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파혼 (1/33)

1.파혼

“그렇게 되었으니 파혼해 주게.”

3개월 만에 만난 약혼자, 이든 오레윈브리지의 말이었다.

키리에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적당히 수려한 얼굴, 얼룩 없이 환히 빛나는 금발, 자신감 넘치는 녹색 눈동자, 보기 좋게 그은 피부. ‘누가 봐도 나 왕세자요’ 하게 생긴 그는 행복해 보였다. 키리에 없이도.

“설마…… 거절하실 생각인가요?”

키리에가 대꾸 없이 찻잔 손잡이만 만지작거리자, 이든 옆의 여자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며 말했다.

루비니아 캐스너. 사랑스러운 금발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사교계 최고의 미녀.

그녀는 과장된 몸짓으로 이든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저는 뷰캐넌 양이 제 부탁을 들어주실 줄 알았어요……. 저희는 이렇게 서로 사랑하고 있는걸요! 물러나 주실 수는 없는 건가요? 그렇게 저희를 방해하고 싶으신 거예요?”

키리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루비니아는 키리에가 이미 뭐라도 한 것처럼 행동했다.

비단 오늘뿐만이 아니라 근 1년간 계속.

정작 약혼한 두 남녀 사이에 끼어들어 상황을 이 지경까지 몰고 온 것은 루비니아였는데 말이다.

키리에는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지난 1년을 떠올렸다.

지독했다.

루비니아 캐스너는 지독한 여자였고, 이든 오레윈브리지는 그녀보다 더 지독한 남자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정도로 키리에를 무시할 수는 없는 거였다.

엄연히 약혼자인 키리에가 있는데도, 왕세자는 모든 공식 석상에서 루비니아와 동행했다.

‘그럴 거였으면 차라리 나랑 약혼하지나 말든가.’

그는 처음에는 양다리가 부끄러웠는지 ‘루비니아와는 친구’일 뿐이라며 그렇게나 고결한 척을 했다.

그러나 6개월쯤 지나서는 아예 대놓고 다른 귀족의 무도회에서 은밀하게 입맞춤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이든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화가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온 사교계가 루비니아와 키리에를 비교하며 쑥덕댔다. 눈의 여왕이 봄의 요정에게 졌다느니, 아무리 예뻐도 여자는 살가워야 한다느니…….

약혼을 주선했던 국왕은 불같이 화를 냈으나, 결국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저와 루비니아 양의 사랑이 그리 고까우시다면, 저는 오레윈브리지의 성을 내려놓겠습니다!’

말리면 더 불이 붙는다고, 이든의 폭탄선언에 국왕도 도리가 없었다. 왕세자를 잃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 짓을 1년을 하고서야 드디어 파혼을 요청한다고 낯짝을 내민 것이다.

‘내 팔자가 어쩌다 이 꼴이 되었지?’

키리에가 남몰래 한숨 쉬었다.

“미안한 마음이 있기나 한가요, 왕세자 저하?”

“물론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네!”

냉랭한 키리에의 말에 이든이 ‘정말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보는 키리에의 속이 뒤틀렸다.

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먼저 사과를 요청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 되었으니 파혼해 주게.”라고?

키리에는 일부러 손에서 찻잔을 놓지 않았다. 뭔가를 쥐고 있지 않으면 당장 주먹이 날아갈 것 같았다.

“할 말은 그게 끝입니까?”

냉정한 키리에의 말에 이든이 수치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미안하게 되었어. 그렇다고 왕실이 뷰캐넌 가와 척을 지고 싶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게.”

키리에가 웃었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1년 동안 모욕해 놓고서 뷰캐넌 가의 힘은 빌리고 싶은가 보지.

백작가라고는 하나, 뷰캐넌은 시조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의 건국도 함께한 개국 공신 가문이다.

특히 지방 귀족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뷰캐넌 백작가는 설령 왕실이래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파혼은 하고 싶지만, 정치적 대립은 피하고 싶다는 거지. 알량하기 짝이 없어.’

키리에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파혼 요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정말인가? 고맙네!”

“다만 제가 받은 정신적 피해에 대해서는 충분한 보상이 있기를 바랍니다.”

냉연한 말에도 이든은 그저 신이 나는 듯했다.

“얼마든지! 키리에 양, 그대가 내 사랑을 이해해 주어서 무척 기쁘네.”

그는 그러고도 한참을 더 루비니아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인인지 떠들다가 떠나갔다.

키리에는 미간을 짓누르는 편두통에 인상을 쓰며 스툴 위로 늘어졌다.

객이 나가고 나서야 시녀인 안네마리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그래.”

“안네마리가 나쁜 사람에게 눈곱이 많이 끼는 주술을 걸까요?”

진심이 섞인 듯한 안네마리의 말에 키리에가 웃었다.

“괜찮아. 그보다 라벤더를 좀 끓여 줄래? 편두통이 도지네.”

“그럴게요. 안네마리는 차 끓이는 건 자신 있어요!”

안네마리는 작은 손으로 부랴부랴 찻잎을 가져오고 물을 데우기 시작했다. 잘그락거리는 안락한 소리에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드디어 끝났다. 이제 저 지긋지긋한 루비니아와도 안녕이었다.

“그렇게 서로 죽고 못 살 거였으면서, 그깟 위자료 내기 싫어서 파혼을 미루다니…….”

키리에의 중얼거림에 안네마리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이젠 다 끝났으니까 편히 쉬세요. 사람들도 캐스너 님 안 보게 되어서 좋다고 그랬어요!”

“사용인들이? 왜?”

찻잔을 받아들며 키리에가 물었다. 눈치 빠르게 단 쿠키를 내오던 안네마리가 투덜거렸다.

“왕세자 저하가 저택에 들르실 때마다 캐스너 님이 같이 오셨잖아요. 그때마다 캐스너 님이 엄청 얄미웠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야. 그랬어?”

“네! 왕세자 저하가 아가씨가 애교가 없다고 하면, 캐스너 님이 웃으면서 ‘주변에 남자가 없을 테니 어쩔 수 없겠죠.’ 같은 말을 했어요! 그래서 안네마리도 사람들도 캐스너 님을 싫어했어요!”

“역시 찻잔이라도 던져 줄 걸 그랬네.”

다시 편두통이 심해졌다. 키리에는 연보랏빛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루비니아 캐스너 자작 영애가 얼굴만큼 마음도 예쁘지 않다는 걸 키리에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마음이 예뻤으면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만나진 않았겠지.’

루비니아의 눈빛은 절대 아무것도 모르고 사랑에 빠졌을 뿐인 여자의 눈빛은 아니었다.

가장 최근, 셋은 건국 무도회에서 마주쳤다.

루비니아는 이든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입장했고, 별수 없이 키리에는 아버지와 입장했다.

본인이 남의 약혼자와 입장한 탓에 키리에가 아버지에게 에스코트 받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루비니아는 굳이 키리에 앞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과장되게 주변을 살폈다.

‘뷰캐넌 양. 에스코트가 보이지 않네요. 어느 분과 입장하셨어요?’

‘아버지가 에스코트해 주셨어요.’

‘아…….’

그때 루비니아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조소를 키리에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죄송해요, 뷰캐넌 양. 왕세자 저하께서 저와 입장하고 싶다고 하셔서,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옆에 있던 라우라가 보다 못해 한마디 할 정도로 얄미운 말이었다.

‘캐스너 양, 키리에 양은 저희와 환담 중이니 물러나겠어요?’

‘어머…… 포트듀케인 양. 저도 낄 수 없을까요?’

‘사람을 좀 가려서요.’

냉랭한 라우라의 말에 루비니아의 얼굴이 싸늘해졌다가, 빠르게 미소로 되돌아왔다.

‘그래요. 왕세자 저하께서 정원에서 부르셨으니 슬슬 가 볼 때도 되었네요.’

꼭 그렇게 한마디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였다.

루비니아가 사라진 뒤, 이제는 익숙해져서 화도 나지 않는 키리에 대신 라우라가 분통을 터뜨렸다.

‘저거 정말 미친 게 분명해. 남의 약혼자를 가로채 놓고서 저따위로 행동해?’

‘나도 이제는 캐스너 양을 이해 못 하겠어.’

웬만해서는 남을 험담하지 않는 마리아까지 조금 분한 얼굴로 거들었다.

자기 일처럼 화내는 두 친구 덕에 키리에는 웃을 수 있었다.

‘얘들아, 사람들이 들어.’

‘들으라고 해!’

