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꺅, 변태!’
에녹은 리아가 들어간 후, 문고리를 잡은 채 그 자리에서 굳어 있었다. 에린의 비명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아무래도…… 다시 해명을…….”
하지만 들어가려다가도, 아직 옷을 입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망설이고 있었다. 그렇게 서성이는 와중에, 안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결혼식이요. 황태자 전하께 청혼 받으셨잖아요?”
에녹은 자신도 모르게 문에 바짝 붙어 귀 기울였다.
리아의 목소리는 비교적 선명했지만, 에린의 목소리는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혹시…… 결혼하기 싫어지신 거예요?”
‘설마.’
순간 다리가 풀려 몸이 휘청거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간신히 벽을 잡아 버티고는 문에서 물러났다.
에린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렇게 에녹이 가지도 오지도 못한 채 서성이고 있는데, 그를 부르는 누군가가 있었다.
“황태자 전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까 인사를 나눴던 델파르 왕국의 3왕녀 이사벨라였다.
“여기서 뭐하고 계시나요?”
다가오는 이사벨라를 보며, 에녹은 당황한 표정을 싹 지운 채 다시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델파르 왕국은 규모는 작지만 천연 자원이 풍부한 나라였다. 귀하디 귀한 대규모 마법석 광산이 알려진 것만 해도 다섯 개가 넘었고, 그 외에도 석탄과 금, 은, 각종 보석도 풍부했다.
칼릭스 제국은 최근 이 왕국과 교류하기 위해, 여러모로 공을 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때문에 사신으로 온 그녀에게 조금은 친절할 필요가 있었다.
일개 왕국의 3왕녀가 제국의 몇 개 안 되는 2층 귀빈실에 머물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덕분이었다.
물론 평화로운 방법으로 안 된다면, 마지막엔 결국 약간의 무력을 사용하겠지만 말이다.
“잠시 누구를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왕녀께서는 이곳에 어쩐 일이십니까.”
“피곤해서 조금 쉬었다 내려가는 길이었어요. 전하께서도 내려가시겠어요?”
우회적인 질문이었지만, 명백히 에스코트를 청하는 말이었다.
에녹은 슬쩍 에린이 머물고 있는 방문을 보다 소리 없이 한숨 쉬었다.
“네, 함께 가시죠.”
그렇게 내려가서 잠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도록 도와주었다. 이사벨라의 가벼운 농담에 사람들이 웃는 동안, 에녹은 머릿속으로 딴생각을 하며 습관처럼 미소 지었다.
그러다 문득 2층을 보니, 에린이 그런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전혀 찔릴 것도 없는 상황이건만, 에녹은 괜히 움찔했다. 2층에 있는 에린에게 다시 올라가려는데, 그녀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더니 휙 돌아서 버렸다.
“전하? 어딜 보고 계세요?”
이사벨라가 멍하니 허공을 보는 에녹의 팔을 살짝 흔들었지만, 에녹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은 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
나는 그대로 2층 테라스 쪽으로 갔다. 해가 져서 깜깜한 밤 아래, 정원수들이 샹들리에의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휴.”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델파르 왕국의 왕녀이니, 에녹은 그런 그녀를 단순히 에스코트했을 뿐이라는 것을.
“뭐, 말짱해 보이네.”
혹시나 방금 전의 일로 기분이 상하진 않았을까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지 싶었다.
‘그래도 그렇게 즐겁게 웃다니.’
미소 짓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에녹 특유의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불편한 감정에 목 안쪽이 따끔해졌다.
그리고 곧 그 감정의 실체를 깨달았다.
“이건…… 질투구나.”
혼자 깨닫고 나니 머쓱하면서도 괜스레 부끄러웠다.
기억을 잃은 후에는 질투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었다. 루퍼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에녹은 내 옆에 거의 항상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예전에, 기억을 잃기 전, 루퍼트와 클로에의 모습에 잠시 질투했었나. 그사이 혜린으로서의 기억이 자리했기 때문인지 너무 머나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새삼스럽게 질투를 느끼긴 했지만, 특별히 기분이 많이 나쁜 건 아니었다.
‘역시 몸이 좀 나른하네. 에녹이 돌아오려면…… 좀 더 있어야겠지. 분위기 흐리지 말고 조용히 가자.’
나는 시종을 불러, 에녹에게 먼저 간다는 말을 전해 달라 부탁하고는 연회장을 떠났다.
다음 날 아침, 외출을 하기 전 황태자 집무실에 방문했다. 예상대로 어제의 무도회 여파 때문인지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다.
“그래도 에녹에게 미리 말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할 수 없지.”
그와는 여러모로 할 말이 많았다. 그의 성격상 일찍 들르지 않으려나 했는데, 영 소식이 없었다.
그렇게 집무실 근처에서 서성거렸지만, 에녹은 끝내 볼 수 없었다. 대신 데이먼이 나를 데리러 왔다.
“레이디, 준비 되셨나요?”
“네, 출발하죠.”
나는 결국 하는 수 없이 그의 인도에 따라 건물 밖으로 나가, 쏟아지는 햇살에 양산을 펼쳐 들었다. 겨울인데도 하얀 햇살은 눈이 부셨다.
