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발 디딜 곳을 찾아 벽에 바짝 붙으며 아래를 흘끔 내려다봤다. 까마득한 높이였다.
‘차라리 뛰어내릴까, 바로 즉사겠지.’
내가 기사였다면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어쩔 수 없이 손으로 돌벽을 짚은 채 아주 천천히 내려갔고, 가는 동안 결국 은신이 풀려 버렸다. 그리고 더욱더 안타깝게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동굴에서 니마스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뭐야! 사라졌잖아! 이 새끼들은 왜 자빠져 있어?”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얼마지 않아 니마스는 암벽에 매달려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등 뒤에 잠자리 같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내게 날아왔다.
“저런, 저런. 가엾게도 얼마 가지 못했구나.”
분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지만, 이젠 정말 답이 없었다.
“킥, 마왕님껜 네가 혼자 도망가다가 추락사했다고 전해 주면 되겠네.”
“아!”
그리고 아주 간단히 내 어깨를 잡아당겨, 아래로 떨어트렸다.
‘죽는다……!’
이번에야말로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신성력을 끌어올려 몸의 방어 기능을 높여 봤지만, 이 높이에 이 속도로 떨어지는 걸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곧 닥쳐 올 충격에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단단한 팔이 확 나를 휘어잡았다.
“에……녹?”
“찾았군.”
나는 반사적으로 나를 구할 수도 있을 익숙한 인물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또 다른 익숙한 목소리가 대신 답했다. 듣는 순간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마…왕.”
루퍼트의 모습을 한 마왕이었다.
강대한 마기의 존재감에 기가 질린 나는 그를 뿌리치고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위에서 쏟아지는 강한 압력에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절망스러웠다. 이거야말로 여우 피하려다 범과 마주친 꼴이 아닌가.
그는 나를 보며 피식 비웃더니 하늘을 봤다. 니마스가 나를 찾기 위해 아직 비행 중이었다. 곧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숲속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으로 귀를 막았고, 니마스의, 그러니까 클로에의 몸이 산산이 부서진 채 그대로 떨어져 버렸다.
하늘에서 언뜻 스치듯 본 모습만 봐도 처참했다. 니마스는 자신의 부하가 아니었나? 그런데 저렇게 망설임 없이 죽일 줄이야.
“하찮은 것이 나의 제물에 손을 대다니.”
마왕은 별것 아니라는 듯 툭 뱉으며, 주저앉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라, 괜히 도망가서 고생이지 않느냐.”
퍽 다정한 척하는 목소리에는 음습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
나는 소름이 돋아 그 손을 외면하고 스스로 땅을 짚어 일어났다. 그러자 마왕이 표정을 굳히며 잠시 나를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고마움을 모르는 인간이군. 네게 흥미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건방 떠는 걸 살려 둘 만큼은 아니야.”
그 순간 그에게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확실히 다정한 척하는 것보단 이편이 어울렸지만, 지금 상황은 좋지 않았다. 살기 위해선 고분고분 굴었어야 했나?
하지만 마왕과 닿을 때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기에, 참을 수가 없었다.
“…….”
기가 질린 채 말없이 서 있자, 마왕은 갑자기 너그러운 어투로 말을 꺼냈다.
“하지만 기회를 주마, 아직 너는 쓸모가 있는 편이니.”
“기회……?”
마왕이 음흉하게 웃었다. 확실히 그는 루퍼트가 아니다. 적어도 내가 아는 루퍼트는 저런 표정으로 웃지 않는다.
“리케포로스의 애송이를 내 앞으로 데려와라. 그럼 네 목숨은 살려 주지.”
어처구니없는 그의 제안에 나는 대답도 없이 눈만 깜빡거렸다. 내 반응과 관계없이 마왕은 계속해서 지껄였다.
“리케포로스를 죽이고 내가 인간 세상의 황제가 되면 너를 황후가 되게 해 주지, 어떠냐. 따분한 신녀 노릇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어지간하면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지만, 에녹을 죽이라는 말에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글쎄, 넌 내 타입이 아니라서.”
내 퉁명스러운 대답에 마왕은 얼굴에서 표정을 거둬 버렸다.
“그래, 어차피 그리 나올 줄 알았다.”
마왕이 냉소적인 웃음을 흘리며 서서히 내게 손을 뻗었다.
“과연 그 리케포로스 애송이는 어떤 선택을 할까? 그것참 궁금하지 않나?”
어두운 기운이 똬리를 틀며 내게 날아왔고, 내 신성력은 발현되지도 않은 채 그에게 사로잡혔다. 그러자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이제 정말 죽을지도.’
***
언덕과 드넓은 평야, 마을을 가로지르는 강줄기, 그 너머 산맥까지 훤히 보였다.
“경치만큼은…… 최고네.”
자조적인 말을 중얼거리면서도 나는 최대한 아래를 보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으읏.”
세찬 바람이 불 때마다 깃대가 휘청거렸다. 그리고 내 몸도 함께 흔들렸다.