라우라가 박력 넘치게 대답했다. 듣는다고 해도 포트듀케인 후작 영애인 라우라와, 올드시우다드 공작 영애인 마리아 앞에서 그녀들을 나무랄 사람은 없을 터였다.

둘을 떠올린 키리에는 사슴처럼 쭉 뻗었던 목을 수그렸다.

“분명 오늘 파혼했다는 거 들으면 라우라는 신나서 춤이라도 출 거야. 마리아는 어떠려나?”

“편지지를 준비할까요?”

눈치 빠른 안네마리가 벌써 잉크와 펜을 꺼냈고, 키리에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파혼한 김에 놀러 가야겠어. 이럴 때일수록 더 잘 지내는 걸 보여 줘야지.”

그러나 곧 쾅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키리에! 키리에 뷰캐넌! 너 이리 와!”

키리에의 아버지, 세자르 뷰캐넌 백작이었다.

키리에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

짝!

키리에가 인사를 채 끝내기도 전에 세자르의 손이 키리에의 뺨을 내려쳤다.

‘이럴 줄 알았어.’

잘못 맞았는지 입가가 터졌다. 비릿한 피를 손으로 닦아내며 키리에가 빈정대듯 말했다.

“어쩜. 위자료 이야기가 잘 안 풀렸나 봐요?”

짝!

다른 쪽 뺨이었다.

뒤에서 안네마리가 ‘히익’ 소리를 내며 와들와들 떠는 것이 보였다. 키리에는 괜찮다고 손을 들어 보이며, 세자르를 올려다보았다.

“뺨은 두 개라 끝인데, 이제 또 어딜 내어드려야 할까요?”

“너, 왕세자 저하 앞에서도 그딴 태도였던 거냐?”

“그럴 리가요. 적어도 왕세자 저하는 제 뺨을 때리진 않았는데요.”

세자르가 한 번 더 손을 들었으나, 이내 고함을 내지르곤 주먹을 쥐는 것으로 그쳤다.

“너! 내가 똑바로 행동하라고 했지! 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파혼을 하느냔 말이야!”

“파혼을 요청한 건 왕세자 저하지 제가 아니에요, 아버지.”

“네가 캐스너 영애만큼 살갑고 애교 있게 행동했으면 왕세자가 파혼을 요청할 일도 없었을 거 아니냐!”

키리에가 코웃음 쳤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게 어떻게 잡은 기회인 줄 아느냐! 왕후가 될 기회를 네가 없애버린 거다!”

“그럼 아버지가 왕세자랑 결혼하시지 그러셨어요.”

짝!

키리에는 너무 강한 힘에 바닥에 주저앉았다. 주마등처럼 그간의 일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키리에, 귀족은 언제나 의연해야 한다. 그리고 가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해. 그 마음가짐이야말로 귀족의 본질이지.’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뭔가요?’

‘왕세자와 약혼해라. 이건 가주의 명령이고, 네게 거부권은 없다.’

세자르에게는 가문이 전부였고, 세자르의 교육을 받고 자란 키리에 역시 책임감이 강했다. 그래서 말 한번 안 나눠 본 왕세자와의 약혼도 받아들였다.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손가락질도 버텼다.

하지만 제멋대로인 약혼이 제멋대로인 파혼으로 끝나자, 마침내 키리에의 인내에도 한계가 찾아왔다.

‘언제까지? 난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 거야?’

그녀는 보랏빛 불길 같은 눈으로 세자르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1년을 참아드렸잖아요. 약혼자나 뺏기는 석녀 취급받으면서도, 아버지가 절대 파혼은 안 된다고 못 박아서 1년을 참았어요!”

“그러게 뺏기길 왜 뺏겨!”

“하! 그러는 아버지는요? 그렇게 잘나셔서 어머니께 이혼당하셨어요?”

키리에의 말에 세자르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 배은망덕한 계집애!”

“안 돼요, 주인님!”

세자르가 발을 들어 올리던 찰나, 기겁한 안네마리가 달려들어 키리에를 감쌌다.

“안 돼요, 주인님! 우리 아가씨 또 상처 나면 안 돼요! 저번 상처도 아직 안 나았단 말이에요! 주인님!”

“이건 또 뭐야!”

“안네마리, 끼어들지 마!”

“안 돼요! 안네마리는 아가씨가 다치는 건 이제 싫어요! 아가씨 잘못이 아니란 말이에요!”

“안네마리!”

키리에가 어떻게든 안네마리를 뿌리치려고 힘을 주었으나 늦었다. 세자르가 강하게 안네마리의 등을 걷어찼다.

“감히 시녀 따위가!”

“아버지!”

바닥에 엎어진 안네마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세자르가 씩씩거리며 차탁을 엎었다.

“넌 근신이다, 키리에 뷰캐넌! 내가 허락할 때까지 엘서스의 별장에서 자숙해!”

“아버지!”

“배은망덕한 건 어미를 닮아 똑같군! 네가 누구 돈으로 먹고사는지 근신하면서 잘 생각해 봐라!”

세자르는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남겨진 키리에는 떨리는 손으로 안네마리의 어깨를 감쌌다.

실망도 슬픔도 없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이건 말도 안 돼! 전부 그 자식 잘못인데 어째서 키리에 네가 자숙해야 해?!」

분노로 휘갈겨 쓴 라우라의 글씨에 키리에가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도착해서 답장해야겠어.’

가주인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키리에는 별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뷰캐넌 백작가의 별장은 여느 귀족들의 별장이 그렇듯 대륙 남부에 있는 바닷가에 있었다.

어차피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참이라, 키리에는 내리는 눈을 무시하고 여로에 올랐다.

‘겨울 바다도 나쁘지 않지.’

수도 셀 아렐라노는 화려하지만 안락하지는 않았다. 모든 무도회에서 사람들이 키리에와 루비니아를 일일이 비교했으니까.

‘혼자 백로인 양 굴더니, 남자 하나 어쩌지 못하는 걸 보면 뷰캐넌 양도 생각보단 별 볼 일 없나 봐요?’

‘그러게요. 일만 잘하면 뭐하겠어요? 사랑에는 실패했는데…….’

‘왕세자 저하께서 캐스너 양을 선택하신 것도 이해가 가죠!’

그들은 단 한 번도 가십을 만든 적 없는 키리에가 추문에 휩싸이는 게 즐거운 것 같았다. 이든과의 약혼이 파기되었으니 지금은 더할 것이다.

라우라와 마리아가 옆에 있으면 그나마 낫지만, 언제까지고 둘과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차라리 잘됐어. 조금 잠잠해지면 돌아오자. 그사이에 둘이 얼른 결혼이라도 해 주면 좋을 텐데.’

사실, 키리에도 처음엔 자신보다 루비니아 캐스너가 이든과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재기 발랄하고 귀여운 루비니아는 키리에가 봐도 사랑스러웠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 키리에는 루비니아에게서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다.

이든이 “오레윈브리지의 이름을 내려놓겠다.”고 말했을 때였다. 그때 루비니아는 순간적으로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서 이든을 노려보았다.

아주 잠깐 드러났던 노골적인 감정은 순식간에 원래의 선량한 낯으로 갈음됐지만, 키리에는 더는 루비니아를 좋게 볼 수 없었다. 잘못하면 귀찮아지겠다는 생각으로 루비니아에 대해 물러나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어차피 키리에가 얌전히 약혼 명령을 따른 이유는 단 두 가지뿐이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귀족답게 의연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

그리고 가문을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 한다는 비틀린 책임감.

약혼이 깨지면서, 아이러니하게도 키리에는 그 두 가지로부터 자유를 얻은 기분이었다.

‘이젠 다 끝났으니 됐어.’

키리에가 멍하니 내리는 눈을 바라보던 중, 마차가 멈췄다.

똑똑, 마차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지?”

키리에가 턱짓하자 문 가까이 앉아 있던 안네마리가 문을 열었다.

밖에 있는 것은 발디르였다. 그는 뷰캐넌 백작가의 기사로, 키리에를 호위하기 위해 동행했다.

“아가씨.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야, 발디르 경?”

“폭설 탓에 더는 전진하기 어렵습니다. 쉴 곳을 찾는 것이 좋겠습니다.”

발디르의 뒤에서는 안내인이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눈은 바깥에 서 있는 발디르와 마부의 종아리까지 쌓여 있었다.

안네마리가 덮어 주는 숄을 두르며 키리에가 한숨지었다.

“그러게 저번 마을에서 쉬는 게 좋았을 텐데.”

