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으, 여기가…….”
일어나자마자 느껴진 건,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였다.
“여긴…….”
나는 축축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둘러보니 주위가 어둑어둑했다. 이곳은 건물 내부는 아닌 것 같았고, 어느 지하 동굴 같았다.
“일어났니?”
몸을 부르르 떨며 정신을 차리려는데, 익숙하고도 섬찟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로에, 아니, 넌 누구지?”
“킥, 하찮은 계집이 감히 악마종인 내 이름을 묻다니.”
“아, 윽.”
구두를 신은 발이 내 손등 위를 짓이겨 밟았다 뗐다. 손을 밟는 발에는 일말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악마의 분풀이를 고스란히 받고 나서야, 나는 손으로 바닥을 짚어 몸을 일으키려 했다.
얼핏 보이는 손등 위에 울긋불긋하게 피멍이 들어 있었다. 온몸이 욱신거리는 거로 보아, 아마 다른 부위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치 어디선가 실컷 두들겨 맞은 듯한, 아니 정말로 맞은 거겠지. 기절한 상대를 두들겨 패다니 정말 악마다운 짓이다.
그래도 몸 밖에 걸어 놓은 방어 마법과 몸 안의 신성력이 아직 제대로 작동하는지, 아프긴 해도 큰 부상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궁금하다니 알려 주지, 나는 위대하신 대악마 니마스라고 한다.”
“……니마스?”
나는 책에서 봤던 악마종의 이름을 떠올리며 피식 실소를 흘렸다. 어쩐지 그 이름을 듣고 나니 그간 클로에의 행적이 이해가 되는 듯도 했다.
“뭐가 웃기지?”
“대악마는 무슨, 너는 하급 악마잖아. 쾌락과, 주술 환각의 악마이지만 마계에서는 최하층에 있다며?”
솔직히 책에서 얻은 지식이 얼마나 쓸모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의 얼굴이 와락 구겨지는 걸 보니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짝, 소리와 함께 오른쪽 뺨에 불벼락에 맞은 듯한 작열감이 들이닥쳤다. 하도 아파서 화끈거리는 뺨을 감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겨우 신의 여종인 인간 여자 주제에 날 비웃어? 내가 널 죽이지 못할 것 같으냐?”
“응, 못 죽이는 것 같은데? 너 그럼 마왕에게 죽잖아?”
실은 이렇게 되는 대로 내뱉는 것도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마왕이 그러했듯이, 니마스도 정신 잃은 나를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죽이지 못하고 이렇게 시시한 분풀이만 한다는 건, 나를 죽인 후 마왕의 질책을 두려워해서겠지. 마왕 입장에선 질책이겠지만, 하급 악마인 니마스 입장에서는 소멸에 가까운 것일 터.
밑도 끝도 없는 마왕의 집착도 무서운 일이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만큼은 그것이 내 목숨을 유지시켜 주고 있었다.
“아주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그래 좋아, 죽이진 못해도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줄 순 있지.”
아, 너무 도발했나.
니마스의 붉은 눈동자가 갑자기 새하얗게 변했다. 어두운 동굴 안에 갑자기 더 새카만 안개가 피어올랐다.
나는 긴장한 눈으로 그 안개를 경계하며 바라보았지만, 어차피 피할 길은 요원해 보였다.
당장 일어나서 달려 나갈 힘도 없었거니와, 동굴 밖에서도 어떤 기척이 느껴지는 게 지키는 자들이 필시 서 있을 것이다.
검은 안개는 결국 턱밑까지 차오르더니 시야를 새카맣게 덮어 버렸다.
“읍.”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입과 코를 막았지만, 폐부 속으로 연기가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죽음에 가까운 고통이라니, 그게 뭐지?
달갑지 않은 호기심이 일어났고, 그렇게 몇 분인가 시간이 흘렀다. 나는 뭔가 달라졌을까 하고 주위를 살펴봤지만, 사방이 안개에 가로막혀서 심리적으로 답답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깔깔깔, 계집년, 그 환각 안개 속에서 얼마든지 허우적대 보거라. 더욱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 테니!”
아아, 이게 악마 니마스의 주특기인 환각 안개인가 보다. 아마 상대에게 끔찍한 환영을 보여 주면서 고통을 주는 거겠지.
나는 어이없는 눈으로 안개 너머에 있는 니마스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하급 악마의 한계인 건지 몰라도 니마스는 머리가 나쁜 모양이다. 신녀인 줄 뻔히 알면서 내게 이런 저급한 흑마법을 사용할 줄이야.
더군다나 안개가 너무 짙어서인지 니마스는 내가 아직 멀쩡하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자, 이제 어떻게 여기서 나가야 할까?
팔찌의 은신 기능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에녹이 걸어 준 마법석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많이 걱정하겠지. 나 때문에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닐까, 조금 염려가 되었다. 그래도 그가 걸어 준 팔찌가 있으니,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건 알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니 안개에서 특유의 탄 냄새가 났다. 냄새뿐만 아니라 공기 자체가 눅눅하고 끈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겨우 동굴 벽을 잡고 일어나서는 손을 휘휘 저어 얼굴 앞에 있는 공기를 분산시켰다.
“후, 적당히 좀 하지, 숨을 쉴 수가 없잖아.”
“……너? 어떻게 정신을 차리고 있는 거지?”
“글쎄, 위대하신 대악마라며. 직접 생각해 보는 게 어때?”
