 재빨리 키리에의 눈앞에서 그것들을 치워냈지만, 딱 한 부가 공중을 날아 나타니엘의 앞에서 멈췄다. 그는 지팡이를 든 채 순식간에 신문 겉면의 전부를 읽어내렸다.
[그런 자숙이었나.]
“…….”
괜히 속이 뜨끔하고 입맛이 썼다.
키리에는 일부러 더 높게 턱을 들고, 더 냉정하게 말했다.
“비웃고 싶으신 거라면 지금 하세요.”
근거 없는 비방, ‘알 만하다’는 시선 따위는 지난 1년간 질리도록 겪었다.
그러나 그녀의 각오가 무색하게, 나타니엘은 갸름한 턱을 기울였다.
[내가 그런 이야기에 관심 가질 것 같니?]
“……아뇨.”
[그래.]
“하지만…….”
말끝이 흐려졌다. 그녀는 자신이 왜 당황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건…… 그렇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잖아요? 보통은 파혼을 당했다고 하면, 하아.”
그녀는 토하듯 내뱉은 한숨과 함께 겨우 말을 멈췄다. 보라색 눈이 당황으로 흐려졌다.
‘대체 뭐하는 거야, 나.’
고작 중립을 지키는 사람 한 명 만났다고 칠렐레팔렐레 속을 보이다니. 수치스러웠다.
말없이 입술을 깨무는 그녀를, 나타니엘은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더니 지팡이로 짧게 한 번 바닥을 쳤다.
[뷰캐넌.]
키리에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비난하겠지? 귀족답지 못하다고.’
미리 고개를 숙이려 대기하고 있던 키리에의 귀에, 그녀가 생각하지도 않은 말이 들렸다.
[이 나라 왕세자의 사람 보는 눈이 없다는 걸 그리 열성적으로 변명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야.]
키리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른 채 굳은 그녀를 두고, 나타니엘은 맑은 눈을 깜빡였다.
[왕세자의 안목을 비웃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지금은 쉬고 싶군.]
너무나도 투명한 시선이었다. 소문만 듣고 자신을 백안시하던 사람들과는 달랐다.
‘아버지에게도 듣지 못한 말인데.’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이상한 표정으로 웃어 버렸다.
“당신은 정말 모를 분이에요.”
그 모를 사람의 말이 이렇게나 상냥하게 들리는 건 왜일까.
“엘서스는 세 영웅의 고향이었다고 해요. 저 비석은 전설경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고요.”
키리에는 눈 내리는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말했다. 선착장 끝의 비석을 가리킨 나타니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광활한 수평선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니, 나타니엘이 메마른 미소를 지으며 눈을 맞춰 왔다.
[다른 건?]
“전설경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어요. 역사서에도 종말을 상대하다 생긴 상처로 일찍 영면에 들었다고만 쓰여 있고요.”
[그렇군.]
“죽지 않았다면 호국경과 함께 살아 있는 전설로서 추앙받았겠죠.”
[그게 싫은 사람도 있었겠지.]
나타니엘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은 가끔 과하게 섬찟하다.
키리에는 망토를 여미며 다시 바다로 시선을 옮겼다.
“이런 이야기는 불편하신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니?]
“그야 역사서에는 시조와 전설경, 호국경이 힘을 합쳐 종말을 몰아낸 것으로 쓰여 있거든요.”
키리에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가 정말 종말이라면 자신을 토벌한 사람의 이야기는 불편하지 않을까?’
우려와 달리 나타니엘은 감정이 배기엔 너무 건조한 미소를 흘렸다.
[글쎄.]
둘은 잠시 합의된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당연하게도 키리에였다.
“그럼 셀 아렐라노를 멸망시킬 생각은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멸망?]
나타니엘이 키리에가 던진 낱말을 골라냈다. 키리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타니엘 님이 정말 ‘종말’이라면 못다 이룬 숙원을 이루고 싶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작은 머리로 그런 귀여운 생각이나 하고 있었군.]
“그럼요. 종말, 멸망, 숙원. 몹시 귀여운 단어죠.”
[말주변은 좋구나.]
나타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갓 내린 눈이 쌓인 외부 테라스로 향했다. 키리에 역시 뒤를 따랐다.