키리에는 감이 좋았다.

느낌이 좋지 않아 이전 마을에서 며칠 묵으려 했는데, 안내인이 아직 폭설이 내릴 때는 아니라며 ‘전문가’를 들먹이기에 어디 뜻대로 해 보라 두었다.

그게 이런 식으로 돌아왔다. 확실히 폭설이 내릴 시기는 아니었지만, 이미 마차는 고립됐다.

발디르가 못마땅한 눈으로 안내인을 돌아보았고, 키리에는 문 근처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지도 줘 봐. 대책을 강구해 보자.”

“예. 아가씨.”

벌써부터 추위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가장 가까운 곳은 버몬트 령(領) 엔비니크 시인데, 거기까지 갈 수 있을까?”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엔비니크 시까지 가려면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말들이 많이 지쳤습니다.”

“원래 마을로 되돌아가는 건?”

“이미 너무 많이 온 데다 내리막길이 얼어 사고의 위험이 있습니다.”

“큰일이네.”

키리에가 이마를 짚었다.

마차 안은 방한 마법이 걸려 있지만, 기사에 종자에 모든 인원이 들어갈 수는 없다.

잠깐 마차를 세운 사이 눈발은 더 거세지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을 지체했다간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올 게 분명했다.

그때 죄지은 표정으로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안내인이 두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들었다.

“제, 제가 하나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의 불안한 몸짓을 내내 주의하고 있던 키리에가 눈을 날카롭게 떴다.

“해 봐. 시간 낭비 싫으니까 빠르게.”

“이 근처에…… 작은 산마을이 있습니다!”

안내인이 급박하게 외쳤다.

“산마을?”

키리에가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지도에는 딱히 표기된 게 없다.

안내인은 추위로 빨갛게 곱아들기 시작한 손을 내저었다.

“그, 지도에는 없지만 헤르큘라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아가씨의 눈에 차지는 않겠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여관도 있습니다!”

“그럭저럭 괜찮은 여관이 있을 정도의 마을이 지도에 안 나와 있다고?”

“설마 이상한 수작을 부릴 생각이냐?”

당장 발디르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를 본 안내인이 번개같이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절대 아닙니다! 절대! 그냥 저는 이대로 가다간 정말 다 죽을 것 같아서……! 원래는 외부인을 들이지 않는 곳이지만, 사정이 이렇게 됐으니…….”

“외부인을 들이지 않는다고?”

“그런 정체 모를 곳에 아가씨를 데리고 갈 셈이냐!”

“폐쇄적인 마을이라 그럴 뿐, 절대 위험한 곳은 아닙니다! 이 모가지를 걸고 약속합니다!”

말하는 동안에도 눈코입에 눈이 들이쳐 그는 몇 번이나 쿨럭거렸다.

“저는…… 저는 정말 죽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뿐입니다, 살려 주십시오!”

바닥을 짚은 채 덜덜 떨리고 있는 손은 이미 꽁꽁 얼어 키리에가 봐도 위험한 수준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위험할 것 같은데, 우릴 버리고 혼자 도망치기엔 나중이 두려운 거군.’

발디르는 사생결단을 내려는 것처럼 나섰지만, 키리에가 막아섰다.

“좋아. 거기로 가자.”

“아가씨!”

키리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 있어 봤자 다 같이 동사야. 뭐라도 해 보는 게 나아.”

무엇보다 키리에는 사람 보는 눈이 좋았다. 적어도 안내인이 나쁜 마음을 먹은 것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게다가, 궁금하기도 했다. ‘외부인 출입 금지’에 지도에도 없는 마을이라니.

마차 문을 닫고 다시 자리에 앉은 키리에가 씩 웃었다.

“기대되지, 안네마리?”

안네마리는 키리에의 숄에 묻은 눈을 털어내며 해맑게 웃었다.

“안네마리도 기대돼요! 안네마리는 아가씨가 좋으시면 다 좋아요!”

“고마워.”

***

키리에는 일단 한 번 놀랐다. 마을의 입구가 마법으로 숨겨져 있었다.

안내인이 눈 쌓인 길 가장자리에 서 있던 돌로 된 여신상을 어루만지자, 갑자기 숲이 흐릿해지더니 다리가 나타났다.

“마을 하나를 통째로 숨길 정도의 마법이라고?”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키리에는 그렇게 들어선 마을이 생각했던 것보다 발달 수준이 높아서 한 번 더 놀랐다.

“어떻게……?”

창문 밖으로 보이는 도시는 아름답고 정갈했다.

그러나 키리에는 묘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마을 전체가 고요했지만, 그 고요에는 어딘지 사람이 위축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밖을 지나다니던 몇 사람은 마차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고, 경계, 혹은 적의 비슷한 반응마저 보였다.

키리에는 그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여관에 도착했다. 3층짜리의 고급스러운 여관이었다.

안내인이 먼저 들어갔고, 여관 주인은 뒤따라 들어오는 키리에와 일행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자네……!”

“미안하네. 내가 실수를 해 버려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눈이 그칠 때까지만 조용히 묵고 가면 모를 거야…….”

키리에는 가만히 여관 1층의 로비를 둘러보았다.

벽에는 아이의 서툰 그림이 가득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이라곤 벽난로 불을 쬐고 있는 늙은 여인 한 명밖에 없었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된 기분이네.”

키리에의 말에 안내인이 화들짝 놀라 손바닥을 비볐다.

“아이구, 전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워낙 외지인이 적은 마을이라…… 허허.”

“뭐가 됐든 방으로 안내해 줘. 다들 지쳤으니 쉬어야 해.”

“아무렴요! 앤더슨, 자네, 얼른!”

앤더슨이라 불린 여관 주인은 깊은 눈으로 안내인을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이겠지만, 귀족 나리, 경거망동하지는 않으시는 게 좋을 겝니다.”

“앤더슨!”

안내인은 화들짝 놀라 키리에의 눈치를 보았으나, 키리에는 여유롭게 미소지었다.

“그건 무슨 경고지?”

“…….”

2층으로 올라가려던 여관 주인은 계단참에 발을 걸친 채 멈춰 섰다.

1층의 천장고가 낮아서 그의 얼굴은 절반밖에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키리에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여기저기 들쑤시며 소란 피우지 말란 뜻입니다. 그래 봤자 위험해지는 건 당신일 테니까.”

“무슨……?”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대화라고 할 수도 없는 통보에 발디르가 근엄하게 칼을 뽑았지만, 키리에가 말렸다. 뭐가 됐든 여관이고, 눈이 그칠 때까지 조용히 머물다 가면 그만이다. 괜히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다.

게다가 키리에는 안내인과 여관 주인의 말에 밴 희미한 두려움을 읽어냈다.

‘대체 뭘 무서워하는 거지?’

키리에는 한숨과 함께 기사들과 시종들을 쉬게 했다. 어서 눈이 그쳤으면 좋겠다.

가장 좋은 방에 들어가 투박한 나무 의자에 앉자, 잊고 있던 피로가 몰려오는 듯했다.

“안네마리. 차를 끓여 줄래?”

키리에가 다시 도지기 시작한 편두통에 이마를 누르며 말했다. 그러나 안네마리의 대답이 없었다.

“안네마리?”

돌아본 곳에서, 키리에는 딱딱하게 굳은 안네마리를 보았다.

“아가씨…….”

겁먹은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면 마을 안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안네마리가 급속도로 긴장한 것도 같았다.

“안네마리. 무슨 일이야?”

“아가씨, 안네마리는…… 무서워요.”

안네마리가 큰 눈을 좌우로 굴리며 속삭였다. 쾌활하고 명랑하던 평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근처에, 무서운…… 아주 큰 게 있어요. 아가씨. 안네마리는 무서워요, 아가씨…….”

“네가 무슨 말 하는 건지 모르겠어, 안느. 무섭다니? 뭐가?”

“무서운 게 잠들어 있어요, 아가씨, 아가씨는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해요. 안네마리는 알 수 있어요……!”

키리에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 ‘냄새’를 맡은 거야, 안느?”

안네마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네마리는 보통 사람보다 육감이 좋아, 온갖 마법과 관련된 일이나 위험한 일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안네마리를 데리고 있던 남자는 안네마리가 인간이 아닌 것의 혈통이고, 그 피가 강하게 남아 그런 것이라 말했다.

그 말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안네마리가 “나쁜 냄새가 나요, 아가씨.” 하면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나곤 했다.

키리에의 얼굴이 굳었다.

