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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118)화 (118/129)

118화

수업은 생각보다 다양하고 흥미로웠다. 백작가에 있을 때도 귀족으로서 교육받긴 했지만, 다양한 분야를 접하기는 힘들었다.

‘오히려 혜린일 때 이것저것 많이 해 봤지.’

지금은 지리 수업을 받고 있었다.

칼릭스 제국은 대륙의 동쪽에 있었는데, 제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해안가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엄청나게 큰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저기 북부 지방은 산으로 막혀 있네요?”

“네, 그래서 산을 넘어가기보다는 보통 해상으로 오고 갑니다.”

눈이 많이 온다는 곳은 저곳이겠구나.

“그러면 문화도 조금 다르겠어요.”

“맞습니다, 제국령이긴 하지만 자치를 인정해 준 곳이라, 그들만의 우두머리가 있고 제도와 문화도 조금 다르다고 합니다.”

“통제가 힘들지는 않나요?”

“제국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건 다른 게 아닙니다. 그들 너머에 있는 몬스터의 범람을 막아 주길 바라는 거죠. 그에 따른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으니, 통제에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죠.”

“아하…….”

나는 지리 교수가 가리키는 지도를 바라보면서 다시 물었다.

“그쪽에 몬스터가 많나요?”

“네, 특히 추위에 강한 대형 몬스터들이 많이 서식하는 편이라고 합니다.”

몇 번의 문답이 오고 간 후, 오전 수업이 끝났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나면 다음은 황족의 행동 규범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으으, 생각보다 일정이 타이트하긴 하구나.”

흥미로운 수업들이라 그나마 다행이긴 했지만, 조금 피곤한 것은 사실이었다.

“점심은 거르고…… 그냥 낮잠이나 좀 잘까.”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에밀리가 살짝 내 곁에 다가와 소곤거렸다.

“후원에 황태자 전하께서 와 계세요. 점심식사를 함께하러 오셨다는데.”

“아…… 그래? 또?”

물론 반갑기는 반가웠지만, 그는 오늘 아침에도 왔었다.

여기 처음 올 때만 해도 에녹은 바빠서 오기 힘들다고 하더니 거의 세 끼 중에 두 끼를 이곳에 와서 해결하고 있었다.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요?”

에녹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는 이미 익숙한 듯 하녀들이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바빠도 할 일은 해야겠기에.”

그는 빵 하나를 반으로 찢어 내게 건넸다. 왠지 요새 살찌는 것 같아서 안 먹으려고 했는데…… 막상 받아 먹어 보니 허기가 돌았다.

“저랑 밥 먹는 게 할 일이에요?”

“가장 중요한 일이죠. 혹시 내가 오는 게 싫으십니까?”

담담하게 묻는 목소리와 달리 입술이 미세하게 툭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참, 저런 모습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겠어.

“아니요, 그럴 리가요. 다만 무리하진 마세요.”

그러자 저렇게 금방 표정이 풀어진다. 확실히 에녹이 자주 와서 함께 식사를 하니 나 역시도 식사를 거르는 게 줄어들긴 했다.

루퍼트와 이혼 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을 때는 식사를 꽤 자주 걸렀었다. 귀찮을 때도 있었고, 답답해서도 있고, 바빠서이기도 하고. 바쁜 건 지금이 더 바쁜 것 같지만.

“시녀들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직요. 정말 누구로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일단 지원자 중에는 라파엘르 후작 부인이 있다고 합니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잠시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라파엘르 후작 부인이라…… 괜찮겠네요.”

그나마 아는 사이였으니까, 조금은 편하겠지.

“들어 보니 지원자가 꽤 많다고 하더군요. 먼저 한 명을 들이고 그 사람과 의견을 나누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그렇군요. 하긴, 그들끼리도 손발이 맞아야 하니까. 하녀 출신을 시녀로 올릴 순 없겠죠?”

