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채굴업자와 마법사는 놀란 얼굴로 서로를 마주 봤다.
“다행히 잘 된 것 같군.”
그렇게 돌아서려는 에녹의 옷자락을 마법사가 급히 붙잡았다.
“누, 누구십니까? 대체 어떻게 이런 수준의 마법을…… 궁정 마법사도 이렇게는 못 할 겁니다.”
“놓, 놓게!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그러자 빌리 고든이 경기를 일으키듯 그의 손을 에녹의 옷에서 떼어냈다. 에녹은 그러든지 말든지 성큼성큼 내게로 걸어왔다.
“명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그가 내 앞에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고, 내 눈은 휘둥그레졌다.
“저는 그런 명령을…….”
말을 하려다 주변의 눈치를 보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수고했네.”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그가 피식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나는 손짓으로 빌리 고든을 불렀다.
“또 어려운 일 있으면 따로 요청하세요. 되도록이면 지원해 드리도록 할게요.”
“예, 알겠습니다.”
다음 작업을 지시하는 채굴업자를 흘끔 보고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매장량이 얼마나 될까요?”
“겉으로 드러난 건 일부이고, 밖에서 측정한 마나의 수치를 볼 때 어마어마한 양이 매장되어 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빌리 고든은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걸 애써 참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흠, 흠. 아무튼 잘 부탁드려요.”
“예, 종종 진행 상황 보고 드리겠습니다.”
빌리 고든의 인사를 뒤로하고, 나와 에녹은 다시 베이스 캠프로 왔다.
모닥불을 쬐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해 뜰 무렵이 되어서야 다시 출발했다.
돌아가는 길은 아무래도 조금 피곤했다. 마차의 규칙적인 움직임에 노곤했던 몸에서 힘이 스르륵 빠졌다.
그렇게 반쯤 졸고 있는 와중에 어깨를 감싸 나를 눕히는 손길이 있었다.
“편히 자요.”
머리에 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닿아 순간 긴장했지만, 곧 잠이 쏟아져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한 달 후…… 결혼식.’
***
잠깐의 외출 후, 내 주변은 이내 결혼식 준비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일주일 뒤에 신년회에서 정식으로 결혼 발표를 할 예정이었지만, 이미 관련인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지금 옮긴다고요?”
나는 내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시녀들과 하녀들을 바라보았다.
그중에 눈에 익은 얼굴이 있었다.
“스필렛 백작님, 임시로 시녀를 맡게 된 에밀리 겔만입니다.”
“아, 그때 황후궁에서 뵈었던 분 맞죠? 그런데 어쩐 일로…….”
“예, 황후 폐하의 명령입니다. 오늘부터 내궁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시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말인가요?”
에밀리는 대답 대신 두 손을 모은 채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전에도 그녀는 친절했지만, 확실히 오늘은 더욱 깍듯해진 태도를 보였다.
“내궁 어디로 옮기나요?”
“우선 결혼식 전까지는 라일락 궁에 기거하게 되실 겁니다. 그럼 짐을 옮겨도 괜찮을까요?”
에밀리가 공손하게 내게 질문을 했고,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일락 궁은 내궁에 속했지만 정궁은 아니었고, 보통 귀한 손님들을 머물게 하는 별궁 중에 하나였다.
“별로 많진 않을 거예요.”
황궁에서 온 하녀들과, 리아와 제니까지 합세해서 내 짐들을 꾸리는 모습을 지켜보니 조금 심란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스필렛 백작님, 짐은 이들이 알아서 옮겨 놓을 테니 일단 저희와 함께 가시겠어요?”
“어디로 가게 되나요?”
“일단 황후 폐하의 궁으로 갈 거예요. 그리고 이후 예비 황태자비로서 수업을 듣게 되실 거예요.”
조금은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막상 닥치니 조금은 얼떨떨했다.
에밀리의 안내를 따라 내궁으로 가다, 문득 궁금한 것을 물어봤다.
“그런데요, 전에 황태자비 부부께서도 함께 사셨나요?”
그러자 에밀리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현 황제 폐하 부부께서는 처음부터 황제, 황후셨기 때문에…….”
“아, 그렇군요.”
내가 기억하기로도 지금의 황제는 황제가 된 이후에 반려를 맞이했다. 에밀리의 나이는 기껏해야 나보다 조금 많아 보였으니, 그런 그녀가 당연히 그보다 앞선 황태자비 부부를 알 리가 없다.
“하지만 들은 이야기로는, 황실은 대체로 화목하다고 들었어요. 귀족들과 달리…….”
나름 귀족이었던 에밀리는 부러운 말투였다. 확실히 단 한 번이었지만, 내가 겪은 귀족 부부로서의 삶도 썩 좋지 않았지. 아니, 그냥 좋지 않은 정도면 차라리 다행인가.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황후궁에 도착했다. 저번과는 다른 의미로 긴장이 됐다.