“아주 위험한 거야? 바로 나가는 게 좋을까?”

“그렇진 않아요, 자고 있어요. 자고 있으면 몰라요. 하지만 눈이 덮여서, 세상이 조용해지면…… 소리가 더 잘 들리니까 조심해야 해요.”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안네마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곧 어깨를 늘어뜨렸다.

“……차를 끓여 올게요, 아가씨! 절대 방 밖으로 나오시면 안 돼요! 안네마리가 아가씨를 지킬 거예요!”

“안네마리?”

키리에가 붙잡기도 전에 안네마리는 쏜살같이 방에서 나가 버렸다. 순식간에 방에는 키리에만 남았다. 눈 탓인지 주변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키리에는 창밖으로 펑펑 쏟아지는 눈을 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뭐가 있다는 거야……?”

여관 주인의 의미심장한 말 탓인지 불길함이 차올랐다.

그녀는 내리는 함박눈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한밤중에도 눈은 그치지 않았다. 여관 주인 앤더슨은 이틀 정도는 계속 눈이 내릴 것이라 말했다.

“이틀이라…… 너무 오래 걸리는데.”

어차피 기다리는 사람도 없으니 상관없지만, 잠자리도 불편하고 사람들의 눈은 더 불편했다.

키리에는 온종일 창문을 통해 마을을 관찰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뭐에 홀린 듯이 조용조용했다. 좋게 말하면 과묵이지만, 그렇다기보다 눈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대체 뭘?’

자러 가기 전, 안네마리는 드물게 날카로운 얼굴로 키리에에게 당부하기까지 했다.

‘아가씨. 안네마리가 아가씨 방을 지킬 거예요. 아가씨 방은 냄새를 못 맡게 할 건데, 아가씨가 방 밖으로 나오시면 냄새가 흩어져요! 그러니까 절대, 절대 나오시면 안 돼요!’

키리에는 안네마리가 알 수 없는 능력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처럼 그걸 대놓고 드러낸 적은 처음이었다.

‘안네마리, 그렇게 위험한 거라면 너도 같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안네마리는 밖에 있어야 해요! 왜냐면, 냄새를 못 맡으려면, 냄새가 나는 곳에 있어야 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안네마리…… 그건 마법이니?’

안네마리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안네마리는 아가씨를 지킬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서 안네마리는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자못 비장한 표정이라, 키리에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

사방에서 겁을 주어서인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키리에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숄을 두른 채 멍하니 서서 눈을 바라보고 있던 키리에는, 문득 이상한 점 하나를 깨달았다.

저 멀리, 마을 끝에 사람이 있었다.

‘……뭐지? 환각인가? 아니면 실루엣이 사람처럼 보이는 것뿐인가?’

키리에가 눈을 가늘게 뜨며 창문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주변이 어두운 탓에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확실히 사람이었고, 키가 큰 남자였다.

그건 아주 기묘한 광경이었다.

왜냐하면, 분명 밤인데도 남자 근처에만 희미한 푸른 빛이 맴돌고 있었다. 더해서 폭설이 내리는 오밤중에, 그는 털 외투나 모피도 아닌 가벼운 예복만을 입고 있었다.

키리에는 부지불식간에 깨달았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것이 바로 저 남자다.

“…….”

아주 멀리 있는데도, 키리에는 숨마저 조심스럽게 쉬게 되는 기묘한 압박감을 느꼈다.

내 쪽을 바라보지 않는 맹수를 관찰하는 초식 동물이 된 것만 같았다. 눈을 돌리고 싶어도, 눈을 돌린 사이에 자신을 알아보고 달려들 것만 같아 그러지도 못했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맹수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뿐.

어느새 쥔 주먹 안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런 키리에의 속도 모르고, 남자는 폭설 속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여유로운 태도로 산책하듯 주변을 거닐었다. 긴 지팡이까지 든 채 하늘을 감상하는 것도 같았다.

그때 남자의 고개가 스르르 움직였고-.

‘흡.’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분명 방이 어두워 보이지 않을 텐데, 남자의 시선이 정확히 이쪽을 향해 있었다.

푸른색. 그 베일 듯 차가운 푸른 시선. 분명 눈동자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먼 거리인데도, 영혼까지 꿰뚫는 듯한 시선이 마치 잡힐 듯 선명했다.

키리에의 머리가 진공 상태가 되었다. 왜인지 당장 도망치고 싶었지만, 등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남자는 한참을 그렇게 서서 키리에가 있는 방향을 응시했다.

그리고, 몇 분 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른하고 여유롭게 어디론가 걸어가 버렸다.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키리에는 늦은 숨을 몰아쉬었다.

“흐, 아…….”

그녀는 창틀을 붙잡고 무너졌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아주 거대한 맹수를 우리도 보호 장비도 없이 눈앞에서 마주한 기분이었다.

“뭐지……? 대체, 무슨…….”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다시 한번 놀랐다. 고작 몇 분 보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새벽 동이 트고 있었다.

***

“안네마리.”

아침 식사가 끝난 뒤 키리에가 조용히 안네마리를 방으로 불렀다. 안네마리가 쪼르르 다가와 방긋 웃었다.

“차를 끓여 드릴까요, 아가씨?”

“아니야. 그보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잠깐 앉아 볼래?”

안네마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닥에 앉았다. 의자에 앉으라고 몇 번을 말해 봤지만 늘 바닥에 앉겠다고 고집을 부렸기에, 키리에도 그 점에 대해서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어제 말했던 거 말이야.”

“어제요?”

“네가 무섭다고 했던 것.”

그녀는 귀를 달싹달싹 움직이며 사방으로 눈을 굴렸다.

“안네마리는 그것에 대해 말하기 싫어요, 아가씨.”

“……내가 어제 그걸 본 것 같아서.”

안네마리의 얼굴이 굳었다.

“그걸 보셨다고요?”

“응. 그런 것 같아. 적어도 ‘사람’이란 느낌은 아니었거든.”

안네마리가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키리에로서는 착잡할 따름이었다. 대체 ‘그게’ ‘뭐길래’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혹시 ‘그게’ 아가씨에게 말을 걸었나요?”

“그렇진 않아. 그냥 눈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아가씨가 창문을 열어 주셨나요?”

“네가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해서 그러지 않았어.”

열고 싶은 생각도 안 들었고.

“그, 그럼 혹시 아가씨가 큰 소리를 냈나요?”

“가만히 있었어. 정말 보기만 했을 뿐이야.”

다소 취조 같은 질문에도 키리에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안네마리에게 나쁜 뜻이 없고,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안네마리는 키리에의 대답을 들은 뒤 입을 크게 벌리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괜찮을 거예요! 절대 아가씨는 밖으로 나가시면 안 돼요!”

“그게 대체 뭐길래 그러는 거야?”

“안네마리도 몰라요! 하지만 아주 무서워요……. 안네마리는 저런 건 처음 봤어요…….”

안네마리가 너무 겁을 집어먹은 탓에 대화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안네마리는 곧 일해야 한다며 가 버렸고, 나가기 전에도 한 번 더 당부했다.

“절대, 절대 나오시면 안 돼요!”

덕분에 키리에는 지루해졌다. 창밖에 구경거리라도 많으면 좋을 텐데 이 마을은 아주 볼 게 없었다.

키리에는 하는 것도 없이 방 안에서 딱 한 권 챙겨온 책을 읽고, 라우라의 편지에 답장했다.

그러고도 시간은 고작 점심이었다. 때마침 안내인이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면 키리에는 지루함에 목 졸려 죽었을지도 모른다.

“들어와!”

키리에의 반가운 인사에 안내인은 코가 무릎에 닿도록 허리를 굽혔다.

“아가씨! 용서를 빌러 왔습니다……. 아무래도 눈 때문에 당장 출발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럴 것 같았어.”

“답답하시겠지만 하루 이틀만 참아 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안 참으면 달리 해결책은 있고?”

키리에의 말에 안내인의 얼굴이 죽을상이 되었다. 그녀는 눈을 흘기는 척했다.

“잘못한 줄 알면, 벌을 받아야지.”

“아, 아가씨……! 저는 정말 가진 것도 없고, 그게, 이 계절엔 원래 눈이 이렇게 오지 않는단 말입니다! 저는 정말 아가씨를 위험에 빠뜨리려는 생각은……!”

“돈으로 배상하라고는 하지 않을게. 대신 궁금증을 좀 채워 줘야겠어.”