왜인지 모르겠지만 클로에의 탈을 쓴 이 악마는 크게 무섭지 않았다. 지금 니마스보다 오히려 클로에였을 때가 상대하기 까다로웠던 것 같다.
전에 마왕과 마주했을 때의 공포를 떠올려 보면 귀여울 정도였다.
그렇다고 정말로 얕보면 안 되겠지만.
“으으, 그렇군. 넌 신녀였지. 그래서 내 종이 그렇게나 저주를 걸었는데도 다 무용지물이었어!”
이제라도 알았으니 칭찬이라도 해 줘야 하나, 라고 생각하는 순간 니마스가 이를 악물고 다가왔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려는데, 니마스의 붉은 눈동자가 악독하게 빛났다.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퍽-!
그렇게 말하는 걸 듣는 순간 복부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흑마법이 통하지 않자, 완력으로 괴롭힐 생각인가 보다.
이것만큼은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니마스는 그 여리여리한 클로에의 몸으로 엄청난 괴력을 냈다.
몇 대인가 여기저기 두들겨 맞고선, 결국 나는 쓰러지고 말았다. 씩씩대는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하급 악마라 그런지 수단도 참 저급하기 짝이 없었다.
“절대 곱게 내보내 주진 않을 거니까, 각오하라고.”
그 와중에 마법석 팔찌에 있는 독침이 떠올랐지만, 너무 아파 정신이 점점 흐려졌다.
나는 속으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며 스르륵 눈을 감았다.
***
“루퍼트……! 자네!”
브리먼은 크게 소리치며 방 안으로 들어오다, 마왕 외에 아무도 없다는 걸 인지하고는 급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발리노스 님, 혼자 계셨습니까.”
“그래, 무슨 일이지?”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마왕은 지금 기분이 몹시 저조해 보였다.
“군사가 모자랍니다. 클리포드 성에서 기사들과 병사들을 좀 더 차출해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양쪽 군의 숫자는 비슷하다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지 않았나? 사마엘의 노예야. 게다가 언데드를 걸면 우리 측의 병사가 늘어날 테니 말야.”
브리먼 황자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답했다.
“그랬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나서.”
“변수라고?”
루퍼트의 얼굴을 한 마왕은 날카로운 눈으로 브리먼을 한 번 쳐다보다 창가로 다가갔다.
“예, 황태자가 전면으로 나서서 엄청난 기세로 우리 군을 집어삼키며 오고 있습니다. 원래 인간을 상대로는 웬만하면 공격 마법을 쓰지 않는 편인데…… 언데드로도 쓰지 못할 만큼 시신을 산산조각내며 오는 터라.”
“리케포로스 애송이가 신녀를 뺏기더니 급해진 모양이구나. 하지만 녀석의 전력을 애초에 계산에 넣지 않았다는 건 너의 실수다.”
“예, 송구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마왕이 휙 뒤를 돌아보았다. 무기질적인 푸른 눈동자가 브리먼을 훑어보았다.
“안 돼, 지금 신녀가 없어져서 찾는 중이야. 병사는 내어 줄 수 없다.”
“발리노스 님……! 그럼 전선의 상황이 더 악화되어……!”
“인간들끼리의 일에 내가 얼마나 양보해야 하는 거지? 네 무능력을 탓해라, 사마엘의 노예야.”
브리먼은 욕지거리가 나오려는 걸 꾹 참아냈다. 그리고 대신 다른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신녀, 에린 스필렛을 찾으면 꼭 죽이셔야 합니다. 절대로 살려 둬서는…… 윽.”
브리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어깨에서부터 엄청난 압력을 느꼈다. 서 있기조차 버거운 압박에 브리먼은 무릎을 꺾고 바닥에 엎드려야만 했다.
[건방지구나, 언제부터 사마엘의 노예 따위가 내 말에 반박을 할 수 있었던 거지?]
마왕의 진언과 함께 숨도 쉴 수 없을 만큼의 압력이 위에서부터 내려와 브리먼을 꼼짝도 못 하게 내리눌렀다.
“으, 으윽, 죄, 죄송합니다, 컥.”
브리먼은 겨우 쥐어 짜낸 목소리로 용서를 빌었고, 마왕이 시선을 돌림과 동시에 고통스러웠던 압력이 사라졌다.
“헉, 헉.”
“가 봐.”
“감사……합니다.”
서둘러 일어나는 브리먼의 뒤통수를 향해 마왕이 무심한 어조로 내뱉었다.
“참, 신녀를 내 앞으로 데려온다면 네 부탁을 고려해 보지.”
브리먼은 그 말에 끝내 대답하지 못한 채 방에서 나와야만 했다.
그는 방에서 한참을 걸어 나와서야 차마 못 한 얘기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 미친 마왕 새끼, 에녹을 상대하라고 불러냈더니 신녀 꽁무니만 쫓아다니네…… 가만있어 보자, 이러다 오히려 방해만 되는 거 아냐?”
투덜거리던 그는 뭔가 잠시 생각하며 머뭇거리다, 이내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마왕에게는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았지만, 브리먼은 신녀가 어디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말하지 않은 건 역시 마왕이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엉뚱한 방향으로 갈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염려는 적중했다.
명색이 마왕이니만큼 자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신녀를 살려 두려 하는 마왕은 자신에게 있어서 최악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하는 수 없지. 방해가 되면 마왕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치워 버리겠어.”
비릿한 웃음이 그의 입가에 맴돌았다.