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오늘 밤 기도를 하고 내일 해가 뜨는 시간, 이 상자를 땅속 깊은 곳에 묻는 것으로 위령제는 끝이 난다.
이 상자에는 각각의 유골함과 유품들이 담겨 있다고 했다. 클로에의 시신도 소각되어 이 안에 안치되어 있을 것이다.
제단 주변은 소박하지만 엄숙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제단 아래에는 에녹을 비롯한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상자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요한 신관이 조용히 내게 다가왔다.
“마음이 가는 대로 기도하시면 됩니다. 신녀님에게는 특별한 형식이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신녀의 기도는 사실 늘 이런 식이었다. 신관에게는 엄격한 의식 절차를 지키도록 교육했지만, 신녀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신녀의 삶은 여러모로 구속당했지만, 신성 의식을 행할 때만큼은 그 자체가 여신의 화신체라 보기 때문인지, 그녀들의 행동 자체가 곧 규율이며 절차였다.
나는 뒤편에 있는 에녹을 돌아보았다. 일렁이는 횃불들 사이로 그가 고개를 까딱하며 내게 힘을 실어 주었다.
나는 다시 나무상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손을 뻗어 앞으로 다가갔다. 거친 나뭇결이 손에 닿자,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뒤쪽에서 신관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장송곡을 불렀다. 적막한 세상에 낮은 음율이 고요히 내려앉았다.
나는 죽어간 많은 군사들에게 마음속으로 위로를 건넨 후, 끝으로 클로에를 생각했다.
솔직히 이곳에서 만난 클로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없었다. 그녀의 말로는 그녀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니, 안타깝게 여길 일도 아니었다.
다만 내가 떠올렸던 건, 소설 속 여주인공이었던 클로에 베레지안이었다.
소설 속 클로에는 다정하고, 아름답고, 사랑에 진심을 다했던 전형적인 로맨스 소설 속 여주인공이었다. 비록 에린의 입장에선 다를지라도.
짧은 기도를 끝내고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거렸다. 에린이었을 때의 기억까지 되찾은 지금, 이곳은 이미 내게 소설 속 세상이 아니었다.
***
클리포드 성을 떠나는 날 아침이었다. 긴 행렬들의 끝엔 하얀색 천으로 감긴 관이 하나 있었다.
그 관은 브리먼 황자의 시신이 들어 있었다. 비록 사라진 머리는 어찌할 수 없었지만, 일단 황족이었기 때문에 수도에 가져가서 황제의 처분에 따라 시신을 처리해야 했다.
그리고 와식 마차도 한 대 있었는데, 거기에는 루퍼트가 누워 있었다. 그는 그날 이후 꼼짝도 하지 않았는데,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죽은 게 아니라고 했다.
‘마왕이 담겼던 육체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루퍼트의 의식은 아직 잠들어 있는 건가?’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일단은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렇게 멍하니 있는데 뒤에서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에린, 이제 출발해야 합니다.”
정신 차리고 보니 다들 출발 준비를 모두 끝마친 채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그래요. 저 때문에 시간이 지체됐네요.”
에녹의 손에 이끌려 준비된 말에 올라탔다. 마차를 준비해 줄지 묻기도 했는데, 출발할 때와 마찬가지로 말을 타고 가기로 했다.
“피곤하시면 마법으로 먼저 모셔다 드릴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요. 환경 오염도 생각해야죠.”
그러면서 먼저 말을 출발시켰다. 에녹이 조금 뒤에서 큭큭거리며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뭐가 웃긴 거지?
나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곧 옆으로 다가온 에녹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런데요, 에녹……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씀하세요.”
“정말 검술은 루퍼트한테 못 이기세요?”
내 질문에 에녹의 눈동자가 얕게 떨렸다. 너무 직설적인 질문이었나?
“왜…… 물으십니까?”
나는 검지를 세워 아랫입술에 갖다 대면서 그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이왕이면 내 남자가 다 최고였음 좋겠으니까? 아, 아니라고 해서 실망스럽다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그런데 내 말을 듣던 에녹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내 시선을 피하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그의 귓바퀴가 불에 데인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에녹? 괜찮다니까요, 진짜 그냥 물어본 거예요.”
혹시 정말 자존심이 상했을까 싶어 나는 다급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곧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면서, 그가 정색한 얼굴로 말을 몰아 조금 더 내 가까이 다가왔다.
워낙 진지한 표정이라 나는 그가 혹시 화를 내려는 건가 했다.
“……그게, 애초에 클리포드 가의 고유 검술이 황실의 검술을 파훼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서, 내가 황실의 검술만을 사용해서 루퍼트를 이기기는 좀 어렵습니다.”
갑자기 그가 무슨 변명처럼 검술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더니, 잠시 숨을 골랐다.
“황실의 검술만 꼭 써야 하나요?”
“대련에서는 웬만하면 유지하려고 합니다만…….”
“그럼 그 검술에서 벗어나면요?”
질문을 던지자마자,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목숨을 걸고 하는 거라면 지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말투에서 자신감이 뚝뚝 묻어나왔다. 나는 흐뭇하게 바라보다가도 당부하듯 말했다.
“그래도 진짜 목숨을 걸진 마시고요. 오래오래 사셔야죠.”
이상하게 또다시 에녹의 얼굴이 붉어 보였다. 오늘 날이 좀 더운가? 아닌데, 추운데.