지팡이를 든 사내가 수평선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왜 나를 데려왔지?]
“문제란 보일 때보다 보이지 않을 때 더 무서운 법이니까요.”
[옳은 말이야.]
키리에는 고요한 바다를 한 번 눈으로 훑곤 최대한 담담하게 물었다.
“정말 이 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하셨나요?”
[글쎄.]
“확답을 주세요.”
[뷰캐넌.]
키리에가 움찔했다. 그에게서 불리는 이름은 왜인지 얼음이 깨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나타니엘은 미소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는 그림 속의 모닥불만큼이나 의미가 없었다.
[선을 지켜.]
얼음처럼 맑고 투명한 푸른 눈. 그 안에 담긴 게 무엇인지 키리에는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자신은 아니었다.
그녀는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모아, 귀 뒤로 넘겼다.
“그래도 저는 알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수도로는 데려가 드릴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귀족이니까요. 이대로 나타니엘 님을 수도로 올려보냈다간 제 책임이 돼요.”
[책임이 없으면 누가 죽든 알 바 아니란 거니?]
“네. 물론이죠.”
키리에가 빠르게 대답했지만 자신감은 없었다. 나타니엘이 피식 웃었다.
[허세가 과해.]
“허세라뇨? 저는…….”
장갑을 낀 손이 불쑥 키리에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차갑고 싸늘한 가죽이 목에 닿는 것을 느꼈다.
놀라야 정상인데, 오히려 놀랍도록 두렵지 않았다. 그러기엔 나타니엘이 지나치게 건조했다. 그에게는 사람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흥분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청옥보다 투명한 것 같은 미소는 여전했지만, 그게 아무 의미 없는 습관임을 감안한다면 그는 완전하게 무표정했다.
“너무 낮이고 너무 밖이네요. 그런 게 취향이신가요?”
[만용도 과하고. 내가 널 죽이지 못할 것 같니?]
“전혀요. 손쉽게 죽이시겠죠.”
나타니엘이 낮게 웃었다.
[그러면.]
“제가 보는 걸 믿을 뿐이에요.”
[네가 보는 것.]
나타니엘의 목소리의 음조가 한 단계 더 낮아졌다.
평소에는 밤에 듣는 흐르는 물소리 같았다면, 지금 그의 목소리는 밤바다의 파도 소리처럼 들렸다.
키리에는 침묵했다. 꽤 오래. 그녀의 머리 위에, 나타니엘의 어깨 위에 눈이 흔적을 남길 정도의 시간이었다.
이윽고 약간은 자신 없는 듯한 맑은 목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서요.”
키리에는 푸른 눈에 자신의 모습이 담기기 시작한 것을 보았다.
제비꽃 색.
***
그날 밤이었다.
키리에는 별안간 아무 이유 없이 잠에서 깼다.
그녀는 천천히 침대 위에서 발을 내렸다가,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놀라 움츠렸다.
‘왜 이렇게 춥지?’
그녀는 조심스럽게 겨울용 털 외투에 팔을 끼운 뒤, 발코니로 향했다. 키리에는 그곳에서 여관을 나서고 있는 나타니엘을 발견했다.
‘나가잖아! 왜 나를 안 깨운 거야?’
그녀는 당장 눈살을 찌푸리며 복도로 나왔다가 화들짝 놀랐다. 그곳에서, 발디르를 포함한 기사들과 여관의 하인들이 잠들어 있었다.
‘마법이구나. 지금까지 얼마나 자주 이런 방식으로 빠져나갔을까?’
이런 제멋대로인 행동에 대해 한마디 하는 것도 우선 그를 찾은 다음의 일이다. 키리에는 빠르게 여관을 나섰다.
나타니엘은 고급 여관이 위치한 언덕길을 느린 걸음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녀는 굳어오는 손가락을 호호 불 생각도 못하고, 잘 보이지도 않는 나타니엘을 따랐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타니엘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놓쳤나?”
[내가 잡은 거지.]
“꺅!”
사라졌던 나타니엘은 뒤에서 나타났다. 키리에는 놀라 자세를 비틀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떻게……? 마법인가요?”
나타니엘은 태연하게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키리에가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녀는 뒤늦게 원래의 목적을 떠올렸다.
“나타니엘 님. 음…… 우연이네요.”