그때는 협상의 목적으로 왔다면, 이번에는 시어머니 될 분께 인사를 드리는 자리였으니.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거울에 슬쩍 모습을 비춰 보았다. 물론 완벽했지만, 역시나 조금은 신경 쓰였다. 뭐, 외모에 연연할 분은 아닌 것 같아 보이긴 했지만.
메리벨 황후의 알현실로 들어섰다. 익숙한 공간이었지만, 오늘 황후의 복장은 평범한 드레스였다. 여기서 평범하다는 건, 그야말로 ‘황후답게’ 화려하고 기품 있는 드레스였다는 뜻이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렴.”
나 역시 최대한 우아하게 인사 올렸고, 메리벨 황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나긋한 목소리로 답했다. 사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완벽했지만, 한편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간단한 인사 후, 그녀와 소파에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황실의 일원이 될 사람을 계속 외궁에 둘 순 없으니, 내가 내궁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단다. 기분 나빴던 거 아니지?”
황후는 내 기색을 살피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몇 번 보지 않았지만, 오늘의 모습은 확실히 의외였다.
“네, 물론이죠. 배려해 주신 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래, 따분하긴 하겠지만 황태자비 수업도 어느 정도는 따라 주고. 내 생각엔 크게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귀족들이 괜히 트집을 잡으면 귀찮아지거든.”
“예, 물론입니다. 성실하게 임하겠습니다.”
나는 그녀의 설명에 내내 잔잔한 미소와 함께 모범적인 답변을 내놨다. 한참을 잘 이야기하던 메리벨이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후 폐하?”
“아, 아니야. 신경 쓰지 마렴. 에밀리?”
“예, 황후 폐하.”
“당분간은 네가 잘 모셔 주렴. 마음에 들면 아예 황태자비 전속 시녀로 가도 된단다.”
“아, 아니에요. 황후 폐하.”
내가 사양하자 황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나 시녀 많아. 그리고 에밀리 정도면 나쁘지 않단다.”
마치 자랑하듯, 당연한 일을 말하는 그녀에게 뭐라 답할지 몰라 어물거리자, 그녀가 앉아 있던 나에게 손짓을 했다.
“이제 가 봐도 돼. 그리고 특별히 시녀로 삼고 싶은 사람이 있니? 귀족 여자 중에.”
잠시 생각해 보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발이 넓은 편은 아니라서요.”
“그럼 후보를 몇 추천해 줄 테니 한번 면접을 보렴.”
그렇게 황후에게 인사를 건넨 후, 에밀리와 함께 알현실에서 나왔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방 안에서 황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이리 와서 등 뒤에 끈 좀 풀어 줘. 내 옷도 갖다 주고! 휴, 오랜만에 드레스를 입으니 영 갑갑하네.”
에밀리와 나는 순간 눈을 마주치다 소리 없이 풋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긴장한 건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나는 에밀리의 안내에 따라 수업을 맡아 줄 교수들을 소개받은 후, 라일락 궁으로 향했다.
라일락 궁이라는 이름답게, 궁 주변에는 라일락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물론 다 마법으로 피워 낸 꽃이었다.
“오후에는 마담 플라다가 방문하기로 했어요. 그때까지는 잠시 궁을 둘러보며 쉬고 계세요.”
“마담 플라다가요? 무슨 일로요?”
“당연히 웨딩드레스를 맞추기 위해서죠. 혹, 다른 디자이너를 생각하고 계시나요?”
에밀리는 말만 하면 마담 플라다를 당장 자를 기세였다.
“아, 아니에요.”
나는 다급히 거절 의사를 밝혔다. 저번에 보니 어느 정도 디자인은 구상했던 것 같은데, 초안이 완성되었으려나. 그러고 보면 아직 귀족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는 시기에도 마담 플라다는 내 결혼에 대해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감이 발달한 사람이라 그런가.’
라일락 궁은 큰 궁이 아니어서 그런지, 돌아보는데 크게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황태자비 궁으로 이 정도도 괜찮은데.’
소파에 앉아 나름대로 고급스러운 가구로 채워진 방 안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꺼내면 에녹이 서운해하겠지.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에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오는 걸까?
“네, 들어오세요.”
방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곧장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차 한 잔 드릴까요?”
“아니요, 금방 나가 봐야 합니다. 잠시 얼굴 보러 들렀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떨어지기 아쉽다는 듯, 내 손을 잡아 만지는 손길이 꽤 집요했다.
“그러게요, 며칠 못 봤네요. 바쁜가 봐요. 도와줄 일은 없나요?”
내 손을 입가로 가져가 손가락마다 입술을 갖다 대면서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손을 빼내 그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무리하지 말아요.”
그는 도망친 손을 다시 잡아 입술을 부비적거렸다. 그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후, 빨리 결혼하고 싶군요.”
꽤 안달난 에녹의 모습을 신기하게 지켜보면서, 나도 말했다.
“나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