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111)화 (111/129)

111화

구속구를 제거했지만, 아무리 루퍼트라 해도 잠긴 철문을 맨손으로 열 방법은 없었다.

‘어떤 무기라도 있으면 모를까.’

에녹의 어깨를 검으로 찔렀던 감각이 아직도 손에 생생했다. 그때는 마왕이 제 몸에 빙의되어 있었음에도, 생각하면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한 번은…… 만나서.’

아니, 루퍼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이중적인 마음에 실소가 나왔다.

에린을 생각하면 여전히 에녹에게 질투하면서도, 에녹을 배신한 자신을 그의 앞에서 속죄하고 싶었다.

이 기분이 정말 자신의 생각인지, 아직도 작용하고 있는 피의 속박 탓인지는 스스로도 헷갈렸다.

전에도 분명 이런 느낌은 비슷했는데, 왜 충동을 제어하지 못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것도 흑마법의 영향이었을까.

어두운 공간 안에는 횃불 하나만이 간신히 시야를 밝혀 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훅 하고 바람이 불어오더니 횃불이 꺼져 버렸다.

“무슨…….”

끼익-

갑자기 어두워져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와중에, 자신이 갇혀 있는 철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루퍼트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누군가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제법 강하게 당기는 힘에, 버틸 수도 있었으나 루퍼트는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끌려 나갔다.

계단을 올라 철문 밖을 지났을 때,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은 한 명도 없었다.

“이봐, 어디로 가는 거야?”

자신을 끌고 나가는 사람은 온통 검은색 옷에 복면까지 쓰고 있었다.

아무리 물어봐도 그는 답이 없었고, 이제 알아서 따라오라는 듯 루퍼트의 팔을 놓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루퍼트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그를 뒤따랐다. 검은 복면인을 뒤따르는 그의 발걸음엔 거리낌이 없었다. 그저 그를 따라가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는 높은 성벽을 단숨에 훌쩍 뛰어넘었다.

‘몸이 상당히 가볍군.’

루퍼트도 무리 없이 그를 뒤따랐다.

벽을 넘어가 보니 마차 한 대가 문을 열어 놓은 채 루퍼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걸 타면 어디로 가는 거지?”

하지만 복면인은 조용히 마차를 가리킬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루퍼트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디서 봤던 것 같은 기시감이 들기도 했지만, 일단 타기로 했다. 어차피 최악의 경우 잡혀 죽기밖에 더하나.

그리고 이게 설사 함정이라 해도, 루퍼트에게는 스스로 빠져나갈 힘이 있었다. 더군다나 사형이 선고된 지금, 그에겐 더 아쉬울 게 없었다.

‘그나저나 날 구하러 오다니, 대체 누구지. 누가 보낸 거지?’

황태자에게 반기를 들었던 귀족들은 이미 다 잡혀 들어갔거나, 항복했을 것이다.

루퍼트가 탄 마차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달렸지만, 그런 것치곤 마차 바퀴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루퍼트가 마차 벽을 손바닥으로 쓸며 살펴보니, 이 마차 전체에 은은한 마나가 흐르고 있었다.

‘마법이 걸려 있군.’

슬쩍 창문을 열어 보았다.

저 멀리 화려한 불빛 속에 감싸인 황궁이 보였다.

거리는 한산했지만, 평소보다 밝게 등불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문을 닫은 가게들 곳곳에는 ‘축 마왕 퇴치’라는 조잡한 플래카드가 걸려 있기도 했다.

루퍼트는 다시 멀어지는 황궁을 보았다.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얼마 후, 수도를 꽤 벗어난 지점에서 마차가 멈춰 섰다. 루퍼트는 마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빛 하나 없는 황량한 들판 위였다.

마차를 몰고 온 사람도 아까 자신을 탈출시킨 그 검은 복면인이었다.

“여기서 뭘 어쩌라는 거지? 대체 넌 누구냐.”

그가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려 루퍼트 앞으로 다가와 섰다. 너무 어두워서 눈동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도 그랬듯이, 전체적인 체형과 행동이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후, 루퍼트.”

그런데 그자가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복면을 벗자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

“……전……하?”

루퍼트는 멍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자신을 구해 준 게 에녹이라니,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에녹은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할 말을 전했다.

“지금 당장 떠나. 마차 안에 약간의 여비를 챙겨 뒀으니 그걸 챙겨서 가면 돼.”

“전하, 어째서 저를?”

그러자 에녹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루퍼트를 노려보았다.

“피의 속박은.”

그리고 손가락으로 루퍼트와 자신을 번갈아 가며 가리켰다.

“너에게만 작용하는 게 아니니까.”

루퍼트의 푸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가늘게 떨렸다. 그의 모습을 보던 에녹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나는 너를 해치는 결정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피의 속박은 직접적인 해를 끼칠 때 작용한다. 간접적인 경우 마음이 불편해지긴 하지만, 그 정도는 참아낼 수 있었다.

자신의 죽음은 황제가 결정했으니, 에녹은 뒤로 빠져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닌가.

