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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103)화 (103/129)

103화

깨어났을 땐 아직도 동굴 안이었다.

아까와 달리 두 손과 발이 꽁꽁 묶여 있는 걸 보니 후회가 밀려왔다. 그냥 일일이 대꾸하지 말고 얌전히 있을걸 그랬나 보다.

의식을 잃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흐릿한 정신이었지만, 동굴 밖에서 두런두런 대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황태자의 마법 수준이 상상 이상이던데, 사마엘의 노예. 이게 어떻게 된 거냐?”

“……그래서 계획을 변경한다. 일단 신녀를 죽여서 적의 사기를 꺾어야겠어.”

클로에의 목소리를 한 니마스와, 브리먼 황자인 것 같았다. 뭐라고 하는지 조금 더 집중해서 들어 보았다.

“죽이라고? 나야 물론 지금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지, 하지만 그 후환은 누가 책임지라고……!”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도 돼, 신녀는 사고로 죽은 거다.”

“어떻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날 죽이려고 하는 그들의 목소리만큼은 또렷하게 들렸다.

대충 들어 보니 날 이 속에 가두고 동굴을 무너뜨려 죽이겠다는 계획인 것 같았다. 그걸 듣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있을 순 없어.’

하지만 손과 발이 묶여 있어 당장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사이 밖에서 이야기하던 니마스와 브리먼이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럼 내가 마법사와 인부들을 부르도록 하지. 깨어나기 전에 하는 게 시끄럽지 않을 거야.”

“……진짜 믿어도 되는 건가?”

“당연하지.”

브리먼 황자의 확신 어린 목소리에 니마스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좋아, 내가 동굴을 지키도록 하지.”

“여자가 깨어나서 도망치지 않게 잘 감시해.”

브리먼이 나가고 니마스도 밖으로 나갔다. 동굴 안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둘의 대화를 듣고 보니 기가 막혔다. 동굴을 무너지게 해서 사고사로 위장한다고? 마왕이 그걸로 속을까? 분명히 문제 삼으면 브리먼은 니마스에게 뒤집어씌울 텐데, 겨우 저 정도로 믿는다고?

혀를 내두를 만큼 순진한 악마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확실한 건 내가 정말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거였다.

나는 니마스가 없는 틈을 타서, 옷 안쪽, 허리 뒤에 숨겨 놓은 단검이 제대로 있는지 뒤로 묶인 손을 더듬어 살펴보았다. 다행히 소지품을 뒤지거나 하진 않은 모양인지, 단검이 그대로 있었다. 역시 순진한 악마가 하는 일이라 그런지 어설펐다.

‘이걸로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마법석 팔찌도 그대로인 걸 보니 어떻게 잘만 하면, 저들의 눈을 피해 탈출이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일단 영악한 브리먼 황자가 멀어지길 기다리면서, 나는 기절한 척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

“전하! 산맥은 모두 점령했습니다. 마왕군은 거의 궤멸했고 남은 잔당들이 클리포드 성으로 후퇴하고 있습니다!”

중년 기사 하나가 에녹 앞에 달려와 부복하며 보고했다.

에녹은 숨을 고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기사는 일어나면서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에녹을 살펴보았다.

에녹의 몸에서는 희미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법을 극한까지 사용한 이후 진정되지 않은 마나가 넘실대고 있었다.

‘대체 누가 마왕인지…….’

에녹을 보는 중년 기사의 눈빛에는 경외감, 존경심, 그리고 희미한 두려움마저도 섞여 있었다.

신녀가 납치된 후, 에녹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이 중년의 기사는 제국 전쟁을 오래도록 수행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직급도 높았고 경험도 풍부했다.

황태자 에녹이 마법사로서 두각을 드러내고, 장성하면서부터 그와 함께 전쟁을 겪은 적도 수차례였다.

조금씩 사용하던 마법만으로도 그가 뛰어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또한 에녹이 참여한 전쟁에서는 평소보다 조금 더 순조롭게 승리한다는 점에서, 이미 중년의 기사는 황태자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었다.

하지만 기사는 오늘 자신이 완전히 오판했음을 깨달았다.

오늘 상대한 마왕군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초반 전투에서는 황자를 지지하는 가문들의 오합지졸 병사들이었지만, 점점 갈수록 클리포드 성의 정예병들이 진군하며 실력이 엇비슷해졌다.

또한 병사와 기사들은 하나같이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광기에 젖어 있었다.

그것이 악마 니마스의 환각 안개 때문이라는 걸 알았을 땐, 이미 아군까지 당한 상황이라 아찔했었다.

그 모든 적들의 방어선을 뚫어 나갈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맨 앞에서 진두지휘하던 황태자 에녹의 마법 덕분이었다.

지금까지도 마법사의 유무는 전쟁에서 크나큰 변수였고, 중요한 화력이었다. 그래서 전쟁이 벌어지면 일단 상대방의 마법사부터 찾아 제거했다. 

그러나 마법사는 기동력이 낮고, 칼과 창이 오고 가는 전장에서 스스로의 몸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전면에 서는 건 절대 무리였다.

‘그런데 그 모든 걸 혼자 해냈다는 거지.’

적들이 앞을 막기가 무섭게 수십, 수백 명의 머리가 날아가는 모습은 일찍이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명백했다.