아슬아슬하게 돌난간을 디딘 발끝이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려다 보니 몸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마왕에 의해 클리포드 성에서 가장 높은 곳, 탑에 매달려 있었다.
정사각형 모양의 탑 맨 꼭대기에는 모서리마다 깃대가 꽂혀 있었고, 마왕은 나를 그중 하나에 밧줄로 대충 묶어 놓았다.
묶으려면 세게나 묶지, 어설프게 묶는 바람에 자칫하면 매듭이 풀려서 그대로 떨어질 것 같았다. 아무리 고소공포증이 없는 나라고 해도, 이 아찔한 기분을 즐길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라도 마음이 바뀌었다면 말해.”
그 와중에도 악마가 나를 회유하려 들고 있었다. 마왕도 악마들 중 왕이니까 악마는 맞지 뭘.
나는 입을 다물었고, 브리먼 황자는 저 아래에서 검을 빼어 들고 진지하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황자는 마왕만 없으면 지금이라도 올라와서 나를 찔러 죽일 것만 같았다.
이건 마왕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그렇게 절망하고 있는 와중에, 마왕이 비릿한 웃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왔군.”
그가 지칭하는 대상은 쉽게 짐작이 됐다. 지금쯤이면 에녹이 나를 구하러 왔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라고 해도, 이 상황에서 나를 무사히 구할 수 있을까? 상대는 마왕이었고, 나는 그의 인질이었다.
이 영악한 마왕은 에녹과 내 사이를 알고 있었는지, 나를 자신의 편으로 회유하는 데 실패하자 죽이지 않고 이렇게 미끼로 써먹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성문으로 다가오던 한 무리가 나를 발견하자 걸음을 멈췄다. 이곳에서는 아주 작은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에녹이 이곳을 보고 있었다.
그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감과 미안함이 밀려왔다.
‘이런 식으로 발목 잡고 싶진 않았는데.’
비록 내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리 될 것이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이는 와중에, 마나가 실린 천둥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케포로스의 후예여, 신녀를 살리고 싶다면 너 혼자 들어와라.]
“치사한 놈.”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클리포드 성문 안에는 브리먼 황자를 선두로 하여 빼곡하게 군사들이 들어차 있었다. 그런 곳을 황태자 혼자 오라고? 더군다나 마왕까지 있는데?
“리케포로스가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지?”
“시끄럽다.”
그마저도 듣기 싫었는지 마왕은 무슨 마법을 써서 내 입을 막아 버렸다. 정말 치사한 놈이라니까.
에녹은 망설임 없이 홀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초조하게 지켜보는 와중에, 성문을 통과한 에녹이 멈춰 섰다. 그러자 마왕은 이 높은 곳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그와 얼마 떨어진 거리에서 마주 보고 섰다.
“너에게 제안을 하나 하지.”
주위가 매우 조용했기 때문인지, 저 아래에서 하는 대화인데도 꽤나 선명하게 들렸다.
“신녀를 내게 넘긴다면, 군사를 물리고 나 또한 마계로 돌아가겠다. 제국을 온전히 보전해 주겠다는 뜻이다.”
“……저 미친놈.”
나는 욕지거리가 나왔지만, 에녹은 말이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인지 자세히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마왕의 제안은 에녹의 입장에서 달콤할 것이다. 단지 여자 하나만 포기하면 된다. 신녀라고는 하지만 마왕이 물러가면 그 또한 효용 가치가 낮아지니까.
“싫다면?”
그러나 뜸을 들인 에녹이 그렇게 묻자, 마왕이 갑자기 손 하나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엄청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아, 안 돼…….”
내가 있는 곳에서는 선명히 보였다.
클리포드 성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 하나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에녹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클리포드 성 자체가 높은 지대에 있으니 그의 눈에도 보일 것이다.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솟아올랐고, 마왕은 손가락으로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다음은 저 마을이다. 신녀를 포기해라, 그럼 깔끔하게 물러나겠다.”
입술을 깨물었다. 이 무력한 상황이 답답하고 화가 났다.
나는 무던히도 살고 싶었지만, 마을의 수많은 목숨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걸 보고도 에녹에게 나를 선택하라 강요할 순 없었다.
“에녹……!”
내가 뭔가 말하려는데, 에녹이 먼저 입을 열었다.
“포기하겠다.”
그 깔끔하고 단조로운 대답에 나는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에녹은 치켜들고 있던 검 끝을 내리고 나를 잠시 올려다봤다.
당황스러우면서도 차마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살려 달라고, 날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빌어야 할까?
“하하핫, 잘 생각했다. 약속대로 나는 물러나도록 하지, 사마엘의 노예야. 군대를 물려라.”
“……안 됩니다! 마왕이시여! 저자는 리케포로스의 후예입니다! 그리고 신녀는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두고두고 후환이……!”
“아주 먼 과거일 뿐이다. 나는 저 어여쁜 제물을 얻은 것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소리치던 브리먼 황자는 갑자기 옆에 있던 병사에게서 활을 뺏어 들더니, 높이 매달려 있는 나를 향해 겨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