나타니엘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우연.]
“네. 저도 산책 중이었거든요. 나타니엘 님도 야간 산책을 가시나 봐요.”
[그 차림새로 말이지.]
푸른 눈이 키리에를 위아래로 훑었다. 어딜 봐도 겨울 산책을 하기에 적절한 복장은 아니었지만, 키리에는 최대한 태연하게 턱을 들었다.
“숙녀를 그런 식으로 훑어보는 건 실례예요.”
[남의 뒤를 쫓는 건 실례가 아니고?]
“산책 나왔을 뿐입니다.”
[그럼 돌아가.]
냉정한 말이었다. 그가 지팡이로 길을 가리키자, 푸른 반딧불이 같은 것이 반짝거리기까지 했다.
‘이렇게 나오면 말로는 못 이기잖아.’
키리에가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쉬었다.
“……동행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안타깝게도 귀족에게는 국방의 의무라는 게 있어서요.”
[안 된다면?]
“그럼 저는 다시 산책을 가야겠죠.”
말하면서도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한참 키리에를 내려다보던 나타니엘은 다행히 그녀를 쫓아내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몸을 돌릴 뿐.
‘암묵적 허락.’
키리에는 잠자코 그 뒤를 따랐다.
나타니엘은 대중없이 걸었다. 잠든 휴양지의 고요함은 끼워 맞춘 것처럼 그에게 잘 어울렸다. 광장의 높은 곳에 걸린 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키리에는 시간이 얼어 버린 것 같은 광장을 나타니엘과 가로질러, 항만으로 향했다.
나타니엘은 낮에 보았던 비석 앞에 멈춰,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키리에는 달달 떨면서도 그를 기다렸고, 불청객답게 그를 방해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먼바다에서 불길한 천둥소리가 울리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쿠르릉…….
낮게 울려 퍼지는 거친 소리에 키리에가 화들짝 놀랐다.
‘태풍? 이 계절에?’
그녀는 시선을 수평선으로 향했다가,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불가사의한 불안감에 덜컥 겁이 나 외쳤다.
“나타니엘 님?”
그녀의 부름에 나타니엘이 고개를 돌렸다.
출렁이는 검은 바다를 배경으로 선, 감색 예복의 청년.
유리처럼 맑고, 투명하고, 모든 걸 얼어붙게 할 것 같은 푸른 눈. 그리고 한낱 조형에 불과한 웃음새. 긴 속눈썹 탓에 그의 푸른 홍채 위에는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그림자가 졌다.
키리에는 자기가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표정을 정돈할 수 없었다.
“그…….”
[알고 불렀니?]
“네?”
[몰랐군. 그래, 너는 눈치가 제법 있던가.]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 말로 키리에는 확신했다. 방금 그가 ‘안 좋은 무언가를 하려’ 했다는 것을. 마치 무언가 두려운 것을 불러들이고 있는 듯했다.
‘전설경이 미운 걸까? 뭐가 됐건 막아야 해.’
그런 실낱같은 깨달음을 부여잡은 키리에가 애써 화사하게 웃었다.
“엘서스는 처음이신가요? 엘서스에서는 세 영웅 말고도 뛰어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그 이유를 아나?]
“네?”
키리에가 화들짝 놀라 반문했다.
[엘서스에서 인재가 많이 나는 이유.]
“아뇨. 그런 게 있나요?”
[엘서스는 이 대륙에서 가장 정순한 마력이 고인 곳이었어.]
“과거형이군요?”
[그래. 지금은 그 솟아나던 마력이 흔적도 없구나. 오레윈브리지의 짓인가.]
“왜 그렇게까지?”
[글쎄.]
다시 말을 붙이려던 키리에는 어느새 입이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얼어붙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좀 더 따뜻하게 입고 올걸.’
생각에 잠긴 것 같았던 나타니엘이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도와달라고 하지 않는구나.]
대답하기엔 그녀는 너무 춥고 지쳐 있었다. 그래서 그냥 웃고 말았다.
나타니엘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서 그런 키리에의 주변에 훈풍을 불러냈다. 기대하지 않은 친절에 키리에가 입꼬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지금 보니 뷰캐넌이 어리석은 건 유전인 것 같군.]
