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125)화 (125/129)

외전 06화

“먼저 마드렌 자작, 영지의 재정에 관한 장부를 가져오라 했는데, 갖고 오셨나요?”

“예, 여기 가져왔습니다.”

마드렌 자작은 긴장하며 내게 서류철을 건넸다. 나는 팔랑거리며 종이를 넘겨 보았다. 사실 이것은 보기 편하게 만들어 놓은 요약본이었다.

이제 내가 이곳의 살림을 완전히 맡는 입장도 아니었으니, 이것이면 족했다.

“사실 클리포드 공작…… 아니, 그분께서 사라진 이후 영지는 최소한의 경제 활동만 하고 있기 때문에 정리할 부분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잠시 장부들을 살펴보면서, 클리포드 영지의 가용 예산이 얼마나 있나 파악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엘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엘리아나 양.”

“예, 비전하.”

“이제 성 안을 관리하는 중책을 맡게 됐네요. 힘들지는 않나요?”

“성을 단순히 관리하는 일이라 어렵지는 않아요. 모시는 상관도 없어서 현상 유지만 하면 되는걸요.”

“별궁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나요?”

“지금은 딱히…… 그냥 텅 비어 있죠.”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곳을 활용할 순 없을까.

“보육 시설을 만들어 볼까 해요. 두 분께서 좀 도와주셔야겠어요.”

일단 말을 꺼냈고, 그들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보며 조금 더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일단 범위는 성 주변 마을 주민이 대상이에요. 일하느라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없는 사람들 위주로 운영하는 거죠.”

“평민 아이들을…… 돌본다고요? 굳이 그럴 필요가…….”

내키지 않는 듯, 중얼거리는 마드렌 자작을 엄한 목소리로 불렀다.

“마드렌 자작.”

“예, 전하.”

“경의 의견을 듣고자 부른 것이 아닙니다.”

“송구합니다.”

마드렌 자작은 즉시 사과했지만, 표정으로 보아하니 이해를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나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차근차근 설득을 해야 하긴 했지만, 이 세계에서는 전혀 없었던 일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일단은 운영을 시작하고 결과를 눈으로 보여 준 후에,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곳에서의 일이 나름대로 성공리에 정착한다면, 수도의 귀족들에게도 조금 더 수월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클리포드 성의 예산으로 부족하다면, 제 사비로 보태 드릴 겁니다. 일단 아이들을 돌보고 급료를 받을 사람부터 수소문해서 구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엘리아나 양은 별궁을 말끔히 청소해 주세요.”

“예, 전하.”

마드렌 자작과 달리 엘리아나는 고분고분 내 이야기를 들으며 경청했다. 아무래도 평민 아이들 대상이다 보니 귀족인 마드렌 자작보다는 좀 더 와닿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어서 더 필요한 부분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고 지시를 한 후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다.

***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 속에서, 한 달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게만 느껴졌다.

해가 뉘엿뉘엿 질 시간, 아이들이 각자 부모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 장면을 2층 창문에서 에녹과 함께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다행이에요, 호응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비께서 하는 일인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다 해도 다시 처음부터 하면 되지요.”

에녹이 소파로 나를 이끌었다. 그가 소파 끄트머리에 앉고, 나는 그의 허벅지를 베고 길게 누웠다.

“에녹은 나한테 너무 물러요.”

“……안 됩니까?”

“이번 일은 다행히 일이 잘 풀렸지만, 내가 그러다 나라 살림 거덜 내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럼 다시 열심히 벌어들여야겠죠. 그런데, 에린. 보육원 초기 운영비를 사비로 지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이마를 쓰다듬는 손길을 즐기며 나는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부드러운 살갗의 감촉이 피로감을 녹여 주며 노곤하게 만들어 줬다.

“어떻게 될지 몰라서요. 그리고 어차피 마법산 광산 수익이 많이 남아서…… 따로 쓸 데도 없고요.”

“…….”

에녹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눈을 반짝 뜨면서 피식 웃었다.

“지금 결혼 잘했다고 생각했죠?”

“……아.”

에녹은 할 말을 잃은 듯, 시선을 피했고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아 일부러 에녹이 나와 눈을 맞추게 했다.

“아니에요? 무슨 생각 했어요?”

“……훗날 평민 자제들을 위한 학교가 세워졌을 때, 거기서 나온 인재들을 어떻게 활용할까 하고……. 물론 이것은 다 그대의 공입니다.”

뒤늦게 원하는 답을 붙이며 에녹이 겸연쩍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말에 나는 돌연 기분이 더 좋아졌다.

“거기까지 생각했어요?”

내 교육 사업과 연계하여 국가 인재들을 뽑을 생각을 하다니, 이러면 교육 사업도 장기적으로 안정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귀족들에게도 그들의 영지에서 인재가 나올 때마다 어떤 인센티브를 준다면, 조금 더 호의적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와아…… 에녹.”

내가 눈을 빛내며 바라보자, 에녹의 의아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왜 그런 눈으로…… 엇.”