오늘의 내 복장은 전형적인 돈 많은 귀부인 컨셉이었다. 새하얀 레이스 양산에 흰 장갑, 프릴이 잔뜩 달린 핑크 파스텔 톤 드레스였다.
그 위에 보송보송한 흰 토끼털 외투까지 걸쳐 입으니, 내가 봐도 귀여워 보였다.
데이먼의 손을 잡고 마차 위에 올라탄 후, 마차를 출발시켰다.
얼마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애초에 황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구시가지였다. 내려 보니 약속한 사람이 미리 나와 있었다.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중년의 신사가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부인, 아니 신녀님.”
“편하게 스필렛 백작이라고 불러 주세요.”
계속 신녀로 살 것도 아닌데, 신녀님이란 호칭은 어딘지 모르게 조금 낯간지러웠다.
“아, 예. 알겠습니다. 바로 저쪽 건물입니다, 따라오시죠.”
우리를 마중 나온 중년 신사는 부동산 중개인이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아담한 타운하우스가 있었다. 나는 그를 따라 이 집 저 집 둘러보았다.
“이곳이 황궁하고 가깝긴 한데…… 집들이 좀 낡았네요.”
“예, 아무래도 그래서 고위 귀족들은 크게 선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땅히 이렇다 할 만한 집은 없었다.
“잘 봤습니다. 내일도 부탁드려요.”
“예, 물론입니다. 내일은 신시가지 쪽 집들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가볍게 고개 숙여 그를 보낸 후, 잠시 거리를 걸었다. 마침 나온 김에 마담 플라다에 들러 보려고 했다.
마왕전 승리와 연말, 신년이 연달아 있으니 거리에는 온통 축제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한참을 걷던 나는, 길가에 서서 이야기하는 두 여자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늦췄다.
“……그런데 델파르 왕국에서 청혼을 해 왔다던데요.”
“청혼을? 누구한테?”
“누구긴 누구예요, 지금 황실에 미혼이라고는 황태자 전하밖에 없잖아요.”
“하지만 그…… 상대가 있다고 들었는데. 신녀라고…….”
나는 괜스레 움찔하며 양산을 기울여 얼굴을 가렸다. 그나저나 청혼을 받았구나. 상대는 그러니까…… 어제 그 왕녀겠지.
“그래서 하는 말이 후궁으로도 괜찮다고 했대요.”
“그렇게까지 나오면 곤란하겠네.”
입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후궁, 후궁이라고. 양산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칼리스 제국은 황제의 계승자가 단 한 명이라는 특성 때문에 역대 황제 중 후궁을 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많지 않았다는 거지 전례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설마…… 정말.’
에녹이 마음에 없을지라도, 혹시 국가적인 이익을 위해 후궁을 들이는 거 아니야?
문득 어제 그녀와 함께 웃고 있던 에녹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이랬다 저랬다 하기도 하지. 루퍼트만 봐도…….
“내가 무슨 생각을.”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에녹을 만나 물어보면 다 풀릴 일이다.
정신을 다잡으며 나는 마담 플라다로 향했다. 그녀는 벌써부터 내 웨딩드레스 디자인을 고심하고 있었다.
그렇게 볼일을 모두 본 후 성으로 돌아갔다. 아직 내가 머무는 곳은 외궁이었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나.’
불편한 건 없었지만 역시나 외궁에 있는 방이 내 집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들리는 소식은 ‘루퍼트 클리포드’가 처형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이름을 듣고 순간 가슴이 철렁했지만, 에녹이 해 준 이야기를 떠올리며 안심해 보려고 노력했다.
이야기를 듣기 위해 다시 에녹을 찾아가 봤지만 그는 여전히 자리에 없었다.
‘많이 바쁜가.’
대신 데이먼을 방으로 불러 물어보았다. 데이먼은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처형장 관리인에게 살짝 물어보니, 원래 있던 사형수 중에 외모가 비슷한 사람으로 대체했다고 합니다.”
“그 사형수는 죄명이 뭐였는데요?”
“살인, 부녀자 강간, 사체 유기…….”
“아, 음. 됐어요.”
혹시 무고한 사람이 죽진 않았나 걱정했는데. 뭐, 죽을 만한 사람이 죽었네. 다행이었다.
그래도 에녹에게 직접 듣고 싶은데, 한 번을 안 찾아오네.
***
다음 날, 집무실에서 에녹을 마주칠 수 있었다.
“……미안합니다, 내가 급히 갈 곳이 있어서.”
하지만 그는 만나기가 무섭게 나를 지나쳐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안쪽을 돌아보니, 밀라 버튼이 훌쩍거리며 짐을 싸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지만, 물어볼 사람이 그녀밖에 없었다.
“황태자 전하는 어디 가시는 길이에요?”
“……몰라요, 델파르 왕녀가 황궁 구경을 시켜 달랬다나, 뭐래나…… 아니, 그런데 왜 저한테 물으세요? 가뜩이나 쫓겨나서 신경질 나는데.”
쏘아붙이면서도 대답은 다 해 줬다. 그나저나 쫓겨나는구나, 나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아 내며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천천히 방으로 돌아가며 손가락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델파르 왕국의 왕녀와 오늘도 만나는구나. 그렇구나.
“역시 조금 신경 쓰이나.”
하지만 오래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오늘도 부동산 중개인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외출 준비를 서두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