“초대 뷰캐넌 말씀이신가요?”
[그래. 그 머저리를 죽이지 말라고 할 땐 그렇게 당돌하더니 춥다는 말 한마디 못 하는구나.]
“하지만 그 머저리가 죽으면 문제가 크고, 제가 좀 춥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진 않는걸요.”
[따분하고 지루하군.]
“그게 인간이죠.”
그렇게 말하면서 키리에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관심 없으시겠지만.”
[없어.]
예상했던 대답에 그녀가 미소지었다.
밤바다는 낮에 본 바다와는 달랐다. 그리고 나타니엘에게는 이편이 더 잘 어울렸다.
문득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나타니엘 님. 복수할 대상이 필요하신 건가요?”
다행히 무슨 헛소리냐는 타박은 없었다.
“그런 거라면, 제가 과거의 사람들을 대신해 미움받을 수는 없을까요?”
[네게 그 정도의 가치는 없어.]
“역시 그런가요.”
추위가 사라진 덕에 키리에는 아무 문제 없이 밤바다를 감상할 수 있었지만, 훈풍은 동상 대신 졸음을 이끌고 왔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키리에에게 나타니엘이 물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나?]
키리에가 잠을 쫓아내기 위해 고개를 휘휘 저었다. 품위고 자시고, 지금은 제정신으로 대답하는 게 우선이었다.
“죽음은 두렵지 않아요. 아픈 게 두려울 뿐.”
[아프지만 않으면 된다?]
“그것도 있고…….”
그녀의 노력이 무색하게, 고개가 자꾸만 아래로 떨어졌다.
“……화나 계신 거잖아요. 아니, 그보다는, 외로움에 가까운가요……?”
‘아, 안 되겠어. 역시 너무 졸려.’
그녀는 해이해진 자신을 속으로 꾸짖었지만 잠이 달아나진 않았다.
“무슨 감정이건 간에 그걸 표현하지도 못하게 하는 건 비겁해요.”
[내가 표현하면 수도는 멸망이야.]
“음. 그러니까 마음은 이해하지만, 제가 귀족이라 그건 또 막아야 해서요…….”
나타니엘은 뭘 하고 있을까?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돌리자, 그는 어느샌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단정하고 옅은 미소 아래 벽안은 시리도록 푸르렀지만, 키리에는 왠지 그 시선이 두렵지 않았다. 분명 두려운 존재인데, 모두가 그렇게 말하는데도 키리에는 나타니엘에게서 공포보다는 공허를 느꼈다.
‘왜일까?’
그는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잠결에 반사적으로 손을 얹었다. 그리고 봄처럼 따뜻하게 미소지으며 속삭였다.
“하지만 전 역시 당신이 그럴 분으로 보이지는 않네요.”
나타니엘은 아주 오래 침묵했다. 키리에는 어쩌면 그의 눈 속에서 우주를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그가 속삭였다.
[돌아가지, 키리에.]
키리에.
다행히 빠르게 마리아와 연락이 닿았다. 마법으로 작동하는 소통석을 사이에 두고, 마리아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안부를 전했다.
「이야기는 들었어, 키리에. 별장이라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해 놓았어. 문제 있으면 관리인에게 말하고.」
“고마워, 마리아. 덕분에 드디어 여관에서 벗어났어.”
「천만에.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도와줄게.」
키리에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마리아는 차기 올드시우다드 공작이 될 사람이었다. 여러모로 신경 쓸 일이 많을 텐데도 그녀는 늘 자신을 돕는 일에는 물심을 아끼지 않는다. 고마운 일이다.
“이 정도면 충분해. 너와 라우라는 별일 없어?”
「아렐라노가 평화로운데 우리라고 무슨 일이 있겠어. 하지만…….」
“하지만?”
근심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너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사교계에 퍼지고 있어, 키리에.」
잠시나마 웃었던 키리에가 다시 무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마리아가 이야기를 꺼낼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의도적이라는 말이구나.”
「안타깝게도…….」
“너무 뻔하네.”
마리아가 한숨 쉬었다.
「맞아. 캐스너 남작가야.」
키리에의 약혼자였던 왕세자 이든 오레윈브리지의 피앙세가 된 루비니아 캐스너.
