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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124)화 (124/129)

외전 05화

슬쩍 곁눈질로 보니, 에녹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 네. 우리 황태자 전하는 얼굴도 잘생겼고, 마법도 잘 쓰시고, 검도 잘 쓰시죠.

저렇게 질투가 많은 사람인데, 루퍼트랑 내가 법적으로나마 부부로 지냈던 시절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언젠가 물어봤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물론 그때도 속은 뒤집어졌지만, 어차피 당신은 내게 올 게 분명했으니까요.”

“아니, 그걸 어떻게 확신해요? 내 마음이 어떻게 될 줄 알고.”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게 더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왕자병 말기 같은 대답을 하는 것이다. 아니지, 그는 진짜 왕자, 아니 황태자였지.

결국 나는 그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

한 달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 버렸다. 이 서늘한 공기에 적응할 만하니 떠날 시간이 오고 만 것이다.

로텐슈타인 성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 우리는 아침 식사 후 길을 떠나기로 했다.

풍랑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짐들은 로텐슈타인 공작과, 수도에서 추가로 보낸 물건들로 어느 정도 충당할 수 있었다.

마지막 배웅하러 나오는 길에는 데이지도 함께 있었다. 데이지는 어디서 배웠는지,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예법에 맞게 인사를 했다.

“조심히 가세요, 황태자 전하, 황태자비 전하.”

그녀가 사뿐히 치마를 들어 올리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데이지 양. 다음에는 수도에서 볼 수 있길 바라요.”

나는 슬쩍 미소를 띠며, 훗날을 기약하는 인사를 했다.

“아, 저…….”

내 인사에 데이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반면에 공작은 희미하게 웃으며 내 말에 화답했다.

“예, 조만간 수도에서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그의 확실한 태도를 보니, 조만간 데이지는 ‘로텐슈타인 공작 부인’으로서 수도에 오지 않을까.

그것이 기대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됐다. 살벌한 수도의 사교계를 순진한 그녀가 견딜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염려하는 건, 순전히 내 오지랖이었으므로 일단은 속으로만 넘기며 그들의 앞날을 조용히 축복해 줬다.

“그럼, 또 보지.”

“예, 그럼.”

에녹의 간단한 인사말에 로텐슈타인 공작이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려는 순간, 그 맞은편에서 에녹이 손을 쑥 내밀었다.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에녹의 손을 잡고 마차 위에 올라탔다. 북부 공작에 관한 오해는 풀렸어도, 싫은 건 싫은 모양이었다.

로텐슈타인 공작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며, 아무렇지 않게 손을 거둬들였다. 공작성에 있는 내내, 에녹의 은근한 견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심히 가십시오.”

모두의 인사를 끝으로, 드디어 마차가 출발했다. 맨 앞에 두 명의 호위 기사가 출발했고, 뒤이어 같은 모양의 마차 두 대, 그리고 짐마차 세 대가 줄지어 따라오고 있었다.

같은 모양의 마차가 두 대인 것은 혹시 있을지 모를 습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지금 우리는 제국 영토의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지금은 황실의 소유가 되어 버린 클리포드 성과 영지가 있었다.

주인이 바뀐 후, 그 지역에 남아 있는 귀족들과 영지민들을 살펴보고 위로하기 위해 일부러 그곳으로 방향을 정했다.

높은 산맥을 기준으로 하여 북쪽과 남쪽의 기후가 확 달라졌다. 산을 넘기 전에는 두꺼운 외투를 항상 걸쳤었는데, 산꼭대기를 지나 내려오다 보니 두꺼운 외투가 점점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는 외투를 벗고 창문을 열었다.

“……아.”

그리고 창문을 열자마자 작게 탄성을 질렀다.

저 먼 곳에 있는 익숙한 형태의 성이 한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성은 그 주인이 바뀌었지만, 아무 변화 없이 위풍당당하기만 했다.

클리포드 성에서의 좋은 기억은 없다고 생각했건만, 그래도 그곳을 간다 하니 설레는 마음 반, 걱정되는 마음 반이었다.

전 클리포드 공작 부인이었던 나를, 이제는 황태자비가 되어 버린 나를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혹, 배신자라고 생각하진 않을까?

“에녹.”

맞은편에서 책을 읽고 있던 에녹이 내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클리포드 성에서는 얼마나 있나요?”

“가서 봐야 알겠지만, 그곳에서도 한 달 정도 있을 예정입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요, 그냥.”

“혹시 그곳에 가는 게 불편하시면, 방향을 바꾸도록 하죠. 나중에 들려도 되니까요.”

에녹의 친절한 염려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수도에 가면 정신없을 텐데, 언제 여기에 들르겠어요.”