나는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잠시 굳어 있던 에녹이 곧 등을 끌어안아 주었다. 귓가에 달콤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또 반했습니까?”

그 목소리에 살짝 몸을 떼며 눈을 흘겼다. 하지만 반박할 순 없었다. 대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그의 얄미운 입술을 내 입술로 막아 버렸다.

오늘이 클리포드 성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 밤이었다.

***

떠나기 전, 나는 성 안 곳곳을 살펴보며 마지막 점검을 했다.

“이쪽에 장미랑, 저쪽은 해바라기…….”

별궁 주변을 꽃과 나무들로 조금 더 예쁘고 알록달록하게 꾸미도록 지시를 했다.

“황태자비 전하! 이제 떠날 시간입니다!”

“아, 가야겠네. 나머지는 서신으로 보고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전하.”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정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곳의 귀족들과, 인부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그 수가 몇십 명은 되어 보였다. 그들은 일제히 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비전하.”

마드렌 자작이 맨 앞에 나와 있었고, 에녹이 곁으로 와서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왜 모두들 나와 있는 거죠?”

“전하들을 배웅하고 싶다고 하도 성화길래 데리고 나왔습니다.”

“아아.”

내가 막상 그들을 쳐다보자, 그들은 쑥스러운 듯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모두들, 잘 지내세요.”

“저, 비전하.”

그러자 그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와 머뭇거리며 손에 들린 풍성한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이름 모를 들꽃으로 만든 꽃다발이었지만, 은은한 향기가 산들산들 배어 나와 기분 좋게 만들어 줬다.

“꽃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아이들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용이 부담스럽진 않나요?”

사실 보육원은 완전히 무료가 아니었다. 거의 모든 비용을 성에서 부담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원비는 지불하게 했다.

“아니요, 애들 없으니 더 일에 집중할 수 있어서 소득이 늘었습니다. 마음이 편해졌으니, 그에 비하면 아주 적은 액수죠.”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듣고 있던 에녹이 옆에서 마드렌 자작에게 한마디 보탰다.

“운영에 어려운 점이 있다면 바로 보고하게.”

“예, 전하.”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우리는 마차에 올랐다. 나는 마차에 오르기 직전 한 번 더 클리포드 성을 돌아보았다. 이곳에 또 언제 오게 될까.

참 나에게는 많은 사연이 있는 곳이다. 높은 성벽 한쪽 귀퉁이는 여전히 무너진 채 그대로였다. 마왕전을 치렀던 흔적을 일부러 보수하지 않은 채 남겨 두었다.

아직도 몇몇 백성들은 이전보다 삶이 나아졌음에도, 클리포드 공작가를 그리워한다고 했다. 어떤 마음인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의 긴 행렬이 출발했다. 나는 잠시 밖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들르지 않았나 봐요.”

“아무래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요.”

보고를 받아 보니, 클리포드 영지도 예외 없이 대형 몬스터들이 출몰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금발의 용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다행히 클리포드 성 내에 기사들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정도라 큰 사고는 없다고 했다.

‘어디서든, 살아만 있다면.’

열어 놓은 창문으로 포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긴 핑크빛 머리가 바람에 휘날리며 시야에 어른거렸다.

완연한 봄이 찾아왔다.

***

장장 육 개월에 걸친 신혼여행을 마치고, 이제 막 수도에 도착했다.

성문을 지나 대로의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팡파르와 축포가 울려 퍼졌다. 이곳부터는 위에 천정이 없는 의전용 마차로 갈아탔다.

“황태자 전하 만세!”

“황태자비 전하 만세! 신녀님 만세!”

수도의 백성들이 나와 환호성을 지르고, 하늘에는 색색의 꽃잎이 휘날렸다.

그들 하나하나의 표정에서 반가움과 기쁨이 넘쳐흘렀다. 그저 황태자 부부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왔을 뿐인데, 이런 환대라니.

확실히 칼리스 제국의 제국민들은 리케포로스 황실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다. 그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함과 동시에 부담감이 느껴졌다.

문득 손등 위에 온기가 느껴졌다. 에녹을 쳐다보니 그가 웃으며 백성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줬다.

“인사 정도는 해 주세요, 나의 비.”

그의 말에 나도 살짝 손을 들어 흔들어 줬다. 환호성이 더욱 크게 들렸다.

정신 차리고 앞을 보니 어느새 황궁 입구가 보였다. 그곳에는 황제와 황후, 귀족들이 모여 우리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와 황후는 같은 모양의 하얀 제복을 커플 복처럼 입고 있어 눈에 확 들어왔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귀족들이 허리를 숙이며 뒤로 물러나 길을 터 줬다.

나와 에녹은 나란히 황제 부부 앞에 서서 인사를 했다. 치맛자락을 들며 무릎을 굽혔다.

“다녀왔습니다, 황제 폐하, 그리고 황후 폐하.”

“어서 오렴, 무사히 다녀와서 다행이구나.”

황후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씨익 웃었다. 왠지 모르게 그 웃음이 단순히 반가움을 표하는 눈웃음은 아닌 것 같아 의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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