그녀는 신분으로만 따지자면 절대 키리에를 따라잡을 수 없다. 키리에는 개국 공신 가문인 뷰캐넌 백작가였고, 루비니아는 지방의 신흥 귀족이었으니까.
당연히 왕세자는 캐스너 남작가와의 혼인으로 얻을 것이 없었다. 왕세자와 루비니아가 약혼을 발표했으니, 사람들이 그걸 비교하며 즐겨댈 차례였다.
‘이번에 실리 자작도 뷰캐넌의 가신이 되었다죠? 사실상 중앙 귀족을 제외하면 거의 뷰캐넌의 세력이네요.’
‘세자르 뷰캐넌 백작의 수완은 대단하죠. 그에 비해 캐스너 남작가는…….’
‘딸 장사죠, 딸 장사.’
캐스너 남작이라면 흑색선전을 해서라도 그런 비교를 막고 싶을 것이다.
키리에가 중얼거렸다.
“아무리 왕세자와의 약혼이 무효로 돌아갔다지만, 너무 뷰캐넌을 우습게 아는걸.”
「꼬리를 숨기는 법도 어설퍼. 많은 사람이 이 근거 없는 소문의 출처가 캐스너 남작가라는 걸 알 거야.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신경 쓰지 않겠지.”
「응. 엊그제 왕세자와 캐스너 남작가는 공식적으로 약혼 발표를 마쳤고, 적어도 며칠 동안은 이 일에 대해서 떠들어댈 거라고 봐.」
“엘서스에 내려오길 잘한 것 같네.”
「수도는 지금 가십에 목말라 있어. 겨울 바다라도 보면서 조금 쉬다 와, 키리에.」
“그럴게. 고마워, 마리아.”
「응. 그리고 키리에?」
“왜?”
드물게도 마리아가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리고 이내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근거 없는 소문이겠지.」
“말하지 않아도 되겠어?”
「응. 키리에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아니까.」
마리아의 목소리는 상냥했다. 키리에는 미소와 함께 연락을 끊었다.
마리아와의 통화를 마친 키리에는 안네마리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에게는 요양을 위해 따로 방 하나를 배정해 주었다.
안네마리는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벌벌 떨고 있었다. 키리에는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가, 손도 대지 않은 식사 쟁반을 확인했다.
“안네마리.”
안네마리의 몸이 움찔한다. 이불보 밑에서 크고 검은 눈이 키리에를 보았다.
“아가씨…….”
“안네마리. 이젠 좀 괜찮아졌니?”
안네마리의 눈이 부지런히 키리에의 주변을 살폈다. 코가 킁킁거리기도 했다.
“그것은요……?”
“쉬신다고 하기에 돌아왔어.”
“그래요…….”
키리에는 조심스럽게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안네마리는 꾸물거리며 키리에의 근처로 다가왔다.
“안네마리. 이제 말해 줄 수 없니?”
“…….”
“왜 네가 이렇게 두려워하는지. 대체 그에게서 무슨 ‘냄새’를 맡고 있는지.”
안네마리가 피리 소리를 내며 숨을 삼켰다. 이불 밑에서 작은 손이 튀어나와 키리에의 손을 잡았다.
“아가씨는 안네마리를 믿어 주시나요……?”
“너를 믿어.”
작은 동산 같던 몸이 서서히 일어났다. 뾰족한 귀의 다람쥐 같은 꼬마 아이는 음울한 눈으로 키리에를 보았다.
“……아가씨.”
“응.”
“사람들은 냄새가 나요.”
“냄새?”
“네. 착한 사람은 착한 냄새가 나요. 아가씨랑, 라우라 아가씨랑, 마리아 아가씨랑, 헤더 아주머니랑……. 가주님은 안 나지만, 하여튼 안네마리는 누가 누가 예쁜지 알아요.”
“지금 나 칭찬해 준 거야? 고마워, 안네마리.”
조금 웃는 듯했던 안네마리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그런데 그…… 그것은, 그것에게서는…… 위험한 냄새가 나요.”
“나타니엘 님을 말하는 거지?”
이름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안네마리는 몸을 움츠렸다. 키리에는 조심스럽게 안네마리를 끌어안았다.
“그가 왜?”
“그것은…… 그것은 인간이 아니에요, 아가씨.”
