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4화
그래도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런지, 에녹은 나름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입가에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그는 사용인들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물론 표정만 풀렸을 뿐, 나를 단 한 번도 보지 않은 건 말할 것도 없다. 은근히 속이 좁다니까.
로텐슈타인 공작과 집사장은 성 내를 직접 설명하고 안내해 주었다.
제일 처음 찾아간 건, 이 성의 노부인 멜리샤 공작 부인이었다. 병중에 있는 그녀는 오래 보지 못했고, 간단히 인사만 하고 밖으로 나왔다.
“두 분이 쓰실 방은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달칵-
우리가 머물 방을 살펴보기 위해 2층으로 내려가는데, 갑자기 긴 복도 끝의 방이 살며시 열렸다. 무척 작은 소리였지만, 마침 조용했던 타이밍이라 모든 시선이 그곳에 쏠렸다.
“아…….”
빼꼼 내밀어진 얼굴에 깜짝 놀라 눈을 깜빡거렸다. 붉은 머리에 키가 작은 여자가 우물쭈물하며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못한 채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분은 누구시죠?”
내가 먼저 질문을 꺼내자, 로텐슈타인 공작이 한순간 당황하는가 싶더니 한숨을 쉬며 그녀를 불렀다.
“데이지, 나와.”
차림새를 보니 하녀는 아니었고, 또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걸로 보아 공작과는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았다.
“그대는 아직 미혼인 걸로 아는데.”
에녹이 묻자, 로텐슈타인 공작이 긍정하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맞습니다, 아직은.”
데이지가 타박타박 걸어 나오자, 로텐슈타인 공작의 눈에 한순간 온기가 서렸다. 그것을 보자마자 눈치챌 수 있었다.
저 ‘데이지’라는 여자가 북부 대공의 연인이구나. 그러니까 어딘가에선 여주인공일 수도 있겠구나.
“인사드려,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시다.”
“처음 뵙겠습니다, 데이지라고 합니다.”
데이지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공작은 조금 난감한 듯 말을 보탰다.
“죄송합니다, 아직 궁중 예절을 익히지 못했습니다.”
“반가워요, 데이지 양.”
나는 흐뭇하게 그녀와 공작을 바라보았고, 에녹은 무표정하게 데이지를 보다 곧 입을 열었다.
“어느 가문의 영애신지?”
“아, 그게…….”
그의 질문에 내가 놀라 에녹의 옆구리를 툭 쳤다. 그제야 마차에서 내린 뒤 처음으로 에녹이 나를 쳐다봤다. 딱 봐도 모르나, 데이지라고만 소개한 건 그녀가 귀족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 여인은 귀족이 아닙니다, 전하.”
공작이 대신 답했고, 그러자 에녹은 고개만 끄덕일 뿐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소개시켜 줬다는 건, 우리가 또 그녀를 마주할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이제 일 층으로 내려가시지요, 식사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알겠네.”
에녹과 내가 먼저 길을 나섰고, 공작은 따라오다 멈춰 서며 데이지를 보았다.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들을 보다 조용히 말을 건넸다.
“데이지 양도 식사 안 했죠? 함께 가요.”
“아, 저…… 그래도…….”
“감사합니다, 비전하.”
공작이 데이지의 손을 잡아끄는 것까지 본 후에, 나 역시 걸음을 옮겼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다. 홀로 뿌듯해하는데, 에녹의 시선이 내게 닿는 것이 느껴졌다.
***
식사 후, 목욕재계까지 마친 후에야 에녹과 단둘이 마주 앉아 있을 수 있었다.
“틀림없어요, 둘이 좋아하는 거라니까요.”
소파에 기대앉은 채 서류를 들여다보는 에녹에게 바짝 붙어 앉으며, 내가 예상한 가설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서로 좋아하는데 신분의 차이도 그렇고, 또 아직 노부인께서 살아 계시니 결혼하기가 쉽진 않겠죠.”
“흐음.”
에녹은 건성으로 끄덕거리며,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기댔던 몸을 살짝 떼며 눈을 흘겼다.
“에녹, 아까부터 계속 바쁜 척하는데, 지금 내내 같은 장만 보고 있는 거 알아요?”
종이를 쥔 손이 살짝 흔들리더니, 그가 스르륵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공작이 누굴 좋아하고, 그들이 어떻게 되든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아, 그래요? 뭐 그럴 수 있죠. 그럼 뭐에 관심 있어요?”
에녹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빤히 나를 가리켰다. 내가 눈만 깜빡거리자, 그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됐습니다.”
“어디 가요.”
그대로 일어나려는 그를 붙잡아 다시 앉혔다. 에녹은 순순히 앉다 말고, 결국 본론은 꺼내 놓았다.
“북부 공작이 주인공인 소설을 봤고, 거기 나온 주인공이 매력 있었다. 아까 그렇게 말씀하셨죠.”
“…네, 맞아요. 그런데 상상했던 이미지와 얼추 비슷해서 조금 놀랐던 거예요.”
내 말을 들은 에녹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뭔가 생각하는 듯,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말하기를 주저했다.
“왜요? 무슨 할 말 있어요?”
“그런 소설에서 황태자는…… 보통 무슨 역할로 나옵니까?”
그가 어렵사리 꺼내는 질문을 들으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북부 공작이 주인공이라면, 황태자는…… 그게 소설마다 다 다르긴 한데.”
