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꽤 쌀쌀한 날씨였지만 걷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에녹이 재킷을 벗어 어깨 위에 걸쳐 주었다. 나는 코끝을 찡긋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역시 파랗고 맑은 하늘이다.
“이곳은 겨울에도 눈이 오지 않나요?”
“북부 지방은 늘 눈이 쌓여 있지만, 이곳은 비교적 남쪽이라 잘 오지 않습니다.”
“그렇구나…… 눈 내리는 풍경도 나름 괜찮은데.”
아쉬운 마음에 중얼거리며, 에녹의 팔짱을 낀 채 천천히 내궁을 향해 걸어갔다.
외궁과 내궁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다리 아래는 깊고 폭이 좁은 물줄기가 내궁을 감싸며 둥글게 흐르고 있었다.
내궁 전체를 감싸고 있는 벽을 따라 둘레 길을 걸어가면서, 에린은 정원의 풍경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겨울이었지만, 전에도 본 것처럼 여전히 아름다운 빛깔의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다. 저 꽃들은 단지 관상용이 아니었고, 하나하나가 모두 마법 트랩이라고 했다.
낮은 관상목에는 빨간 열매가 달려 있었다.
‘먹을 수 있는 건가?’
슬쩍 건들다 조금 더 걸어가 보니 나무로 된 벤치가 나왔다.
나와 에녹은 그곳에 나란히 앉았다. 그러자 에녹이 손을 잡아 왔다.
“…….”
잠시간 서로 말이 없었지만, 그리 어색하진 않았다. 생각해 보니, 둘만 있던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느긋한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제가 외부에서 왔다고 했잖아요. 그것도 결국 저였다고 하지만.”
내가 말을 꺼내자 에녹이 잔잔한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에녹의 등 뒤로 그의 눈동자와 같은 색의 나뭇잎들이 흔들거렸다.
“처음 왔을 때가 언제인지 아세요?”
“결혼식 때라고 얼핏 들었던 것 같군요.”
“맞아요, 눈 뜨자마자 신부 대기실 거울 앞이었어요. 혹시 꿈이 아닐까 생각도 했었고요.”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그다지 오래된 일도 아니건만, 마치 먼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발끝 앞쪽의 땅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루퍼트가 어찌나 차가운지, 과거의 기억이 없어서 차라리 다행이었어요. 아니었으면 거기서 울어 버렸을 거예요.”
“……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왜요?”
“안 그러면 내게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담담한 고백에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나는 에녹이 등장했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에녹은 정말 빛이 나더라고요. 나 황태자다, 라고 써 붙인 것 같았다니까요.”
“당황스럽지 않았습니까?”
“아뇨, 정말 멋있었어요.”
나를 보며 씨익 웃는 에녹과 마주 보다, 나도 입꼬리를 살짝 올려 주고는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루퍼트는…… 어떻게 됐어요?”
루퍼트가 감옥에서 탈출했다는 건 알았지만, 그 이후의 일은 알지 못했다.
“떠났습니다.”
“그래요…….”
다행이라는 마음과 함께 씁쓸함이 동시에 느껴졌지만 애써 미소 지었다. 그러자 에녹이 마주 잡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괜찮을 겁니다. 그자는 어디서든 잘 살아남을 겁니다. 그리고 훗날…… 나에게 힘이 생기면.”
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는 순간, 누군가를 발견한 그가 말을 멈추고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폐하.”
나 역시 깜짝 놀라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에녹과 맞잡고 있는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가 놔 주지 않으려고 했다.
좀 더 강하게 뿌리치고는 치맛자락을 들며 무릎을 굽혔다.
“제국의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와 황후는 둘 다 비슷한 디자인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마치 커플룩 같아 보였다.
그리고 내리깐 시선에 황제와 황후가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뭔가.
황제가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고, 황후의 표정은 어딘가 애매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곧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둘이 결혼하겠다고?”
“……예, 황후 폐하.”
소리 없는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왜 그러는 거지,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벌써부터 시월드 입성?
“본인이 좋다는데 누가 말리겠냐마는, 나는 내 아들이 누구보다도 사랑받길 바란단다.”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공손하게 시선을 내리깐 채 눈을 깜빡거렸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나? 여기서?
에녹을 힐끔 보자 그는 싱긋 미소 지을 뿐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허허, 황후도 참. 아까까지만 해도 자네의 칭찬을 침이 마르게 하더니.”
그러자 황후가 민망한지 황제의 손을 휙 놔 버리고는 먼저 걸어가 버렸다.
“제…… 이야기를요?”
“빌리 고든이라는 자와 거래한 이후부터 황실의 지출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하네. 들여오는 물건의 품질도 전보다 훨씬 좋아졌고. 자네의 수완에 감탄하고 있었어.”
“아…… 그러셨구나.”
나는 흘끔 황후가 간 쪽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듣지 못한 척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걷고 있었다.
황제는 털털하게 웃으며 에녹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황후를 따라 걸어갔다. 황제가 온다는 걸 눈치챘는지, 꽤 앞서 걸어가던 황후가 잠시 멈췄다.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우리도 다시 걸을까요.”