안내인은 키리에가 뭘 묻고 싶은 건지 바로 눈치챘는지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아가씨, 저는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뭘 물어볼 줄 알고?”

안내인은 어쩔 줄 모르고 울상을 지었다. 그래도 키리에는 그가 그렇게 강단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정말 안 되는 걸 안 하는 양심 있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키리에를 이 마을에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바른대로 대답해. 대체 이 마을은 무엇을 위해 있는 거고, 대체 왜들 그렇게 몸을 사리는 거야?”

“아가씨…….”

“아는 걸 말하지 않으면 아버지께 말해서 벌을 주겠어. 명색이 안내인이란 사람이 백작 영애를 눈 속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들다니, 말도 안 되는 거 알지?”

“아가씨! 저는 아가씨를 위해 말하지 않는 겁니다요!”

“언제 봤다고 날 위해서야? 우리가 그렇게 친했나?”

“그, 그런 건 아니지만……!”

“난 이런 미심쩍은 곳에 있기 싫어. 적어도 이곳에서 그렇게 두려워하는 게 뭔지는 알아야 여차할 때 도망이라도 칠 거 아닌가?”

안내인은 오랫동안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는 역시나 키리에의 시선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모자를 쥔 손을 덜덜 떨며, 누가 엿듣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사실은, 저희도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모릅니다…….”

안내인의 눈이 공포로 번들거렸다. 목소리는 더 작아졌다.

“다만 저희는…… ‘그것’을 종말이라고 부릅니다.”

***

까무룩 잠들었다가 일어나니 어느새 밤이었다. 그것도 한밤중.

“세상에. 나 대체 얼마나 잔 거야?”

키리에는 테이블에 엎어져 있다가, 아으으 소리를 내며 상체를 들었다. 목이며 어깨가 찌뿌둥했다.

언제 잠들었나 되새겨 보니, 낮에 안내인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였던 것 같다.

‘종말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웃음이 나왔다. 괜히 지레 겁먹었다 싶었다.

건국 신화에 그런 이야기가 있기야 하다.

540년 전, 땅 위에는 종말이 가득해 사람이 살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때 대마법사인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가 나타났다. 일검으로 바다를 갈랐다고 전해지는 불로불사의 두 초월자와 함께.

발라브리가는 긴 전쟁 끝에 종말을 무찔렀고, 트레베레움을 건국해 스스로 왕가의 시조가 되었다. 그리고 건국을 도운 두 명에게 각각 전설경(傳說卿)과 호국경(護國卿)의 지위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전설경은 이후 갑작스럽게 죽었다고 전해지지만, 호국경은 당연하게도 아직 살아 있다. 그리고 종말이 정말로 뭘 의미하냐는 역사가들의 질문에 침묵으로 답했다.

그 침묵을 역사가들은 역병, 기근, 정치적 반대파를 종말에 비유했다고 해석했고, 호국경은 그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런데 인제 와서 종말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키리에는 상념을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저나 안네마리는 왜 나를 안 깨운 거지?”

그녀는 어깨를 돌리며 일어나 자연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나 문득 머리를 스친 생각에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나가도 되나?’

밤이었고, 안네마리가 그녀를 깨우러 오지 않았다……. 아니, 안네마리뿐만 아니라 발디르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묘하게 찝찝했다. 왠지 열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키리에는 기묘한 불안감을 느끼며 창가로 다가갔다. 밖과 연결된 유일한 부분이었다.

“……!”

키리에는 창밖을 보자마자 눈을 홉떴다.

그가 그곳에 있었다.

그.

그것.

그것은 어제보다 더 가까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명백히 여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키리에의 몸이 싸늘하게 식기 시작했다.

‘눈이 마주쳤던 게 착각이 아니었어.’

놀랄 일이 하나 더 있었다. 거의 비처럼 몰아치는 눈 사이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안네마리였다.

“……지 말아요!”

그녀는 양팔을 뻗어 여관 문을 가로막은 채 무어라고 외치는 듯했으나, 눈보라 탓에 잘 들리지 않았다.

“……돼요! ……씨는, 안네…… 거예요!”

다가오던 남자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지팡이를 들었다. 그 순간, 안네마리가 무언가에 맞은 것처럼 펑 하고 날아가 여관 문에 부딪혔다.

“안네마리!”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안네마리의 이름을 외치며 창문을 열었다.

“안 돼요, 아가씨!”

안네마리의 비명이 있었지만 이미 늦었다.

아마도 그는 그걸 기다렸던 것 같다. 기다렸다는 듯이 방 안으로 눈보라가 들이닥쳤다.

“읏……!”

온몸을 난도질하는 것 같은 추위와 서 있기도 힘들 만큼 몰아치는 눈 탓에 키리에는 얼굴을 가리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달각 소리와 함께 창문이 닫히고, 눈보라가 끊겼다.

키리에는 느리게 팔을 내렸다. 찬 공기 탓에, 숨이 폐까지 내려와 다시 빠져나가는 감각이 속속들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숨쉬기가 어려웠다. 어젯밤 느꼈던 바로 그 감각이었다.

“…….”

그녀는 뻣뻣한 목을 천천히 돌렸다.

그곳에 한 남자가 있었다. 밤하늘 같은 검은 머리에, 시리도록 푸른 별 같은 눈동자.

겨울의 왕 같은 아름다운 남자가, 키리에를 향해 권태롭고 오만하게 미소 지었다.

[안녕.]

발끝이 오므라들 정도로 깊고 은근한 목소리였다. 키리에의 입술이 말라붙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그런 키리에를 보며, 남자가 다시 속삭였다.

[안녕.]

키리에는 두 인사의 미세한 차이를 바로 알아챘다. 처음의 인사보다 뒤의 인사가 음조가 낮았다.

‘대답해야 해.’

직감이었다.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해선 안 된다. 들이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들여버린 이상.

“안녕하세요.”

최대한 태연하게 말하려고 했으나 말끄트머리가 조금 떨렸다.

키리에의 인사에 남자는 기분이 좋은 것처럼 눈꺼풀을 반쯤 접어 미소지었다. 지독히도 아름답고, 또 지독히도 차가운 미소였다.

[귀족이니?]

“뷰캐넌 백작가의 키리에라고 합니다.”

그녀가 드레스를 우아하게 들어 올리며 답했다.

남자는 인사받는 것이 익숙해 보였다. 성의는 없지만 우아함은 있는 가벼운 손짓은 분명 귀족의 예법이었다.

[뷰캐넌 ‘백작가’?]

“네.”

[내가 알기로 뷰캐넌은 공작가였을 텐데.]

키리에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남자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시조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 대에 백작가로 격하되었어요.”

[흥미롭군.]

남자가 손가락 끝으로 지팡이 손잡이를 톡톡 두드렸다. 나른한 몸짓이었으나, 키리에는 그 나른함이 미친 듯이 신경 쓰였다.

그러나 키리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최대한 태연한 척 서 있는 것뿐이었다. 남자는 그런 키리에를 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이곤, 바닥에 세우고 있던 지팡이를 수평으로 무릎 위에 올렸다.

[앉지. 올려다보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

키리에는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남자가 쿡쿡 웃었다.

[그 숲 짐승이 하도 꼭꼭 숨겨 놓기에 궁금해지더란 말이야.]

키리에의 얼굴이 굳었다.

‘안네마리를 말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안네마리는 어떻게 되었지?’

그녀는 당장 안네마리에게 뛰쳐나가고픈 마음을 억눌렀다. 매미 유충을 관찰하듯 자신을 보고 있는 남자에게 책잡힐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대신 그녀는 날씨 이야기를 하듯이 태연하게 화제를 꺼냈다.

“그러셨군요. 그런데 실례지만 사람을 시켜 안네마리를 안으로 들여도 될까요? 이 폭설에 밖에 있다간 동사하고 말 거예요.”

남자가 빙긋 웃었다.

[대화 예절이 부족하구나.]

“부탁드릴게요.”

키리에가 앉은 자세에서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귀족으로서의 자존심보다 안네마리의 목숨이 더 귀중하다.

남자는 그런 키리에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손가락을 튕겼다.

[1층에 들였으니 이제 이야기나 할까?]

“네?”

반사적으로 나온 반문에 남자는 미소 지은 그대로 물끄러미 키리에를 응시했다. 키리에의 등허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어떤 이야기를 원하시나요?”

빠르게, 그러나 너무 조급해 보이지는 않게, 그녀가 말했다. 남자가 턱을 당기고 미소지었다.

[지금 국왕은? 여전히 오레윈브리지 왕조인가?]