자신이 지난날 브리먼 황자를 앞세워 그의 편에 들어갈까 생각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멀리 떠나. 떠나서 어디서든 네 역할을 찾아 속죄해라. 그리고 내가 훗날 황제가 되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퍼트의 몸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전하.”

그가 에녹의 발아래 무릎을 꿇어앉아 입을 열려는 순간, 에녹이 그의 말을 막아 세웠다.

“그만.”

에녹이 한차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루퍼트는 고요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금의 나는…… 충성의 맹세를 받을 자격이 없다. 널 지키지 못했으니까.”

“전하.”

에녹은 간절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루퍼트를 잠시 응시했다.

“어서 떠나.”

그는 냉정한 어투로 일갈하고는 복면을 뒤집어쓴 채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루퍼트는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에녹이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둡고 차가운 황야 위에 세찬 바람이 불어와 루퍼트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에린이 떠났을 때와는 다른 상실감이 가슴 속에 휘몰아쳤다.

루퍼트는 고개를 들어 다시 수도를 봤다. 저 멀리 빛나는 황궁이 이제 밤하늘의 별처럼 멀게 느껴졌다.

땅에 닿아 있는 손을 세게 쥐었다 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리석은…….”

치기 어린 열등감에 빠져 미처 자신의 감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거짓된 속삭임에 빠져 무엇이 진실인지 알지 못했다.

사실은 누구보다 황태자를 동경했었다. 그리고 에린 스필렛을 곁에 두고 아껴 주고 싶었다. 이제야 허망한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지만,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밀라 버튼은 내 주위로 와 놓고도 나를 본체만체하며, 다른 이들과 잡담을 나눴다.

간간이 흘긋대는 시선이 곱진 않았지만,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어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그녀가 내 드레스에 와인을 쏟기 전까지는.

“어머……! 내 정신 좀 봐, 손이 미끄러졌네요!”

그 소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쏟은 줄도 몰랐을 것이다. 책에서나 봤던 너무 뻔한 수법에, 나는 혹시 정말로 그녀가 손이 미끄러진 건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새하얗게 빛나는 실크 위로 정확히 흐르는 붉은 자국을 볼 때 절대 실수일 리가 없었다.

라파엘르 후작 부인이 나 대신 파르르 떨며 밀라 버튼을 노려보았다.

“버튼 영애……!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인가요? 이 드레스는 마담 플라다의…… 아니, 그것보다. 신녀님께 너무 무례하지 않나요?”

그러자 밀라 버튼이 딴청을 피우며 새침하게 말했다.

“그러게요, 제가 안 하던 실수를 다 했네요. 미안해요, 스필렛 백작.”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럴까, 생각하며 밀라 버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답을 깨달았다.

밀라 버튼은 다른 영애들과 달리 황태자 집무실의 보조 사무관으로서 꼬박꼬박 출퇴근했다. 그녀가 유달리 성실했기 때문에? 그럴리가, 황태자에 대한 짝사랑 때문이겠지.

“하지만 신녀가 되었다면 고고하게 신전에나 계실 일이지, 이런 미천한 파티까지 참석하시고. 신녀라는 게 하는 일이 참 없는 모양이죠?”

나는 매끄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 시선은 이미 밀라 버튼이 아닌 그녀의 뒤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공손히 시선을 내리깔면서도, 누군가의 귀에 잘 들릴 수 있도록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천한 파티라…… 밀라 버튼 영애. 설마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주최하신 파티를 미천하다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런…….”

“미천한 파티라 미안하구나, 버튼 자작 영애.”

그녀의 등 뒤에서 그림 같은 미소를 지은 메리벨 황후가 나타났다. 밀라 버튼은 화들짝 놀라며 깊게 허리를 숙였다.

“황, 황후 폐하……!”

오늘의 황후는 우아하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당연히 몹시도 아름다웠지만, 나는 어쩐지 그녀에게는 제복이 조금 더 어울려 보였다.

“미천한 파티이지만, 마왕전 승리를 이끈 주역이시라 특별히 신녀님을 초대했단다. 영애가 좀 이해하는 게 어떨까?”

황후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다.

“무, 물론입니다. 어찌 저 따위의 이해를 감히…….”

“물론 그렇지. 정 불편하다면 영애는 돌아가도 된단다.”

그렇게 대답한 후, 메리벨은 밀라 버튼을 휙 등지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나는 무릎을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내 주위에 있던 귀부인들도 함께 인사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의 말이 꼭 틀린 건 아닙니다, 신녀님. 이쪽으로 오세요.”

“네? 폐하, 어디로…….”

메리벨은 내 손을 잡아끌며 무리 안에서 빠져나왔다.

“신녀님을 일반 귀족들과 섞이게 둘 순 없지요. 자, 이곳에 앉으세요.”

그녀가 가리킨 자리는, 황제와 황후의 오른쪽 아래, 나란히 놓인 두 의자 중 한 자리였다. 나머지 한 자리는 황태자의 자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