물론 리아와 제니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옆에서 오랫동안 날 보살펴 온 그녀들이라 편하기는 제일 편했다.

에녹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준남작 정도의 작위를 줘서 시녀로 들이는 건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다지 추천 드리고 싶진 않군요. 시녀의 일은 생각보다 다양하니까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건 다음에 생각해 볼게요.”

“하녀들 중 지위를 높여 주는 방법으로 곁에 두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어차피 황태자비를 모시는 하녀들은 일반 귀족가의 하녀와 달리 중위 계층으로 분류됩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시녀는 단순히 수발을 들어 주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사교계 안의 소문을 전해 주기도 하고, 나 대신 소문을 만들어 주기도 하며 정치적인 우군이 되어 줄 사람들이다.

“저녁때 지원자와 추천인 목록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저녁땐 못 오시나요?”

내 질문에 에녹이 씨익 웃었다.

“아쉬우십니까?”

“아, 아니, 그렇다기보단…….”

내 반응을 보며 기뻐하던 에녹은 무척이나 아쉬운 듯 한숨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네, 아쉽지만 오늘 저녁은 일이 있어 못 올 것 같군요. 하지만 식사는 꼭 챙기세요.”

그렇게 몇 가지 이야기를 다 하다 보니 점심식사 시간이 지나 버렸다. 에녹은 나를 수업하는 곳까지 데려다준 후에 떠났다.

조금 귀찮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저녁때 안 온다는 말을 들으니 허전한 것 같기도 하고. 사람 마음이란.

***

오늘은 마담 플라다가 입궁을 했다.

그녀가 가져온 웨딩드레스와 베일을 보고 있자니, 이제 정말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실감이 났다.

“전엔 너무 말랐다 싶었는데, 지금이 딱 보기 좋아요.”

마담 플라다가 뒤에서 코르셋 모양을 잡아 주었다.

“그래요?”

느낌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찌긴 쪘나 보다.

“드레스 입으면 부해 보이지 않을까요?”

“전혀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는 사이, 그녀를 따라온 첼시가 엄청나게 커다란 가방에서 드레스를 꺼내 들었다.

“와, 정말…….”

“아름답죠?”

마담 플라다는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고, 나는 황홀해진 기분으로 드레스에 가까이 다가갔다.

“진짜 아름답네요, 세상에. 어서 입어 보세요.”

곁에 있던 에밀리를 비롯한 시녀와 하녀들도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마담 플라다와 첼시의 도움을 받아 웨딩드레스를 입어 보았다. 전신거울 앞에 서서 보니, 내가 나에게 반할 지경이었다.

윗부분은 자잘한 꽃무늬 레이스가 수놓아져 있었고, 아래의 치마는 하나의 꽃봉오리처럼 한 겹 한 겹 덧대어져 내려가고 있었다.

“이건 임시로 가져온 거예요.”

플라다가 티아라를 씌워 주고 거기에 베일까지 달아 주었다.

“이것도 너무 예쁜데요.”

“원하신다면 빌려 드릴 수 있지만, 아마 황실에서 더 좋은 걸 해 주시지 않을까요?”

“아, 그렇겠네요.”

나는 연신 전신거울 안의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일단은 예쁜 나 자신에게 흡족하기도 했고, 오만가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대로 정말 결혼을 하는구나.’

기쁘면서도 아쉽고 싱숭생숭했지만, 그런 기분은나보다 훨씬 즐거워 보이는 주위 사람들의 목소리에 금방 묻혀 버렸다.

“그런데요, 플라다. 전에 명함을 보내 주신 분은 지금도 알려 주실 수 없나요?”

플라다는 가봉을 위해 시침핀을 꽂으며 웃음 띤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명함은 제 은인분께 드린 거예요. 일생을 함께할 반려를 만나신다면, 그분께 드리라고요.”

마담 플라다의 말을 들은 나는 설마 싶은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은인이라는 분이…….”