예전 같았으면 나 편할 대로 했겠지만, 그래도 이제 일국의 황태자비가 아닌가. 나는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최대한 일정을 빨리 소화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아직까지는 그곳이 어색했기 때문에, 서두르겠다는 그의 말을 거부하지 않았다.

***

에녹은 자신의 말을 지키려는 듯, 도착하자마자 성 내에 쌓인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가 그렇게 바쁜 동안에, 나 역시 황태자비로서 할 일이 있었다.

일단은 이 지역이 침체되지 않게 하기 위해, 외성에 있는 생산지들을 돌아보며 독려하고 고충을 살펴 주기로 했다.

데이먼 로젠 백작이 여전히 내 호위 기사를 맡고 있었다. 그를 비롯한 다섯 명의 호위 기사들이 다니는 곳마다 든든하게 내 주위를 지켜 주었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성에서 가까운 농장이었다.

이 농장 역시 원래는 클리포드 가의 농장이었고, 이곳의 수확물 역시 클리포드 성에서 쓰였다.

북부 지방에서 했던 것처럼, 농장 관리인에게 이곳의 어려운 사정에 대해 들어 보았다.

“중간 관리자들이 싹 교체된 이후로는 크게 어려운 점은 없습니다.”

“다행이네.”

그의 말을 듣는 동시에 눈으로 농장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곳에도 어린아이들이 꽤 많이 보였다.

“아이들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부모들이 일하러 나오는 사이 돌봐 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대부분 그냥 데리고 나오는 겁니다. 조금 큰 녀석들은 일을 도와주면서 어느 정도 삯을 받아 가기도 하고요.”

“그래…….”

북부에서도 그렇고, 이곳에서도 평민 아이들은 대부분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아마도 이것은 농장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목장, 마구간, 대장간, 공방, 수공예품 제작소 등등 성에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서 마을을 이루며 살아가면서 출퇴근을 했다.

그곳의 아이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건 아까운 일이야…….”

“네? 무엇이 말입니까?”

“아닐세.”

귀족 아이들은 집집마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교육을 받지만, 평민 아이들은 운이 좋아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하는 듯했다.

아마 제국에서도 일부러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관행적으로, 신분제가 당연한 사회였기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거다.

아마 나도 이곳에서만 계속 살았다면,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앞으로 황후가 되었을 때 해야 할 일이 눈에 보였다.

***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보육원도 같이요.”

에녹이 저녁 식사 테이블에 앉자마자 내가 꺼낸 말이었다. 그는 조금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계속 말하라는 듯 눈짓을 했다.

막상 말하려고 하니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그러니까…… 제 말은…… 평민 아이들이 여기저기…….”

내가 말을 하다 조금 주저하자, 에녹이 자신의 접시 위에 있는 고기를 썰어 내 입에 쏙 넣어 주었다.

우리는 황궁에서도 그렇고, 어딜 가서든, 테이블이 얼마나 크든지 간에 서로 가까운 곳에 앉아 식사를 했다.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이야기하세요.”

나는 입에 들어온 고기를 오물오물 씹으며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꺼냈다.

“……황후가 되면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일들.”

“평민을 상대로 하는 교육이라면 아마 반대하는 귀족들이 있을 겁니다. 뭐, 황권으로 밀어붙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 협조를 얻기가 어렵겠죠.”

“으음, 그냥 뚝딱 세울 수 있는 일이 아니군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정치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들이 얽혀 있었다.

“전국적으로는 그렇겠지만, 부분적으로는 상관없을 겁니다.”

“그럼…… 이곳부터 조금 손대 봐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여기는 황실령이니까요. 원하는 대로 하세요. 지원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말씀하시고요.”

에녹은 고맙게도 전적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믿어 주었다. 그와 이런저런 방법에 대해 논하면서 즐겁게 저녁 식사를 했다.

목적이 생기자마자, 이곳에 와서 조금 무기력했던 기분에 활력이 생겼다.

다음날 바로 이 성의 안살림을 맡고 있는 엘리아나와 행정적인 일을 맡고 있는 마드렌 자작을 불러들였다.

모두 첫날 간단히 인사하긴 했지만,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마드렌 자작의 인사를 보면서 엘리아나도 같은 인사말을 건넸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나는 응접실 소파 가운데 자리에 앉은 채로 그들을 맞이했다.

둘은 양쪽 소파에 마주 보며 조심스레 앉았다. 하녀가 차를 내어 올 때까지 나는 일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앉아서 나를 흘끔대는 모습이 아직은 이 상황을 어색해하는 것 같았다.

물론 이전에 만났을 때도, 소공작 부인이었으니 이들의 상관이면서, 동시에 이 성의 안주인이었다. 때문에 나로서는 바뀐 게 없었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이들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 노력하진 않았다. 지금부터 하는 일들은 어느 정도의 권위와 복종이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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