“인간은 아니겠지.”
그가 정말로 신화 속의 ‘종말’이라면 인간이 아니기야 하겠지만…….
그러나 안네마리를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가씨, 안네마리는, 안네마리는 알아요. 그자가 있으면…… 모든 게 숨을 죽여요.”
“모든 것?”
“모든 거요…….”
안네마리가 순식간에 들어본 적 없는 고요하고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바다, 산, 개울, 날벌레, 쥐, 개, 들고양이, 공기, 풀숲, 산 까마귀, 지렁이, 두더지, 도마뱀, 모든 네발 달린 짐승들…….”
차가운 안네마리의 몸. 차가운 방. 낱말마저 그녀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얼어붙는 것 같았다.
키리에는 문득 산비탈에 서서 눈 덮인 숲을 내려다보던 나타니엘의 등을 떠올렸다. 그 고요함이 고작 분위기라고 뭉뚱그리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웅장한 무언가였던 걸까?
“왜냐면 그것은…… 그것은 얼마든지, 자기가 내키지 않으면, 고작 그런 이유로, 뭐든 집어삼킬 수 있어서…….”
“그가 그 정도의 힘이 있다고?”
“그것은요, 아가씨, 처음에는 엄청, 엄청 화가 나 있었어요. 지금은 가라앉았지만…….”
“가라앉았다면 괜찮지 않을까?”
키리에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린 시녀가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상냥하게 말했다.
“네가 없는 동안 그와 이야기를 나눴어. 그리고 나는 그가 이유 없이 날뛸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는걸. 지나간 일은 의미가 없다고도 했고.”
안네마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키리에의 품 안에서, 작은 팔로 키리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지금 먹잇감을 고르고 있을 뿐이에요.”
“그것도 냄새로 아는 거야?”
“아니에요.”
때마침 안네마리의 머리를 덮고 있던 이불이 스르르 내려갔다. 안네마리는 물끄러미 키리에를 올려다보았다.
두려울 정도로 고요한 검은 눈은 천천히, 키리에를 떠나 창밖으로 향했다.
“아직 눈이 오고 있어요.”
***
나타니엘은 올드시우다드 공작가 별장의 독채 하나를 통째로 배정받았다.
그는 씻을 필요가 없지만. 굳이 유황 물에 몸을 녹였다.
가운 차림으로 욕탕에서 나오자 하인들이 어느새 식탁에 음식을 차려 놓고 사라진 뒤였다. 먹을 필요는 없으나, 인간을 흉내 내는 것에 익숙한 나타니엘은 작은 사과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는 젖은 발로 창가에 서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의 마지막 말도 눈과 함께 그의 머릿속에 내려앉았다.
사방에 도열한 꺼림칙한 표정의 기사들과, 7대 가문 중 6명의 가주들. 그 중앙에서 금빛 지팡이를 들고 외치던 발라브리가.
‘나타니엘. 고마워! 그대 덕에 나는 이 대륙을 통일할 수 있었어. 하지만…….’
발라브리가의 눈에 어렴성이 떠올랐다.
‘그대는, 그대는 너무 강하고 위험해. 난 아직도 그대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무슨 힘을 지녔는지조차 모르겠어……. 나는 네가 두려워…….’
그는 그렇게 말하며 금빛 술식을 그렸다.
‘그러니까 이건 대의를 위해서야. 이해해 줘.’
손 안에서 과일이 부서졌다.
나타니엘은 물끄러미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즙과 으깨진 과육을 내려다보았다. 손을 털자 과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타니엘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유리로 된 창 너머 지척에 서 있는 금발의 남자를 보았다.
문을 열자 남자가 들어왔고, 나타니엘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젖었던 몸의 물기는 사라지고, 그는 순식간에 짙은 청록색의 예복 차림으로 되돌아갔다.
[빨리 왔구나, 레쇼.]
금발의 남자가 어깨 위의 눈을 털어내고 바로 섰다.
〔오랜만이다, 나타니엘.〕
로르 레쇼.
나타니엘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유일한 전우이자, 호국경(護國卿). 본디 섭정에게 붙이는 칭호였으나 이 나라에서는 수호의 의미로 쓰인다.
[잘 지낸 것 같네.]
