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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106)화 (106/129)

106화

그 와중에 우리를 발견한 익숙한 얼굴들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치료술에 능한 요한 신관과 부총사였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에녹은 힘없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항복하는 자는 살려 두고, 세뇌당하거나 흑마법에 당한 자들을 한쪽에 모아 두어라.”

“예, 전하.”

부총사는 지시를 내리기 위해 사라졌다. 요한 신관이 약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그는 에녹의 상처를 보며 낮게 신음했다.

“휴우, 어떻게 살아 계신 겁니까?”

“신녀님의 응급 처치 덕분에.”

에녹은 그 와중에도 나를 보며 웃었다. 조금 안심이 된 나도 그를 따라 살짝 웃고 말았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일단 입을 다물었다.

요한이 에녹의 상처를 치료할 동안 나도 도우려 했지만, 요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작은 약병 하나를 내밀었다.

“신녀님은 이거 드시고 잠시 계세요, 보아하니 신녀님도 행색이 말이 아니신데…….”

“저요? 제가 왜…….”

그렇게 말하며 나 자신을 내려다봤다. 여기저기 찢어진 옷이며 팔뚝과 다리에 시퍼런 멍이 나 있었다.

아마 니마스에게 두들겨 맞을 때 생겼을 상처가 대부분일 것이다.

“아, 이건 동굴에 갇혔을 때구나. 니마스가…… 아, 니마스는 클로에가 계약했던 악마예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설명했지만, 에녹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변했다. 그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타깝군, 미리 죽어 버리다니.”

“어떻게 죽은지 알았어요? 마왕이 그런 건데.”

“그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알았습니다. 이미 근처에 와 있었거든요, 아…… 윽, 살살 좀 해.”

내내 초연하던 에녹이 드물게 인상을 찌푸렸다. 요한이 기를 쓰며 그의 상처를 비틀어 짜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독을 다 빼 내야 됩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리는 거 아닐까요?”

“……음, 그렇긴 하죠.”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요한은 별로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고, 에녹도 별말 없었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아무튼 어느 정도 독을 제거한 후에 약을 바르고, 상처를 꿰맨 후 붕대를 감아 두었다.

“초반에 신녀님이 치료해 뒀으니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겁니다.”

“고생했네.”

에녹은 옷을 걸쳐 입고는 앉아 있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에린,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그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면서 나는 문득 그가 날 부르는 호칭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 챘다. 그것에 대해 뭔가 말하려는데, 중년 기사가 다가왔다.

“전하, 분부하신 대로 사람들은 분류해 놓았습니다. 세뇌당한 자들은 어떡할까요?”

“군에 배치된 신관들에게 데려가서 정화시켜라.”

“예, 전하!”

에녹은 가기 전에 내 어깨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방으로 들어가서 요한에게 치료를 받으세요. 이따 가 보겠습니다.”

“전 괜찮은데요. 으음, 알겠어요.”

돌아다니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신녀가 이런 꼴로 돌아다니는 걸 보면 군의 사기에 별로 좋지 못할 것 같았다.

성안으로 들어가면서, 아까 전투가 벌어졌던 곳을 보니 군사들이 루퍼트의 신체를 조심스럽게 옮기고 있었다.

“……죽은 걸까?”

“아니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내려온 데이먼이 내 호위로 다시 합류했다.

“죽지 않았다고요? 정말?”

“네, 의식을 잃고 쓰러지긴 했지만 제가 확인해보니 숨은 붙어 있었습니다.”

데이먼은 그 말을 하자마자 갑자기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데이먼?”

“레이디, 저는 두 번이나 레이디를 위험에 처하게 했습니다. 호위 기사로서의 자격이 없으니 저를 해고하세요.”

나는 당황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려 했다.

“일어나요, 데이먼. 그럼 데이먼을 해고하고 누구를 고용하면 될까요?”

“그건…….”

데이먼은 눈을 굴리며 고민하면서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사실 나는 데이먼의 실력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우선 그는 에녹이 추천한 사람이 아닌가.

무엇보다 그의 상대가 나빴다. 첫 번째는 이 나라 제일의 검사 루퍼트였고, 두 번째는 마왕이었다.

“데이먼?”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레이디가 원하는 사람이라면…….”

“찰스라고 하는 기사가 유능하다던데.”

사실 듣기만 했지, 나는 찰스라는 사람의 얼굴도 알지 못했다.

“그 작자는 겉멋만 들었지 사실 검술 실력은 형편없습니다.”

“토마스라는 사람은요?”

“토마스요? 절대, 절대 안 됩니다. 그놈은 레이디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는 놈이에요!”

데이먼의 간절하기까지 한 즉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데이먼.”

내가 손을 내밀자 데이먼은 얼굴이 붉어지더니, 두 손으로 내 손끝을 살짝 잡았다.

“목숨을 다하겠습니다, 레이디.”

나는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에녹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보고 있었기에, 나는 그를 향해서도 손을 흔들었다.

***

“신녀님은 쉬셔야 합니다. 지금은 모르시겠지만 긴장이 풀리면 통증이 있을 겁니다.”

“몸살 날 지도 몰라요. 방 안에 계세요, 레이디.”

“휴, 알았어요…….”