“현재는 진저 오레윈브리지 국왕 전하께서…….”

[시조의 몇 대손이지?]

조금 지루하다는 듯이 남자가 키리에의 말을 끊었다. 키리에는 인생 최대의 영리함을 발휘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느꼈다.

“시조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에서부터 18대 왕입니다.”

[벌써 지루하군.]

남자가 눈을 내리깔았다.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조금 심장이 아플 정도였다.

그러나 고작 지루함. 그것 때문에 방 온도가 뚝 떨어지고 입김이 나올 이유가 뭐란 말인가.

키리에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추위보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수도는 여전히 셀 아렐라노고?]

“네.”

[셀은?]

“왕궁도 여전히 아름다운 수도의 상징입니다.”

[레쇼는.]

레쇼? 키리에가 잠깐 미간을 좁혔다가 그게 호국경의 이름이라는 걸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호국경 로르 레쇼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여전히 셀에 계십니다.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목격담이 들려오곤 해요.”

이때 남자의 눈에 처음으로 이채가 스쳤다. 그건 마치 오랫동안 못 본 아는 사람의 소식을 들었을 때의 표정 같았다.

키리에는 잠시 뒤 그런 자신의 생각을 속으로 비웃었다.

‘말도 안 돼. 호국경은 이미 100년 이상 공식 활동을 하지 않았어.’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근거 없는 상념을 떨쳐냈을 때, 남자가 물었다.

[사는 건 어떻지?]

“어떤 점을 말씀하시나요?”

[내 때엔 권세 있는 일곱 가문이 승냥이 떼처럼 권력 다툼을 벌이곤 했더랬지.]

“그 점은 여전합니다.”

[저런. 여전히 한심하기 짝이 없어.]

키리에는 공손히 시선을 내리깐 채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심하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지, 지팡이가 시야 가장자리에서 규칙적으로 까딱거렸다.

그는 이제 키리에에게 관심을 옮겼다.

[넌 어떻게 이 마을에 들어왔지? 분명 금제가 걸려 있었을 텐데.]

“근처를 지나가다 폭설 사이에 갇…….”

[다른 건?]

“다른…… 거요?”

남자가 나른하게 턱을 들어 올렸다. 하얀 손 아래서는 지팡이가 경망스럽지 않을 정도로 흔들거렸다. 손잡이가 흰 금속으로 된, 장식 없이 단순한 검은 지팡이였다.

그 끝이 흔들리는 모양이 이상할 정도로 키리에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남자는 애초에 그걸 의도했는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음새를 보였다.

[그 금제는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가 건 것. 그래서 내도록 잠들어 있었던 것인데…… 네가 그걸 깼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왕가 오레윈브리지는 뛰어난 마법사 혈통. 반면 키리에는 마법사조차도 아니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뭔가 착오가 있는 게 아닐까요?”

[아니야. 너란다, 뷰캐넌.]

한숨인지 웃음인지 구분되지 않는, 그마저도 우아한 작은 소리가 먼저 들렸다.

[이상한 일이구나.]

남자가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깜빡임 하나 없는 조용한 시선이었다. 명백히 정탐에 목적을 둔.

정말 거짓말을 하는 중이었다면 침이라도 한번 삼켜 버렸으리라.

하지만 정말로 자신은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키리에는 어떤 상황에서든 필요 이상으로 구차하게 구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 건 귀족답지 못하니까.

“그렇네요. 영문 모를 일이군요.”

그녀는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냉연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침묵 속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을 서늘하게 키리에를 응시하던 남자는, 이내 분위기를 바꾸고 싶은지 산뜻한 숨을 내뱉었다.

[어디로 향하는 길이지?]

“엘서스로 향하고 있습니다.”

남자가 나른하게 웃었다.

[멋진 마을이지. 요양이 필요할 정도로는 보이지 않고, 이 시즌에 휴양을 가는 것도 아닐 테니 자숙이로군.]

당황스러울 정도로 상황을 제대로 짚은 말이었다. 키리에는 때를 잊고 약간의 부끄러움마저 느꼈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 사소한 부분을 언급하는 대신, 눕혀 놓았던 지팡이를 세웠다.

[사정을 알아보려면 셀 아렐라노로 가야 할 것 같구나. 엘서스에서의 일이 끝나면 수도로 가겠지? 신세를 좀 지겠어.]

“하지만…….”

놀란 키리에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가 멈칫했다. 남자는 부드럽게 손가락 하나를 들어 키리에의 말을 가로막았다.

[뷰캐넌.]

남자의 미소도 말도, 얼어붙은 별처럼 차가웠다.

[초대 왕이 걸어 놓은 금제를 네가 풀었어. 왕가에서 이 일을 알면 어떻게 될까? 나를 옆에 두는 게 네 신상에 이로울 텐데.]

키리에의 눈이 흔들렸다. 시조니 호국경이니 금제니, 전부 너무 멀게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녀는 심호흡과 함께 짧은 당황을 끝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냉정하고 의연하게. 귀족답게.’

남자의 말에 따르자면 무려 시조의 금제다. 그렇다는 건 왕가가 눈앞에 있는 남자의 존재를 숨기고 싶어 한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그런 존재를 깨워 놓고 태연히 갈 길 간다? 어불성설이다.

‘왕실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어. 의심받고 싶지도 않고.’

그 모든 사실을 눈 깜빡할 사이에 통찰해낸 남자는 그저 예의상 키리에의 대답을 기다려 주고 있는 듯했다.

키리에가 입술을 깨물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어요.”

[문제?]

남자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얼음별 같던 눈이 흥미로 반짝거렸다. 기대에 못 미칠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영 미안해질 정도였다.

“폭설 탓에 출발이 지연될 것 같으니, 그때까지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니나 다를까 남자의 눈에서 활력이 사라졌다.

[아아. 그래. 천재지변에는 맥도 못 추는 연약한 존재였지.]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쿡쿡 웃었다. 키리에는 점잖게 남자의 웃음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

‘잠깐 출발을 지연시키고 그 틈에 수도로 사람을 보내서 이 자의 정체가 뭔지 알아보거나…….’

그러나 남자는 그런 키리에의 생각을 가뿐하게 휴짓조각으로 만들었다.

[눈이 녹으면 되는 거지.]

남자가 일어나 뚜벅뚜벅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어느새 동이 트고 있는 창문을 바로 열어젖혔다. 구색만 갖춰 놓은 낡은 커튼이 바람에 부풀어 올랐다.

키리에는 찬기를 예상하고 몸을 움츠렸으나, 키리에의 팔에 닿은 것은 봄바람만큼 따스한 공기였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함박눈 속에 파묻혀 있던 마을은, 흡사 눈이라곤 온 적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히 잠들어 있었다.

키리에의 몸이 굳었다.

‘……인간이 이런 마법을 부릴 수 있다고는 들어본 적 없어.’

남자는 키리에의 지척에 서서, 고요한 시선으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동녘의 햇살, 미온의 미소는 남자가 풍기는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희석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빛 들지 않는 그늘 속의 광기를 선연히 드러낼 뿐.

그 섬뜩한 위압감을 두르고도 남자는 압도적으로 아름다웠다. 큰 키에 지팡이를 짚은 반듯한 자세, 칠흑 같은 머리칼, 검은 수를 놓은 감색의 예복.

세상이 눈앞의 남자를 위해 존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았다.

‘무엇보다 저 눈.’

키리에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남자는 천천히 키리에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머리가 진공 상태가 되는 것을 느꼈다.

지상의 모든 푸름이 거기 있었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워 그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을 것만 같은 눈을 하고서, 남자가 낮게 속삭였다.

[출발해.]

키리에는 악마에게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나타니엘.]

그가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나를 ‘종말’이라 부르더구나.]

***

“뷰캐넌 백작가에 크게 도움을 주셨던 은인이시니 대함에 모자람이 없도록 신경 쓰도록.”

사용인들은 갑자기 나타난 남자의 정체에 대해 의문스러운 표정이었으나, 의외로 순순히 수긍했다. 그간 그 정도 신뢰는 얻을 정도로 행동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반면, 나타니엘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남의 제지를 받아본 적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뷰캐넌의 호위 기사인가?]

“그렇습니다.”

나타니엘의 눈이 뻣뻣하게 굳은 발디르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제법이네.]

묘하게 사람의 경쟁심을 자극하는 말. 다행히 발디르는 거기에 응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다만 나타니엘이 그대로 마차에 오른 뒤, 발디르는 조금 억울한 표정으로 키리에를 돌아보았다.

