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열려 있는 창문 사이로 하늘하늘 바람이 불어왔다. 달콤한 꽃내음이 코끝에 스치는가 싶더니,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손 위로 빨간 장미꽃 한 송이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어…… 그…….”
조용히 꽃송이를 집어 들었다. 냄새를 맡는 척 시간을 끌다 흘긋 그를 보았다. 녹아내릴 듯 다정한 녹빛 시선 속에서 문득 초조함이 묻어 나왔다.
뭔가 답을 해 줘야겠지.
“나…… 나도…….”
그 한마디가 왜 이렇게 힘든 건지. 눈을 질끈 감았다.
“……나도 사랑……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녹이 벌떡 일어나더니 입술을 겹쳐 왔다. 몸이 뒤로 넘어가는 바람에 등 뒤로 푹신한 침대가 느껴졌다.
묵직하고 잔잔한 체향이 감미롭게 입술 사이로 스며들었다. 쏟아지는 키스에 아찔한 정신을 부여잡으려, 옷깃을 꽉 쥐었다.
맞붙은 입술은 뜨거웠지만, 뒷목을 부드럽게 받치는 손길은 서늘했다. 자연스럽게 그가 침대 위에 엎드린 형태가 되다 보니, 자세를 의식하고 말았다.
목뒤에 있던 손은 어느새 내려와 내 어깨를 잡고 있었다. 힘 주어 잡는 손길에 머릿속이 점점 더 새하얘졌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 여, 여기서? 지금?’
이성이 드문드문 끊어지는 와중에 손이 닿는 곳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느껴졌다.
‘뭐, 괜……찮을지도.’
그렇게 진한 키스에 야릇한 상상이 더해질 무렵이 되었을 때,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내려다보는 눈길에 불꽃이 이글거렸다.
“에……녹.”
반질거리는 그의 입술은 매끄럽게 올라가더니 이번에는 내 입술 위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부드러운 버드 키스임에도, 눈빛에는 아쉬움이 뚝뚝 묻어 나왔다. 그러니까…… 나도 아쉽긴 하지만.
“얼마 안 남았으니…… 그날을 위해 참아야겠죠.”
아니, 안 참아도 되는데.
차마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그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얼얼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그의 손에 이끌려 덩달아 일어났다.
그나저나 이 방이 내 방이 된다는 거지. 설마 침실도 같이 쓰나?
의문스러운 시선으로 에녹을 보자, 에녹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딴청을 피웠다. 그러면서 바닥을 발로 툭툭 치더니, ‘핑크……’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이미 대답을 들은 것 같다. 뭐 그다지 싫진 않았다. 이 세계에서는 확실히 좀 특이한 일이긴 했지만 문제될 건 없겠지.
오히려 조금은, 기대되기도 했다.
***
며칠 후, 외출 준비를 마치고 나와 보니 에녹과 데이먼이 마차를 점검하고 있었다.
오늘은 신전에 들러 인사를 한 후, 막 개발을 시작한 마법석 광산에 가 보기로 했다.
역시 겨울이지만 포근한 날씨 덕에, 나들이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간단한 외출이라 생각하여, 호위 기사인 데이먼 외에는 따로 수행 인원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마차가 출발하고, 옆자리에 앉은 에녹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에린.”
“네?”
나는 창문 밖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 거리의 풍경을 보는 건 늘 즐거웠다.
“……한 달 후, 어떻습니까?”
한 달 후가 뭐지? 고개를 갸웃거려 봤지만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깜빡거렸다.
“결혼식 말입니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미룰 이유도 딱히 없는 듯하여…….”
여기서 또 주춤거리면 정말로 서운해하겠지.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아아, 그래요. 그런데 겨울이라 야외 결혼식은 좀 어렵겠네요. 하긴, 황실의 결혼이니 원래부터 안 됐으려나요?”
“야외 결혼식 말입니까?”
그의 질문에 배시시 웃으며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아, 음. 옛날부터 로망이었거든요.”
정확히는 혜린이였을 때의 로망이었지만.
내 말을 들은 에녹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나는 흘끔 그를 보다 모른 척 다시 창밖을 봤다.
얼마 후, 우리는 곧 신전에 도착했다.
나는 그곳에서 간단한 서약서를 작성했다.
황실과의 결혼으로 일상적인 신녀의 의무에서는 벗어나더라도, 주요 행사가 열리거나 또다시 사건이 벌어지면 신녀로서 의무를 이행하겠다는 약속이었다.
크리스티나 신녀가 신전 건물의 입구까지 배웅 나왔다. 젊은 모습의 그녀였지만, 대신관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신녀의 삶과 황태자비, 황후의 삶이 크게 다를지 모르겠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크리스티나 신녀는 내게 성물로 된 목걸이를 목에 걸어 주었다.
확실히 황실의 일원이 된다는 건, 내 생각만큼 자유롭고 즐겁기만 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기대되는 부분은 분명히 있었다.
나는 잠시 옆에 있는 에녹을 바라보다가, 크리스티나 신녀와 대신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종종 찾아뵐게요.”
“속 끓이는 일 있으면 언제든지 신전으로 오려무나. 여기도 네 집이니까.”
정말 든든한 친정이 생겨 버렸다. 나는 감사 인사를 건넨 후, 다시 마차에 올랐다.
다음 목적지는 정말 기대가 됐다.
“얼마나 걸릴까요?”
“마법으로 속도를 조금 높여서, 반나절이면 도착할 겁니다.”