요한에게 치료를 받은 후, 다시 나가려고 했지만 데이먼과 요한 모두 극구 만류하는 통에 나는 가만히 방에 앉아 있어야 했다.

어차피 남은 일은 전쟁의 뒷수습이니 내가 없어도 돌아가긴 돌아갈 것이다. 정말 가만히만 있기는 무료하여 창가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밖을 구경했다.

아직 정리가 덜 되었는지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그래도 확실한 건, 이제 전투는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어느덧 슬금슬금 해가 지고 있었다. 타닥타닥 타고 있는 벽난로에서 은은한 온기가 피어올라 방안을 데워 주었다.

큰일을 겪고 나서인지 몸이 노곤해졌다. 꾸벅꾸벅 졸다 깨어나 보니, 어느새 왔는지 에녹이 맞은편에 앉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언제 왔어요? 깨우지 않고 왜.”

나는 혹시 침이라도 흘렸을까 싶어, 나도 모르게 입 주위를 훔쳐내었다.

“침대에 데려다 놔야 하는 건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아, 아니에요. 잠깐 졸았나 봐요.”

“쉬라고 들여보내 드렸으니 편히 주무셔도 될 텐데요.”

“그냥 자 버리기엔 조금 아까워서요. 역사적인 날이잖아요.”

나는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돌렸다. 어느새 찾아온 휴식 같은 어둠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긴장했던 모두가 모처럼 맛보는 평화로운 밤일 것이다.

그가 의자를 조금 더 가깝게 당겨 앉았다.

“에린, 치료는 다 했습니까? 아픈 곳은 없어요?”

내 손목을 잡아 오는 손길을 보다 문득 생각나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왜…… 이름으로 부르세요?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갑자기 호칭이 바뀌었길래.”

“당신도 나를 이름으로 불러도 됩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에녹, 이라고 해 보세요.”

손등을 덮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입술만 달싹거릴 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무리 꽤 편하게 대해 준다 해도, 상대는 이 제국의 황태자였다.

“그래도, 남들 들으면…….”

“황태자비가 황태자의 이름을 부른다는데 누가 뭐라 하면 나에게 데려오세요.”

“황…… 황태자비…… 아니, 아직 아니잖아요!”

나는 벌떡 일어나려다 빤히 보는 에메랄드빛 시선에 움찔하며 다시 앉았다. 뭐, 이만하면 예의상 사양은 충분하겠지.

“알았어요, 에녹.”

새침하게 대답하자 에녹이 환하게 웃었다.

“듣기 좋네요.”

문득 다정한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사람도 피곤할 테지.

“전하는 안 쉬세요?”

“아직 할 일이 조금 남아서…….”

에녹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조금 당황하는 것 같았다.

“이리 와요.”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에녹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나 나를 따라왔다.

나는 소파 끝에 걸터앉아 내 허벅지 위를 팡팡 때렸다.

“음, 그…… 에린.”

“뭐해요, 어서요.”

눈을 크게 뜬 채 굳어 버린 에녹을 잡아당겨 소파에 눕게 만들었다. 그는 망설이는 듯하면서도 내가 당기면 당기는 대로 순순히 끌려와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그런데 에녹이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풋, 그렇게 있으면 편해요?”

“네.”

허벅지를 베고 눕긴 누웠는데, 마치 관에 들어가는 사람처럼 두 손을 가지런히 자신의 배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이럼 제가 더 불편하게 하는 것 같잖아요.”

“……아닙니다.”

어쩐지 목소리에 한숨이 섞여 있었다.

“어깨는 안 아파요?”

“네, 괜찮습니다.”

나는 듣자마자 손가락으로 상처 부위를 은근하게 콕 눌러 보았다. 그러자 에녹이 화들짝 놀라며 내 왼쪽 손목을 살짝 낚아챘다.

“아, 아프구나. 괜찮다길래 혹시나 하고…….”

하지만 에녹은 내 손목을 놓지 않고 그대로 슬그머니 손을 잡아 손등을 쓰다듬었다. 조금 어색하고도 마음이 간지러운 가운데, 나는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물어봤다.

“일부러 그런 거죠?”

“…….”

“아까 마왕한테…… 일부러 어깨 내준 거 아니에요? 나보고 맞추라고.”

“그럴 리가요.”

에녹이 대답을 피하듯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맞는 것 같은데…….”

나는 중얼거리면서도 더 캐묻지 않고, 오른손으로 그의 까만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로 스치는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의 느낌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계속 만지작거렸다.

에녹도 싫진 않은지 가만히 눈을 감은 채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아래에서 새근새근 소리가 났다. 여전히 한 손은 꼭 잡은 채였다.

그나저나 에녹이 잠든 건 정말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잠시 수려한 얼굴을 감상하기로 했다.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가락을 조금 움직여 반듯한 이마 위를 살짝 만져보았다.

매끄러운 감촉을 따라 내려가 보니 높고 잘생긴 코가 나왔고 그 아래 가지런히 다물린 입술이 자리하고 있었다.

입술 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나도 모르게 입 안에 고여 있던 침이 넘어갔다. 침 넘기는 소리가 너무 커서 스스로 놀라 버렸다.

“아, 내가 무슨 생각을.”

홀로 중얼거리며 손을 떼려 하는데, 갑자기 눈을 뜬 에녹이 그 손을 덥석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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