540년 만에 만난 레쇼는 잠들기 전의 모습과 다른 점이 없었다. 나타니엘은 즐겁게 웃으며 잔에 와인을 따랐다.
반면 레쇼의 표정은 무거웠다.
〔나타니엘. 뷰캐넌에 묵을 곳을 빌렸으니 거기서 밤을 지내고 함께 셀로 올라가자.〕
[뷰캐넌?]
〔그래.〕
나타니엘이 포도주잔을 들어 올리며 미소지었다.
[우연인가?]
〔우연?〕
[헤르큘라에서 나를 깨워 여기로 인도한 것도 뷰캐넌이거든.]
레쇼의 얼굴이 굳었다.
〔뷰캐넌이 너를 깨웠다고?〕
[그래. 난 또 뷰캐넌이 오레윈브리지를 뛰어넘는 강대한 마법이라도 얻은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더라고.]
나타니엘은 포도주를 한 모금만 마시고 내려놓았다. 도시는 발전했지만, 술맛은 전만 못했다.
나타니엘이 입을 다물자, 레쇼는 초조한 듯했다.
〔셀 아렐라노에서 설명해 주마. 왕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아, 그래. 우리가 씌워준 왕관은 건재하더군.]
〔…….〕
[오레윈브리지는 항상 정에 호소하는 능력이 뛰어났지. 540년 전의 그가 네게 호소하던가? 나를 봉인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레쇼의 붉은 보라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금방 자신을 되찾았다.
〔그렇지 않다. 나는 일이 끝날 때까지 모르고 있었어. 또한, 나 역시 더는 오레윈브리지를 섬기지 않고.〕
[그건 깨어나서 보고 들은 것 중 가장 덜 시시한 이야기네.]
나타니엘이 지팡이를 손목에 걸쳐 빙글빙글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뇌리에 문득 매발톱꽃을 닮은 여자 한 명이 스쳐 지나갔다. 비장하게 입술을 꾹 다물고 자신을 올려다보던 보라색 색채의 여자.
그는 별 의미 없이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목이 가늘었다.
[‘가장’은 아닌가.]
그는 한숨과 함께 거대한 소파에 잠기듯 앉았다.
[따로 가지. 뷰캐넌에 대한 일은 오레윈브리지에게 말하지 마.]
그 말에 레쇼가 미간을 좁혔다.
〔나타니엘.〕
나타니엘이 고개를 들었다.
〔혹시 뷰캐넌이 마음에 들었나?〕
나타니엘은 맑은 수정 같은 눈으로 물끄러미 레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웃음기 없이 빈정댔다.
[이런. 방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그 로르 레쇼가 540년 만에 농담이란 걸 배웠어.]
그 특유의 냉소에 레쇼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540년 만에 만나서 잊고 있었다. 저게 원래 나타니엘이란 걸.
〔실언했다.〕
[그런 허황된 이야기 말고, 좀 더 재밌는 이야기를 하자고. 레쇼.]
〔나타니엘.〕
[그래, 그 건방진 오레윈브리지의 핏줄이 아직도 왕가라 이거지. 재밌는걸. 그 정도는 되어야 복수할 맛이 나겠지.]
〔꼭 그래야만 하겠나?〕
[그건 그 치들이 정해야지. 예전처럼 호락호락 당해 줄 생각은 없으니까.]
나타니엘이 빙긋 웃었다.
[그러니 너는 먼저 가서 알려 주라고.]
그는 나른하게 자세를 흐트러뜨리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품위 있고, 오만하게.
[네가 죽인 전설경이 돌아왔다고.]
엘서스에 머무른 지 얼마 안 있어, 수도의 세자르에게서 연락이 왔다.
「뭘 하고 다니는 거냐, 키리에! 자숙하라고 보냈는데, 네가 아무 남자나 침대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해! 당장 수도로 올라와! 그 놈팡이도 같이!」
***
전국적으로 유례없는 폭설이 내렸다. 그러나 키리에와 나타니엘이 탄 마차 주변에는 항상 훈풍이 불었다.
키리에는 나타니엘이 더는 걸리적거리는 일 없이 수도로 향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뭐가 그의 심경을 변화시켰는지는 묻지 못했다.
불가사의한 마법의 힘으로 둘러싸인 마차는 내려올 때보다 두 배는 빠르게 셀 아렐라노에 다다랐다.
