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8화
나는 급히 황제를 보다 에녹을 돌아보았고, 에녹은 예상치 못한 말에 잠시 얼어붙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겉보기엔 정정해 보이시는데…….”
에녹이 황제를 여기저기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난 보다시피 멀쩡하다.”
“그런데 왜 선위를 하겠다 하십니까?”
“할 만큼 했으니 나도 이제 그만 쉬어도 되지 않겠느냐?”
“……안 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단호하게 말했지만, 황제 역시 그런 그에게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황후 역시 내 생각에 동의했다. 안 그렇소, 황후?”
“물론이죠.”
황후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일단은 몸조리부터 잘하렴. 몸이 튼튼해야 훌륭한 황후가 될 수 있단다?”
“그, 저……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가.”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두 분을 보면서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정말…… 하기 싫어서?”
“맞아, 내 아들보다 비가 훨씬 똑똑하네.”
황후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내 표정이 에녹과 닮아져 갔다. 아주 잠깐, 그것도 일부였지만 내가 경험했던 황후의 업무는 상상을 초월했다. 어차피 받을 자리인데, 굳이 나서서 고생을 빨리 자처할 필요가 있을까.
“안 되겠어요, 황후 폐하. 이렇게 강건하신데, 저희는 아직 배울 게 많답니다.”
“아니야, 내가 보기엔 지금도 훌륭해. 당장이라도 주고 싶지만, 우리 비가 임신 중이니 조금 기다려 주는 것뿐이야.”
우리는 극구 사양했고,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하고 황제 부부는 자리를 떠났다.
“에녹, 알았죠. 절대 물러나면 안 돼요.”
“알겠습니다, 나도 그럴 생각입니다.”
그로부터 5년 후.
“황태자 에녹 드웰 리케포로스가 칼릭스 제국의 제 28대 황제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대신관의 선언에 따라, 나는 성수를 손끝에 발라 에녹의 반듯한 이마에 살며시 갖다 대었다. 그리고 짧게 기도문을 외우며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벨벳 쿠션 위에 있던 왕관을 조심스럽게 들어 검은 정수리 위에 씌워 주었다. 금색으로 빛나는 왕관이 그에게 참 잘 어울렸다.
그래도 조금만 더 늦게 받았으면 좋았으련만.
우리는 버티고 버텨 그나마 5년이란 세월을 끌었다. 하지만 마지막엔 병에 걸린 척 연기하는 선황제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황후의 대례복을 입은 채 행하는 신녀의 축복은 조금 어색했다. 나도 오늘 에녹이 황제가 되는 동시에 황후가 되지만, 동시에 신녀였기 때문이다.
황제가 즉위하고, 그 황제가 나에게 황후의 왕관을 직접 씌워 주는 것으로 황제 부부의 즉위식은 끝이 났다.
에녹과 나는 단상 위에 나란히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선황제와 선황후가 단상 옆에 나란히 앉아 크게 박수를 쳤다.
그와 동시에 황제 즉위식을 지켜보던 모든 귀족들이 무릎을 꿇었다. 곧 업무에 치여 정신없는 나날이 이어지겠지.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흘긋 에녹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는 늘 그랬듯이 시종일관 담담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늘 사람들 앞에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사이 단상 위에는 드래곤이 새겨진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벤틀리. 이리 오렴.”
유모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오는 아이가 바로 나의 아들이었다.
에녹의 까만 머리카락에, 나의 황금빛 눈동자를 물려받았다.
에녹은 의자에 앉으며, 벤틀리를 안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아바바…….”
벤틀리가 에녹의 왕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왕관이 두둥실 떠다니다 벤틀리의 머리 위에 비스듬히 씌워졌다. 아직 머리가 작아서인지, 왕관 안에 머리가 쏙 들어가 눈을 가렸다.
귀족들이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우리는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에녹은 그런 벤틀리를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다 귀족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경들은 들으시오.”
귀족들이 일어나 머리를 조아리며, 이제 막 즉위한 젊은 황제의 말에 귀 기울였다.
“지금 보셨겠지만 벤틀리가 대마법사의 핏줄을 이어받았으니, 오늘 이 자리에서 정하려고 하오. 벤틀리 스펠 리케포로스가 장차 내 뒤를 이을 황태자가 될 것이오. 이의 있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의 뜻대로 하십시오. 앞으로 벤틀리 황태자 전하를 잘 보필하겠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혹, 벤틀리의 형제자매가 더 생길 수도 있지만, 대마법사의 핏줄은 한 세대에 단 한 명뿐이다.
벤틀리가 마법 능력을 보였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주 만약에, 훗날 브리던 황자 같은 변수가 발생할지라도 벤틀리가 차기 황제라는 것을 확실히 주지시킨 것이다.
즉위식이 끝나고, 우리 부부와 벤틀리가 대연회장을 앞서 나갔다. 문 앞에는 선황제 부부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바로 떠나실 생각입니까.”
에녹이 묻자 편한 복장의 황제가 속 편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바로 떠날 참이다. 황제 의복이 제법 잘 어울리는구나.”