우리는 곧장 수도로 가지 않고 클리포드 영지를 차례로 순행하며, 성주들의 항복을 받아 냈다.
그들은 클리포드 공작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반기를 들었지만, 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성을 떠난 지 며칠이 되어서야 우리는 수도에 도착했다.
나는 활짝 열린 성문을 향해 다가가면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루퍼트는 아직도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루퍼트가 깨어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건…….”
에녹도 슬쩍 뒤를 돌아보더니 말끝을 흐렸다. 그른데 갑자기, 또 다른 황실 기사단이 성문에서 쏟아져 나왔다.
“멈추십시오!”
“앗!”
내가 탄 말이 놀랐는지 들썩거렸고, 에녹이 훌쩍 뛰어내려 고삐를 잡아 내렸다.
에녹을 본 그들의 대장이 앞으로 뛰어나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황태자 전하, 개선을 축하드립니다! 수도에 들어가기에 앞서 루퍼트 클리포드의 신병을 저희에게 넘겨 주시길 바랍니다!”
그들 중 일부는 루퍼트를 태운 마차로 몰려가 창끝을 마차로 향하게 했다.
에녹이 무릎 꿇은 대장의 앞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의 명을 받고 오는 길이냐.”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이리로 달려왔습니다!”
대장은 품 안에서 종이를 꺼내 에녹에게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황제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에녹은 잠시 말이 없더니, 한숨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데려가라.”
그러자 기사들이 마차를 끌고 있는 말의 고삐를 잡아끌었다. 나는 그 마차를 보다 다시 에녹을 보았다.
에녹은 복잡한 눈으로 멀어지는 마차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루퍼트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아까의 질문을 다시 하고 싶었지만, 왠지 지금은 묻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정작 나 자신도, 루퍼트를 어쩌고 싶은지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모든 게 끝난 지금 나는 그를 동정하고 있었다.
다시 말을 몰아 성으로 들어가니, 거리마다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환호하며 우리를 맞이했다.
“황태자 전하 만세!”
“마왕을 무찔렀다!”
“신녀님 만세!”
소란스러운 축제 분위기에 착잡했던 마음이 조금 뒤로 물러났다. 에녹과 나는 서로를 마주 보다 살짝 웃으며, 곧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렇게 황궁으로 들어간 후, 우리는 곧장 황제를 알현했다.
“고생들 많았다. 조만간 개선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 예정이다. 그때까지 편히 쉬도록.”
“황공합니다, 폐하.”
황제의 알현실을 나가기 전, 에녹은 내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으로 가서 쉬고 계세요. 이따 찾아뵙겠습니다.”
“아, 알겠어요.”
그렇게 나를 내보낸 에녹은 황제에게 독대를 청했다.
***
“내게 할 말이 있더냐.”
“예, 폐하. 루퍼트의 신병을……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너는 생각을 마쳤느냐.”
“…….”
황제는 빤한 얼굴로 에녹을 보며 미소 지었다. 에녹이 입술을 달싹이는가 싶더니 허탈하게 숨을 뱉었다.
“아니요, 아직 못했습니다.”
“그래, 이건 어려운 일이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느릿한 걸음과 마찬가지로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비록 마왕이 된 건 그 녀석의 뜻이 아니었다지만, 정황상 반역의 증거가 너무도 명백하다.”
“……그렇습니다.”
루퍼트와 브리먼 황자의 잦은 만남, 그들이 나누었던 대화, 클로에와 루퍼트의 관계까지 종합해 볼 때 혐의를 벗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반역은 본인과 가문까지 모두 몰살당할 만한 죄목이었다.
“무엇보다도 녀석은 내가 아닌 너를 향해 반기를 들려 했다. 피의 속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을 용서할 수 있겠느냐?”
에녹이 주먹을 꽉 쥐었다 풀었다.
“잃기엔 아까운 인재입니다.”
하지만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하진 않았다.
“클리포드는 대대손손 황실에 충성을 다했다. 그런 가문이 반역에 가담하고, 또 그대로 용서받는다면 앞으로 네가 황제가 되었을 때 통치력에 구멍이 생긴다.”
에녹은 말없이 황제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자신의 감정이 어떠하든, 루퍼트 클리포드의 죄는 사안이 엄중했다.
“잠시만, 생각할 말미를 주시겠습니까.”
“개선 파티 전까지는 마쳐야 할 것이다.”
에녹이 깊게 머리를 숙였고, 황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런데 폐하, 브리먼 황자의 시신은…….”
“…….”
그의 이야기를 꺼내자 황제의 얼굴이 서늘하게 변했다. 무심한 말투로 꺼낸 말은 상반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마땅히 황손이 죽었으니 국상을 치뤄야겠지. 하지만 좋은 분위기를 망칠 수 있으니 조용히 치르도록 하자. 발표는 나중으로 미루겠다.”
황자나 황녀가 죽으면 보통 애도의 기간을 선포한 후, 일주일가량 국상을 치른다. 하지만 황제는 그 모든 것을 생략하자고 말했다.
이미 그는 마음속으로 브리먼을 자신의 자식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만 가서 너도 쉬도록 해라.”
“……예, 폐하.”
에녹은 딱히 그 말에 반박하지 않고 그대로 물러났다. 그리고 나가자마자, 황제의 알현실 밖에 있던 보좌관 리암에게 물었다.
“루퍼트는 어디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