지금까지 제국과 타국 사이에 벌어졌던 영토 전쟁에서, 에녹은 실력을 많이 숨기고 꽤 자제해 왔던 것이다.

중년 기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보고를 마친 후 다시 병사들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자신의 자리로 갔다.

에녹이 적을 궤멸시켰더라도, 점령지를 수색하고 점거하는 건 군사들의 몫이었다.

에녹은 중년 기사가 물러나는 것을 본 후, 사뿐히 뛰어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의 발아래 비옥하고 넓은 클리포드 영지가 펼쳐져 있었다.

‘느려.’

중년 기사의 경악에도 불구하고, 정작 에녹 자신은 지금의 진군 속도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객관적으로는 유례없이 빠른 속도라고 하더라도, 그사이 에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이대로는 안 돼.’

다행히 산맥을 넘은 이후에는 무슨 일인지 흑마법의 개입이 상당히 줄어들었고, 보충되는 병력의 숫자도 적어 보였다.

‘안에 무슨 일이 생긴 거다.’

목 안이 타들어 가고 피가 바짝 말라 가는 기분이었다. 단지 기분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의 온몸은 불에 데인 듯이 뜨거웠다.

확실히 그는 무리하고 있었지만,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조급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정밀한 컨트롤이 필요한 마법보다는 화력이 높은 공격 마법 위주라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답답해하고 있는 와중에 마법 통신구에서 빛이 반짝거렸다. 에녹은 서둘러 통신구를 켰다.

“데이먼, 그쪽의 일은 어떻게 됐지?”

「전하, 이곳 병력이 흩어져 누군가를 찾고 있습니다. 얼핏 대화 내용을 종합해 볼 때, 그 대상이 신녀님인 것 같았습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에녹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과연 에린이 무사히 마왕에게서 탈출할 수 있을까? 만일 도망치다 잡히면 더 큰 변고를 겪게 되는 것은 아닐지.

“……은밀하게, 하지만 최대한 빨리 신녀를 찾아라.”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쪽도 수색 인원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대로라면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

“내가 가지.”

에녹은 통신구를 끄고 뒤를 돌아 재정비하고 있는 황실의 군대를 내려다봤다.

가장 위험하고 어려울 것이라 예상했던 산맥을 넘었으니, 이제 이들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에녹은 훌쩍 다시 아래로 뛰어 내려가, 각 부대의 지휘관을 소집했다.

“군을 나눌 것이다.”

날랜 기사들과 마법사, 신관을 포함한 소수의 정예를 자신이 데려가고, 나머지는 원래의 계획대로 차근차근 영지를 점령하기로 했다.

지금 영지 안의 성주들 가운데는, 지금 마왕이 되어 버린 클리포드의 영주가 반란을 일으켜 어쩔 수 없이 참여한 이들도 많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회유를 우선으로 한다. 이들 또한 제국의 백성이니 최대한 피를 보지 않길 바란다.”

“예, 전하!”

각자가 자리로 흩어지는 것을 보며, 에녹은 혼돈의 활과 지팡이를 챙겨 등에 메었다. 그때 신관 요한이 다가와 에녹에게 작은 약병을 건넸다. 요한은 에녹을 따라가지 않고 군에 남기로 했다.

“그 마음을 알아 말리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적들에게 당하기도 전에 전하께서 쓰러지실 겁니다. 부디 헤아리시길.”

에녹은 물끄러미 그것을 보다 순순히 물약을 열어 마셨다. 전투를 치르는 내내 마셔 왔던 마나 포션이었다.

들끓던 몸이 약간이나마 식는 기분이었다.

그는 빈 약병을 바닥에 툭 던지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더는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라서.”

***

“응? 뭐야, 아무도 없잖아.”

동굴을 폭파시키기 위해 온 마법사와 곡괭이를 들고 있는 인부가 안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입과 코를 가리고 숨을 죽여 조심스럽게 그들의 곁으로 기어갔다.

“헉, 도망친 모양인데요! 저기 보세요!”

인부가 다급하게 바닥에 흩어져 있는 밧줄을 가리켰다.

“젠장, 어서 클로에 님께 알려야……! 어억?”

‘안 돼. 나가면!’

나는 서둘러 손에 쥐고 있던 독침을 되는대로 마법사를 향해 찔러 넣었다. 찌르고 보니 엉덩이였다.

화들짝 놀란 마법사가 엉덩이를 벅벅 문지르며 두리번거렸다. 난 늦기 전에 인부의 종아리에도 독침을 찔렀다.

“앗, 이게 뭐야! 벌인가?”

인부는 펄쩍 뛰며 주저앉았고, 나는 일어나 그들에게서 조금 물러났다.

“뭐해, 어서 나가서…….”

인부에게 지시를 내리던 마법사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입에 거품을 문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인부의 처지도 다르지 않았다.

‘다행이야, 두 명까진 효력이 있나 봐.’

마법석 팔찌의 은신 기능이 작동 중이었다. 나는 그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바로 동굴에서 뛰어 나갔다.

아까부터 발목을 비롯하여 온몸이 시큰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동굴에서 나왔다고 해도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동굴은 깎아지른 절벽 한가운데 있었고, 덕분에 내가 도망치는 속도는 한없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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