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화
즉위식이 끝나고, 수도의 흥분됐던 분위기는 점차 가라앉았다.
로텐슈타인 공작은 수도에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떠났다. 돌아가는 그의 손에는 황제의 칙서와 황후의 증표가 들려 있었다.
그가 떠난 후에도 수도는 바쁘게 돌아갔다.
그런 것을 보냈다는 사실도 잊을 만큼 시간이 지나서야 로텐슈타인 공작의 서신이 도착했다.
「제국의 황제 폐하께 보고드립니다.
시일이 오래 걸려 무척이나 송구합니다.
제가 수도로 가라는 제안에 그자는 한사코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황제 폐하의 칙서와 황후 폐하의 증표를 보여 준 후에는 한참 동안 고민하는 듯했습니다.
결국 황제 폐하의 명령을 거스를 순 없으니 따르겠다고 말했습니다만, 무엄하게도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첫째, 가면을 절대 벗기지 말 것.
둘째, 자신이 누군지 알려고 하지 말 것.
셋째, 적절한 시점에 다시 자유롭게 놔줄 것.
참으로 건방지기 그지없는 자입니다.
제가 추천했지만, 오로지 폐하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에녹이 건네준 로텐슈타인 공작의 서신을 모두 읽은 후, 에녹을 빤히 바라보았다.
에녹은 뭐가 우스운지 피식거리며, 깃펜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우리는 지금 내궁 집무실에 함께 있었고, 나는 둘째를 임신하고 있었다.
내궁의 집무실은 황제, 황후가 함께 쓰도록 설계를 했다. 물론 백 프로 에녹의 의견이었다.
다행히 외궁의 집무실은 따로 있었기에, 각자의 보좌관들은 주로 외궁에서 머물렀다.
“에녹.”
내 부름에 그의 부드러운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뒤의 창문에서 쏟아지는 가을 햇살이 검은 머리카락 위에서 반짝거렸다.
왠지 그게 만지고 싶어서, 나는 그의 곁에 다가가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망설일 필요 있나요. 조건을 들어줘요.”
에녹이 작게 한숨을 쉬며 옅게 웃었다.
“그래야겠죠.”
사실 그가 내세운 조건은, 본인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정체가 밝혀졌을 때 곤란해질 상황을 우려해서였겠지.
에녹은 결국 그 모든 조건을 승낙한다는 각서를 썼다. 그리고 의외의 조건도 걸어 두었다.
“굳이 그런 조건을……?”
“저에겐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참으로 부지런한 황제 폐하시네요.”
에녹을 빤히 보니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안 써 버릇하면 실력도 녹슬기 마련이니까요.”
그가 종을 울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이 얼른 뛰어 들어왔다.
그에게 서신을 전한 후, 에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 식사 후에 함께 산책이나 하죠.”
“그럴까요?”
그렇게 나서려는데,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콰과광……!
대낮에 하늘이 번쩍거리고, 엄청난 폭음과 함께 건물이 흔들거렸다.
“에린!”
순간 에녹이 나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조용해졌다.
“뭐, 뭐였죠, 방금?”
에녹의 품에서 나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창밖을 보는 에녹의 표정이 무척이나 화나 보였다.
“시종장!”
방금 나갔던 시종장이 다시 헐레벌떡 들어왔다.
“가서 당장 황태자를 불러오게.”
“예, 예! 알겠습니다!”
아, 에녹은 저게 벤틀리의 짓이라는 걸 바로 알아챈 모양이다. 같은 대마법사 핏줄이라 감이 빠른 건가.
아무튼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벤틀리가 도착했다.
“벤틀리 스펠 리케포로스.”
에녹이 풀 네임으로 부르자, 벤틀리가 움찔하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잘못을 알긴 아는 모양이다.
“……네, 아버지.”
나는 어느 편을 들어야 하나 관망을 하며 가만히 두 부자를 지켜봤다.
“네 짓이겠지?”
벤틀리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에녹은 자신의 어린 아들을 싸늘한 눈으로 쳐다봤다. 평소에는 자상했지만, 아이를 혼낼 때는 단호하고 무서웠다.
“왜 그렇게 화가 났지?”
