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2화
“다행이에요. 그런데 여기는…….”
절벽 뒤로는 침엽수가 빽빽하게 들어찬 숲이 보였다.
“일단 이동하죠.”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바람은 거셌다. 젖은 몸으로 찬 바람을 맞으니 점점 체온이 내려갔다.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추위가 몰려왔다.
손을 잡고 앞서 걷던 그가, 물끄러미 뒤를 돌아보았다.
“에녹?”
그러더니 가볍게 내 양어깨에 손을 얹었다. 뭔가 알 수 없는 주문을 짧게 외우자 신기하게도 젖은 옷이 순식간에 말라 버렸다.
“에녹, 에녹은요.”
하지만 그 역시 젖어 있었는데, 그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난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없다. 지금 이 마법도 분명 무리했을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는 나뭇가지를 주워 그 위에 불을 피웠다. 무슨 수를 썼는지 젖었던 나뭇가지 역시 바짝 마르며 그 끝에 활활 불이 타올랐다.
“에녹.”
나는 그의 팔뚝을 지그시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마법 그만 써요. 이미 무리하고 있잖아요.”
그러자 에녹이 슬쩍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전보다 운용 능력이 훨씬 나아졌으니까요. 지금은 그런 것보다 여기를 빨리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입니다.”
그는 한 손으로는 횃불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으며 다시 걸어 나갔다.
나도 나름 신녀인데, 이럴 때는 정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방해는 되지 말아야지.
그렇게 숲을 헤매던 중,
“에녹, 저쪽에 불빛이 보여요.”
얼마 지나지 않아 민가가 보였다.
넓은 터에 대여섯 가구들이 이곳에서 모여 살고 있었다. 그와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맞추다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 보죠.”
더 이상 밖에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우리는 조심스럽게 한 오두막집으로 다가갔다.
에녹이 목을 한 번 가다듬더니, 문을 두드렸다.
“계시는가.”
조용하던 문 안에서 우당탕 소리가 났다. 우리는 한 발 물러서서 주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누구십니까?”
문이 열리고, 덥수룩한 수염 가득한 사내가 나와 우리를 경계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에녹 뒤에 있던 내가 슬쩍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배를 타고 가다가 뜻밖의 풍랑을 만나 이 숲까지 오게 됐어요. 하루만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나는 재빨리 양쪽 귀걸이를 빼내 그에게 내밀었다. 순간 몹시 당황한 건 에녹이었다.
“에린, 그렇게까지는.”
나는 단호한 눈길로 그에게 고개를 저은 후 다시 사내를 호소하듯 바라보았다.
“도와주면 돌아가서 충분히 사례하겠네. 그러니 에린, 이것은 넣어 두세요.”
“괜찮아요, 이런 것쯤은. 돌아가면 얼마든지 있다고요.”
우리의 실랑이를 들으며, 경계하던 사내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바뀌었다. 신분이 높다는 걸 알아챈 듯 보였다.
“크흠, 일단, 들어오시죠.”
나와 에녹을 번갈아 가며 관찰하더니 그가 문 앞에서 비켜 주었다.
“고맙네.”
에녹은 당연하다는 말투로 그에게 감사하며 들어갔다. 참 이럴 때 보면 황태자라는 게 티가 났다.
“고맙습니다.”
나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들어가며 귀걸이를 손에 쥐여 주었다. 망설이던 남자는 이내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안은 벽난로가 있어 훈훈했다. 방이 두 개가 있었고, 사내의 부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안에 있었다.
“죄송합니다, 하룻밤만 신세를 질게요.”
“아휴, 밖이 추운데 다행이네요. 그런데 이쪽 분만…… 홀딱 젖었군요.”
마른 수건 두 개를 가지고 나오던 그녀가 나와 에녹을 살펴보더니 에녹에게만 수건을 내밀었다.
“한 분만 젖어 있네요?”
신기한 눈으로 우리를 보던 그녀가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요, 배고프겠네요. 마침 다행이에요. 큰 애가 떠나서 방이 하나 비었으니까요. 오늘은 거기서 주무시면 되겠네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가 권하는 자리로 앉았다. 에녹 역시 수건으로 툭툭 머리를 털어 내며 옆에 앉았다.
“큰 자제분이 어디로 가셨나요?”
“썩을 놈이, 이런 산골짜기에 처박히기 싫다고 도시로 떠났습죠.”
사내가 부엌에서 가득 퍼 담은 수프 그릇을 들고 나오며 대신 답했다.
“어휴, 이 사람은 말을 해도. 근처 도시로 갔어요. 일자리를 구하겠다고.”
“변변치 않지만 많이 드십쇼.”
음식의 질은 투박해 보였지만, 양은 말 그대로 넉넉했다. 가볍게 감사 인사를 또 전한 후, 우리는 식사를 했다.
두 부부는 우리 맞은편에 앉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여인이 씨익 웃었다.
“제 이름은 로렌, 이 사람은 마크라고 해요. 귀족분들이시죠? 어쩌다가 이 산속에서…….”
“아, 반가워요. 로렌, 마크. 우리는…….”
나는 흘끔 에녹을 보았고, 에녹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신혼여행 중일세.”
“……아, 그러셨군요.”