플라다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저는 그때 이미.”

“결혼하신 상태였죠. 그래서 저도 놀랐답니다.”

맑게 웃는 목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조금 황당하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고. 확실히 그때부터 이미 에녹은 내게 친절했었지.

에밀리와 시녀들은 로맨틱하다며 더더욱 시끄럽게 떠들어 댔고, 그녀들의 수다 속에 들뜬 기분이 되어 복잡한 생각들이 또다시 파묻혀 버렸다.

나 역시 웃어넘겼다.

***

“이제 눈 뜨셔도 돼요.”

상냥한 목소리에 눈을 떠 보니 내 앞에 거울이 있었다. 오늘이 바로 결혼식 당일이다.

“와, 눈이 크셔서 그런지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고마워요.”

짧게 화답하면서, 나는 거울 속 내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너무 당황스러웠고, 무서웠고, 모든 게 꿈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천천히 눈을 깜빡거리자, 거울 속 황금빛 눈동자가 사라졌다 드러났다. 이것이, 이제는 익숙해진 내 모습이다.

에밀리와 리아가 곁에서 화장을 마무리하고 있었고, 뒤에서는 본격적으로 시녀로 합류한 라파엘르 후작 부인이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들고 왔다.

작은 다이아몬드가 빼곡하게 박혀 있는 티아라였다. 마담 플라다의 말대로, 황후께서 티아라를 선물해 주셨다.

라파엘르 후작 부인이 그 티아라를 로즈핑크빛 머리 위에 씌워 주었다. 그리고 그 뒤로 새하얀 베일이 늘어뜨려졌다.

“기분이 어떠세요?”

“아직도 얼떨떨해요.”

“아직 그럴 거예요. 아이참, 부럽다.”

라파엘르 부인이 꾀꼬리같이 웃으면서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 이제 거의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자, 이제 일어나 보세요.”

에밀리의 도움을 받아 일어나니, 마담 플라다가 드레스의 매무시를 다듬어 주었다. 그녀가 결혼식장까지 함께 동행해 주기로 했다.

전과 같으면서도 다른 상황, 다른 사람들.

루퍼트와의 결혼식은 아무것도 모른 채 따가운 시선 속에 치르고 말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씁쓸하면서 아찔했다.

“결혼 축하드려요.”

후작 부인이 내게 부케를 건네주며 축하의 인사말을 건넸다.

수줍게 미소 짓는 와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과거의 어느 한 장면과 같은 순간에, 잠시 몸이 굳었다.

“어머, 황태자 전하가.”

누군가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니, 잔잔하게 웃고 있는 에녹이 문 뒤쪽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카만 머리와 잘생긴 얼굴, 우월한 키와 몸매, 거기에 딱 맞는 턱시도까지. 저 사람이 내 남편이다. 차가운 시선은 이제 없었다.

잠시 주춤했던 게 무색할 만큼, 웃음이 나왔다.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예, 예. 물론이죠! 어서 모셔 가세요!”

나 대신 후작 부인이 대답해 줬고, 에녹은 가만히 내 손을 잡았다.

이미 말하지 않아도 그의 눈동자에서 나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 나왔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가 이끄는 대로 걸어 나갔다.

그런데 가다 보니 조금 이상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옆에 있는 연회장으로 가는 게 아닌가요?”

그러자 에녹은 나를 돌아보며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뒤쪽에서 따라오는 마담 플라다와 에밀리도, 에녹과 마찬가지로 웃기만 할 뿐 말을 해 주지 않았다.

그 상태 그대로 나는 마차를 탔고, 얼마지 않아 알 수 있었다.

황실 내궁의 넓은 잔디 광장이 아름답게 꾸며져 야외 결혼식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에녹이 먼저 훌쩍 뛰어내리며 손을 내밀었고,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덥석 잡았다.

조금 정신없는 와중에도 즐거워하는 그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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