벤틀리가 화가 났다고? 벤틀리는 우물쭈물 거리다 입을 열었다.
“검술 시합에서 졌어요. 그런데 애들이 은근히 비웃잖아요. 그래서 마법으로 콧대를 눕혀 주려고…….”
“…….”
에녹이 이마를 짚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너는 네가 마법 실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나 보구나.”
“저는 대마법사의 피를 이어받았으니까요, 그래서 아버지께서도……!”
“그래서 애꿎은 황궁 사람들을 다 놀라게 했나. 네 어머니, 황후께서 놀라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어쩔 뻔했지.”
에녹은 어린 아들의 치기 어린 발언에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저럴 때 보면 은근히 냉정하다니까. 그래도 진심으로 나를 걱정했다는 걸 알아서 잠자코 있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이제 막 일곱 살이 된 벤틀리는 그제야 나를 보며 사과를 했다. 어린 얼굴에 미안함이 가득 배어났다.
“나는 괜찮아, 하지만 폐하의 말씀대로 앞으로 조심하는 게 좋겠어.”
그러자 에녹이 벌떡 일어나더니 벤틀리를 지나쳐 갔다.
“따라 나와라.”
벤틀리가 축 쳐진 어깨로 그를 따라 나갔고, 궁금한 김에 나도 나갔다. 빠르게 앞서가던 에녹은 뒤돌아서 나를 발견하고는 조금 속도를 늦췄다.
에녹이 안내한 곳은 마법사 전용 연무장이었다. 커다란 돔으로 된 연무장은 마법석이 빼곡하게 박혀 있어서 어떤 마법을 써도 무너지지 않았다.
벤틀리도 몇 번 와 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연무장에는 각종 도구들이 널려 있었다. 그중 에녹은 가느다란 실뭉치에서 실 한 가닥을 꺼내 들었다.
“벤틀리, 저 끝으로 가서 이 실을 태워 보아라. 내가 들고 있을 테니.”
“저, 위험할 텐데. 아직…….”
벤틀리가 멀어지면서 자신 없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괜찮아. 최대한 이 실만 태우는 거다.”
에녹이 내게 눈짓을 보냈고, 나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곧이어 벤틀리가 손끝에서 불꽃을 쏘아 던졌다. 하지만 작게 시작한 불꽃은 에녹 앞에 도착했을 때 어마어마하게 커져 버렸다.
커다란 화마가 순식간에 에녹을 집어삼켰다.
“……에녹!”
하지만 곧 에녹의 주위로 가볍게 바람이 불더니 불길이 훅 꺼져 버렸다. 당연히 에녹은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았다.
“후우.”
무사할 걸 알았지만 그래도 눈앞에서 보니 놀란 건 사실이었다. 벤틀리 자신도 놀란 듯 커다란 황금빛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다시.”
에녹은 별다른 동요 없이 벤틀리의 훈련을 계속 진행했다. 확실히 벤틀리의 마법 스승은 아버지인 에녹만이 유일할 것이다.
“벤틀리,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하도록 해.”
벤틀리는 그의 주문대로 애써 봤지만, 이번에는 에녹에게 닿기도 전에 불길이 꺼져 버렸다. 그렇게 총 스무 번의 시도 끝에 미약한 불꽃이 실에 닿았고 드디어 성공했다.
“잘했다. 그 감각을 잊지 말도록 해.”
“……벼락을 치게 하는 것보다 이게 더 힘들어요.”
벤틀리는 그 말 그대로 몹시 지친 모습이었다. 에녹이 벤틀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원래 조절 능력을 키우는 게 더 어려운 법이지. 완벽하게 익힐 때까지 앞으로 연무장 외에서 마법 사용은 금지다.”
“……예.”
벤틀리는 시무룩해하긴 했지만 순순히 에녹의 말에 따랐다. 자신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다가오는 벤틀리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수고 많았어, 벤틀리.”
그제야 벤틀리의 표정이 풀리며, 내게 폭 안겨 들었다. 역시 아직은 일곱 살의 어린아이였다.
***
청명한 가을 하늘이 유달리 높고 맑은 어느 날이었다.
우리는 외궁의 넓은 홀 상석에 앉아 있었다. 정반대 편에 있는 큰 문은 열려 있었다.