생각해 보니 전에 사낭터에 갔을 때도 그랬던 것 같다. 그때도 에녹이 빌려 준 황실 마차를 타고 갔었지. 갑자기 중간에 나타나서 깜짝 놀랐었지만.
“전에 이 길쯤에서 만나지 않았었나요?”
익숙한 풍경이 나오자마자 말을 꺼내니, 에녹도 그때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습격을 받았다고 했었죠. 브리먼 황자 일당이었겠네요.”
“네, 맞습니다. 당시에는 심증만 있고 꼬리가 잡히지 않아 확신을 못 했었지만요.”
“그때 주신 조언이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됐어요.”
그렇게 과거의 일들을 되짚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가다 쉬다를 반복하다 보니 해가 저물어 갔다.
마법석 광산 근처의 베이스캠프는 산속이었지만 아직도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미리 기별을 했기 때문인지, 빌리 고든이 미리 마중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황태자 전하, 스필렛 백작님.”
“오랜만이에요, 고든 씨.”
내리자마자 에녹이 미리 챙겨 온 담요로 내 어깨를 폭 덮어 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밤이 되니 산속은 확실히 추웠다.
“자, 이리로 오세요.”
빌리 고든은 가운데 모닥불을 피워 둔 곳으로 우리를 이끌고 갔다.
“두 분 식사들은 하셨습니까? 안 그래도 지금 막 저녁 식사를 할 참이었습니다.”
모닥불 옆에는 인부들이 모여 있었고, 배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그들에게는 손님이라고만 소개했을 뿐, 구체적인 신분을 밝히지는 않았다.
커다란 솥에서는 맛있는 스프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 냄새를 맡으니 나도 모르게 군침이 났다.
“……먹어 볼까요?”
물어보면서도 이미 나는 그 끝에 줄을 섰고, 에녹은 피식거리며 내 옆에 섰다. 오목한 그릇에 받아 적당한 장소에 가서 앉아 호로록 마셔 보니 꽤 맛이 있었다.
에녹을 흘끔 보니 받자마자 빠른 속도로 비워 내고 있었다.
“의외로 잘 드시네요.”
“전쟁 중 기지에서 종종 먹고는 했죠.”
포슬거리는 빵을 뜯어 그의 스프 속에 넣어 주고는 나도 스프를 찍어 먹었다. 역시 나쁘지 않았다. 이 세계로 넘어와서 가장 좋은 건, 무슨 빵이든 다 엄청나게 맛있다는 점이었다.
“자, 교대하지! 저녁 작업 시작하자고.”
누군가가 박수 치며 인부들을 독려했고, 하나둘 일어나 장비를 짊어지고 산으로 갔다.
“고든 씨, 밤까지 하는 건 너무 힘들지 않을까요?”
“아, 마법석은 밤에 더 잘 보입니다. 그리고 교대로 투입되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전에 왔을 때는 밤에 다니기 꽤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크게 길이 나 있어 수레가 다니기에도 큰 문제가 없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전에 온 적이 있는 마법석 광산이 나왔다. 마법 램프가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어 대낮처럼 밝았다. 이렇게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전에 왔을 때는 정말 죽을 뻔했는데.’
그렇게 동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인부들이 드나드는 걸 보고 있는데, 빌리 고든이 다가와 한 사람을 가리켰다.
“저자가 바로 채굴업자입니다. 마법석 광산을 여러 번 채굴해 본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는 인부들에게 뭔가를 끊임없이 지시하면서, 갖고 있는 종이를 살펴보았다.
나는 방해가 될까 싶어 굳이 다가가지 않고 먼 곳에서 보며 끄덕거렸다. 옆에 있던 에녹이 조용히 한마디 했다.
“작업에 어려운 점은 없다던가.”
“으음, 언뜻 듣기로는 발파 작업에 필요한 양질의 마법사와 마력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고위 마법사를 이런 일에 부를 수는 없고, 그러다 보니 하급 마법사 여럿이 돌아가며 마력을 채워 놓는 실정이죠.”
채굴업자 옆에서 어떤 장치에 마력을 불어넣고 있는 사람이 마법사인 모양이었다.
얼마 후, 채굴업자가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 나와!”
인부들이 광산 안에서 달려 나왔고, 곧이어 몇 차례 폭음이 들렸다. 혹시나 싶어 귀를 막았지만,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다.
채굴업자는 들어가 안을 확인해 보고는 나와서 툴툴거렸다.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그것을 보고 있던 에녹이 조용히 다가가 발파 장치 위에 손을 올렸다.
“이봐!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를 알아보지 못한 채굴업자가 정색을 하며 다가왔고, 빌리 고든이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그를 말렸다.
“가만, 가만있어 보게!”
“저게 얼마짜린 줄 아십니까! 저 사람이 대체 누구길래……!”
에녹은 몇 번인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확신을 얻은 듯 장치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은은한 붉은빛을 띠던 장치의 마석이 이내 새빨간 빛을 뿜어 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마법사가 경악했다.
“모, 모두 물러서!”
인부들은 더 멀리 물러났고, 나 역시 몇 걸음 더 뒤로 갔다. 얼마지 않아 저 깊은 곳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지면이 흔들렸다. 안쪽에서는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도 났다.
“이 정도면 된 건가?”
에녹이 묻자, 채굴업자와 마법사가 급하게 장치를 살펴보았고 인부 몇 명은 조심스럽게 광산 안으로 들어갔다.
안을 보고 나온 인부 한 명이 놀랍다는 듯이 소리쳤다.
“뻥, 뻥 뚫렸어요! 아주 시원하게 뚫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