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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112)화 (112/129)

112화

황후가 안내한 자리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도 울렁거렸다. 내내 긴장했기 때문인 걸까.

“저, 황후 폐하. 죄송한데 잠시만 바깥에 다녀오겠습니다.”

“이제 막 파티가 시작됐는데 어디 가신다는 거죠?”

나를 바라보는 황후의 표정이 미묘했지만, 이대로 가다간 쓰러질 것 같았다. 나는 애써 웃음 지으며 말했다.

“드레스도 갈아입어야 할 것 같고요.”

“아아, 그렇지. 내 정신 좀 봐, 다녀와요.”

하얀 레이스 위에 얼룩진 부분을 보여 줬더니, 황후는 그제야 흔쾌히 수락했다.

이런 자리에서 아프다는 말은 굳이 하고 싶지 않았는데, 밀라 버튼이 모처럼 좋은 핑계를 만들어 준 것 같다.

밀라 버튼이라. 생각해 보니 그녀는 첫 대면부터 나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신녀가 된 이후에는 제대로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무슨 상관이야.’

내게 배정된 휴게실에 들어가 소파 위에 털썩 엎드려 누웠다. 나를 본 리아가 깜짝 놀라 다가왔다.

“어머, 백작님! 드레스가!”

“아, 으응. 와인이 쏟아졌는데, 이걸 어쩌지? 비싼 드레스 같은데. 플라다에게 미안하게 됐네…….”

“백작님께 드린 거니까 플라다 님은 별말 안 하실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리아는 등 뒤로 와서 허리를 조인 끈을 풀어 주었다.

“새 드레스로 갈아입으실 거죠?”

“아, 응. 그전에 좀 쉬어야…… 리아, 가서 두통약을 좀 가져다줄래?”

“어, 어디 아프세요?”

나는 다시 일어나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벗고 얇은 슈미즈 차림으로 소파 위에 드러누웠다.

“머리가 조금 아파서. 부탁해, 리아.”

“네, 다녀올게요!”

리아가 뛰어나가고 나는 그대로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때, 무도회장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당시의 나는 알지 못했다.

***

“신녀님이 자리를 피하시네요?”

“황태자 전하가 청혼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저건 황태자비의 자리인데…… 그걸 거절하고 가다니.”

“청혼을 거절한다는 의미일까요?”

“혹시 황실에서 압박한 건…….”

다시 말끔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에녹은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황태자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한 채, 남에게 들릴 만한 목소리로 수군대고 있었다.

“아무튼 황태자비 자리를 보자마자 사색이 돼서 도망가던데요.”

“……그렇게 싫은가? 하긴, 전 남편이 마왕이 돼서 어쩔 수 없이 이혼을 하긴 했지만…….”

“저런, 아직 그리워하는 게 아닐까요.”

그들은 그저 가십거리 삼아 떠드는 말이었지만, 에녹에게는 아니었다. 그들은 곧 자신들을 스쳐 지나가는 에녹을 보며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에녹은 비어 있는 자신의 자리와, 그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왜 거부한 거지? 설마 아직…….’

방금 전, 루퍼트를 떠나보내고 온 차였다. 루퍼트의 눈빛에는 후회와 회한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속에는 에린을 향한 그리움도 분명히 담겨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자, 때때로 엄습했던 불안감이 다시금 가슴을 옥죄어 왔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이성적으로는 알면서도,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신녀님은 어디에 가셨지?”

지나가는 시종에게 물으니, 그가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가리켰다.

“대기실로 가시는 것을 봤습니다.”

“알았네.”

에녹은 주먹을 불끈 쥐며 계단 위로 올라갔다. 2층에 위치한 대기실은 모두 보다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머물게 되어 있었다.

황태자가 지나가자 계단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길을 열어 주었다.

그렇게 신녀가 머무는 대기실 앞에 서서 숨을 고르는데, 복도 쪽에서 리아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에녹을 보자 급히 멈추며 고개를 숙였다. 리아의 손에는 약병이 들려 있었다.

“그건……?”

“아, 백작님께서 머리가 좀 아프다고 하셔서요. 약을 좀 가져다 달라시기에…….”

그 말을 들은 에녹의 표정이 일순간 굳는가 싶더니,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내가 가져다주지.”

“아…….”

리아는 그래도 되나 싶어 주춤거리면서도 결국 약병을 건네주었다. 어차피 일개 하녀인 그녀가 황태자의 요구를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았나?”

“글쎄요, 조금 힘들어 보이시긴 했어요.”

에녹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파서 자리를 비운 걸, 다른 뜻으로 오해해 버렸으니 스스로가 꽤나 한심하게 느껴질 수밖에.

“저는 그럼 이만, 드레스를 가져와야 해서요.”

“드레스를 가져오다니?”

“입고 오신 드레스에 와인이 묻었더라고요. 오는 길에 들어 보니 밀라 버튼 자작 영애께서 그러셨다나…….”

리아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밀라 버튼의 이름을 또박또박 읊고 떠나 버렸다. 그 말 속에는 ‘나중에 혼내 주세요’란 뜻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다.

‘밀라 버튼이라.’

에녹은 잠시 그녀가 누군지 떠올려 보았지만, 집무실의 사무 보조관이란 것 외에는 별다른 특이점을 기억하지 못했다.

