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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107)화 (107/129)

107화

“아…… 저…….”

뭐라 말하기에 앞서, 나는 양손을 모두 에녹에게 잡힌 상태였다. 에메랄드빛 눈매가 형형하게 빛나며 호선을 그렸다.

“왜 갑자기 놀라요.”

“놀라긴요, 누, 누가 놀랐다고.”

“난 놀랐는데.”

두 손이 한순간 자유로워졌다. 에녹은 그 자리에서 상체를 일으켜 나를 마주 보았다.

잘생긴 얼굴이 훅 하고 다가오니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왠지 전에도 한 번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아서.”

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것까지 본 후에 나는 눈을 꼭 감아 버렸다. 그러자 따뜻한 숨결이 입술 위에 닿는가 싶더니, 곧 말랑한 감촉이 느껴졌다.

어깨를 감싸는 부드러운 손길과 함께, 촉촉하게 아랫입술을 머금는 감촉이 짜릿하고도 달콤했다.

그렇게 몇 번의 입맞춤을 했을 뿐인데 깜깜한 새벽이 되어 버렸다.

***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침대 위였다.

“언제…… 잠든 거지?”

소파 앞 테이블 위에 마시다 남은 와인 잔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는 멍한 정신으로 어제의 기억을 떠올려 봤다.

에녹과 소파에서 키스를 했고, 중간에 와인을 나눠 마셨고, 그리고 또 입맞춤했고, 그런데 왜 난 침대에 있는 거지?

화들짝 놀라 이불을 들쳐 봤지만, 옷은 꼼꼼하게 입고 있었다.

“휴우…… 에녹이 그럴 리가 없지.”

안심이 되면서도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고 터덜터덜 전신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부스스한 머리와 살짝 부은 얼굴이 보였다. 이리저리 몸을 비춰 보기도 했다.

“예쁘기만 한데.”

자다 깬 모습도 역시나 아름다웠다. 나는 맨얼굴을 손바닥으로 벅벅 문지르며,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준비를 마친 후, 건물 밖으로 나오면서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에녹을 바라보았다.

어제 잠 한숨 못 잔 사람이 맞는 건가?

나는 피곤에 절어 있는데, 에녹은 멀쩡하다 못해 활기가 넘쳐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어깨의 상처도 제법 나았는지 물건을 나르는 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전하.”

“에녹.”

내가 부르자마자 바로 정정이 들어왔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람들이 너무 많잖아요.”

“에녹 드웰 리케포로스, 설마 내 이름을 모르는 건 아니겠죠.”

이 사람이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걸까. 나는 급히 주제를 바꿔 버렸다.

“그런데 어깨는 괜찮아요? 아까 무거운 거 들던데, 무리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신녀님의 치료 덕분에 많이 나았습니다.”

“저보다는 요한 신관님이 더 애쓰셨죠, 아니, 그런데 정말 다 나았다고요?”

나는 나도 모르게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에녹의 상의 맨 윗단추에 손을 뻗었다가, 아차 하고 몸을 굳혔다. 그러자 나를 전혀 말리지도 않은 에녹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방금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하더니, 꽤 대담하시군요.”

나는 손을 확 뒤로 빼내면서 그를 옆으로 흘겨봤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뭔가 얄미운데, 그 이유가 뭔지 잘 모르겠단 말이지.

“아무튼, 정말 괜찮다는 거죠?”

“리케포로스의 핏줄에는 치유의 힘이 들어 있어 남들보다 회복 속도가 빠릅니다. 걱정 마세요.”

“아, 그렇구나…… 다행이네요.”

그러고 보니 나 역시도 멍들었던 상처들이 꽤 옅어져 있었다. 아마도 내가 신녀이기 때문이겠지.

성에 못 보던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병사나 기사는 아니었고, 이곳의 사용인들도 아니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저들은 누구죠?”

내 질문에 곁에 있던 에녹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불타 버린 마을의 주민들입니다.”

“엇…… 그 마을이요? 마왕이 없애 버린 그……마을 사람들이……?”

“맞아요.”

“아.”

나는 멍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활기차게 웃으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에린?”

“네……?”

에녹이 당황한 목소리로 날 부를 때까지, 나는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했다.

에녹은 난처한 듯 웃으며 가까이 다가오더니, 눈 밑을 엄지로 쓸어 주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왜 우십니까.”

“아…… 제가.”

에녹이 말없이 바라보는 시선에, 나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다시 마을 사람들을 보았다.

“다…… 죽은 줄 알았어요, 나 때문에.”

에녹이 나를 두고 마왕과 대치하던 그 한순간, 잿더미가 되어 버린 마을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참이었다.

그들이 무사하다는 걸 들은 순간, 깊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마음 쓰는 줄 알았으면 미리 알려 줄 것을.”