에녹의 단답형에 부부는 다시 할 말이 없어진 듯 입을 다물었다. 신세 지고 있는 입장에 너무 당당한 거 아냐?
하지만 별로 불쾌해 보이지 않는 부부를 보며 나는 다시 말을 꺼냈다.
“그래도 낯선 사람인데 이렇게 자리를 내어 주셔서 감사해요.”
내 말에 로렌이 뭔가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 달 전인가, 그때도 갑자기 누군가 찾아왔었죠.”
“그런가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들으며 빵을 수프에 찍어 먹었다.
“그 사람이 우리에게는 은인이나 다름없었죠. 이 근방이 은근 크고 작은 몬스터가 많거든요.”
“아, 그랬군요. 그럼 안전한 곳에 가시지 않고…….”
그러자 마크가 손을 저으며 한숨 쉬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은 짐승이나 약한 몬스터밖에 없었습죠. 우리는 사냥꾼들이라 숲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위험한 몬스터들이 나타났다는 건가?”
묵묵히 듣고 있던 에녹이 질문을 던지자, 마크가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요. 그 사람이 나타나기 일주일 전쯤부터인가, 이 근방에 안 보이던 녀석들이 나타나서……. 특히 오우거 세 마리가 그렇게 속을 썩였죠.”
“그래서 한 달 전에 나타난 사람이 해치워 준 거군요?”
“맞아요, 정말 검 실력이 뛰어난 분 같았어요! 머리가 금발이었는데, 이름이 뭐랬더라…….”
내 물음에 로렌이 반색하며 답하고는 곰곰이 이름을 떠올렸다.
“아니, 이 사람아. 그걸 그새 까먹나. 로퍼트라고 하지 않았나, 로퍼트.”
“맞아요, 그런 이름이었어요.”
‘로퍼트’라는 말을 듣고 에녹과 나는 동시에 서로를 마주 보았다. 우리의 반응에 로렌이 두 손을 마주치며 말했다.
“어머나, 아는 분인가요? 안 그래도 그때 사례도 없이 떠나 버려서 수소문하려던 참인데요.”
“아, 아뇨. 안다기보단…….”
“우리 부부는 어디서 자면 되지?”
에녹이 느릿하게 일어나며 자연스럽게 로렌을 보았다. 잔잔하게 미소 띤 에녹의 얼굴을 빤히 보던 로렌이 왠지 붉어진 얼굴로 머뭇거리며 방 하나를 가리켰다.
“저, 저 방을 쓰시면 돼요.”
“이 여편네 왜 갑자기 말을 더듬어?”
나는 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잠자코 있었다. 이런 순간에 미남계를 쓰다니, 왠지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것 같다.
“고마워요.”
에녹이 먼저 들어가고 나는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따라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안이 깜깜했다. 에녹이 멋모르고 마법으로 램프에 불을 붙이려는 걸 보고는 바로 말렸다.
“잠시만요, 그럼 이상해 보이잖아요.”
내가 밖으로 나가 불씨를 받아 램프에 불을 붙였다. 마법사라는 게 꼭 비밀은 아니었지만, 공공연하게 드러낼 필요도 없지 않은가.
우리는 나란히 앉은 채 흔들리는 불꽃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저, 아까…….”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아까의 대화 중, 분명 마음에 걸리는 내용이 있었다. 에녹이 손을 겹쳐 잡으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녀석.”
마주 보는 눈빛에 그가 씨익 웃어 보였다.
“작명 센스가 별로군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따라서 픽 웃어 버렸다.
“그러게요. 로퍼트가 뭐예요, 로퍼트가…….”
마주 보며 웃던 우리는 웃음을 멈추고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맞겠죠?”
내 조심스러운 질문에 에녹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무사한 걸 알게 돼서 다행이네요.”
혼자 중얼거리다, 물끄러미 보는 눈빛에 괜히 찔려 허둥지둥 댔다.
“아, 아니. 내내 걱정했다는 뜻은 아니고요,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긴 하니…까요.”
“괜찮아요, 나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훗날 어떻게 할지, 묻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아직 에녹은 황태자였고, 루퍼트는 이 제국에서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로렌 씨가 떠다 준 따뜻한 물로 간단히 세수를 한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좁은 침대에 꼭 붙어 자느라 조금 불편했지만, 나름 따뜻하고 포근한 잠자리였다.
그런데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는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에녹은 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에녹, 에녹. 그만 일어나 봐요.”
가까스로 뜬 눈에는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는 힘겹게 일어나 앉으며, 긴 한숨을 쉬었다.
“많이 피곤해요? 어제 역시 마법을 무리하게 사용해서…….”
“아, 아뇨. 그냥 잠을 좀 설쳐서.”
조금 멍해 보였지만, 에녹은 고개를 저으며 툴툴 털고 일어났다. 뒷머리가 삐죽 솟은 것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그를 따라 나가며 뒤에서 손으로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
“일어나셨군요, 식사들 하세요.”
나가 보니 로렌은 이미 일어나서 아침을 차리고 있었고, 마크는 마을로 외출했다고 했다. 아침을 먹고 나가며 작별 인사를 했다.
“마크 씨에게도 인사 전해 주세요.”
“네, 그럼 좋은 여행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