“아가씨. 저분은…….”

“더는 묻지 말아 줘. 위험한 분은 아냐.”

“정말입니까……?”

“아닐 거야…… 아마도.”

키리에의 말에는 확신이 없었다. 그 모습에 발디르가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애써 미소지었다.

“무슨 일이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일이 생기든 아가씨는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고마워.”

출발까지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키리에는 빠르게 여관 주인 앤더슨을 끌고 여관 뒤의 마당으로 향했다.

“아는 걸 다 말해.”

앤더슨은 깊고 무거운 눈으로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어쩌다 그리되셨습니까?”

“이미 이렇게 된 이상 구구절절 설명하기엔 시간이 모자라네. 아는 게 뭐지? 이 마을은 뭐고, 저자는 누구야?”

앤더슨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마차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여관 건물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는 보이지 않을 누군가를 보고 있는 것처럼 몸을 떨었다.

“……‘종말’이라고 부릅니다.”

“설마 역사서에 나오는 그 ‘종말’을 말하는 거야?”

“저희도 모릅니다.”

“뭐?”

“그자는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았습니다. 저희는 조부의 조부 때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이 지역에 잠든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지요.”

앤더슨은 순식간에 늙어 버린 사람처럼 힘겹게 근처의 빈 나무 상자에 걸터앉았다.

“우리는 누구도 그의 정체를 모르지만, 이 마을이 그를 위해 지어졌다는 것만은 압니다.”

“그를 위해?”

“그게 지키기 위해서인지, 혹은 봉인하기 위해서인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냥 그렇게 듣고 자랐습니다. 이 땅에는 종말이 잠들어 있으니, 그를 깨우지 말라. 눈이 오는 날은 괜찮다, 하지만 눈이 그친 밤에는 절대 나가지 말라…….”

“나가면 어떻게 되지?”

앤더슨이 자기 정수리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모릅니다.”

“무슨…… 후우.”

키리에는 자신이 이 괴담 같은 이야기에 슬슬 진력이 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모릅니다. 그냥 사라지니까요.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앤더슨의 말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죽은 우물 같았다. 키리에는 그의 내면에서 우렁우렁 울리고 있는 듯한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여관의 벽에 어린아이의 그림이 잔뜩 붙어 있던 것을 떠올려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아이는 본 적이 없다.

“혹시, 네 아이도 그리되었나?”

앤더슨이 죽은 미소를 지었다.

“귀족 나리가 보기에도 있었던 것 같습니까? 내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그걸 가능케 할 것 같은 남자가 지금 자신의 마차 안에 있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있었나?”

그녀는 목이 메는 것을 깨닫고 침을 한 번 삼켰다.

“이렇게 그자가 밖으로 나와서…… 모습을 드러낸 경우가.”

“없습니다.”

앤더슨이 고개를 저었다.

“눈이 많이 내리는 한밤중에 가끔 아이들을 통해 목격된 적은 있어도, 이렇게 정말 ‘사람’처럼 나타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앤더슨의 눈이 묻는 듯했다. 그랬는데, 너 대체 뭘 한 거야?

키리에는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았지만, 특별히 무언가를 한 기억은 없었다. 보통 옛날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 꼭 비석이나 건드리면 안 될 것을 건드려서 재앙을 입고는 하던데, 자신이 무얼 했다고?

“아니면, 저자가…… 저자가 그냥 보통 사람일 확률은.”

“핫.”

키리에의 말에 앤더슨이 메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얼굴은 비명을 지르기 직전의 찡그림에 가까웠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자를 보고도?”

키리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도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말한 건 아니었다.

앤더슨이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조부의 조부의 조부 때부터 종말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던 중년은, 묘하게 초연한 태도로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여보십시오, 귀족 나리. 사람이 사람을 구분하지 못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는 낱말 하나하나를 꾹꾹 누르듯이 말했다. 그러지 않으면 목소리가 떨릴 것을 아는 사람처럼.

“하다못해 좀 미친 사람의 눈빛만 봐도 그게 미친놈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

“그런데 저놈이 어떻게…… 보통 인간일 수 있습니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앤더슨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가까스로 말은 떨지 않고 마쳤지만, 무릎을 꽉 쥔 손에는 핏기가 없었다.

앤더슨은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건 키리에가 나타니엘에게 느끼는 감정 그대로였다.

그녀는 옆의 나무 기둥을 짚은 채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럴 리 없겠지.”

신이 빚어낸 것 같은 외모, 고급품이 분명한 예복, 고상하고 우아한 행동, 저 하늘의 달별마저 손끝으로 부릴 것 같은 태생적 오만.

보이는 모든 부분에서 그는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이 있었고, 보이는 걸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는 정제되지 않은 힘과 야만의 냄새를 풍겼다.

그 어처구니없는 이중성을 어리석은 육감의 발로라고 착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앤더슨은 그녀의 낙관에 종지부를 찍었다.

“좀 더 근거를 들어 말해드리자면, 헤르큘라에 저런 주민은 없습니다. 이 마을이 저런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들이 올 만한 위치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나리도 아시겠지요.”

키리에는 대답 없이 눈을 깜빡였다. 생각은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이제 와 그를 데려가지 않겠다 하더라도, 폭설의 흔적까지 삽시간에 없애버릴 수 있는 남자다. 어떻게든 나오려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내가 그런 이상한 존재를 깨워 버렸다고?’

키리에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깊게 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달리 이 지역에 전해지는 말은 없나?”

“그게 끝입니다.”

“새로 떠오르는 게 생기면 셀 아렐라노의 뷰캐넌 백작가로 서신을 보내.”

“그를 데리고 가실 겁니까?”

“그래야지.”

생각 외로 차분한 대답에 앤더슨이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키리에는 그를 무시하고 몸을 돌렸다.

“그가 정말로 사람들이 말하는 ‘종말’이고, 이 마을이 그를 위해 지어진 거라면, 그가 여길 나갔을 때 이 마을도 지금처럼 있진 않을 거야. 각자 자리에서 힘내기로 하지.”

“……귀족 나리에게는 처음 듣는 말이군요.”

“영광으로 알아.”

앤더슨은 픽 웃고서, 키리에에게 사용인들이 하듯 깊이 허리를 숙였다. 어설프고 서투르지만 진지하고 무거운 동작이었다.

“힘내십시오, 나리.”

“자네도.”

***

날 듯이 달린 마차는 무사히 버몬트 령(領) 엔비니크 시에 도착했다.

키리에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나타니엘과 같이 탄 마차는 고요할 뿐 불편하진 않았다.

마차 안에서 나타니엘은 대부분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간혹 눈이 마주치면, 잔물결에 비친 햇살처럼 눈 부시기만 한 미소를 지었다.

‘타인에게 주는 공포감이나 위압감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거겠지. 고양잇과 맹수가 발톱을 숨길 줄 알듯이.’

배려해 준 것일 수도, 그냥 그쪽이 더 편해서일 수도, 아니면 아무 이유 없을 수도 있다.

키리에는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짐작할 수 없는 대상에 골몰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그래도 그 덕에 키리에는 나타니엘을 좀 더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숨 쉬는 것도 멈춰야 할 미심쩍은 포식자’에서 ‘좀 지체 높은 윗사람’ 정도로.

마차는 침묵 속에 자연스럽게 여관으로 향했다. 달리는 내도록 별다른 말이 없던 나타니엘은 마차가 멈추자 키리에에게 물었다.

[버몬트 령이라 하지 않았나?]

키리에는 그 질문에 담은 함의를 못 알아들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마차에 가문의 문양을 넣은 것도 아니니, 그냥 여관에서 지내려고 해요.”

뷰캐넌임을 드러냈다면 예의상 버몬트 저에 들러야 할 테지만, 그런 요란한 과정은 내키지 않는다. 게다가 그녀는 버몬트 후작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교계에 소문이 자자한 그의 아들은 더더욱.

나타니엘은 [제법이야.]하고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마차에서 내렸다.

“어서 오세요! 화이트디어 인에 오신 것을 환영합……!”

손님을 맞이하러 달려오던 급사는 나타니엘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멈췄다. 지상에 강림한 천사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키리에는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반복되리라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하다.

“나타니엘 님.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지만 여관에서 가장 좋은 방을 나타니엘 님 몫으로 수배해 놓았습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기왕이면 방에서 드셔 주시면 좋겠네요. 그런 속뜻을 눈치챘는지 나타니엘이 나른하게 미소지었다.