나는 에녹이 건네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우는 모습을 보였다는 게 어쩐지 조금 창피했다.

“어떻게 살아 있는 건가요?”

“혹시 몰라서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인근 주민들을 미리 대피시켜 놓았습니다. 한 명도 다치거나 죽지 않았으니, 걱정 말아요.”

정말 놀라운 준비성에 감탄이 나왔다.

이 사람은 어떻게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던 거지? 이런 게 바로 천재가 아닐까?

“이들은 마을이 재건되는 동안 성에서 머물 겁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조금 익숙한 이들이 내게 걸어왔다. 바로 클리포드 성의 사용인들이었다.

“……마님.”

그중 이곳의 집사장이 눈을 내리깐 채 내 앞에서 고개를 조아렸다.

“고개 드세요, 이제 나는 클리포드 공작 부인이 아니에요.”

“들었습니다. 이제 신녀님이 되셨다고요.”

“그래요, 하지만 신녀가 되지 않았더라도 클리포드 공작과는 이혼했을 거예요.”

모두 이해한다는 눈빛이었다. 어떤 면에서 이해를 받았는지 몰라도 크게 내색하지 않아 줘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집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뒤에 있던 엘리아나와도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보자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다가왔다. 옷차림을 보니 그녀가 지금 성의 하녀장인 것 같았다.

“정말, 전 이제 세상이 멸망하는 줄 알았어요. 다들 미친 것 같아서…….”

지친 표정인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녀는 혈색도 좋고 눈빛도 맑았다. 아마 흑마법에 당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선대 공작을 모시면서 봤던 것들이 분별력을 키워 줬을 것이다.

“잘 지낸 것 같아 다행이에요.”

옆에 있던 에녹이 불쑥 끼어들어 집사장과 엘리아나에게 말했다.

“클리포드 성에 물자와 인력을 보강해 줄 것이다. 피난민들이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잘 관리해 주길 바란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들은 아까보다 더욱 깊이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저, 그런데 한 가지 여쭤 볼 일이 있습니다.”

집사장이 아까보다 훨씬 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에녹에게 말을 꺼냈다.

“뭐지?”

“뒷산에서…… 시신을 수습했는데 어찌해야 할는지.”

“시신이라면…….”

“흠흠, 여기 한때 계셨던 영애분의…….”

집사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내 눈치를 봤다. 말하는 정황을 들어 보니 아마 클로에의 시신인 것 같았다.

“확실히…… 죽었나요?”

“예, 도저히 살아 있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나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 그녀의 시신은 마지막에 봤던 대로 처참할 것이다.

에녹이 가볍게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일단 시신이 더 훼손되지 않도록 잘 보관해 두어라. 앤드론 백작에게 바로 기별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동시에 에녹은 오늘 밤 위령제를 준비하라 지시했다.

성안에서는 에녹과 마왕의 일대일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큰 희생이 없었지만, 그전에 산맥을 넘으면서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했다.

그들의 넋을 위로해 주기 위한 위령제였다.

에녹은 그 후에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군사들을 격려하고 위로했으며, 남은 일들을 손수 살뜰히 챙겼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어김없이 나를 데리고 다녔다.

그날 저녁 식사를 하는 중에 앤드론 백작에게서 바로 답신이 왔다.

“그녀의 시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겠다는군요.”

에녹은 왠지 그럴 줄 알았다는 말투였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나는 조용히 먹던 스푼을 내려놓았다.

앤드론 백작은 클로에의 친부가 아니기도 하고, 또한 그녀의 끝이 그리 명예롭지 않다는 점에서도 엮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앤드론 백작도 어차피 반란에 가담한 죄로 곧 수도에 소환될 겁니다.”

내가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자, 에녹이 다정한 어투로 물었다.

“에린, 내게 할 말이 있으십니까?”

“저…… 이런 말 위선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럴 리 없으니 말씀하세요.”

“클로에 양도 위령제 명단에 넣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에녹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야기를 뭐 그렇게 어렵게 꺼내십니까. 무슨 얘기를 하려 그러나 긴장했네요.”

“……어쨌든 제국의 반역자이니까요.”

반역자일 뿐 아니라, 흑마법을 사용하다 한때 악마가 되었던 육체였다. 하지만 에녹은 별것 아니라는 말투로 말하며,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았다.

“클로에 앤드론이 아닌 클로에 베레지안으로 올리도록 하죠.”

“고마워요, 전하.”

“에녹.”

“……에녹.”

따라 부르자, 그제야 그는 만족한 듯 미소지었다.

“아침부터 한 번도 안 부르시기에.”

어색해서 일부러 부르지 않았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우리는 의복을 갈아입은 후, 클리포드 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련된 위령제 장소에 갔다.

넓은 공터 위에 커다란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앞에 작은 제단이 있었다. 신관들이 그 제단에 서서 상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녀인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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