선황제와 선황후는 이 길로 바로 여행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들은 황태자 시절에 결혼한 게 아니기 때문에, 결혼 후 제대로 된 신혼여행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래, 벤틀리, 이 녀석! 가기 전에 한번 안아 보자꾸나.”
선황제와 선황후는 한 번씩 벤틀리를 안아 본 후에 마차에 올랐다. 그들이 떠나는 것을 배웅한 후, 우리는 본궁으로 향했다.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본궁 역시 한 달 내내 새 단장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떻게 바뀌었을까?
“아…… 세상에.”
들어가자마자 작게 탄성이 나왔다.
에녹의 표정을 보니, 역시 그의 지시가 있었나 보다.
내가 아무리 핑크와 하얀색을 좋아한다고 했기로서니, 이렇게 온통 핑크색 천지일 줄이야……!
전체적으로 바닥과 벽, 천장은 하얀색이었고, 커튼을 비롯한 주요 장식물들이 다양한 톤의 핑크색을 띠고 있었다.
“와, 이 커튼 좀 봐.”
정말 유치하고 사랑스러운 게 딱 내 취향이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표정을 숨기려야 숨길 수 없었기에, 에녹은 뒷짐 지며 그런 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황궁의 로비가 이래도 될까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예쁘면 그만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마음에는 들지만요, 정말 이래도 되나요? 그리고 에녹은…… 핑크색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은데.”
“누가 그런 말을. 나도 좋아합니다.”
이런저런 말장난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2층 계단으로 향했다.
“벤틀리, 이제 케이시와 함께 있으렴. 이따 저녁때 보자.”
벤틀리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한 후, 아이를 유모에게 맡겼다.
“케이시. 벤틀리를 데려가 주세요.”
“예, 황후 폐하.”
벤틀리는 아직 어려서 본궁에서 우리와 함께 지냈다. 황실에서는 보통 여덟 살 정도가 되었을 때, 황태자궁으로 옮긴다고 한다.
“에녹은 몇 살 때 황태자궁으로 갔어요?”
“나는 여섯 살에 옮겼습니다. 보통보다는 조금 빨리 옮긴 편이죠.”
“……그땐 에녹도 한참 어린데, 외롭진 않았어요?”
어린아이가 큰 성에 홀로 지내면 외롭고 무섭지 않을까. 물론 유모도 있고 곁에 사용인들도 많긴 했겠지만.
“으음, 조금 이른 일이긴 했지만. 여기선 그게 당연한 일이라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난 벤틀리가 여덟 살이 돼도 보내기 싫을 것 같은데.”
“그건 황후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굳이 억지로 멀어질 필요는 없죠.”
응접실에 들어가 에녹과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다행히 오늘은 즉위식 날이고, 저녁때 무도회가 있을 예정이기 때문에 둘 다 아직은 업무를 시작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마냥 놀고 있기에는 쌓여 있는 일이 너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소파에서 쉬면서도 손에서 서류를 놓을 수가 없었다.
“후우…….”
언뜻 파악하기만 했지만 역시나 예상대로 양이 상상을 초월했다. 황제보다 많진 않지만, 그래도 황제는 보좌관을 비롯하여 도와주는 사람들이 수십 명이 된다.
하지만 역대 황후들은 거의 다 홀로 업무를 해결했다. 과로사하지 않은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에녹, 나도 보좌관을 뽑아야겠어요.”
에녹이 서류에서 흘긋 시선을 비껴 나를 보았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그럼 황후의 집무실을 조금 더 넓은 곳으로 옮기도록 하죠.”
뭔가 설득할 말을 할까 했지만, 그는 예상대로 별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동의해 줬다.
나는 내 서류에서 눈을 떼고 에녹에게로 찰싹 붙었다. 그가 보는 서류를 훔쳐보며 말을 걸었다.
“에녹은 뭐 해요?”
“곧 수도에 아카데미가 개원하니까요. 그에 관한 서류들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흐응, 이제 드디어…….”
드디어 많은 노력 끝에 수도에 아카데미가 탄생했다.
아카데미는 고등 교육 기관이었고, 각 영지의 학교에서 일정 성적 이상 거둔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었다. 입학 자체는 평민과 귀족을 구별하지 않았다.
훗날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면, 평민이라 해도 국가에 채용되어 일을 할 수 있었고, 큰 공을 세우면 작위를 받을 수도 있었다.
한마디로 ‘개천의 용’이 탄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한 것이다.
‘나도 나중에 그들 중에서 사람을 뽑아 볼까.’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다시 종이 위로 시선을 옮겼다. 마법석 광산 사업도 아직 한창이었다. 그곳에서 나온 마법석을 개발하여, 각국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었다.
“황후 폐하, 이제 준비하셔야 합니다.”
안나의 부름에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에녹이 안쓰럽단 눈으로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다녀오세요.”
“어휴.”
그 웃음은 여전히 예뻤지만, 어쩐지 속은 기분이 들었다. 황후가 이렇게 힘든 직업이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어쨌든 쉬는 시간이었지만, 전혀 쉬지 못한 채 나는 곧장 무도회에 참석할 준비를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