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7화
“비전하, 얼마나 기쁘세요. 황후 폐하께서 그렇게 신임하시니.”
내게 아부성 인사를 건네는 체스트 백작 부인을 보며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이것이 신임인 걸까?
“그래도 너무하세요, 비전하. 수도에 오시고 한 달 만에야 저희를 불러 주시다니.”
“비전하께서 오시자마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잖아요.”
“맞아요, 그런데 무도회는 언제 열릴까요? 정말 기대되는걸요.”
“비전하께서 오시면 자주 열릴 줄 알았어요.”
나도 자주 열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정말 없었다.
재잘거리는 부인들의 목소리를 듣던 나는 호로록 차를 들이켜며 태연하게 말했다.
“안 그래도 곧 황제 폐하의 생신에 맞춰 무도회 준비를 하라고 전달 받았어요.”
“와아, 그러고 보니 한 달도 안 남았네요. 이번 무도회는 그럼 비전하께서 책임자이신 거군요?”
“네.”
달칵, 찻잔을 내려놓았다. 한숨이 새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 냈다. 어느 정도 적당히 하고 돌아가 줬으면 좋으련만, 이 부인들은 갈 생각이 없는 듯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다.
나로서도 이런 대화나 만남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정말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그럼 즐거웠어요. 다음에 뵐게요.”
겨우겨우 티 파티를 끝내고 난 후, 나는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의 문을 열자마자, 아까보다 더 높게 쌓여 있는 서류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안나! 혹시 이거.”
“네, 방금 전 시종이 더 두고 갔어요.”
“맙소사…….”
나는 결국 꾸역꾸역 책상 위에 앉아 맨 위에 있는 것부터 한 장씩 살펴보았다. 그러다 왜 일이 이 지경이 됐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왜긴 왜겠어, 황후 폐하 때문이지.’
와그작-.
이것도 어찌 보면 시댁 살이가 아닌가?
“……비전하! 서류가 다 구겨졌어요!”
“아, 응.”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잡으며, 다시 내용에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황후는 내가 수도에 오자마자 불러들이더니, 황후의 권한 중 절반 이상을 내게 넘겨주었다. 그때는 신이 나서 뭣도 모르고 금고 열쇠며, 도장이며 받아 왔었다.
만일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사양했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비전하, 클리포드 영지에서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밖에 있던 에밀리가 들어와 내게 고했다.
“들여보내세요.”
일은 많아졌지만, 그만큼 권한도 커졌고 할 수 있는 것도 많아졌다.
클리포드 성에는 이제 보육원뿐만 아니라 학교도 세워졌다. 그곳의 초대 이사장이 바로 나였다.
“어떤가요? 운영하는 데 무리는 없나요?”
“아주 호응이 좋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점이 생겼습니다.”
“뭐죠?”
“주변 지역의 귀족 자제들도 입학시키고 싶다는 청원이 들어왔습니다. 어찌 해야 할지…….”
확실히 나로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긴 했다. 귀족가는 각 가문마다 나름대로의 교육 방식이 있었기 때문에 학교는 선호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일단은 보류하세요. 생각을 좀 해 봐야겠군요.”
“예, 알겠습니다.”
그가 나가는 것을 보며 슬쩍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학교의 수업 질 향상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선생님을 초빙해 왔다. 평민들을 위한 학교라 하여 대강대강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반응이라면 설득에 어렵지 않겠는데?”
아무튼 귀족 자제들에 대한 학교 입학은 저녁 때 에녹과 상의하면 될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기지개를 한번 켜고는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정말 하루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만큼 정신없었다.
***
“에린.”
책상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조심스럽게 나를 깨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 에녹.”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네요.”
나는 혹시나 침이라도 흘리진 않았을까, 입가를 훔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스스로도 의아하긴 했다. 아무리 일이 많이 밀려 있다지만, 책상에서 잠이 든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에녹도 근데 늦게 왔네요. 피곤할 텐데.”
“나는 괜찮습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직이요, 간단히 요기라도 할까요?”
“그러죠.”
에녹과 내가 1층으로 내려가자, 주방장이 늦은 저녁을 뚝딱 만들어 내어놓았다.
내가 평소 좋아하는 양송이 수프와 토마토 샐러드, 치즈 조각과 과일이 차려졌다.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양송이 수프를 스푼으로 떠서 한입에 삼켰다. 그런데 갑자기 수프에서 흙 비린내가 확 올라왔다.
“……욱.”
“에린?”
내 잔에 샴페인을 따라 주던 에녹이 놀라서 냅킨을 받쳐 주었다.
“이거, 버섯이 좀 상한 것 같은데요.”
그러자 에녹이 바로 주방장을 호출했다. 주방장은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버섯이 상했을 리 없습니다! 이건 바로 오늘 들어온 버섯인걸요!”
하지만 그러기엔 아직까지도 입에서 버섯 특유의 흙 비린내가 너무 심했다.
“그럼 직접 먹어 보게.”
나는 그릇을 그에게 건네주었고, 주방장은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 보다 스푼으로 살짝 떠먹어 보았다.
“……송구하지만.”
“어떤가?”