에녹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살며시 손을 잡았다.
“미안해요, 아까는 조금 당황했어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황제와 황후 폐하는 그런 부분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편입니다.
“네, 그래 보여요.”
그렇게 내궁 안을 넓게 한 바퀴 돈 후에, 에녹은 황태자 궁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가 황태자비 궁입니다.”
“저건 황태자 궁 아닌가요? 그럼 에녹은 궁을 옮기나요?”
“아니요.”
그의 입가에 얼핏 웃음이 서렸다.
“……설마 같은 궁을 쓰나요?”
“안 됩니까? 우린 부부가 될 건데요.”
도리어 묻는 질문에 할 말이 없었다. 이전의 황태자비 부부들이 어땠는지 잘 모르겠다. 에녹이 이끄는 대로 가다 보니 궁을 지키는 기사들이 절도 있게 경례를 했다.
우리는 그들을 지나쳐 궁으로 들어갔다.
전에도 와 봤지만, 그때는 궁의 로비와 식당 정도만 봤었다. 이번에도 그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에녹은 나를 데리고 성큼성큼 이 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가도 괜찮을까요? 벌써부터.”
“내가 이 성의 주인이고, 또 당신도 주인이 될 사람이니 미리 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이 층 응접실을 돌아본 후, 그가 보여 준 곳은 빈방이었다. 크진 않았지만 햇살이 잘 들어오고, 창문 밖으로 아기자기한 후원이 보였다.
“이곳을 황태자비 집무실로 쓸까 하는데, 마음에 드십니까?”
“아, 네…… 물론. 전망이 예쁘네요.”
그런데 보다 보니 벽 옆면에 또 다른 문이 있었다. 타박타박 그곳으로 가서 열어 보니, 익숙한 체향과 함께 기분 좋은 나무 냄새가 났다.
그 안으로 들어가자 단조롭지만 고풍스러운 책상과 의자, 책꽂이와 소파 등이 놓여 있었다.
“여긴……?”
한쪽 구석에 놓인 옷걸이에 많이 봤던 옷이 걸려 있었다.
“내 집무실입니다.”
휙 뒤를 돌아보니 따라 들어온 에녹이 답해 주었다. 나는 이 안의 책상과 그가 들어온 문을 번갈아서 보다, 화들짝 놀라 물었다.
“그, 서로 집무실이 연결되어 있어요?”
“네, 무슨 문제라도?”
“어, 그…… 문제라기보단.”
원래 황태자 부부가 이렇게 가깝게 지내는 건가? 현 황제는 내가 기억하는 시절부터 이미 황제였기 때문에 황태자 부부가 원래 어떻게 지내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 침실은 어디인가요?”
“이쪽으로 오시죠.”
에녹의 집무실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걸어가자 맞은편에 문이 나왔다. 그는 그 문을 열어젖혔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며, 침대 앞까지 다가가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이미 모든 가구가 놓여 있는 침실은 깔끔하긴 했지만, 사용감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전에 루퍼트와 결혼한 후, 처음 공작 부인의 침실에 들어갔을 때도 같은 것을 느꼈지. 다만 다른 건, 이 방의 주인은…….
에녹의 얼굴을 보자 내 짐작이 맞아 보였다. 하지만 내가 뭔가 말하기도 전에 그가 잽싸게 먼저 입을 열었다.
“원하시는 취향대로 바꾸셔도 좋습니다. 침대며 그 외 가구며, 화장대를 놓으셔도 좋고, 벽지와 바닥까지 바꿔도 좋습니다. 아, 무슨 색을 좋아하십니까?”
“핑크색이랑 하얀색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뭐, 내 취향과는 조금 다르지만 이제부터 좋아하도록 해 보겠습니다. 아니, 이미 좋아했던 것 같네요.”
“……네?”
침대 위에 곱게 덮혀 있는 이불을 손으로 슬쩍 쓸어 보았다. 그가 등 뒤로 와서 내 머리칼을 손끝으로 살짝 만지작거렸다.
언뜻 보이는 핑크빛 물결에 그가 이미 좋아했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아 조금 부끄러웠다.
“그…….”
에녹이 내 어깨를 살며시 잡더니 나를 침대 위에 걸터앉게 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내 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전하? 아, 아니 에녹.”
내가 일어나려 하자, 에녹이 내 두 손을 겹쳐 잡으며 다시 앉게 만들었다.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빛을 내고 있었다.
나는 다시 멍하니 앉아, 홀린 듯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매끄럽게 휘어지는 두 눈을 마주치니, 눈 아래가 붉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제대로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아…….”
설마, 이건.
예상할 수 있는 상황에 오히려 심장 소리가 점점 커져 오고 있었다.
바닥에 나란히 놓인 발끝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그에게 잡힌 손가락에 괜스레 힘이 들어갔다.
잔잔한 열기가 목을 타고 올라와 얼굴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오늘이 될지 몰라 준비물을 다 챙기지는 못했지만.”
내내 여유로웠던 그의 목소리에도 약간의 긴장감이 배어 나왔다. 그걸 듣고 있으니 점점 더 떨렸다.
“에린 스필렛, 사랑합니다. 나와 결혼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