마차 창 너머로 뷰캐넌 백작가의 저택이 보이게 되었을 때, 키리에가 운을 띄웠다.
“당부드릴 이야기가 있어요.”
[해 보렴.]
“제 아버지 세자르 뷰캐넌은 권력욕이 강해요.”
[흠.]
“저는 파혼당했고, 그런 마당에 딸이 데려온 남자가 좋게 보일 리 없다는 걸 미리 알아주세요.”
나타니엘이 기묘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가 입 모양만으로 중얼거렸다.
‘놈팡이.’
키리에는 가볍게 그 단어를 무시했다.
“아버지가 나타니엘 님에게 무례하게 굴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저택에 계시는 동안은요.”
달리 말하면 언제든 나가려면 나가서 모르는 척하자는 의미였다. 나타니엘은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모를 표정이었다.
[네 아비에게 내가 종말이니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네.”
[나야 상관없지만 너는 제법 귀찮아질 텐데?]
“제가 좀 귀찮다고 해서 수도가 날아가진 않으니까요.”
[아. 가족애. 갸륵하기도 하지.]
“갸륵한 김에 부탁도 들어주시겠어요?”
나타니엘이 잔잔하고 냉연한 미소를 지은 채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역시 넌 모질지 못해.]
그는 지나치게 예리하다. 키리에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
세자르 뷰캐넌은 딸과 놀아난 예의 ‘놈팡이’의 얼굴이나 구경하자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둘을 맞이했다.
그러나 마차에서 내리는 나타니엘을 본 그는 걸음을 뚝 멈췄다.
나타니엘은 심장에 무리가 갈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과 지나치게 우아한 자세로 저택을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 세자르에게 다가가 눈인사했다.
[네가 당대 뷰캐넌이구나.]
젊고 아름다운 남자가 머리 희끗한 중년에게 태연히 하대하는 것이, 몹시도 기묘한 광경이었다.
키리에는 어쩔 수 없이 조금 웃고야 말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당황으로 어버버하는 모습을 살아생전에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모자란 아버지의 불찰을 용서하세요.”
“큼! 키리에.”
[용서하지.]
“허…….”
키리에는 깨달았다. 이 남자, 장난칠 때 죽이 너무 잘 맞는다.
“이쪽은 세자르 뷰캐넌, 제 아버지예요. 그리고 아버지, 이 분은 나타니엘 님이세요.”
세자르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근엄하게 자세를 다잡았다.
“흠, 세자르 뷰캐넌이라 하오. 귀공은 어느 가문의 영식이신지?”
“나타니엘 님. 일단 들어가시겠어요? 피곤하실 텐데.”
키리에가 냅뜨듯 끼어들었다. 세자르는 당황했다.
“키리에. 예의가 아니잖니.”
하지만 키리에는 보란 듯이 나타니엘의 팔에 손을 얹었다.
“아버지. 설마 나타니엘 님의 신분을 의심하시나요?”
[저런.]
나타니엘이 열의도 없이 능청을 부렸다. 바라지도 않았던 지원 사격에 키리에가 웃음을 참았다.
‘정말 추임새 하나는 끝내주는군.’
세자르가 드러나지 않게 쩔쩔매기 시작했다. 키리에는 세자르가 더 말을 붙이기 전에 경쾌하게 나타니엘의 팔을 잡아끌었다.
“문 앞에서 너무 긴 이야기를 하는 건 옳지 않죠. 들어오세요, 나타니엘 님.”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진 뒤, 나타니엘이 나른하게 속삭였다.
[너는 누군가를 놀리거나 빈정댈 때 제일 활기가 넘치는구나.]
“어머. 그 장단에 맞춰 주신 분이 하실 말씀인지.”
[놀리는 맛이 있는 종류의 사람을 보았는데 어찌 그냥 넘어가겠어.]
“그렇다니까요.”
둘이 동시에 킥킥 웃었다. 그런 다음 나타니엘은 물 흐르는 듯이 자연스럽게 중얼거렸다.
[그 얼굴이 낫군.]
키리에가 잠시 멈칫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타니엘은 아무 일도 없던 양 미소지었다.
[둄2 절갠 교환재공타싸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