홀 안에도 귀족들이 각자의 자리에 앉아 문 쪽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귀족은 아니라는 것 같죠?”
“그래도 오늘 작위를 받을 것 같던데요. 폐하께서 직접 부르시는 거 보면…….”
“야만인이라는 말도 있어요. 어찌나 잔인한지 적들이 치를 떨더래요.”
“흠흠, 그것참. 제국의 영웅에게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조용히들 하세요.”
갖가지 소리들이 한데 뒤섞여 웅성웅성 메아리를 만들어 냈다. 나는 최대한 차분한 표정으로 문을 응시했다.
기다림이 지루한 듯, 벤틀리가 이리저리 발을 흔들었지만 그래도 꾹 참고 잘 앉아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이곳부터는 무기를 벗으셔야 합니다.”
밖에 있는 호위 기사의 목소리가 들리고, 철컥 철컥 무기를 풀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바닥에 깔려 있는 레드 카펫 위로 한 발자국 옮기려다 멈칫거렸다.
“뭐 하는 거지? 저 가면은 또 뭐고?”
귀족들이 의아한 듯 속닥거렸다.
“어서 가까이 다가오게. 기다리고 있었네.”
에녹의 부름에 남자가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로텐슈타인 공작의 설명대로, 남자는 얼굴의 3분의 2 이상을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길게 길러 하나로 묶은 금발 머리가 그의 걸음마다 흔들거렸다. 그를 원래 알던 귀족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와 에녹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단상 아래까지 다가온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부르심을 받고 찾아왔습니다.”
“…….”
에녹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도 차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아 잠자코 있었다.
황제와 황후가 아무 말도 없자, 남자가 고개를 슬쩍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푸른 눈동자가 흔들거리다 이내 시선이 아래로 깔렸다.
에녹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느라 고생 많았다. 그대의 명성은 수도에서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제국을 위해 세운 공은 하찮게 취급될 수 없다. 따라서 짐이 그대에게 상을 내리고자 한다.”
에녹은 시종이 가져온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검 끝으로 남자의 어깨를 살짝 짚었다.
“그대에게 북서쪽에 있는 탈트 지방 전체를 하사하며 그대를 탈트 영주로 임명한다. 또한 동시에 탈트 백작의 작위를 하사하겠다.”
남자가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눈과 에녹의 눈이 한참 동안 마주쳤다. 에녹의 눈이 미세하게 호선을 그렸다.
탈트 영지는 북동쪽에 있는 로텐슈타인 영지와 이어져 있는 황실 소유의 비어 있는 땅이었다. 비옥한 땅이라고 할 순 없었지만,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곳의 영주는 군사적인 지식도 해박해야 했고, 황실과의 긴밀한 협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자리였다. 하지만 적임자를 찾지 못해 내내 비어 있었고, 황실 기사단이 교대해 가며 지키고 있었다.
“물론 나 역시 조건이 있다.”
남자가 눈을 깜빡거리자 에녹이 말을 이어 갔다.
“하나는 삼 년간 황태자의 검술 스승이 되어 줄 것. 또 하나는 일 년에 두 번, 나의 대련 상대가 되어 주어야겠다. 내 조건은 그것뿐이다.”
귀족들이 웅성거렸지만 에녹과 남자 사이는 고요하기만 했다. 푸른 눈동자가 일렁거리다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명, 받들겠습니다.”
조용한 홀에 조심스러운 박수 소리가 하나 둘씩 퍼져 나갔다. 에녹이 그를 일으켰고, 나도 일어나 에녹의 곁에 섰다.
“축하해요, 탈트 백작.”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에녹의 에메랄드 빛 부드러운 시선이 내게 닿는 것이 느껴졌다. 나 또한 에녹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제야 케케묵은 숙제가 풀린 기분이었다.
탈트 백작은 이후 수많은 공을 세웠고, 제국에 완연한 평화를 가져다줬다.
그렇게 ‘탈트 공작’이 된 이후에야 가면을 벗었는데, 그때쯤 되어서는 아무도 그가 예전의 ‘루퍼트 클리포드’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이후 나와 에녹은 당연하게도 오랫동안 행복하지만, 격무에 시달리는 황제와 황후로서 살았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