“저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그저 양송이 수프인걸요.”
주방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없어.”
“이리 줘 보게.”
내가 바로 부정하자 에녹이 그릇을 달라며 손을 뻗었다. 주방장은 슬쩍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수프 그릇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에녹 역시 슬쩍 수프의 맛을 보았다.
“어때요? 이상하죠?”
“……음.”
에녹이 난감한 듯한 시선으로 나를 보더니 다시 한번 먹어 보았다.
“에린.”
“네.”
주방장과 내가 동시에 그의 판정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프는…… 내가 먹기엔 괜찮은 것 같습니다.”
“괜찮다고요?”
나는 서둘러 다시 수프 그릇을 가져와 한 스푼 먹어 보려다, 확 올라오는 비린내에 다시 멈췄다.
곧장이라도 속이 뒤집어질 것 같은 느낌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에린!”
“비전하!”
“따라오지 마요!”
정원까지 나가 풀숲에 대고 속을 게워 냈다. 하지만 딱히 먹은 게 없어 나오는 것은 없었다.
말을 듣지 않고 따라온 에녹이 내 등을 두드려 줬다. 한참을 그러다 고개를 들자, 그가 손수건으로 내 입가를 닦아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지금 당장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콜록, 콜록, 아니 그렇게까진.”
안나와 세리아도 쫓아와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안나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우리는 모두 그 조용한 목소리에 주목했고, 갑작스레 시선이 쏠린 안나가 당황하며 더듬거렸다.
“그, 비전하, 달거리가 늦어지시는 게…….”
순간 나에게도, 내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도 스치는 생각이 있는 듯 시선을 맞췄다.
에녹이 일어나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가서 궁정의를 불러와라. 어서 당장!”
“예, 전하!”
“저기…….”
나의 작은 목소리는 그 사이에 묻혀 버렸다.
“에녹.”
“일단 침실로 가서 누웁시다.”
“앗……!”
에녹은 나를 부축하려다 아예 번쩍 들어 올렸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옮겨지며, 홀로 곰곰이 날짜를 세어 보았다.
‘정말……? 설마…….’
침대에 눕혀지고 긴가민가한 사이에 궁정의가 한달음에 도착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
“인사는 됐고 어서 비를 봐 주게.”
“예? 예, 알겠습니다.”
궁정의가 조심스럽게 내 손목을 잡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뜨더니 내게 물었다.
“비전하, 마지막 달거리가 언제였습니까?”
“지난달 초? 그런데 가끔 늦어지기도…… 해서.”
에녹이 그새를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임신인가?”
“예, 그렇습니다. 아기를 가지셨습니다. 아마도 이제 두 달은 되셨을 겁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렇게 궁정의가 뭐라 지시하며 나갈 때까지 가만히 있다 배를 쓸어 보았다. 임신이라고? 내가?
아, 그래서 양송이 수프가……. 그건 입덧이었나? 한참 만에야 사고가 하나하나 이어져 갔다.
내 임신 소식을 알자마자, 내 주변인은 왠지 모르게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고 에녹은 내 곁에 앉아 따스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녹.”
“에린, 우리 아기가 생겼다고 합니다.”
“…….”
“당신 일을 줄여야겠습니다. 아니, 아예 하지 마십시오. 이제부터 무리하면 절대 안 됩니다.”
“아, 아니에요. 그렇게까진……. 음, 다는 말고. 조금은 남겨 둬도 괜찮아요.”
괜찮다고 하려다 급히 노선을 돌렸다. 확실히 지금은 일이 너무 많기는 하다. 하면서 나름 재미있기도 했지만, 아기가 있다면 조심하긴 해야겠지.
그리고 황후 폐하의 업무는 귀족들의 사업과 관련성이 커서 아직 내가 손대기엔 무리인 것들이 많았다.
“오늘 저녁을 아무것도 못 먹었는데. 먹고 싶은 것은 없습니까?”
“그냥…… 달콤한 푸딩이라든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에녹이 고개를 돌리자마자, 시녀 한 명이 후다닥 뛰어나갔다. 그 모습에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모두가 나를 애지중지하며 아껴 주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
다음날 아침, 조용하던 황태자궁이 일찍부터 부산스러웠다.
황제, 황후 폐하께서 내 임신 소식을 듣고 축하해 주기 위해 행차하신 것이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둘을 응접실 상석으로 모시고, 차 대접을 했다.
“축하해, 아들일까, 딸일까?”
황후가 웃으면서 묻는 질문에 에녹이 진지하게 답했다.
“아들이든 딸이든, 제 다음 황제가 될 겁니다.”
“마법사로 태어나야 가능한 것이지.”
황제의 말에 에녹이 잠시 뜸을 들이다 나의 배 쪽을 바라보았다.
“분명 이 아이가 이어받았을 겁니다.”
“그래, 뭐 그건 네 뜻대로 하려무나. 안 그래도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러 왔다.”
황제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잘됐다는 듯이 응수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 에녹과 내가 서로를 쳐다보는데, 황후가 찻잔을 들며 황제의 말을 이어 받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상황이 안정되는 대로, 우리는 너희에게 이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