에녹이 다시 숨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안쪽에서는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에린, 들어가겠습니다.”

조금 큰 소리로 말해 보았지만, 여전히 조용했다. 슬슬 마음이 불안해졌다.

‘아프다더니, 쓰러지기라도 한 건가?’

그는 걱정되는 마음에 결국 문을 열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상황에 다급히 등 뒤의 문을 닫아 버렸다.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바닥만 보며 두리번거리면서도, 한 번씩 흘끔흘끔 소파로 눈이 향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그는 애써 눈을 멀리 둔 채 약병을 소파 앞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맞은편 소파에 있는 작은 담요를 들어 에린에게 다가갔다. 에린은 속이 비칠락 말락 한 얇은 슈미즈 차림으로 소파 위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쪽으로 시선이 갈 때마다 아찔한 기분에 시야가 아득해졌다.

‘정말 무방비하군, 누가 들어오면 어쩌려고.’

사실 이곳의 구조나 신분을 따져 봤을 때 자신이나 직속 하녀인 리아를 빼고는, 들어올 수 있는 이가 없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그렇게 에녹이 담요를 덮어 주려는 순간, 눈꺼풀에 가려져 있던 황금빛 눈동자가 천천히 드러났다.

에녹은 허리를 숙인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저, 그게, 그러니까…….”

그답지 않게 횡설수설하는 사이, 에린은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자신의 차림을 깨달은 순간 담요를 확 뺏어 들었다.

“꺅! 변태,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나가 주세요……!”

“그, 이건 오해가…….”

에녹이 다급하게 설명했지만, 에린은 그에게 나가라는 말만 반복할 뿐 도무지 요지부동이었다.

그렇게 쫓겨난 에녹은 문밖에 선 채 머리만 쓸어 올렸다. 마침 리아가 풍성한 드레스를 안고 다시 등장했다. 그녀는 문 앞에 서 있는 에녹에게 의아한 표정으로 눈인사를 건넨 후, 아무렇지 않게 안으로 쑥 들어갔다.

그 모습을 에녹은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엉뚱하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은, 부러웠던 것 같기도 했다.

***

흥분이 가라앉은 후, 나는 손에 들린 담요를 바라보았다.

“……너무 심했나?”

순간 너무 놀라 소리치긴 했는데, 평소 에녹의 성격을 돌이켜 보면 그런 뜻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보다도 에녹이 더 놀랐을지도 모르지.

“아니야, 그래도 자고 있는 숙녀의 방에 마음대로 들어온 거잖아.”

너무 무방비하게 잠들긴 했다. 잠깐 누웠는데 그 차림 그대로 잠들 줄이야. 그렇게 한탄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리아가 낑낑대며 들어왔다.

“약은 드셨어요?”

“약?”

“황태자 전하께서 가져다주신다고 하셨는데. 백작님께서 아프다고 하시니 무척 걱정하셨어요.”

“아…….”

나는 그제야 테이블 위에 놓인 약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힘없이 약병을 손에 들고 몇 알 입에 털어 넣고는, 식어 버린 찻물을 호로록 들이켰다.

“좀 괜찮으세요?”

“응, 아까보다는.”

역시 신경성이었던 걸까, 내내 좀 무리하긴 했지. 여전히 조금은 어지러웠다.

“조금 더 쉬셔야 하지 않을까요?”

“오래 자리를 비우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약을 먹었으니까 괜찮아지겠지.”

나는 일어나 리아의 도움을 받아 새로 가져온 드레스를 입었다. 1부, 2부로 나뉜 파티라 두 벌을 가져온 게 다행이었다.

이번에는 짙은 보라색 바탕에 붉은 장미가 탐스럽게 달려 있는 드레스였다. 전신 거울로 비춰 보니, 나는 역시나 이런 강렬한 컬러도 찰떡같이 소화해 냈다.

등 뒤에서 끈을 묶어 주던 리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식은 언제쯤으로 생각하세요?”

“식……?”

내가 의아한 듯 물으며 뒤를 돌아보니, 리아가 더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결혼식이요. 황태자 전하께 청혼 받으셨잖아요?”

“어, 어?”

물론, 청혼을 받았고 난 그것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녀로서 살아야 한다고 했으니까.

지금 신녀이면서 동시에 귀족으로서 이렇게 파티에 참여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받아들인 이유가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지만.

내가 잠시 말이 없자, 리아가 오해했는지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혹시…… 결혼하기 싫어지신 거예요?”

쿵-

뭐지, 잘못 들었나. 문밖에서 뭔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백작님?”

리아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리며 그녀의 오해를 정정해 줬다.

“아니야, 그럴 리가. 하지만 날짜는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이제 상의해 봐야겠지.”

밝게 대답하니 리아도 한결 표정이 밝아졌다. 만일 내가 싫다고 했다면, 리아도 꽤나 심란해졌을 것이다.

나는 거울을 보며 마지막으로 외모를 점검했다.

‘결혼이라…….’

싫은 건 아니었다. 단지 지금까지는 수락해 놓고도 아직까지는 남 일처럼 여겼었나 보다.

이래저래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슬슬 이야기가 나올 때이긴 하다. 설레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싱숭생숭한 마음을 안고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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