“다르긴 한데?”
“제가 봤던 건 주인공을 방해하고, 방탕하고, 무능력한……. 아니 에녹, 에녹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거 알죠? 세상에는 분명 무능한 황태자도 존재할 거라고요.”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내 설명에 에녹은 심드렁하게 답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에녹, 가, 갑자기……!”
“갑자기라뇨, 밤이 된 지 오래입니다. 이제 자야죠.”
나를 침대 위에 사뿐히 눕히며, 에녹은 위에서 아래로 눈을 마주쳤다. 밤이 되면 이 사람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에녹.”
그를 향해 손을 뻗어 올리자, 그가 비뚜름하게 웃으며 몸을 낮췄다.
“내가 원하는 말을 뻔히 알면서.”
귓가에 속삭이는 음성에 어쩐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섞여 있는 듯했다.
“말을 빙빙 돌리시더군요.”
“무슨…… 말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그에게서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전혀 놓아줄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두 손을 위로 모아 강하게 옭아맸다.
“모르신다면, 오늘 밤은 알 때까지 괴롭혀야겠군요.”
꽤 유용한 협박에 나는 다급히 정답을 내어놓았다.
“아니, 에녹! 당연히, 당연히, 에녹이 이 세상에서 제일 멋있고 잘생겼죠! 그걸 꼭 말로 해야겠어요?”
“이미 늦었습니다.”
그는 단호히 답하며 짓궂게 미소 지었다. 저 미소를 보니 알 수 있었다. 오늘 밤도 자긴 글렀다.
***
로텐슈타인 성에는 약 한 달간 머무르기로 했다. 우리는 로텐슈타인 공작의 안내에 따라 북부 지역의 일부를 순행하곤 했다.
산양들을 키우는 목초지를 둘러보던 중, 에녹이 공작에게 말을 꺼냈다.
“영지에 어려운 점은 없나?”
그러자 공작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답했다.
“왜 없겠습니까, 이곳은 추운 곳이다 보니 경작할 수 있는 작물이 한정적입니다.”
“그럼 식량은 어디서 구하지?”
“가죽이나 이곳의 생산품을 판 돈으로 다른 곳에서 사 오는 편입니다. 하지만 지형상 거의 해상으로만 다녀야 하기 때문에, 날씨가 궂을 때는 어렵습니다. 그런 시기에는 식량이 모자랍니다.”
“그렇군.”
에녹이 고개를 끄덕거리다, 북쪽과 남쪽을 가로막고 있는 높은 산을 바라보았다.
“저 산을 통과할 수 있는 육로가 있으면 좋을 텐데.”
“네, 그럼 저희로서는 금상첨화이지요.”
“수도에 가는 대로 황제 폐하께 아뢰어 방법을 강구해 보지.”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둘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양 목장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어른들도 있었지만, 아이들도 있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은 풀과 흙으로 장난을 치며 놀았고, 조금 큰 아이들은 어른들의 일을 거들어 주고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양젖을 짜는 것을 보니,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에린, 이쪽으로 오세요. 이제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합니다.”
“아, 네. 가요.”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갔지만, 에녹이 부르는 통에 금방 잊어버리고 말았다.
마차에는 나와 에녹이 나란히 앉았고, 맞은편에 공작이 앉았다.
숲길이 지나가면서, 공작은 또 다른 고민거리를 꺼냈다. 원래 황태자 부부의 신혼여행이 민원 처리반 임무도 띠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최근 들어 대형 몬스터들이 눈에 띄게 급증했습니다. 아마 마법석 광산 때문이겠지요.”
마크가 들려 줬던 고민과 같은 내용이었다. 공작은 그에 관한 원인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오면서 이미 들었네, 이곳의 기사들로는 방비가 불가능한가?”
“처음에는 좀 버거운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나타나 꽤 많은 수의 몬스터를 해치우고 간 이후로는, 그래도 좀 수월해진 편입니다.”
“어떤 남자…….”
에녹과 나는 서로를 동시에 쳐다보았다. 아마 같은 생각을 떠올린 것 같았다. 나는 다급히 공작에게 물었다.
“그 남자를 직접 봤나요?”
“아니요, 기사들과 영지민을 통해 들었을 뿐입니다. 그자를 직접 본 기사들은 검술의 신과 같았다면서, 거의 숭배하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아. 혹시 머리가 금발이라고 하던가요?”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곳에서는 그자를 ‘금발의 용사’라고 부릅니다. 나중에 사례라도 하려고 수소문을 해 보았지만,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이야기에 에녹은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고, 내가 대신 그의 말을 받아 주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네요.”
“네, 천만다행이죠. 사실 대부분의 기사들은 국경을 지키고 있느라 자리를 비우기가 힘들거든요. 하지만, 그 금발의 용사라는 사람은 부러웠습니다. 그렇게 검을 잘 쓴다니…….”
“공작께서도 검을 잘 다루지 않으세요?”
당연히 북부 공작이라 하면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진 기사라고 생각하고 한 질문이었다.
그러자 공작이 조금 머쓱하게 답했다.
“쑥스럽지만, 저는 검술에는 소질이 별로 없습니다. 어릴 때 조금 배워 보긴 했지만 금방 흥미를 잃어 관두고 말았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도 그때 조금이라도 더 배워 둘 걸 그랬나 후회하곤 합니다.”
“아아, 그랬군요.”
의외의 답변에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을 조금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