[나는 볼일이 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어. 내일 출발 전까지는 돌아오지.]

“외출하시나요?”

[그럴까 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키리에가 조금 미간을 좁혔다. 이대로 그를 혼자 내보내도 될까?

‘아니, 절대 안 되지.’

그녀는 능숙하게 다른 핑계를 끌어모았다.

“홀로 다니시기에는 불편하실 텐데, 괜찮으시면 시중들 하인을 붙여드릴까요?”

나타니엘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푸른 눈이 아주 재밌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반짝거렸다.

[그건 정말로 내 불편함을 염려해서인가? 그렇다면 받아들이지.]

키리에는 나타니엘의 고요한 눈 속에서 무참히 떨리는 자신의 눈동자를 보았다.

얕은꾀. 얕은꾀였다.

그녀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나타니엘 님을 혼자 보내는 것이 우려됩니다.”

나타니엘이 지팡이를 들었다. 그리고 땅과 닿는 지팡이 끝부분을 검사하는 척하며, 우아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우리 뷰캐넌은 내가 사고라도 칠까 봐 두려우신가 보군.]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라고?]

“아니죠.”

키리에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고 수준의 귀여운 일을 걱정하고 있지는 않거든요.”

심기를 거스를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나타니엘은 몹시 즐거운 듯했다.

[말재간이 좋구나. 불안하니?]

“불안합니다.”

[무엇이?]

“모릅니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앞으로도요?”

나타니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심연보다 깊게 미소지었다.

[외출은 취소하지.]

나타니엘의 고개가 여관의 문으로 향했다. 키리에는 푸른 얼음 같은 색의 홍채가 원초적 즐거움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나를 지루하지 않게 해 줄 무언가가 제 발로 걸어들어오고 있구나.]

키리에가 굼실거리는 불안을 인지하기도 전에 여관의 문이 열렸다.

고급품은 아니더라도 재봉이 야무지고 부드러운 원단으로 만든 예복을 입은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여관을 둘러보더니, 키리에를 발견하고는 곧장 그녀에게 다가왔다.

“실례하겠습니다. 버몬트 후작가에서 나왔습니다. 키리에 뷰캐넌 아가씨 되십니까?”

걸어 다니는 재앙, 굴러들어오는 근심.

다음은 뭘까? 키리에는 이마를 짚었다.

“엘서스로 향하고 있다지? 여관 같은 곳에서 묵느라 고생이 많았네. 여독도 풀 겸, 편히 묵다 가게.”

발렌시아 버몬트가 말했다.

키리에와 나타니엘은 현재 버몬트 후작의 저택에 있었다. 젠체하는 사용인의 손에 건네받은 초대장은 버몬트 후작의 친필이었고, 키리에에게는 거절할 명문이 없었다.

‘아버지가 승냥이라면 버몬트 후작은 구렁이지.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키리에는 속을 숨기고 잔을 들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후작님.”

“환대라니, 아무렴, 뷰캐넌 양이 오신다는데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지.”

버몬트 후작이 홀홀 웃었다.

“오히려 좀 서운하군! 뷰캐넌 양. 어찌 내 영지에 들러 놓고 나를 안 보고 갈 생각을 했나?”

“거점 도시가 아니라 계실 줄 몰랐어요.”

키리에가 냉랭하고 예의 바르게 대꾸했다. 버몬트 후작은 염소 꼬리 같은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그 말이 맞네. 평소에 있을 곳이야 아니지.”

“저 때문에 굳이 걸음 하셨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왜 아니겠나? 뷰캐넌 백작이 얘기하더군. 당신 여식이 그리로 가는 중이니 신경 좀 써달라고.”

망할 아버지. 키리에가 속으로 욕했다.

“아버지의 걱정이야 늘 남다르죠.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금방 떠날 거예요.”

“사양하지 않아도 좋네! 이렇게 보기 좋은 아가씨가 와 주었다는데, 꽃구경은 해야 하지 않겠나.”

“꽃은 봄에 피는 거고요, 후작님. 계절을 착각하신 것 같네요.”

“내 눈이 이렇게 즐거운 걸 보면 착각은 아닐 게야.”

버몬트 후작이 키들거렸다. 그는 이내 잔을 들어 올리며 놀랍도록 예리하게 눈을 빛냈다.

“그런데, 정말 소개는 안 해 줄 생각인가? 키리에 뷰캐넌 양, 자네의 말 없는 동행자에 대해서 말이네.”

그 시선의 끝에는 당연하지만 나타니엘이 있었다.

여태 같은 식탁에 있었으면서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남자. 바로 그 사내.

그는 도무지 남과 맞출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주제에 예법은 훌륭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태가 흘렀다.

그래서인지 버몬트 후작은 그를 쫓아내지 않았다. 행여나 어딘가의 높은 사람과 척이라도 질까 싶은 모양이었다.

“뷰캐넌 양이 내가 모르는 청년과 여행을 떠날 줄이야. 이거 확실히 오래 살고 볼 일이 아닌가! 심지어 뷰캐넌 백작은 모르고 있는 것 같던데?”

은근히 키리에를 조롱하는 듯한 말이었다. 나타니엘에 대한 의아함도 비쳤다.

그러나 둥근 잔을 흔들며 포도주를 굴리는 나타니엘은 대답은커녕 그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대신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그가 누군지 궁금하신가요? 알면 깜짝 놀라실 텐데요.”

“얼마나 놀랄지 기대가 되는군. 이 나이 정도 먹으면 하루하루가 지루하거든. 새롭고 신선한 충격은 늘 젊은이에게서 오는 것 아니겠나.”

“농담도 참. 충분히 정정하시지 않나요.”

“아니야, 아닐세. 난 이제 매일 아침 새로운 것을 기다리는 늙은이가 되어 버렸어.”

버몬트 후작이 콧수염을 들썩거리며 다시 나타니엘에게 관심을 보였다.

“지금도 보게. 말은 한마디도 하질 않고 있으니…….”

키리에가 쓴웃음을 지었다.

“수줍음을 많이 타서요.”

“허.”

후작이 코웃음 쳤다.

“수줍음이나 탈 청년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누군지 정말 궁금하군. 설마 어중이떠중이는 아니겠지, 뷰캐넌 양?”

키리에와 버몬트 후작,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맞부딪쳤다. 먼저 여유롭게 미소지은 것은 키리에였다.

“설마요.”

“그렇다면야.”

후작이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뭐, 조급할 필요는 없지. 글라디오소가 곧 올 테니.”

글라디오소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키리에의 미소에 작은 균열이 갔다. 그녀는 빠르게 여유를 가다듬고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글라디오소 님이 오시나요?”

“그래. 내 아들 글라디오소 말이네. 뷰캐넌 백작이 권하더군. 둘은 나이가 맞으니 짧게라도 만남을 가지면 좋지 않겠느냐고.”

“좋은…… 생각이네요.”

키리에가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런데 어쩌면 좋죠? 일정이 급해서 오래 머물지는 못할 것 같은데.”

“하루 정도의 여유는 있지 않겠나. 설마 이 노공의 청을 거절하진 않겠지, 뷰캐넌 양?”

버몬트 후작이 노련하게 말을 받으며 키리에를 응시했다. 거절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피하긴 어렵겠어.’

뱀처럼 느물느물하게 굴어도 버몬트 후작가는 기본적으로 강성이다.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으면 상식을 뛰어넘을 정도로 과격하게 나오는 게 버몬트의 특징이었다.

‘여기서 일이 생기면 곤란해.’

키리에는 천천히 드레스를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절이라뇨, 후작님. 제가 생각지도 않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오히려 저의 기쁨인걸요.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여독 때문에 저는 이만 방으로 돌아가야겠어요.”

“푹 쉬도록 하게.”

버몬트 후작의 작은 눈이 키리에를 따라 일어난 나타니엘에게로 향했다.

“자네도.”

짧고 단호한 말이었다.

나타니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겨울밤의 달 같은 미소를 띤 채, 키리에에게 팔을 내밀었을 뿐.

버몬트 후작이 무례를 빌미로 역정을 내도 이해가 갈 행동이었다. 그러나 버몬트 후작은 그러지 않았고, 나타니엘의 몸에 밴 기품 역시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키리에는 재삼 자각했다. 들개는 사자를 무릎 꿇릴 수 없다. 그녀는 우아하게 인사했다.

“그럼, 좋은 밤 보내시길, 후작님.”

[둄2 절갠 교환재공타싸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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